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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달,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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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김순영 옮김/후마니타스·1만원/156쪽

이 책도 읽어보기는 해야할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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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공평해!’ 분노의 외침이 공정사회 만든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10-08-27 오후 08:37:34)
평생 민주주의 연구한 노학자의 진단
‘소비 문화’가 후퇴시킨 정치적 평등
대중의 열정과 에너지로 되찾아야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 로버트 달 지음·김순영 옮김/후마니타스·1만원/156쪽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는 정치학자 로버트 달(예일대 명예교수)의 2006년 저작이다. 1915년에 태어났으니 91살에 쓴 책이다. 이 얄팍한 저작에는 평생 민주주의 연구에 분투해온 노학자의 민주주의에 대한 관심과 걱정과 비전이 응축돼 있다. 달이 이 책을 쓴 2006년은 조지 부시 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시절이었다. 테러리즘과 전쟁을 벌인다며 미국 민주주의의 숨통을 틀어막던 암울한 시기였다. 민주주의는 이렇게 후퇴하다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고 말 것인가? 아니면 다시 힘을 얻어 전진할 것인가? 연로한 학자는 이 책에서 자꾸 어두워지는 마음을 달래며 평생 공부한 민주주의 역사를 등불로 삼아 낙관으로 난 길을 찾아나간다
 
책의 제목이 알려주는 대로 지은이가 여기서 직접 탐구하는 주제는 ‘정치적 평등’이다. 민주주의가 모든 인간이 추구하는 정치적 이상이라면, ‘정치적 평등’은 그 민주주의 이상을 실현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할 필수적 전제조건이다. 정치적 평등은 민주주의라는 다소 추상적인 가치의 실현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수단이자, 민주주의가 얼마나 실현됐는지 그 정도를 재는 척도인 셈이다.
 
달은 지난 2세기 동안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이 놀라울 정도로 전진했음을 먼저 이야기한다. 1776년 7월 열린 제2차 대륙회의에서 채택한 미국 독립선언서는 이런 구절을 품고 있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을 자명한 진리라고 생각한다. 곧 모든 사람은 평등하게 태어났다.” 그러나 이 독립선언서를 채택하는 데 찬성했던 55명의 대표자는 모두 남성이었다. “여성은 그 시대의 법률상 아버지나 남편의 소유물이었을 뿐이다.” 아메리카 원주민도, 아프리카계 미국인도 처지는 다르지 않았다. 지난 200년 사이에 이들은 모두 백인 남성과 동등한 시민권을 얻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정치적 평등을 진전시키는 동력 구실을 하는 것일까. 이것이 달이 이 책에서 던지는 가장 흥미로운 질문이다. 달의 질문을 그대로 인용하면 이렇다. “실제로 정치적 평등을 확대하도록 특권계급과 하층계급을 밀고 가는 힘은 무엇인가? 왜 하층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상위의 특권층과 정치적으로 동등한 자로 대우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하는 것일까?” 달이 이렇게 질문할 때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을 다소 폭력적으로 요약하면 ‘이성이냐 감정이냐’ 하는 이분법에 가까워진다. 그는 “가장 탁월한 철학자들 가운데 일부”가 “이성의 중요성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다고 본다. 단적으로 그는 이마누엘 칸트를 지목한다. <도덕 형이상학을 위한 기초 놓기>에서 칸트는 이렇게 말한다. “결국 의무의 기반은 인간의 본성도, 그가 서 있는 세계의 환경도 아닌, 오로지 순수이성이라는 개념의 선험성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 ‘순수이성’이 정치적 변화를 일으키는 진정한 힘인가? 달은 여기서 칸트의 주장을 반박하는 논거로 데이비드 흄의 주장을 제시한다. 흄은 <인간본성론>에서 말한다. “이성이란 열정의 노예이며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성은 열정에 봉사하고 그것에 복종하는 것을 넘어서서 결코 어떤 다른 역할을 자처할 수 없다.” 흄만 그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시대 정치철학자인 마이클 월저도 같은 말을 한다. 달은 월저가 <정치와 열정>에서 한 말을 인용한다. “평등이나 민족의 독립, 그리고 해방과 권리 인정을 위한 어떤 운동도 위계 구조의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을 참여시키는 투쟁적 열정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한,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월저는 그 열정에 시기·분개·분노가 포함된다고 말한다.
 
달은 칸트가 아니라 흄과 월저의 편에 선다. 그렇다고 해서 달이 이성의 구실을 완전히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성은 정의로운 행동을 하는 데 이바지할 수 있다. … 분명히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달의 강조점은 이성의 앞면이 아니라 뒷면에 찍혀 있다. 그는 정의나 공정을 추구하도록 만드는 것은 ‘순수이성’이 아니라, “동정심이나, 시기, 분노, 증오와 같은 정서 내지 감정”이라고 단언한다. 이성이 아니라 감정과 열정, 다시 말해 “이건 불공평해!”라고 외치게 만드는 절박한 느낌이 정치적 평등과 같은 도덕적 목표를 추구하도록 밀어붙이는 힘이라는 것이다.
 
달은 이어지는 장에서 정치적 불평등이 미국에서 점점 더 커지는 양상을 추적하면서, 그 근본적 원인을 ‘소비문화의 지배’에서 찾는다. 소비문화의 범람이 정치적 참여의 중요성을 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문화적 흐름 위에서 조지 부시 정권의 일탈이 가능했다고 달은 생각한다. 9·11테러 이후 미국의 권력은 시민과 그 대리자인 의회의 통제에서 벗어나 대통령과 행정부에 과도하게 집중됐고, 이런 정치적 불평등의 확대는 미국 민주주의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민주주의와 정치적 평등을 복구하고 전진시키려면 미국 시민들이 ‘소비주의 문화’의 자장을 이겨내고 ‘시민권 문화’를 되찾아야 한다. 달은 “그동안 미국인들이 잊고 살았던 것”이 있다며 “정치적 불평등을 줄일 수 있는 정책을 확실하게 채택하도록 시간과 에너지를 집중할 수 있는 한층 더 강력한 대중운동을 복원하는 일”이 그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그런 대중운동을 어떻게 하면 일으킬 수 있을까? 여기서 바로 답하지는 않지만, 대중의 마음속 깊은 곳에 잠복해 있는 감정, 곧 분노와 열정을 끄집어내는 것임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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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불평등, 해소될 수 있을까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2010/08/27 06:26)
 
일생을 민주주의 연구에 매진한 로버트 달 미국 예일대 정치학과 명예교수는 '정치적 평등에 관하여'(후마니타스 펴냄)라는 비교적 짧은 분량의 책을 통해 앞으로 정치적 평등이 어떻게 진행될지를 예상한다. '민주주의'를 도달할 수 없는 이상(理想)으로 보고, 실재하는 현대 민주주의를 다두제(polyarchy)로 지칭하는 달 교수는 90세를 넘겨 쓴 이 책에서 '민주주의의 기본 전제'인 정치적 평등을 가로막는 장애물들로 ▲정치적 자원, 기술, 그리고 불평등한 분배 ▲시간의 한계 ▲정치체제의 규모 ▲시장경제의 확산 ▲중요하지만 민주적이지 않은 국제 체제의 존재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심각한 위기 등을 들었다.
 
가령 정치체제의 규모가 크면 클수록 시민이 대표에게 결정을 위임할 필요성이 커지고 대표가 위임받는 권한의 양도 따라서 커지기 때문에 정치적 평등이 위협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시장경제 역시 시민들 사이에서 '자원을 둘러싼 엄청난 불평등'을 만들어낸다는 점에서 정치적 평등을 위협할 수 있는 장애물로 언급됐다. 이어 저자는 최근 미국의 사례를 들어 정치적 불평등이 심화된다는 내용과 약화된다는 내용의 두 시나리오를 내놨다.
 
테러 이후 권력이 대표에게 집중되고 있으며 소득 불평등이 심화하고 있다는 것이 첫번째 시나리오의 근거이며, 경쟁적 소비주의의 허무함을 미국인들이 깨닫고 적극적 참여가 바탕이 된 시민권 문화가 발달할 것이라는 기대가 두번째 시나리오의 바탕이다. 책은 미국에서 2006년에 발간돼 "로버트 달의 모든 것을 담고 있다" 등의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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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史·哲의 향기]정치적 평등은 과연 실현 가능한가 (동아, 이새샘 기자, 2010-08-28 03:00)
 
출간 당시 91세였던 저자는 이후 집필활동을 하지 않고 있다. 민주주의를 평생의 연구 주제로 삼아온 노학자는 이 책을 통해 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정치적 평등이 과연 실현 가능한지를 묻고 있다. 대상으로 미국사회를 상정하고 있지만 한국사회에 적용하더라도 어색함이 없다.
 
저자는 우선 “모든 인간은 평등한 본질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본질적 평등’을 전제한다. 효과적 참여, 투표의 평등, 계몽적 이해의 획득, 의제에 대한 최종적 통제 등은 이상적 민주주의, 즉 정치적 평등이 보장되는 정치제도의 조건이다.
 
그러나 정치적 평등이 이성적으로 합당한 목표라는 점 그 자체가 인간 행동을 추동할 수 있을까. 저자는 순수이성만을 인간 행동의 유일한 추동력으로 파악한 칸트를 비판하며 “이성이란 열정의 노예”라고 말했던 흄의 논의를 받아들인다. 지난 수백 년간 사람들이 정치적 평등을 위해 투쟁하도록 만든 힘은 이성이 아니라 감정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 예로 ‘불평등 혐오’를 들 수 있다. 시기심이나 질투심이라고도 부를 수 있는 이 감정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과 비교해 자기 자신에 대한 보상이 불공평하게 분배되는 데 대해 본능적으로 민감하게 느끼는 것을 뜻한다. 이 외에도 감정이입과 공감, 그리고 두려움이나 개인적 야심도 복합 요인으로 작용한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수백 년간 지속적으로 증진돼 온 정치적 평등은, 다음 세기에도 그 성취를 계속 확대할 수 있을 것인가. 두 가지 결론이 가능하다. 첫 번째는 정치적 평등이 축소될 것이라는 결론이다. 그러나 저자는 정치적 평등이 진작될 것이라는 희망 역시 버리지 않는다.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시장자본주의의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한 정책과 제도들은 여전히 남아 있다. 동시에 사람들은 소비를 통해 인간의 감정을 충족시키는 자본주의가 행복이나 복지를 성취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가고 있다. 만약 이 같은 전환이 더욱 광범위하게 일어난다면 소비주의 대신 정치적 평등을 강력하게 추구하는 ‘시민권의 문화’가 우위에 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두 가지 전망을 제시한 채 어느 쪽으로도 명확히 결론짓지 않는다. 이 책은 다음 문장으로 끝난다. “아직은 아니지만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경쟁적 소비주의 문화에 내재한 공허함을 자각하는 동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권의 문화가 가져오는 보상과 도전 의식의 가치를 깨닫게 될 때, 그들은 미국을 저 멀리 잘 잡히지 않는 목표에 훨씬 더 근접할 수 있도록 만들기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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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8 07:32 2010/08/28 0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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