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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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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기획하지 않은 자유: ‘수유+너머’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
고미숙 지음, 휴머니스트, 2004.
  
헌책방에서 나온 것이 보이길래 사서 처박아 두었다가 얼마 전 시간이 나서 다 읽었다. 전체적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것을 파악은 하였다. 그런데 이렇다고 세상이 바뀔까. 세상을 바꿀 생각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게다가 나는 그 마저도 하지 않고 있지만...
 
항상 내가 하는 것에서 하는 고민이지만, 생산은 어떻게 가능할까. 수유+너머의 사람들도 자신이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는 것은 아닌 듯한데... 앎에 대한 욕구를 충족하는 방식으로 수유+너머의 시스템은 괜찮아 보인다. 그런데 결국은 다른 주도적인 활동에 기생하여 사는 것은 아닌가. 분배메커니즘만 있을 뿐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생산해내지는 못하지 않은가. 상상력이나 서적, 보고서 같은 것 말고 말이다. 코뮌을 이야기하면서 자체적으로 독립되어 있다고 하지만, 수유+너머 이외의 다른 공간과의 교류와 관계가 없다면 존재하기 힘든 것 아닌가.
 
그래도 그 이너서클에 들어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기도 하였지만, 그 길은 내가 갈 길은 아닌 듯 싶다. 다만 내가 앞으로 무엇을 조직하고 모색할 때 도움은 되지 않을까 싶다. 그 기본적인 마인드 자체와 하나하나씩 이루어나가는 방식은 배우고 발전시킬 필요가 있다.
  
책을 읽으면서 써먹을 만한 문구 등을 발췌한다. 발췌한 내용을 옮기는 것도 보름쯤 되지 않았나 싶다. 발췌된 것 중에 반복되는 것도 많지만, 이는 그 만큼 내가 거기에 관심을 쏠렸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 내용들을 어디에다 써먹을까. 글 중간에 언급되는 책들이나 사상들을 좀더 깊게 접해보고 싶은 생각은 있지만, 시간을 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과거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새롭게 구성된다는 것. 지금, 여기의 삶이 어떻게 구성되느냐에 따라 미래 뿐 아니라 과거도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 그러므로 무엇을 기록한다는 것은 과거 속에 미래를, 현재 안에 과거를 중첩시켜 전혀 다른 시간의 장 안으로 진입하는 것임을 알았다. (12쪽)
 
한때 ‘사랑하면 알게 된다’는 말이 유행한 적도 있다. 그럼 “사랑하면 전파한다”는 어떤가? 사랑하는 것을 어떻게 혼자만 즐긴단 말인가. 사방팔방 퍼뜨려서 함께 나누어야지. (37쪽)
  
학문의 영역에서 가장 핵심적인 것은 시간과의 싸움이다. 즉, 한 사람이 얼마나 뛰어난 지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가의 여부는 천재적 영감이 아니라 얼마나 지속적으로 지적 열정을 견지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43쪽)
 
의무나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순전히 내적 에너지에 의해 추동되는 앎의 여정을 밟아가고 싶었다. 이건 사실 지극히 평범한 욕구이지만 용기와 담대함이 요구된다.
 
지식의 횡단이 요구되는 건 바로 이런 맥락에서이다. 경계를 가로질러 넘나드는 지식이란 쉬임없이 우리를 미지의 세계로 인도한다. 거기에서는 원로의 권위나 노년의 안식 따위는 필요 없다. 가슴 벅찬 열정과 끈질긴 지구력만이 요구될 뿐. 물론 그 세계를 자유롭게 가로지르기 위해서는 이전에 메고 다니던 뗏목을 내려놓아야 한다. 치열하게 접속하되 때가 되면 가차없이 내려놓고 떠나는 것. ‘횡단’이란 무릇 이런 것이다. (45쪽)
 
하긴 예정된 일들만 일어난다면 삶이 얼마나 메마르고 썰렁할 것인가. 거꾸로 말하면 우발적인 마주침이 많을수록 삶은 그만큼 역동적이 된다. 그렇게 보면 코뮌이란 예기치 않은 마주침과 사건이 수시로 일어나는 곳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50쪽)
 
→ 내 삶에서 우발적인 마주침은 얼마나 많을 것인가. 사실 우발적이라고 해도 거기에는 어느 정도의 의식성(상대방이든, 나든)이 개입되어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이 책을 헌책방에서 만나 시간을 투자하여 보게 된 것도 우연이고, 그 만큼 나름 얻은 것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글쓴이를 몰랐다면, 수유+너머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았다면, 이런 것에 관심이 없었다면, 헌책방에 그런 책이 들어오지 않았다면 과연 우연이 가능했을까. 우연과 필연은 백치 한 장 차이일 뿐이다.
  
우리는 노마디즘을 사랑할 뿐, 그것을 이념적 지주로 떠받들지는 않는다. 우리는 노마디즘의 용법을 몸으로, 삶으로 익히고 싶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천 개의 고원’의 용법, ‘노마디즘’의 응용일 뿐이다. 뗏목이 되는 순간, 그것조차 놓아버릴 작정이다. 길은 어차피 우리 스스로가 직접 열어야 하는 것이므로. (51쪽)
 
연구비의 지원보다 좀더 근본적인 문제는 텍스트에 대한 열정이다. 텍스트를 사랑하게 되면 돈이 되지 않아도, 아니 사방에서 뜯어말려도 그것과 접속하기 위해 몸부림치게 된다. 거꾸로 열정이 없으면 설령 연구비 지원이 충분히 된다 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 (59쪽)
  
연구실을 꾸려온 것도 어찌 보면 길눈이 어두워 잘못 들어선 것인지도 모른다. 길눈이 조금만 더 밝았더라면 그렇게 무모하게 길을 나서지는 않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세상에 잘못 들어서는 길이란 없다. 길이란 본디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오직 모를 뿐! 오직 갈 뿐! (64-65쪽)
  
공간 확장 또는 이전할 때의 갈등 - 서로 대립하는 동안에는 고통스럽기 짝이 없지만, 그런 차이는 너무도 당연하다. 공간은 그저 중립적 대상물이 아니라 삶의 토대이자 또 다른 신체이기도 하다. 그러니 새로운 공간을 결정함에 있어 그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나 입장이 어떻게 동일할 수 있겠는가. 다르다는 것이 얼마나 힘겨운 것인지, 또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몸으로 깨우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75쪽)
 
자신이 타고난 능력만으로 사는 건 바보다. 타인의 능력과 제대로 접속하면 내가 지닌 능력의 몇십 배의 능력을 마음대로 활용할 수 있다. (83쪽)
 
→ 나에게 부족한 것은 바로 이런 마인드가 아닐까 싶다. 그런데 과연 타인의 능력이 언제까지나 나의 능력이 될 수 있을까. 사물은 변할 수 있는 것인데...
  
공동체는 명분이 무엇이든 희생과 손해를 감수하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방식은 다를지언정 구성원 개개인의 삶이 비옥해지지 않는다면 그것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시쳇말로 다 잘 살자고 하는 짓인데, 공동체는 더더욱 그래야 하지 않는가 말이다. (87쪽)
  
사랑이 자기 아닌 다른 존재를 향한 욕망의 투어이고, 혁명이 타인들과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종류의 삶을 창출하는 것이라면, 어떤 인간도 이 욕망의 생산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어떤 체제 하에서건 사랑은 삶의 방식과 습속, 무의식의 기저를 이룬다고 할 때, 혁명은 사랑법을 바꾸는 일과 결코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사랑의 습속을 바꾸는 일이야말로 혁명 그 자체가 아닐까? 이제 필요한 것은 또다시 이분법의 레일 위에서 성급하게 해답을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물음 그 자체를 바꾸는 것, 그럼으로써 주어진 레일을 아예 벗어나는 것일 터이다. (89-90쪽)
 
사랑이란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하게 하는 것이다! 소유와 집착이 아니라, 혹은 자기와의 동일성에의 요구가 아니라, 그의 본성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하도록 촉발해주는 것이 바로 사랑인 것이다. (99쪽)
 
외부를 향한 감염력이 없다면, 다른 대상들을 촉발할 수 없다면, 그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사랑은 근원적으로 코뮌주의를 지향한다. (106쪽)
 
사랑은, 존재를 뭔가 고유하고 사적인 것 속에 가두는 모든 시도의 파괴로서, 절대적으로 근본적인 방식 속에서 제기된다. 나는, 사랑은 고유하고 사적인 것을 공동적인 것으로 변형시키기 위한 근본적 열쇠라고 생각한다. (107쪽, 안토니오 네그리와 펠릭스 가타리)
  
코뮌주의란 “우리가 미래에 도달해야 할 어떤 장소나 상태가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종식시켜 나가는 살아 있는 노동의 현실적 힘이며 바로 지금, 우리 시대에 내재하고 있는 울림”이 된다. (107쪽)
  
시간을 이기지 못하면 혁명은 없다. 혁명은 일상을 극복할 때 온다. 일상 안에서 축제를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일상을 축제화하지 못한다면 그건 혁명이 아니다. 길거리에서, 바리케이드 안에서 하는 혁명이 며칠 가겠나……. 시간을 극복하는 것, 시간과 싸워 이기는 게 혁명 아닌가. 사랑도 그렇지 않나. (109-110쪽)
   
사람들은 어째서 아주 젊은 날부터 그토록 노후를 걱정하는 것일까. 나는 그것이 일과 친구가 사라질 것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즉, 활기차게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할 수 있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친구들이 있다면 노후대책을 위해 많은 돈을 쌓아놓을 이유가 없다. 돈이란 그야말로 최후의 거처일 뿐이다. 그러나 연구실 같은 집합적 관계가 가능하다면 죽을 때까지 배움의 길이 열려 있고, 점입가경으로 늘 새로운 친구들과 만날 수 있는데, 외롭고 심심할 겨를이 어디 있는가. (114-115쪽)
 
책을 진정으로 소유하는 방법은 벗들에게 주어 닳아 없어지게 하는 것이다? (119쪽)
 
우리가 선물을 ‘살뜰하게’ 받을 수 있었던 건 갚아야 한다는 강박에서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어차피 선물을 준 이들에게 고스란히 갚을 길은 없다. 가능하다 해도 별 의미도 없고, 대신 그 선물들이 가능하게 해준 능력과 행복을 더 많은 이들과 나누면 된다. 증여란 바로 이런 것이다. 주고받음이 맞물려 계속 새로운, 그리고 강렬한 울림을 만들어 가는 것. 흐름이 흐름을 불러 동심원처럼, 혹은 전자파처럼 멀리 멀리 퍼져 나가는 것. (120쪽)
 
인디언 주술사 베어하트는 말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지 무엇인가 줄 것을 찾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부터 10년 후가 아니라 바로 지금 주어져야 한다”고. 줄 것이 하나도 없을 만큼 가난한 사람도 없고, 더 이상 받을 게 없을 만큼 풍족한 사람도 없다. 주고받기의 흐름에는 경계가 없다는 뜻이다.
 
아울러 증여는 순환하면 할수록 더 왕성해진다는 게 특징이다. 활동성이 크면 클수록, 사심 없이 베풀면 베풀수록 그 주체는 더 큰 활동과 관계의 장 속에 들어가기 때문에 능력이 커지는 건 지극히 당연한 이치이다. 타인을 위한 배려의 최대 수혜자가 자기 자신이 되는 오묘한 역설! (121-122쪽)
 
순환적 시스템이야말로 노마드의 정치경제학이다. 물건들은 지천에 넘치는데 사람들은 그것들을 활용할 줄 모른다. 그래서 다시 물건들을 폐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하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이 지긋지긋한 반복을 끊고 싶다면 먼저 물건들을 해방시켜라. 삶이 훨씬 가벼워질 것이다. 가족과 연애가 사람들을 붙들어매는 중력장치라면, 소유에 대한 집착은 자신의 몸을 얽어매는 쇠사슬이다. (124쪽)
 
싸우면서 터득한 지혜가 하나 있다. 서로 다르다는 건 소중하다는 것. 만약 내가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무대포로 일관했다면 나 자신의 돌부리에 수없이 부딪혀 넘어졌을 것이다. 나와 정반대로 세상을 보는 이가 좌우에서 당겨주기 때문에 나는 계속 나의 속도를 측량하고 조절할 수 있었다. (128쪽)
 
코뮌적 활동에서 단위의 차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아무리 사소해 보이는 것일지라도 그 자체로 전체를 표현할 수 있고, 또 그래야 하기 때문이다.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는 규칙도 같은 맥락에 있다. 아주 사소해 보이는 행위까지 윤리적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 자체가 전체의 흐름을 고스란히 표현하는 까닭이다. (128-129쪽)
 
식생활이 건강해야 삶에 활기가 넘친다. 건강한 식생활의 첫째 조건은 함께 먹는 것이다. 함께 먹다 보면 정도 들고, 여러 가지 지혜가 모여 건강한 먹을거리 풍토가 조성되게 마련이다. 식당을 전전해서는 절대 불가능하다. 그리고 더욱 근본적인 건 일상이 바뀌지 않으면 결코 지식의 새로운 경계가 펼쳐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보통 지식을 두뇌활동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오산이다. 삶이 바뀌고 신체가 바뀌지 않고서 능동적인 지식이 생산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만큼이나 어렵고도 어렵다. 그렇다면 일상의 핵심은 무엇인가? 바로 밥이다. (138-139쪽)
 
→ 왜 1992년 총선 당시 구로을 이우재 사무실 옥상의 주방이 생각날까. 당시 민중당 총재였던 이우재의 선거운동을 한다고 깝죽댔던 시절도 있었구나.
  
매 끼마다 어떤 정성과 선물, 그리고 노동력이 투입되는지를 한눈에 파악하게 되니 음식쓰레기를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일어난다. 이런 무형의 보답에 무심해지면 증여는 더 이상 이루어지지 않는다. 인디언들에 따르면, 무언가를 받는다는 건 그 사람의 영혼의 일부를 받는 것이다. 증여가 단순히 물질적 나눔에 그치지 않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대화의 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일 터이다. (143-144쪽)
 
→ 이런 얘기를 하면서 자연스럽게 육식을 멀리하게 되는 과정이 나온다. 그런데 내가 과연 육식을 버릴 수 있을까. 나는 아직 그렇게까지 치열하지는 못할 듯하다.
  
더럽다는 것은 공간을 축소시키고 변용가능성을 떨어뜨린다는 의미에서 ‘무능력(혹은 공간의 부르주아적 소유)’의 다른 표현이기도 하다.
흔적을 남긴다는 건 단순한 무능력을 넘어 타인의 노동을 무상으로 점유하는 것이라는 점에서 일종의 착취다. 말하자면 ‘내 대신 네가 치워!’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다. 코뮌을 구성하고 싶다면 적어도 이러한 무의식적 착취와 명령의 습속에서는 벗어나야 하지 않을까.
 
시간에 대해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모든 활동에서 시간 엄수는 기본이다. 시간을 지키지 않는 건 타인의 시간을 무상으로 점유하는 것일 뿐 아니라, 활동 전반을 침체시키는 주범이 된다. 시공간에 대한 태도를 투명하게 하지 않고서 코뮌적 관계란 가능하지 않다. (148쪽)
 
→ 이 대목을 읽을 땐 꼭 나에게 대고 얘기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반성하고 고치는 수밖에...
 
끊임없이 변이를 추구하면서 활동마다에 특징을 부여할 수 있어야 외부와 소통하는 능력이 증대된다. 코뮌의 생명은 외부와의 소통능력이다. 코뮌이 실패하는 여러 가지 이유 가운데 하나가 ‘자족적’이라는 데 있다. 자족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내적 경계를 고정시킨다는 뜻인데, 개인이든 집단이든 경계가 명료해지는 만큼 활동 에너지가 위축되는 건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151쪽)
 
삶의 지평을 넓혀 가기 위해서는 품성의 기초가 튼튼해야 하는 건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이 능동적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튼튼한 체력이 요구된다.
 
체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신체가 수동적, 방어적으로 될 뿐 아니라 계속 다른 사람들과 불협화음을 만든다.
 
건강할 때는 저절로 남을 배려할 수 있다. 배려는 근본적으로 의무나 희생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내적 에너지가 밖으로 흘러넘치는 것임을 그 때 알았다. 하지만 몸의 균형이 깨어지면 타인을 배려할 수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도 없다. 설상가상으로 그 전에 잘 하던 것까지 귀찮아진다. 더욱 문제인 것은 부정적이거나 비관적인 생각에 사로잡히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관계와 활동을 구성할 것인가의 여부는 품성 이전에 체력의 문제이다. (158-159쪽)
 
탁구든 제기든, 또 앞으로 무슨 운동을 하게 되든 이것들은 모두 우리 일상의 원동력이다. 배려하는 힘을 키우는 훈련터이면서 동시에 외부를 향해 열린 창구이다. 밥상도 그렇지만 이 배치에 들어오면 서로의 벽을 아주 쉽게 허물 수 있다. 건강한 몸과 외부를 향한 열정, 지식생산에 이보다 더 절실한 것은 없다. (164쪽)
 
페미니즘이 주류가 되어버린 상황에서 뼛속까지 가부장주의로 무장한 남자들도 감히 하지 못하는 말들을 나는 거침없이 해댄다. ‘여자애들은 할 수 없어. 여자니까 그렇지. 하여튼 여자들은 문제라니까.’
이렇게 자극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는 이유는 이 문제가 코뮌적 관계를 풀어가는 데도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몸을 사리는 데 익숙한 이들은 동정이나 연민 혹은 맹목적 순종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 게으르고, 활동이나 행동하는 걸 귀찮아하는 것은 보수반동인 걸까? 고미숙은 여성들의 신체가 선천적으로 보수반동이라고 하면서 몸이 너무 무겁고, 안움직이는 걸 문제라고 지적하는데... 고미숙의 이러한 언급은 평소 내가 생각하는 것과 유사하지만, 남성이 하기엔 부담스러운 말이다. 게다가 나같이 게으른 청춘에게는 더욱더...

  
나는 여성의 사회적 소외의 단적인 예가 체육교육의 부재라고 생각한다. 몸에 대해 사유할 수 있는 기회, 아니 그 이전에 몸을 능동적으로 활용할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한 채 교육과정을 마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몸에 대한 조절능력을 확보하지 못하는 한 여성이 삶의 주체가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166쪽)
 
정화스님은 남보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자신의 몸에 맞게 하면 된다고 하셨다. 안 되면 될 때까지 하면 된다고. 척도는 오직 자기 자신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의 몸과 투명하게 대화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요가의 지혜이다. (168쪽)
 
요가를 하다 보면 자세의 완성도가 아니라, 일상의 패턴을 바꿀 수 있느냐 하는 문제로 귀착된다. 일상을 바꾸지 않는 한 아무리 멋진 자세를 취할 수 있다 해도 그건 모두 ‘황’이다.
 
→ 내가 요가나 참선에 부정적인 것은 삶의 여유가 없어서인지도 모르겠다.
  
등산은 그저 평범한 스포츠가 아니다.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삶에 대한 생생한 지혜를 터득할 수 있는 ‘인연의 장’이기도 하다. (169쪽)
 
→ 공감. 사람들과 함께 산에 오르면서 얘기를 나누도록 해볼까. 하긴 그것도 맘에 맞는 사람들과 함께 올라야 제 맛이다.
  
유머를 즐기기 위해서는 마음의 경계를 푸는 것, 즉 무거운 감정을 내려놓는 것이 필요하다. 안팎의 구별이 두터운 이들, 진지한 것이 진실에 더 가깝다고 굳게 확신하는 이들, 인정욕망에 익숙한 이들은 이 유머의 퍼레이드에 참가하기 어렵다. 거꾸로 말하면 유머에 익숙해지면 안팎이 사라지면서 새로운 관계, 이질적인 삶이 열리게 된다. (181쪽)
 
→ 내가 유머에 익숙하지 못한 이유를 잘 적어놓았다. 실없는 소리하고는 구분해야 하는 것일까.
 
유머는 누가 뭐래도 ‘노마디즘의 토대’다. 낯설고 이질적인 것들 사이를 자유롭게 가로지르며 예기치 않은 흐름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으로서의 유머. 더 나아가 그것은 주류적 질서를 전복하면서 매끄럽게 옮겨 다니는 ‘유목적 특이점이자 우발점의 기법’이다. (181-182쪽)
 
함께 살아보면 집합적 리듬에 동참한다는 것, 더 나아가 그것을 능동적으로 조성한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도 어려운 일인지를 실감하게 된다. (183쪽)
 
행복하게 살기 위해 코뮌을 구성했는데, 왜 나는 나 자신을 자꾸 궁지로 몰아가고 있는 것일까? 해답은 간단했다. 나는 엄청난 노력을 투여한 대신 연구실 사람들에게 그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즉, 나는 능동적 배려가 아니라 희생이라는 자의식에 묶여 있었던 것이다. 아무도 나에게 연구실을 위해 돈과 시간과 능력을 투여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좋아서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나는 어느덧 ‘내가 이렇게 희생했는데 너희들은 대체 왜 그 모양인가,’ ‘왜 스스로 활동의 주체가 되지 못하는가?’라고 분노를 키웠던 것이다.
 
남을 괴롭히는 자들은 진정으로 약자다. 자기가 궁지에 몰려 외롭고 두렵기 때문에 남은 힘으로 타인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다. 자신이 충분히 행복하다면 무엇 때문에 타인을 괴롭히겠는가? 그래서 타인을 배려하기 위해서는 건강해야 한다. 설령 병이 들더라도 그것을 고통으로 받아들이지 않아야 한다. (188쪽)
 
오래된 습속, 자신에 대한 맹목적 집착을 벗어나지 않는 한, 코뮌은 불가능하다. 욕망과 능력에 따라 자유롭게 활동하되, 코뮌적 리듬을 구성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떤 습속이 나로 하여금 그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지를 명료하게 보는 것이 필요하다. (189쪽)
 
스승이 될 수 없으면 진정한 친구가 아니고, 친구가 될 수 없다면 스승으로 섬길 수 없다. (203-204쪽, 이탁오)
 
대체 앎의 영역에서 스승과 제자가 어떻게 고정된 선으로 구획될 수 있을 것인가? 나이가 많다거나 학벌이 좋다거나 지력이 뛰어나다거나 하는 것은 그저 하나의 특이성일 뿐이다. 앎의 세계에는 종착점이 없기 때문이다. 끊임없이 배우고, 쉬지 않고 가르치는 앎의 흐름만이 있을 뿐. 이런 관계에서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오직 지식이 구성되고 진수되는 ‘벡터’만 작동하는 까닭에 학문외적 권위나 위계 따위는 설자리가 없다. (205쪽)
 
지식 자체가 사람 사이의 친밀감을 높이는 중심요소가 될 때 비로소 ‘스승과 친구가 하나인 우정의 교육’이 가능한 법이다. 따라서 공간의 수평적 배치는 교사와 학생의 경계뿐 아니라, 학습자들 상호간의 친화력을 상승시키는 데도 결정적인 기능을 한다. (206쪽)
 
사람의 마음은 본래 저절로 즐겁다. 배움이란 이 즐거움을 배우는 것이다. 즐겁지 않다면 배움이 아니고, 배우지 않는다면 즐겁지도 않다. 즐거운 연후에야 배운 것이고, 배운 연후에야 즐거운 것이다. 즐거움이 배움이고 배움이 즐거움이다! 아아! 세상의 즐거움 중에 이 배움만한 것이 있는가? (206쪽, 왕심재)
 
지식의 본래면목이 즐거움이라는 데 동의한다면, 자연히 가르침과 배움의 경계는 사라진다. (207쪽)
 
분과학문은 단지 여러 전공 사이의 소통장애에 그치지 않고, 분과 내의 위계를 작동시킨다는 점에서 더욱 문제적이다.
자신의 분야에서 한 발짝만 벗어나도 앞이 캄캄한 것이 이른바 우리 시대 전문성의 실체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이것이 한 분야를 심화시키기 위한 불가피한 방책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지만, 이것은 심화가 아니라 고립을 자초하면서 현실에 아무런 쓸모도 없는 지식을 양산하는 불모성에 불과할 뿐이다. (211쪽)
 
유목민의 전투방식으로는 게릴라 전술이 최고다. 예측불가능한 지점들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며 균열을 일으키는 것. 돌연 솟구쳐 올라 섬광을 쏘아 올리기도 하고 순식간에 가라앉아 심해를 탐사하기도 하면서 끊임없이 새로운 전략전술을 구사하는 것. 그것은 지식 게릴라들만이 수행할 수 있는 작업이다. 그런 점에서 세미나는 그런 게릴라들의 양성거점인 셈이다. (213-214쪽)
 
지식이 책과 대학이라는 협소한 소통구조 안에 갇혀 있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수치상으로 보면 매년 치러지는 학술대회는 정말 많다. 그럼에도 소통의 구조가 조금도 달라지지 않고 있는 것은 전적으로 지식인들의 열정과 상상력의 빈곤 때문이다. 상상의 배치를 바꾸고 과감하게 ‘거리의 열정’과 접속하고자 한다면, 분명 드넓은 소통의 창구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다. (223쪽)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을 해부하는 정도로 근대성의 지반을 넘어서기에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러한 지배와 예속, 오만과 편견을 작동시키는 인식론적 전제에 대한 근원적인 회의 없이 ‘근대 외부’에 대한 사유란 결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의 사유 역시 휴머니즘에 대한 맹렬한 비판을 담고 있다. ‘기계(machine)'라는 개념을 고집하는 이유도 인간의 특권적 지위를 해체하기 위해서이다. 기계란 어떤 대상과 접속하느냐에 따라 끊임없이 용법이 달라지는 모든 대상을 지칭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입은 강의할 때는 말하는 기계지만, 식사시간에는 밥 먹는 기계, 남에게 욕할 때는 싸움기계 등이 된다. 공간 역시 그렇다. 연구실 1층은 탁구를 칠 때는 체육관이, 밥 먹을 때는 식당이, 강의할 때는 교실이 된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도, 동물도, 공간도, 시간도 모두 기계의 일종일 뿐이다. (233쪽)
 
→ 들뢰즈/가타리에 대해 제대로 공부할 필요가 있겠네.
 
서로 다른 의견들이 충돌할 때, 상이하고 이질적인 개성들이 부딪힐 때, 시시비비를 가린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된 적은 거의 없다. 그건 그저 하나의 출발점에 불과할 뿐이다.
 
장단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어떤 특성이 장점이나 단점으로 작용하는 인연조건 혹은 배치가 있을 뿐이다. 어떻게 하면 각자의 개성과 활동들이 서로 매끄럽게 소통하는 집합적 배치를 구성할 것인가, 코뮌의 강밀도는 바로 여기에서 결정된다. (244-245쪽)
 
자의식과 내면이라는 중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신을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운다는 말은 아주 상투적으로 들릴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매우 구체적인 실천의 방편이다. 누구나 아는 말이지만, 강을 건너면 뗏목을 버려야 한다. 그래야 다시 길을 갈 수 있는 법이다. 마찬가지로 새로운 경계로 나아가려면 익숙하고 낡은 것들을 가차없이 내려놓아야 한다. (245쪽)
 
비움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낯설고 새로운 앎에 대한 열정을 계속 고양시켜 가려면 비움의 강밀도 역시 커져야 한다. 앎이란 천지에 가득 찬 흐름이기 때문에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적으로 소유하려 하는 순간, 앎의 경계는 막혀버린다. 따라서 안팎의 경계를 넘어 계속 흐르게 하려면 끊임없이 비워야 한다. (246쪽)
 
노마드란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는 유랑민이나 이주민이 아니다. 어떤 불모의 땅에서도 찰거머리처럼 들러붙어 새로운 삶과 관계를 구성할 수 있는 능동적 주체들이다. 초원이나 스텝을 찾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선 자리를 초원으로, 스텝으로 만드는 이들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야 한다. 비운다는 걸 그저 욕심을 버리는 정도로 이해해서는 곤란하다. 비운다는 건 소극적으로 내면에 침잠하는 게 아니라, 거꾸로 외부의 역동적 흐름 속에 자신을 아낌없이 던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자신에 대한 집착, 지나간 인연에 대한 집착에 사로잡혀 있는 한 유목은 불가능하다. 비울 수 있는 자만이 새로운 삶을 구성할 수 있다! (246-247쪽)
  
코뮌적 관계에 들어온다고 해서 모두가 저절로 코뮌적 주체가 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사회적 차별이 없기 때문에 자의식의 견고한 벽이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날 수 있다. 따라서 누구도 그런 시행착오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하지만 진정 노마드가 되고 싶다면 그런 모습을 적나라하게 응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보면 사라진다’고 했던가. 강렬하게 접속하되 집착과 소유라는 함정에 빠지지 말 것. 활동이 하나의 영역에 멈추지 않고 다른 활동들로 흘러 들어가게 할 것. 그러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나’와 ‘나 아닌 것’의 경계가 없어야 한다. (247-248쪽)
 
지식생산의 측면에서도 명상의 지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의 능동적 생산은 궁극적으로 ‘지식 외부’를 지향한다. 즉, 앎과 삶의 일치, 나아가 삶의 새로운 가능성에 대한 실험이 바로 우리가 추구하는 지식의 내용이다. 그리고 그리로 가는 길은 단지 책에서만 얻어지지는 않는다. 그것들은 책 밖에서, 책을 넘는 신체적 변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249쪽)
  
달라이 라마는 늘 불안과 신경증에 시달리는 서구인들에게 ‘문제에 해결책이 있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해결책이 없다면 역시 걱정해도 소용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터무니없는 낙천주의자. (254쪽)
 
“자네는 길이 이미 어딘가에 있다고 생각했네. 하지만 거기에 길은 없었다네. 길은 바로 우리가 만든 것이라네.”
이를 나의 버전으로 바꾸면, 잘못 들어선 길은 없다. 길이란 늘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건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결코 끝나지 않는다. (259-260쪽)
   
무엇보다 삶과 동떨어진 분석적 지식으로부터 탈주해야 한다. 분석적 지식은 정보일 뿐, 앎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체를 비껴 허공에 흩어지고 만다. 그것은 아무리 폼나게 유목과 탈주, 탈영토화 따위를 조리 있게 설명한다 해도 자본과 권력에 고스란히 회수되고 만다. 자본과 권력은 정말 ‘힘이 세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가 추구한 앎에 대한 원초적 본능, 욕망과 능력의 분자적 증식은 하나의 탈주선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만으로 자본과 권력에 맞서 싸우기에는 역부족이다.
 
‘지혜의 바다’로 ‘혁명의 산’으로 이어지려면 앎이 삶 속에서, 일상 속에서, 매 호흡마다 강렬하게 표현되어야 한다. 앎과 삶을 가로막고 있는 모든 경계를 거칠게 뛰어넘는 열정과 결단이 요구된다. ‘야생마-되기’ 혹은 ‘미꾸라지-되기’를 쉬임없이 시도해야 한다. ‘도래할 혁명’, ‘오래된 미래’를 가능케 하는 건 이념적 명분도 수목적 위계도 중심적 장치도 아니고, 오직 ‘지금, 여기’에서 솟구치는 생의 ‘강밀도’인 까닭이다. (278-279쪽)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에 남들처럼 사는 길을 택할 뿐이다. 성공해봤자 나른한 일상과 소통부재만이 존재하는 그런 코스를. 따라서 그런 코스와는 다른 선택지가 많아야 한다. 돈으로 환원되지 않는 행복을 스스로 창안할 수 있어야 비로소 자본에 대항할 수 있는 법이다. 아니, 그 자체가 자본으로부터의 탈주가 된다. 자본에 대한 대안이 자본보다 빈곤해서야 말이 되는가. (2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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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8/03 19:47 2007/08/03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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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21세기 상징 지식인분야 연구공간 수유+너머 Tracked from 2008/09/20 04:43

    뉴스메이커에서 21세기 상징 지식인분야로 연구공간 수유+너머를 다루었다. 수유+너머의 사람들이 종횡무진 활약을 하고 있지만, 그들에 대한 인상은 2004년보다 더 악화된 것 같다. 그런 것을 통해 코뮨주의가 달성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본주의에서 독립적인 대안적 지식공동체라고 해도 생산에 대한 통제가 없는 이상 내 눈에는 자본주의 현 체제에 기생하고 있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수유+너머의 성원들은 다들 훌륭한 사람들이고, 나 또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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