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

from 09년 만천리 2009/06/21 19:50

소나기(6월 15일/맑음, 소나기 17-25도)

 

요즘 소나기가 자주 온다. 어제도 자고 일어나니 밤새 소나기 왔는지 땅이 젖었고 그제도 저녁나절에 한바탕 비가 쏟아졌었다. 사실 이 핑계로 오늘 아침에도 밭에 나가지 않았는데. 오늘도 예보로는 오후에 비가 잠깐 온다고 하던데 저녁엔 밭에 나갈 수 있을라나.

 

요즘 밭에 나가면 하는 일이 비슷하다. 토마토며, 호박, 오이 등에 지주끈을 잠시 살펴보고 곧바로 콩 밭 김매기다. 감자와 고구마를 심은 곳은 한 차례 풀을 매주기도 했지만 벌써 많이들 자라고 있어 따로 잡초 제거를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오로지 콩 밭 풀 뽑는데 시간을 다 보낸다.

 

낮 동안 비는커녕 해만 쨍쨍이길래 아무 생각 없이 밭에 나갔는데 어찌된 게 금세 컴컴해 지는 게 심상치가 않다. 처음엔 시간상 어두워질 때가 됐겠거니 하고 별 생각이 없었는데 해가 지는 거하고는 달리 순식간에 칠흑으로 변하는데 이건 아니다 싶어 서둘러 자전거에 오른다. 하지만 출발할 때부터 한두 방울씩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차 굵어지더니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니 장대비로 바뀐다. 에휴. 물에 빠진 생쥐가 따로 없다.

 

감자꽃(6월 16일/맑음 16-25도)

 

올 해 처음 도전한 작물로 감자와 참외를 심었다. 그중 감자는 대게 늦어도 4월 초까지는 다들 심는다고 하던데 농사일지를 보니 꼭 한 달 정도 늦게 심은 걸로 되어 있다. 늦어도 한 참 늦게 심은 것이다. 그래서 다른 감자밭에는 벌써 꽃이 다 피었고, 아니 꽃은 이미 다 피어서 진 것 같고 곧 수확을 앞두고 있는데, 이제야 꽃이 피기 시작한다. 다른 것들보다 일찍 심어 되려 손이 덜 가기는 했지만 혼자 힘으로 잘 자라 꽃까지 피우니 이쁘기만 하다. 이제 곧 올 장마철만 잘 보내면 둥굴둥굴 못난 강원도 감자 맛을 볼 수 있으리라.

 

지주끈 손봐주기(6월 18일/맑음 16-25도)

 

작년엔 고추 농사가 잘 안 됐다. 겨우겨우 장마철까지 키워 풋고추를 맛보기는 했지만 비가 그치자마자 병에 걸렸는지 어쨌는지 한 그루 한 그루 비실비실하더니 어느 순간 200주 가까운 고추가 다 죽어나갔다. 안 그래도 고추는 키우기가 쉽지 않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유기농은 더 경험이 필요할 듯싶다.

 

올해엔 300주가 넘게 고추를 심었다. 욕심이 과한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 해서든 고춧가루를 만들 요량으로 가까운 중앙시장도 마다하고 학곡리 농협까지 가서 사다 심었는데 아직까진 고추가 싱싱하다. 또 작년엔 겨우 지주대 세워주고 지주끈을 한 번 묶어줬을 뿐인데 올 해엔 벌써 지주끈을 두 번째 묶어줘야 할 만큼 잘 자라고 있다. 그래서인지 좀 성급할 수도 있겠지만 기대가 된다.

 

장마 예보를 하지는 않지만 방송에선 모래부터 장맛비가 시작된다고 한다. 아마 장마가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 지만 예보를 하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장마가 시작된다는 얘기에 걱정이 되는 건 당연하겠지만 바람도 강하게 분다고 하니 더 걱정이다. 그래서 자라기도 많이 자라 끈을 묶어줘야 하겠지만 장맛비에 강풍이 더 걱정이라 오늘과 내일은 고추끈이며 지주를 세워준 것들에 지주끈을 손봐줘야 한다.

 

한낮 무더위가 가셨다고 생각했는데 고추밭에 한 시간 일하고 나니 등에 땀이 범벅이다. 게다가 허리를 굽혀서 하는 일이라 힘이 더 든다. 그래도 물 한 모금 마시고 한 줄 끈 묶고, 물 한 모금 마시고 또 한 줄 끈 묶는다. 또 땀도 식힐 겸 김매기도 하는데 해를 피해 나온다는 게 너무 늦게 나왔나, 금방 해가 진다.

 

 

오이를 따다(6월 19일/맑음 17-29도)

 

며칠 전부터 오이 몇 개가 손가락만 하게 매달리더니 그세 손바닥보다 더 커졌다. 작년 농사일지를 보니 7월 초에야 겨우 오이를 수확했으니 1달 이상이나 일찍 오이 맛을 보는 셈이다. 해서 등에 땀나도록 고추와 호박 지주끈을 묶어줘도 힘들다는 생각보단 저녁 밥상에 오를 오이와 상추, 고추 등에 입맛이 더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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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1 19:50 2009/06/2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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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파리, 10만 차

from 말을 걸다 2009/06/19 13:16

1.

제주도에 때 이른 해파리가 극성이라 한다. 개장을 앞두고 있는 해수욕장에도 비상이 걸렸고, 어구가 파괴되거나 잡은 고기의 신선도가 떨어져 어업에 종사하는 이들도 울상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 해파리가 예년 보다 일찍 나타났다는 것보다 해가 지날수록 급격하게 늘어나는 숫자에 그것도 주로 동남아에서 서식하는 대형 독성 해파리들이 때지어 출몰한다는 거다. 그리고 곧 남해안, 서해안까지도 진출할 거라고 한다. 국립수산과학원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연간 피해액이 연간 최소 350여억 원, 최대 1,500여억 원에 달한다고 하니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2.

한낮에 밭에 나가 30분만 있어도 금세 땀으로 범벅이 되니 곧 여름일터인데 6월 초부터 이러니 올 여름 더위 만만치 않겠다. 게다가 여기 춘천이란 곳이 지형적 특성 때문인지 일교차도 크고 여름엔 불볕더위로 유명하니 이만저만 걱정이 크다. 그래도 어찌 작년엔 새로 이사한 아파트가 겨울 동장군을 막기엔 다소 힘이 부치는 것 같지만 여름 더위엔 그럭저럭 지낼만해 다행이다. 아니 지낼만한 정도가 아니라 비가 조금만 와도 금세 서늘해질 정도니 집에만 있으면 따로 피서를 가지 않아도 될 정도다. 하지만 그래도 그렇지. 여름 내내 집에만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오늘이라도 베란다 구석에 모셔둔 선풍기라도 꺼내놔야겠다.

 

3.

춘천의 자동차 수가 1세대 당 1자동차라 한다. 아직 가구당 보유 대수는 0.98대이기는 하지만 1인 독립세대를 감안한다면 사실상 한 세대가 한대의 차를 갖고 있는 셈이다. 그러고 보니 춘천의 세대 수가 10만여 세대라 하니 총 자동차 대수가 얼마인지는 자동차등록사업소까지 가지 않더라도 알 수 있겠다. 그래도 굳이 자동차 보유 현황을 알고 싶다면, 올 6월 15일 현재 등록된 자동차 수는 모든 10만 206대이고 차종별로는 승용차가 7만 5,858대, 승합차가 6,130대, 화물차가 1만 7,928대 등이라 한다. 가히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 없다. 인구 25만의 이 작은 도시에 10만 여대의 차가 굴러다니고 있다니. 하긴 작년 우리나라 자동차 수가 1천 6백만 하고도 80만 여대를 넘어 주민등록상 인구 2.95명 당 1대라고 하니 어찌 보면 놀라운 숫자가 아닐 수도 있다. 또 전국적으로 승용차가 12,484천대(74.3%), 승합차가 1,097천대(6.5%), 화물차가 3,160천대(18.8%)라고 하니 누군가는 되려 이제야 평균치를 ‘돌파’했다며 요란을 떨지도 모르겠다.

 

<정말 빼곡히 들어찬 아파트 주차장, 급기야 소방차 전용구역까지 침범했다>  

 

4.

돌이켜 생각해보면 다소 무모할 수도 있을 춘천이란 이 낯선 곳으로 이사할 맘을 먹은 데에는 서울과의 근접성도 무시 못 할 이유였지만 앞으로 농사지을 만한 곳으로 딱 좋게다, 싶어서였다. 물론 지금도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사과나무가 쑥쑥 자라고 드물기는 하나 냉해에 약한 복숭아까지도 재배하는 곳이 있을 만큼 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다양한 작물들을 기를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심한 물갈이도 하긴 했지만 그럭저럭 잘 적응을 했고, 아니 어느새 이곳이 쏙 맘에 들고 있으니 삼년 후 다시 정착할 곳을 찾아야만 하는 일이 크게 걱정되지가 않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앞으로 5년 내에 북극 얼음이 여름 동안엔 찾아볼 수 없게 만든 이 온난화가 뜻하지 않게 강원도, 그것도 춘천이란 이 도시에 정착케 했으니 아직은 고마워해야 하는 건지 안타까워해야 하는 건지 구분이 잘 안 간다. 또 추위라면 아직도 두려움에 떨지만 강원도의 매서움을 작년 한 차례 겪으면서 이 정도면 적응할 수도 있겠다, 싶은 맘이 생기는 것도 아직은 고마워해야 할 일인지 안타까워해야 할 일인지 구분이 잘 안 간다. 하지만 더워지면 더워질수록 에어컨 광고가 더 많아지고, 도심 속 자전거도로 확충보다는 도로 건설에 더 열을 올리는 걸 보면 고마워할 수만은 없을 것 같다. 또 주차장을 빼꼭히 매운 것도 모자라 인도까지 점령하고 있는 자동차들을 보면서도 그저 ‘10만대 돌파’라는 하루치 기사로 써지는 게 아무래도 안타까워해야 하는 게 맞는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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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9 13:16 2009/06/19 13:16

몸살

from 09년 만천리 2009/06/15 13:24

고추밭 김매기(6월 8일/안개 후 맑음 14-25도)

 

고추는 비닐 멀칭을 해 풀 걱정은 안하겠다, 싶었는데 지주끈을 묶다보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 풀이 쑥쑥 자라고 있다. 고추를 심으려면 비닐 일부를 오려내야 하는데 바로 거기서 풀이 나고 있었던 게다. 덕분에 하루 종일 고추밭 김매느라 또 손목이며 무릎이 저리다. 그래도 부쩍 자란 상추를 한 바구니 따와서 저녁 밥상이 모처럼 풍성해 힘든 줄 모른다.

 

비(6월 10일/차차 맑음 17-23도)

 

어제와 그제 비가 내렸다. 덕분에 드문드문 싹이 나지 않은 콩 밭에 다시 콩을 심을 수 있었다. 하지만 콩 밭이며 고추 밭 김매기를 이틀이나 하지 못한데다 비 오면 한 풀 더 자라는 풀들을 보니 막막하다.

 

비는 새벽에 그쳤는데 어찌된 게 해질녘에 나갔는데도 잡초에 물기가 가득하다. 땅이 촉촉이 젖었으면 잡초 뽑는데 편하기는 한데 장갑을 껴도 금세 장갑이 젖어 손톱에 흙이 잔뜩 낀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급한 게 김매기니. 그렇게 두어 시간 또 풀들과 놀다 저녁 밥상에 올릴 상추며 고추 잎을 따니 아니나 다를까 손톱에 흙이 새카맣다.

 

몸살(6월 13일/맑음 13-25도)

 

엊그저께 저녁 밭에 갔다 온 후로 때 아닌 몸살 기운에 어제와 그저께는 종일 쉬었다. 그리고 오늘도 낮에 잠깐 학교에 들렀다 중앙로 헌책방 들른 거 빼곤 또 쭉 쉬다가 저녁에야 겨우 밭에 나갔다. 삼일을 쉬고 나오니 몸은 한결 좋은 데 골 사이 풀이 무릎까지 올라오고 호박이며, 가지 덩굴이 무성한 게 여기저기 손봐야 할 곳이 많아졌다. 대충 급한 것들 손봐주고 몸살 나기 전까지 김매기 하던 콩 밭 풀 뽑아주니 금세 해가 진다. 서둘러 저녁 밥상에 올릴 상추며, 풋고추를 따서 자전거에 오른다.

 

쉬엄쉬엄(6월 14일/맑음 17-24도)

 

주말엔 쉬자는 다짐이 계속 어긋난다. 예기치 않은 비 때문에도 그렇고 몸살 때문에도 그렇다. 그래도 아침엔 쉬고 저녁나절 선선해질 때에만 나간다. 그리고 할 일이 쌓여 있어도 쉬엄쉬엄, 채 두 시간도 안 하고 풋고추 몇 개 따서 곧 집으로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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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5 13:24 2009/06/15 1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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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 뱀사골에서 오도재 아래 촉동마을까지(2006년 4월 29일)

 

남원에서 출발한 뱀사골 행 시외버스는 지리산 계곡을 따라 굽이굽이 돌아가는 길을 거침없이 질주한다. 가만히 보니 오늘 오후 내내 걸어야 할 길이 채 30분도 걸리지 않는 것 같다.

 

뱀사골에서 산내까지는 지리산의 장대한 산세를, 그러면서도 푸근함을 함께 느낄 수 있는 길이다. 큰 산 만큼이나 큰 계곡, 큰 나무들이 있어 걷기 좋은데, 때마침 입산금지기간이라 인적마저 드물다.

 

<정말 소박하고 아담하다: 실상사 경내> 

 

산사라고 하지만 절 뒤로 보이는 지리산 자락이 아니라면 산사라는 말이 무색할 만큼 너른 들판에 자리잡고 있는 실상사는 여느 절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어찌보면 아무렇겠나 버려 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하는 절간 풍경도 그렇고, 스님들이 거처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을 특별하게 경계 삼지 않은 것도 그렇고, 여느 절의 일주문과는 다른 일주문이 보여주고 있듯이 공동체적 귀농의 중심에 있는 것도 그렇고, 절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불거진 눈이며, 뭉툭한 코, 투툼한 입을 갖고 있는 석장승 얼굴에서 우리네 민중들의 모습을 볼 수 있는 것도 그렇다.

                                                                                                                               

절 구경을 마치고 오도재를 향하는데, 인월에서 시작해 이곳 실상사를 지나 함양까지 이어진 이 길이 느림의 상상력을 쏟아내고 있어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얼마 전 실상사 인근 마을주민들은 국도건설을 반대하는 나섰으니, 지역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땅을 무조건 파헤치는 방향으로 길을 내지 말자면서, 지금의 길을 조금만 폭을 넓혀 보행자와 자전거, 농기계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을 만들자고 했단다. 그리고 얼마 후 우리가 지금 걷고 있는 이 길은 4차선의 길로 넓혀지거나, 산이 뚫리거나, 다리가 새로 놓이지 않고, 농군들을 위한 갓길만이 넓어지게 됐으니, 사방에서 조금이라도 더 빨리 가는 길을 내려는 것과는 반대 방향으로 나아간 큰 발걸음이다.

 

오도재로 오르는 길은 1023번 지방도로는 오가는 차도 없어 무척 한적한 길이다. 오른편으로는 뱀사골, 백무동, 칠선 등에서부터 흘러온 물들이 모여 제법 큰 계곡을 이루며 따라오니 그냥 지나칠 수 없다. 오랜만에 신발까지 벗고 물장난이다.

                                                                                                   

오도재로 향하는 길로 접어드니 그새 5시가 넘었다. 당초 오도재 정상아래 촉동마을에 자리잡은 ‘아원농원’에서 머물려고 했는데 그만 연락처를 가져오지 않아 어찌해야 할지. 더구나 농원 외에는 아무런 정보가 없어 하루 머물다 갈 수 있는 곳이 있을까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나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이것저것 물어볼 수라도 있으련만. 해가 떨어지기 전에 촉동마을까지 간다면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그렇지 못하다면. 한참을 지도를 보며 어쩔까 하지만 답이 없다. 결국 밤길을 걷는 한이 있더라도 일단 출발이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해는 점점 짧아지고 길은 점점 가팔라 오는데 촉동마을은 보이지 않는다. 다행히도 버스정류장이 있어 다음 마을이 촉동인 거는 알겠는데 당체 끝간데 없이 오르기만 하고 마을은 보이지 않는 거다. 씩씩대며 또 한참을 오르는데 인심 좋게 생기신 아저씨 한 분이 차를 멈춰 놓고는 우리를 불러 세운다.

 

“어디꺼정 가는고? 날이 지는디. 타소”

“죄송한데요. 저희는 걸어서 여행하는 중이거든요. 혹시 이 근처에 민박할 만한 곳이 어디 없나요?”

“걸어서 여글 넘는다꼬? 어허. 어째쓰까나. 어. 민박이라꼬? 일단 타소. 저 위에 올라가면 뭐가 있긴 있거든”

“예”

 

모르겠다. 일단 트럭에 오르고 본다. 헌데 이런. 코앞에 민박을 겸한 식당이 있는 거 아닌가? 다시 내릴 수밖에.

 

“아저씨 고맙습니다”

 

여기가 촉동마을인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역시나 인심 좋게 생기신 아주머니 한 분이 우리를 맞이한다.

 

“저 죄송한데요. 여기 아원농원이라고 혹시 아시나요?”

“아. 알죠. 우리 마을 사람인디. 거그 갈라고 허요? 거그는 어떻게 아셨지? 요그 길 따라 쭉 올라가믄 마을이거든요. 그 마을 위쪽에 아원농원이 있어요. 마을 들어가기 전 다리에서 왼쪽 길로 쭉 올라가면 되는디”

“예. 감사합니다”

 

어찌할까 잠시 고민이다. ‘방 값은 하루 밤 묵으시는 건 3만원이며 갖고 계신 어떤 물건으로도 숙박 값 지불 가능하며, 하루 4시간 품앗이에 하루 숙식제공 등 모든 수단도 환영입니다. 진보 활동을 하시는 분은 무료로 쉬어 가시길 바라며 제가 담은 술로 대접도 해드리고 싶습니다’라며 손길을 기다리는 아원농원에 하루 머물며 살아가는 이야기와 술맛을 볼까, 이것도 인연인데 여기 물레방아 산장에서 하루 머물까. 이미 해는 지고 있고 어둠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결국 나중 인연을 따르기로 한다. 다만 인심 좋은 아저씨 덕에 고갯길 100여 미터를 거꾸로 걸어 내려갔다 다시 올라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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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4 00:08 2009/06/14 00:08

사용자 삽입 이미지1.

당초 이 책에 손이 가게 된 이유는 소설가 박태원 때문이었다. 월북 작가라는 왠지 모를 호기심도 호기심이었지만 17여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그것도 급작스런 병으로 실명에, 전신불수까지 온 상태에 이르렀어도 끝내 대하역사소설 <갑오농민전쟁>을 써내고 말았다는 얘기에 언제고 그가 쓴 글을 읽어야겠다, 마음먹었었기 때문이다.

 

남쪽에서는 박태원의 글들이 1988년 7월 해금된 이후에나 장편 <천변풍경>, <임진조국전쟁>을 비롯해 완역한 <삼국지> 등이 소개됐고, 지금은 절판돼 구하기가 어렵지만 <갑오농민전쟁>이 출판사 깊은샘을 통해 출판됐기도 했다. 그리고 이 책, 도시계획을 전공한, 소설과는 꽤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조이담이 쓴 ‘경성 만보객-新 박태원 전’과 함께 한 권으로 엮인 <구보씨와 더불어 경성을 가다>에도 박태원의 글 ‘소설가 구보(九甫)씨의 일일’(이하 ‘일일’)이 있다.

 

‘일일’은 박태원이 1934년 8월 1일부터 9월 19일까지 조선중앙일보에 연재한 글로 당시로서는 보기 드물게 도시소설이라는 장르로 쓰였다. 또 주인공의 하루 산책을 따라가는 피카레스크식 구성이라는 독특한 방식에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을 쫓아가는 몽타주 기법을 가미한 매우 독창적인 글쓰기를 시도했다. 월북 작가의 글들 중 많은 것들이 내용면에서뿐만 아니라 형식이나 소재면에서도 다분히 실험적이고 독창적인데 ‘일일’ 역시 그런 면을 두루 갖추고 있는 셈이다.

 

2.

현대적 도시의 대로(大路) 중심성은 서울의 거리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세종로를 축으로 동대문 방향으로 곧게 뻗은 종로와 을지로, 퇴계로, 남대문과 서울역 방향으로 서울시청 앞에서 잠시 꺾인 태평로의 모습. 이런 풍경은 프랑스 대혁명 당시 바리케이드가 세워졌던 수많은 골목길들이 사라진 것을 연상케 하는데, 민중들 위에 군림하려는 권력자들의 의지를 극명하게 투영한다.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조선 봉건 왕조는 쭉 뻗은 이 길 양편에 궁궐과 관청들을 늘어 세워 비천한 백성들이 감히 범접할 수 없도록 했고, 뒤이은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세종로 광화문을 경복궁 오른편으로 옮기면서까지 조선총독부를 세워 식민지 민중들을 위압적으로 굴복시키려 했다. 이후 박정희로부터 MB에 이르기까지 이 거리는 정권의 부도덕성을 지우고 근엄한 위엄을 억지 세우기 위해 동상을 세우기도 하고, 애꿎은 천(川)을 콘크리트로 덮었다 들어내기도 하고, 급기야 차벽으로 길의 숨통마저 틀어막고 있다.

 

그렇게 서울의 길은 민중들에게 있어 낯선 거리일 뿐이다.

 

3.

스물여섯의 구보씨는 늙은 어머니의 ‘일즉어니 들어오너라.’는 말을 뒤로하고 천변 길을 광교로 향하여 걷는다. 그러나 딱히 어디로 갈 것인지 정하지 못한 구보씨는 종로통으로 걸음을 옮기다 종로네거리에서 동대문방향 전차에 오른다. 전차가 동대문에서 방향판을 ‘한강교’로 갈고 훈련원을 지나 조선은행 앞을 지날 때까지도 별 볼일 없던 구보씨는 잠시 다방에 들러 홍차를 마시고는 다시 길을 나선다. 태평로2정목 고물상 거리를 따라 태평통을 걷던 구보씨는 경성역에서 중학 시대 열등생을 우연히 만난다. 마음에도 없는 만남을 시큰둥해하던 구보씨는 그와 해어진 후 다시 다방으로 돌아가 시인과 마주 앉는다. 그러나 집, 아니 여사(旅舍)로 돌아가는 벗과 달리 구보씨는 여전히 거리를 방황한다. 어느 틈엔가 종로네거리에 선 구보씨는 하얗고 납작한 조그만 다료(茶寮)엘 들러 벗을 데리고 나온다. 벗과 설렁탕으로 저녁을 때운 구보씨는 꼭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며 ‘열점, 늦어도 열점 반’에 다시 다방에서 만나자는 벗과 헤어진 후 이번엔 광화문통으로 걸음을 옮긴다. 그 멋없이 넓고 또 쓸쓸한 길을 아무렇게나 걷던 구보씨는 열점에 다시 보기로 한 벗을 만난다. 벗과 다시 만난 구보씨는 벗이 흥미를 가지고 있는 카페의 여급을 찾아 낙원정으로 향한다. 가는 비 내리는 오전 두시, 드디어 구보씨는 내일 밤에 또 만나자는 벗의 인사에 ‘내일, 내일부터 집에 있겠소, 창작하겠소.’라는 말을 끝으로 이 낯선 거리에서의 배회를 끝낸다.

 

4.

‘일일’은 형식면에서는 매우 독특하면서도 실험적인 방식을 띠고 있지만 내용면에서는 별 싱겁기 그지없는 사건들로 채워져 있다. 하지만 이 싱겁기 그지없는 일들이 구보씨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물 흐르듯 그려지면서 알 수 없는 현실감이 생겨나는 건 아무래도 필자의 의식  속으로 자연스럽게 빠져들게 만드는 묘한 필치 때문일 것이다. 또 주인공 혹은 주인공과 벗이 함께 만 하루 동안 배회한 거리에 대한 치밀하고도 세밀한 묘사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그들과 함께 그 거리를 걷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들게 한다.  이쯤되면 아무래도 글쓴이의 힘이 느껴진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시덥지도 않게 동대문 방향 전차 안에서, 경성역에서, 종로네거리에서, 광화문통에서 끊임없이 욕정을 드러내기도 하고, 근대 도시의 상징이랄 수 있는 우뚝우뚝 솟은 건물들 사이에 자리 잡고 있는 고물상들을 어떻게 거리에서 쫓아낼 것인가를 생각하기도 하는 구보씨를 보자면 다소 답답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래도 우리의 만보객 구보씨의 뒤를 차분히 쫓아가노라면 1930년대 경성의 거리와 사람들, 그리고 그 속에 담겨있는 문화를 느낄 수 있어 책을 읽는 재미가 무척 쏠쏠하다.

 

대개 새로운 책을 손에 잡으면 일주일 혹은 열흘 정도면 다 읽게 되는데 어찌된 게 이번 것은 이주가 넘도록 마지막 장을 넘기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봄 농사 준비로 바쁜 시기라 해도 이주는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과는 다소 다른 어법이나 문법체계가 글을 읽어나가는 속도를 더디게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이 든다. 또 읽는 이로 하여금 마치 구보씨와 태평로며 광화문, 종로, 을지로의 거리를 걷고 있는 느낌을 갖도록 그의 행적을 꼼꼼히 되짚어 준 상당히 많은 분량의 주해도 한 몫 했으리라. 게다가 덤이라기에는 매우 완성도가 높은, ‘일일’이 등장하기 직전인 1934년까지의 경성을 배경으로 ‘박태원’이 주인공인 또 한편의 소설이 있었기에 더 그랬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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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10 15:49 2009/06/10 15: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