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처음 궁동 주말농장에서 5평 남짓한 밭을 빌렸을 땐. 작은 모종이 어느새 자라 토마토며 고추며 가지를 만들어내는 게 신기해 연신 사진만 찍어댔지요. 

 

삼천동 밭 100평을 임대해 모양새는 좀 나는 밭농사다운 밭농사를 했던 재작년엔. 사진만 찍던 것에서 조금 더 나아가 농사일지라는 걸 쓰기 시작했습니다. 언제 무엇을 심었고, 언제 무엇을 수확했는지 정리한 것이지요.

 

올해도 농사를 짓게 된 만천리 밭을 만난 작년엔. 무엇을 심고 무엇을 수확한 것에 덧붙여 밭에 나간 날만큼은 날씨까지 적으면서 나름 농사일지 다운 일지를 써보겠다고 했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올해. 올해엔 재작년과 작년보다 더 꼼꼼히 적어야겠다, 마음을 먹습니다. 작물이 자라는 모양새에 절기의 변화에 따른 농사준비까지 말이지요. 이렇게 하나하나 기록을 하다보면 어떤 땅에서 어떤 게 잘 자라고, 어떤 날씨에 어떤 건 잘 안 되는지. 작물별로 그 특성들을 자연스레 알 수 있지 않을까요.

 

2.

궁동 주말농장에선 써 놓은 게 없으니 정확치는 않지만. 찍어 놓은 사진을 보니 4월 29일에 상추며, 고추 모종을 옮겨 심은 것 같구요. 춘천으로 와 처음 밭농사를 했던 재작년엔 4월 30일에 퇴비를 뿌리고, 5월 13일에 첫 모종을 심었습니다. 그리고 작년엔 5월 7일에 감자를 시작으로 토마토, 가지, 오이, 애호박 등을 9일부턴 고추를 심었구요. 올해엔.

 

밭을 다시 구하고 어쩌고 하지는 않았다고 쳐도. 또 당장 뭘 심지는 않을 것이긴 하지만. 4월 7일에 퇴비를 뿌리고 엊그제 밭을 갈았는데도. 어찌된 게 빠르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으니요. 겨우 삼년 텃밭 수준의 농사짓고 이런 말을 하는 게 우습기도 하겠지만. 농사를 시작하는 날짜가 조금씩 앞당겨지고 있다는 게 심상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지난주엔 4월 초순 날씨라고는 믿기지 않게 낮 기온이 20도까지 오르기도 하고. 예년에 비해 많았던 겨울눈과 비, 그리고 꽃샘추위 때문에 일조량이 낮아 꽃 피는 시기가 작년에 비해 좀 느리다고는 하지만. 평년에 비하면 개나리며, 진달래, 벚꽃 등이 빠른 건 열흘까지도 빨리 폈다고 하니까요. 뭔가 좀 이상하긴 하지요.

 

3. 

여기저기서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책을 만든다고 토론회다, 책이다, 벌이고 펴내고 있습니다. 또 무슨무슨 센터를 만드네, 부처를 새로 신설하네, 분주합니다. 그리고 날씨가 변하면 가장 많은 영향을, 또 직접적인 영향을 받게 될 농업분야에서도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하지 않나, 하는 얘기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곰곰이 얘기들을 들어보고 있자니. “제주도와 남해안 일부 지역에 해당했던 아열대 기후가 점차 충청도와 경기도로 확장될 것으로 예측”되니 “기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품종개발과 농업용수 관리, 생산기술 개발 등이 절실하다”는 말들이 꽤나 많습니다. 그리고 그 말들 속에는 벼 이모작 확대, 난대성 및 아열대 과일 재배기술 보급, 아열대 채소류 적응 연구가 필요하다는 주장도 따라 나오고 있구요.

 

사실 강원도로 이사를 가자, 결정하게 된 데에는 앞으로 농사를 짓는데 딱 이다, 싶은 판단이 들어서였지요. 벌써 사과는 물론이고 포도까지 재배가 가능한 걸 보면. 비록 다른 지역에 비해 땅이 척박하고 산지 지형이라는 약점이 있기는 하지만. 따뜻해지는 날씨 덕에 그동안은 엄두도 내지 못했던 여러 작물들을 길러낼 수 있겠다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물론 변화하는 기후에 발맞춰 새로운 작물을 심기도 하고 그러면서 적응력을 길러내는 것도 중요하겠지요. 하지만 농업용수 관리라는 이유를 들어 자연스런 물길을 막거나 부러 곧게 펴는 것은 옳은 방향은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갯벌을 메워 만든 새만금에, ‘녹색성장’이란 되도 않는 말을 갖다 붙이면서 농업부문 전진기지를 개발하자고 하는 건 그야말로 혹세무민일 뿐입니다.        

 

4. 

언제부터인가 날이 좀 추워진다 싶으면 그새 겨울이고, 풀린다 싶으면 금방 더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봄, 가을이 짧아진 게지요. 또 눈이든 비든 내렸다하면 감당하지 못할 만큼 쏟아내는 일이 잦아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방송이다 언론에선 하루는 지구 반대편에서 발생한 또 하루는 바로 이웃 동네에서 일어난 이상 기후 현상들을 토해내고 있지만. 

 

어느새 한여름엔 창문을 꽁꽁 닫아두고는 전기로 찬바람 만들고. 겨울엔 여름에나 입을 반팔 옷을 입으면서도 또 전기로 따뜻한 공기를 만들어내는 데 무척이나 익숙해져만 가고 있는 모습에. 

 

가만두면 스스로 정화하고 치유하는 강물에 삽을 들어 생채기를 내고. 기껏 발전 기업에 부과된 ‘신재생 에너지 할당’을 채워주려 또 갯벌을 막으려하고.* 기후변화에 따른 곡물가격의 상승에 대비해 GMO 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노력을 하자고 하는 이 나라 국책농업연구기관의 연구관이 하는 말**을 듣고 있자니.

 

빨라지는 봄을 걱정하는 건. 하늘을 보며 내일의 날씨를 점치고. 때를 맞춰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두는. 들판의 농부님네들만일런지요.

 

* 영종도, 용유도, 장봉도와 강화도 남부의 갯벌과 해류를 틀어막는 '인천만 조력발전소', 강화 본섬과 석모도, 서검도, 교동도를 북쪽으로 이어 역시 그 일대의 갯벌과 해류를 막는 세우는 '강화 조력발전소'가  2012년부터 전체 발전량의 10퍼센트'까지 이른바 '신재생 에너지'로 충당해야 하는 '신재생 에너지 의무 할당제' 때문이라는 주장이 있는데요. 벌금 액수가 상당해 발전 기업마다 태양력이니, 풍력, 소수력, 지력, 조력과 같은 신재생 에너지원을 확보하는 일이 시급하답니다. 이 때문에 여기저기 무분별한 '개발'의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게 작금의 '신재생 에너지' 정책입니다.

 

**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00416030004   4월 16일자 서울신문 기고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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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6 17:40 2010/04/16 17:40

퇴비 넣어주기

from 10년 만천리 2010/04/12 12:40

퇴비를 사다놓고(4월 5일/맑음 0-18도)

 

아침부터 부산하다. 마음 같아선 퇴비를 사는 김에 아예 다 뿌려놓을까도 싶지만. 한쪽에 다 털지 못한 콩도 남아있고. 밭을 갈기 전 비닐 쪼가리 하나라도 더 집어내려면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다.

 

퇴비는 작년에 비해 포대 당 이백 원이 내려갔는데 용달비는 만원이 올랐다. 기름 값도 안 나온다는 말에 그럽시다, 했지만. 삼십분이면 끝나는 일에 사만원이라니. 좀 심하다 싶다. 하지만 그렇게 일하고 나면 오전 중엔 다른 일을 하기가 쉽지 않으니 이쪽 입장에선 비싸다해도 저쪽 입장에선 그렇지가 않을테다. 그래. 아무 말 않고, 고맙습니다, 하고 말았다.

 

한 귀퉁이에 퇴비를 쌓아놓고는 콩을 밭 가운데 경계가 되는 돌무더기 쪽으로 옮기고 나니 여기저기 떨어진 콩이 꽤나 많다. 우선 눈에 띄는 비닐부터 치우고 또 지주들도 한쪽으로 옮겨놓고는. 근 한 시간 반이 넘게 쭈그리고 앉아 콩을 줍는데. 오가는 사람들마다 뭐 하는가 싶어 힐끗힐끗 쳐다본다. 봄나물이라도 캐는가 싶어서.

 

그렇게 콩 줍고 쌓아놓은 퇴비에 가림막을 쳐놓으니 그새 점심때다. 많이 오지는 않는다고 하지만 내일 오전에 비소식이 있어 마음 같아선 퇴비를 다 뿌리고 싶지만 뱃속 시계가 어찌나 정확한지. 아무래도 퇴비는 내일이나 뿌려야 할 듯. 

 

퇴비 넣어주기(4월 6일/맑고 바람 셈 5-14도)

 

잔뜩 찌푸린 날씨 탓에 하늘만 바라보다 허망하게 오전을 다 보냈다. 예보로도 비가 온다고 했고, 금방이라도 비를 쏟아낼 것처럼 먹구름이 있었는데. 빗방울 하나 떨어지지 않더니 점심때가 되서는 해가 배꼼 얼굴을 내민다. 이런.

 

서둘러 이른 점심을 먹고 밭에 나가 어제 사다 놓은 퇴비를 넣어준다. 바람이 세게 불긴 해도. 4월 날씨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치 따가운 햇볕에 땀이 날 지경인지라 되레 이편이 낫다. 두 시간 남짓 퇴비 뿌리고 어제 줍다만 콩 마저 주워 담으니. 밥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그새 배가 고프다.   

 

게으른 농부(4월 8일/맑음 *1-19도)

 

작년 가을에 털어내지 못한 콩이 아직 밭 한쪽 편에 쌓여있다. 다 게으른 탓이다. 부지런히 오고가며 일했다면 마저 다 수확을 했을 텐데. 쉬엄쉬엄 다니니 일이 그리 되고 만 것이다. 겨울 내내 썩지 않고 있어준 것만도 다행이지 싶다.

 

그제 퇴비를 넣어줬으니 밭을 갈고 이랑을 만들기 전까지 시간이 있으니 콩을 털어내야 한다. 씨감자며 고구마도 주문을 해야 하고 고추대도 손봐줘야 하니 이래저래 오늘과 내일 중으로 일을 끝내야 한다.

 

엊그제 바람이 불 때 콩을 털고 골라냈으면 좀 나았을 것을. 오늘은 어째 바람이 시원치 않다. 터는 데는 금방인데 아무래도 콩깍지며 돌 골라내는 게 쉽지가 않다. 겨우겨우 절반 넘게 털고 골라내고 나니. 어이쿠. 또 밥 먹을 때다. 참 시간도 빨리 간다.

 

* 다음 주 금요일에는 씨감자를 주문해야 한다. 잊지 말자!!

 

때 이른 더위(4월 9일/맑음 1-20도)

 

농사만큼이나 날씨로부터 받는 영향이 큰 것도 없을 터인데. 4월 초 치곤 더운 날씨가 걱정이다. 오늘은 낮 기온이 20도까지 올라간다고 하니. 이만하면 초여름 날씨니. 갑자기 따뜻해진 것도 그렇지만. 점점 빨리 찾아오는 봄 같지 않은 봄 날씨가 이래저래 반갑지만은 않다. 

 

아침부터 부쩍 기온이 오르지만 그래도 바람이 좀 부니 낫기는 하다. 그리고 마저 남은 콩을 털어내야 하니 좀 덥더라도 오늘처럼 바람이 분다면 일하기는 더 수월하다. 그래서일까. 두 시간 남짓 일을 하고 나니 몸도 가뿐하고. 미뤄뒀던 일도 다 끝내니 마음까지 가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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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12:40 2010/04/12 1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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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아주 오랫동안 여성노동자들은 억압과 착취의 가장 직접적이면서 일차적인 대상으로 존재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경제기적의 시대’라 칭송받을 만한 때였는지 심히 회의감이 드는 1970년대. 그래요. ‘산업역군’이란 허황된 이름아래 노동권은커녕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한 생존의 길목에서 그 시대를 올곧이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그이들은 이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의 물을 길어 올렸고. 끝내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을 만들어냅니다. 여기 YH노동조합과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여성노동자들이 말이지요. 
 
2.           
 
이어 호소문이 낭독되었다. “이제부터 어머님의 약값은 누가 댈 것이며 동생의 학비는 누가 보탤 것입니까 … ” 이순주 부지부장은 눈물로 목이 메어 끝까지 읽지를 못한 채 오열했다. 이어 김경숙 상집위원(경찰 침임 때 추락하여 사망 함)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었으며 박사무장의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종결대회를 마쳤다. 눈물범벅이 된 조합원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동지들의 몸을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조합원들의 뜻은 “우리의 직장을 정상화시켜 달라”는 것이었고 “죽음으로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 전YH노동조합/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엮음. p.198.

 
1966년 자금 100만원, 종업원 10명으로 시작한 작은 가발공장은 밀어닥치는 가발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정책에 힘입어 불과 2년 만에 면목동에 5층 건물을 지어 본공장을 이전하고 1970년에는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가 됐습니다. 바로 장용호라는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따 이름 지은 YH무역 주식회사입니다. 장용호는 당시 수출실적으로 대통령표창, 동탑산업훈장까지 받기도 하는데요. 1970년 진동희를 사장을 앉혀놓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용 인터내셔널 상사를 설립, YH 제품을 수입 판매합니다. 국내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내 상품을 만들어내면 이를 외상으로 수입해 판매함으로써 이중으로 치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장용호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겠지만 이로 인해 회사는 급격한 하향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때,
 
YH무역 노동자들은 1974년 5월 24일 서울역 앞 우남빌딩 섬유노조 본조 회의실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합니다. 회사와 유신독재정권의 비인간적인 처사와 노동 착취, 휴 폐업에 맞서기로 한 것이지요. 하지만 YH노동조합의 목숨을 건 투쟁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합니다. 독재정권의 비호아래 막대한 외자를 빼돌리고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부채와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져간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와 박정희 정권은 YH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노동조합이 강하기 때문에 회사가 망한다”, “노동조합이 있어서 다른 기업에서 인수를 꺼린다”는 악의적인 헛소문을 퍼뜨립니니다. 결국,
 
YH 노동자들은 김경숙 조합원이 공권력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신민당사로 향하게 됩니다.
 
3.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무참히 학살을 당하던 1980년 5월 말. 숨 쉬는 것 말곤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암흑의 시기. 학살당한 이들을 위해 모금운동이라는 무모한 짓거리를 벌인 이들이 있었습니다. 영등포 대림동에 자리 잡고 있었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바로 그이들입니다. 당시 1,700여 노동자들은 모금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4백 70만원이라는 돈을 모아 천주교 광주교고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달을 했는데요. 원풍모방 노동조합이 걸어왔던 그 1970년대를 돌이켜보자면 이 무모한 짓거리가 가능했던 건. 그렀습니다. 그만큼 전설적인 노동자들이었지요.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비상사태가 선포돼 단체행동이 일절 금지되었던 1972년, 파업농성을 통해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습니다. 이후 노조는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했던 1974년에는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권력에 빌붙어 되레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앞장서고 있던 섬유노조 본부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며 싸움에 나서기도 합니다. 허나.
 
광주를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권력에 집착하고 있던 신군부가 ‘노동계 정화조치’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민주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곧 지부장과 부지부장은 수배가 떨어지고 간부들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갑니다. 회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산(都産)이 들어오면 도산(倒産)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퍼뜨리며 조합원들을 흔들어댑니다. 결국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한가위 달이 환하게 비추는 가운데 수백 명의 사복경찰들에게 쫓겨 회사 앞 6차선 도로를 맨발로 내달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새벽 5시경, 드디어 작전은 개시되었다. 수백 명의 폭력배들이 야수처럼 달려들어 끌어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농성장은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사람 살려!” 울부짖는 소리, 뒤를 돌아보니 아, 소름이 끼쳤다. 눈이 뒤집혀 있는 폭력배들,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었다. 조합원들은 온 힘을 다해 악착같이 버티었다. 끌려가면 안 된다.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결코 끌려가면 안 된다. (중략) 때 아닌 추석날 새벽 대림동 바닥은 비명과 통곡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쫓겨 달리는 대림동 육교 위에 펄럭이는 ‘선진조국창조’라는 플래카드는 딴 나라 얘기인가?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었다. 구경꾼마저도 없는 조상대대로의 명절날 새벽에 차도 한가운데에서 광분한 늑대에게 쫓기는 양떼마냥 조합원들은 맨발로 달리다 새벽예배를 보기 위해 훤하게 불이 켜진 예배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민주노조 10년: 원풍모방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 원풍모방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 엮음. pp.302-303.
 
4. 
올해도 지하철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은 시간당 4,110원인 최저임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길거리에서 몇 날을 새울 겁니다. 하긴 노조를 만들기 전엔 화장실에서 숨어 똥 누는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어야했던 여성노조 인천지부 인하대분회 여성조합원들을 생각해보면 길거리에서 일 년을, 십 년을 더 싸워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수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나선 2010년의 풍경들. 이 땅에 여성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의 기적을 얼마나 더 만들어내야 하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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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7 13:58 2010/04/07 13:58

올 농사 계획

from 10년 만천리 2010/04/04 21:33

가는 날이 장날(4월 3일/맑고 강한 바람 *3-13도)

 

겨우내 놀려두기만 했던 밭을 정리하러 나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람이 세다. 다른 일이라면 바람이 불어도 괜찮겠지만. 고추와 참외를 심었던 곳에 멀칭용으로 깔아놓은 비닐을 치우는 일이라. 흙이 신발이며 바지며 여기저기 흩어지는 거야 툭툭 털면 되겠지만. 바람에 날리는 비닐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꼴이라니.

 

역시. 겨우겨우 한 시간 넘게 밭 이곳저곳을 헤매며 다 걷어내고 나니. 올 해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검정 비닐을 대신할 것을 찾아야겠단 생각이 더 든다. 누군 볏짚으로 멀칭을 한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 신문지, 낙엽으로도 한다니. 이도저도 아니면 플래카드라도 재활용을 해야겠다.

 

올 농사 계획(4월 4일/맑음 *3-17도)

 

봄밭갈이를 한다는 청명(淸明)이 내일이니 이제 준비를 슬슬 해야 한다. 어제는 겨우내 잠깐잠깐씩만 들여다봤던 밭에 나가 고추대도 뽑아내고 멀칭으로 깔아놨던 비닐도 걷어냈다. 마저 다 털지 못한 콩이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토마토 지주를 뽑아내고 나니 대충 준비는 된 듯한데.

 

작년에 비하면 근 한 달 가까이나 빠르다. 물론 밭을 새로 구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올 농사를 가름할 호밀 때문에 서둘러 준비를 한 것이다. 물론 하지 감자를 거두기 위해선 지금쯤 씨감자를 넣어야 하긴 하지만. 장마가 끝나고 나서야 감자를 수확한 후 곧바로 김장 배추며 무를 심는 게 낫다는 게 작년 경험인지라(3월 중하순에 감자를 심고 장마 전에 거둔 후 콩을 심을 수도 있지만 콩은 옥수수와 섞어짓기로도 가능하다). 감자보다는 호밀 때문인 게 맞다.  

 

호밀은 올 농사를 가름할 중요한 작물인데, 잡초를 잡기 위해 헛골에 뿌릴 예정이다. 물론 고추나 참외와 같은 것들은 따로 멀칭을 하겠지만.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조금이라도 호미질을 덜 하려면 이랑과 이랑사이 제초만이라도 무슨 수든 내야 하는데. 요놈의 호밀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요맘때쯤 호밀을 뿌려두면 잡초가 자라기 전에 뿌리를 내리고 장마 전까지 무성히 자랄 것이다. 그리고 비가 그치면. 풀들을 밭에서 몰아낸 호밀은 잠시 숨을 죽였다가 찬바람이 불면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럼 제초는 성공이다.

 

고추와 참외는 멀칭을 하되 비닐을 대신할 것들을 찾아야 한다. 급한 마음에 용도가 다 된 플랭카드 한 박스를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고추의 경우 한 이랑은 플랭카드로, 한 이랑은 신문지로, 다른 한 이랑은 볏짚이나 낙엽으로, 그리고 또 한 이랑은 멀칭을 하지 않은 채 키워볼 요량이다.

 

작년엔 욕심으로 메주콩을 꽤나 많이 심었는데. 이번엔 옥수수와 함께 섞어짓기로 조금만 심기로 한다. 대신 팥과 서리태를 새로이 도전하기로 했다. 또 들깨와 참깨는 싹도 틔어내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참기름과 들기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외에 이것저것 밥상에 올릴 채소들과 참외, 토마토는 작년과 같고 고구마는 조금 줄일 것이다.

 

4월엔 서울에 올라갈 일이 많다. 거의 주마다 한번 꼴은 기차를 타야하니. 이것저것 모종을 심는 건 4월 말부터지만. 퇴비도 미리 넣어줘야 하고. 밭도 갈고 이랑도 만들고. 감자심고 호밀까지 뿌리려면 느긋하게만 일을 할 수 없다. 마음은 급한데 내일 비 소식이니. 비가 그치고 나면 곧 농협에 들러 퇴비를 사다 날라야 한다. 늦어도 다음 주엔 밭 모양을 만들고 호밀을 심어야 하니.  

 

* 호밀을 골에 뿌려 멀칭, 제초하기

* 고추, 참외는 두둑에 플래카드, 신문지 등으로 멀칭, 제초하기

* 새로운 작물로 팥, 서리태, 수수 등 심기

* 들깨, 참깨 성공하기

* 고구마 100주 / 고추 200주 / 감자 20kg

* 토마토, 방울토마토, 애호박, 오이, 참외 - 각 20개씩

* 메주콩은 절반으로 줄이고 팥, 서리태, 수수 심기

 

* 장마 전까지 할 일

4월 16-30일: 호밀, 감자, 옥수수 심기

5월 1-15일: 각종 채소, 고추 모종 심기, 옥수수, 메주콩, 서리태 심기, 들깨 모종 만들기

5월 15-30일: 고구마, 참깨 심기

6월 1-15일: 팥, 콩나물콩, 고구마, 들깨 모종 심기

6월15-30일: 들깨 모종, 조, 기장, 녹두 심기, 서리태 윗순 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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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4 21:33 2010/04/04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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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재를 두 개나 넘으며, 동강이와 함께 하는 길(2006년 11월 8일)

 

이른 아침, 길을 나서려는데 오늘 하루는 아마도 쫄딱 굶을 거라며 도시락을 내민다. 어제 밤 편안히 쉬어 갈 수 있었던 것도 이제까지의 여행 중에서 처음 접했던 고마운 일이었는데, 도시락까지 챙겨주다니. 게다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이라. 정말 마음 한 곳에 따뜻함이 머물게 하는 사람이다.

 

어제 길을 잃었던 곳에 이르니 할아버지께서 집 밖에까지 나오셔서 다시 길을 일러주신다. 우리는 밭 위쪽 끝까지 올라가서 길을 찾았는데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다 쓰러져 가는 폐가 뒤쪽으로 길이 나 있다고 하신다.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한참이나 더 올랐으니 길을 찾을 수가 있나.

 

일러주신 대로 폐가 뒤쪽으로 올라서니 아니나 다를까 낙엽이 쌓여 있어 언뜻 보면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법 사람들이 많이 다닌 듯, 길이 나 있다. 또 등산로임을 알려주는 알록달록한 리본들까지 보인다. 또 때맞춰 저 아래서 할아버지께서 길은 찾았는지, 고개를 넘으면 마을이 보인다며 큰 목소리로 알려주시니 이래저래 걱정이 가신다. 

 

   <겨우 산길을 너머 절벽 건너편으로 오니 이런....>

한 시간 가까이 등산 아닌 등산을 한 후 진탄나루에 도착해보니 어제 절벽에 막혀 되돌아갔던 곳이. 세상에, 바로 코앞이다. 이런. 그래도 어제오늘 마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또 맛난 도시락을 먹으며 동강을 바라볼 수 있어, 오히려 기분은 좋기만 하다. 

 

 

 

 

 

 

 

 

 

 

 

 

 

 

 

 

 

 

발 가득 옻나무진을 묻히고 산을 넘은 개 한 마리로 길이 생겼다는 칠족령(柒足領)을 넘기 위해 문희마을에서 잠시 길을 확인하고 나니 12시다. 재 넘어 제장마을까지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는 말에 여유를 부리며 마을 구경을 해볼까도 하지만 여행 첫날부터 일정이 계속 어긋나고 있어 그리 하진 못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칠목령이라고도 불리는, 칠족령을 넘어가는 길은 백운산 등산로와 함께 많은 이들이 걸었던 길이어서 비교적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또 동강의 가을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만큼 푹신한 낙엽길에, 굽이돌며 멀리서 푸른빛을 내는 강줄기가 있어 힘들지가 않다. 다만 전망대를 지나면서 시작되는 하산 길은 곳곳에 ‘낙석주의’, ‘추락주의’ 표지판이 서 있는 대로 곳곳에서 절벽과 만나고 있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 사람들이라면 한 시간, 외지인이라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하던데. 산을 내려와 제장마을에 도착하고 나니 두시가 훌쩍 넘었다. 아마도 칠족령까지가 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려오는 길에 마주친 절벽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기 했어도 한 시간, 한 시간 반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은데.

 

힘겹게 재를 두 개나 넘었기에, 문산나루와 진탄나루에 이어 세 번째 나루이자 가장 예스러운 정취를 품고 있는 나루터이기에, 마땅히 쉬어가야 하나 이제는 나루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다리 위에서 잠시 강이며, 마을 구경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지도상으로는 제장마을에서부터 정선까지는 강을 따라서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이어져 있다고 되어 있는데 소동에서부터 납운교까지는 강을 따라 가는 길은 없고 고성산성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야 한다. 덕분에 우리도 소동까지 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길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길을 돌아서야 했다.

 

납운교부터 우리가 동강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한 가수리까지는 왼편으로 강이 줄곧 따라오는 길이다. 간혹 긴 오르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아스팔트길과 흙 길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기도 하고, 또 올 여름 수해 때문에 자주 출몰하는 대형 트럭들이 나타나 길을 걷기가 수월치는 않지만 용바위니, 삼형제바위니 등 눈요깃감이 있어 지루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어째, 가탄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더니 바람도 거세지고 먹구름까지 몰려든다. 아침에 잠시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으나 칠족령을 넘고 나니 파란 하늘이 열려 비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걱정이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가수리까지는 아직 한참이고, 마을이라고는 제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번평마을 하나를 지났으니 앞으로 마을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어제그제 만났듯이 여름 한철만 민박을 하는 곳이 많아, 또 마땅히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전혀 없어 가수리에 당도한다 해도 잠잘 곳이 있을런지, 배를 채워줄 곳이 있을런지, 이래저래 걱정이다.

 

멀리 가로등 불빛이 보이는 게 가수리인 듯싶다. 가탄마을을 지난지도 벌써 1시간이 지났고, 어둠과 먹구름과 바람 때문에 쉬지도 않았고, 평상시보다도 빠른 속도로 걸었으니, 꽤 먼 거리를 지나온 듯하다. 파김치 몸을 이끌고 가수리에 들어서니 다행히 끼니도 때우고 잠도 청할 곳이 몇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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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4 19:52 2010/03/24 19: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