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사원이 도마에 올랐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난데없이 ‘운하’라니요. 일각에선 눈치 보기 감사다, 감사원을 감사해야 한다, 말도 많고. 지금이라도 사실을 밝혔으니 다행이라는 소리도 있고. 하지만 그러면 뭐합니까.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는 사이 보(洑)는 다 세워졌고 강물은 흐름을 멈췄으니 말입니다. 지금이라도 그게 운하니, 운하가 아니니. 거 봐라 네 말이 틀렸니, 내 말이 맞니 해가며 감사원 탓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냐는 겁니다. 허뚱거리다  死대강이 되고 있으니요. 하지만 이제라도 누가 책임을 져야하긴 하겠는데. 이왕 일이 이렇게 됐으니 한 번 더 삽질? 대운하?, 보(洑) 철거?
 
허뚱거리다 : 중심을 잃고 이리저리 기우뚱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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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24 11:03 2013/07/24 11:03
사용자 삽입 이미지바우길 ⑤ 솔향기 솔솔, 심스테파노길(2012년 10월 20일)
 
버스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다. 태백에서 출발한 기차는 강릉역에 13시 05분 도착한다. 그런데 심스테파노길이 시작되는 명주군왕릉을 가는 버스도 13시 05분에 종점에서 출발하니. 버스를 타야하는 곳까진 걸어서 10분 남짓이지만. 이게 참 애매하다. 종점에서 버스가 여까지  얼마나 걸릴지 종잡을 수 없으니 말이다. 아침나절 부지런히 쌌던 김밥을 두고 오는 통에 어디서 먹을 걸 사야긴 사야겠고.
 
하는 수 없어 택시를 집어타고 정류장에 도착, 근처 편의점에서 김밥과 빵 등등을 사고 보니. 어이쿠, 그새 20분이 다 되간다. 버스 놓친 것 아닌가, 발을 동동 구르는데. 가는 날이 장날이라 했나. 하는 줄도 몰랐던 세계무형문화축전 덕에 버스가 늦게 도착, 겨우 탈 수 있다. 뭐, 또 그 덕에 길이 막히기도 했고, 돌아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버스를 놓쳤다면 천상 다음 차를 타야 하는데, 그랬다간 해가 꼴딱 다 넘어간 후에야 위촌리에 도착했을 거고. 나오는 버스도 한 시간 넘게 더 기다려야 하고, 줄줄이 시간이 뒤로 밀리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탔어야 했으니 참 다행이지, 싶고. 이번도 이번이지만 다음번도 시간 맞추기가 쉽지 않으니. 이래저래 꼼꼼히 준비해야겠단 생각이 다시 든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기차 안에선 흐렸던 날씨가 군왕릉에 도착하니 맑게 개었고. 뒷자리에 앉아 눈치 보며 허겁지겁 먹긴 했어도. 김밥에 빵까지 든든히 먹었더니 힘도 나고. 10구간과 4구간 갈림길부터 시작되는 푹신한 솦 숲길에선 솔솔, 솔향기 그득하고. 땀이 채 나기도 전에 시원한 바람이 뒷목을 간질간질. 아까까지 조마조마했던 마음이 싹 날아간다. 또 강릉휴게소에서 잠깐 쉬었다 다시 시작된 솔 숲 길 임도, 멀리 동해바다와 강릉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솔바위까지 내처 걸으니. 바우길, 참 좋다.
 
4구간처럼 거꾸로 걸었다면 엄두도 나지 못했을 가파른 내리막길을 로프를 잡고 한참을 내려올 땐 이거 만만치 않은데, 하다가도. 법륜사를 지나 다시 시작된 동네 뒷산 길 같은 산길이 다시 이어지고. 심스테파노가 숨어 지냈다던 골아우 마을을 지나는 동안 멀리 바다가 보일 듯 말듯. 길 가에 바짝 붙여 묶어둔 산만한 개 두 마리에 오금이 다 저리다가. 오랜만에 재미없는 아스팔트 길과 눈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송전탑과 고속도로 교각들을 지나고 난  끝, 송양초교까지 내처 쉬지 않고 걸으니. 다리는 조금 찌릿찌릿, 해는 뉘엿뉘엿, 버스 타는 곳은 또 어딜까 마음은 조마조마.     
 
11km로 비교적 짧은 거리지만, 바우길이 가진 재미를 온전히 다 갖고 있는 솔향기 솔솔, 심스테파노길. 그 길을 어느 가을, 맑고 바람 부는 날 그렇게 온전히 다 걸어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심스테파노길:
바우길을 탐사하던 중 구한말 병인박해 때 심스테파노라는 신자가 포도청 포졸에게 잡혀가 순교한 골아우라는 마을을 찾았다고 합니다. 해서 탐사대는 이 마을을 심스테파노 마을이라 부르고, 길 이름도 심스테파노길이라 지었답니다.  
 
* 열한 번 째 여행에서 걸은 길
바우길 10구간 심스테파노길 11km를 걷는데 3시간 30분 정도 걸렸다.   
 
* 가고, 오고
바우길 어느 구간이나 들머리, 날머리 모두 버스가 있지만 시간 맞추기가 까다롭다. 미리 시간을 확인하는 건 당연하고 10분 정도는 일찍 정류장에 도착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자칫 시간에 못 맞추면 택시를 부르거나 다음 버스가 올 때까지 한참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 잠잘 곳
10구간은 짧은 구간이기 때문에 따로 잠잘 곳을 정하지 않아도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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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14 11:00 2013/07/14 11:00
사용자 삽입 이미지1.
백주대낮, 한 청년이 쇠파이프에 맞아 죽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백골단이 공권력이라는 이름으로 휘두른 흉기에 말이지요. 그리고 곧 이를 항의하는 시위가 연일 열렸습니다. 대학가는 물론이고 전국 시내 곳곳에서 사람들이 모여 책임자를 처벌하고 전경과 백골단을 해체하라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하지만 당시 권력의 최정점에 있었던 노태우는 상황을 모면하려는 꼼수들만 내놓았습니다. 아니, 구속 중이었던 노동조합 위원장이 의문사를 당하고 시위에 참여했던 한 여학생이 폭력적인 진압에 질식사하는 일이 발생할 만큼 폭력을 숨기지 않았지요. 사람들은 권력이 자행하는 포악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리고는 자기 몸을 내던지는, 분신이라는 극한 저항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학생, 빈민, 노동자, 무려 11명이나 되는 열사가 생겨난 것입니다. 
 
2.
정권이 저지른 폭력에 희생당한 청년은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한 새내기였습니다. 4월 26일이 그가 죽은 날이니 불과 3개월 남짓 대학생활을 한 것이지요. 그 때문에 이런 말들도 나돌았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가 선배들 손에 이끌려 시위에 나갔다 참변을 당한 것이라고. 하지만 그 91학번 신입생은 “좋은 책을 읽어야 해. 자본가의 입장에서 쓴 경제학 서적보다는 일한 만큼 제 임금을 받지 못하고, 억압받는 노동자의 입장에서 쓴 책이 민중을 대변하는 올바른 책이지”(p.132)라고 말할 만큼 생각이 깊은 학생이었습니다. 또 2주에 한 번씩 열리는 독서토론회에 빠지는 법이 없었고 모르는 것이 생기면 알 때까지 선배들을 쫓아다니는 열정적인 후배였습니다. 백골단에 맞아죽던 날도 그랬습니다. 맨 선두에서 싸우고 있던 선배들이 곤경에 빠지자 이를 알리기 위해 최루가스가 자욱한 그 선두로 뛰었던 것입니다.
 
3.
김지하라는 사람이 “죽음의 찬미를 중지하라. 그리고 그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라며 호통을 쳤습니다. 이어 박홍이란 사람은 “어둠의 세력이 있다. 죽음의 블랙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며 곧 있을 조작 사건을 예고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요. 분신배후설을 흘리던 검찰이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을 만들어냈습니다. 김동길이란 이는 화염병을 던지는 것이 정당화되면서 최루탄은 불법이라는 논리는 맞지 않다고 정부 편을 들고 나섰고, 김수환 추기경은 첫 사무 활동을 시작한 진주에서 달걀 세례를 받게 되는 말을 했습니다. “국가가 흔들리는 일이 없도록 자제해야 할 것” 조선일보는 한 술 더 떴습니다. 연일 국민의 냉담을 조성하는 기사를 써내려갔으며 강경 진압을 요구했던 것이지요. 후에 이들은 5적이라 불리게 되지만, 5월 투쟁은 이들로 인해 급격히 사그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물론 뒤이어 총리에 오른, 아니 총리 서리였던 정원식이 밀가루를 뒤집어쓰는 극적 효과까지 있었지만 말입니다.         
 
4.
그리 먼 일도 아닙니다. 지금은 백골단은커녕 최루탄도 보기 힘드니 오래된 것처럼 보이지만 말입니다. 또 아주 가끔씩 텔레비전을 통해 먼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대규모 시위와 최루가스, 물대포를 보면서 아직도 저런 나라가 있나, 싶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그 5월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많아 보이지 않습니다. 아니 할 수만 있다면 그 거리를, 그 함성을  지우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이전 87년 6월 항쟁과는 달리 철저히 패배한 싸움으로 끝난 것처럼 보여서입니다. 그리고 91년과 92년 사이를 두고 사회운동세력들은, 특히나 학생운동진영은 커다란 내적 변화를 겪게 된 것도 그렇습니다. 그래서일까요. 10년이 지난 후에 나왔던 그 긴 제목의 책, <그러나 지난 밤 꿈속에서 이 친구들이 나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1991년 5월>이라는 책과 여기 이 책. <1991년 ‘5월 투쟁’의 꽃, 강경대 평전>은 한동안 가슴에 남아 있을 것만 같습니다. 그것은 이 책들이 그저 그런 과거를  단순히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꿈속에서’만 나오던 청년들, 빈민들 노동자들, 가슴 깊은 곳에 가라앉은 사랑과 투쟁, 희망을 살려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위로받지 못한 지난 아픈 상처를 보듬어 감싸주기 때문입니다. 그때 그대들은 참으로 아름다웠다고 말하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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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7/05 15:15 2013/07/05 15:15
사용자 삽입 이미지세계사에서 ‘아나키즘’이 조명을 받았던 적은 많지 않습니다. 고작해야 ‘파리코뮨’ 정도지요.  하지만 ‘아나키즘’은 진보를 향한 투쟁이 있던 곳이라면 어디에서나 그 자취를 찾을 수 있습니다. ‘스페인 내전’이 그러하고 ‘러시아 혁명’도 그렇습니다. 가깝게는 ‘5.18 광주’에서도 공동체와 자율이라는 이상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렇듯 ‘아나키즘’은 사상사적으로 보나 역사적으로 보나 중요한 사상(思想)이자 원동력임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에서 ‘아나키즘’은 ‘무정부주의’ 혹은 ‘무질서주의’ 정도로만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 ‘협동조합’이 각광을 받으며 ‘열풍’이 부는데 비하면 거의 푸대접에 가까운 상황인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이전에도 ‘풀뿌리는 느리게 질주한다’, ‘아나키스트의 초상’등을 쓰며 ‘아나키즘’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던 하승우가 쓴 ‘세계를 뒤 흔단 상호부조론’은 지금 시점에서 꼭 봐야할 책이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말로 ‘상호부조론’이라고 알려진 크로포트킨의 ‘Mutual Aid: A Factor of Evolution’이란 책이 어떤 배경에서 쓰여 졌고, 어떤 내용을 담고 있으며, 당대에 그리고 또 후대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풀어 쓰는 방법을 통해서 ‘아니키즘’의 역사와 내용, 유산을 간결하게 정리했으니 말입니다. 또 이회영과 신채호 등 우리 역사 속에서 찾아볼 수 있는 ‘아나키스트’들을 만날 수도 있고, 무한경쟁에 내몰린 우리 사회를 되돌아 볼 수 있게 만드니 더욱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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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28 09:40 2013/06/28 09:40

또 ‘빨갱이’ 타령입니다. 물론 이번엔 직접적으로 ‘빨갱이’라 하지 않았지요. 다만 ‘운동권’ 출신, 그것도 ‘부총학생회장을 지낸 PD계열 인물’이라고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합니다. 곧이어 조.중.동을 위시해 앞 다퉈 옮기며 물 타기를 할 게 뻔하니까요. 아니, 이미 시작됐습니다. ‘주임검사’와 ‘운동권’으로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벌써 여기저기서 기사들이 올라오고 있으니요. 한쪽에선 ‘언쟁’이니 ‘감정싸움’이니 하며 국회 내 공방을 전달하는 척하면서. 또 한쪽에선 본격적으로 ‘운동권’ 검사에 대한 이력을 세세히 소개하면서 말입니다.

 

사실 새누리당이나 조.중.동.일베 등으로 대표되는 보수들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게 한, 두 번도 아니라 새삼스럽지도 않지만. 문제는 건건이 다 통하고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대응할 만한 가치도 없다는 얘긴 하나마나한 소리고. 전형적인 ‘물 타기’라고 길길이 날뛰며 목소리만 높이는 것도 역시 하나마나한 대응입니다. 그래봐야 ‘좌파’, ‘운동권’, ‘진보’라는 말이 ‘빨갱이’와 자동 연상되는 걸 바꿀 수도 없고. ‘빨갱이’ 소리만 들어도 움츠러들고 목소리가 작아지는 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요. 또 엊그제 아침, 용어 혼란으로 생긴 문제를 가지고 호들갑을 떨며 “교육현장의 역사 왜곡을 바로잡겠다.”는 대통령의 생각도 바뀌는 게 아니까요.

 

김동춘 교수(성공회대 사회학과)는 한국전쟁이 우리 사회에 남긴 유산(遺産)으로 ‘전쟁이 사회 운영원리로 내재화되고 냉전적 정치경제 질서가 가장 철저하게 착근된 사회’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 사회는 여전히 ‘전쟁’중이라는 건데요. 여기서 논의를 더 진전시켜 이런 질문을 던져본다면 말입니다. 예컨대 우리는 이 ‘전쟁’을 누구와의 ‘전쟁’으로 기억하고 있는지, 또 바라보고 있는 지를 묻는다면. 맞습니다. 바로 이 질문에 대한 답이야말로 ‘빨갱이’면 다 통하는 우리 현실을 온전히 드러내 줍니다. 아직도 ‘빨갱이’와 ‘전쟁’을 하고 있는 마당이니요. ‘적’으로 간주된 이는 ‘사살’되거나 ‘포로’로써 무장해제를 당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또 힘없는 민중들은 정처 없이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다는 얘깁니다.  

 

북쪽이 대화를 제의하면서 남.북간 막혔던 통로가 열리는 가 싶었는데. ‘격’이 맞아야 대화를 할 수 있다는 남쪽 주장으로 분위기가 다시 가라앉았습니다. 6.15 행사는 반쪽행사로 끝났고, 북미 고위급회담도 ‘선(先)비핵화 조치’라는 압력에 막혀버렸습니다. 지난 ‘잃어버린 10년’을 돌이켜보면 한, 두 번 접촉으로 화해무드가 조성될 리가 없을 겁니다. 또 5.18 당시 ‘북한군이 침투’했다는 말을 공공연히 하는 마당에. 북쪽을 대화 상대자로 인정하는 것 또한 쉽진 않을 겁니다. 더구나 한반도는 여전히 ‘전쟁’상태인데다, 자국민마저 여차하면 ‘빨갱이’로 몰아세우는 판이니 말입니다.    

 

정연주 전 KBS사장은 <작은책>에서 행한 강연에는 37이라는 숫자를 반복해서 얘기했습니다. 지난 대선과 총선, 여론조사 결과 등등. 정 전 사장에 따르면 이 37이라는 숫자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37은 우리 사회에서 흔들리지 않는 ‘뿌리 깊은’ 보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숫자인 겁니다. 진보는 ‘빨갱이’인 셈이고, ‘빨갱이’는 곧 ‘종북세력’이며, ‘좌파’와도 한 몸, ‘운동권’, ‘전교조’, ‘민주노총’은 물론 ‘민주당’까지도 관련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인 겁니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 이후 지난 반세기 동안 ‘포로’로써 무장해제를 당한 사람들인 것이지요. 여기에 ‘피난’ 떠나는 사람들까지 합하면. 맞습니다. 결코 이기기 쉽지 않습니다.  

 

‘핵’을 앞세운 카드를 만지작, 만지작하는 북쪽을 두둔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습니다. 다른 것도 아니고 ‘핵’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파멸을 초래할 무기로 현 상황을 돌파하겠다는 생각은 결코 도움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한반도 평화는 물론이고 급격한 우경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일본과 미국에 견줄만한 군사력을 갖추기 위해 군비 증강에 나서고 있는 중국 등 동북아지역을 놓고 봤을 때도 그렇습니다. 하지만 벼랑 끝에 내몰린 초등학교 학생에게 헤비급 권투선수가 나서 한판 붙자고 하는 건 해결책이 될 수 없습니다. 고양이가 쥐를 몰 때도 도망갈 곳은 만들어놔야 한다는 말처럼. 마냥 몰아세워서는 일이 되질 않기 때문입니다. 

 

‘빨갱이’에 ‘빨’만 나와도 눈치를 봐야 하는 사회입니다. 아니 너도나도 손가락질이라 해야 살아남는 요상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정부를 향해 이제 그만 이 ‘전쟁’을 끝내자고 말하는 건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럴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가면서 할 말은 해야 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행동도 해야 합니다.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라는 가치를 확고히 하면서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당장 실현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바꾸고 북.미간 국교도 정상화해야 합니다. 한반도, 아니 동북아 평화공동체 구성을 위한 논의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하고, 발전소를 포함한 모든 ‘핵’을 동북아에서 제거하는 일도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들이야말로 ‘빨갱이’ 콤플렉스에 빠진 우리 사회를, 여전히 ‘피난’을 떠날 수밖에 없는 우리 국민들을 ‘민주주의’의 장으로, ‘평화’의 장으로 건져내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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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8 16:29 2013/06/18 1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