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거가 시작됐나, 싶었는데 그새 내일이 투표일입니다. 워낙에 선거운동 기간이 짧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대선을 앞둬서인가요. 각 정당들이 이전 선거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로 선거를 치렀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선 정당들이 인기를 잃으면 당 이름을 바꾼다”는 해외기사까지 나게 하는 두 거대 양당, 새누리당은 박근혜가 전면에 나서 총력전을 펼쳤고, 민주통합당 역시 MB정권 심판을 내걸고 ‘야권연대’까지 이뤘으니 말입니다. 게다가 직접 선거에 나오지도 않았는데도 연일 뉴스에 오르내리는 안철수까지, 아무래도 다들 이번 선거를 통해 다음 대선까지 어찌어찌해볼 생각들을 갖고 있었나 봅니다.
 
하지만 돌아가는 모양새, 아니 다 끝나가는 마당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짧게는 4년, 길게는 50년, 100년을 두고 우리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갈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토론하고 싸우기는커녕 진흙탕 싸움만 하다 볼일 다 봤으니. 뭐, 새누리당이야 어차피 정책이라고 해봐야 공약(空約)에 불과한 말잔치에 불과하니 볼 것도 없었지만. ‘야권연대’라는 이름으로 뭉친 반MB 진영 역시 솔직하고 뼈저린 반성 없이 내건 ‘한미FTA폐기’ 주장에서 보듯 일단 표부터 얻고 보자는 속셈이 뻔히 보였고. 여론조사 결과를 놓고 봐도 정당이나 정책보단 인물을 보고 뽑겠다는 사람들이 많으니. 말이 좋아 인물이지, 또 ‘그 밥에 그 나물’들이 잔칫상에 올라올 것 같습니다.
 
그러니 요란스레 떠들어대는 선거 관련 뉴스에도 그닥 관심이 가질 않았고. 집으로 배달 온 공보물도 봉투만 겨우 뜯어내고 투표소 위치만 확인했다 뿐이지 거들떠도 안 봤는데요. 그나마 진보신당에서 낸 한 장짜리 공보물 “세상을 바꾸는 동행/희망을 현실로 만드는 정당투표”가 없었다면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직행했을 겁니다. 지역구 후보자들이라고 해봐야 달랑 세 명, 그것도 꼴도 보기 싫은 새누리당, 민주통합당, 자유선진당 이렇게 셋인데다, 그나마 관심 갖고 지켜보고 있던 녹색당은, 혹시 빠진 거 아닌가 싶어 몇 번이나 뒤적거렸는데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 말입니다.
 
해서 내일이 투표긴 하지만 녹색당 홈페이지도 가보고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정당.정책정보시스템에서 비례대표 선거공보 e-book도 다운받아 보고. 정당별 10대 공약이며 지역구 후보들 공약까지 쭉 훑어봤는데요. 느닷없이 이번 선거에서 정당투표는 통합진보당을 집중투표하기로 결정한 민주노총이 떠오르더군요. 국회의원 뺏지에 목매달아 신자유주의 세력과 손을 잡은 것도 눈꼴사나워 죽겠는데, 성폭력 사건 당사자를 비례후보로 내세운 것도 모자라, 남근 중심 성적 조롱에 환호하는 이들을 보며 우쭐대는 김용민까지 감싸고도는 통진당을 팍팍 밀어 주기로 한 민주노총이 말입니다.
 
내심 진보신당은 지지한다고 선언하진 않더라도 통진당을 꼭 짚어 투표하라고 하진 않겠지, 라고 생각했었는데. 그건 그래도 5년 넘게 한솥밥을 먹었다고 생각했던 사람이 가진 짝사랑이었나 봅니다. 물론 5년 전에도 설마 그러겠어, 하며 뒤통수를 맞았던 게 한 두 번이 아니어서 충격은 좀 덜하지만, 그래도 씁쓸함은 쉽게 지울 수가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뭐 어쩌겠습니까. 새로운 시작은 늘 힘들고 어려운 일이며, 우직하게 제 길을 가는 것도 만만치 않은 걸 알면서도 그걸 하는 사람들이 있어 세상은 살만한 것인 걸요. 그러니 아무래도 내일 투표소에선 시간이 한참 걸릴 것 같습니다. 지역후보야 대충 1번과 3번을 빼고 찍으면 되겠지만. 정당투표, 11번과 16번 사이에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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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10 13:26 2012/04/10 13:26

사용자 삽입 이미지<춘천을 떠나며 산 책>

 

대형 서점들이 곳곳에 들어서고, 인터넷 서점이 활개를 치면서. 동네 서점은 학습지 판매점으로 근근이 명맥을 이어나가는 판국인지 오래됐습니다. 일, 이백 원도 아니고 몇 백 원 또는 몇 천 원씩 싸게 파는 마당에 당해낼 재간이 없겠지만. 당장에 필요한 책이 아니라면 이틀이면 집에서 편안히 받아볼 수 있으니. 이래저래 동네 서점을 찾아 가는 게 되레 시간을 내야 하는 일이 돼버렸지요. 그래도 부러 서가에 꽂혀 있는 책들을 꺼내 보는 재미며. 동네 서점에서도 이런 책이 다 있네, 하며 반갑게 들쳐보게 되는 책들을 만나게 되는 재미는. 아무래도 동네 서점만이 가지는 매력이겠지요.

 

춘천에도 꽤나 큰 서점이 두 개가 있었습니다. 이름만 대면 알 수 있는 ㄱ문고니, ㅇ문고니, ㅂ어쩌고 저쩌고는 아니지만. 나름 본점에 지점까지 하나, 둘씩은 갖고 있었으니. 분명 큰 서점임에 틀림없지요. 하지만 춘천이 서울이나 하겠습니까. 그 큰 서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물론 동네 서점들보다야 크긴 크지만. 말이 좋아 지점도 있는 큰 서점이지. 겨우 서가 한 켠 정도만 차지하고 있는 인문서적이나 사회과학서적들. 한 층을 온통 차지하고 늘어선 초.중.고등학교 자습서와 수험서들을 보자면. 동네 서점이라 할 만했지요. 그래서였을까요. 가끔 책 구경을 나서게 되면. 책 절반은 조지 오웰이 직접 영국 중북부 지역의 광산촌에 들어가 체험한 것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글들이 그리도 나머지 절반엔 사회주의가 왜 노동계급으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하는 가를 냉철하고 날카롭게 지적한 <위건부두로 가는 길>과 같은 책을. 그래, 이런 책도 여기서 볼 수 있구나, 하며 선뜻 계산대까지 가게 만드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태백에 와 처음 산 책>

 

느닷없이 태백으로 이사를 하게 됐습니다.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는 다는 말이 어울릴 듯. 보름 상간에 방 빼고 방 구하고. 도배, 장판에, 버릴 것 버리고 쌀 것 싸고. 자칫 번갯불에 볶은 콩이 탈 지경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와중에도 출근은 해야겠기에 보름간 머물 오피스텔까지 하나 구해 놓고 춘천에 왔다, 다시 태백으로 갔다, 를 수차례. 다행히 베란다로 보이는 풍경이 꽤나 좋은 곳에 집을 얻어 고생은 길게 하진 않았지만. 차비없이 한 이사에 몸과 마음이 지칠 대로 지쳤더랬습니다.

 

춘천에 비하면 사람 수만 봐도 5분의 1. 오르락내리락 언덕길이 많아 다니기가 힘들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뿐 크기도 대충 그만큼은 하려나. 아무튼 춘천보다도 더 작은 도시이니 서점이라곤 학교 앞 참고서 파는 곳밖에 없을 거라 생각했지요. 그러니 인문, 사회과학 서적을 파는 곳이 있을 거라곤 상상도 못했지요.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요. 번화가라고 해봐야 걸어서도 겨우 20여분이면 다 둘러보는 시내 한복판에 말입니다. ‘역사학의 지평을 넓힌 12인의 짧은 평전’이라는 부제를 달고, E. H. 카아, 하워드 진과 같은 꽤나 유명세를 타는 역사학자들부터 챈들러, 캐너다인, 립겐스와 같은 생소한 역사학자들까지 두루 살펴볼 수 있는. 미시사, 일상사, 구술사, 기업사와 같은 전통적인 정치.사회사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벗어난 연구자에서부터 지역적으로도 미국뿐만 스페인, 독일, 프랑스, 러시와 같은 다양한 나라들의 역사 연구를 소개하고 있는. <역사가들>과 같은 책이 떡하니 서가에 진열돼 있는 서점이 있다니. 오호, 여기 태백. 아, 이런 책들도 여기 있구나, 하는 재미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아 다행이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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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06 14:56 2012/04/06 14:56
그야말로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이사를 했습니다. 내심 9월에나 발령이 나길 바랐지만. 그래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타고 산티아고 길도 걷고. 전세금 빼서 재미나게 한 6개월 걷기만 하자 마음먹었지만. 사람 일, 참 맘대로 되질 않더군요. 연수 때부터 왠지 아슬아슬하다 싶었는데. 결국 막차를 타고 말았던 듯. 그래도 혹여 동해안 쪽으로 나지 않았을까, 란 마음도 있었지만. 그것도 한 순간 꿈. 춘천하곤 정말 먼. 기차타고 지나만 갔을 뿐 둘 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곳, 태백.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이사 준비하느라 왔다 갔다 한 이 주일 동안 이틀인가 해가 나온. 처음느낌이라곤 눅눅함과 잔뜩 찌푸림이지만. 또 몸도 마음도, 미리 갖추어 차리는 준비도 없이 왔지만. 푸근한 인심과 환한 얼굴들이, 곧 정붙이고 잘살만한 곳이겠구나 싶고. 춘천만큼이나 차타기가 쉽진 않지만 여기저기 볼 것도 많고 가볼 곳도 많으니. 함 재미나게 살아봐야지요.
 
차비없이 : 미리 갖추어 차리는 준비도 없이
 
방 빼기 무섭게 방 구하고. 방 구하자마자 도배며 장판하고. 도배, 장판하고 나서 서둘러 이삿짐 꾸려 옮겨왔지만. 비싼 월세도 아니면서 전세도 아닌. 좀 작다 싶긴 하지만 베란다로 보이는 풍경이 너무 좋은. 어차피 버스는 포기하고 택시타고 다녀야 하니 학교랑 먼 거는 상관없고. 바로 앞에 산책길이며 체육관에 도서관도 있으니. 차비없이 한 이사치곤 꽤 잘한 듯싶습니다. 다만 너무 빨리 난 발령 때문에 놀질 못했고. 의정부랑 서울이랑 더 멀어졌고. 나이가 먹어가면서 낯선 곳으로 가는 게 선뜻 내키질 않아. 또 물갈이를 하지나 않을런지 걱정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왕 왔으니, 또 정붙이고 살아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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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30 20:27 2012/03/30 20:27

사용자 삽입 이미지심심한 7번 국도, 해 넘어 도착한 곳 인구항(2010년 9월 18일)

 

꼭 한 달만이다. 날씨가 좋아 걷기로 했지만 곧 추석이고. 길게는 9일 가까이나 되는 연휴인지라 길이 많이 막힐 것 같아 연휴 시작에 갈까, 연휴 끝에 갈까 고민도 됐고. 이제 막 마르기 시작한 고추도 하루, 이틀은 더 바싹 말려야 안심이 될 것 같아 어쩔까 걱정도 됐지만. 또 며칠 전부터 속도 좋지 않고 조금만 무리해도 피곤해 아무것도 할 수 없이 잠만 쏟아지고 있지만. 이런 저런 일을 생각하다보면 언제 또 가려나 싶어, 이렇게라도 걸어야 운동이 되려나 싶어. 일단 가자, 새벽차를 탄다.

 

오색령을 넘어갈 때까진 썩 기분이 좋질 않았다. 또 이 이유 없이 싸우다 그리됐는데, 옆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꽤나 재밌었을 듯싶다. 보기엔 웃기지도 않는 걸로 둘이 싸우는 가 싶더니, 잠깐 섰다 가던 원통터미널에선 급기야 울기까지 하고. 그러다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가는데 뭐가 좋은지 웃고 떠드니. 지겹기만 하진 않았을테다.   

 

새벽에 나선 탓에 세 시간이 넘게 차를 타고 왔는데도 양양에 도착하니 10시도 못됐다. 하루 종일 걸어 남애항이나 인구항까지 가고자 계획을 세웠는데. 둘러가고, 돌아보고 가도 대충 20km정도니 무리하지 않아도 되겠다, 싶어 느긋한 마음에 찬찬히 길을 나선다. 어딜 가도 읍내는 구경하지 않는 법인데. 터미널 주변이긴 해도 이곳저곳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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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남짓이나 걸었을까. 전날 미리 사 놓은 김밥에 과일까지 바리바리 싸 가져와 버스 안에서 주섬주섬 먹었는데도 배가 고프다. 국도를 벗어나 오랜만에 한적한 시골길을 걸으며 호젓함을 느끼려면 아무래도 뭘 먹지 않으면 안 되겠다. 헌데 이 아침부터 밥하는 데가 있을까. 한참 휴가철이라면 걱정 없겠지만. 어딜 가나 때를 놓치면 밥 한 끼 먹기도, 하룻밤 묵어가기도 쉽지 않으니. 그래도 선사유적지 근처에 가니 아침밥을 하는 곳이 있어 청국장에 밥 한 그릇씩 뚝딱. 든든히 배를 채운다.

 

먹었으니 이제 힘을 내 길을 걸어야겠는데. 동해안 일주여행 하면 으레 떠오르는 길. 7번 국도. 하지만 그 7번 국도는 옛 명성에 통 걸맞지 않다. 해안선을 따라 구불구불, 느리게 내려가던 그 2차선 길은 다리미질 한 것 마냥 일직선, 게다가 바다는 저 멀찍이 떨어져 있어. 걷기엔 참 재미없고 심심하기만 한데. 당분간은 그 길을 걸을 수밖에 없어 힘이 나질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나. 잔뜩 구름낀 흐린 날씨지만 벌써 노랗게 패인 벼들과 울긋불긋 코스모스들이 있어, 그 보는 재미에 겨우겨우 나간다. 또 수산항과 동호리에선 등나무 아래, 쉼터 의자에서 오랫동안 이 얘기, 저 얘기 이야기꽃을 피우며 쉬엄쉬엄 가니. 변덕스런 날씨 때문에 해가 나왔다, 들어갔다. 한 여름 불볕더위 못지않은 햇볕을 피해 쉬었다가, 선선한 가을바람에 또 걸었다가.

 

사용자 삽입 이미지메밀전병에 막국수 한 그릇씩 후루룩 말아먹고는 다시 7번 국도 위에 서는데. 좀 전에 걷던 지방도하고는 달리 널찍한 갓길이 있어 둘이 나란히 걸을 수도 있지만. 바람과도 같이 질주하는 차들 때문에 손잡고 걷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발뒤꿈치를 보며 걷다. 하조대에 이르러서는 안 되겠다, 바다에 발 담그고 한참을 놀다. 절벽위에 선 하얀 등대 보러 삼십분 넘게 되돌아가는 길을 걷기도 하고. 이리저리 심심함을 달래보니 아까보단 낫다.

 

그래도. 기사문항을 지나고부터 다시 만난 이 널찍한 도로. 게다가 흐린 날씨 탓에 다섯 시도 안 됐는데 어둑어둑. 두 번을 갈아 타야하는 수고를 덜기 위해 어찌됐든 인구항까진 가야 하기에. 열심히 걷기만 해야 해서. 참 재미없는 걷기다. 하지만 어째, 죽을 힘 다해 부지런히 걸을 수밖에.

 

결국 지나는 포구마다 그저 눈길 한 번씩만 돌리고. 조금만 돌아가면 이 심심한 길을 벗어날 수 있겠건만. 자동차 불빛이 하나, 둘 켜지는 걸 보며 급한 마음에 거의 뛰다시피. 다행히 조기 눈에 보이는 곳이 인구라고는 하지만. 겨우 숨 한번 돌려 쉬고 또 걸어. 겨우겨우, 강릉 가는 시외버스 표를 끊고 나니 금세 어둠이 짙게 깔리는데. 피곤함에, 배고품에, 맥이 탁 풀린다. 

 

* 다섯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양양 읍내에서 인구까지 약 23km.

 

* 가고, 오고  

춘천에서 양양은 한계령을 넘어가는, 홍천, 인제, 원통 등을 거쳐 가느라 시간이 다소 걸리는 시외버스를 타거나 미시령 터널을 지나가는, 중간에 들르는 곳이 없어 조금 빠르긴 하지만 속초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가는 방법이 있다. 인구에서는 도로 양양으로 나오는 것보다는 강릉으로 가서 무정차 춘천행 시외버스를 타는 게 좋다. 양양에서보다 늦게까지 있을 뿐만 아니라 자주 있기 때문이다.

 

* 잠잘 곳

역시 널린 게 먹을 곳, 잠잘 곳이다. 너무 많아 탈이라면 과한 표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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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7 12:10 2012/03/27 12:10
사용자 삽입 이미지외국영화를 보다보면 가끔 원제목과는 전혀 다른 제목 때문에 헛웃음이 나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테리 길리암 감독이 1985년에 내놓은 ‘Brazil’이라는 컬트무비는 ‘여인의 음모’라는 제목으로 바뀌었는데요. 영화를 보는 내내 대체 저 여인이 뭔 음모를 꾸민다는 거지, 괜한 상상을 하게 만들다 끝내. 영화 속 주인공처럼 환상에서 깨어날 때쯤 영화도 끝난다는. 꽤나 어처구니없었던 기억이 있습니다. 아, 물론 반대의 경우도 없지는 않습니다. 그것도 영어식 제목을 무조건 한글로 해야 했던 웃긴 시대에 나온 'Butch Cassidy And The Sundance Kid'. 폴 뉴먼과 로버트 레드포드가 주연으로 나왔던 이 영화는 ‘내일을 향해 쏴라’라는 아주 멋진 제목으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으니까요.
 
책도 마찬가지입니다. <문화의 수수께끼>와 <음식문화의 수수께끼>에 이어 <식인과 제왕>까지, 문화인류학 3부작을 잇달아 발표했던 마빈 해리스가 1981년도에 쓴 이 책. 첫 장부터 책을 덮을 때까지 내내 대체 제목을 왜 이따위로 한 거야, 란 말이 나왔지요. 아무리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을 뽑는다고는 해도, <아무것도 되는 게 없어>가 모랍디까. 책 내용과 동떨어진 거는 물론이거니와 문화인류학과는 촌수를 따지기도 힘든 제목. 솔직히 마빈 해리스란 이름만 없었다면 그냥 눈길 한 번 주는 걸로 끝났을 겁니다. 하지만 저거 계속 보고 있자면 찝찝한 마음이 자꾸 생기니 말이지요. 달력이라도 한 장 죽 찢어 표지를 덮어 버린 다음, 꼼꼼히 읽어보면. 해리스가 이전에 썼던 책에서도 밝혔듯이 사회학이나 경제학만큼이나 시대를 읽어 내는 눈이 생기는 데 문화인류학 역시 큰 도움이 되겠다, 라는 것. 또 그것이 마빈 해리스가 이 책을 쓰게 된 이유이면서도 매우 적절한 분석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 그러니, 제목 따윈 신경 쓰지 않아도 될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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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21 17:36 2012/03/21 17: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