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그랬다지요. 다른 당 후보도 아니고, 자기 당 후보들이 재차 물었으니 짜증도 났겠지만. 가뜩이나 과거를 망각한 채 되레 힘을 키우고 있는 일본에게 우리 정치권이 과연 따가운 일침을 던질 자격이 있는지 걱정인 판에. “과거에 모두 사시네요.”

 

하워드 진은 조지 오웰의 말을 빌러 이렇게 얘기합니다.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자들이 곧 역사를 기술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할 수 있다면, 우리의 미래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 콜럼버스에 관련된 역사를 논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다.” 잔혹한 20세기 미국의 현재 모습을 바로 이해하기 위한, 그리고 미국이 어떤 미래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바로 콜럼버스로부터 출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박정희’에 대한 물음은 단순히 과거에 어떤 일이 있었는가 하는 ‘사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민주화가 완성됐다는 지금, 우리 사회의 모습을 똑바로 이해하기 위해서, 그리고 21세기 한국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해 어떤 답을 찾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물음인 것이지요.  

 

그러니 아무리 같은 당 후보였지만 5.16에 대해 던진 질문에 저런 식으로 답해선 안 될 것이었습니다. 물론 김문수나 임태희 같은 사람들과 현재 한국사회를, 미래를 두고 논쟁을 벌인 건 아니었겠지만. 오히려 지난번에 “역사관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서로 존중하고, ‘이것은 결국 국민 판단 몫이고 역사의 몫이다’라고 하고 우리가 맡은 사명에 대해 충실히 노력할 때 오히려 통합이 이뤄진다.”라고 했던 말보다 더 후퇴를 했으니. 오히려 하워드 진이 명확히 지적하듯(?) 역사란 철학과 사상에 따라 크게 좌우되는, 절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걸 지적하며 치고 나갔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역사 공부를 시작하는 그 순간, 넘쳐나는 정보 중에서 특정 부분에 해당하는 정보를 얼마만큼 넣고 뺄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그렇게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선택은 자신의 관점에 따라 이루어지며, 모든 역사가와 역사 연구는 어떤 관점이 있습니다. 단순한 ‘사실’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p.105

 

“역사 연구는 곧 무엇이 중요한지를 선택하고 결정하는 일입니다. 그리고 무엇이 중요한가는 실제로 현재 우리의 관심이 무엇이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p.112

 

“역사는 수많은 사실들에서 선택하는 것이며,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에 따라 선택을 하게 됩니다. 역사는 객관적일 수 없습니다.” p.281

 

아버지 박정희 후광으로 여당 대선후보에까지 오른 박근혜에게 5.16은 대선이 끝나는 날까지 따라다닐 겁니다. 그것도 박근혜 후보 자신이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든 얼렁뚱땅 넘어가든 말이지요.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문제가 박 후보에게나 다른 대선 후보들에게 모두 좋은 공격 수단으로, 아킬레스건 정도로 생각돼서는 안 됩니다.     

 

앞서 하워드 진으로부터 배웠듯이 이 문제는 역사를 통해 우리가 무엇을 배울 것이며 어떤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인지 분명하게 답해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또 콜럼버스와 박정희가 여전히 영웅으로 떠받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이기도 하니까요.

 

“콜롬버스를 20세기 기준으로 평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이런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기본적인 도덕률은 20세기이든 15세기이든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p.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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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4 13:31 2012/09/04 13:31

줄줄이 검찰에 소환되고 기소되고 있습니다. 김상곤, 곽노현, 장만채, 김승환, 장휘국. 이제 강원교육감만 남았나요. 겉으로 드러난 건 무상급식, 교원평가, 시국선언, 체벌, 학생인권이지만. 결국 경쟁과 통제, 보수 대 협동과 인권, 개혁이 맞부딪친 결과일 터인데. 한쪽에선 이 기회에 지방교육자치제를 없애버리려 하고, 다른 한쪽에선 안타깝지만 아직까진 지키기에 급급한 모양새이니. 교육개혁, 아직 멀었나 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멈춰야 되겠습니까. 김상곤 대책위, 곽노현 대책위, 장만채 대책위가 아니라 진보교육감 공동대책위라도 만들어 싸워야지요. 어디 ‘개혁’과 ‘진보’가 쉽게 왔더랍니까. 매번 깨지고, 매번 졌다고 희망까지 놓아선 안 된다는 말입니다. 물론 지치기도 할 겁니다. 힘도 들겠구요. 오죽해야 말이지요.

 

김상곤 경기교육감은 벌써 두 번이나 기소됐다 무죄 판결을 받았고, 곽노현 서울교육감은 후보자사후매수죄라는 얼토당토않은 법리로 대법까지 같으니 말입니다. 또 장만채 전남교육감은 배임과 횡령, 뇌물수수 혐의로 한 순간에 파렴치한이 됐으며, 장휘국 광주교육감은 장만채 교육감과 함께 선거홍보비 부당 청구혐의로 조사를 받고 있고. 또 최근엔 김승환 전북교육감마저 교과부로부터 시국선언 교사에 대한 징계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검찰에 고발을 당했으니 말입니다.     

 

하기야 애당초 눈엣가시 같았던 진보교육감들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으니. 이만한 사안들이 아니었어도, 또 이만한 일들이 없었어도 득달같이 달려들어 물어뜯을 이유를 기어코 만들었을 겁니다. 인권위에서조차 개선 권고를 한 학교생활기록부 학교 폭력 가해 사실 기재 거부와 관련해 교과부가 특감에 나서겠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러니 이제 남은 건 민병휘 강원교육감밖에 없지만. 사사건건 시비를 걸려는 교과부로부터 언제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르니, 지금이라도 공동 대응을 해야겠습니다. 혹여 그런 일은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자칫 잘못하다간 이러다 다음 번 선거도 전에 싹 다 갈릴 수도 있으니까요. 점잖은 도덕론으로 손가락질이나 할 줄 알고. 같지도 않은 핑계로 등 돌리는 이들은 빼고. 경쟁대신 협력이, 통제대신 자율이, 인권과 민주주의가 넘쳐나는 학교를 원하는 사람들 모두 모아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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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8 15:21 2012/08/28 15:21

민주노총이 결국 통합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네요. 대선에서 독자 후보를 낼 수도 있다고 하던데. 애당초 어중이 떠중이의 실속 없는 무리들에 기댔던 것에 대해선 아무 소리도 없더군요. 물론 창당 때부터 함께 해왔던 진보정당이 갈라진데다. 2MB이 하도 기가 찰 일들만 해서 통진당을 선택했다고는 하지만. 사과조차 않았던 신자유주의 세력과 손잡았던 일, 야권연대라는 이름으로 조합원들을 투표소로 내몰았던 일에 대해 말이 없는 건. 제대로 된 평가나 반성이 없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엉성하고 덜된 일은 한번 흩어지기만 하면 재결합이 어렵다는 걸 생각한다면 말이지요. 민주노총이 보이는 지금 모습으론. 아무래도 조합원들을 다시 한 곳으로 모으기가 만만치 않아 보입니다.    

 

선떡부스러기: ① 어중이 떠중이의 실속 없는 무리. ② 엉성하고 덜된 일은 한번 흩어지기만 하면 재결합이 어려움을 비유한 말.

 

이석기, 김재연 의원 제명안이 부결되자 후폭풍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심상정, 유시민, 노회찬 등 신당권파는 새로 당을 만들겠다고 나섰고. 민주노총은 통합민주당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습니다. 결국 선떡부스러기들은 흩어지는 모양새고, 닭 쫓던 개는 지붕 쳐다보는 꼴입니다. 하지만 가만 보건데. 이번 일이 불거지지 않았더라면 어쨌을까, 싶으니. 정치세력화라는 이름 아래 조합원들을 팔아먹었던 이들은 얼굴 빛 하나 바뀌질 않네요. 그러니 적과 싸우면서 적과 닮아간다는 말이 이럴 때도 떠오르는 건, 맞습니다. 조합원들과 동떨어진 채 비판과 견제로부터 멀어졌던 당이나 총연맹. 결국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된 셈입니다. 그런데도 야권연대라는 이름으로 선떡부스러기들을 지지했던 일은 반성조차 않으니. 또 똑같은 길을 되풀이 하겠다는 건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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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1 12:35 2012/08/21 12:35
1.
벌써 한 달이 넘었네요. 느닷없이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었더랬습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를 때이니 벌써 5년이 훌쩍 지났고. 한참 자랄 때라 그런지, 그때도 부쩍 자란 조카들에 흠칫 놀랐었는데. 지금은 길에서 마주친다고 해서 알아볼 수나 있을지. 그동안 한 번도 보질 못했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아들내미, 아니 조카가 이제 문, 이과를 선택해야 하는데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며, 애 얘기를 들어봐 달라며 전화번호를 알려주더라구요. 하지만 오랫동안 연락도 없었으니 쑥스러워 전화를 하지 않겠다, 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리고 낮에 누나와 통화를 했고, 저녁때쯤 전화할 거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9시 뉴스가 끝나도록 전화가 오질 않더군요. 그래, 쉽진 않을 거야, 라며 보리차물을 올리러 주전자를 닦는데.
 
요란스레 전화벨이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2. 
누나와 얘길 할 때도 그랬지요. 성적도 좋고, 앞으로 취직 문제도 좋지만 일단 자기가 좋아하고 관심 있는 게 먼저 아니겠냐고 말입니다. 물론 나중을 생각한다면 그런 것들을 무시하진 못하겠지만 우선은 지가 끌리는 게 뭔지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하지만 전화 통화는 생각지도 않은 방향으로 흘러갔습니다. 먼저 예상했던 것보다 스스럼없이 자기 성적이며, 고민하고 있는 게 뭔지를 소상히 얘길 하는 조카 목소리를 들으니 한편으론 반갑기도 하고 꽤나 기분이 좋았었지요. 헌데, 안부를 묻고 이런 저런 애기를 하다 학교생활도 묻고 어쩌고 하는데. 자꾸 성적이 어떠니, 문과 쪽 과목들하고 이과 쪽 과목들하고 어느 쪽이 더 높느니, 이런 말들을 하고 있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 물론 학교에서 진로나 진학 상담은 받아봤는지, 흥미를 느끼는 과목이 어떤 것들인지,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살고 싶은 것인지 등등도 물어봤었지요.
 
하지만 돌아온 답은 들으나 마나했습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 나이에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을 결정해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터이고. 학교에서도 아이 취미나 적성보다는 진학률, 취업률을 먼저 생각할 것이 뻔하고. 이제껏 받아온 교육이란 게 답이 있는 문제만을 풀어오고 암기해온 게 전부니. 조카 입장에선 어쩔 수 없었겠지만.
 
참 난감하더라구요.
 
 
사용자 삽입 이미지3. 
수업을 받는 것도 일을 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공동체를 위한 활동을 보고 돈을 주는 나라가 있습니다. 압박 수단으로 시험과 성적표를 쓰지 않습니다. 노는 때와 공부하는 때를 가르는 것이 의미가 없구요.
 
교사는 아이들이 갖는 자유로운 결정권을 제약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굴복시키는 훈육자이거나 조련사이지 않으며, 더더군다나 적대자여서는 안 됩니다. 그저 필요한 전문지식을 주는 조언자에 지나지 않으며, 학생의 장점과 단점, 충분히 발휘되고 있는 재능과 아직 계발되지 않은 발전 가능성을 의논할 뿐이지요.
 
아이들은 학교에 다니는 동안 자기가 어떤 분야에 관심이 있고 소질이 있는지 스스로 알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갖습니다. 상급학교에 진학한 학생들은 공화국으로부터 어떤 조건도 달지 않은 재정지원을 받습니다.
 
어떤가요. 상상 속에나 있을 법한 이 나라, 그 동안 싹도 틔워 보지 못한 채 짓밟히고 말살당한 창조성을 길러내며, 지금의 사회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변화시키고, 극복하고, 개선하는 것을 기본 이념으로 삼는, ‘더 많은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사람’이 되기를 소망하는 나라.
 
바로 공화국 벤포스타입니다.
 
 
4.
어떻게 전화를 끊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을 다닌 게 벌써 20년도 더 됐다며 발뺌을 한 것도 같고. 결국 작년까지 학교를 다녔으니 조금 더 잘 알겠거니 싶어 짝꿍한테 전화를 넘겼지요. 애기를 이어갈수록 처음에 하려고 했던 말은 안 나오고 맨 이.공계 취업이 요즘은 옛날과 다르다느니, 이과는 공부 잘하는 애들이 많이 가는 편이라느니, 당체 도움도 안 될뿐더러 다 아는 얘기만 나오니까요. 하는 수 없었습니다.
 
물론 얼떨결에 전화를 넘겨받은 짝꿍이 도움이 될 만한 정보와 경험담을 섞어 잘 얘기를 해서 결정은 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그렇게 전화를 끊고 나니. 내 자식도 아닌데도 끝내 남들과 똑같은 생각으로 이런 결정을 하는데. 내 자식이면 오죽하겠나, 싶더랬습니다. 틈만 나면 학교 교육에 대해 침 튀기며 열만 올릴 줄 알았지 말입니다. 또  꼴에 콩 내놔라, 팥 내놔라 남 얘기하기만 좋아할 뿐.
 
아직 멀었다, 싶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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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7 22:03 2012/08/17 22:03
사용자 삽입 이미지예전엔 ‘선거투쟁’이란 말도 있었더랬습니다. 듣기엔 거창할지도 모르겠지만. 솔까, 당선되긴 어려우니 하고 싶은 말이라도 실컷 해보자던 건데. 지금 봐도 참 그럴듯한 말을 갖다 붙였지요. 아무튼 그땐 소로우가 누군지 몰랐었음이 틀림없었을 터인데.   
 
투표란 장기나 주사위 놀음과 같은 일정의 놀음이다. 다만 옳고 그름이라는 도덕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노는 약간 도덕적 냄새가 풍기는 놀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내기에 자연스럽게 따른다. 투표하는 사람의 인격은 내기가 상관없다. 나는 어쩌다가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쪽에 표를 던진다. 그러나 그 옳은 것이 승리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나에게 생명을 건 관심사는 아닌 것이다. 나는 기꺼이 그 결과를 다수자들에게 맡긴다. 그러므로 투표의 의무는 결코 편의(便宜)의 의무를 넘지 못한다. 옳은 것을 위해 던진 표도 진작 그 옳은 것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것은 다만 사람들에게 정의가 이기기를 바라는 당신의 소원을 미약하게 나타낼 뿐인 것이다. 현명한 사람은 정의를 다수자의 손에 맡기거나 아니면 그 다수자들의 힘을 통해 승리에 이르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다수자들이 결국에 가서 노예 폐지를 위해 투표를 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들이 노예에 대하여 흥미를 잃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투표로 해방될 노예들이 거의 없게 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때에 그들은 남아있는 유일한 노예가 될 것이다. 다만 자신의 투표로 자신의 자유를 주장할 수 있는 노예들의 투표만이 이 노예제도의 폐지를 빠르게 할 것이다. pp.193-194
 
라는 말을 들었더라면. ‘선거투쟁’보다는 좀 세련된 말을 만들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도 듭니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그 당시엔 선거에 통 관심이 없었었지요. 누가 되도 상관없단 식은 아니었지만. ‘부르주아 선거’에서 얻을 거라곤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했던 시절이었으니까요. 물론 김대중과 노무현이 잇따라 대통령이 되고. 진보정당들도 의회에 들어가는 호시절을 지났어도 별로 달라진 게 없는 현실을 보면. 영 틀린 말도 아니다,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투표를 하되 옹근 표를 던지라. 그저 한 장의 종이쪽만 던질 것이 아니라 당신의 전 영향력을 던지라. 소수자는 다수자에게 고개를 숙이는 한 무력하다. 그렇게 되면 소수자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소수자가 그 온 힘을 다하여 버티면 그것을 당해낼 수는 없는 것이다. p.203
 
라는 소로우의 말도 또한 여전히 유효하단 생각도 듭니다. 금배지 달아보겠다고 과거에 잘못한 일들을 반성조차 하지 않는 이들과 손잡는 일도 벌어지고. 대중의 마음을 얻어 보겠다며, 고매한 ‘도덕’을 강요하고 손가락질하는 사람들도 생기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종이쪽만 던지는 게 아니라 내 온 영향력을 던진다면. 더 이상 죽을 수 없다며 다시 싸움을 시작한 쌍용자동차 노동자들, 평화로운 제주를 만들기 위해 싸우고 있는 강정마을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고 어깨를 건 이들에게 표를 던진다면. 맞습니다. 한 발은 더 내딛는 거란 얘깁니다. 물론 지금도 정부는 최소한도여야 한다는 소로우의 생각에 무조건 동의하지만 말이지요.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2/08/06 13:37 2012/08/06 13: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