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1. 미완(未完)

『임꺽정(林巨正)』은 다 써진 얘기가 아닙니다. 마지막 <자모산성> 편을 보면 아시겠지만, 이제 막 얘기가 진행되는 시점에서 끝이 나고 있는데다, 임꺽정이 구월산에서 최후를 맞았다는 걸 생각해보면. 맞습니다. 단행본으로 10권에 달하는데 아직 못한 얘기가 남아 있다니. 홍명희가 건강상 문제가 없었다면. 또 1940년대라는 일제말기의 암울한 시대적 상황이 아니었다면(홍명희는 1930년대 들어 문학을 통해 자신이 가고자 했던 길을 가려고 했던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민족해방이 점차 요원해지는 1940년대가 되자 붓을 들기가 쉽지 않았던 듯합니다. 게다가 관군에 쫓겨 구월산에서 최후를 맞게 되는 임꺽정을, 우리 민중의 영웅의 최후를 쓴 다는 것은 더욱 그러했겠지요.). 문학사적 측면에서뿐만 아니라 요즘 우리 출판사상에서도 매우 보기 드문 장편역사소설이 됐을 것입니다. 물론 지금도 임꺽정에 비견할만한 역사소설은 흔치 않지만 말입니다.
 
2. 사회주의(社會主義)
식민지시기에 근대장편역사소설상 기념비적인 작품, 『임꺽정』을 쓴 벽초(碧初)는 작가라기보다는 오히려 사회운동가에 더 가까웠습니다. 3.1운동 당시 고향인 괴산에서 만세 시위를 모의, 조직, 주도했을 뿐만 아니라 1920년대 말에서 30년 대, 식민지시기에 최대 민족운동단체였던 신간회(新幹會) 결성과 운영을 주도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지요. 게다가 토오꾜오 유학시절부터 사회주의 사상을 접했던 홍명희는 3.1운동 이후 신사상연구회, 화요회, 정우회의 주요 회원으로 활동하게 됩니다. 조봉암, 박헌영, 김단야 등과 같이 해외에서 사회주의 이론을 체계적으로 학습한 이들과 같이 말입니다. 또 홍명희는 당시 문단에서 큰 세력을 떨치고 있던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동맹(KAPF)와도 관련을 맺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대선배로 대접받고 있었습니다. 이때는 『임꺽정』을 쓰지도 않았던 때인데 말입니다. 해방 후 홍명희는 1947년 남북연석회의 참가 차 평양에 갔다 다시 돌아오질 않았습니다. 이후 북에서 내각 부수상,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부위원장까지 지낸 후 1968년에 죽습니다.    
 
3. 기필(起筆)
『임꺽정』이 처음 조선일보에 연재된 것은 1928년입니다. 이해 11월 21일부터 이듬해 12월 26일까지 모두 300여회에 걸쳐 연재된 「봉단편」, 「피장편」, 「양반편」은 『임꺽정전』이라는 제목이었지요(당시 동아일보에는 이광수의 역사소설 『단종애사(端宗哀史)』가 연재되고 있었으니 후에 친일로 돌아선 이광수와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는 일이라 생각됩니다.). 이후 『임꺽정』은 홍명희가 신간회 민중대회 사건으로 검거, 구속되거나 어려서부터 유달리 병약했던 탓에 병고에 시달리면서 휴재와 연재를 거듭합니다. 2차 연재는 1932년 12월 1일부터 1934년 9월 4일까지, 3차 연재는 1934년 9월 15일부터 1935년 12월 24일까지, 4차 연재는 1937년 12월 2일부터 1939년 7월 4일까지 말입니다. 그러다 조선일보사가 강제 폐간이 된 후인 1940년, 「조광」이라는 잡지 10월 호에 「화적편」, ‘자모산성’장의 일부가 실린 것을 마지막으로 연재가 중단되고 맙니다.    
 
4. 민중사(民衆史)
『임꺽정)』에는 조선시대 민중들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장면들이 매우 세세히 묘사되어 있습니다. 개성 뚜렷한 등장인물들과 사실적인 배경 설명, 정사(正史)와 야사(野史)를 넘나들면서 전개되는 줄거리, 그리고 이들과 멋들어지게 어우러지고 있는 우리말의 향연. 적어도 이런 점들이 이 소설을 근대역사장편소설 가운데 최고로 꼽는 요인들일 것입니다. 이는 벽초가 『임꺽정』이 연재되기 시작한 시기 조선어와 조선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추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구요. 다른 한편으론 철저히 현실에 바탕을 둔 리얼리즘문학을 추구하지 못하고 있던, 조선 프로문학에 대한 반성적 글쓰기를 몸소 보여준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민족․민중 문학, 리얼리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직접 글로써 보여준 것이지요.      
 
5. 임꺽정(林巨正)
제4차 연재가 중단된 직후인 1939년에 단행본 『임꺽정』 제1권이 출간됩니다. 이때에는 전8권으로 임꺽정을 출간할 예정이었는데요. 11월에 2권이, 12월 3권, 이듬해 2월 4권이 각각 나오게 되지만 5권에 실릴 예정이었던 <화적편>을 비롯해 <봉단편>, <갖바치편>, <양반편>은 간행되지 못합니다. 그러다 해방 후, 1948년 을유문화사에서 『임꺽정』 전6권을 차례로 펴내게 되는데요. 이때 나온 『임꺽정』은 일제 강점기에 출간됐었던 초판 4권을 6권으로 읽기 좋게 나누었던 것입니다. 이에 맞춰 홍명희도 『임꺽정』을 완결하고 기왕에 나와 있던 것들도 수정하려는 의욕을 보이기도 했는데요. 1948년 남북연석회의 참가 차 북에 갔던 홍명희가 그곳에 남게 됨에 따라 끝내 이루지 못하게 됐습니다. 이후 『임꺽정』은 남쪽에선 금서가 됐고. 1985년 사계절출판사에서 다시 간행될 때까지 그 모습을 볼 수 없었습니다.        
 
6. 일일일독(一日一讀)
분량으로 치자면, 다 마치지 못한 얘기들까지 넣지 않더라도. 일단 권수가 10권이고 각권이 300페이지 내외이니 장편소설 치고도 꽤 많은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가만 보면 사설과 같아 건너뛰고 읽어도 무방할 것처럼 보일 수도 있는 <봉단편>만 해도 한권을 다 차지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러니 족히 보름이나 한 달은 잡아야 다 읽을 수 있을 터인데. 워낙에 나오는 사람도 다양하고 여기저기 동네 이름도 많으니. 그렇게 길게 잡고 읽으면 자꾸 앞쪽을 들추게 돼 되레 시간이 많이 걸리게 되고. 아예 책을 잡으면 하루 한 권은 읽는다, 마음먹어야 할 겝니다. 또 빈 종이에 등장인물들을 쭉 적어 놓고 가계도(家系圖)도 그려가며 읽어야 합니다. 그래야 짧은 시간에 책을 다 읽을 수 있을뿐더러. 나중에 그게 누구지? 라며 헛갈리지 않거든요. 하지만 뭐, 책이 워낙에 야무지게 재밌고 짜임새가 있으니 그냥 봐도 별 상관은 없지만 말입니다. 
 
* 이 글은 강영주가 쓰고 '창작과비평사'에서 펴낸 <벽초 홍명희 연구>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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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07 01:26 2013/02/07 01:26
지난 번 MB이 대통령에 당선 됐을 때도 그랬겠지요만. 그래도 그땐 딱히 기대를 걸만한 이가 없어 충격은 덜했을 겁니다. 그저 뚜벅뚜벅 갈 길을 가면 되지 했었거든요. 하지만 올 대선은 조금 달랐습니다.
 
물론 문재인이든 안철수든 누가 되도 결국은 다시 시작해야 하는 가다, 마음 다잡았지만. 5년간 이어졌던 절망이 또 이어지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또 박원순을 보고 있으려니 그래도 그네보단 낫겠지, 란 생각에. 마지막엔 유례없이 높은 투표율에 어쩜, 내심 기대를 했었던 건 아니었나.
 
선거 이후 뉴스도 인터넷도 모두 끊고, 글도 안 쓰고. 누가 보면 열렬 운동원이나 됐었던 것 마냥 며칠을 멍한 채로 지냈더랬습니다. 그리고는 고작 자조적으로 욕을 해대며 중얼거리는 짓이나 하고 있으니. 물론 그렇다고 어느 동네 수도, 가스, 전기 싹 다 민영화해달라며 울분을 터뜨리고. 뚝뚝 떨어져가는 아파트 값만치나 피눈물도 뚝뚝 떨어질 거라 저주를 퍼붓는 게 옳다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총체적 부실이라는 4대강 사업 감사원 결과가 나와도. 탈법과 편법을 관례라고 항변하는 헌재소장 후보 얘기가 나와도. 결국 구느름만 하고 있어서는 구렁이 담 넘어가듯. 아니 누가 뭐라 해도 깡그리 무시할 거라는 것. 지난 5년 동안 수도 없이 겪었지 않았더랬습니까.
 
그러니요. 이제 광장에서, 거리에서 촛불 들고 외치는 이들을 두고. 이제 그만하지,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손가락질 하진 않았으면 합니다. 다음 5년 후 투표소에서 보자라는 허황된 다짐이나 맹세 따윈 더 이상 하지 말잔 말입니다.   
 
구느름: 자조적으로 욕을 해대며 중얼거리는 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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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24 20:25 2013/01/24 20:25
사용자 삽입 이미지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역사인물 찾기 시리즈이니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도 한데. 당체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뇌봉’이라는 이름이 여간 흔하지 않은 이름이니 스쳐가듯 이라도 들었더라면 분명 기억 못 할리 만무하니 말입니다.
 
헌데 올 초 모 신문에 ‘레이펑’이란 이름이 올랐던 적이 생각났습니다. 혹여 그 사람이 아닐까 싶었었는데, 어이쿠 맞았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레이펑 사후 50주기를 맞아 ‘레이펑 정신 실천 캠페인’을 벌이겠다는 기사였던 것 같은데. 그 레이펑이 바로 뇌봉이었던 겁니다.
 
당시 신문을 다시 찾아보니. 관영언론을 통해 특집기사들을 내보내고 각 지방정부마다 이런저런 행사를 준비했다고 하네요. 심지어 ‘레이펑 배우기’ 우수자에게 의료, 주택, 취직 등의 혜택까지 주겠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나름 야심차게 일을 진행했던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그 후에도 별다른 소식이나 얘기가 없었던 걸 보면. 관료화된, 아니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당 지도부가 강요하는 도덕 재무장이란 게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인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요즘은 거진 헌책방을 기웃거리다 집어온 책을 읽게 됩니다. 뇌봉도 마찬가지. 외대 앞 헌책방 한 귀퉁이에서 골라왔지요. 하지만 책도 오래됐고 주인공 뇌봉도 오래 전 사람이지만. 그가 가다듬고 실천한 정신과 사상은 다시 되새겨야 할 것들이 많을뿐더러. 다 읽고 나면 감히 나서서 본받자, 따르자 할 사람도 아니란 걸 알게 되니.
 
언제 적 얘기냐며 덮어두기엔 아까운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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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9 20:23 2013/01/19 20:23

바우길 ③ 나눠서 걷는 사천둑방길: 여우비 맞으며 사천에서 해살이마을까지(2012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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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사천(沙川)은 모래가 많은 냇물이 흐른다해 모래내라고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천진리 해변가 모래만 해도 예전만 못하고. 사천천(沙川川)가도 여기저기 아스팔트로 포장된 반듯한 둑방과 보(洑)들로 그 이름이 무색하다. 지금이야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간판들로 한과로 유명한 마을이구나 싶지만, 그것도.
 
‘호당 농가소득이 인근 전업농에 비해 월등히 높은데다 부채마저 없는, 고소득 마을’로 바뀐 터라. 또 강릉 시내와 가까운 곳이어서인지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길을 내고 호사스런 집들을 지어 대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덩치가 산만하고 소리 하나로도 기를 팍 꺾게 만드는 개들이 심심찮게 많다. 해서 조용히 걷기엔 그닥 좋지만은 않다.     
 
또 둑방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긴 하지만. 구불구불 모래톱을 만들며 흘러가는 물 대신, 철마다 흐드러진 꽃을 피워내는 보드라운 흙 대신. 반듯하게 흐르는 강물에, 아스팔트로 발라진 둑방이라 걷는 맛은 덜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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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쪽으로는 깨끗한 바다가, 뒤로는 준엄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마을 뒷산, 사천천 양쪽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사이로 난 농로와 둑방길을 번갈아 걸으며,  
 
하평마을은 강릉 시내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해안 농촌마을이다. 강릉 곳곳에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듯. 이곳 역시 허 남매의 외가인 애일당(愛日堂) 김참판이 살았던 곳으로도 알려졌다.
 
이 마을에서는 음력 2월 초엿새 좀생이날* 저녁이면 마을 주민들이 다리에 모여 횃불을 들고 그 해 농사가 잘 되기를 빌며 다리밟기를 했다. 이런 횃불놀이, 불놀이, 다리밟기는 다른 지방과 다를 바가 없긴 한 것이지만 좀생이날에 행하는 것은 이 마을이 유일하다.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으로 종교적이면서도 놀이적인 것들이 어우러진 하평답교놀이는 횃불, 솔문 같은 것들을 태워 황덕불을 해놓고는 밤을 새워가며 축제를 즐긴다.
 
는, <사천둑방길>이 끝나는 곳. 아니 거꾸로 걸으면 시작하는 곳에서 만나는, 하평마을과 답교놀이 얘기와.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사기막리 마을은 200년 전 사기 막사발을 만들던 움막이 많아 ‘사그막’ 또는 ‘사기막’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지금도 가마터와 사기그릇 잔흔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마을에서 빚은 사기 막사발은 ‘옛날 서민들의 마음을 담은 밥그릇이 되기도 했고, 애환을 달래줄 술잔이 되기도 했으며, 그윽한 향기를 담은 찻잔이 되기도 했다.’
 
해살이라는 이름은 요즘은 희귀식물이 된 창포가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볕이 들기만 하면 잘 자란다 하여 "해살이풀" 이라고도 하고 여러 증상에 도움을 주는 약초로 아픈 것의 해답이 된다 하여 "해답이풀" 이라 불리기도 한 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는, 명주군왕릉에서 산을 넘어 처음 만나는. 반대로 걸으면서 그것도 나눠 걷느라 오늘은 여기까지다, 멈춰 선. 해살이마을과 ‘사기막’ 얘기를 찾아간다면. 아무리 천천히 둘러보며 걷는다 해도 세 시간이면 넉넉할 만큼 짧은 길이라도, 걷는 재미만큼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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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처음 길을 나설 땐 등 뒤가 따가우리만치 해가 쨍쨍 떴는데. 농로에서, 둑방에서 두어 차례 여우비를 맞으며 걷다가. 허기질 때쯤 나타난 막국수집에서 목도 축이고 배도 채우고.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해도 뉘엿뉘엿. 버스 정류장에 앉아 담아둔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많이, 많이 남으니. 내처 명주군왕릉까지 걸어 볼까, 싶기도 하다.  

 
* 좀생이날은 음력으로 이월 초엿새 날이다. 이날 서쪽 하늘에 모여 있는 작은 별들을 보고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는데, 이 별들을 좀생이라 부르기 때문에 좀생이날이라고 한다.
 
* 아홉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바우길 4구간 사천둑방길을 또 거꾸로 걸었다. 사천 해변에서 해살이마을까지 약 12km.
 
* 가고, 오고
지난 번 여행과 마찬가지.
 
* 잠잘 곳
사천 해변에는 잠잘 곳이 많으나 해살이마을, 명주군왕릉까진 식당만 몇 개 있을 뿐이고 숙박할 곳이 없다. 다만 걸어서 한 기간 거리에 저렴한 가격에 아침까지 먹을 수 있는 바우길 게스트 하우스가 있긴 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서고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는 버스 시간을 꼭 확인해야 하고, 또 시간보다 미리미리 정류장에 나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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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2 17:59 2012/12/22 17:59
주말에 재미난 일이 있었지요. ‘Orange’이후 잠잠했던 전 국민 영어 공부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미국이라면 껌뻑 죽는 이들인데 ‘TIME’에 후보 얼굴이 나왔으니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야말로 덮어놓고 떠벌인 건데. 끝나고 보니 이건  본전도 못 찾은 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가’가 ‘김정일’이랑 동급이란 걸 광고한 셈이니. 대체 ‘강력한 지도자’가 뭐랍니까. 설마하니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 몰입교육 시키는 나라에서 그 정도 단어 뜻도 모를 거라 생각했을 건 아닐 테고. 주변에 ‘어뢴지’, ‘어뢴지’하는 사람들만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닐 터인데. 게다가 기사는 꼼꼼히 읽어보기나 한 건지. 아니 이도저도 다 제쳐놓고. 많고 많은 사진들 가운데 쌍클한 얼굴을 표지로 쓴 것만 봐도 딱 답이 나와 있는 걸.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아무튼 덕분에 전세계적으로다 망신 한 번 또 톡톡히 당했으니. 재미난 일이라고 웃어넘기기엔 좀, 아니 많이 창피합니다.  
 
쌍클하다 : 매우 못마땅하여 성난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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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0 12:58 2012/12/10 12: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