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주 오랫동안 여성노동자들은 억압과 착취의 가장 직접적이면서 일차적인 대상으로 존재했습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것이 ‘경제기적의 시대’라 칭송받을 만한 때였는지 심히 회의감이 드는 1970년대. 그래요. ‘산업역군’이란 허황된 이름아래 노동권은커녕 생존권도 보장받지 못한 생존의 길목에서 그 시대를 올곧이 견뎌냈습니다. 그리고 그이들은 이 절망의 시대에도 희망의 물을 길어 올렸고. 끝내는 1987년 ‘노동자 대투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을 만들어냅니다. 여기 YH노동조합과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여성노동자들이 말이지요. 
 
2.           
 
이어 호소문이 낭독되었다. “이제부터 어머님의 약값은 누가 댈 것이며 동생의 학비는 누가 보탤 것입니까 … ” 이순주 부지부장은 눈물로 목이 메어 끝까지 읽지를 못한 채 오열했다. 이어 김경숙 상집위원(경찰 침임 때 추락하여 사망 함)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목소리로 결의문을 읽었으며 박사무장의 성명서 낭독을 끝으로 종결대회를 마쳤다. 눈물범벅이 된 조합원들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동지들의 몸을 부둥켜안고 떨어질 줄 몰랐다. 조합원들의 뜻은 “우리의 직장을 정상화시켜 달라”는 것이었고 “죽음으로 투쟁한다”는 것이었다. , 전YH노동조합/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 엮음. p.198.

 
1966년 자금 100만원, 종업원 10명으로 시작한 작은 가발공장은 밀어닥치는 가발수출의 호경기와 정부의 수출 정책에 힘입어 불과 2년 만에 면목동에 5층 건물을 지어 본공장을 이전하고 1970년에는 국내 최대의 가발업체가 됐습니다. 바로 장용호라는 이름의 영문 이니셜을 따 이름 지은 YH무역 주식회사입니다. 장용호는 당시 수출실적으로 대통령표창, 동탑산업훈장까지 받기도 하는데요. 1970년 진동희를 사장을 앉혀놓고는 미국으로 건너가 용 인터내셔널 상사를 설립, YH 제품을 수입 판매합니다. 국내에서 여성노동자들의 피와 땀을 쥐어짜내 상품을 만들어내면 이를 외상으로 수입해 판매함으로써 이중으로 치부를 하기 시작한 것이지요. 장용호는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겠지만 이로 인해 회사는 급격한 하향길에 접어들게 됩니다. 이때,
 
YH무역 노동자들은 1974년 5월 24일 서울역 앞 우남빌딩 섬유노조 본조 회의실에서 노동조합을 결성합니다. 회사와 유신독재정권의 비인간적인 처사와 노동 착취, 휴 폐업에 맞서기로 한 것이지요. 하지만 YH노동조합의 목숨을 건 투쟁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점점 나빠지기만 합니다. 독재정권의 비호아래 막대한 외자를 빼돌리고 문어발식 사업 확장에만 열을 올린 나머지 부채와 적자가 눈덩이처럼 커져간 것입니다. 그러나 회사와 박정희 정권은 YH노동자들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며 “노동조합이 강하기 때문에 회사가 망한다”, “노동조합이 있어서 다른 기업에서 인수를 꺼린다”는 악의적인 헛소문을 퍼뜨립니니다. 결국,
 
YH 노동자들은 김경숙 조합원이 공권력에 의해 죽음으로 내몰린 신민당사로 향하게 됩니다.
 
3. 
 
광주에서 무고한 시민들이 무참히 학살을 당하던 1980년 5월 말. 숨 쉬는 것 말곤 그 무엇도 할 수 없었던 암흑의 시기. 학살당한 이들을 위해 모금운동이라는 무모한 짓거리를 벌인 이들이 있었습니다. 영등포 대림동에 자리 잡고 있었던 원풍모방 노동조합의 조합원들이 바로 그이들입니다. 당시 1,700여 노동자들은 모금을 시작한 지 이틀 만에 4백 70만원이라는 돈을 모아 천주교 광주교고장 윤공희 대주교에게 전달을 했는데요. 원풍모방 노동조합이 걸어왔던 그 1970년대를 돌이켜보자면 이 무모한 짓거리가 가능했던 건. 그렀습니다. 그만큼 전설적인 노동자들이었지요.
 
원풍모방 노동조합은 비상사태가 선포돼 단체행동이 일절 금지되었던 1972년, 파업농성을 통해 어용노조를 몰아내고 민주노조를 출범시켰습니다. 이후 노조는 회사가 부도위기에 처했던 1974년에는 경영에 직접 참여하기도 하고, 권력에 빌붙어 되레 노동자들을 억압하고 착취하는데 앞장서고 있던 섬유노조 본부에 대해 날선 비판을 하며 싸움에 나서기도 합니다. 허나.
 
광주를 피로 물들이면서까지 권력에 집착하고 있던 신군부가 ‘노동계 정화조치’라는 이름으로 시작한 민주노조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의 표적이 되고 맙니다. 그리고 곧 지부장과 부지부장은 수배가 떨어지고 간부들은 삼청교육대로 끌려갑니다. 회사는 이때를 놓치지 않고 ‘도산(都産)이 들어오면 도산(倒産)한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퍼뜨리며 조합원들을 흔들어댑니다. 결국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한가위 달이 환하게 비추는 가운데 수백 명의 사복경찰들에게 쫓겨 회사 앞 6차선 도로를 맨발로 내달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새벽 5시경, 드디어 작전은 개시되었다. 수백 명의 폭력배들이 야수처럼 달려들어 끌어내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농성장은 전쟁터가 되어 버렸다. “사람 살려!” 울부짖는 소리, 뒤를 돌아보니 아, 소름이 끼쳤다. 눈이 뒤집혀 있는 폭력배들, 그들의 모습은 인간이 아니었다. 조합원들은 온 힘을 다해 악착같이 버티었다. 끌려가면 안 된다. 다시는 못 돌아올지도 모른다. 결코 끌려가면 안 된다. (중략) 때 아닌 추석날 새벽 대림동 바닥은 비명과 통곡의 아수라장이 되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쫓겨 달리는 대림동 육교 위에 펄럭이는 ‘선진조국창조’라는 플래카드는 딴 나라 얘기인가? 난리도 그런 난리는 없었다. 구경꾼마저도 없는 조상대대로의 명절날 새벽에 차도 한가운데에서 광분한 늑대에게 쫓기는 양떼마냥 조합원들은 맨발로 달리다 새벽예배를 보기 위해 훤하게 불이 켜진 예배당 안으로 뛰어들었다. <민주노조 10년: 원풍모방 노동조합 활동과 투쟁>, 원풍모방 해고노동자 복직투쟁위원회 엮음. pp.302-303.
 
4. 
올해도 지하철 청소용역 여성노동자들은 시간당 4,110원인 최저임금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길거리에서 몇 날을 새울 겁니다. 하긴 노조를 만들기 전엔 화장실에서 숨어 똥 누는 소리를 들으며 밥을 먹어야했던 여성노조 인천지부 인하대분회 여성조합원들을 생각해보면 길거리에서 일 년을, 십 년을 더 싸워야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보수세력이 ‘잃어버린 10년’을 되찾겠다고 나선 2010년의 풍경들. 이 땅에 여성노동자들은 경제성장의 기적을 얼마나 더 만들어내야 하는 것인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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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7 13:58 2010/04/07 13:58

올 농사 계획

from 10년 만천리 2010/04/04 21:33

가는 날이 장날(4월 3일/맑고 강한 바람 *3-13도)

 

겨우내 놀려두기만 했던 밭을 정리하러 나갔더니.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바람이 세다. 다른 일이라면 바람이 불어도 괜찮겠지만. 고추와 참외를 심었던 곳에 멀칭용으로 깔아놓은 비닐을 치우는 일이라. 흙이 신발이며 바지며 여기저기 흩어지는 거야 툭툭 털면 되겠지만. 바람에 날리는 비닐을 잡으러 뛰어다니는 꼴이라니.

 

역시. 겨우겨우 한 시간 넘게 밭 이곳저곳을 헤매며 다 걷어내고 나니. 올 해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이 검정 비닐을 대신할 것을 찾아야겠단 생각이 더 든다. 누군 볏짚으로 멀칭을 한다고 하기도 하고. 누군 신문지, 낙엽으로도 한다니. 이도저도 아니면 플래카드라도 재활용을 해야겠다.

 

올 농사 계획(4월 4일/맑음 *3-17도)

 

봄밭갈이를 한다는 청명(淸明)이 내일이니 이제 준비를 슬슬 해야 한다. 어제는 겨우내 잠깐잠깐씩만 들여다봤던 밭에 나가 고추대도 뽑아내고 멀칭으로 깔아놨던 비닐도 걷어냈다. 마저 다 털지 못한 콩이 조금 남아 있긴 하지만.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토마토 지주를 뽑아내고 나니 대충 준비는 된 듯한데.

 

작년에 비하면 근 한 달 가까이나 빠르다. 물론 밭을 새로 구한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올 농사를 가름할 호밀 때문에 서둘러 준비를 한 것이다. 물론 하지 감자를 거두기 위해선 지금쯤 씨감자를 넣어야 하긴 하지만. 장마가 끝나고 나서야 감자를 수확한 후 곧바로 김장 배추며 무를 심는 게 낫다는 게 작년 경험인지라(3월 중하순에 감자를 심고 장마 전에 거둔 후 콩을 심을 수도 있지만 콩은 옥수수와 섞어짓기로도 가능하다). 감자보다는 호밀 때문인 게 맞다.  

 

호밀은 올 농사를 가름할 중요한 작물인데, 잡초를 잡기 위해 헛골에 뿌릴 예정이다. 물론 고추나 참외와 같은 것들은 따로 멀칭을 하겠지만. 한 여름 뙤약볕 아래서 조금이라도 호미질을 덜 하려면 이랑과 이랑사이 제초만이라도 무슨 수든 내야 하는데. 요놈의 호밀을 이용하기로 한 것이다. 요맘때쯤 호밀을 뿌려두면 잡초가 자라기 전에 뿌리를 내리고 장마 전까지 무성히 자랄 것이다. 그리고 비가 그치면. 풀들을 밭에서 몰아낸 호밀은 잠시 숨을 죽였다가 찬바람이 불면 다시 일어설 것이다. 그럼 제초는 성공이다.

 

고추와 참외는 멀칭을 하되 비닐을 대신할 것들을 찾아야 한다. 급한 마음에 용도가 다 된 플랭카드 한 박스를 준비하고 있긴 하지만. 고추의 경우 한 이랑은 플랭카드로, 한 이랑은 신문지로, 다른 한 이랑은 볏짚이나 낙엽으로, 그리고 또 한 이랑은 멀칭을 하지 않은 채 키워볼 요량이다.

 

작년엔 욕심으로 메주콩을 꽤나 많이 심었는데. 이번엔 옥수수와 함께 섞어짓기로 조금만 심기로 한다. 대신 팥과 서리태를 새로이 도전하기로 했다. 또 들깨와 참깨는 싹도 틔어내지 못했는데 무슨 일이 있어도 참기름과 들기름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 외에 이것저것 밥상에 올릴 채소들과 참외, 토마토는 작년과 같고 고구마는 조금 줄일 것이다.

 

4월엔 서울에 올라갈 일이 많다. 거의 주마다 한번 꼴은 기차를 타야하니. 이것저것 모종을 심는 건 4월 말부터지만. 퇴비도 미리 넣어줘야 하고. 밭도 갈고 이랑도 만들고. 감자심고 호밀까지 뿌리려면 느긋하게만 일을 할 수 없다. 마음은 급한데 내일 비 소식이니. 비가 그치고 나면 곧 농협에 들러 퇴비를 사다 날라야 한다. 늦어도 다음 주엔 밭 모양을 만들고 호밀을 심어야 하니.  

 

* 호밀을 골에 뿌려 멀칭, 제초하기

* 고추, 참외는 두둑에 플래카드, 신문지 등으로 멀칭, 제초하기

* 새로운 작물로 팥, 서리태, 수수 등 심기

* 들깨, 참깨 성공하기

* 고구마 100주 / 고추 200주 / 감자 20kg

* 토마토, 방울토마토, 애호박, 오이, 참외 - 각 20개씩

* 메주콩은 절반으로 줄이고 팥, 서리태, 수수 심기

 

* 장마 전까지 할 일

4월 16-30일: 호밀, 감자, 옥수수 심기

5월 1-15일: 각종 채소, 고추 모종 심기, 옥수수, 메주콩, 서리태 심기, 들깨 모종 만들기

5월 15-30일: 고구마, 참깨 심기

6월 1-15일: 팥, 콩나물콩, 고구마, 들깨 모종 심기

6월15-30일: 들깨 모종, 조, 기장, 녹두 심기, 서리태 윗순 지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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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04 21:33 2010/04/04 2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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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 날, 재를 두 개나 넘으며, 동강이와 함께 하는 길(2006년 11월 8일)

 

이른 아침, 길을 나서려는데 오늘 하루는 아마도 쫄딱 굶을 거라며 도시락을 내민다. 어제 밤 편안히 쉬어 갈 수 있었던 것도 이제까지의 여행 중에서 처음 접했던 고마운 일이었는데, 도시락까지 챙겨주다니. 게다가 우리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집 앞에 서 있는 모습이라. 정말 마음 한 곳에 따뜻함이 머물게 하는 사람이다.

 

어제 길을 잃었던 곳에 이르니 할아버지께서 집 밖에까지 나오셔서 다시 길을 일러주신다. 우리는 밭 위쪽 끝까지 올라가서 길을 찾았는데 할아버지 말씀으로는 다 쓰러져 가는 폐가 뒤쪽으로 길이 나 있다고 하신다. 것도 모르고 무턱대고 한참이나 더 올랐으니 길을 찾을 수가 있나.

 

일러주신 대로 폐가 뒤쪽으로 올라서니 아니나 다를까 낙엽이 쌓여 있어 언뜻 보면 길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제법 사람들이 많이 다닌 듯, 길이 나 있다. 또 등산로임을 알려주는 알록달록한 리본들까지 보인다. 또 때맞춰 저 아래서 할아버지께서 길은 찾았는지, 고개를 넘으면 마을이 보인다며 큰 목소리로 알려주시니 이래저래 걱정이 가신다. 

 

   <겨우 산길을 너머 절벽 건너편으로 오니 이런....>

한 시간 가까이 등산 아닌 등산을 한 후 진탄나루에 도착해보니 어제 절벽에 막혀 되돌아갔던 곳이. 세상에, 바로 코앞이다. 이런. 그래도 어제오늘 마음 따뜻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또 맛난 도시락을 먹으며 동강을 바라볼 수 있어, 오히려 기분은 좋기만 하다. 

 

 

 

 

 

 

 

 

 

 

 

 

 

 

 

 

 

 

발 가득 옻나무진을 묻히고 산을 넘은 개 한 마리로 길이 생겼다는 칠족령(柒足領)을 넘기 위해 문희마을에서 잠시 길을 확인하고 나니 12시다. 재 넘어 제장마을까지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는 말에 여유를 부리며 마을 구경을 해볼까도 하지만 여행 첫날부터 일정이 계속 어긋나고 있어 그리 하진 못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칠목령이라고도 불리는, 칠족령을 넘어가는 길은 백운산 등산로와 함께 많은 이들이 걸었던 길이어서 비교적 등산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 길을 잃을 염려는 없다. 또 동강의 가을을 제대로 맛볼 수 있을 만큼 푹신한 낙엽길에, 굽이돌며 멀리서 푸른빛을 내는 강줄기가 있어 힘들지가 않다. 다만 전망대를 지나면서 시작되는 하산 길은 곳곳에 ‘낙석주의’, ‘추락주의’ 표지판이 서 있는 대로 곳곳에서 절벽과 만나고 있어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여기 사람들이라면 한 시간, 외지인이라도 한 시간 반이면 충분하다고 하던데. 산을 내려와 제장마을에 도착하고 나니 두시가 훌쩍 넘었다. 아마도 칠족령까지가 한 시간이 아닐까 싶다. 물론 내려오는 길에 마주친 절벽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기 했어도 한 시간, 한 시간 반은 아무래도 무리일 듯싶은데.

 

힘겹게 재를 두 개나 넘었기에, 문산나루와 진탄나루에 이어 세 번째 나루이자 가장 예스러운 정취를 품고 있는 나루터이기에, 마땅히 쉬어가야 하나 이제는 나루 역할을 대신하고 있는 다리 위에서 잠시 강이며, 마을 구경을 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지도상으로는 제장마을에서부터 정선까지는 강을 따라서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이어져 있다고 되어 있는데 소동에서부터 납운교까지는 강을 따라 가는 길은 없고 고성산성 쪽으로 난 길을 따라 가야 한다. 덕분에 우리도 소동까지 갔다가 마을 사람들로부터 길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서야 길을 돌아서야 했다.

 

납운교부터 우리가 동강에서 하루 더 머물기로 한 가수리까지는 왼편으로 강이 줄곧 따라오는 길이다. 간혹 긴 오르막이 나타나기도 하고, 아스팔트길과 흙 길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기도 하고, 또 올 여름 수해 때문에 자주 출몰하는 대형 트럭들이 나타나 길을 걷기가 수월치는 않지만 용바위니, 삼형제바위니 등 눈요깃감이 있어 지루하지만은 않다.

 

하지만 어째, 가탄마을을 지나면서부터는 날이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하더니 바람도 거세지고 먹구름까지 몰려든다. 아침에 잠시 먹구름이 하늘을 덮었으나 칠족령을 넘고 나니 파란 하늘이 열려 비 걱정은 하지 않았는데 걱정이다. 지도를 들여다보니 가수리까지는 아직 한참이고, 마을이라고는 제장에서부터 여기까지 오는 동안 번평마을 하나를 지났으니 앞으로 마을이 있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어제그제 만났듯이 여름 한철만 민박을 하는 곳이 많아, 또 마땅히 식사를 할 만한 곳이 전혀 없어 가수리에 당도한다 해도 잠잘 곳이 있을런지, 배를 채워줄 곳이 있을런지, 이래저래 걱정이다.

 

멀리 가로등 불빛이 보이는 게 가수리인 듯싶다. 가탄마을을 지난지도 벌써 1시간이 지났고, 어둠과 먹구름과 바람 때문에 쉬지도 않았고, 평상시보다도 빠른 속도로 걸었으니, 꽤 먼 거리를 지나온 듯하다. 파김치 몸을 이끌고 가수리에 들어서니 다행히 끼니도 때우고 잠도 청할 곳이 몇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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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4 19:52 2010/03/24 19:52
1.
대길이는 언년이와의 사랑을 위해 양반과 노비가 없는 세상을 꿈꿉니다. 하지만 대길이의 이 꿈은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을 한 후에라야 가능합니다. 그리고 이 꿈도, 실은 도술을 부린 홍길동도 바꾸지 못했기에 실현가능성은 없어 보입니다. 
 
송태하는 임금을 바꾸는 것이 아닌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역모를 도모합니다. 하지만 송장군이 꿈꾸는 세상은 양반과 노비가 없는 세상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리고 양반이라는 신분을 포기하지도 않을 것 같구요.
 
2.
업복이는 양반과 상놈이 뒤집어져 양반을 부리는 세상보다는 양반, 상놈 구분 없이 사는 게 더 좋은 세상이 아니냐고 나지막이 얘기합니다. 자신들을 이용하는 세력들이 만들려는 천지개벽이 결국 지금의 불합리한 세상과 별반 다를 게 없다면 그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지만 업복이는 끝내 양반과 상놈, 구분 없는 세상도 좋지만 그 전에 복수는 하고 싶다는 초복이의 말마따나 총을 들고 맙니다.   

 
3.
대길: 네 놈이 무슨 연유로 제주를 갔다 왔는지 모르겠다만 결국 네 놈은 네 놈 자리로 돌아가고 싶은 거 그거 말고는 없어. 예전처럼 떵떵거리면서 살고 싶은 거겠지.
태하: 네가 그런 말 할 자격이 있는가? 조선의 질서를 바로잡는다며 추노를 한다지만 무고한 백성을 들볶고 왈패처럼 거들먹거렸겠지.
대길: 당연하지. 그래야 살 수 있으니까. 그래야 살 수 있는 세상을 너 같은 벼슬아치들이 만들었으니까.
태하: 그럼 너는? 단 한번이라도 그런 세상을 바꾸려고 한 적 있었나?
대길: 어이, 노비. 아니지. 노비양반. 홍길동이 알지? 그 놈은 도술까지 부렸는데 이 세상을 바꾸지 못했어. 근데 도술도 못 부리는 내가 이 지랄 같은 세상을 바꾼다?
태하: 세상은 도술로 바뀌는 게 아니다. 사람이 바꾸는 거지.
대길: 언놈이 지랄 연병을 해도 이 지랄 같은 세상은 말이야 절대로 바뀌지가 않아.
태하: 세상은 바뀌지 않는다는 말, 함부로 하지 마라. 그런 말을 가장 무서워하는 사람이 있으니.  
 
4.
‘유토피아’는 그리스어의 U(없다)와 topos(장소)의 복합어로서 ‘어디에도 없는 땅’이란 뜻 입니다. 곧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는 이상향이 유토피아인 셈이지요.
 
토머스 모어는 ‘유토피아’라는 저서를 통해 새로운 세상을 꿈꿉니다. 필요한 만큼 일하고, 쓸 수 있는. 다스리는 사람과 다스림을 받는 사람이 구분 없는. 나아가 소유가 필요치 않은 사회를 말이지요. 16세기 혼돈의 영국 사회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이상향’을 놀라운 상상력으로 만들어낸 것입니다. 
 
하지만 ‘유토피아’는 단순한 픽션 혹은 문학으로만 분류되진 않습니다. 이러저러한 생각들을 자유롭게 펼쳐냈다는 면에서는 소설임에 틀림없지만. ‘현실’을 고발하고, 부정함으로써 그 세계에 속박됐던 이상을 자유롭게 했다는 면에서. 정치, 경제, 교육, 도덕, 사회체계를 새로운 시각으로 분석하고 설계함으로써 사회사상사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는 점에서.
 
출간된 지 500여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고전으로 대접받고 있는 이유일 것입니다.  
 
5. 
드라마라곤 보면서도, 또 봤으면서도 통 어디 가서 얘기 하진 않지만. 꼭 한번 되짚어 보고 싶었던 건. ‘추노’가 보여주는. 결코 양반이기를 포기하지 않는 이들만이 양반, 상놈 구분 없는 ‘유토피아’가 어찌 가능한지를 꽤나 잘 알고 있다는 다소 거북한 설정 때문이었을까요. 아님 그래도 총을 거두었던 업복이가 다시 화약에 불을 댕기지 않았으면 하는 기대 때문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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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05 10:38 2010/03/05 10:38
1. 
아무래도 2MB이 대통령을 하고 있는 동안엔 심심치만은 않겠습니다. 만날 짜증나는 얘기만 들리다가도 ‘피식’ 헛웃음만 나오게 하는. 어이없는 짓거리들을 가끔 터뜨리니 말입니다. 최근엔 난데없는 ‘강도론’으로 집안싸움도 하고. 또 며칠 전에는 잠깐 9시 뉴스에도 나왔는데. 글쎄. ‘어감이 좋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노동관련 용어’이기 때문에 ‘비정규직’이란 용어를 퇴출시키겠다고 나선 적이 있었는데. 나, 참.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아마 여기저기서 ‘비정규직 문제’를 떠들어대는데. 막상 어찌 해야 하는지 답은 나오지 않고. 골머리는 썩는 마당에. 여기저기 언론사에 보도 자료까지 배포한 걸 보니. 참말로 기가 막힌 해결책을 만들 어 냈다고 자평하는 것 같던데. ‘비정규직’이란 말이 없어지면 ‘비정규직 문제’라는 것도 한 순간에 ‘펑’하고 함께 사라지리라 믿나 봅니다. 
 
2. 
혹 ‘아리울’이라는 말을 들어보셨는지요. 물을 의미하는 ‘아리(ari)’와 터전을 뜻하는 ‘울(ul)’을 결합한 순 우리말로 물의 도시를 상징한다고 하는데요. 생명의 근원인 물과 인간 문명의 상징인 도시의 만남이라. 어떤가요. 그래요. 정부가 2011년부터 2030년까지 20년간 21조원을 투입, 첨단 산업․관광레저․농업 등이 어우러진 세계적인 명품(名品) 복합도시를 만든다고 하는데. 이 도시가 들어서는 곳이 바로 ‘아리울(Ariul)’이랍니다. 꽤나 근사해 보이지요. 하지만요.  
 
‘전북 군산과 부안을 연결하는 방조제 33.6km를 축조해  4만 100ha의 해수면을 2만 8,300ha의 토지와 1만 1,300ha의 담수호로 만들려는 국책사업(<새만금, 네가 아프니 나도 아프다>, 풀꽃평화연구소 엮음, p16)'으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죄 없는 광주의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권력을 장악한 살인마들이 ‘국토확장’과 ‘농지확보’라는 헛구호를 앞세워 민심을 되돌리고자 시작된 일이 끝내 ‘민주화’된 정권들마저 이를 넘지 못하고(‘정치야합과 탐욕이 빚은 새만금 비가(悲歌)’, 박병상) 갯벌과 그 갯벌과 하나로 이어져 있던 공동체를 무너뜨리고 만(‘새만금 갯벌이 살아야 우리가 산다’, 윤박경) 것에 다름 아닌 ‘새만금 간척사업’이 ‘아리울’이란 이름으로 변신을 꾀한 것이라면. 어떤가요. 아직도 근사해 보이는지요. 
 
3. 
‘아리울’은 외국인에게 '새만금'이란 발음이 어렵다는 불편이 나와 새로 만든 이름이라고 하는데요. 뭐, ‘새만금’이 얼마나 발음하기 어려운지는 알고 싶지도 않지만. 갯벌과 그 갯벌 속에 살아 숨 쉬던 생명들을 싹 죽여 가며 만든 다는 것이 고작 ‘물의 도시’라니. 참 우습지도 않네요. 그래서일까요. 단순한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세상에 나온 지 6년도 더 지난 책을 이제와 다 읽고서도 한참이나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까닭이요. 그리구요. 아무래도 ‘비정규직’ 퇴출이란 발상이 그냥 나온 게 아니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것이. 설마, 그렇게 하면 뭐가 뭔지 모를 거야, 뭐 그런 건 아니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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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7 16:29 2010/02/17 16: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