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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8/22
    생각이 툭툭 톡톡 튀는 밤
    처절한기타맨
  2. 2007/08/15
    세월의 힘(1)
    처절한기타맨
  3. 2007/01/17
    나의 첫 알바
    처절한기타맨
  4. 2007/01/06
    눈 내린다.(1)
    처절한기타맨
  5. 2005/11/07
    소리없는 꿈
    처절한기타맨
  6. 2005/03/02
    손모가지를 부러트리고 싶다.(2)
    처절한기타맨
  7. 2005/02/11
    오랜만에 글쓴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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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04/11/01
    광주는 그곳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2)
    처절한기타맨
  9. 2004/09/26
    White Day's Morning Candy(4)
    처절한기타맨
  10. 2004/09/25
    그저 한없이 걸음 걸으세요(1)
    처절한기타맨

생각이 툭툭 톡톡 튀는 밤

  • 등록일
    2007/08/22 00:23
  • 수정일
    2007/08/22 00:23

생각이 많은 밤이다.

 

어떤이는 그런 많은 생각을 벼룩에 비유했었지.

 

이리저리 툭툭 톡톡 튀어다니는, 어디로 튈지

 

자신도 도무지 감잡을 수 없는 생각들.

 

그래도 어떻게 살아야할까 하는 물음을

 

꼭꼭 깨물어 먹으면서 살아야한다.

 



그 누군가 그랬지.

 

예속된, 안락한 삶은 노예에 불과할 뿐이라고,

 

그러느니 죽는게 났다고...

 

실패하는게 두렵다면 첫단추를  꿸 수 없다.

 

그저 지금 내 지금의 삶에 있어 가장 중요한 가치가

 

무엇인지, 그 가치를 지키기위해 혼신을 다해

 

얼마나 자기자신에게 부끄럽지 않게 노력하는지,

 

그건 자신만이 안다.

 

글이나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써

 

자기 자신을 증명해 나가는것.

 

그것만이 눈물겨운 진실일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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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의 힘

  • 등록일
    2007/08/15 15:22
  • 수정일
    2007/08/15 15:22

 

구례땅에 내려와 쥔장없는 방안에서 뒤적뒤적

 

뒹글뒹글거리며...

 

공선옥 작가의 단편들을 읽다가

 

눈물이 찔끔 흐른다.

 

가난에 대한 기록...들,

 

그 가난속에서도 오롯하게 피어나는 가냘픈 슬픔들,

 

속절없는 애절함들.

 

 

어째든 난 사랑을 잃고 쓴다.

 

잘있거라.

 

잘 지 내 보 드 라 고...

 

 

세월의 힘이 나를 어떻게든

 

또 먹여살리겠지.

 

 

 



 

창밖으로는 새파란 땡감이 꼬물꼬물 익어가고,

 

늦여름의 매미가 맴맴맴맴 폭포수 소리를 내며

 

귀청 떨어지게 울어쌓고,

 

메르세데스 소사는 시원하게

 

노래를 불어제껴대고,

 

 

공선옥 그이의 소설중 살을 베이는 장면을 묘사한 대목에서

 

진저리를 치고 섬뜩해하며 책을 내려놓는다.

 

 

전생에 난 어쩌면 망나니의 칼날에 목이 잘려죽은...

 

어설픈 반역자였을까? 하는 상상을 해본다.

 

 

아니면 언제인가 손목을 날이 들지않은 칼로

 

쓱쓱 베어보았던 경험때문일까?

 

 

어째건 오늘은 날이 참말로 무 덥 구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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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알바

  • 등록일
    2007/01/17 13:05
  • 수정일
    2007/01/17 13:05

 

직업이 바로 그 사람이다는 말이 있습죠. 그에 따른 자기 소개 혹은

자기 고백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에 들어가기전에는 특별히 어떤 일을 아르바이트로 해본적이 별로 없습니다.

다만 집안에 어머니께서 자잘한 부업거리를 들고 오신적이 있긴 했었지요.

조화(造花)에 꽃잎달기 100개 채우면 단가가 몇백원정도 였던가? 머 그런 부업을

어머니 손을 도와 해본게 전부일겁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대학에 들어와서 여름방학때

가양동에 있는 제일제당 다시다 공장에 일용 잡부로 아르바이트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사회라고 하는 시스템을 첨 겪은 곳입니다.

어머니 친구분의 아들이 그 공장에서 일하고 있었습니다.

그 소개로 일을 시작하게 되었습지요.



그곳에서의 가장 뼈저리게 기억에 남는 일은 컨베이어 벨트앞에서의 작업였습니다.

모던 타임즈였던가요? 공장에서 하루종일 나사를 죄는 노동자로 나왔던

채플린의 모습이 기억이 나네요.

여자의 젖꼭지까지도 나사로 보여 그걸 조일려고 따라다니는 찰리 채플린의 연기.

그런 이상한 강박증을 갇게하는 힘겨운 노동에 대한 모습을 역설적이게도 희화시켜

우스꽝스럽게 보여주었던 영화.

제게도 다시다를 포장하던 그때가 떠오릅니다. 아주 미쳐버릴것 같았던, 돌아버릴것 같았던

그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 딴 생각을 잠깐만하면 포장해 넣어야하는

다시다 봉지가 저리로 밀려가

제자리에서 일어나 휘다닥 뛰어가서 봉지를 채와서 박스에 포장을 해 넣어야했던,

그런 지독한...밸트에 묶인 노동.

늘 노래를 불렀습니다. 흥얼흥얼 들국화의 노래를...그리고 흥얼흥얼

기계 한번 고장나서 안 멈추나하고...

기계가 멈추면 사람들을 놀리지 않기위해 청소를 시켰습니다.

그나마 청소하는게 쉬운일에 속했었지요.

아침에 너무 졸리면 쉬는시간에 잠시 화장실에 들어가 변기를 내리고 걸터앉아

깜박깜박 졸기도 자주 했었습니다.

그때의 기억이 솔솔, 빨래감을 담궈놓은 물에 하이타이가 솔솔 풀리는듯한 느낌이 듭니다.

 

추석 맞이 사은품 세트를 포장하기 위해서 물량이 많을때는

야간학교에 다니는 여중생들이 잠시 투입되었지요.

그 꼬맹이들이 스무살이 채 되지도 않았던 나를 아저씨라고 불렀던 것이

충격을 주기도 했습니다.

좀 조숙했다면 그때 원조교제를 시도 해봣을듯하네용. ㅎㅎ

 

고백을 하자면 그나마 벨트앞에서 하던 일은 지루했지만 쉬운 편에 속하는 일이였습니다.

끔찍하게 힘들었던 일은 멸치 다시다의 재료인 멸치에 포함되어 있는

분순물들을 제거하기 위한 제조 과정에 투입 됬던 일이였습지요.

1분당 한 포대씩을 진동을 하는 기계에 털어 넣어야 했지요.

그게 한 포대에 25kg인가 햇을겁니다.

숨돌릴틈없이 한포대씩을 털어넣는 역할을 하거나

한포대씩 분순물이 제거된 멸치를 빈 포대에 다시 받아서

4개씩 파레트에 4층 높이로 쌓는일.

정말 힘들고 너무 고되서 견딜 수가 없더군요.

먼지도 많고 일은 힘들고 바쁘고 정말 뼛골이 빠지더군요. 

 

그래서 그 공정을 관리하는 공장의 관리자급인 사람에게 자리를 좀 이동시켜 주면

안되겟냐고 면담을 신청햇습니다.

사실 폐가 안 좋아서 너무 먼지먹고 하는 일에는 견딜수가 없다고 그렇게 사정을 했었죠.

(쪽팔리게도 어릴적 폐결핵을 앓은 적이 있다는 사실까지 이야기를 했던것 같습니다.)

 

그의 반응은, 너 대학생 알바냐고, 니 아버지가 잘 살고 그러면 뭐하러 이딴데 와서 일하냐고,

하기 싫음 힘들면 때려치고 일 관두고 나가라고...

 

'조까라 마이싱이다!' 하고 일을 그만 둘수가 있을까요? 그때 저로써...

 

지금 생각하면 참 어리고 아무것도 몰랐을 순진한때 였었지요. 부끄럽기도 하더군요.

 

그때 그 다시다 공장의 공장장이 아버지의 고등학교 동창이였다는 이야기를

나중에 일을 하던 도중 집에서 아버지와 막걸리 한사발을 하다가 들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이 너무 힘들면 이야기라도 해줄까하는 걸 됏네요, 하고

고개를 가로젓긴 했었지요.

그래도 문득 간사하게도 그 순간에 공장장 이름이라도 팔았으면 어땟을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여기 공장장이 울 아버지 친구인데...머..그런...

 

하여간 멸치 다시다의 계절은 용케 끝나고 소고기 다시다쪽으로 배치가 되었고,

소고기를 익히는곳에서

일한건 재미 있었습니다. 왜냐 점심무렵이 지나고 슬슬 배가 고파질때즘 익혀진 소고기를

소고기 양념장같은것에 찍어먹는 재미가 있었거든요.

 

잔업을 꽤나했었습니다. 야근 작업을 할 경우에의 일당이

기본 근무에 비해 1.5배를 주긴했으니까요.

야간은 2배였고요. 몇번인가 야간에 일을 했던것으로 기억합니다.

 

87년도였고 첫 월급이 20여만원을 조금 넘는 정도였던거 같습니다.

그때 출근표 도장 찍힌것과 첫월급이 명기된 종이쪽지를 버리지않았으니

아마 방구석 어딘가에 있을것도 같습니다.

 

그렇게 처음 아르바이트를 시작했고, 그곳에서의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기억에 많이 납니다.

그때 한양대 사회학과 학생이 한명 있었습니다. 저와 같은 1학년 새내기였고

까무잡잡하게 생긴  키도 훤칠한 미남형이엇지요.

둘은 괜히 쉬는 시간에 사아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운동가요를 슬쩍 부르기도 했고,

대학생 초년생이라는 동질감에 잘 어울리긴 햇었습니다.

하기만 그뿐이였습니다. 생각하면 참 뻘쭘한 대학생 새내기들 둘이 

괜한 운동가요 부르며 폼잡고 그런 셈이였을겁니다.

그 친구가 그때 고기서 일하던 역시 우리 또래의 여직원중에 

풍만하고 몸매가 꽤 매력적으로 생겼던

여자를 꼬셔서 밖에서 만났나고 하는걸 듣긴 했었지요.

 

하나하나 잠시지만 같이 일을 했던 이들의 얼굴이 어렴풋하게 떠오릅니다.

밤업소에서 일하다 호스테스랑 관계하고나서는 성병걸려 약 먹는다고

 매일 놀림을 당하던 중학교 동창이였던 친구,

안양 타이거라는 폭력조직 서클에 있었다던 성질 고약한 친구,

가리봉동에서 살고있다던 사람 좋았던, 봉제공장일부터 시작했다던,

온갖 노동일로 잔뼈가 굵었던 친구.

그 시절을 다시 떠올려 보니 20대 초반의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특별히 갈곳없는 또래또래들이 많았었네요.

 

가장 기억에 오래도록 남는 사람은 다시다 공장의 옥상에 위치한 옥탑방에서

혼자 일하던 사람입니다.

굼띤 업무처리 때문에 노상 그보다 먼저 회사에 들어온 선임 직원에게 욕 먹고

무릎팍을 채여 멍투성이기도 했었던것 같은데...

그의 취미가 클래식 기타를 치는것 였습니다.

그때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을 연습하고 있는데 잘 안된다고

무척 어렵다고 진지하게 이야기하던게 인상적이였습니다.

얼굴도 목소리도 기억나지않지만 참 선량하고 착했었다는 그런 기억만이 슬핏 남아있네요.

어째든 그 여름이 지나고 대학에 복귀해서 저는 클래식 기타반 문을 두드렸답니다.

그것이 제 인생의 크나큰 전환점이 되었지요.

 

회사의 가게 앞에서 돼지 껍데기를 안주로 술을 먹어본게 그때가 처음이기도 합니다.

좋은 추억이건 나쁜 추억이건 오래 묵으면 이렇게 아련하고 아찔하기만 하군요.

 

첫 알바가 끝나고...월급턱을 낸다고 고등학교 친구들 몇몇을 이대앞에서인가

모이게 해서 술을 한잔 샀습니다.

 

그리고 그날 첫 담배를 피워 물었습니다. 뻐금 담배가 아니라

가슴 속 깊히 담배를 빨아 피웠습니다.

그때 같이 있던 친구넘들은 지금 무얼하고 살고 있을련지...

잠시나마 같이 한 공간에서 일했던, 나를 빗방울처럼 스쳐갔던 사람들은

또 어떻게 잘 먹고 잘 살고 잘 지내고 있을런지...

 

후..담배가 문득 찐하게 땡깁니다.

 

(르포문학교실 수업을 마치고 4기 모임방에 자기소개를 구술생애사 형태로 하기

숙제를 이곳에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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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다.

  • 등록일
    2007/01/06 15:17
  • 수정일
    2007/01/06 15:17

 

싸르락 싸르락 눈 내린다.  이곳에 글을 쓴게 일년이 넘었다.

 

그 사이 계속 이런 저런 영화제에서 일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다.

 

비정규직 영화제 노동자, 자기 정체성을 정확히 파악하기

 

그리고 노동자로써 삶의 방식을 재정립하는게 필요할듯도 하다.

 

예술한다고 작업을 등에 업고 젠체하는 삶이 아니라

 

노상 일과 부대끼면서 조금이라도 마음과 생각의 나이테를

 

배불렸으면 좋겠다는 바램을 해본다.

 

 

즉슨, 몸과 말과 마음의 우주를 넓히기

 

요이땅이다~



 

2007년 해야할 것들이 참 많다.

 

늘 일을 벌여놓고 산다.

 

르포문학교실 4기 모임 꾸리기

 

피아노 그리고 클래식 기타 배우기

 

영화제 기술팀 업무

 

공식 기록 영상팀 꾸리기 (영화제에 관한 다큐멘타리 작업)

 

그리고 알콩달콩

 

연애 사업

 

행복해보자꾸나 우째껀~

 

 

                                                                     김준권-솔밭에서-판화

 

김준권-솔밭에서-판화작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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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없는 꿈

  • 등록일
    2005/11/07 18:28
  • 수정일
    2005/11/07 18:28

흑백 사진과도 같은 꿈속에

 

눈이 내린다.

 

소리없는 꿈속 길가에 쌓여있는 연탄재들,

 

골목길엔 노는 아이들이 보이고,

 

갖가지 사물들이 얌전하게

 

제자리에 놓여 있다.

 

나는 그저 물끄러미 바라본다.

 

꿈속 풍경들을...고즈넉하니...

 

떠들썩하지 않는 그런 고요한 꿈을

 

오랜만에 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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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모가지를 부러트리고 싶다.

  • 등록일
    2005/03/02 02:27
  • 수정일
    2005/03/02 02:27

오랜만에 아침 9시 반에 기상 북한산행을 하기로 했다.

그동안 푸대접해왔던 몸을 긴장시켜볼까하는

그런 의도였지만, 결국 우측 무릎이 결단났다.

 

절뚝 절뚝 절뚝

 

찜질방에서 우연히 드라마를 보게되었다.

 

마지막회 제목은 모르겟다.

최불암(정 전현대회장)이랑 독고영재(박정희 그때그넘)이 나오는

드라마다.

 

노동자가 어쩌구 저쩌구 힘들게 지내는데 아직은 그단계가 아니라고 하시는

회장님 말씀

 

충분히 노동자들의 고생과 피와 땀은 자기도 미뤄 짐작한다는

푸근한 표정이다.

 

한때 자기 몸 몇번 실어주었던 뇬들에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지하 고급 매장 하나씩은 떼주었다 하던데 그리 인정 많으신 분이

노동자 탄압은 얼마나 가혹하게 하셨는지...차암....정말

 

기가 막힐 노릇이다.



그 다음은....전태일씨의 분신에 대한 소식을 듣는 박통

드라마는 사실이 아니구 허구라지만,

전태일의 탄원서를 읽어주는 보좌관앞에서

심려깊은 안타까운 근심의 표정을 짓는....씨발

 

정말 씨발...이다...라는 욕이 문득 터져나온다.

 

저 드라마 쓴 새끼들...정말

손모가지를 부러트리고 싶다.

 

 

건강에도 안좋은 담배 한대 짐 피워문다.

 

 

언제나 되야...전태일의 죽음을 저렇게  말도 안되게 가져다 써먹은 새끼들이

이 지구상에서 사라질까.

 

곱게 사라져주게 내비두기가 정말 정말

 

하여간....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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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글쓴다

  • 등록일
    2005/02/11 04:41
  • 수정일
    2005/02/11 04:41

한 열흘전 오랜만에 편의점에서 임페리얼을 한병

뽀렷다. 그 술을 따게한건 우연히 웹서핑하다

발견한 한 이의 글들을 읽은 덕...

 

15. 그녀는 노동자이다. 고등학교를 나와 운동이라고는 아무 것도 몰
랐던 여성이다. 다만 문학을 사랑했던 여성이었다. 온통 피 ! 피! 피! 만을
부르짖는 듯한 운동권 문학을 처음 접한 그녀의 반응은 이러했다. "왜 피만
이야기하죠? 그럼 사랑하고 사랑 받는 이야기는 어디에 써야 하나요? 친구
와의 우정에 대해 쓰면 소설이 아닌가요?" 그러나 그녀는 얼마 안가 그녀의
친구로부터 달라졌다는 말을 들었다. 어느 순간 그런 친구를 이끌고 집회에
참석하는 그녀가 된 것이다. 그녀의 집안은 무척 어렵다. 그러나 그간 벌어
둔 얼마 안되는 돈을 그녀가 대표로 있는 연극단체에 쏟아 붓는다. 그녀는
당당하다.  유명 인사와 회의를 할 때도 도전적이면서도 실천적이다.

그녀는 무척 따뜻한 성격의 소유자이고, 인내심이 강하다. 그러면서도 현

실감각이 뛰어나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남성이 없다. 시집을 가고 싶어하

고, 그녀 자신도 좋아하는 남성을 찾고자 하지만 그녀처럼 당당한 여성 앞

에서는 투쟁 잘 하는 남성도 주눅이 드나보다. 남성은 민족해방과 노동해

방에는 관심이 많지만, 여성해방에는 갸웃거릴 뿐.
나도 존경할 마음만 생기는데... 누나, 빨리 시집가세요. 

 

내 마음에 퍼다나르고 이곳에 굵은 그리고 밑줄을 그어본다.

 

혼잣말처럼 그리고 뜬금없이

 

난, 성해방에 기웃거리고 있어라고...중얼거려본다.

 

나 참 미친놈같다...

 

아래 그림도 그이의 블로그에서 뽀려온거다.

 

오래전 우리 옛 여인네들의 빨래터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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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는 그곳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 등록일
    2004/11/01 20:23
  • 수정일
    2004/11/01 20:23

광주는 그곳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피바랜 광주>

변성찬(영화평론가, ‘연구공간 수유+너머’ 회원)

2004년 5월 18일, 광주 망월동의 5.18 광주 묘지에서 ‘제24주년 5.18 민주화 운동 기념식’이 거행된다. 노무현 대통령 내외는 물론, 박근혜 대표를 비롯한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이 ‘처음으로’ 참석한, 말 그대로 전국민적인 행사이다. <피바랜 광주>는, 역설적이게도 전국민적 행사가 되면서 빛 바래가는 빛고을 광주의 ‘오늘’을 추적하고 있다. 대통령이 분향하는 모습이 현장에 준비된 대형 모니터로 중계되고 있다. 행사장에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자발적 참석자들은 그 모니터를 ‘구경’하고 있다. <피바랜 광주>의 카메라-시선은, 아마도 그날 저녁 9시 뉴스에 편집-방영되었을, 그 모니터 속 이미지의 ‘이면’을 향하고 있다.


가령, 그 무대 뒤의 풍경은 이러하다. 국가 원수가 참석함으로 인해 ‘당연히’ 이루어지는 통제와 검문 검색으로 인해, 전국에서 찾아온 자발적 참석자들은 ‘새삼스러운’ 기나긴 교통 정체를 감내해야만 한다. 그들은 차에서 내려 차라리 걷기로 마음 먹는다. 흰 소복에 조촐한 제수 보따리를 들고 행사장을 들어서려던 유가족 할머니는, 갑자기 자신을 제지하며 그 제수 보따리를 빼앗듯 나꿔채는 검색 요원의 행동에 깜작 놀란다. 행사장 입구의 혼잡으로 빨리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국회의원들을 향해 카메라는 자꾸 귀찮은 질문을 던진다. 그들은 카메라의 시선을 애써 피하며 자꾸 자기 줄의 앞을 초조하게 바라본다. 그때 들려오는 기쁨에 찬 목소리: “국회의원은 그냥 가도 된대요!”





<피바랜 광주>는 엄숙하고 경건하게 시작된다. 5.18 광주 묘지로 들어서는 텅 빈 진입로, 길 가의 ‘민들레’에 이중 인화되는 부처님께 절하고 있는 여인의 이미지, 그 이미지 위를 흐르고 있는 헌시(獻詩), 광주가 결코 80년 5월만의 문제가 아니었음을 증언하는 그곳의 수많은 열사들의 묘. 강경대, 이철규, 이한열, 이내창, 박관현, 그리고 무명 열사들...무덤 앞에서 정성스레 제사를 지내고 끝내 오열하는 유가족. <피바랜 광주>의 카메라는 질문과 의문으로 흔들린다. ‘저렇게 많은 묘지’가 왜 생겼는지, 그 죽음이 ‘우리나라 사람들에 의한 것인지, 다른 나라 사람들에 의한 것인지’를 물어보는 천진한 아이의 질문은 참 당황스럽다. 순식간에 진압되어 미처 카메라에 담지 못한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의 행사 참여 반대 시위와 그것에 대한 취재 통제는 또 한 번 당황스럽다. 흔들리던 <피바랜 광주>의 카메라는 끝내 울분을 토한다. 학살의 원흉들에 표를 던진 부산-경남의 이해 못할 민심에 울분을 토하는 한 경상도 할머니의 울분에 길게 공명하던 카메라는, 끝내 직설적인 몽타주로 자신의 울분을 발화한다. 죽어있는 지렁이 위에 꼬여있는 파리떼들. 오늘의 광주는 그 파리떼들 때문에 ‘피바래’ 가고 있다. 그 파리떼들의 행사를 구경해야만 하는 우리는 죽어있는 지렁이다.


<피바랜 광주>는 경건한 애도의 심정과, 흔들리는 의문의 시선과, 터져나오는 울분의 목소리로 오늘의 광주를 묻고 있다. 그 카메라는 차마 24년전의 광주로 되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아직 그 24년전의 광주를 온전하게 애도할 준비가 되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카메라-시선에는 이제야 비로소 그 온전한 애도의 준비를 수행하고 있는 우리의 모습이 담겨있기도 하다. 우리의 이웃에는 ‘아마도 대부분 생매장되었을 광주 행불자’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제작을 준비하는 깨어있는 양심(사진 및 다큐멘터리 작가 박성배씨)이 있으며, 이라크 파병 반대 투쟁으로 ‘광주의 정신’을 되살리고자 하는 행동하는 양심이 있다. 5.18 민주화 운동 전야제에서 불태워지고 있는 성조기, 그것은 아마도 오늘 우리가 수행하고 있으며 또 수행해야 할, 광주에 대한 대항 역사 쓰기의 몸짓일 것이다. 아직 우리는 24년전 광주를 온전하게 애도할 준비조차 못하고 있지만, 그러한 대항 역사 쓰기의 몸짓이 있는 한, 아직 죽은 지렁이인 것은 아니다. 밟힐수록 꿈틀거리는 생명력, 그것이 지렁이의 본성이기 때문이다.


<피바랜 광주>와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가지 사실. 첫째, 5.18 광주 민주화 항쟁 과정에서의 행불자로 신청된 사람들의 숫자는 363명이다. 그 중 현재까지 ‘인정’된 사람들의 숫자는 70명이다. 둘째, 제24주년 5.18 광주 민중 항쟁 기념식을 하루 앞둔 17일 오후 전남도청 앞에서는 ‘이라크 파병 반대 광주 전남 비상 국민 행동’의 기자 회견이 있었다. 국민 행동은 이라크 침공 반대 성명 발표와 함께, 도청에서 망월동 묘역에 이르는 국군 파병 철회를 위한 삼보일배를 실행했다. 오늘 광주는, 아직 많은 것을 ‘매장’당하고 있지만, 벌써 그 죽음의 원한에서 떨쳐일어나고 있다. 다음은, 그 되살아나고 있는 ‘광주 정신’을 담고 있는 성명서의 한 부분이다.

"80년 광주가 목숨걸고 지키려고 했던 것이 무엇인가? 광주정신은 인권과 평화라는 인류 보편적인 가치로 승화될 때 의미가 있다. 지금 이라크에서 천인공노할 미국의 만행이 저질러지고 있다면 광주는 그곳에 반드시 있어야 한다.
오늘 우리는 80년 5월의 심정으로 이 자리에 섰다. 이라크 침략전쟁에 국군을 파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5월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5.18묘지까지 고행을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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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Day's Morning Candy

  • 등록일
    2004/09/26 22:25
  • 수정일
    2004/09/26 22:25

 

 

아침까지 술을 처 마시고 용케 택시를 잡아타고 집에 들어오다
현관 앞 조그마한 보라색 꽃 화분을 문득 보고 너무 착해보여서
방안으로 데리고 들어왔습니다.

강아지 똘똘이가 샘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잠깐 하긴 했지만
화분을 책상에다가 올려놓고 보라색 꽃에다가 대고
한참 술주정 했었드랬지요.


 



♪ WhiteDayMoringCandy ♪


곁에 두고 보고 싶은데 너무 멀리 있어서

볼수가 없다고, 보고 싶다고...

고꾸라져서 한참을 자다 일어나서 어머님께 꽃이름을 여쭤보니
구개화(九開花)라고 말씀 하시더군요.


아홉번을 연달아 피는 꽃이란 뜻이겟지요.

꽃이 계속 피어 올라서 한창 간다고,

그리 말씀 하시더군요.


내 안에서도 그렇게 무언가가 계속 피어올랐으면 좋겟다고,
그랬으면 정말 좋겠다고, 생각을, 다짐을 자꾸만 해보네요.

아홉번이든 열번이든 피고 또 졌으면 좋겟다고...

다만 그러했으면...좋겠노라고...

 

 

2002년 어느 봄날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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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한없이 걸음 걸으세요

  • 등록일
    2004/09/25 03:59
  • 수정일
    2004/09/25 03:59

 

 

그저 한없이 걸으세요. 눈을 감고 귀를 적시는 시원한 바람소리, 작은 새들이 재잘 지저귀는 소리 상냥한 풀벌레들의 울음 소리에 발을 맞춰 한없이 걸어보세요. 슬픔이랑 기쁨이랑 고통이랑 걱정이랑 이런 것들 다 길가에 훌훌 벗어 던져 버리고 눈물같은거 웃음같은거 다 꼭꼭 씹어 삼켜 버리고 한없이 한없이 맨 알몸의 정신으로 길을 걸어보세요. 보이지 않는 하늘가운데 길, 길도 나지 않는 바다속 짭짜름한 길, 부는 바람 속 붕붕거리는 세상길 저편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차려놓은 검은 그림자길따라 샛노란 아기 병아리 종종 걸음으로 걸으세요. 그래요 한없이 하냥 걷다보면 금방 다음 세상에 닿아 있을것만 같지만, 걸었던 길들과 다시 걸어야 할 길은 다르고 또 같아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설움 같기도 하지만, 먼지잼 오시는 길가 샛노랗게 도드라지는 민들레꽃처럼 피어난 인연들, 빈 하늘 가운데로 다시 하얀 꽃가루 되어 가볍게 투신하지요. 걷다가 뛰다가 웃다가 울다가 날다가 기다가 헤엄치다 노래부르다 비명지르다 소리지르다 도망가다 앞서가다 뒤서가다 하여간 따라 길을 걸으세요 약속하지도 부르지도 애원하지도 말고 그저 그저 한없이 마냥 걸음 걸어보세요.


그저 한없이 걸으세요. 눈을 감고 귀를 적시는 시원한 바람소리, 작은 새들이 재잘 지저귀는 소리 상냥한 풀벌레들의 울음 소리에 발을 맞춰 한없이 걸어보세요. 슬픔이랑 기쁨이랑 고통이랑 걱정이랑 이런 것들 다 길가에 훌훌 벗어 던져 버리고 눈물같은거 웃음같은거 다 꼭꼭 씹어 삼켜 버리고 한없이 한없이 맨 알몸의 정신으로 길을 걸어보세요. 보이지 않는 하늘가운데 길, 길도 나지 않는 바다속 짭짜름한 길, 부는 바람 속 붕붕거리는 세상길 저편으로, 따사로운 햇살이 차려놓은 검은 그림자길따라 샛노란 아기 병아리 종종 걸음으로 걸으세요. 그래요 한없이 하냥 걷다보면 금방 다음 세상에 닿아 있을것만 같지만, 걸었던 길들과 다시 걸어야 할 길은 다르고 또 같아서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설움 같기도 하지만, 먼지잼 오시는 길가 샛노랗게 도드라지는 민들레꽃처럼 피어난 인연들, 빈 하늘 가운데로 다시 하얀 꽃가루 되어 가볍게 투신하지요. 걷다가 뛰다가 웃다가 울다가 날다가 기다가 헤엄치다 노래부르다 비명지르다 소리지르다 도망가다 앞서가다 뒤서가다 하여간 따라 길을 걸으세요 약속하지도 부르지도 애원하지도 말고 그저 그저 한없이 마냥 걸음 걸어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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