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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으로 하는 공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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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유원 잡문집, 『몸으로 하는 공부』, 여름가지, 2005.

 

이 책은 서평 형식의 글로 짜여진 것이 아니라 강유원의 홈페이지 ‘armarius.net’에 연재했던, 책과 세상에 대한 강유원의 잡문집이다. 책 마지막에 실린 <내가 공부하는 방법>은 인터넷 공간에서 널리 알려졌다고 한다. 나도 본 적은 있는 듯하다. 나름대로 철학이 담긴 공부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아무나 이렇게 공부할 수 있을까. 강유원은 교수와 학자, 학내의 지식인과 학교 밖의 지식인을 구분하여 전자에 대해서는 조소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데, 그런 생각을 가지고 공부하는 수많은 사람들, 특히 나같은 사람에게 얼마나 와닿는 충고가 될지... 그래도 이런 공부하는 방법을 본 것은 재수할 때 이후 처음이다.

 

글이 쉽게 읽힌다는 것은 좋은 것이다. 몇 군데를 제외하고는 강유원의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그것이 내가 그 책의 일부를 발췌하여 옮긴 이유이고...

 



01. 말하기와 글쓰기
 
우리가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자신의 지적 호기심에 따라 자발적으로 그것을 채우는 과정을 체득했으냐 그렇지 않느냐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길러지는 자질은 머리에 쌓는 지식 자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고 어린 시절부터 훈련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자질을 기르기 위해 가장 간단하고도 확실한 방법은 글에 익숙해지는 것이다.
어려서부터 글로만 이루어진 텍스트 읽기 훈련이 되어 있지 않으면 책을 읽어 지식을 넓히려 해도 책 읽는 일 자체가 어려워진다. … 책을 읽지 않는 이유는 글에 익숙해져 있지 않기 때문이다. 꾸욱 참고 앉아 진득하게 글을 읽는 일부터 해보자. 이런 점에서 글읽기는 머리로 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하는 것이다. 몸이 무거워지고 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해야 책이 손에 잡힌다. 책이 손에 잡혀야 새로운 것을 알게 되고, 자신이 모르는 게 무엇인지도 알게 된다. (17-18쪽)
 
02. 머리로 알기, 몸으로 해보기
 
몸으로 직접 겪어보지 않고 전체를 이론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사태의 실상을 더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 수도 있는 것이다. 몸으로 겪어봐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론적으로 정리할 줄 아는 것이다. (21쪽)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논어』 첫머리에 나오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의 해석을 "(예를) 배우고 때를 정하여 (제자들이 함께 모여) 실습을 하는 것만큼 즐거운 일은 없다"고 하였다.
누군가 뭘 '안다'고 말하면 '해봤어?' 라고 한번쯤 물어서 그의 지행합일 정도를 측정해보자! (21-22쪽)
 
03. '안다'는 것
 
사람들은 어떤 방식을 통해서건 뭘 배우고 알게 되며 그렇게 알게 된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주장한다. … '내가 뭘 안다'고 스스로 자부할 때에는 항상 '이것이 틀릴 수도 있다'는 의심을 스스로에게 제기해야 한다. 따라서 앎에 대한 참다운 자세를 가진 사람은 늘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이고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각별히 신경을 써야 한다. 즉 그는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안다는 것'의 가장 중요한 의미이다. 아는 것을 안다고 말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야말로 진정으로 아는 사람이요, 이런 사람을 주제파악이 잘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지 않고 아는 체하면 영원히 아는 사람이 될 수 없다. 스스로가 아는 것처럼 착각에 빠지면 실제로는 모르고 있는데, 그런 상태가 계속되어 자기 최면에 걸려서 나중에는 아는 것처럼 자기 스스로도 속게 된다. … 사실 많은 사람들은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과감하게 말하자 '나는 그것을 모른다'고.
이것은 지식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태도의 문제다. … 남들은 자기가 지식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모른다'고 말하면 부끄러울 수도 있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말하면 마음이 편해진다. 자신의 지식에 대해 자부심을 갖는 건 좋지만, 모르는 것은 겸손하게 인정하는 게 좋다. (28-29쪽)
→ 나에게는 이런 면이 부족했던 것 같다. 특히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남들이 나의 허상을 볼수록 내가 뭘 모른다고 말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다. 고시생 경력으로 인해 '몰라도 아는 척, 조금 알아도 다 아는 척, 책표지만 봤어도 책을 다 읽은 척 …' 이런 척하는 자세가 고시에 합격하기 위한 첩경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잘 고쳐지지 않는다. 여기에서 잘 빠져나오는 것이 바로 내가 '앎'으로 나아가기 위한 첫걸음일 것이다.
 
제대로 안다는 것은 사실 '할 줄 안다'는 것까지 포함한다. 머리로 익힌 것을 몸으로 해봐서 할 줄 아는 단계로까지 가야 어느 정도 앎의 완성에 접근해간 것이다. 이것이 '지행합일' 또는 '지행일치'이다. (30쪽)
 
04. 책의 속살과 껍질
 
05. 책 따로, 세상 따로
 
06. 지식인은 어떻게 먹고 사는가
 
어떤 개인 회사 사장이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일하라'고 한다면, 일단 그가 좋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는 있다. 그러나 그런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회사를 다니면서 자기 자신을 위해 일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건 사장 몰래 해야 하는 것이며, 자신이 회사의 주인이 아닌 한, 또는 자신이 회사의 주인일 수 있는 일종의 제도적 장치가 없는 한, 즉 사장이 유일한 주인임을 견제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는 없고 말만 그러하다면 그건 멋있는 거짓말에 지나지 않는다. (54쪽)
→ 연구소 조직도 마찬가지이겠지?
 
교수가 될 사람은 겉으로는 자신의 학문적 관심에 따라 논문을 쓰고 학생을 위하여 강의를 한다고 하며 실제로도 그러하다고 믿고 있지만, 이는 본질적인 관계가 아니다. 논문 주제를 학문적 관심에만 근거하여 선택하기보다는 학계의 동향, 여러 가지 역학 관계, 취직에 도움이 되는지의 여부 등을 따져서 하기 때문이다. 지도교수와 관련된 중요한 행사가 겹치면 아무 생각 없이 주저 없이 갈등 없이 학생을 위하여 강의를 하러 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62쪽)
→ 강유원은 교수와 학자를 구별하여 대비시키면서 교수를 폄하한다. 특히 최근에 모 교수가 총장이 되려고 하는 것과 관련하여 가까운 다른 교수들이 수업을 등한시하는 것을 보면서 나름대로 현실적인 이해라고 보았다. 나라면 어떻게 행동할까.
  
이런저런 대책을 추상적으로 늘어놓기보다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를 잡아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 좋다. 그것 하나를 해결함으로써 그것으로부터 번져나가는 파급효과에 의해 다른 것들도 저절로 해결되는 단서를 잡아야 한다.
사립대학의 학생들이 주인 노릇을 하기 위한 방법 중의 하나는 교수나 시간 강사들에게 '학생을 위하여 강의를 해야 한다'는 의식을 각인시키는 일이다. 교수나 강사들이 이를 철저하게 자각하고 학생들을 주인으로 대우하게 되면 나머지 일들은 쉽게 해결된다. 교수와 강사들은 학생을 포함한 대중들을 위해 강의를 하거나 글을 쓰는 일도 신경을 쓸 것이며, 이는 지식의 대중화에도 기여하게 될 것이다. (63쪽)
 
교수와 학생의 지위가 평등하다는 것이 제도적으로 보장되는 것과 교수의 권위는 별 관계가 없다. 교수의 권위는 그가 가진 학문적 성과, 교육에 대한 열정, 그리고 이를 수용하는 학생들의 자세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교수와 강사들에게 학생들이 주인임을 자각하게 하려면 이를 강제하는 제도적 장치가 있어야 하고, 이 장치는 교수나 강사의 생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야 한다. 즉 그들의 밥통을 겨냥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는 '쿠폰제'라는 말로 집약된다.
강의평가제가 실시되는 대학들이 제법 있다. 이거 말은 쉬운데 시행은 어렵고 효과는 불투명하다. 가르치는 사람이 미친 척하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밥통을 건드리지 않는 한 효과는 없다. (64-66쪽)
→ 쿠폰제라는 게 시장기제적 성격을 가지기는 하지만, 의미있는 제안이라고 본다.
 
07. 지식인과 매스미디어
 
현대의 지식인은 대중매체를 통해서만 대중을 만날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지식인이 시민이나 대중을 만나려면 먼저 미디어를 만나지 않으면 안되며, 그에 따라 미디어를 어떻게 만날 것인가는 지식인에게 아주 심각한 문제이다. (69쪽)
 
유명 지식인들은 무슨 이슈가 있을 때면 미디어에 등장해서 떠들어댄다. 겉보기에는 지식인 자신의 주의주장을 펴는 듯하지만 그들이 매스미디어에 등장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미디어의 검열을 거쳤음을 의미하므로, 그들의 주장은 미디어가 선택한 미디어의 주장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그들은 유명하기는 하나 당파성은 없다. 좌파 분위기를 내는 이들도 가끔 눈에 띠기는 하지만 속내를 들여다보면 명성에 굶주린 거지일 뿐이다. … 토론 프로그램에서 아무리 격렬하게 대립한다 해도 그들은 '미디어가 선택한 자'들이라는 패거리에 속한다. 피에르 부르디외는 『텔레비전에 대하여』에서 그들을 이렇게 규정한다.
"일회용 사고의 전문가들이며, 방송인들은 그들을 '단골손님'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은 안심하고 초대할 수 있는 자들이며, 타협적인 사람들이고, 어려움을 만들지 않으며, 말썽을 피우지 않고, 아무 문제없이 말을 많이 하는 사람들입니다." (73쪽)
→ 전반적인 논지에는 동의하지만, 모든 것에 수긍할 수는 없다. 매스 미디어에 대한 선입견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매스 미디어를 이용할 줄도 알아야 하며, 그 한계를 명확하게 인식하면서 당파적인 주장을 펼칠 수도 있다고 본다. 미디어가 선택하지 않은 자들이 당파성이 있다고 보기도 어렵다. 당파성은 대중매체에의 노출 여부로 결정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지식인이 살아가는 모습은 다양하지 않다. 둘뿐이다. 체제 안으로 흡수-고용co-opt되어 살아가거나, 아니면 꿋꿋이 살아가거나뿐이다. (75쪽)
 
08. '문화'라 불리는 것은 문화가 아니다
 
광주 비엔날레에 전시되었던 백남준의 작품을 '구경'나와 보았던 광주 인근의 시골 할아버지는 '뭐여, 별 희한한 게 다 있네' 하지 않았을까? 그걸 고도의 문화적 창작이라 한 사람은 몇 안되었을 것이다.
한국 사람의 문화라 할 수 있는 것은 따로 있을 것이다. … 몸 따로 마음 따로가 아니듯이 -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고 하지 않던가 - 문화는 먹고사는 자리나 방식과 따로 놀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백남준의 '비디오 아트'는 비디오 찍어주고 먹고사는 사람에게도 문화가 아니다. 그의 아트가 문화로 보이는 사람은 어떤 식으로든 먹고사는 게 해결되고 비디오 가지고 이리저리 장난을 쳐 볼 수 있는 이들뿐이다. (82-83쪽)
 
09. 리영희의 '객관성'
 
나는 이른 바 '내 인생의 책'이 없다는 것에 스스로 의아해한다. 그러나 나는 이게 좋다. 책이 영물이기는 하나 딱 한 권이 내 인생을 바꾸었다면 얼마나 내 인생이 풍부하지 못하냐 싶은 것이다.
한 권의 책, 하나의 사건이 삶에 있어서 하나의 계기가 되고 그것에 다시 또 하나의 계기가 이어져서 그러한 계기의 사슬들이 삶을 구축해나간다. 그렇다면 그런 계기들은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삶에 있어서 중요한 계기들이므로 하나도 버릴 게 없다. - 이런 식으로 따지는 게 이른바 '방법론적 전체주의'다. (85쪽)
→ 나에게도 '내 인생의 책'은 없다. 있더라도 한 두 권이 아닐 것이다.
 
리영희의 『반세기의 신화』 제2부 '우상과 신화의 정체'에 묶인 글들에 일관되고 있는 리영희의 태도는 객관적 보고서를 쓰는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한 시민의 개인적 작업이므로, 필자로서는 소론의 결론이나 부분적 기술이 전부 옳다고 고집할 생각은 없다. 작으나마 학문적 시도이므로 과학성과 논리성의 인도를 받으면서 진실에 '가까운'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써 만족할 것이다." (87-88쪽)
 
10. 한국 '문화' 탐구 방법론
 

'일상의 파시즘', '내 안의 파시즘'에 대해 떠들고자 한다면 가장 먼저 챙겨서 살펴야 할 대상은 바로 자신이다. … '남의 파시즘'은 타기해야 하지만, 내가 저지르는 파시즘은 용서가 된다. 나도 실천하지 못하고 실천하지 않는 주의를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죄악이다. (91쪽)
 
마빈 해리스의 『문화의 수수께끼』(한길사)에서 시도하는 '합리적인 설명'
"아주 기이하게 보이는 신앙들이나 관행들이라 해도 면밀히 검토해보면, 평범하고 진부하며 '통속적'이라고까지 할 수 있는 상황, 욕구, 활동 등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사실 …… 진부하고도 통속적인 원인들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면, 그것들이 성, 에너지, 바람, 비 등등의 손으로 만져볼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보편적인 현상들로 이루어져 있고, 그런 현상들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91쪽)
  
마빈 해리스가 『아무 것도 되는 게 없어』(황금가지)를 쓴 목적은 앞의 책과 마찬가지이며, 다만 분석 대상이 다를 뿐이다. 앞의 책이 원시 사회나 종교적 금기를 다루고 있다면 이 책은 미국 사회의 경제, 여성, 범죄, 문화 등에서 전반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을 다룬다. 하지만 목적은 똑같아서, 이 책은 "이성을 통해 자연과 문화를 객관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노력"의 산물이다. 이 노력은 '계몽'의 시도이다. (95쪽)
계몽은 늘 필요하다. 제정신을 차리고 세상을 올바르게 만들어보려는 사람은 늘 너무나 적다. 제정신일 뿐만 아니라 영악하고 탐욕적인 놈들은 대다수의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어놓고 그 틈바구니에서 이익을 얻으려고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있다.
근대 자본주의 사회가 전개된 이후 세상에는 천재지변을 빼고 우연히 일어난 사례란 하나도 없다. 모든 일이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 사소해 보이는 사회적 현상도 따지고 들어가 보면 분명한 원인이 있고 그 일로 인해 손해를 보는 이와 이익을 보면 놈이 분명히 갈린다. (96쪽)
  
어떤 사회를 설명하는 방식 중 "도덕적, 정신적 가치를 중시하는 관점"은 문제의 해결에 전혀 도움을 주지 않는다. "문화의 '상부'-도덕적ㆍ정신적 가치 - 의 변화보다는 '하부' - 소속원들이 일상생활을 꾸려 나가는 구체적인 행동방식 - 의 변화를 먼저 살피는 게 상황을 명확하게 이해하는 데 유리할" 때가 많다. 그러니까 대학생들이 교수들을 우습게 알기 시작했다면 대학생들의 머릿속을 뒤져서 버르장머리 제거 바이러스를 찾아내기보다는 대학이라는 곳이 구체적으로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것이 어떻게 변했으며, 그 변화과정에 교수들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등을 따져보는 게 더 낫다는 말이다.
이는 일종의 물질주의적인 것이다. 마빈 해리스가 미국 사회의 변화를 고찰하는 태도가 이것인데, 그는 일상생활을 구성하는 구체적인 요소들인 "미국의 제품과 서비스, 인플레이션, 가정생활, 섹스, 범죄, 복지, 종교 등에서의 성격 변화와 미국의 직업조직, 작업 방식, 노동 인구의 성비 등에서의 변화" 등을 면밀히 추적하고 있다. (97-98쪽)
 
미국의 흑인들 중 '아메리칸 드림'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대다수는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생활을 해나갈 수 없게 되었다. …"생존이 위태로운 상황에서는 범죄 행위가 희생이라기보다는 기회로, 일탈 행위라기보다는 생업으로 …… 월등한 수익을 보장하는 사업"이 된다. 그러므로 "미국 도심지의 거리를 위험 지역으로 변화시킨 노상강도들은 천성적으로 폭력과 범죄에 대한 욕망을 지닌 병적인 타락자들이 아니다. 노상강도질은 이들의 직업이다". (100-101쪽)
 
현재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여러 가지 상황들, 이를테면 정보화 사회라는 말로 치장되고 있는 서비스 중심경제로의 이동, 여성의 사회적 진출과 세계 상위권으로 올라선 이혼율과 그에 이은 청소년 범죄의 증가 등은 어쩌면 물질주의적 틀로써 해명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한국인의 '문화'와 '정체성'에 관한 가장 적절한 해명일 것이다. (103-104쪽)
 
11. 패스트푸드 전체주의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정확하게 알려면 어쩌다 한번 일어나는 일들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되고 우리의 일상을 채우고 우리의 마음에 새삼스럽게 의식되지 않는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새삼스럽게 문화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문화가 아닌 것이다. (106쪽)
 
패스트푸드의 범람을 막는 일은 경제활동구조와 관계되어 있으며, 개개인의 각성으로 성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전 사회적ㆍ국가적 급식 시스템과 농업생산 시스템의 뒷받침이 있어야 이루어진다. 즉 패스트푸드 문제는 개인의 입맛이 아닌 사회적 밥통의 문제인 것이다.
'패스트푸드'는 사실 현대사회, 특히 아메리카의 상징처럼 여겨진다. 즉 이제 단순한 음식이 아니고 그것 안에 아주 다양한 습관과 관행, 심지어 문화까지도 포괄한다.
패드트푸드의 대명사는 맥도날드다. 그런데 이제 맥도날드는 일종의 사회ㆍ경제적 현상을 가리킨다. '맥도날드화 McDonaldization'는 "패스트푸드점의 원리가 미국사회와 그 밖의 세계의 더욱더 많은 부문들을 지배하게 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 규정은 원제가 The McDonaldization of Society인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라는 책에 나오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조지 리처에 따르면 "네 가지 매혹적인 특성이 맥도날드 모델, 좀 더 넓게 말해 맥도날드화의 성공을 이끄는 핵심이다. 간단히 말해 맥도날드는 고객과 종업원, 지배인 모두에게 효율성 efficiency, 계산가능성 calculability, 예측가능성 predictability, 그리고 통제 control를 제공하기 때문에 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 네 가지 특성은 맥도날드의 경영전략일 뿐만 아니라 현대사회가 움직여가는 기본적인 작동원리이면서 동시에 특정집단에 속한 인간 전체를 신속하고도 정확하게, 즉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게 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108-110쪽)
 
현대사회에서 기업은 우리 생활의 모든 측면을 지배한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전 인생과 온몸을 지배하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이 이윤창출의 대상이 된다. … 끊임없는 새로운 헤어스타일을 유포하고, 계절신상품을 출시한다. 계속적인 소비를 강요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기업은 정부를 움직이고 반대세력을 무력화시켜서 우리의 인생전체를 기업의 식민지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를 '자본주의 기업의 전체주의'라 말할 수 있을 것이요, 이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은 바로 '맥도날드화'인 것이다.
자본주의 국가라 해도 정부는 원칙적으로 국민들의 뜻에 따라 민주적으로 선출된 이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게 되어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람들은 경제체제와는 무관하게 그 체제를 민주주의라 부른다. 그런데 기업은 민주적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기업의 의사결정은 최고 경영진이 알아서 하게 되어 있다. … 기업은 철저한 독재체제이자 전체주의 시스템이다. 그런데 이런 기업이 사회적 영향력을 확대하고 국가의 정책에 심각하게 관여해서 모든 것을 좌우한다면 그 국가의 민주성은 형편없어진다. 즉 정치적 의사결정과정은 가식일 뿐이고, 실제로는 기업에 의한 사회지배가 실행되는 것이며, 이것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에 의한 일상의 지배를 통해 이루어진다.
우리의 일상을 파고 들어와 옴싹달싹하지 못하게 하고 있는 자본주의 기업에 의한 전체주의는 말 그대로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이다. 정치적 형태의 전체주의가 농약이라면 일상적 형태의 전체주의는 생물학적 오염과 같다. 우리는 먹고살기 위해 기업에 취직하여 자신도 모르게 기업의 전체주의 지배를 돕고 있으나, 그것이 결국에는 우리의 목숨을 겨누고 있다는 절 알고 있다. 빤히 알면서도 어쩌질 못한다. 이것이 바로 '일상적 파시즘'의 본질적 내용이요, 그것을 '패스트푸드 전체주의'라 할 수 있겠다. (113-115쪽)
→ 자본주의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이다.
   
12. 노예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멘탈리티는 정신적인 것을 주입한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육체적인 조건들이 충족되어야만 생겨난다. (120쪽)
 
구체적으로 누가 위에 있어서 이래라 저래라 하는 말을 듣고 사는 것만이 노예처럼 사는 건 아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이 검증되지 않은 채 사회에 떠돌아다니는 풍문에 자신의 삶을 맡겨서 사는 것도 노예처럼 사는 것이다. … 그러나 따져보면 이렇게 사는 게 편하다. 어차피 인생이란 게 이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고, 저렇게 살아도 한 세상이다. 그러니 뭐 '의미'가 어떻고, 자유가 어떻고 하면서 사는 건 피곤하기만 할 뿐이다. … (하지만) 인생은 선택과 결단의 연속이다. (125-126쪽)
→ 역설적인 비유
  
선택해야 할 일이 많아지면 급기야는 아무 생각없이 살아가고 싶어진다. 적극적으로 선택하는 일이 너무나 힘들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절대적인 위력의 결정과 선택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것이 편안한 상태가 된다. 그저 윗사람의 입에서 떨어지는 '명령'에 내 머리를 맡긴 채 묵묵히 그것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 한나 아렌트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지극히 평범한, 그러나 명령이 없다면 살아갈 수 없는 소시민이 어떻게 해서 유태인 학살계획을 담담하게 수행해 나갈 수 있었는지를, 그리하여 아무 생각 없는 평범함 banality이 바로 현대인의 악의 원천임을, 즉 악의 평범성을 증언해주고 있다.
고민하라. 번뇌하라. 아무 생각 없음은 악이다. … 끊임없이 공부하고 그것에 근거해서 독자적인 판단을 하도록 노력하라. 21세기적 인간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존엄성을 스스로 지키기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야 한다.
 
13. 학문의 세 가지 태도
 
인문학적 태도는 현존의 것에 대한 의심에서 출발하여 확고하고도 불변의 진리를 찾고자 한다. 의심은 모든 학문에서 가장 근본이 되는 태도이다. … '인문학의 위기'의 본래적인 의미는 현존의 사태를 의심하고 확실한 것을 모색하고자 하는 '인문정신의 위기'이며, 이런 점에서 볼 때 현대인들은 무비판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하는 것이다.
인문학적 태도인 의심은 진정한 지식 추구의 출발점이고 사태의 고정성을 깨뜨리는 힘이기도 하지만 완결에 이를 수 없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다. … 따라서 스스로 판단하기에 인문학적 태도가 좀 심하다 싶은 사람은 지나친 의심을 거두고 사회ㆍ역사적인 현실에 관심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사회과학적 태도는 사태에 대한 객관적 파악을 중요하게 여긴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 무엇인지를 탐구하는 것이 이 태도의 기본적인 목표이다. 이 태도는 몇 가지 증거가 있다 해도 더 나은 증거가 나올 때까지 판단을 유보하고 단지 그 사태를 밝혀주는 증거를 나열할 뿐이다. … 자료의 객관성을 검증하고 그것의 단단함을 점차로 확보해나가는 것을 사회과학적 탐구라 할 수 있다.
공학적 태도는 현실적으로 실현가능한 것을 찾고자 하는 태도이다. 이는 실용적 태도이다. … 구체적인 성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실천까지 고려하지 않는 탐구는 그저 탁상공론에 그치기 십상이다. 그렇지만 공학적 태도가 어떤 의심 없이 객관적인 사실 확인 없이 무조건 실용성만을 따라간다면 이는 유사공학적 태도이다. (131-136쪽)
 
14. 철학의 현실적 쓸모
  
수영은 물속에서 해나가면서 배우는 것이다. 한번 해보고 나서 물가로 나와서 자기점검을 해보고, 그 점검을 바탕으로 다시 물속에 들어가 수영을 해보는 과정을 되풀이해야 수영을 배울 수 있다. 이 과정을 대상과 자기 사이의 끊임없는 상호작용을 통해 더 나은 진리에 이르는 탐구과정으로 생각할 수 있다. (142쪽)
 
형식논리학이 우리의 일상에서 일정한 지표의 역할을 하려면 그걸 배우는 과정에서 이러한 형식성을 넘어서 진정으로 비판적인 내용까지도 담아야 하며, 이는 논리학을 가르치는 이들이 논리학의 형식만이 아니라 세상의 내용까지도 챙겨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올바른 규칙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배우는 것은 나중 일이다. 세상을 먼저 들여다보아야 한다. 물가에서 수영하는 흉내를 먼저 낼 것이 아니라, 일단 물속에 들어가본 다음에 자세에 대해 연구해야 한다. 세상을 들여다본 다음에 자신의 생각이 얼마나 제대로 된 것인지 궁금할 때 논리학의 형식을 이용할 수 있다. (144쪽)
내가 보기에 우리가 자신의 판단을 검토할 때 고려해야 할 검증기준은 대체로 세 가지 정도이다. 하나는 '느닷없는 엮기' - 논리학에서는 cogito interruptus라 한다 - 이고, 다른 하나는 사태가 속한 차원을 혼동하는 범주의 오류,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뭐든 도매금으로 속단해 버리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이다. (145쪽)
→ 내가 글을 쓸 때 자주 범하는 오류들이다. 특히 선동적인 글을 쓸 때 그러한데, 그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쩝...
 
철학이 현재 한국사회에서 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기여는 바로 비판적 사고 -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이 진실인지 의심하고 검토해보며, 더 나아가 자신이 처한 구체적 관계 속에서 그 진실을 확인하려는 태도 -를 늘리는 데 있어야 한다. (147쪽)
 
15. 방법론적 시니컬
 
나는 '삶이 무엇인가', '세상은 무엇인가'와 같은 물음에 대한 대답을 다른 방법을 통해서 찾아보려고 한다. 그것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세상, 구체적으로는 '현재의 사회'에 대해서 깊이 따져 봄으로써 그 속에서 살고 있는 나,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도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가 워낙 변화무쌍하다는 어려움이 있다. 철학은 본질에 대한 학문이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철학적 탐구인 사회ㆍ역사철학 역시 본질에 관한 것이어야 하는데, 변하지 않는 본질은 영 찾아내기가 어려워보이는 것이다. 그러니 어쩌면 사회에 관해서도 상대적 개념과 잠정적인 규정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이 나를 시니컬하게 하지만, 나는 이에 절망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나의 '시니컬'은 철저하게 본질을 찾아내기 위한 방법론적 시니컬일 뿐이다. (158쪽)
 
내가 특정이념을 신봉하지 않는 것은 이념이 덧없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념 이전에 인간이 있었으니 이념이 인간의 삶을 피폐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더 이상 의미 있는 게 못된다. 나는 사태를 객관적으로 설명해주는 이론들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를 신봉하지는 않지만, 내가 인간과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면 언제든 받아들인다. (161-162쪽)
 
16. 고전의 힘
  
마키아벨리가 훌륭한 지도자의 예로 드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장한 예언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예언'을 오늘날의 말로 풀어보면 '비전'이다. 리더는 사람들에게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이 비전을 제시하는 과정이 설득이고, 설득을 위해서는 지식과 겸손이 필요하다. 단편적인 정보의 묶음이 아닌 사태를 처음부터 끝가지 꿰뚫어서 파악한 지식이 있어야만 오늘을 분석하고 앞날을 내다보는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 또한 아무리 많은 지식이 있다 해도 그것이 겸손한 형식 속에서 표출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165-166쪽)
  
탈 아카데미즘의 길목에서
 
내가 공부하는 방법
→ 내가 이 책을 사게 된 동기를 부여하는 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대로 실천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이게 인터넷에 올라와 있는 줄은 책을 살 때에는 몰랐다. 나답지 않게 이런 책을 사다니...
 
교수는 교수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강의를 성실하게 하는 교수, 개념을 철저하게 따져서 강의하는 교수, 무슨 일이든지 원칙대로 처리하는 교수, 자신은 늙은이면서도 일 학년 학생에게도 반말하지 않는 교수, 리포트를 써내면 빨간 펜으로 고쳐서 되돌려주는 교수, 어떤 일이 있어도 학점을 고쳐주지 않는 교수, MT도 공식행사라면서 반드시 참석하며, 그것도 양복에 넥타이까지 매고 가는 교수. 이렇게 처신하는 교수는 강의 시간에 늦게 들어와서 일찍 나가는 일도 없고, 무슨 보직을 맡을 겨를도 없으며, 어디에 잡문을 쓸 여가도 없고, 텔레비전에 나갈 시간도 없고, 정치에 돌릴 눈은 더욱이나 없다. 이런 교수가 있다면 계속해서 강의를 들어야 한다. 그래서 그가 가진 모든 것을 빨아들여야 한다.
이런 교수에게 공부를 배우면 우선 개념 따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이것부터 시작하지 않는 사람에게 공부를 배운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두 번째로 원칙대로 처리하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이 아무리 뒤죽박죽되어도 원칙을 지키는 사람이 있다면 언젠가는 제자리로 되돌아올 희망을 가질 수 있다. 다음으로 아무리 어린 사람이어도 존중해야 한다는 걸 배울 수 있다. 세상은 나이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능력과 인격으로 살아가는 곳이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이 하는 일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이 결국 제대로 된 삶이 기초라는 걸 배울 수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공부에서만이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데서도 기본이다. (177-178쪽)
→ 젠장... 아무래도 나는 교수할 타입은 아닌 모양이다.
 
지도 교수 또한 지도 교수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바를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지도 학생에게 잔심부름시키지 않는 교수, 자기가 쓴 논문을 자기가 타이핑하고 편집까지 하는 교수, 출판사에서 넘어온 교정본을 자신이 교정보는 교수, 새로울 것도 없고, 치열함은 더더욱 없이 사교장으로 변해버린 학회 따위에는 관심도 두지 않는 교수, 대학원 수업 시간을 꽉 채우고 끝내는 교수, 고전만 붙잡고 세월 가는 것도 모르고 그것만 읽히는 교수, 논문 주제를 상의하면 <알아서 써보라>고 하는 교수, 막상 논문을 써 가면 주격 조사나 접속사부터 따지는 교수, 논문 인용문의 원전을 죄다 찾아보고 잘못된 번역과 적절치 않은 인용을 지적해주는 교수, 이렇게까지 해놓고도 <지금까지는 문장 연습과 논문 쓰기 연습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주제를 잘 정하고, 본격적으로 써보라>고 한마디 툭 던지는 교수, 자신이 정한 기준에 합당치 않으면 아무리 여러 학기가 지나도 결코 논문을 통과시켜 주지 않는 교수, 같은 주제에 대해서 자신이 가진 견해와 달라도 학생의 주장이 논리적이면 인정해주는 교수, 자신에게 박사학위를 받은 학생에게 다른 학교 강의 하나 알선해주지 않는 교수, 아무리 오랜 세월을 공부해도 두 사람의 거리가 딱 그만큼에 멈춰 있게 하는 교수.
이런 지도 교수 밑에서 배우면 공과 사를 분명하게 하는 법을 배운다. 고전만 붙잡고 앉아서 공부를 했으니 기본이 튼튼해진다. 게다가 단어 하나, 문장 하나도 소홀히 읽는 일이 없게 된다. 무슨 문제든지 자신이 알아서 할 수 있는 능력이 길러진다. 문장 쓰는 훈련을 하므로 자신의 언어로써 생각하고 말하는 힘이 길러진다. 공부 가르쳐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신경을 안 써주니까 학생도 자연히 쓸데없는 데 신경 안쓰고 공부만 하는 습성이 생긴다. (179-180쪽)
→ 이것도 당연히 어렵다. 뭘 할 수 있을까.
 
선생님 없이도 공부하는 방법을 생각해둘 필요가 있다.
베끼기 없이 <내 철학> 해봤자 남는 건 처치할 길 없는 거만과 아무런 맥락 없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현란한 단어들뿐이다. 이런 사람들은 철학을 공부한 사람조차 알아듣지 못할 말들을 지껄이기 마련이고 남들이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건 자신의 철학이 그 만큼 심오하기 때문이라는 도취에 빠지며 급기야는 도사가 된다. (182쪽)
  
철학사를 읽든 철학의 제문제를 읽든 주의할 점은 마음에 드는 부분만 골라서 읽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죽 읽어야 한다. 누가 중요하다고 하는 부분만 읽어서도 안 된다. 그 사람에게는 중요할지 모르지만 아네게는 중요한지 아닌지 아직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베끼기는 평생에 걸쳐 해야 한다. … 베끼기는 독학이 가져다주는 폐해도 막아준다. 독학하는 사람은 어떤 분야의 책을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읽기 마련이다. 역사적인 연관이나 주제의 관련성에 유의하지 않고 읽는 일이 흔히 일어난다. 그 결과 아는 게 많아져서 장광설을 쏟아놓는다. 게다가 그들은 최근의 것 what's new에 대한 관심도 지대해서 항상 시대에 맞춰 살아가는 듯하다. 그러나 그 분야에 대해 체계적으로 글을 써보라고 하면, 장광설은 사라지고 말을 더듬게 되며, 그 점을 지적하면 원래 제대로 된 공부는 체계에 얽매이지 않는다고 우격다짐을 하곤 한다. … 어쨌든 베끼기를 거치지 않은 독학은 시간낭비, 지적인 허영일 뿐이다. 베끼기를 열심히 하다 보면 책을 제대로 읽는 법을 체득하는 이점이 있다. (183-184쪽)
 
베끼기를 열심히 하여 기초를 다졌으면 구체적인 자기 공부에 들어갈 차례다. … 공부 주제는 자신이 살아오면서 가장 심각하게 고민했던 문제여야 한다. 실존적인 차원에서 고민해 본 문제를 다듬어서 철학적 주제로 삼는 것이다. 별로 해주는 것 없이 규제만 하고 세금만 잔뜩 걷어 가는 국가가 못마땅했으면 국가론을 주제로 삼아보다는 것도 좋다. … 주제를 이런 식으로 정하지 않고 요즘 유행하는 거, 남들이 하는 거 붙잡아서 공부하다 보면 유행이 지나서 말짱 헛것이 될 수도 있고, 남들이 다 아는 이야기만 하게 될 수도 있다. 더 심각한 문제는 그런 공부는 얼마 가지 않아 흥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185쪽)
→ 프로포절을 어떻게 할지 고민된다. 바꾸어야 하나.
 
탐구할 주제를 정했으면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한다. 책은 그 주제에 가장 심오한 학설을 제시한 철학자의 책을 읽어야 한다. 이 철학자를 판별하는 근거는 베끼기를 통해 축적한 데이터베이스이다. 번역본이 있다면 일단 그걸 정독한다. 번역이 잘못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고, 또 제대로 된 번역본이 드문 것도 사실이므로 원전으로 읽어야 한다. 원전을 읽기 위해서 해당 외국어를 익혀야 함은 당연하다. 철학자의 책을 읽어나갈 때는 머리를 비우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읽어야 한다. 괜한 말 덧붙여 봐야 쓸데없는 일이고 감상일 뿐이다. 철학자의 책을 충분히 읽어서 그 책에 등장하는 개념과 논지들을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신할 수 있으면 관련된 책, 즉 해설서나 참고 문헌을 읽는다. 이 순서를 바꾸면 안 된다. (186쪽)
→ 이건 지키기 어려울 것 같다. 좀더 생각해봐야겠다.
 
참고 서적을 읽은 다음에는 다시 철학자의 책으로 돌아가서 열심히 읽는다. 누가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이거 무슨 말이냐고 물으면 나름대로 논리를 가지고 설명할 수 있을 정도로 읽어야 한다. 이 정도가 되면 이제 자기 글을 써볼 차례다.
오로지 원저작만을 인용하여 글을 써야 한다. 그렇게 써서 글이 안 되면 원저작을 다시 읽어야 한다. 원저작의 인용만으로 글을 쓴 다음에는 참고서에서 관련된 내용을 정리하여 각주에 덧붙인다. 본문과 각주가 글에서 차지하는 지위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각주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지만 본문은 글의 뼈대요, 살이다.
원저작의 내용만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원저작과 대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대결이 없다면 영원히 참고서에 의존해야 하고 원저작을 넘어설 수 없다. (187-188쪽)
 
여기저기서 떼다 붙인 글로 리포트를 써내던 사람이 자기 논문을 쓰기 시작하니 할 말이 없어진다. 떼다 붙인 글들도 문장이 안 되어 있기는 마찬가지다. 평소에 아무 주제나 붙잡고 글을 써봐야 한다. 그게 어려우면 일기라도 날마다 써야 한다. 말은 일사천린데 글은 엉망이라면 공부를 접는 게 낫다. 생각이 표면에서만 떠돌 뿐 되새겨지지 않은 증거이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끝맺지 못하는 사람은 아예 책도 들여다보지 말아야 한다. 생각도 정리되어 있지 않을뿐더러 책 한 권도 끝까지 읽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생각의 결을 따라서 물 흐르는 듯이 이어지는 글은 언제든 쓸 수 있지만, 엄격한 틀 속에서 글을 쓰는 훈련은 다시 할 기회가 없다. 글은 최대한 간결하게 써야 한다.
내 눈으로 읽어서 내 손으로 쓰는 것이 핵심이다. 정 모르는 게 있으면 선배에게 묻지 말고 지도 교수에게 물어야 한다. (189-190쪽)
  
마지막으로 할 일은 공부를 심화시키는 과정이다. 지금까지는 기존의 철학자의 사고를 검토하고 그것을 완벽하게 나의 언어로 소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이제부터 하는 일은 나만의 것을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 공부를 심화시키는 목표는 교수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학자가 되는 데 있다. 공부는 벼슬을 얻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해두어야 한다.
학자가 되려면 우선 공부를 시작할 때 했던 일, 즉 베끼기를 계속 해야 한다. 자신이 집중적으로 연구한 부분에 대해 어느 정도 상과가 있었다 해서 철학의 전 영역에 대한 공부를 게을리한다면, 다른 분야를 공부한 사람의 글을 이해할 수 없게 된다. 이해도 못하는데 토론과 비판은 더더욱 할 수 없을 것이다. 기본적인 것을 계속해서 다지는 것은 심화된 공부에 있어서도 밑거름이다. 심화의 과정에서는 반드시 다른 분야의 책을 읽어야 한다. 우선 읽어야 할 분야는 역사이다. 통사는 물론이고 세부적인 항목을 다룬 역사책들도 부지런히 읽어야 한다. 역사책 읽기는 철학적 주제들에게 생동성을 가져다 준다.
오늘날에 대해서 탐구하고자 한다면 신문이나 잡지 등을 열심히 읽어야 함이 기본이다. 신문이나 잡지를 읽되 사회과학적인 인식을 가지고 읽어야 하므로 사회과학 관련 서적도 열심히 읽어야 한다. 역사와 사회과학에 대한 독서가 어느 정도 이루어져야만 자신의 철학을 정립할 기본을 갖출 수 있고, 그것이 공허한 탁상공론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시대에 충실한 학문을 하는 것이 오히려 보편적인 사유로 가는 첩경이 아닐까. 철학사에서 접하는 철학들 중에서 오로지 철학만 공부해서 얻어진 것은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살아가는 시대의 모든 분야를 골고루 천착한 결과 이루어진 것들이었다. 학자가 되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다.
훌륭한 학자가 되는 일은 참으로 어렵다. 훌륭한 학자가 가져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 중의 하나는 어느 것에도 의존하지 않는 독립성인데, 이게 구체적으로는 먹고 사는 일과 연결되어 있어서 자기를 먹여 살려주는 사람을 욕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이다. (190-193쪽)
→ 먹고 사는 일을 고민하게 되면 학자가 되기 어려운가. 
 
<내가 공부하는 방법>을 실천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자기 학대>이다. 스스로를 괴롭히면서도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매저키스트가 된다면 남이 뭐라 하든 신경 쓰지 않고, 공부를 해서 명예를 얻지 않아도 슬프지 않으며, 공부가 돈이 되지 않는다 해도 서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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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5/05 02:24 2006/05/05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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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로자 2006/05/05 11:17

    전 맨날 "몰라, 모른다, 난 아무것도 몰라"라고 말하는데... ㅋㅋ

    대체로 동의할 수 있는 좋은 내용이 많네요. 약간 뜨끔한 것도 있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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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새벽길 2006/05/05 17:53

    저도 그렇습니다만... ^^

     Reply  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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