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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사람들』(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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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저자인 크리스토퍼 브라우닝이나 지그문트 바우만이 하는 주장과 비슷한 얘기를 하워드 진도 하고 있다. 
이 책의 내용을 슈테판 마르크스의 『나치즘, 열광과 도취의 심리학』(2009, 책세상)과 비교해보면 재미있을 듯하다. 슈테판 마르크스는 브라우닝처럼 당시 독일인들이 처했던 상황과 행태를 일반화하지는 않는 듯하다. 물론 유사한 상황은 언제든지 벌어질 수 있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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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특수 상황선 누구라도 ‘악마’가 될 수 있다 (경향, 김재중 기자, 2010-08-20-21:31:10)
아주 평범한 사람들 |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 | 책과함께
  
연쇄살인범이 잡히면 그의 행위에 대한 해석은 크게 두 갈래로 나뉜다. 하나는 그가 광기에 사로잡힌 악마라는 것인데 대다수 보통 사람의 감정적 반응이 이것이다. 이에 반해 그가 악행을 저지르게 된 상황적 요인이 있을 것이란 입장이 맞선다. 악행을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악행의 원인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개인적 또는 집단적 행동, 특히 악행의 주요 원인은 증오심, 기질과 같은 심리적인 것인가, 아니면 그가 처한 특수한 상황 또는 사회적 구조인가라는 질문으로 달리 표현할 수 있다. 어찌보면 전자의 입장이 훨씬 속 편할지 모른다. 그저 나하곤 전혀 별개의 나쁜 놈, 악마로 규정하면 끝이니까. 그러나 이런 해석은 반복되는 인류의 잔혹한 행동들, 그리고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를 가로막는다.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학계의 논의도 크게 보면 비슷한 구조다. 유대인 학살에 참여한 사람들은 원래부터 극도로 유대인을 증오했거나 잔악한 사람들이었던 것인가? 아니면 위에서 시켰기 때문에, 즉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살에 가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인가? 미국의 홀로코스트 전문 역사가 크리스토퍼 R 브라우닝이 1992년 처음 발표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원제 Ordinary Men)은 이런 질문을 물고 늘어져 강력한 가설을 제시한 기념비적인 작품이다. 제목에 등장한 ‘평범’이라는 단어는 의미심장하다. 한나 아렌트가 유대인 수백만명을 죽게 만든 책임자인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책에서 ‘악의 평범성(the banality of evil)’을 주창했듯, 사악함이나 세뇌효과, 유대인에 대한 증오심 등 심리적 요인이 잔혹한 행위의 결정적 원인은 아니었다는 결론을 암시한다. <아주 평범한 사람들>은 학살 책임자나 피해자보다는 학살을 직접 수행한 말단의 당사자를 집중 추적한 연구서로 최초이기도 하다. 이 책이 나온 뒤 요나 골드하겐이라는 학자가 같은 자료로 브라우닝과 정반대의 결론, 즉 심리적 요인이 결정적이었다고 주장한 책을 출간하면서 꽤 유명한 논쟁을 벌이기도 했다. 브라우닝은 개정판(98년) 후기에서 골드하겐의 공격을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어 양자 사이의 논쟁의 뼈대를 파악할 수 있게 했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아주 평범한 학살 집행자들’은 나치 독일 당시의 ‘101예비경찰대대’. 101예비경찰대대는 1942~43년 폴란드에 투입돼 유대인 3만8000여명을 학살하고, 4만4200여명을 죽음의 수용소로 강제 이송했다. 명실상부한 ‘죽음의 부대’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독일의 중년 남성 500여명으로 구성된 101예비경찰대대 구성원은 대부분 열렬한 히틀러 지지자가 아니었으며, 오히려 반(反)나치 성향이 강한 함부르크 지역 출신이었다. 철저한 훈련과 이념교육을 받은 정예부대는커녕 대부분 군 복무 경험조차 없었다. 말 그대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브라우닝은 함부르크 검찰이 1960년대에 전직 101예비경찰대대원 125명을 취조한 기록을 분석, 이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어떻게 ‘학살 전문가’가 돼 갔는지 규명했다. 1942년 7월 처음으로 유대인 학살 작전에 나서기 직전 101예비경찰대대의 지휘관은 임무를 설명하면서 감당할 자신이 없는 사람은 빠져도 좋다고 말한다. 500여명 가운데 12~13명이 나왔다. 나머지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유대인 1500여명의 머리통을 총탄으로 차례차례 날려버리는 과정에 직접 참여했다. 물론 소극적으로 임하거나, 몇명 죽이고 나서는 빠져나온 부대원도 생겼다. 20% 정도가 열외를 택한 것으로 추정됐다. 놀랍지 않은가. 10명 가운데 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자신과 아무런 원한도 없거니와 범죄자도, 적군도 아닌 민간인을 시체더미로 만드는 데 나선 것이다. 학살 작업을 거부해도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물론 묵묵히 임무를 수행한 부대원들도 첫날의 경험을 한 뒤 극심한 스트레스와 역겨움을 호소했다. 부대로 돌아와 독한 술에 만취했고, 악몽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러나 브라우닝은 말한다. “얼마 후 그들이 다시 사살 임무 앞에 서게 됐을 때 그들은 결코 ‘미쳐버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점차 효과적이고 무감각한 학살 집행자로 변해갔다.” 대부분은 학살을 무덤덤한 일상으로 받아들였으며 심지어 학살을 즐기는 사람까지 나타났다.
 
브라우닝이 발견한 요소는 ‘동조(同調)’와 ‘권위에 대한 복종’이었다. 대원들은 동료나 상관에게 ‘사나이답지 못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하며 체면을 중시했고, ‘최고위층의 명령’이라는 권위에 복종했다는 것이다. “그들이 수행하고 있는 임무에 대해 충격과 혐오감을 느끼면서도 대부분 학살을 계속했다.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 공개적으로 비동조 행위를 보이는 것은 그들 대부분의 능력 밖에 있었다. 차라리 총을 쏘는 것이 그들에게는 더 쉬웠다.”
 
브라우닝은 “학살을 저지른 그들은 같은 상황에서는 누구나 똑같이 행동했을 것이라는 주장에 의해 결코 사면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우리가 ‘이해’했을 때 상당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 브라우닝의 결론은 평범한 사람도-나를 포함해서-특수한 상황에 처하면 언제든 악마가 될 수 있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브라우닝도 “잔혹성은 개인적이고 성격적인 것이 아니라, 훨씬 더 근본적인 뿌리를 볼 때 사회적”이라는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의 말을 인용한 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의 이야기에서 엄청난 불안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101예비경찰대대 대원들이 당시의 조건 아래서 학살자가 될 수 있었다면, 오늘날 유사한 조건이 주어질 때 어떤 집단이 그렇게 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는 것이다.
 
우리는 브라우닝이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알고 있다. 나치의 홀로코스트 이후에도 우리는 세계 여러 나라 정부들이 ‘아주 평범한 사람들’을 ‘자발적인 학살 집행자’로 동원한 사례를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홀로코스트는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의 근대적 삶 속에 숨어 있는 잠재적인 위험이다”(지그문트 바우만)라는 명제는 불편하지만 진실이라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런 이해가 홀로코스트 학살자의 책임을 덜어주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학살 임무를 거부한 사람들도 소수지만 있었으니까. 이진모 옮김. 2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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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3 04:25 2010/08/23 04: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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