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

from 말을 걸다 2012/11/19 13:18
1.
이제 추수도 얼추 다 끝나가겠군요. 올 핸 농사를 짓지 못했지만, 예년만 같았다면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을 터인데. 봄 철 농사도 고사리 손이 필요할 만큼 분주하겠지만. 짧은 해가 더 아쉬울 가을 역시, 더 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을 겝니다. 이제 곧 김장 무와 배추를 거둬야겠고. 성큼 다가온 추위에 긴 겨울 준비를 해야 하는데다. 요즘은 1,000원만 있으면 손쉽게 종자회사나 농협 매장에서 사다 쓸 수 있긴 하지만. 내년 봄에 뿌릴 씨앗들도 튼실하고 빛깔 좋은 것들로 골라놔야 하니까요. 콩이며 팥 같은 것들은 물론이고 텃밭에서 길러먹는 쌈채소들까지 말이지요. 하지만 이것도 토종 종자가 없으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니, 이런 풍경을 보는 것도 예삿일이 아닙니다. 도시 속 텃밭은 물론이고 환금작물로는 이만한 게 없다고들 하는 고추만 해도, 매년 새로 모종을 사다 심는 게 당연하게 됐고. 이런 저런 돈이 되는 작물이든 그저 우리 식구 먹는 것이 됐든, 종묘상 가서 광택 나는 코팅된 씨앗 사다 심으니까요. 농촌에 젊은 사람 없고 농사지을 사람 없어 그리 됐다고들 얘기 하는 게 일견 맞을지 모르겠지만. 또 어딜 가도 똑같은 모양에 똑같은 맛을 내는 것에 손들이 가는 데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말에 토 달기 어렵겠지만 말입니다.
 
2.
5년 전이네요. 살던 곳, 일하는 던 곳을 떠나기로 했을 때 계획이란 걸 세웠지요. 4년 공부할 시간 동안 어떻게 먹고 살 것인가를 놓고 계획을 세웠으니 딱히 말한다면 계획이랄 것도 없고 돈 나갈 곳만 따진 것입니다. 들어오는 돈이야 퇴직금 받은 거 은행에 넣어놓고 받는 이자가 전부니 그랬을 겁니다. 그래도 전세금 빼고 모아 놓은 돈 조금에 실업급여 6개월분과 퇴직금으로 얼추 계산해보니 4년은 그럭저럭 지낼 수 있을 것 같았으니, 겨울바람이 채 가시기도 전에 춘천으로 이사를 했겠지요. 하지만 계획이란 게, 그것도 생활비 짜 놓은 게 맘대로 되지 않는 다는 건 다들 아실 겁니다. 생각지도 못하게 목돈이 들어갈 일이 생기기도 하고. 씀씀이를 줄인다, 줄인다 해도 어쩔 수 없이 늘어나는 지출도 있고. 채 1년이 다 지나기도 전에 다시 계획을 따져보니. 아뿔싸, 이렇게 가다간 한 1,000만원은 모자라겠다 싶더군요. 그러니 다시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고, 괜히 서둘렀나 싶은 생각도 들고. 괜한 짜증에 티격태격 싸우기도 많이 싸웠던 것 같으니. 있는 사람들에겐 돈 1,000만원이 무에 그리 큰돈이냐 하겠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음 해부터 학교에서, 집에서 장학금도 받고 집도 조금 더 줄여가며 돈을 아끼지만 않았다면 어찌됐을까. 무사히 춘천을 떠났으니 망정이니. 1,000만원 때문에 어렵게 들어선 길을 다시 되돌릴 뻔 했으니, 참 다행이다 싶습니다. 
 
3.
<광해>가 1,000만 관객을 넘었다지요. 올해만 벌써 도둑들에 이어 2번째니, 요즘은 1,000만 정도는 돼야 흥행한 영화라고 하는가, 봅니다. 독립영화로는 최단기간 3만 돌파니, 최고 흥행 기록을 세웠다니 하는, 용산참사를 다룬 <두 개의 문>이 겨우 7만을 넘겼다고 하는데. 하긴 일 년에 고작해야 열 손가락도 남을 만치 극장엘 가는, 올 해엔 독립영화 전용극장만 서너 번 간 게 전부인 사람도 떡하니 가서 봤으니 그럴 만도 하겠습니다. 하지만 모 영화감독이 “한 두 영화가 멀티플렉스 극장을 독점하고 있다. 동시대에 사는 영화인들이 만든 작은 영화들이 상영 기회를 얻지 못하고 평가도 받기 전에 사장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들. 여성 시나리오 작가 겸 단편영화 감독이 외롭게 자취방에서 숨을 거두는 일이 일어나고, 예술종합학교 학생들이 연이어 목숨을 끊는다고 한들. 우려는 잠깐이고 추세는 계속 될 듯싶습니다. 그러니 이만하면 편식 정도가 아니라 독식이라고 해도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고. 뭐가 됐든, 한 번 우~ 하고 몰려가면 이도저도 안 보고 휩쓸려 가는 게 유행이라면. 똑같은 등산복 차림으로 줄지어 오르다 때 아닌 병목현상까지 일어나는 것까지. 유행도 참 별나고 가지가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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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9 13:18 2012/11/19 13:18
태국까지 가서 억지를 부리는 모습을 보니 어이가 없는 게 다 뭡니까. 이젠 안쓰럽기까지 합니다. 불과 엊그제까지만 해도 죽은 물고기가 떼 지어 떠올랐다는 걸 못 봐서 하는 소리인지. 올 여름 유행어 중 하나가 ‘녹조라떼’라는 걸 못 들어서 하는 얘긴지. 4대강 본류엔 삽질하기 전부터 홍수 났단 말 들은 지 오래됐다는 걸 모르고 하는 말인지. 여든대는 것도 한 두 번이고, 자화자찬도 유분수지요. 4대강을 안했다면 나라 전체가 물난리가 났을 거라구요? 대체 제 눈으로 치적 확인하고 싶어 틈만 나면 나가보는 곳은 어디랍니까? 도시 사람들 멀리 차 끌고 와 타고 다니라고 만든 자전거도로 위랍니까, 쓰지도 못하는 물만 잔뜩 담아 두고 있는 거대한 보(洑) 위랍니까. 22조원이나 퍼부었는데도 여기저기서 예견한 일들이 , 예기치 않은 일들이 터져 나오는데도. 안에서나 밖에서나 잘했다고 떼만 쓰고 있고, 억지만 부리고 있으니. 정말 4대강엔 가보고나 일을 한 건지, 일 끝나고 가보기나 한 건지. 그가 보는 4대강과 우리가 보는 4대강이 다른 강들이나 한 건지. 참으로 궁금합니다. 
 
여든대다 : 떼를 쓰다. 억지를 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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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13 07:21 2012/11/13 07:21
사용자 삽입 이미지쿠바에서 혁명이 성공한 후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전역으로 혁명이 확산되는 걸 막기 위해 안간힘을 씁니다. 각 나라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을 통해 압력을 행사하기도 하고, 노골적으로 군부 쿠데타를 조장하기도 했지요. 하지만 독점자본과 미국의 후원을 받는 군부가 저지르는 횡포에 맞선 라틴 민중들은 되레 혁명으로 한발, 한발 나아갔습니다. 까닥 잘못하면 목숨도 잃고 나라도 망가질 수 있었는데 말이지요. 이런 분위기로 보자면 칠레 역시 마찬가지 길을 걸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게바라로 상징되는 무장봉기가 아닌 선거로 이룬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말하자면 ‘선거 혁명’이라 할 수 있는 것이지요.
 
1970년에 치러진 대통령선거에서 살바도르 아옌데는 인민연합 후보로 나서 36.2%의 득표율을 기록합니다. 이어 의회에서 열린 결선투표에 대통령으로 선출됩니다.
 
“내빈여러분, 여러분은 우리나라의 가난한 모습을 직접 보셨습니다. 칠레 역사의 전환점을 맞아 인민이 운명을 자신의 손에 쥐고 사회주의를 향한 민주주의적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봄을 맞이한 칠레는 온 셰계사람들과 형제가 되기를 원합니다.”
  
‘선거 혁명’을 이룬 칠레가 겪게 될 고난과 시련은 이미 선거 기간 내내 예고가 됐었습니다. 국유화와 토지재분배 같은 혁명적인 공약과 함께 사회주의 국가들과의 연대를 천명한 아옌데가 눈엣가시 같았던 미국이 저지른 일들 때문이었지요. 급기야 대통령 취임식을 전후해서는 쿠데타가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한편으론 구리 가격 폭락 조장 등을 통한 경제봉쇄를 하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1973년 9월 11일 아침. 칠레 국영라디오는 “산티아고에 비가 내린다.”는 방송을 반복해서 내보냅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고 하지요. 바로 군의 행동 개시 신호이자 대통령 궁을 향한 폭격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맞서 아옌데 대통령은 끝까지 자리를 사수하겠다는 최후 방송으로 화답합니다.
 
“동포 여러분, 쿠데타군이 라디와 방송을 끊어버릴 수도 었습니다. 제가 여러분 곁을 떠나야 할 수도 있습니다. 지금도 전투기가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총탄 세례를 퍼부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적어도 이 나라에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를 알아야 하는 이들이 있다는 점을 말입니다. 저도 그렇게 하겠습니다. 인민이 부여한 대로, 제 양심이 시키는 대로 인민의 대통령으로서 존엄함 제 직무를 끝까지 수행해나겠습니다.”
 
그리고 피델 카스트로가 혁명을 지키라며 준 자동소총을 들고 쿠데타군에 맞서다 사살당하고 맙니다. 선거로 사회주의 혁명을 이뤄낸, 역사상 전후 무후했던 칠레 사회주의 혁명 정부는 그렇게 막을 내립니다.         
 
<칠레, 또 다른 9.11>이란 부제를 달고 있는 <기억하라, 우리가 이곳에 있음을>은 살바도르 아옌데가 마지막 방송을 통해 칠레 민중이 다시 일어나 혁명을 완수할 것이라는 목소리와 쿠데타  직후 군에 체포돼 처형된 빅토르 하라의 노래, 베트남과 쿠바에서 쫓겨나 칠레를 갉아먹으려는 자들을 심판해야 한다고 외친 파블로 네루다의 시가 함께 실려 있습니다. 또 ‘트랙 2’로 불리는, 미국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군사쿠데타가 어떻게 진행됐는지도 알 수 있으며, 혁명 동지로 무한한 존경과 경의를 표했던 피델 카스트로와 혁명과 아버지를 잃은 슬픔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 베아트리스 아옌데의 연설도 함께 들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몰랐던 다른 ‘9.11’이 여기에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2001년 미국에서 벌어진 공중 테러뿐만 아니라, 1973년 칠레 대통령 궁에 가해졌던 폭격도 함께 기억하는 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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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05 13:14 2012/11/05 13:14

사용자 삽입 이미지바우길 ② 주문진 가는 길? 사천항 가는 길!(2012년 5월 27일)

 

태백을 출발할 때만 해도 괜찮았다, 날씨도 몸도. 기차가 동해를 지나 바닷가와 나란히 달릴 때쯤. 몸살기가 도는 가 싶더니 하늘에 먹구름이 낀다. 비가 온다는 얘기가 없었느니 괜찮겠거니 싶었는데. 정동진을 지나는데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진다. 더구나 덩달아 몸도 으실으실. 따뜻한 걸 먹으면 좀 나아질까, 없는 걸 겨우 찾아 마셔 봐도 그 때뿐. 다 허사다. 이까지 아프니. 아무리 오늘 걸을 길이 길지 않고, 해변가 마을들을 걷는다고 해도. 날씨에 몸까지 이러니 걱정이 앞선다. 그래도 강릉역 앞 안내소에서 일하시는 분 얘기론 소나기고 양도 많지 않을 거라니. 일단은 주문진으로 향한다.

 
아들바위는 지난번에도 구경을 못했는데 이번에도 그냥 지나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소돌에 도착하니 비는 오질 않지만. 걸어야 할 거리와 시간에 딱 맞춰 온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감기 기운 때문에 뭐라도 먹어야 할 것 같아서다. 하지만 늘 그렀듯 언젠가 다시 오겠지, 라는 말을 해보지만. 그때뿐인 걸 알아서인지 아쉽기만 하다. 그래도 되돌아서기엔 몸이 못 따라간다. 정말 이번만은 어쩔 수 없다. 얼큰하고 시원한 국물로 몸이라도 추슬러야한다. 그래야 오늘 걸을 길, 바우길 두 번째 걷기, 12구간 주문진 가는 길, 아니 사천항 가는 길을 걸을 수 있기에.
 
바우길 12구간은 길 이름이 보여주듯 주문진이 도착점이다. 하지만 고성에서부터 7번 국도를 따라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걷는 중이라. 오늘은 주문진 가는 길이 아니라 사천항 가는 길이 됐다. 원래부터 길을 만들 때부터 거꾸로 걷는 사람들도 염두에 둔 덕에 이정표도 잘 돼 있으니 걱정은 없고. 또 연휴에 몰려든 사람들로 복작복작한 주문진보다야 여유로운 사천항이 끝내는 곳으로는 더 적당할 것 같으니. 꼭 정해진 방향으로만 걷는 것보단 나을 수도 있겠다. 더구나 이어지는 4구간도 또 반대로 걸어야 하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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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바우길 12구간은 사천항에서 주문진으로 간다해서 주문진 가는길이란 이름이 있다>

 

뜨끈한 매운탕에 밥을 먹고 나니 한결 몸이 좋아진다. 덩달아 먹구름 사이로 통 보이질 않던 해도 고개를 내미니, 이제 슬슬 걸어볼까. 헌데 이런, 조금 걷다 보니 이번엔 오뉴월 해치곤 따가운 해가 등 뒤에서 비춘다. 다행히 짐을 가볍게 싸 가져왔고. 또 아직은 해가 짧은 탓에 금세 햇살이 잦아들겠거니 싶지만. 그래도 따가운 해를 피해 커피도 마시고, 바닷물에 발도 담그고 놀다.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또 신리하교를 건너 접어든 동네 뒷산 길. 푹신푹신한 솔잎이 잔뜩 깔려 있고. 지나는 작은 마을이며 숨바꼭질 하듯 보였다 안 보였다 하는 바다를 보니. 걷는 재미가 쏠쏠하고 수월하다. 아픈 몸을 참고 온 거며.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것 같은 날씨에도 일단 가보자, 며 온 것이. 참 잘했다, 싶고. 아무래도 이 바우길 마음에 쏙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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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하면 ‘감자바우’가 떠오른다. 둥글둥글하면서 제멋대로인 모양. 어느 하나 똑같은 게 없는 감자와 바우(강원도 말로 바위를 가르킨다)처럼. 개성이 서로 뚜렷하다는 걸 표현하는 것인지, 그저 감자가 많이 나는 곳이니. 편하게 붙인 것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것도 벌써 5년씩이나, 아직은 낯선 강원도에, 춘천과 태백에서 살고 걷기도 많이 걸었지만 말이다. 강원도 하면 ‘감자바우’요, ‘감자바우’하면 강원도라는 말은 따질 말이 아닌 듯하다. 그만큼 친근하기도 하고 익숙하기도 한 말이니.

 
바우길은 이런 강원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들과 많이 닮았다. 우선 동네 골목길을 돌아 뒷산으로 올라 돌아가는 길이 많다. 또 푸근한 인심과 웃음을 볼 수 있는 집들을 끼고 걸으니 친근하지 않을 수 없다. 숲길에 들어서도 고개만 돌리면 푸른 바다를 볼 수 있고, 바닷길을 걸으면서도 늘 산을 바라볼 수 있으니. 이만큼이나 강원도 풍경을 한껏 즐길 수 있을까, 싶을 만큼 친근하고 익숙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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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구간부터 죽 이어서 걸어도 좋고 마음 내키는 대로 숲길과 계곡길을 걷다, 심심할 쯤 하루 종일 바닷길을 걸을 수도 있다.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산꼭대기 등줄기만을 밟고 걷는 길, 산에서 바다로 나아가는 길, 바다에서 바다를 따라 걷는 길, 바다에서 산으로 올라가는 길, 산 위에서 한 걸음 한 걸음 바다를 밟듯 걷는 길, 바다와 숲길을 번갈아 걷는 길’이 바우길인 것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바람과 함께 아카시아 향이 코를 찌르고 파란 바다가 보일락 말락, 한 고개 넘으면 보였다 또 한 고개를 넘으면 보였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 숲길에서 내려오니 이번엔 탁 트인 바닷길인데, 이건 또 그냥 바닷길이 아니다. 작은 어촌마을 길을, 해송 숲길을 걸으니 마냥 바다만 보고 걷는 건 아닌 셈. 길가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지난 차들이 있지만 거기서 한 발 빗겨나니 이런 한적 길이. 도란도란 얘기꽃을 피우기도 하고 티격태격 이 말이 맞니 저 말이 맞니 하며 걸으니. 여기가 서해바다인가 싶게 빨간 노을이 등 뒤에 있다. 멀리 지나온 주문진이, 오르락내리락 동네 뒷산이 보일 때 쯤.
 
주문진 가는 길, 아니 주문진에서 사천항으로 가는 길, 끝이 보인다. 내처 5구간 강릉 바다 호수길을 따라 경포대까지도 걷고 싶은 마음도 들고. 다음 걷기를 위해 4구간 사천 둑방길을 따라 7번 국도가 보이는 길까지 걷고 싶은 마음도 들지만. 때맞춰 강릉까지 가는 버스도 있고. 아슬아슬하겠지만 태백 가는 버스 타기 전, 저녁 먹을 시간도 있을 법 하니. 오늘 하루 참 잘 걸었다, 다독이고 버스에 오르니. 금세 해가 지고 가로등 불이 환하게 켜진다. 
 
* 여덟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바우길 12구간 주문진 가는 길을 반대로 걸었다. 약 12km.
 
* 가고, 오고
지난 번 여행과 마찬가지.
 
* 잠잘 곳
당분간은 따로 소개하지 않아도 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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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30 13:29 2012/10/30 13:29
둘째 날, 무더위에 지쳐 겨우 덕산까지 걷고 성심원으로 향하다(2012년 7월 28일)
 
아침에 일어나니 어제 밤 나물을 다듬던 옆 방 일행들은 편백나무 숲으로 산책을 나갔다고 한다. 누군 아무리 늦게 도착해 녹초가 됐다고는 해도, 참 부지런들 하다. 그나저나 빨래가 하나도 마르질 않았다. 새벽 서리를 맞은 건지, 피곤한 몸에 꼭 짜질 못해서인지 모르겠지만. 배낭에 주렁주렁 매달고 가야할 생각을 하니 식전부터 심란하다. 하지만 어째, 일단 밥부터 묵고, 냉장고에서 얼린 물과 빈 생수통을 바꾸고, 어제 일을 교훈 삼아 단단히 맘을 먹고 출발한다. 다만, 오늘 잘 곳이 마땅치 않으니 덕산까지만 걷기로 하고.
 
위태를 감싸 안은, 안개인지 구름인지가 걷히니 아침인데도 또 땡볕이다. 갈치재에서 만난 대나무 숲도, 유점마을 느티나무 그늘 아래 평상도, 더위를 피하기는 쉽지 않다. 점심때도 멀었건만 벌써 얼음물은 반 이상 녹았고. 길 옆 감나무가 늘어선 긴 내리막길을 지나 겨우 도착한 중태마을 안내소에 도착히니 얼음은커녕 물도 없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며 느닷없이 사진찍자 달려든 부부 때문에 잠깐 웃기는 했지만. 이래서야 어디 덕산까지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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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꾸만 여서 자고 가라는 할마시들을 뒤로하고 땡볕에 다시 길을 나서니 다들 걱정스런 얼굴이다. 하긴 제 정신이 아니면 이 더위에 어찌 걸을 생각을 할까. 외지에서 온 사람들이나 되니 기어코 길을 나설 터이니. 할마시들로서는 이해가 되질 않을 터이다.

 
11시가 넘어 중태마을을 출발해 1시가 다 되 덕산에 도착했으니 시간상으론 겨우 3시간을 걸었을 뿐인데. 천평마을 못 미쳐 2층 평상에서 대자로 뻗어 쉬었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아스팔트길을 느릿느릿. 달팽이 기어가듯 걸었으니 걸은 길은 얼마 되지 않을 듯. 하지만 얼굴뿐만 아니라 종아리, 허벅지까지 뜨끈뜨끈. 배는 등에 붙고 기력은 완전 소진. 여서 더 갈 수 없다는 게 되레 다행이지, 싶다. 그런데도 맛난 걸 먹겠다고 이리저리 왔다 갔다. 몸만 더 고생이다.
 
셋째 날, 해질녘 강 따라 걷는 길, 성심원에서 산청읍까지(2012년 7월 29일)
 
하늘이 도왔나, 여름 성수기 때 방구하기가 쉽지 않을 터인데. 이 보다 더 좋은 민박을 구할 수 있을까 싶은 곳에 자리를 잡았다. 둘레길 안내소와 게스트하우스가 있는 경호강가 성심원.
 
어제 낮, 밥을 먹고 쉴만한 곳을 찾아 대원사까지 갔었지만 가는 곳마다 인산인해(人山人海). 여기저기 전화를 돌려보지만 역시나 방 없음 또는 턱도 없는 방 값. 이거 집에 가야 하나 전전긍긍하고 있던 차에 생각난 것이 당초 모래 자기로 했던 성심원이었는데.
 
방도 2개에 샤워실과 화장실이 따로 있고, 밥은 식당에서 먹긴 했지만 취사시설까지 있으니. 둘이 머물기엔 호사가 아닌가도 싶다. 게다가 덕산에서부터 성심원까지 건너뛰긴 했어도. 실은 백운계곡이니 웅석봉이니 하는 산들을 넘는 게 여간 부담이 되지 않아 다행이지 싶지만. 여기서 다시 둘레길을 이어가면 될 듯싶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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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늘어지게 책도 보고 산책도 할 수 있겠다 싶어, 하루 더 빌리기로 한 것이다. 해서 어제, 오늘 이방에서 저방으로 뒹굴뒹굴, 책보다 밥 먹고 낮잠 자고. 해질녘이 돼서야 산책도 할 겸 산청까지 쉬엄쉬엄 걸었다.

 

길을 잘 못 들어 과수원을 가로질러 가기도 걷기도 하고. 산한만 개에 놀라 뛰다시피 걷기도 하고. 여름철 물놀이며 래프팅을 즐기는 사람들이 내뿜는 매연을 피해 걷기도 하고. 노을 지는 강이 이뻐 한동안 멍하니 바라보기도 하고, 그러면서 말이다.

 

* 지리산 둘레길 걷기 첫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보통 둘레길은 시계방향으로 걷지만, 반대 방향으로 걸었다. 하동호-삼화실, 위태(상촌),-하동호, 덕산(사리)-위태 구간을 삼화실 바로 아래 이정마을에서부터 덕산으로 걸은 것. 여기에 덧붙여 수철-어천 구간 중 풍현(성심원)에서 바람재를 넘어 산청읍까지 산책하듯 걸었다. 첫째 날은 이정마을에서부터 위태까지 약 21km, 둘째 날은 위태에서 덕산까지 10km 남짓, 셋째 날은 6km 정도.
 
* 가고, 오고
태백에서 지리산까지는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버스로든 기차로든 여러 번 갈아 타야하고 시간도 많이 걸리기 때문이다. 뭐든 대략 6시간 내지 7시간 정도 걸리는데, 대구 쪽으로 가야 자주 있다.
 
* 잠잘 곳
이정마을과 바로 옆 삼화실에는 민박과 게스트하우스가 있으니 출발지로는 안성맞춤이다. 하동호 주변, 궁항리, 위태, 중태에는 숙박할만한 곳이 여럿 있으니 적당한 곳에서 쉬어 가면된다. 성심원에는 게스트 하우스가 있는데 식당 이용은 사전에 알아봐야 한다. 때맞춰 자원활동을 하러 온 이들이 있다면 저렴한 가격에 밥을 먹을 수도 있으니. 지리산 둘레길 공식 홈페이지에는 교통편, 숙박, 음식 등에 대한 더 자세한 후기들이 많으니 꼭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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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8 08:49 2012/10/18 0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