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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 1인시위자 강주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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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자 매일노동뉴스에 실린 '1931년 강주룡과 2011년 김진숙'이라는 글을 보고 그렇구나 싶었다. 그러고 보니 저번 기륭전자 노동자들의 철탑 고공농성 이후 더 이상 그런 고공농성이 없기를 바랬었다. 그런데 올해도 어김없이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은 이어지고... 여성노동자의 고공농성이 80년이 지난 오늘에도 계속되고 있다니... 역사는 과연 진보하는 것인지... 김진숙 동지의 고공농성을 보면서 안타깝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6년 전에 네이버블로그에 강주룡에 관한 글을 모아놓은 적이 있어 이를 담아왔다. (이 중에서 박준성의 글은 링크를 찾지 못하겠고, 퍼슨웹의 가상인터뷰글은 링크를 해놓았는데, 링크된 페이지가 사라졌다. 그래서 대신 동광에 실렸던 다른 글을 넣어놓는다. 이것이 가상인터뷰글인지도 모르겠다.) 이제 이런 고공농성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세상이 와야 하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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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강주룡과 2011년 김진숙 (매노, 구은회 기자, 2011-03-04 오전 9:17:11)
저임금·해고에 맞서 싸우는 여성노동자들
 
우리나라 최초의 고공농성자는 여성이다. 평원고무공장 노동자였던 강주룡은 1931년 5월29일 새벽 평양 을미대 지붕에 올라 회사의 임금삭감 계획에 저항했다. 당시 조선인 남성의 임금은 일본인 남성의 절반, 조선인 여성의 임금은 조선인 남성의 절반 수준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평양 선교리 평원고무공장은 임금을 깎겠다고 발표했고, 조선인 여성노동자들은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며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그러자 회사는 노동자 49명 전원을 해고했다. 일본 경찰을 투입해 한밤중에 노동자들을 공장 밖으로 몰아냈다. 자신들의 정당한 싸움을 세상에 알리겠다며 을밀대 지붕에 오른 강주룡은 “(평원고무공장의 임금삭감이) 결국은 평양의 2천300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 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려는 것입니다”라고 외쳤다.
 
80년 전 강주룡의 외침은 2011년 부산 한진중공업 85호기 지브크레인 위 김진숙 민주노총 부산본부 지도위원으로 이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이 지났지만, 고용과 노동조건을 둘러싼 노동자들의 저항은 계속되고 있다. 김 지도위원은 한진중의 정리해고 철회를 촉구하며 지난 1월6일 농성을 시작했다. 그는 81년 한진중의 전신인 대한조선공사에 입사해 용접공으로 일하다 86년 7월 해고됐다. 누구보다 해고의 아픔을 잘 알고 있는 그는 “조선소 아저씨들이 잘리는 것을 마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다”며 홀로 크레인에 올랐다. 하지만 한진중은 지난달 15일 생산직 172명을 정리해고했다.
 
지난해 회사로부터 복직합의를 받아 내고 일터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고 있는 기륭전자 여성노동자들도 기록에 남을 만한 고공농성을 벌였다. 중소 제조업체 불법파견 문제를 상징하는 기륭전자 노동자들은 2005년 7월 해고된 뒤 무려 1천895일 동안 복직투쟁을 벌였다. 2008년 5월에는 35미터 높이의 철탑에서 18일간 고공농성을 벌였고, 지난해에도 포클레인 위에 올라 농성을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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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 2005/04/15 01:00

 

카테고리를 별도로 하나 만들어 한국과 세계의 진보민중운동, 특히 진보정당사와 노동운동사에 관한 글들을 퍼오기로 하였다. 이와 관련된 글들이 많은데, 약간 정리되지 않았다는 느낌도 들었고, 또한 이에 대해 나름대로 공부를 하면서 정리하는 것도 의미있을 듯하여 별도의 카테고리를 만든 것이다. 갈수록 블로그가 무슨 데이터베이스 비스무리한 것이 된다.

 

이를 저지르게 된 이유는 우선 가깝게는 서핑을 하다가 민주노총의 기관지 [노동과 세계]에 연재되고 있는 [사진 속의 노동역사]에서 박준성 님의 전태일평전에 관한 글을 발견했는데, 다른 연재글들도 담아놓고 싶다는 욕심도 생겼다는 것이고(원래의 글이 언제 사라질지 모른다는 두려움), 둘째로 이번에 진보정당운동사와 민주노동당 강령에 대해 교육을 하면서 많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 먼 이유이다. 

 

처음으로 올리는 것은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에 관한 글이다. 강주룡은 예전에 한겨레신문에 한번 소개되었는데, 그것이 기억나는 이유는 사진 때문이다. 사진에 나오는 것처럼 한국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 1인시위를 그가 해내었던 것이다. 그는 한국 여성노동운동가 1호로 알려져 있다.

 

당시 평양의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로서 파업을 이끌던 강주룡은 단식동맹을 조직하여 공장을 점령했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강제로 내몰린 후 대성통곡하는 동무들을 보면서 이들의 용기를 다시 북돋워줄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 평원고무공장의 횡포를 하루라도 빨리 알려야 한다고 보았다. 이 파업투쟁의 패배는 평양지역 고무공장 전체 노동자들의 임금인하로 귀결될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죽을 각오를 하고 을밀대 지붕 위로 올라갔다가 어차피 죽을 바에는 평원공장의 만행을 알리고 죽자고 하여 그 사정을 외쳤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여 죽는 것이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그는 일제의 노동착취와 수탈을 고발하며 9시간 30분 동안 규탄 연설을 한 뒤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이에 그치지 않고 5월 29일 저녁부터 6월1일 새벽 2시 검속 기간이 끝나 풀려날 때까지 57시간을 “승리를 못하면 차라리 죽고 만다”며 한끼 밥도 먹지 않으면서 완강히 버텼다고 한다. 이런 투쟁 때문인지 그녀는 이듬해 8월 숨을 거두었다.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이라고 제목을 달긴 했지만, 퍼슨웹의 인터뷰처럼 여류투사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것 같다. 당시에는 체공녀라고 불렀다던가? 일제 시대에도 운동 흉내를 내다가 맛이간 여성지식인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강주룡처럼 견결하게 투쟁했던 여성 노동자들이 있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아래 글은 박준성님의 글과 퍼슨웹의 가상인터뷰 글, 그리고 한겨레신문의 기사이다. 어쩌면 가상인터뷰 글이 훨씬 더 와닿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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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평원고무공장 여성노동자 강주룡 (노동과 세계, 박준성 역사학연구소 연구원·노동자교육센터(준) 공동대표, 2003년01월23일 14:02:23)

 
최초의 '고공농성' 선뵌 치열한 삶
노동자 투쟁의 역사를 살피는 일은 과거라는 무덤 속에서 살아나오는 선배 노동자들의 처절한 외침과 거대한 함성을 듣는 것이다. "투쟁하는 노동자들과 연대하지 않고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우리들 다하지 못한 꿈을 함께 싸워 이루어라"는 날카로운 꾸짖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다.

  
1931년 5월29일 아침 평양 을밀대 지붕위에서 한 여성노동자가 우리 노동운동사 최초의 고공농성, 1인시위를 벌였다. 평양 평원고무공장노조 지도자 강주룡이었다. 주위로 몰려든 사람들 앞에서 외친 내용을 강주룡은 뒤에 잡지사 기자와 인터뷰를 할 때 이렇게 전했다.

   
"우리는 49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2천3백명 고무공장 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 것이므로 우리는 죽기로서 반대하려는 것입니다. 2천3백명 우리 동무의 살이 깎이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뚱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워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해서는 (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왔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중략)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태여 나를 여기(지붕)서 강제로 끌어낼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지붕 위에 사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곧 떨어져 죽을 뿐입니다."
 
목매 자살하려다 을밀대 지붕에 올라  

1931년 5월16일 평양 선교리에 있는 평원고무공장은 제멋대로 임금을 깎겠다고 발표하였다. 그때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의 임금은 일본인 남성노동자들의 절반 수준이었고, 여성노동자들의 임금은 조선인 남성노동자들의 절반 수준이었다. 그런 임금을 더 깎겠다는 것이다. 여성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갔다. 강주룡이 앞장섰다. 평양의 다른 12개 고무공장에서도 평원고무공장의 싸움을 지켜보면서 임금을 깎을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평원공장의 결과는 다른 고무공장에서 일하는 2천3백여 노동자의 임금에도 영향을 미칠 문제였다.
  

노동자들이 12일 동안 죽자사자 싸웠지만 회사는 요구를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5월28일, 평원노동자들은 굶어 죽기로 싸우겠다고 아사동맹을 결의하고 단식투쟁에 들어갔다. 회사는 노동자 49명 전원해고를 선언하고 한 밤중에 일본경찰을 끌어들여 공장 밖으로 쫓아냈다.
  

선배이자 간부였던 강주룡은 죽음으로 평원공장의 횡포와 자신들의 싸움을 세상에 알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한밤중에 광목 한 필을 사서 을밀대 근처로 올라갔다. 벚나무 가지에 광목을 걸어놓고 목을 매려다 '이대로 죽는다면 사람들이 저 여자가 왜 죽었는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죽더라도 우리의 싸움을 알려야 할텐데...'하며 궁리를 했다. 어둠 저편으로 을밀대가 어슴푸레 눈에 들어왔다. 광목 한 끝에 묵직한 돌을 묶어서 지붕 건너편으로 던져 넘겼다. 한쪽을 기둥에 묶고 밧줄처럼 타고 지붕 위로 올라갔다.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물러서지는 않겠다고 마음을 다지면서 강주룡은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들의 처지와 평원고무공장 노동자들이 이렇게 싸울 수밖에 없는 이유를 밝히면서 외치고 외쳤다.
  

평양서로 끌려간 강주룡은 29일 저녁부터 6월1일 새벽 2시 검속기간이 끝나 풀려날 때까지 한끼 밥도 먹지 않으면서 완강히 버텼다. 쉴 틈도 없이 바로 선교리 파업본부로 돌아가 동료들을 격려하고 파업을 지도하였다.
 
감옥서 얻은 병으로 31년 꽃다운 삶 마감

그 즈음 강주룡은 평양에 있는 다른 노조간부, 노동운동 활동가들과 함께 노동자 정치조직에 참여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자들이 '적색노조'라고 불렀던 1930년대 '혁명적 노동조합운동'이었다. 6월9일, 노동자 출신 강주룡은 '평양 최초 최고의 적색노동조합사건'에 연루되어 또 다시 체포되었다.

    
평양지방법원 예심에 회부되어 1년 동안 감옥에서 비타협의 옥중투쟁을 벌이던 강주룡은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을 얻었다. 1932년 6월7일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잠시 나아지는 듯했으나 병은 다시 점점 깊어갔다. 그러나 병원에 입원하여 안정되게 치료를 받을 형편이 못되었다. 동료들의 처지도 어렵고 가난하긴 마찬가지였다. 두 달 동안 앓아 누웠던 강주룡은 1932년 8월13일 오후 3시반, 평양 서성리 빈민굴 68-28호에서 한 많은 세상, 그러나 치열하게 살았던 31년 삶을 마감했다. 8월15일 남녀 동지 1백명이 모여 장례를 치르고 평양 서성대 묘지에 묻었다.

    
강주룡의 삶과 투쟁은 대중들 속에서 앞장서 죽기로 싸우겠다는 지도자의 꿋꿋한 모습과 명예롭고 가치 있는 삶이 무엇인지 보여주었다. 그의 외침은 지금도 노동자들의 투쟁이 자신의 이익과 요구를 해결하려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준다. 지지와 연대가 왜 필요한지 가르쳐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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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기억되지만 망각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삐딱한 자들에게 역사는 가혹하다.
여기, 망각된 과거로부터 하나의 목소리를 불러낸다.
때는 1931년 5월 28일. 평양의 을밀대에 한 여자가 올라갔다.
을밀대는 평양 금수산 마루에 있는 대와 그 위에 세워진 정자인데,
지붕까지 높이는 40척, 즉 12미터이다.
그 지붕 위에서 장장 9시간 반 동안 농성을 해서 화제가 된
그녀의 이름은 강주룡!
그녀는 지붕 위에서 머물렀다고 공중에 체류한 여자,
'체공녀'라는 별명이 붙었다. 지금으로 치면 남대문 지붕 위에 올라간 격.
여자라는 이유로, 노동자라는 이유로 이중의 굴레를
쓰고 있던 여성노동자를 만나본다.

 
[을밀대(乙密臺)의 체공녀(滯空女)-여류 투사 강주룡(姜周龍) 회견기](<동광(東光)>, 1931. 7.에서)
<동광> 1931년 7월호 기사
 
평양 명승 을밀대 옥상에 체공녀가 돌현하엿다.
평원(平元) 고무직공의 동맹파업이 이래서 더 유명하여젓거니와 작년 노동쟁의의 신전술을 보여준 일본 연돌남(煙突男)과 비하야 좋은 대조를 이루는 에피소드라 할  것이다.(중략)
 
「우리는 사십구 명 우리 파업단의 임금감하를 크게 여기지는 않습니다. 이것이 결국은 평양의 이천삼백 명 고무직공의 임금감하의 원인이 될것임으로 우리는 죽기로써 반대하랴는 것입니다. 이천삼백 명 우리동무의 살이 깍기지 않기 위하여 내 한 몸덩이가 죽는 것은 아깝지 않습니다.
내가 배와서 아는 것 중에 대중을 위하야서는(중략) 명예스러운 일이라는 것이 가장 큰 지식입니다. 이래서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집웅우에 올라 왓습니다. 나는 평원고무사장이 이 앞에 와서 임금감하의 선언을 취소하기까지는 결코 내려가지 않겟습니다.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는 자본가의 (중략)하는 노동대중을 대표하야 죽음을 명예로 알뿐입니다.
그러하고 여러분, 구타야 나를 여기서(집웅) 강제로 끄러내릴 생각은 마십시오. 누구든지 이 집웅우에 사닥다리를 대놓기만 하면 나는 곳 떠러져 죽을 뿐입니다.」
 
이것은 강주룡이 5월 28일 밤 12시 을밀대 집웅우에서 밤을 밝히고 이튿날 새벽 산보왔다가 이 희한한 광경을 보고 뫃여든 백여명 산보객 앞에서 한 일장 연설이다. 이 연설을 보아서 체공녀 강주룡의 계급의식의 수준을 엿볼 수 잇다. 이 여자는 어떤 사람인가. 어떤 생애를 하며 어떠한 환경의 지배를 받앗나? 이것이 편집자로부터 내게 발한 명령이다.
 
6월 7일. 부외(府外) 선교리(船橋里) 평원 고무직공 파업단 본부로 강주룡여사를 방문하엿다. 유달리 안광을 발하는 작은 눈, 매섭게 생긴 코, 그리고 상상이상의 달변은 첫 인상으로 수월치않은 여자라는 것이엇다.
 
그러나 그보다도 그의 과거 생애가 듣는 나를 놀라게 하엿다. 오늘 그의 가진 의식과 남자이상의 활발한 성격이 우연한 바가 아님을 알수잇다. 이제 잠간 나는 붓을 돌리어 그의 입에서 나오는 대로의 그의 과거 생의 독백을 속기한다.
 
고단했던 간도길 - 결혼에서 사별, 노동자가 되기까지
나의 고향은 평북 강계(江界)입니다. 열네살까지는 집안이 걱정없이 지냇으나 아버지의 실패로 가산을 탕진하야 내나히 열네살쩍예 서간도로 갓습니다. 거긔서 농사하면서 칠년동안 살앗는데 스므살 나든 해에 통화현에 잇는 최전빈(崔全斌)이라는 이에게 시집갓습니다. 남편은 그때 겨우 15세의 귀여운 도련님이엇습니다. 나는 남편의 사랑을 받았다기보다도 남편을 사랑하엿습니다. 첫눈에 아조 귀여운 사람 사랑스런 사람이라는 인상을 얻엇습니다. 부부의 의도 퍽 좋앗습니다. 동리가 다 부러워 하엿답니다.
 
시집간 지 1년후부터 우리 부부의 생애에는 큰 변동이 생겻습니다. 그것은 남편이 00단 수령 白狂雲(지금은 그이도 죽엇습니다)씨의 제이중대에 편입된 것입니다. 물론 나도 남편과 같이 풍찬노숙하며 00단을 따라다녓습니다.
 
6,7개월 00단을 따라다녓는데 나종에는 「거치정거려서 귀찮으니 집에가잇으라」는 남편의 명령을 받고 나는 본가에 도라와 잇엇습니다.
 
남편이 백광운씨의 제2중대에 편입된지 1년만이엇습니다. 그 때는 내가 본가에 도라온지 5~6개월후이엇는데 우리 본가에서 백여리나 되는 부락에서 남편의 병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갓슬때는 벌서 틀렷습디다. 손가락을 잘라서 피를 먹엿더니 좀 정신을차렷섯으나 그날밤으로 죽엇습니다. 밤에는 단지 나혼자 그를 간호하고 잇엇는데 잠간새에 숨이 끈허젓습니다. 죽엇는지 살앗는지 몰라서 바늘로 살을 찔너보고야 아조 죽은줄 알앗스나 기위(이미) 죽은 사람이라 시신옆에서 한잠 자고 이튿날 아츰 병문안왓든 사람들의 손으로 무첫습니다.
 
그리고 나는 시집으로 도라갓섯습니다. 좀 창피한 이야기지만은 시집에서는 나를 의심하야 남편 죽인년이라고 고생햇습니다. 하도 원통하고 또 돌봐주는 이도 없서서 1주일을 꼽박굴멋습니다.(그런데 이번 사흘쯤 단식이야 쉽지않아요?)
 
서간도서 귀국한 것은 내가 스물네살 되든 해엿습니다. 처음에는 사리원서 1년쯤 지냇는데 부모와 어린동생을 다리고 내가 밥버리를 하면서 아들노릇을 하엿습니다. 그러다가 평양온 것이 벌서 오년째 됩니다. 처음부터 고무직공으로 밥버리를 햇지요. 고무직공조합에는 작년파업이 이러나기 바로전에 입회햇습니다.
 
을밀대에서
을밀대에 올나갓든 얘기요? 그야 다 아시지 않아요? 5월 29일밤 우리는 전술을 고치어 단식동맹을 조직하고서 공장을 사수하기로 하고 공장을 점령하엿습니다.
 
그러나 밤 한시나 되니까 공장주는 경관에 의뢰하야 우리들을 공장밖으로 내몰앗습니다. 동무들이 대성통곡하면서 쫓겨나올때 나는 차라리 이 목숨을 끊어서 세상사람에게 평원공장의 횡포를 호소할 맘을 먹엇습니다. 그래서 나는 공장에서 쫓겨나오는대로 거리에서 일목(日木) 한 필을 사가지고 을밀대로 올라갓습니다. 그러나 「사구라」 나무가지에다 일목을 거러놓고새각하니 내가 이대로 죽으면 젊은 과부년이 또 무슨짓을 하다가 세상이 부끄러워 죽엇나하는 오해를 받을뜻하여 기왕이면 을밀대 집웅우에 올나갓다가 아츰에 사람이 모이면 실컨 평원공장의 푕포나 호소하고 시원히 죽자고 맘을 돌렷습니다.
 
그러나 을밀대 집웅우에 올라갈 길이 망연하엿습니다. 궁리끝에 일목 한끝을 올가미를 지어서 집웅마루에 걸어보랴고 애썻으나 실패하엿습니다. 마즈막의 묘책에 나는 성공하엿습니다. 일목 한끝에 무거운 돌을 달아서 지붕 건너편으로 넘겨놓고 줄을 다려보앗더니 괜찮앗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줄에 매달녀 「그네」를 뛰어서 안전함을 시험한 후에 이 줄을 타고 집웅으로 올라갓습니다.
 
그때가 아마 새벽 두시는 되여슬 것입니다. 사면이 고요한데 기생을 끼고 산보하는 잡놈을 두개나 보앗습니다. 아즉 날이 밝기는 멀었는지라 일목을 걷어 올려몸을 가리고 한잠 잣습니다. 동이 트기 시작하면서 내가 요란한 소리에 놀라 깬 때는 벌서(중략)
 
그는 벌서 한개 로동자가 아니라 사십구명의 로동자를 거느리고 투쟁의 선두에 나선 「리-더」의 한사람이다.(하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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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노동운동가 1호 ‘강주룡’ (인터넷 한겨레 편집 2002.01.14(월) 18:23, 박정애/여성사연구모임 길밖세상)
    

1931년 5월29일, 아침부터 평양 을밀대 아래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을밀대 지붕 위에는 한 여자가 무언가 열심히 호소를 하고 있었다. 바로 평원고무공장의 노동자 강주룡, 임금인하를 반대하며 파업을 벌였다가 강제로 쫓겨난 참이였다. 이대로 지고 만다면 전염병이 퍼지듯 전체 고무직공의 임금인하가 시작될 것이 뻔하다고 목이 터져라 외치고 또 외쳤다.
 
1901년 평북 강계에서 태어난 강주룡은 서간도에 가서 살다가 20살 되던 해에 5살 연하의 최전빈과 결혼했다. “남편에게 사랑 받았다기보다는 남편을 사랑했다”고 유쾌하게 회상하는 모습은 그의 열정적인 성품을 보여준다. 함께 독립단에 들어가 활동하던 남편이 병을 얻어 죽자, 시집에서 강주룡을 살인자라고 고발하는 바람에 유치장에 갇히는 수모도 겪는다. 24살 때 귀국, 평양에서 고무직공을 하면서 부모와 어린 동생을 먹여 살렸다고 한다.

  

당시 고무공장은 방직공장과 더불어 식민지 공업화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발달하게 된 분야였다. 이들 공장의 눈부신 성장은 여성 노동력에 기반한 것이었는데, 자본가들은 `값싸고 순종적인' 여공들을 통해 최대한 이윤을 확보하려 했다. 턱없이 낮은 임금에 장시간 노동은 기본이었고, 남자 감독관의 욕설과 구타, 성희롱은 끝이 없었다. 1929년 공황이 닥쳐오자 상황은 더 나빠졌다. 공장주들은 `산업합리화'를 내세워 노동자에 대한 임금인하, 정리해고, 노동시간 연장 따위를 감행하였다. 참다 못한 평양의 노동자들은 1930년 대대적인 총파업을 벌였고, 그 여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평원고무공장 공장주는 다시 한번 임금인하를 시도했다.

  

강주룡의 고공농성으로 파업단은 새로운 힘을 얻는다. 사람들은 강주룡을 `여류투사 강여사', `평양의 히로인'이라고 부르면서 뜨거운 관심과 호응을 보냈고, 파업단은 전열을 가다듬어 끝내 임금인하를 막아냈다. 그 과정에서 강주룡 등 20명은 해고를 당하는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리고 다음해 8월, `극심한 신경쇠약과 소화불량'으로 고통받던 강주룡은 평양 서성리 빈민굴에서 숨을 거둔다.

    

역사는 강주룡을 한국 최초의 여성 노동운동가로 기록한다. 그러나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가 여공들의 파업부터 시작된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그의 발견은 좀 늦은 듯 하다. 이미 1923년 경성고무공장 여공들의 파업을 시작으로 식민지시대 노동운동의 물꼬를 튼 여성 노동자들은 때마다 파업 현장을 지키면서 전체 노동운동의 지평을 넓혀나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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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04 14:28 2011/03/04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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