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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학회 다녀오면서 도덕경을 읽었다.
오강남 풀이의 현암사 버전이다.

부피가 크지 않으면서 너무 후딱 읽어버리지 않을 책으로 딱 한 권을 엄선하여 들고나간 책이다.
번잡하고 시끄러운 공항에서,
청명하기 이를데 없는 시애틀 해변에서,
삐딱하게 앉아 이 도덕경을 읽었다. 부조리극의 한장면..... ㅡ.ㅡ
책에는 워낙 여러가지 판본이 있고, 번역서 또한 적지 않다고 들었다. 그리고 각 버전마다 조금씩 다른 방식으로 풀이가 되어 있다고...
무엇이 가장 원전에 가깝고 노자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진실을 잘 드러냈는지 나야 알 길이 없다만, 책을 읽으면서 몇 가지 흥미로운 지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 금강경이나 법구경을 읽었을 때도 생각했던 것인데, 처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 담긴 내용과 구절들은 결코 낯설지 않았다. 예전에 그리스-로마 신화나 성경이 서구인의 정신세계와 문화 속에 깊이 뿌리박혀 있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던 적이 있다. 어려서부터 많이 들어서 관련 상식이 풍부하다는 소리인가? 하지만 불경이나 도덕경을 읽으면서 새삼 깨달은 것은, 그동안 내가 읽고, 생각하고, 살아왔던 수많은 장면과 방식들 속에 이미 이러한 내용들이 상당 부분, 다양한 수준과 형태로 체화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그것은 내가 특별히 공부를 하거나 지식을 쌓아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문화 속 깊이 뿌리를 두고 전승되어왔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러면서도 한편 당혹스러웠던 사실은 추상적인 개념어가 포함된 구절들을 이해하는데, 주석으로 붙어있는 한자보다 영어 단어가 더욱 도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건 영어 단어의 미묘한 뉘앙스를 잘 이해하고 있다거나 한자실력이 형편없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한자 실력이 형편없는 건 사실이다 ㅡ.ㅡ). 이성적인 사고, 혹은 추론과 추상화의 과정에 한자어보다는 영어가 더욱 익숙하고 편하다는 것인데, 문제는 영어를 그만큼 자유롭게 구사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여전히 한자보다 영어가 편하다는 점이다. 이는 (상당한 수준으로 한자가 포함되어 있는) 모국어로 사고하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애국심이 부족해서 큰일이라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스스로의 사고를 모국어로 제대로 개념화하지 못하고, 또 이를 다른 이들에게 정확하고 적절하게 전달할 수 있는 능력마저 제한된 것이라 생각하니, 안타깝고 조금 한심스럽다는.... ㅡ.ㅡ 또 한편으로는 모국어로 사고를 성숙시키고 추상능력을 발전시키는데 학교교육이 어찌나 부실했었나 하는 원망...
도덕경을 다 읽었다고 해서 '도'가 무엇이지 깨달은 것은 아니다. 시도 때도 없이 접근하여 '도를 아십니까' 묻는 이들이라고 해서 그 도를 깨달았다고는 물론 생각지 않지만, '도라고 할 수 있는 도는 도가 아니다'라는 표현이 역설적으로 도의 정체를 가장 잘 드러내는게 아닌가 싶다.
무위의 정신, 집착을 놓아버리고 자연의 뜻을 따르기를 강조하는 것들이 언뜻 불경에서 이야기하는 열반 혹은 깨달음과 비슷한 것으로 생각될 수도 있지만, 그 폭과 깊이에서 열반의 개념에는 미치지 못하는 듯....
어찌 본다면, 속세의 강을 건너 열반의 섬에 이르는 나침반이라기보다 이 곳 현세에서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바람직한지를 제시하는 현장 지침서?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이 '도'라는 것이 유가에서 이야기하는 인/의/예보다는 한 수 위의 경지라는 것이다.
"...
도가 없어지면 덕이 나타나고, 덕이 없어지면 인이 나타나고
인이 없어지면 의가 나타나고, 의가 없어지면 예가 나타납니다.
예는 충성과 신의의 얄팍한 껍질, 혼란의 시작입니다.
..."
도덕경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경서이기도 하지만 특히 당대의 위정자와 지배계층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올바른 길을 전하는 책이기도 했다. 여러가지 기억해둘만한 구절들이 있지만,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가장 와닿는 것은 이것이다.
"...
백성이 죽음을 가볍게 여기는 것
윗사람이 지나치게 삶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
이때 윗사람이 집착하는 삶은 꼭 개인의 복락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 있다.
나라를 위해서... 민족을 위해서....우리 집단을 위해서.....그 형태는 다양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헛된 집착 -- 내가 속하거나 다스리는 영역을 벗어나는 순간 타자에게 적대적으로 변해버리는 배타적인 집착, 혹은 타인의 삶을 압도해버리는 집착이 가져오는 결과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면, 짧지만 참으로 핵심을 찌르는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오늘 우리에게 절실하게 필요한 것은, 많이도 아니라, 단 한뼘만큼의 진정한 '도'!
건강정책포럼 이번 달 칼럼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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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어원에 따르면 ‘용역’이란 ‘물질적 재화의 형태를 취하지 아니하고 생산과 소비에 필요한 노무를 제공하는 일’로 정의됩니다. 한편 법제처의 법률 정보에 의하면 ‘학술 용역’이란 ‘학문 분야의 기초 과학과 응용과학에 관한 연구 용역 및 이에 준하는 용역’을 지칭하고 이 중 ‘위탁형 용역’은 ‘용역 계약을 체결한 계약 상대자가 자기 책임하에 연구를 수행하여 연구 결과물을 용역 결과 보고서 형태로 발주 기관에 제출하는 방식’을 말합니다.
새삼스레 용어의 정의를 찾아본 것은, 연기를 거듭하던 노동 패널 학술 대회가 결국 취소되었다는 뉴스를 접한 후입니다. 학술 활동과는 무관한 비민주적 정치 세력의 전횡이 이러한 결과를 낳았다고 생각합니다. 학술 대회가 취소되고 노동 패널 조사가 기약 없이 미뤄지는 것쯤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 연구 기관이 휘둘린다는 사실이 그저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하지만 첨예한 정치적 이슈들을 다루는 노동연구원에만 이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이만큼 극적인 형태는 아니지만 보건학 연구 분야에도 우리가 경계해야 할 ‘학문적 자율성 침해’의 문제들은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용역’이라는 단어가 존재합니다.
보건학의 경우, 특정 기술이나 제품과 관련된 임상 연구보다는 인구 집단 혹은 정책과 관련된 연구들이 많고, 그러다보니 사기업의 후원보다는 공공 재원에 의한 연구 수행이 상대적으로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연구재단이나 건강증진기금에서 지원하는 자유 과제들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대부분 중앙 정부의 부처나 지방 자치 단체가 발주자 역할을 하는 학술 연구 용역 과제의 형태를 갖게 됩니다. 상식적으로 이렇게 공적 재원에 의해 수행되는 연구 과제는 사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롭고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하며 학문적 자유는 최대한 보장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제가 경험한 몇 가지 에피소드는 이러한 ‘상식’과는 다른 것이었습니다.
2년 전, 공공 연구 기금의 지원을 받았던 한 과제는 중간 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던 학회 당일 주무 부처의 ‘권고’에 의해 발표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종료되지 않은 연구 과제에 대해 외부에 공표하지 않겠다는 계약 조건, 또 연구 결과를 발표할 때에는 ‘갑’의 사전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조건을 위배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최근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지방 자치 단체의 의뢰를 받은 연구 과제였는데, 공개적인 중간 결과 보고회 전날, 분석 결과가 ‘갑’의 입장을 난처하게 만들 수도 있으니 인쇄물을 배포하지 말고 또 민감한(?) 사안들은 발표 내용에서 제외해달라는 ‘부탁’을 받았습니다.
다른 연구과제는 기이한 서약서 작성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보안 유지나 성실 의무의 수행을 약속하는 서약서를 작성해 본 적이 여러 번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런 것들과 ‘급’이 달랐습니다. 과제와 관련된 내용을 누설하는 것은 국가 안보를 해치는 것으로, 누설 시 그에 상응하는 민형사상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평범한 연구자의 상상력으로는 그 과제가 어떻게 국가 안보라는 엄청난 주제와 연계되는지 도저히 짐작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사채업자들한테 쓴다는 신체 포기 각서가 이런 거냐는 우스갯소리들을 했지만 마음은 편치 않았습니다.
사실 이런 경우들은 연구 윤리나 과학 기술의 사회학 문헌들에서 강조했던 부분이 아닙니다.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청부 과학(원제 Doubt is their product)’이나 ‘더러운 손의 의사들(원제 On the Take―How Medicine's Complicity with Big Business Can Endanger Your Health)’, ‘노동자 건강의 정치 경제학(원제 Point of Production)’ 같은 책들은 일관되게 기업과 학술 연구의 유착 관계 혹은 자본에 의한 학문적 자유의 침해 문제를 지적합니다. 이를테면 공중 보건에 심각한 위해가 될 수 있는 연구 결과들이 ‘갑’에 의해 은폐되거나 ‘을’인 연구자가 ‘갑’의 허락 없이 연구 결과를 학술 대회에서 발표했기 때문에 비밀 유지의 의무를 소홀히 한 책임을 물어 기업으로부터 소송을 당한 사례들이 언급되어 있습니다. 이 책들은 하나같이 ‘공공’ 연구의 필요성과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한편 대부분의 국제 학술지들이 논문 투고 시 ‘이해 갈등(conflict of interest)’ 상황을 밝히도록 하지만 여기에서 지칭하는 것은 기업의 연구비 지원이나 자문 위원 활동, 주식 보유 여부 등입니다. 정부의 연구비 지원, 즉 공공 재원에 의해 수행한 연구 결과를 두고 이해 갈등이나 유착이라고 표현한 경우는 본 적이 없고 연구 결과에 대한 정부의 압력이나 은폐를 경계하는 글을 읽은 적도 없습니다. 최소한의 형식적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사회에서라면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경험한 사안들도, 실무적인 측면에 국한해본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만일 제가 민간 서베이 업체에 조사 용역을 의뢰했는데 그 업체가 조사 결과를 중간에 임의로 발표하거나 심지어 그 자료로 자신들의 논문을 쓴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이제 문제는 간단해집니다. 대학으로 표상되는 연구기관의 정체성이, 혹은 연구 활동이 서비스 제공에 대한 금전적 보상만을 취하고 그 결과물에 대해서는 어떠한 권리도 행사할 수 없는 용역 수주 ‘업체’의 그것과 동일한지 여부만 결정하면 됩니다 (물론 연구자가 연구 자체와 관련한 신의성실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점은 굳이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만일 용역의 개념정의에 따라 그 성과가 오로지 ‘갑’에게만 귀속되는 것이라면 학회발표를 취소시키는 것, 혹은 발표 내용을 수정토록 하는 것이 하등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대학이 ‘업체’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돈을 받는 대가로 정부가 해야 할 지적 노동을 대신 해주는 것이 대학의 역할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더구나 ‘갑’이 지원하는 연구비 혹은 연구기금은 시민들이 낸 세금이지 정부의 은전(恩典)이나 담당자의 쌈짓돈이 아닙니다. 연구의 진행이나 성과물의 확산은 시민들의 건강개선과 학문발전, 혹은 시민들의 알 권리 충족이라는 원칙에만 근거해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담당자의 안위나 정치적 선호, 혹은 조직적 이해에 근거하여 연구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바람직한 학술연구용역의 형태가 어떤 것인지 제가 답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불공정 근로계약서나 소비자 약관에 대한 개정처럼 정부의 학술연구용역 발주와 관련한 연구윤리 - ‘갑’과 ‘을’ 모두에게 해당하는- 에 대해 공개적인 논의와 새로운 지침 마련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을’의 노력이 절실합니다. ‘을’은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문제에 대해, 부끄럽게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술자리에서만 ‘어떻게 이런 일이!’ 언성을 높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학문적 자율성을 지키는 것은 사소한 문제제기와 일상의 수고로움으로부터 시작되며, 귀찮아서 포기한 작은 권리들이 연구자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끝)
커트 보네거트의 [제 5도살장 - 혹은 아이들의 십자군 전쟁, 죽음과 추는 의무적인 춤] (박웅희 옮김, 아이필드 2005년)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등장한다.
" 나는 내 아들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대량 학살에 가담해서는 안되고
적이 대량 학살당했다는 소식에 만족감이나 쾌감을 느껴서도 안 된다고 늘 가르친다. "
" 또한 대량 학살 무기를 만드는 회사의 일은 하지 말라고,
그리고 그런 무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경멸감을 표하라고 늘 가르친다. "
드레스덴 대폭격, 소위 Dresden theater의 경험은 돌아가신 두 할배 - 하워드 진과 커트 보네거트의 삶에 폭격만큼이나 커다란 흔적을 남겼다.
에릭 홉스봄의 지적했듯, 반전운동에 누구보다 열심인 사람들이 참전군인들이라는 사실은 일견 당연해보인다.
현장의 참혹함과 스러져간 목숨들의 허무함을 직접 체험한 이들만큼 생생하게 전쟁의 부당성을 증언할 이들이 또 있을까....
이런 면에서 한국의 상황은 차~암 독특....
그나저나 요즈음 강건너 불구경하듯 태평한 모습으로 (물론 표정과 억양만큼은 결연 그 자체!) 전쟁불사를 외치는 이들이야말로 전쟁의 폐해를 피해갈 가능성이 가장 높은 이들이다.
고등학생인 연정이마저 그런 소리를 했다. '언니, 부자들은 벌써 비행기표 다 사놨다며?"
"야, 전쟁나면 비행기가 뜨겠냐? 혹시 모르겠다. 나라들마다 비상 항공편 마련하면 귀하신 이중국적자들 다 싣고 가실지도...."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전쟁불사 운운하는 인간들, 어떻게 하면 앗뜨거하게 해줄 수 있을까?
이번 선거처럼 정신줄 놓고 있던 경우는 처음인 듯 싶다.
막상 선거가 사흘 앞으로 다가오니 암것도 안했다는 죄책감이 쓰나미처럼... ㅜ.ㅜ
(심지어 돈 못번다고 후원금도 찔끔.... ㅡ.ㅡ)
심이 사퇴한다는 소문이 사실인지 궁금하여 점심 무렵 최은희 샘한테 전화했다가 정말 마음이 짠했다.
별로 힘들다는 소리 안하는 그녀가
완전히 잠겨 갈라진 목소리로 너무 힘들단다....
당으로 걸려오는 조직적인 항의전화와 심지어 항의 방문들....
차라리 어버이연합의 항의라면 웃어넘길수나 있지......
이게 그들이 말하는 민주주의인가?
87년 비판적 지지 논쟁이야 덮어둔다 치더라도
지난 10년 동안 진보정당을 상대로 그리도 상습적인 공갈협박을 해댔으면서도 또....
나는 진보신당 당원이다.
당연히 우리 당과 민주적 절차를 거쳐 선출된 우리 당 후보에게 표를 던질 것이다.
비록 완전하지는 않지만 내가 생각하는 지향에 가장 가깝기 때문에 당원이 되었다.
남들이 우습게 생각한다 해도, 또 부족한 부분이 많다 해도
나 또한 책임이 있기에 '난 아니야' 라며 살짝 뒷걸음칠 수 없다. 당원이니까...
옘비 정권에서 정치적 시민적 권리의 적지 않은 퇴행을 목격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지난 정권 세력들을 지지하는 근거는 될 수 없다.
적의 적이 동지는 아니지 않나....
앙드레 고르는 지본주의와 같은 방식으로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없다고 했다.
그런데 단일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그들이 반대하는 세력의 프레임으로 상황을 몰아가고 있다.
"경제가 망할 거야, 북한이 쳐들어올거야... 그니까 닥치고 한나라당을 지지해야 해!"
"한나라당이 지지하면 이러저러한 재앙이 닥칠꺼야, 그니까 닥치고 우리를 지지해야 해!"
이제 벌써 10년이다....
내가 그토록 싫어하는 마초 영화 '친구'에 나왔다는 대사마냥...
이제 고마 마이 묵었다....
공갈협박 좀 고만 해라.....
내 정당 내가 지지하겠다는데 왜 이리 못살게들 구는겐가!
양심과 사상의 자유는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면서....
그렇게들 서로 좋아 죽고 못사는데, 만일 선거 끝나고 합당 안 하면 그것도 미스테리!
#1.
며칠 전 퇴근 길 지하철에 올랐는데, 실내가 약간 덥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침 승무원 아자씨께서 안내 방송을 하셨다.
냉방 때문에 춥다는 민원이 들어와 냉방을 껐으니, 승객들이 이 점을 양해해달라는 메시지였다.
그리고 한 30초나 지났을까, 아자씨가 몹시 다급한 목소리로 방송을 하셨다.
"아~ ! 지금, 덥다는 민원과 춥다는 민원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
"승객 여러분! 지금 현재 덥다는 민원과 춥다는 민원이 동시에 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다들 귀를 쫑긋 세우고 중계방송을 경청하기 시작했다.
"아~ 지금 현재, 덥다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많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
"네~ 덥다는 의견이 압도적입니다."
....
"이제, 냉방을 다시 켜도록 하겠습니다. 덥다는 의견이 압도적인 관계로 냉방을 다시 켜도록 하겠습니다.... (어쩌구저쩌구...)
도대체 지하철 안에서 누가 그렇게 민원을 넣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들도 방송을 들으면서 다들 두리번....
요즘 지하철에는 승무원이 혼자 탑승한다.
운전상태도 점검하고, 인명사고가 발생하면 혼자 그걸 수습(!)하고, 심지어 이제는 승객들의 폭주하는 민원도 받아줘야 한다.
승무원 아자씨의 긴장감 넘치는 중계방송은 재미났고, 목소리는 정감있었지만,
이게 뭔 일인가 싶다.... ㅡ.ㅡ
#2.
어제 근 두 달 만의 무한도전, 행여나 한 조각이라도 놓칠세라 오후 내내 엠비씨에 채널을 고정해놓고 있었다.
그리하여, 음악중심인가 하는 음악프로를 보게되었는디...
우선, 끝도 없이 쏟아져나오는 소년소녀 떼거지에 놀랐다.
그들의 노래 실력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으나, 최소한 분명한 것은, 각자 불러야 할 소절이 얼마 되지 않아 굳이 가창력을 애써 검증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어쩌면 한민족의 무의식 속에 전승되던 집단창가?
그런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마음 속에서는 쾌지나칭칭나네 자동 재생 ㅡ.ㅡ
이거야 사실 최근의 아주 새로운 현상은 아니기에 그저 '새삼' 놀랐다는 것이고 (아직도 이 문화가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에), 진정 나를 깜딱 놀라게 만든 것은 그 놀라운 가사들!!!
이런 걸 퇴행이라 표현하지 않으면 무엇을 퇴행이라 부르리???
가부장주의와 신파는 내가 모르는 최신의 문화코드였단 말인가?
되도 않는 영어 추임새와 외계어의 조합은 일단 제껴둔다 하더라도,
일찍이 1980-90년대에도 들어보지 못한 교태, 앙탈 코드에 입이 쩍 벌어졌다.
어제 등장한 여자 가수들 노래 중에, 다양한 방식으로 오빠한테 징징거리지 않는 가사는 아마도 이효리의 것이 유일했던 듯...
갑자기 그녀가 다르게 보이더라니.... ㅡ.ㅡ
도대체 저런 노래들이 살아남을 수 있는 한국사회 문화 '시장'의 괴력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 궁금해 죽겠다.
출퇴근 거리가 길어지니까 책읽을 시간이 늘어났다.
물론, 운수대통으로 일찌감치 자리를 차지하는 경우 도저히 깜빡잠이라고 부르기 어려울만큼 푸~욱 잠들어버리지만.....
얼마전에는 내릴 정거장이 되어서 문닫히기 전 후다닥 뛰어내렸는데,
하도 깊이 자다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인지 어지러워 한동안 멍때리고 서 있었음 ㅡ.ㅡ
읽은지 오래되어 기억도 가물가물이나, 그나마라도 기록해놓는게 좋을 듯 싶어 몇 자 남겨둔다
#1. Eric Hobsbawm.

지난 겨울 히말라야 가서 읽기 시작했던 책이다.
저 표지사진............ 책의 내용을 이미 절반은 설명하고 있다.
*
과거에 대한 올바른 이해없이 현재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소박한 진리를 새록새록 떠올리게 만드는 책이다.
돌이켜보면, 한번도 현대사를 이렇게 폭넓게 '조망'해본 적이 없었다.
읽고난 지 얼마되지도 않아 벌써 연대기 순서도 뒤죽박죽되고 구체적인 디테일들을 왕창 까먹었지만 (ㅡ.ㅡ), 부분적으로 알고 있던 사건들을 맥락 속에서 전체적으로 바라보게 되면서 느꼈던 '깨달음'의 즐거움만은 생생하다. 정치와 이념, 문화예술과 과학 - 어떻게 한 사람이 이렇게 시공간을 넘나들며 씨줄날줄을 잘 엮을수 있는거지?
*
홉스봄은 1930년대 대공황 부분을 기술하면서, 시장지상주의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이렇게 생생하게 경험하고서도 1980-90년대에 신자유주의가 다시 맹위를 떨치는 현상이 참으로 기이하다고, 그래서 역사가가 필요하다고 이야기했다. 그리고도 또 20년이 지나 전세계적 데자뷔를 경험하고 있는 걸 보면, 집단적 기억투쟁이 중요한 것 같기는 하다.
*
책을 읽으면서 자연스레 하워드진의 [미국 민중사]와 비교를 하고는 했다.
[미국민중사]를 읽으면서 울컥하는 감정의 고양과 낙관을 갖게 되었다면,
[극단의 시대]를 읽는 내내 눈이 뜨인다는 이성적 기쁨과는 별개로 마음이 매우 무거웠다.
주욱 돌아보니, 자본주의가 지배하는 이 지구촌에 어떠한 형태든 근본적 변화가 가능하기는 한 것일까 하는 비관이 스멀스멀..... ㅡ.ㅡ
*
실제로, 대학시절 세미나 이후 처음으로, 러시아혁명과 중국 혁명에 대해 '차분하게' 돌아보았다. 물론 그 시절에도 들끓는 환호의 마음으로 모든 걸 받아들였던 것은 아니었다. 또한 지금 이해의 지평이 확장되었다고 해서, '그 때는 제가 철이 없었어요' 혹은 '속았어요'하며 배신감을 느낀 것도 아니다.
세상의 복잡성과 맥락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고, 그 정도의 지식과 이해밖에 얻기 어려웠던 것이 그시절의 한계일수 있다. 하지만, 내가 막연하게 이해하고 있던 것보다 혁명 당시의 상황은 훨씬 열악했고, 혁명을 통해 과연 그 사회들이 근본적인 변화를 경험했냐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답변을 하기가 훨씬 어려워졌다.
*
책의 첫 장에 인용된 인류학자 Baroja의 말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There's a patent contradiction between one's own life experience - childhood, youth, and old age passed quetly and without major adventures - and the facts of the twentieth centry... the terrible events which humanity has lived through"
20세기는 기이하게 마감되었다.
'평균적인' 물질적 조건들은 개선되었지만, 불평등은 유례없이 심화되고,
전지구적 차원의 전쟁을 사라졌지만 국지적 갈등은 이제 그야말로 유비쿼터스.....
기관사없는 폭주기관차처럼 위태롭게 질주하는 21세기 지구촌의 운명은 과연 어디로... ㅜ.ㅜ
*
세계대전 때 폭격으로 폐허가 되어가는 런던을 떠나며 영국인들은 다시는 런던을 보지 못할거라고 생각했단다. 세계가 멸망하는 줄 알았다고.....
그러게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지속된다.
하지만 문제는 어떤 삶이 지속되느냐 하는 것이다.
인류는 정말 중대한 기로에 서 있다.
#2. John Berger < Ways of Seeing> Penguin books 1972

미술작품, 특히 회화에는 등장인물 (혹은 사물이나 풍경) - 그리는 사람 - 그림을 보는 사람 이 존재한다.
Berger는 통상적인 예술사 기술이 잔뜩 신비화된 미사여구로 등장인물과 화가들의 내면에 대해 소설을 쓰는 것을 비판하며, 등장인물과 화가 의 관계, 그리고 그림과 감상자 혹은 소유자의 관계에 주목하면서 작품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이 책이 BBC에서 방송된 프로그램에 기반을 두고 쓰였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렇게 '급진적'인 내용이 공중파 예술프로그램에서 가능한 거구나... ㅡ.ㅡ
책의 목적은 서문에 아주 분명하게 기술되어 있다.
"A people or a class which is cut off from its own past is far less free to choose and to act as a people or class than one that has been able to situate itself in history. This is why - and this is the only reason why - the entire art of the past has now become a political issue"
무엇보다, 책이 재미있고,
얄팍한 나름의 서양미술사 지식에 토대를 둔 관성적인 스스로의 작품 이해방식을 앗 깜딱이야 하면서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준 아주 훌륭한 책.... (종류가 다르기는 하지만,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읽고서 눈이 번쩍 뜨였던 경험에 비할만하다)
칼라 도판 없이도 그림책이 이렇게 훌륭할 수 있구나!!!
#3. Wilkinson R, Pickett K.

미국에 체류 중인 S 샘이 저자 친필 서명까지 얹어 선물로 보내준 책이다.
저자들은 주로 선진국들의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득불평등이 다양한 건강과 사회문제 (정신건강, 약물남용, 평균 수명, 비만, 교육성취, 10대 임신, 폭력, 징역/형벌, 사회 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꼼꼼하게 보여주고 있다. ( 인용하거나 참고할만한 수치나 그래프들이 적지 않다- 다만 통계미비로 한국은 분석에 거의 포함되어있지 않음 ㅡ.ㅡ)
그래서, 한 사회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뿐이 아니라 모두를 위해서 좀더 평등한 사회를 만들 필요가 있다고 강력하게 주장한다. 불평등로 인해 초래되는 사회적 비용은 그 사회 모두에게, 특히나 열악한 조건에 처한 이들에게 좀더 집중적으로, 전가되며, 윤리적인 측면에서 뿐아니라 효율이라는 측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평등한 사회로 변화해가는 것이 결코 불가능하거나 수천만년 걸리는 일도 아니라는 것을 현실의 예를 들어서 보여주고 있다.
아주 꼼꼼하고 설득력 있게 쓰인 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좀 '결정적인' 부분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도대체 '왜' 불평등이 이러한 여러가지 건강과 사회문제들을 낳는가 말이다.
저자는 오랜기간 주장해왔듯, 다시 한번 사회심리적 요인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분명히 중요한 요인이기는 할 것이다.
하지만 단지 마음가짐과 스트레스의 문제가 아니라,
불평등으로부터 야기된 힘의 불균형 (이들은 상호강화)이 시민들의 민주적 참여를 배제시키고, 사회적 투자를 침식함으로써 실제적인 물리적 조건의 변화를 낳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 아닐까?
OECD 국가들 중 불평등 수준이 가장 심각한 미국의 평균적인 건강수준이 나쁜 것이,
불평등 때문에 시기와 질투로 마음에 병이 나서 그렇다기보다는
계급 혹은 계층적 이해가 달라지면서 공공의 장이 축소되고, 권력을 가진 이들의 이해에 충실한 정책과 사업들이 시행되면서 실질적인 삶의 조건이 달라졌기 때문이라고 본다.
저자들의 관점에 대한 이러한 문제의식은 사실 나만이 아니라,
사회역학계에 나름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설명에 대해서는 학술적 논쟁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 분명하지만
어쨌든, 이 책이 전공자들이 아닌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쓰여졌고 그것도 아주 쉽고 간명하게 핵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는 점에서 굳이 '나 이 책 반댈세'라고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설명방식에 대해서 관점이 좀 다르기는 하지만
불평등이 건강과 사회문제에 심원한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단지 가난한 이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오늘날 한국사회에 무척이나 절실한 메시지!
일본어를 공부해보겠다고 널리 광고를 했더니만 주변에서 온정이 답지했더랬다.
우선 rawfish 는 자신이 듣는 인터넷강의를 알려주었다.
인터넷 강의라는 거는 처음 이용해보는데, 생각보다는 괜찮다.
나도모르게 혼자 큰소리로 따라하고 있는 걸 보면 좀 웃기긴 해 ㅋㅋ
근데 요즘 맨날 밤늦게 귀가하니라 듣지를 못해 너무너무 밀려있다.
노건연의 Suzuki 동지는 딸래미가 즐겨찾던 일본 어린이 사이트들 알려주었다.
어린이 학습 소재관이라고... http://kotoba.littlestar.jp/kisetsu-sozai.html
히라가나 연습부터 시작하여 시계보기, 단어 익히기 등 미취학 아동을 위한 사이트라며 나한테 딱 맞을거라 추천해주었는데 이거조차 버거워... ㅡ.ㅡ
우리집 김씨는 자신이 다니던 일본어학원 학습교재를 복사해주었다.
책을 사겠다는데도 굳이 못사게 하면서 복사해준, 지극한 동생사랑의 결정판이라고나 할까....ㅡ.ㅡ
정성은 눈물나도록 고마운데, 강사 설명없이 교재만 보고 쫓아가는게 쉽지는 않다.
그나마 듣고 있던 인터넷 강의가 덕분에 겨우겨우....
그런데, 좀 황당한 것이...
점선 따라 글씨와 단어 연습하는게 있어 열심히 따라 그렸는데(!)
자세히 들여다보니 교재에 인쇄된게 아니라, 김씨가 쓴 게 복사된 거다.
김씨는 어려서부터 악필로 소문이 자자했던 자다.
그동안 저 글씨를 따라쓰며 일본어를 익혔다니....
십년공부 도로아미타불 OTL.....
이렇게 공부해서 과연 죽기 전에 책 한권이나 읽어볼 수 있을랑가 모르겠다.
요즘 만나는 이들 중에, 행복하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여기서 조금이라도 '힘들어요' 혹은 '글쎄요'라고 대답했다간 질문하신 분들이 급실망할 기세.... ㅡ.ㅡ
사실, 직장을 옮기기 전에도, 그렇게 불행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사람마다 고통의 무게가 다른 법이기는 하지만, 내가 처해있는 상황이 우리 사회 전반에 비추어 결코 최악이 아니었기에, "왜 나에게 이런 시련이?"라고 투덜거리는 것은 인지장애가 아니고서는 나오기어려운 반응....
따라서 지금의 일터로 옮겼다고 해서, "이제 새 삶을 살게된 것 같아요. 여자라서 햄볶아요" 하며 호들갑을 떠는 것은 좀 웃긴 일이다 (무엇보다 '나는 행복한가' 류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안 하는 편....그래서 뭐 어쩌라구?)
나는 그저, 내가 조금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문제 때문에 활동의 공간을 옮긴 것 뿐이다.
새 일터라고 문제가 없을 것도 아니고, 앞으로 내외적인 갈등이 없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누군가, "거봐라"라고 조소 혹은 진심이 담긴 나무람을 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나름, 쪼금 득도해서 매 상황에 일희일비하지는 않는 편이다 ㅋㅋ
번뇌의 바다에서 어떻게 어려움과 고통이 없을 수 있나?
그냥, 바람에 걸리지 않는 그물처럼... 묵묵히 가는거다....
또, 지금의 일터로 옮긴 것을 대단한 희생이나 결의로 보는 시선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다.
교수가 뭐 그리 대단한 자리라고...
그리고 교수직만 그만두면 갑자기 실천활동이 수백배 증폭되는 것도 아닌데....
사회적 지위나 명망 따위야 원래부터 관심도 없었고,
다만 안정된 생계에 대한 걱정만 좀 있는데,
부부가 전문직에 월 가계소득이 천만원 넘는 이들도 다들 생계걱정하고,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소연하는 걸 보면 이것도 끝이 없는 걱정 아닌가 싶다.
사회보장 강화하자고 싸울 이유가 하나 더 생긴 것 쯤으로 생각하면 될 듯 싶다....
나의 인생이 진심으로 걱정되시는 분들은 연구소 후원이나 쫌.... ㅡ.ㅡ
제가 일하고 있는 '시민건강증진연구소'에서 함께 할 젊은(?) 연구자를 찾고 있습니다.
영 펠로우라는 영문 명칭이 좀 어색하기는 한데, 학계에 널리 통용되는지라 그냥 썼어요.
"젊은 친구"라고 번역하면 좀 웃겨져서리.. ㅡ.ㅡ
관심있는 분들의 참여 부탁드리고, 주변에도 널리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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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건강증진연구소 (People's Health Institute)와 함께 할 영 펠로우를 찾습니다.
# 프로그램 목표: 진보적 담론/대안/운동 지향 연구 활동의 후속세대 양성
# 펠로우쉽 기간: 1년, 매년 3월~익년 2월 (2010년 5월 1일~2011년 2월 28일)
# 자격: 석사 졸업 후 미취업 상태이거나 박사과정 재학생 (보건 관련 전공, 혹은 보건학과 연계 가능성이 높은 학문 분야 전공)
# 대우
․급여: 월 50만원
․연구 성과물의 학위/학술지 논문화 가능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각종 교육프로그램과 강좌 참여 가능
# 활동 조건
․주 12시간 근무 (시간 선정은 자율)
․연구 활동 참여를 통해 펠로우 기간 중 2건 이상의 성과물 제출 (보고서/소책자/단행본 등)
# 필요 서류: 이력서*, 연구계획서**
# 이메일 서류 접수 마감: 4월 25일 (일) 자정 (TO mhkim1871@gmail.com)
# 문의: 전화 070 8658/9-1848 전자우편 mhkim187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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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력서에 주민등록번호, 학부출신학교명, 가족 상황 기재 불필요 (전공과목만 기재)
** 연구계획서: 정해진 양식 없으며 A4 3장 이내, 아래의 2010년 연구소 중점 사업 중 2가지를 선택하여 기재
① 한국의 보건의료 개혁 운동 - 이론, 평가, 전망
② 최근 10년 간 건강불평등 관련 정책 동향
③ 한국의 건강불평등 소책자 시리즈 1편 “지역”, 2편 “아동”
주변의 너나할 것 없는 강추가 있었으나 시간을 내지 못하다가 불현듯 나서 보게 되었다.
홍현숙 감독의 다큐 [경계도시2]

작품을 보면, 나- 개인의 안위를 걱정하는 사람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송교수의 부인만이 예외)
어떤 이들은 국가안보가 위협당할까봐 진심으로 걱정하고, 또다른 이들은 민주화 운동이 위기에 처할까봐 걱정한다. 생뚱맞게 박홍 총장 같은 이는 송두율 교수을 걱정해주며 그가 사도 바울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음을 축원하고, 심지어 기자라는 작자들마저 어떻게하면 이 상황을 잘 돌파할 수 있을지 검찰의 '조언'을 김형태 변호사에게 일러주기마저 한다.
또한 송교수의 잠재적 아군이었던 이들은 '전술'을 이야기했다.
이건 그저 전술일 뿐이다 (전략이 아니라) - 그저 사죄성명에 준법서약서 한장....,
(나는 그리 생각하지 않지만) 사람들이 이걸 문제 삼으니 어쩌냐, 일단 비는 피해야지....
이러한 전술적 접근은 좋게 표현하면 유연성이고, ('~주의'라고 이름붙이는 것이 적절한지는 모르겠지만 굳이 그리하자면) '실용주의', 혹은 약간 폄훼해서 '정치공학'이라고도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근대가 개인의 발견과 함께 시작된 것아라면,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한국사회는 아직 전근대라는 것을 이 작품은 보여준다. 집단적 대의명분 앞에 개인은 존재하지 않으며, 양심이란 편의에 따라 잠깐 유보할 수 있는 생각의 한 단편일 뿐....
(송교수가 준수선언을 강요당했던 그 잘난 대한민국) 헌법에 보장되어 있다는 개인의 양심과 사상이 좌와 우에 의해 그리도 손쉽게 재단될 수 있다는 것에 새삼 (!) 놀랐다. 하긴 주위를 둘러보면, 일상에서 드문 광경도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양심과 사상을 개떡같이 취급하는데 너무나 익숙해져 있지 않은가...
멀리 국가보안법까지 언급할 것도 없이, '일단' 반성문 쓰기, 종교 강요 같은 예는 수백가지도 들 수 있다.
이런 일들의 특징이자 위험성은 그것이 대수롭지 않게 여겨진다는 점이다.
억압을 가하는 측만 그런 것도 아니다. 억압받는 이들조차도 내적 괴로움 없이 실용주의적인 혹은 유연한 접근을 하는 경우가 많고, 또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주변의 신심어린 조언자들과 지지자들이 이러한 선택을 충고한다. 그것도 진심어린 애정으로부터.....
파시스트 독일에서, 히틀러-나치스에 경례를 붙이고 싶지 않았던 한 저명 과학자는 집밖을 나설 때면 항상 양손에 무언가를 들었다고 한다. 경례를 붙이는 사람들이 모두 진심으로 파시스트는 아니었을 것이다. 그냥 손짓만 따라하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열렬하게 파시즘을 미워했어도 괜찮았다. 아마도 적지 않은 이들이 그렇게 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러나 이 과학자는 스스로에게 용납이 안 되었기에, 수 년 동안을 외출 때마다 짐꺼리를 만들어야 했다.
김동원 감독의 [송환]에 보면, 전향서를 쓴 이와 그렇지 않은 이들이 모두 등장한다.
그깟 전향서, 형식적으로 쓰고 마음 속으로만 전향 안하면 되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그걸 차마 할 수 없어서 수십년을 영어의 몸으로 지내버렸다.
스스로를 돌아본다.
(아무도 들여다볼 수는 없지만) 나의 존재 근거를 뒤흔들 수 있는 상황들에 나또한 얼마나 '유연하게' 대처했었는지..... 나의 양심 혹은 다른 이의 정체성을 얼마나 손쉽게 '그 따위'로 만들었는지....
이 작품이 우리에게 던져준 과제는
국가보안법 따위를 떠받드는 야만적 우파에 대한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어떤 근대를 살아가고 있는지 성찰해보라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뱀발
영화에 현재 건강보험공단 정형근 이사장이 몇 번 등장한다.
역시 그곳이 더 잘어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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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 및 생물 관련 학술용역을 주로 수행하는 민간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보고서를 쓰다가 문득 학술용역을 수행하는 사람으로서의 자세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고, 검색 결과 이 포스트를 읽게 되었습니다. 무척이나 공감가는 글이었습니다. 그런데 현실에서 과연 이 문제를 어떻게 공론화할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그렇다고 국내에 기술용역의 엔지니어링협회처럼 어떤 학술용역 단체를 위한 협회가 존재하는 것도 아니고, 또 더 확대해 생각해보면 학술용역뿐 아니라 기술용역도 동일한 문제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지요. 양심만으로는 해결될 수 없는 체제의 근본적인 문제점인데, 이를 어떻게 제도적으로 보완할지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부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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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서 지원하는 연구비는 출연금(공동연구) 및 용역비(용역과제) 등이 있고 수행기관은 개학, 연구기관, 업체 등이 참여가능합니다. 저도(국가기관) 지난번에 용역연구를 발주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출연금을 받는 대학은 연구결과를 논문으로 발표할 경우, 스폰서만 논문에 명기해 주면 됩니다. 그런데 재원의 출처가 다르지만 용역과제도 대학에서 수행한 경우에도 스폰서만 명기해 주면 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일부 용역결과 자료와 다른 과제결과를 합쳐서 SCI 논문이 나왔습니다. 주저자는 물론 용역과제 수행한 교수님입니다. 그런데, 발주한 연구자가 논문 주저자나 교신저자가 되어야 조직의 성과물이 된답니다.^^;; 그러면서 사전 발표승인의 협약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네요. 아무리 성과평가가 무섭다고 하지만 이런 것이야 말로 연구윤리에 저축되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흔히 관리하는 분들은 안하고 못하는 이유를 주로 말합니다. 감사로부터 연구자를 지키기 위해서...^^ 그러나 규정으로 모든 것을 명확히 할 수 없을 경우에는 상식선에서 잘 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지나치게 일부자료만을 사용할 경우까지 제제를 한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연구활성화를 저해하는 것이라 보여져 답답합기만 합니다.부가 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