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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서평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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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와 세상]재벌 개혁과 사장 직선제 (경향, 강수돌 | 고려대 교수·경영학, 2012-07-11 21:13:31)
오는 12월 대통령 선거에서는 아무래도 경제민주화 이슈가 가장 큰 화두가 될 것 같다. 그것은 경제민주화가 ‘민생 경제’의 핵심을 이루기 때문이다. 민생 경제란 한마디로 ‘살림살이’ 경제다. 기존의 돈벌이 경제 논리와 다른 논리 위에 선다는 말이다.
보수 기득권층을 대변하는 새누리당은 경제민주화 이슈를 선점한 듯 보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그 내용이 ‘무늬만’ 경제민주화일 가능성이 높다. 일례로, 최근 뉴스에 많이 등장한 ‘일감 몰아주기 근절’ 등 불공정 행위 규제를 통한 공정 거래 확립은 경제민주화가 아니라 시장 경제 질서 강화에 불과하다. 이것은 마치 사냥할 때 정작 목표물은 겨냥하지 않고 덤불 언저리만 때리는 꼴이다.
 중산층이나 서민층을 대변한다는 민주당은 그보다 한 발 더 나아간다. ‘재벌 개혁’을 초점으로 하여 경제력 집중 완화, 지배구조 개혁을 꾀하기 때문이다. 일례로, 최근 발의된 9개 법률 개정안에는 재벌 문제의 핵심 중 하나인 대기업 순환출자를 금지하고 출자총액을 제한하는 제도를 다시 도입하기, 금산 분리 강화와 재벌 범죄의 사면 제한 등이 포함되어 있다.
이에 대해 새누리당은 민주당더러 재벌 개혁이 아니라 재벌 해체를 지향한다고 비난하고, 민주당은 새누리당에 대해 알맹이가 없이 말로만 경제민주화를 외친다고 비난했다. 내가 볼 때, 민주당의 여러 정책이 추진된다고 해서 재벌이 해체될 리 만무하고 새누리당의 시장 질서 확립이 된다고 해서 경제민주화가 될 리 만무하다. 참된 경제민주화는 기득권을 가진 양당 자체가 자신의 기득권을 온전히 버림으로써만 실현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대 정당이 기득권을 버린다는 것은 단순히 두 정당만 그렇게 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암묵적으로 전제하고 있는 모든 기득권 구조 자체를 허물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결국, 참된 경제민주화를 이루려면 거대 양당부터가 스스로의 기득권에 대해 포기할 각오까지 하면서 사회 전체가 묵인하고 있는 기득권 구조 자체를 근원적으로 수술해야 한다.
일례로 나는 김상봉 교수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제안된, 재벌을 비롯한 주식회사 사장을 노동자가 선출하는 미래를 상상한다. 봉건주의 시대에 왕은 하늘의 뜻이나 선친의 뜻에 의해 군림했다. 민주주의 시대라면 당연히 온 백성이 대통령을 뽑는다. 이런 맥락에서 경제민주화 시대엔 주식회사 같은 기업체나 학교 같은 곳에서 일반 직원이나 노동자, 평교사가 그 대표를 뽑아야 한다. 그래야 ‘민주주의는 공장 문 앞에서 멈춘다’는 말도 사라진다. 대부분의 노동자나 가족을 떨게 하는 고용 불안 또는 정리 해고 문제, 비정규직, 성차별이나 학력 차별도 사라질 것이다. 물론 과연 그 노동자나 교사들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도 중요하다. 따라서 경제민주화가 완성되려면 ‘보통’ 사람들의 철학이 중요하다. 어릴 때부터 삶에 대해 어떤 태도를 배우는가가 중요한 셈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인문학적 깊이가 있는 학습이 필요한 까닭이다. 게다가 나 혼자만 깨친다고 될 일도 아니고 친구나 이웃들과 소통하고 토론하며 공론을 만들어가야 한다. 소모임이나 네트워크가 중요해지는 까닭이다.
한편, 최근에 국립대 네트워크 구축을 통한 서울대 학부제 폐지안이 부각되기도 했지만, 실은 이것도 기득권에 대한 근본적 변화를 꾀하는 것은 아니다. 제2의 서울대가 분명히 나올 것이고 이미 몇몇 대학들이 속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태의 핵심은 일류대 출신들이 정치경제적 기득권을 장악한 현실이다. 이를 허물기 위해서는 기업이나 학교 등에서 사람을 구할 때 출신 학교나 학위, 지역을 물을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할 수 있는지 보아야 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가 개인 행복을 넘어 사회 행복에 기여할 것인가, 학벌이나 직업에 무관하게 비슷한 대접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결국, 고교평등화를 넘어 대학평등화, 또 이를 넘어 직업평등화가 되면서도 교장 및 사장 직선제까지 이룰 때 비로소 사람들은 신바람이 날 것이고 경제민주화도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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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은 3대 세습'보다 더 괴이한 '이재용 3대 세습'! (프레시안, 최종덕 상지대학교 교수, 2012-05-18 오후 5:17:30)
[철학자의 서재]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세속화된 형이상학

철학은 형이상학을 품기도 하며 논리학으로 드러나기도 하며 윤리학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그 무엇이건 간에 철학은 세계와 우주를 조우하며 동시에 인간에 대한 질문과 맞닿아 있어야 한다. 인간을 묻는 질문이 없다면, 철학이 만나는 세계란 공허하고 유명무실한 존재일 뿐이다. 인간에 대한 질문은 자아 내부를 깊숙이 비추는 반성력과 자아가 세상을 보는 비판력에서 생긴다.
인간의 토대 위에 구축된 세계 인식을 나는 '세속화된 형이상학'이라고 부른다. 공허하거나 순수 논리적이거나 인간 없는 형이상학, 즉, '신성화된 형이상학'과 대비되는 삶의 철학이라고 보면 된다. 철학은 신성화된 형이상학을 극복해야 하지만, 형이상학 없는 철학은 자칫 유사 과학 수준에 머물 수 있다.
나의 철학 공부는 신성화된 형이상학 대신에 세속화된 형이상학을 주요한 커리큘럼으로 하고 있다. 신성화된 형이상학이란 인간이 배제되어서, 색깔이 없으며 차가우며 건조한 형이상학이다. 반면 세속화된 형이상학이란 인간의 시선 안으로 투영된 형이상학을 뜻한다. 어떤 때는 인간의 역사와 사회의 구조가 묻어난 존재의 서사시처럼 비춰질 수도 있다.
이렇게 세속화된 형이상학 안에는 인간의 실존과 세계의 실재가 뒤섞여 있다. 세속화된 형이상학은 혼돈과 중첩, 비규정성과 불확실성이 스며들어 있다. 마치 논리학처럼 질서정연한 신성화된 형이상학 공부는 수학자나 신학자에게 맡기고, 나는 혼돈의 세속 형이상학을 공부하려 한다. 그런 나의 공부 커리큘럼에는 김상봉의 책들도 목록으로 있다. 
김상봉의 책에는 세계 형이상학과 인간 윤리학이 날줄과 씨줄처럼 치밀한 구조로 짜여 있다. 특히 최근에 출판된 그의 책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에서는 거대한 관습과 문명적 오류를 붕괴시킬 만한 세속적 형이상학의 범례를 제시하고 있다. 거대한 자본의 우상을 깨고 삶의 윤리를 재구축하려는 범례이다. 형이상학과 현실학의 페이지로 구성된 철학적 선언서이기도 하다.
김상봉의 선언 명제는 한국형 자본주의 사회에서 아무 의심 없이 통용되는 주주 경영 구조의 허구와 모순을 밝히는 철학적 프로토콜이다. 주식회사는 주인이 있을 수 없으며, 있어서도 안 된다는 주장이다. 사회가 진보하기 위하여 재벌 기업의 주식회사는 그것이 크면 클수록 폴리스 민주제 즉 공화제처럼 되어야 한다는 설명을 자세히 해주고 있다.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기 때문에 그 누구든 주식회사의 경영자가 될 수 있다는 입장은 단순한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경제사적이며 철학사적인 근거 위에 배선된 분명한 사실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노동자가 주식회사의 경영자로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했다. 이런 주장이 뭇사람들에게 큰 당혹감을 줄 수 있지만, 실은 아무도 말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 사실 명제를 언급했을 뿐이다. 김상봉은 그런 진실을 조금이라도 교조적으로 말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철저한 역사적 근거와 철학적 논증을 통하여 주주 자본주의 사회의 허구를 설득시켰다. 그래서 이 책은 정말 읽을 만했다. 정말 그런지 하나하나 책 내용을 따져보겠다.
국가 위에 재벌
국가 권력보다 더 커진 한국의 재벌 기업들은 이미 기업 국가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다. 저자는 기업 국가의 무수한 부패들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국가가 기업에 동화되면 일어나는 전형적인 변형은 민주주의가 후퇴하고 독재적이고 권위적인 문화가 확산되는 데 있다. 여기서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부분을 지적했다. 즉, 자본주의 경제 제도와 자유 민주주의는 동전의 양면이라는 오판들이다.
한국의 재벌 기업 문화는 그들의 이익 구조를 위하여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심각하게 훼손시키고 있다는 점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26쪽). 재벌 기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그런 기업들이 있어서 대한민국이 이렇게 잘 살게 된 것이 아니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재벌 기업의 이윤 행위는 공적으로 국민들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사적으로 그들만의 개인 이익을 위한 착취 수준이라는 점을 알아둘 필요가 있다.
너무나 당연한 논리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그런 모순을 덮어버리곤 한다. 재벌이 우리를 잘 살게 해줄 것이라는 마약 같은 믿음을 조작하고 있다. 이명박이 대통령 되면 우리 모두 재벌처럼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마약의 환상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강남 부자들이 대한민국의 부를 상승시킬 것이라는 믿음이 횡행하고 있다. 빈부격차는 더 많이 벌어지고 있는 당면한 현실에 많은 사람들이 기꺼이 눈감아 버린다. 재벌 기업에게 더 많은 돈을 몰아주면 끝내는 우리들 대중들에게도 혜택에 돌아올 것이라는 막연한 믿음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믿음은 재벌과 그 공조자인 정부 공무원이 만들어낸 가짜 유토피아일 뿐이다.
나는 이런 희망을 '의존적 희망'이라고 말한다. '주체적 희망' 반대편에 놓인 허망한 믿음의 결과이다. 앞서 말한 기만의 믿음, 즉 부자들에게 돈을 우선적으로 몰아주면 넘쳐나고 난 이후, 끝내는 대중들에게 떡고물이 똑똑(trickle) 떨어질 것이라는 믿음은 전형적인 트릭클다운(trickle-down) 현상의 귀결이다. 트릭클다운 정책은 미국에서 아버지 부시 대통령이 1990년 전후로 시행했던 부자 혜택 정책이다. 한국은 이런 부자 혜택 경제 정책을 미국 이상으로 노골적으로 시행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부자들에게 더 큰 파이의 혜택을 돌리고 난 후 그 파이 아래로 똑똑 떨어지는 떡고물조차 서민들에게 돌아가지 않는다. 재벌 2세들이 그 남은 떡고물까지 깡그리 흡수해 버리기 때문이다. 재벌 2세, 3세에게 기업을 불법적으로 물려주는 현실을 법관들까지 모른 척하고 있으며 관련 상급 공무원들은 한 발 더 나가 재벌 비위 상하지 않도록 미리 알아서 기고 있다.
자본과 기술면에서 세계 최강을 자랑하는 삼성전자의 대표이사라는 사람이 자본 독재자 이건희에게는 물론이거니와 그 아들에게도 벌벌 기는 장면을 아마 유럽 기업인들이 보았다면 무슨 영화 찍고 있냐는 신기한 생각으로 물어볼 것이다. 가부장적인 권위에 독재자의 폭압성이 더해져서 주주법상으로 아무 직함도 없는 이건희에게 감히 고개조차 들지 못한다. 그 아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김정일에 이어 김정은 3대로 이어지는 북한 권력 세습을 보고 있으면 한숨이 푹푹 나오거늘, 소위 자유 민주주의라는 국가에서 재벌 기업의 세습 권력은 북한 정권 이상으로 더더욱 괴이한 모습이다. 전 세계 자본주의 국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한국형 독재 권력이려니 하고 쉽게 생각하려 해도, 여전히 가슴이 더 깊게 패이고 만다. 김상봉은 그의 책에서 이런 괴이함을 재미나게 표현했다. "북한에서는 국가 위에 당이 있다면 남한에서는 국가 위에 재벌 기업이 있는 것이 다를 뿐이다." (225쪽)
경영자가 이사회를 주물럭거리는 것이 한국 주식회사의 기현상이다. 이사회 위에 경영진이 있고, 경영진 위에 절대권력 회장님이 있다. 그런 재벌 기업의 규모는 국가 예산을 넘어설 정도로 방대해졌지만 그 지배 방식은 동네 식당을 운영하는 수준이다. 그들의 세습 권력은 두말할 것도 없이 재벌이라는 조직 자체가 독재의 잔존이라는 점을 김상봉은 잘 설명해주고 있다. 독일 같은 나라에서는 재벌이 없다는 말이 너무나 당연하여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재벌 떨거지들, 맹목적 재벌 자본 추종자들이 우러러 받들어 모시는 미국에도 재벌 개념은 없다. 최근 무섭게 융기하는 친일 세력들이 좋아하는 일본에서조차도 재벌 조직이 없다는 것을 저자는 상세하게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독재 세습 한국형 재벌은 재벌 기업식 주주 자본이 현대 자본주의의 주류라고 서민을 속이고 있다. 미국 기업 사회 자본가들은 이미 미국 사회에서 발생한 독재적 주식회사의 전횡과 몰락을 많이 보아왔다. 2001년 전 세계 경제를 혼란에 빠뜨린 "엔론 사태가 경영자 지배의 극단이라면 포드의 경우는 소유주 지배의 극단이다. 그리고 주주 자본주의는 이 두 극단 사이에서 언제나 동요할 수밖에 없다."(204쪽)
책에 쓰인 대로 이재용은 1994년 아버지 이건희로부터 61억 원을 물려받았다. 증여세를 납부하고 나니 44억 원이 남았다고 한다. 당시 매스컴은 소박한 상속이라고 칭찬했다. 그러나 이재용의 돈 44억 원이 불과 15년 만에 2조2000억 원이 되었다. 더군다나 셀 수 없을 정도의 많은 계열사 기업의 실질적인 주인이 되었다. 전 지구적 차원의 불법적 행위가 일어났지만, 대한민국 법원이 내린 그에 대한 법정 판결은 결국 그 부자에게 면죄부를 준 결과에 지나지 않았다. 저자가 쓴 다른 한 구절을 보자.
"예를 들자면, 정몽구 회장은 2006년 1000억 원의 비자금을 조성해 빼돌린 협의로 구속 기소당해 보석으로 풀려나기까지 두 달 가량 감옥 체험을 해야 했다. 미국이라면 정 회장은 어쩌면 아직도 감옥에 있을 수도 있었겠지만, 이 나라에서는 100만 원을 훔쳤다는 죄로 감옥에서 썩는 사람들은 많아도 1000억 원을 훔쳤다고 징역을 살지는 않는다. 그리고 정몽구 회장도 여전히 회장으로 건재하고 있다." (256쪽)
노동자 경영권
그래서 김상봉은 재벌 기업의 지배 구조를 민주적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너무 당연한 말이다. 여기서 민주적이라는 뜻의 실속은 그 구성원들이 공동체 의사 결정에 참여하는 데 있다. 기존 방식대로라면 참여하는 구성원이 주주나 경영자에 제한되었지만 그런 제한이 바로 주식회사법을 어기고 있는 셈이다.
김상봉은 이제라도 노동자 대표가 참여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증명한다. 노동자가 경영자도 될 수 있고 그런 노동자는 마치 기업이라는 공화국의 시민인 셈이다. 이런 방식이 바로 김상봉이 전개하는 폴리스로서의 기업이다. 이런 주장에 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난리법석을 떨며 자본의 생리를 조금도 모르고 까부는 말이라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원시 공동체 같은 헛소리를 하고 있냐고 핀잔을 하기도 한다. 현대 사회는 국가 간 치열한 경쟁력의 전쟁터와 같은 곳인데 웬 꿈같은 로맨스에 빠져 있냐고 극단적으로 몰아붙이는 사람들도 있다. 재벌 기업을 하는 사람들, 많은 경제학자들, 정부 관료들이 바로 그런 비난과 조롱을 퍼붓는 사람들이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진보적이라는 지식인조차 기업 공화제 구조를 실현 불가능한 이상주의라고 일축하면서 그런 비난에 적극적으로 가세한다.
저자 김상봉이 그런 비난을 모르는 채 이 책을 쓴 것은 아니다. 노동자 경영권으로 압축된 그의 주장이 낭만적 이상이 아니라 아주 구체적으로 실현 가능하다는 것을 상세히 쓰고 있다. 기업이 이윤을 추구하기 위하여 생겨났다는 기업의 본능적 생리에 대하여 김상봉이 모르는 바도 아니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그런 자본의 생리를 무시했다면 그는 기존의 낡은 유토피아 경제학자와 별 다를 바가 없었을 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의 탄생은 그들이 투자한 모든 자산보다 훨씬 더 많은 잉여 가치를 얻어내는 데 있다는 점을 저자는 절실하게 알고 있다. 그런 절실한 인식이 있었기에 그는 우리들의 행복한 공동체를 구현하려는 의지와 설계를 분명히 제시할 수 있었다. 철학사의 관점에서, 경제 사상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유럽이나 일본의 가까운 실증적 사례들을 통하여 김상봉은 노동자 경영권의 실현이 가능한 이유를 소상하게 보여 준다.
헤겔에서 좀바르트에 이어가면서 철학사와 경제사를 결합하여 소유 개념을 설명하는 그의 분석력이 돋보인다. 소유에 대한 헤겔의 개념이 너무 추상적이라는 오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그는 주식회사에 대한 법적인 보기를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소유권이란 쉽게 말해서 (1) 나만 가질 수 있고 (2) 내 마음대로 늘리거나 (3)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 그런데 주식회사의 주주는 자기가 소유한 주주의 한도 안에서만 주주의 배당과 손실을 받을 뿐, 회사의 경영에 대하여 책임질 필요가 없다. 누구나 다 알고 있듯이 말이다.
김상봉은 다양한 현실 사례를 들어 주식 기업의 소유가 불가능함을 지적하고 있다. 그 중의 하나, 2008년 <파이낸셜타임스>가 선정한 시가 총액 1위 기업 엑손모빌을 사례로 들어 주식회사가 소유 혹은 지배의 대상이 될 수 없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161쪽).
"주주의 몫은 배당금이며, 노동자의 몫은 임금이고, 채권자의 몫은 원금과 이자이며, 소비자나 계약자의 몫은 계약에 따라 지불한 금액에 상응하는 상품이나 서비스이다. 하지만 경영권은 누구의 몫도 아니다. 그런 까닭에 주식회사에서 누가 경영을 맡느냐 하는 것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문제로서 원칙적으로 주식회사의 본질적 특성으로부터 연역되지 않는 문제이다. 아니 주식회사의 경영권이 누구에게 속하느냐 하는 것이 미리 결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야말로 주식회사의 고유한 특성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183쪽)
노동자 경영권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별 문제 없는지를 따져 보아야 한다. 앞서 말했듯이 진보 지식인조차 노동자 경영권의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주식회사에 주인이 없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고 노동자가 그 경영권을 가져야 한다는 분명한 명분이 있겠느냐는 자조적 의심 때문에 그렇다.
김상봉은 이에 대하여 책의 마지막 장을 할애하고 있다. 노동자는 기업으로부터 받는 임금이 그들의 최후 생활 보장에 대한 경제적 권리이기 때문에 기업에 대하여 진정으로 책임감을 갖는 주체는 바로 노동자이다. 이러한 김상봉의 주장에 대하여 나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주식회사의 주주는 책임을 지지 않으며, 경영자는 원칙적으로 경영을 잘하여 수익을 많이 남기라는 주주들 대표에 의해 임명된 사람이므로 전적인 책임을 질 수도 없다. 주주의 권한을 넘어선 재벌은 공적 책임보다는 그들만의 사적 잉여금을 챙겨가는 데에 여념이 없다. 그래서 노동자의 책임은 소중하며, 노동자가 기업 경영에 참여하는 것이 당위적이다.
노동자 경영권에 대한 실질적인 사례도 많다. 독일이나 일본에서 노동자 경영권의 관행과 제도가 있다는 것을 저자는 본보기로 보여주었다. 그리고 경제사적인 측면에서 그 정당성을 증명해 보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우리들의 관습적 사유를 깨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 어찌 감히 노동자 경영권을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2) 기업의 창업자가 있는데, 어찌 감히 그들의 재산을 간섭할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순응되어진 두려움에 우리는 휩싸여 있다. 그런 두려움의 관습으로부터 벗어나는 일이 지식 학습보다 더 우선하며 더 중요하다.
철학이 필요한 이유
여기서 철학이 요청된다. 이 책은 겉보기에 노동자 경영권이라는 현실 경제 주장을 담은 책 같지만, 실은 자본 권력 즉 돈의 힘에 순치된 우리의 자화상을 내부로부터 깨부수려는 철학적 선언서라고 나는 생각한다. 마치 코페르니쿠스의 혁명처럼 말이다. 코페르니쿠스 혁명이라는 것도 후대로 지나고 보니 혁명이라는 칭송을 받게 된 것일 뿐이다. 남들 다 천체가 돈다고 할 때 지구가 돈다고 했으니 당대에 코페르니쿠스는 정말 비난과 조롱을 받았었겠지.
남들 다 하는 대로 나도 쫓아가는 것이 뭐가 문젤까? 한때 유행했던 할리우드 영화 <매트릭스>에서는 누구에 의해 프로그램되어진 세상 속에서 가짜의 세계, 허구의 세계, 조작된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짜 세계에서 안주하는 것이 행복하다고 여겨질 수 있을지 의심을 품고 되묻는 것 그것이 바로 철학이다. 박사 학위에 교수라는 최고의 철학 전공 지식인이라도 그 조작된 세계에 안주하거나 조작에 가담했다면 그는 철학과 동떨어진 사람에 지나지 않는다.
노동자 김진숙이 크레인에 올라 자본 권력의 허구에 항거했을 때 김진숙으로부터 우리는 가장 철학적인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의심을 하지 않고 주어진 틀에 안주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순치되었다. 조금만 참으면 희망찬 미래가 올 것이라는 감언이설에 빠져 가짜의 현실을 그냥 인정하고 마는 허구의 믿음들이 넘쳐난다. 그런 믿음들은 일종의 '의존적 믿음'일 뿐이다. 우리에게는 '의존적 믿음'이 아니라 '주체적 믿음'이 요청된다. 그런 '주체적 믿음'을 실현하려는 의지가 바로 철학이다.
대학 법인은 공적 법인인데도 불구하고 많은 대학 이사장들은 대학의 사적 주인을 당당하게 자처하고 있다. 또 대학 재벌 권력의 비리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 정부는 그들을 주인으로 모시고 있다. 노동자와 국민을 무시한 채 국민의 세금으로 세워진 고속철도나 국제공항도 그들 마음대로 주인을 기업에게 넘긴다고 한다. 4대강을 그네들 개인 관광지처럼 결정해서 억지 주인 행세하며 자연으로부터 빼앗고 우리 모두의 것으로부터 빼앗아 토건 정부답게 그들 마음대로 파헤치고 있다. 보수 신문의 비호 아래 제주도 강정 마을을 빼앗아 해군 기지를 세워서 미군에게 안주인을 넘겨주고 있다. 그네들끼리 마음대로 주인을 만들거나 바꿔치기에 능숙해졌다. 오래 전부터 주식회사가 법적으로 주인이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재벌이 주인을 자처하고 또한 재벌을 주인으로 모셔온 그들의 관행에 우리들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시각을 조금만 넓혀 유럽이나 일본 아니면 금융 자본주의의 극치를 달하는 미국을 바라본다면 한국의 세습적 주주 자본이 얼마나 변태적인지를 느낄 수 있다. 시선을 조금만 달리하여 자본의 역사 및 한반도 제국주의의 역사를 되새길 수 있다면 현행 기업 권력이 왜 국가를 넘어서게 되었으며 나아가 왜 국가가 나서서 재벌을 옹호해 주는지를 알 수 있다.
불법의 관행에 침묵으로 동참한다면 우리 역시 누구에게선가 프로그램된 게임 캐릭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업을 그네들 마음대로 하고 싶다면 주식회사 형태 말고 사적 기업으로 운영하라고 해라, 그러면 아무도 간섭하지 않을 것이다. 대학을 세워 명예 권력을 쥐고 돈을 벌고 싶다면 처음부터 노골적으로 개인 기업형 학원을 차리라고 해라, 그러면 어느 누구도 말리지 않을 것이다. 법인의 이름을 도용하여 공중 이익을 침식하고 그네들 이익을 지수 함수적으로 늘려가고 있는 현실을 관행이라고 옹호하는 비호 세력에 무력해져서는 안 된다고 김상봉은 제동을 걸었다.
그런 관습이 가짜라는 것을 그의 책에서 읽을 수 있었다. 김상봉의 책에 나온 대로 우리는 그들이 가짜 주인이요 진짜 주인은 우리 모두라는 항변을 해야 한다. 이러한 항변이 바로 철학함의 출발이다. 여기서 김상봉의 철학이 고귀한 박제된 형이상학이 아니라 현실을 섭동하며 극복하는 실천적 형이상학임을 알게 되었다. 실천적 형이상학이란 조작된 의존적 희망으로부터 탈출하여 주체적 희망을 되찾는 삶의 매뉴얼이다. 그런 매뉴얼을 읽을 수 있다면, 김상봉의 노동자 경영권 주장이 낭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 전체에 관통하는 실천적 지표임을 쉽게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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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철학적 몽상에 관하여 (레디앙, 남종석 진보신당 부산 동래당협 부위원장, 부산대 경제학 강사 / 2012년 5월 2일, 5:04 PM)
[비판과 모색] 김상봉『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비판①
1. 당의 지식인

선거 후 홍세화 진보신당 대표는 당원들에게 보낸 공개편지에서 진보신당의 두 지식인이 새로운 저서를 발간했다고 썼다. 그 중 하나가 김상봉 선생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이 책은 철학자로서 그가 한국 사회의 변혁을 위한 상을 제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 자신의 표현에 따른다면, 이 책은 “자본주의 체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에 대한 종합적 답변이다.
그간 김상봉 선생은 이런 저런 강연을 통해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에서부터 구체적인 정책개혁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쟁점에 대해 자신의 견해를 제시해 왔다. 삼성 반대, 서울대 폐지 등 진보신당의 정책이 그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가 당 강령 전문을 작성한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그의 성향과 진보신당의 정책 방향이 크게 다를 것 같지는 않다. 이런 점에서 보면 이 책에서 제시된 자본주의 극복 방향은 진보신당의 노선 결정에도 큰 영향을 줄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자본주의적 소유제도의 특징과 주식회사의 구조분석에서 출발하여, 노동자들을 노예화시키고 있는 경영의 본질을 밝히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으로서의 노동자 경영권을 주장하고 있다. 그는 노동자들 스스로 경영권을 갖고 노동을 자주적으로 통제하며, 잉여를 자율적으로 배분함으로써 예속의 상태를 벗어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관계의 변혁 없이도 노동자들이 경영권만 장악할 수 있다면 기업을 만남의 공동체로 전환시킬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의 주장이 과연 창조적 발상이 될 것인지 아니면 개인적인 몽상에 불과한지를 알기 위해서는 꼼꼼한 검토가 필요하다. 이 글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비판적 논평이다. 나는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진단과 처방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의 철학적 상상력은 창조적 문제 제기라기보다는 고립된 철학자의 몽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장들에서 내가 왜 이렇게 판단했는가를 제시해볼 것이다. 나의 문제 제기는 김상봉 선생이나 그의 입장을 옹호하는 진보신당 내의 세력들과의 생산적 대화를 위한 것으로 이해해주었으면 한다.
 
2. 소유권과 분리된 경영권?
이 책은 현대 사회의 노동자들은 노예와 같은 처지로 전락했다고 진단한다. 노동자계급이 노예의 상태가 된 것은 현대 기업 체제에서 사용자가 경영권을 독점하고, 이를 토대로 노동과정에서 노동자들을 이윤 추구의 수단으로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영권은 “노동자에게 자신의 지위와 명령에 복종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사용자의 권리”(122쪽)로서, 사용자는 이 권리를 통해 “노동자들의 인격”을 지배할 수 있고 “착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123쪽) 이는 인간을 “수단이자 목적”으로 대해야 하는 칸트식의 도덕적 명령에 위배되는 것으로 인간의 도구화만을 부추길 뿐이다.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권력이기도 하다. 비록 노동자는 자유로운 계약을 통해 고용되지만 노동과정에서 자본착취의 도구로 전락하고, 그의 인격은 경영주에게 예속됨으로써 노예와 같이 되었다고 한다.
경영주는 노동자들을 그들의 자유 의지와 상관없이 명령하고 강제함으로써 인격적 억압을 자행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이후 시민들은 법 앞의 평등을 획득했지만, 노동과정에서 예속됨으로써 노예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기업의 경영권은 자율적인 개인들의 동의에서 벗어난 외부적 강제 수단일 뿐이다.
노동과정에서 노동자가 노예와 같은 처지가 되었다는 주장은 별로 새로울 것도 없고 특별한 것도 없다. 김상봉 선생 스스로도 인정하고 있듯이, 이 책이 진정 독창적인 점(?)은 경영권을 자본주의적 소유와 분리여 사고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상봉 선생은 기업의 경영권은 자본주의적 소유와 필연적인 관련이 없기 때문에 소유권의 전환 없이 경영권만 노동자들이 장악하면 노동자들은 노예 상태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더라도 경영권만 노동이 지니게 되면, 노동자들은 기업을 자율적으로 운영할 수 있고 잉여의 사용을 주체적으로 결정할 수 있다. 노동자는 경영권을 장악함으로써 자율적인 사회적 주체가 되는 것이다. 이렇듯 “소유 없는 자유”를 제시한 것이야말로 그의 독창성을 보여주는 증표인 듯하다.(107쪽)
그는 주식회사의 구조분석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한다. 주식회사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되어 있다. 주주들은 비록 배당권과 주식평가차익을 얻고자 하지만 어느 누구도 기업을 배타적으로 소유하고 있지 않으며 경영권에 대해서도 대부분 무관심하다.
주주들은 이사를 선임하고, 이사회에서는 대표이사를 선출한다. 이렇게 선출된 사용자들은 경영권만 지니고 있을 뿐 실질적인 소유권을 행사하지 않으며 행사할 수도 없다.(257쪽) 왜냐하면 주식회사는 법인으로서, 자본의 결합물이지 인간적 결합물이 아니며, 주식회사가 자유로운 인격(법인격)으로 간주되는 것은 회사 스스로가 주인이지 다른 어떤 인간의 독점적 소유물이 아니라는 것이다.(147쪽) 그러므로 주식회사의 소유구조는 그대로 두고 경영권만 노동자들이 장악하면, 주주들은 배당이익을 받고 노동자들은 인격적 예속에서 벗어나 기업을 만남의 공동체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유권과 분리된 경영권 장악이라는 김상봉 교수의 주장은 언뜻 독창적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는 그가 부르주아적 소유에 대한 기본적 이해조차 제대로 하지 않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다. 소유란 생산관계의 법적 표현일 따름이다. 그것은 특정인이 무엇을 소유했기 때문에 임의적으로 처분하거나 혹은 처분할 수 없다는 문제가 아니다.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은 부르주아 계급의 생산수단의 독점과 재생산을 보증하는 것이다. 자본가는 사적으로 소비하고 생산수단을 감가시켜도, 잉여가치를 생산에 재투자함으로써 생산수단을 지속적으로 소유할 수 있게 된다. 잉여를 재생산에 투자함으로써 생산수단에 대한 부르주아의 소유는 지속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적 소유법칙이다.
문제는 자본가의 소유가 재생산되려면 생산과정에서 잉여가치가 추출되어야 하고, 잉여가치를 추출하려면 노동과정에서의 자본의 지배는 필수적이다. 부르주아들이 경영권을 장악해야 하는 이유는 생산과정에서의 지배를 통해서만 잉여가 추출될 수 있고, 잉여가 추출되어야만 소유가 재생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자본가가 계급으로서 자신을 재생산하는데 필수적인 부분이며, 노동과정에서의 지배야말로 계급투쟁의 핵심적 사안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소유는 노동과정에서의 부르주아의 지배(경영권)와 긴밀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주들은 경영에는 관심이 없고 배당에만 관심이 있다는 분석은 전혀 맞지 않는 주장이다. 주주들이 경영에 무관심한 것은 경영권을 장악한 부르주아들이 잉여의 생산을 감독함으로써 부르주아적 소유가 재생산된다는 가정 하에서 그런 것이다.
특정 주주가 주식 평가차익에만 관심을 두는 것을 두고 부르주아 일반이 경영권에 관심이 없다고 일반화시키는 것은 계급으로서의 부르주아의 본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소치일 뿐이다. 부르주아들이 소유권만 갖고 경영권은 노동자들에게 넘겨줄 것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려면 부르주아들이 노동자들의 도전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만 살펴보면 된다. “곤봉을 맞아보면 정신을 차린다.”
물론 김상봉 교수는 나의 이런 비판에 대해 노동자들이, 소유권의 변동 없이도 경영에 참여한 역사적 사례가 있다고 반박할지 모르겠다. 그가 제시하는 대안 가운데 하나는 독일의 노동자평의회이다. 그는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이 사용자에게 “제안하고 협의하고, 동의할 권리”를 지녔다고 쓰고 있다.(186쪽) 노동자들 스스로 주체적으로 노동과정에 참여한 역사적 선례인 것이다.
그러나 독일의 사례는 전혀 근거가 될 수 없는데, 왜냐하면 독일의 노동자 경영참가는 부르주아의 경영권에 대한 자발적 동의였지 그 반대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는 전후 미국 법인자본을 따라잡기 위한 전형적인 ‘노사협조 문화’일 뿐 노동자의 경영권 분점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이는 3절에서 다룬다). 그것은 부르주아 경영권에 대한 자발적 종속의 다름 아니었다.
부르주아들이 소유권에만 관심을 두고 경영권에는 무관심하다는 사고는 김상봉 선생의 심오한 상상 속에서나 가능한 일이지 현실의 부르주아들은 결코 그렇게 멍청하지 않다. 부르주아들은 잉여의 생산과 소유의 재생산은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과정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계급투쟁을 언제나 능동적으로 조직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철폐를 주장하는 이유는 소유관계(생산관계의 재생산)와 노동과정에서 자본가의 지배(경영)는 필연적으로 결합되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상봉 선생은 “마르크스는 겉으로는 자본주의적 소유를 경멸하는 허세를 부렸으나 마음속으로는 은밀하게 자본주의적 소유를 부러워했다”(104쪽)고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참으로 코믹스런 비판이지 않는가? 마르크스가 “자본주의적 소유를 은밀하게 부러워해서” 부르주아적 소유관계를 전환시키려고 했다는 해석이야말로 김상봉 교수의 전무후무 한 독창성을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3.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는 주주자본주의의 대안인가?
김상봉 교수는 주식회사(법인자본)에 대한 분석을 보충하여 법인자본의 구체적 형태에 대한 비교 분석을 제시한다. 그는 독일, 일본, 미국, 한국의 법인자본의 특징을 비교 분석한다. 그는 미국 자본주의가 주주자본주의에서 경영 자본주의로 이행함으로써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졌다고 주장한다.
경영자들이 자신들의 권력과 이해를 추구함으로써 주주의 지배권을 전복시켰으며, 경영자(대표이사)가 이사들을 선임함으로써 이사회를 완전히 장악해 버렸다고 주장한다. 주주권과 경영권의 대립이 미국 자본주의의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197쪽)
반면 독일 법인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이 직장별로 존재하는 노동자평의회를 통해 경영과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노동자의 자주 관리의 전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노동자들은 경영주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킴으로써 생산과정이 주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일본의 주식회사에 대한 예찬도 빠지지 않는다. 일본 기업들은 종업원들에게 종신고용을 보장하고, 경영자는 종업원 출신이 많으며, 기업은 종업원을 운명공동체로 여긴다고 주장한다.(228쪽) 반면 한국은 일본 재벌의 껍질만 가져왔을 뿐 일본 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는 전혀 수용하지 않고 있다고 덧붙인다.
김상봉 교수의 법인제도의 비교는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 일각에서 미국의 주주자본주의에 대한 대안으로 제시된 이해관계자 자본주의의 변종이다. 몇몇 진보주의자들은 미국식 주주자본주의를 넘어서기 위한 전거로 독일 자본주의를 가져 왔던 것이다. 더불어 일본의 ‘종업원 중심주의’까지 결합시킴으로써 자본주의적 시장체제 내에서도 노동자들의 지위는 혁신적으로 개선될 여지가 있음을 보이고자 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미국식 법인자본은 경영권의 과잉이라는 측면에서 헤어 나올 수 없는 수렁에 빠져있으며, 한국의 재벌은 제왕적 지배자가 독재를 하는 악의 근원인 것처럼 제시된다.
그러나 김상봉 교수가 독일이 노동자평의회를 찬양하지만 20세기 법인 혁명의 중심지는 미국이다. 20세기 초반 미국에서 등장한 법인자본은 생산(라인이라 한다)과 스텝을 결합시킴으로써 거래비용을 내부화했다. 미국 법인 기업들은 컨베이어벨트로 라인을 혁신했을 뿐만 아니라 부품산업을 내부화하고, 생산과 인사-재무-마케팅(판매)을 결합시킴으로써 시장의 불안정성을 내적으로 통제하는 새로운 혁신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이 지오바니 아리기가 『장기 20세기』에서 논하고 있는 20세기 미국 법인혁명이다. 미국은 법인혁명을 통해 19세기 말부터 시작된 자본주의의 위기를 극복하고 새로운 헤게모니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김상봉 교수가 법인체제에 대한 분석을 하고자 했다면, 가장 표준적인 사례인 미국 법인자본주의의 혁신을 제대로 분석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가 제시하는 표준적인 사례는 독일이다. 전후 독일은 미국의 생산성에 한참 뒤쳐져 있었다. 이런 와중에 미국과의 경쟁을 위해서는 노사협력이 필수적이었다. 기업들은 노동자들에게 일자리 안정과 경영에 참여를 보장하는 대신 노동자들은 임금인상을 억제하고, 파업을 자제하며, 기업의 경영전략에 적극 동참할 것을 결의한다.
1948년부터 1968년까지 무려 20년간의 무파업 행진이 이를 상징하고 있다. 로버트 브레너가 『혼돈의 기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는 독일 노동자 운동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이지 결코 진보적인 무엇이라 할 수 없다. 경쟁력 향상을 위한 노동자들의 자발적 종속을 어떻게 ‘진보’라고 할 수 있겠는가?
1990년대 한국의 진보주의자들이 독일의 이해관계자 자본주의를 찬양하고, 산별노조를 주장하는 세력들이 독일 금속노조를 모델로 삼기도 했다. 그러나 2010년 비교자본주의는 온 데 간 데 없다. 유럽은 붕괴되고 있고, 독일이 유지되는 것은 유럽 주변부의 부를 착취하기 때문이다. 더불어 독일 노동조합은 노사협조주의의 전형이었지 노동운동의 독자성과는 별반 상관이 없었다. 물론 노사협력의 문화가 정착되면서 노동자들의 경영참여가 보장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은 노동의 자율성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오히려 노조는 부르주아의 축적 전략에 보수적으로 통합되어 있었을 뿐이다. 이와 같은 보수적 타협체제의 근원은 비스마르크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김상봉 교수의 분석에서 더 기가 막히는 것은 일본 법인기업에 대한 분석이다. 그는 일본 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를 찬양한다. 일본 기업들은 오랫동안 헌신한 종업원에게 승진의 기회를 보장하고 종업원의 안정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일본기업의 종업원 중심주의는 ‘정규직 노동자’에 한하여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일본 기업체계는 다층적인 하청체계를 통해 다수의 노동자들을 계층화시켰으며, 기업의 위기는 하청 노동자들을 조절함으로써 외부화했다.
정규직은 기술적 신축성의 대상이 되고 비정규직 하청고용 노동자들은 산술적 신축성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도요티즘이다. 도요티즘의 린 생산방식은 1980년대 미국과 유럽으로 수입됐고, 이는 다시 세계로 번져 나갔다. 한국의 재벌체제의 하청 계열화와 비정규직화는 이런 도요티즘을 극단화시킨 것이다. 그 표준적인 사례가 동희오토와 같은 ‘꿈의 공장’이다. 정규직이 단 한 명도 없다는 점에서 꿈의 공장이다.
김상봉 교수가 기이한 것은, 그가 진보신당 내에서 비정규직 투쟁을 가장 열심히 주장하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그런 분이 일본의 기업문화를 찬양하고 있다. 그 일본의 기업문화가 바로 린 생산방식, 노동의 불안정성을 세계적으로 수출하는 표준적인 모델이 되었는데 말이다.
이런 기이한 주장을 할 수 있는 이유도 그가 현대 노동과정과 관련된 쟁점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이다. 기초적인 문헌 학습만 했어도 그는 린 생산방식이 일본에서 유래한 것이고, 이것이야말로 비정규직 확대의 모델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한국 기업들이 다른 모든 것은 일본을 따라하면서도 기업문화는 일본을 따라하지 않는다고 타박하는데, 한국 기업들이야말로 일본식 생산방식의 가장 반동적인 수입자들 중 하나이다. 너무 잘 따라 해서 문제이지 따라하지 않는 게 문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마르크스 극복? 170년 전으로 퇴행” (레디앙, 남종석 진보신당 부산 동래당협 부위원장, 부산대 경제학 강사 / 2012년 5월 4일, 4:50 PM)
[비판과 모색] 김상봉 교수『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비판②
4. 자본주의 극복인가 시장 예찬인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노동자의 경영권 장악으로 주식회사가 만남의 공동체가 되면 부르주아적 소유관계의 극복 없이도 자본주의는 극복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노동자가 기업의 경영권을 갖게 되면, 기업은 잉여가치 착취를 하는 공간이 아니라 노동자의 주체성이 실현되는 곳이 되며, 개별 기업들은 각자 자신의 판단에 따라 시장에 필요한 제품을 공급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시장은 그대로 두되 기업 경영만 전환시키면 자본주의적 착취 질서는 극복될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을 보는 김상봉 선생의 시각은 매우 독특하다. 그에게 있어 “시장은 우리에게 자유를 주는 장소”이다. 자유란 “타자와의 만남에서 한편에서는 수동적으로 당하고 받아들이면서도 그 작용에 능동적으로 응답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시장은 “내가 타인의 결핍을 채워주는 대가로 나의 결핍을 채울” 수 있는 “수동성이 교환되는 장소”(73쪽)이기 때문에 자유가 생겨나는 공간이라는 것이다. 개인들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서만 결핍을 충족시킨다는 점에서 시장은 나와 타자의 만남의 공간이자 자유 실현의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김상봉 선생의 입장에서 시장은 결코 사라져서는 안 된다. 시장이 존재한다면 경쟁도 사라지지 않는다. 그는 경쟁에서 실패할 경우 기업은 퇴출된다고 말한다. 노동자들이 경영하는 기업도 경쟁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기업 생존을 위해서 노동자들은 잉여를 아무렇게나 처분하지 않고 기업의 유지 존속을 위해 합리적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한다.(62쪽) 더 나아가 노동력이 상품이 되는 사회적 질서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으며, 시장에서 화폐가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분석도 없다. 노동력을 판매하고 화폐를 통한 교환은 자생적 질서의 일부인 것이다. 그가 문제 삼는 것은 오로지 경영권뿐이다.
김상봉 선생은 스스로의 입장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사이에 있는 어떤 독특함으로 분류하고 있다. 누군가는 그를 두고 공산주의라고 비판하고 누군가는 그가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고 비판하고 있다고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자신의 입장이 ‘새로운 길’(87쪽)이라고 평가한다. 
시장이 자유의 영역?
기업 경영권을 소유권으로부터 분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 점에서 김상봉 선생이 ‘독창적’일지 몰라도 그가 그리고 있는 경제체제는 전형적인 시장 사회주의 체제로서 이미 많은 논자들이 주장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시장 사회주의란 중국과 같은 현실 경제체제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시장 사회주의란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도 시장이라는 제도를 활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런 이론적 조류는 매우 다양하다. 신고전파 이론가였던 왈라스와 랑게는 시장이 일반 균형 달성에 유리하다는 점에서 계획경제에서 활용할 수 있다고 했고, 분석마르크스주의 로머는 시장의 경쟁이 사회주의 체제에게 역동성과 혁신을 초래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시장 사회주의자들 어느 누구도 김상봉 선생처럼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치켜세우지 않는다. 그들은 시장이 사회주의 체제의 한계를 보조할 수 있다고 주장할 따름이지 시장 그 자체가 인간의 자유가 이뤄지는 곳이라서 시장이 유지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자 자생적 질서의 공간이라고 찬양하는 자들은 신자유주의 경제학의 마두 하이예크이다. 하이예크는 『자유의 길』에서 시장이야말로 개인들의 자율적인 조정을 통해 만들어진 자생적 질서이기 때문에 인간 자유의 근원적 공간이라고 했다. 가장 반동적인 철학자나 시장을 자유의 영역이라고 떠들지 사회주의자들 중 어느 누구도 시장을 자유와 연결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김상봉 선생은 시장 사회주의가 어떤 모순을 안고 있는지 자문하지 않는다. 시장체계에서는 고정자본을 많이 투자한 기업(기술경쟁력이 우월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이 생산한 잉여를 영유한다. 평균이윤율을 매개로 경쟁력이 우월한 기업이 그렇지 못한 기업의 잉여노동을 가져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기업에게 부를 넘겨주지 않으려면 기업은 지속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노동자가 경영하든 누가 경영하든 시장경쟁은 기업으로 하여금 축적을 강제한다. 마르크스는 이를 ‘축적을 위한 축적’이라고 했다.
김상봉식 독창성 또는 몽상
노동자가 경영하는 기업도 경쟁에 노출되면 축적을 위한 축적에 참여할 수밖에 없다. 더불어 파산하는 기업이 나올 것이며, 시장의 변동은 경기 순환을 만들어 낼 것이다. 축적을 위한 축적은 이윤율의 저하를 야기하고, 경제의 불안정도 지속될 수밖에 없다. 기업이 망하면 경영의 주체였던 노동자들은 실업 상태로 전락한다. 김상봉 선생이 제시하는 체제에서라면 이 모든 것들이 그대로 작용한다. 거기다가 경제학의 기초만 알아도 쉽게 추측할 수 있는 사적 생산과 사회적 실현의 모순에 대해서도 일체 언급하지 않는다. 김상봉 선생이 제시하는 체제는 경영만 노동자가 할 뿐이지 자본주의와 거의 같게 움직인다.
대부분의 시장사회주의자들은 이런 문제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두고 그들 나름의 해법을 제시한다. 로머는 중앙계획기구가 부를 공정하게 배분하여 독점이나 부의 편중을 원천적으로 봉쇄해야 한다고 했다. 여기서 로머의 주장에 동의하는가 그렇지 않은가는 쟁점이 아니다. 시장 사회주의자들은 시장의 모순을 어떻게 지양할 것인가를 두고 나름의 대안을 제시하려 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김상봉 선생은 자신이 시장사회주의 전통 속에 있다는 것조차 의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장 사회주의의 고유한 모순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다. 당연히 시장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자각도 없다. 문헌 리뷰는 아예 없다. 기초적인 문헌 조사도 없이 그저 자신의 ‘몽상’을 서술하고 있을 뿐이다. 이게 김상봉식 독창성의 핵심이다.
 
5. 이행의 길인가 과거로의 퇴행인가?
사회변화는 변혁 주체들이 생각하는 이상적인 사회 모델을 제시한다고 이뤄지는 것이 아니다. 변혁운동 진영은 새로운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가도 고민해야지만 이를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해서도 진지하게 고민해야 한다. 김상봉 선생도 자신이 구상한 체제를 실현하기 위한 나름의 방안을 제시한다. 앞에서도 밝혔듯이 그는 노동자들이 경영권을 장악하고, 민주적 과정을 통해 사장을 선출하고, 노동자가 기업 활동에 주체적으로 참여함으로써 기업 속에서 민주공화정을 수립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베를린 필과 같은 오케스트라도 지휘자를 선거로 선출하고, 지휘자와 연주자들이 서로주체성을 실현하고 있듯이, 기업이라고 공화정의 원리를 실현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단 두개의 법률 조항”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총회에서 선임한다.” 이 두 개가 법조항을 넣음으로써 주식회사의 노동자들을 회사의 노예에서 회사의 주권자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308쪽) 남은 일은 입법투쟁이다. 노동자 경영권을 법제화함으로써 노동자를 예속의 상태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김상봉 선생은 명시적으로 언급하지 않지만 그의 이행전략은 말 그대로 의회주의다. 노동자들의 예속을 반대하는 좌파들이 의회의 다수파를 장악하고,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부여하는 법률 두 조항을 입법화함으로써 노동자들은 자주성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계급성 무시
김상봉 선생에게 있어 국가 그 자체는 중립적인 존재이며, 공화정의 구현체이다. 그에게 있어 국가의 계급성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인민들은 누구나 정치에 참여할 수 있고 권력의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나 민주적 과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할 수 있고 자신들의 이상을 법제화할 수 있다. 문제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대중들의 지지를 받는 것이다. 다수 대중들이 좌파를 지지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노동자 경영권을 입법화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노동자들은 해방될 수 있다는 것이다.
참으로 간단명료한 이행 전략이다. 사회체제가 이렇게 쉽게 바뀔 수 있다면 모든 활동가들의 우울증도 단번에 날려 버리겠다. 체제변화가 이렇게 쉬운데 고민할게 뭐가 있겠는가? 그러나 의회를 통한 이행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것이 아니다. 의회는 부르주아 국가 장치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고, 의회권력은 부르주아 권력의 일부에 불과하다. 의회를 장악하는 것도 쉽지는 않지만 의회과정 자체가 부르주아의 소유권/경영권을 공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2절에서 나는 부르주아의 소유권은 경영권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부르주아들은 결코 경영권을 노동자들에게 이양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만약 노동자들이 의회를 통해 기업 경영권을 공격하게 된다면, 부르주아들은 의회를 해산해서라도 노동자 계급의 요구를 파괴시켜 버릴 것이다. 이것이 바로 부르주아 국가의 계급성이다. 더군다나 부르주아 국가에 대한 김상봉 선생의 이해는 조잡하다. 그는 대학에서 교수들이 대학총장을 선출하거나 오케스트라의 단원들이 지휘자를 선택할 수 있다면서 기업도 종업원들이 사장을 선출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마르크스는 음악에 대해 “전혀 무지하기 때문에”(106쪽) 교향악단 단원이 지휘자의 노예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비판한다. 김상봉 선생은 기업의 운영체제와 대학이나 교향악단의 운영이 동일한 원리에 따라 작동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 스스로는 이것이 대단한 독창적인 발견처럼 쓰고 있다.
대학과 예술단체는 이데올로기적 장치
그러나 마르크스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기업과 대학, 사장과 오케스트라의 지휘자와의 관계를 잘 몰라서 사장을 민주적으로 선출하자는 제안을 하지 않은 것일까? 아시다시피 마르크스는 경제적 장치와 국가권력, 특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의 작동을 구별하여 분석했다. 경제가 잉여노동이 착취되는 체제의 토대라고 한다면,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는 체제의 재생산을 담당한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의 작동원리와 경제의 작동원리는 다르다. 경제는 생산과정에 대한 지배를 통해 구성되지만, 이데올로기적 장치는 참여와 자율성이라는 외피를 걸치지 않을 수 없다.
그람시가 시민사회 내에서는 강제보다 헤게모니가 주요하게 작동한다고 주장한 것도 이를 두고 한 말이다. 헤게모니는 근본적으로 강제에 토대를 두고 있지만 윤리적 동의 또한 무시하지 않는다. 당연히 이데올로기적 장치에는 참여와 자율성이 보장된다. 그러나 경제는 그렇지 않다.
대학과 예술단체는 그것이 사적으로 소유된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이데올로기적 장치이지 경제적 장치가 아니다. 부르주아들은 이 두 곳에서 대표가 자율적으로 선출되는 것을 허용하지만 그들의 계급적 이익의 토대가 되는 기업 조직에서는 결코 그와 같은 운영을 수용하지 않는다. 대학교와 기업을 동일한 지반 위에 놓고 같은 원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김상봉 선생의 주장은 경제적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다른 성격의 것임을 무시할 때나 가능한 것이다.
경제의 작동원리와 문화의 작동원리를 다르게 분석한 것은 비단 마르크스주의만의 주장은 아니다. 뒤르켐이나 탈코트 파슨즈와 같은 주류 사회학자도 사회를 구별하여 기능을 분석했고, 위르겐 하버마스 같은 중도좌파 사회학자도 사회체제를 구분한다. 하버마스는 경제는 이익의 논리가, 행정은 권력의 논리가, 생활세계는 의사소통적 합리성의 논리가 작동한다고 보았다.
사회작동 원리 차이 무시
부르주아 사회체제를 이렇게 구별하여 인식하는 것은 정치와 경제, 사회는 비록 하나의 구성체로 밀접히 결합되어 있지만 그들은 고유한 작용원리가 있기 때문이다. 이는 사회과학의 상식 수준에서도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이와 같은 작동원리의 차이를 무시하고 오케스트라와 기업을 동일한 수준에서 논한다면 과학이 될 수가 없다.
김상봉 선생의 ‘참으로 순박한 이행전략’은 마르크스 이전의 사회주의를 연상시킨다. 로버트 오웬이나 생시몽주의자들은 부르주아들에게 사회주의 장점을 잘 보여주면, 누구나 사회주의가 더 우수한 체제인 것을 인식하고 그 과정에 동참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사회관계 내에서 계급투쟁을 무시했으며, 근원적으로 폭력에 의존하는 부르주아 체제의 본질에 대해서는 무지했다. 언젠가 홉스봄은 ‘맑스, 엥겔스와 맑스 이전의 사회주의’라는 논문에서 이들 유토피아 사회주의자들과 마르크스를 구별하며, 마르크스주의는 적어도 두 부분에서 그 이전의 사회주의와 다른 질적 진보를 이끌어 냈다고 썼다. 하나는 마르크스가 경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정치적 이행을 위한 구체적 전략을 제시하려 했다는 것이다.
김상봉 선생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에 대해 무지하다. 그의 정치적 이행전략은 유토피아주의자들만큼이나 단순하다. 그는 마르크스주의가 전혀 대안이 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인해 스스로 새로운 사회변화의 상을 제시하고자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제시하는 프로그램들은 마르크스주의에 한참 미달하는 조잡한 수준에 불과하다. 그는 시장경제의 고유한 모순에 대해서도, 자본주의적 노동과정의 본질에 대해서도 무지하다. 경제적 장치와 이데올로기적 장치를 동일한 수준에서 분석하고, 이행을 “단 두 개의 법률 조항”으로 대체한다. 그 스스로는 마르크스를 극복했다고 주장하지만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그는 논쟁의 수준을 170년 전의 상태로 돌려놓고 있다는 느낌이다.
 
6. 메타과학으로서의 철학?
어떤 주장이 독창성을 지니려면 해당 분야의 현대적인 쟁점들을 정확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해당 분야의 현대적인 논의들을 완전히 섭렵해야 한다.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제일 먼저 하는 것은 문헌 리뷰이다. 자신이 다루는 분야의 쟁점은 무엇이고, 현대적인 논의가 어디에 도달해 있는가를 정확히 알아야 그 이상의 진전을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학자라면 누구나 갖춰야 할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다.
김상봉 선생은 이 책에서, 책의 부제도 알려주고 있듯이 철학을 통해 자본주의를 뒤집는다. 그는 권력의 본질을 논하면서도 칸트를 언급하고(124쪽), 생물학의 한계를 이야기하면서도 칸트를 논하며(267쪽), 소유의 의미를 심오하게 분석한 것도 헤겔이라고 쓰고 있다. 그는 모든 것을 철학으로 환원하고, 철학적 논리 속에서 비판과 대안을 구성한다. 과학에 대한 그의 편견은 놀랍다. 그는 생물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생물학은 다양한 생명체들이 보여주는 수많은 현상들을 분석하고 기술하려 할 뿐, 생명현상 또는 생명체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서 파악하려는 데는 별 관심이 없다.”
그가 과연 어떤 생물학 저작을 읽었는지 의심스럽다. 몇몇 유명한 진화생물학의 저작들만 보아도 생명현상을 총체적으로 다루고 있음을 단박에 알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생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다루는 탁월한 대중적 과학 저작들만 해도 부지기수이다. 이들 대부분의 저작들은 생명체를 통일된 원리로 파악한다. 심지어 사회생물학은 생명현상만이 아니라 정치/사회/문화/윤리적 문제마저 생물학의 논리로 설명한다. 윌슨의 『통섭』은 이런 부류들 중 가장 급진적인 흐름을 대변한다. 나는 물론 윌슨류의 메타생물학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생물학이 생명체를 하나의 통일된 원리 속에서 파악하는데 관심이 없다는 김상봉 선생의 주장은 억측을 넘어 지적 편견일 뿐이다.
억측을 넘은 지적 편견
그는 철학을 메타 과학의 지위에 올려놓고 다른 과학을 재단한다. 철학이 경제학보다도 경제에 대해 더 잘 설명하며, 생물학보다도 생물의 본질을 더 잘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그의 입장은 알튀세르가 『과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에서 “철학의 이데올로기화”라고 비판했던 바로 그 이데올로기를 대변한다. 과학을 통제하고 과학 위해 군림하는 철학! 경제도, 정치도, 생물학도 철학으로 환원하여 재단하는 이런 지적 폭력을 해방을 추구하는 철학자가 자행하고 있다는 사실이 나로서는 의아할 따름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그의 이해도 1930년대의 스탈린주의 수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는 타자와의 만남이야말로 서로주체성이 실현되는 조건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스스로는 철학의 타자인 과학을 만나지 않고 있다. 그가 마르크스의 경제학 비판만 제대로 이해하고 있었어도 이런 이상한 저작을 발간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기 동일성에 매몰된 존재, 홀로 주체성으로 고립된 존재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이다. 만남을 그렇게나 강조하는 철학자가 철학의 자궁 속에서만 웅크리고 있다는 사실은 정말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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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야, 문제는 기업의 민주화야 (한겨레, 장정일 소설가, 2012.04.27 20:41)
[장정일의 독서일기]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김상봉 지음/꾸리에·1만5000원
개인이 출자하거나 창업한 회사의 주인은 출자를 하고 창업을 한 본인이다. 그러나 허다한 주주가 출자를 한 주식회사는 누구의 것일까?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2012)는 대표적인 법인 기업인 주식회사는 주식회사 자체에 인격이 부여되어 있으므로, 자연인이 자신의 인격을 타인에게 양도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로 어느 한 사람의 소유물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을 생각한다>(사회평론, 2010)가 그 실상을 널리 폭로한 바와 같이, 주식회사의 외양을 띤 우리나라 재벌의 총수는 순환출자로 조성된 쥐꼬리만한 지분을 가진 지주회사를 통해 자기보다 더 큰 그룹 전체에 무제한의 경영권을 행사할 뿐 아니라, 왕국을 물려주듯이 자식에게 주식회사를 물려준다.
주식회사는 공공재다. 그런데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오늘의 자본주의 양식을 대표하는 주식회사가 총수의 사유물이 됨으로써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기업의 노예가 되었다. 지은이는 그것에 대한 해결책으로, 자금을 출자한 주주와 거기서 일하는 노동자를 소유권자와 경영권자로 분리할 것을 제안한다. 노동자의 경영권 법제화를 촉구하는 지은이의 가열한 주장은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전언 속에 온전히 담겨 있다. 여기에는, 기업이 국가보다 더 커진 오늘의 현실에서는 “정부가 아니라 기업을 민주화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야말로 지금 우리 시대의 진보적 과제”라는 지은이의 평소 신념이 반영되어 있다. ‘삼성 공화국’이 은유가 아니라 실재라면, 그 공화국을 민주주의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자본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모두에게 불편한 책이다. 우선 주류 경제·경영학자들은 주주들의 수가 너무 많아서 어느 특정인이 불가피하게 경영을 도맡게 된 것이라고 항변하면서, 노동자의 경영권 접수는 사유재산 침탈이라고 반박할 것이다. 또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주장을 빼다 박은 조합주의적 수사로 치부하면서, 노동해방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국가적 기획에 의해서만 완수될 수 있다는 교조적 이론을 되풀이할 것이다.
지은이는 양쪽의 비판을 어수룩이 넘기지 않는다. 먼저 주류 경제·경영학자들의 논리에 대해서는 우리나라 주식회사법과, 우리나라의 주식회사 구조와 운영 체계를 미국·독일·일본의 주식회사 체계와 세심히 비교하는 것으로 충분히 해명하고 있다. 또 마르크시스트의 비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의 극복이 노동자를 기업에서 해방시켜 국가의 월급쟁이로 만드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응답한다.
1990년대부터 기승을 부렸던 신자유주의는 많은 사람들을 바보로 만들었다. 예컨대 신자유주의 초기에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회유와 협박에 못 이겨, 구조조정과 비일용직 양산을 용인했다. 그런데 신자유주의의 위세가 한풀 꺾이고 폐해가 드러나면서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바보야, 문제는 정치야!’라는 담론이 유행처럼 번진다. 하지만 정치를 배제한 경제 담론이 우리에게 희생을 강요한 것처럼, 경제가 없는 정치 담론 역시 유권자를 동원하려는 정치인들의 ‘뽐뿌질’에 지나지 않는다. 더 이상 바보가 되고 싶지 않다면, ‘정치경제’에 대한 동시 접근이 필요하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그것을 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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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주가 회사 주인이며 경영권 갖는다는 건 만들어진 믿음” (경향, 황경상 기자, 2012-03-23 19:54:52)
ㆍ‘기업은 누구의…’ 김상봉 교수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되는가?’ 김상봉 전남대 교수(52)가 펴낸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의 문제의식은 간명하다. 다만 갸웃거림을 넘어 비난까지 들을 게 뻔하다. 그 스스로도 “불가능하다는 논거를 더 열심히 찾았다”고 썼을 정도다. 그럼에도 주류 경제학자들조차 노동자의 경영권 행사를 처음부터 부정하는 이는 없었다. 역사적·법적·철학적 분석을 통해 그가 내린 결론은 “주식회사의 주인이 주주이며 그들에게 경영권을 줘야 한다는 믿음은 만들어진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지난 17일 전화 인터뷰에서 “오늘날 우리는 정치적으로는 자유로운 시민이지만 경제적으로는 기업의 노예”라며 문제제기의 배경을 설명했다. 우리 시대는 노동이 임금벌이를 넘어서 ‘사회적 존재’를 결정하고 있다. 국가는 날로 세계화하고 있는 기업을 통제하기에 역부족이다. 되레 ‘기업국가화’되고 있는 현실에서 민주주의는 후퇴하기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독재적인 조직’인 기업의 문화가 사회로 배어든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 나아가 자본주의를 극복하자고 하지만 구체적인 방법은 없어요. 마르크스-레닌의 상상력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건 생산수단의 국유화 같은 실패한 정책을 되풀이하는 셈이죠. 반면 복지 모델은 자본주의의 모순에 손대지 못하는 한계가 있습니다.”
김 교수는 차라리 ‘공장’을 ‘공화국’으로 만들어 나가자고 제안한다. 외부의 통제보다 내부를 민주주의화하는 전략이다. 이미 1985년 정치학자 로버트 달은 노동자들이 집단 소유·운영하는 ‘자치 기업’을 제안했다. 최근에는 협동조합의 가능성에 주목하는 이들도 많다. 김 교수는 노동자가 대규모 기업을 인수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모든 기업이 협동조합이 될 수도 없다는 점에서 이들과 거리를 둔다. 그러면서 일반 주식회사 자체를 노동자들이 경영해야 한다는 논지를 전개한다.
이는 ‘사유재산 부정’이 아니다. 동네 식당처럼 개인 출자 기업이라면 소유권을 인정해야 하지만 주식회사는 다르다는 생각이다. 간단한 몇 가지 사실로도 주주가 주인이라는 신화는 깨진다. 우선 주주가 납입한 자본은 회사로부터 되돌려받을 수 없다. 재산권도 행사할 수 없는데 과연 ‘소유’라 볼 수 있는가. 게다가 1인이 모든 주식을 소유한 주식회사라도 주주는 투자금 외에 어떤 책임도 지지 않는다. 주주는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물질’로 기업이라는 공동체에 참여할 뿐이다. 이 무책임함에 ‘소유’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아가 김 교수는 주식 소유와 기업의 경영권 사이에 필연적 관계가 없다고 말한다. 주식회사가 주주만의 것이라면 국가가 공공성을 고려해 이해관계도 없고 주주도 아닌 사외이사를 두게 하는 것도 비상식적이다. 결국 김 교수는 주식회사라는 법인은 ‘법적 인격체’이므로, 인격체를 누군가 소유하거나 지배할 수 없듯 소유·지배가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법으로 주주들이 주인 행세를 할 수 있도록 규정했지만 기만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절대다수의 주주들은 기업 경영에 아무 관심이 없고, 아무런 책임이 없다”고 말한다. 그래서 대다수의 회사는 “주식회사라는 옷을 걸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개인 소유의 기업”으로 남게 된다. 극히 작은 비율의 주식을 소유하고도 이건희 회장은 78개 거대 기업집단의 ‘오너’로 전권을 행사한다. 법적 등기이사가 아니어서 경영 실패에 책임도 지지 않는다. 독재자보다 나은 지위다.
김 교수는 주식회사라는 공동체에서 ‘물질’로 남아버린 주주가 몸이라면 노동자야말로 활동하는 주체라고 말한다. 주주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노동자에게 의존해야 한다. 아니면 또 다른 ‘이건희’가 주식회사를 사유화하는 것을 피할 수 없다. 주주가 노동자와 서로를 통해 주체성을 확립할 때만 건강한 상태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실현은 간단하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단 하나의 법률 조항만이 필요하다. 주주는 배당금을 받고 노동자는 경영을 이끈다.
이런 논지의 바탕에는 만남이 주체성을 형성한다는 김 교수의 ‘서로주체성’ 철학이 있다. 김 교수는 소유를 늘려야만 자유가 커진다는 신자유주의, 사적 소유의 철폐만이 자유를 가져온다는 마르크스주의를 모두 부정한다. ‘기업’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통제’만으로 노동자는 자유로워질 수 있다.
독일과 일본은 이미 ‘노동자 경영’이라고 부를 수 있는 제도나 관행이 있다. 김 교수는 노동자 기업이 당장의 임금과 복지 지출로 고갈돼버릴 것이라는 주장도 편견이라 본다. “시장 경쟁 속에서 자신의 목줄을 죌 리 없다”는 것이다. 파산 뒤 노동자들이 인수해 키워낸 키친아트 같은 기업이 모범을 보여준다. 그는 일단 공기업에서부터 노동자 경영을 실천해보자고 제안한다.
이번 책에는 ‘거리의 철학자’로 불리며 거대 재벌과 투쟁을 벌여온 김 교수의 삶이 녹아 있다. 그에게 철학과 경제는 따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지금은 경제가 모든 삶의 철학이 돼버렸는데 우리 삶의 총체적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은 다시 철학이 돼야 합니다.”
 
"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되나" 철학자, 주식회사를 사유하다 (한국, 김범수기자, 2012.03.23 21:57:59)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유한 책임만 지는 주주는 주식회사의 소유주가 아니다 주주엔 배당금, 노동자엔 경영권"
재벌이 장악한 한국 현실 감안 공기업 사장 선출권 우선 도입 등 당장 실현가능한 방법 제안

1960년 경동산업으로 출발한 키친아트는 알려진 대로 숟가락이나 국자 같은 주방용품을 전문으로 생산하는 기업이다. 프레스 작업 중심이어서 일 하다가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산업재해가 많은, 한국의 열악한 노동 현실을 대변하는 이미지를 가진 기업이었다. 양식기로 제법 돈을 번 이 회사는 자동차 부품, 종이컵 제조 등으로 투자를 확장했다가 경영전략이나 재무관리 부재로 2000년에 법정관리에 들어가고 말았다. 파산 당시 빚만 1,000억원. 이 회사를 노동자들이 체불임금과 퇴직금, 위로금 등을 모아 76억원에 인수해 주식회사 키친아트로 새 출범시켰다. 노동자 기업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공동소유, 공동책임, 공동분배'를 사훈으로 내건 이 회사는 그 뒤 매출 700억원대의 탄탄한 기업으로 성장했고 해마다 주식 배당금 10%를 사회에 환원한다.
자본주의 기업의 소유와 경영 문제를 재검토한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이 책을 한국 재벌기업의 1인 전횡 구조를 비판하거나 협동조합 같은 식의 노동자 경영 참여를 모색한 책으로 지레 짐작했다. 책의 앞부분에 키친아트 사례 같은 것이 나와서 더욱 그랬다. 하지만 저자가 노동자의 경영 참여를 검토한 뒤 강조하는 것은 그것이 협동조합처럼 노동자의 삶의 질 개선에 '필요'한 것이 아니라 '당위'라는 사실이다.
저자의 질문은 '경영자를 왜 노동자가 직접 선출하면 안 되는가'에서 출발한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로 국민의 이해를 대변할 의원을 뽑고 대통령을 선출하듯, 기업의 구성원인 노동자가 경영자를 뽑아서 안 될 이유는 무엇인가.
문제의 핵심은 '소유권'이었다. 물건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이용할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당연하듯, 기업을 가진 사람이 회사를 경영하는 것은 마땅하다. 중요한 것은 지금 자본주의 사회를 지탱해가는 물적 토대라고 할 수 있는 주식회사에 이 같은 상식을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주식회사는 주주의 자본금 납입으로 설립되지만 등기를 마침과 동시에 그 자체로 하나의 법적인 인격체가 된다. 노예사회가 아닌 이상 한 인간을 다른 인간이 소유할 수 없듯, 주식회사 역시 누구에게 소유되는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주체'라는 것이다.
이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주식회사의 소유주로 흔히 착각하는 주주의 유한 책임이다. 식당이 망하면 주인이 가게 인테리어며 임대를 위해 은행에서 빌린 대출금을 어떻게든 갚아야 한다. 하지만 주식회사는 망해도 주주가 그런 책임을 지지 않는다. 주주는 기업이 잘 되면 주가 상승의 이익이나 배당금을 받고 못 되면 주가 하락에 따른 손실을 볼 뿐이다. 더구나 주주 경영권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이유는 기업이 크면 클수록 주주의 다수가 주가를 통한 이익 실현에만 관심이 있지 실제 경영에는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대로 주식회사가 '오늘날 우리의 삶을 가장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지평'이라면, 그것이 '일종의 유기체이면서 구성원들이 서로를 도구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목적으로 대접하고 다시 그들이 하나의 공동의 목적을 추구하는 통일성을 실현하는 조직'이 되어야 한다면, 이런 주주를 기업의 주인으로 믿고 그들에게 경영을 맡기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는 '생각하는 주주가 주식회사의 몸이라면 노동자는 활동하는 주체'라고 규정한다. 협동조합처럼 굳이 노동자가 주주가 되지 않더라도 주식회사의 경영권은 주체인 노동자가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자본의 사적 소유를 국가 소유로 전환하려는 마르크스의 기획에도 반대한다.
책에서 삼성을 대표 사례로 꼽아 신랄하게 고발하듯 미국식 주주자본주의에다 봉건적 의식에 사로 잡힌 재벌이 장악하고 있는 한국의 현실 앞에서 그의 주장은 언뜻 공허하게도 느껴진다.
그래서일까. 노동자가 기업의 주체가 되기 위해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하고 주주와 함께 활동의 주체가 되기 위해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상법 개정을 최종 목표로 하면서도 저자는 당장 실현가능한 방법들을 제안한다. 우선 공기업 사장 선출권을 노동자들에게 위임하고 원칙적으로 법인이 운영하는 기관은 그 기관에 소속되어 일하는 종업원들이 기관장을 선출하도록 하는 것이다. 주식회사의 경우도 성격상 공익적인 회사에서는 노동자 경영권을 도입한다. 대표적인 기업으로 요즘 파업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언론사를 꼽았다. 기관투자가들이 주주권을 행사해 노동자 경영권 도입을 앞당기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 있다고 한다. 노동자들의 유보된 임금이라고 할 수 있는 연기금이 어떤 기업의 최대주주라면 그것은 실질적으로 익명의 노동자들이 최대주주라는 말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독일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가 아리스토텔레스며 칸트의 철학 이론과 법학, 경제학의 논리를 다양하게 인용해가며 펴는 이런 논리 전개에 실은 모델이 있었다. 베를린 필 같은 세계 수준의 교향악단들이다. 그 조직은 주식회사든, 재단법인이든 단원들이 통치하는 작은 공화국이라고 한다. 지휘자를 선출하는 것도 물론 단원들이다. 교향악단의 이윤을 창출하는 핵심적인 존재인 단원이 주체가 되는 이런 체제에 아무도 불만을 제기하지 않는다. 주식회사가 교향악단처럼 운영되면 안 될 까닭 역시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덧붙인다. '만약 주식회사가 이런 오케스트라가 될 수 있다면, 우리가 사는 세계의 진리가 가장 탁월하게 표현되고 실현되는 장소라면, 모든 주식회사가 오케스트라가 된다는 것은 이 세계에 넘쳐 흐르는 고통스런 신음소리가 아름다운 음악소리로 바뀐다는 것을 의미하는 일일 것이다.'
 
재벌 개혁, 하려면 진보신당처럼 (진보신당 정책위원회, 2012/03/27 09:24) 
총선 시작하기 전, 새누리당까지 포함해서 모든 정당이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진보정당만의 주장처럼 되어 있던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구호가 되었다.
하지만 막상 총선 공약으로 나온 것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새누리당 공약은 굳이 길게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경제 민주화’라는 거창한 표제 아래 담긴 내용은 “대기업의 무분별한 중소기업 사업영역 진출방지” 정도가 고작이다. 공약으로 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정부, 여당이 해야 할 일들을 생색내듯이 나열할 뿐이다.
민주통합당은 이런 새누리당을 비판하면서 “출자총액제한제도 재도입, 순환출자 금지, 금산분리 강화 등”을 공약한다. 이러한 공약은 민주통합당이 바라보는 재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그것은 총수 일가가 자신들이 실제 소유한 주식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모든 주주가 자신이 소유한 지분만큼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즉, ‘1주 1표’의 주주자본주의 질서를 철저히 확립하는 것이다.
지난 2월에 통합진보당 이정희 대표가 발표한 ‘맞춤형 재벌개혁 로드맵’도 민주통합당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재벌 그룹에 대해 맞춤형 처방을 내놓는다고는 하지만, 일관된 것은 민주통합당과 마찬가지로 “출총제 부활, 순환출자 금지 등”을 통해 재벌의 경제집중력을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정희 대표의 방안이 실현된다면, 10대 재벌 그룹은 해체되고 총수 일가는 다른 대주주와 마찬가지의 지위가 된다. 
민주통합당 공약이나 이정희 대표 로드맵은 새누리당 공약에 비해서는 ‘재벌 개혁’이라 할 만한 측면이 있다. 재벌 권력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재벌 개혁’이 곧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방식대로 하면, 재벌 권력은 약화되는 대신 전체 대주주 집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 즉, 주주자본주의가 강화된다.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제 현실의 미시적 기초가 되는 기업 단위 질서가 주주자본주의다. 위의 ‘재벌 개혁’안들은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강화의 통로가 되고 말 것이다.
최근의 ‘재벌 개혁’론에 대한 장하준 교수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이러한 맹점을 짚고 있다.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 (장하준 교수 인터뷰, <프레시안> 2012. 3. 25.)
그렇다면 ‘어떤’ 재벌 개혁이어야만 하는가? 진보신당은 ‘탈삼성 공약’을 통해 그 대안을 제시한다. 삼성을 비롯한 재벌 대기업에서 이사의 절반 이상을 노동자가 뽑자는 것이다. 그래서 총수 일가의 전횡도 아니고 주주들의 ‘1주 1표’도 아닌 노동자의 ‘1인 1표’로 운영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것이다. 이러한 공약은 재벌 문제에 대한 진보신당의 독자적 진단에서 비롯된다. 재벌 문제의 밑바탕에는 주식회사의 근본 구조가 있다. 주식회사 본래의 문제가 한국적 형태로 나타난 게 바로 재벌 문제다.
주식회사는 주인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법체계는 이 사회적 자산의 경영권을 주주라는 특정 집단에게 맡긴다. 하지만 주주는 사실 일종의 채권자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경영의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다보니 실제로는 대주주들의 묵인과 담합 아래 소수 과두 세력이 기업을 지배한다. 한국에서는 이 과두 세력이 총수 일가로 나타날 뿐이다.  
최근 출간된 김상봉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는 이러한 진보신당의 재벌관을 깊이 있게 정리한다. 그 몇 구절이다. “[이건희 일가가] 대규모 기업집단을 단돈 41억 원으로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나라가 이 나라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극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식회사에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주인일 수 있는 것이다.”(221쪽)
“주식회사에서 활동의 주체는 노동자들이니, 오직 노동자들만이 주식회사의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일 수 있다. (중략) 그렇다면 더 무슨 말이 필요한가? 주식회사를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이제 우리에게 남은 과제는 노동자들에게 주식회사의 주체성을 돌려주는 일만 남았다. (중략) 필요한 것은 단 하나의 법률조항이다. -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307-308쪽)
이사회의 다수를 노동자들이 선출하자. 노동자야말로 그 기업의 장기적인 생존과 발전에 가장 깊은 이해관계를 지니고 있고 따라서 책임의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요하다면, 이와 함께 다른 이해관계자들, 즉 소비자, 지역사회, 유관중소기업(하청업체 등) 대표들도 이사회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다. 주식회사의 기업지배구조가 이렇게 바뀌면, 주주의 독점권이 약화되면서 동시에 재벌의 권력도 자연스럽게 해체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몇몇 ‘진보적’ 재벌 개혁안은 노사공동결정제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먼 미래의 과제로 미뤄두거나 혹은 출총제 재도입, 순환출자 금지 등에 따르는 보완책 정도로만 제시한다. 이에 반해 진보신당은 주장한다. 노동자 경영권이야말로 재벌 개혁의 몸통이고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고. 순환출자 금지 등은 오히려 이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를 보완할 수단일 뿐이다.    
바야흐로 ‘재벌 개혁’의 백가쟁명의 시대다. 하지만 같은 ‘재벌 개혁’ 구호 아래서도 나머지 정당들과 진보신당 사이에는 이러한 차이가 존재한다. 한 마디로, 신자유주의 ‘이후’의 시대를 열어가기 위해 지금부터 과연 무엇이 가장 필요한지에 대한 입장 차이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번 총선에서 유권자들이 진보신당을 눈여겨볼만한 충분한 이유가 된다.

 

주식회사 경영권 주체는? 철학자의 대답은 ‘노동자’ (한겨레, 최원형 기자, 2012.03.27 20:39)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 특히 주식회사는 이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삶의 장소다. 그러나 이윤을 만들어내는 도구로서의 가치만이 주목받았을 뿐 이 장소의 본질에 대해서는 따져물은 사람이 거의 없었다.
철학자 김상봉 전남대 교수가 최근 펴낸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철학자의 눈으로 주식회사의 본질을 파고들어간 책이다. 공화국의 이상을 강조해온 지은이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공간인 주식회사가 ‘공동체’가 되어야 할 필요성을 강조하고, 민주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이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을 선출하듯 주식회사에서 노동자가 사장을 선출할 수 있는 근거들을 따지고 들어간다.
사실 많은 사람들이 주식회사의 주인은 주주라고 생각하고, 기업의 소유와 경영은 같은 것으로 치부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사람들도 국가가 소유권을 넘겨받도록 하거나, 노동자들이 소유권을 갖게 하는 등 기업의 소유관계를 변화시키는 데에서 그 방법을 찾곤 한다.
그러나 철학자인 지은이는 소유를 통해서 자유를 확보하려는 생각에 비판을 가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업의 주인을 바꿈으로써 자본주의의 모순을 해결하겠다는 유혹에 빠지는 까닭은 인간의 자유가 소유에 기초한다는 전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 그가 볼 때 자유는 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활동을 스스로 규정할 수 있는 능력과 권리를 의미한다. 그는 이로부터 노동자의 자유를 위해서 요구되는 것은 기업의 소유권이 아니라 경영권이라는 명제를 도출해낸다.
그렇다면 경영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는가? 일반적으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업을 개인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인식은 경영권도 마찬가지로 소유할 수 있다는 인식을 이끌어낸다. 삼성그룹의 경영권이 3대째 세습되는 이유도 이른바 ‘오너’들이 소유한 지분에 근거한다. 그러나 지은이는 주식회사가 과연 사사로이 소유할 수 있는 대상인지 따져묻는다. 개인이 차린 식당이 그의 소유물인 것과는 다르게 주식회사는 사람의 결합체가 아닌 자본의 결합체로서 ‘법인격’을 부여받은 주체이기 때문에, 그 누구의 소유물도 될 수가 없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로부터 ‘주주 경영권’을 배격하고 ‘노동자 경영권’의 필요성을 제기한다. 생산활동은 언제나 노동자의 몫이기 때문에 노동자만이 회사가 다치면 함께 고통받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주체일 수 있다는 것. 이에 따라 그는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단 하나의 법률조항만 도입하더라도, 주식회사를 참된 의미의 생산공동체로 만들 수 있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주주들의 목소리를 반영하기 위해 “주식회사의 감사는 주주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조항을 덧붙일 수 있다고 한다. 지은이는 이런 논의를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란 한마디로 압축할 수 있다고 말한다.
 
주주자본주의 문제점 조목조목 지적 (세계일보,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 2012.03.30 17:10:57)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철학 자본주의를 뒤집다/김상봉 지음/꾸리에/1만5000원
선거를 앞두고 너도나도 ‘재벌개혁’을 내세운다. 그러나 선거가 끝나면 또다시 독자들은 실망할 것이다. 전남대 철학과 교수인 저자가 ‘주주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저자는 15.9%의 지분을 가지고 오너로 군림하는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예를 들면서 주주자본주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밀턴 프리드먼은 “기업은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도구일 뿐”이라고 했고,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석좌교수인 마이클 젠슨과 도널드 츄는 “경영자들의 목적은 그 기업을 소유한 주주들의 목적과 자주 충돌한다”고 했다. 이들은 모두 주주들이 기업을 소유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는 듯 전제하고 있다. 이들이 설파하는 주주자본주의의 교리는 미국이나 이를 추종하는 한국사회에서 오랜 시간 종교와도 같은 위력을 발휘해 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가 주식회사의 주인이 누구냐고 물으면 마치 당연한 듯이 주주들이 주인 아니냐고 반문한다.
영·미권에서 학위를 받은 한국의 경제학자들 역시 이 주주자본주의 체제를 불변의 현상으로 간주한다. 당연한 반응이다. 저자는 “이들은 체제 내의 경제운용에만 관심을 가질 뿐 그 체제가 만들어내는 모순과 파행을 극복해야 할 필요성도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이들이 국가의 경제정책을 결정하고 주도해온 탓에 이 나라는 기업 특히 재벌 기업 지배국가가 돼 버렸다고 비판한다.
저자는 “무릇 모든 위대한 사고는 무심히 지나쳐온 ‘상식적인 현실’로부터 시작된다. 자본주의 경제학은 물론이고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도 정면으로 묻지 못했던 자본주의 내부로부터 자본주의의 극복의 길 찾기를 시작하자”고 촉구한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주는 일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조항, 바로 이것이다. 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는 것이다.”
 
삼성 회장 선거로 뽑는다면, 이건희 아닌 ○○○가 주인! (프레시안, 장석준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부소장, 2012-03-30 오후 5:26:37)
[장석준의 '적록 서재'] 김상봉의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1990년대 초에 나온 <우리 시대의 사회주의 당>(민맥 펴냄, 1993년)이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민중회의'라는 좌파 정치 조직에서 활동하던 김종박이었다. 이 책의 요지는 1992년 백기완 민중 후보 운동의 성과를 모아 사회주의 지향의 진보 정당을 건설하자는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설명 방식이었다.
김종박은 이 책에서 '사회주의'를 "국민이 대통령을 투표로 뽑듯, 노동자가 사장을 투표로 뽑자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사회주의=프롤레타리아 독재+국유화'라고 이해되던 당시로서는 사뭇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관련된 몇 구절을 인용해보자.
"우리 당이 주장하는 재벌 회사의 공장을 노동자에게 맡기자는 말은 무엇인가? 말 그대로다. 그 기업의 대표를 노동자들이 직접 뽑자는 것이다." "기업보다 더 큰 게 나라다. 나라의 대통령도 국민이 뽑는다. 그래도 나라는 잘 유지되고 있다. 하물며 재벌 회사의 대표를 공장 노동자들이 뽑는 것은 대통령을 뽑는 것보다 쉬운 일이다."
아쉽게도 김종박의 이런 주장은 새로운 사회주의관으로 발전하거나 현실 운동과 결합되지는 못했다. 한때의 기발한 선전 아이디어 정도로만 사람들 뇌리에 남았다. 그럴 수밖에 없기도 했다. 1992년 대선 이후,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자본-노동 관계의 근본적 변화는, 점점 더, 현실 정치 의제가 될 수 없는 먼 미래의 이상이 되어갔으니까.
그리고 20여 년이 지나고 나서, 난 한 권의 문제작과 마주하고 있다. 김상봉(전남대학교 철학과 교수, 진보신당 상상연구소 이사장)의 신간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꾸리에 펴냄)가 그 책이다. 1980년대 사회과학 서적을 연상시키는, 거의 디자인이라 할 것이 개입되지 않은 흑백 표지가 이 책의 민낯이다. 그리고 이 표지 하단에는 단정적인 어조의 한 문단이 구호처럼 선명히 박혀 있다. "기업을 참된 의미의 생산 공동체로 만들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게 경영권을 돌려줘야 한다. 이를 위해 많은 일을 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하나의 법률 조항, 바로 이것이다!-주식회사의 이사는 종업원 총회에서 선임한다."
철학, 주식회사를 뒤집다
김상봉은 철학자다. 전공은 칸트 철학이지만, 서양 철학 전반에 대한 근본적 비판을 통해 독창적인 사유 체계를 발전시켜온 우리 시대의 사상가다. 그는 서양 철학의 주체 개념을 '홀로주체성'이라 비판적으로 정리하면서 그 대안으로서 '서로주체성' 개념을 탐색해왔다. 이러한 사색 작업에서 그의 주된 영감의 원천은 서양 철학자들보다도 오히려 함석헌의 '씨알' 사상 그리고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 투쟁이었다.
그런 그에게는 별명이 있다. '거리의 철학자'. 실제로 그는 왕성한 실천가다. 이미 오래 전부터 '학벌 없는 사회'라는 교육 운동 단체를 만들고 키우는 데 앞장서왔다. 게다가 진보 정당 운동에도 적극 참여하여 진보신당의 강령 제정 작업을 주도했고 지금도 그 부설 연구소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래서 철학자인 그가 주식회사, 기업 지배 구조, 노동자 경영권 등을 다루는 신간을 낸 것이 아주 낯설게만 느껴지지는 않는다. 특히 김상봉은 최근 몇 년 새 '삼성 공화국'의 현실을 비판하고 그에 맞서 싸우는 일의 최전선에 서 있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이들이라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가 지난 몇 년간 그의 삶의 궤적에서 필연적으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저작이라고 느낄 법하다.
그런데 이것은 영 틀린 짐작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정확한 것도 아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전개하는 사유의 발단이 반(反) 삼성 운동보다 훨씬 오래된 것임을 밝힌다. 한국에서 대통령 직선제가 쟁취되고 뒤이어 노동자 대투쟁이 폭발한 1987년에 당시 독일 유학 중이던 김상봉은 다음과 같은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졌다고 한다. "공장의 폴리스(polis)화. 폴리스로서의 공장. 즉, 하나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단위로서의 공장. 이때만이 모든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왜 사장은 선거를 통해 뽑으면 안 되는가?"
"왜 사장은 선거로 뽑으면 안 되는가?"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분명 반 삼성 운동 등의 정세로부터 촉발된 것이기는 하되 그 뿌리는 1987년의 거대한 투쟁들의 여진 속에서 솟아난 이 물음에 있다. 그 해 이후 한국의 민주화가 먹은 나이 꼭 그만큼의 세월과 함께 숙성된 물음인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제1장 제목 자체가 "바보 같은 물음-사장을 노동자가 뽑으면 안 되는가?"이다. 제1장은 이 질문을 던지면서 또한 이 질문의 답을 얻으려던 과정에서 저자가 맛본 실망과 좌절에 대해 토로한다. 저자가 보기에 카를 마르크스를 포함한 기존 좌파 이론가들은 모두 이 문제에 대해 속 시원히 답하지 못했다. 그래서 제1장은 이 책 전체에서 가장 신랄하며 논쟁적인 어조를 취한다. 기존 이론의 권위에 상당한 애착을 지닌 독자라면 이 장을 읽으며 혈압이 좀 올라갈 수도 있겠다.
제2장에서 저자는 철학자답게 자유, 소유, 권력 등의 근본적 개념들을 재검토하며 앞 장의 비판을 발전시켜나간다. 자유는 소유로부터 나올 수 없다는 것, 사람은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없으며 권력 역시 소유의 대상일 수 없다는 것을 차근차근 논증한다. 얼핏 진부한 상식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우리의 일상인 자본주의 현실은 이런 상식의 정반대를 진리로 전제하며 존립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철학적 비판 작업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백미이자 압권은 제3장부터다. 이 장에서 저자는 자본주의 기업의 가장 발전되고 일반화된 형태인 주식회사를 철저히 검토하고 그야말로 '해체'한다. 그리고 독일, 미국, 일본 등에서 발전한 주식회사의 여러 변형태들을 검토하는 제4장이 제3장의 이런 중심 논의를 뒷받침한다.
주식회사는 노동자와 사회의 다른 부분에 막대한 권력을 행사하며 주식회사 자체가 상품이 되어 시장에서 팔리기도 하고 그 과정에서 주주 집단이 엄청난 이익을 향유한다. 이것이 현대 자본주의다. 이 모든 현실의 밑바탕에는 주식회사를 존립시키는 제도적 중핵들이 존재한다. 그 중 하나가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주식회사에 부여되는 법인격이다. 김상봉은 법철학적 논의를 통해 이러한 제도적 중핵들을 사정없이 파헤친다. 그래서 그것이 결국은 한 더미의 무의미하고 허술하며 모순된 명제들의 조합에 지나지 않음을 밝힌다.
결론은 무엇인가? 주식회사에는 주인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자본주의 법체계에서 주식회사의 주인인 것처럼 전제되는 주주들도 사실은 주인임을 내세울 아무런 근거를 갖고 있지 못하다. 주식회사는 본래부터 그렇게 주인 없이 성립된 생산 공동체다. 따라서 주주 소유권을 전제하고 그로부터 연역되는 경영권이라는 것도 거짓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저자가 보기에는 한국의 재벌 문제도 바로 이 근본적 문제에서 파생하는 것이다.
"(이건희 일가가) 수많은 주주들이 주식을 소유하고 있고 국가 경제에 엄청난 영향력을 가진 대규모 기업 집단을 단돈 41억 원으로 저렇게 간단히 사유화하고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나라가 이 나라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지극히 역설적인 일이지만 주식회사에는 처음부터 주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무나 주인일 수 있는 것이다." (220~221쪽)
저자는 이렇게 기존 현실의 논리적 토대들을 해체한 뒤에 제5장에서 자신의 오래된 물음에 대한 답을 제시한다. 소유에 따른 권력 행사의 논리가 원천 부정된 자리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과제는 이제 이 주인 없는 공동체를 어떻게 참다운 공동체로 만드느냐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김상봉의 '서로주체성' 개념이 등장해 제 역할을 한다.
주식회사의 자산 제공자가 주주일지는 몰라도 주주는 결코 주식회사의 활동 주체는 아니다. 그런 활동의 주체로 우리는 노동자 말고 다른 어떤 집단도 생각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제 경영권은 주주 '소유'권이라는 허상에서 의제될 것이 아니라 이들 활동 주체와의 '관계' 속에서 형성되어야 한다. 노동자와 경영자가 '서로주체'로서 마주할 때에 주식회사는 비로소 실체를 갖춘 공동체, 폴리스('공화국'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가 된다. 즉, 노동자가 경영자를 선출해야 한다.
그럼 주주에게는 무엇이 남는가? 그는 이제 금융 투자자로서 자신의 본분에 충실해야 한다. 김상봉은 이들 '수탈자들에 대한 수탈'로서 지극히 문명적인 방식을 제시한다. 소유권과 경영권 사이의 고리를 확실히 끊는 조치만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배당권이 여전히 인정된다. 하지만 경영권과는 안녕이다. 이들의 역할은 경영 감사 정도로 족하다. 그래서 드디어 이 책의 최종 결론이 완성된다.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
다소 길지만,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논지를 쭉 소개해봤다. 이 책의 성취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나는 우선 마르크스 이야기를 좀 하고 싶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에서 마르크스는 주로 과거 논의의 한계를 대표하는 인물로 출연한다. 그런데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오히려 마르크스를 다시 보게 되었고, 그간 주목하지 못했던 측면들을 새로 발견할 수 있었다. 가령 <자본> 3권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다.
"자본주의적 생산이 고도로 발전한 결과 만들어진 이것(주식회사)은 자본이 생산자 소유로 재전화―그러나 이제 소유는 개별화된 생산자들의 소유가 아니라 결합된 생산자들의 소유[즉, 직접적인 사회적 소유]로서의 생산자 소유이다―하기 위한 필연적인 통과점이다. 또 다른 한편 그것은 재생산 과정에서 지금까지 자본 소유와 결합되어 있던 모든 기능이, 단지 결합된 생산자들만의 기능[즉, 사회적 기능]으로 재전화하기 위한 통과점이기도 하다." (<자본 3-1>(강신준 옮김, 길 펴냄), '제27장 자본주의의 생산에서 신용의 역할', 586쪽)
주식회사는 분명 마르크스에게도 중요한 연구 주제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역사적 시간은 이 주제를 탐색하기에는 너무 제한적이었다. 마르크스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주식회사는 자본주의 세계에서 일반적 기업 형태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따라서 <자본> 자체의 체계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런 시대적 상황 때문에도 주식회사는 3권에서야 중요한 주제로 부상한다. 하지만 그조차도 충분히 자세히는 다뤄지지는 못한다.
그 결과로 <자본>의 독자는 혼란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본> 1권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자본가는 19세기 중반 영국 자본주의의 전성기에 자본가의 일반적 유형이었던 가족 기업 경영자다. 이 자본가 유형은 소규모 기업의 창업주이자 실질 소유자였고 경영에서는 무자비한 독재자였다. <자본> 1권을 접한 한국의 독자들이 이 책의 자본가 상(象)에 한국의 재벌을 쉽게 오버랩시킬 수 있었던 것(사실은 오인인데)도 이런 사정 때문이었다.
하지만 <자본>의 끝머리(제3권)에 다다라서 우리는 전혀 다른 자본가 유형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에서는 화폐 자본가와 생산 자본가가 서로 나뉜다. 화폐 자본가란 은행가, 주식시장 중개인, 주식 소유자 등으로서 현실의 자본가 계급은 점점 더 이들을 중심으로 재편된다. 그러면서 자본가 계급의 다수는 직접적 생산 기능으로부터 유리된다. 반면 생산 자본가가 담당하던 감독 기능은 점차 전문 경영인이 담당하게 된다.
"주식회사(신용 제도와 함께 발달한다)는 일반적으로 이 관리 노동을 점점 더 자본(자기 자본이든 차입 자본이든)의 소유와 분리된 기능으로 만드는 경향이 있다. (…) 한편으로 자본의 단순한 소유주인 화폐 자본가에 대해서 기능하는 자본가가 대립해 있고, 또 신용의 발달과 더불어 이 화폐 자본 자신이 하나의 사회적 성격을 취하면서 은행으로 집중되어 이제는 직접적인 소유주들로부터가 아니라 바로 이 은행들로부터 대부됨으로써,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 차입된 것이든 그렇지 않든 어떤 명목의 자본도 소유하지 않은 단순한 관리자가 기능하는 자본가 그 자신이 수행해야 할 모든 실질적인 기능들을 수행하게 됨으로써, 이제 기능인만 남게 되고 자본가는 별로 쓸모없는 사람으로서 생산 과정에서 사라진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09~510쪽)
주식회사는 이러한 역사 발전 과정에서 등장하고 정착된 기업 형태다. 마르크스도 언급하고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도 조목조목 따지고 있는 것처럼, 이것은 영락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어느 누가 배타적인 사적 소유를 주장할 수도 없고 단순히 주주들의 사적 소유의 총합이라고 하는 것도 어불성설인 그런 물건이다. 그런데도 현실의 주식회사에서는 여전히 사적 소유의 논리가 지배한다. 그래서 이것은 반드시 모순의 현장이 될 수밖에 없다.
"주식 제도 안에는 사회적 생산 수단이 개인의 소유로 나타나는 낡은 사회 형태에 대한 대립이 이미 존재한다. 그러나 주식 형태로의 전화 그 자체는 아직 자본주의적 한계 내에 묶여 있다. 그래서 그러한 전화는 사회적 부와 사적 부의 성격 간의 대립을 극복하기보다는 그것을 새로운 형태로 바꿀 뿐이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90쪽)
사실상 이미 극도로 사회화된 자산의 사적인 전유(일상어로는 차라리 '횡령')―이것이 주식회사에서 작동하는 지배의 메커니즘이다. 마르크스는 이미 이것을 예감했고, 더 나아가 신용 제도의 발전과 함께 이러한 지배 메커니즘이 기업 울타리를 넘어 사회 전체로 확대될 것임을 내다보았다. 주인 없는 주식회사 안에서 주주들이 주인 노릇 하는 것처럼, 금융 과두 세력이 사회 전체의 저축을 농단하리라는 것이었다.
"주식 제도―이것은 자본주의 체제 그 자체의 기초 위에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적 사적 산업의 지양이며, 또 그것이 확대되어 새로운 생산 영역을 장악할 정도가 되면 사적 산업을 아예 절멸해버린다―이외에도 신용은 개별 자본가[혹은 한 사람의 자본가로 간주될 수 있는 사람]에게 일정 범위 내에서 타인 자본과 타인 소유 그리고 그럼으로써 타인 노동에 대해서까지 하나의 절대적인 처분권을 제공한다. 자기자본이 아닌 사회적 자본에 대한 처분권은 그에게 사회적 노동에 대한 처분권을 부여해준다.
(…) 이제 수탈은 직접적 생산자로부터 중소 자본가들에게까지 널리 확대된다. 이러한 수탈은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출발점이다. 그러한 수탈의 관철은 곧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의 목표이며 궁극적으로는 생산 수단을 모든 개인들로부터 수탈하는 것을 의미한다." (<자본 3-1>, '제23장 이자와 기업가 수익', 588~590쪽)
마르크스 사후 주식회사 형태는 계속 발전했고, 신용 제도도 더욱 발전했다. 사회화된 자산의 사적 전유를 통한 지배의 작동도 가일층 확대되고 치밀해졌다. 오늘날의 신자유주의는 어쩌면 그 극단적 발전태라 할 수 있다. 그런데도 막상 마르크스의 후계자들은 이 논의와 분석을 그다지 심화시키지 못했다. 혁명을 주장하는 진영이든 개혁 노선을 취한 진영이든 마찬가지였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마르크스가 남겨놓은 정도의 주식회사 비판이라면 선동의 재료로서 이미 충분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들에게 그 다음 과제는 결코, 각 나라에서 주식회사가 작동하는 구체적인 방식을 분석하거나 그에 따른 대안을 발전시키는 것 따위가 아니었다. 단지, 존재가 입증된 자본가 '계급' 전체와, 아니 사실은 그들의 대변자로 지목된 국가와 맞서 싸우는 일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프리드리히 엥겔스와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이 선호한 '국유화' 방식의 사회주의 이행 노선도 이런 무관심에 크게 일조했다.
한편, 개혁주의자들은 또 다른 방향에서 고민을 지워버렸다. 이들은 기업 단위에서부터 자본-노동 관계를 뒤집는다는 과제를 먼 미래의 이상 정도로 계속 뒤로 미루거나 아니면 현실 정치 의제에서 아예 배제했다. 물론 루돌프 마이드네르와 스웨덴 노동 운동이 1970년대에 시도한 임노동자 기금 같은 예외가 있기는 했다(<복지 자본주의냐, 민주적 사회주의냐 : 임노동자 기금 논쟁과 스웨덴 사회 민주주의>(신정완 지음, 사회평론 펴냄)). 하지만 이런 사례들은 어디까지나 예외일 뿐이었다. '제3의 길' 노선이 등장하기 이전에 이미 많은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주식회사는 복지 국가와 공존해야 할, 대안 없는 선택지였다.
이렇게 다소 길게 마르크스와 마르크스주의자들 이야기를 한 이유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성취를 제대로 자리매김하기 위해서다. 내가 보기에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식회사를 둘러싼 여러 제도들의 봉합점 역할을 하는 법인격 개념의 철저한 해체이고, 다른 하나는 소유가 아니라 관계(서로주체성)에 바탕을 둔 노동자 경영권의 근거를 철학적으로 정초한 것이다.
이 중 첫 번째 성과는, 기존 이론들과의 관계 속에서 본다면, 마르크스가 단편적으로 언급하는 데 그친 현대 자본주의의 지배 메커니즘 비판을 좀 더 완성된 형태로 전개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법인 조직을 둘러싼 제도들의 비판을 통해 사회적 자산이 사적으로 전유되는 구체적 양상을 포착한 것이다. 달리 말하면, '법인 제도(주식회사를 비롯한)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 메커니즘의 규명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우리 시대의 성격을 더없이 선명하게 이해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사회의 살아 있는 주체들이 실질적인 결정권을 확보하지 못했다는 단 하나의 이유로 주인 아닌 자들이 사회의 모든 처분권을 행사하는 시대, 어떤 임계점에 달한 인류사적 과도기다.
노동자 경영권 없는 재벌 개혁은 신자유주의 강화!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에 대한 이러한 비판과 분석은 지금 당장 한국 사회의 현안을 살피는 데도 유용한 나침반이 되어준다. 그것은 이번 총선에서도 쟁점 중 하나로 부상한 재벌 문제다.
총선 시작하기 전, 새누리당까지 포함해서 모든 정당이 재벌을 개혁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였었다. 진보 정당만의 주장처럼 되어 있던 '경제 민주화'가 모두의 구호가 되었다. 물론 막상 총선 공약으로 나온 것을 보면,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가령 새누리당 공약은 공약으로 낼 것도 없이 지금 당장 정부, 여당이 해야 할 일들을 생색내듯이 나열한 것일 뿐이다.
민주통합당은 이런 새누리당을 비판하면서 "출자 총액 제한 제도 재도입, 순환 출자 금지, 금융-산업 분리 강화 등"을 공약한다. 이러한 공약은 민주통합당이 바라보는 재벌 문제의 핵심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지금 재벌의 문제는 총수 일가가 자신들이 실제 소유한 주식 지분보다 훨씬 더 많은 권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따라서 해결책은 모든 주주가 자신이 소유한 지분만큼만 영향력을 행사하게 하는 것이다. 즉, '1주 1표'의 주주 자본주의 질서를 철저히 확립하는 것이다.
지난 2월에 통합진보당 대표 이정희가 발표한 '맞춤형 재벌 개혁 로드맵'도 민주통합당의 시각과 크게 다르지 않다. 각 재벌 그룹에 대해 맞춤형 처방을 내놓는다고는 하지만, 일관된 것은 민주통합당과 마찬가지로 "출자 총액 제한 제도 부활, 순환 출자 금지 등"을 통해 재벌의 경제 집중력을 억제하겠다는 것이다. 이정희의 방안이 실현된다면, 10대 재벌 그룹은 해체되고 총수 일가는 다른 대주주와 마찬가지의 지위가 된다.
민주통합당 공약이나 이정희 대표 로드맵은 새누리당 공약에 비해서는 '재벌 개혁'이라 할 만한 측면이 있다. 재벌 권력에 손을 대겠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제는 모든 '재벌 개혁'이 곧 '경제 민주화'는 아니라는 점이다. 이들의 방식대로 하면, 재벌 권력은 약화되는 대신 전체 대주주 집단의 권력은 더욱 강화된다. 즉, 주주 자본주의가 강화된다.
우리가 흔히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경제 현실의 미시적 기초가 되는 기업 단위 질서가 주주 자본주의다. 주주 자본주의의 강화란 다름 아니라 신자유주의의 강화다. 그렇다면, 위의 '재벌 개혁' 안들은 경제 민주화가 아니라 신자유주의 강화의 통로라는 이야기가 된다. 최근 '재벌 개혁' 논의에 대한 장하준의 다음과 같은 비판은 이러한 맹점을 잘 짚고 있다.
"재벌, 특히 삼성은 참 나쁘다. 자식들에게 편법 상속을 했고, 우리 사회 엘리트들을 매수했다. 여기에 대해선 법에 따라 단호하게 처벌을 해야 한다. 하지만 삼성그룹을 해체하자는 주장은 동의할 수 없다. 그렇게 되면, 삼성 계열사의 주인이 누가 되나. 국가가 주인이 된다면, 그건 차라리 낫다. 하지만 실제론 해외 투기자본이 주인이 될 게다."
대개의 '재벌 개혁'론이 한국의 재벌 문제를 주주 자본주의의 모순과 별개로 바라본다. 그래서 일단 재벌을 해체하여 '정상적인' 주주 자본주의 질서를 수립해야 하고 주주 자본주의의 문제는 그 다음부터 고민하면 된다는 식의 태도를 보인다. 여기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 이후 사회과학의 표준적 틀이 되어온 '보편'-'특수' 구도도 작동한다. '보편적인' 자본주의와 '특수한' 한국 재벌 문제 식의 구도 말이다.
그러나 재벌 문제는 그런 '특수한' 질병이 아니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 문제가 오히려 보편적인 현대 자본주의의 모순이 한국 사회에서 나타나는 한 형태라고 분석한다. 그 보편적인 모순이란 곧 '법인 제도를 통한' '사회적 자산의 사적 전유'다.
주식회사는 주인 없는 사회적 자산이다. 그런데도 자본주의 법체계는 이 사회적 자산의 경영권을 주주라는 특정 집단에게 맡긴다. 하지만 주주는 사실 일종의 채권자에 불과하다. 이들에게는 경영의 의지도, 능력도 없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는 대주주들의 묵인과 담합 아래 소수 과두 세력이 기업을 지배한다. 한국에서는 이 과두 세력이 총수 일가로 나타날 뿐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렇게 재벌 문제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열어준다. 그래서 대안도 민주통합당 류와는 전혀 달라지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 경영권이 당면 중심 과제가 된다. 노동자가 이사를 선출하자, 그래서 총수 일가의 전횡도 아니고 주주들의 '1주 1표'도 아닌 노동자의 '1인 1표'로 운영하는 기업을 만들자는 것이다.
물론 몇몇 '진보적' 재벌 개혁안은 노사 공동 결정 제도를 언급하기도 한다. 하지만 출자 총액 제한 제도 재도입, 순환 출자 금지 이후의 다음 단계 과제로 미뤄두거나 혹은 이러한 조치들에 따르는 보완책 정도로만 제시한다. 이에 반해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결론은 이렇게 주장한다. 노동자 경영권이야말로 재벌 개혁의 몸통이고 가장 먼저 추진되어야 할 과제라고. 순환 출자 금지 등은 오히려 이것이 실현되는 과정에서 이를 보완할 부분적 수단일 뿐이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 '이후'의 과제들
나는 "주식회사의 경영은 노동자가 한다!"는 것이 우리 시대 노동 운동과 사회 변화의 중심 구호가 되어야 한다는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결론에 깊이 공감한다. 그래서 감히 이 책을 이 시대 모든 깨어 있는 노동자와 민주 시민의 필독서로 추천한다. 이 책의 독자가 변호사 김용철의 <삼성을 생각한다>를 읽어본 이들의 숫자만큼만 되어도 한국 사회의 균열이 지진으로, 화산으로 폭발하는 것을 기대해볼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주주에겐 배당금을, 노동자에겐 경영권을"이라는 이 책의 결론에 동의하더라도 그 결론에 수반되는 수많은 의문점들, 더 해명되어야 할 숱한 쟁점들은 남는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기업 내의 민주화를 강조하다 보니 이러한 또 다른 고민거리들은 굳이 부각시키지 않는 경향이 있다.
한 가지 사례만 들자면, 이런 것이다. 노동자가 이사를 선출하기 시작한 주식회사가 이제 그 다음에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느냐는 문제. 당연히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선출한 이사를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주요 경영 사안을 숙의하기 위해 노동자 평의회 같은 현장 대의 기구를 만들고 운영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굳이 강조할 필요도 없는 필수 과제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그러한 끊임없는 감시와 요구가 향할 방향, 그것이다.
만약 노동자 경영 기업이 지금과 마찬가지 정도의 경쟁 압력 속에서 생존해야 한다면, 어찌 될 것인가? 주식회사를 우리 시대의 아테네로 만들었더니, 그 아테네가 끝없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라는 격랑 한 가운데에 놓여 있다면? 이렇게 되면 노동자 스스로 노동 시간을 연장하고 사회적, 환경적 비용을 늘리더라도 당장의 수익 기준을 충족시키는 데 골몰하게 되지는 않을까? 억압과 착취를 이제는 자본가의 명령이 아니라 노동자 스스로의 투표로 결정할 뿐인 상태가 출현하지는 않을까?
노동자 경영이 필요 없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노동자 경영 기업이 활동하는 경제 생태계 전반의 변화가 함께 이뤄져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노동자 경영 기업이 작은 공화국들로 지속, 발전하기 위해서도 영구 평화에 가까운 경제 생태계가 만들어져야한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이런 문제까지는 짚지 않는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라는 21세기의 숙제를 완수하려면 이런 물음을 생략하거나 우회할 수는 없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의 답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 것이다. 좀 더 총체적인 대안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런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도 확고한 출발점이 필요하다. <기업은 누구의 것인가>는 분명 그런 시작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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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12 22:16 2012/08/12 2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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