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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의 두번째 산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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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2003). 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 사회평론.
 
최영미의 두번째 산문집이란다. 산문집은 몇몇 유명한 사회평론가들의 것을 빼놓고는 산 적이 없는데, 이 책은 헌책방에서 싼 맛에 산 것 같다. 물론 시인이나 소설가의 산문집은 별로 사지 않는다. 고종석 - 소설가인가, 기자인가 - 의 산문집은 다르겠지만...
 
그 동안 여기저기 잡지에 발표했던 글을 모아놓은 것이긴 하나, 글의 흐름 속에서 최영미라는 인간에 대해 알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 진정성이 있다는 전제 하에서 하는 얘기이다. 대부분은 글을 쓸 때의 최영미가 글을 볼 때의 나의 상황과 비슷하다는 점에서 감정이입이 잘 되었다. 물론 나는 훨씬 더 경험도 일천하고, 상황도 더 열악하겠지만 말이다.
  
글 전반에 대해서는 검색해서 나오는 여러 관련 비평글을 살펴보면 될 것이고, 나는 항상 그렇듯이 인상적인 부분으로 접어놓았던 것에 대해서만 얘기하려 한다.
 
최영미가 인용하는 산문이나 시들이 인상적으로 다가온다. 시인이라서 그러한지 시에 관한 글들이 많은 것이다. 나도 최영미처럼 좋은 시에 몰입하게 되면 거기에서 무엇인가 의미를 얻을 수 있으려나.


그전까지 돈에 관해 난 나름대로 철학을 갖고 있었다. 인생을 사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즉, 많이 벌어 많이 쓰는 삶과 적게 벌어 적게 쓰는 삶. 많이 버는 것도 많이 소비하는 것도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겐 너무너무 피곤한 일이라서 애초에 포기한 길이었다.
언제 훌훌 떠나도 좋게 짐을 만들지 않고 살자. 이게 그동안 내 삶의 모토였다. 집이니 차니 남편이니 옷장이니... 이런 것들이 없어도 사는 데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그래서 굳이 소유하지 않고 버틴 건데, 요즘 들어 부쩍 남들이 다 가진 걸 갖지 못하면 사는 게 무지 피곤하다는 걸 알았다. 살면서 별것 아닌 일로 열받고 깨질 때마다 내가 그게 없어서 이런 수모를 당하나? 싶어 괜한 자격지심이 들었다.
 
한국처럼 획일적인 삶을 강요하는 꽉 막힌 사회에서는 남들과 다르게 산다는 건 하나의 형벌일 수도 있다. 젊은날, 난 그 형벌을 기꺼이 감수했었고 오히려 영광으로 알았다. 그래서 늘 세상과 부딪쳤지만 뭐가 '있나요?'라는 질문들에 자신있게 '없어요'로 대답할 수 있었고, 나이야 어떻게 생각하든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러는 한편 가슴 한구석에선 언젠가는 세상이 날 이해해주리라는 은밀한 바람을 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게 달라졌다. 세상과의 승산없는 싸움을 계속할 만큼 내 피는 더이상 뜨겁지 않고 그동안 수차례 깨지고 부서지며 철도 들었다. 지금 난 세상이 나를 이해하기를 감히 바라지 않는다. 세상이 내게 맞출 리가 없으니 대신 세상에 나를 맞춰야겠다, 아니, 맞추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냥 겉으로나마 남들처럼 적당히 살자. 적당히 얼굴도 내밀고 적당히 가벼운 인사말도 나누고 시비도 적당히 가리자. 그 '적당히'가 과연 어디까지인지... (29-30쪽)
  
윗글은 갈수록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도록 하다가 막판 정리를 깔끔하게 한다.
 
깨끗해진 몸과 마음으로 인생을 정리하는 작업의 일환으로 요즈음 난 옛 일기장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며칠 못 가 손을 들고 말았다. 총십여 권에 이르는 일기들을 컴퓨터로 다 입력시키려면 일 년은 족히 걸릴 것이니 이러다간 내 인생을 정리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나가떨어져 '정리'될 판이다.
게다가 원본을 그대로 살리되 중복, 부연되는 내용을 빼고 편집하는 것도 대단한 인내심이 요구되는 일이다. 컴퓨터 자판을 하염없이 두드리던 어느날, 나도 모르게 내가 일기를 각색해 '소설'을 쓰고 있다는 걸 발견했는데... (36쪽)

  
일기란 것이 항상 각색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블로그에 쓰는 일기는 방문하는 이들의 눈을 의식하게 되기 때문에 더 솔직하기 어렵고...
  
돌이켜보면 한번도 젊은 적이 없었던 것도 같고 또 한편으론 늘 젊었던 것 같다. 온전한 젊음을 누린 적이 없기에 제대로 늙을 수도 없는 것일까?
마흔을 코앞에 둔 지금, 가끔씩 난 내가 아직도 서른 살이라고 느낀다. 서른 살처럼 옷을 입고 서른 살처럼 비틀거리고 서른 살처럼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 흔한, 그 잘난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내 곁을 떠나지 않는 질긴 절망을 벗삼아 다시 일어설 수 있을까?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어 오로지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으로 건너가야 했던 서른 살의 강. 그 강물의 도도한 물살에 맞서 시퍼런 오기로 버텼던 그때 그 시절이 오늘밤 사무치게 그립다. (45쪽)
  
가끔씩 내가 대학초년생이었으면, 아니 서른살이었으면 하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렇다면 더 치열하게 살 수 있을까. 서른 때는 공무원시험 공부하느라 정신 없었는데... 그 시험을 준비한 것은 후회된다.
  
서른 살은, 특히 한국에서 여자 나이 서른 살은 단순한 나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강이다. 아직 젊음의 불꽃이 남아 있을 때 있는 힘을 다해 생을 한번 뒤집어볼 수 있는, 도박을 할 수 있는 나이. 주사위는 던져졌고, 당신은 한번 가면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야 한다.
서른은 결코 한 해가 아니다. 언제든 자기 인생을 철저하게 뒤돌아볼 때 우리는 영원히 서른 살이고, 부러진 뼈들을 추슬러 새로 시작할 수 있으리라. 가차없이 자신을 반성할 수 있는 자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나는 감히 믿는다.
삼십대를 마감하는 지금 나는 문학이 나의 운명이듯이, 실연이 나의 운명이듯이, 서른 또한 나의 숙명임을 엄숙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아무리 싫다고 고개를 저어도 죽을 때까지 내 이름 석자에 '서른'과 '잔치'가 따라다니리라는 걸 나는 안다. (48-49쪽)

   
나도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읽으면서 '잔치'가 '운동'의 은유라고 오해를 했다. 최영미는 잔치가 끝났다고 말한 적이 없는데... 그냥 있는 그대로 이해하면 되었을 것을...
 
나도 여전히 서른일까. 명인의 'Re: 서른 즈음에'가 생각난다.
  
명인 - Re: 서른즈음에 (命人 글, 김성민 곡)
   
설레임보다는 이별이 익숙해진 어느새 서른 즈음에
이룬 건 하나 없고 잃은 건 많은 나이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슬픔을 팔아야 장사가 되는 나이 거지같은 서른 즈음에
더 이상 무엇에도 전부를 걸지 않을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지금도 그대는 희망을 노래하는가 또 하루를 애타게 살아가는가
때로는 지나간 추억에 기대서라도 때로는 못다 이룬 꿈에 기대서라도
   
하루를 견딘 만큼 나를 대견해하는 빌어먹을 서른 즈음에
가야할 그 길을 끝까지 걸으려는 눈물겨운 서른 즈음에

  
시를 써서 소위 공인이 된 뒤에 내가 만난 사람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질문 중의 하나가 "왜 결혼 안하세요?"였다. 처음 그런 사적인 질문에 접했을 때는 진지한 자세로 뭔가 주섬주섬 더듬거리며 답했던 것 같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정말 지긋지긋할 정도로 같은 레퍼토리가 반복되자 나도 요령이 생겼다. 요즘에도 이런 무례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이 있으면 난 그냥 아무 말도 안하고 웃던가, 혹은 "결혼했는데, 모르세요?" 거짓말이 입에 붙었다. 차라리 그게 편했다. 한국사회에서는 거짓말을 해서 받는 스트레스가, 거짓말을 안하고 진실을 말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보다 적기 때문이다. 내 인생과 별 관계가 없는 타인들에게 내가 정말로 혼자 사는 이유를 말한다 해도 그들이 날 이해할까? (55-56쪽)
  
정말로 한국사회에서는 거짓말을 안하고 진실을 말했을 때 받는 스트레스가, 거짓말을 해서 받는 스트레스보다 많은 것 같다. 하지만 나는 아직까지도 거짓말을 잘 못하겠다. 상대방이 오해하고, 내가 스트레스를 받을지언정...
 
그저, 어중간한 어정쩡한 전망보다는 괜찮은 부정 하나 하고 싶다. 그리고 시 이전에 삶에 대한 고민이 더 깊고 끈질기다는 것. 어떤 이데올로기도 현재 우리를 구원할 수 없으며, 결국 사랑과 연민만이 나 아닌 너를 더듬고 이해할 힘을 준다는 것, 잘 보낸 하루가 그저 그렇게 보낸 십 년 세월을 보상해줄 수도 있다는 것. 이 정도가 지금 내가 자신있게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이다.
 
유토피아로 가는 길을 나는 모르고, 어쩌면 그건 동경의 대상일 뿐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살아 있는 한 우리는 꿈꾸기를 포기할 수 없을 것이다. 꿈만이 이 지긋지긋한 현실을 견디게 하니까. (71쪽)

 
최영미 - 꿈의 페달을 밟고 (94쪽)
   
내 마음 저 달처럼 차오르는데
네가 쌓은 돌담을 넘지 못하고
새벽마다 유산되는 꿈을 찾아서
잡을 수 없는 손으로 너를 더듬고
말할 수 없는 혀로 너를 부른다
몰래 사랑을 키워온 밤이 깊어가는데
 
꿈의 페달을 밟고 너에게 갈 수 있다면
시시한 별들의 유혹은 뿌리쳐도 좋았다

  
이 시는 최영미의 두번째 시집 제목이다. 이게 무슨 영화 의 이미지를 차용했다고 했던 것일까.
 
정민 교수의 [죽비소리]라는 책을 보면서 그냥 괜찮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영미는 죽비가 '절의 선방에서 시종들을 졸지 말라고 등짝을 내려칠 때 쓰는, 대나무로 만든 회초리'이기에 전근대적이고 가부장제적인 발상이라고 한다. 하긴 자신도 이해못할 비난을 죽비소리라고 하면서 들을 때 그런 감정이 들 수도 있겠다.
  
최영미가 김정란 교수를 비판한 대목은 그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를 보여준다. 이 부분이 이 산문집에서 가장 논란이 되었던 부분이고...
이 글을 읽으면서 '비평이라는 것도 함부로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리고 내가 과거에 내뱉었던 말들에 대해서도 책임질 수 있어야겠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다. 김정란 교수는 그 뒤에 무슨 반박을 했을까.
  
길지 1996년 4월호에 실렸던 이정현 얼굴을 보고 쓴 '광주는 언제 신파를 극복할 것인가'라는 글도 깊은 공감을 주었다.
 
역사를 일 년 혹은 이 년 앞당긴다는 게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광주를 다룬 최초의 텔레비전 드라마 <모래시계>, 최초의 영화 <꽃잎>,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을 처음으로 재판대에 세우는 것. 나는 이 모든 처음, 최초들이 의심스럽다. 언젠가 반드시 제대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할 일들을 일 년 혹은 몇 년 빨리 해치운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129쪽)
 
영화 곳곳에 삽입된 그날의 광주에 대한 자료필름과 현장재현장면을 빼고 나면 남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본 것은 신파에서 벗어나려는 또 다른 신파, 90년대의 첨단영상기술로 은폐된 신파였다. 내가 본 것은 반포르노(semi-porno)로 짓밟힌 <꽃잎>이었다. (132-133쪽)

  
나도 꽃잎을 보면서 아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광주를 이렇게밖에 그릴 수 없었나.
곧 영화 <화려한 휴가>가 개봉을 한단다. 그 영화는 광주의 신파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이제는 제대로 된 광주를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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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6/05 01:02 2007/06/05 01:02

2 Comments (+add yours?)

  1. 산오리 2007/06/05 08:42

    '왜 결혼 안하세요?' 또는 '결혼 했어요?' 이렇게 물어보는 건 그저 일상적인 인사라고 생각하면 될 거 같은데, 결혼안한(안할) 사람 입장에서는 그게 짜증나는 질문이 되는 모양이네요..
    그냥 '식사했어요?' '그집 애들은 잘 커요?' 이런 말과 무슨 차이가 있을까 싶어요.. 그럼 아침밥 안먹고 나온 사람, 또는 애기가 없는 사람은 그걸 짜증나는 질문으로 받아 들여 거짓말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네요..ㅎㅎ

     Reply  Address

  2. 새벽길 2007/06/05 10:38

    결혼 여부를 물어보는 게 실례가 되는 경우가 있지요. 결혼을 하고자 하는 저의 경우에는 아니지만,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이들, 즉 비혼을 선택한 이들에게 결혼에 대해 얘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요.
    살아가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식사를 했는지 여부를 묻는 것과는 조금 다르다고 봅니다.

     Reply  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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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누가 뭐라해도 나이가 든.. Tracked from 2007/06/06 04:41

    새벽길님의 [최영미의 두번째 산문집] 에 관련된 글. 간만의 블질이다. 이런저런 일들로 무척 정신없이 지냈던 날들을 되돌아 보는 일을 갖았다. 허허허. 그랬더니 후회가,, 그리곤 완전 반성모드. 낼모레 글피를 앞둔 반성모드.. 반성도 그담에 바뀌어야 반성이지 반성만 계속한다면 관성이지. 암튼... 새벽길님의 최영미 두번째 산문집 덕분에 찍었던 영화 중간편집을 봤다. 서른이라고 우기면 사는 내겐 완전 확, 훅 끼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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