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째 날, 괴산의 화양구곡, 선유구곡을 지나 문경의 선유동계곡까지(2006년 9월 30일)
 
근 10여 일에 가까운 연휴다. 다행히 연휴의 뒤쪽에 추석이 있어 앞쪽의 5일을 온전히 걷기여행을 위해 쓸 수 있게 됐다. 물론 아껴둔 여름휴가 일주일 가운데 하루를 쓴 덕이긴 하지만. 해서 여지껏 여행보다도 긴 일정의 여행이 될 듯하다. 하지만 그만큼 준비해야 할 것도 많고 챙겨가야 할 것도 많다. 덩달아 가방 무게도 제법이다.
 
<먼저 만나는 화양구곡>
 
화양구곡과 선유구곡은 계곡의 크기만큼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제 각각이라는 데서 상반된다. 예컨대 화양구곡이 그 크기만큼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는 곳이라면 선유구곡은 반대로 그 크기만큼이나 발길이 잦지 않은 곳이다. 그래도 처음엔 화양구곡의 크고 깊은 아름다움에 반해 걸음이 늦어지는가 싶더니 후에는 선유구곡의 아기자기한 맛에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 오랫동안 머무르지 않을 수 없어 재미가 쏠쏠하다.
 
<뒤이어 선유구곡이.....>
그렇게 세 시간이 넘도록 18구곡의 풍경에 빠져있다 정신을 차리니 이번엔 하, 중, 상관평을 거쳐 경상도 땅으로 이어지는 긴 오르막의 517번 지방도로가 우리를 기다린다. 예전에는 이곳까지 길이 나지 않아 물길을 건너 청천 읍내에 장을 보러 다니셨다는, 관평슈퍼 앞에서 만난 할머니와 두런두런 지나온 길을 이야기하며 잠시 숨을 고르는데 해가 산머리에 걸린다. 서두르지 않으면 안 될 텐데, 할머니께서 ‘용추계곡까지는 갈 수 있겄네. 저기 저 보이는 산만 넘으면 되니께’ 하신다. 안심이다.
 
충청도와 경상도를 이어주는 숯가마골을 넘어 용추계곡에 도착하니 말씀대로 아직은 해가 남아있다. 헌데 이런. 마땅히 숙박할 만한 곳이 없다.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날은 조금씩 어두워 오고, 동네 개 짖는 소리는 점점 요란해지고. 어쩌나. 아무래도 오늘은 문경이나 점촌으로 나가야 할 듯한데, 때마침 읍내로 나가는 맘씨 좋은 부부를 만나 무사히 나올 수 있다. 또 점촌 사람들의 친절한 길 안내에 쉬이 잠 잘 곳을 찾을 수 있다.
 
 
둘째 날, 용추계곡에서 문경읍내까지 쉼 없이 걷다(2006년 10월 1일)
 
점촌에서 첫차를 타고 부지런히 움직여 어제 저녁 우리의 발목을 잡았던 용추계곡 입구에 당도했는데도 시계를 보니 9시가 넘어도 훌쩍 넘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발걸음을 빨리 하지 않으면 안 될 듯하다. 그래도 이강년 생가 구경이며, 비록 볼일이 급해 발을 들여놨지만 작고 예쁜 희양분교 구경이며, 250년 된 느티나무 아래 멀리 노랗게 익어 가는 벼 구경이며, 이제는 찾는 이 없어 고즈넉이 서 있는 가은역 구경에 점심때마저 놓친다.
 
 
 
가은 인근은 예전 탄을 캐던 곳이 곳곳에 있었던 만큼 석탄박물관이 널리 이름이 알려졌으나 구경하지 못하고 늦은 점심만 간단히 해결하고 곧 출발이다. 그래도 진남역 주변에는 전에는 탄을 실어 날랐던 철로의 흔적을 곳곳에서 볼 수 있어 눈길을 잡아끈다.
 
부지런히 걸어서인지 어둠이 내리기 전 문경읍까지는 들어갈 수 있을 듯하다. 오늘은 새재 아래까지가 목표였는데 아침에 늦게 출발한 탓인지라 아무래도 오늘은 문경읍내에서 머물러야겠다. 들판 너머 읍내 불빛들은 꽤 가까운 것처럼 보이는데 그래도 걸음으로는 한참이다. 대신 늦은 저녁 생각에 발걸음만은 빠르다.
 
셋째 날, 문경새재를 지나 마폐봉을 넘어 월악산 덕주사까지(2006년 10월 2일)
 
오늘은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라는 문경새재 옛길을 걷다가 지금은 마역봉으로 불리나 예전에는 마폐봉으로 일컬어졌던 산자락을 넘어야 한다. 새재 길이야 잘 정비된 길이고 사람들도 많이 왕래하는 길이라 걱정이 없지만 마폐봉을 넘어 가는 산행 길이 아무래도 걱정이다. 백두대간을 지나는 길목이라 지도상으로는 쉬이 찾아볼 수 있지만 조령 3관문인 조령관에서부터 정상으로 오르는 길과 반대편 월악산 국립공원 사문리 매표소로 내려가는 길은 그리 만만치 않은 듯해서다. 해서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다.
 
읍내에서 새재 입구까지는 생각보다 먼 길인데다 10월 햇살 같지 않은 따가운 햇빛에 무척 힘이 든다. 그래도 새재 입구에 당도하니 제법 가을을 맛볼 수 있는 낙엽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 마음은 한결 가볍다.
 
새재 1관문인 주흘관서부터는 흙 길이다. 마음 같아서는 신발에 양말까지 벗어 던지고 걷고 싶으나 발걸음을 빨리 해야 하는 탓에 흙 길의 느낌을 맛보는 것으로 만족한다. 더구나 이른 아침이어서 인지 오가는 이들이 없어 오랜만에 한가로이 길을 걸을 수 있다.
 
<새재길은 1관문인 주흘관을 시작으로 2관문 조곡관, 3관문 조령관까지 이어진다>
 
2관문 조곡관까지는 그리 길지 않은 길인데다 가파르지도 않아 금방이다. 그래도 아침부터 움직인 탓에 몸이 뻐근하다. 잠시 숨도 고르고 몸도 풀고는 길을 나서는데. 이런. 가을 소풍이라도 온 것일까?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 무더기로 내려오는데 이건 끝도 없다. 아니 급기야는 유치원 아이들까지 가세한다. 결국 그렇게 사람 구경만 하다 제3관문인 조령관에 도착하니 12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부터는 산행을 해야 하는데 아침을 든든히 먹어서인지 아직은 배도 고프지 않고 그동안 길러진 체력 탓에 거뜬하다.
                                                                                                   
마폐봉 오르는 길은 생각만큼이나 그다지 어려운 길은 아닌 듯하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1시간 조금 넘게 오르며 간간이 미끄러운 곳을 만나기는 했어도 쉬이 올라왔으니 말이다. 정상에 서니 내려가는 길 멀리 월악산 영봉이 보이고, 올라온 길 멀리 꾸불꾸불 새재길이 보인다. 잠시 숨도 고르면서 좋은 풍경을 배경 삼아 사진도 찍고 싶지만 허기진 배만 채우고는 서둘러 길을 나선다. 내려가는 길은 올라온 것과 달리 거리도 길고 그만큼 시간도 많이 걸린다고 들었기에.
 
산을 내려오기 시작한지 한 시간 반 만에 사문리 매표소에 당도했다. 여기서부터는 우리가 걷기여행을 하도록 마음먹게 해 준 아름다운 길이다. 미륵사지 입구에서 시원한 동동주까지 얻어 마셨던 식당이며, 덕주사 입구에서 하루 머물렀던 민박집이며, 계곡 물에 손을 담그며 물장난을 쳤던 송계계곡이며, 오티마을로 넘어가는 지도에도 나오지 않은 오티고개며, 꼬부랑길을 한참을 걸어서야 만날 수 있었던 예쁜 마을 물태리까지. 그때 걸었던 길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감회가 새롭다.
 
미륵사지터는 지난번에 둘러보았기에 구경하지 않는 대신 동동주에 파전까지 시켜놓고는 느긋한 점심을 즐긴다. 헌데 입이 즐거운 만큼 몸은 고생이라고, 점심 후 발걸음이 자꾸만 늦어진다. 좋은 길을 걸으며 좋은 경치를 감상하는 탓도 있지만 아무래도 술기운이 발걸음을 잡는 것 같다. 잠시 쉬어가야겠는데 닷돈재 너머 멀리 덕주사 입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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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4 23:22 2009/11/14 23:22

가을이 다 가고서야 낙엽을 밟습니다 그려. 그도 그럴 것이 농부에게 이 계절이란 이루 다 말할 수도 없이 바쁜 하루하루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그렇지. 십분만 걸어 나가도 온통 붉고, 노란데 무에 그리도 일이 많은지요. 근 2년 만에 얼굴을 본 이도 ‘농부가 농부 같아야지’라며 도통 농사짓는 모양새가 아니라며 허허 웃는데도 말입니다.

 

<10분만 걸어나가도 가을을 볼 수 있는데도 뭐가 그리 바쁜가요(공치전)>

 

춘천으로 오고 나니 꽤나 많은 이들이 사는 것, 농사짓는 것, 이런 저런 구경삼아 오겠다, 고들 하더군요. 또 어떤 이들은 강촌의 구곡폭포니, 가평의 남이섬, 그리고 이곳 춘천의 중도를 떠올리면서 꼭 한 번 더 가보고 싶다고들 합니다. 헌데 다들 사는 게. 그래 그리 녹녹치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그리 오겠다던 사람들. 전화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바로 엊그제네요. 주말도 아닌 월요일 아침. 느닷없이 오겠다는, 여기 춘천엘 놀러오겠다는 전화 한 통을 받았답니다. 그것도. 그래요. 좀 전에도 말했지요. 근 2년 동안이나 얼굴도 못 본(사실은 지지난주, 서울에 볼일을 보러 갔다 저녁 술 한잔 했으니 ‘통’이란 한 글자를 넣어야 하겠네요) 선배의 전화를 말입니다.

 

실은 누가 여기 춘천에를 온다고 하면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랍니다. 뭐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서도 모두들 알 듯 모를 듯한 어떤 뭔가에 이끌려오곤 하지만. 딱히 어딜 함께 갈만한 곳도. 함께 먹을 만한 것도 마땅치가 않기 때문에 말입니다. 이름만 들으면 아련한 뭔가가 떠오르긴 한데. 막상 가보면. 그래요. 뭐 별 거 없는 게 괜스레 미망하기만 하더라구요.  

 

<올 봄, 산책길에서 본 중도예요. 멀리 배가 보이지요?>

 

   <5분 남짓 배를 타면. 중도에 다 왔습니다>

중도. 

그래요. 중도도 그런 곳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하는. 배를 타고 건너진 않았지만 왠지 그럴 것 같은 불길한(?) 느낌이 들러랬습니다. 그건 아마도. 짬짬이 산책을 다니던 길가에서 의암호 너머로 늘 보이는 모습 때문이었을 수도 있고. 거길 다녀왔다던 사람들이 이구동성(異口同聲)으로 하던 이야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습니다.

 

‘거, 뭐 볼 거라곤 하나도 없어요’

 

근화동쪽 뱃터를 이용하면 차를 실을 수 있지만 가격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그래 보통은 뱃터 혹은 삼천동쪽 선착장 앞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는 가벼이 몸만 싣습니다. 호수 이쪽에서는 섬이 꽤나 커 보이지만. 걸어서도 넉넉잡고 서너 시간이면 둘러보는데 충분하거든요. 그러니 굳이 차를 가지고 들어갈 이유가 없답니다.

 

날 좋은 봄이나 가을, 혹은 여름 한철에는 배가 쉼 없이 오가지만. 바람 불고 낙엽 다 떨어진 요맘때. 것도 평일 아침이라면 배에 오르기 전 이런 말을 듣기도 한답니다. 대략 5분 남짓이면 저편에서 이편으로, 이편에서 저편으로 오가는데도 말입니다.

 

‘나오시려거든 미리 전화를 주세요. 언제 배가 들어가는지 확인하셔야 하니까요’

 

 

 

<어때요. 종일 걷고, 쉬고, 보며, 얘기하기에 딱이지 않습니까>

 

중도는 의암댐이 들어서면서 생겨났답니다. 쉽게 말해 물길을 막기 전엔 걸어서 다녔던 곳이란 거죠. 그렇게 만들어진 섬은 크게 상중도와 하중도로 나뉘는데요. 이 가운데 하중도가 흔히들 알고 있는 중도유원지이구요. 상중도는 농사를 짓는 이들이 살고 있는, 여느 시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중도는 딱히 볼만한 거리들이라곤, 딱히 즐길만한 놀이시설이라곤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춘천을 배경으로 찍은 ‘겨울연가’와 ‘와니와 준하’ 촬영지, 섬을 둘러싸고 있는 산책길 과 자전거길, 선착장 바로 옆 선사유적지, 저렴한 가격의 통나무집과 민박, 들을 빼고 나면. 널따란 잔디, 사방에서 보이는 강, 나무와 조그만 숲이 다니까요. 하지만 이런 점들이 오히려 중도의 매력이 아닐까 싶기도 하는데요. 이번 방문이 그런 느낌을 가져다 주었더랬거든요.

  

2년여 만에 봤기도 했지만. 배를 전세 낸 듯 둘이서만 타고서. 다 떨어진, 이제는 색까지 다 바랜 낙엽을 밟으며. 좀 세차긴 했지만 시원한 강바람도 맞으며. 그동안 살아왔던 얘기들. 앞으로 살아갈 얘기들. 다른 이들이 사는 얘기들. 걷다. 가끔은 나무 아래, 호숫가에 쉬기도. 추위를 녹이려 자판기 커피를 한잔씩 마시기도. 섬으로 들어오는 배를 말없이 바라보기도. 하니, 중도. 이 섬의 매력에 푹 빠지게 되더라니까요.    

 

이제 누군가가 또 춘천엘 온다면 함께 들를만한 곳으로. 그래요. 중도를 추가해야겠습니다. 다소 뱃삯이 비싸기는 하지만. 종일 걷기에 이만한 곳이 어디 또 있을까 싶으니. 종일 사람 사는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곳이 어디 또 있을까 싶으니.

 

꽃망울이 터진 봄이면 어떻고, 낙엽이 다 진 이 가을이면 또 어떻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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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1 11:47 2009/11/11 11:47

콩 타작

from 09년 만천리 2009/11/10 15:56

콩 타작 - 셋째 날(11월 5일/맑음 1-13도)

 

비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잠깐씩 내렸지만. 콩 타작 하는 일 이외엔 밭에 나와도 딱히 할 일이 없기에 모처럼 나흘을 푹 쉬었다. 쉬는 동안 시래기도 삶아 말리고 전주에 털기만 했던 콩도 골라내긴 했지만 오랜만에 뒹굴뒹굴. 신선놀음이 따로 없었다.

 

오늘은 이른 점심을 먹고는 해가 질 때까지 도리깨로 두 시간 타작. 나무막대기로 두 시간 타작. 대충 한 시간 돌 고르고 콩깍지 고르고. 덕분에 콩이 자루에 가득하다.

 

콩 타작 - 넷째 날(11월 7일/맑음 8-19도)

 

날이 좋은 날 놀지 말고 부지런히 콩을 털어야 할 텐데. 마음만 그렇다. 어제는 과학관 구경에 나섰다가 모처럼 서점에도 들르고 명동에도 들르고 했다. 밭에 쌓아둔 콩 더미를 생각하면 늦은 오후라도 밭에 나갔어야 했는데. 부러 여유를 부린 것이다. 비만 오지 않는다면 날이 조금 춥더라도 콩 터는 데는 별 문제가 없으리란 생각으로.

 

오늘도 그제처럼 이른 점심을 먹고 밭에 나가 네 시간 넘게 열심히 콩을 털지만 겨우 묶어 세워둔 콩 더미로 세 더미 밖에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아무래도 나중에 심은 것들을 터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 듯하다. 그래 가만히 보니 일찍 심은 것들은 키는 큰데 콩깍지가 많이 달리지 않고. 나중에 심은 것들은 키는 작지만 콩깍지는 훨씬 많은게. 뭐든 시기를 잘 맞춰야 수확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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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0 15:56 2009/11/10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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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

from 09년 만천리 2009/11/02 18:23

지주 뽑아내다(10월 26일/안개 후 맑음 9-19도)

 

오랜만에 안개다. 날이 쌀쌀할 땐 안개가 안 생겼는데 날이 푸근해지니 다시 안개가 낀 것이다. 안개가 오죽 짙게 끼었으면 점심때가 다 돼서야 겨우 해가 보인다. 어제만큼 해가 나온다면 한 이틀 고추를 바짝 말려 빻으려 했는데. 하루, 이틀 더 날씨를 봐야겠다.

 

오늘로 아래 밭에 심은 고구마는 모두 수확이 끝난다. 애초 사흘 정도 잡고 캐낼 생각이었는데. 위쪽 밭에 비하면 겨우 이틀 만에 다 캐냈으니 수확량으로 따져도 5분의 1도 되지 않는다. 물론 씨알도 자잘한 것만 있을 뿐이다.

 

고구마를 다 캐고 나니 시간이 어중간하다. 곧 점심때가 될 터이긴 하나 느지막이 아침을 먹고 나와 배 속 사정은 여유가 있고. 고구마도 채 한 시간도 안 돼 다 캐냈으니. 해서 여름 내내 밥상을 풍성하게 해줬던 오이며, 호박 지주를 뽑아낸다. 주말에 중곡동 식구들이 온다고 하니 그때까진 고추 지주까지 다 뽑아야 한다. 그래야 차를 이용해 한 번에 다 나를 수 있으니.

 

어중간한 시간에 일을 시작한 것도 있지만. 생각보다 지주를 뽑아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아 점심때가 한 참 넘어서야 일이 끝났다. 오이며, 호박 줄기에 달린 매듭을 일일이 잘라내야 하고, 지주에 칭칭 묶인 비닐 끈도 일일이 다 풀어내야 하고, 흙도 탈탈 털어내야 하기에, 그리고 혹여 땅에 떨어지거나 잡초에 숨은 끈은 없는지 확인도 해야 하고. 서둘러 고구마를 자루에 담아 자전거에 오르니 한 시가 훌쩍 넘는다. 일할 땐 몰랐는데 시계를 보고나니 배가 고프다. 서둘러야지.   

 

열무김치(10월 27일/맑음 9-21도)

 

20도까지 올라가는 낮 기온만 놓고 보면 완연한(?) 봄이다.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일교차가 큰 탓에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고. 춘천에 온지 1년이 훌쩍 넘었는데도 여전히 적응이 되질 않는다. 어쩌겠나. 알아서 몸조심하는 수밖에.

 

올 봄에도 열무며 아욱 등을 심었는데 어찌하다보니 때를 놓쳐 맛을 못 봤다. 열심히 키우기만 한 셈인데. 올 가을엔 벌써 아욱된장국을 두, 서너 번 먹었고 오늘은 열무를 수확하니 바쁜 일이 없긴 없나보다.

 

열무를 두 줄만 뽑아내서 손질을 했는데도 둘이 먹긴 양이 수월치 않다. 아무래도 훌쩍 자란 놈들은 시래기로 만들어야겠고. 아욱은 웬만큼 크는 대로 때 놓치지 않고 따가 된장국에 넣어 먹어야겠다.

 

열무만 손질해 한 자루 싣고 돌아오려니 30분 넘게 자전거 타고 온 시간이 아깝단 생각이 들어 고추 두 이랑 지주를 뽑아낸다. 역시나 지주 뽑는 시간은 10분인데 끈 정리하는데 1시간이 넘게 걸린다. 암만 봐도 뭔 수를 내도 내야할 듯하다.   

 

도리깨(10월 28일/맑음 6-18도)

 

백 평 농사를 짓던 이천 평 농사를 짓던 있어야 할 건 있어야 한다던데. 이건 좀 비싼 거 아닌가 싶다. 도리깨 하나에 1만원, 2미터×3미터 바닥 천 하나에 1만 5천원인데. 다음에 또 오라며 2천원 깎아서 2만 3천원. 콩 농사 조금 지어서 2만 3천원 어치나 나오려나.

 

늦은 아침을 먹고 밭에 나가 바닥 천을 깔고 도리깨질을 하는데. 이게 생각보단 쉽진 않다. 바닥 천이 작아서인지. 도리깨질 한 번에 이리 저리 튀는 콩들이 바닥 천을 벗어나기 일쑤다. 요령이 없어서일지 모르겠지만서도 겨우 묶어 세워놓은 콩 두 단 털고 나니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아무래도 내일부턴 뭔 수를 내야겠다.

 

그래도 털어 온 콩을 저녁 내내 돌아가며 골라내니 작년에 수확한 콩 양을 훌쩍 넘는다. 묶어 세워놓은 콩이 오늘 턴 것에 대략 20배는 될 터이니. 아무래도 이번 콩 수확도 성공이지 싶다.

 

* 도리깨 - 1만원 / 바닥 천 - 1만 3천원

 

콩 타작 - 둘째 날(10월 29일/맑음 6-22도)

 

생각보다 콩 터는 게 쉽지 않다. 일이 힘든 거 보단 시간이 많이 걸려서 그렇다. 얼추 사나흘 도리깨로 타작하고 바람 부는 날 한 이틀 키질하면 될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 돌아가는 모양새론 어림도 없다.

 

모래 비가 오고나면 날씨가 추워질 거란 예보에 두 이랑 남은 고구마를 캐야 하는데 도리깨를 잡고 있으니 아무래도 양이 많은 콩이 부담이 되나보다. 또 일요일 오후에 중곡동 식구들과 남은 고구마를 캐면 손을 줄일 수 있다는 계산도 콩 타작에 나서게 한다. 하지만 두 시간이 넘게 일을 해도 겨우 반 자루니. 언제 다 털려나. 

 

다시 고구마 캐다 - 첫째 날(10월 30일/맑음 9-23도)

 

예정대로였다면 오늘 오후 서울에서 오는 손님들과 또 일요일에 찾아오는 중곡동 식구들을 위해 고구마를 조금 남겨뒀었다. 멀리서 얼굴 보러, 밭 구경 하러 부러 오는데 고구마라도 캘 수 있게 해야 할 것 같아서였다. 헌데.

 

내일 오후부터 내리는 비가 그치고 나면 영하로 떨어지는 추위가 온다고 한다. 비록 이틀 정도 새벽에 영하로 내려가는 거지만. 고구마에겐 치명적이기에 하는 수 없이 고구마를 캐내다. 그래도 중곡동 식구들을 위해서 조금은 남겨두는데. 어차피 혼자 캐내서 옮기려면 벅차기도 하기 때문에.

 

고구마를 두 자루 넘게 캐내고는 고추단도 다 뽑아내고, 옥수숫대도 베어내고, 고추끈도 정리한다. 콩은 이미 다 뽑아 말리고 있고 며칠 전엔 오이, 가지, 호박 지주도 뽑아냈으니. 밭이 휘휘하다. 이제 고추 뽑아내고, 콩 다 털고, 배추, 무 뽑아내면 올 농사 끝이다.

 

다시 고구마 캐다 - 둘째 날(10월 31일/흐린 후 비 10-16도)

 

아침부터 날씨가 꾸물꾸물하다. 하늘을 보니 금방이라도 비가 쏟아질 듯 먹구름이 가득한데. 서둘러 밭으로 나가 남은 고구마도 캐내고 열무며 아욱도 수확해야 할 텐데. 며칠 간 낮엔 밭일을 밤엔 밭에서 가져온 콩 고르기에 고추 닦기에 쉬지를 않았더니 몸이 무거워 꼼지락댄다.

 

겨우 10시가 조금 넘어 밭으로 나가 남은 고구마를 캐내고 나니 하늘이 거멓다. 모르긴 해도 30분 내에 비가 올 듯한데. 서둘러 자루에 고구마를 담고 자전거에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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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18:23 2009/11/0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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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우고전선 가운데 8번째이네요. 1987년 개정 4쇄판으로 읽었답니다>
 

 
존 번연(John Bunyan 1628-1688)은 동시대를 살았던 존 밀턴(John Milton 1608-1674)과 함께 17세기 영국 청교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로 알려져 있는데요. 그에게 이런 명성을 가져다 준 책이 바로 <천로역정(天路歷程 The Pilgrim's Progress)>입니다.
 
하지만 <천로역정>은 그가 스스로 밝히고 있듯이 어떤 의도(意圖)에 따라 저술된 것이 아니라 일련의 여러 사건들을, ‘거룩한 땅’으로 안내하기 위해 짜 맞추듯 늘어놓고 있어 보기에 따라서는 도식적이다, 거북스럽다, 느낄 수도 있을 듯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로역정>이 존 번연의 대표작이라는, 단순한 종교서적으로 특정인들 사이에서만 읽혀진 것이 아니라, 당대는 물론 후대에도 걸작으로 인정받는 데에는, 토머스 페인(Thomas Paine 1737-1809)이 쓴 <인간의 권리 Rights of Men>와 더불어 영국 노동계급 운동의 양대 기본 문헌 가운데 하나로 널리 읽혔기 때문입니다(E.P. Thompson, <영국노동계급의 형성 The Making of the English Working Class>, 나종일 외 옮김 p.44). 즉, <천로역정>은 주인공인 크리스천이 고난과 역경을 넘어 ‘천성(天城)’에 당도한다는, ‘신앙의 문제를 우화(寓話) 형식으로 형상화한 종교소설’을 뛰어넘어 ‘1790년에서 1850년까지의 노동계급 운동의 기본 바탕을 이룬 이념과 입장의 형성에 가장 크게 기여(<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p.44-45)한 ‘복음서’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실들에도 불구하고 <천로역정>에 등장하는 무수한 비유(譬喩)들 속에서 ‘18세기를 통해 내내 보존되어 19세기에 몇 번이고 되풀이하여 터져 나오곤 했던 잠재된 급진주의(<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44)’의 흔적들을 읽어내기란 녹녹치가 않습니다. 그리고 또, 혹 그런 흔적들을 읽어냈다손 치더라도 곳곳에서 드러나는 ‘과장된 감동, 현세에 복종적인 태도, 개인적 구원에 대한 자기 중점적 추구(<영국노동계급의 형성> p.49)’,들을 보고 있자면 역시나 종교소설이라는 틀을 벗겨내기가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아무래도 존 번연의 <천로역정>을 제대로 읽기 위해서는 17세기와 18, 19세기 영국의 정치, 경제, 사회적 배경에 대한 또 다른 읽기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할 때에야 비로소 <천로역정>을 특정인들 사이에서만 읽히는 ‘복음서’에서 ‘해방’시킬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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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30 12:37 2009/10/30 12:3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