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3월 11일(월) 맑음
 
한옥학교 첫날. 설렘 반, 두려움 반. 시간이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겠다. 오랫동안 혼자 시간을 보낸 데다 이제껏 해오던 일과는 전혀 다른 일을 하는 것이기에 그랬을까. 고용센터에서 계좌제 카드를 받고는 학교에 두 번이나 방문하면서 나름 준비를 한다고 했는데도 그랬다. 그래도 자기소개 시간엔 평소 생각했던, 그리고 꿈꿔왔던 일을 동기들 앞에 다짐도 했고. 점심 먹을 때 서울에서 왔다는 한 동기와도 말을 트기까지 했으니. 절반은 성공한 셈.
 
게다가 “공포스럽지 않으세요?”라며 재미나게 ‘공포’를 설명하는 샘. 가만히 있어도 대목 포스가 풍기는 샘. 아마 한옥을 스케치업 프로그램을 이용해 설계를 하는 유일한 사람일 것 같은 샘까지. 짜임새 있게 꾸려진 교수진에, 60대 어르신부터 20대 젊은이들까지 다양한 연령층에 직업을 가졌던 이들이 한데 어우러진 동기들이 30여명이나 있으니. 나머지 절반도 성공할 것 같은 예감이다.
 
다만 11기까지 배출했다고는 하지만. 강의시간에 울려대는 학교 전화 벨 소리와 조금은 두서없이 진행되는 이론 교육 시간이. 어딘지 모르게 어설프기도 하고 안정적이지 않은 게 조금은 걱정이 되고. 또 점심은 각자 해결해야 하는데다 학교 청소에 커피 구입까지 학생들이 해야 한다는 게 조금은 성에 안 차지만.
 
이왕 시작했으니. 아침 6시부터 부산을 떠느라 점심 먹고 나면 급격히 졸리고 피곤해 집중력이 떨어지기도 하지만. 3개월. 정신력으로 버티고 하나하나 배워나가면. 동기들 앞에 다짐했던 일을 몇 년 안에 할 수 있을 터이니. 함 한 번 해보자.
 
* 기둥과 기둥 사이의 거리: 9자 내외, 기둥 굵기: 1/10, 즉 9치(5자→5치, 9자→9치)
* 추녀: 서까래 크기의 1.5배
* 대보: 전면 처마도리에서 후면 처마도리까지 거리의 1/10
* 연골벽(당골): 서까래 간격. 4치(아무리 굵어도 4치), 가장 굵은 것 8치, 간격은 4치
* 보의 굵기: 기둥과 기둥 사이의 1/12~1/10(집의 길이)
 
 
3월 12일(화) 맑음
 
어제에 이어 오늘도 하루 종일 강의실에서 이론 강의가 진행됐다. 파릇파릇한 젊은 친구들도 오후가 되니 슬슬 풀어지는데. 50, 60 되신 분들은 어쩔까. 꾸벅꾸벅 조는 건 기본, 쉬는 시간도 5분 늘었다. 하기야 앉아서 하는 일이라면 자신 있었건만. 순간순간 멍하니 있을 때도 늘고, 좀이 쑤셔 몸을 뒤척뒤척, 목을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고. 안간힘을 써 봐도 4시부턴 시계만 보게 되는데.
 
아무리 생소한 용어들이 끊임없이 튀어나오고. 익숙하지 않은 척도법이 나오는 게. 귀에 잘 안 들어오겠기도 하겠지만. 눈이 오면서부터 그만 둔 운동부족에서 오는 체력 저하 때문인 듯. 마음도 피곤하고 몸도 피곤하지만 주말부턴, 아니 오늘 저녁부터라도 조금씩 몸을 움직여야겠단 생각이 든다. 터미널에서 학교까지 왕복 자전거야 겨우 20분 남짓이니 운동이라 말할 것도 아니니.        
 
* 전체 건축물 중 목조 건축은 1%, 목조 건축 중 한옥은 10%
* 20평 형 규모 한옥: 약 1만 2천 재(1재: 1치(3cm)×1치(3cm)×12자(3.6m))
* 원목의 크기 측정 / 길이 측정
크기: 말구(짧은 쪽)의 직경
길이: 원구 쪽의 짧은 쪽에서 말구 쪽의 짧은 쪽까지의 길이
* 물매: 지부의 낙수면이 이루어지는 비탈진 경사도(흘림)
싸다: 급한 경사도
뜨다: 완만한 경사도
 
 
3월 13일(수) 눈, 비
 
회장과 총무도 뽑고 4인 1조, 총 7조로 나누고 나니 자리가 잡히는 듯하다.
 
또래 끼리나 같은 숙소를 쓰는 사람들로 자연스레 모이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하곤 여전히 서먹서먹했었는데.
 
임원진 선출하고 건의사항도 하나씩 정리하고. 필요한 물품 목록도 만들고 연락망도 파악하고. 학교 여기저기 청소할 순번도 정하고.
 
이틀간 앉은자리에서 강의만 듣다 이런저런 말들도 하고 또 의견들도 내놓고 하니.
 
어딘지 모르게 그새 친해진 것 듯.
 
다음 주부턴 본격적으로 실습에 들어갈 예정이니 서두를 필요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만치라도 자리를 잡아야 순조롭게 일정을 소화할 수 있으니.
 
늦지 않게 딱 맞춰 일이 진행 것 같아 다행이다. 
 
* 장혀: 민도리집의 경우 장혀가 없는 경우도 있다. 비교적 작은 규모의 경우 하중이 적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모가 큰 경우 보의 굵기나 크기, 간격 등이 넓고 크기 때문에 도리 만으로는 하중을 견디기 어려우므로 장혀를 넣는다. 장혀의 두께는 벽을 어느 정도의 두께로 할 것인가에 따라 영향을 받는다.
* 처마곡이 있다 하더라도 빗방울은 기와골을 따라 흐르므로 가운데로 모이지 않는다.
*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대패는 몸 쪽으로 당겨서 사용하는 일본식임.
* 대패에서 중요한 것은 대패 몸체이며, 그 다음 덧날, 날이 잘 들고 안 들고는 그 다음.
* 본날과 덧날을 다 갈아 겹쳐 놓고 봤을 때 빛이 들어오면 대패 시 밥이 엉켜서 나오지 않는다.
* 창대패: 본날만 있는 대패로 매끈하지 않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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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월 14일(목) 맑음

 
역시 이론과 실제는 많이 달랐다. 어제 오후부터 오늘 오전까지 꽤나 많은 시간을 대패에 대해 배웠는데 막상 오후 실습 시간이 되니. 전 선생님이 나서지 않으면 도무지 진도가 나가질 않는다. 물론 배운 만큼, 아니 그 보다 앞서가는 사람도 있지만. 또 주문받아 온 대패에 문제가 좀 있기도 했지만.
 
선생님 손을 거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이 확연히 다르니. 아무래도 이러다간 선생님이 무지 바빠질 듯하다. 더구나 사람이 많아서인지. 분명 하지 말라고 했는데도 먼저 시작하는 사람. 이렇게 하라고 했는데 저렇게 하는 사람. 정해진 수업 시간이 애매해지니 아무렇게 누군 쉬고 누군 하던 거 하고. 대패 하나가지고 이러니 원형톱이니 전기톱 가지고 하는 실습에 어쩔까 걱정도 된다.
 
아무래도 선생님 말로는 일주일을 꼬박 대패날만 갈아야 하는 곳도 있다던데. 그만큼은 아니라도 대패 하나만 가지고도 며칠은 꼬박 연습도 해야겠고, 더 배우고 혼도 나야겠지 싶은데. 가만 보니 학교장도 그렇고 선생님들도 그렇고. 너무 무른 게, 일을 이렇게 만드는 것 같기도 싶다. 물론 영 손재주 없는 사람들이 더디게 만드는 것도 있고.
 
* 대패질 요령:
① 원구 쪽을 앞쪽으로 말구 쪽을 뒤쪽으로 놓는다.
② 부재와 몸을 평행하게 한다.
③ 말구 쪽부터 시작해서 원구 쪽으로 해나간다.
 - 대패질을 처음 시작할 때 생기는 자국을 지워 마감하는데 용이함
④ 대패가 끝나는 부분은 옆구리에 오게 한다.
⑤ 몸을 굽힘과 동시에 팔을 뻗고 당기면서 몸을 같이 움직인다.
* 곡척: 우리나라는 공식적으로는 곡척법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일본에서 만든 것을 사용.
* 장척: 긴 부재의 치목 시 유용하게 사용됨.
* 이동스퀘어: 깎아낸 홈이 직각을 이루는 지 확인 하는 데 쓰이며 45° 각을 그리는데 유용하게 사용.
* 자유자: 자유롭게 각도를 잡을 수 있어 선자서까래 치목 시 거의 필수적으로 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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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5일(금) 맑음

 
오전 실습 시간엔 대나무를 쪼개 먹칼을 만들었다. 보기엔 별 거 아닌 것처럼 보여도. 대나무의 단단한 쪽을 가늘게 대패질을 해야 하는데다. 가늘게 쪼개는 데 쓰이는 도구 명칭이 정확히 뭔지 모르겠지만. 끌로 최대한 가늘게 쪼개기 위해 눈을 크게 부릅뜨고 신중히 작업을 해야 한다. 거기에 다시 끌로 둥글게 마무리 작업을 해야 하는데 이게 또 대패날 세우는 것 마냥 쉽질 않다. 결국 한 사람 당 2개의 먹칼 만들고 나니 먹줄 놓기는, 전 선생님 시범만 보고 실습은 진행하지 못했다.
 
오후엔 스케치업 강의가 진행됐다. 이미 동영상 강의를 들은 사람들은 능숙하게 강의를 따라가지만. 나이가 좀 들어 컴퓨터에 능숙하지 못하거나. 미처 강의를 듣지 못한 사람들은 좀체 진도가 나가질 못한다. 가뜩이나 익숙지 않은 프로그램을 쓰는 데다 잠깐이라도 한눈을 팔기만 해도. 어김없이 다음 일을 진행하지 못한다. 한두 번 그렇게 되다보면 결국. 손을 놓고 강의만 듣는 상태가 된다. 아니면 강의와 상관없이 동영상 강의를 듣거나. 아무래도 강의 속도가 너무 빠르지 않나 싶다. 강의를 하는 입장에선 최대한 쉽고 천천히 한다 해도. 처음 스케치업을 접한 사람으로선 쉽지 않으니. 물론 그렇다고 가장 늦게 이해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하잔 건 아니다. 하지만 최소 절반 이상은 이해하고 따라 할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어쩔 수 없다. 주말에 동영상 강의를 들으며 보충해야지.
 
* 먹칼 만들기
: 대패로 3mm가 되도록 깎아낸 후 끌로 처음 1mm, 이후 최대한 얇게(약0.5mm 내외) 쪼갠다. 마지막으로 끌을 이용해 쪼갠 부분을 둥글게 다듬는다. 
 
* 먹줄 놓기: 7치로 깎기
① 좁은 쪽은 중심에 맞춘다.
② 넓은 쪽은 나무가 들어가고 나온 상태를 잘 살펴보고 들어간 곳을 염두에 놓고 줄을 맞춘다.
③ 수평계를 이용해 수직선을 긋는다.
④ 나온 쪽을 먼저 3치 5푼을 잡고, 들어간 쪽도 3치 5푼을 잡는다.
⑤ 반대쪽은 나온 쪽을 조금 희생하더라도 들어간 쪽을 먼저 3치 5푼 잡다.
⑥ 먹줄을 놓을 때 나온 쪽 모자란 부분은 각대를 대고 3치 5푼을 맞춘다.
⑦ 양쪽 먹선을 이어 먹줄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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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17 16:49 2013/03/17 16:49
사용자 삽입 이미지1894년 고부에서 일어난 봉기를 시작으로 ‘척왜척양(斥倭斥洋)’, ‘보국안민(輔國安民)’ 기치를 든 일련의 사건들을 일컬어 보통은 ‘동학농민운동’ 혹은 ‘동학농민혁명’이라고 합니다. 교과서에도 그렇게 쓰여 있고 그 발자취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곳들도 대게는 이를 차용해 이름이 붙었으니 그렇습니다.
 
하지만 작가 박태원은 <갑오농민전쟁>이란 이름을 붙였더랬습니다. 눈이 멀고 몸이 굳어지는 와중에도 끝내 마무리를 한 동명(同名)의 장편역사소설에서 말입니다. 한편에선 이를 두고 사회주의에 토대를 둔 작가의 이념이 투영된 것이라고들 하지만. 지금은 많은 이들이 이 명칭을 쓰기도 하니 이런 얘기들은 흘려들어도 될 만합니다.
 
또 ‘동학농민운동’이나 ‘동학농민전쟁’이라고 한다면. 자칫 ‘동학(東學)’이라는 특정 종교와 이를 따르는 도인(道人)들이 일을 일으킨 것으로 한정되는 측면이 있으니. 갑오년(甲午年)이라는 특정 시간대를 두고 이름을 붙이는 게 좋을 듯싶기도 합니다. 또 당시 무장봉기를 일으켰던 이들을 두고 농민군(農民軍)이라 불렀으니 당연히 이 또한 이름에 넣어야 할 것이구요. 마지막으로 봉건 잔재를 일소하는 일대 사회변혁의 사상은 물론 일본 제국주의와의 피할 수 없는 싸움까지 내포하고 있었으니 ‘전쟁’이 아니 붙을 수 없으니. 어찌 보면 ‘갑오농민전쟁’이 맞을 듯싶습니다.
 
다만 이제껏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으로만 불렸던 이유가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물론 봉기를 주도했던 이들 가운데 많은 이들이 동학(東學)의 접주(接主)였고 또 도인(道人)들이 많이 참여를 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그 후 극심한 탄압으로 동학(東學)은 그 세(勢)가 거의 없어져 명맥이 끊겼으니 굳이 이를 고수하려는 이들이 많지 않았을 터인데 말이지요.
 
아무튼 북으로 갔지만 남로당계열로 숙청된 데다 구술(口述)에 의존해 마무리 지었다는 <갑오농민전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또 다른 월북작가 홍명희가 쓴 <임꺽정>과 더불어 최고 역사장편소설임에는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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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2 17:39 2013/02/22 17:39
정부가 주택용 전기 요금 누진제를 완화하겠다고 합니다. 애초 서민 부담은 줄이면서 전기를 아끼자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던 것인데. 이제와 거꾸로 가는 정책을 내놨으니. 여기저기서 “또 당했다”란 말이 나오는 게 당연한 듯합니다.
 
해서 지식경제부가 외국의 경우를 들면서 물타기를 하려는 것 같은데. 들리는 얘기로는 어찌됐건 지금까지 전기를 적게 썼던 가구가 피해를 보게 되는 건 피할 수 없어 보입니다. 어떤 경우든 전기를 적게 쓰는 집은 부담이 늘고 물 쓰듯 하는 집에선 보다 큰 혜택을 보게 되니까요.
 
결국 몇 년 전 전력 직접구매대상 제한제도 폐지라는 꼼수를 써가며 전기 많이 쓰는 이들에게 선물을 주려했던 것까지 따져보면. 지난 ‘잃어버린 10년’이란 게 결국 이런 거 였구나, 또 깨닫게 됩니다.
 
더구나 작년 여름부터 올 겨울 내내 ‘블랙아웃’이니 어쩌니 했던 호들갑도. 오는 2027년까지 전력 공급을 1억 3천만kW로 늘린다고 하는 공급위주 정책도. 결국 돈 없는 사람들이 허리띠를 졸라매면 아무 문제없다, 이런 심보인 거 같아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사실 전기 값이 원가에도 못 미치는 만큼 싼 가격에 공급이 되다보니 큰 부담 없이 사용하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해서 요금을 올려 사용량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는 건 맞는 방향입니다. 하지만 재벌기업 발전소에는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면서도 산업용 전기는 현실화할 생각도 없으면서. 한 달 전기 값 1, 2만원이 없어 냉골 바닥에서 잠을 자는 사람들 보고 지금보다 더 내라하고. 조금만 더워도 에어컨 틀고, 또 조금 춥다고 난방기 돌려쓰는 사람들은 깎아주는 꼴이니.  
 
이래서야 이거 어디 전기 소비량이 줄기나 하겠습니까. 되레 ‘블랙아웃’을 부르지나 않으면 다행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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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13 16:44 2013/02/13 16:44

사용자 삽입 이미지1. 미완(未完)

『임꺽정(林巨正)』은 다 써진 얘기가 아닙니다. 마지막 <자모산성> 편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제 막 얘기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끝이 나고 있는데다, 임꺽정이 구월산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맞습니다. 단행본으로 10권에 달하는데 아직 못한 얘기가 남아 있다니. 홍명희가 건강상 문제가 없었다면. 또 1940년대라는 일제말기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다면(홍명희는 1930년대 들어 문학을 통해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가려고 했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민족해방이 점차 요원해지는 1940년대가 되자 붓을 들기가 쉽지 않았던 듯합니다. 게다가 관군에 쫓겨 구월산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 임꺽정을, 우리 민중의 영웅의 최후를 쓴 다는 것은 더욱 그러했겠지요.). 문학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출판사상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장편역사소설이 됐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임꺽정에 비견할만한 역사소설은 흔치 않지만 말입니다.
 
2. 사회주의(社會主義)
식민지시기에 근대장편역사소설상 기념비적인 작품, 『임꺽정』을 쓴 벽초(碧初)는 작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운동가에 더 가까웠습니다. 3.1운동 당시 고향인 괴산에서 만세 시위를 모의, 조직,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말에서 30년 대, 식민지시기에 최대 민족운동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 결성과 운영을 주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요. 게다가 토오꾜오 유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던 홍명희는 3.1운동 이후 신사상연구회, 화요회, 정우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조봉암, 박헌영, 김단야 등과 같이 해외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학습한 이들과 같이 말입니다. 또 홍명희는 당시 문단에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와도 관련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선배로 대접받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임꺽정』을 쓰지도 않았던 때인데 말입니다. 해방 후 홍명희는 1947년 남북연석회의 참가 차 평양에 갔다 다시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이후 북에서 내각 부수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후 1968년에 죽습니다.    
 
3. 기필(起筆)
『임꺽정』이 처음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은 1928년입니다. 이해 11월 21일부터 이듬해 12월 26일까지 모두 300여회에 걸쳐 연재된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은 『임꺽정전』이라는 제목이었지요(당시 동아일보에는 이광수의 역사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가 연재되고 있었으니 후에 친일로 돌아선 이광수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후 『임꺽정』은 홍명희가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검거, 구속되거나 어려서부터 유달리 병약했던 탓에 병고에 시달리면서 휴재와 연재를 거듭합니다. 2차 연재는 1932년 12월 1일부터 1934년 9월 4일까지, 3차 연재는 1934년 9월 15일부터 1935년 12월 24일까지, 4차 연재는 1937년 12월 2일부터 1939년 7월 4일까지 말입니다. 그러다 조선일보사가 강제 폐간이 된 후인 1940년, 「조광」이라는 잡지 10월 호에 「화적편」, ‘자모산성’장의 일부가 실린 것을 마지막으로 연재가 중단되고 맙니다.    
 
4. 민중사(民衆史)
『임꺽정)』에는 조선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매우 세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개성 뚜렷한 등장인물들과 사실적인 배경 설명,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넘나들면서 전개되는 줄거리, 그리고 이들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지고 있는 우리말의 향연. 적어도 이런 점들이 이 소설을 근대역사장편소설 가운데 최고로 꼽는 요인들일 것입니다. 이는 벽초가 『임꺽정』이 연재되기 시작한 시기 조선어와 조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추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구요. 다른 한편으론 철저히 현실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문학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프로문학에 대한 반성적 글쓰기를 몸소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민족․민중 문학, 리얼리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직접 글로써 보여준 것이지요.      
 
5. 임꺽정(林巨正)
제4차 연재가 중단된 직후인 1939년에 단행본 『임꺽정』 제1권이 출간됩니다. 이때에는 전8권으로 임꺽정을 출간할 예정이었는데요. 11월에 2권이, 12월 3권, 이듬해 2월 4권이 각각 나오게 되지만 5권에 실릴 예정이었던 <화적편>을 비롯해 <봉단편>, <갖바치편>, <양반편>은 간행되지 못합니다. 그러다 해방 후,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임꺽정』 전6권을 차례로 펴내게 되는데요. 이때 나온 『임꺽정』은 일제 강점기에 출간됐었던 초판 4권을 6권으로 읽기 좋게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에 맞춰 홍명희도 『임꺽정』을 완결하고 기왕에 나와 있던 것들도 수정하려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가 차 북에 갔던 홍명희가 그곳에 남게 됨에 따라 끝내 이루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후 『임꺽정』은 남쪽에선 금서가 됐고. 19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될 때까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6. 일일일독(一日一讀)
분량으로 치자면, 다 마치지 못한 얘기들까지 넣지 않더라도. 일단 권수가 10권이고 각권이 300페이지 내외이니 장편소설 치고도 꽤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 보면 사설과 같아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봉단편>만 해도 한권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족히 보름이나 한 달은 잡아야 다 읽을 수 있을 터인데. 워낙에 나오는 사람도 다양하고 여기저기 동네 이름도 많으니. 그렇게 길게 잡고 읽으면 자꾸 앞쪽을 들추게 돼 되레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고. 아예 책을 잡으면 하루 한 권은 읽는다, 마음먹어야 할 겝니다. 또 빈 종이에 등장인물들을 쭉 적어 놓고 가계도(家系圖)도 그려가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짧은 시간에 책을 다 읽을 수 있을뿐더러. 나중에 그게 누구지? 라며 헛갈리지 않거든요. 하지만 뭐, 책이 워낙에 야무지게 재밌고 짜임새가 있으니 그냥 봐도 별 상관은 없지만 말입니다. 
 
* 이 글은 강영주가 쓰고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벽초 홍명희 연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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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7 01:26 2013/02/07 01:26
지난 번 MB이 대통령에 당선 됐을 때도 그랬겠지요만. 그래도 그땐 딱히 기대를 걸만한 이가 없어 충격은 덜했을 겁니다. 그저 뚜벅뚜벅 갈 길을 가면 되지 했었거든요. 하지만 올 대선은 조금 달랐습니다.
 
물론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누가 되도 결국은 다시 시작해야 하는 가다, 마음 다잡았지만. 5년간 이어졌던 절망이 또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또 박원순을 보고 있으려니 그래도 그네보단 낫겠지, 란 생각에. 마지막엔 유례없이 높은 투표율에 어쩜, 내심 기대를 했었던 건 아니었나.
 
선거 이후 뉴스도 인터넷도 모두 끊고, 글도 안 쓰고. 누가 보면 열렬 운동원이나 됐었던 것 마냥 며칠을 멍한 채로 지냈더랬습니다. 그리고는 고작 자조적으로 욕을 해대며 중얼거리는 짓이나 하고 있으니. 물론 그렇다고 어느 동네 수도, 가스, 전기 싹 다 민영화해달라며 울분을 터뜨리고. 뚝뚝 떨어져가는 아파트 값만치나 피눈물도 뚝뚝 떨어질 거라 저주를 퍼붓는 게 옳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총체적 부실이라는 4대강 사업 감사원 결과가 나와도. 탈법과 편법을 관례라고 항변하는 헌재소장 후보 얘기가 나와도. 결국 구느름만 하고 있어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아니 누가 뭐라 해도 깡그리 무시할 거라는 것. 지난 5년 동안 수도 없이 겪었지 않았더랬습니까.
 
그러니요. 이제 광장에서, 거리에서 촛불 들고 외치는 이들을 두고. 이제 그만하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손가락질 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다음 5년 후 투표소에서 보자라는 허황된 다짐이나 맹세 따윈 더 이상 하지 말잔 말입니다.   
 
구느름: 자조적으로 욕을 해대며 중얼거리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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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 20:25 2013/01/24 20: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