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외

from 09년 만천리 2009/07/06 08:10

찜통더위(6월 30일/무더움 23-28도)

 

온다던 장맛비는 오지 않고 찜통더위다. 그냥 기온만 높은 게 아니라 습도까지 함께 높은 찜통더위인 게다. 이런 날엔 삼심분만 밭에 나가 있어도 땀범벅이다. 아니나 다를까 적당히 선선해졌다 싶은 시간에 나갔는데도 한 시간도 못돼서 땀으로 흠뻑 젖는다. 휴~ 한여름엔 어찌 일하지?

 

모기에 물리다(7월 1일/무더움 21-28도)

 

따가운 햇볕 때문이라도 긴팔 옷을 입어야 하지만 가끔씩 피를 빨아대는 모기를 피하기 위해서도 그래야 하니 가뜩이나 더운 날씨에 땀이 줄줄 흐른다. 엊그제도 호박 지주끈을 묶어주다 손목에 살포시 내려앉은 모기에 된통 물렸는데 오늘은 콩 밭 호미질하는 동안 목덜미를 두 군데 물렸다. 가뜩이나 땀으로 범벅이 된 데다 가렵기까지 하니 흙 묻은 손으로 긁지도 못하고 난리도 아니다. 하지만 어쩌겠나. 꾹 참고 호미만 계속 놀린다.

 

요즘 같은 날씨엔 한낮을 피해 밭에 나온다 해도 또 아무리 얇은 셔츠를 입었는 해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으면 그야말로 사우나에 앉아 있는 것 마냥 일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도 오늘은 장맛비 영향인지 바람이 선선히 불어 다른 날보다는 낫다. 조금 전에 모기에게 두 방 물린 것만 빼면. 어제부터 손대기 시작한 고구마 밭 제초하고 장아찌 담글 요량으로 풋고추 한 봉지를 가득 딴다.

 

 

 

참외(7월 2일/무더움 19-25도)

 

올 해 처음 재배한 것들이 몇 개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참외다. 참외는 기르기가 까다롭다는 얘기를 많이 들은 데다 노지에서 기르려니 자신이 없어 모종만 20개를 사다 심었다. 또 비가림 시설은 못할망정 열매가 흙에 닿아 무르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해 이랑에 비닐을 깔았다. 그리고 순지르기는 제때 못해줬어도 밑거름을 충분히 줬다. 그래서일까. 생각지도 않게 참외가 여럿 달린다. 아직 노랗게 되려면 한 참 더 있어야 하고 또 노랗게 된 후에도 녹색이 다 없어질 때까지 더 기다려야 하니 참외 맛을 보려면 아직은 멀었다. 이제 순지르기에 신경만 조금 더 쓰면 꽤 수확을 할 수 있을 듯하다.

 

마른장마(7월 3일/무더움 19-25도)

 

장마전선이 오르락내리락 한다고 하는데 아직 춘천까진 올라오지 못했나보다. 또 다른 곳은 때 아닌 집중호우로 피해를 본다고도 하는데 여기 춘천엔 비가 오긴 와도 피해가 날 정도는 아니다. 장마는 장마인데 마른장마인 게다.

 

모처럼 내일과 모래 서울, 의정부 나들이를 간다. 밭 상태를 봐선 이 이틀 때문에 다음 일주일은 고생 좀 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젠 웬만한 풀을 봐선 그냥 지나칠 정도다. 죽자, 살자 풀 뽑아봐야 돌아서면 또 풀은 이만큼 자라있고, 하루아침에 싹 뽑아내지 않을 거면 그냥저냥 작물에 큰 피해 가지 않는 선에서 풀과 함께 자라도록 내버려두는 게 몸도 맘도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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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6 08:10 2009/07/06 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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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과 자라는 콩(6월 22일/무더움 21-29도)

 

이제 6월 말인데 벌써부터 폭염이다. 엊그제 비가 오고 나니 더 더워지는 것 같기도 한데, 급기야 어제 밤에는 기온이 20도에서 내려오지를 않았다. 그리고 오늘 낮엔 30도에 육박하는 무더위다. 이 정도면 한여름 날씨가 아니고 뭔가.

 

한차례 비가 왔으니 작물들도 많이 자랐겠지만 풀들도 함께 쑥쑥 올라왔을 거라 생각되니 아침부터 걱정이다. 하지만 불볕더위에 감히 나갈 생각을 못하다 해가 한 숨 잦아들 때쯤 겨우 자전거에 오른다.

 

이런. 아니나 다를까. 토마토며, 호박, 오이는 비가 오기 전에 한 번씩 지주끈을 더 해줬는데도 벌써 웃자랐는데. 미처 다 풀을 잡아주지 못했던 콩밭에 풀들이 무릎 높이까지 올라온 게 아닌가. 이건 콩보다도 더 자란 꼴이다. 아무래도 이번 주는 이 풀들 잡느라 시간 다 보내게 생겼다.

 

자전거 펑크(6월 23일/무더움 16-30도)

 

며칠 전부터 이유 없이 자전거 앞바퀴에 바람이 슬슬 빠지더니 집을 나선지 500미터도 채 가지 못하고 타어이가 쭈글쭈글해졌다. 아무래도 어딘가에 구멍이 난 듯하다. 결국 자전거점까지 끌고 가서 다시 30분을 기다린 후 펑크 난 곳을 때우고 나니 이런, 해가 뉘엿뉘엿. 서둘러 밭에 나가보지만 잠깐 콩 밭에 풀 뽑고 나니 벌써 어두워진다.

 

                               

    <풀과 자라는 콩(왼쪽)과 풀을 잡아준 콩(오른쪽), 잘 보면 풀과 자라는 콩들이 더 키가 크다. 이유가?>

 

치커리, 호박(6월 24일/무더움 16-30도)

 

작년과 달리 채소를 꽤 많이 심었더니 요즘 밥상이 풍성하다. 오이, 상추는 진즉에 수확을 했고 근대며, 아욱, 알타리, 열무 등이 곧 먹을 수 있을만치 자라고 있다. 제때 풀을 잡아주지 못한 대파만 제외하면 아직까지 채소 농사는 성공적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오늘은 첫 호박을 수확하고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아 제멋대로 자라고 있는 치커리도 한 봉지 가득 담는다.

 

폭염과 장마(6월 25일/무더움 17-29도)

 

남부지방은 폭염주의보란다. 35도를 넘나든다. 밤까지 열대야가 이어지는 무더위가 계속되는 중이다. 다행히 춘천은 그만큼은 아니다. 물론 낮에는 30도 가까이 기온이 오르지만 한참 때를 피하면 아직은 일할 만하다. 또 해가 뜨기 전 후, 그리고 해지기 전, 후엔 금세 선선한 바람도 불고 기온이 떨어져 일하기 좋다. 한마디로 요즘 날씨는 일교차가 크다는 특징이 있는 춘천 날씨를 그대로 보여준다고 할 수 있겠다.

 

며칠간 계속 콩 밭 김매기에 매달리고 있는데도 아직 마무리를 짓지 못하고 있다. 돌아서면 이쪽에 풀이 자라고 이쪽 풀매고 나면 저쪽에 풀이 자라고. 그뿐만 아니라 하루가 다르게 줄기를 뻗어내는 줄기 작물 손봐주랴, 고추끈 묶어주랴 없는 듯 있는 듯 일이 밀리기 때문이다.

 

예전엔 무더위가 있기 전에 장마전선이 많은 비를 뿌렸지만 요즘은 장마와 무더위가 함께 오는 듯하다. 아니 오히려 무더위가 먼저 오고 장마가 나중에 오는 것 같다. 해서 요즘이 한참 김매기를 할 때인데 드문드문 많은 비도 오면서 기온은 갑자가 높아져 일하기가 어중간하다. 물론 한 낮 무더위만 피하면 아직은 일하기 좋은 날씨이긴 하지만 말이다.

 

아무래도 밭 모양새를 보니 아침에 시간을 좀 내야겠다.

 

끝없는 김매기(6월 26일/무더움 17-29도)

 

옛말에 소농은 풀을 보고도 안 매고, 중농은 풀을 보아야 매고, 대농은 풀이 나기 전에 맨다고 한다. 또 거친 두벌이 꼼꼼 애벌보다 낫다는 말도 있는데 지금 밭 모양새를 보면 어찌 그리 이 말들이 꼭 들어맞는지 모르겠다.

 

뭐하느라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풀이 한참 자라기 시작해서야 겨우 호미를 잡은 데다 성격 탓인지 꼼꼼히 풀을 잡아가느라 속도도 느려 이쪽 풀을 매고 있으면 저쪽에서 풀이 자라고, 저쪽 풀을 매고 있으면 또 이쪽 풀이 자라고 있어 끝이 보이질 않는다. 다행히 장마전선이 남부지방 쪽에 머물러 있어 풀 잡을 시간이 아주 없진 않다. 아무래도 이번 주는 주말에도 풀 뽑으러 나와야겠다. 대충 콩 밭은 정리가 되가는데 먼저 매줬던 감자, 옥수수, 고구마 심어놓은 곳에 풀이 무릎까지 올라왔기 때문이다.

 

“거, 제초제 뿌려버려요” (6월 28일/무더움 20-31도)

 

오랜만에 아침 일찍 집을 나선다. 오늘 밤부터 장맛비가 온다고 하니 마음이 급하다. 고랑에 무릎까지 올라온 풀들을 다 잡지는 못할망정 대충 낫질이라도 해둬야 하기 때문이다. 또 김매느라 신경을 못 썼던 고추들도 지주대며 지주끈이 튼튼한지 손봐줘야 하고, 여전히 풀 속에 파묻혀 있다시피 하고 있는 콩들도 호미질을 해줘야 한다.

 

비가 온다고 해서 그러나 안개 때문에 그러나 5시가 넘어 해가 떠도 공기가 눅눅하다. 덕분에 호미질 30분, 낫질 30분 만에 온몸이 흠뻑 땀으로 젖었다. 목도 축일 겸 잠깐 손에서 호미를 놓고 쉬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동네 아저씨 한 분이 목소리를 높인다.

 

“거, 제초제 뿌려버려요. 풀 어찌 다 잡으려고?”

 

올해엔 어찌 제초제 소리 안 듣나 했는데 간만에 일찍 나온 오늘이 딱 그날인가보다. 뭐라 대꾸할 기운도 없고 또 대꾸해봐야 소용없다는 걸 작년에 경험했기에 그냥 씩 한 번 웃고 만다. 아저씨도 더 말을 않고 그냥 물끄러미 내 모양을 보고 가던 길을 가신다. 그런데 저 아저씨 어디서 봤더라?

 

8시가 조금 넘자 벌써 햇볕이 따갑다. 마음 같아서는 콩 밭에 난 풀을 조금 더 뽑아주고 싶지만 이미 속옷까지 다 젖은 터라 힘이 부친다. 몰라보게 부쩍 자란 고추에서 풋고추 한 봉지 가득, 매일 밥상에 오르고 있는 오이도 몇 개 따니 땀 흘린 보람을 느낀다. 아무래도 이 맛에 농사짓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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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9 15:31 2009/06/29 1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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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날, 촉동마을에서 오도재를 넘어 함양까지(2006년 4월 30일)

 

<함양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30분 넘게 쉬어갔던 간판도 없는 조그만 가게 앞 평상>

 

8시가 조금 안된 시간에 출발했는데도 벌써 등 뒤가 따가울 정도로 햇살이 장난 아니다. 산장에서 조금 위쪽으로 오르니 당초 하루 머무르려고 했던 촉동마을이고, 왼편 산 아래쪽으로 사진으로만 보았던 아원농원도 보인다. 사람이 살기 가장 좋은 곳이 해발 600에서 700미터라고 하는데 이 마을이 바로 그렇다. 언제고 다시 들렀으면 하는 마을이다.

 

오도재 정상으로 오르는 길에 있다고 하는 지리산조망공원까지 가는 길은 다시 걷기 싫을 마음이 생길 정도다. 가파른 길도 길이거니와 4월의 햇빛 같지 않은 따가운 햇살 때문에 연신 땀이 흐른다. 당연히 발걸음이 더딜 수밖에. 100 걸음 오르고 쉬고 또 100 걸음 오르고 쉬기를 반복한다.

 

산장 아주머니 말씀으로는 산책 삼아 30분이면 충분히 오른다고 했는데, 족히 한 시간은 걸어서야 ‘오도재휴게소’에 도착했다. 날씨가 흐려 또렷하게는 보이지 않지만 저 멀리 천왕봉에서 시작해서 노고단까지 이어지는 지리산 주능선이 보인다. 그리고 발아래로는 계단식 논이며 밭이 이어져 있다. 마음까지 시원해지는 느낌인데 이곳까지 오면서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바람까지 마중 나오니 몸도 한결 가뿐해진다.

 

쉴 때는 몰랐는데 다시 걸으려고 하니 뱃속이 요란하다. 건너 띈 아침 대신 뭐라도 요기를 해야겠는데, 휴게소 문이 굳게 잠겨 있다. 가게 안을 살펴보니 불은 켜져 있고 음악소리마저 흘러나오고 있다. 잠시 다른 일을 보러 가셨나? 좀 기다려볼까? 그렇게 한참을 기다렸지만 사람은커녕 차 한 대 지나지 않는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대로 출발해야 하는지. 결국 큰 소리로 사람을 불러본다.

 

“사람 없어요. 배고파 쓰러져요”

 

한참을 그리 떠들고 나니 휴게소 2층 창문이 빼꼼이 열리며 아저씨 한 분이 우리를 번갈아 가며 쳐다본다. 체면이고 뭐고 없다.

 

“아저씨. 문 좀 열어주세요”

 

  

 

덕분에 이제까지 맛보았던 그 어떤 라면보다도 맛난 라면을 먹을 수는 있었지만 우리가 그리 떠드는 통에 ‘얼마나 많은 동물들과 식물들이 놀랬을까?’하니 마음 한 구석이 편치만은 않다. 엊그제 노고단에서도 산에서는 아무리 조그만 소리라도 자연에게는 폭풍우 치는 소리와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배고픔에 그새 잊어버린 것이니, 너무 한심하다.

 

그래도 겉표지에 박정희가 죽었다는 글이 큼지막하게 쓰인 ‘썬데이서울’에, 옛 물건들을 장식 삼아 오도산방이라는 찻집까지 함께 운영하는 오도재휴게소는, 꼭 한번 들러 찬밥이라며 내어주기 어려워하시는 주인 내외의 넉넉함을 느껴야 할 곳이니 빠뜨리지 말자. 다만 주인장이 보이지 않거들랑 조용히 2층 창문으로 돌맹이 하나만 던지도록 하면 될 듯하다.

 

오도재 정상에서 함양으로 이어지는 24번 국도까지의 길은 반대편에서 걸어 왔더라면 십중팔구 포기했을 거다. 그만큼 오르막길도 길게 이어져있고 경사도 가파르다는 이야기다. 거기에 변변한 가게 하나 보이지 않는다. 이거야 원. 단단히 준비하지 않고서는 정말 난감한 길이다. 그래도 내려오는 길 이쪽저쪽, 외설적이라고만 알려져 있으나 실은 봉건질서 속의 지배계급과 민중들의 삶을 풍자한 ‘변강쇠가’의 변강쇠와 옹녀를 상품화한 여러 가지 볼거리가 있어 지루하지만은 않다.

 

가까운 백장암 계곡에는 변강쇠와 옹녀가 놀았다고 전해지는 옹녀탕과 변강쇠가 기력을 보충했다는 득독골 등을 찾아 볼 수 있고, 변강쇠를 응징하기 위해 모인 8도의 장승들을 재현한 ‘변강쇠 쌈지공원’도 자리 잡고 있다. 그리고 지금 우리고 걷고 있는 이 길 주변에는 변강쇠 집터와 무덤자리도 있으니 참 재미나다. 마지막으로 마천의 벽송사는 팔도의 장승들로부터 응징을 받아 죽게 된다는, ‘변강쇠가’의 내용과는 다른 이유에서지만 머리 부분이 반쯤 타 있는 여장승이 있어 묘한 분위기를 풍기니 이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구불구불 참 재미난 길이다. 지안재 고갯길>

촉동마을에서 시작해 사진을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한번쯤 찾아왔을 지안재 고갯길을 꾸불꾸불 돌아 내려오니 길은 24번 국도로 이어지는데 어째 슈퍼하나 보이지가 않다. 재를 넘으며 참았던 갈증은 더 심해지는 것 같다. 그래도 조금만 가면 함양이겠거니 ‘참자’ 하며 걸으니 정말 고갯길 돌아 함양 읍내가 눈에 들어온다. 때마침 간판도 달지 않았지만 평상 하나만은 커다란 동네 구멍가게가 눈에 들어오니 쉬어가기에 딱이다.

 

이젠 평상만 보면 신발 끈부터 풀고 올라선다. 그리고 누가 보든 말든 대자로 누워 눈을 감고 10분이고 20분이고 쉬는 게 몸에 배었다. 그렇게 30분을 넘게 평상에 누워 바람에 날리는 봄 향기를 맡다, 시원한 물 한잔 마시다 보니 어느새 서울행 시외버스 출발시간이 다가온다. 서둘러 길을 나서는데 몸과 마음 모두 가볍기만 하다.

 

* 여덟 번째 여행에서 걸은 길

뱀사골에서 산내까지는 861번 지방도로, 산내에서 실상사를 지나 오도재로 오르는 길 입구까지는 60번 지방도로, 오도재 가는 길은 1023번 지방도로, 다시 함양으로 가는 길은 24번 국도다. 거리로는 약 30Km다. 첫째 날은 약 6시간, 둘째 날은 8시간 정도 걸었다.

    

* 가고, 오고

지리산 뱀사골은 남원시외버스터미널에서 출발하는 시내버스와 시외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물론 시내버스는 시외버스보다 가격은 저렴하나 자주 있는 것도 아니고 시간도 들쭉날쭉하니 시외버스를 이용하는 것이 편하다. 서울에서 남원은 기차 편도 그렇고 고속버스도 그렇고 쉽게 이동할 수 있으며, 함양에서 서울은 거창을 경유해 남부터미널까지 운행하는 고속버스가 하루 10차례 운행하고, 동서울터미널까지 운행하는 고속버스는 7차례 운행한다. 다행히 밤 10시 이후에도 심야고속이 있으니 안심이다.

 

* 잠잘 곳

산내를 제외하고는 오도재 정상 아래 촉동마을까지는 민박은 전혀 없고 간간이 음식점만 보인다. 촉동마을에는 우리가 머물려고 했던 ‘아원농원’과 머물렀던 ‘물레방아산장’이 있다. 다만 ‘아원농원’에서 하루 쉬어가고자 한다면 미리 연락을 취해야 할 것이다. 촉동마을에서 함양까지는 오도재 정상 지나 계곡에 민박과 음식점이 몇 있으나 그 이외에는 함양 초입까지 변변한 슈퍼하나 없으니 미리미리 준비를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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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6 11:34 2009/06/26 11:34

외상장부

from 글을 쓰다 2009/06/23 14:38
“엄마, 왜 안 깨웠어? 지금이 몇 신데.”
 
봉철이가 눈을 뜬 시간은 8시 20분. 서두르지 않으면 등교 시간에 늦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학교까지 데려다 줘야 할 엄마가 어찌된 일인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엄마, 어디 있는 거야? 나 늦었단 말이야, 빨리 빨리.”
 
봉철이는 안방이며 부엌으로 엄마를 찾습니다. 그런데 엄마는 아빠와 벌써 집을 나갔는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만 식탁 위에 식빵만이 놓여 있습니다.
 
“뭐야, 오늘은 아침부터 나간거야? 에이 나가려면 깨우고 가지.”
 
봉철이는 부랴부랴 옷만 갈아입고 집을 나섭니다. 다행히 마을버스가 일찍 와서 늦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마을버스가 이 골목, 저 골목 돌고 돌면서 봉철이 마음이 급해집니다.
 
“아이 참, 왜 이렇게 도는 거야.”
 
버스는 봉철이가 사는 집과 지난달까지만 해도 엄마, 아빠가 매일 아침 문을 여셨던 쌀가게를 지나 동네 구석구석을 헤집고 다닙니다. 하지만 버스에 타는 사람은 얼마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사를 떠났기 때문입니다. 엄마 얘기로는 이 동네에 아파트가 들어선다고 합니다. 그래서 엄마, 아빠도 가게를 그만둔다고 하셨습니다.
 
“엄마, 아빤 너무해. 저번에 이제 가게 안 하니까 롯데월드도 가고 외할머니 댁에도 가자고 해놓고선. 맨날 맨말 저녁마다 나가더니 오늘은 뭐야, 아침부터.”
 
봉철이는 학교 앞에서 같은 반 친구 영일이를 만났습니다.
 
“나발나발 강봉철, 요새 니 여친, 왜 학교에 안 오냐?”
 
아침밥도 먹지 못한 봉철은 기운도 없는데다 또 짝꿍 얘기를 하는 영일이가 얄미워 대꾸도 안합니다.
 
“헐 나발나발 강봉철이 이제 말까네. 야, 니 여친이 보고 싶어 그러냐? 크흐흐.”
 
“야, 내 앞에서 근정이 얘기 꺼내지도 마, 누가 내 여친이라고. 그리고 나도 좋거든. 걔 안 나오니까. 알았지?”
 
봉철이는 학교 친구들이 ‘나발나발’이라고 부를 만큼 말이 참 많습니다. 그래서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학원에서도 “제발 조용히 좀 해”라는 말을 참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봉철이에게 그런 얘기를 안 하는 사람이 딱 한명 있습니다. 바로 근정이입니다. 김근정은 친구들이 뭘 물어봐도 대답은 안하고 웃기만 합니다. 그리고 옆 자리에 앉은 봉철이가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도 그렇습니다. 그냥 말없이 들어주고 웃기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일까요. 봉철이는 근정이가 옆자리에 있는 게 싫지는 않았습니다.
 
“야, 강봉철. 니 아무래도 수상하다. 근정이가 학교 안 나오면서부터 니도 맹 풀이 죽어 있는 게. 니 그렇게 걱정돼나?”
 
잠깐 근정이 생각을 하느라 학교 앞에서 만난 영일이가 어느새 옆자리로 온지도 몰랐던 봉철이는 깜짝 놀라 말합니다.
 
“너, 한 번만 더 근정이 얘기 해봐라. 니하고 내하고 끝이다. 끝. 알간?”
 
“헤헤. 니 말 안 해도 내 다 안다. 누굴 속일라고.”
 
봉철이는 빨리 학교가 끝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영일이가 놀려대는 것도 싫었지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 아빠를 붙잡고 물어볼 게 많이 있습니다. 대체 밤마다 어딜 쏘다니는지, 왜 오늘은 깨우지도 않고 나갔는지, 롯데월드는 언제 갈 건지를요. 하지만 봉철이 다시 집으로 온 시간은 7시가 넘었습니다. 수업은 4시에 다 끝났지만 6학년 올라오면서 다니기 시작한 보충학원 때문입니다.
 
“에이, 아직도 안 왔네. 배고파 죽겠는데.”
 
봉철이는 하루 종일 아무것도 먹지를 못했습니다. 아침은 늦게 일어나 먹을 새도 없었고 점심은 봉철이가 싫어하는 찜닭이 나왔기 때문입니다.
 
“밥은 있겠지?”
 
평소에는 혼자 밥 먹는 일이 절대 없는데 오늘은 어쩔 수가 없습니다. 봉철이 밥통이며 냉장고를 엽니다.
 
“뭐야. 텅텅 비었네.”
 
아무래도 자장면이라도 시켜야겠습니다. 어찌된 일이지 밥통에 밥은커녕 냉장고에도 먹을 만한 게 없습니다.
 
“아, 배고파. 대체 언제 오는 거야. 전화도 안 받고. 나 참. 돈이라도 주고 가야지. 뭘 사먹던가 하지. 밥도 안 해놓고. 정말 너무하네. 안 되겠다. 자장면이라도 시켜야지”
 
봉철이는 냉장고 옆에 붙여있는 중국집에 전화를 걸어 자장면을 시키고는 안방 화장대며, 장롱을 뒤집니다. 엄마, 아빠가 가게를 그만 두기 전까지 이곳에 돈을 넣어두는 걸 많이 봤고, 또 몰래 꺼내 쓰기도 했었거든요.
 
“어. 돈이 하나도 없네. 분명히 여기에 있었는데. 어디 있지? 어. 이건 또 뭐야? 외상장부?”
 
봉철이는 화장대 서랍에서 검정색 노트 한 권을 꺼내들었습니다. 겉표지에는 ‘외상장부’라고 써있는데 안을 들여다보니 깨알 같은 글씨로 누구네 집 얼마, 381-52호 75,000원, 꽤나 두껍습니다.
 
“뭐야, 이거. 외상장부가 뭔 말이데. 어? 이거. 혹시 근정이 아냐?”
 
봉철이가 꺼내 든 ‘외상장부’에는 아침에 영일이가 그렇게 놀렸던 짝꿍 근정이의 이름이 여기저기에 보입니다. 그리고 이름 옆에는 날짜와 함께 30,000원, 27,000원 따위의 숫자들이 적혀 있습니다. 또 어떤 날은 숫자와 이름에 두 줄이 죽 그어져 있기도 합니다.
 
“뭐야. 근정이가 우리 집에서 돈 빌려갔나? 뭔 소리지 이게. 앗~ 찾았다.”
 
여기저기서 근정이 이름이 써 있는 걸 의아해 하던 봉철이 ‘외상장부’를 처음부터 보려고 펼쳐드는데 만 원짜리가 한 장 ‘툭’ 떨어진 겁니다. 아마 엄마, 아빠가 돈을 넣어두었는데 이 한 장만 빼놓고 딴 데로 옮겨둔 거 같습니다.
 
“야. 이거 웬 횡재냐. 크흐흐”
 
봉철은 금세 근정이고 ‘외상장부’고 다 잊어버립니다. 아침부터 쫄쫄 굶어서인지 지금은 자장면 먹는 데 정신이 팔린 겁니다. 허겁지겁 자장면을 다 먹은 봉철이는 남은 돈으로 아이스크림이며 과자를 잔뜩 사다놓고는 컴퓨터 앞에 앉습니다. 아마 엄마, 아빠가 있었다면 꿈도 못 꿀 일일텐데요. 그래서인지 화가 좀 풀리나 봅니다. 슬슬 졸기도 하구요.
 
“봉철아, 여기서 자면 어떻게 해. 방에 들어가서 자”
 
“봉철아, 너 근정이 알지? 근정이 당분간 우리 집에 있을 거다. 그리 알고. 너 인사도 안 하냐? 내일부터는 너 근정이랑 같이 학교 가거라.”
 
언제 잠이 들었었는지 봉철이, 엄마와 아빠가 번갈아가며 깨우는 소리에 눈을 뜹니다. 아마 신나게 카트라이트를 하다 자기도 모르게 잠에 빠졌나 봅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며칠 전부터 학교에 나오지 않던, 아침에 그렇게 영일이가 놀려대던 근정이가 엄마와 밥을 먹고 있는 게 아닙니까. 잠에서 덜 깬 봉철이 너무 어이가 없습니다.
 
“엄마, 뭐야. 왜 인제 들어와. 그리고 재는 뭐야. 쟤는 어디서 데리고 온 거야?”
 
“아빠, 어떻게 된 거야? 쟤가 왜 우리 집에 와 있어? 뭐야. 말 좀 해봐. 쟤. 인제 우리 집에서 사는 거야?, 방은? 혹시 나랑 같이 쓰라고 하는 건 아니지? 뭐야, 나 쟤랑 같이 살기 싫어. 쟤도 엄마, 아빠 있을 거 아냐? 왜 우리 집에 왔어? 뭐야,, 빨리 말해 봐”
 
봉철이는 도대체 무슨 일이지 알 수가 없습니다. 매일 학교에서 놀림당하는 것도 싫은데 이제 근정이랑 같이 산다니. 죽을 맛입니다.
 
“어. 오늘은 늦었으니까. 내일 얘기하고, 너는 니 방에 가서 자라. 아빤 엄마랑 밥부터 먹어야 겠다”
 
“뭐야. 나 쟤랑 같이 살기 싫어. 알았지. 나 죽어도 쟤랑 같이 안 산다니까”
 
화가 머리끝까지 난 봉철이는 근정이를 본체만체 하고는 문을 ‘쾅’ 닫고 들어갑니다.
 
“뭐야. 밤마다 나가더니 근정이는 왜 데리고 들어온 거야. 그나저나 내일 학교에 어떻게 가지? 가다가 영일이 자식이라도 만나면 어쩌지. 나. 참. 에라, 모르겠다. 어떻게 되겠지. 아니지, 내가 왜 쟤랑 같이 학교를 가. 미쳤어.”
 
봉철이는 당장 내일 아침이 걱정입니다. 영일이 그 놈이 또 얼마나 자기를 놀려댈지 안 봐도 뻔하거든요.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봉철은 침대 위로 몸을 던집니다.
 
“여보, 이제 우리 외상값 받으러 그만 다닙시다.”
 
“......”
 
“당신도 며칠 동안 다니면서 봤잖아요. 이 동네 사람들 이제 다 떠나고 얼마 안 남았어요. 그 사람들 어디로 갔는지 찾으려면.... 서울에 없는 사람들도 많을 거예요. 그리고 찾는다고 해도 없던 돈이 갑자기 생기겠어요.”
 
“.....”
 
“쟤. 근정이만 봐도 그래요. 엄마는 거 외국인 불법 체류인가 뭔가, 거 왜, 단속에 걸려 언제 베트남으로 쫓겨 갈지 모르는데 돈을 어떻게 받겠어요.”
 
“그럽시다. 내도 요 며칠 많이 생각했소. 아무래도 외상값 받는 건 그만둡시다. 당신 말대로 그 사람들한테 돈 달라고 하는 것도 못할 짓이요. 그나저나 쟤는 어쩌려고 그려요. 당신 말대로 쟤 엄마 쫓겨나도 아빠가 있지 않소. 엄마, 아빠 둘 다 없다면 뭐 어찌해보겠지만 아빠가 있는데 우리가 맡는다는 건 좀 그렇지 않겠소.”
 
“예.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아빠한테 맡겨야죠. 근데 지금은 아닌 것 같아요. 쟤 아빠가 지금 제 정신이겠어요. 쟤 엄마 어떻게 해서라도 여기에 남게 하려고 백방으로 뛰어다니는데요. 엄마가 쫓겨 나가던 다시 집으로 오던 그때까지만 데리고 있자구요. 어차피 우리도 이제 곧 이사도 해야 하고 하니까 오래 데리고 있을 수도 없어요.”
 
잠결이었던가요. 봉철이 귀에 엄마, 아빠의 목소리가 들립니다. 하지만 봉철이는 그냥 이불을 뒤집어쓰고 맙니다. 아무래도 내일 학교에 갈 일이 걱정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근정이 덕분에 엄마, 아빠가 집에 있다고 하니 기분이 좀 좋아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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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4:38 2009/06/23 14: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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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제 마지막으로 편지를 썼었는지조차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버니지아가 살던 때에는 상상도 못했을 전자통신수단의 발달 때문에 이젠 많은 사람들이 편지를, 그것도 손으로 꾹꾹 눌러쓴 편지는 매우 비효율적인 의사소통 수단이라고 하거든요. 하긴 시간이 곧 돈인 시대이니 그럴 만도 합니다. 하지만 가끔은 비효율적이라 해도, 그리고 편지를 받아볼 이가 없다 해도 또 보낸 편지에 답장을 기대하기 어렵다 해도 가끔은 편지를 쓰고 싶을 때가 있답니다. 물론 한 자, 한 자 펜으로 꼼꼼히 쓰지는 않더라도요.

 

2.

둘이 벌다 하나만 일을 그만둬도 금세 지갑이 얇아지는데 둘 다 일을 그만두니 당장 이것저것 줄여야 할 게 많습니다. 그동안 뭘 했는지 모아둔 돈은 없고 그저 퇴직금 받은 것밖에 없으니까요. 어떻게 해서든 이 돈으로 4년을 써야 하는데 아무리 계산기를 두드려봐도 답은 씀씀이를 줄이는 것 외엔 방법이 없었습니다. 해서 외식비는 없애고, 공과금 나갈 것은 줄이고, 또 허리를 핑계로 그 좋아하는 걷기여행도 가지 말자, 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여기저기 5천원, 3천원, 1만원씩 내던 후원금, 회비도 당분간은 중단하자, 했습니다. 헌데 어찌 보면 얼마 되지도 않은 돈들이기도 하고 빡빡한 생활 속에서 그나마 여유로움을 주던 돈들을 막상 줄이려 하니 쉽지가 않더군요. 더구나 후원금. 통장에서 매달 25일 혹은 10일에 그렇게 빠져나가는 이 적은 돈들까지 끊는 건 정말 어려웠습니다. 일일이 후원하는 단체에 전화를 걸어 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여건이 되면 꼭 연락하겠다, 고 말하는 게 여간 쉽지가 않더라 이겁니다. 그래 어찌할까 고민하다 은행엘 갔답니다. 그리고는 그동안 자동이체 해왔던 곳들의 목록을 뽑았습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3.

어느 날 버지니아는 어떻게 하면 전쟁을 방지할 수 있느냐를 물으며 기부를 청해온 한 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이 편지는 그녀 스스로 그 편지에 대한 긴 답장의 글에서도 밝혔듯이 당시로서는 매우 유별난 편지였습니다. 왜냐면 일찍이 ‘교육받은 남성’이 여성에게 어떻게 하면 전쟁을 방지할 수 있겠느냐고 의견을 물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유별난 편지를 받은 그녀는 무려 3년이나 지난 후에야 답장을 씁니다. 그녀로서는 답장이 저절로 씌어지거나 다른 사람들이 답장해주기를 바랐지만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온 ‘교육받은 남성’조차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아직 못 내린 채 놔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오랜 시간 동안 기다려온 신사의 요청에 그녀는 응답을 합니다. 당신의 기부 요청에 기꺼이 1기니의 돈을 보내줄 수는 있다고. 하지만 자신 앞에 놓인 또 다른 두 통의 편지에 대한 답장이 먼저라고 합니다. 여자 대학의 증축을 알리는 다른 한 금전출납원이 보낸 편지와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의 전문직 고용을 도와주는 단체의 생활비 마련을 호소하는 또 다른 한 통의 편지 말입니다. 또 그녀는 당신 단체에 1기니를 보내기에 앞서 여자 대학 증축을 위해, 또 여성이 직업을 가질 수 있도록 지원하기 위해 각각 1기니의 돈을 보내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나서야 당신 스스로가 부가하는 조건 외에 다른 어떤 조건 없이 자유롭게 쓸 수 있는 1기니를 보낼 수는 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녀는 신사에게 1기니를 보내기는 하나 당신 단체의 가입신청서는 작성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왜냐면 그녀에게 신사가 물어왔던 폭력과 전쟁 방지, 그리고 지배의 철폐는 그것들을 만들어낸 ‘교육받은 남성’들의 말과 방법과는 다른 새로운 말과 새로운 방법을 창조함으로써만 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녀는 마지막 말을 전합니다. 그녀가 제안한 새로운 말과 새로운 방법의 창조는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이 받아왔던 가정교육에 대한 유일한 대안인 공교육을 위한 여자 대학의 설립과 함께 ‘교육받은 남성의 딸’들이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전문적인 직업을 가질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입니다.

 

4.

은행에서 뽑아준 목록은 그리 길지 않았더랬습니다. 이미 전화로 두어 군데 후원을 중지하는 전화를 했기 때문입니다. 수화기 너머 되려 무슨 일이 있느냐며 안부를 물어오는 그런 전화를 말입니다. 그래, 자동이체를 해지하는 일은 무척이나 금방이더군요. 몇 장의 동의서에 서명만 하면 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은행 문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볍지만은 않았습니다. 이제 더 미안함에 망설이며 전화를 걸 필요가 없어졌는데도 말입니다. 사람 마음 참 알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이 있은 지 이제 일 년이 훌쩍 지났고, 지금도 그때, 꼭 일 년 전 수화기를 들었던 그때, 미안함에 은행문을 나서던 그때를 잊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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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23 13:49 2009/06/23 13: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