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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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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숙의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에 관한 경향신문, 한겨레의 서평기사를 보고 이 책을 사봐야지 싶었다. 사실 사주팔자 보는 걸 운명론으로 치부하는 건 조금 거시기했다. 이를 돌파하는 길을 열어주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다. 
 
그런데 동아일보에 '고미숙이 말하는 몸과 우주'가 연재되고 있더라. http://news.donga.com/Series/List_70080000000330/2 
벌써 60회가 넘었다. 이것도 볼만하겠다는 생각은 드는데, 조금은 불편한 부분이 있다. 물론 고미숙은 동아에 연재하면서도 이로 인해 펜을 굽히는 것 없이 자기 할 말은 다했을 터이다. 그런데 이렇게 글을 연재하는 게 과연 진보에 도움이 될까. 
 
여기서 그만. 언제부터인가 깊게 생각하는 걸 귀찮아하기 시작했다. 나이 탓은 아니라고 믿고 싶다. 그리고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라는 제목에서도 지적되었지만, '나의~'라는 식으로 시작하는 책 제목에 딴지를 거는 이들이 있던데, 그 또한 염두에 두었으면 좋았을 텐데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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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와 미신 사이에 갇힌 ‘사주명리학’을 위한 항변 (한겨레, 허미경 기자, 2012.08.31 20:21)
나의 운명 사용설명서 고미숙 지음/북드라망·1만3000원
‘수유+너머’ 태동시킨 고미숙씨 
사주명리학 철학적 입문서 펴내 
‘운명에 개입하는 길’ 안내 나서
지은이는 명리학을 도인이나 무속인의 전유물이라고 간주하는 세간의 시각을 맹렬히 비판한다. “(신비화와 미신화) 둘 다 명리학을 지식의 외부로 축출한다.” 이때 지식의 범주는 철저히 서구적 인식론과 모더니즘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이라는 점에서 명리학에 대한 폄하는 서구의 시선으로 다른 지역 문화를 타자화하는 또다른 오리엔탈리즘이라고 지은이는 비판한다.
그는 “거의 모든 재벌들이 전용 역술가를 거느리고 있음”을 언급하면서, 한국의 지적 풍토는 명리학을 신비와 미신 사이에 묶어 공적인 담론의 장에서 몰아냄으로써 사적으로 상류계급이 독점하도록 했다고 말한다.
그는 진보 단체들이 부딪치는 가장 큰 장벽은 권력의 탄압이 아니라 공동체원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감정의 틈’이라면서, 활동과 일상, 명분과 현장 사이의 이 간극을 통찰하지 못하면 “진보든 혁명이든 별무소용”이라고도 주장한다. 그는 이 간극에는 인생과 자연의 단절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 간극은 물질적 분배와 제도, 시스템만을 강조하는 사회과학 담론에는 자연 혹은 우주가 결락되어 있기에 생겨나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지은이는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한 방향전환의 한 방편이 사주명리학이라고 본다.
그는 사주팔자의 앎이란 결코 운명론이 아니며, 운명에 개입할 수 있는 ‘나’의 길이 들어 있다고 말한다. “중요한 것은 삶을 한 방향으로(만) 이끄는 거울을 깨고 자신의 삶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명리학은 타고난 명을 말하고 몸을 말하고 길을 말한다. 그것은 정해져 있어서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그 길을 최대한 누릴 수 있음을 말해준다.”
 
ㆍ‘나의 운명…’ 낸 고전평론가 고미숙
“힐링이 넘칠수록 상처 또한 더 깊고 다양해지죠. 위로를 받으면 절대 치유가 되지 않습니다. 동정과 연민으론 나를 치유할 수 없습니다. 그 속에서마저 소외를 느끼며 자기 존중감이 생기지 않기 때문이죠. 내가 내 힘으로 치유했을 때만 떳떳할 수 있습니다.” 
“좋은 제도를 만들면 인간의 삶과 존재성이 고양될 것이라는 도식은 명백히 틀렸습니다. 10여년 전, 지식인 공동체를 만들면서 대학과 다른 대안적 시스템을 만들면 다 바뀔 것이라 기대했지만 실제 그렇지 않았죠. 그때부터 서양과학식 패러다임을 버렸습니다.”
자기 욕망을 재구성하고 자기 삶을 긍정하는 것은 혁명을 향한 운동 안에 자신의 존재성을 결합할 때야 가능하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나를 구원하지 못하는 혁명이 누구를 구할 수 있는가. 공적으로 표방하는 명분과 내밀한 욕망 사이의 이중 플레이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아무리 혁명을 외친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라고 되물었다. 이런 고민을 안고 건져 올린 화두가 ‘몸’이었다.
“동양역학을 신비로운 차원으로 환원하거나 지식 이하의 저급한 술수로 매도하는 것은 모두 명리학을 지식의 외부로 축출하는 점에서 동일하죠. 서구의 시선으로 다른 지역의 문화를 타자화, 하위주체화하는 것을 ‘오리엔탈리즘’이라고 한다면, 이 또한 오리엔탈리즘의 일종에 다름 아닙니다.” 
그는 “정치인과 자본가를 비판하는 소위 진보적인 사람들도 현실에서 물질적 욕망을 벗어날 수 없는 이유가 핵가족과 가족주의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자본주의의 상품화가 공동체적 관계를 핵가족으로 끊어내면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이 안에서는 소외와 탈락이 주는 상처를 절대 치유할 수 없다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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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8 09:59 2012/09/08 0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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