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상급식이 난데없이 ‘부자급식’ 논란으로 번졌네요. ‘부잣집 아이들에게까지 공짜 밥을 줄 수는 없다’는 게 그 이유인데요. 부자당, 한나라당에서 이런 소리가 나오고 있으니. 아니 제 자식들 공짜 밥 먹는 걸 보고 싶지 않다는 얘긴가요, 제 아이들 공짜 밥 먹는 게 부모로써 창피하단 얘긴가요. 알다가도 모르겠습니다.
 
하긴 서울시장은 ‘여기서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무너진다’며 여전히 악을 쓰고 있고, 춘천시장은 ‘얘들 밥 먹이는 게 그렇게 급한 일도 아니다’며 한마디로 딱 잘라냈고, 경기도지사는 ‘요즘 얘들 비만이 문제지 영양실조가 문제인가’라며 펄쩍 뛰었었는데. 가만, 이거 세 사람 모두 어느 당(黨) 사람들입니까. 
 
암튼 상황이 이러니 서울시나 경기도, 강원도 모두 무상급식 실현이 쉽지만은 않을 것 같습니다. 아니요. 강원도는 물 건너갔습니다. 강원도 의회가 무상급식 관련 예산을 전액 삭감했거든요. 이에 따라 춘천, 강릉, 태백을 제외한 강원도 내 시, 군들이 올 해부터 실시하기로 했던 무상급식도 어렵게 됐습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하려 해도 할 수 없게 돼버린 겁니다.
 
뭐, 기획재정부장관이란 사람은 “복지 같은 데 재원을 다 써버리면 남는 게 없다”고 투덜대기나 하고.  대통령은 가뜩이나 많지도 않은 복지관련 예산을 뭉텅이로 잘라내고는 “우리가 복지국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수준에 들어가고 있다”며 자화자찬(自畵自讚)하고 있는 마당이니. 이런 결과는 당연한 거겠지만. 아무리 자치단체장이 그렇게 나온다고 해도 그렇지요. ‘부자급식’이 ‘언론발’을 받은 게 틀림없지만 ‘여론발’을 받은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서인가요. 경기도는 ‘절대 안 돼’에서 한 발 물러섰고. 서울은 한나라당이 구청장을 하고 있는 강남 3구(서초, 강남, 송파)와 중랑구를 제외한 21곳의 자치구에서 초등학교 1~4학년에 대한 무상급식을 실시하기로 했다니. 아무리 ‘공짜 밥’에 ‘부자급식’, ‘포퓰리즘’으로 혹세무민(惑世誣民)해도 대세는 거스를 수 없는 가 봅니다.
 
하지만요. 애당초 무상급식을 바라보는 시각이 참 많이도 다르구나 생각은 했지만. 평등이니 보편이란 말만 꺼내도 곧 ‘빨갱이’, ‘친북’으로 자동 연결되는 머릿속을 보고 있자니. 또 ‘주민투표’를 통해 무상급식을 반드시 저지하겠다고 결의(?)를 다지고 있는 서울시나 ‘친환경 학교급식’이란 이름으로 어물쩍 넘어가려고 하는 경기도도 아직은 한참 더 싸워야겠지만.
 
춘천, 아니 강원도에 비하면 그래도 거진 절반은 넘게 해냈으니 괜찮습니다. 젠장, 여긴 터널 끝이 당체 보이질 않거든요. 이러니 이거, ‘무상의료’, ‘무상교육’이란 말은 언제나 꺼내볼 수 있을까요. 유난히 추운 겨울만큼이나 마음까지 얼어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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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9 10:39 2011/02/09 10:39
1. 
그새 10년이나 지났지만. 그때만 해도 담 없는 대학, 지역주민에게 도서관을 개방한 대학은 드물었지요. 김동춘 샘이니 조희연 샘, 신영복 샘이 있었고 또 여기저기 단체나 노동조합에 힘을 보태고 있는 샘들이 꽤나 많았으니 그럴 만도 했겠지만. 아, 그렇다고 그 학교가 운영면에서나 자치면에서 민주적이었다고는 생각지 않았습니다. 한 달에 한 번 생일을 맞은 학생들을 위해 학생식당 테이블마다 케이크를 사다놓고. 또 한 달에 한 번 자취나 하숙을 하는 학생들을 위해 식당을 개방하기도 했지만(이 비용은 총창이 사비를 털어 댔답니다. ^^). 주먹구구식 학사행정, 열악한 교육환경, 학교 당국의 권위주의는 여느 학교나 마찬가지였단 말이지요. 또 요 근래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청소, 경비 등 학내 비정규직 문제도 밖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가을 축제 땐 ‘윤밴’을 보러 온 가족이 놀러오기도 하고, 날 좋은 주말엔 샘들과 공을 차기도 하고.
 
2.
애당초 논문엔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해서 학기를 마치자마자 곧 노동조합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는 춘천으로 이사하기까진 그야말로 정신없이 살았으니. 더는 학교에 가는 일이 없겠다, 싶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원을 다녀야 한다는 핑계로 학교 근처에 집을 얻었던 게. 어찌어찌 동네에 정도 들고 또 그만한 돈으로 어디 또 다른 데를 찾기가 쉽지 않아 몇 년을 그대로 더 있었더니. 곧잘 학교 도서관엘 가게 되더라구요(지역주민회원제도 있었지만 수료라도 했다고 졸업생회원 자격을 주더군요). 암튼 햇볕 좋은 날엔 도서관 창가에 자리를 잡고 이 책 저 책 뒤적거리고. 추적추적 비가 오는 날엔 DVD를 빌려 와 하루종일 영화를 보기도 하고. 또 그땐 집에서까지 인터넷을 하지 않았던 터라 인터넷도 하고. 물론 척 보기에도 동네 주민으로 보이는 분들도 꽤나 많았었구요. 그 사람들 틈에 끼어 학교를 떠난 지 5, 6년이 지나도록 그렇게 도서관을 맴돌았답니다. 그러니요. 참 이만치도 열린 학교가 또 어디 있을까, 얼마나 자랑하고 싶었는지 모릅니다.
 
3. 
홍익대가 자주 언론에 오르내리네요. 얼마 전엔 동국대가 그러더니 이번엔 홍익대가 문젠데, 아마도 총학생회 때문에 더 요란한 듯합니다. 보기엔 총학생회도 총학생회지만 학교법인 홍익학원이 벌이는 짓거리가 손가락질 받을 일인데. 어찌된 게 총학으로 시선이 집중되고 있으니. 물론 홍대 총학이 저지른 일들 때문에 일이 더 커지고 있으니 문제 해결을 위해선 되레 잘됐다고 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데도 홍대 총학생회가 여전히 ‘외부단체’라는 말을 쓰는 걸 보니. 왜 자신들이 욕을 먹고 있는지 잘 모르고 있는 듯합니다. 하지만 초, 중, 고 12년 그리고 대학 4년을 배우는 동안 노동권에 대해, 노동조합에 대해 제대로 배우질 못했단 점을 고려하면 상처가 조금은 깊지 않다, 생각할 수 있을까요. 아, 물론 그렇다고 홍익대학교 총학생회를 두둔하잔 건 아닙니다. 정규교육과정에서 가르치지 않았다고, 학교교육에서 배우지 않았다고 해서 잘못이 덮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아무리 대학이 취업준비기관으로 전락했다하더라도 스스로 시민으로서의 권리, 노동자로서의 권리마저 내팽개칠 순 없단 말이지요. 
 
4.
춘천으로 오고서도 한동안은 학교란 데를 갈일이 없었습니다. 간혹 책을 빌려봐야 할 일이 있으면 시립도서관엘 갔고 또 거기 열람실에서 공부를 했거든요. 요즘은 어느 도서관이든 책을 빌리면 언제 반납을 해야 하는지도 문자로 알려주고. 여름엔 시원하게 에어컨을, 겨울엔 따뜻하게 난방을 해주니 어떨 땐 집보다 낫기도 하단 생각도 듭니다. 하지만 이름만 시립일 뿐 책이 많지 않더군요. 그리고 그래서이겠지요. 그나마 있는 책들도 다양하지 않아 많이 아쉬웠습니다. 게다가 요즘 들어 부쩍 들여다보고 있는 환경, 생태, 농업 관련 책들은 그야말로 가물에 콩 나듯 있으니. 그렇게 자주 찾아가게 되진 않더라구요. 헌데 지금 살고 있는 동네로 이사를 하고 나니. 그나마 시립도서관은 더 멀어지게 됐고, 그나마 동내도서관이 있긴 한데 시립보다도 더 작으니. 보고 싶은 책을 찾는 게 더 어려워졌습니다.
 
5. 
작년 가을쯤인 걸로 기억합니다. 춘천엔 큰 대학이 3개가 있지요. 국립대인 교육대와 강원대 그리고 사립인 한림대 이렇게 말이지요. 지금 살고 있는 곳은 이 세 대학 중 두 곳과 매우 가깝습니다. 걸어서 10여분 내외면 정문이니 말이지요. 해서 처음 이쪽으로 오고나선, 마음먹기에 따라 내 집 드나들듯 대학시설을 이용할 수 있겠지, 생각했습니다. 도서관이니 학교식당이니, 박물관, 운동장 등등을 말이죠. 헌데 말이죠. 교대는 담이 없어 비교적 학교 출입에 대한 거부감이 없긴 한데 도서관은 개방을 하지 않더라구요. 물론 첨부터 그런 건 아니었는데 작년 가을쯤부턴 학생증이 없으면 출입 자체를 못하게 만들더군요. 그리고 지역주민회원제 같은 건 아예 없구요. 
 
6. 
강원대는 워낙 학교가 넓어서 그런지 여기저기 담을 두르고 정문이나 후문도 그럴듯하게 세워놨습니다. 하지만 도서관은 지역주민들에게 개방을 한다는 얘길 어디서 들은 것 같아. 작년 가을쯤인가 도서관에 문의를 했지요. 지역주민회원 가입은 어떻게 하는 겁니까, 하구요. 헌데, 나 원. 제한된 수에 한해 회원을 받는데 지금은 다 찼다고 하더라구요. 거기까진 뭐 그럴 수 있겠다, 싶었는데. 그럼 언제 회원에 가입할 수 있겠느냐 물었는데. 글쎄, 무조건 안 한다고, 학생들 도서관 이용에 불편이 많아 당분간은 안 받을 거라고 하더라구요. 아, 스팀. 한 마디 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도서관 홈페이지엔 지역주민회원제라는 게 분명 명시돼 있고, 어차피 회원은 열람실 이용이 제한돼 있으니 학생들에게 피해가 얼마나 가는지 모르겠지만 장서실 이용하는데 그렇게 불편을 초래하느냐, 국립대면 도서관만큼은 지역주민들에게 되도록 제한 없이 개방해야 하는 거 아니냐, 했더니. 돌아온 대답은. 너, 어디 사느냐, 는 말로 시작해 끝내는 욕설이 나오더군요. 참 어이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람과 더 말을 해봐야 도통 먹히질 않을 것 같아 대학본부로 연락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는 말, 그 문제 때문에 지금 학교 규정을 바꾸려고 한다, 규정을 개정하면 좀 더 많은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랍디다.  
 
7.
올 겨울은 강원대 도서관 5층 장서실에서 보내고 있습니다. 규정을 개정했는지 어쨌는지 모르겠지만 다행히도 얼마 전 지역주민회원으로 가입을 할 수 있었거든요. 해서 가끔 책도 빌려보기도 하다, 4월에 있을 시험 준비도 할 겸 아침부터 도서관으로 향하고 있는 것이지요. 헌데 말입니다. 가끔은 온종일 돌아가는 난방 때문에 골이 아프기도 하지만요. 넓은 책상에, 국립대라는 이름에 걸맞게 서고마다 책이 잔뜩 꽂혀있어 바로바로 딱 맞는 책들을 찾아 볼 수 있으니. 이보다 더 공부하기에 좋을 순 없겠더군요. 게다가 단돈 2천원이면 3가지 반찬에 김치와 국까지 따라 나오는 식당에서 밥도 먹을 수 있고(후식으로 200원짜리 커피도 마실 수 있답니다). 얼마 전에 갔을 땐 청소하느라 못 봤지만 박물관도 곧 구경할 수 있을 테고, 날이 풀리면 푹신푹신한 운동장 트랙에서 운동도 할 수 있을 테니. 집에 있는 시간보다 학교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질 것 같은데. 이거, 이래도 되는 될까, 괜한 걱정도 해봅니다. 어차피 3월, 학기가 시작되면 아무리 5층 장서실이라도 지금 같은 호사는 눈치 때문에 쉽지 않을 테니 말입니다.  
 
8.
대학이 ‘지성의 요람’이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더구나 ‘민주주의의 보루’였던 시대는, 대체 그런 때가 있었던가 싶을 만큼 아득합니다. 그러니 대학문을 활짝 열어젖히고 노동자들과 함께 보다 나은 내일을 얘기했던 68을 기대하는 건 택도 없는 일이지요. 도서관 열람실은 미어터지다 못해 좌석예약제까지 생기는데, 장서실 서고엔 면접요령이니 취업전략이니 하는 책들만 인기를 끌고. 이런저런 자격증도 모자라 문과계열 학생이 CPA를, 이과계열 학생은 고시를. 자신만은 10%에 들 수 있을 거라는 헛된 희망에, 아니 자신만은 나머지 절반의 정규직이 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에 두 눈 다 감고, 두 귀 다 닫고 어학연수, 유학으로 보내는 4년. 경제단체로부터, 재벌기업으로부터 장학금 타 쓰는 총학생회, 동아리, 학회. 지금 우리 대학은 취업학원, 고시학원일 뿐인 것이지요. 아니 많게는 수백억 원에 달하는 적립금을 가져다주는 황금알 낳는 대기업일 뿐인 겝니다. 상황이 이러니 노동조합을 ‘외부단체’라 스스럼없이 말하는 것일 터이고. 동네 사람들이 도서관에서 책 좀 본다고, 열람실에 공부 좀 한다면 그걸 불편해하고 성가셔하는 것이겠지요. 누구나 편하게, 시립도서관만큼이나 열린 도서관. 길이 참 멀단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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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13 22:44 2011/01/13 22:44

1.

국회에서 또 몸싸움이 났습니다. 뒤엉켜 멱살잡이에, 치고받고,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 던지는 꼬락서니(심지어 모 남성 의원은 여성 당직자 머리까지 잡아 끌더군요)들이 참 가관입니다. 이러려면 애초부터 힘 좋은 의원 뽑기를 하던지 아님 과반 의석 차지하면 그냥 맘대로 다 할 수 있게 하던지. 막고 있는 이들이나 들어가려고 하는 이들이나 별반 차이가 없는 게. 엊그제는 여기에 있던 자들이 오늘은 저기에, 어제는 저쪽에서 들어가려는 자들이 오늘은 막는 이들로 서 있으니. 이놈들 욕하자니 저 놈들 한 짓이 생각나고, 괘씸한 저 놈들 보고 있으려니 이놈들도 똑같고. 그렇다고 양비론으로 둘 다를 욕하자는 건 절대 아닙니다. 다 같은 놈들이라고 해도 그때그때마다 또 이번 일처럼 분명 잘잘못은 있는 거니까요. 덮어놓고 싸잡아 욕하진 말자는 얘깁니다. 예컨대 막무가내 4대강 삽질에 올인 한, 3년째 예산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킨 한나라당이 이번 사태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얘길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또.
 
2.
우리 사회는 민주주의를 매우 협소한 개념으로 사고하는 듯합니다. 표결과 과반, 그것이 민주주의의 전부인양 생각하고 행동하니 그렇습니다. 아니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매년 난장판이 돼 버리고 마는 국회를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과반수 의석만 차지하고 나면 무조건 밀어붙이기로 일관하는 정치권(여, 야 가릴 것 없이, 아니 어떻게 보면 둘이 공모한 작품일지도 모르지요. 한 순간에 야당에서 여당으로 또 여당에서 야당으로 바뀌기도 하지만 누가 여당이 됐든 늘 그런 식이었잖아요)이 장단을 넣고 여기에 어울려 춤추는 언론. 이번 예산안 처리만 봐도 그렇지요. 과반 의석을 차지하고 있다고, 토론이나 심의과정은 대충대충. 그저 머릿수로 어찌해보려고만 하는 한나라당이나.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밖에 없는 몸싸움과 고성, 온갖 던지기 등을 ‘폭력’에만 초점을 맞춰 보도하는 언론들(이런 모습들은 민주당이 과반을 차지하고 있던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뭐, 이미 예견된 거 아니었겠습니까.  
 
3.
민주주의는 결코 표결로 완성되는 게 아닙니다. 더구나 과반을 넘겼다고 해서 모든 것에 정당성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표결보다는 대화와 토론을 통한 합의를, 또 설령 과반, 아니 2/3가 넘더라도 소수 의견은 끝까지 존중하는 것, 그것이 민주주의인데 말이지요. “타협을 해도 성과가 없을 것”이라는 말이나 “고질적인 발목잡기”라고 비난을 한다 해도, 민주주의를 잘 못 알고 있는 것은 변함없는 사실인 것처럼. ‘막장국회’니 ‘난장판국회’니 하며 선정적인 제목과 사진을 쏟아내면서도 정작 무엇 때문에 이런 일이 생긴 건가, 누구에게 책임이 있는 건가에 대해선 일언반구도 없는 언론도 결국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있는 겁니다. 이렇게 국회와 언론이 민주주의를 왜곡하고 애써 외면만 하니. 마치 모든 것을 표결에 붙이고 또 표결에서 과반이 넘으면 되지 않느냐, 아니 이도저도 안되면 쪽수로 밀어붙이자, 라고 생각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마치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처럼 매우 당당해합니다. ‘승자독식’이란 말은 ‘과반’과 동의어란 것. ‘표결’은 민주주의의 마지막 수단이란 것. 다시 생각하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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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10 22:11 2010/12/10 22:11

  <구불구불 흐르는 공지천, 모래톱도 보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1.

대체 며칠 째인지 모르겠습니다. 보기만 해도 어마어마한 돌덩이들을 잔뜩 싫은 덤프트럭들 이 쉴 새 없이 오가고. 또 실어오기 무섭게 여기저기 내려놓고. 포클레인은 이 돌들을 집어 강변에 쌓느라. 이거야 원 하루 종일 공사 소음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오릅니다. 그리고 곧 겨울이니 서둘러 공사를 마쳐야 하겠지, 이해가 안 되는 건 아니지만. 해가 뜨기도 전부터 시작해 해 진 후에까지도 들려오는 소리에. 또 며칠 전 주말엔 아름드리나무들을 잘라내느라 전기톱을 쓰는 바람에. 생각해보니 그때부터 신경질이 나기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합니다.

 

2.

혹시 청계천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어떤 이들은 천만이 넘게 사는 대도시에 이만한 하천이 없다며, 복원된 하천을 찬탄합니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1급수 물고기 연어가 발견됐다, 줄납자루니 각시붕어니 하는 이름도 첨 듣는 토종 물고기가 발견됐다 호들갑을 떱니다. 하지만 콘크리트 세면으로 발라진 둑을 보고 있자면. 조개에 알을 낳는 물고기가 살고, 섬진강에서 사는 물고기 날아와 살고 있다는 얘길 들으면.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인지 짧은 머리론 통 이해가 되질 않더군요. 게다가 이 청계천 복원사업 이후 어느 도시, 어느 강변엘 가도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는 하천들을 보자니. 이게 도대체 무슨 유행인지 짧은 머리로 또 통 이해가 되질 않습니다.

 

3.

대체 무슨 공사를 하는 건지 하도 궁금해서 시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공지천’으로 검색을 해봤습니다. 그랬더니. 아, 이런 내용으로 <보도자료>*를 낸 적이 있더군요.

 

  ○ 춘천시의 도심하천인 공지천이 내년 여름이면 예전과는 다른 생태, 친수하천으로 되돌아온다.

  ○ 춘천시는 지난 6월 공지천 생태하천 정비사업 1지구 공사를 준공한데 이어 이달 중 2지구 공사에 들어간다고 밝혔다.

  ○ 1지구는 학곡리 공지천이 시작되는 지점~퇴계천 합류점까지 2.2km 구간으로 호안 정비와 함께 자전거도로 겸 산책로 4.2km가 개설돼 현재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다.

  ○ 2지구는 퇴계천 합류지점~공지천교 간 3.4km로 호안정비와 자전거도로 개설(2.7km) 공사가 이뤄진다.

  ○ 현재는 둔치 한 쪽만 산책로가 있으나 둔치 양쪽에 산책로가 추가로 개설돼 돌다리로 연결된다.

  ○ 남춘천교~효자교 구간에는 홍수 피해가 없도록 하기 위해 제방이 낮은 곳은 석축을 높이는 공사가 이뤄진다.

  ○ 생태계 복원을 위해 물가와 둔치가 만나는 경계에 나무로 짜여진 틀에 돌을 넣어 수생물과 물고기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식생방틀이 설치된다.

  ○ 시는 당초 내년 말까지 전 구간을 준공키로 했으나 국비 지원 등이 순조롭게 이뤄지면서 내년 6월말까지 조기에 사업을 마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 공지천 상류인 춘천한방병원 맞은편에 조성되는 생태공원 3곳(6천㎡)도 내년 6월 2지구 공사와 함께 준공된다.

  ○ 공지천 생태하천 정비사업은 국비 등 250억원이 투입돼 지난해 2월부터 공사에 들어갔다.   

 

 

그제야 저 공사 소음이 뭐 때문인지 확실히 알 것 같더군요. 퇴계천 합류지점에서 공지천간 호안 정비와 자전거 도로 개설 공사, 바로 2지구 공사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지요. 사업명이 분명 생태하천 정비 사업이라고 돼있던데.

 

4.

요즘은 공지천 자전거 도로 겸 산책로엔 많은 사람들이 나옵니다. 이어폰을 낀 젊은이들로부터 나이 드신 노부부까지. 때론 위태위태하기도 하지만 나름 걷는 사람과 자전거가 공존하는. 시민 음악회도 열리기도 하고, ‘많은 시민들이 찾고’ 있는 셈입니다. 하지만 공지천은 ‘밤에 피는 장미’일 뿐입니다. 무슨 말이냐구요. 해가 떠 있는 시간엔 말입니다. 통 사람들 보기가 힘듭니다. 왜 그럴까요. 맞습니다. 해를 피할 만한 곳이 하나도 없기 때문인 게지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무얼 저렇게 파내고, 쌓고 있는 걸까요>

 

그나마 아파트 뒤 베란다로 보이는 곳엔 꽤나 큰 나무들이 있었습니다. 버드나무에 아카시아, 그리고 이름은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아름드리나무들이 자리 잡고 있었던 겁니다. 그나마 땡볕을 가려줄 나무들이 말입니다. 헌데 이 무신 생태하천 공사인지. 그 나무들을 모조리 - 정확히 딱 한 그루만 잘라내지 않았더군요. 하지만 그게 뭐 대수인가요. 이만하면 ‘모조리’이지요 - 베어내 버렸더군요.

 

있던 나무 다 잘라내고 멀쩡한 땅 포클레인으로 뒤집고 돌 쌓는 것이. 그리해서 ‘물가와 둔치가 만나는 경계에 나무로 짠 틀에 돌을 넣어 수생물과 물고기가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식생방틀’을 만드는 게. 뭔 ‘생태계 복원’인지요. 뭐, 그래도 한강에서 물을 끌어다 부어줘야 하는 청계천보다야 낫겠지 싶은 생각도 들지만. 잘 모르겠습니다.

 

5.

언제부터였나요. 어딜 가나 똑같은 모양으로, 똑같은 둔치에 똑같은 자전거 도로. 똑같은 운동시설, 나무 하나 없는 똑같은 생태하천이 생겨난 것이. 가만 생각해보면, 2MB이 대통령이 된 데에는 청계천 복원사업이 일등공신이었다고 하면, 과장된 말이 아니겠지요. 아닐 겁니다. 그래야만 저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하천들이 우후죽순 생기는 걸 이해할 수 있으니까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지 않나요? 무엇이, 무엇이 똑같을까>**

 

 

엊그제 저녁 뉴스를 보니 ‘청계천+20프로젝트’에 선정돼 국비를 지원받고 있는 약사천 복원사업이 우수 사업으로 사례발표까지 했다고 합니다. 뭐, 콘크리트로 덮여있던 하천을 되살린다고 한다는 데야 반대할 사람이 없겠지만. 한강에 청계천에 이제 공지천 공사 모습까지 보고 있으려니, 심히 걱정되는 게. 그래요. 한낮 기우였으면 좋겠네요. 

 

* http://www.chuncheon.go.kr/open_content/open_content_02.asp?MCode=20302 

 **  보도자료에 첨부된 사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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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27 22:45 2010/10/27 22:45
1.
지금은 나잇살도 있고 알 수 없는 맹신으로 몸 관리를 하지 않아 조금만 뛰어도 숨이 차고 땀이 나지만. 그래도 한 때는 이것저것 못하는 운동이 없었던 때가 있었지요. 초등학교 때까진 얼굴이 새카맣게 되도록 성수교 아래에서 야구도 하고. 중학교, 고등학교 땐 일요일 아침마다, 또 수업이 끝나자마자 농구장으로 달려갔고. 대학에 다닐 땐. 큭. 운동이 운동이긴 한데. 뭐, 따지고 보면 달리고 던지고 휘두르고 하니. 뭐, 운동이네요. 하여튼 그랬구요. 대충 이래저래 생각나는 것만 적어도 이만하니. 몸치라는 소리는 듣지 않았던 거죠.
 
한데 지금은. 밭에 가는 길에 그리고 집으로 오면서 왕복 1시간 남짓 자전거를 타는 거 외엔. 딱히 운동이란 걸 하지 않으니. 열심히 밭일해야 할 봄과 여름, 가을은 그래도 몸이 가뿐하고 뱃살도 나오지 않는데. 슬슬 찬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는 계절이 오면. 나름 탄력 있던 몸매가 급격히. 게다가 어느 때부턴가 몸을 움직이는 것보단 눈으로 보는 걸 더 즐기기 시작하니. 처음엔 월드컵이니 WBC만 보던 것이. 지금은 어쩔 땐 새벽 2시, 3시에도 하는 EPL 경기까지 챙겨볼 정도니. 어쩌다 이 지경까지 왔는지.
 
암튼. 예전에도 그랬는데 하도 가끔 보는 거라 인식을 하지 못하고 있었던 건지. 그 많은 운동 경기 중계를 보는데. 이거. 조금 심하다, 싶을 데가 한 두 번이 아니더라구요. 잘 몰라 그런 건데. 원래 운동 경기 중계는 이렇게 하는 건가 싶기도 하지만. 운동 경기가 뭐 이기려고 하는 거긴 하지만. 그리고 응원하는 팀이나 선수가 이기면, 그리고 잘 하면 왠지 기분이 좋기는 하지만. 좀 과장해서 말하면. 운동 경기를 중계하는 게 아니라. 
 
최전방으로 이어지는 패스 하나로 상대방 방어망을 허물어 뜨렸어요”
대포알 슛으로 선취점을 올렸습니다”
“현란한 드리블로 적진 깊숙이 파고들어”
“좌, 우 쌍포를 앞세워 상대편 골망을 초토화시켜합니다”
 
거리낌 없이 군사용어가 튀어나오고, 핏대를 세우며 흥분하는 모습들이. 좀 과장해서 말하면. 마치 전쟁이라도 난 것처럼 난리도 아니더라구요. 그런데 말이지요. 이 정도 멘트는 애교로 봐줄만 하더라구요. 중요한 경기일 경우엔 조금 더 표현이 과격해지는데요. 
 
“팀 홈런 1위 롯데, 쉴 틈 없는 핵폭탄 타선 자랑”
“남자배구, 일본 격파 선봉
“중심타선 맹폭에 미국 무릎!”
“16강 절박, 융단폭격 나선다”
숙적 일본을 상대로 도쿄대첩을 거둔 바 있는 대표팀”
배수진을 치고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싸워야
 
이거야 원. 명량에서 사투를 벌이던 조선 수군이 따로 없고. 황산벌에서 몰살당한 백제 군사들이 따로 없네요. 이 정도면. 그야말로 죽기살기이구요. 선수들은 전쟁터에 나간 병사들입니다.
 
원샷 원킬’. ‘스나이퍼’ ‘산소탱크
‘전차군단’ ‘오렌지군단’ ‘무적함대’ ‘태극전사
 
 
2.
어찌된 일인지 올 해엔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드라마나 영화가 유달리 많이 나오고 있는 듯합니다. 표면적인 이유는 60주년이라서 그런다고들 하는데. 뭐. 운동얘기 하는데서 전쟁하지 못해 안달난 이들까지 들먹일 필요는 없지만. 우연이라고 하기엔 이상하리만치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뭐, 그거야 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김동춘 샘은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가 ‘전쟁이 사회 운영원리로 내재화되고 냉전적 정치경제 질서가 가장 철저하게 착근된 사회’가 됐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 ‘전쟁’ 중인 사회에서 힘없는 민중들은 끊임없이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피난’ 행렬에 나설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피난사회’가 된 것이지요(이전 서평: ‘피난사회’에서 살아남기-<전쟁과 사회>, 김동춘 참고).
 
그리고 조희연 샘은 한국전쟁 이후 철저한 반공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된, 그리고 그것이 정치, 사회 체제를 지배하는 반공규율사회가 됐다고 합니다. 즉 냉전과 내전의 특수한 결합으로 인해 반공이데올로기가 ‘의사합의(pseudo-consensus)’로 내재화된 특유한 우익적 사회라는 겁니다. 이 사회에서 개인 및 집단 간의 사회적 관계와 행위는 철저하게 우익적으로 규정되고, 민중들은 반공의식에 기초한 자기통제 메커니즘이 장착된 일종의 ‘군기(軍紀)’잡힌 병사가 되는 것이지요(<한국의 국가.민주주의.정치변동>, 조희연 참고>.  
 
조금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두 샘 모두 한국전쟁 이후 우리 사회가 북녘과의 전쟁이 아직 끝나지 않은, 준전시체제 속에서 정치, 사회, 문화, 경제가 질식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두 샘이 이렇게 조금은 낯선 말들을 써가며 분석한 책들을 굳이 읽어보지 않았다 해도 말이지요. 지난 60년 간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빨갱이’, ‘반공’ 이데올로기가 결국 이 이상하리만치 호전적인 기질을 만들어 냈다고 하면 비약이 조금 심한 건가요. 그리고 또, 그것이 며칠 전 별 생각 없이 시간이나 때울까 하고 봤던. 학도병을 소재로 한 영화와 겹치면서 이런 질문을 하게 만든다면. 억지 춘향일까요?  
 
“운동선수는 군인인가, 군인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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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23 21:59 2010/09/23 21: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