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2. 메주콩 - 첫째 날(9월 22일/맑음 13-25도)
내일이면 낮과 밤의 길이가 같아진다는 추분이다. 추분이면 고추를 따서 말리고, 김장 농사(배추와 무, 열무 등등)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메주콩을 거두어야 하는데. 늦게 심은 건 아닌데도 메주콩이 덜 여물어 아직은 거둘 때가 아닌 듯하고. 엊그제 내린 비 때문인지 이제 한풀 꺾이려는 듯싶던 잡초만 무성하다.
이제 선선한 가을 날씨에 무에 그리 바쁘게 할 일이 있을까 싶어 느지막이 밭에 나왔기에 콩밭에 부쩍 키를 높인 잡초 잡을 생각을 하지 못했다. 혹여나 하는 마음에 늘 호미며, 낫을 챙기긴 했지만 저문 해에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다. 아무래도 이번 주는 콩 심은 곳 김매기에 매진해야겠다.
메주콩 - 둘째 날(9월 23일/맑음 12-26도)
꾸준히 아침 기온은 떨어지는데 낮 기온은 들쭉날쭉하다. 어떤 때는 27-8도까지 오르기도 하고 구름이 끼거나 정오 무렵까지 안개가 껴도 25-6도는 기본이지만 비가 온 전후로는 20도에도 못 미치고 하는 게 요즘 날씨인 게다. 덕분에 일하는 데는 그 어떤 때보다 좋긴 하지만 마지막 불꽃을 태우려는 듯 풀이 쑥쑥 자라 걱정이 크다.
무릎으로 기다시피 하며 콩 밭을 휘젓고 다닌다. 어떤 건 콩보다도 높게 키를 키운 풀들을 잡기 위해서인데. 누가 보면 조금 있음 수확할 때인데 뭔 김매기냐 싶지만, 그래도 그냥 뒀다가는 잡초로 뒤덮일 것만 같아서다.
일찍은 아니지만 서둘러 아침부터 나온 덕에 두어 시간밖에 일을 하지 못했지만 콩 심은 곳 절반은 풀을 매준 것 같다. 어제만 같아도 이번 주 내내 풀을 매야 할 것 같았지만 오늘 진도나간 것을 볼 땐 모래나 글피면 끝날 듯. 이제 콩 밭 풀베기만 끝나면 올 농사도 거진 다 마친다.
메주콩 - 셋째 날(9월 24일/맑음 13-24도)
순지르기를 해주지 않아서일까. 콩이 많이 달려서일까. 비가 한 번씩 오면 콩대가 몇 개씩 쓰러졌는데. 물론 그때마다 일으켜 세워주긴 했지만. 풀을 베면서 다시 보니 여기저기 쓰러진 콩대가 많다. 그래도 콩들이 잘 여물고 있어 다행이긴 하다.
처음 콩 밭을 봤을 땐 사나흘은 매달려야 할 것만 같았는데. 이틀 바짝 일을 하고 나니 거진 일이 마무리됐다. 덕분에 오늘은 한 시간 남짓만 손을 보고는 또 며칠 만에 빨간 고추를 한 봉지 넘게 딴다.

40여년을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들에게 춘천이란 도시는 정말 작았습니다. 지금 사는 곳에서 웬만한 곳은 자전거로 30여분이면 닿으니까요.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그래서 이 작은 도시에 적응하느라 조금은 시간이 걸렸답니다. 지금이야 몇몇 정류장에 버스위치를 실시간으로 알려주니 조금 낫긴 하지만. 처음 와서는 30분도 넘게 버스를 기다리다 지쳐 택시를 잡아타기도 했구요. 또 가끔은 그렇게 기다려 버스를 탔는데, 고작 10여분 후면 곧 내려야 한다는 것에 한숨을 푹푹 쉬기도 했답니다. 이것 역시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요. 그래, 요즘은 버스를 기다리기보단 아예 걷거나, 혹은 조금 먼 곳은 으레 자전거를 끌고 나온답니다.

<춘천은 호반의 도시답게 자전거길도 호숫가에 있답니다. 오늘은 중도 뱃터에서부터 한 바퀴를 돌 거예요>

<이곳은 다행히 산책길과 분리돼 있긴 하지만요.
사실 지금 함께 하는 이 길은 사람과 자전거가 함께 어울리기에 여간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된답니다>

<중도 뱃터를 지나면 곧 공지천과 만나게 되지요>
사실 이 작은 도시, 춘천으로 오면서 이제 ‘교통지옥’이라는 말은 듣지 않겠거니 했습니다. 인도까지 점령한 자동차, 채 건너기도 전에 깜빡이는 신호등, 하염없이 미터기 숫자만 올리는 꽉 막힌 길 등등. 그런데 말이죠. 인구 25만의, 전에 살던 구로구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 사는 이곳도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뭔 차가 그리도 많은지요. 집 앞 호반도로만 해도 아침, 저녁으론 차들이 길게 꼬리를 물고 있구요. 아파트마다 주차장은 항상 만차랍니다. 그래도 아직은 서울만큼은 아니니 걷거나 자전거를 타기엔 그리 어렵지 않답니다.


<왼쪽으로 의암호 너머 중도가 보이구요(위), 햇볕에 일광욕 중인 고추가 길을 막아서기도 하네요(아래).>
일찍 알았더라면 가보았을 터인데. 아무튼, 몇 달 전 강원대학교에서 ‘춘천 녹생성장 자전거로 달라자’라는 주제로 자전거 포럼이 있었는데요. ‘자전거 길은 녹색성장의 출발점’이라는 기조발제(이상원, 대통령직속 녹색성장위원회 위원) 뿐만 아니라 ‘도로신설에 따른 기존 국도의 자전거 시설로의 활용방안’(백남철 한국건설기술연구원 책임연구원), ‘경춘선 폐철도를 활용한 자전거 도로 건설방안’(윤경구 강원대학교 교수) 등의 주제발표 제목만 봐도 얼핏 알 수 있듯 최근의 자전거 열풍을 생활자전거로 이어가기보다는 레저, 문화, 관광 등 산업자전거로 가고 있어 조금은 아쉽기만 했습니다. 하지만 어찌됐건 간에 춘천만큼이나 자전거 타기 좋은 도시에서 이렇게나마 자전거에 대한 보다 적극적인 관심과 연구가 시작됐다는 데엔 큰 점수를 주고 싶네요.


<소양2교를 건너면 육림랜드와 인형극장을 만나게 되는데요. 혹, 이 길이 춘천댐까지 연결됐을라나요?>
춘천으로 오고 난 후 가장 먼저 한 일 가운데 하나가 새로 자전거를 마련하는 일이었습니다. 웬만한 곳은 30분이면 충분한데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느니 속편하게 자전거를 타고 다니자, 했던 겁니다. 그리고 또, 농사를 배우려 왔으니 조만간 밭을 구해야겠고, 그리고 나면 아침, 저녁으로 밭엘 가야하는데. 아무래도 자전거만큼이나 기동성이 있으면서 간단히 짐받이에 박스하나만 달아도 꽤나 많은 짐을 쉽게 실을 수 있는 게. 자동차만큼이나 아니 것보다 더 싫은 오토바이 말곤 없었거든요.
한쪽에서 자전거 이용 활성화를 위한다면서 <자전거등록제>를 도입하자는 얘기가 나오고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한쪽에서는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을 위해 헬멧 착용을 의무화하자는 소리도 나오고 있구요. 이제껏 자동차를 중심으로만 해서 세워졌던 교통정책에 이런저런 정책들이 자연스레 나오는 걸보니 방향이야 어떻든 간에 바야흐로 자전거 시대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굴러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뺀다고. 지금 얘기되고 있는 이런 논의들이 이 옛말에 딱 들어맞는다, 싶은 게.

<시내에 있는 유일한 자전거길입니다. 왼쪽 차도와 오른쪽 인도 사이에 안전턱도 보이네요>
<자전거 주차장입니다. 헌데 세워진 자전거가 한 대도 없네요. 너무 외진 곳에 만들어 둔 건 아닌지요>
그래, 그렇게 자전거를 장만한 지 이제 일 년하고도 반. 이젠 속속들이는 아니지만 거진 춘천 시내 주요 길뿐만 아니라 동네 골목길까지도 꿰차고 있으니 이만하면 이제 춘천시민이라 할 만하지 않겠습니까. 하지만 말이죠. 이렇게 춘천 곳곳을 다녔어도 마음 놓고 자전거를 탈 만한 곳은 생각보다 많지가 않았습니다. 밭에 가는 길이야 시내한복판은 아니지만 그래도 중심가를 통과해야 하기에 언감생심 자전거 도로가 있을 거라 생각지도 않았지만. 집 가까이에 있는 공지천만 해도, ‘마라톤 도시’라 할 만큼 달리기 하는 사람들에, 가족 단위로 산책 나온 사람들에, 그리고 자전거까지 하나의 길에 뒤엉켜서는. 그리고 말이죠. 동사무소에를 가든 대형마트를 가든 어찌 그리 자전거 세워 놓을 곳이 뵈지 않는 건가요. 또 구석에 처 밖아 둘라치면 공간이라도 넉넉해야지, 원. 이것도 저것도 아닌 경우가 태반이랍니다. 상황이 이러니 춘천만큼이나 자전거 타기 딱 알맞은, 적당한 크기의 이 도시에서 되레 자전거가 홀대 받는 거 아니겠습니까.

<신매대교에서 의암댐 가는 길을 따라 소양5교까지 갔다, 이제 돌아옵니다>
얼마 전,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이런 안내문이 붙었더군요. ‘기후변화와 환경오염, 에너지, 교통체증 등의 문제 해결을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추진되는 자전거 이용 활성화 정책에 따라 주민들의 자전거 이용 실태에 대해 조사를 하겠다’는 춘천시장 명의의 안내문 말입니다. 자전거 보유대수 및 이용도, 보관방법 등에 대해 조사를 하겠다고 하는데요. 모쪼록 시류에 편승해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어설픈 정책을 만들지나 않았으면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다소 쓴 소리도 마다하지 않아야겠지요.
풀베기 - 첫째 날(9월 14일/흐림 15-21도)
날씨가 제법 선선해졌다고는 하지만 아직 밭에 난 풀들의 기세는 등등하기만 하다. 고추를 따고 말리느라 눈길 한 번 주지 못했던 아래쪽 고구마 밭이 온통 풀천지이니. 얼추 눈대중으로 봐도 호미로 풀매기는 글렀고. 누가 초보 농부 아니랄까봐 낫 들고 풀베기에 나선다.
두어 시간 남짓 풀을 베어냈더니 고구마 심은 곳은 물론이고 콩 심은 곳까지도 손을 댈 수 있다. 한 이틀 정도만 시간을 더 내면 옥수수 심은 곳까지 말끔히 정리를 할 수 있겠다, 싶다.
풀베기를 하고 나니 풀이 한 무더기 나오는 건 당연지사. 봄부터 집에서 나오는 음식물 쓰레기로 퇴비를 만들어볼 요량으로 밭 한쪽에 따로 모아두긴 한데. 사실 퇴비를 만드는 건지 그냥 쓰레기만 버리는 건지 모르겠다. 오늘만 해도 풀은 풀대로 음식물은 음식물대로 따로따로 모아져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다음 달에 있는 퇴비 만들기 교육이라도 들어야지, 싶다.
풀베기 - 둘째 날(9월 15일/맑음 16-26도)
이틀째 풀베기다. 여름 내내 김매기를 했건만 조금 선선한 날씨에 방심했더니 금세 풀밭이 된 곳들을 말끔히 베어내니 속이 다 후련하다. 이제 깨 심었다 깨는커녕 풀만 키 높이로 자란 곳만 정리하면 대충 밭 정리가 끝난다.
풀베기 - 셋째 날(9월 16일/맑음 14-27도)
늦은 시간. 밭에 나가야 하나, 하루 쉴까, 잠시 고민하다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모자를 눌러쓰고 자전거에 오른다. 오늘 하루만 더 낫질을 하면 아래쪽 밭은 말끔하게 될 것 같아서다.
깨를 심었지만, 영 시원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여름부터는 아예 풀밭이 된 곳을 한 시간 남짓 풀베기를 하니 대충 정리가 된다. 밭 둘레 빙둘러가며 심은 옥수수야 아직 따지도 않은 것들이 있으니 좀 더 있다 해도 되니 말이다.
늦게 나왔으니 해가 지는 것도 빠르다. 자전거에 다시 오르기 전 쇠뿔도 단김에 뺀다고. 저녁 먹고 난 후 군것질할 요량으로 옥수수 몇 개를 담아간다.

<며칠만 손을 놔도 금세 풀천지가 된다 (왼쪽과 오른쪽이 확연히 다르지요)>
끝물 고추(9월 18일/맑음 14-28도)
무더위가 한 풀 꺾이는가 싶었는데 아직은 아닌가보다. 어제만 해도 낮 기온이 26도 머물렀고 아침, 저녁으로 찬바람이 부는 게 이제 더는 불볕더위가 없겠다, 했는데. 오늘은 최고 기온이 28도에 육박하고 햇볕도 뜨거워 도로 8월로 돌아간 것 같기만 하다.
해질녘이 돼서야 겨우겨우 늘어진 몸을 추스르고 밭에 나간다. 어제, 그제 풀베기를 하면서보니 더는 생길 것 같지 않았던 빨간 고추가 제법 달려 있는 게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생각 같아선 좀 더 기다렸다 이달 말쯤 한 번에 수확을 할까도 했지만. 언제 갑자기 찬바람이 불지도 가늠하기 힘든데다 다음 주 월요일엔 비 소식까지 있기에. 또 이젠 병에 걸린 것들이 그렇지 않는 것들보다 많기 때문에. 빨리 거두어야겠단 마음이 들어 늦었지만 밭에 나온 것이다.
끝물이라 그런지 두 시간을 넘게 고추를 땄지만 포대를 반도 채 채우지 못했다. 아무래도 보기보단 병에 걸린 것들이 많아서다. 그래도 용케 한여름을 보내고 가을 초입까지 잘 살아남아 빨간 고추를 만들어낸 것들이 기특하기만 하다. 이제 추석을 전후해서 풋고추를 수확해 장아찌를 담그면 올 고추농사는 얼추 마무리가 되는데. 작년에 비한다면 올 해는 무척 잘 됐다, 싶다.
불과 일주일 사이인데 한결 가을 날씨다. 지난주만 해도 목덜미로 땀이 송글송글 맺히고 아스팔트 위에 열기가 후끈후끈했는데 시원한 가을바람 한 줄기에 금새 땀이 마르는 걸 보니. 여름 내 많이 걷는다고 걸었는데도 그리 많이 걷지 못했고, 이제 걷기에 더없이 좋은 날들이니 부지런히, 많이 걸어야겠다.

다행이 터널은 방금 지나온 길처럼 최근에 지어져서인지 잘 닦여 있을 뿐만 아니라 내부도 환하고, 갓길도 찻길과는 다른 높이로 넓게 확보돼 있어 걱정이 없다. 다른 터널들도 이만큼만 환하고 갓길이 넓었으면. 도로뿐만 아니라 터널, 다리 모두가 차에게는 좋은 길이겠지만 걷는 이들에게는 좋지 않은 길이다. 그래도 질주하는 차들의 굉음에 발걸음은 빨라진다. 둘째 날, 산길을 넘어 괴산군 사담계곡까지(2006년 9월 3일)
백현리라는 마을에서는 상회라는 간판을 달기는 했어도 겉보기에도 그렇고 실제도로 그냥 평범한 농가에서 냉장고 하나 갖다놓고 이것저것 음료수만 파는 그런 곳에서 목을 축일 음료수도 사서 마시기도 하고, 경상북도 상주로 넘어와서는 손두부마을에서 두부정식에 점심을 먹기도 하며 부지런히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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