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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셰리 버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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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먼, 셰리. 김유진 옮김. 2010. 『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서울: 후마니타스.

 

여기저기 격찬이 이어지길래, 그리고 미국에 있는 후배가 아직 번역되지 않았던 이 책을 반드시 읽어보라고 추천했길래, 어쩔 수 없이 읽어봤다. 하지만 기대에 영 미치지 못했다. 물론 사민주의를 자신의 정치적 신념으로 확고하게 굳힌 이들에게는 경전으로 여겨질 만하지만, 20세기 유럽의 형성을 이런 식으로 정리해도 되는지 의문이다.

 

이 책의 핵심은 스웨덴 사민주의라고 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해 서술한 대목한 1장밖에 되지 않고,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나찌즘)의 등장배경, 논리 등에 대한 내용도 상당부분 차지한다. 이데올로기에 초점을 두었기 때문에 불가피한 결과이다.

 

참고문헌에는 많은 문헌들이 나열되어 있지만, 편향된 독서의 후과라고 해야 하나. 우리들이 접하기 어려운 다양한 문헌들이 언급되어 있으나, 마르크스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원전은 정작 발췌선집을 읽는데 그쳤다. 그는 마르크스주의의 핵심을 역사유물론과 계급투쟁으로 정리하고 있지만, 그야말로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조야한 요약이라고 할 만하다. 처음 시작부터 의심하게 되니 영 미덥지가 않다.

 

이러한 의심의 결정판은 아래 양솔규의 서평이다. 버먼의 이 책에 대한 다양한 서평이 있지만, 양솔규의 서평이 제일 신랄하면서도 이 책이 가진 약점을 제대로 짚고 있다고 본다. 버먼은 왜 이런 부분을 간과했을까. 여기에 하나 덧붙이자면 버먼은 책 제목처럼 정치가 경제에 우선한다고 하였지만,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 핵심이 정치와 경제를 분리할 수 없다는 점임을 놓치고 있다는 거다.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맨 앞에 나오는 Thing 1('자유 시장이라는 것은 없다')에서도 언급되어 있는 그 부분이다. 장하준조차 "정치 논리, 경제 논리를 분리해서 얘기하려는 사람들은 경제를 민주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막으려는 숨은 의도가 있는 사람이다. 정치가 곧 경제고, 경제가 곧 정치라는 사실을 모든 사람이 아는 게 중요하다"고 얘기한다. 시장이 정치의 산물이라는 점에서 정치가 우선한다고 하면 타당하지만, 그렇다고 정치와 경제를 분리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을 모두 읽어볼 필요는 없다고 본다. 제1장 서론과 제9장 결론(이것도 1장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을 읽으면 충분하다. 추가적으로 스웨덴 사민주의에 대해서 서술한 제7장 스웨덴에서만 가능했던 이유을 읽으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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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선한다: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The Primacy of Politics by Shari Berman. 2006. Cambridge University Press.
셰리 버먼 지음 | 김유진 옮김 | 2010. 12 | 후마니타스.
 
| 옮긴이 후기 |
사회민주주의는 버먼이 보기에 단순한 기계적 중립을 지향하는 중도파들의 허구적 이데올로기가 아닌, 자신만의 독특한 정체성과 철학을 지닌 새로운 정치사상이다. 버먼이 지적하는 사회민주주의의 주된 특징은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과 더불어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있다.
스웨덴 사민당은 이미 낡아 버린 이론에 매달리는 대신 새로운 현실에 맞게 자신들만의 새로운 방식을 실천해 나갔다. 그들은 마르크스와는 달리 국가와 정치를 초월해서가 아닌, 그것들을 통해서 더 나은 세상으로 가는 길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믿음을 바탕으로 현실에 걸맞은 비전과 정책들을 만들어 냈고, 이는 스웨덴 사민당을 이후 수십 년 동안 유지된 강력한 패권 정당으로 만들어 주었다. 즉 버먼에게 사회민주주의란, 국가와 정치를 통해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다는 신념 위에서 탄생한 적극적인 민주주의자들의 비전이다. (327쪽)
급진주의자들의 주장 속에서 그 중요성이 쉽게 망각되곤 하는 국가와 정치의 역할을 두고 책임감 있는 좌파들이 얼마나 치열한 논쟁을 벌여 왔는지, 그리고 그런 논쟁 속에서 탄생한 사회민주주의가 인류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 이 책은 잘 보여주고 있다. (328-9쪽)
버먼의 주장에 따르면 사회주의자들의 문제점은 개혁 그 자체를 거부한다는 점이 아니라, 그런 개혁조치들을 자신들의 좀 더 큰 비전과 연계시키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조안 바르칸(Joanne Barkan)은 마이클 해링턴(Michael Harrington)의 모호하고 추상적인 비전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며 실제적인 개혁 작업에도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주장했지만, 바로 그런 이론과 실천의 분리야말로 진정한 문제라는 것이다. 카우츠키와는 달리 베른슈타인과 같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개혁을 단순히 자본주의의 최종적인 붕괴가 이루어지기 전가지 고통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개량적 조치로 보기보다는 그것 자체를 사회주의적 비전의 일부분으로, 즉 현재의 세계를 변혁시키는 수단으로 생각했다. 스웨덴 사민당은 자본주의를 초월해서가 아니라 자본주의를 통해서 사회주의적 미래에 도달할 수 있으며, 좌파의 임무는 어떻게 하면 시장의 혜택을 최대화하는 동시에 부작용을 억제할 수 있는가를 규명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대공황의 위기가 닥쳤을 때 이미 이에 대처할 수 있는 강력한 이데올로기와 정책들을 갖추고 있었고 이후 선거를 통해서도 오랫동안 성공 가도를 달릴 수 있었다. (331-2쪽)
바르칸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적이고 일관성 있으며 자신만의 분명한 색깔을 보여 주는 이런 큰 전략은 사소한 것이 아니다. 하나의 운동을 희망적이고 역동적으로 만들어주는 반면, 다른 운동은 수세적이고 쇠약해지도록 만드는 것이 바로 이런 비전이기 때문이다. (332쪽)
 

제1장 서론
20세기 초반을 거치면서 실제 현실 속에서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기존의 시장과 국가, 사회의 관계를 극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것은 정치적 권력에 의해 조절되고 제한되며 사회적 필요에 종속되는 자본주의가 창조되었음을 의미했다. ‘역사의 종언론’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2-세기의 승리자는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였다. (12-13쪽)
 
자본주의
전자본주의사회들에서는 시장이 좀 더 넓은 사회적 관계 속에 뿌리 내리고 있었으며 정치에 종속되어 있었다. 따라서 전통적 공동체들의 제도·규범·선호가 시장의 범위와 작동을 통제했다. (13쪽)
근대 자본주의 시대 이전의 시장은 경제생활의 액세서리 이상이었던 적이 결코 없었다. 경제체제는 일반적으로 사회체제 속에 흡수되어 있었으며……중상주의 체제와 같이 시장이 가장 고도로 발전되어 있던 곳에서도 그것은 중앙집권화된 정부의 통제 아래 번성했다. ... 규제와 시장은 사실상 함께 자라난 것이다. 자기 조절적(self-regulating) 시장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자기조절이라는 개념의 탄생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흐름에 완전히 역행하는 것이었다(Polanyi, 1957: 68).
자본주의가 도래하면서 시장의 요구사항들이 공동체의 삶과 정치권력의 한계를 결정하게 되면서 국가-시장-사회 간의 전통적 관계가 뒤집힌 것이다. (14쪽)
자본주의는 개인들에게 자신의 지위와 생활이 주로 특정 집단 혹은 공동체에 의해 규정되던 세상의 종말을 의미했고, 개개인의 정체성과 생계를 시장에서의 지위에 의존하는 체제로 이행하게 되었음을 뜻했다. ... 전통적 관계들이 박살나면서 초래한 중요한 결과의 하나는, 전자본주의사회에서는 개인의 기본적 생계가 “인간 공동체에 소속되어 있다는 것 자체의 도덕적 권리”에 의해 보장될 수 있었던 반면, 자본주의 아래에서는 아사의 위협(‘굶주림이라는 경제적 채찍’)이 사회적 제도들의 필요물이자, 심지어 바람직한 일부분으로 자리 잡았고 게임의 법칙이 이끄는 궁극적 유인이 되었다는 점이다. (14-15쪽)
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사적 이익이 공적 이익보다 우선시되었고, 시민들 간의 유대 관계는 일시적이고 변하기 쉬운 교환 관계로 대체되었다. (15쪽)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는 국가를 통해 시장을 제자리에 복귀시키고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리고 근대성이 만들어 낸 원자화, 뿌리 뽑힘(dislocation), 사회적 불화와 싸워 나가겠다는 새로운 사회의 비전이었다. 따라서 많은 사람들에게 시장 사회의 모순과 문제점에 대한 ‘실질적인, 그러나 야만적인 해결책’을 의미했다(Polanyi, 1957: 132; Block & Somers, 1984: 61). 전간기와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을 겪고 난 이후의 유럽인들은 시장의 영향력과 지나침을 통제할 수 있고 사회적 연대에 대한 사람들의 열망이 충족될 수 있는 세상을 창조해야 했다. 전후 들불처럼 퍼져 나갔던 체제는 사실 자유주의의 업데이트판이 아니라, 무언가 분명 다른 것이었다. 그것은 사회민주주의였다. ...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경제 중심주의(economism)와 수동성을 거부하면서, 그리고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의 폭력성을 회피하면서,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믿음(경제적 힘이 아닌 정치적 힘이 역사의 동력이 될 수 있으며 또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확신, 그리고 사회의 ‘욕구’와 ‘행복’은 보호되고 배양되어야 한다는 확신) 위에 세워졌으며, 사회주의의 비마르크스주의적 비전을 나타냈다. (17-8쪽)
20세기 역사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담당했던 핵심적인 역할이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이유는, 전후 체제에 대해 우리가 전체적이고 역사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사회민주주의를 그 역할에 걸맞게 존중하거나 이데올로기 분석을 면밀하게 진행한 학자 혹은 논평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19쪽)
사회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적 강령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다. 그것은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타협 또한 아니며, 막연한 좌파적 정서와 공산주의를 혐오하는 어떤 개인이나 정당에 적용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사회민주주의는, 적어도 출발 자체가, 그 핵심에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특유의 믿음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둘 모두에 대한 뚜렷한 대안인 것이다. 사회민주주의의 진정한 성격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는 그것이 탄생한 배경에서 찾을 수 있다. (20-21쪽)
 
이데올로기
실제와는 다르게 진행될 수도 있었던 사건들의 전개 방향을 결정하는 데 이데올로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데올로기는 그것이 아니었더라면 연결되지 않았을 법한 사람들을 연결시켜 주며, 추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정치적 목표들을 추구하도록 그들에게 동기를 제공한다. (22쪽)
정당에 초점을 맞추지 않고서는 20세기 정치 발전을 이해할 수 없다. ... 정당은 대중에게 이데올로기를 홍보하고 전파했으며, 진정한 신봉자들이 특정 정치적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분투하는 데 사용할 정치적 수단을 제공했다. ... 특정 정당을 규정하는 조직, 정치 전략, 선거 연합 모두가 그들이 신봉하는 이데올로기적 기획에 의해 결정적으로 형성된다. (24-5쪽)
 
사회민주주의 이야기
19세기의 막바지에 이르러 몇몇 사회주의자들은, 만약 자신들이 바라던 정치적 결과가 단지 그것이 필연적이라는 이유만으로 실현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결국 그것은 인간 행위의 귀결로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이단아들 가운데 레닌 같은 이들은 그것이 위로부터 부과될 수 있다고 생각했고, 혁명 전위대의 정치·군사적 노력을 통해 역사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이들은 사회주의적 목표를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만들 수 있으며, 따라서 좀 더 고결한 선(good)에 대한 믿음이 인간들의 집단적 노력을 촉발해 그 목표를 이룰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후자와 같은 ‘수정주의’ 진영에서는 조르주 소렐(Georges Sorel)의 작업으로 대표되는 혁명적 수정주의와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의 작업으로 대표되는 민주적 수정주의가 나타났다. (28-29쪽)
베른슈타인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두 기둥, 즉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공격했다. 그리고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 교차적 협력에 기반을 둔 대안을 주장했다. 그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자본주의에서는 부의 집중과 사회적 궁핍화가 점점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복잡해지고 적응력도 커지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현존하는 체제를 개혁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쪽을 선호했다. 그가 보기에 사회주의의 앞날은 “부의 감소가 아닌 증가”에 달려 있으며, 또한 “개혁을 위한 긍정적 제안”―근본적인 변화를 자극할 수 있는―을 내놓을 사회주의자들의 능력에 달려 있는 것이었다(Bernstein, 1898).
(제1차) 세계대전이 촉발한 광범위한 변화로, 수많은 서유럽 좌파들은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두 기둥(계급투쟁과 역사 유물론)을 분명히 거부하고, 그 반대테제들(공동체주의와 정치의 우선성)을 공개적으로 받아들였다. 혁명적 수정주의자들은 노동자들만으로는 효과적인 혁명적 전위를 구성할 수 없다는 점과, 민족주의가 엄청난 동원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되면서, 마침내 계급투쟁을 거부했다. 민주적 수정주의자들도 비슷한 결론에 도달했는데, 이는 노동자들만으로는 결코 선거에서 다수파가 될 수 없다는 점과, 정치적 권력을 얻기 위해서는 비프롤레타리아 집단들과 협력할 필요가 있음을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 한편 두 진영 모두, 자본주의의 붕괴를 선동하는 것보다는 국가를 통해 시장의 파괴적이고 무정부적인 잠재력을 규제하면서 그것의 전례 없는 물질적 생산 능력을 끌어내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고 결론을 내렸으며, 그 결과 역사 유물론과도 멀어졌다. (31쪽)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은 공산주의적 좌파뿐만 아니라 파시즘적·민족 사회주의적 우파에 대한 두려움을 표하면서,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매달린다면 주류 좌파들은 정치적 망각의 운명에 처하고 말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혼란에 빠지고 불만에 찬 유럽 대중의 욕구와 주장에 부응하는 민주주의적 좌파의 프로그램이었다. 그런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위해 그들은 한 세대 전에 베른슈타인과 그 밖의 다른 이들이 제시한 주제들과 비판으로 돌아갔다. 즉 정치의 우선성과 계급 교차적 협력의 필요성이었다. (32쪽)
비록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간에는 분명 결정적 차이가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중요한 유사점이 있다. 이들 모두는 정치의 우선성을 받아들였으며, 정치권력을 사용해 사회와 경제를 재구성하고자 하는 열망을 강하게 드러냈다. 또한 공동체적 연대와 집단적 선에 호소했으며, 현대적 대중 정치조직을 만들었고, 자신들을 ‘국민정당’으로 내세웠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자본주의와 관련해 중도적 입장을 택했다. ... 그들은 국가가 시장을 파괴하지 않으면서 그것을 통제할 수 있으며 또 그래야만 한다는 믿음을 바탕으로 ‘제3의 길’을 추구했다. (33쪽)
1945년 이후 유럽이 작동할 수 있었던 것은 (자유주의보다) 사회민주주의와 훨씬 관련이 깊다. 전후의 합의는 국가-시장-사회 간 관계의 극적인 변화를 기반으로 한다. 규제되지 않는 시장은 이제 위험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사회적 이익은 이제 사적 특권보다 당연히 우선시되었다. 그리고 국가는 ‘공동의’ 또는 ‘공공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경제와 사회에 간섭할 권력(아니, 의무)을 지닌 것으로 이해되었다. 달리 말해 1945년 이후 사람들은 국가를 사회의 보호자로 인식하기 시작했으며, 경제적 우선순위는 종종 사회적 우선순위보다 뒷자리로 밀려났다. 그 결과 오랫동안 공존할 수 없을 것으로 보였던 것들, 즉 잘 작동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적 안정성 사이에 조화가 이루어졌다. (35쪽)
이 책의 목표 가운데 하나는 젊은 세대들에게 전후의 안정이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었는지, 왜 그것이 필요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그것이 실행되었는지를 상기시켜 주려는 것이다. 사회민주주의는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 위에 세워졌으며, 비마르크스주의적 사회주의를 대표하는 고유한 이데올로기와 운동으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또한 그것은 20세기의 가장 성공적이었던 이데올로기와 운동으로서 인식되어야 한다. 그것의 원칙과 정책들은 유럽 역사상 가장 번성하고 조화로웠던 시기를 지탱했던 것이다. ... 이 책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를 올바로 이해하는 것이 현재의 정치적 과제들을 해결하는 데 어떻게 안내자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현재의 과제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점에서 한 세기 전의 문제들과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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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사미로 끝나버린 20세기 유럽 사회민주주의 분석, 고민은 지금부터! 우리에게! (<좌파저널> 창간준비1호. 2011. 1. 4., 양솔규 진보신당 경남도당 정책국장)
『정치가 우선한다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셰리 버먼 (후마니타스, 2010)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는 아주 흥미로운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바로 20세기 정치의 최종적 승자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수정’ 자유주의 또는 ‘내장된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공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였던 여러 가지 요소들, 예컨대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적 안정을 결합시키는 것에 성공하면서 20세기에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어중간한 중도도 아니고, 복지국가 등의 특정한 정책을 도입하는 시도로 환원해서도 안된다. 저자에 의하면 사회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적 강령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특유의 믿음’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둘 모두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파시즘 등도 공유하고 있는 바, 따라서 파시즘과 구별되는 사회민주주의의 특성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셰리 버먼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필연적인 요구였다. 이에 세 가지 해답이 제시되었다. 자유주의적 해법, 마르크스주의적 해법, 파시즘적?민족사회주의적 해법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자유주의적 해법과 마르크스주의적 해법은 모두 ‘경제 우선적’ 해법이었다. 자유방임주의는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적 해법은 그 특유의 경제결정론에 입각해 대기론을 부추겼다. 요컨대 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혁명을 만든다는 것은...요인들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며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혁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게 되었다.(세라티) 하지만 자본주의는 대중들에게 파국을 선사했고 해결책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두 가지 입장이 제시되었다. 민주적 수정주의의 입장(베른슈타인)과 혁명적 수정주의의 입장(소렐)이었다. 민주적 수정주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사회주의에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자유주의의 정신적·현실적 후계자로 보았고, 민주주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자 근본적 구성 요소로 보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우선론을 기각하고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공격했다. 이러한 민주적 수정주의는 전간기를 거치면서 사회민주주의로 등장하게 된다.
반면 혁명적 수정주의는 자유주의를 혐오했고 민주주의를 파괴적이고 퇴보적인 영향을 일으키는 사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현존 자유주의 체제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 혁명적으로 뒤엎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흐름은 나중에 민족주의, 사회주의적 요소들과 결합해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나타나게 된다.
(민주적 수정주의에서 진화한) 사회민주주의, 파시스트, 민족사회주의자들(나치)들은 공통적으로 유사한 원리와 정책을 발전시키면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반면 이러한 운동들은 대중들에게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열망을 제공했다. 하지만 독일 사민당, 이탈리아 사회당, 프랑스 사회당 등은 모두 전간기에 제시된 여러 가지 쟁점들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했다. 다수의 의석 획득으로 인해 대두된 정부 참여 문제를 거부하는가 하면(책임성 결여), 민족주의의 위력에 대한 평가 절하,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집과 이로 인한 실천의 부재가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거절됨으로서 ‘정치의 우선성’의 필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몫이 되고 말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계급교차적 이해를 주장하고(국민정당화), 민족주의를 동원했으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비록 탐욕스러운 자본과 창조적인 자본을 구분하여 기업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동시에 반자본주의적 자세를 유지했지만 말이다.
오로지 한 나라에서만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이 당 내에 안착하였다. 바로 스웨덴이다. 스웨덴에서만 가능했던 이유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었고, 브란팅을 비롯한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의 지도력이 유지되었으며, 정치적 후진성(보통선거권의 배제)이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제시하게 했다. 요즘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의) ‘후발주자의 이점’ 이랄까?
어쨌든 이러한 19-20세기 초반의 이데올로기 필요성에 대한 수요와 이에 대한 각 이데올로기의 공급, 서로간의 투쟁의 과정을 거치고, 또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친 후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셰리 버먼은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민주적 수정주의) 간의 쟁점들을 역사적 이데올로기 투쟁 과정을 통해 매우 역동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정치적 우선성’이 당시에 요구될 수밖에 없었던 20세기 초반의 상황 속에서,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이 이를 실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책임으로 돌린다. 예를 들어 국가를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로 보는 시각은 국가 참여주의를 기각하게 만듬으로써 국민들이 사회주의 정당에 원하는 책임감을 거부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와 국제주의 고수는 민족주의의 거대한 잠재적 힘을 퇴행적 사회세력에게 넘겨주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정통적인 경제결정론과 원칙에 얽매임으로서 현실의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들이 불가피하게 어정쩡한 모습으로 핑계를 대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몇몇 개혁 조치들 또한 이론과 실천의 분리 속에서 전체 사회개조를 위한 장기적 목표 속에 위치 짓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셰리 버먼의 책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고민 지점을 던져주고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언급이 들어있다. 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쟁도 진행된 바 있다.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어떤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고, 이를 뛰어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현실 사민주의의 극복과 +미래 α 요소의 결합? 사실 진보신당 내 좌파들이 전후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그들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사회민주주의가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 등은 타당하며, 여타 쟁점들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내에서 논쟁과 검토 과정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공백지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과감한 생략 덕분에 가능했던 이데올로기 경합 과정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분명한 주장들은 셰리 버먼의 책을 읽어볼 필요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리 버먼의 책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불충분한 논증의 문제이다.
셰리 버먼의 ‘정치의 우선성’의 강조가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책 속에서 논리적으로 충분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사회민주주의가 안착하는 과정에서의 ‘정치의 우선성’의 실제 모습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스웨덴에서의 2차세계대전 이전의 경험들이 거의 유일한 설명이고, 이는 전체 9장 중에 1개의 장 밖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 책의 부제인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에도 의문을 갖게 한다. 사실상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은 20세기의 초반, 또는 30년대까지로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의 형성을 다 설명하는 듯한 부제는 적절하지 않다. 설사 이데올로기의 기초는 그 당시 30년대에 이미 마무리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의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설명되어져야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다. 
둘째 ‘정치의 우선성’이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격 구분에서는 유용했을지 몰라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의 문제는 충분한 논증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인지, 아니면 경쟁자들의 소멸로 인해 ‘잔존’한 것인지 책 속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자본주의가 ‘경제적 필요’에 의해 선택된 ‘정치적 동력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사회민주주의’ 또는 ‘수정 자유주의’가 아닌지 하는 의문이다. 말하자면 20세기가 과연 정말로 ‘정치의 우선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민주의의 승리를 증명했는지 저자의 책 속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제의 우선성’이 사민주의 세력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셋째, 사회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본다면, 그 승리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단지 잔존? 아니면 지배적 정치주체로 등장하는 것? 아니면 애초 자신의 이론적 목표가 달성되는 것?
쉐보르스키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서 선거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서술하고 있다. 다수파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훼손할 수밖에 없고 노동계급 외 다른 계급들의 이해에 호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사회주의 정당(노동계급 정당)이 아니게 되고(노동자 정당일 수는 있어도) 이는 노동자들을 동원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절감된다는 것이다. 사민주의에게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는 수단이자 목적이고 사회주의로 인도하는 매개자이자 미래의 정치형태이지만, 이것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아닌 것이다. 셰리 버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특정 정책을(개량을) 그저 그 자체 목적인 것이 아닌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구조를 바꾸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바꾸려는 의지 자체도 점차 희박해졌다. 이런 점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목표 설정과 관련해 무엇을 성공했는지 의심스럽다. 즉, 성공의 외피 속에 실패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이 대기론에 빠져 행동의 열정을 봉쇄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성공에 기댈 수밖에 없는 딜레마와 민주주의에 내제한 온건화 속에서 사회주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만다고나 할까?
넷째, 사회민주주의가 중요하게 다루는 ‘민주주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20세기 내내 사회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소위 복지국가 내에서도 민주주의 의제와 요소는 확장되었고, 이에 대해 국가와 또는 국가 내부에서 치열한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제도화에는 기여했을지 몰라도 새로운 확장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섯째, 셰리 버먼의 논증 과정은 매우 한정적이다. 나라로 보면, 영국과 미국은 검토에서 제외되었고, 시기로 봐도 20세기 초반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셰리 버먼의 논증 과정에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현상이었던 ‘냉전’ 상황과 현실 사회주의의 존재가 미친 영향은 아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주장하듯이 전후 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냉전의 역할’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가 전후 지배적 정치이데올로기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으로 인해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 일본 군국주의 등이 소련에 맞서는 ‘자유세계’의 행위자로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냉전기 서구정부들의 정치적 기반은 전쟁 전의 사회민주주의계 좌파에서부터...걸쳐 있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공산주의적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핵심은, “노동자 계급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대중 투쟁이 불가피하게 폭발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적 위협”은 현실적이었다.(필립 암스트롱 외)
설사 셰리 버먼의 주장처럼 사회민주주의의 정치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냉전 또는 미국 중심의 질서가 부과하는 힘을 상회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전후 중도우파 또는 보수파들도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들을 펼쳤다는 것은 이에 대한 반증이 될 수도 있다. 
여섯째, 역자와 저자의 몇 가지 언급에서는 21세기 현재의 세계적 과제 역시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기껏해야 ‘좌파 스스로의 지적 오류나 의지 상실을 극복’하고 ‘낙관주의와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옳게 지적하는 것 한 가지! 저자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실패는 운동의 기반이었던 이상주의를 상실했다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주의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상관관계 속에서 고유하게 존재하는 딜레마와 연관된다. 더군다나 21세기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서 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는 저자 역시 충분하게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반했다면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이러한 믿음을 상실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얼마 전에 얘기했듯이 ‘급진적 정치에서 온건한 중도로 끊임없이 변화’한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러한 이상주의를 21세기적 조건 속에서 다시 되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저자의 사회민주주의의 현재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공허한 희망사항에 불과할 것이다. 
일곱 번째, 저자는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사회민주주의가 충분히 훌륭하게 버티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2010년 9월 스웨덴은 선거에서 1914년 이후 최저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중도우파 정당이 승리했으며 극우반이민 정당이 의회에 진입했다.
저자는 미래의 전략을 논하면서 현 좌파들의 다문화주의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는 이민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포퓰리즘적 우파들에게 공동체라는 주제를 뺏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스웨덴의) 정책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주의를 향한 모색이며 퇴보가 아닌 진보의 징후로 보았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민주의자들은 이민자들이나 다른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했었다. 저자도 살폈듯이 민족주의에 사민주의는 편승했고 주류 정당으로 남기 위해 공동체를 호명했다. 그러다가 최근의 더 큰 이주노동의 물결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서 이러한 통합 정책은 실패했고 포퓰리즘적 우파의 등장을 막지도 못했다
여덟 번째, 경제 중심론 또는 경제결정론에서 벗어나는 방식이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전환 역시 단순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실제 저자의 논의들은 매우 주의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단순한 치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 이면에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문제가 놓여 있고 국가이론이 주로 이러한 문제를 다뤄왔다. 밥 제솝이 얘기했듯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론을 기각해야 가능한 것이다. 상부구조의 변화 없이 토대의 변화는 없기 때문이다. 즉 자율성은 상대적일 수 없다. 역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상대적 자율성’을 폐기하는 대신에 ‘상호작용적’ 심급에서의 결정만이 존재한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저자의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실패한 이데올로기의 공통점을 ‘경제 우선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여러 이데올로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에는 탁월하지만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상황과 전망에 대한 인식을 연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정치의 우선성’의 장점들을 역으로 가리게 되는 것 같다. 
아홉 번째,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를 경제결정론으로 못박는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개념을 기각함으로써 비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못박는다. 둘 사이의 연관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 역시 과도한 비약과 단절을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만 기능하게 되며 이상주의의 씨앗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스웨덴을 제외하고)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정책에 있어서 매우 협소한 수단들만을 사용하고 상상력은 고갈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주의와의 단절 속에서 사민주의가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길은 아니었을까? 
열 번째, 이 책은 20세기 유럽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형성과 관련한 책이다. 따라서 유럽 중심주의적인 논의일 수밖에 없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또다른 수정주의인 레닌주의 또는 마오주의는) 유럽 바깥의 광대한 제3세계, 그리고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사회민주주의는 유럽 바깥과 어떤 모습으로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는 아무런 편린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 사회민주주의와 관련해 저자의 많은 논의들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부분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나, 당시 카우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나 독일사민당 등의 무능력에 대한 설명, 직면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베른슈타인 등의 용기 등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많은 특징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주장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거의 모든 실패의 원인을 마르크스주의에게만 돌리고 있다. 결론을 향해 질주하는 기차 같다고나 할까? 이미 내려진 결론과 짜맞추어지는 논리들.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줌으로써 사민주의를 갓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사명감은 심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근거는 허약하다. 이데올로기 분석에만 치중한 나머지 20세기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의 공과 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논증은 없고 장밋빛 전망만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담 쉐보르스키나 요스타 에스핑 엔더슨 같은 정치학자들의 논의보다 정치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물론 21세기의 방향과 관련한 저자의 논증 공백을 메우는 것은 저자만의 책임은 아니며 이론적 검토와 더불어 실천적 모색이 병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저자의 희망대로 아직 사회민주주의에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민주주의가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는 것을 최소 필요조건으로 할 것이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와는 다른 어떤 것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련의 국가사회주의가 사라진 지금, 민주적 사회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자신의 대립물로 설정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형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직면했던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의 고민을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충분치는 않겠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의 고민들은 매우 진솔했으며 현재의 고민들의 많은 부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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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데올로기 승자는 ‘사민주의’ (레디앙, 2010년 12월 04일 (토) 10:52:14 정상근 기자)
[새책]『정치가 우선한다』…근대 이데올리기의 투쟁의 역사

 

20세기의 진정한 승자는 사민주의였다 (한겨레, 고명섭 기자, 2010-12-03 오후 08:30:26)
자유주의 지배력 정면으로 부정
‘정치 우선’ 이념·역사 서술 눈길
“좌파의 오류·의지 상실이 걸림돌”

 

자유주의도, 사회주의도 아니다 (한겨레21 2010.12.10 제839호, 신소윤 기자)
[출판] 신자유주의가 지배하는 세계 정치의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제시한 셰린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경제체제보다 정치 방임이 문제” (서울, 조태성기자, 2010-12-15  23면)
버먼 교수 ‘정치가 우선한다’

 

장하준에 열광한 당신이 지지할 정당은 바로… (프레시안, 최병천 복지국가소사이어티 정책위원, 2010-12-17 오후 7:41:39)
[프레시안 books]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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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6 12:53 2011/02/06 12: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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