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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재구성 ❶ 미국형 사회민주주의 (시사IN 연재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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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IN의 <진보의 재구성> 연재 기획을 보면서 김대중, 노무현이 우리 사회의 진보 논의의 폭을 오른쪽으로 이동시킴과 동시에 많이 좁혔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과거 같으면 '진보'의 테두리 내에 결코 포함되지 않았을 인물·지식·사상들이 논의의 대상이 되도록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또한 한국의 자유주의 우파세력의 독창적인 생각은 아니고,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가운데 길인 사민주의를 좀더 오른쪽으로 이동한 제3의 길에서부터 예고된 것이었다. 유럽의 제3의 길 주창자들도, 미국의 자유주의 세력들도 최근 들어 진보를 들먹이기는 하지만, 스스로도 낯간지러울 것이다.
 
시사IN의 <진보의 재구성> 연재물은 과연 진보의 폭을 넓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20여년 전 이진경은 당시 비합법 지하 정치신문이었던 '노동계급'에서 '진보'는 '사회주의'라고 단정적으로 주장했다. 진보라는 게 사회주의 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상적 흐름을 포함하게 된 것이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인지 여부는 판단하기 어렵지만, 바람직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게 외연이 확장된다고 하여 진보가 재구성될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 
 
최근에 뉴라이트들도 자신들이 진정한 진보라고 하면서 머리를 들이미는데, 이들의 가능성도 관대하게 검토할런지... 언제부터 변혁, 혁명, 사회주의를 얘기하는 게 부담스럽고, 구태의연하게 들리더니, 앞으로 진보라는 것조차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겠지. 결국은 이 또한 프레임 싸움이고, 담론 싸움이기에 그러하다. 
 
지금까지 진보라고 하는 것을 제대로 구성조차 못해본 상황에서 무엇을 재구성하겠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최근 2-3년간 내가 속한 정치조직에서도 진보의 재구성 운운하면서 작업을 했었는데, 그에 대한 치열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이 새삼스레 아쉽게 느껴진다. 아무튼 시사IN의 연재물을 통해 뭔가 배울 것이 있기를...
  
사실 시사IN이 연재하기로 정한 주제에서 벗어난 것이 오히려 진보의 재구성을 보여주는데 더 많은 시사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이왕 시도해보겠다면 시장사회주의, 분석적 마르크시즘, 참여계획경제론, 자주관리, 녹색당 및 생태사회주의 운동, 해적당의 사례, 남미의 브라질 및 베네수엘라의 사례 등 다양한 예들도 포함하여 검토해보기를 바란다. 이후에 관련기사가 나오면 추가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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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의 재구성> 연재를 시작하며 (시사IN [103호] 2009년 08월 31일 (월) 13:51:26 이종태 기자)
진보의 재구성 ❶ 미국형 사회민주주의 
 
한국에서 ‘진보’로 분류되는 인물·사상·지식은 우리 근현대사를 발전시켜온 거대한 양 갈래 흐름 중 하나다. ‘진보’는 인류사에 유례없을 정도의 속도로 이루어진 한국 경제 발전의 그늘에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해왔고, 후발 자본주의국으로서는 유일하게 ‘민주화와 경제성장의 병행’을 이루어냈다. 이런 ‘진보’에서 ‘왼쪽’에 속하는 인물·사상·지식은 자본주의와 시장경제를 근본적으로 비판하는 단계로 나아갔다. ‘진보’의 ‘오른쪽’은 11년여 전, 정권에 진출하면서 그간의 ‘한국 사회 비판’을 뛰어넘어 정치·경제·사회 제도들을 직접 설계해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세계적 대세였던 신자유주의 물결은, 평등을 중시하는 세력이 집권한 시기에 오히려 양극화가 심화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으로 ‘진보’를 몰아붙였다. 진보는 대외적으로 기대를 배신했고, 내부적으로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시사IN>이 ‘진보의 재구성’을 연재하기로 한 이유는 이런 상황들, 그 자체다. 다음은 이 연재의 몇 가지 원칙이다.
 
첫 번째, ‘진보의 재구성’은 모두 10회에 걸쳐 격주로 연재한다.
두 번째, <시사IN>의 이번 연재에서 ‘진보’는 ‘차별을 위한 기준’이 아니라 각종 인물·지식·사상들을 이 범주 내에 포괄하기 위한 실천적이고 무정형적인 개념으로 간주된다.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거나 진보로 간주된 바 있는 인물·사상·지식이라면, 그 가능성을 관대하게 검토한다. 김대중·노무현 전 대통령이 수용했던 영미형 자본주의, 북유럽 사민주의, 케인스주의, 자본주의의 다양성 논의, 근본주의적 혁명론과 개인주의까지 진보라는 범주 아래 다룰 계획이다.
세 번째, 이번 연재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는, 이런 ‘진보’ 개념과 관련된, 국내외의 여러 논의를 쉽고 간략하게 서술하는 것이다.
네 번째, 구체적인 연재 주제는 다음과 같다.
 
1. 미국형 사회민주주의(로버트 라이시, 진 스펄링, 클린턴, 오바마)
2. 신케인스주의(폴 크루그먼, 스티글리츠)
3. 북유럽 사회민주주의(비그포르스, 칼레비, 렌-마이드너)
4. 영국 신노동당(기든스, 토니 블레어, 고든 브라운)
5. 자본주의의 다양성(폴라니 등)
6. 근본주의적 혁명론자들(레닌, 트로츠키, 토니 클리프)
7. 포스트 마르크시즘, 자율주의, 노동 거부(네그리 등)
8. 교육과 사회(보울스, 긴티스)
9. 세계 금융위기와 그 대안(실러 대 크로티)
10. 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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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산업화 대안은 시장 역동성 믿는 미국형 사민주의 (시사IN [103호] 2009년 08월 31일 (월) 13:53:43 이종태 기자)
노동자의 단결도, 자본과의 싸움도 불가능하다는 탈산업화 시대의 진보적 대안은? 이찬근 인천대 교수가 미국 신민주당 노선을 해설한다.  
 
미국 민주당이 1990년대 초에 성취한 사상적 변혁은 한국의 진보 세력에도 강한 영향력을 미쳤다. 당시 미국 민주당이 한 일은 서구세계 진보적 대중정당들의 전통적 사상을 뒤엎은 것이었다. 복지와 시장, 국가에 대한 기존 관념을 전복함으로써 1992년 빌 클린턴을 대통령에 당선시켜 공화당의 12년 지배를 끝장냈다. 이런 사상적 변혁 이후의 미국 민주당을 ‘신민주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금융과 고부가가치 서비스업이 미국의 주력산업으로 자리 잡기 시작한 때였다.
 
신민주당이 변혁한 것은 자신과 미국만이 아니었다. 1990년대 하반기에는 미국과 다른 경제 시스템을 영위하는 동아시아 국가와 유럽 국가들을 금융자본주의 시스템에 포섭했다. 당시 한국에서 집권한 진보 세력은 신민주당의 사상을 적극 흡수하기도 했다. 그만큼 위력적인 사상이었다.
 
신민주당은 시장의 역동성이 진보적 과제와 결합될 수 있음을 굳게 믿었다. 이에 따라 시장을 규제해서 소생산자와 노동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시장을 왜곡하지 않는 수단(근로장려세제 등)으로 서민을 직접 지원하려 했다. 또한 기업과 경제성장을 노골적으로 중시했다. 민주당의 존 케리 상원의원 같은 사람은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미워하면서 일자리를 사랑할 수는 없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런 시각은 자연스럽게 개인의 능력과 책임을 강조하는 정책으로 이어졌다. 행정과 공적 사업을 민간에 이양하는 권력이양(empowerment) 정책이 실시되었다. 서민에게 시혜를 베풀기보다 이들이 자기 사업을 통해 자활할 수 있도록 금융기관에서 돈을 빌릴 수 있게 하는 제도가 설계되었다.
 
한국에서도 이 흐름은 김대중 시대의 생산적 복지, 노무현 시대의 사회적 투자국가론 등으로 이어졌다. 금융 및 서비스 산업의 성장동력화, 참여정부의 금융허브론, 이명박 정부의 금융중심지론도 신민주당의 영향을 일정하게 반영한다. 이러한 미국 신민주당 사상의 배경 및 전망과 관련해 최근 지구화라는 맥락 속에서 클린턴·오바마 정책을 연구 중인 인천대 이찬근 교수를 만났다. 
 
미국 신민주당의 사상 역시 소외층 지원을 강조한다는 면에서 미국형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유럽 사민주의 정당의 경우, 지구화 흐름에서 이탈하자고 주장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지구화에 상당히 비판적이다. 지구화에 따른 현상들을 일정 정도 정치와 사회의 힘으로 다스릴 수 있고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이에 반해 미국 신민주당은 지구화를 ‘포스’(force), 즉 ‘거역할 수 없는 힘’으로 인식한다. 신민주당의 여러 정책에는, 이런 ‘포스’에 맞설 것이 아니라 올라타야 한다는 생각이 깔려 있다. 또한 이 흐름을 주도한 빌 클린턴, 로버트 라이시(전 노동장관) 등은 지구화와 기술 혁신이 미국의 국익에 부합한다고 보았다.
 
지구화에 대한 견해 차이가 대안의 차이로 이어지는 것인가.

로버트 라이시, 진 스펄링 등 미국 신민주당 이론가들은 지구화의 불가피성을 일단 인정하고 이에 대한 대응을 고민한다. 탈산업화라는 현실에 기반해서 국가의 구실을 고민하고, 이 영역에서 보수와 진보가 대안으로 다투자는 거다. 유럽 사민주의가 ‘복지를 지키자’고 주장한다면, 미국형 사민주의는 복지의 개념을 ‘개인의 위험 관리’에서 ‘개인 능력의 향상’으로 바꾸자고 주장한다.
 
탈산업화는 어떤 시대인가.

로버트 라이시에 따르면, 미국 자본주의 혹은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추세는 지구화다. 대다수 대기업은 국적이 불분명한 글로벌 기업이다. 이들은 원자재, 중간재(하청기업), 노동자 등을 국내가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선택한다. 미국 기업이 잘나간다고 미국인의 일자리가 보장되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자본과 노동이 국민경제 내에서 공생하며 한 배를 타던 시대는 지나갔다. 또한 기술 발전으로 인해 제조업과 서비스업에서 숙련도가 낮은 반복적 노동이 사라지고 있다. 이 부문의 저숙련 노동자들은 기존 일자리를 잃고 소매 상점, 레스토랑, 호텔, 노인이나 어린이 돌보기 등 대인 서비스업(사람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서비스업)으로 밀려나고 있다. 이런 대인 서비스업은 자동화가 불가능하고 글로벌 경쟁에 직접 노출되지 않기 때문에 일자리 수가 크게 줄어들지 않았다. 그러나 문제는 급여 수준이 너무 낮아서 사회적으로 일자리 불안과 양극화를 초래한다. 이처럼 탈산업화 시대에는 자본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반면 노동자들의 일자리가 사라지고 양극화가 심화된다.
 
노동과 자본 간 사회적 대타협에 기반한 기존 사회민주주의가 불가능해졌다는 것인가.

그렇다. 기존 사민주의는 산업화 시대의 대안이었을 뿐이다. 산업화 시대는 기업들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면서 거대한 공장을 운영했고, 그 공장 내에는 비슷한 작업을 수행하는 수많은 노동자가 근무했다. 노동자들은 단결하기 쉬웠고, 단결하면 자본에 대단히 위협적이었다. 또한 기업들의 생산거점도 국가 내에 있었다. 그래서 국가 단위에서 자본은 노동과 타협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조건이 모두 사라졌다.
 
이런 현실에 대한 미국 신민주당의 대안은 무엇인가.
바로 교육이다.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교육개혁을 강조하는 이유다. 오바마는 ‘미국은 교육에서 승리해야 다른 나라들을 앞설 수 있다’고 말한다.
 
‘국가 경쟁력 강화’가 아니라 ‘교육 강화’인가. 특유의 세계 인식이 깔려 있는 것 같다.
공산권 붕괴 이후 30억여 명 이상이 세계 노동시장에 들어왔다. 이에 더해 무역과 투자도 완전히 개방되었다. 세계 자본의 처지에서는 글로벌 차원에서 노동자 40억명을 마음대로 활용하면서 생산을 조정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새로운 고부가가치 비즈니스도 금융과 서비스 산업을 중심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요한 것은 개인의 능력이다. 지구화로 인해, 어느 나라에 살든 글로벌 차원에서 부가가치가 높은 노동을 제공할 능력이 있는 개인은 높은 보수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런 인식에 기반하면, 결국 대안은 고부가가치 노동력을 자국 내에 많이 육성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교육을 강조한다. 교육을 통해 고부가가치 인력을 많이 키워내자는 것이다.
 
교육의 강화로 진보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것인가.
로버트 라이시는 일자리에는 세 종류가 있다고 생각한다. 가장 최상위에는 고도의 지적 능력을 요구하는 지식형·문제해결형 일자리가 있다. 두 번째는 산업화 시대에 전형적인, 대규모 사업장에서 반복 노동을 하는 일자리다. 세 번째는 대인 서비스이다. 그런데 두 번째는 파괴되었고, 세 번째는 늘어나지만 임금 수준이 매우 낮다. 결국 첫 번째 일자리를 늘리는 것이 국가의 구실이고 이를 담당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얘기다. 그런데 이에는 기득권 해체의 의미도 있다. 공교육을 강화해서 저소득층 자제들도 노력에 따라 고부가가치 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국가가 보장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경우, 일부 사립학교와 부촌의 공립학교만 우수하다. 그런데 나머지 학교의 수준을 끌어올려 고부가가치 인력의 풀을 넓히자고 한다. 부모의 조건에 자식이 구애받지 않도록 하자는, 교육이 갖는 엄청나게 평등한 함의가 여기 있다.
 
그러나 클린턴 시대의 미국도 그리 평등한 나라는 아니었던 것 같다.
미국이 반성해야 하는 부분이다. 클린턴 때는 경제 환경이 괜찮았다. 그래서 양극화의 본질적 대책인 ‘교육에 대한 역사적 투자’를 게을리 했다. 탈산업화와 양극화에 월스트리트는 금융 버블을 통해 자산가격을 올리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미국 시민들의 실질소득 하락을 자산가격 상승으로 보완한 것이다.
 
그러나 오바마 정부 역시 이런 월스트리트 방식을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교육정책이 핵심이지만 그 효과가 나타나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당분간 소비를 살리는 차원에서 금융 버블을 통해 자산가치를 높이는 전략을 추구할 것이다. 다만 오바마 정부는 금융을 청정에너지 기술 같은 녹색산업에 대한 생산적 투자로 유도하면서 이에 교육개혁을 결합하려 할 것이다.
 
신민주당적 관점에서 한국 정부를 평가한다면.

김대중·노무현·이명박 시대로 한정해서 보면, 정치인이나 지식인 사회에서나 탈산업화 시대라는 자각이 없다. 양극화에 대한 인식만 있다. 그래서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다. 김대중 정부는 IMF나 미국의 압력으로 시장 개혁 및 전면 개방을 적극적으로 수행했으나 이러한 조처가 탈산업화로 가는 문을 연 것이라고 인식하지 못했다. 이때 탈산업화가 15년 당겨졌다. 노무현 정부는 양극화를 물려받아 많은 고민을 했다. 동반성장 전략을 세우기도 했으나 기득권자들과의 싸움에 너무 에너지를 소진했다. 사회적 대타협의 마지막 기회였으나 이를 성공시키지 못했다. 이명박 정부는 보수라고 하나 보수의 특징이 뚜렷하지 않다. 그냥 ‘경영자 정부’로 보인다. 경영자로서 거시적 환경 변화에 무조건 적응한다는 방침이지 ‘내가 노선을 깔겠다’는 것이 없다. 그래서 불분명하다. 예컨대 이명박 정부도 교육개혁을 제시하고 있으나 방향이 틀렸다. 교육개혁의 목표는 탈산업화에 대한 대응으로서 학생들의 지적 능력(skill)을 높이는 것이어야 한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게 교육개혁은 ‘사교육 비용 줄이기’의 일환일 뿐이다. 이는 포퓰리즘에 불과하다.
 
※ 이 기사와 관련해 참조할 도서로는 로버트 라이시의 <부유한 노예>(김영사), <슈퍼자본주의>(김영사), <국가의 일>(까치글방)과 진 스펄링의 <성장 친화형 진보>(미들하우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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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5 21:49 2009/09/05 21: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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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철 2009/09/06 01:40

    '그렇게 외연이 확장된다고 하여 진보가 재구성될리는 만무하기 때문이다.'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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