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자 삽입 이미지실천문학사에서 펴낸 역사인물 찾기 시리즈이니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도 한데. 당체 처음 듣는 이름이었지요. 그도 그럴 것이 ‘뇌봉’이라는 이름이 여간 흔하지 않은 이름이니 스쳐가듯 이라도 들었더라면 분명 기억 못 할리 만무하니 말입니다.
 
헌데 올 초 모 신문에 ‘레이펑’이란 이름이 올랐던 적이 생각났습니다. 혹여 그 사람이 아닐까 싶었었는데, 어이쿠 맞았습니다. 중국 공산당이 레이펑 사후 50주기를 맞아 ‘레이펑 정신 실천 캠페인’을 벌이겠다는 기사였던 것 같은데. 그 레이펑이 바로 뇌봉이었던 겁니다.
 
당시 신문을 다시 찾아보니. 관영언론을 통해 특집기사들을 내보내고 각 지방정부마다 이런저런 행사를 준비했다고 하네요. 심지어 ‘레이펑 배우기’ 우수자에게 의료, 주택, 취직 등의 혜택까지 주겠다는 말까지 나왔으니. 나름 야심차게 일을 진행했던 것도 같습니다.
 
하지만 그때도 시대착오적이라는 비판이 있었는데. 그 후에도 별다른 소식이나 얘기가 없었던 걸 보면. 관료화된, 아니 새로운 지배계급이 된 당 지도부가 강요하는 도덕 재무장이란 게 얼마나 현실과 동떨어진 소리인지, 몰랐던 모양입니다.    
 
요즘은 거진 헌책방을 기웃거리다 집어온 책을 읽게 됩니다. 뇌봉도 마찬가지. 외대 앞 헌책방 한 귀퉁이에서 골라왔지요. 하지만 책도 오래됐고 주인공 뇌봉도 오래 전 사람이지만. 그가 가다듬고 실천한 정신과 사상은 다시 되새겨야 할 것들이 많을뿐더러. 다 읽고 나면 감히 나서서 본받자, 따르자 할 사람도 아니란 걸 알게 되니.
 
언제 적 얘기냐며 덮어두기엔 아까운 책임에 틀림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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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1/19 20:23 2013/01/19 20:23

바우길 ③ 나눠서 걷는 사천둑방길: 여우비 맞으며 사천에서 해살이마을까지(2012년 6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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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 사천(沙川)은 모래가 많은 냇물이 흐른다해 모래내라고 불렸던 곳이다. 하지만 지금은 사천진리 해변가 모래만 해도 예전만 못하고. 사천천(沙川川)가도 여기저기 아스팔트로 포장된 반듯한 둑방과 보(洑)들로 그 이름이 무색하다. 지금이야 고개만 돌리면 보이는 간판들로 한과로 유명한 마을이구나 싶지만, 그것도.
 
‘호당 농가소득이 인근 전업농에 비해 월등히 높은데다 부채마저 없는, 고소득 마을’로 바뀐 터라. 또 강릉 시내와 가까운 곳이어서인지 돈깨나 있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길을 내고 호사스런 집들을 지어 대고 있어. 지나는 사람들을 깜짝깜짝 놀라게 하는, 덩치가 산만하고 소리 하나로도 기를 팍 꺾게 만드는 개들이 심심찮게 많다. 해서 조용히 걷기엔 그닥 좋지만은 않다.     
 
또 둑방길이란 이름이 붙어 있긴 하지만. 구불구불 모래톱을 만들며 흘러가는 물 대신, 철마다 흐드러진 꽃을 피워내는 보드라운 흙 대신. 반듯하게 흐르는 강물에, 아스팔트로 발라진 둑방이라 걷는 맛은 덜할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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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앞쪽으로는 깨끗한 바다가, 뒤로는 준엄한 산으로 둘러싸인. 마을과 마을 뒷산, 사천천 양쪽으로 펼쳐진 너른 들판사이로 난 농로와 둑방길을 번갈아 걸으며,  
 
하평마을은 강릉 시내에서 북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위치한 전형적인 해안 농촌마을이다. 강릉 곳곳에 허균과 허난설헌 남매와 관련된 이야기들이 있듯. 이곳 역시 허 남매의 외가인 애일당(愛日堂) 김참판이 살았던 곳으로도 알려졌다.
 
이 마을에서는 음력 2월 초엿새 좀생이날* 저녁이면 마을 주민들이 다리에 모여 횃불을 들고 그 해 농사가 잘 되기를 빌며 다리밟기를 했다. 이런 횃불놀이, 불놀이, 다리밟기는 다른 지방과 다를 바가 없긴 한 것이지만 좀생이날에 행하는 것은 이 마을이 유일하다. 풍년을 기원하는 세시풍속으로 종교적이면서도 놀이적인 것들이 어우러진 하평답교놀이는 횃불, 솔문 같은 것들을 태워 황덕불을 해놓고는 밤을 새워가며 축제를 즐긴다.
 
는, <사천둑방길>이 끝나는 곳. 아니 거꾸로 걸으면 시작하는 곳에서 만나는, 하평마을과 답교놀이 얘기와.
 
높은 산들이 병풍처럼 둘러쳐진 사기막리 마을은 200년 전 사기 막사발을 만들던 움막이 많아 ‘사그막’ 또는 ‘사기막’이라고 불렸던 곳으로 지금도 가마터와 사기그릇 잔흔들을 쉽게 찾을 수 있다. 이 마을에서 빚은 사기 막사발은 ‘옛날 서민들의 마음을 담은 밥그릇이 되기도 했고, 애환을 달래줄 술잔이 되기도 했으며, 그윽한 향기를 담은 찻잔이 되기도 했다.’
 
해살이라는 이름은 요즘은 희귀식물이 된 창포가 마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서 붙여진 것이다. 볕이 들기만 하면 잘 자란다 하여 "해살이풀" 이라고도 하고 여러 증상에 도움을 주는 약초로 아픈 것의 해답이 된다 하여 "해답이풀" 이라 불리기도 한 것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는, 명주군왕릉에서 산을 넘어 처음 만나는. 반대로 걸으면서 그것도 나눠 걷느라 오늘은 여기까지다, 멈춰 선. 해살이마을과 ‘사기막’ 얘기를 찾아간다면. 아무리 천천히 둘러보며 걷는다 해도 세 시간이면 넉넉할 만큼 짧은 길이라도, 걷는 재미만큼은 쏠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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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처음 길을 나설 땐 등 뒤가 따가우리만치 해가 쨍쨍 떴는데. 농로에서, 둑방에서 두어 차례 여우비를 맞으며 걷다가. 허기질 때쯤 나타난 막국수집에서 목도 축이고 배도 채우고.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해도 뉘엿뉘엿. 버스 정류장에 앉아 담아둔 사진을 한 장, 한 장 넘겨보고 있으니. 왠지 모르게 아쉬움이 많이, 많이 남으니. 내처 명주군왕릉까지 걸어 볼까, 싶기도 하다.  

 
* 좀생이날은 음력으로 이월 초엿새 날이다. 이날 서쪽 하늘에 모여 있는 작은 별들을 보고 풍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는데, 이 별들을 좀생이라 부르기 때문에 좀생이날이라고 한다.
 
* 아홉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바우길 4구간 사천둑방길을 또 거꾸로 걸었다. 사천 해변에서 해살이마을까지 약 12km.
 
* 가고, 오고
지난 번 여행과 마찬가지.
 
* 잠잘 곳
사천 해변에는 잠잘 곳이 많으나 해살이마을, 명주군왕릉까진 식당만 몇 개 있을 뿐이고 숙박할 곳이 없다. 다만 걸어서 한 기간 거리에 저렴한 가격에 아침까지 먹을 수 있는 바우길 게스트 하우스가 있긴 하다. 그렇지 않으면 어디에서고 하루에 몇 번 다니지 않는 버스 시간을 꼭 확인해야 하고, 또 시간보다 미리미리 정류장에 나와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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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22 17:59 2012/12/22 17:59
주말에 재미난 일이 있었지요. ‘Orange’이후 잠잠했던 전 국민 영어 공부시간이 돌아왔기 때문입니다. 안 그래도 미국이라면 껌뻑 죽는 이들인데 ‘TIME’에 후보 얼굴이 나왔으니 얼마나 좋았을까요. 그야말로 덮어놓고 떠벌인 건데. 끝나고 보니 이건  본전도 못 찾은 꼴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박정희가’가 ‘김정일’이랑 동급이란 걸 광고한 셈이니. 대체 ‘강력한 지도자’가 뭐랍니까. 설마하니 초등학교 때부터 영어 몰입교육 시키는 나라에서 그 정도 단어 뜻도 모를 거라 생각했을 건 아닐 테고. 주변에 ‘어뢴지’, ‘어뢴지’하는 사람들만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닐 터인데. 게다가 기사는 꼼꼼히 읽어보기나 한 건지. 아니 이도저도 다 제쳐놓고. 많고 많은 사진들 가운데 쌍클한 얼굴을 표지로 쓴 것만 봐도 딱 답이 나와 있는 걸.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는지. 아무튼 덕분에 전세계적으로다 망신 한 번 또 톡톡히 당했으니. 재미난 일이라고 웃어넘기기엔 좀, 아니 많이 창피합니다.  
 
쌍클하다 : 매우 못마땅하여 성난 빛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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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0 12:58 2012/12/10 12:58

김지하를 ‘나의 영웅’이었다고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어찌 김동춘 샘 한 분뿐이겠습니까. 그이 말마따나 그이 시대 청춘들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많은 이들이 그의 글로부터 ‘박정희 체제를 비웃을 수’있었고, ‘민주화 투쟁 의지를 불태울 수’있었기 때문이었지요.

 
그런 그가 아버지 박정희를 등에 업은 박근혜를 지지하고 나섰으니 세상 일, 참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1991년 ‘죽음의 굿판을 걷어치워라’며 호통 치던 김지하를 떠올리면 세상 일, 결국 다 제 갈 길대로 가는 것이구나 싶습니다.
 
그런데도 걱정이 되는 건. 기실 조선일보에 글을 쓸 때부터 ‘변절’이니 ‘전향’이니 하는 말들이 돌기는 했어도, 이번만큼이나 싶겠거니 했지만. 백낙청 선생에겐 열 가지나 되는 이유를 대며 ‘깡통 빨갱이’이라 비난하고, 리영희 선생에겐 ‘깡통 저널리스트’라는 막말까지 하는 걸 보니.
 
이러다 김동춘 샘은 ‘그를 따뜻하게 품어주지 못한 운동 세력의 좁은 품’이라고 안타까워했건만, 되레 더 험한 말이 나오지나 않을까 싶어서 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해야 할 말은 좀 하는 게 낫겠다 싶은데. 
 
따지고 보면 딱 김지하만이 아니라도 김문수니, 황석영이니, 김정환까지도. 예전 자신 모습을 부정하는, 아니 삶을 지탱해주고 사회를 진보(進步)시켜줬던 사상까지 다 내팽개치고. 싸움의 대상이었던 자들을 이제는 치켜세우는 자들이 심심치 않게 나타나니. 육당(六堂)과 춘원(春園)이 백년 후에 다시 등장한 것 마냥. 일견 개인들의 문제를 넘어 우리 사회가 가진 병리현상이 아닌가도 싶습니다.  
 
게다가 백낙청 선생을 욕하며 ‘못난 쑥부쟁이’에 비유를 하는 모습을 보면서는. 본인이야 무슨 구구절절한 사연까지도 잘 알고 있으니 이런 비유를 들었겠지만. 실은 처음 들어보는 절들은 눈에도 들어오질 않았고. 다만 빌어먹을 삽질, 사(死)대강 사업을 하면서 밀어버린 ‘단양 쑥부쟁이’가 떠올랐던 건.
 
‘생명사상’이니 ‘후천개벽사상’이니 하는 게 결국 ‘자본론’과 ‘경제학․철학 본고’, ‘도이치 이데올로기’를 읽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도 없는. ‘지하실에 가본 적이 한 번이라도’ 없는 이들에겐 넘을 수도 없는 심오한 사상이었구나, 무릎이 딱 쳐질 뿐이니.
 
‘나의 여웅’이란 이미 십 수 년 전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아니 이제와 삿대질 하며 저긴 내가 살던 곳이 아니다 몸부림치는 원로(遠老)가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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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04 19:59 2012/12/04 19:59
사용자 삽입 이미지1936년, 스페인에서는 사회당과 공산당을 포함한 좌파 정당들과 무정부주의자들, 자유주의 정당과 자치주의자들이 연합한 <인민전선>이 선거에서 승리를 합니다. 흔히 알고 있는 칠레 아옌데 사회주의 정부보다 앞선 것이지요. 그리고 또 잘 알고 있듯이 <인민전선> 또한 낡은 사회관계를 과감히 변화시켜 나갔습니다. 토지개혁을 단행했으며 지배세력과 함께 하고 있었던 가톨릭에 맞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나도 또 또렷이 기억하고 있듯, <인민전선> 역시 프랑코를 중심으로 한 파시스트 세력들이 일으킨 반동에 맞닥뜨리게 됩니다.
 
내전은 곧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이 군대와 무기를 지원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의 전초전 적인 성격을 띠게 됩니다. 하지만 파시즘에 맞선 이들은 같은 이름을 가졌던 프랑스의 <인민전선> 정부도, 되레 프랑코에게 호감을 표하고 있었던 영국도 아니었습니다. 소련은 무기를 팔아먹는 데만 급급했을 뿐만 아니라, 내전을 통해 자신들의 지배력을 확대하려는 의도만 있을 뿐이었지요.
 
스페인 동부의 대도시에서 “기관총 진지를 택시들이 시속 백 킬로미터로 달려가 부수어(「카탈로니아 찬가」, p.70)” 버리며 파시스트들을 물리친 노동자, 농민들은 “노동자 순찰대, 노동조합에 기반을 둔 노동자 의용군 등을 통해 거칠게나마 노동자 정부를 세워보려는 시도(「카탈로니아 찬가」, p.70)”를 합니다. 봉기에 우왕좌왕하던 <인민전선>을 대신해 혁명을 더욱 앞으로 밀고 나가기 시작한 것입니다. 하지만 스페인 내전은 이로 인해 더 복잡한 양상을 때게 됩니다. 조지 오웰이 「카탈로니아 찬가」를 “솔직히 정치적인 소설(「동물농장」,, <나는 왜 쓰는가>, 민음사, 2005, p.142)”이라고 한 이유가 되는 제11장을 비롯해, 제5장에 쓰여 있듯 말입니다.
 
오웰, 헤밍웨이, 앙드레 말로, 파블로 네루다 등 전 세계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스페인 혁명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총을 든 이들에게 “만화경 같은 정당과 노동조합들, 그리고 그 짜증나는 이름들 - P.S.U.C., P.O.U.M., F.A.I., C.N.T., U.G.T., J.C.I., J.S.U., A.I.T. - 은” 좀체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오웰이 말한 바대로 「파시즘과 싸우기 위해서」 또는  「공동의 품위를 위해서」라는 대의 앞에는 예상치 못했던 장벽이 놓여있었던 것이지요. 결국 혁명에 대한 약속은 너무 쉽게 깨졌고 배신과 좌절이 뒤를 따르게 됩니다.
 
「카탈로니아 찬가」는 조지 오웰이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전해 겪은 일을 기록한 ‘소설’입니다. 하지만 “스탈린주의에 적대적인 사회주의자들의 책을 많이 내는 바람에 공산주의자들의 따돌림으로 운영도 어렵던 프레드릭 워버그의 출판사에서 1928년 4월”이 돼서야 나온 것만 보더라도. 또 공공연히 오웰 자신이 정치적인 목적에 의해 썼다고 말했듯이 ‘소설’ 그 이상의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아니 <나는 왜 쓰는가>에서 말했던 ‘역사적 충동’과 ‘정치적 목적’의 동기를 가장 충실히 따른 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전체주의에 <반대>하고 내가 아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위해>(「동물농장」,, <나는 왜 쓰는가>, 민음사, 2005, p.141)” 쓴 글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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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1/25 15:09 2012/11/25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