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초, 역시나 밭 구하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습니다. 좀 더 좋은 밭을 얻어 보겠다는 욕심 아닌 욕심으로 작년에 지었던 밭을 놓쳤던 게 일의 시작이었고 안 되겠다 싶어 생활정보지까지 뒤적거리다 장학리로, 사우동 솔밭으로, 정족리로, 송암동으로 연일 허탕을 치더니 종국엔 농지원부가 뭔지도 모르는 지금 밭주인을 겨우 겨우 만났으니 말입니다. 하지만 작년보단 작물들이 꽤나 잘 자라는 것 같아 구할 때 가졌던 마음 졸임을 다 잊고 있으니 썩 나쁜 기억으로만 남을 것 같진 않습니다.

  

<집은 춘천 서쪽 끝트머리에, 밭은 동쪽 끝트머리에 있답니다. 어찌..... 밭이 넓나요?>

 

작년에 농사를 지었던 밭은 평수가 그리 크지 않았습니다. 처음 농사를 짓는 거라 처음부터 무리하지 말자는 생각에 작은 밭을 구했거든요. 그때도 생활정보지에 내 놓은 광고를 보고 구했습니다. 연고라고는 친구 하나 없는 곳에서 인데다 급하게 이사를 하느라 시내에 아파트를 얻었기에 밭 구하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봄농사 시작하기엔 좀 늦긴 했지만 이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밭을 구했으니 정말 다행이었죠.

 

<집을 나서 처음 만나게 되는 순환도로에는 지금 경춘복선전철 공사가 한창이랍니다> 

 

연일 장맛비가 계속 내리니 밭에 나가는 시간도 자연스레 줄었습니다. 애초 한 낮 더위는 피해 새벽녘과 해질녘을 전후해 서너 시간씩만 일을 하기로 했던지라 지금처럼 비가 계속되면 다른 이들보다 일이 더 쌓이게 되지요. 하지만 고추 몇 주가 쓰러진 거 빼곤 큰 피해도 없고 제때 풀을 잡아주지 못해 무릎까지 풀이 난 곳만 빼면 크게 손 볼 곳이 없으니 다행입니다. 그래도 가끔씩 맑은 하늘이 보이거나 잔뜩 흐려있어도 비가 오지 않으면 바로 바로 자전거에 오릅니다. 틈날 때마다 김매기도 해주고, 지주대도 다시 묶어주고, 열무며, 알타리를 심을 곳도 손봐야 하니까요.

 

<공지교에서 대룡산을 바라본 보습입니다. 다리 아래로는 의암호로 흘러들어가는 공지천이 흐릅니다>

 

밭은 지금 살고 있는 집에서 대략 6킬로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문전옥답(門前沃畓)이란 말이 있듯이 집 근처에 밭이 있다면 좋으련만 그렇지가 않은 거죠. 해서 밭에 가는 길이 쉽지만은 않고 시간도 꽤나 걸린답니다. 차가 있다면 채 10분도 걸리지 않을텐데, 자전거로 위험한 곡예를 하듯 찻길을 따라 때론 긴 오르막길도 넘어 가려니 그런 것이죠.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남들은 시간 내고 돈 내서 운동한다던데 뭐 운동하는 셈치고 열심히 페달을 밟습니다. 그래도 가끔 힘이 부칠 때면 집 뒤 조그만 산 하나만 넘으면 금방이었던 작년 밭이 떠오르긴 합니다.

 

<작년에 텃밭 농사를 지었던 곳은 이런 멋진 호숫길을 따라 갈 수 있었답니다>

 

아직도 춘천하면, 중도와 아침 안개가 자연스레 떠오릅니다. 정작 춘천으로 이사한 이후로도 여태 호수를 건너 둘러보지 못했는데도 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학교와도 거리가 꽤 멀고 교통편도 그리 좋지 않은데도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가 왠지 모르게 처음 본 순간부터 꽤나 끌렸습니다. 베란다에서나마 뒷산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렇고, 조그만 오솔길을 지나 만나게 되는 도서관도 그렇고, 무엇보다 공지천에서부터 의암호를 끼고 돌아 중도에를 건널 수 있는 배터까지 연결된 산책길이 마음에 들었던 겁니다.

 

<초기 도시계획 단계에서 각 교차로에 1호, 2호, 식으로 불렀던 것이 그대로 지명으로 남은 팔호광장입니다>

 

<팔호광장을 지나면 곧 긴 오르막이 나타납니다. 이 언덕만 아니었으면 밭에 가는 길이 꽤 수월할텐데.....>

 

올 해 얻은 밭에 가는 길은 서울에서 온 사람들이 보기엔 우습기까지 하겠지만 도심을 가로질러 가야합니다. 다행히 시청을 중심으로 한 명동 한복판을 지나지는 않지만 남부시장과 운교사거리며, 팔호광장 등을 거쳐야 하니 말입니다. 그러고 보니 집은 춘천 서쪽 끄트머리에 밭은 동쪽 끄트머리에 있네요. 아무튼 이리 도심을 가로질러 가려니 도무지 밭에 가는 맛이 나질 않습니다. 게다가 자전거 뒤 짐받이에는 괭이며 삽을, 앞 짐바구니에는 호미며 낫을 싣고는 밀짚모자를 쓴 채 질주하는 모습이라니. 참 멋대가리 없습니다. 그려.

 

그에 비해 작년에 얻었던 밭에 가는 길은 나름 농사짓는 폼을 잡을 수 있을만했더랬습니다. 집이 워낙 변두리에 있었던 터라 고개 하나만 넘으면 곧 산과 논과 밭이 흩어져 있어 자전거를 타고 갈라치면 경운기도 ‘털털털털’ 다니고 소똥 냄새도 엔간히 났으니까요. 게다가 좀 전에도 얘기했던, 의암호에 자리 잡고 있는 중도를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 산책길이 집까지 연결돼 있었으니까요.

 

내일은 아침 일찍부터 움직여야겠습니다. 지난주까지 퍼붓던 장맛비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하루걸러 200미리, 130미리 장대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물이 아직도 빠지질 않고 있습니다. 또 고추도 몇 주 쓰러졌고 오이, 호박, 토마토, 방울토마토에 세워줬던 지주대도 흔들흔들하거든요. 게다가 모처럼만에 어제 서울 나들이를 하는 바람에 또 이틀을 밭에 나가지 못했답니다. 그래 일이 많거든요. 아 참. 내일은 밭에 다녀오는 길에 잠시 자전거포에 들려야 할 것 같습니다. 이상하게시리 며칠 전부터 페달이 ‘삐걱삐걱’ 소리를 내는 게 기어도 뻑뻑하니 아무래도 손을 좀 봐야 할 것 같거든요. 밭에 오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자전거가 고장이라도 나면. 당장 걷고, 버스타고, 또 걷고. 아,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합니다.

 

 

 

 

 

<이제 밭이 코 앞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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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8 23:05 2009/07/28 23:05

 

<장맛비에 쓰러지길 두 어번, 잎이 누렇게 되고 아래쪽 고추부터 썩어가기 시작했다(위).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했으나 결국 10여주를 뽑아낼 수밖에 없었다(아래).>

 

장마 소강상태(7월 21일/무더움 23-30도)

 

거의 일주일 넘게 이틀 간격으로 쏟아 붓던 장맛비가 그쳤다. 예보로는 당분간 비가 오지 않겠다고 하는데 밭 상태를 봐선 정말 다행이지 싶다. 어제 하루를 쉬고 나왔는데도 아직까지 고추 밭 배수로에 물이 쫄쫄 흐르고 있으니 말이다. 아마 이대로 며칠 더 비가 왔다면 고추 농사 끝났을 거다.

 

모처럼 아침 일찍 나왔더니 꽤 많은 일을 할 수 있다. 심어놓고 통 들여다보지 못했던 옥수수 밭 김매기도 하고, 한 번 풀을 뽑아줬던 고구마 밭도 조금 손을 댔으니. 하지만 신발은 이슬에 다 젖고 옷은 땀으로 범벅이니 꼭 아침이라고 해서 일하기 쉬운 것만은 아니다. 더구나 일 끝내고 돌아갈 때쯤이면 해가 중천에 떠서 되려 더 덥기만 하다.

 

장맛비가 그렇게 내렸는데도 빨간 토마토와 방울토마토가 주렁주렁이다. 참외도 서너 개 노랗게 됐고. 요즘만 같으면 과일 주전부리가 부족함이 없겠다. 매일매일 따내도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또 열리니 말이다.

 

아침안개(7월 22일/무더움 19-30도)

 

장맛비가 그치니 춘천 본래의 날씨로 되돌아 왔다. 큰 일교차, 그리고 그로 인한 안개.

 

저녁나절에 일하는 것과 아침녘에 일하는 것, 둘 다 장단점이 있다. 우선 저녁에 일을 할 경우, 우선 일하는 데 덥지가 않아 좋다. 밭 주변에 그늘을 만들어 줄만한 거라고는 거의 다 지어가고 있는 아파트뿐인데 밭에서 보면 서쪽 방향에 있어 해질녘에 그 덕을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늘을 만들어 주는 시간에 맞춰 나가다 보면 금세 어둑어둑해져 일하는 시간이 짧아진다.

 

다음 아침에 일하는 경우는, 그 반대라고나 할까. 일단 밭에 도착할 때까진 선선한 게 좋다. 하지만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해가 뜨는 속도와 비례해 기온이 오르기 시작한다. 그러다 배가 고파 집으로 돌아갈 때가 되면 벌써 한 낮 더위와 맞먹게 된다. 그리고 곧 땀으로 범벅이다. 그러니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얼마나 멀게만 느껴질까. 하지만 저녁때 두어 시간 일하는 거에 비하면 근 서, 너 시간은 너끈히 있을 수 있으니 딱 언제가 좋은지는 잘 모르겠다.

 

장맛비 때문이기도 하고 무더위 때문이기도 하고 저녁나절에 일하다 오늘부터는 다시 아침에 나오기로 했다. 앞에서 말했듯 더운 게 문제이긴 하지만 워낙 일이 밀려 있기 때문이다. 엉성해진 지주대도 다시 묶어줘야 하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김매기도 해야 하고, 곧 감자도 캐야 하기 때문이다.

 

토마토케첩(7월 23일/무더움 20-29도)

 

연일 토마토가 빨갛게 열린다. 둘이 먹기엔 만만치 않은 양이다. 사실 토마토만 그런 게 아니다. 참외도 그렇고, 방울토마토도 그렇고, 채소는 모종을 10개, 20개만 심어도 한참 열매를 만들어 낼 땐 주체하기 힘들다.

 

작년엔 갑자기 쌀쌀해진 날씨 탓에 채 익지도 않은 토마토를 두 바구니가 넘게 따서 식초에 담구기도 했다. 설탕 조절을 잘못해서인지 그다지 맛이 나지 않아 아직까지 세 병이나 남아 있긴 하지만 그런대로 오래두고 먹을 수 있게 만든 셈이다.

 

오전에 세 시간 가량 옥수수 심은 곳과 채소 심은 곳 김매기를 해주고, 지난 장맛비에 엉망이 된 지주대도 다시 튼튼히 세워도 주고, 역시나 빨간 토마토 한 바구니를 따서 집으로 오니 냉장고 과일 칸이 가득 찬다. 대체 이 많은 걸 어쩌나.

 

결국 토마토를 다 끄집어내고는 무르거나 따온 지 오래된 것들을 골라내 작년에 담갔던 매실액을 섞어 케첩을 만든다. 토마토가 워낙에 단맛이 많아 매실액을 조금만 넣었는데도 다 만들고 나니 어찌된 게 파는 것 마냥 달기만 하다. 그래서일까. 할 땐 많아 보였는데 만들면서 맛보고, 다 만들고 밥에 조금 비벼먹고, 또 감자에 묻혀먹으니 한 병도 채 안 된다. 이런.

 

고추를 뽑아내다(7월 25일/흐림 18-25도)

 

결국 고추 10여주를 뽑아내고 말았다. 지난주까지 퍼붓던 장맛비에 쓰러졌다, 일으켜 세웠다, 다시 쓰러졌다, 를 반복했던 고추들이 시들시들하더니 몇 주는 살아나고 몇 주는 잎이 몽땅 시들해지며 아래쪽 고추부터 말라가 하는 수 없이 뽑아 버린 것이다. 그래도 짱아찌나 부각이라도 만들 요량으로 말라비틀어진 것들을 빼고 나머지 고추를 다 거두니 비닐봉지로 세 봉지다.

 

죽어가는 고추를 다 뽑아내고는 어제 내린 비로 또 물이 쫄쫄 빠지고 있는 배수로를 다시 파내고 나니 두 시간이 훌쩍 지난다. 서둘러 호박 지주대도 다시 튼튼히 묶어주고 고추와 콩 심은 곳에 제초 작업을 두 이랑 하고 곧 자전거에 오른다. 모래 있을 조카 백일 선물 때문에 저녁에는 시내로 나가야하기에.

 

<참외, 토마토, 호박, 오이, 방울토마토, 가지... 우와 하루에 이만큼씩이나? 감자는 좀 있다 한 번에 캐야겠다>

 

풍성한 여름(7월 26일/맑음 18-25도)

 

내일은 모처럼 서울 나들이다. 겸사겸사, 올라가는 김에 맛 뵈기로 한참 많은 열매를 만들어주는 호박이며, 참외, 토마토 등을 한 바구니씩 따가야겠다. 해서 일요일이라 쉬려했지만 잠시 밭에 들르는데, 조금씩만 담는다고 했는데도 이것저것 담으니 자전거가 다 무거울 지경이다. 정말 풍성한 여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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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7 20:33 2009/07/27 2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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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용자 삽입 이미지1.

‘바보 노무현’이 저 세상으로 간지 그새 60일이 됐네요. 믿기지 않았던 그 토요일의 아침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말입니다. 세상사는 일이 다 그런가봅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 뒤엔 곧 잊힘이 있고.

 

사실 ‘바보 노무현’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를 세상에 알렸던 청문회와 김영삼을 향한 삿대질, 안될 줄 알면서도 또 부산으로 향하던 모습들을 기억하지만 어찌 된 게 그런 일들이 있었기나 한 것 마냥 통 기억이 없으니까요. 또 그를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던 돼지저금통과 노란색의 물결도 그저 잘 찍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 성별 학력 지역의 차별 없이 모두가 자기의 꿈을 이루어가는 세상 ..... 우리 아이들이 커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그려보세요. 행복한 변화가 시작 됩니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믿게 만들었던 걸까요. 동창회 모임 때 말고는 얼굴보기 힘든 동기들 전화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12월의 몹시도 추웠던 그 날, 마지막 유세를 위해 종로를 거쳐 광화문 교보문고 앞을 지나 미 대사관 근처까지 가는 길에 말이죠. 온통 북새통에 목소리도 들리지도 않는데 이쪽에 뭐라 하든 상관없이 연신 ‘2번’을 외치던 전화를 말입니다.

 

2.

“그러므로 미국의 줄기찬 호전성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우리의 운명이고, 파병을 결정한 우리 정부다. 노무현 정부는 왜 우리가 그에게 허락한 국가권위를 이토록 쉽사리 남용하는지 알 수 없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p.297 「피 묻은 국익 (2003)」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까지 포함된 서민들의 평화집회에 부안 군수를 위해 정부수반이 보내준 경찰은 특수진압 전투경찰들이었다. 어떤 정권도 이룩하지 못한 핵폐기장을 자발적으로 건설하겠다는 군수가 나타나자 그토록 갸륵했을까.” p.242 「‘핵’ 깡패들 (2003)」

 

“농부들이 논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신자유주의를 내건 열강들의 시장개방 압력에 정부가 너무나 쉽게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쌀농사를 포기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이 땅에서 이 땅의 산물을 취하며 오래오래 살겠다는 태도가 아닙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 허구입니다.” p.29 「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2006)」

 

“집회가 절정에 이르던 오후 녘, 조용히 밀물이 차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금(生金)밭’ 갯벌이 진짜 보석처럼 햇살에 반짝거렸다. 에루아 에루얼싸, 눈물났다. 에루아 에우얼싸. 우리가 부른 노래와 춤은 새만금이 그냥 죽도록 포기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싸움을 다짐하는 결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p.108 「에루아 에루얼싸, 새만금 (2006)」

 

글을 쓴 이의 면면을 봐도 그렇고 책을 몇 장만 넘겨봐도 영락없는 자연 평화 생태 환경 산문집일 뿐이건만 읽는 내내 왜 ‘바보 노무현’이 자꾸만 떠오른 걸까요. 애초 기대라는 것조차를 하지 않았기에 큰 실망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명분 없는 전쟁에 나서고, 그 전쟁에 우리 젊은이가 죽어가도 꿈쩍하지 않고, 농민이 맞아 죽어도, 노동자가 제 몸에 불을 살라도 FTA는 꼭 해야 한다, 하고, 핵쓰레기를 파묻을 곳은 찾고 또 찾고, 기어이 갯벌을 도룡뇽의 숨통을 끊어 놓는 데는 당체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답니다. 또 129일이라는 시간동안 그 높은 크레인 위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다 끝내는 제 목을 매달고 만 한 노동자와 그런 그이가 몹시도 보고파 크레인이 굽어보는 도크에 몸을 던진 또 한 노동자에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며, 연민의 눈조차 건네지 않았던 데는 마침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바보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은 까닭이요.

 

3.

‘바보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그 토요일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새벽, 여기 춘천에도 시민분향소가 세워졌더랬습니다. 헌데 급작스레 만들어진 탓도 있었겠고, 아직 출근 전이라는 시간 탓도 있었겠지만, 분향소엔 두 어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 분향소 주위엔 ‘바보 노무현’을 상징하는 노란색 메모지가 수십 장 걸려있었지만 정작 아무 글도 쓰여 있지 않았구요. 아무튼 조촐하다 못해 썰렁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이었기에, 또 ‘바보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잠시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저 웃고 있는 ‘바보 노무현’을 한참 바라보다 왜 담배를 끊었을까, 뜬금없는 자책 아닌 자책 후에 조용히 자전거에 올랐더랬습니다. 아, 바람에 팔랑거리던 그 노란 빈 종이에 한마디 적은 후에 말입니다. ‘그래도 노짱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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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3 14:13 2009/07/23 14:13

<이틀 걸러 쏟아진 장대비에 고추가 쓰러졌다> 

 

첫째 날(7월 13일/흐리고 비 19-27도)

 

9일 날은 200mm, 어제는 130mm의 비가 내렸다. 다행히 밭 한쪽만 빼곤 물 고인 곳이 없다. 하지만 며칠 간격으로 많은 비가 쏟아지니 밭에 물기가 잔뜩 이다. 또 물 고인 것 빼곤 괜찮은 듯싶었던 고추도 몇 주가 쓰러졌다. 급한 마음에 콩 밭에서 흙을 퍼다 고추를 바로 세우고 지주끈도 다시 묶어주지만 어째 엉성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비 그치면 대대적으로 손을 봐줘야겠다.

 

고추 밭에 발을 들이민 김에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두었던 잡초 제거를 하니 금세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래도 낫질을 하면 할수록 고추 밭이 깨끗해지니 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 한 시간 남짓 열심히 낫질을 하는데 이런. 낫자루가 힘없이 ‘툭’ 부러지고 만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고 했던가. 낫이 없다고 하다만 제초를 그만둘 수 없어 괭이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는데. 오호 그럭저럭 낫 역할을 꽤 한다. 하지만 어찌 낫을 따라갈 수 있을까. 결국 고추 밭 제초는 다 하지도 못하고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와 오이 몇 개를 따고는 자전거에 오른다.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을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다행히 집이 코앞이다. 쓰러진 고추가 걱정돼 서둘러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는데. 쓰러진 고추는 억지로 세우면 뿌리에 바람이 들어가 섞을 수 있다며 그냥 나둬야 한다는 얘기도 있고 쓰러진 고추 옆에 지주대를 대주고 세워줬더니 다시 잘 자랐다는 사람도 있다. 답답한 마음에 계속 노트북 앞에 앉아 있지만 뭐가 정답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쓰러진 고추는 세웠으니 이젠 오면서 가면서 잘 살펴줘야 하는 수밖에.

 

둘째 날(7월 15일/맑음 22-27도)

 

어제 또 200미리가 넘게 비가 내렸다. 연일 쏟아지는 비에 여기저기 비 피해가 심하다. 여기 춘천도 곳곳에 농경지가 침수되고 하천이 넘치고 산이 무너졌다. 또 밭과 인접한 하천 제방 일부가 침수되면서 다리가 무너지기도 했다.

 

그제 비가 잠시 그쳤을 때 쓰러진 고추를 일으켜 세워 놓긴 했지만 어제 비로 몽땅 다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임시방편으로 콩 밭 흙을 떠다 쓰러진 고추를 일으켜 세워보지만 아무래도 지지하는 데 힘이 부친다. 연일 계속된 비로 지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탓이다. 주말에 또 비가 온다는 데 지금으로선 비의 양이 많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일으켜 세워도 다시 내린 비로 또 쓰러졌다. 이제 엔간히 왔으면 좋겠는데.....>

 

셋째 날(7월 16일/무더움 21-32도)

 

모처럼 해가 보인다. 밭 상태로 봐선 이쯤해서 비가 그치고 오늘처럼 맑은 날씨가 계속돼야 할 텐데 내일 또 비소식이다. 쬐끄만 밭 하면서도 이리 마음이 편치 않은데 빚까지 내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어쩔까. 이제 엔간히 왔으면 좋겠다.

 

일으켜 세운 고추들 가운데 몇몇이 시들시들하다. 물이 덜 빠진 곳에 있는 것들이다. 아무래도 내일과 모래 비가 더 오면 살아남기 어려울 듯하다. 아직까지도 배수로에 물이 쫄쫄 흐르고 있으니.

 

한 낮 따가움을 피해 나왔더니 얼마 일도 못한다. 비오는 데 온 신경을 다 쓰느라 돌보지 못했던 채소와 과일 심은 곳에 김매기도 해주고 여전히 물이 빠지지 않고 있는 고추 밭에 배수로도 다시 파주고 하니 금세 어둑어둑해지니 말이다. 부쩍 빨갛게 잘 익어가는 방울토마토와 비오면 맛이 떨어진다는 참외 한 봉지를 따니 사위가 어둡다.

 

넷째 날(7월 18일/무더움 23-30도)

 

어제 또 비가 내렸다. 그래도 다행히 양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간 내린 비로 이미 땅이 흠뻑 젖은 상태라 일으켜 세운 고추가 잘 버티고 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서일까. 급한 마음에 30도에 이르는 무더위가 올 거라는 것도 잊고 한 낮에 집을 나선다. 꼭 고추 밭만 살펴보고 오자 다짐하며.

 

우려했던 것과 달리 쓰러진 고추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한 번 쓰러졌던 것들은 여전히 시들시들하고 자꾸만 옆으로 기우뚱 기우뚱 쓰러지려 해서 다시 지주끈을 동여매준다. 또 틈나는 대로 고랑사이 김매기도 하고 아직도 물이 빠지고 있는 배수로도 다시 파준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일이 많다.

 

고추 밭만 살펴보고 오자, 했는데 어찌 일 하다 보니 그게 쉽지가 않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도 조금만 더, 조금 만 더, 하다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으니. 그래도 혼자 일하다 둘이 일하니 진도도 빨리 나가고, 언제 손봐줘야지 하면서 바라보고만 있던 채소밭 김매기까지 하니 힘들긴 해도 일할 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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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9 19:30 2009/07/1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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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덕유산에서 길을 잃다(2006년 6월 5일)

 

    <횡경재 오르는 길>

<횡경재 오르는 길>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시간이다. 4시 30분. 하지만 어제 저녁 부탁해 놓은 된장국에 아침을 먹고 나니 어느새 산 정상에서부터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마중이다.

 

덕유산은 처음인데다 준비한 등산지도들이 제각각 이어서 걱정이다. 게다가 너무 이른 시간 이어서인지 문 잠긴 매표소에는 안내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출발이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오르니 비구니 한 분이 내려오신다.

 

“저. 길 좀 여쭐게요. 혹시 송계사에서 백련사로 넘어 가는 길을 아시나요?”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조금 올라가시면 오늘 산행을 하신다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시겠어요?”

“예”

 

대답만큼은 씩씩하다.

 

송계사 못미처 만나게 되는 철조망을 지나자 이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크게 급하지 않은 산길인데다 길옆으로는 계곡 물이 흐르고 있고, 햇살은 아직 나무들 틈 사이까지 비추지 않고 있어 오히려 뒷동산에 오르듯 걷기에 좋다. 어째 출발은 좋다.

                                                                                                                                                         

횡경재까지 오르는 길은 초행길이지만 지루하지도 힘이 들지도 않을 만큼 완만한 오르막길과 계곡과 나무들이 어울려있다. 아침을 든든히 먹기는 했지만 슬슬 배가 고파오는 것을 빼고는 정말 기분 좋은 산행이다. 하지만 곧 닥쳐올 힘겨운 산행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횡경재에서 만난 사람들을 따라 무작정 산길을 나섰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등산로를 미리 확인해두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비구니의 말을 따라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아서였을까? 횡경재를 두고 무려 세 시간을 산 속에서 헤매었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마주치는 아주머니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등산로를 찾았는데도 아직 그 자리다. 별수 없다. 다시 처음 길을 나섰던 횡경재로 되돌아가 본다. 헌데. 이런 길이 두 갈래가 아닌가. 동네 뒷산의 산책길 같은 등산로를 놔두고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산 아래에 있을 시간인데 이제야 길을 확인하다니.

 

향적봉과는 반대편 길로 30분쯤을 가니 지봉안이다. 여기서 다시 길을 확인하는데 어째, ‘등산로 없음’을 알리는 나무표지판과 계곡 아래쪽으로 난 방향표지판이 같은 것 아닌가. 어쩌라는 거지? 덕유산 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전화를 해보지만 이건 첩첩산중일 뿐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은 없다고 한다. 분명 나무표지판에는 내려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준비해간 세 장의 지도와 여기 두 개의 표지판, 그리고 관리사무소 이야기가 모두 틀리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 탓에 그리될 수밖에 없는 국립공원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등산로 표지판 정도는 잘 해놔야 하는 거 아냐?’는 생각에 조금은 화가 난다.

                                                                                                   

그렇게 한참을 어찌할까 씩씩대며 고민하는데, 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일단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방향을 나타내는 표지판을 믿기로 한다. 대신 조금이라도 길이 좁아진다거나 하면 다시 되돌아오기로 한다. 하지만 이런, 갈림길에 얼마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길도 좁아지고 숲도 울창한 것이 좀 전에 헤매던 상황과 비슷하다.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이러다 정말 조난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다행이다. ‘조금만 더 내려가 보자’며 계곡 쪽으로 길을 잡으니 최근에 이 길로 산행을 한 듯 한 이들이 드문드문 이정표를 해놓은 리본들이 알록달록 보인다.

 

결국 오전 6시부터 산행을 시작해 반대편 백련사까지 내려오는데 무려 8시간이 넘게 걸렸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고 오늘은 더 이상 걷기 어렵겠다. 무주구천동에 있었던 14개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련사에서 잠시 쉬면서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이니, 원통전이니, 삼성각, 범종각, 천왕문 등등을 구경한다. 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꿀맛 같은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입에 물고는 ‘백련교’를 넘어 다시 1시간 30분 넘게 구천동계곡을 따라 내려와 점심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밥을 먹으니 파김치다. 에라,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이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누워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넷째 날, 구천동계곡을 따라 무주군 설천면까지(2006년 6월 6일)

 

어제는 산 속에서 헤매는 바람에 백련사부터 시작되는 구천동 33경 가운데 사자담, 인월담, 월하탄 등 19경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해서 오늘은 남은 14경, 만조탄, 파회, 수심대, 세심대, 수경대 등등은 꼭 찾아보아야 한다. 하지만 어제 산에서 헤매다 늦게 내려 온데다 반가운 벗을 만나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여서인지 10시가 다되어서야 겨우 일어났고, 아침을 먹고 나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섰다. 땡볕에 걷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부터 걷지 않으면 설천까지 갈 수 있을지 장담 못하니 14경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을런지. 몸도 마음도 바쁘기만 하다.

 

심곡마을에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평상에 누워 땀을 식히기도 했지만 낮 1시가 넘어가자 더 이상 걷기가 힘들 정도다. 갈 길은 멀지만 구천동 제11경과 제12경이 한 자리에 있는 파회와 수심대에 이르러서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펴고 누울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서 고기 굽는 냄새가 요란하지만 굴하지 않고 번갈아 가며 낮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니 좋기만 하다. 그렇게 햇빛이 잦아들 때까지 한가로이 쉬어간다.

 

<왼쪽, 오른쪽으로 무주구천동 14경이 이어지는 걷기 좋은 길>

 

3시. 다시 출발이다. 설천면까지의 길은 몇 안 되는 정말 걷기 좋은 길임이 틀림없다. 오가는 차도 없는데다가 구천동의 절경을 따라 걷는 길이라 더욱 그렇다.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적송나무 길에, 전나무 길에, 벚꽃나무 길에, 모자까지 벗어들고 걷는다. 또 두길리 마을 입구에서는 맛난 라면에 발을 뻗고 누워 쉬기도 하고, 이름 모를 마을 입구에서는 입이 까맣게 되도록 버찌열매를 따먹으며 쉬어가기도 하니 한편으론 발걸음이 더디다.

 

신라와 백제의 사신들이 오고가는데 관문 역할을 했던, 구천동 33경의 마지막 라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니 잠시 여행을 멈추어야 할 설천면 소재지인데, 때마침 지난 사 일간 우리를 괴롭혔던 햇살도 잦아들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 아홉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함양에서 안의를 지나 장풍숲까지는 3번과 24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장풍 숲에서부터 송계사까지는 37번, 1001번 지방도로로 바꾸어 걸었다. 송계사와 백련사를 이어주는 산길을 걸어 덕유산 자락을 넘었고 무주구천동 관광특구에서 설천까지는 37번 국도를 타고 구천동 33경을 훑어 내려갔다. 거리로는 첫째 날 대략 18km, 둘째 날 28km, 셋째 날 13km, 마지막날 20km이고, 시간으로는 첫째 날 4시간, 둘째 날 8시간, 셋째 날 10시간, 넷째 날 7시간이다.

 

* 가고, 오고

서울에서 함양까지는 동서울터미널과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거창, 안의 경유, 시외버스가 다수 있으며, 무주에서는 서울로 올라오는 차편이 많지 않은 편이므로 가까운 영동이나 대전으로 나오는 것이 오히려 편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는 설천공용터미널에서 19시 05분에 출발한 시내버스를 타고 무주로 들어와, 무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19시 25분에 영동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이용했으며, 다행히도 영동역에서 20시 16분에 출발하는 부산발 서울행 열차를 탈수 있었다. 영등포역에 22시 50분 못미처 도착했으니 모두 3시간 40분 정도 걸린 셈이다.

 

* 잠잘 곳

안의 읍내에는 여관이 몇 있다. 우리는 여관보다는 민박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읍내를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교복민박에서 단돈 만원에 숙박을 해결했다. 송계사 인근은 송계산장 이외에는 전혀 숙박을 할 만한 곳이 없을뿐더러 음식점도 그 곳 한 군데뿐이다. 다만 수승대 인근에는 음식점과 민박이 다수 있다. 무주는 구천동 관광특구와 리조트를 중심으로 번잡스러울 정도로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매우 많다. 하지만 리조트를 지나 설천까지 이르는 길에는 음식점과 민박집이 뜨문뜨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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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6 21:15 2009/07/16 2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