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지난주에는 통 밭에 갈 시간이 나질 않더군요. 엊그제였던 아버님 기일이라고 해봐야 특별히 제사 음식 준비를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아침 일찍 성당에 나가 연미사를 하는 게 전부였는데도 말입니다. 하지만 의정부에서 김해에서 식구들이 오니, 원님 덕에 나발 분다고. 그 덕에 이틀을 집에서 푹 쉬었답니다.

 

그리고 또 병이란 게 으레 느닷없이 닥치기는 해도 한 번은 119 구급차에 실려. 또 한 번은, 예전 같았으면 집에서 그냥 쉬었을 텐데. 다섯 살배기 조카 놈이 걱정돼 병원 문을 두드렸답니다. 결국 이래저래 병원에 들락날락, 또 사흘을 보냈으니. 지난주에 심어 놓은 김장 무며, 배추가 잘 자라는지 어디 들여다볼 시간이 있었겠습니까.

 

2. 

식구들이 다들 돌아간 어제 저녁, 월요일부턴 밭엘 나가봐야겠단 생각으로 일기예보를 보러 인터넷에 접속했는데. 이런, 유독 눈에 들어오는 신문 기사 하나가 있더군요. 하기사 요새 하도 여기저기서 플루, 신종플루 하고 있으니, 조금만 관심을 가졌다면 다들 이 기사를 봤을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아무튼.

 

강남구의 신종인플루엔자 확진 환자 수가 강북구에 비해 10배가 많다고 하네요. 강남구의 인구가 56만 명이고, 강북구의 인구가 34만 명인데. 아무리 인구 차를 감안하다고 해도 121명 대 12명은 좀 심한 거 아닙니까. 강남구와 인접한 서초구와 송파구, 강북지역의 은평구와 도봉구도 사정은 비슷하답니다.

 

기사에 따르면, 아니 ‘신종플루도 양극화…확진 환자, 강남이 강북의 '10배' - 해외여행․어학연수 많은 강남, 초기감염률 높아’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을 달고 있는 이 기사에 따르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강남 지역의 사람들이 해외여행을 하거나 해외체류를 하다 감염된 경우가 많다는 겁니다. 그러면서 얘기를 전하는 투로 신종플루를 일종의 '부자병'이라고 진단하고 있구요. 또 보건소 관계자와 병원장의 입을 빌려 이를 기정사실화 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돈’ 많은 이들이 신종인플루엔자에 노출될 가능성이 큰 만큼 환자도 늘 수밖에 없다는 애기인 거지요.     

                                                                                                                
3. 

원체 감기에 잘 걸리는데다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자 열도 나고 목도 칼칼한 게. 여지없이 또 걸렸구나, 싶었습니다. 헌데 워낙 주변에서 호들갑들을 떨어야지요. 그리고 학교에도 확진 환자가 생겨 이틀을 휴교하니 살짝 의심을 했답니다. 그래도 건강한 성인일 경우 독감과 같이 지나간다기에 그냥 푹 쉬려고 했습니다. 아버님 제사에 맞춰 멀리서 올라 온 조카만 아니었다면 말이죠. 그리고 어머님 걱정도 이만저만 아니었답니다.

 

그래 거점병원으로 지정된, 며칠 전 119 구급차에 실려와 진료를 받기도 했던 모 대학 종합병원으로 갔습니다. 집 근처 모 종합병원에서 1시간 가까이 컨테이너 진료소에서 기다리다 신종플루 때문에 발열이 있는 건지, 얼마 전 진료 받은 것 때문에 발열이 있는 건지 잘 모르겠으니 그 병원으로 가보라는 황당한 말에 씩씩 화를 내면서 말이죠. (발열과 호흡기 증세가 있어 확진 검사를 받으러 갔으니 일단 검사를 하면 되는 거 아닌가요. 쩝. 아무튼)

 

입구부터 마스크를 착용한 이들이 꽤나 많더군요. 하지만 모두가 신종플루 검사를 받으러 온 것 같지는 않았습니다. 아마도 예방 차원에서 쓴 이도 있겠고, 또 병원에서 일하는 이들은 아무래도 감염된 이와 접촉할 기회가 많을 테니 당연 그리하겠지요. 또 아무튼.

 

접수를 하고 간단한 문진표를 작성하는데 간호사가 체온을 재며 안내문을 보여주며. 신종플루 감염 여부를 확진하는 검사가 두 종류. 2만원이 조금 넘는 검사는 15분 이내에 결과를 알 수 있으나 정확도는 50% 내외. 12만원이 넘는 건 정확도는 90% 이상으로 시간은 조금 더 걸린다. 어찌하겠냐, 는 겁니다. 나 원.

 

뭘 어쩌겠습니까. 검사도 하기 전에 진찰료 명목으로 만 몇 천원을 선불로 낸 상황에서 뭔 돈이 또 있다고. 당연 2만 원 짜리를 해야죠. 

 

4.

신종인플루엔자 확진 환자 수가 6천명을 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망자는, 엊그제 죽은 70대 노인의 경우 신종플루가 원인이 아니라고 판정됐으니 모두 3명이네요. 이미 세계보건기구가 최고 경보단계인 ‘대유행(pandemic)’으로 규정짓고 있는 상황이고. 우리 보건당국의 경우 9월 말 혹은 10월께 확산 상황을 보고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를 발족할 계획을 세우기도 하고, 신종플루 경보 수준을 ‘심각’ 단계로 격상할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도 하니 아무래도 심각하긴 심각한 상황인가 봅니다. 하지만.

 

병원에서 돌아온 후에 안 거지만, 50% 내외의 정확도를 보인다고 하는 그 2만 원짜리 검사 말입니다. 그거 병원에서 했던 말과는 달리 신종인플루엔자 검사가 아니라 인플루엔자 항원 검사일 가능성이 크네요. 해서 결과가 양성으로 나왔다고 해도 신종 플루인지, 일반 계절 독감인지 구분할 수 없었을 테고. 이런, ‘돈’ 아끼려다 결국 헛돈만 쓴 거 아닐까요. 

 

사실 신종플루가 급격하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가장 문제가 됐던 것은, 병원에 따라서 차이가 조금 있긴 하지만 최소 12만원에서 많게는 20만원까지 내야했던, 확진판정을 받아야만 건강보험 적용을 받을 수 있는, 한마디로 비용이 문제였습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확진 검사를 받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는데요. 한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신종플루라고 단정할 순 없지만 증상을 호소하는 환자 가운데 30% 가량은 비용 문제로 확진 검사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강남지역에 신종플루 확진 환자가 강북에 비해 많다는 것. 그래요. 그 기사에 나온 것처럼 해외에 체류하거나 해외여행을 많이 한 탓에 신종플루에 감염됐을 가능성이 많다는 건 이해하겠어요. 하지만 말이죠. 최하 10만원이 드는 확진 검사 비용에 발길을 돌려야 하는 사람들, 아이들 과외 시킬 돈이 없어 학원에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 또 부모가 모두 돈을 벌어야 하기에 유치원에, 어린이집에 보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 외떨어진 곳에 홀로 집을 지키는 독거노인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에 노출될 수밖에 없겠습니까. 그리도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감염 됐다는 사실도 모른 체 검사조차 받지 못하고 있을까요.

 

그래요. 결국 문제는 이래저래 또 ‘돈’이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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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9 10:29 2009/09/09 10:29

풀천지

from 09년 만천리 2009/09/07 14:48

풀천지(9월 2일/맑음 14-28도)

 

딱 일주일 만에 밭에 나갔더니 온통 풀천지다. 그 동안 비가 이틀 정도 오기도 했지만 갑작스레 응급실로, 게다가 하루 입원까지 하는 바람에 그리됐는데.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불기도 하고 해서 이렇게까지는 아니겠지 했건만. 막상 풀로 뒤덮인 밭을 보니 심란하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데. 우선 퇴비를 넣어둔 곳에 이랑 만들기부터 한다. 가을 채소를 심어야 하는데 퇴비만 넣고 이태까지 방치했기 때문이다.

 

10여분 만에 이랑 하나를 후딱 만들고는 호미와 낫을 들고 고구마 밭으로 뛰어든다. 다행이도 고구마 줄기가 잘 뻗어 나와 다른 데 보다는 좀 낫긴 하다. 그래도 줄기 사이사이로 삐죽삐죽 나온 풀을 일일이 호미로 뽑아내야 하니 쉽지만은 않다. 또 땀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모기들 때문에 괜히 짜증까지 난다.

 

땀도 식힐 겸 그동안 손대지 못했던 가지며, 토마토며, 깻잎이며, 치커리 등을 수북이 따는데. 그새 해도 짧아졌는지 어둑어둑하다. 서둘러 자전거에 오르는데. 오랜만에 저녁 밥상이 풍성할 걸 생각하니 입에 침이 고인다.  

 

                       

   <씨앗을 심은 무는 싹이 텃고 모종을 사다 심은 배추는 벌레가 여기저기를 뜯어 먹긴 했어도 잘 자란다>

 

가을 채소(9월 3일/맑음 14-28도)

 

해 뜨기 전과 해 지기 전 날씨만 보면 영락없는 가을 날씨다. 선선한 바람도 바람이거니와 15도를 넘지 않는 기온으로 이젠 덥지 않겠다, 싶다. 하지만 정오를 기준으로 언제 그랬냐 싶게 햇볕이 따가워 아직은 조심해야 한다.

 

아침 일찍 옥상에 고추를 널어놓고는 서둘러 밭으로 나간다. 조금만 지체하면 금방 더워지기도 하겠지만 오늘처럼 맑은 날은 뭐를 심어도 좋은 날씨기 때문이다. 물론 내일이나 모래 쯤 비가 온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봄에는 아욱이며, 근대, 열무, 시금치까지 많은 채소를 심었었다. 하지만 무에 그리 바쁜 일이 많았는지 열무는 키워놓기만 하고 맛도 못 봤다. 또 아욱이며 근대는 언제 수확을 해야 하는지 몰라 허둥대다 결국 제 손으로 뽑아내야 했다. 이래서야 어디, 초보 농부 티 팍팍 내는 거 아닐까.

 

해서 가을 채소는 이것저것 심지 않기로 했다. 김장 무와 배추는 이미 심었으니 열무 조금하고, 상추, 아욱, 치커리. 이 정도면 족하다. 다만 이번엔 때를 놓치지 말아야지.

 

* 감자 수확량 - 11.3k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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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7 14:48 2009/09/07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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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초

from 09년 만천리 2009/09/01 19:26

감자 수확 - 다섯째 날(8월 24일/무더움 16-30도)

 

근 한 달에 걸쳐 감자를 캐고 있다. 중간에 고추도 수확하고 가을 배추와 무 심을 준비도 하느라 그랬다 쳐도 좀 심하다. 아무래도 저녁나절에만 밭에 나가다 보니 그리 된 듯하다.

 

여섯 이랑을 심었는데 오늘까지 감자를 수확하면 모두 세 이랑을 캐는 셈이다. 모래 또 비가 온다고 하니 이번 기회에 모두 캐내야 할 텐데, 벌써 첫물고추 따낸 자리에 빨간 고추가 주렁주렁이다. 감자캐랴, 고추따랴 정신없다.

 

급한 마음에 땡볕인데도 삽질까지 한다. 감자 캐는 거야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지만 봄부터 여름까지 밥상에 올라왔던 상추를 뽑아내고 다시 심기 위해 자리를 만들기 위해서다. 하지만 쇠뿔도 당김에 뺀다고.

 

상추만 심을 요량으로 자리를 만들다 알타리며 아욱 등을 심을 곳까지 만든다. 덕분에 퇴비만 사다 넣으면 될 만큼 일을 마무리했지만 한낮에 움직여야 하니 여간 번잡스러운 게 아니다.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와 옥상에 널어놓은 고추 뒤집어 주고 나니 2시가 훌쩍 넘었다. 

 

* 감자 수확량 - 12.3kg

 

고추 수확 - 첫째 날(8월 25일/무더움 18-30도)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다 못해 조금은 추운 듯한 느낌까지 드는 날씨가 계속된다. 하기사 처서가 엊그제였으니 그럴 만도 하다. 하지만 한 낮엔 여전히 30도에 육박하니, 이래저래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인 셈이다.

 

내일 밤부터 비가 온다고 하니 마음이 급하다. 무는 어제 씨앗을 심었으니 이제 배추 모종을 내야 할 텐데. 한 달씩이나 걸리도록 아직도 다 캐지 못한 감자도 눈에 밟히고, 첫물고추 따낸 후 다시 빨갛게 물들고 있는 고추도 눈에 들어오니 말이다.

 

아침 일찍 눈을 뜨자마자 옥상에 고추 널고 겨우 밥 한술 뜨고는 자전거에 오른다. 좀 이른 시간이긴 하지만 모종 파는 곳은 이보다 더 일찍 문을 여니 걱정할 필요는 없고. 30여 분 만에 사 온 배추 모종은 다 심고, 곧바로 고추 따기에 나선다. 급한 거야 감자도 마찬가지지만 아무래도 고추가 더 걱정이기 때문이다.

  

한 시간을 조금 넘게 고추를 따고 나니 어느새 포대가 꽉 찬다. 포대를 하나 더 챙겨왔으면 더 고추를 땄을 테지만. 금세 머리 위로 오른 해가 지글지글하니 이 핑계로 서둘러 호미며, 낫을 챙겨든다. 대신 한 낮 더위를 피해 해 질 무렵 다시 밭에 나가 또 한 이랑 고추를 따고 나니. 휴. 이제 겨우 절반 했네. 

  

* 고추 수확량 - 12.5kg

 

고추 수확 - 둘째 날(8월 26일/흐리고 비 19-28도)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고추 수확이다. 하지만 고추 따기 전,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가을 야채 심을 곳에 퇴비를 넣어주는 일. 해서 농협에 먼저 들러 퇴비를 사 밭으로 향한다.

 

고추 따기는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다. 허리를 굽히기도 애매하고 그렇다고 쪼그리기도 어색하고, 드문드문 나오는 상태 나쁜 고추를 골라내며 포대에 담기도 여간 신경이 쓰인다. 또 땀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모기떼들은 목이며, 손목이며, 옷으로 가려지지 않는 곳은 어디든 달려든다. 모기 쫓으랴, 고추 가려내랴, 이래저래 신경 쓸 일이 많기만 하다.

 

아침 안개 때문인지, 밤부터 온다던 비 때문인지 12시가 다 돼도 해가 보이지 않는다. 다행이지 싶다. 그래 고추 수확 끝내고 옥수수도 따고, 참외도 따고, 퇴비도 넣어준다.     

 

* 고추 수확량 - 14kg

 

태양초(8월 30일/맑음 16-24도)

 

첫물고추를 따고 13일부터 햇볕에 말리기 시작했으니 20여일이 지났다. 그 사이 비도 간간이 오고했으니 따지고 보면 보름 정도는 말린 셈이고. 난생처음 만들어보는 태양초이지만 색깔도 그렇고 냄새도 그렇고 그럭저럭 모양새는 난다. 이제 두 번째 고추를 또 따왔으니 오늘까지만 첫물고추를 말리기로 한다. 일일이 고추를 닦아내고 무개를 재보니 4.2kg인데, 28.9kg을 따서 이만큼 나왔으니 잘된 건가? 잘 안 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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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1 19:26 2009/09/01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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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쁜하루

from 09년 만천리 2009/08/24 15:58

바쁜 하루(8월 17일/무더움(소나기) 20-34도)

 

아침부터 바쁘다. 고추도 널고, 퇴비도 사고, 감자도 캐고, 소나기 때문에 급하게 집으로 오다 자전거 펑크에 수리도 하고, 다시 고추 꼭지 따고 정말 정신없는 하루다.

 

* 감자 수확량 - 4.2kg

 

* 퇴비 20kg 2포대 - 6,200원

  무 씨앗 - 7,000원

  낫 - 2,000원

  목장갑 - 2,000원

  고추 건조망 - 7,000원

 

김장 무 심기(8월 19일/가끔 흐림 23-31도)

 

요즘은 아침에 눈 뜨자마자 옥상에 고추 널고 오후에 한 차례 뒤집어주고 밭에 나가 일하고 돌아와 고추 걷는 게 하루 일과가 됐다. 태양초 만들기가 쉽지 않다고 하던데 그걸 몸소 체험하고 있는 셈이다.

 

엊그제 퇴비를 사다 넣었으니 뭐를 심어도 심기는 좀 이르지 않나 싶다. 하지만 모처럼 내일 비 소식이 있으니 급한 마음에 김장 무라도 심을 작정으로 밭에 나가는데. 오랜만에 괭이질을 하니 무 심을 조그만 이랑 하나 만드는데도 숨이 차다. 이런. 그래도 한 시간 정도 땀 흘리며 괭이질을 하고 무 씨앗을 심고 나니 뿌듯하기만 하다. 

 

* 감자 수확량 - 6.3kg

 

이랑 만들기(8월 21일/맑음 19-29도)

 

오늘은 밭에 나가 삼십 여분 남짓 배추 심을 이랑만 만들고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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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4 15:58 2009/08/24 15: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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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천군 청산면에서 속리산 아래 서원계곡까지(2006년 8월 27일)
                                                                              
                                                                                <동학 집회가 열렸던 장내에는 장승만이 서있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첫차를 탔는데도 청산에 도착하니 7시가 넘어도 훌쩍 넘었다. 아직은 구름 속으로 해가 숨어 있어 아직은 괜찮지만 언제부터 목 뒤로 따가운 햇빛이 내리쬘지 몰라 서둘러 길을 나선다. 하지만 청산 면소재지를 벗어나자마자 만나게 되는 505번 지방도로의 풍경이 자꾸만 발걸음을 늦추게 한다.
 
오른편으로 보성천이 있기는 한데 강물은 흐름을 멈춘 듯 하고, 바람은 한 점 없는 데다 사람은커녕 지나는 차 하나 없다. 길을 걷고 있는 우리 이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움직임도 없는 것이 마치 꿈속을 걷는 듯 나른하기만 하다. 큰 목소리로 노래도 부르며 힘을 내보지만 여전히 발걸음이 무겁기만 하다.
 
어제는 밖에 일이 있다며 사무실에서 땡땡이를 치고는 해지기 전 옥천에 당도했다. 꽉 짜여진 일상에서 탈출하기가 맘만 먹으면 이렇게도 쉬운 것을, 이리재고 저리재고 앞뒤 생각하니 어디 쉽게 놀러 갈 수나 있을까. 혹, ‘누가 요즘 같은 때에 간도 크게 사무실을 땡땡이 쳐!’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한 번 해보시라. 맘먹을 땐 오만가지 생각이 들겠지만 일단 저지르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열차를 타기 전 일기예보를 확인하니 소나기가 한 두 차례 온다는 이야기가 있기는 했는데, 어째 옥천역에 내리자마자 내리기 시작한 소나기가 좀체 그칠 줄을 모르더니 5시가 넘어서야 겨우 가늘어진다. 그 바람에 정지용 생가며, 문학관 구경을 놓치고 말았다. 게다가 비가 온 탓인지 날마저 금세 어둑어둑해져 옥천으로 다시 나가지 못하고 인근에서 하루 머물 곳을 정했다.
 
10여 년 전 홍수로 유실돼 이제는 그 자취를 볼 수 없는 한호팔경이 있었던 대성리라는 마을에서 한 숨 쉬고 나니 한결 몸도 마음도 가벼워진다. 하루 종일 있어봐야 동네 사람 이외에는 누구 하나 올까말까한 동네 구멍가게에서 목도 축이고, 평상에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도 나눈다.
 
마로면 관기리에 도착하니 11시가 조금 넘었다. 이제는 목덜미가 따끈따끈하고, 귀 볼 아래로 땀도 주르르 흐리니 배가 고프지 않더라도 땀을 닦으며 쉬어가야겠다. 다행이 맛 좋은 시골 밥상을 차려주는 식당이 있어 뱃속을 든든히 채우고는 커다란 은행나무가 있는 시골 학교 운동장 한구석에 자리를 펴고 눕는다.
 
까까머리 소년들의 공차기에 쪽잠이 방해받기는 해도 정겨운 시골 풍경 때문인지 그리 시끄럽지만은 않다. 나무아래 시원한 가을바람 속에서 그렇게 아직은 한여름의 따가움을 지니고 있는 햇살이 사그라질 때까지 그렇게 쉬다 3시가 넘어서야 다시 길을 나선다.
 
속리산국립공원으로 이어지는 25번 국도는 길 양옆으로 은행나무 가로수가 줄지어 서있고 너른 논이 산 아래까지 펼쳐져 있어 마음이 한결 풍성해진다. 하지만 여느 국도와 다를 바 없이 통행하는 차도 많고, 멀리 보이는 공사 현장에서 쏟아내는 덤프트럭들이 쉴 새 없이 질주하느라 조심해서 걷지 않으면 안 된다. 그래도 탄부 임한 솔밭 공원에서는 250년 이상 된 노송 사이에서 잠시 쉬기도 하고, 장내에서는 선병국 가옥에, 동학 장내 집회 장소에서 이것저것 눈요기를 하며 쉬기도 하고, 마른하늘에 때 아닌 소나기를 맞기도 하니 재밌기만 하다.
 
 
<서원계곡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선병국 가옥>
 
장내에서부터 ‘여기가 서원계곡이다’고 불리는 서원계곡은 여름철 계곡 물놀이 장소로 이름이 알려졌다기보다는 이런저런 고시들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한데 모인 곳으로 더 소문이 난 듯하다. 장내 입구에서 한 동안 우리의 발걸음을 잡았던 99칸 선병국 가옥이 그랬고, 서원리의 커다란 건물들이 모두 고시원 간판을 달고 있는 것이 그랬다. 그리고 보니 장내에서부터 유난히 선남선녀들이 눈에 띄었는데 아마 그 고시생들이 아니었을까 싶다.
 
혹시나 해서 서울에서 서원계곡 내 민박집 여러 곳의 전화번호를 적어왔지만 마땅히 잘 만한 곳이 없어 보이는 게 이만저만 걱정이 아닐 수 없다. 당초 일정은 숙박할 곳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법주사까지 걷는 것으로 잡았는데, 선병국 가옥과 동학 집회 장소에서 너무 오래 머물렀기 때문에 어쨌든 근방에서 하루 머무르지 않으면 안 될 텐데 말이다. 해서 잘 만한 곳 여기저기에 서둘러 전화를 돌려본다. 하지만 이를 어째. 쉽사리 통화가 되는 곳들은 우리가 서 있는 곳에서 한참을 더 계곡을 따라 올라가야 하고, 어렵사리 통화가 된 곳들에서는 터무니없는 방에, 터무니없는 방 값을 불러 기분만 상한다. 아무리 한철 장사라고 해도 좀 너무 한다 싶다.
 
서울로 갈 요량으로 고시촌 서원리로 다시 되돌아가는 가는데, 이름 모를 동네 어귀에서 버스편을 알아보니 이미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이미 끊겨버렸다고 한다. 어찌할까 생각해봐야 답은 없고, 일단 국도와 이어지는 장내까지 내려가기로 한다. 다행히 고시촌 못 미쳐서 맘씨 좋은 고시생을 만나 보은 읍내까지 편히 나올 수 있었다. 3시간 30분이나 걸린다는 걸 차가 출발한 후에야 알게 된 남부터미널행 시외버스에 오르니 창밖으로 어둠이 짙다.
 
* 열두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 옥천군 청산면에서 보은군 외속리면 서원계곡까지 약 23km. 걸은 시간은 약 6시간.
 
* 가고, 오고
옥천까지는 영등포역에서 14시 33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열차로 이동했으며, 청산면까지는 군내버스를 이용했다. 영등포에서 옥천까지 기차요금이 8,200원인데 옥천읍에서 청산면까지 버스요금이 3,250원이니 웬만하면 열차나 고속버스가 다니는 곳에서 시작과 끝을 맺는 게 좋다. 서원계곡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은 맘씨 좋은 고시생을 만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하루 더 그곳에 머물러야 했다. 서원계곡에서 보은읍내로 나가는 버스는 몇 차례 운행하지 않는다는 것도 문제지만 대략 저녁 6시 이전에 마지막 차가 지나는 것을 보았으니 하루 더 머물 요량이 아니라면 막차시간을 미리 확인해야 한다. 보은에서 청주를 거쳐 서울로 올라오는 시외버스는 시간도 많이 걸릴 뿐만 아니라 저녁 7시 30분이 마지막이다. 시간을 절약하려면 일찍 터미널에 도착해 대전이나 청주를 거쳐 고속버스 또는 열차를 이용하는 것이 낫다.
 
* 잠잘 곳
이번 여행은 1박 2일 일정이었지만 걷기는 둘째 날 하루만 했다. 첫째 날 우리가 머문 곳은 정지용 생가 인근의 춘추민속관이라는 곳이다. 가까운 옥천 읍내에는 여관과 모텔 등 숙박할 만한 곳이 여러 있으나 한옥체험을 할 수 있다 해서 그곳에서 머물렀다. 속리산 아래 서원계곡에는 황토방갈로를 운영하는 곳 한 군데를 제외하고는 숙박할 만한 곳이 없으니 보은읍이나 법주사 쪽으로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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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2 13:20 2009/08/22 13: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