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체 어쩌자는 거지? 뭘 얘기하고 싶은 거야? - <티위사람들 The Tiwi of North Australia>, C.W.M. Hart & Arnold R.Pilling
from 지난 책 2012/07/11 12:47
늙은 남편을 둔 어머니들에게 재혼은 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과부재혼(寡婦再婚)에 따라 자식들은 몇 번이고 새로운 이름을 새 아버지로부터 받아야 했습니다. 죽은 아버지가 지어준 이름은 금기가 됐고, 어머니의 새로운 남편은 얼마나 딸들이 생기느냐에 따라 사회적 성공 여부가 결정됐습니다. 여자들은 채 10살이 되기도 전에 늙은 남편과 결혼이 정해졌고 심지어 어머니 배속에서 나오기도 전에 짝이 맺어지기도 했습니다. 남자들은 24살 또는 25살이 되기까지 후견인으로부터 혹독한 교육(?)을 받아야 했으며 30살, 아니 40살이 될 때까지도 아내를 맞이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독특한 혼인 제도를 가지고 있었던 ‘티위사람들’이 서구 학자들 눈에는 어떻게 보였을까요. 대부분의 문화인류학 연구들이 그렇듯 하트C.W.M. Hart와 필링Arnold R.Pilling이 각기 1928년에서 30년까지 그리고 1953년에서 54년까지 ‘연구’한 성과로 펴낸 <The Tiwi of North Australia> 역시 연구자의 시선 그 자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역자 서문에는 ‘다양한 민족지들을 접하게 함으로써, 인류학이라는 연구 분야의 참다운 성격 그리고 인류학 연구에서 그 핵심이 되는 문화(文化)라는 개념을, 보다 구체적으로 또 보다 생생하게 전달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p.5)라고 인류학에 대해 옹호하고 있지만. 좀 심하게 말하자면. 실은 그 다양했던 문화가 단일한 서구 문화로 수렴되고 만 것에 대해선 외면하면서. 그저 ‘티위사람들’과 티위 문화에 대해 추억하고, 기록으로 남기고 있다는 얘기입니다.
자본주의 문화에 대한 권력은 건들이지도 않으면서 ‘문화상대주의’라고 말하는 것은. 결국 사라져간 것들에 대한 얄팍한 추억(1954년 여행을 온 엘리자베스 여왕 앞에서 춤을 추기 위해 퀸즈랜드로 보내어 진 호주 북부지역 원주민들과 ‘티위사람들’이나 미국 텔레비전 시청자들이 티위 춤을 즐길 날이 오리라고 기대되는 일처럼 말이지요. p.150)과 약탈한 문화들로 가득 채운 거대하고 화려한 박물관들뿐인 셈이지요.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트와 필링이 그 모든 죄를 뒤집어쓴다는 건 억울한 일일 겝니다. 그들이 관찰한 대로 ‘티위사람들’이 가진 문화가 파괴되고 사라진 건. 일부일처제를 위해 어린 여아를 사들인 카톨릭 신부, 철과 젊은 아내들을 맞바꾼 일본인 진주 조개잡이,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등지에서 마구잡이로 노예를 잡아들인, 식민지 개척 경쟁에 뛰어든 유럽인들일 테니까요.
하지만 오늘날 학계가 ‘침묵의 카르텔’로 권력과 자본을 위해 봉사하는 일처럼, 아무 상관이 없는 건 아닙니다. 다만 스스로 “모든 문화는 그 나름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문화란 고정되거나 단일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로 사라진 것들을 대상화함으로써 이름을 유지하고자 할 뿐인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기셀Gsell신부를 속인 폴리Polly처럼. <티위사람들>에서 본 것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지 않을 수도 있구요. 폴리와 결혼한 카바지가 담배를 얻기 위해 새로 혼인한 젊은 다른 여인을 신부에게 준 것처럼, 한 문화가 어떻게 사라지고 파괴되는지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인류학, 문화인류학 ‘연구’성과들만큼이나 그래서 뭘 얘기하는 거지, 대체 어쩌자는 거야, 책을 다 읽고도 의문이 풀리지 않았던 건. 당연한 일일 겝니다.
인간으로 인해 시작된 환경위기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 존 벨라미 포스터의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 장 지오느의 <나무를 심은 사람>
from 지난 책 2012/06/20 14:23
‘천 리 길도 한 걸음부터’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 처음이 중요하다는 뜻이기도 하지만 결국 아무리 먼 길도 한 걸음을 내딛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장 지오느가 쓴 <나무를 심은 사람>에 등장하는 엘제아르 부피에처럼 도토리나무를, 자작나무를, 떡갈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은 환경위기를 넘어서기 위한 아주 소중한 실천이 될 수 있겠습니다. 뭐, 나무가 잡아두는 이산화탄소야 나무가 살아있을 때나 유효한 것이니 별 소용이 없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나무를 심는 행위가 단순히 숲을 가꾸고 만드는 것만이 아니라. 사라지고 파괴된 공동체를 복원시키는 일이라면. 지배와 착취라는 인관-자연 관계를 새롭게 바꾸는 일이라면 말입니다. 한 무더기 도토리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정성껏 골라 땅에 쇠막대기로 구멍을 파고, 심고, 덮는 일을 지금 당장 시작해야 한다는 얘깁니다.
하지만 <환경과 경제의 작은 역사>라는 책을 쓴 존 벨라미 포스터가 도토리를 심는 있는 부피에를 본다면 무슨 얘기를 할까요. 사적이윤 추구와 맞물려 있는 경제체제를 재조직화하지 않는다면. 나무를 심고 가꾸는 일이 됐던, 하이브리드 자동차나 절전형광등과 같은 에너지 절감 기술이 됐던. 자연과 인간 사이에 결코 평화를 보장해주지 않는다며, 아마도 따끔한 충고를 할 겁니다. 지속가능하고 생태적인 경제를 가능케 하기 위해선 사회적 토대로서 생산을 사회화해야 한다는 말이겠지요.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고르디우스 매듭’을 말끔히 잘라냄으로써 문제를 풀었다는 알렉산더 이야기도 되새겨볼만 합니다. 더구나 환경위기가 언급된 지도 벌써 반세기가 넘었고, 태평양 섬나라들이 국민들을 이주시킬 곳을 찾고 있는데도 마땅한 대책들이 나오지 않는 상황인 걸 보면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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