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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 노무현’이 저 세상으로 간지 그새 60일이 됐네요. 믿기지 않았던 그 토요일의 아침이 엊그제 같기만 한데 말입니다. 세상사는 일이 다 그런가봅니다.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고, 헤어짐 뒤엔 곧 잊힘이 있고.

 

사실 ‘바보 노무현’에 대한 기억은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았습니다. 다른 이들이 그를 세상에 알렸던 청문회와 김영삼을 향한 삿대질, 안될 줄 알면서도 또 부산으로 향하던 모습들을 기억하지만 어찌 된 게 그런 일들이 있었기나 한 것 마냥 통 기억이 없으니까요. 또 그를 한 나라의 대통령이라는 자리에까지 오르게 했던 돼지저금통과 노란색의 물결도 그저 잘 찍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만 같았으니까요.

 

‘오늘 밤이 지나면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납니다. 성별 학력 지역의 차별 없이 모두가 자기의 꿈을 이루어가는 세상 ..... 우리 아이들이 커서 살아가야 할 세상을 그려보세요. 행복한 변화가 시작 됩니다’

 

무엇이 그토록 그를 믿게 만들었던 걸까요. 동창회 모임 때 말고는 얼굴보기 힘든 동기들 전화에 시달렸던 적이 있었습니다. 12월의 몹시도 추웠던 그 날, 마지막 유세를 위해 종로를 거쳐 광화문 교보문고 앞을 지나 미 대사관 근처까지 가는 길에 말이죠. 온통 북새통에 목소리도 들리지도 않는데 이쪽에 뭐라 하든 상관없이 연신 ‘2번’을 외치던 전화를 말입니다.

 

2.

“그러므로 미국의 줄기찬 호전성만큼이나 중요한 일은 우리의 운명이고, 파병을 결정한 우리 정부다. 노무현 정부는 왜 우리가 그에게 허락한 국가권위를 이토록 쉽사리 남용하는지 알 수 없다. 권력이란 무엇인가?” p.297 「피 묻은 국익 (2003)」

 

“노인과 부녀자, 어린이들까지 포함된 서민들의 평화집회에 부안 군수를 위해 정부수반이 보내준 경찰은 특수진압 전투경찰들이었다. 어떤 정권도 이룩하지 못한 핵폐기장을 자발적으로 건설하겠다는 군수가 나타나자 그토록 갸륵했을까.” p.242 「‘핵’ 깡패들 (2003)」

 

“농부들이 논을 포기하게 만든 것은 신자유주의를 내건 열강들의 시장개방 압력에 정부가 너무나 쉽게 굴복했기 때문입니다. 쌀농사를 포기하겠다는 정부의 태도는 이 땅에서 이 땅의 산물을 취하며 오래오래 살겠다는 태도가 아닙니다. 나머지 이야기는 다 허구입니다.” p.29 「논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2006)」

 

“집회가 절정에 이르던 오후 녘, 조용히 밀물이 차 들어오기 시작했다. ‘생금(生金)밭’ 갯벌이 진짜 보석처럼 햇살에 반짝거렸다. 에루아 에루얼싸, 눈물났다. 에루아 에우얼싸. 우리가 부른 노래와 춤은 새만금이 그냥 죽도록 포기하지 않겠다는, 새로운 싸움을 다짐하는 결의의 표현이기도 했다.” p.108 「에루아 에루얼싸, 새만금 (2006)」

 

글을 쓴 이의 면면을 봐도 그렇고 책을 몇 장만 넘겨봐도 영락없는 자연 평화 생태 환경 산문집일 뿐이건만 읽는 내내 왜 ‘바보 노무현’이 자꾸만 떠오른 걸까요. 애초 기대라는 것조차를 하지 않았기에 큰 실망을 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그렇지. 명분 없는 전쟁에 나서고, 그 전쟁에 우리 젊은이가 죽어가도 꿈쩍하지 않고, 농민이 맞아 죽어도, 노동자가 제 몸에 불을 살라도 FTA는 꼭 해야 한다, 하고, 핵쓰레기를 파묻을 곳은 찾고 또 찾고, 기어이 갯벌을 도룡뇽의 숨통을 끊어 놓는 데는 당체 씁쓸함을 지울 수가 없었답니다. 또 129일이라는 시간동안 그 높은 크레인 위에서 삶과 죽음을 넘나들다 끝내는 제 목을 매달고 만 한 노동자와 그런 그이가 몹시도 보고파 크레인이 굽어보는 도크에 몸을 던진 또 한 노동자에게 ‘죽음이 투쟁의 수단이 되는 시대는 지났다’며, 연민의 눈조차 건네지 않았던 데는 마침내 분노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바보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은 까닭이요.

 

3.

‘바보 노무현’이 부엉이 바위에서 몸을 던진 그 토요일의 주말이 지나고 월요일 새벽, 여기 춘천에도 시민분향소가 세워졌더랬습니다. 헌데 급작스레 만들어진 탓도 있었겠고, 아직 출근 전이라는 시간 탓도 있었겠지만, 분향소엔 두 어 사람만이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또 분향소 주위엔 ‘바보 노무현’을 상징하는 노란색 메모지가 수십 장 걸려있었지만 정작 아무 글도 쓰여 있지 않았구요. 아무튼 조촐하다 못해 썰렁할 지경이었습니다. 그래 자전거를 타고 가는 길이었기에, 또 ‘바보 노무현’에 대한 기억이 그다지 유쾌하지만은 않지만 잠시 멈추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는 그저 웃고 있는 ‘바보 노무현’을 한참 바라보다 왜 담배를 끊었을까, 뜬금없는 자책 아닌 자책 후에 조용히 자전거에 올랐더랬습니다. 아, 바람에 팔랑거리던 그 노란 빈 종이에 한마디 적은 후에 말입니다. ‘그래도 노짱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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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23 14:13 2009/07/23 14:13

<이틀 걸러 쏟아진 장대비에 고추가 쓰러졌다> 

 

첫째 날(7월 13일/흐리고 비 19-27도)

 

9일 날은 200mm, 어제는 130mm의 비가 내렸다. 다행히 밭 한쪽만 빼곤 물 고인 곳이 없다. 하지만 며칠 간격으로 많은 비가 쏟아지니 밭에 물기가 잔뜩 이다. 또 물 고인 것 빼곤 괜찮은 듯싶었던 고추도 몇 주가 쓰러졌다. 급한 마음에 콩 밭에서 흙을 퍼다 고추를 바로 세우고 지주끈도 다시 묶어주지만 어째 엉성하기만 하다. 아무래도 비 그치면 대대적으로 손을 봐줘야겠다.

 

고추 밭에 발을 들이민 김에 제멋대로 자라게 내버려두었던 잡초 제거를 하니 금세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그래도 낫질을 하면 할수록 고추 밭이 깨끗해지니 쉴 생각도 나지 않는다. 그래 한 시간 남짓 열심히 낫질을 하는데 이런. 낫자루가 힘없이 ‘툭’ 부러지고 만다.

 

이가 없으면 잇몸으로 씹는다고 했던가. 낫이 없다고 하다만 제초를 그만둘 수 없어 괭이를 이리저리 휘둘러보는데. 오호 그럭저럭 낫 역할을 꽤 한다. 하지만 어찌 낫을 따라갈 수 있을까. 결국 고추 밭 제초는 다 하지도 못하고 빨갛게 익은 방울토마토와 오이 몇 개를 따고는 자전거에 오른다.

 

잔뜩 흐렸던 하늘에서 한 방울, 두 방을 빗방울이 떨어지는데 다행히 집이 코앞이다. 쓰러진 고추가 걱정돼 서둘러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보는데. 쓰러진 고추는 억지로 세우면 뿌리에 바람이 들어가 섞을 수 있다며 그냥 나둬야 한다는 얘기도 있고 쓰러진 고추 옆에 지주대를 대주고 세워줬더니 다시 잘 자랐다는 사람도 있다. 답답한 마음에 계속 노트북 앞에 앉아 있지만 뭐가 정답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랴. 이미 쓰러진 고추는 세웠으니 이젠 오면서 가면서 잘 살펴줘야 하는 수밖에.

 

둘째 날(7월 15일/맑음 22-27도)

 

어제 또 200미리가 넘게 비가 내렸다. 연일 쏟아지는 비에 여기저기 비 피해가 심하다. 여기 춘천도 곳곳에 농경지가 침수되고 하천이 넘치고 산이 무너졌다. 또 밭과 인접한 하천 제방 일부가 침수되면서 다리가 무너지기도 했다.

 

그제 비가 잠시 그쳤을 때 쓰러진 고추를 일으켜 세워 놓긴 했지만 어제 비로 몽땅 다 도로 쓰러지고 말았다. 임시방편으로 콩 밭 흙을 떠다 쓰러진 고추를 일으켜 세워보지만 아무래도 지지하는 데 힘이 부친다. 연일 계속된 비로 지반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탓이다. 주말에 또 비가 온다는 데 지금으로선 비의 양이 많지 않기만을 바랄뿐이다.

 

<일으켜 세워도 다시 내린 비로 또 쓰러졌다. 이제 엔간히 왔으면 좋겠는데.....>

 

셋째 날(7월 16일/무더움 21-32도)

 

모처럼 해가 보인다. 밭 상태로 봐선 이쯤해서 비가 그치고 오늘처럼 맑은 날씨가 계속돼야 할 텐데 내일 또 비소식이다. 쬐끄만 밭 하면서도 이리 마음이 편치 않은데 빚까지 내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어쩔까. 이제 엔간히 왔으면 좋겠다.

 

일으켜 세운 고추들 가운데 몇몇이 시들시들하다. 물이 덜 빠진 곳에 있는 것들이다. 아무래도 내일과 모래 비가 더 오면 살아남기 어려울 듯하다. 아직까지도 배수로에 물이 쫄쫄 흐르고 있으니.

 

한 낮 따가움을 피해 나왔더니 얼마 일도 못한다. 비오는 데 온 신경을 다 쓰느라 돌보지 못했던 채소와 과일 심은 곳에 김매기도 해주고 여전히 물이 빠지지 않고 있는 고추 밭에 배수로도 다시 파주고 하니 금세 어둑어둑해지니 말이다. 부쩍 빨갛게 잘 익어가는 방울토마토와 비오면 맛이 떨어진다는 참외 한 봉지를 따니 사위가 어둡다.

 

넷째 날(7월 18일/무더움 23-30도)

 

어제 또 비가 내렸다. 그래도 다행히 양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며칠 간 내린 비로 이미 땅이 흠뻑 젖은 상태라 일으켜 세운 고추가 잘 버티고 있는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래서일까. 급한 마음에 30도에 이르는 무더위가 올 거라는 것도 잊고 한 낮에 집을 나선다. 꼭 고추 밭만 살펴보고 오자 다짐하며.

 

우려했던 것과 달리 쓰러진 고추가 그다지 많지 않다. 하지만 한 번 쓰러졌던 것들은 여전히 시들시들하고 자꾸만 옆으로 기우뚱 기우뚱 쓰러지려 해서 다시 지주끈을 동여매준다. 또 틈나는 대로 고랑사이 김매기도 하고 아직도 물이 빠지고 있는 배수로도 다시 파준다. 아무래도 생각보다 일이 많다.

 

고추 밭만 살펴보고 오자, 했는데 어찌 일 하다 보니 그게 쉽지가 않다. 온 몸이 땀에 흠뻑 젖어도 조금만 더, 조금 만 더, 하다 보니 점심때가 훌쩍 지났으니. 그래도 혼자 일하다 둘이 일하니 진도도 빨리 나가고, 언제 손봐줘야지 하면서 바라보고만 있던 채소밭 김매기까지 하니 힘들긴 해도 일할 맛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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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9 19:30 2009/07/19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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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 날, 덕유산에서 길을 잃다(2006년 6월 5일)

 

    <횡경재 오르는 길>

<횡경재 오르는 길>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시간이다. 4시 30분. 하지만 어제 저녁 부탁해 놓은 된장국에 아침을 먹고 나니 어느새 산 정상에서부터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한다. 이른 아침 마중이다.

 

덕유산은 처음인데다 준비한 등산지도들이 제각각 이어서 걱정이다. 게다가 너무 이른 시간 이어서인지 문 잠긴 매표소에는 안내도 하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단 출발이다. 매표소를 지나 조금 오르니 비구니 한 분이 내려오신다.

 

“저. 길 좀 여쭐게요. 혹시 송계사에서 백련사로 넘어 가는 길을 아시나요?”

“죄송합니다. 잘 모르겠네요. 조금 올라가시면 오늘 산행을 하신다는 분들이 있거든요. 그 분들에게 한번 물어보시겠어요?”

“예”

 

대답만큼은 씩씩하다.

 

송계사 못미처 만나게 되는 철조망을 지나자 이내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하지만 크게 급하지 않은 산길인데다 길옆으로는 계곡 물이 흐르고 있고, 햇살은 아직 나무들 틈 사이까지 비추지 않고 있어 오히려 뒷동산에 오르듯 걷기에 좋다. 어째 출발은 좋다.

                                                                                                                                                         

횡경재까지 오르는 길은 초행길이지만 지루하지도 힘이 들지도 않을 만큼 완만한 오르막길과 계곡과 나무들이 어울려있다. 아침을 든든히 먹기는 했지만 슬슬 배가 고파오는 것을 빼고는 정말 기분 좋은 산행이다. 하지만 곧 닥쳐올 힘겨운 산행이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을까?     

                                                                                                                                                       

횡경재에서 만난 사람들을 따라 무작정 산길을 나섰던 것이 문제였을까? 아니면 등산로를 미리 확인해두지 않았던 것이 문제였을까? 비구니의 말을 따라 산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길을 물어보지 않아서였을까? 횡경재를 두고 무려 세 시간을 산 속에서 헤매었다. 가파른 능선을 오르락내리락, 마주치는 아주머니들에게 길을 물어물어 등산로를 찾았는데도 아직 그 자리다. 별수 없다. 다시 처음 길을 나섰던 횡경재로 되돌아가 본다. 헌데. 이런 길이 두 갈래가 아닌가. 동네 뒷산의 산책길 같은 등산로를 놔두고 엉뚱한 길에서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예정대로라면 산 아래에 있을 시간인데 이제야 길을 확인하다니.

 

향적봉과는 반대편 길로 30분쯤을 가니 지봉안이다. 여기서 다시 길을 확인하는데 어째, ‘등산로 없음’을 알리는 나무표지판과 계곡 아래쪽으로 난 방향표지판이 같은 것 아닌가. 어쩌라는 거지? 덕유산 국립공원관리사무소로 전화를 해보지만 이건 첩첩산중일 뿐이다. 우리가 있는 곳에서는 백련사로 내려가는 길은 없다고 한다. 분명 나무표지판에는 내려가는 길이 표시되어 있는데. 준비해간 세 장의 지도와 여기 두 개의 표지판, 그리고 관리사무소 이야기가 모두 틀리다. 턱없이 부족한 예산 탓에 그리될 수밖에 없는 국립공원의 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등산로 표지판 정도는 잘 해놔야 하는 거 아냐?’는 생각에 조금은 화가 난다.

                                                                                                   

그렇게 한참을 어찌할까 씩씩대며 고민하는데, 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일단 아래쪽으로 내려가는 방향을 나타내는 표지판을 믿기로 한다. 대신 조금이라도 길이 좁아진다거나 하면 다시 되돌아오기로 한다. 하지만 이런, 갈림길에 얼마 내려오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길도 좁아지고 숲도 울창한 것이 좀 전에 헤매던 상황과 비슷하다. 불안감이 엄습해온다. 이러다 정말 조난이라도 당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다행이다. ‘조금만 더 내려가 보자’며 계곡 쪽으로 길을 잡으니 최근에 이 길로 산행을 한 듯 한 이들이 드문드문 이정표를 해놓은 리본들이 알록달록 보인다.

 

결국 오전 6시부터 산행을 시작해 반대편 백련사까지 내려오는데 무려 8시간이 넘게 걸렸다.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고 오늘은 더 이상 걷기 어렵겠다. 무주구천동에 있었던 14개 사찰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백련사에서 잠시 쉬면서 대웅전을 비롯해 명부전이니, 원통전이니, 삼성각, 범종각, 천왕문 등등을 구경한다. 절과는 어울리지 않는 꿀맛 같은 아이스크림까지 하나씩 입에 물고는 ‘백련교’를 넘어 다시 1시간 30분 넘게 구천동계곡을 따라 내려와 점심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밥을 먹으니 파김치다. 에라, 남의 눈치 볼 것도 없이 나무 그늘 아래 자리를 펴고 누워 세상 모르게 잠에 빠져든다.

                                                                                         

넷째 날, 구천동계곡을 따라 무주군 설천면까지(2006년 6월 6일)

 

어제는 산 속에서 헤매는 바람에 백련사부터 시작되는 구천동 33경 가운데 사자담, 인월담, 월하탄 등 19경을 제대로 둘러보지 못하고 내려왔다. 해서 오늘은 남은 14경, 만조탄, 파회, 수심대, 세심대, 수경대 등등은 꼭 찾아보아야 한다. 하지만 어제 산에서 헤매다 늦게 내려 온데다 반가운 벗을 만나 밤늦게까지 술잔을 기울여서인지 10시가 다되어서야 겨우 일어났고, 아침을 먹고 나니 벌써 11시가 훌쩍 넘어섰다. 땡볕에 걷지 않으려고 했는데, 지금부터 걷지 않으면 설천까지 갈 수 있을지 장담 못하니 14경 구경을 제대로 할 수 있을런지. 몸도 마음도 바쁘기만 하다.

 

심곡마을에서는 마을 입구에 있는 커다란 평상에 누워 땀을 식히기도 했지만 낮 1시가 넘어가자 더 이상 걷기가 힘들 정도다. 갈 길은 멀지만 구천동 제11경과 제12경이 한 자리에 있는 파회와 수심대에 이르러서는 계곡 아래로 내려가 자리를 펴고 누울 수밖에 없다. 여기저기서 고기 굽는 냄새가 요란하지만 굴하지 않고 번갈아 가며 낮잠을 자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니 좋기만 하다. 그렇게 햇빛이 잦아들 때까지 한가로이 쉬어간다.

 

<왼쪽, 오른쪽으로 무주구천동 14경이 이어지는 걷기 좋은 길>

 

3시. 다시 출발이다. 설천면까지의 길은 몇 안 되는 정말 걷기 좋은 길임이 틀림없다. 오가는 차도 없는데다가 구천동의 절경을 따라 걷는 길이라 더욱 그렇다. 다른 데서는 보기 힘든 적송나무 길에, 전나무 길에, 벚꽃나무 길에, 모자까지 벗어들고 걷는다. 또 두길리 마을 입구에서는 맛난 라면에 발을 뻗고 누워 쉬기도 하고, 이름 모를 마을 입구에서는 입이 까맣게 되도록 버찌열매를 따먹으며 쉬어가기도 하니 한편으론 발걸음이 더디다.

 

신라와 백제의 사신들이 오고가는데 관문 역할을 했던, 구천동 33경의 마지막 라제통문(羅濟通門)을 지나니 잠시 여행을 멈추어야 할 설천면 소재지인데, 때마침 지난 사 일간 우리를 괴롭혔던 햇살도 잦아들고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 아홉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함양에서 안의를 지나 장풍숲까지는 3번과 24번 국도를 따라 걷다가 장풍 숲에서부터 송계사까지는 37번, 1001번 지방도로로 바꾸어 걸었다. 송계사와 백련사를 이어주는 산길을 걸어 덕유산 자락을 넘었고 무주구천동 관광특구에서 설천까지는 37번 국도를 타고 구천동 33경을 훑어 내려갔다. 거리로는 첫째 날 대략 18km, 둘째 날 28km, 셋째 날 13km, 마지막날 20km이고, 시간으로는 첫째 날 4시간, 둘째 날 8시간, 셋째 날 10시간, 넷째 날 7시간이다.

 

* 가고, 오고

서울에서 함양까지는 동서울터미널과 남부터미널에서 출발하는 거창, 안의 경유, 시외버스가 다수 있으며, 무주에서는 서울로 올라오는 차편이 많지 않은 편이므로 가까운 영동이나 대전으로 나오는 것이 오히려 편할 수 있다. 참고로 우리는 설천공용터미널에서 19시 05분에 출발한 시내버스를 타고 무주로 들어와, 무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19시 25분에 영동으로 가는 시외버스를 이용했으며, 다행히도 영동역에서 20시 16분에 출발하는 부산발 서울행 열차를 탈수 있었다. 영등포역에 22시 50분 못미처 도착했으니 모두 3시간 40분 정도 걸린 셈이다.

 

* 잠잘 곳

안의 읍내에는 여관이 몇 있다. 우리는 여관보다는 민박을 선호하는 편이라서 읍내를 조금 벗어난 곳에 자리 잡고 있는 교복민박에서 단돈 만원에 숙박을 해결했다. 송계사 인근은 송계산장 이외에는 전혀 숙박을 할 만한 곳이 없을뿐더러 음식점도 그 곳 한 군데뿐이다. 다만 수승대 인근에는 음식점과 민박이 다수 있다. 무주는 구천동 관광특구와 리조트를 중심으로 번잡스러울 정도로 음식점과 숙박시설이 매우 많다. 하지만 리조트를 지나 설천까지 이르는 길에는 음식점과 민박집이 뜨문뜨문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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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6 21:15 2009/07/16 21:15

얼마 전 우리나라가 2년 연속 출산율 ‘꼴찌’를 기록했다며 연일 호들갑을 떨었던 적이 있었습니다. 재작년 기준으로 평균 1.2명을 낳았다는데, 뭐든 ‘일등’, ‘일류’만 외치다 ‘꼴찌’를 해서인가요. 헌데 따지고 보면 어디 ‘꼴찌’가 이 출산율 하나뿐일까요. 어찌 보면 애들을 낳지 않는 건 애들과 관련된 것들이 모조리 ‘꼴찌’를 하고 있기 때문일 터인데 말입니다. 육아에 대한 가족 책임 주의, 낳아서 대학 졸업시키는 데까지 ‘억’소리가 나는 교육비와 서열화, 경쟁에만 열을 올리는 교육제도, 그리고 이를 철저히 제도화하는 신계급사회, 돈 없으면 죽으라는 사유화 정책에 내몰리고 있는 의료시스템 등등 말입니다. 그런데도 애 안 낳는다고 성화만 해대니. 그러고 보니 지자체별로 애 가진 가족이 주소를 이전하면 선물을 준다느니, 둘째 애, 셋째 애를 낳으면 출산장려금을 준다느니 요란한 걸 보니 바야흐로 우리나라는 애 낳기 운동 중인가 봅니다. ‘둘만 낳아 잘 기르자’, ‘둘도 많다 하나만 낳자’며 산하 제한 운동을 벌이던 게 엊그제 같은데 말입니다. 하지만 이렇게 요란들을 떤다고 애 안 낳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갑자기 순풍, 순풍 애들을 낳아 댈까요.

 

지난 주말이었죠. 11일이 ‘인구의 날’이었답니다. 뉴스에서 ‘초고령사회’니 ‘인구감소’니 하며 잔뜩 우려석인 말들을 쏟아내지 않았더라면 그날이 ‘인구의 날’이었는지도 모르고 지났을 겁니다. 아무튼 ‘인구의 날’이란 게 세계 인구가 50억을 넘은 것을 기해 인류가 장차 직면하게 될 사태에 대비해 인구전략을 모색하자는 의미로 국제연합이 지정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날 우리 언론이 보여준 태도는 아직도 경제발전지상주의를 벗어나지 못한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겉으로는 우리 사회가 굉장히 빠른 속도로 초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다며 대책 마련을 환기시키는 듯하지만 ‘노년부양비율’, ‘국가경쟁력’, 등등 어쩌구저쩌구 하면서 결국은 생산가능 인구가 줄어 경제력이 위축될 것이라는 말만 하니 말입니다. 심지어는 국가 안보 능력이 위축될 가능성이 있다는 말까지도 합니다. 어쨌든 이윤창출이 지상최대의 목적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착취 가능한 노동력의 지속적인 확보는 매우 중요한, 아니 필사적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니 그러려니 하는 생각도 듭니다.

 

전세계적으로 인구밀도가 평방킬로미터 당 51명이라고 합니다. 헌데 우리나라는 이보다 무려 10배 가까이나 많은 490명이랍니다. 이 정도면 방글라데시와 대만 정도를 제외 하고 우리나라 보다 인구밀도가 높은 나라가 없으니 가히 세계 최고의 수준이라 할 만합니다. 상황이 이러니 땅을 넓히려고 그 넓은 갯벌들을 다 메우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야 골프장 하나라도 더 짓을 수 있으니까요. 아무튼 이 통계수치를 보니 참 좁은 땅 덩어리에 많이도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인구밀도가 높다면서도 합계출산율이 너무 낮다느니 그래서 세계 인구 순위가 46위로 밀려날 거라느니 말하는 걸 보면 아직은 살만한가, 봅니다. 하기사 이 나라는 땅을 일구며 사는 것 보다는 핸드폰 팔아서, 자동차 팔아서 밥 사먹고 고기 사먹을 작정을 했으니 땅이 좁은 들, 사람이 많은 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누군가 이런 계산을 했더군요. 지구별의 역사를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1년이라는 시간 단위로 놓아보았더니 마치 지구별을 제 것인 양 마구 파헤치며 생채기를 내는 인간이란 족속이 등장한 게 겨우 12월하고도 31일, 그것도 밤 8시 경의 일이었다는 겁니다. 그야말로 지구 나이에 비하면 그 찬찬한 인간 역사는 새발에 피인 셈이죠. 그러면서도 이 인간이란 종(種)이 하는 짓이란 게 지구별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기는커녕 그저 주인 된 양 착취와 수탈의 대상으로만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어리석기 이를 데 없습니다. 사실 인구가 줄어들어 이런저런 문제가 생긴다는 건 그야말로 인간들 입장에서만 바라본 거 아니겠습니까. 천년만년 문명이라 칭하는 것을 이어가야겠다고 애쓰는 인간들만의 입장에서 말입니다. 하지만 이 작은 지구별의 진짜 주인인 지구 처지에서 보면 인구가 준다는 건 되려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까요. 그토록 짧은 시간 안에 지구별을 망신창이로 만든 이들이 이들 말고 또 누가 있었는가를 생각해보면 말입니다. 결국 이제는 인간 스스로가 무한정 지구별 자원을 마구 퍼다 쓰는 짓을 줄이던가, 지구별이 감당할 만한 적절한 부양능력을 스스로 갖춰야 할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인구가 줄어든다고 그리 호들갑을 떨거나 우려할 만한 일은 아닐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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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5 15:01 2009/07/15 15:01

씀바귀(7월 6일/무더움 20-31도)

 

엊그제 모처럼 서울엘 다녀왔다. 춘천으로 이사를 오고 난 후 간간이 서울 혹은 의정부엘 가게 되는데 엊그제도 그랬듯이 어찌 그리 사람 많은 곳에서 살았는지 매번 의문이 생긴다. 아마 그 안에서 밖으로 나오지 않았으면 절대 모를 일일지만 말이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인 장마가 시작된다고 한다. 서울에 다녀오지 않았어도 주말에는 웬간해선 일하지 말자, 했기에 그러려니 했지만 불과 이틀새 풀이 무릎까지 올라왔다. 물론 애벌도 못해준 콩 밭 한쪽은 키 높이로 풀이 자랐고.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를 지경이다. 하지만 모처럼 어머니까지 함께 밭에 나왔기에 일보다는 아삭이며, 호박이며, 오이, 참외, 방울토마토 수확에만 매달린다. 또 밭 한쪽 귀퉁이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었지만 뭔지도 모르는 주인만나 눈길조차 한 번 받아보지 못했던 씀바귀도 한 바구니 가득 담아낸다. 아무래도 내일 낮엔 비빔밥을 먹게 될 것 같다.

 

소서(小暑)(7월 7일/무더움 22-29도)

 

본격적인 더운 날씨로 접어든다는 소서다. 이맘때가 되면 밭농사에는 김매기가 빼놓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농약을 쓰지 않으려면 아침, 저녁으로 호미를 들고 밭으로 나갈 수밖에 없다. 땅심을 살리고 사람을 살리는 농사를 지으려면 농부가 감내해야 할 몫이지만 아직은 힘만 든다는 생각뿐이니, 농부 되는 길이 쉽지 않다.

 

남쪽 지방엔 기록적인 비로 작물 피해가 났다는 얘기가 들리는데 여긴 새벽에 잠깐 온 것 빼곤 감감무소식이다. 아니 한 낮엔 이글거리는 해 때문에 밖에 나가기가 두려울 지경이다. 또 해질녘 쯤 되면 선선한 바람이 불던 것도 그쳤다. 한마디로 일하기 쉽지 않다는 말이다.

 

무더위가 계속되니 일하는 시간이 줄어들고 일하는 시간이 줄어드니 사방이 풀천지다. 그래도 이제 하루 이틀이면 대충 콩 밭은 정리가 될 것 같아 다른 쪽에도 신경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급한 건 옥수수를 심어놓은 곳과 한 차례 김을 매주기는 했지만 또 풀이 정강이까지 올라온 고구마 밭이다. 모래 장맛비 후엔 여기부터 손을 봐줘야겠다.

 

                          

     <오른쪽은 고구마 줄기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낫으로나마 김매기를 해준 왼쪽은 그래도 좀 낫다>

 

낫으로 하는 김매기(7월 8일/무더움 21-30도)

 

고구마와 감자를 심어놓은 곳은 한 번 김매기를 했지만 콩 밭 풀 잡느라 신경을 안 썼더니 무릎까지 풀이 올라왔다. 다행히 오늘로 콩 밭 김매기가 끝나 여유가 생겼다. 하지만 감자는 호미로 풀을 매면서 함께 북주기도 하면 좋으련만 워낙 손봐야 할 곳이 많아 결국 낫으로 쓱쓱 잘라내고 만다. 아무래도 고구마, 감자 밭은 이제 호미는 무용지물일 듯하다.

 

장마(7월 10일/무더움 17-29도)

 

며칠 동안 비는커녕 무더위가 계속돼 장마예보가 무색했었는데 어제 비로 체면치레는 한 것 같다. 춘천만 해도 무려 200미리가 넘는 장대비가 하루 종일 지속됐으니 말이다. 덕분에 하루 잘 쉬기는 했지만 잡초란 게 비가 오고 나면 급속히 자라는 속성이 있어 이만저만 걱정이 크다. 게다가 이틀 정도 쉬었다 또 많은 비가 온다고 하니 고추 지주끈도 한 번 더 묶어줘야 하고, 이래저래 일이 꽤 된다. 또 느지막이 밭에 나가봤더니 고추밭에 물이 빠지지 않은 곳도 있으니 내일은 일찍부터 움직여야 할 듯하다.

 

마음은 급한데 비는 내리고(7월 12일/흐리고 비 18-28도)

 

내일부터 또 비소식인데 이번엔 제대로 된 장맛비다. 월요일에 잠깐 그쳤다 다시 수요일까지 쭉 비다. 그리도 목요일쯤 쉬었다 또 주말에 비다. 뉴스에선 장마예보를 하지 않기로 했던 기상청이 머쓱해졌다고 하는데 그러고도 남겠다.

 

어제 비 그치고 나온 밭 한쪽에 물이 고인 게 보였었다. 또 콩 밭 김매기에 잠시 소홀했던 고구마 밭과 고추 밭에 풀이 꽤 올라왔다. 수확하는 재미에 풀 올라오는 줄 몰랐던 채소밭도 손봐줘야 한다. 한마디로 할 일이 태산이란 얘기다.

 

일단 급한 게 고추 밭 배수로 정비인 것 같아 괭이부터 집어 든다. 고추는 배수가 잘 돼야 병이 오지 않는다고 하던데 물이 고였으니 어쩔 수 없다. 한 삼십 분 괭이질을 한 것뿐인데 온 몸이 땀으로 젖는다. 하루 종일 흐린 날씨에 해가 보이 않았는데 땀으로 젖는 걸 보니 아무래도 곧 비가 오려나보다.

 

어제 대충 감자 밭 제초를 했으니 오늘은 고구마 밭인데 통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어느새 덩굴을 뻗어내고 있는 줄기를 피해 낫질을 하려니 시간이 걸리는 것이다. 결국 두 시간 가까이 낫을 놀렸는데도 두 이랑을 다 못했다. 게다가 이런. 아까부터 심상치 않았는데 한 방울, 두 방울, 빗방울이 떨어진다. 마음은 급한데 비는 내리고, 난감지사다. 서둘러 노랗게 익은 참외 예닐곱 개와 고추, 상추, 치커리 등을 바구니에 담는데 빗방울이 점차 굵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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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12 11:39 2009/07/12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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