최근 글 목록
-
- 태즈매니아_나들이_마지막
- hongsili
- 05/17
-
- 태즈매니아_나들이_05
- hongsili
- 05/17
-
- 태즈매니아_나들이_04
- hongsili
- 05/17
-
- 태즈매니아_나들이_03
- hongsili
- 05/17
-
- 태즈매니아_나들이_02
- hongsili
- 05/17
10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 |
|
야만적 불평등 - 미국의 공교육은 왜 실패했는가 조너선 코졸 문예출판사, 2010 |
이책이 쓰여진것은 1990년대 초반, 그래서 어쩌면 20년 전, 이미 지나간 시절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전 30년이 그러했듯, 이후 20년 동안 근본적 특성이 변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미국에 살던 2000년대 중반 즈음, 뉴욕타임즈에 실린 공교육 현장 기사들은 내눈을 의심케 만들었더랬다.
운동장이 없어서 복도에서 체육수업을 한다니, 재정이 파탄나서 스쿨버스 운영을 중단해버렸다니...
이런 류의 기사들이 참 믿기 어려웠었다.
썩어도 준치라고...그래도 세계 최고 부자 미국인데, 정말 이정도까지???
이와 달리, 주변의 한국 방문연구교수나 포스닥/대학원생들은 미국의 공립학교가 얼마나 훌륭한지 입을 모아 칭찬했다. 한국에서와 달리 아이들이 얼마나 행복해하는지 모른다고....
이 화해할 수 없는 두 가지 '사실'을 둘러싼 진실은 저 너머에 있는게 아니라, 이 책 안에 있다... ㅜ.ㅜ
예전에 한 세미나에서 누군가 미국사회의 공공의료체계가 부족함을 지적하며, 왜 학교는 공공이 존재하는데 보건의료는 그러지 못할이유가 있냐고 발표하니까, 플로어에서 미국에는 공교육도 역시 존재하지 않는다며 비유가 부적절하다고 지적했던게 생각난다... ㅡ.ㅡ
사실, 두 가지는 가장 기본적인 사회권으로서 같이 가는게 보통이니, 뭐 놀라운 일은 아니다.
미국 공교육, 그것도 공교육 일반이 아니라, 가난한, 특히 인종적으로 분리된 지역에서의 공교육 환경은 상상을 초월한다. 교과서가 모자라고, 냉난방이 안 되는 교실은 불쌍한 축에 끼기도 어려워보인다. 불이 났던, 천장이 없는 건물에서, 때로는 화장실과 탈의실 공간에 책상을 놓고 공부를 해야하고, 교사 급여를 줄 수가 없어서 수업을 단축하고, 학교 안에 물이 새서 강이 흐르는 광경은 도대체 지옥이 있다면 여기일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주식거래에서의 정보전달 능력이 세계최고라는 뉴욕 시에서 학교에 나오지 않는 가난한 아이의 행방을 '아무리 찾아도' 알 수 없다는 교장의 뻔뻔한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아연실색이다...
물론, 당연히, 모든 학교가 이런 건 아니다.
중산층, 백인들, 그리고 선택받은 소수의 아시아계 학생들이 다니는 공립학교는 우리가 영화, 드라마에서 흔히 보고, 또 주변의 미국유학자들에게서 이야기 듣는 모습 그대로이다.
그렇다면 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가...
공립학교의 재원이 기본적으로 지역 재산세에서 조달되고, 교육구 사이에 재원의 재분배가 이루어지지 않는데다, 지역 간 인종/계급 분리가 무지무지 극심하며 인종통합교육에 대한 (암묵적) 반대가 그 핵심 원인이라 할 수 있다.
가난한 지역은 유해산업이 밀집해있거나 경제가 낙후하고, 재산 가치가 낮기 때문에 재산세 납부가 적은데다 (심지어 세율은 가난한 지역이 더 높다!!!), 세금을 납부할 수 있는 기업들은 아예 독자적인 타운을 구성해서 스스로를 통치하며 세금을 회피한다. 주정부에서 내놓는 교육구 공립학교 통계연보는 부동산 시장에서 으뜸가는 근거자료다. 누군가에게는 좋은 주거지와 좋은 학교, 넉넉한 학교재정의 선순환구조가, 또다른 누군가에는 열악한 주거환경과 무너져가는 학교, 파탄난 학교 재정의 악순환 구조가 고착화되는 아주 좋은 근거자료이리라...
중산층 학부모 (그리고 그들 중 다수는 1960년대 후반 인종분리 철폐를 위해 남부로 가는 희망버스에 탑승했던 이들!!!) 들이 자원의 재분배나 통합교육에 반대하는 것이 어이 없지만, "어쩌면 이들이 '반대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은 일일지 모른다. 더 정확히 말하면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이들은 가난한 아이들이 피해를 보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들은 그저 자신의 아이들이 최선의 것을 얻기 바라는 것뿐이다. 이러나저러나 사우스브롱크스의 아이들에게는 마찬가지다."
중산층 지역 명문 공립학교 학생들의 경쟁은 '건강에 해로울 만큼' 지나치다며 "뉴욕의 아이들 (가난한 도심지역 학생들)이 겪는 고통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우리 아디을 대다수는 너무 큰 고통에 시달리고 있어요" 라는 중산층 학부모의 토로에 대해 코졸은 이야기한다. "불공정의 한계가 명확하지 않은 이런 진술들은 인간으로서 피할 수 없는 불행과, 불공정이 일으키는 불필요한 비참함 사이의 구분을 모호하게 한다. 이로써 부자들은 불편함과 파멸의 차이를 인정해야 하는 의무감에서 벗어난다".
이들은, 그리고 교육관료들은 교육비가 늘어난다고 환경이 나아지는 것은 아니라며, 돈이 문제의 전부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교육재정을 공평하게 분배하자는 이야기에는 펄쩍 뛴다. 돈이 중요한게 아니라면서 말이다. 심지어 부시 대통령조차 "돈이 교육 문제의 해결책이라고 생각하는 가난한 아이들의 학부모들에게 경고했다. '돈을 숭배하는 사회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물론, 돈이 다는 아니다. 돈이 중요한게 아니니까 너네 가진 것 좀 내놓으면 안 되겠니?.
이러한 와중에 '마그넷 시스템'이라는 선발제 공립학교는 대안적 체계로 환영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이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중산층, 젊은 전문직 종사자, 백인의 자녀들이다. "이 시스템이 겉으로는 학생의 능력 위주로 운영되는 것처럼 보이나, 이 경우 능력은 계층과 인종에 밀접하게 연관된 조건에 의해 미리 결정된다. 일부에서는 이 시스템을 '적자가 생존하는 법'이라며 옹호하지만, 사실 적자생존이라기보다 적자의 아이의 생존이라고 하는게 더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뉴저지 주의 빈곤지역 학부모들이 주 정부를 상대로 교육구간 재정 불평등을 문제삼아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왜 뉴저지의 가난한 도시에 사는 아이들이 부유한 교외 지역의 아이들과 똑같은 기초 교육을 받을 자격이 있는지를 설명하려고 7년이라는 세월과 607페이지에 걸친 문서가 소요되었다."
물론, 열악한 환경에서도 헌신하면서 기적을 일구어내는 교사들이 있다. 하지만, ".. 자칫하면 이러한 교사들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열악한 조건에서도 좋은 교육을 할 수 있다는 희망의 그림을 그리고 싶은 유혹에 빠지기 쉽다. 사실 이런 식의 주장이 점점 늘어나고, 이따금 이런 논조의 책들이 대단한 인기를 누리기도 한다. 위안을 주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격려성 연설과 장밋빛 자기계발서들은 열악한 상황에서 나름대로 제 역할을 하지만, "희망은 청바지처럼 쉽게 판촉할 수 있는 게 아니다. 인간 해방은 이런 식으로 대중 최면을 통해 달성될 수 없다"는 것이 슬프지만 진실이다.
책에서 인용된 존 쿤스는 "사실, 인위적으로 이권을 부여받은 자손이 한 세대의 최적자 (the fittest)를 순환적으로 대체하는 현재의 상황보다 자본주의 시스템을 더 크게 위협하는 것은 없다" 고 경고했다. 평등과 자유는 반드시 상충하는 개념이 아닌 것이다.
사실, 이 책에서 그 무엇보다 가슴시리게 다가온 것은 이 부분이다.
코졸은 한 중산층 명문공립학교의 학생토론을 참관한다. 이들은 앨리스워커를 비롯하여 미국의 인종철폐와 사회정의에 대한 훌륭한 저자들의 저작을 모두 탐독했고, 학교재정의 불평등과 인종통합에 대해 아주 논리적이고 차분하게 자신의 견해를 제출할 줄 안다. "일정 부분 이들의 능숙함과 총명함은 비현실감에서 나온 듯하다. 불공정 문제는 인간애나 양심의 문제라기보다 기하학적 문제처럼 취급된다." 그리고 조금만 더 도전적인 질문을 받으면 '본심'이 튀어나온다. "... 그러기 위해 더 많은 세금을 내는 것이 공정한 일이 아니겠냐고 그 학생에게 묻는다. "그래봐야 저한테 무슨 보탬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1968년에는 가장 부유한 교외 지역 학교에서조차 이런 말을 하기가 얼마나 어려웠을지 생각해본다. 급우들은 위장하지 않은 사리사욕을 더내는 이런 발언에 술렁였을 것이다. 1990년 라이에서 그 학생은 아무런 째 없이 이런 말을 할 수있다. 나는 이 흥미로은 학생이 그렇게 솔직할 수 있다는 데 감탄한다."
코졸이 20여년 전 미국에서 느껴던 이런 감정을 오늘날 한국의 많은 교수들이 대학에서 경험하고 있다.
사회적 연대의 부재, 적자생존의 무한경쟁, 그리고 '염치'의 상실은, 오늘날 한국사회를 나타내는 중요한 특징들이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들이 먼 남 이야기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수많은 친미관료들과 학자들에 의해 미국식 교육 프로그램들이 속속 도입되는 것 - 이를테면 입학사정관 제도나 AP 프로그램 - 은 불평등의 재생산이라는 측면에서 진실로 우려할 만하다.
예전에 한 방송국이 주관하는 고등학생 영어토론 대회 중계를 잠시 본 적이 있다.
아이들은 아주 유창하고, 논리정연하게 국제원조 문제를 토론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들은 식민지배의 역사와 사회정의를 이야기했지만, 그 때 내가 느꼈던 감정은 '공허함'이었다.
물론, 그 학생들에게 진심이 없었다고 말하려는 건 아니다.
다만, 코졸이 느꼈던 것처럼, 그것이 인간애와 양심의 문제로 다루어지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던 게다.
가끔씩 학생 리포트 혹은 토론수업에서 정제되지 않은 이기적 발언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튀어나올 때면, 나는 아무리 본심이 이렇더라도 제발 이렇게 대놓고 말하지만은 말았으면 하고 바랬었다.
연대는 차마 바라지도 않지만,
연민과 염치.... 내가 너무 큰 걸 바라는 것일까?
이들도 역시 '개념'들과 함께 안드로메다에 가 있는 것일까?
ㅜ.ㅜ
지난 주 한겨레 21에 실린 미류의 칼럼 "천사는 옵션, 권리는 기본" 은 쉬우면서도 깊이 있는 글이었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 글의 주제가 한겨레의 '천사' 운운하는 훈훈한 미담 기획을 비판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만,
한겨레는 이 대목을 가볍게 흘려듣지 않았으면 좋겠다.
부쩍 연성화되는 한겨레21 기사들에 대해 내부적으로 문제의식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다.
어떤 고정된 지면을 갖고 글을 쓸 기회를 갖는 것,
그건 소수만이 누릴 수 있는 특혜이자 또 부담이기도 하다.
세상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하고, 또 누군가 들어주기를 소망한다.
때로는 너무나 절박하게...
하지만 모든 사람이 그럴 기회를 가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그토록 소중한 공간, 말할 수 있는 기회를 허비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시사잡지가 딱딱하고 심각한 내용만을 다루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시사잡지의 존재의 이유를 져버리지는 않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따뜻하고 코믹하고, 재미난 생활글이 읽고 싶으면, 혹은 쓰고 싶으면 그에 맞은 매체를 이용하면 되지 않나...
나는 한국사회에서 한겨레 21이라는 상식적인 언론매체가 존속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없는 형편에 1년에 15만원을 넘게 들여 정기구독을 하고 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시사주간지에서 기자 부부들의 음주습관을 적나라하게 목격해야 하는지 모르겠다. 변호사의 지극히 개인적인 드라마 감상평 (지금은 연재가 끝났지만), 기자의 요리실습 과정들도 그다지 알고 싶은 것들이 아니다.
제발 이런 글들은 개인 블로그에다 쓰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오마이뉴스도 있잖은가...
절박한 사연을 가진 누군가의 말할 기회, 들어줄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언론의 직권남용이고 오만이다.
너무 황당하고 웃기기는 한데, 차마 웃을 수 없는.... 이런 걸 블랙코미디라고 해야 하나?
차라리 '진짜' 코미디였으면 맘편하게 배꼽잡았을텐데...
#1. 코앤 형제 <시리어스 맨> (2009)

주제는 어쩌면 "세상의 복판에서 온몸으로 시련을 맞다" ?
도대체 근원을 알 수 없게 꼬여만가는 삶 -
하지만 그동안의 '정상적인' '중산층 지식인'의 삶이라는 게,
실제로는 아주 얄팍하고 위태로운 질서 위에 굴러갔던 것...
아주 작은 균열만으로도 송두리채 흔들릴 수 있었다는게 나만큼이나 주인공도 믿어지지 않았을 것이여...
그 꼬여버린 상황에 명료한 대답이나 해결책을 줄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 오늘의 진리...
슬프지만 진실....
#2. 김재환 <트루맛 쇼> (2011)

이 영화 진짜 엄청나게 웃긴데... 차마 웃을 수는 없었다네... ㅜ.ㅜ
엄청나게 비장한 결기로 '고발'을 할 수도 있었을텐데,
시종일관 웃으며, 쿨하게, 깔끔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모자이크 없어서 너무 좋아...
연예인들부터 우리 김재철 사장님, 그리고 불만제로/소비자 고발에 등장했던 '맛집' 설렁탕 집 방문하여 친히 사진도 남겨주신 그 분까지.... (알고보면 그 분도 피해자 ㅋㅋ)
정말, 쉽지 않았을텐데, 그리고 앞으로도 어려움이 적지않을텐데,
집요하게 문제에 천착하며 이를 알려낸 PD 들 팟팅이요!!!
#3. 찰스 퍼거슨 <Inside Job> (2010)

아, 정말 보고 있노라면 울화, 쓴웃음, 어이상실 - 복합감정 3종셋트가 마구 분출...
정말 해결책이 있기나 한 건지 모르겠다.
최소한 비판적이고 독립적인 전문가 그룹이라도 있어야 할 것 같은데,
금융패밀리의 결속은 너무도 단단하고, 그에 비해 비판자의 목소리는 너무도 미미했다.
영화 보는 내내, 이게 그냥 영화 속 이야기라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기업자문 활동으로 엄청난 돈을 챙긴 후 대학으로 돌아온 경제학자의 인터뷰 배경으로,
"Beyond greed and fear" 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다...
사실, 화이트칼라 사기꾼들의 탐욕과 두려움이 일반인만큼만 되었어도 사건이 이지경까지 이르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4.
맥락은 다르지만, 즐거움을 준 영화 한 편

정말, 중요한 주인공들 다 날려버리고 (자비에 교수 산산조각, 진 사망, 미스틱과 로그 보통인간 회귀)
매그니토를 우스꽝스러운 미치광이 할배로 만들어버리면서 시리즈를 개차반으로 망가뜨렸던 3편의 후유증이 겨우 사라져가는 시점에서,
킥 애스의 감독 매튜 본이 시기적절하게 (!!!) 시리즈를 다시 부활시켜주었다네....
타자성과 정체성에 대한 초기의 문제의식... 근본도 없는 냉전적 갈등....
어린 엑스맨들의 풋풋한 우정과 치기...
무엇보다 [어바웃 어 보이] 에서 많은 이를 사로잡았던 꼬마 니콜라스 홀트의 의젓한 모습...
그리고, 맥어보이와 파스빈더.... 오호... 결코 패트릭 슈튜어트와 이언 맥컬런에 뒤지지 않아.......
이 정도 했는데, 다음 편 또 망쳐버리면 진짜 화낼껴...
크리스토퍼 놀란이 했듯.. 이제 본편을 보여주오, 매튜 본!!
읽은지 꽤나 오래되었는데, 되돌아볼 시간이 없어서 책상위에 한참이나 굴러다녔다.
원제는 [Crazy Like Us: Globalization of American Psyche]
여기에서 US 는 우리들일수도 있고 United States (of America)일수도 있다.
한국어 부제처럼 그들이 맥도날드 뿐 아니라 우울증도 팔았다는, 즉 미국적 심리의 세계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 |
|
미국처럼 미쳐가는 세계 - 그들은 맥도날드만이 아니라 우울증도 팔았다 에단 와터스 아카이브, 2011 |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이 생물학적이지만 사회적이고,
심지어 생물학적인 부분조차도 역시 '수용가능한 ' 혹은 '치료가 필요한' 심지어 '사회가 부담가능한' 이라는 잣대에 따라 정상과 비정상이 구분된다는 점에서 볼 때, 섭식장애, 우울증이나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의 전 지구적 유행 앞에서 사실은 심각한 의심을 했어야 했다.
한편으로는 생물학적 환원론을, 다른 한편으로 의료화 (medicalization) 을 경계한다고 자부하면서도 이런 문제들을 그동안 숙고하지 못했던 것은 여전히 서양의학/과학기술 트레이닝의 영향이 강하게 남아있어서인것같다.
저자가 서문에서 "이렇게 서로 다른 정신병 개념과 다양한 치료법이 사라지는 현상에 대해, 우리는 생물학적 다양성이 사라지는 현상을 대할때처럼 심각하게 걱정해야 한다" 는 말에 심하게 공감한다.
#.1.
홍콩의 거식증 인식과 사회적 유행의 진화과정에 대한 고찰은 self-fulfilling prophecy로 작동하는 정신적, 심리적 고통의 사회화 과정을 잘 드러낸다.
"... 그래서 문화적 틀이 없을 때는 소수의 환자들이 진기한 행동을 보였지만, 거식증이나 하지마비 같은 새로운 히스테리성 증상이 널리 채택되면 '그로 인해' 그 장상이나 장애가 공식적으로 '발견'되고 문화적인 피드백이 이루어진다".
"... 서양식 진단을 수입함으로써 환자들과 의사들이 그 질환에 대해 이야기하는 방식을 변화시켰을 뿐만 아니라, 질병에 대한 경험자체를 변화시켰다...."
".. 우리의 서양식 성인 개념은 개인의 정체성과 자급자족에 높은 가치를 두고, 그에 따라 서양 청소년의 질풍노도는 대부분 독립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실랑이에서 발생한다. 그러나 많은 전통문화에서, 특히 아시아에서 개인의 독립은 성년의 목표가 아니다..."..
어쩌면 지금과 같은 홍콩의 거식증은 발견되었다기보다 차라리 인위적으로 퍼뜨려졌다고 보는 것이 옳을 수도 있겠다... 한국은 어떨까?
#2.
스리랑카의 쓰나미 재해 이후, PTSD 라는 2차 쓰나미로부터 사람들을 구해내고자 달려간 미국의 수많은 심리전문가와 상담사들의 활동에 대한 묘사는 resilience 혹은 회복력이라는 현지인들의 고유한 속성에 대한 무지, 문화인류학적으로 깊이있는 상호소통의 필요성에도 불구하고 변변한 통역요원조차 갖추지 않은 채 막무가내로 지역에 '짐을 풀은' 공급자 마인드 혹은 계몽주의적 (어쩌면 폭력적인) 시각을 전형적으로 잘 드러낸다. "... 이렇게 볼 때 누구보다도 취약한 사람은 폭력과 빈곤을 직접 경험해본 적이 별로 없는 사회와 문화권에서 온 서양상담사들이었다"라는 표현은 이 상황이 갖는 아이러니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암암리에 현지의 견해들과 관습들이 열등하다는 파괴적인 메시지가 전달된다. 저자들의 현장 경험으로 볼 때 이 메시지는 식민주의를 통해 이식된 열등감을 강화시키고, 그들 자신의 긍정적인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는 현지 주민들의 믿음을 약화시킬 수 있다."
또다른 의료인류학자의 이야기도 경청할만하다. "세계적으로 재난의 대부분은 서양 바깥에서 일어난다. 그러나 우리는 재난지역으로 가서 그들의 반응을 병으로 취급한다. 우리는 '당신들은 이 상황에서 생존하는 법을 모른다'고 말한다. 우리는 그들에게서 그들의 문화적 서사들을 제거하고 우리의 것을 부과한다. 이는 사람을 비인간화하는 끔찍한 예다."
#3.
정신의학자/심리학자들, 그 중에서도 특히 정신질환자의 사회적 차별과 편견을 타파해고자 노력했던 이들은 정신질환이 다른 신체질환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문제가 아니라) 그저 특정한 유전적 기질, 화학적 불균형, 뇌질환이 문제라는 점을 강조해왔다. 인슐린이 작동 안하면 당뇨병이 생기는 것처럼, 뇌의 특정화학물질이 제대로 작동 못해서 이런 일이 생길 뿐이다. 그러니 색안경을 쓰고 이들을 쳐다보지 말아라....
하지만 이러한 생물학적 설명이 오히려 일반인들로 하여금 정신질환자에 대한 사회적 거리를 멀게 만들고 있다는 지적은 '그럼 어째야 하나'는 고민거리를 던져준다. 나도 그래왔기 때문이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하면서, 편견과 심리적 장벽 때문에 정신과 진료를 꺼려하는 이들에게 전문적인 의료서비스 받기를 독려했던 것이 과연 적절한 것이었는지 되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사랑에 빠지거나, 질투에 사로잡히거나, 아이와 놀면서 기쁨을 느끼거나, 종교적 희열을 경험할 때 우리는 친구들에게 그경험을 뇌 화학물질들의 행복한 또는 불행한 합류로 설명하지 않는다. 그러나 정신질환자에게 부과되는 사회적 낙인을 줄이려 할 때마다 뇌 화학작용 이야기는 계속 이용될 것이다. 환자 개인의 지각을 축소하고, 그 지각이 '그저 화학작용'이라는 관념을 강조하는 것보다 무엇이 더 치욕스러울 수 있을까?"
#4.
"일본의 높은 자살률은 우울증 치료가 부족함을 가리키는 증거라는 것, 서양의 SSRI들은 과학적으로 진보했다고 입증된 치료제라는 것, 1차진료의사들은 정신질환 진단을 도와주는 간단한 3분 검사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것, 우울증의 기준틀에 맞지 않는 환자라도 아픈 것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 일본인들은 업무 및 산업화와 관련된 사회적 스트레스를 SSRI로 치료해야 할 우울증의 조짐으로 재고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
이는 GSK가 일본에 SSRI를 출시하기에 앞서 진행한 전문가 워크샵에서 논의된 주제들이다.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표현하는 것이 제약회사의 메가마케팅을 통해 적극적으로 전파되었다는 것은 (짐작은 했지만) 정말 마음 편치 않은 일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제품이 효과적이라고 확신하는 것같았고, 어느 누구라도 그것들의 가치를 의심하면 당황했다. 다른 어떤 산업보다도 의약산업은 자신의 마케팅 활동과 윤리적인 목표를 잘 연결시킨다. 그 결과 질병을 '기회'로 여기는 이윤추구 계획과, 인류의 건강이 그 (화학물질들의) 균형에 달려있다는 윤리적 관점이 신랑과 신부처럼 결합한다. 이 때문에 대단히 공격적인 마케팅 담당자들이라도 자신이 공익을 위해 봉사한다고 믿게 된다."
#5.
물론, 그렇다고 이 책이 '에이즈라는 실체는 존재하지않는다. 서구 강대국의 음모일 뿐이다" 식의 주장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강조하는 것은 성찰과 회의, 사회적/역사적 맥락에 근거해서 타인의 고통을 바라보고 도움을 주자는 것이다. 섭식장애 전문가로서 고통받는 환자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는 한 교수는 그의 연구가 "그가 뿌리뽑기를 원하는 바로 그 질병을 잠재적으로 전파해왔다고 걱정한 적은 없냐"는 질문에 침울한 긍정의 답변을 보낸다.
어떤 정신질환, 혹은 '질환'이라 명명되지 않은 어떤 심리적 고통을 인식하고 도움방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서양의학 - 근대 서구사회라는 매우 구체적인 맥락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생물학이자 사회학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 틀에 맞추어 타인의 고통을 재단하려 한 것은 아닌지 돌아볼 일이다. 특히 편견을 줄이기 위해 정신질환은 온전히 생물학적인 것으로 만들고, 누구나 앓을 수 있는 가벼운 질환으로 '만연'시키는 것이 과연 긍정적이기만 한 것인지 심각하게 고민해볼 필요가 있겠다....
최근에 SERI에서 스트레스 산업의 시장규모가 수 조원에 이를 것이라는 비관인지 낙관인지 모를 보고서를 내놓았고, 언론들은 일제히 대서특필했다. GDP 올라가서 누구는 참 좋겠다...
날로 스트레스가 커지는게 우리사회라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해야 한다.
"... 만일 인구집단 내에 심적 고통을 일으키는 원인이 비현실적인 사회적 요구라면 왜 개인이 알약을 복용해야 하는가?..."
좀 있다 대구 출장가야 하는데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서 모닝포스트....
#1. < 사막별 여행자 >
법정 스님의 추천 도서 목록에서 발견한 책이다
![]() |
|
사막별 여행자 무사 앗사리드 문학의숲, 2007 |
이 책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서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는게,
한편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면서 다른 한편으로 쫌 맘 불편한 구석도 있다.
일단 모티브 자체는 아름답고 놀랍다.
사막의 원주민 투와그레 부족 소년이 우연히 서구 관광객과 마주치는데
그들은 무려 '어린왕자'를 흘리고 떠난다.
그것을 읽게 된 소년은 완전 깜놀.....!!!
소년은, 이제, 사막에 어린 왕자가 혼자 남겨졌던 것은 아니라고,
우리가 있었다고 이야기해주러 프랑스로 떠난다.
그 곳에서 소위 '물질문명'을 체험하면서,
투와그레 부족의 영혼충만한 삶에 비추어 도시인들에게 살아가는 방식,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해 두런두런 이야기를 전한다....
물론, 이 책에서 가장 놀라운 것은 이 소년의 경험담이 작가의 실제 인생사라는 점이다.
나이 (가 성숙의 기준은 아니지만)에 어울리지 않게 담담하고 깊이 있는 성찰이 담긴 잠언 같은 이 글들은, 수많은 차도남 차도녀들의 삶을 뒤흔들고 자신을 돌아볼 기회를 주엇을 것이다.
이를테면
"문명세계의 사람들은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면 시간을 잃어버린다고 여긴다. 그러나 우리 투아레그인들은 다르다. 우리에게 있어 시간은 잃거나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살아가는' 것이다."
"문명국가들에서는 자기 존재의 유일함이 지니는 가치 안에서 비상하는 열망이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지 못한 것을 '이상'이라 부른다"
"도망치는 삶은 여행하지 못한다"
"여행이란 많은 타인들을 통과하면서 자신에게서 자신으로 떠나는 거야"
하지만, 내가 불편했던 건 이런 거다.
mother nature 를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목가적 유토피아를 되뇌이는 모습? 도시는 이러저러한데 비해, 사막과 자연은 이러저러하게 다르고, 또 문명인의 삶은 이렇게 각박한데, 원주민/투와그레족의 삶은 이렇게 풍성해.... 도시인들은 왜 이렇게 살지 못할까, 왜 이렇게 삶을 바라보지 못할까....
이건 뭐, "나는 이런데 너는 왜 그렇게 하지 못하니? 생각을 좀 바꿔봐.... "하는 계몽의 또다른 버전처럼 느껴진다고나 할까...
더구나 저자가 체험하지 못했던, 계급적대, 민족/국가 혹은 봉건주의/가부장주의의 폭력성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현대인들의 '뿌리없는' 삶을 비판하는 대목은 안타깝기마저 하다. 가족, 출신배경, 민족/국가를 떠나 독립된 한 주체로서 '개인'을 인정받는 것이 많은 사회들에서, 특히 여성들과 낮은 신분을 가진 자들에게서 어떤 의미였는지 저자는 알고 있는 것일까?
"...나로서는 내 앞에 있는 사람의 가족이 어떻게 지내는지 모르는 한은 누구에게 말을 걸고 있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람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가족이기 때문이다. 우리를 만드는 것은 가족이다. 가족은 우리의 반석이다..."
"... 우리의 힘은 우리가 태어난 곳과 민족의 역사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조상을 존경하고 찬미하기에 우리 자신을 믿는다. 과거의 자신과 현재에 자기가 하고 있는 일로 자신을 정의하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 보았다. 하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뿌리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고독한 삶임에 틀림없는 듯했다..."
"... 사람들이 더이상 책임감을 느끼지 못하는 사회란 끔찍하다! 우리 고장에서는 수천의 사람들이 프랑스의 최저임금보다도 적은 돈을 벌기 위해 쉬지 않고 일한다..."
이 책이 각박한 도시인들의 삶에 한줄기 바람같은 위안과 휴식을 주었다면, 뭐 그것만으로도 충분하기는 할 것 같다.
하지만, 역사적/사회적 맥락 없는 '아름다운' 잠언으로는 2% 부족....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이 나에게 준 가장 큰 미덕은... wandering spirit 을 다시 충동질했다는 것이다... ㅡ.ㅡ
#2. <꾸뻬 씨의 행복 여행>
![]() |
|
꾸뻬 씨의 행복 여행 프랑수아 를로르 오래된미래, 2004 |
예전에 읽었던 에릭 와이너 <행복의 지도>와 비슷한 구석이 있으면서 좀더 가벼운, 그리고 심지어 '소설'이다.
프랑스의 정신과 의사인 저자가, 자신을 모사한 주인공을 내세워 행복의 조건들을 찾아나선 여행담...
귀엽고 (?) 가벼운 문장들이지만 곰곰이 생각하면서 읽을 거리를 던져준다. (구태의연한 클리세들이 없다고는 말 못함... ㅡ.ㅡ)
주인공이 소소한, 때로는 엄청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매 순간 기록한 행복의 조건 스무나믄 가지들은 충분히 공감이 가는데, 인간의 행복세계를 탐구하는 연구자이자 생활인으로서 가장 와닿는 것은 이런 거다...
행복한가 라고 다른 사람한테 질문할 때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 질문은 때로 사람들의 마음을 심하게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지적 말이다.... 이런 시덥잖은 (?) 질문에 미묘하게 흔들리는 눈빛들을 많이 보았더랬다.....
그리고 "행복은 미래의 목표가 아니라 현재의 선택"이라는 것...
물론 이것이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마음에 달려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유예하지 않는 삶의 중요성, 수많은 순간에서 trade-off가 존재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이 역시, 읽고 나니 길떠남을 부추겼다.
슬슬... 준비를 해볼 시간이 된 것일까? 흠흠흠....
![]() |
|
행복의 지도 - 어느 불평꾼의 기발한 세계일주 에릭 와이너 웅진지식하우스(웅진닷컴), 2008 |
#1.
허영만 화백의 <식객>에서 자운선생이 오랜만에 마주친 성찬을 야단치는 장면이 나온다.
"차가 막혀서 늦었다고 말하지 마라!
바빠서 연락 못했다고 말하지 마라!
요즘엔 차 안 막히는 날이 없고 바쁘지 않은 날이 없는데 그건 핑게가 아니야 "
맞아....ㅡ.ㅡ
#2.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세프>
![]() |
|
시간을 정복한 남자 류비셰프 다닐 알렉산드로비치 그라닌 황소자리, 2004 |
류비셰프처럼 사는게 정말 좋은 건지는 모르겠당...
시간을 굳이 '정복'하는 것이 행복의 요건인거 같지는 않은데,
또다른 한편으로 게으를 수 있는 권리를 이야기하는 것이 허랑방탕하게 지내는 스스로를 위한 변명으로 쓰이는 거 같아, 가끔씩 '시간'의 존재방식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나쁘지 않은 것 같다.
" 생각할 시간을 갖지 못하는 학자, 그것도 짧은 시간 동안 그러한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생각을 하지 않는 학자는 학자로서 아무런 가망도 없습니다. "
헉.......................ㅡ.ㅡ
요즘 부쩍 드는 의문인데....
#1.
한국에서 각종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의 인기를 과연 무얼로 설명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얼마 전에 무슨 자문회의 갔는데, 참석자 열 명 중에 안 보는 사람이 나밖에 없었음... ㅡ.ㅡ
각종 문화비평이나 칼럼들은 공정한 사회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 비주얼 중심의 아이돌 가수문화에 대한 식상... 대강 뭐 이런 걸로 설명하고는 했다. 글쎄...
내가 그런 프로를 안 보는 이유는...
등수를 내고, 탈락자를 정하는게 싫어서다.
학생시절 내내 등수를 매겼고,
심지어 일터에서도 끊임없이 평가를 받는게 한국 사람들의 일상인데
이제 지겹지도 않나???
자신이 대상자가 아니라, 점수를 매기는 사람의 위치에 있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이것은 범국민적인 복수전?
#2.
아까 뉴스데스크 보는데, 기업들의 해병대 체험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단다.
군대에서 훈련한 리더쉽이 기업 경영에도 도움이 된대... (웃어야 하나???)
이건 정말 분열증이라고 이야기할수밖에 없다.
작년 아이폰 '사태'를 겪으면서, 이제는 창의적 인재의 시대라며
방송이며 신문이며 밤낮없이 떠들어대더니만 뜬금없이 군대 문화???
또한 올해 초부터 끊이지 않는 대학에서의 폭력 사태 구설수는
뿌리깊은 군사문화로밖에 설명할 도리가 없는데...
기자들 정신세계는 한 번 탐구해볼만...
#3.
어디까지가 공모이고 어디까지가 희생인지....
내가 보기엔 분명히 공모자인데, 스스로를 희생자로 그리는 이들을 보면 어이 상실...
사실, 원칙을 미리 정해두고 그 조건에 부합하는 경우에만 희생자로 정의하면 좋겠지만
현실에서는 참 판단이 어렵다.
하지만,
충분히 저항할 수 있는 물적/사회적 토대가 있음에도
저항하지 않음으로써 부당한 질서를 공고화하는데 기여했다면
(본인은 희생자라 생각할 수도 있지만)
적극적 공모만큼은 아니더라도, 죄가 없다고 말하지는 못할 듯 싶다.
최근에 본 영화 두 편, 외양은 엄청나게 다르지만,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존의 전형성을 전복하는데다,
바탕에 '소통과 교감'의 중요성을 강조한게 아닐까 싶다. 물론 전적으로 내 생각...
#1. <황당한 외계인 폴> 2011년 (그렉 모폴라 감독)

근자에 본 영화들 중에 가장 발랄하고 웃겼던 작품
세 주인공 (사이먼 페그, 닉 프로스트, 그리고 폴 역의 세스 로건)이 직접 시나리오를 썼단다.
외계인 폴은, 한편으로 우리 통념이랑 너무 똑같아서 ('기존' 외계인과 똑같은 외모, 그리고 여타의 영화에서처럼 영어를 쓴다는 ㅋㅋ) 미지와의 조우를 기다리던 자에게 한없는 실망과 허탈함을 안겨주고,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 통념이랑 너무 달라서 (너무 터프하고 외설적이야 ㅋㅋ) 사람들을 식겁하게 만든다.
그동안 인구에 회자되던 모든 외계인 괴담들을 총망라했고 (이를테면 항문에 probe를 집어넣는다, 앨비스 프레슬리 살아있다 등등) 또 SF 를 둘러싼 독특한 팬덤을 아주 재간있게 비틀어놓은지라 (코믹콘에서 수여되는 상이 Hugo와 쌍벽을 이루는 Nebular award 가 아니라 Nebulon award, X-file 의 멀더캐릭터나 스필버그 ET 컨셉은 모두 폴이 조언해준 것이었어!!!) SF 를 좋아하는 자라면 정말 즐거워하며 볼 수 있는 영화...
심지어 마지막에 등장하는 우리 시고니 위버 왕언니... ㅋㅋㅋ
정부는 요원을 통해 폴을 추적하고,
우연하게 이들과 동행이 된 애꾸눈 처녀 때문에
복음주의 광신도 아버지가 이들을 추적하고,
정규직 요원자리를 차지하고픈 꼬붕 요원들이 다시 또 이들을 추적하고...
엄청 정신없는 추적극과 대소동 속에서
은근히 드러나는 것은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방을 긍정하는 따뜻한 마음..... 이라고 하면 내가 오바쟁이?
#2. <파수꾼> 2011년 (윤성현 감독)

영화 보는 내내, 전형성에 길들여진 나의 무의식적 통념과 배반이 이어졌다.
이건 나만이 아니라 같이 본 도끼도 호소한 증상이다.
첨에는 누가 죽은 줄 몰랐다,
다음에는 괴롭힘을 당하던 희준이가 죽은 줄 알았다,
그리고는 기태 아버지가 아이들을 쫓아다니면서 무언가 어두운 음모가 밝혀질 줄 알았다.
아이들의 어정쩡한 말투에서 분명 무언가를 숨긴다고 생각했다.
기태가 다른 친구들로부터 '복수' 의 징벌을 당한거라고 믿었었다.
동윤이와 기태와 결정적으로 갈라서는 순간에도
동윤이의 여친 세정이에게 기태 일당이 무슨 대단한 해꼬지라도 한 줄 알았다.
심지어 집단성폭행이라도 한게 아닌가 의심했다.
동윤과 기태가 밤을 지새우며 수다를 떨 때도,
'나도 한 잔 줘' 하는 대사에 당연히 술을 줄 것으로 알았다.
물병을 보고도 믿지 못해, 저것들이 물병에 술을 따랐나 했다.
애들이 쌈박질 하는 장면에서도 체인이나 주머니칼 정도는 나올 줄 알았다.
근데 그냥 치고받고 싸우기만 했다.
나보다 한술 더뜬 도끼는 이 남자아이들이 서로 사귀는 줄 알았단다... ㅡ.ㅡ
그래서 갈등을 견디지 못하고 한 아이가 세상을 뜨는...............
하지만, 그 어느 것도 들어맞지 않았다...
아이들의 파국은 그저 사소한 오해와 미숙한 대화, 상처받은 여린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우리는 영화적인 '드라마'와 '스펙타클'에 너무 익숙해져 있어서 그런 것들은 차마 영화적 갈등의 요소가 될 거라고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갈 무렵 떠오른 한 마디는 "애들은 애들이다" ....
내가 너무 때묻은 존재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라니... ㅡ.ㅡ
겉모습은 마초에 야생마 같았지만
아이들의 속마음은 너무 여렸고, 스스로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지 알지 못했다.
누가 가해자고, 누가 피해자인지도 모호할 뿐더러
살아남은 아이들이 기태 아버지를 만나 영문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것은
'저런 영악한 놈들!'이 아니라 정말 그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영화 속에 선생이나 부모는 그저 주변적인 존재로 등장한다.
이게 현실에서도 사실이리라.
파수꾼 한명 없는 비정한 안개 속 세계에 던져진 아이들.....
서로라도 따뜻하게 보듬을 수 있으면 좋았으련만..............
영화는 신인감독의 작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만큼 짜임새가 빼어났고,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다 (기태 역을 맡은 배우는 박해일 동생인 줄 알았음)
감독과 배우들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
지난 달에 산수유 매화 보러 남도에 다녀왔었다. (그걸 이제 올려...ㅡ.ㅡ )
꼭 포스팅을 해야 한다고 누가 쪼아대는 건 아니지만,
일더미에 묻혀 있다가도 문득 돌아보는 나들이 포스팅들이
상큼한 자극이나 한숨 돌리게 하는 위안이 된다는 점에서 '저축' 삼아 올린다.
#1. 구례 산수유 마을....
아침 7시 반에 양재역에서 버스에 올라 잠시 휴게소에서 화장실 다녀온 것 말고는 정말 눈 잠깐 붙였을 뿐인데, 벌써 구례에 도착해 있었다.
당시, 꽃샘 추위 때문에 산수유가 완전히 만개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평일, 조용한 마을,
따뜻한 기운과 함께 나른하게 피어오르는 산수유 무리는
'봄'을 실감케 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
내가 기억하는 산수유는 학생 때 국어교과서에 나온
"... 아버지가 눈을 헤치고 따오신 붉은 산수유 열매..."
근데 정작 같이 간 주먹도끼는 이걸 기억하지 못했다. 나만 이상한 사람 됨... ㅡ.ㅡ
기이하게 촌스러운 산수유 열매 동상 (?) 도 나름 귀엽고
사진은 못 찍었지만 멀리서 바라본 산수유 대형 동상도 유쾌 ㅋㅋ
돌담길의 예쁜 그림도 정감 넘친다





#2. 광양 매화마을
매화마을로 이동하는 동안 도끼와 나는 창밖 도로변 하얀 꽃의 정체를 두고 갑론을박했다.
먼저 주먹도끼는 그것이 매화라고 주장했지만,
내가 그럴리 없다. 내가 아는 매화는 좀더 분홍색이라고 반박했다. 그자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나는 그것이 '배꽃'이라고 추정했다.
근거는 '이화에 월백하고 은한이 삼경인제... 일지춘심을 자규야 알랴마는..." 시조에 따라 배꽃은 봄에 피고, 또 하얀 색이며, 과수원처럼 생긴 곳에 중점적으로 피어있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둘다, 자신은 없었다.
버스에서 열심히 아이폰을 검색해봤지만 결론을 내리기에는 양쪽 다 근거가 부족했다.
남한에서 제일 아름답다는 섬진강변을 열띤 토론(?)과 함께 지나며 매화마을에 도착해서 알게 된 것은...
매화가 눈처럼 하얀 것부터 빨간 색까지 아주 다양하더라는.. ㅡ.ㅡ
내가 예전에 낙안읍성에서 본 분홍 매화는 그 중 하나...
매화는 한심했을 것이다.
자기가 누군지도 모르는 인간들이 꽃구경이랍시고 천리길을 달려왔다니.. ㅜ.ㅜ
매화는 아름답고,
매실을 담가둔 항아리들의 풍경은 평화로웠으며,
작은 대숲은 청명했다.






이렇게 봄 향기를 실컷 맡고,
심지어 현지에서 지인들에게 엄청 자랑질 문자를 날려댔으나,
약효는 믿을 수 없을만큼 짧았다.
정말 일주일도 안 가..... ㅜ.ㅜ
약발이 짧은 만큼,
자주 다녀야 한다는 것이 결론이다.
보아하니 지구 멸망도 얼마 안 남은 것 같은데,
올해 목표 중 하나인 한 달에 한번씩 나들이 간다는 꼭 지켜보자!!!
시사매거진 2580 보는데 참으로 가슴이 서늘해졌다.
포항지역에서 성매매에 종사하던 여성들 몇 명이 연달아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물론, 그건 착취와 관련된 것이었고, 직접적으로는 부채, 특히 사채와 관련이 있었다.
그들 중 일부는 서로 보증을 서왔기에 누군가의 죽음은 다음 사람의 부담으로 이어졌던 게다.
사건이 이쯤 되고 보니 지역에 대대적인 단속이 이어졌고, 그래서 인근의 유흥업소들 매출이 뚝 떨어졌단다.
업주들은 시위에 나섰다.
아주 놀랄만한 소식은 아니다.
내가 뉴스 화면에서 놀란 것은 두 가지였다.
우선 경찰은, 언론이 왜 이 여성들의 죽음에 유독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고 투덜댔다.
모텔 주인이라는 한 중년 여성은 죽은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이게 뭐냐며 고함을 질러댔다. 우리는 세금내며 장사하는 사람들인데 이럴 수가 있냐는 거다...
연민없는 이 세상을 마주볼 용기가 사라져간다.
댓글 목록
관리 메뉴
본문
링크 주소가 http://is.gd/0eTHJe 이어야 하는데 잘못된 게 붙어 있어서 링크가 깨져요. 가급적이면 원래 글의 주소를 링크해 주세요. 주소 단축 서비스가 사라지면 원글로 바로 갈 수가 없으니깐요~원주소: http://h21.hani.co.kr/arti/COLUMN/15/29849.html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고쳤어염... 알려줘서 고마워유~~~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저도 5년째 한겨레21을 보고 있는데, 미류 선생님의 그 글은 쉬우면서도 중요한 지점들을 잘 짚어내고 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한겨레21도 그렇고, 한겨레신문도 그렇지만, 신뢰도에서는 높은 순위를 차지하지만, 구독률이 떨어지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이 많은 것 같습니다. 요즘 몇 년동안 광고도 많이 떨어졌다고 하고요. 종이신문의 구독률이 떨어지는 것은 시대의 흐름이라 하더라도, 같은 신문들에 비해 구독률이 떨어지는 건 문제라고 봅니다. 그 중에 하나가 컨텐츠의 양인 것 같고요. 한겨레신문도 ESC, 경제면들을 늘려가는 것도 그에 대한 나름의 처방인 것 같습니다.
물론 한겨레21쯤 되는 잡지는 굳이 이런 전략으로 독자층을 늘릴 필요는 없겠지요. 인용이나 파급효과로 본다면 오마이뉴스가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한겨레21은 사회불평등에 대한 탐사보도를 해주면 좋을 것 같아요. 노동 OTL 같은 기사는 그 곳이 아니면 안 나올 것 같습니다.
부가 정보
관리 메뉴
본문
방가요... 잘 지내시죠? 저도 그런 기획기사들 때문에 한겨레21을 놓지 않고 있기는 해요. 기자들 혹은 한겨레 지인들의 시시콜콜한 신별잡기 늘어놓는다고 과연 구독률이 높아질지는 의문이예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는 생각하지만, 여전히 '쓸 수 있는 권리'를 가진 자들의 오남용이 지나치다는 생각은 버릴 수가 없네요.. ㅡ.ㅡ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