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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사랑이라는 이름의 착취

미디어 참세상 칼럼 '조주은의 [ING]'에서 퍼왔습니다.

 

'연애의 정치학'에 대해 고민하는 사람으로서 공감되는 글.

 

 



사랑이라는 이름의 착취 
 
살면서 확인하게 되는 것은 가장 순수한 것에 잔인한 착취가 숨어있고 가장 여린 것에 폭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사랑… 언제부터인가 우리들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사랑'이다.

 

곳곳에 널려있는 교회의 찬송가에는 '사랑'의 메시지가 울려 퍼지고 있고 사람들간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도 '사랑'이다. 어린 자녀를 껴안고 뺨을 부비며 "사랑해"라고 말하지 않으면 부모로서의 방식이 아닌 것이고,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연인끼리도 수시로 "사랑해"라고 귀에다가 속삭이지 않으면 변심한 것으로 간주된다. 이처럼 모든 사람들은 사랑이라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고 산다. 그런데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세상을 살아가기가 왜 이렇게 고달프고 달콤하지 못한 것일까?

 

흥미롭게도 남성들이 "사랑해"라며 말하며 한 행동들이 여성들에게는 성폭력으로 의미되는 경우가 많다. 알고 보면 '사랑'은 산업화와 근대화 이후 생겨난 이데올로기이다. 나는 만약 엄마가 70년대 초에 나를 키우면서 "주은아, 사랑해"라고 말하고 껴안았다면 징그러워서 그 날로 가출했을 것이다.

 

연인 사이에서도 그렇다. 기혼 여성과 남성들에게 왜 결혼했냐고 물어보면 모두들 "사랑해서 결혼했다"고 말한다. 한 여성이 돋보기 안경 쓴 남성이 자신을 쫓아다니면 벌레보듯 하다가 그가 자신의 직업을 소위 'O사(士)'자 가진 직업이라고 밝히는 순간 핑핑 돌아가는 안경을 쓴 그가 갑자기 이지적으로 보이기 시작하고 눈에 하트 모양이 그려지면서 사랑이 솟아나기 시작한다.

 

사랑은 맹목적인 감정의 영역이 아니고 이성과 결합되어 매우 계산적이고 전략적인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성별화 되어 있는데 우리사회에서 사랑이라는 이데올로기는 상대적인 약자(여성)의 전략이기도 하다.

 

예를 들어서, 친밀한 사이인 이성 커플은 관계를 유지하고 발전시켜나가는 과정은 산업자본주의사회 이후 강화된 성별 분업 이데올로기에 기반해 있다. 데이트 비용을 주로 부담하며 경제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자는 남성이고 상대방을 기쁘게 할 선물을 준비하며 평온함과 친밀함의 오아시스를 제공하도록 기대되는 자는 여성이다.

 

그리고 사랑한다면 결혼해야만 하는 것이 애정 공식으로 치부된다. 여성의 1차적인 역할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전쟁터 같은 일터에서 돌아온 남편을 평안하게 맞이하고 자녀를 낳아 보살피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터는 노동자들에게 가하는 폭력과 착취를 어느 정도까지는 드러낸다. 그러나 최후까지 교묘하게 드러내지 않는 착취관계는 공식성을 인정받지 못한 곳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유지되고 재생산된다.

 

전 세계적으로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접어들면서 치열한 경쟁과 삭막한 관계라는 특징을 가진 직장과는 달리 가족은 이해관계가 동일하다고 말해지는 애정공동체로 각색된다. 이러한 가족을 1차적으로 책임지는 사람은 여성이다. 여성은 사랑한다고 여겨지는 남성을 만나 결혼으로 꾸린 가족에서 사랑을 실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노동자들의 노동력을 재생산시키는 애정적 존재이다. 일터에서의 노동이 여성들의 노동에 의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근대 이후 가족관계를 특징짓는 낭만적 사랑의 이데올로기는 여성들의 가족 내 노동을 노동이 아닌 것으로 보이도록 한다.

 

새벽에 일어나서 출근하는 남편의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작업복을 준비하는 여성들의 노동은 남편에 대한 애정과 친밀함을 드러내는 것이고, 자녀를 돌보는 여성들의 고된 노동은 '모성본능'에 입각한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이다. 이처럼 사적 관계라고 일컬어지는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여성들의 활동은 이해관계와 갈등을 노정하는 고된 노동이라기 보다는 여성성에 입각한 가족애의 실현으로 이해되었다.

 

따라서 한국사회에서 경제활동인구와 관련된 개념에서도 가족 안에서 이루어지는 노동은 아직 '노동'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그저 노동이라는 두 글자가 생략된 '가사'일 뿐이고 통학, 연로, 심신장애자와 함께 비경제활동인구층으로 분류되고 있다. 국가야 그렇다 치더라도 진보적인 노동 관련 단체에서도 가사노동을 여성들의 1차적인 역할로 규정하고 가족원에 대한 애정에서 우러나온 행위로 위치 지우고 있다.

 

모순적이게도 노동운동 진영처럼 '노동'에 둔감한 곳도 없다. 모든 것은 노동운동에 대한 애정과 헌신으로 환원된다. 여전히 자본가와 직접적으로 대립하는 일터에서의 노동, 공식적인 임금이 지불되고 있는 노동만이 노동이다. 자신들의 임금인상 투쟁 때 노래패 불러 노래부르게 하고, 문화패 불러 춤추며 문화공연 시키며, 강사 불러 좋은 이야기 좀 해달라고 한다.

 

문화일꾼들의 각종 공연과 강사노동자들의 강연은 노동자들을 향한 '애정에 입각한 행위'로 위치 지어진다. 나 또한 노동관련 단체에 강연을 섭외받았을 때 강연 노동의 대가인 강사비가 얼마인지에 대하여 전혀 알지 못하고 간다.

 

만약 노동자들이 일터에서 일할 때 자신의 노동력의 댓가인 임금이 얼마인지도 모르고 일을 시작하는 경우를 상상할 수 있을까? 수많은 노동은 사적인 피난처로 의미되는 가족 안에서, 비공식부문의 일터에서, 지하 연습장에서, 도서관에서, 대중교통 수단 안에서, 심지어 감정 안에서 행해지고 있다. 따라서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할 진정한 대안은 자신의 노동을 지속하기 위하여 비가시화 되었던 노동의 메커니즘을 이해하고 그동안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덧칠해져있는 노동들의 억압성을 드러낼 때 비로소 모색될 수 있을 것이다. 
 
2004년07월11일 4: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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