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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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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전진의 대안사회팀에서 진행했던 세미나 내용을 정리한 것이다. 이제 1년밖에 안되었는데도 그 내용이 새롭다. 대안적인 정부조직개편에 대해 연구하려고 하면서 기본적인 철학과 원칙이 있어야 할 듯 싶어 다시 살펴봤는데, 공공성과 관련된 부분이 부족하고, 참여와 민주주의에 관한 것은 별도로 정리되어 있다는 것 이외에는 훌륭하다. 여기에 여성이나 환경, 소수자의 문제가 빠져 있는 것도 한계이지만, 이는 보완될 수 있을 것이다.   
최종 정리를 장석준 동지가 했기 때문인지, 그의 흔적이 물씬 풍긴다.
 
     

[대안사회보고서_국가(최종).hwp (67.39 KB) 다운받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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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1. 국가, 왜 중요한가? 
 
1.1 국가란 무엇인가?
   
연말마다 천막 농성이 벌어지고 집회가 열리는 여의도에 가면 육중한 국회의사당이 버티고 있다. 그 곳에 들어갈라치면 전경이 나타나 주민등록증을 요구하거나 아니면 몽둥이를 날린다. 대한민국의 남성들이면 누구나 징집영장을 받아들고서 새삼 국가를 실감한다. 또한 노동자면 누구나 세금이 원천 징수된 월급 봉투를 받아들고 국가를 느낀다. 이게 우리가 아는 국가다.
  
하지만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국가가 무엇인지는 그렇게 만만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흔히 행정부라고 부르는 게 국가라는 건 누구나 다 안다.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지방자치단체도 국가의 일부다. 3권 분립이라고 해서 행정부와 함께 권력을 나눠 가지는 입법부와 사법부도 국가의 한 부분들이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은 어떤가? 국민이면 누구나 어린 시절을 거치게 되어 있는 초등학교,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 복지기관들, 이런 것들은 국가인가, 아닌가?
    
사실은 국가가 뭔지를 말하는 것 자체가 뜨거운 논쟁의 대상이다. 국가가 뭔지 답을 내놓는다면 정치 문제의 절반 이상은 해결한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우리의 고민을 풀어나가자면, 적어도 잠정적으로 국가는 이런 것이라고 정리를 하고 넘어가야 한다. 
  
우선 국가에 대한 아주 상식적인 정의, 두 가지를 확인하자. 
 
첫째, 바깥으로부터 그리고 위로부터 바라보자. 그러니까 마치 우주인이 된 것처럼 지구의를 쳐다보는 시선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 때 국가란 한국, 일본, 중국, 미국, 러시아 같은 나라(nation)들이다. 지금 지구상에 존재하는 가장 보편적이고 주된 형태의 정치적 공동체들이다. 모든 국가는 반드시 다른 국가들로부터 ‘주권’을 인정받아야 한다. 주권을 인정받은 국가는 그 권한이 배타적으로 행사되는 일정한 영토와 국민(‘국민’이라는 표현을 쓰면 사람들이 국가에 지나치게 종속된 것으로 느껴진다. 그래서 다른 나라들에서는 보통 ‘시민’ 혹은 ‘인민’이라는 표현을 더 많이 쓴다)을 지닌다.
     
둘째, 시선을 안으로 그리고 아래로 옮겨보자. 각 나라의 안에서 바라보자는 것이다. 이 때 국가란 각 나라가 정치적 공동체로서 유지되게 만드는 여러 조직과 활동들, 즉 특수한 사회 관계들을 의미한다. 한국사회라는 게 있다. 그런데 이게 일본사회의 일부도 아니고 중국사회의 일부도 아닌 ‘한국’사회로 유지되게 만드는 특수한 조직과 활동들이 사회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런 조직과 활동들은 사회의 다른 부분들과는 구분된다는 것이다. 이게 또 다른 의미의 국가(state)다. 그런데 한 사회 안에서 국가라고 부를 있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 사이의 경계는 아주 모호하다. 둘은 오히려 서로 긴밀히 중첩돼 있다. 그래서 국가가 뭔지 답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1.2 국가의 ‘두 얼굴’
  
국가는 모순 그 자체다. 서로 대립하기까지 하는 두 측면이 항상 함께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국가는 우리의 두통거리다. 여기서는 그것을 국가의 ‘두 얼굴’이라고 부르자.
  
국가의 한 쪽 얼굴은 그야말로 폭력의 화신이다. 국가가 처음 태어날 때부터 그것은 항상 폭력과 함께 했다. 안으로는 귀족계급이 민중을 창칼로 짓누르면서 국가라는 게 제 꼴을 갖춰왔다. 또한 국가는 밖으로 항상 다른 국가와 싸움을 벌이면서 성장해왔다. 세계사 책을 펼쳐보면 국가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임을 알 수 있다. 굳이 다른 나라 역사를 들춰낼 필요 없이 우리 역사 속에서도 고구려, 백제, 신라 같은 초기 국가가 등장하고 성장한 과정은 바로 피 튀기는 전쟁의 연속이었다. 먼 과거의 역사만은 아니다. 근대에 들어서도 국가는 항상 전쟁을 통해 발전해왔다. 국가의 가장 문명화된 형태인 복지국가조차도 2차 대전의 참화 속에서 등장했다는 것을 잊지 말자.
  
하지만 국가에게는 또 다른 얼굴도 있다. 권리의 보장자라는 측면이 그것이다. 우리가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들을 보장해주는 것은 가족도 아니고, 마을도 아니며, 기업도 아니다. 그것은 국가다. 굳이 고도의 사회적 권리들을 예로 들 필요도 없다. 우리 삶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가장 기초적인 권리, 가령 내가 타인에게 맞아 죽지 않을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국가다. 일제 식민지 시절 이 땅의 사람들에게는 바로 이런 역할을 해줄 자신들의 국가가 없었다. 그래서 그토록 독립국가의 건설을 염원하고 이를 위해 목숨 바쳐 싸웠던 것이다.
  
국가는 참으로 얄궂은 것이다. 있으면 번거롭고 없으면 섭섭하다. 국가는 예사롭게 폭력을 행사하기도 하지만, 또 사람들을 일상의 폭력으로부터 그나마 숨 돌리게 하는 것도 국가다. 국가를 바라볼 때 항상 ‘변증법’적 시각(모순을 모순 그대로 인식하기)이 필요하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1.3 세상을 바꾸려면 국가 문제를 우회할 수 없다
 
세상을 바꾸려는 그 어떤 운동도 국가 문제를 빙 둘러갈 수는 없다. 국가를 어떻게든 처리하지 않고서는 어떤 사회도 바꿀 수 없기 때문이다. 또 국가를 어떻게 할지, 그 복안이 없고서는 새로운 세상을 건설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프랑스대혁명 이후 수 세기 동안 혁명운동의 주된 쟁점은 항상 국가 문제였다. 세계 최초의 노동자 국제조직(제1인터내셔널)에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이 서로 갈라지게 된 것도 국가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근 우리 주위에서는 ‘비국가적 실천’이라는 이야기를 심심찮게 들을 수 있다. 이런 주장의 밑바탕에는, 소련 등 현실사회주의 체제가 보여준 크나큰 오류에 대한 역사적 반성이 자리한다. 현실사회주의 나라의 공산당들은 국가기구를 통해 위로부터 사회를 변화시키려 했고 그 때문에 관료 지배의 억압적 체제를 낳고 말았다. 결국 이런 의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현실사회주의 나라들은 ‘사회’주의가 아니라 ‘국가’주의에 불과했던 게 아닌가. 숨막히는 관료 독재와 피의 숙청, 숱한 전쟁과 강제수용소, 이런 20세기의 비극은 바로 이 국가주의에서 비롯된 게 아닌가. 따지고 보면, 한국전쟁과 분단체제로 인해 신음한 한국사회야말로 국가주의의 최대 희생양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국가주의를 벗어난 새로운 전략, ‘비국가적 실천’이 필요하다는 데 일단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비국가적 실천’이라는 게 ‘이제 국가 문제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주장으로 이어진다면, 그래서 국가 문제를 우회해서 세상을 바꾸는 방식을 모색해보자는 것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대표적인 예로, 존 홀러웨이, 『권력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는가』, 조정환 옮김, 갈무리, 2002. 참고). 국가는 확실히 변혁운동의 덫이다. 하지만 이 덫을 피하려면 누구보다 덫에 대해 잘 알고 있어야 한다. 덫에 걸리지 않으려면 덫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하고, 덫에 걸리더라도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으려면 덫의 얼개를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소규모 공동체를 만들든 대중운동을 벌이든 국가라는 그물망에 전혀 걸리지 않고 성장․발전할 수는 없다. 처음부터 국가 문제를 고민하고 그것에 도전하지 않는다면, 결국은 어느새 거미줄에 걸려 있는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국가주의의 오류에 다시 빠지지 않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여전히 국가 문제를 변혁 전략의 핵심 과제로 고민해야 한다. 국가가 작동하는 바로 그 현장에 두 발을 디디면서 동시에 그 국가를 넘어서는 것(in and against)이 우리 시대 변혁 전략의 화두다.
  
1.4 세계화 시대에도 국가는 중요하다
  
또 어떤 사람들은 자본주의 세계화 시대에는 이제 더 이상 국가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기도 한다. 겉만 보면 이 말이 맞는 것도 같다. 정부 관료들과 보수정당, 언론들은 하나같이 세계화가 대세라고 주장하면서 쌀 협상 결과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한다. 저들이 말하는 대로 국가에 더 이상 재량권이 없다면 그 멱살을 부여잡는다는 게 부질없는 짓 아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일면의 진실일 뿐이다. 속사정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우선 세계화라는 과정 자체가 국가를 제쳐둔 무엇이 아니라 국가들이 주인공이 돼 서로 위협하고 야합하고 협상하여 추진하는 것이다. WTO니 세계은행이니 IMF니 하는 초국적 기구들도 완전히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게 아니다. 그 이면에는 미국을 정점으로 한 여러 국가들 사이의 대립과 타협이 존재한다. 심지어는 자본에 비해 국가의 힘이 약화되는 과정도 국가 자신이 그렇게 만들고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면 실현될 수 없다. 세계화가 우리가 국가에서 눈을 뗄 이유는 되지 못한다.
  
또한 세계화의 모순이 깊어지면 질수록 국가의 역할이 긴급하게 요청된다. 어느 사회에서나 세계화는 빈곤과 소외, 갈등과 대립을 부추긴다. 그래서 이러한 재앙적인 결과들을 조금이라도 누그러뜨리지 않고서는 체제 자체가 버텨낼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그 뒤치다꺼리는 결국 국가의 몫으로 남는다. 프랑스에서 이주 노동자들의 폭동이 벌어지면 자본은 다름 아닌 프랑스 국가를 쳐다보는 외에 다른 방도가 없다. 민중 세력도 마찬가지로 국가를 향해, 그것을 무대로 목소리를 높이지 않을 수 없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결정적으로 격퇴되지 않는 한, 이러한 과정은 세계 어디에서든 반복될 것이다.
 
즉, 세계화는 결코 국가 문제의 위상을 떨어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점에서는 신자유주의 세계화를 역전시키기 위해, 그리고 세계화의 가공할 참극에 도전하기 위해, 각 나라에서 국가에 대한 투쟁이 그 어느 때보다 더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2. 사회주의 운동의 전통적인 두 국가론, 그리고 그 비판 
 
국가 문제는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사이의 분열의 도화선이었을 뿐만 아니라 다시 사회주의를 두 가지 흐름으로 갈라놓았다. 우리가 흔히 ‘사회민주주의’라고 부르는 개혁적 사회주의(개혁주의 혹은 개량주의)와 ‘공산주의’ 등으로 불려온 혁명적 사회주의, 이 두 흐름을 낳은 결정적인 쟁점이 바로 국가 문제였던 것이다. 우선 개혁적 사회주의의 입장부터 보자. 
 
2.1. 국가를 ‘장악’해야 한다: 개혁적 사회주의 
 
개혁적 사회주의자들은 국가를 어떻게 바라보는가? 다른 사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이들도 이제까지 국가가 지배 계급의 무기가 되어 노동자․민중을 억압하는 역할을 해온 것을 비판한다. 하지만 이들은 보통선거권의 도입과 함께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는 점을 또한 강조한다. 이제 국가는 바야흐로 민주공화국이 된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도 나와 있는 것처럼 민주공화국에서는 누구나 일정 연령이 되면 동등하게 한 표의 권리를 행사한다. 그리고 그 투표 결과에 따라 집권 세력이 바뀐다. 선거로 뽑히는 대통령이나 수상이 누구냐에 따라 국가의 나머지 부분은 이들 명령권자를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이 정당을 만들어 여당이 된다면 곧 노동계급이 국가를 ‘장악’하게 되는 것 아닌가. 즉, 부르주아 계급의 무기였던 국가가 이제는 오히려 노동계급의 무기가 된다. 계급 지배의 도구였던 국가가 오히려 그것을 혁파하고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수단이 되는 것이다. 
 
이게 개혁적 사회주의자들이 국가를 바라보는 기본 관점이다. 그래서 이들은 선거를 통해 대통령을 당선시키거나 의회 다수당이 되어 내각을 구성하는 것을 중요시한다. 이런 맥락에서 이들은 의회 사회주의자, 선거 사회주의자이기도 하다.
  
즉, 개혁적 사회주의자들에게 국가(민주공화국)는 누구든 선거를 통해 손에 쥘 수 있고 일단 손에 쥐면 자신의 무기로 삼을 수 있는 장돌 같은 것이다. 자본가들의 손에 들어가면 자본가들의 무기가 되지만 노동자들의 손에 들어가면 노동자들의 무기가 된다. 그러니 우선 국가를 ‘장악’하자!
 
* 더 읽을 책․글들:
- E. 베른슈타인, 『사회주의의 전제와 사민당의 과제』, 강신준 옮김, 한길사, 1999.
- E. 베른슈타인,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외』, 송병헌 옮김, 책세상, 2002.
- P. 게이, 『민주사회주의의 딜레마』, 김용권 옮김, 한울, 1994: 베른슈타인의 사상을 정리한 책.
 
 
2.2. 국가를 ‘분쇄’해야 한다: 혁명적 사회주의
 
반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보통선거가 실시된다고 해서 사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물론 선거로 노동자정당이 집권할 수도 있다. 하지만 노동자정당이 여당이 된다고 해서 국가기구 전체를 좌지우지할 수 있을까? 아니다. 상황은 그 반대다. 국가기구를 실제 좌우하는 것은 선출직 공직자들이 아니라 선거와 상관없이 국가기구의 중심에 버티고 있는 비선출직 고위 관료들이다. 이들은 실로 다양한 방식으로 기득권 세력의 이해에 긴밀히 얽혀 있다. 아무리 노동자 대통령이 나오고 사회주의자 수상이 취임한다 해도 국가기구는 이들 고위 관료의 주도로 의연히 제 갈 길을 가게 마련이다.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은 여기에다가 더욱 강력한 근거를 하나 더 추가한다. 비록 민주공화국이라 할지라도 국가의 폭력적 성격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 그것이다. 국가기구의 핵심 중의 핵심은 바로 경찰과 군대다. 평상시에는 눈에 보일 듯 말 듯 하다가도 기득권 세력과 노동자․민중이 첨예하게 대립하기만 하면 곧바로 전면에 등장하는 게 경찰과 군대다. 국회의사당에 진입하려는 노동자, 농민이 전경들의 몽둥이 찜질을 당하고 군홧발에 차여 길바닥에 쓰러질 때 도대체 민주공화국의 ‘주인’은 누구인가.
 
국가는 애초부터 계급 지배를 위해 만들어진 것이고, 온통 그 목적으로 짜여져 있다. 설사 선거로 진보 세력이 최상층 공직 몇 개를 차지한다고 해도 국가 전체의 성격이 변하지도 않을 뿐더러 고분고분 명령에 따르지도 않는다. 계속해서 기득권 세력의 지배 수단이 될 뿐이다. 그렇다면 이 물건을 어찌할 것인가. 애당초 노동자․민중이 차지할 수 없는 무기라면 그저 파괴해버릴 수밖에. 기존의 국가를 ‘분쇄’하고 아예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만 새 세상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혁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즉,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에게 기존의 국가는, 그것이 비록 민주공화국이라 할지라도, 자본가계급의 무기가 될 수밖에 없는 구조와 생리를 지니고 있다. 선거로 그것을 노동자․민중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은 환상이다. 가능한 방법은 기존 국가를 파괴하고 노동자․민중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는 것이다. 그러니 무엇보다도 국가를 ‘분쇄’하자!
 
* 더 읽을 책․글들:
- K. 맑스, 『프랑스의 내전』: 『칼 마르크스․프리드리히 엥겔스 저작선집 4』(박종철출판사)에 수록.
- V. I. 레닌, 『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논장, 1988: 절판 상태.
 
 
2.3 전통적인 두 국가론에 대한 비판: 역사적 경험에 따른 비판
  
2.3.1 국가를 ‘장악’하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다 
 
개혁적 사회주의자들은 선거를 통해 국가를 장악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힘으로 사회개혁을 펴나갈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서유럽 여러 나라에서는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주도로 복지국가가 건설되기도 했다. 그렇다면 적어도 발전된 민주주의 사회의 경우에는 개혁주의 노선이 옳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렇게 단정짓기에는 석연치 않은 대목이 많다. 우선 복지국가를 건설한 과정부터가 그렇다.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처음 집권하기 시작한 것은 1차 대전 직후부터였다. 그러나 복지국가가 본격적으로 건설된 것은 2차 대전이 끝나고 나서였다. 스웨덴 정도만이 예외였다. 이것은 복지국가 건설 과정에서도, 진보정당이 선거로 집권하고 나서 개혁정책을 하나 하나 추진하는 식으로 일이 진행되지는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1920년대에 등장한 좌파 정부들(혹은 좌파가 주도한 연정)은 모두 우파 정당이나 정부 내의 반대 세력들과 타협을 모색하다가 변변한 개혁정책 하나 추진하지 못했다. 1934년 오스트리아에서는 진보적 정책을 펼치던 비엔나의 좌파 시정부가 극우파 중앙정부의 군사 공격으로 해산되기까지 했다. 2차 대전을 거치면서 전 세계적으로 자본가계급이 한 발 물러서게 된 뒤에야 복지개혁이 순조롭게 추진될 수 있었다.
  
게다가 진보정당의 개혁이 자본가계급이 용인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서면 이야기가 전혀 달라진다. 특히 자본가계급의 소유 독재에 손을 대는 순간 일이 벌어진다. 다름 아니라 국가기구 내에서 기득권 세력과 긴밀히 연관돼 있는 부분들이 개혁을 사보타지하고 나선다. 더 나아가 이들은 오히려 개혁 추진 세력을 포위하여 무력화시킨다.
 
1974년에 영국 노동당이 25대 대기업의 국유화를 총선 공약으로 내걸고 집권했을 때, 이런 일이 벌어졌다. 당내 좌파 성향의 토니 벤이 산업부 장관이 돼 국유화 공약을 실현시키려 하자 고위 경제 관료들이 일손을 놓았다. 이들은 주류 언론 매체들과 손잡고 벤 장관 죽이기에 나섰다. 단지 선거 공약을 지키려 했을 뿐인 벤은 노동당 내각 안에서마저 따돌림의 대상이 됐고, 국유화 정책은 흐지부지됐다.
 
만약 이렇게 굴복하지 않고 선거에서 노동자․민중과 맺은 약속을 ‘겁도 없이’ 계속 추진하려 한다면 어떻게 될까? 1970년에 집권해서 1973년 미국의 사주를 받은 군부 쿠데타로 무너진 칠레의 인민연합(사회당․공산당 등의 연합) 정부가 그 답을 보여준다. 인민연합의 살바도르 아옌데 후보가 국유화 등의 공약을 내걸고 대통령에 당선되자 칠레의 기득권 세력은 선거 결과를 무시할 준비가 돼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아옌데가 대통령이 돼도 그 명령에 따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선언한 참모총장이 첫 번째 희생양이 되었다. 누군가 그의 자동차에 폭탄을 설치해 날려 버린 것이다. 우파정당들은 새 정부로부터 개헌 시도를 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나서야 새 정부의 출범을 인정했다.
  
하지만 싸움은 오히려 그 다음부터였다. 아옌데 정부의 개혁정책은 의회의 다수 의석을 차지한 우파정당들과의 힘겨운 싸움을 거쳐야 그나마 세상에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한데 그것조차도 헌법재판소로부터 번번이 위헌 판결을 받아 무효가 되기 일수였다. 또한 이 나라에서도 수많은 행정 관료들이 사실상 태업 상태에 들어갔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군대가 있었다. 군대 내의 수구파 장성들은 1973년 9월 11일 결국 쿠데타를 일으켜 합법 정부를 박살내고 10만 명을 학살했다.
    
한 마디로, 국가를 ‘장악’한다는 것은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다. 국가기구의 각 부분들은 선출직 공직자에 반발해 들고일어날 수 있으며, 그것은 아주 효과적이다. 개혁주의자들의 국가론에 대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비판이 상당 부분 사실로 드러난 것이다. 특히 개혁정책이 기득권 세력의 이해와 심각하게 대립하는 상황에 이르면 그 비판은 마치 불길한 예언과도 같이 어김없이 실현되곤 했다. 기존 국가기구는 개혁의 수단이 아니라 그 강력한 걸림돌, 아니 반개혁의 디딤돌이 되곤 했던 것이다.
 
* 더 읽을 책․글들:
- 고세훈, 『영국노동당사』, 나남, 1999: 이 중 제9․10장
- 서병훈, 『다시 시작하는 혁명』, 나남, 1991: 칠레 아옌데 정부의 경험을 정리한 책.
- 장석준, 「칠레의 전투는 계속된다: 칠레 사회당․공산당과 아옌데 인민연합정부」, <이론과 실천> 2003년 5월호.
- 영상자료: <칠레의 전투> 제1부 (인권운동사랑방 배급)
 
   
2.3.2 국가를 ‘분쇄’하는 게 가장 바람직하고 효과적인가 
 
그렇다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이 곧 우리의 대안인가? 그렇게 답할 수 있다면 편하겠지만, 20세기의 교훈은 그런 간편한 양자택일을 허용하지 않는다. 혁명 노선도 나름의 한계와 오류에 부딪혔다.
  
우선 민주공화국의 모순적 성격을 충분히 주목하지 못했다는 게 드러났다.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대의 민주주의가 아무리 발전해도 국가의 폭력적․계급적 성격이 변하기는 힘들다는 지적은 올바른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측면에서 대의 민주주의의 위력은 생각보다 강한 것이었다. 선거나 의회 제도가 결정적인 순간마다 그 한계를 여실히 드러냈음에도 불구하고 선진자본주의 사회의 대중은 그것을 이유로 기존 국가기구 전체의 파괴를 선뜻 지지하지는 않았다. 러시아의 10월 혁명이 단순히 반복되기는 쉽지 않았던 것이다. 대중은 그보다는 대의제의 룰을 계속 고수하려 했다.
 
20세기 초에 전 세계를 뒤흔든 자본주의의 위기가 진정된 2차 대전 이후에는 그런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자본주의의 위기 시기에도 혁명정당들(제3인터내셔널, 즉 코민테른에 속했던 공산당들)은 선진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혁명을 실현시키는 데 실패했지만, 2차 대전 이후에는 더더욱 이런 고전적 혁명 노선을 주장하는 정치세력이 대중의 지지를 얻기 힘들었다.
 
더욱 치명적인 것은 국가기구의 ‘분쇄’를 추진한 역사적 경험, 즉 러시아 10월 혁명이 뜻밖의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이다. 러시아에서는 기존의 의회 대신에 새로운 대의기관으로 소비에트(노동자․농민․병사 평의회)가 등장했다. 구 체제의 경찰과 군대도 해산되고, 국가기구 전체가 새로 조직됐다. 그런데 이 새로 등장한 국가가 과거의 짜르 정부를 능가하는 관료 독재를 펼치기 시작한 것이다. 1930년대에 들어서면 우리가 흔히 ‘스탈린주의’라고 부르는 억압적 체제가 그 완성된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10월 혁명의 변질은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한 나라들에서 혁명 노선이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현실사회주의의 실상이 외부에 그대로 알려지는 게 우파의 어떠한 반공 선전보다 더 효과적이었다.
   
말하자면 혁명적 사회주의자들의 국가론은 개혁주의에 대한 비판으로는 위력을 발휘했으나 그 대안은 만족스럽게 제시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10월 혁명의 경험은 서구의 민주공화국에는 잘 들어맞지 않았다. 민주주의가 일정하게 정착된 사회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서는 사회 변혁이 어떻게 가능한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3. 국가, 어떻게 바꿀 것인가?
 
3.1 국가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
  
국가는 손에 쥘 수 있는 물건도 아니고, 그렇다고 통째로 부숴야 한다는 시각으로만 볼 것도 아니다. 무엇을 국가라고 부르고 무엇을 국가가 아니라고 불러야 할지 난감할 정도로 현대 국가는 다양한 조직과 활동들로 구성된다. 한 사회 전체만큼이나 복잡하게 여러 사회적 관계들이 그물처럼 얽혀 있는 게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국가를 이루는 여러 구성 요소들은 서로 그 구조와 기능이 다를 뿐만 아니라 역사적 뿌리 자체가 다르기도 하다. 관료제나 상비군은 비교적 오래 전부터 국가의 구성 요소가 돼온 것들이다. 국왕과 귀족이 지배하던 당시에도 이들은 국가기구의 일부를 이뤘었다. 한데 의회는 이것들과는 출생이 다르다. 애당초 의회는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시기에 국왕의 군대와 겨루고 귀족계급과 투쟁하던 혁명 기관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 혁명이 승리하고 나자 바로 이 의회가 관료제, 군대 등과 함께 국가의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되었다. 아니 국가 내의 새로운 권력 중심으로까지 부상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서로 그 기원이 다른 기관들이 오랜 역사적 과정을 통해 서로 결합돼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고 있는 게 지금의 국가다.
 
또한 사회의 다른 부분(흔히 ‘시민사회’라 부른다)과 국가 사이의 경계가 모호하다는 점도 국가를 둘러싼 이야기들을 복잡하게 만든다. 현대 국가일수록 국가와 시민사회가 서로 중첩되는데, 이게 우연이 아니라는 것이다. 시민사회 안에 국가의 촉수가 길게 뻗어 나와 있어야 국가의 활동이 원활하게 펼쳐질 수 있다. 이걸 방향을 달리 해서 보면, 시민사회의 여러 부분들이 국가 내부와 깊숙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기도 하다. 김대중 정부 때 만들어진 제2건국위원회는 국가기관인가, 시민사회인가? 노무현 정부가 무슨 일 있을 때마다 만들자고 주장하는 범국민 연석회의 운운은 또 뭔가?
 
국가가 누군가의 손에 쥐어지길 기다리는 장돌도 아니고 어떤 집단의 전용 무기도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고 잡다한 요소들이 얼기설기 모여 있는 무질서한 다발 같은 것은 더욱 아니다. 차라리 수많은 세포로 이뤄져 있고 다양한 내장 기관들의 복잡한 운동을 통해 살아가는 생물체라고나 할까.
 
그럼 이렇게 다양하고 서로 상반되기까지 하는 요소들을 국가라는 하나의 덩어리로 통일하는 힘은 도대체 무엇인가? 고대의 폭력적 지배 조직으로부터 비롯된 이 국가라는 것을 수많은 하위 조직과 활동들을 포괄하는 복잡한 그물망으로 발전시킨 그 힘은 무엇인가? ― 그것은 바로 사회적 세력관계들, 투쟁과 타협의 관계들이다(계급, 성, 인종 등등). 그리고 그 중에서도 계급 세력관계, 즉 계급투쟁이다.
 
어떠한 조직들이 서로 어떤 관계를 맺어 국가라는 걸 구성할지 결정하는 것은 계급 세력관계다. 국가 전체에서 어떤 조직이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할지 결정하는 것도 계급 세력관계다. 그 때 그 때의 계급투쟁이 국가의 성격과 구조, 작동 방식을 결정한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함의를 끌어낼 수 있다.
 
첫째, 지금까지의 국가는 지배계급의 독무대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겠는가. 이제까지 계급 세력관계란 건 항상 지배계급이 일방적으로 리드하는 판이었다. 자본주의 사회에는 자본가계급의 헤게모니가 사회 곳곳에 뿌리내리고 있다. 따라서 국가라는 복잡한 그물망도 결국은 자본가계급을 향해 쏠릴 수밖에 없다.
 
둘째, 그렇지만 동시에 주목해야 할 것은 국가에 지배계급의 권력과 이해가 관철되는 과정은 그렇게 자동적이거나 순탄하기만 한 게 아니라는 점이다. 다시 말하지만 국가는 ‘그 때 그 때’의 계급 세력관계에 의해 결정된다. 그렇다면 국가가 자본가계급을 향해 쏠리는 것도 항상 기계적으로 보장되는 거라고 볼 수는 없다. 아니, 이것은 ‘그 때 그 때’ 확인되고 또 재확인되어야 한다. 게다가 그 과정은 사회의 여러 투쟁들에 노출된 시끄럽고 골치 아픈 것이다. 그렇다면 ‘때에 따라서는’ 국가 안에 자본가계급의 뜻을 관철하는 데 실패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이제 비로소 국가는 하나의 생물체처럼 뭔가 확실히 꿈틀거리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셋째, 혁명 수준의 격렬한 계급투쟁은 국가에도 그 정도의 커다란 변화를 야기한다는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이 바로 그 대표적 사례다.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 즉 국왕․귀족과 부르주아 계급 사이의 계급투쟁 과정에서 의회라는 부르주아 계급의 혁명 기관이 등장했다. 이 기관은 민중들의 지지를 받아 권력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했고 이를 중심으로 국가 전체가 다시 짜여졌다. 새로운 기관이 등장하고 그것이 새 중심이 되었으며 이에 따라 국가의 얼개가 크게 바뀌었다. 즉, 국가는 ‘변형’되었다.
 
* 더 읽을 책․글들:
- A.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이상훈 옮김, 거름, 1999: 이 중 제2장 “국가와 시민사회”.
- C. 보그, 『다시 그람시에게로』, 강문구 옮김, 한울, 2004: 그람시의 사상을 정리한 책.
- N. 풀란차스, 『국가, 권력, 사회주의』, 박병영 옮김, 백의, 1994: 절판 상태.
- B. 제솝, 『풀란차스를 읽자』, 백의, 1996: 현대 맑스주의 국가이론가 풀란차스의 사상을 정리한 책.

3.2 국가 안의 투쟁: 본격적인 싸움은 집권 이후부터 
 
민주공화국에서 사회주의자는 선거와 의회에 참여해야 한다. 아주 강한 의미에서 참여<해야> 한다. 선거와 의회는 국가 안에서 민중 투쟁에 가장 열려 있는 공간이다. 또한 이것은 민중 투쟁의 산물이기도 하다. 우리의 경우는 4월 혁명, 광주 항쟁, 6월 항쟁을 떠올려 보면 된다. 대의민주제는 어쨌든 형식적인 수준에서는 진보정당도 선거를 통해 집권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준다.
   
사실 선거로 집권하고 나서 과연 제대로 된 개혁을 펼칠 수 있는지 여부는 고사하고라도 선거란 것 자체가 이만저만 편파적이고 왜곡된 싸움판이 아니다. 미국을 비롯한 대부분의 유서 깊은 ‘민주’공화국에서 1인1표는 추상적 이상에 불과하다. 지역 선거구에서 한 명의 당선자를 뽑는 경기는 도대체 국민의 의사를 정치에 반영한다는 목표와는 거리가 멀다. 비록 가장 민주적인 선거 제도(비례대표제)를 취한다 하더라도 근본적인 장애는 계속 남는다. 선거전은 여론전인데, 자본주의 사회에서 대부분의 거대 매체는 자본의 소유다. 이들 매체는 아무래도 기존 체제를 대변하는 역할에 충실할 수밖에 없다. 정치적 주장을 사람들의 귀에 다가가게 하는 데에 이미 커다란 불평등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주의자는 선거와 의회 공간을 포기할 수 없다. 그것은 선거 정치에 대한 환상 때문은 아니다. 아니, 어떠한 환상과도 관계없는, 가장 냉정한 현실 판단 때문에 그렇다. 이미 대의민주제가 뿌리내린 사회, 그것도 민중 투쟁을 통해 그것을 쟁취한 사회에서 대중은 선거와 의회를 값싸게 여기지 않는다. 그것에 결코 만족할 수 없고 자주 냉소의 대상이 되긴 하지만, 어쨌든 그것이 자신들의 의사를 표출하는 가장 중요한 통로라고 여긴다. 다른 더 나은 통로가 없다는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에 제도정치공간은 그 정당성을 유지한다. 사회주의 세력이 소수 엘리트가 아닌 다수 대중의 지지와 동의에 기반해 사회를 바꾸려 하는 한(다수자 혁명), 제도정치공간은 사회주의자들이 반드시 두 발을 디뎌야 할 곳 중 하나다.
   
하지만 우리는 개혁적 사회주의자들과 같은 환상에 빠져서는 안 된다. 국가기구 내에서 선거를 통해 접근하고 확보할 수 있는 공간은 극히 제한되어 있다. 노동자정당이 선거에서 승리해 여당이 된다고 할지라도, 이것은 국가권력이 곧바로 노동자․민중에게 넘어온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것은 국가 내에서 하나의 진지, 아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코 국가 전체와 혼동되어서는 안 될 한 진지를 확보한 것을 뜻할 뿐이다. 우리는 항상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따라서 집권은 끝이 아니라 시작일 따름이다. 오히려 본격적인 싸움은 집권 이후에 시작된다. 칠레의 사례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진보세력이 집권해서 급진적 개혁정책을 펼치면 기득권 세력과 노동자․민중 사이의 이해 대립이 대중의 눈에 선명히 드러나게 된다. 기득권 세력은 (외세를 비롯한) 참으로 다양한 수단을 동원해 반격을 펼치지만, 이 중에서도 특히 효과적인 방법은 국가기구 내에서 집권 진보세력에 대한 사보타지와 반란이 일어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의 가장 근본적인 대립이 국가기구 내의 투쟁에 집약돼 나타난다. 이 치열한 무대 연기는 지금까지 숨죽이고만 있던 관객들로 하여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게 한다. 이제 역사의 전혀 새로운 국면이 열린다.
  
이것은 중앙정부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진실이 아니다. 의회의 일부에 진출하든 지방자치단체의 여당이 되든 마찬가지다. 체제 자체에 손을 대는 것과는 거리가 먼 수준의 개혁정책이라 하더라도 때로 기득권층의 반발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한국사회처럼 한 번도 진지한 사회개혁이 추진되어본 적이 없는 곳일수록 그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다. 이 때 진보세력은 기득권층의 반대를 이유로 개혁을 포기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이것을 대중들의 새로운 각성과 참여의 기회로 활용해야 한다. 국가기구 안에서의 진보세력의 정치활동은 이렇게 대중의 역량을 강화시키는 계기로서 기획되어야 한다.
  
브라질 노동자당이 포르투 알레그레 시에서 추진한 참여예산제가 주목할만한 사례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노동자당 시정부는 시의회 내의 보수파 때문에 예산안을 통과시키지 못하게 되자 시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예산안을 짜게 했다. 시의회의 보수파들도 시민의 힘에 굴복해 이 예산안을 승인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이 도시의 예산안은 항상 시민들의 활발한 참여를 통해 작성되었다. 지방자치제도 내의 투쟁이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새로운 역사를 연 것이다.
 
3.3 국가 밖의 투쟁: 핵심은 아래로부터의 민중권력
  
위에서 살펴본 것처럼, 국가기구 안의 대립과 타협을 결정하는 것은 국가 안팎에 걸친 계급 세력관계다. 그렇다면 국가기구 내의 진보세력의 투쟁도 계급 세력관계가 노동자․민중 쪽에 유리한지 그렇지 못한지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즉, 진보세력이 제도정치공간에서 투쟁할 힘은 노동자․민중운동의 역량에서 나온다.
  
이것은 사회주의 운동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득표율과 국회의원 수, 지방의원 수가 진보세력의 역량을 말해주는 게 아니다. 이런 것들보다 더 중요한 것은 노동자․민중운동의 성장이다. 진보정당이 국가 내에 일정한 진지를 확보하더라도 대중운동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국가기구 내의 투쟁 역시 제대로 이뤄질 수 없다. 낮은 수준의 개혁정책조차 밀어붙이기 힘들 것이다. 민주노동당이 원내에 진출한 뒤 겪고 있는 상황이 바로 이런 것 아닌가. 노동운동․농민운동이 모두 침체와 수세 상태에 있기 때문에 국회의원들의 활동도 폭발력을 갖기 힘든 형편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는 핵심은 대중운동이라는 점을 결코 잊어선 안 되는 것이다. 진보정당의 성장은 노동조합운동의 발전과 함께 해야 한다. 한편에서는 국회 의석도 늘어야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지역에 진보적인 공동체들이 뿌리내려야 한다. 지도자들이 TV에 자주 나오는 것도 좋지만, 기존의 매체들을 대신하거나 변화시킬 대안문화운동이 절실히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지만 단지 이것만이 아니다. 노동자․민중운동의 가장 드높은 형태는 민중권력이다. 중요한 역사적 순간마다 대중은 기존의 대의민주제를 훌쩍 뛰어넘는 새로운 민주주의를 스스로 고안해낸다. 정치라고는 관심도 없고 패배와 냉소에 젖어 있는 것만 같았던 대중들이 어느 날 갑자기 권력의 주인임을 확인하고 나서는 것이다. 이들은 어떠한 이념가보다 더 앞으로 나아가고 어떠한 이론가보다 더 뛰어난 창의력을 보여준다.
  
1871년 프랑스의 파리 코뮌, 1917년 러시아의 노동자․농민․병사 평의회(러시아 말로 ‘소비에트’), 1919년 이탈리아의 공장평의회 등이 그 좋은 예다. 우리 역사에서도 1894년 동학농민혁명 중의 집강소나 해방 공간에 등장한 건국준비위원회․노동자 자주관리운동 등이 이런 사례에 해당한다.
 
민중권력은 기득권 세력과 노동자․민중 사이의 이해 대립이 사회 전체에 걸쳐 너무도 선명히 부각될 때 그 모습을 드러낸다. 단순히 선동만 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계기가 있어야 한다. 국가기구 내의 투쟁을 통해 사회의 근본 대립이 모두의 눈앞에 명백히 드러나는 상황이 이런 계기들 중 하나다.
  
1972년 10월의 칠레가 바로 그런 순간을 보여준다. 이 때 칠레에서는 자본가계급이 아옌데 정부에 반대해 일손을 놓았다. 파업투쟁을 한 것이다! 파업은 노동자들만의 무기가 아니었다. 더구나 풍족한 파업 기금을 지닌 자본가계급의 단결력은 노동자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공장에 관리자들이 출근하지 않고, 상점들이 문을 닫아 생필품을 사기도 힘들어졌다. 그러자 이제 노동자․민중이 전면에 나섰다. 인민연합 정부에만 기대를 거는 게 아니라 민중들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열기 시작한 것이다.
 
노동자들은 공장 자주관리 기관인 산업코르돈(‘코르돈’은 조정위원회라는 뜻이다)을 공장마다, 공단마다 만들었다. 관리자들이 출근하지 않아도 공장이 다시 돌아갔다. 더구나 어떤 공장에서는 이윤이 아니라 삶을 위한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상점이 문을 닫아 품귀 현상이 일어난 동네에서는 주민 자치 기관인 ‘자치지도부’가 만들어져 시장을 거치지 않고 생필품을 공급했다. 일이 이렇게 되자 자본가계급도 결국 한 달만에 파업을 풀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아옌데 정부를 굴복시키기는커녕 역사의 참된 주인공의 잠만 깨웠을 뿐이었다.
  
똑같은 일이 지금 베네수엘라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차베스 대통령의 진보적 정책이 기득권 세력의 반발을 가져와 어용 노조의 파업, 군부 쿠데타 시도, 대통령 불신임 국민투표 등 정치적 대립이 격렬해지자 이 나라에서도 민중들 자신이 무대의 주인공으로 나섰다. 30년 전의 칠레와 꼭 마찬가지로 공장에서는 자주관리, 지역에서는 민중 자치의 거센 물결이 휘몰아치고 있다.
    
포르투 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도 규모만 훨씬 작다 뿐이지 이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사례다. 해마다 수만 명의 시민이 예산 작성 과정에 참여하고 기존의 시의회 외에 예산참여평의회라는 새로운 자치 기관이 등장해 시민들의 토론장 역할을 하는 것은 민중권력의 초보적 단계라 할 수 있다.
  
3.4 국가 안과 밖의 투쟁을 통해 국가를 ‘변형’시킨다
  
여기에서 당연히 이런 물음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그럼 기존 국가 내의 투쟁과 새로 등장한 민중권력 사이의 관계는 무엇인가?
  
우리가 갖고 있는 답 중 하나는 민중권력기관이 기존 국가기구에 맞서게 하는 것이다. 즉,  ‘이중 권력’이다. 그리고 결국은 민중권력기관(소비에트)이 나서서 기존 국가기구(임시정부)를 ‘분쇄’하고 노동자국가를 새롭게 건설하는 것이다. 바로 10월 혁명의 길이다.
 
이것과는 다른 길을 생각해볼 수도 있다. 한 마디로 국가를 ‘변형’시키는 것이다. 그 구조와 작동 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전혀 새로운 권력 기관이 등장하고, 이 기관이 국가 권력의 중심으로 부상한다. 이를 주축으로 이제까지 국가를 이루던 여러 요소들도 혹독한 변화의 과정을 거친다. 또한 이들 사이의 관계도 바뀐다. 이렇게 하여 ‘변형’된 국가는 지금의 국가와는 확실히 다른 모습일 것이다. 마치 과거의 봉건제 국가가 민주공화국과 다르듯이, 아니 그것 이상으로.
    
새로운 권력 기관이란 곧 민중권력이다. 과거에 의회가 그랬듯이 이제는 현재의 의회보다 훨씬 더 민주적인 대의 기관이 등장해 국가 권력의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른다. 국가기구 내의 투쟁 세력은 민중권력기관의 등장과 확장을 돕고 이들과 연대한다. 민중권력기관이 기존 국가 전체와 대립하는 형국이 아니라 국가기구 내의 투쟁 세력과 만나 사회 전반에 걸친 새로운 그물망을 구축하는 것이다.
  
이 때 국가 내의 어떤 요소들은 폐지되거나 축소되어야 한다. 억압적 국가기구들이 여기에 해당할 것이다. 또 다른 요소들은 역할이 재조정되어야 한다. 기존의 의회는 민중권력기관과 역할을 분담해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요소들은 그 내부 구조와 작동 방식이 완전히 바뀌어야 한다. 경제 전문 관료기구는 시민사회의 이해당사자들이 참여하는 경제 담당 위원회로 교체되던가 그것에 무릎을 꿇어야 할 것이다.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정부는 집권하자마자 헌법을 개정해 국가기구를 크게 손봤다. 직접민주주의 제도들이 도입되고, 관료 엘리트들의 본산인 사법부 등의 구조가 바뀌었다. 이것은 국가를 변형시킨다는 게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다.
  
국가의 변형, 30여 년 전 칠레의 민중들은 이 길의 첫 발만 내딛은 상태에서 패배하고 말았다. 반면 지금 베네수엘라 민중들은 이 길의 중턱을 넘어서고 있다. 역사상 가장 앞선 경험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끝이 어디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한편 오래 전, 1차 대전 직후, 유럽에서도 비슷한 시도가 있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노동자와 참전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건설한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합법 기관으로 인정했다. 하지만 이것은 새로운 대의 기구로 성장하지 못하고 사회민주노동당의 동원 기구 정도로 전락했다. 이렇게, 민중권력기관이 국가의 새로운 중심으로 부상하기보다는 오히려 기존 국가기구에 흡수돼버릴 수도 있다.
  
말하자면 국가 변형론 역시 역사 속에서 충분히 검증된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이와 비슷한 길을 추구한 얼마 안 되는 역사적 경험들 중에도 역시 성공보다는 실패 사례들이 더 많다. 또한 무슨 완성된 모델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지금 우리가 갖고 있는 것은 밑그림에 불과하고 그 내용은 이제부터 씌어져야 할 판이다. 하지만 형식민주주의가 뿌리내린 민주공화국에 적합한 변혁 전략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장 풍부한 시사를 던져주는 논의인 것만큼은 틀림없다.
  
한편 미해결의 과제 중 특히 중요한 것으로 억압적 국가기구의 반발이나 외세의 간섭 같은 문제를 지적하고 넘어가야겠다. 사실 이것들은 애당초 어떤 이론적 공식으로 풀릴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구체적 상황의 구체적 분석과 그에 따른 실천이 필요할 뿐이다. 베네수엘라를 예로 들어 보자. 베네수엘라에서는 군대 내의 민중적 부분이 차베스 정부를 성원한 덕분에 평화 혁명이 가능했다. 보수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차베스 정부를 지지하는 공수부대가 쿠데타 군을 진압해버렸다. 또한 베네수엘라가 갖고 있는 석유 자원이 외세의 개입을 우습게 만들었다. 오일 달러가 있고 베네수엘라를 지지하는 이웃 나라들(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이 있기 때문에 미국의 협박도 별 효과가 없다. 하지만 어쨌든 이것은 베네수엘라의 이야기다.
 
* 더 읽을 책․글들:
- N. 풀란차스, 「유로코뮤니즘: 민주적 사회주의로의 길」, 한국정치연구회 사상분과 편, 『현대민주주의론 2』, 창작과비평사, 1992.
- B. 제솝, 『풀란차스를 읽자』, 백의, 1996: 이 중 제16장 “민주적 사회주의로의 민주적 이행”.
- M. 카노이, 『국가와 정치이론』, 이재석 옮김, 한울, 1985: 이 중 제6장 “국가, 민주주의 및 사회주의로의 이행”.
- R. 밀리반트, 『회의하는 세대를 위한 사회주의: 사회주의의 새로운 모색』, 이남표 외 옮김, 변증법, 2003.
- 장석준, 「칠레의 전투는 계속된다: 칠레 사회당․공산당과 아옌데 인민연합정부」, <이론과 실천> 2003년 5월호.
- M. 아르네케르, 「미래를 만들기 위해 과거를 이해하자」, <이론과 실천> 2003년 10월호: 칠레 아옌데 정부의 경험을 평가한 글.
- 영상자료: <칠레의 전투> 제2․3부 (인권운동사랑방 배급)
- M. 그레 외, 『새로운 민주주의의 희망』, 김택현 옮김, 박종철출판사, 2005: 브라질 포르투 알레그레 시의 참여예산제 경험을 정리한 책.
- 마르꼬스 외, 『게릴라의 전설을 넘어』, 박정훈 옮김, 생각의나무, 2004: 이 중 제2장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

  
3.5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지향: 국가는 점차 ‘사멸’해야 한다
  
고전 사회주의 이론가들이 국가 문제를 놓고 제시한 이상은 참으로 드높고 원대한 것이었다. 맑스, 엥겔스, 레닌, 이런 사람들은 단지 기존의 자본가계급 국가를 무너뜨리고 노동계급의 국가를 건설하자는 이야기만 한 게 아니었다. 이들은 국가 자체가 결국은 없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노동계급 국가도 마찬가지다. 노동계급 국가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노동계급’ 국가인 주된 이유는 스스로 알아서 사라져 가는 국가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왜 국가가 사라져야만 하고 또 사라질 수밖에 없는가? 국가는 어쨌거나 누군가가 다른 누구를 지배하기 위한 조직이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자본가계급도, 따라서 그에게 고용돼 살아가는 노동계급도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소유권을 공유하는 동등한 시민이 된다면 국가가 더 존재할 필요가 없다. 민중을 억압하고 다른 국가와 싸우기 위해 폭력을 독점하는 조직이 더 있을 이유가 없다. 대중 스스로 자신의 삶을 결정할 것이기 때문에 국가라는 이 대리 통치 기관은 이제 무용지물이다.
  
다만 국가는 단박에 없어지고 마는 건 아니다. 국가가 없어질 토대가 갖춰져야, 즉 자본주의 계급사회가 일단 극복돼야 국가도 없어질 수 있다. 말하자면, 국가는 서서히 죽어 가는 것이다. ‘사멸’하는 것이다.
  
이게 고전 사회주의 이론가들의 주장이다. 너무 유토피아적인 공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도대체 국가 없는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상상하기도 힘들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가 사멸의 이상은 결코 만만히 볼 게 아니다. 이것은 자본주의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현대 생활의 비극을 직시한 데서 나온 근본적 문제의식이다. 20세기의 수많은 비극 중에서 국가와 무관한 게 과연 있는가? 사회주의 운동 자체의 비극도 혁명의 실험들이 국가주의로 전락해버린 데서 비롯된 것 아닌가? 요즘 ‘비국가적 실천’ 같은 말이 회자되는 것도 국가 사멸의 이상을 새삼 재발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국가가 주도하는 이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결국 대규모 폭력의 문제(전쟁, 학살 등등)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국가 사멸의 이상을 사멸된 채 놔둬선 안 되는 것 아닐까.
  
물론 국가 사멸의 상태를 마음 속에 그려놓고 이것을 현실에 기계적으로 적용하려 한다면 큰 사단이 날 것이다. 하지만 국가의 사멸을 장기적이고 근본적인 지향으로 바라보고 이에 따라 지금 우리의 실천이 어느 쪽으로 향할지를 결정한다면 이건 또 다른 이야기다. 맑스의 말처럼 “공산주의[국가의 사멸도 이 개념 안에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인용자]는 우리가 달성해야 할 미래의 상태나, 현실을 끼워 맞춰야 할 어떤 이상이 아니라, 현재의 상태를 지양하는 현실의 운동”(『독일 이데올로기』)이니까 말이다.
  
이탈리아의 사회주의자 안토니오 그람시는 국가의 사멸이 곧 국가(정치사회)가 시민사회에 흡수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옥중수고』). 국가가 대리하던 활동들을 민중들 자신, 그리고 민중 자치조직의 몫으로 회수한다는 이야기다. 달리 말하면, 국가 없이 자기 삶을 스스로 결정하고 꾸려갈 수 있는 민중들의 능력이 성숙해 가는 과정이고, 민주주의가 끊임없이 심화․확대되는 과정이다. 즉, 우리가 장기적․근본적 지향으로서 국가의 사멸을 추구한다는 것은 항상 민중의 자치가 확대되는 방향으로 정치 활동을 기획․실천한다는 의미에 다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권력이 등장하고 이를 통해 국가가 변형되는 것은 국가 사멸의 이상을 향한 일대 도약이라고 할 수 있다. 민중권력의 부상은 곧 민중 자치의 비약적 성장을 의미하기 때문이며,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의 폭발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기에 덧붙일 게 몇 가지 있다. 고전 이론가들이 충분히 강조하지 못한 내용, 두 가지다.
 
하나는 국가 사멸의 국내적 조건에 관한 것이다. 레닌을 비롯한 고전 이론가들은 하나 같이 국가 사멸의 ‘경제적’ 토대만을 지나치게 강조했다. 그러나 경제적 영역만 강조하는 것은 너무 일면적이다. 국가는 그것을 대신할 대안적 사회 조직들이 성숙하지 않고서는 결코 인류 역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대안적인 사회 조직들은 자본주의 착취 관계가 사라진다고 해서 자동으로 생겨나는 게 아니다. 대중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능력이 함께 성숙해야 한다. 또한 민중권력의 밀물이 한 차례 휩쓸었다고 해서 단번에 민중 자치의 능력이 성숙하는 것도 아니다. 더 많은 역사적 경험 속에서 단련되고 또 단련되어야 한다. 이를 위한 의식적인 노력이 없이는 착취와 폭력 없는 세상은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만년의 레닌이 ‘문화혁명’을 그토록 강조한 것도 결국 이런 이유 때문 아닐까.
  
다른 하나는 국가 사멸의 국제적 조건에 관한 것이다. 국가가 존재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다른 국가들이 존재한다’는 가장 단순한 사실에 있다. 다른 국가들이 존재하는 한, 이에 대해 주권을 주장할 ‘우리의’ 국가가 존재해야만 한다. 즉, 국가들이 서로 지배하고 지배받으며 경쟁하고 싸우는 국제질서가 그대로 남아 있는 한, 국가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10월 혁명 이후 등장한 혁명 국가가 다른 국가들과 별 차이 없는 것으로 전락한 데는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탓이 컸다. 혁명 러시아가 제국주의 국가들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이 신생 국가는 제국주의 적대국들의 논리를 모방하며 제 살길을 찾았던 것이다.
 
이제 ‘국제연대’라는 추상적인 구호는 국제질서를 조금이라도 의식적으로 개편하려는 구체적인 노력들로 나타나야 한다. 이 점에서 일국 혁명과 세계 혁명의 이분법은 허망한 것이다. 세계 변혁이 일국에서 시작될 수밖에 없듯이 모든 일국적 변혁(개혁의 수준일지라도)은 세계 개조의 전망을 동반하지 않고서는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 이러한 전망이 없다면 진보세력은 국가 간 경쟁과 투쟁의 논리를 무의식적으로 뒤좇다가 항상 국가주의의 포로 신세를 반복하게 될 것이다. 신자유주의적 유럽연합 헌법안에 반대하면서 사회권 중심의 통합을 요구하는 유럽 사회주의 운동의 움직임이나, 최근 라틴아메리카에서 좌파 정부들의 주도로 추진되는 통합운동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 더 읽을 책․글들:
- V. I. 레닌, 『국가와 혁명』, 김영철 옮김, 논장, 1988: 절판 상태.
- A. 그람시, 『그람시의 옥중수고 1: 정치편』, 이상훈 옮김, 거름, 1999: 이 중 제2장 “국가와 시민사회”.

    
4. 무엇을 할 것인가?
  
4.1 국가 변형을 위한 당과 대중운동의 판짜기
  
우리의 목표가 국가라는 거미줄 안에 갇히는 게 아니라 그것을 제압하고 바꾸는 것이라면 우리 운동은 바로 지금부터 그 태세를 갖춰나가야 한다. 국회에서 보수세력이 내놓은 법안 하나 제대로 막지 못하면서 벌써부터 집권하고 난 뒤 걱정이냐고 할지 모른다. 팔자 좋은 고민 아니냐, 사치스러운 공상 아니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국가를 어떻게 다루고 사회를 어떻게 바꿔나갈지는 결코 집권 가능성이 높아지고 나서야 고민할 문제가 아니다. 종착역이 어디냐에 따라 우리의 중간 기착 역이 달라진다. 최종 목표가 무엇인지에 따라 지금 우리의 발걸음 하나 하나가 결정된다.
   
국가 변형 전략을 추구한다면 우선 당운동의 중심부터 제대로 놓아야 한다. 대중의 인기를 끌고 선거에 이기는 건 그것대로 해야 하지만, 이것에 취해서 정작 더 중요한 걸 놓쳐선 안 된다. 국회의원이 아무리 많고 지방의원이 수천 명이 돼도 이 사람들이 감투 차지하는 데만 골몰한 정치꾼들이어서는 그 수가 연대 규모가 되고 사단 병력이 돼도 쓸 데 없다. 이런 사람들만으로는 재경부니 외통부니 하는 곳에 포진한 제 잘난 고위 관료들을 제압하기는커녕 비웃음만 사기 딱 알맞다. 몇몇 똑똑한 스타 정치인들이 있다고 해서 상황이 달라지지도 않는다. 이들만의 힘으로 저 방대한 국가기구를 휘어잡기는 애당초 불가능하다. 선거정당․의회정당으로는 집권은 할 수 있을지 몰라도 세상은 바꿀 수 없다.
  
이건 무엇보다도 노무현 정부의 모습에서 잘 드러난다. 노무현 정부가 약속한 보잘것없는 수준의 개혁조차도 관료들에게 영이 안 서서 용두사미가 돼버렸다. 그러자 노무현 정부가 생각해낸 묘책이란 게 기존 정부기구 바깥에 숱한 정책자문위원회들을 만드는 것이다. 하지만 이 위원회들이 하는 일이란 학자들이 모여 보고서 내고 언론 플레이하는 게 고작이다. 정작 일은 여전히 정부 부처들이 알아서 한다. 노무현 지지 세력과 열린우리당이 특히 못나서 이런 게 아니다. 제 아무리 급진적인 언사를 내뱉는 정치세력이라 하더라도 국가기구를 바꿀 능력을 갖추지 못하면 다 마찬가지 운명이다.
  
선거정당․의회정당을 비판하면, 그럼 코민테른의 혁명정당 노선을 선택하자는 거냐고 반문하곤 한다. 물론 과거 혁명운동의 전통 중에는 우리 시대에 맞게 다듬어 계승해야 할 것들이 많다. 하지만 혁명을 신앙으로 바꾼 소규모 정파․서클들이 우리의 대안은 분명히 아니다. 이런 조직, 이런 활동에 머물러서는 혁명은 고사하고 어떠한 거대한 사건도 만들어낼 수 없다.
  
대중은 급진적인 문구의 선전 선동에 감동해 움직이지는 않는다. 대중은 오직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만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한 번 걸음을 내디디면 그 속도는 누구도 예상할 수 없다. 바로 이러한 역사적 경험들을 끊임없이 시도하고 촉발하는 게 당의 몫이다. 그러자면 대중정당은 대중정당이되 선거정당․의회정당의 길에 대해 늘 의문과 비판을 제기하면서 자신의 길을 만들어 가는 정당이 있어야 한다.
  
혹자는 이런 당을 ‘운동정당’ 혹은 ‘사회운동정당’이라 부르기도 한다. 그러나 간판이 중요한 게 아니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분명히 깨닫는 게 관건이다. 사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합법대중정당을 한다면서 선거정치나 국가주의의 덫에 빠지지 않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과거 신선한 시도들로 이름을 날렸던 브라질 노동자당조차 집권 이후에는 영 형편없는 것을 보면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어려운 과제에 도전해야 한다. 어차피 세상을 바꾼다는 게 무슨 선례가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니다. 수풀을 헤쳐 길을 만드는 일이다.
  
우리 시대의 당운동은 다음의 과제들을 손에서 놓지 말아야 한다.
  
첫째, 노동자․민중운동의 성장을 제도정치의 성과만큼이나,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시해야 한다. 노동조합운동을 노동계급 전체로 확대시키고 지역에 풀뿌리 진보세력을 형성하는 걸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둘째, 항상 모든 정치 활동을 국가를 들썩이고 시민사회를 약동시키는 계기로서 기획․추진해야 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대중의 역사적 경험을 촉발하는 것이다. 지역에서는 주민들의, 전국적으로는 노동자․민중의 새로운 집단적 경험을 만들어내야 한다.
 
셋째, 당 활동을 통해 현재의 국가와는 전혀 다른 민주주의의 제도적 맹아와 실천 능력들을 싹 틔워야 한다. 노동 현장과 지역 현장의 토론으로부터 전국적인 합의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훈련해야 한다. 관료기구와는 달리 전문가와 생활인이 기획 단계에서부터 지식과 의견을 함께 나누는 모델을 몸으로 보여줘야 한다. 기존 국가기구의 네트워크(고위 관료-관변 전문가-주류 언론 등)를 압도할 대안세력의 네트워크(대중운동-진보적 지식인․운동가-대안 언론 등)를 구축해야 한다.
     
한편 당뿐만 아니라 대중운동도 변혁 전략의 내용에 따라 그 성격과 과제를 재정비해야 한다. 가령 노동조합들이 단체교섭에만 매몰돼 교섭 전문기구처럼 되어 버린다면 민중 투쟁의 힘으로 국가를 변형시킨다는 것은 공염불에 그쳐버릴 것이다. 그렇다고 전투성을 견지하면 다 될 일도 아니다. 비록 파업 투쟁을 잘 하고 거리에 나가 싸우는 데 능하더라도 광범한 대중이 그 투쟁을 지지하도록 설득할 능력이 부족하거나 그 투쟁력을 새로운 사회의 건설을 뒷받침할 저력으로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이것도 결국 헛일이다.
  
흔히 대중운동이라고 하면 일회적인 동원, 즉 총파업이나 가두 투쟁만을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 운동의 한 측면일 뿐이다. 로자 룩셈부르크는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 투쟁이 갖는 커다란 사회주의적 의미는, 그것이 노동계급의 인식과 의식을 사회[주의]화한다는 것”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사회 개혁이냐 혁명이냐』, 55쪽). 선거에 뛰어들든 총파업 투쟁을 하든 가장 중요한 건 이것이다: 자본과 국가를 극복할 대중의 능력을 형성하고 축적하는 것.
  
한국의 노동자․민중운동은 그간 워낙 국가 권력과 모질게 맞붙어 싸워와서 그런지 일순간에 폭발하고 격렬하게 싸우는 것은 잘 한다. 그 광경을 지켜본 외국인들이 한국은 항상 ‘혁명 전야’라고 오해할 정도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정반대다. 노동자들의 의식이 ‘코포라티즘’이니 ‘개량주의’니 하고 비판받는 서유럽의 노동자만 못하다. 공장과 사무실 담벼락을 넘어 1400만 노동계급이 공동의 이해관계를 지닌다는 생각을 발견하기 쉽지 않다. 서울 도심에서 데모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동네나 마을로 들어가면 그 사람들이 다 어디에 숨었는지.
  
이제 우리 노동자․민중운동은 노동 현장․지역 현장에서부터 대중의 역량을 키워 차곡차곡 쌓아간다는 근본 과제에 치열하게 매달려야 한다. 흔히 ‘진지전’이라는 표현을 쓴다. 수많은 ‘진지’를 건설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국가와 자본의 그물망에 대항하고 그것을 압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파업 투쟁을 해도 그것이 남길 진지가 무엇인지를 고민해야 한다. 협상을 하고 타협을 하더라도 우리가 쟁취할 진지가 무엇인지부터 따져야 한다.
  
4.2 국가 변형을 위한 한 걸음 - 국가의 민주화․자치공간의 확대
 
 
그렇다면 당과 대중운동은 일상적으로 무엇을 주장하고 추진할 것인가?
  
우선, <국가의 민주화>다. 물론 국가 기관들을 조금씩 바꾼다고 해서 국가를 변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을 좀 바꾸고 수많은 위원회에 노동자 대표를 보낸다고 국가의 성격이 바뀌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런 시도들은 국가 안에 진지들을 남길 수 있다. 노동자․민중운동은 이들 진지를 발판으로 저항과 개입의 능력을 훈련할 수 있다. 이러한 경험과 역량이 쌓여야만 모처럼 역사의 기회가 열렸을 때 국가의 변형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만약 이런 ‘예행 연습’들이 없다면 모처럼의 기회도 막간극 정도로 끝나버릴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부터 국가 내에 저항과 개입의 중심들을 건설해야 한다.
 
국가 안에 민주적․민중적 요소를 강화하려면 어떠한 노력이 필요한가? 어디에 어떠한 저항의 중심들을 건설해야 하는가? 토론을 통해 많은 실천 과제들을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일단 다음과 같은 과제들을 정리해본다.
  
선거와 정당․의회제도의 민주적 성격을 강화한다. 전면적인 비례대표제의 도입도 그 한 부분이다. 또한 공직자 소환 제도의 실시도 중요하다.
  
② 한국사회 민주화의 성역으로 남아 있는 국가 기관, 특히 공안기관과 사법부를 민주화한다. 지역 경찰․검찰 책임자를 선출직으로 만드는 것이 그 한 방법이다. 그리고 시민 배심제를 발전시켜야 한다.
  
경제․사회․문화정책 담당 기관들을 노동자․민중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위원회 구조로 바꾼다. 여기에서 위원회란 정부가 안건을 제시하고 결론의 가이드라인까지 쳐놓으면 거기에 들러리나 서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노사정위가 바로 이런 식이었다. 중앙정부부터 지방자치단체에 이르는 숱한 위원회들 모두가 관료기구의 기획․집행 활동에 자문이나 해주는 꼴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위원회가 기획 단계부터 마지막 평가 절차까지 막강한 권한을 지녀야 한다. 최소한 각 참여 주체들이 자유롭게 의안을 상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게만 된다면 경제․사회적 쟁점들에 대한 위원회 내의 논쟁은 그 어떤 폭로나 선동보다 더 효과적으로 사회적 관심과 토론을 촉발하게 될 것이다.
  
국가의 모든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한다. 국가의 모든 비밀 관행은 혁파되어야 한다. 더 나아가, 공공적 성격이 강하면서도 사적으로 독점되어 있는 정보들이 있다. 국가는 이러한 정보들을 시민사회에 공개․유통시키는 통로 역할을 해야 한다.
  
중앙정부의 권한을 대폭 지방으로 이전하고 민중 참여․민중 자치의 계기를 마련한다. 지방자치단체의 권한이 강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중앙의 관료나 정치인들보다 지방의 관료나 정치인들이 더 많은 권한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결정권의 단위가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 물리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곳에 있어야 민중 참여의 가능성도 높아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방으로 이전된 권한들은 다시 지역 민중들에게로 이전되어야 한다. 즉, 민중 자치의 시도들이 필요하다. 위에서 소개한 참여예산제가 그 대표적 사례다. 브라질 외에도 1980년대의 영국 런던에서, 최근 우루과이, 인도 등지에서 비슷한 시도들이 성공을 거뒀다. 이것이 이제는 서울, 대전 그리고 호남의 한 농촌 지역과 영남의 한 지방 도시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공공부문의 지배구조에 노동자․민중 대표가 참여한다. 앞에서 정부 내의 각종 위원회들에 대해 제시한 원칙들이 공공기관과 공기업의 이사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다. 공공부문 지배구조의 민주화는 공공부문에 대한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높임으로써 공공부문이 확장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해준다. 더 나아가 공공부문의 새로운 경험들이 사기업의 소유 및 지배구조에 대한 진보적 논의를 촉발할 수 있다.
  
국가의 일선 요원들 사이에서 대중운동을 발전시킨다. 우선 공무원, 교사, 공공부문 노동자, 경찰, 군인 등이 노동권을 비롯한 제반 권리를 온전히 누려야 한다. 그리고 일선 국가 요원들의 대중운동은 국가 안에서 진보적 개혁을 추진하는 주축이 되어야 한다.
  
⑧ 또한 평화체제 구축과 군비 축소도 국가의 민주화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을 새삼 환기하자. 어느 나라나 군대는 적대 국가의 존재를 그 존립의 이유로 삼는다. 적대국이 존재하고 그 위협이 증폭될수록 군은 팽창하고 군부의 정치적 성격도 강화된다. 따라서 국가 간의 적대적 관계를 극복하는 게 군대의 과잉 팽창을 막고 군부 내의 보수적 요소를 최소화하는 첩경이다. 우리의 경우, 무엇보다도 남북이 평화체제를 구축하고 군비 축소에 착수해야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는 동아시아 차원의 평화체제 건설과 핵 폐기를 포함한 군비 축소를 향해 나아가야 한다.
  
국가의 민주화와 함께 또 다른 중요한 과제는 <자치 공간의 확대>다. 앞의 것이 국가 안에 저항 및 개입의 중심들을 건설하는 것이라면, 뒤의 것은 사회 곳곳에 새로운 권력의 중심들을 건설하는 것이다. 전자가 국가 안의 진지라면, 후자는 국가 바깥에 건설되지만 장래에 새로운 국가의 핵심적 부분이 될 진지라고 할 수 있겠다. 노동자․민중운동은 이러한 자치 공간을 거점으로 삼아 대중의 능력을 배양하고 새로운 사회 관계와 실천의 훈련을 쌓으며 지지 세력을 확대해 나갈 수 있다.
      
민주노조운동의 전통적 가치인 자주성과 현장 권력도 이런 맥락에서 그 의미를 되새겨볼 수 있다. 기업별 노동조합 체제를 깨고 초기업단위 노동조합을 건설하게 되면, 수십, 수백만 규모의 조합원들이 중요한 경제․사회 문제들에 대해 국가와 자본의 간섭 없이 분임 토론을 벌이고 집단적 의사를 형성해야 한다. 즉, 노동조합 사무실이나 대의원대회 장소에 국가와 자본의 힘이 미쳐선 안 된다는 소극적 자주성뿐만 아니라 사회의 다수 구성원인 노동계급이 스스로 집단적 의사를 형성해서 사회의 결정에 영향을 미칠 수 있어야 한다는 보다 적극적인 자주성이 필요하다.
    
또한 현장 권력도 새로운 시각으로 다시 바라볼 수 있다. 노동자․민중운동은 독자적인 교육 기관들을 설립해야 한다. 그리고 노동자의 교육휴가권을 확대해야 한다. 과거에는 이러한 교유휴가권이 자본이 주도하는 좁은 의미의 직업 훈련에 제한되었다면, 이제는 노동운동의 독자적 교육기관에서 실시하는 진보적 시민 교육의 기회로 활용되어야 한다. 이것은 ‘확대된’ 현장 권력에 다름 아니다.
  
노동 현장뿐만이 아니다. 지역 현장에서도 자치 공간들을 확보하고 그 영역을 넓혀가야 한다. 소비협동조합에서 복지협동조합, 생산협동조합까지 다양한 협동조합을 건설하고 이들 협동조합간의 거래를 통해 주류 시장경제로부터 벗어난 경제권을 형성할 수 있다. 노동조합, 농민회가 서로 협력하여 조합원, 농민회원들을 지역생활공동체로 조직할 수 있다. 대안문화운동가들이 지역 문화센터를 건설하고 지역 차원의 FM 라디오 방송을 시도할 수도 있다. 특히 이러한 지역 차원의 자치 공간들이 진보적 지방자치단체와 서로 만난다면 더 강한 폭발력을 갖게 될 것이다.
  
민중들의 삶의 현장 곳곳에 등장할 자치 공간들은 대안 사회의 맹아라고 할 수 있다. 이것 자체가 민중권력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민중권력의 영감이 확대되고 그 꼴을 갖추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자치 공간들을 통해서다.
  
4.3 국가 사멸을 향한 고민
  
마지막으로 국가 사멸의 장기적․근본적 관점에서 우리가 다시 짚어봐야 할 문제들을 지적해야겠다. 아직 고민이 깊지 못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지금부터 머리를 맞대고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들이다.
 
첫째, 지식 혹은 지적 능력의 공유․사회화 문제다. 국가의 극복을 위해 필요한 대중의 역량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이 바로 이 지적 능력이다. 왜 그러한가?
  
계급사회에서는 항상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이 사회적으로 분리되어왔다. 그리고 정신노동을 전담하는 집단이 국가의 중추를 이뤄왔다. 이것은 자본주의 사회와 현대 국가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흔히 고위 관료, 직업 정치인 혹은 전문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은 단순히 자본주의 사회의 지식 격차의 산물일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지식을 독점하고 지적 능력을 사유화하여 그 격차를 온존시키거나 확대한다. (법전에 나와 있는 해독 불능의 기이한 언어들을 떠올려보자. 도대체 이 암호들은 누굴 위해 존재하는가?)
 
현대 국가의 이러한 활동을 해체하지 않는다면, 국가를 변형시키려는 시도들은 국가 관료의 조용한 반격 앞에 다시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또한 대중의 지적 역량을 발전시키지 못한다면, 국가의 수명은 터무니없이 연장되고 관료 독재의 가능성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레닌은 새로운 사회에서는 요리사도 쉽게 국가 회계 업무를 맡아볼 수 있으리라고 내다봤지만, 이것은 지나친 낙관론이었다. 지식․지적 능력의 세계에서 불평등과 싸우는 특별한 노력들이 필요하다.
  
아마도 노동시간이 단축돼 자유시간이 늘어나고 그만큼 공적 생활의 일상적 참여, 학습과 토론, 자기계발과 문화활동의 기회가 풍부해지는 게 해결의 첫 실마리가 될 것이다.
  
둘째, 통일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다. 이제까지 통일은 한반도에서 민족국가를 완성하는 것으로 이해되어왔다. 하지만 왜 민족국가는 ‘완성’되어야 하는가? 그래서 통일을 하지 말자는 게 아니라 통일을 전혀 다른 각도에서 새롭게 바라보자는 것이다. 일단 두 분단국가를 극복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대안이 더 크고 강력한 민족국가를 건설하는 것뿐일까?
  
이 대목에서 지금으로부터 15년도 더 전 문익환 목사가 연방제 통일의 제3단계로 제시한 내용을 주목해보자. 그는 이렇게 제안한다. “제3단계는 남과 북 두 단위로 실시하던 지방자치제를 도 단위로 세분화한 단계이다. 그러나 연방제를 과도기적인 체제로 소극적으로만 이해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민주주의 제도의 기본인, 지방자치제로서 적극적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우리가 실험해야 하는 지방자치제는 미국이나 소련의 지방자치제보다 철저한 것이어야 한다. 현재의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이 두 단위로 지방자치제를 실험하다가 때가 되면 도 단위로 지방자치제를 분화한 후에도 도마다 개성 있는 실험들을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연방제 통일의 3단계 과정」, <사회와 사상> 창간호, 1988년 9월) 우리가 이 주장에 모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통일=민족국가의 완성’을 넘어선 전망도 가능하다는 것만은 생각해볼 수 있다.
   
일단 우리는 국가연합이나 연방제, 혹은 ‘낮은 단계의 연방제’라는 형식부터 새로운 각도에서 재음미해봐야 한다. 애초에 제안된 의도나 취지와는 다르게 이러한 단계적 통일 방안들을 국가 단위를 넘어서려는 인류의 새로운 의식적 실험들과 연결시킬 가능성은 없는가. 한반도 전체에 걸쳐 전통적 형태의 국가기구를 건설하는 게 아니라 동아시아연합과 한반도연합, 각 지방정부들로 구성되는 새로운 형태의 정치공동체를 만드는 것을 우리의 통일 전망으로 설계하는 것은 어떨까.
 
이것은 결국 세 번째 문제로 우리를 이끈다. 국가의 위상을 축소하고 종내는 그것의 극복으로 이어질지도 모르는 국제질서의 재편이다.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에게는 꿈같은 이야기로 들릴지 모르지만, 유럽이나 라틴아메리카에서는 이미 신자유주의 세계화와는 다른 방향에서 민중의 정치적 공동체를 재설계하려는 시도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역통합의 시도들은 그것 자체가 끝이 아니라 더 커다란 전 세계적 변화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일 것이다.
 
너무 멀리 나아간 걸까. 하지만 원래 사회주의자란 미래의 자리에서 현재를 바라보고 지금 이 순간의 한 발자국을 내딛는 사람들이다. 누구보다도 먼저, 그리고 더 치열하게 미래를 고민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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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29 13:31 2007/05/29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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