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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영근 - 절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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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규
 
저렇게 떨어지는 노을이 시뻘건 피라면 너는 믿을 수 있을까
네가 늘 걷던 길이
어느 날 검은 폭풍 속에
소용돌이쳐
네 집과 누이들과 어머니를
휘감아버린다면
너는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네가 내지르는 비명을
어둠속에 혼자서 듣는다면
아, 푸른 하늘은 어디에 있을까
작은 새의 둥지도
 
- 뭉크의 '절규'를 소재로
  

창비 2007년 여름호에 박영근의 유고시집 <별자리에 누워 흘러가다>에 나오는 '절규'가 실렸다.
'절규'는 시집에 실린 44편의 시들 중에서 유일하게 발표되지 않았던 시이며, 시집의 맨 마지막에 실려있다.
 
나는 뭉크의 ‘절규’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데, 노동자 시인 박영근은 달랐나 보다.
아마도 그 치열했던 삶을 떠올린다면 좀더 많은, 좋은 시들을 쓸 수 있었을 텐데...
시집에 실린 그의 시 몇 개를 추가한다. 알라딘 책 소개에 나와 있는 것이다.  
 
박영근 - 1958년 전북 부안에서 태어났다. 1981년 <반시(反詩)> 6집에 시 '수유리에서' 등을 발표하면서 시단에 나왔다. 1994년 제12회 신동엽창작상을, 2003년 제5회 백석문학상을 수상했다. 2006년 생을 마쳤다. 시집으로 <취업공고판 앞에서>, <대열>, <김미순전(傳)>, <지금도 그 별은 눈뜨는가>, <저 꽃이 불편하다>가 있고, 산문집으로 <공장옥상에 올라>, <오늘, 나는 시의 숲길을 걷는다> 등이 있다.

 

추천글 - 김정환 (시인)
 
어떤 죽음은 너무도 생생하여
다른 죽음들을 삶과 혼동하게 만든다
어떤 죽음은 어둠이 검음보다 더 명징하여
대낮을 빛바래게 한다.
너무도 가혹한 삶의 증거가 죽음의 영역을 무색케 하고,
고독과 절망의 비유가 비리디비리다.
살았을 적 박영근의 문학은
간절하고 고달픈 '삶의' 노동문학이었다.
이제 그가 이 세상을 떠나며 남긴 시들을 읽자니
그의 문학은 벌써 '죽음 속' 노동문학이라는 생각이 든다.
뗀석기, 간석기, 긁개, 자르개,
도구는 일찌감치 있었으되
예술이 매장 이후 비로소 출현하는 것을 보면
비유는 정작 자연형상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명상에서 비롯된 것인지 모른다.
박영근을 에로 들며
우리는 비로소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죽음은 노동의 단절이 아니라 확장이다.
그 전에,
노동은 죽음의 연장이 아니라 심화다...
   
 
늦은 작별
  
그 언제부턴가
가을도 다 지나고
 
가슴속에
식은 채 묻혀 있던
불덩어리 하나
 
다 피어나지도
저를 떨구지도 못한
꽃덩어리 하나
 
오늘은
허연 잿더미를 헤치고
말갛게 불티로 살아난다
 
이제 그만
저를 놓아주세요
 
찬 바람 속
몸시 앓다가
한 여드레쯤 지나면
문밖 골목에도
고즈넉이 흰 눈 내리겠다
 
 
기억하느냐, 그 종소리
 
모든 것은 다 지나간다
 
천년의 꿈이라 한들
제자리에 있겠느냐
 
우리가 사는 일이 온통 고통이라 해도
오늘 바람 속에 흔들리는
저 풀잎 하나보다 못하구나
 
기억하느냐
겨울 빈 들에서 듣던 그 종소리
 
 
폐사지에서 1
 
내가 여기서 보는 건 사금파리가 된 나의 문자(文字)들이다
 
절벽에 서 있던 시간들이 붙잡고 있던
그리움 하나
반조가리 몸뚱이로 비에 젖고
 
그리고 웬 주검이 저를 보내지 못하고 옛길에서 저렇게 완강하다
 
나는 탑과 부도를 돌아 먼 데 마을을 바라본다
길을 끌어당기고 있는
오래 묵은 풍경들과
 
마음이 끝내 허물지 못한 낡은 집 한 채
 
돌아가고 싶었다
이 폐사지를 건너
뜨거운 해와 바람과 물소리마저 사라진 뒤
밝아올 어둠의 자리
 
거기 내가 두고 온 바다에 종소리가 떨어지고 있을 게다
막 태어나 젖먹이 울음을 머금고
별자리 하나 눈 푸르게 돋아나고 있을 게다
 
늙은 산수유 한 그루 나를 보다가 빗속으로 가뭇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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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0/01 20:54 2007/10/01 20:54

3 Comments (+add yours?)

  1. 당고 2007/10/02 08:04

    마음이 끝내 허물지 못한 낡은 집 한 채...
    아, 정말 모든 것이 지나가고, 그리고 돌고 도는 거 같아요.

     Reply  Address

  2. 감사함다 2007/10/04 10:59

    한참 머물다 갑니다.
    마음을 울리는 시, 덕분에 감사합니다.

     Reply  Address

  3. 새벽길 2007/10/07 12:57

    이심전심이네요. ^^

     Reply  Addre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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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박영근 시인 2주기 Tracked from 2008/05/15 07:19

    박영근 시인이 숨진 지 2년이 된다는 것을 어느 블로그에서인가, 신문기사를 통해서인가 알게 되었다. 그의 시 중에 몇 개를 알고 있었지만, 그가 '솔아 푸르른 솔아'의 원작시인임을 이번에 알았다.지난 10일에는 그와 알고 지냈던 이들이 그를 추모하는 시낭송의 밤 행사를 열었다고 한다. 인천 송림동 배다리 아벨서점 앞 삼거리에 야외무대를 꾸며놓고 했다고 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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