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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도 사람, 꼴등도 사람

** 월간 [사람] 6호, '이것도 인권이에요' 꼭지 글. ** 이 글만으로 [사람]의 질적 수준을 판단한다면 경기도 오산입니다. (요즘 쾌변작가 메가쇼킹의 만화에 버닝중;;) ** 황우석 스캔들과 관련해서 뭔가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좋은 글들이 와르르 쏟아져서 사실 굳이 내가 말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좋은글들을 쓰는 사람이 주류(혹은 다수)가 아니라는 사실이 참 서글프다. -_ㅜ


1인자가 되어야만 살아남는다.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늘상 묻는 질문이 있다. ‘너 커서 뭐 되고 싶어?’ 정말 실속 없는 질문이기도 하지만 사회의 분위기를 가장 잘 읽어낼 수 있는 질문이기도 하다. 아이들의 답변은 그 시대의 경쟁력있는 직업이 무엇인지를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기준이 되기도 한다. 대통령이라는 답변이 많이 나왔을 때는 유신을 지나 땡전뉴스(9시가 울리는 ‘땡’소리 직후 ‘전두환 대통령은~’하고 방송되던 그 시대의 뉴스)가 방송되던, 대통령이 최고의 권력과 권위를 표상하는 상징으로 읽히던 시대였다. ‘과학자’라는 답변은 경제 개발 5개년 계획이 차츰 마무리되고 ‘우리가 가진 자원은 인적 자원뿐’이라는 선전과 함께 실용적인 응용학문들에 많은 투자지원을 하던 때였다. 한류다 뭐다 해서 문화산업이 각광받고 있는 요즘 아이들의 대답이 ‘연예인’으로 바뀐 것은 그들이 가벼워서가 아니라 시대의 요구에 충실히 따르고 있을 뿐인 것이다. 그러나 수많은 아이들이 연예인을 꿈꾸고, 과학자를 꿈꾼다고 해서 모두 동방신기나 황우석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남들과 다른 성과를 거두어야만 하고, 1인자를 만들기 위한 부모들의 노력은 오늘도 계속된다. 박세리 선수의 LPGA 우승 이후에 박세리 선수 아버지의 지도법이 세간의 화제가 되자, 너도나도 아이에게 골프를 시키겠다는 부모들 때문에 골프학원이 특수를 맞기도 했었다. 노벨상 수상자의 15%를 배출했다는 유대인들의 천재교육 십계명 1조는 ‘남과 다르게 되라’는 것이라고 한다. 남과 다르게 되기 위해 부모들은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에 보내고, 경쟁에 살아남는 법을 가르치며, ‘이기는 것이 살길’이라는 것을 머리에 각인시킨다. 출발선이 다른 시작 살아남기 위해서는 1인자가 되어야 하지만, 그 경쟁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개천에서 용난다’는 말은 이제 어디에 써먹어야 할지 모르겠다. 학교 수업만 열심히 한다고 해서 좋은 대학에 갈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경쟁력 있는 인적자원을 만들기 위해 한글도 떼기 전에 영어부터 배우는 아이들이나, 잠자는 시간 외에는 학원에서 하루의 대부분을 보내는 아이들을 생각해보면 돈 없이는 경쟁할 수 있는 조건조차 갖추지 못할 것이다. 최근 인하대 수시전형에 합격한 송유근 군의 경우는 이 신동을 위해 과학기술부의 지원계획이 잡혀져 있다(과학기술부에서는 송군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서 전문가 4~5명으로 구성된 전담지원부를 개설할 예정이다.). 이 경우는 확연히 다른 출발선으로 시작하게 되는 것이다. 음악에 재능이 있더라도, 국내의 음악 교육의 상황을 생각해본다면 저소득층의 사람들은 음악 공부를 할 엄두도 못 낼 것이다.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천재들이 한명씩 등장할 때마다 그 천재의 학습법을 담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어도, 그 학습법을 그대로 따라하려면 부모가 아이의 교육에만 신경을 쏟거나, ‘남들과 다른 교육’을 받기 위해 어마어마한 사교육비를 지출해야만 한다. ‘1인자’와 나머지들 또한 사람에 대한 평가 기준이 ‘성과 중심’이 되면서, 노력이 가지는 가치는 그 빛을 잃었다. ‘너도 노력하면 잘 할 수 있어’라는 말은 ‘노력하면’보다는 ‘잘 할 수 있어’가 핵심이다. 영화 [말아톤]의 실제 주인공인 배형진씨가 빛나는 것은, 그가 정신지체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비장애인들과 비슷한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에 대한 축하이다. 배형진씨가 달리기를 잘하고, 비장애인들처럼 직장을 다니며 일상생활을 잘 영위할 수 있다고 해서 다른 장애인들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며, 여전히 장애인에 대한 차별은 사회 곳곳에 만연해 있다. 스티븐 호킹이 위대한 물리학적 성과를 이루었다지만, 그렇다고 해서 수많은 장애인들이 밖을 자유롭게 나다닐 수 있는 이동권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지금도 어딘가에서 기회만 얻으면 스티븐 호킹 말고도 더 멋진 학문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장애인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그냥 가능성일 뿐이다. 장애인들의 가능성은 펼쳐보기도 전에 차단되고, 그 속에서 삶을 위한 개개인의 노력들은 자취도 없이 사라진다. 배형진씨의 성공기는 헌신하는 어머니가 없는 장애인들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한다. 경쟁만을 강요하고 1인자가 되기만을 요구하는 사회에서, 확실한 결과물 없이는 존재 가치마저도 인정받을 수 없는 것이다. 1인자가 아니라 ‘사람’을 보고 싶다. SF영화에서 종종 등장하는 ‘미친 과학자’ 캐릭터는, 자신이 가지고 있는 능력을 이용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 자신의 뛰어난 능력을 통해 치명적인 화학무기를 만들어내기도 하고, 누구도 저항할 수 없는 가공할 힘을 가진 로봇 따위를 만들어내 세계를 위험에 빠뜨리기도 한다. 이 상황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은? 아무리 똑똑해도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 세계를 재패할만한 힘이 있어도 그를 올바른 일에 써야 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널리 사람을 이롭게 할지는 못할 망정 피해는 주지 말아야 할 터인데, 지금의 1인자들 주변에는 온통 피해자들 밖에 없다. 수많은 신동의 부모들은 아이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을 것이고, 황우석 교수의 실험을 위해 난자를 제공한 연구원들은 과배란 유도제의 부작용을 걱정해야 했을 것이며, 자신의 노력을 인정받지 못한 채 경쟁에서 밀려난 수많은 패배자들은 아무것도 보상받지 못할 것이다. 경쟁의 의미가 자신의 능력을 계발 할 수 있는 자극제의 역할이 아닌 ‘1등’이라는 성과를 얻기 위한 것으로 변질된 지금, ‘페어 플레이’정신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말이 된 것 같다. 여러 색깔의 조각천들을 모아 만든 퀼트처럼 세상에는 여러 재능을 가진 다양한 사람들이 존재할텐데, 그 많은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가고 1인자만 살아 남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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