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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쇄로서의 시간, 심장으로서의 시간 (백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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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녹색평론』 2005년 9~10월(통권 84호)에 실렸던 것입니다.

강공우님의 싸이홈피에서 담아왔습니다.

 

김곰치 님의 글 <"그놈 한분" - 백무산 시인께>은

http://jayul.net/view_article.php?a_no=860&p_no=1 에서 읽을 수 있습니다.

 



족쇄로서의 시간, 심장으로서의 시간

 

백무산

 

  산과 강과 풀벌레의 마음 빌어 글을 쓰는 작가 김곰치씨에게

  

  곰치씨! 겨우내 산에 쌓였던 잔설들이 채 녹기도 전에 ‘녹색평론’을 통해 내게 전해진 곰치씨의 글이건만, 들판의 벼들이 누릇누릇 색을 입는 처서 무렵에야 답을 하게 되었으니 이만저만도 분수가 있지 이런 무례를 범하고서야 입이 열인들 둘러댈 말이 있겠습니까. 하긴, 청탁글이라면 한사코 사절해 온 내 글버릇을 물린 건 곰치씨의 그 진지함에 감읍한 때문이지만, 내 현실적인 사정을 뒤로 하고 책상머리에 앉을 구실을 좀체 갖지 못했습니다. 그 탓인지 그만 어깨 근육이 늘어나 찻잔 들기도 힘든 사정이 되어서야 걸상을 당겨 앉게 되었습니다. 봄부터 계속된 노동은 호구지책의 것은 아니었으나 시간을 잘라 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건 내 사주팔자에 책상머리와의 인연이 적은 탓도 있으니 그것도 궁색하나마 변명이라면 변명이니 한 풀 접고 봐주시기 바랍니다.

  

  시간을 탓하며 사는 일은 참 비겁한 변명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는 시간이 웬수라는 말을  늘 입에 달고 다닙니다. 시간은 운명적인 것처럼 거역할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드리기도 하지만 종종 시간에 저항하기도 합니다. 오래전 내 노트에서 시간에 대해서 이렇게 표현해 놓았던 걸 발견한 일이 있습니다. “삶의 모든 불운의 배후에 있는 시간/생의 이면에서 언제나 흉계를 꾸미고 있는 시간/비밀경찰처럼 따라붙어 언제나 나를 수배자로 만들어버리는 저 시간/저만큼 숨 가쁘게 달아나서 돌아보면 벌써 발꿈치까지 따라붙고 있는 가위눌린 시간/지겨운 저를 향해 그만 돌아설 수는 없을까/돌아서서 그만 통과해 버릴 수는 없을까” 그 심정은 아마 당시의 군사독재정권만큼 긴급하게 해결해야할 내 내면의 파쇼기계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곰치씨, 정말 시간을 붙들고 이런 억지를 부려도 되는 것일까요? 우주가 운행하고 지구가 공전하는 걸 두고 이러니저러니 시비를 걸어도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나는 오늘 바로 이 시간에 대해서, 이 비정한 한 물건에 대해서 걸고넘어져 보려고 합니다.

     

  나는 시간에 대해서 아주 강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내 삶의 경험 때문입니다. 내 인생의 기억에서 20대의 추억이 거의 빠져 있습니다. 기계 앞에서 기계와 뒹굴었던 기억밖에 소중한 기억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도 나는 쇠의 녹 냄새, 카본 타는 냄새, 시너 냄새에서나 그 시절 기억을 떠올립니다. 밝은 햇살이 내리고 있는 동안 들판이나 거리를 거닐었던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어떤 열망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시간전쟁을 겪는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닐 겁니다. 꿈꾸고 열망하는 것들을 위한 시간과 현실적 시간의 충돌 때문이겠지요. 그 열망이 크면 클수록 이쪽과 저쪽, 골짝과 마루 사이의 진폭과 파도를 감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또 마음을 발생시킵니다. 마음은 생각의 지평 너머에 있습니다. 그 마음은 이미 주어진 시간, 기계의 시간에 저항합니다.

     

  곰치씨, 이 우주의 많은 시간대 위에서 같은 시간대에 비슷한 공간에서 비슷한 공감대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놀랍고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어떤 순간에 완전히 다를 시간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곰치씨의 글을 읽는 순간에도 그런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 순간 한 순간 같은 존재에 대해서 다른 이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벨이 울리는 동안에 전화를 받지 않으면 대화를 할 수 없지만, 공통의 시간성을 공유하지 않으면 모든 대화는 서로 이해할 수 없는 기호의 나열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경험하는 시간성은 심리적 시간성입니다. 현대물리학은 우주에 어떠한 유일한 기준의 시간도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물리학적 시간을 두고 한 말이지만, 삶의 외부 공간의 시간도 상대적임을 입증하는 말입니다. 삶의 내부에서 주어지는 시간을 주관적이고 해서는 곤란합니다. 시간이란 어차피 물질운동의 계수(計數)의 문제가 아니라 생명의 사건과 연관된 문제이기 때문 입니다. 근대의 시간은 물질운동의 수로 삶을 측정하고 삶을 규정해 들어갑니다. 그것은 근대 물리학과 철학이 산업생산의 요구에 부응한 시간 개념입니다. 근대의 외부에서 보면, 시계는 측정기가 아니라 발명품입니다. 물리적 진자운동 방향에 생체운동을 표준화한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성은 과거의 것은 소멸하는 것으로 보게 하고 미래는 종말에 이르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이것은 측정할 수 없는 것을 측정하게 하고 오지 않은 시간도 지배할 수 있도록 하는 초월적 지배의 힘에 영합하고 뿌리내립니다.

     

  자본은 인간의 삶의 시간을 잉여가치의 시간으로 전환하지 않으면 존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생물학적이며 자율적 생체리듬에 따라 고도로 조직화된 존재이므로 등가적 잣대로는 측정불가능한 유기체 혹은 그 이상의 존재입니다. 산업생산의 요구는 모든 것을 기계리듬의 시간으로 표준화 합니다. 그것은 생산활동의 시간은 물론 인간의 삶 전체를 기계화 합니다.  인간은 생체리듬의 시간과 기계리듬의 시간 사이에 극심하게 갈등하고 분열됩니다. 그것은 자율적 삶을 해체하고 기계에 스스로 의존하게 하며 고유한 인간성을 훼손합니다. 어쩌면 이제 인간의 생체가 기계와 분리되면 또 다른 분열증을 유발할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릅니다. 기계는 이미 편리나 이기라는 범위를 넘어서 있습니다.

     

  사이보그는 더 이상 공상과학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그런 상상 속의 존재가 아닙니다. 현대인들은 하루 종일 생체조직을 기계와 접속하여 생활합니다. 손발의 근육과 신경을 여러  기계에, 핸들, 액셀레다, 통신기, 로봇, 정보기계, 생산설비에 부착합니다. 사무실에서든 공장에서든 뇌의 신경과 근육과 의식을 기계의 눈금과 코드에 맞춥니다. 이미 인간은 사이보그 단계에 진입한 것입니다. 이것은 사회적 가치결정화로 나아가 문화와 정신영역에서 재생산 합니다. 인간 내면의 생체시계는 철저히 배제됩니다. 생체활동의 연장이나 편리함을 위해 존재하는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이것은 휴식과 생리적 시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심각한 정신적 분열증은 물론 신체적 분열은 각종 기괴한 질병을 불러옵니다. 그 심각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인간은 이제 자신의 몸과 마음의 자율적 생체 반응과 신호를 감지할 능력도 퇴화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기계의 즐거움에, 기계화의 기쁨에 빠져 스스로의 재조직화에 환각적으로 반응합니다. 이러한 상황에 처한 존재는 필연적으로 소비와 파괴를 통한 자기실현의 욕망을 폭발시키게 됩니다. 기계는 더 이상 인간능력의 연장이 아닙니다.

     

  소멸하는 시간, 생성하는 시간

     

  시간은 우리 삶의 배후에 있으며 전면에 있습니다. 근대적 시간관에서 시간은 과거의 파괴적 축적위에 있고 그 연장선에서 미래로 이어져 가는 것으로 파악합니다. 시간은 단속적 이지 않으며 특이하지도 않으며 먼 과거에서 이어져 왔으며 이어져 갈 무엇이라고 파악합니다. 이것은 물질축적을 통한, 소유욕망이 자극한, 절대성에 대한 욕망, 무한함이라는 초월적 가치 추구에 뿌리 내린 시간관입니다. 지배와 권력의 시간입니다.

      

  우리 삶의 순수한 경험 가운데 파악되는 시간은 창조적 행동의 시간성입니다. 모든 것이 창조되며 아무 것도 파괴되지 않은 시간입니다. 그것은 과거의 시간도 부패나 죽음의 축적으로 파악될 수 없는 시간입니다. 시간을 가두어야 될 아무런 이유가 없으며, 어떤 축적을 통해서, 절대권력을 통해서 가두어진(축적) 시간은 죽은 시간입니다. 변증법적 부정의 시간도 종말적 시간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체험하는 시간은 과거도 미래도 스스로 존재하지 않으며, 그 모두가 현재에, 영원한 현재에 포섭된 시간입니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카이로스의 시간을 탈근대적 시간성으로 파악하면서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성의 관점에서 보기 시작하자마자, 과거와 미래는 결코 명백한 것이 아니게 된다. 유일하게 확실한 존재론적 일관성은 시간의 화살촉에 있는 까닭”이라고 합니다. 그 촉에서 영원한 현재와 그에 상응하는 이름(개념)과 역시 그에 상응하는 사물이 창조적으로 빛을 발하는 시간을 탈근대적 시간으로 파악합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많은 말 가운데서 죽은 개념을 발견하듯이 시간 역시 죽음의 시간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노동은 죽은 노동입니다. 그것은 다만 노동과정에서 삶을 실현할 수 없는 것은 물론, 시간을 죽여 오직 돈과 바꿀 뿐인, 그러면서도 정당하게 교환할 수도 없는, 게다가 그 사회적 노동의 결과에서도 소외 되는, 그 결과물로 인해서 오히려 자신이 차별과 소외를 당하는, 결과적으로 공유되어야 할 환경을 파괴하며, 그 파괴의 피해를 누구보다도 많이 당하는 그러한 노동의 시간은 죽은 노동 죽은 시간입니다. 이것은 탈근대의 시기에 우리가 파괴해야할 것이 무엇인가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시간은 인간존재를 벌겨 벗겨서 보여줍니다. 우리는 시간에 대해서 좀 현실적으로 비유해 볼 수도 있습니다. 현대물리학에서는 시간과 공간은 분리개념이 아닙니다. 경험적으로도 시간은 공간을 통하지 않고, 공간은 또 시간을 통하지 않고 정의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어떤 미지의 땅으로 여행을 한다고 상상을 해봅시다. 아무도 밟아보지 않은 그곳은 매 발자국마다 새로운 공간이 펼쳐지는 놀라운 경험하게 되겠지요. 그런데 시간은 어떻습니까? 한 시간 후에는 어떤 시간일까요? 내일은 또 어떤 시간일까요? 한 달 후? 일년 후에는요? 대체로 뻔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대체로 예측가능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고 그런 시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습니다. 도대체 시간 자체가 무얼 열어줄 수 있다는 거죠? 새로운 것이든 낡은 것이든 그것은 인간 인식의 문제이지 시간의 문제가 아니지 않으냐고 할 수도 있겠지요? 그렇습니다. 그건 시간이라기보다 시간성이라고 해야 정확한 말입니다. 그래도 역시 마찬가집니다. 시간은 대상과 인간이 실천적 관계 속에서 열어가는 화살이므로 시간자체라고 해도 문제는 없습니다. 우리의 실천적 인식 속으로 한번도 오지 않은 이것은 새로움으로 열릴 존재의 가장자리가 분명합니다. 그것은 한번도 발견되지 않은 처녀림의 공간과 같습니다. 그러나 이미 누가 다 발굴해 놓았군요! 누가 이 놀라움을 다 벌목해 놓았군요! 누가 시간을 가로질러 갔군요. 누가 한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돗자리를 펼치듯이 가로질렀군요. 이건 초월적 힘이 아니면 불가능 하지요. 과거는 부를 축적하듯이 잔뜩 쌓여져 있고 미래는 돗자리처럼 축 늘어져 펼쳐져 있군요. 이것은 초월적 존재인 권력의 시간입니다. 잘 짜여진, 질서정연한, 환원가능한 시간입니다. 이미 일어난 일의 동일한 반복의 잣대 입니다. 시간뿐이겠습니까? 공간도 이미 모든 공간은 등가계수로 측정됩니다. 바다도 산도 강도 그 폭력적 척도는 평방미터입니다. 우리가 경이로운 자연을 바라보면서 저게 몇평이나 될까? 평당 가격이 얼마나 될까? 누구 것일까? 이런 생각이 생뚱맞게 비집고 나오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 입니다. 사람들이 비행기를 타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다고 하지만 실상 그곳에서 만나는 것은 새로운 시간도 새로운 공간도 아닌 자기 쾌락입니다. 시간도 공간도 다만 쾌락의 기호에 불과합니다.

      

  자본과 권력의 시간은 부의 축적과 같은 원리를 가집니다. 초월적 힘으로 측정해야 합니다. 생명의 시간도 살아있는 자연도 측정불가능하므로 그곳에서 생명과 창조적 활동성을 배제합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죽은 시간 입니다. 측정불가능한 것과 측정되기를 거부하는 것은 빨갱이 입니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그 화살촉 앞에서 모든 견고한 것, 이미 주어진 것, 이미 결정된 것은 다 무너집니다. 매순간 항상 새로움으로 열리게 하며 매순간 다시 창조되는 공간을 열어갑니다. 시간은 때려눕히지 않는 한 펼쳐서 가로지를 수 없으며, 불가역적이므로 영원한 현재의 빛을 발하며 날아갑니다.

      

  존재의 소금, 상상력

      

  곰치씨, 문학은 날로 사소한 것으로 전락하고 더 이상 세상의 전면에 설 자신을 잃은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문학이야말로 시간의 화살촉에서 매순간 다시 눈을 떠야할 것입니다.

      

  시간의 화살은 어느 방향으로 날아왔고 어느 방향으로 날아갈까요? 이 질문은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그 방향은 화살촉에서 매순간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이 우주를 제멋대로 종횡무진 하지는 않습니다. 열역학 제2법칙을 상기하면서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을 따라가 보겠습니다. 내가 수년 전에 쓴 시입니다.

      

천지사방 흩어진 몸들은

나무를 통해 마음으로 돌아오고

세상에 지천으로 흘린 마음들은

나무를 통하여 몸으로 돌아오는데

      

  ‘마음에 심는 나무’라는 제목의 같잖은 시의 토막입니다. 이건 시간과 관련성이 없어 보이겠지만, 내 마음이 향하는 시간의 방향을 두고 쓴 것입니다. 열역학 제2법칙은 흔히 엔트로피 법칙이라고도 하지요. 높은 준위의 에너지 질서 상태에서 무질서한 불활적 열사 상태로 진행한다는 에너지 법칙으로 환경파괴 문제와 함께 많이 알려진 것이지요. 인간의 파괴적인 활동은 지구를 빠른 속도로 열사상태로 만들어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주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리학에서는 시간의 진행방향이 우주가 팽창하는 방향이면서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에 그렇다고 합니다.시간이 스스로 방향을 바꾸거나 우주가 빅뱅을 멈추고 줄어들지 않는 한 그 반대는 없다는 겁니다.

      

  이것은 인간의 모든 정신적 영역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법칙은 우주가 무한하다든지 열린 체계라든지 하는 주장을 무색케 하는 것으로 우리 우주를 닫힌 체계로 보는 모순된 주장이기도 합니다. 나는 그 법칙을 심정적으로(그럴 수밖에 없지만)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우주는 팽창을 하는 동안은 아직 생성의 시간이며 시간이 생성의 방향으로 진행하는데 어떻게 사멸의 상태를 증가시키느냐는 것입니다. 문학적 상상력을 통해서 보면 때로는 시간이 방향을 바꾸는 현상을 발견할 수도 있습니다. 

      

  성냥 알갱이 하나에 불을 붙이면 유황과 탄소가 탑니다. 열에너지는 대기 중으로 흩어지고 탄소와 재는 땅에 가라앉아 흩어집니다. 그 반대로, 흩어진 에너지와 재를 모아 성냥을 다시 만드는 일은 그 누구도 절대로 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나는 간단히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무는 할 수 있다! 저 들판에 서 있는 나무는 할 수 있다고! 나무는 일생동안 방출하는 에너지의 총량이 자신이 질서 있게 응축한 에너지 양 보다 더 적습니다. 과학자들은 이것은 부분적인 것이고 우주의 에너지 총량을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겁니다. 그러나 이 법칙은 닫힌계 안에서라는 단서를 달고 있고 우주의 열린 틈을 그들이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상상을 계속해야 합니다.

      

  나무는 여러 가지 상상을 불러일으킵니다. 나무는 인간을 거꾸로 비추는 거울이라고 어느 시에서 제가 표현한 일이 있습니다. 생김부터가 인간을 거꾸로 비춥니다. 나무는 생식기를 보란듯이 하늘을 향하고, 머리는 인간처럼 하늘로 거만하지 쳐들지 않고 뿌리에 감춥니다. 뛰고 소리 지르고 게걸스럽게 먹고 열을 토하는 대신에 침묵하고 구심운동을 하며 선정에 듭니다.

      

  그뿐 아닙니다. 나무의 시간도 당연히 인간의 시간과 같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시간이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방향으로 진행한다는데 아무 이설이 없다고 할 때, 나무는 엔트로피가 감소하는 방향으로 운동하므로 분명 인간의 시간과 다르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의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나무는 미래를 기억으로 성장하는 것일까요? 나무는 미래에서 온 것일까요? 나무는 가이야의 심장은 아닐까요? 그렇다면 나무는 미래에서 지구를 구하러 온 터미네이터는 아닐까요?

      

  곰치씨, 문학이 사소해졌다고는 하나 상상의 축제의 주체자이므로 아직은 생명이 남았다고 해야 할까요? 무얼 하는 상상력이냐구요? 문학은 상상력으로 현실의 부패를 막고 혁명에 참여하는 존재입니다.

      

  인간존재의 엔트로피, 미래를 기억하다.

      

  그 시간과 에너지 법칙을 정신활동의 법칙으로 끌고 들어와 볼 수 있습니다. 높은 준위의 정신에너지 상태는 어떤 것일까요? 인간은 언제부턴가 정신에너지를 열에너지로 과도하게 소비하는 방향의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정신세계의 엔트로피를 높이고 환원불가능한 소비중심의 해체문화를 생산하고 재생불가능한 생산과 소비를 충동질 합니다. 우리가 높은 준위의 정신(생체)에너지 상태에 대해 정의를 내릴 수 있다면, 정신적 엔트로피의 진행을 역방향으로 돌려세울 수도 있을 겁니다. 그것은 시간의 방향에도 관계합니다. 이 논리를 단순히 따라가면 어떤 상태에서 우리는 시간의 경계가 전혀 쓸모없는 것으로 인식할 수도 있습니다. 상상력을 더하면, 미래를 기억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물질에너지의 질서 상태와는 달리 높은 준위의 정신에너지는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요? 곰치씨가 한번 도전해 보고 싶다는 문제가 이런 것은 아닐까요?

      

  곰치씨가 녹색평론 80호를 통해 저에게 보낸 글에서 무엇보다 비중 있게 제기한 문제가 도에 관한 문제였습니다.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고전을 인용하기도 했습니다. 도는 왜 듣는다 하는가? 도를 듣고 곧 그 자리에서 죽어도 좋다고 하지 않는가? 그런 문제에서 스스로 답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어떤 물건이든 인간의식의 지극한 상태에서 파악되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사회윤리적, 도덕적, 인격적 진리의지로서의 도라면 모르되 깨달음으로써의 도의 문제라면 곰치씨의 판단은 부적절합니다. 도는 듣는 것이 아니라 깨닫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관통하는 것으로, 실천적 자세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누가 이런 문제를 두고 유사종교 취급을 하건 말건 문학하는 사람이 언어를 비워서 어쩌겠다는 것이냐고 트집을 잡건 말건 곰치씨의 진지한 태도를 존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런 문제제기는 자기혁명의 계기를 찾는 노력으로 비치기 때문입니다. 황당하다고 일축해 버릴 수 있는 이 문제에 대해 사람들이 아는 것은 아주 적습니다. 우물을 먹고 그 물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우물의 깊이에 대해 무관심하고 금기시 합니다.

      

  현실존재는 본질에 우선한다는 실존적 판단도 중요하지만, 그러한 현실을 비추어볼 건너편 거울을 갖지 못하는 것은 현대의 또 하나의 불행이 아닐까 합니다. 현실주의 입장에서 도는 부정적으로 비치기 쉽습니다. 현실을 방관하게 하고 고통스런 현실의 도피처로 인식되어 왔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것을 적극적으로 대면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도는 인간의 자기정화를 통해, 모든 사물에 개입하여 사물을 왜곡시키는 욕망을 벗겨내고 대상을 스스로 존재하게 하며, 무구한 상태에서 의식과 사물이 다시 창조적으로 만나게  합니다. 주어진 현실을 고집하고 그 속으로 빨려들 것을 요구할 것이 아니라 현실을 확대하여 현실을 넘어서야 합니다.

      

  참된 도는 신비화가 아니라 탈신비화이며, 한계에 대한 도전이며, 물신화, 고착화를 파괴하는 적극적인 활동입니다. 도는 사물의 이면에 본질이 따로 존재하며, 그 불변적 가치를 찾는 일이라고 오해를 합니다. 선험철학이나 실존철학은 존재와 본질 사이 근본을 두고 서로 다투지만, 도(禪)는 현상과 본질을 나누어 파악하지 않으며, 존재의 가장자리에서 존재를 매순간 창조적으로 생성하게 합니다. 지극히 높은 준위의 정신이 지극히 낮아 그 무엇에고 거슬리지 않는 마음 언저리 어딘가에서 곰치씨가 찾는 한 물건이 발견될 것입니다. 나는 곰치씨의 문제의식에 답을 찾기보다 오히려 의문만 계속 늘려 놓았습니다. 우리의 대화에는 의문이 계속 확대되어야 합니다. 큰 의심에 큰 깨달음이 있다고 합니다.

      

  물러서면서 구하는 길, 나아가면서 구하는 길

      

  보내주신 곰치씨의 산문집 ‘발바닥 내 발바닥’을 읽고 새삼 깨닫는 게 많았습니다. 현실 변혁의 열정을 안고 현장에 뛰어들었던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 현장에 실망을 품고 떠났던 가슴 아픈 경험을 우리는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서 돌아보면 그 현장 밖 어디에서도 해답을 구할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갔습니다. 현장에서 구하지 않으면 어디에도 답이 없다는 현장주의의 입장이 곰치씨의 산문을 통해 새롭게 이해됩니다.

      

  수년 전부터 노동운동과 생태운동 사이에 보이지 않는 긴장이 있어왔습니다. 그동안 노동운동은 오랜 세월 숱한 희생을 치루며 쌓아올린 성과들을 송두리째 잃었다고 할 만큼 자신의 추한 도덕적 치부를 드러내었고, 환경,생태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노동운동이 더 이상 회생할 수도 없고 희망도 없다고 입을 모으기도 했습니다. 노동운동이 권력지향적이 되었으며, 이익집단으로 전락했다는 그들의 비판은 정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비판은 종래에 노동자 집단을 우리 사회 기득권 집단과 동일시 해버리는 것은 과도한 것이었습니다. 생태주의 입장에서는 노동자와 자본가가 꼭 같은 공범자라고 하는 시각이 그것입니다. 그것은 분배를 두고 적대할 뿐 같은 개발주의, 생산주의적 입장이어서 명백히 환경에 적대적이라는 겁니다. 그 논리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노동계급 형성의 역사를 인정하지 않은 비판입니다.

      

  노동계급은 환경에서뿐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족쇄도 생산하는, 자본주의 하에서는 지극히 모순된 존재 입니다. 자신을 착취하는 자본증식에 복무하여 지배의 기반을 더욱 튼튼하게 하고 자신에게 적대적인 권력 형성에도 복무합니다. 생존을 위해서는 자신을 겨눌지도 모를 총을 만들고 전차도 만들지 않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국가와 자본지배의 권력 틀 안에서는 극복되지 않는 모순적 존재입니다. 주어진 상태가 곧 존재의 본질이 아닙니다. 그것은 존재자체가 혁명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에서 그 역동적 힘이 존재의 본질인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러한 모순의 삶을 살아온 노동자들이 자신의 고통스런 삶을 통해  고백했던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라는 신념을 스스로의 삶으로 깊이 체현하지 못하였습니다. 최근 일부 상층 대기업 노동자들의 이기적 조합주의, 소비문화에의 중독현상,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한 차별 의식에서 보듯이 과거 통절했던 경험을 자기반성을 통한 인간평등의 도덕적 이상으로 승화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월 70만 원 이하의 기아임금을 받는 최저임금 노동자가 150만 명이나 되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는 현실을 외면하는 일은 가슴 아픈 일이지만, 그들의 삶을 귀족적이라고 매도하는 것은 더욱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들 역시 상대적 여유는 누린다고는 하나 각종 질병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 장시간노동에 따른 정신적 황폐화 등 여러 가지 고통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이런 불안한 삶이 출구를 몰라  왜곡된 소비에 빠져들고 그것을 충당하기 위해 다시 무리한 잔업과 특근으로 몸을 망치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사실 고임금노동자라고는 해도 우리나라 평균 중산층 수준에 불과합니다. 노동자들이 중산층 수준이 되면 귀족이라고 부르는 데는 노동자에 대한 차별의식이 얼마간 바탕에 깔려 있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상대적으로 누리는 여유만큼 환경에 적대적이 된 현실을 직시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이 없었다는 점에는 어떠한 비난도 피할 수 없습니다. 누구보다 뼈져리게 격어온 삶의 체험을 생명 평등의 규범으로 체현해 오지 못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전체 노동운동에 대한 지나친 매도는 생태,환경운동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노동운동의 과도한 목적론적과 역사결정론적 당위를 비판하면서 역사허무주의적 입장에 빠지는 일은 위태해 보입니다. 생태주의 입장에서 환경파괴와 자원고갈이라는 위기의 심각성 때문에 역사성을 상대적으로 소홀히 취급하는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하더라도 간혹 “역사의 기본동력은 우연성에 있다.”는 식의 주장들은 지나칩니다. 인간 개인의 실천의지의 중요성을 강조한 주장이겠지만, 우리는 근대에 대한 올바른 비판 위에 서야 하고 탈근대적 가치생산과 삶의 전략을 세워나가야 합니다. 근대적 생산과 소비 체제로 인한 생태 위기와 자원고갈의 문제가 아무리 긴급하다고 해도 그 해결책을 전근대적 가치에서 찾거나 탈역사적 입장에서 구하는 것은 적극적이지 못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 의도에 반하여 역사해체주의와 포스트주의를 용인하고 개발주의자들에게 자리를 내어주는 꼴이 될 수도 있습니다. 건강한 삶의 전형을 과거에서 살려내는 일 또한 탈근대적 가치생산과 더불어 일어나야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3.1절 날 성조기를 들고 시청 앞에 모인 사람들의 주장만 같아 입맛이 개운치가 않습니다. 

      

  고도의 자본주의체제에서 노동의 소외현상은 노동자의 삶 전체에 위협적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생존모순이 분배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자각을 불러일으킵니다. 이것은 노동환경 문제, 기계환경에 대한 부적응, 미래에 대한 불안 가중, 그리고 스스로를 필요 없는 존재로 만드는 ‘노동의 종말’ 문제와 함께 생태,환경 문제는 멀지 않아 노동자들이  자신의 생존 문제와 결합하여 전면화 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노동의 종말’에 대한 예고는 이미 현실적으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노동자가 자본축적에 기여하고 그로 인해 얼마간의 분배를 보장받기 위해 생산성을 높이고 투쟁력을 강화하는 일 자체가 자기 스스로를 불필요한 존재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맑스가 이러한 법칙을 두고 일찍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특유한 인구법칙’이라고 말한 바 있는 그런 현상입니다.

      

  자본의 이윤율은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의 가치비율에서 발생하므로 노동자가 생산능력을 향상할수록, 그리고 투쟁력을 강화할수록 자본은 기계설비 증설과 자동화를 진행하고 이윤은 날로 줄어들게 되며, 노동자는 빠르게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현상입니다. 이런 문제는 이제 피할 수없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노동자들은 오히려 탈근대의 시기에서 그야말로 벌거벗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이 벌거벗은 존재는 자신의 삶을 전면적으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시간의 가장자리에 놓이게 될 것입니다.

      

  현실노동운동진영 상층부의 자기 논리와는 별도로 보통의 노동자들을 생태, 환경운동의 잠재적 동력으로 파악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노동자들은 그것을 운동이라기보다 삶으로서 끌어안아야 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노동운동 상층부에 대한 문제를 전체 노동자의 문제로 확대할 수 없습니다. 그 상층부는 이미 국가의 일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다시 주목하는 것은 카이로스의 시간성입니다. 이것은 탈근대를 향한 문이며, 이곳에서 노동과 생태가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생산한 것으로부터 배제되는 시간과 척도로서의 시간, 기계리듬의 시간, 죽은 노동의 시간으로부터 탈주와 저항과 혁명을 예고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노동뿐만 아니라 생태주의가 갇히기 쉬운 문제, 인간 배제의 자연관, 정형화된 자연, 초인격적 자연, 종말론적 시간관, 창조적 경계를 무시한 통합된 자연관을 극복할 수도 있게 할 것입니다.

      

  노동문제는 이제 심각하게 전환점을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더 심각한 것은 불행하게도 노동운동 안에서 노동문제의 해결지점이 보이지 않는데 있습니다. 그것은 고도 자본주의시대에 우리 삶이 전면적으로 포획되듯이 그 해결 지점 역시 전면적일 수밖에 없게 되므로 노동운동의 틀을 고집할 필요가 전혀 없게 됩니다.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이 포괄될 수밖에 없습니다. 생태,환경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역할이 결정적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삶정치’, ‘삶권력’이라는 말은 탈근대적 전면성을 표현합니다. 그에 대응하는 탈근대의 노동을 삶노동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입니다.

      

  나는 간혹 이런 이야기를 노동자들에게 해보기도 합니다. 괜찮은 신발장 하나 사려면 휴일 특근 하루는 해야 하는데 그 시간에 목공소 가서 최소한의 자재만 사서 가족들과 함께 만들면 어때요?  도심 텃밭 확보 투쟁을 하고 잔업을 줄이고 퇴비 만들어 채소 가꾸면 어때요? 근무 줄이고 가사문제, 아이들 학원 문제, 세금 문제, 생활환경 문제, 의료 문제, 문화 활동 문제, 주민자치 문제, 향정(지자체) 문제 대책을 위한 다양한 기구를 만들어 활동하면 더 많은 이익을 얻지 않을까요? 조기퇴직한 동료 앞세워 구청에 가서 노는 논밭 빌려 공동경작을 하면 어때요? 조합에서 요구하여 노동시간을 반나절로 줄여 일자리를 나누고 생태 농업에 관심을 가지는 건 어때요? 우선 노동조합과 관련한 시설에서부터, 노동현장, 나아가 생활공간에 이르기까지 태양에너지, 풍력에너지, 바이오 에너지 시설을 의무화하는 투쟁과 교섭을 벌이면 어때요? 이러한 시설을 통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면 어때요? 지자체를 통해 주민시설에도 청정에너지 보급을 강제하면 어때요? 노사협상의 의제를 확대하여 노사가 함께 사회적 기금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청정 시설을 확대하면 어때요?

      

  이러한 문제를 제기하면 노동조합의 관심이 분산되고 투쟁력을 약화시킨다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큰 착각입니다. 더 넓은 의미의 공동체적 연대는 오히려 시민사회의 모든 영역을 포섭하고 투쟁력을 강화합니다. 노동운동진영에서는 종종 생태적 활동으로의 전환은 계급적 모순을 방기하는 것으로 곧 무장해제를 의미한다고 비판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활동의 전환을 개인적 자각과 결단에 의존하는 수준이었기에 그러한 우려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곰치씨, 지금은 나도 우리 사회에서 그나마 건강한 집단은 노동자가 아니냐고 자신있게 말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어진 현실에서밖에 구할 수가 없다면 이러한 이유들 때문에라도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사회에서 아직도 소비의 단맛에 덜 중독되어 있습니다. ▲농촌을 실제적으로 체험했습니다. ▲육체노동의 즐거움을 아는 세대입니다. ▲자본의 비정함을 누구보다 실감하고 있습니다. ▲가난을 경험한 세대입니다.

      

  곰치씨, 삶 전체가 자본주의적 생산활동이 되는 탈근대적 시대에는 인간의 존재가 발가벗겨져 있으며 삶 전체가 그에 대응합니다. 그것은 산 노동과 죽은 노동의 투쟁이며, 산 시간과 죽은 시간의 투쟁입니다. 근대적 방식의 투쟁이 점유를 위한 투쟁, 부정의 변정법이었다면 탈근대적 운동성은 긍정의 전투성입니다. 절대 생성의 창조적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이 운동성에는 ‘환경’과 ‘노동’의 경계가 무너질 수밖에 없습니다.

      

  곰치씨가 직관적으로 파악하는 도의 문제는 곧 존재의 혁명을 의미합니다. 자신을 다 드러내어야 그 가장자리에 설 수 있습니다. 존재의 가장자리에는 이시대의 불온한 꿈과 사랑과 영혼이 있습니다. 새로운 생성을 향해 지금 이 순간 영원한 현재를 향해 날아가는 화살촉에 있습니다.

      

  곰치씨, 서둘러 여기서 글을 접어야 하는 것을 이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좋은 글을 많이 써서 가진 것이라고는 부족함밖에 없는 이 無産處士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시기 바랍니다.

        


윗 글은 '녹색평론 2005년 1-2월호'의 김곰치 님의 글 <"그놈 한분" - 백무산 시인께>에 대한 답글로 '녹색평론 2005년 9-10월호'에 실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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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0/27 22:36 2006/10/27 22:36

3 Comments (+add yours?)

  1. molot 2006/10/28 20:51

    김곰치씨가 예전에 사무실에 온 적이 있어서 식사를 함께 했었는데요. 정말 독특한, 예술가 스러운 분이더라고요. 감정 기복과 표현이 아주 자유자재였고--;; 책 출간해서 많이 팔리면 프레시안에 후원금을 많이 내겠가도 아준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던 기억이 나누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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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새벽길 2006/10/28 21:21

    프레시안이 광고문제 땜에 어렵다는 말이 있던데...

     Reply  Address

  3. molot 2006/10/29 13:03

    그래요? 회사를 일주일에 한 번 들어가는지라 회사 이야기도 밖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들을때가 많긴 한데..기본적으로 이 동네가 다 지지부진하긴 한데... 잘되는것도 없고 잘 못되는것도 없는 수준인걸로 알고 있어요. 특별히 어렵단 말은 못들었는데 항상 어렵죠 뭐 영세업체 규모다 보니 근데 다 모르는 사이에 혹시--;; 엊그젠 술 먹다가 바깥 사람이 뜬금없이 알리안츠가 회사를 인수한다는게 거의 확실하더라 하는 소리까지...나도 외국계 회사 직원되는건가 싶어 잠깐 좋아하다가 ㅎㅎ 아무리 생각해봐도 알리안츠가 우리 회사를 인수할 이유가 없더라는... 이 바닥도 워낙 말 많은 동네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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