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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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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30년을 넘어 다시 복지국가로 (한겨레21 2011.07.18 제869호, 허미경 기자 한겨레 문화부문)
[책 속의 책-구본준 기자가 추천하는 인문서 15선]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죽음에 임박한 한 역사학자가 이 시대에 던지는 통렬한 유언장이다. 토니 주트(1948~2010)는 2006년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 현대사를 분석한 역사서 <포스트워 1945~2005>를 통해 ‘미국적 생활양식’에 대비되는 ‘유럽식 사회모델’을 유럽의 성공 요인으로 ‘통찰’해 미국과 유럽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토니 주트는 2008년 루게릭병을 진단받았다. 그의 몸은 점점 마비됐고, 의료장비의 도움을 받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까지 악화됐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집필된, 정확히는 지인들이 그의 구술을 받아 입력해 완성된 책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국가, 어떤 정부를 선택하고 만들어야 하는지를 화두로 삼은 이 책에서 그는 유럽과 미국의 사례를 역사 속 당대 현실에서 천착하며, 1989년 세계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한 때부터 세계 경제위기(2008)가 몰아친 2000년대까지 최근 30년을 자유시장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의 시대로 파악한다.
그가 보기에, 1970년대에 발아해 ‘공공부문에 대한 경멸과 규제받지 않는 시장, 민영화·민간부문에 대한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쓴 이 30년은 ‘잃어버린 30년’이다. 왜냐하면 제2차 세계대전 뒤 유럽 나라들이, 대공황기 미국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사적 영역의 실패를 공적 영역을 통해 해결한 성과와 그 모든 노력을 이 30년 동안 무위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을 특권화하고 공적 영역을 무시한 극단적인 탈규제 정책의 진원지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문제는 그 어떤 나라도 지난 30년간 ‘경제 관리’와 ‘복지’ 파괴에 앞장서온 미·영 두 나라에 맞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8년 GM 대표가 벌어들인 소득은 GM 노동자의 66배였지만, 오늘날 월마트 대표는 월마트 노동자의 900배에 달하는 돈을 벌 만큼 미국의 빈부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이 시기에 탈규제가 심한 나라일수록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고, 사회문제는 악화 일로를 걸었다. 문제는 국가가 얼마나 부유한지가 아니라 국가 내부의 불평등이 얼마나 큰지였다. 선성장론(후분배론), 곧 번영과 특권은 파이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레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된다는 견해에 대해 저자는,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함을 보여준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역사학자로서 멀리는 19세기, 가까이는 20세기 유럽·미국의 정책들을 들여다보며 역사적으로 통찰한다는 데 있다. 케인스와 루스벨트가 주도한 미국의 뉴딜정책, 전후 유럽 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뤄낸 복지국가, 전후 영국의 사회보장국가 등은 빈부 격차 해소와 사회적 불평등 억제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945년 이후 1980년대까지 약 30년간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빈부 격차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중산층은 무상교육, 무료(저가) 의료 혜택, 공공연금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빈민층과 함께 똑같은 혜택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한 결과 1960년대에 가처분소득이 1914년 이래 사상 최대에 이르렀다. 지은이는 “세상이 그렇게 잘 돌아간” 까닭을 시장의 마술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찾는다. 곧 정부가 시장을 규제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사회주의’란 말이 금기처럼 돼 있고 공공 목적의 재정지출을 옹호하는 논객들마저 ‘자유주의자’(리버럴)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지내온 역사학자로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이지만, 그 목소리는 미국식 사회모델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의 독자에게도 절절한 울림과 함께 직접적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지은이는 2008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이 다름 아닌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 자체라는 점을 상기시켜주었다고 단언한다. 그의 열쇳말은 ‘큰 정부’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다. 요약하면, 사민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복지국가다. 이 역사학자가 격정적 어조로 토해내는 이야기는,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가? 우리가 원하는 국가는 어떤 종류의 국가인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토니 주트는 2010년 3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뒤 그해 8월 뉴욕에서 숨졌다.
 
[신남희의 즐거운 책읽기]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토니 주트/플래닛 (매일신문, 신남희 수성구립 용학도서관 관장, 2011년 08월 04일)
금융위기·복지정책 퇴조·실업률 급증…더 나은 세상은?
주요 공공 산업 부문의 민영화 요구, 효율성을 위한 기업의 대규모 구조조정, 작은 정부에 대한 지향. 최근 우리 사회에서 신봉되어온 이런 정책들은 비정규 일자리의 양산과 실업률 급증, 결혼기피와 출산율 저하 같은 부정적 결과들을 낳고 있다. 경제적 가치를 최상으로 여기며 살아오는 과정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지향해야 할 공동체의 가치는 무엇인지 궁금해하는 이들도 늘고 있다.
영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읽었다.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정말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배제하고 나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특수한 상황에서 이 책을 쓴 저자는, 규제받지 않은 자유 시장과 효율성을 기치로 내건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낳은 온갖 불평등과 극심한 빈부 격차에 격렬한 분노와 슬픔을 드러낸다.
저자는 영국이 신자유주의적 정책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삶에 꼭 필요한 공공재를 민영화시켜 버리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며, 이것은 비용절감을 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필수적인 서비스의 질을 떨어뜨리고 말았다고 한탄한다. 복지의 축소는 사람들의 삶을 악화시키고 사회의 불평등을 심화시킨다. 역사의 교훈을 통해 어렵게 채택된 복지정책들이 후퇴하고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면 우리에게 어떤 미래가 닥치게 될지 우려한다. 그리고 이러한 사태를 야기한 정치인들의 무능과 시민의 무관심을 안타까워하며, 어떤 경우에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합법적인 정치의 영역에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의지를 잃지 말 것을 호소한다.
“우리는 경제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번영과 특권은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확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
사람들이 정치와 정치가들을 신뢰하지 않는 이유는 공공 정책의 의사결정에는 본질적으로 윤리적 성격이 내포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실제 정치적 논쟁은 실용주의적인 관점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래 본능적으로 도덕적 존재이며, 따라서 자신의 도덕적 본능을 표현할 만한 언어를 필요로 하는 존재다.”
그리고 우리에게 더 나은 삶을 원한다면 다시 한 번 정치적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어떠한 사회에서 살기를 원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 내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토니 주트는 역사를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1914년 이전에 세계는 이미 한 차례의 세계화를 경험했다. 하지만 그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재앙으로 이어졌다. 복지국가는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는 일은 절대로 없어야 한다는 절박함 속에서 탄생했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전례 없는 안정과 번영, 평등의 확산을 가져오며 파시즘을 불러온 원동력이었던 중산층의 불안과 불만을 가라앉혔다. 그런데 왜 우리는 복지국가를 버리고 다시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는가? 토니 주트는 다음 세대의 젊은이들에게 20세기 역사의 아이러니를 들려준다. 그리고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면, 그 앎을 행동으로 옮기라고 역설한다.
우리와는 고민의 시점이 다른 점도 있지만, 금융위기나 복지정책의 퇴조, 실업률의 급증 같은 세계적 추세 속에서 우리의 문제를 어떻게 풀어갈 수 있을지 생각해볼 수 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상상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절규하는 저자의 외침은, 책을 쓸 당시의 그의 상황과 맞물려 더욱 절실하게 공감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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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삶을 상상하는' 것은 왜 정치가 아니란 말인가? (프레시안, 최수태 문화평론가, 2011-05-13 오후 6:05:48)
[책 vs 책] '유럽식 복지 국가'를 넘어서
1. 사회학자 엄기호는 애니메이션 <미래 소년 코난>의 '건국 신화'를 거론하면서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에 대한 서평을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질서가 서서히 퇴조해가고 있는 지금 우리 모두는 '복지주의자'가 되어버렸다. 그러므로 현 시점에서 요구되는 것은 성장의 결과를 공정하게 배분하라는 사회민주주의적 요구가 아니라, 전면적이고 근본적인 정치의 재구성이다.
마치 코난이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듯이, 우리는 새로운 공동체의 가능성을 고민해야 한다. 이것이 엄기호의 문제의식이다. 그래서 그는 토니 주트의 마지막 책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한다.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과거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226쪽)는 결론에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엄기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사회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이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이와 같은 전폭적이고 강렬한 비판에 대해 반론이 나오지 않을 리 없다. 플레닛 대표 안성열은 자신이 발행인으로 등재되어 있는 책을 직접 옹호하고자 나섰다. 그런데 그는 자신이 엄기호의 서평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고 고백하며, 더 발전적인 논의를 위해 그의 정치적 입장에 대해 더 따져 묻기로 결정했다. 엄기호의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푸른숲 펴냄)을 꺼내든 것이다. 우리는 그 옹호와 반박의 내용을 "그것이 왜 '정치'가 아닌지 아직도 모르나?"에서 확인할 수 있다.
토니 주트의 책, 그리고 20대 비명문대 학생들의 목소리를 엄기호가 담아낸 책을 전장(戰場)으로 삼아, 예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이 다시금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비록 엄기호는 본인의 서평의 목적은 사회주의를 고리타분한 것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라 "사회주의이건, 사회민주주의건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그의 화살이 어디를 겨누고 있는지는 명백하다. 그러한 엄기호의 입장에 대해 안성열은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적 상상력"은 그가 <미래 소년 코난>에서 이상적인 정치 공동체를 목격했듯이 만화적 상상력에 가까운 몽상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반박한다. 이것은 '사회주의'에 대한 '사회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대응 방식이기도 하다.
어떤 정형화된 대립 구도를 가진 논쟁은 시작되는 것 자체가 이미 실패라고 볼 수 있다. 논쟁에 참여하는 양자 모두 이미 충분히 검증된 '정답'과 '오답'을 모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마치 칸트가 말한 이율배반처럼, 둘 다 옳고 동시에 둘 다 틀린 추상적인 원리가 충돌할 때, 우리의 지성은 갈 곳을 잃고 표류하고 만다. 이렇게 굳어버린 논쟁들의 역사는 비극으로, 희극으로, 그리고 끝없이 되풀이되는 부조리극으로 반복된다.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한 권, 혹은 두 권의 책을 가지고 있다. 우선 서평의 대상이 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있고, 또 안성열이 끄집어낸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도 함께 논의해 보아야 한다. 이것은 분명히 다른 전장에서 펼쳐지는 같은 싸움이다. 하지만 그 지리적 특수성과 보편성에 힘입어 우리는 이 싸움의 갈피를 잡아볼 수 있을 것이다.
2.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엄기호의 독해를 '오독'이라고 몰아붙이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닐 테지만, 그가 특정한 편향성을 지니고 텍스트에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은 어렵지 않게 확인 가능하다. 엄기호의 사회민주주의 비판이 이미 거의 완전한 형태로 토니 주트의 논의 속에 등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토니 주트가 무분별하게 68 세대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토니 주트 혹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새로운 공동체'를 모색하지 않는다는 엄기호의 비판을 기억하는 독자라면, 책을 펼치자마자 우선 당혹스러움을 느끼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당장 19쪽, 즉 서문의 페이지가 고작 세 장 넘어간 지점에 등장하는 다음 문장 때문이다.
"요컨대, 강력한 국가와 개입주의적 정부가 필요하다는 데는 논쟁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국가를 다시 생각해보려는 자는 아무도 없다." (19쪽, 강조는 인용자)
여기서 '국가를 다시 생각한다'는 말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이 책의 최종적인 결론에서 토니 주트는 '현실 속에 존재하는 선택지' 중 하나로 사회민주주의의 가치를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뉘앙스와 함께) 긍정한다. 하지만 그 역시 엄기호가 말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것과 그것이 현재의 언어적/정치적 질서를 뛰어넘는 무엇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해답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질문을 던지기라도 해야 해답을 찾을 것 아닌가? 우리는 변화에 대해 논의하는 방법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다. 우리는 '혁명'이라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되풀이하지 않으면서, 우리 자신을 위해 현재와는 아주 다른 질서를 상상하는 방법을 되찾아야 한다. 우리는 바람직한 목표와 용납할 수 없는 수단을 우리 선배들보다는 더 잘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156쪽)
토니 주트에 대한 엄기호의 비판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있다. 안성열이 지적한 바와 같이 토니 주트는 68 세대의 일원으로 성장하였고 그 빛과 그림자를 모두 목격하였다. 그러므로 그가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주목적이 자유주의적 정책 내에서 상대적으로 괜찮은 급진적 선택을 지지하려는 투표자들을 설득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고 해도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오늘날의 상황에서 그런 말들은 헛소리에 불과하다"(146쪽)고 비판하는 것은, "실제로 독일의 젊은 급진주의자 세대를 숨 막히게 만들고 그들을 "제도권 정치 바깥"으로 몰려가게 만든 것은 교육 정책부터 시작해서 외교, 공중 여가 정책 그리고 불미스런 과거사 문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던 두 정당의 정책적 유사성"(58쪽) 때문이었다는 문제의식을 확고하게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결국 책의 결론에서 토니 주트는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그나마 최선의 해답은 사회민주주의'라는 결론을 내린다. 사회민주주의가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즉 보수주의 정당과 "모든 면에서 별반 다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우리는 이것이 아닌 저것을 택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토니 주트의 이 책에 대한 엄기호의 독해가 공정하다고, 혹은 편향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토니 주트 역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리기는 마찬가지이다. "우리 자신을 위해 현재와는 아주 다른 질서를 상상"해야 한다면서,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는 이유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바로 여기서 적극적인 독해, 능동적인 해석, 창조적인 서평이 요구된다. 왜 이 죽어가는 역사학자는 자신이 비판한 체제를 그 체제의 쌍생아의 해법으로 인정하고 권유할 수밖에 없는가? 하지만 엄기호는 텍스트의 심층으로 들어가 그 자체와 씨름하는 대신, 예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구도 속으로 그것을 끌고 들어가 버렸다. 안성열의 반론은 바로 그러한 선택에 필연적으로 따를 수밖에 없는 결과물이다.
3. 비단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뿐 아니라, 어떤 것이건 이미 만들어진 이율배반적 논쟁의 구도가 도입되면 그 순간 실제 논의 자체는 급격하게 소외되어버린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글을 읽지 않고 비판하고, 논쟁의 핵심이 되는 텍스트에 대해서도 꼼꼼한 독해를 하지 않고 내지른다.
먼저 안성열의 비판을 펼쳐보자. 그는 엄기호가 토니 주트의 대의를 오판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안성열에 따르면 엄기호는 신자유주의 시대와 함께 "국가"가 파괴되었다고 믿고 있지만, 토니 주트의 책에 따르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닌 개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 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하지만 엄기호가 '나라'라는 단어로 작은따옴표를 이용해 지시한 것은 폭력을 합법적으로 행사하는 유일한 권력 집단인 정부 혹은 국가가 아니다. 엄기호가 토니 주트의 책에서 읽어내는 '나라'는 곧 사회이면서 공동체이며 삶의 형식 혹은 양태를 뜻하는 것이다.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의 서두에서 뜬금없이 <미래 소년 코난>과 건국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책이 다름 아니라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
이때의 나라란 단지 시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구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가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 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시대 인식과 공간을 공유한 동시대인 동료들의 정치 공동체인 '나라'다.
엄기호의 서평에서, 안성열이 인용한 문장의 바로 아래에 "이때의 나라란 (…)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문장이 직접 등장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안성열은 엄기호가 '개인 대 국가'의 대립쌍 중 '국가'가 파괴되었다고 말하고 있다고 단정 짓고 그것을 전제로 하여 논의를 진행한다. 불행하게도 그와 같은 독해는 독자뿐 아니라 토니 주트에게도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이다.
토니 주트 본인이 "근대적 삶을 진정으로 구별 짓게 하는 것은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개인이 아니다. 그것은 사회다. 더 정확히 말해 19세기에 기원을 둔 부르주아 사회 혹은 시민 사회"(216쪽)라면서 그 시민 사회의 상징물인 철도를 논하고, "마거릿 대처가 절대로 열차를 타지 않으려 하지 했던 것이 단지 우연만은 아니"(217쪽)라고 의미심장한 여운을 남길 때, 우리는 엄기호에 대한 안성열의 비판이 어떤 '프레임'을 가지고 출발하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가장 강력하고 '유용'한 조정 기구인 국가에 대한 통제권을 회복하기 위해 개인들은 공공에 대한 관심을 회복하고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 토니 주트의 논점이며 그 지점까지는 엄기호 역시 동의하고 있다. 다만 차이는 그 참여의 형태가 무엇이어야 하냐는 것이다. 토니 주트는 문제도 많았고 완벽하지 않지만 지금까지 현실 속에서 검증된 바 있는 사회민주주의를 선택한다. 반면 엄기호는 '좋은 옛 것'보다는 '위험한 새 것'을 선택한다. 양자 모두 신자유주의에 의해 '국가'가 파괴되었다는 말은 하지 않고 있다.
안성열이 엄기호의 서평을 불성실하게 읽었다고 비판하는 것은 이 시점에서, 그것 역시 불성실한 비판에 지나지 않는다. 문제는 대체 왜 이와 같이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오독이 강한 확신과 함께 등장할 수 있느냐이다. 물론 필자는 이미 그 이유를 이 글의 도입에서 제시했다. 엄기호와 안성열 모두 다시 한 번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대리전을 치르고 있기 때문이다. 개별적인 필자의 지적 능력이나 성실성이 아니라, 애초에 그 구도가 도입되었다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4. 한국의 담론 지형에서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은 대략 다음과 같은 형태로 진행된다. '사회주의자'들은 우리에게 주어진 정치적인 구조 자체를 바꾸어야 진정한 변화가 가능할 것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제도권 내에서 수행되는 것뿐 아니라 지금까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던 요소들이야말로 '정치'의 본질을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사회주의자들의 시각에서 보자면 고전적인 주제들, 가령 지역 갈등이나 노동 문제 등보다도 어쩌면 섹슈얼리티와 젠더, 정체성 문제, 문화적인 차이와 다양성을 존중하는 새로운 주제들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68 혁명 이후 이른바 '신좌파'의 도래와는 무관하게, 사실 정치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다는 입장을 고수한다. 일차적으로 경제적 자원의 공정한 배분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 안성열의 표현을 빌자면 "생존"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에서 "삶"을 이야기하는 것은 무의미하거나 해로울 수도 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그러므로 가장 강력하고 효과적으로 자원을 배분하는 도구인 국가 권력을 획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믿으며, 그것을 위한 실천 과정에서 집중을 방해하는 요소들이 '정치'의 일부로 거론되는 현상을 그다지 적극적으로 환영하지 않는다.
이것은 간략한 스케치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로 개별적인 사람, 집단, 조직 내에서 벌어지는 이데올로기적 움직임은 이보다 훨씬 복잡하고 다양하다. 어찌되었건 이와 같은 추상적인 구도가 실제의 논의에 도움이 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모종의 '가족 유사성'을 지니지만, 각자의 머릿속에서 서로 합의되지 않은 채 개별적인 화자의 사고방식을 지배해버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논쟁 참여자들은 비슷한 듯하지만 서로 소통될 수 없는 각자의 방언을 이야기하며 평행선을 긋게 된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에서 엄기호가 청년들의 정치적 무관심에 대해 내놓은 서술을 살펴보자. 그는 젊은이들이 냉소적이라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그들이 '냉소적임에도 불구하고'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이들은 언제 정치적으로 움직이는가? 정치가 사기라는 것을 잘 아는 이들이 정치적으로 움직일 때는 정치가 오락이 되거나 혹은 정치가 오락을 방해할 때이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91쪽)
엄기호에게 청년들이 "시민으로서가 아니라 게이머로서 정치에 참여"(같은 책, 93쪽)하는 것은 결코 탈정치화가 아니다. 오히려 민주주의와 정치를 도덕화한 기존 세대가 이해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정치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다. 하지만 바로 같은 구절을 읽은 후 안성열은 엄기호가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그는 애초에 오락적인 요소들을 '정치'의 일부로 바라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같은 현상을 놓고 엄기호는 젊은이들이 오락을 통해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반면 안성열은 기존의 '정치'가 오락을 이용해 젊은이들을 '끌어들이고' 있을 뿐이라고 본다. 당연히 논의는 평행선을 그을 수밖에 없다. 각자는 자신의 위치에서 상대방을 '무책임한 사회주의자', '고리타분한 사회민주주의자'로 간주하며 흐지부지되어가는 논쟁을 마무리 짓게 되는 것이다.
필자는 지금 두 사람이 시쳇말로 '병림픽'을 벌이고 있다는 식의 비난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라는 형이상학적 구도가 정치적인 판단과 논쟁에 도입되면서 야기하는 막대한 혼돈에 대해 기술하고자 할 따름이다. 이와 같은 형이상학적 이분법이 무서운 이유는, 앞서도 잠깐 이야기했지만, 그것이 특정한 형태로 추출되어 객관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모두의 머릿속에 있는 구도는 각자의 방식으로 전부 다르다. 하지만 그것들은 모두 실질적인 논의를 방해하고 우리의 판단을 마비시킨다.
우리는 발터 벤야민의 표현을 빌려,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처럼 해결될 수 없는 논쟁으로 정치적 논의가 빨려 들어가고 실종되어버리는 현상들을 '정치의 철학화'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정치의 철학화'로 우리는 지난 시대에 만연했던 빨갱이 사냥을 떠올릴 수 있다. 냉전 질서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한, 또 고속 성장에 걸 맞는 공정한 분배를 이루기 위한 실질적인 논의들을, '빨갱이냐 아니냐' 혹은 '공산주의자냐 민주주의자냐' 같은 유사 철학적 구도가 권력의 총칼을 빌어 휩쓸어버린 그것들 말이다.
무상 급식 논쟁, 복지 논쟁에 이르기까지 그 여파는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공짜 밥을 주는 것은 공산주의, 빨갱이다'라는 선언이 등장하는 순간 교육과 복지와 우리의 다음 세대를 둘러싼 정치적 결단은 모두 가장 부정적인 의미에서 '철학화'된다. 올바른 논의의 대상이 되지 못한 채 힘의 논리에 의해 휘둘리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같은 현상을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의 논쟁 구도 속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진중권은 합당론에 대해 강경한 반대 입장을 보이는 진보신당 지지자들을 한껏 조롱하지만, 이화여자대학교 교수 조기숙이 트위터로 "당신의 주장은 국민의 명령과 같다"고 말하자 히스테리컬하게 반발한다. 그는 진보신당 잔류파들 혹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진보정당의 아우라를 가지고 싶지만, 그것을 국민의 명령과 같은 포스트-노무현 시대의 정치 운동에 빼앗기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민주당을 뺀 모든 정당들이 합쳐서 '유럽식 사회민주주의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기표는 진중권과 조기숙 혹은 문성근 모두가 공유하고 있지만, 각자의 속내와 셈법은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그들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사회주의자'들을 규정한 채 몰아세우며, 자신은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사회민주주의자'의 스탠스를 점유한 채, 정치적 세력을 확보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런 식으로 '철학화' 되어버린 정치 속에서는 더 이상의 이성적, 상식적 논의가 불가능하다. 토니 주트의 책을 둘러싼 두 서평자의 논쟁 역시 그 사례 중 하나로 기록될 수 있을 것이다.
5.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고 해야 하는가? '정치의 철학화'에 어떻게 맞설 것인가? 막연한 질문에 대한 해답 혹은 그 실마리를 구하기 위해 우리는 다시 토니 주트의 책으로 돌아가 볼 필요가 있다.
토니 주트에 따르면 68 혁명과 신보수주의 운동은 모두 같은 시대의 산물이다.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98쪽)이라는 서술을 곱씹어보자.
이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토니 주트는 신좌파 운동이 지니고 있는 개인주의적, 주관주의적 경향성을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 문장은 '신좌파=네오콘'이라는 식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에 서 있는 두 집단이 동일한 감정을 느낀다면 그것은 차라리 그 시대의 분위기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비단 젊은이들 뿐 아니라 수많은 이들이 1960년대의 집산주의적 복지국가에 대해 반발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였다. "중산층 시민단체들은 공격적이고 무차별적인 방식으로 진행되는 철거 사업에 반대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90쪽)하였고, "사회민주주의자들이 확고하게 정권을 잡고 있었던 스웨덴에서도 공영 주택, 사회 복지, 그리고 공공 의료 정책에 수반되는 무지막지한 획일성"(90쪽)이 젊은이들을 숨 막히게 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반발로 신좌파 운동이 기존의 사회민주주의를 내부로부터 허물어가는 가운데, 오스트리아 출신의 망명 철학자들의 사고방식이 시카고 대학과 관련된 영미권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사회와 국가에 대한 전반적인 분위기를 뒤바꿔버린다. 신보수주의 운동, 이른바 네오콘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토니 주트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말하자면 70년대 중반부터 이후 30년간 이어진 보수주의의 승리와 그로 인한 근본적인 변화들은 필연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것은 일종의 지적 혁명이 낳은 결과였다. 대략 10년 남짓한 짧은 기간 동안, 공적 담론의 지배적 '패러다임'이 바뀌었다. (104쪽)
보수주의자들은 정책을 둘러싼 논쟁의 장을 정치와 경제가 아닌 문화의 영역으로 돌림으로써 승리를 거두었다고 토니 주트는 설명한다. 그러나 신보수주의는 단지 철학적 차원에서만 머무르지 않고, 신고전학파 경제학자들에게 영향을 미치며 결과적으로 향후 30여 년을 지배하는 정치 담론으로 변모하게 된다. '정치의 철학화'가 아닌 '철학의 정치화'를 이루어낸 것이다.
토니 주트 혹은 그의 대변인으로서의 안성열은 68 혁명이 이루어낸 '철학의 정치화'를 그다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국가 권력의 점유 등과는 무관하게, 21세기를 살아가는 누군가가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집단 구타를 당해도 경찰이 묵인하지 않는 세상이 온 이유는 신좌파적인 철학이 그들 나름의 방식으로 정치화하였기 때문이다.
불과 50년 전만 해도 동성애자들이 언젠가 공개적으로 결혼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주 드문 예외를 제외한다면, 인류의 재생산을 위한 도구가 되라는 사회적 압박을 뿌리치고 여성이 지적인 삶을 살아가는 방법은 오직 수녀 혹은 여승이 되는 것뿐이었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이 모습은 '가족'의 가치를 부르짖던 신보수주의자들이 원하던 바도 아니다. 이와 같은 '정치적' 변화는 1960년대부터 일어난 지적 움직임이 정치의 영역에 반영된 결과물이다. 진보적이건 보수적이건, 그 변화는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다.
민영화가 공적 삶을 얼마나 황폐화시켰는지는 무심결에 내뱉는 새로운 정책 언어에서 빈번히 확인된다. 오늘날 영국의 고등 교육계에서 시장을 메타포로 사용하지 않는 대화는 찾아보기 힘들다. 대학의 학장과 학과장들은 누군가가 이룬 과업의 질을 판단할 때 '산출량(output)'과 '영향(impact)'을 평가하라고 강요받는다. 영국의 정치가들과 공무원들은 공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통적인 독점 산업들을 포기하는 이유를 대기 위해 애쓰면서 '공급자가 다양화되었다'고 둘러댄다. 2008년 6월 영국 노동연금부 장관은 사회 복지 사업의 민영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이를 '복지 전달의 최적화'라는 말로 묘사했다. (122~123쪽)
그렇다면 신좌파 운동은 어떨까? 멀리 갈 것도 없다. "Ill Fares The Land"라는 제목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번역되는 것만 보더라도,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는 신좌파의 언어가 없이는 새로운 정치를 말하지도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제목은 18세기 아일랜드의 시인 올리버 골드스미스의 시에서 따온 것으로, 질병이 퍼지고 죽어가는 대지 위에서 부를 축적하는 사람들과 쌓여가는 시체들의 모습을 묘사하는 장면 중 하나이다.
굳이 한국어로 옮기자면 '죽어가는 대지에서' 정도가 될 수 있겠지만, 출판사는 그런 결정을 내릴 수 없다. 저 시구는 한국어의 유산에 속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즉 우리는 그것을 있는 그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우리는 신좌파의 언어로 제목을 붙인, 하지만 본문에서는 신좌파를 비판하는 책을 읽게 된 것이다.
6. 어떤 '끝없는 논쟁'에 끼어드는 것이 과연 현명하거나 유용한 행동일까? 그러한 논쟁의 구도를 도입하거나 끼어드는 것 자체가 잘못된 행동이라고 나는 이미 비판한 바 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에게는 논의의 기반이 되는 텍스트 그 자체가 있다는 것 역시 잊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한 가지 역설을 발견할 수 있다.
토니 주트의 '결론'은 사회민주주의이지만, 그의 논의 구도는 전체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의 편에 서있다는 것을 말이다. 이 긴 서평의 결론을 대신하여 그 이야기를 해보도록 하자.
토니 주트의 논리 구조가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에서 사회주의 쪽에 더욱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는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제시될 수 있다. 첫째, 앞서 우리가 확인한 바와 같이 그는 '지금까지 상상하지 못했던 정치 질서'를 찾아야 한다는 입장에 선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종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결론으로 내세우지만, 혁명을 거치지 않으면서도 완전히 새로운 질서를 찾아내고자 하는 그의 열정 자체에는 변함이 없다.
둘째, 신좌파 혹은 네오콘들과 마찬가지로 토니 주트 역시 새로운 언어를 찾아내고 사유 체계를 바꾸어내는 것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의 '사회주의 대 사회민주주의' 논쟁의 구도 속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언어란 프로파간다 정도의 중요성만을 지닌다는 것, 혹은 언어를 통한 정치적 변화의 가능성을 논하는 사회주의자들의 어법이 '공상적'인 것으로 치부되곤 한다는 점을 놓고 볼 때, 토니 주트의 무게 추는 (한국의 논의 구도 속에서) 사회주의 쪽으로 쏠린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구절에서 그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방식으로 정치적 변화를 이끌어 내었던 전례들이 있다. 구체제가 비틀거리고 있던 18세기 중반 프랑스에서 가장 중요한 발전이 일어났던 정치 무대는 저항 운동의 현장도, 그 저항 운동을 저지하고자 했던 국가 기구도 아니었다. 중요한 변화는 언어 그 자체에서 시작되었다. 언론인들과 팸플릿 작가들은 체제에 불만을 품은 행정가나 성직자들과 함께 정의나 인민의 권리와 같은 구체제의 언어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다. 결국 이러한 어휘들은 민중 행동의 새로운 표현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절대주의 군주정에 정면으로 맞설 수는 없었지만, 그들은 기존 질서에 대한 반대를 표현하고 상상함으로써, 그리고 '민중'이 믿을 수 있는 대안적인 권위의 원천들을 상정함으로써 절대 군주정의 정당성을 박탈하기 시작했다. 사실상 그들은 근대 정치학을 발명했다. 그리고 이것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모든 질서에 대한 언어적 거부를 통해 탄생했다. 프랑스 혁명이 본격적으로 일어났을 때, 이 같은 새로운 정치 언어는 이미 프랑스 전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실제로 혁명가들은 그 언어가 없었다면 자신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무엇인지 표현조차 하지 못했을 것이다. 모든 것은 말에서 시작되었다. (174~175쪽)
셋째, 한국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논의되는 맥락은, 토니 주트의 논의를 빌려온 후 적용하자면, 일종의 신식민지주의적 사고방식이라고 비판될 여지가 크다. 이것은 그동안 엄기호와 안성열의 논의에서 등장하지 않은 것이므로 조금 더 조심스럽게 소개되어야 한다.
68 혁명은 당시까지의 사회주의적 요구와는 달리 '집산주의'(collectivism)를 거부하고 개인주의적 차원에서 사회 문제에 접근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95쪽)였던 것이다. 그 결과 60년대의 정치는 '정체성'의 정치로 탈바꿈하였고, 공동의 이해관계가 아닌 "사회나 국가에 대한 개인적인 권리들의 총합"(같은 곳)이 정치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좌파 스스로가 속해 있던 국가, 즉 이른바 '선진국' 내에서의 사정일 뿐이고, 그들은 자신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이 미치지 않는 '타자'들을 향해서는 여전히 집산주의적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토니 주트는 그 점을 흥미롭게 지적하고 있다.
흥미롭게도 신좌파는 다른 나라에서 벌어지는 문제에 관해서는 여전히 집단적 속성을 높이 평가했다. 그곳에서 신좌파들은 '빈농', '탈식민', '소외 계층(subaltern)' 등과 같은 불명료한 사회적 범주 아래 모여들었다. 하지만 자국에서는 개인적인 것이 대세를 장악하고 있었다. (96쪽)
'한국에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급진적이다'와 같은 '한국식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목소리는 이와 같은 이중적 시각과 얼마나 다른가? 과연 2011년의 대한민국이 품고 있는 '정치적' 갈등은 '유럽식 사회민주주의'의 도래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단순하고 평면적일까? 정체성의 정치, 언어적 갈등, 대변되지 못해왔고 대변될 수 없는 자들의 목소리를 고려하지 않아도 우리가 겪는 문제들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혹은 그러한 '정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를 '철모르는 공상적인 사회주의 동호회 놀이'라고 매도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마치 비행기를 타고 저 높은 상공에서 이곳을 내려다보는 시각, 혹은 저 유럽의 어느 먼 나라에서 대한민국이라는 변방의 민주적 발전 단계를 내다보는 그런 시각의 산물이 아닐까?
환경주의, 여성주의, 젠더의 정치학, 투표율 50%가 말해주는 대의민주주의 내에서 발생하는 정치적 소외, 이른바 '다문화 가정' 및 그 자녀들의 정체성 갈등이 불러올 예견되는 파국, 즉 도농 갈등이 인종 갈등으로, 지방민에 대한 수도권 거주자들의 차별 의식이 가장 지저분한 형태의 인종 차별로 드러날 가능성에 대한 경계 등 그 모든 것을, '한국에서는 유럽식 사회민주주의만으로도 충분히 급진적이다'와 같은 경험적으로 검증될 수 없는 명제 하나로 덮어버리려는 시각은, 토니 주트가 비판한 '68 혁명' 만큼이나 무책임할 뿐더러 오만하며, 일종의 자기 소외 혹은 자기 멸시에 기반을 둔 사고방식이다. '우리 주제에' 무슨 정체성 타령이야, 사회민주주의만 해도 감지덕지지. 이렇게 볼 때, 토니 주트의 사유를 통해 한국에서의 '사회민주주의'를 비판하는 것은 어느 정도 가능할 것이다.
7.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고, 그것을 언어로 형상화하여 정치적으로 요구하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이 될 수 있고 또 되어야 하는가? 그 대답은 나나 다른 엄기호 혹은 안성열이 내릴 수 있는 것도, 또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한 권의 책이 제시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지금 우리에게 주어진 '텍스트'들을 더욱 더 세심하게 읽고 대담하게 해석하여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그 책을 놓고 논쟁을 벌인 엄기호, 안성열의 논의를, 나는 다시 한 번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우리가 가진 것이 언어뿐이라면, 우리가 유일하게 할 수 있는 윤리적인 행위는 오직 경청하는 것뿐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노력 속에서 '정치'를 바꿀 수 있는 새로운 언어가 나올 가능성도 비로소 발견될 수 있을 것이며, '정치의 철학화'가 아닌 '철학의 정치화'를 모색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지도 확보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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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이 왜 '정치'가 아닌지 아직도 모르나? (프레시안, 안성열 플래닛 대표, 2011-03-18 오후 7:18:13)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vs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엄기호에 따르면, 기성세대가 20대 대학생에게 퍼붓는 비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우파의 비난으로 이들이 "힘든 일을 하기 싫어 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좌파가 하는 비난으로 "완전히 탈정치화되었다"는 것이다. 우파의 비판에 대해서는 대학생들이 등록금을 대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동을 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아느냐고 되물으면서 함부로 이들의 삶을 삭제하는 무례를 범하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어서 그는 젊은이들이 탈정치화되었다는 좌파의 비난 또한 잘못된 것이라고 말한다. 언어는 정치의 전제조건이며, 따라서 탈정치화된 존재는 언어가 부재해야 하는데 이들에게는 언어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엄기호에 따르면 그들의 언어는 다음과 같은 한 마디로 정리된다. "나는 정치에 관심이 없다."
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은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에게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따지지 말고, 왜 그들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먼저 그들의 눈높이에서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며, 그러면 젊은이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성장하고 있음이 보이게 될 것이라는 논리다. 젊은이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적극적인 정치적 의사 표현의 하나로 볼 수 있느냐는 쉽게 대답할 수 없는 문제이다. 하지만 더 큰 문제는 엄기호 자신이 바로 이러한 정치적 무관심의 관점에서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 대한 서평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글의 대의를 완전히 오판한다. 엄기호는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라는 말로 책의 대의를 전달하는데, 토니 주트에 의하면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국가가 아니라 개인들의 삶이기 때문이다. 가해자를 피해자로 둔갑시킨 것이다. 신자유주의가 국가를 파괴했다는 이야기는 이 책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반대로 이 책은 신자유주의를 주창하고 받아들인 국가와 정부 아래에서 개인들의 삶이 얼마나 만신창이가 되었는지를 고발하고 있다. 하지만 국가 자체는 건재했고, 오히려 개인에 대한 국가의 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토니 주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한 가지는 확실히 하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그 누구도 국가 자체를 축소하려 들지는 않았다. 마거릿 대처와 그녀에 뒤이어 등장한 조지 부시와 토니 블레어 가운데 중앙 정부의 억압 기구 또는 정보 수집 기구를 옹호하는 데 주저한 자는 아무도 없었다. CCTV, 도청, 미국의 국토안보부, 영국의 독립안보국을 비롯한 그 밖의 장치들 덕택에 근대 국가가 그들의 신민들에게 행사했던 전방위적인 통제는 오히려 확장일로에 있다." (113쪽)
엄기호는 주트가 68혁명 세대를 "혹독하게 비판"하고 있으며,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고 말한다. 좌파 기성세대와 그들의 비난을 받는 젊은이라는 그의 도식을 떠올리게 하는 판단이다.
먼저 68혁명과 그 세대에 대한 토니 주트의 설명을 간략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후의 복지 국가는 대단히 성공적이었지만 그것은 부작용을 수반했다. 1960년대 후반에 이르면, 국가가 다 알아서 하겠다는 식의 태도는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오고 있었다. 복지 정책에 수반된 무지막지한 획일성은 젊은 세대를 숨 막히게 했다. 또 참혹했던 전쟁과 전후의 어려움을 겪어 보지 않은 60년대 세대는 이전 세대 개혁가들이 내세운 목표인 사회정의와 같은 대의보다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의 표현에 가해지는 제약에 더 민감하게 반응했다.
"60년대 세대를 하나로 뭉치게 만든 것은 모두의 이해관계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와 권리였다. '개인주의', 즉 모든 사람은 사적 자유를 최대한 누리고 자신의 욕망을 어떠한 제한 없이 표현할 자유가 있으며 이 모든 권리는 사회에 의해 존중되고 제도화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점차 좌파의 슬로건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95쪽)
"젊은 급진주의자들은 자신들의 목적을 절대 그런 식으로 묘사하지는 않았을 테지만, 사실상 그들의 감정은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으로 확실히 나뉘어 있었다. 아이러니한 것은 새로 등장한 우파 역시 이와 똑같은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98쪽)
토니 주트는 신좌파의 이러한 개인주의적인 태도가 전후에 인기를 잃었던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존경심' 등을 내세우며 문화 전쟁을 일으키는 빌미를 제공했다고 본다. 68혁명이 내세운 개인의 자유와 욕망의 해방에 대한 요구가 보수주의의 부활과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확산에 영향을 미쳤다고 보는 것이다.
엄기호는 마치 존재의 근간을 부정당한 사람처럼 주트의 비판에 격한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며 주트의 분석에서 68혁명이 비판적으로 언급되는 자리마다 사회민주주의(또는 구좌파)를 집어넣는다. 아무런 설명 없이 모든 것을 전도시키는 것이다. 그 결과 철저히 무능하고 무지한 사회민주주의자들 탓에 신자유주의가 도래했다는 어이없는 강변이 나오게 된다. 하지만 엄기호가 놓치고 있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바로 토니 주트(1948~2010년) 자신이 68혁명 세대라는 점이다.
토니 주트는 복지 국가의 건설을 주도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유산을 높이 평가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오류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평하고 있고, 이러한 접근 방식은 끝까지 이어진다. 하지만 엄기호는 주트의 주장이 결국 "'도로' 복지 국가"에 불과하다고 단정을 짓는다. 이어서 엄기호는 68혁명이 결국 보수주의의 도래에 일조했다는 주트의 평가에 심한 거부감을 드러내며 신자유주의를 초래한 주범은 사회민주주의라는 납득하기 힘든 주장을 펼치면서 사회주의와 어깨동무를 한다.
엄기호는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을 요구한 68혁명의 구호가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이유는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혁명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고 반복해서 말한다.
반면 68 세대가 한 것은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으며 "그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고 추켜세운다. 그러면서 엄기호는 사회민주주의와 복지 국가가 만개한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 봐야 하며, 역사를 되돌아봐야 하는 사람들은 젊은이들이 아니라 사회민주주의자들이라고 거듭 강조한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 그리고 그 삶의 요구에 대해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엄기호에게 반문하고 싶다.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의 이분법을 해체하는 정치는 구체적으로 어떠한 정치인가? 또 "사회 밖으로"를 외칠 때 기본적으로 국가라는 공동체에 주어진 권력은 누가 차지하게 되는가? 그리고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해 책 속에서 충분히 되돌아보고 있지 않은가? 1960년대 후반부터 젊은이들이 사회 복지와 공공 의료 정책의 무지막지한 획일성에 숨 막혀 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주트는 68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그로 인해 초래된 두 가지 결과에 대해 말하고 있을 뿐이다. 하나는 공적인 것보다 사적인 것을 앞세우는 그들의 정서가 아이러니하게도 새로 등장한 우파의 감정과 일치했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신좌파가 감정의 분출과 해방에 몰두한 나머지, 반대급부로 보수주의자들이 '가치', '국가', '권위' 등을 주장하며 문화 전쟁을 벌일 수 있도록 하는 빌미를 제공했으며 결국 정치적 헤게모니를 그들에게 넘겨주게 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엄기호는 토니 주트가 68혁명에 지나친 비난을 퍼부었다고 보고, 68혁명에 지워진 책임을 사회민주주의에 뒤집어씌우려 애쓰며 근거 없는 주장을 계속한다.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서문에서 둘 다 젊은이들을 위해서 이 책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두 책은 오늘날의 젊은이들이 정치에 무관심하다는 데서 의견이 일치하고 그 이유 또한 다르지 않다.
"여론조사는 정치인과 정치 제도에 대한 냉소적인 혐오감을 확연히 드러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독 심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을 꾀하면서 자기네들이 하고 싶은 대로 할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들의 행동이 낳을 결과에 영향을 미치려고 시간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는 것이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136쪽)
하지만 이어지는 논의에서 두 책의 태도는 180도 달라진다. 토니 주트는 정치적 무관심이 초래할 치명적인 위험을 경고하는 반면, 엄기호는 반대로 젊은이들이 정치에 냉소적인 이유를 천작하고 정치가들이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야 한다고 말한다.
엄기호는 20대를 정치적 문제를 제기할 수 있는 능동적인 주체로 보지 않고 재미가 있으면 반응하고 재미가 없으면 반응하지 않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에서 정치를 소비하는 수용자로 이해하는 우를 범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엄기호가 젊은이들의 정치적 언어라고 주장하는 "정치적 관심 안에서 형성된 무관심"의 실체이다. 이처럼 젊은이들이 정치적 능력의 주체로 설 가능성 자체를 부인하고 수동적인 객체로 전락시키면서, 엄기호는 위로와 격려를 해준다는 책의 의도와 달리 사실상 이들을 정치적으로 무력한 존재임을 확정짓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엄기호는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고 말한다. 도대체 복지에 대한 백가쟁명이 벌어지고 있는 상태에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현실적 차별성이 있다는 것인가?
우리는 한 번도 사회민주주의를 경험해 본 적이 없다. 설사 백 번 양보해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가 엄기호의 말처럼 '도로' 복지 국가와 사회민주주의를 말하고 있을지라도, 어쨌든 우리에게는 '도로'가 아니다. 하지만 불과 몇 달 동안 벌어진 논쟁을 두고 엄기호는 우리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어 버렸다고 조롱한다.
엄기호가 말하고자 하는 정치는 아마도 각각이 독자성을 갖는 예술 작품처럼 자유롭고 완성된 삶을 가능하게 하는 정치일 것이다. 그 무엇에도 구속받지 않는, 말 그대로 "해방"된 삶 말이다. 그는 정치의 미학화를 꿈꾼다.
엄기호가 말하는 정치에는 정당의 이름이 적혀 있는 현판이 없다. 당명이 없기 때문이다. 그의 상상 속에서는 개개인의 이름이 정당이고, 개개인의 삶이 이념이다. 마치 개념의 범주에서 벗어나 있는 예술 작품처럼 그가 말하는 정치는 개념 속에서 포착되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68혁명을 꿈꾸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기 때문에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평가에 그토록 과민 반응을 보이고, 그렇기 때문에 현실 정치에 거부감을 드러낼 수밖에 없고, 현실 정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68혁명에 대한 주트의 분석은 아이러니한 방식으로 옳았음을 드러낸다.
우리는 정치를 정치적 범주 속에서 상상한다. 자유주의, 민주주의, 사회주의, 사회민주주의 등으로 불리는 정치적 범주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가 해나가야 할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한다. 당연히 우리만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하지는 않는다. 우리 앞 세대 또한 정치를 상상하고 더 나은 삶을 상상해 왔다. 거기에는 성과도 있었고 오류도 있었다. 우리는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상상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것의 바탕 위에서 상상한다. 성과를 이어받고, 오류를 삭제하며 더 나은 삶이 도래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인간사의 모든 일이 그러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역사를 배우는 이유다.
엄기호가 말한 바처럼 아직도 정치는 기껏 "생존" 수준에 머물러 있는지는 모르지만, 모든 정치, 그리고 모든 이념은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상상하고 주장하며 많은 피를 흘려 왔고, 오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실제로 더 많은 사람들의 생존을 가능케 하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여기에 사회민주주의는 절대적인 기여를 해왔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시대에 많은 이들의 생존이 위태로워졌다. 그렇기 때문에 토니 주트는 사회민주주의를, 그리고 복지 국가를 다시 생각해 보라고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통제와 억압이 두려워 정치를 포기할 때, 우리는 어떠한 통제와 억압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생존"이 보장돼야 엄기호가 그토록 강조해서 말하는 "삶"을 상상할 수 있다. "생존"의 보장, 정치와 국가가 존재해야 할 일차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자유로운 사회라는 미명하에, 국가 경제 발전이라는 미명하에, 가난한 자들의 식판을 발로 걷어차 엎어버리는 짓은 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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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가 '족발'이야? 밥만 먹여주면 다야? 희망은? (프레시안, 엄기호 교육 공동체 '벗' 편집위원, 2011-03-11 오후 6:28:22)
[프레시안 books]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토니 주트의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김일년 옮김, 플래닛 펴냄)에 대한 서평의 서두에서 뜬금없이 <미래 소년 코난>과 건국의 이야기를 한 것은 이 책이 다름 아니라 '나라'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꼬장꼬장한 사회민주주의자/공동체주의자인 주트가 보기에 신자유주의에 의해 파괴된 것은 다름 아니라 '나라'이다.
이때의 나라란 단지 시장을 통제하고 불평등을 조정하는 기구로서의 '국가'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마거릿 대처가 "사회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남자와 여자, 개인만이 있을 뿐이다"고 선언했을 때 사망 신고를 받은 것은 바로 이 시대 인식과 공간을 공유한 동시대인 동료들의 정치 공동체인 '나라'다.
'나라'가 붕괴되고 그 여파가 어떻게 인간의 삶을 집어 삼켰는가에 대해 주트는 지금까지 그 어느 신자유주의 비판서보다 더 격양되고 울분에 찬 목소리로 가차 없이 폭로하고 비판한다. 사회는 더욱 불평등해졌다. 불평등은 인간 삶의 어쩔 수 없는 조건이라고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보기에 불평등해진 사회보다 더 큰 문제는 사람들이 불평등이라는 병리학적 현상을 그저 살아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탐닉하면서 살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결과 '강하다는 것'은 과거에는 고통을 인내하는 능력으로 이해가 되었지만 이제는 '남을 괴롭히는 능력'으로 전환되었다. 가난한 이가 괴롭힘을 당한다면, 모욕을 당한다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런 사회에는 사람들 사이의 상호신뢰, 절제, 정직, 공공선처럼 공동체를 존속시킬 수 있는 가치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 부를 거머쥔 사람들뿐만 아니라 이 체제로부터 얻을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람들 역시 이 '라이프스타일'에 빠져있다. 그 결과 사회는 새로운 '나라'를 건설할 꿈을 꾸지도, 꿀 수도 없게 되었다.
불평등을 조정하고 탈락한 사람들을 세심하게 보살피면서 실패한 사람들의 자존심을 되살리는 것, 그것이 20세기의 진보를 규정짓는 사회 개혁의 핵심이었으며, 그 결과가 복지 국가다. 보편주의에 기초한 복지 국가는 소득과 관계없이 모두 똑같이 사회 부조와 공공 서비스의 혜택을 누렸다. 책에 나온 말을 그대로 인용하면 "살아가는데 필수적인 많은 부분들이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충당된 결과, 1960년대에 이르면 유럽의 중산층들은 자신들의 가처분 소득 수준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바로 국가가 나라, 즉 정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공동체로서의 국가는 공동의 과업을 수행한다. 그리고 이 공동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서는 신뢰와 협동이 필요하다. 세금이 바로 이런 협동과 신뢰의 상징이다. 세금은 당대에 세금을 내는 사람들 사이에 신뢰가 있을 때에만, 그리고 그 세금을 국가가 올바르게 사용할 것이라는 점에 대해 신뢰가 있을 때에만, 마지막으로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인식이 있을 때에만 가능해진다. 이렇게 신뢰가 바탕이 되기 때문에 우리는 모두 '시민 공동체의 일부'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우리'의 근대적 최대치가 바로 '국가'이다. 국가를 통해서 그 공간 안에 있는 우리 동시대인들은 동료라는 감각을 확보하고 서로 신뢰하게 된다.
주트가 지적하듯이 이 정치 공동체인 국가는 1970년을 시작으로 해서 무너지기 시작한다. 모든 신자유주의 비판서들이 다 거론하고 있는 것을 여기서 다시 거론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특이한 것은 저자가 1970년에 들어와 복지국가가 해체되는 것에 큰 공헌을 세운 것으로 '세대'를 거론하고 있다는 점이다.
복지 국가의 혜택을 받으며 성장한 복지의 자식들이 정치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하기보다는 오히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구호를 들고 공적 담론을 잠식했다. 개인과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는 신좌파의 흐름은 나름의 정당성이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 즉 공동의 것에 대한 의식을 명백히 퇴조시켰다. 여기에는 오로지 개인적 주관주의, 즉 순전히 자기 기준에서만 측정한 이해관계와 욕망뿐이었다고 주트는 혹독하게 비판한다. '사적 자유에 대한 열광'과 '공적 구속에 대한 짜증'에 빠진 복지의 자식들이 하이에크와 같은 보수주의, 즉 신자유주의의 귀환을 부채질한 것이다. 젊은 세대에 대한 그의 입장은 대단히 가혹하다.
문제는 오늘날 그들(노인들을 의미함)이 받는 혜택의 비용을 지불하는 자들이 대공황과 전쟁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즉 복지 국가가 탄생할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이유를 알지 못하는 젊은 세대라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부담해야하는 비용에 분노했다. (151쪽)
그 결과가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신자유주의가 망쳐놓은 세계이다. 무엇보다 공동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신자유주의에 따른 공공 부문의 민영화와 같은 정책의 가장 두드러진 결과는 '우리가 다른 시민들과 무엇인가를 공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기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동시대인을 동료로 끌어 모으는 것이 아니라 동료들이 그저 동시대인으로 해체되고 있다.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동시대인은 시간은 공유하지만 공간을 공유하지 않는다. 세계화는 이 흐름을 가속화시켰다. 이제 나의 '동료'는 지구 저편에서 나와 채팅하는 사람이지 우리 동네에 사는 김 씨 아저씨가 아니다. 그러나 정치는 김 씨 아저씨와 하는 것이지 지구 저편의 페르난도와 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구화된 동시대인들 사이에는 '정치'가 들어설 여지가 없다. 왜냐하면 저자에 따르면 정치는 특정 공간에서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우리는 정치 운동이 없는 시대에 들어섰다. 물론 여기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시애틀에서부터 시작된 저 거대한 반지구화 운동이 있지 않은가? 2년에 한 번씩 전 세계의 사회운동이 모여서 세계사회포럼을 개최하지 않는가. 지금도 지구 어디선가는 세계화에 대항하고 지구 온난화에 대항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지 않는가.
그러나 이것에 대해서도 주트는 지극히 비판적이다. 그가 보기에 이것은 "여럿이 모여 감정을 표출하는 것 이상"은 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목표들을 하나로 아우르지 못하는 한 이것은 정치 운동이라기보다는 정치적 삶에서 그저 소비자로 살아가는 것에 불과하다. 저자는 이에 대한 한 마디로 응수한다. "이보다는 잘해야 한다."
자, 여기까지다. 그는 '이보다는 잘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첫 단추는 공적 대화를 재구축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더 잘해서 만들어야 하는 그 공적 대화의 공간이자, 결과는 '도로' 복지 국가이다. 그는 책의 맨 마지막에서 세계를 변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마르크스의 말을 인용하였지만, 그 변혁을 통해 복귀해야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이다.
주트는 신자유주의가 유럽을 18세기로 돌려놓았다고 흥분하였지만, 그가 변혁을 통해 이루고자하는 것도 짧게 보면 1945년에서 1970년 사이에'만' 존재하던 바로 그 '복지 국가'이다. 그래서 그는 갑자기 신중함을 요구하며 우리는 20세기의 업적들을 다시 상기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에 맞선 최선의 중재 기구는 다시 '국가'이며, 국가만이 시민에게 응답할 수 있고, 시민만이 국가에 응답할 수 있다고 한다. 철도나 운동장과 같은 공공시설을 만드는 것, 즉 개인의 욕망을 전체에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한데 모을 수 있는 것으로 세금보다 더 나은 제도는 아직까지 없다.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사회주의는 그 어떤 외형도, 그 어떤 아류도 실패했다. 반면 사회민주주의는 이미 많은 국가에서 권력을 잡는데 성공했을 뿐 아니라, 최초에 사회민주주의의 기틀을 닦은 사람들이 가졌던 소박한 꿈을 훨씬 뛰어넘는 대성공을 거두었다. 19세기 중반에는 그저 이상에 불과해 보였던 것들이, 그리고 20세기 초까지만 해도 지나치게 급진적으로 보였던 것들이 많은 자유주의 국가들에서 일상적인 정치가 되었다. (229쪽)
사회주의는 실패했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성공을 거두었다고 하는 주트의 단언에 조소하는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들이 보기에 신자유주의야말로 사회민주주의가 실패한 결과가 아닌가? 신자유주의와 대결하였다가 굴욕적으로 패배하고 무릎을 꿇은 것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가 아니냐는 사회주의자들이 조소가 들려오는 듯하다.
사회주의자들뿐만이 아니다. 토니 주트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를 젊은이들을 위해서 썼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주트는 한국어판 제목으로 말하자면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고 촉구하였지만, 젊은이들이 결국 '도로' 사회민주주의에 불과한 그의 당부에 그리 귀를 기울일 것 같지는 않다.
1960~70년대 청년들의 문화 운동과 신좌파 운동에 대한 주트의 이야기를 돌아보자. 사실 <신자유주의 : 간략한 역사>(한울 펴냄)를 쓴 데이비드 하비도 신자유주의가 출현할 수 있었던 문화적, 사회운동적 배경으로 68 혁명을 거론하고 있다는 점에서 토니 주트와 의견을 같이 한다. 요컨대 앞에서 주트가 말한 '사적 자유에 대한 갈망'과 '공적 간섭에 대한 짜증'이 '자유'를 전면에 내세운 신자유주의와 친화력이 상당하였다는 점이다.
68 혁명은 이미 모순에 처해있던 자본주의가 울고 싶은데 뺨때려준 것과 같은, 자본주의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준 것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단순하게 정리하면 포디즘 체제의 축적 양식이 위기에 처했으며, 그 위기에 따라 노동을 더욱 심하게 통제하는 방식이 아니라 '더 많은 자유'를 통하여 새로운 축적 양식이 출현해야 하는 때에 자본주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 오히려 68 혁명이라는 이야기이다.
대표적인 것으로 대학을 들 수 있다. 미셸 푸코도 1968년의 혁명은 19세기에 시작된 고등 교육 형태, 즉 소수의 젊은이를 사회적 엘리트로 변환시키는 신기한 제도로서의 대학을 효과적으로 종결시켰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사회가 자신의 지식을 전달하고 지식이란 가면 아래 자신을 전달하는 거대한 메커니즘은 그대로 남아있다. 대표적인 것이 고등학교이다. 이에 반해 오히려 대학은 자신의 낡은 구조를 제거하고 신자본주의의 요구에 실질적으로 적응하였다고 볼 수 있다.
프랑스 68 혁명의 교과서라고 불리는 <일상생활의 혁명>(주형일 옮김, 이후 펴냄)을 쓴 라울 바네겜 역시 다른 혁명과는 달리 수천 년간의 비인간적 행위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유일한 혁명인 68 혁명은 억압적 폭력의 회오리 속에서 완성되지 못했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1968년에 경제는 자신의 '전성기와 전멸기의 매듭'을 지었다.
자본주의는 생산보다 일반화된 소비에서 더 많은 이익을 얻는 상품 체계로 전환되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역시 스펙터클로 전환하였다. 사회는 권위주의에서 시장의 유혹으로, 저축에서 낭비로, 청교도주의에서 쾌락으로 땅과 인간을 볼모로 만드는 착취에서 환경의 영리적 재구성으로 바뀌었다.
무엇보다 사람에 대한 관점이 바뀌었다. 자본은 이제 사람과 사람의 창조력이 더 중요한 자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68 혁명 이후의 자본주의는 '개인보다 소중한 자본'에서 '가장 소중한 자본으로서의 인간'으로 서둘러 넘어갔다. 살아있는 자의 수익성은 더 이상 그의 소진에 기대를 거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재구성에 기대를 걸게 된다. 그 결과는 다품종 소량 생산, 유연 생산 방식의 포스트포디즘이다. '더 많은 자유'와 '더 많은 상상력'이라는 68 혁명의 구호는 자본주의의 구세주가 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이 증명하는 것은 68 혁명의 의도가 아니라 오히려 자본의 괴물과 같은 적응력,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하는 능력이다. 따라서 뒤집어 생각해보면 자본이 젊은 세대의 문화 운동과 신좌파들의 주장을 포섭하는 동안, 구좌파들이 이것을 사적인 것으로 폄훼하면서 적극적으로 포용하지 못한 철저한 무능과 무지의 결과이지 68 혁명 자체의 귀결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들 구좌파는 자본이 이들이 요구하는 것의 자본주의적 의미를 귀신같이 알아차리고 포섭하는 동안 젊은이들의 주장이 무엇인지 파악조차 못했다. 그래서 그것이 사적인 욕망을 분출하는 징징거림 혹은 조직적 당을 파괴하려는 짓거리 정도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 공적인 것과 사적인 것 사이의 이분법, 이미 정치적으로 구획된 그 정치를 해체하려는 가장 '정치적인 시도'였다.
이것을 위에서 이야기한 바네겜의 <일상생활의 혁명>을 통해서 살펴보자. 68 혁명이 일어나기 1년 전에 써진 이 책에서 그는 "일상생활을 지배하던 권태와 그 원인을 고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비주의의 확산과 사회의 스펙터클화에 따라 세상이 안온한 무덤이 되어가는 것 같은 그 순간에 사실 '삶에 대한 열정'이 소비에 대한 자유로 완전히 대체되고, 박탈된 자유에 대한 불만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삶의 열정에 대한 관심'은 오히려 더 증가하였다.
그래서 나온 68 혁명의 언어는 "착취자에게 죽음을!"이 아니라 "무엇보다 우선 삶을!"이다. 이것이야말로 68 혁명이 어디에서 출발하여 무엇을 지향하였는지를 정확하게 보여준다. 이들은 생존이 아니라 삶을 위하여 "사회 밖으로!"를 외쳤다.
바네겜은 "우리는 '굶어죽지 않는다는 보장'이 '지겨워 죽을 위험'과 교환되는 세계를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며 일상생활이 주된 걱정거리가 되었다고 말한다. 생존의 풍요로움이 곧 삶의 빈곤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이다. 집단적 생존의 문명은 개인적 삶의 죽은 시간들을 증가시키기만 하였다. 따라서 아무리 스펙터클과 소비 상품들이 넘쳐난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이 만들어내는 환상은 '신성한 것이든 통속화된 것이든, 집단적인 것이든 개인적인 것이든' 어떤 환상도 일상적 행위들의 빈곤함을 숨길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람들은 소비를 통하여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으며 모든 욕망을 해방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소비 사회는 소비와 스펙터클에 갇힌, 자유의 이름으로 자유를 감금하는 시스템이라고 고발한다. 따라서 이들의 무기는 화염병만이 아니라 언어였다. 이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창조성이며, 창조성의 존재 양식인 자발성이었다. 따라서 68 혁명이 말과 구호, 아니 시(詩)의 축제인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68 혁명 당시 프랑스가 아니라 알제리에 있었던 푸코조차도 68 혁명이 없었다면 감옥과 섹슈얼리티 등의 것들에 대한 자신의 연구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인정한다. 그는 "5월의 운동은 교육 체제에 종속되었던 반복적인 상황과 보수주의의 가장 구속적인 형태에 종속되었던 개인들이 혁명적 전투를 전개"한 것이며 이로 인해 촉발된 "사유의 위기'는 뿌리가 깊은 것이라고 주장한다.
사회민주주의가 안정화되어 있던 스웨덴이나 인민민주주의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던 폴란드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한 항거가 증폭되고 있던 튀니지에 이르기까지 국가나 다른 제도들 혹은 억압적 집단들이 행했던 일상생활에 대한 계속적 억압, 그리고 이런 불편함을 생산한 권력에 대한 항거가 68 혁명이다.
푸코가 간파했듯이, 68 혁명의 주역들은 국가 권력뿐만이 아니라 대학 당국에서 텔레비전 그리고 길거리 등 사회 속에서 다양한 경로와 제도들을 통해 작동하는 권력을 문제 삼았다. 그들은 사람들이 더 이상 통제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들은 특정한 제도들이 이성이나 정상성의 이름으로 행위, 존재, 실천, 발언의 방식을 확립하고 개인들을 비정상, 광인으로 낙인찍음으로 개인들의 집단에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나아갔던 방식을 추적하였다. 68 혁명은 사회의 특정한 계층과 청년 문화에 영향을 발휘하던 권력 형태의 전체 연결망에 대한 반란이었다.
이처럼 푸코는 68 혁명의 독특성은 전통적으로 정치의 공식 영역이 아니던 부분들 전반에 걸쳐 정치를 향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라고 본다. 당시에는 마르크스주의와 마오쩌둥주의 언어가 혼재하여 존재하는 모든 문제들을 이들 언어로 적어보려고 하였지만 그 결과는 오히려 마르크스주의가 이런 문제와 직면하는 것에 무기력하다는 것만 입증하였다.
이것으로 정치적 교의의 틀 안에서 문제를 제기하는 행위는 종언을 고하고 정치 자체에 대해 다양한 질문들이 던져졌다. 68 혁명이 언어의 혁명일 수 있었던 것은 이 혁명이 그동안 갇혀있던, 혹은 제기되지 않던 질문을 제기하는 행위를 해방시켰다는 점이다. 더 이상 진리와 권위, 그리고 당의 이름으로 의문에 붙여지지 않는 것은 있을 수 없었다.
이것은 전혀 사적인 징징거림이 아니다. 또 주트가 말하는 것처럼 공동의 것을 추구하지 않고 오로지 욕망에만 충실한 그런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정치의 재구성이다. 사회민주주의/복지 국가가 만개해 있던 상태에서 이런 주장이 나왔다는 것에 대해 지금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더욱 깊게 생각해봐야한다.
주트는 젊은이들이 역사를 다시 돌아보아야 한다고 말하지만 정확히 같은 이유에서 1968~70년대를 다시 돌아봐야하는 것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현실적으로 가장 이상적인 사회민주주의가 왜 청년에게 감옥으로 느껴졌는지에 대해서 말이다. 그들이 왜 생존이 아니라 삶을 이야기했는지에 대해서, 그리고 그 삶에 대한 요구에 당시의 사회민주주의가, 아니 지금의 사회민주주의 역시 마찬가지로 얼마나 무지했는지, 그리고 무관심했는지를 돌아보아야한다.
내가 이 서평에서 사회민주주의가 낡은 흘러간 옛 노래라고 주장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사회주의이건, 사회민주주의건 그것을 재생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아야한다는 것이다. 보라. 지금 신자유주의가 몰락하고 있는 시점에서 박근혜부터 진보신당에 이르기까지 우리 모두는 '복지주의자'가 되었다.
동구 몰락 이후 모두가 민주주의자가 되었을 때 자신만 민주주의자인 척하다 망해버린 좌파의 전철을 또 밟을 것인가?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만으로, 복지에 대한 주장만으로는 아무런 현실적 차별성을 주장할 수 없다. 복지에 대한 진짜/가짜 논쟁은 장충동 족발 집에 붙어 있는 '진짜 원조', '원조 중의 원조'만큼이나 무의미하다. 어쨌든 모두가 복지주의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회민주주의가 지금까지 인류가 실험해왔던 체제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나은 것이었으니 그리로 돌아가자는 주장만으로는 사람을 움직일 수 없다. 왜냐하면 해방에 대한 요구는 그 때보다 더 많아지고 더 커졌기 때문이다. 사회민주주의는 그 해방의 요구에 무관심하거나 무지하거나 무능해서 신자유주의에 패배한 것이다.
지금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고민해야하는 것은 저 주장들이 신자유주의를 불렀다는 타박이 아니다. '더 나은 삶'은 지금의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것만큼이나 그때의 사회민주주의도 넘어서는, 그런 정치적 상상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해방에 대한 욕구들에 더 선도적으로 응답할 때 출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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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의 숭고한 기원 새겨라" 죽은 역사학자의 마지막 당부 (한국, 남경욱기자, 2011/02/18 12:55:39)
"우리는 경제 '성장'이 충분히 이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가정한다. 번영과 특권은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확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
영국 출신 역사학자 토니 주트(1948~2010)는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에서 이렇게 단언하면서 오늘날 세계가 당면한 가장 핵심적 과제는 불평등의 완화임을 역설한다. 이 책은 전후 유럽에 관한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는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인 주트가 루게릭병으로 온몸이 마비되어가는 고통 속에서 쓴 마지막 저서다.
주트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비판하면서 역사가답게 이를 극복할 대안으로 20세기 역사를 되돌아볼 것을 권한다. 특히 복지국가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떤 과정을 거쳐 다시 불안의 시대로 들어섰는지를 되새기게 함으로써 신자유주의에 함몰돼 있는 서구 사회에 각성을 촉구한다.
서구에서 복지국가가 등장한 것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 후 그 참담한 시절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는 절박함에서 탄생했다. 시장은 규제되었고,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시민의 당연한 권리로 인식됐다. 서구의 복지국가는 2차대전 이후 수십 년간 전례 없는 번영과 평등의 확산을 누렸다.
복지국가가 퇴색되기 시작한 것은 2차대전 이후에 태어나 복지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던 1960년대 세대들이 정의나 기회균등보다는 개인의 권리를 강조하면서 싹텄다는 지적이 예리하다. 신좌파의 이러한 태도는 사회 구성원들이 같은 목표를 공유한다는 의식의 퇴조를 가져왔고 이는 우파 역시 마찬가지였다. 주트는 이런 태도들이 보수주의의 귀환을 불러왔다고 본다.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만이 있을 뿐이다"고 한 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의 말이 이 같은 사조를 대변한다.
주트는 돈벌이에 대한 강박, 민영화와 민간 부문에 대한 숭배, 점증하는 빈부 격차 등 서구 사회에서 자연스러운 것들로 보이는 물질주의적이고 이기주의적인 특성은 인간 조건에 내재한 것이 아니라 8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또 이러한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를 퍼트린 것은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영미권 경제학자들로 알려져 있지만 이들의 사고방식에 영향을 미친 것은 나치의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이라고 추적해 들어간다. 그러면서 서구사회가 세계 대전의 잿더미 위에서 건설한 복지국가라는 위대한 유산을 잊지 말라고 당부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살아 왔다. 우리는 법원의 판결이나 의회 법안이 좋은 것인지, 공정한 것인지, 정당한 것인지, 올바른 것인지 묻는 법이 없다. 과거에 우리는 이러한 정치적 질문들을 던지곤 했다."
주트의 지적은 외환위기 이후 밀어닥친 신자유주의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한 한국 사회에도 경종을 울린다. 주트는 사회의 공동선을 위한 공동 행동의 가치와 가능성을 믿는 사회민주주의의 입장에 서서 자본주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삶의 방식에 이의를 제기하고 있다.
 
“강력한 복지국가, 우리가 갈 길이다” (한겨레, 허미경 기자, 2011-02-18 오후 07:46:07)
역사학자 토니 주트 마지막 저서
불평등 키운 미국 사회모델 비판
‘큰 정부’ 유럽국가들서 대안 찾아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 토니 주트 지음·김일년 옮김/플래닛·1만3000원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죽음에 임박한 한 역사학자가 이 시대에 던지는 통렬한 유언장이다. 토니 주트(1948~2010)는 2006년 2차대전 이후 유럽 현대사를 분석한 역사서 <포스트워 1945~2005>를 통해 ‘미국적 생활양식’에 대비되는 ‘유럽식 사회모델’을 유럽의 성공 요인으로 ‘통찰’하여 미국과 유럽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영국 태생 유대인으로 영국과 미국에서 활동해온 이 역사학자는 미국의 이라크전쟁과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전쟁을 강하게 비판하고, 불의를 잘못이라 말하는 데 망설이지 않았던 지식인으로 평가된다.
토니 주트는 2008년 루게릭 병을 진단받았다. 그의 몸은 점점 마비되기 시작했고 의료장비의 도움을 받아야만 숨을 쉴 수 있는 상태까지 악화됐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이런 “특수한” 상황에서 집필된, 정확히는 지인들이 그의 구술을 받아 입력하여 완성된 책이다.
더 나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어떤 국가, 어떤 정부를 선택하고 만들어야 하는지를 화두 삼은 이 책에서 그는 유럽과 미국의 사례들을 역사 속 당대 현실에서 천착하면서, 1989년 세계 공산주의 진영이 몰락한 때부터 세계 경제위기(2008)가 몰아친 2000년대까지 최근 30년을 자유 시장을 앞세운 ‘신자유주의’의 시대로 파악한다. 그가 보기에, 1970년대에 발아하여 ‘공공부문에 대한 경멸과 규제받지 않는 시장, 민영화·민간부문에 대한 숭배’로 특징지어지는 신자유주의가 세계를 휩쓴 이 30년은 ‘잃어버린 30년’이다.
왜냐하면 2차대전 후 유럽 나라들이, 대공황기 미국이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사적 영역의 실패를 공적 영역을 통해 해결한 성과와 그 모든 노력들을 이 30년 동안 무위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사적 영역을 특권화하고 공적 영역을 무시한 극단적인 탈규제 정책의 진원지는 미국과 영국이었다. 문제는 그 어떤 나라도 지난 30년간 ‘경제 관리’와 ‘복지’ 파괴에 앞장서온 미·영 두 나라에 맞서지 못했다는 것이다. 1968년 지엠 대표가 벌어들인 소득은 지엠 노동자의 66배였지만 오늘날 월마트 대표는 월마트 노동자의 900배에 달하는 돈을 벌 만큼 미국의 부 양극화는 극심해졌다. 영국 역시 오늘날 소득, 건강, 재산, 교육, 개인 삶 향상 기회 등 거의 모든 영역에서 1920년대 이후 사상 최대로 불평등이 커졌다고 지은이는 지적한다.
이 시기 탈규제가 심한 나라일수록 부유한 소수와 가난한 다수 사이의 격차는 더욱 커졌으며 사회문제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문제는 국가가 얼마나 부유한지가 아니라 국가 내부의 불평등이 얼마나 큰가였다. 선성장론(후분배론), 곧 번영과 특권은 파이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레 (다양한 계층으로) 확산된다는 견해에 대해 지은이는,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함을 보여준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역사학자로서 멀리는 19세기, 가까이는 20세기 유럽, 미국의 정책들을 들여다보며 역사적으로 통찰한다는 데 있다. 케인스와 루스벨트가 주도한 미국의 뉴딜정책, 전후 유럽 스칸디나비아에서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이뤄낸 복지국가, 전후 영국의 사회보장국가 등은 빈부 격차 해소와 사회적 불평등 억제에 대성공을 거두었으며, 1945년 이후 80년대까지 약 30년간 유럽 국가들과 미국에서 빈부 격차가 극적으로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유럽의 중산층은 무상교육, 무료(저가) 의료 혜택, 공공연금에 이르기까지 노동자·빈민층과 함께 똑같은 혜택을 누리는 대신 자신들의 세금으로 이 비용을 충당한 결과 1960년대에 가처분소득이 1914년 이래 사상 최대에 이르렀다. 지은이는 “세상이 그렇게 잘 돌아간” 까닭을 시장의 마술을 믿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는 데서 찾는다. 곧 정부가 시장을 규제했기 때문이다. 양차 세계대전과 대공황을 겪으면서 사람들 마음속에서 그나마 남아 있던 자유방임국가의 잔재가 쓸려나갔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징후는 ‘계획’이었다. 좌파 진영은 소련이 그토록 잘나가는 이유가 ‘계획’에 있었다고 생각했고 우파 진영도 히틀러·무솔리니 파시즘의 인기는 상명하달 계획경제에 있었다고 믿었다. 그 판단은 정확했다고 지은이는 말한다.
이 책은 ‘사회주의’란 말이 금기처럼 돼 있고 공공 목적의 재정 지출을 옹호하는 논객들마저도 ‘자유주의자’(리버럴)를 자처하는 미국에서 지내온 역사학자로서, 유럽과 미국의 젊은이들을 위해 쓴 책이지만, 그 목소리는 미국식 사회모델이 횡행하는 한국 사회의 독자들에게도 절절한 울림과 함께 직접적인 문제제기를 하는 것으로 느껴진다.
지은이는 2008년 경제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은 ‘규제받지 않는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점을 상기시켜 주었다고 단언한다. 그의 열쇳말은 큰 정부, 복지국가, 사회민주주의다. 요약하자면 사민주의에 입각한 강력한 복지국가다. 오늘 미국에서 그 근간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지만 20세기 미국의 입법·사회정책 가운데 최선에 속하는 것 대부분은 유럽인들이 사민주의라고 부르는 것에 상응하며, 현재로선 사회민주주의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 것으로 보인다고 그는 말한다.
이 역사학자가 격정적인 어조로 토해내는 이야기는, 우리는 질문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와 나는 어떤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가? 우리가 원하는 국가는 어떤 종류의 국가인가?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토니 주트는 2010년 3월 이 책을 세상에 내놓은 뒤 그해 8월 뉴욕에서 숨졌다.
 
[책과 삶]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경향, 백승찬 기자, 2011-02-18 20:49:16)
ㆍ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공공의 목적을 생각한다면…시장 규제 ‘강력한 복지국가’가 묘약
“복지예산은 역대 최고”라고 자화자찬하는 집권자들이나 “사회 따위는 없다. 오직 개인과 가족이 있을 뿐”(마거릿 대처 전 영국 총리)이라고 믿는 보수주의자들은 어차피 이 책에 관심이 없을 것 같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좌파들의 각성을 촉구한다. 저자 토니 주트는 좌파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국가를 두려워하지 마라”, “개인의 자유뿐 아니라 공공의 목적을 생각하라”.
현대사가 시작된 이래 줄곧 폭압적인 국가에 시달려온 한국의 좌파들은 국가 권력을 강조하는 시각에 두드러기가 날지도 모른다. 일단 주트는 이 책이 “대서양 양안에 사는 젊은이들을 위해 쓴 것”이라고 말한다. 그렇다 해도 미국과 서유럽의 생활양식이 한국과 무관하지 않다는 건 분명하다. 책의 목표는 “정부가 우리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우리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고, 또한 국가가 가까운 미래에 사라질 일은 없을 것이기에 우리가 원하는 국가가 어떤 종류의 국가인지를 생각”하자는 것이다.
2008년의 전 지구적 금융 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은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알려줬다. 지난 30년간 미국과 영국, 그리고 이를 추종하는 자본주의 국가들은 일관되게 공적 영역을 축소하고 사적 영역을 확대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1968년 GM의 CEO가 벌어들인 소득은 기본급과 수당을 합쳐 일반 노동자의 66배였다. 오늘날 월마트 CEO는 일반 노동자 임금의 900배를 번다. 소득 불평등의 정도는 유아사망률, 범죄발생 빈도, 기대수명, 정신질환 발병률과도 관련 있다. 불평등의 심화는 인간을 자포자기 상태로 몰아넣는다. 일찍이 레프 톨스토이는 <안나 카레니나>에 이렇게 썼다. “인간이 적응할 수 없는 삶의 조건은 없다. 특히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조건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일 때는 말이다.”
원래 세계는 이 모양이 아니었다. 1914년 이전 세계는 이미 한 차례의 세계화를 경험했다. 결과는 두번에 걸친 대재앙, 즉 세계대전이었다. 복지국가는 다시는 그러한 재앙을 겪지 않아야 한다는 절박함의 산물이었다. 시장을 규제하고 공동체의 관계를 복원했다. 그리고 세상은 평화로워졌다.
평화는 권태를 불렀다. 1960년대 신좌파를 비롯한 젊은이들에게 복지국가는 지루한 일상이었다. 60년대 세대를 뭉치게 한 것은 공공의 목표가 아니라 개인의 권리였다. 다시 발흥한 우파도 비슷한 심정이었고, 그들의 반격이 시작됐다.
주트는 믿는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도덕적 존재이며, 따라서 자신의 도덕적 본능을 표현할 만한 언어를 필요”로 한다고. 그러므로 부익부빈익빈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사람은 많지 않다고. 좌파는 인간의 도덕 본능을 충족시킬 언어를 개발해야 하고, 이는 국가의 역할을 새로 생각하고 정치를 포기하지 않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주트는 방대한 역사서 <포스트워 1945-2005>의 저자다. 이 책이 한국에 출간된 2008년, 그는 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한 주가 지날 때마다 6인치씩 면적이 줄어드는 감방”에 갇혔다.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는 지난해 8월 타계한 주트의 마지막 책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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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 대안은 복지국가" (서울=연합뉴스, 황윤정 기자, 2011/02/14 16:12)
英역사학자 주트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 출간
신간 '더 나은 삶을 상상하라'(플래닛 펴냄)는 영국 출신의 저명한 역사학자 토니 주트의 복지국가론을 담은 책이다. 지난해 8월 루게릭병 합병증으로 별세한 그는 루게릭병으로 거동이 불편한 와중에 쓴 이 책에서 2차 세계대전 이후 '공동선'으로 생각되던 복지 국가가 1980년대 이후 어떻게 쇠퇴하게 됐는지 되짚어보면서 지금이야말로 강력한 복지 국가가 어느 때보다 필요한 때라고 역설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유럽 현대사를 통찰한 저서 '포스트워(Postwar)'로 유명한 그는 가차없는 현실 비판으로 책을 시작한다.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무언가 근본적으로 잘못돼 있다. 지난 30년간 우리는 물질적 사리사욕의 추구를 미덕으로 삼아 왔다. 정말 이러한 욕망의 추구를 배제하고 나면 우리는 공동의 목적의식에 대해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저자는 또 현대인들이 "경제와 정치의 불안정을 넘어 인신(人身)의 안전마저 담보해 주지 못하는 불안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진단한다. 그러면서 돈벌이에 대한 강박, 민영화에 대한 숭배, 점증하는 빈부격차 등 오늘날 '자연스러워' 보이는 것들 가운데 대부분은 1980년대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분석한다.
1980년대 미국과 영국이 사적인 개인의 이익 추구를 미덕으로 내세우면서 신자유주의가 새로운 지배적 경제 이데올로기로 부상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특히 이런 패러다임의 전환을 가져온 것은 시장 중심의 주류 경제학의 본산인 시카고학파를 중심으로 한 경제학들이었다고 말한다. 프리드리히 하이에크, 칼 포퍼, 조지프 슘페터, 피터 드러커 등이 대표적이다. 나치의 지배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이들 오스트리아 출신 학자들은 국가의 지나친 개입이 결국 파시즘을 초래했다고 결론 내리고 시장의 효율성을 중시하는 신자유주의로 세계 경제를 이끌었다.
저자는 그러나 신자유주의 경제가 남긴 유산은 처참하기 그지없다고 단언한다. "우리는 경제성장이 충분히 이뤄지고 나서야 비로소 사회적 병폐를 줄이는 일들에 대해 말할 수 있을 거라고 가정한다. 번영과 특권은 파이의 크기가 커지면 자연스럽게 확산될 거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슬프게도, 역사는 그렇지 않다고 증언한다."
저자는 그러면서 신자유주의의 대안으로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 국가 체제를 제시한다. 두 차례 세계대전 이후 전쟁의 잿더미 속에서 전례 없는 안정과 번영, 평등의 확산을 가져왔던 사회민주주의적인 복지 국가 체제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저자는 "사회민주주의는 이상적인 미래상을 제시하지 않는다"면서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손에 쥘 수 있는 대안들 가운데 이보다 나은 것은 없다"고 결론내린다. "2008년의 경제 위기는 자본주의 최악의 적(敵)은 규제받지 않은 자본주의 그 자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었다. 자본주의는 조만간 자기 자신이 부린 과욕의 희생양이 되어 다시 한번 국가를 바라다보며 구조를 요청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파국에서 벗어나 정상을 되찾은 후에도 기존 방식을 되풀이한다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더 큰 파국을 맞이하게 될지도 모른다."
원제는 'ILL FARES THE LAND'로, 영어판은 작년 2월 출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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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7 14:37 2012/10/07 1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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