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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진보정당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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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제가 평등사회로 전진하는 활동가연대(준)의 기관지인 [전진] 제16호(2007.11.30)에 쓴 것입니다. 의도를 하고 쓴 것은 아닌데, 기존에 나와 있던 민주노동당의 2007년 활동에 대한 평가글들을 짜집기하여 이리저리 엮다 보니 백서 비슷한 것이 되어 버렸습니다. 분량도 많은데다가, 중언부언하고 있고요. 읽다 보면 '어디서 본 구절인데..'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짜집기성 글임을 상기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물론 당연히 제 의견입니다.
  
대통령선거에서 민주노동당이 지난 2002년 대선의 결과보다 못한 참패를 하면서 당내외에서 많은 논의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대선결과에 대해 평가하고자 하는 움직임이 활발합니다. 저는 이러한 평가가 단지 대선 시기에만 맞춰지는 것이 아니라 민주노동당이 진보정당의 이름으로 원내로 진출한 이후 시기부터 4년여를 종합적으로 철저하게 평가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대선은 그 4년여 활동의 결과물이니까요. 그럴 때만이 이번 대선에 대해 제대로 평가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 평가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뻔하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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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진보정당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1. 자유주의 우파진영의 위기 = 좌파의 위기?
 
2007년 대선과 함께 2007년 한해가 저물어가고 있다. 전세계적으로는 신자유주의 광풍이 점차 사그라들고 있는 상황이라지만, 한반도에서는 좌파세력이 마땅한 대안을 제출하지 못하면서, 대선 또한 신보수주의세력의 난장판이 되고 있다.
 
올해 대선은 현 집권세력인 소위 민주화 세력에 대한 강한 실망감이 보수세력에 대한 ‘묻지마 지지’로 이어져서 지속되고 있는 특이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묻지마 지지’는 끊임없이 터져나오는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 문제에는 관심도 없고 염두에도 두지 않겠다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이는 대통령 후보의 조건으로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 논란은 문제삼을 만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전체적으로 보면 문제가 있다는 쪽이 더 많지만, 도덕성보다는 경제를 내세우는 보수진영의 공세가 먹혀들고 있다.
 
김대중ㆍ노무현 정부의 10년에 대한 강한 책임추궁 경향이 정치상황을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변수가 되었다. 유권자의 행위결정이 각 정당이나 후보의 이념이나 정책, 인물의 신뢰성 등 미래의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이슈에 의해 이뤄지는 ‘전망투표’가 아니라, 10여년 동안 집권해왔던 자유주의 우파 정부와 대통령의 통치행위 전반에 대한 부정적 평가, 즉 ‘반노무현 정서’에 기반한 ‘회고투표’의 성격을 띠게 된 결과 이명박ㆍ이회창 지지가 범여권을 압도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명박 후보의 도덕성 문제는 쟁점화되기 어려운 조건이 형성되었다.
 
이에 대해 범여권은 제대로 대응하지도 못하고, 이를 뒤엎을만한 새로운 프레임을 제시하지도 못하면서 스스로의 위기를 양산해내고 있다. 국민들은 기존 집권세력의 자기반성을 요구하고 있는데도 이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대선정국을 주도하지 못하는 도덕성 프레임으로 승부를 보려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자유주의 우파진영의 위기가 좌파에게는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가.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가 정국의 핵심쟁점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각 정당들 사이의 차이가 희미하기 때문이다. 이라크 파병연장 문제나 한미 FTA 체결 문제 등에서 보이듯 각 정당들은 정책과 대변하는 가치에 있어서 커다란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이에 명확한 반대입장을 취하고 있었지만, 이를 주요 의제로 제시하지 못했다.
 
국민들은 현 집권 세력을 신임하지 않을 경우 나머지 세력이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판단하게 된다. 하지만 지금까지의 상황은 범여권과 야합하여 비정규악법을 통과시킨 한나라당이 양극화, 부동산 가격 급등, 청년 실업 등의 문제를 가지고 현 집권세력을 맹공하면서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형편이다. 이에 민주노동당은 노무현 정권에 근본적으로 반대하는 야당으로 자리매김하지 못하고, 국민들은 민주노동당을 범여권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자유주의 우파세력과 진보정치세력 사이에 별 차별성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민주노동당까지 포함한 진보-개혁진영의 대선 후보 단일화를 이루자는 ‘진보와 개혁을 위한 의제27’에 속한 학자들의 제안도 그 연장선상에 있다. 진보-개혁이라는 용어 자체가 무차별의 프레임을 내포한다. 2006년 진보개혁의 위기를 다루었던 경향신문의 기획기사에 따르면, 진보개혁세력의 대표집단이나 인물로는 민주노동당(15%)이 가장 많이 지목되었으나, 참여연대(14%), 노무현 대통령(11%)과 열린우리당(11%)이 그 뒤를 이었다. 용어사용도 문제이긴 하지만, 민주노동당이 정치적으로 진보진영을 대변하지 못하는 문제부터 관심을 가져야 한다.
 
집권당과 범여권에 대한 책임을 추궁하고자 하는 상당수의 국민들에게 노무현 정권과 한나라당이 적대적 공생관계임을 제대로 폭로하면서, 민주노동당이 대안 정치세력으로서 의미 있는 신호를 보낼 수 있었다면 상황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은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을 명확히 하는 가치와 정책을 제시하지 못하고, 응집력 있는 당조직 체계를 만드는 데 실패하였으며, 진보정당 나름의 운영 메커니즘을 갖추지 못한데다가, 결정적으로 당내 경선이 혁신과 변화를 내다볼 수 없는 결과를 산출하면서 좋은 대안정당으로 선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스스로 봉쇄하였다.
 
열린우리당이 붕괴되는 와중에 민주노동당의 지지율이 2위까지 나왔던 적이 있다. 한미FTA에 반대하는 이들을 조직하고, 특별한 헛발질을 하지 않는다면, 이번 대선에서 괜찮은 성과를 낼 수 있으리라는 전망도 제기되었다. 하지만 민주노동당에게는 대선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한 전략이 없었다.
 
당은 항상 그렇듯이 그때그때 터지는 투쟁현안에 대해 집회를 만들어내거나 성명서를 쓸 뿐, 이를 한 데 모을 수 있는 전반적인 전략을 제시하지 않았다. 전략만 없는 것이 아니라 당원들의 의지를 불러낼 실력, 지도력도 없었다.
 
물론 정당은 개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당체제라는 대안의 집합, 구조 속에 위치하며, 다른 정당들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기 때문에 그 가운데 자신의 존재를 부각시켜야 한다. 민주노동당은 2007년에도 여전히 열린우리당에 가까운 ‘2중대’로서 인식되었고, 자신의 독자성을 드러내지 못했다. 자유주의 우파 정당과 단절할 수 있는 역량과 의지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점에서 2007년 진보정당운동 또한 위기에 처해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래에서는 민주노동당 내의 상황을 중심으로 2007년 정당운동을 평가해보기로 한다.
 



2. 당 정체성 혼란과 정책적 무능의 전면화
 
1) 민주노동당에 입당할 때에는 보통 자신이 모순이라고 생각하는 문제들, 사회적 약자의 문제, 지역정치의 사안들을 자신의 손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갖고, 이에 입각하여 활동을 하게 된다. 민주노동당원들은 기존의 보수정당과는 다르게 행동하고, 다르게 사고하며, 다른 꿈을 꾼다는 것에서 자부심을 얻는다. 하지만 2007년의 민주노동당은 당원들에게 그러한 자부심을 심어주는 데 실패했다. 자신의 가치와 정책에서 흔들리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당체제는 제도권 내에서 경쟁하는 정당으로 단지 극우 내지 우파 보수정당만을 허용했으며, 여기에서는 좌파정당은 물론 사민주의 정당이나 중도성향의 정당조차 뿌리내리기 어려웠다. 민주노동당을 보수독점적 정당 구조의 예외로 볼 수도 있겠지만, 이미 거대 보수정당들이 투표자 시장을 선점함으로써 선택의 구조가 닫힌 이후 뒤늦게 제도권으로 진입한 결과 제도권 내 권력과 선거 경쟁에서 주요한 행위자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과거 선거 시기마다 비판적 지지론이 진보정당의 제몫찾기를 방해한 점도 있지만, 보수정치세력이 좌파정치세력을 유의미한 변수로 파악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비판적 지지론은 자유주의 우파를 향한 일방적인 짝사랑이었다.
 
2002년 대선 이후 민주노동당의 선전은 민중의 독자적 정치세력화가 이루어지나 보다 하는 환상을 주기도 했다. 민주노동당은 2004년 17대 총선에서 13%를 득표하였고, 총선 직후인 2004년 5월 13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의 조사결과 그 지지율이 21.9%까지 올라갔다. 울산에서는 정당득표율이 35.4%로 치솟았고, 한나라당을 1% 내로 따라붙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고, 민주노동당은 이후 계속 내리막을 걷고 있다.
 
이는 민주노동당 또한 제3당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한국 정치에서 제도권 밖의 운동적 요소로부터 일정하게 분리되어 형성된 기성 정당들의 체제에 좌절감을 느낀 유권자들은 기권을 선택하거나 제3정당을 지지함으로써 정당 체제 전체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표출하는 항의투표를 했다. 1992년 정주영의 국민당, 1997년 이인제의 국민신당이 그 예이다. 민주노동당에 대한 지지 또한 그 상당 부분이 당을 적극적으로 선택했다기보다는 87년 체제에 대한 실망과 항의를 표출하려는 측면이 컸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열정이 사라지자 지지 또한 사라지는 것이 당연하다.
 
2007년 하반기에 18대 총선 비례대표후보선거를 겨냥한 집단입당을 제외하고는 지속적인 당원 가입 배가 노력에도 불구하고 당원의 수는 증가하지 못했다. 오히려 당의 모습에 실망하여 탈당하거나 활동을 중지하는 당원들이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2) 민주노동당은 2006년에 이어 계속되는 한미FTA 저지투쟁 과정에서 정당으로서의 장점을 살리지 못했고, 이슈를 선도하지 못했다. 한미FTA 논쟁에서 노무현 정권과 보수 언론은 개방 담론을 선점하고, 진보진영의 FTA 반대 움직임을 쇄국론으로 몰아붙였지만, 한미FTA 저지 범국민운동본부(이하 범국본)으로 대표되는 진보진영은 몇 차례의 집회와 지역별 선전전 등을 통해 수공업적으로 한미FTA의 문제를 제기했을 뿐이었다. 그리고 한미FTA가 야기하는 문제를 공론화한 것에는 공중파 등에서 방영한 시사교양프로그램의 역할이 컸을 뿐, 민주노동당을 비롯한 진보진영이 의제 설정을 했다고 보기 어렵다.
 
“한미FTA를 저지하기 위한 청와대 앞 단식 농성을 통해 FTA 정국을 만들어내고, 단식을 끝내고 이해 당사자들을 만나 반대 여론을 본격적으로 확산시키자는 계획을 세웠는데 아무 것도 실행되지 않았다”(김형탁, 대변인 사임의 글, 2007-11-13).
 
정태인 민주노동당 한미FTA저지사업본부장은 지난 8월 입당을 하면서 “그래도 민주노동당은 어떻게든 해야 하는 것은 해내는 훈련 등이 잘 돼있는 조직”이며, 한미FTA와 관련한 강연을 다니면서 살펴본 결과 대부분의 지역에서 가장 열심히 참여하고 교육ㆍ선전하는 조직이 민주노동당이라고 한 바 있다. 하지만 거기까지이다.
 
한미FTA에 반대하는 40%가 넘는 민중들은 민주노동당이 FTA에 반대한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민주노동당은 이것을 넘어 그 대안까지는 보여주어야 제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운동권 단체라면 한미 FTA 반대를 외치고 다니면 되지만, 정당은 FTA가 타결될 경우 노동자ㆍ민중들에게 어떤 피해가 돌아가는지, 그것이 갖는 함의는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밝히고 담론화하는 작업을 해야 한다. 정당은 전국적 정치담론의 생산자이자 유통자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진보정치연구소를 설립하고 자체 언론으로서 기관지인 「진보정치」와 「이론과 실천」을 발간한 것도 담론투쟁에서의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진보정치연구소의 경우 법정으로 정해진 연구비가 필요한 시기보다 뒤늦게 배정되고, 다수 자주계열이 중심이 된 지도부가 진보정치연구소를 정파적 시각으로 바라봄에 따라 그 역할을 수행하는데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기관지의 경우 대부분의 당원들로부터 ‘자민통 세력의 소식지’로 낙인찍혀 외면받고 있다. 이런 상황 하에서 민주노동당이 담론투쟁에서 떨쳐나설 수 없다는 것은 명약관화하다. 
 
KSOI의 2006년 10월 여론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62.9%가 민주노동당은 시민운동의 성격이 강하다고 답했다. 민주노동당에 당이란 단어가 포함되어 있지만, 많은 이들이 민주노동당을 당이라기보다는 운동단체로 보고 있는 것이다.
 
민주노동당은 좋은 대안 정당으로서, 실현 가능하고, 모두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당이 내걸고 있는 평등, 연대의 가치에 부합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당원들은 계속되는 반대집회에 동원되는 대상으로만 남아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미FTA 저지투쟁의 성과가 조직화로 연결될 리는 만무하다.
 
3) 민주노동당이 진행한 정책과 활동에 대한 평가가 부재한 것은 2006년과 마찬가지이다. 2006년 5ㆍ31 지방선거에서 패배하였으면서도 그에 대한 평가를 제대로 하지 못하였고, 이를 지도부의 정치적 견해로 정리해내지 못했다. 참패인지 여부에 대한 논란에 휩싸여 평가를 해야 하는 문제의 본질은 사라져버린 바 있다.
 
2007년에도 이는 마찬가지였다. 대선후보 선출을 위한 당내 예비경선은 결선까지 이어지는 치열한 경합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평가는 각 선본에서 제출되지 않았다. 아마 각 선본 내부에서 공유되는 것은 있었을지 모르나, 당원에게는 전달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지난 11월 11일 서울시청 앞에서 진행되었던 ‘100만 민중대회’의 경우 권영길 의원이 대선후보로 확정된 후부터 그 효과가 대선에까지 이어질 것을 기대하면서 집회의 조직화에 온 힘을 쏟았던 행사였다. 하지만 국민들의 자발적인 붐이 없이 인위적으로 만들어내는, 일종의 할당 사업으로 변질되어 버렸고, 결국 단지 일회성 행사로 그치고 말았다. 그 성사를 위해 들인 노력과 비용에 비해 어떠한 성과가 있었는지, 대선에는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한 냉철한 평가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그에 대한 평가서가 제출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나아가 제기되는 여러 의제와 사안들을 민주노동당의 가치와 정책에 적합한가를 기준으로 평가하였는가, 이러한 가치와 이념을 당원들이 체득하고 있는가 또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대표적으로 거제시상수도운영사업의 수자원공사 위탁관리 동의 사례를 들 수 있다. 지난 지방선거에서 4명의 시의원과 1명의 도의원을 배출한 거제시위원회의 경우 공공재의 사유화 반대라는 당의 정책에도 불구하고 거제시 상수도 운영사업의 수자원공사로의 위탁관리에 동의하는 사태가 벌어졌던 것이다. 당 정책을 접할 수 없어서 발생한 것이라는 해명과 함께 사과문이 발표되었지만, 물 사유화 문제에 대하여 당 소속 지방의원들조차 당이 내걸고 있는 가치와 정책을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은 문제의 심각성을 말해준다.
 
4) 당의 가치와 정책보다 개인이나 정파의 입장이 우선시되어 진보정당이라면 당연한 상식들이 파괴된 경우도 있었다. 종북파세력이 당내 다수파를 계속 유지하면서 진보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의심케 하는 사건들은 2007년에도 계속되었던 것이다. 2005년 3월 일본 시마네현 의회가 ‘독도의 날’ 조례안을 제정하자 “독도에 군대를 주둔시켜야 한다”는 기자회견을 했다가 공개사과한 경우나, 2006년 10월 북한의 핵실험 강행에 대해 정책위의장이 핵의 자위적 측면을 인정한다고 밝혀 물의를 빚은 사례와 같이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완전히 몰각되는 경우는 없었지만, 종북파들의 민족문제에 대한 집착으로 인해 사회경제적 의제를 제기하고 이를 쟁점화해나가는 진보정당으로서의 정체성은 희미했다.
 
언제든지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수 있다는 생존의 두려움을 제거하는 수준은 이미 충족되었으며, 유권자의 80%가 남북대화에 의한 평화공존을 지지하는 상황에서 기존 정치세력들 중 누구도 전쟁을 통한 문제해결을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이렇게 사회는 민족ㆍ통일문제를 진보의 기준으로 파악하지 않는 쪽으로 변하고 있는데도, 종북파의 그늘에 있는 민주노동당은 여전히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가 ‘주체사상 글 포교행위’ 성명서 삭제 파문이다. 민주노동당은 7월 20일 '정보통신부는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지 말라'는 제목의 공식 성명서를 발표했다. 당 게시판의 불법 게시물을 삭제하라는 정보통신부의 공문에 대한 항의 성명서였다. 성명서는 "해방 이후 지금까지 종교집단의 포교 행위에 대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를 걸어 처벌한 역사는 없다"면서 "당 게시판에 올려져 있는 일부 '북한찬양 문건'은 사회과학적 차원에서 인정되는 사상 관련 문건이 아니라 주체사상에 대한 신앙 고백 내지는 포교 활동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이 성명서는 당 정책연구원이 작성해 대변인실을 거쳐 당 명의의 공식 성명서로 발표되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 성명서에 대한 한국진보연대(준)의 항의 공문이 당에 접수된 이후 8월 2일 열린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에서 성명서 문제가 갑자기 기타 안건으로 상정되었다. '한국진보연대(준) 자주통일위원회'는 공문에서 "북측의 공식 입장을 포함한 북 관련 내용들을 종교적 맹신의 수준으로 폄훼한 매우 배타적이고, 일방적인 규정"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담당 정책연구원이 지적한 것처럼 “당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글은 '북한이 최고다. 무조건 믿어야 한다'는 자기 확인과 독백의 내용”이고, “한국진보연대가 말한 '북측 공식입장을 담은 발표문'은 단 한 건도 없다”는 점에서 종북파가 주도하는 당 최고위원회는 호들갑을 떤 것이다.
 
최근 단지 통일방안 정도로 자리매김하는 것이 타당한 코리아연방공화국안이 대선 공약의 국가비전으로 상정된 것도 그 연장선상에서 파악할 수 있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은 애초에 격렬한 반대에 직면하여 메인슬로건으로 채택되지 못하여 ‘세상을 바꾸는 대통령’으로 메인슬로건이 채택된 바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을 결정하는 대통령선거에 있어서 국가비전 제시는 사실상 후보의 메인슬로건으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정이 당내 민주적 절차에 의한 충분한 논의도 없이 졸속으로 이뤄졌다. 이에 민주노동당 정책연구원 19명은 지난 10월 9일 권후보의 ‘코리아연방공화국’ 공약이 연구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국가비전이라는 핵심공약으로 결정된 데 대한 항의 성명을 발표하였다.
 
민주노동당은 보수진영이 유포하는 경쟁과 성장의 신화에 맞서 진보적 관점에서 사회양극화와 민중생존 파탄을 해소할 대안을 제시해야한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은 완전한 통일국가 이전의 통일방안으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몰라도, 당면한 대선에서 제시할 사회체제의 상을, 남북을 포괄하는 개념에 담아낸다는 것은 현실적이지 않다.
 
코리아연방공화국은 17대 대선에서 별로 사용가치가 없는 용어가 될 가능성이 높으며, 그만큼 대선승리에 무기력한 개념이 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선동 사무총장은 당 홍보물에 자의적으로 코리아연방공화국을 집어넣으면서 5만여부를 폐기하는 소동을 야기하고 잠적하였다. 정파의 입장을 우선시하는 자민통 세력의 행태는 이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난다.
 
5) 한국노총에 대한 사과 논란은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이 모호하고 전략이 부재함을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문성현 대표는 2006년 11월 보건의료노조 간부 삭발식에서 “공익사업장 파업권을 전임자 임금 때문에 바꾼 한국노총은 노동자의 이름을 버려야 한다”고 발언한 바 있다. 그런데 한국노총이 10월 8일 민주노동당에 공문을 보내 “민주노동당이 한국노총에 대해 행한 과거의 언행에 대하여 공개사과와 향후 재발방지에 대한 명확한 약속을 할 경우 2007년 대선 정책연대 대상후보에 포함한다”는 결정을 통보하고, “귀 당 책임자가 노총을 방문하여 사과문을 전달하고, 언론을 통해 공개사과 및 재발 방지를 약속할 것”을 요구하자, 문성현 대표는 답변시한을 하루 앞둔 10월 15일에 한국노총에 “공당대표로서 적절한 내용이 아니었기에 공식적 사과의 뜻을 분명히 전달”한다는 사과공문을 보냈다. 여기에는 “한국노총과의 연대를 강화하기 위한 노력을 다 할 것”이며 “굳건한 연대를 실현하기를 희망”한다는 표현도 들어있다.
 
한국노총은 민주노동당이 보낸 공문을 정책연대를 구걸하는 서약서로 해석했으며 이를 기정사실화하였다가 이후 민주노동당 최고위원회에서 이를 철회하자 민주노동당을 정책연대 대상 후보에서 제외하였다.
 
문성현 대표는 당 내외의 거센 비판이 쏟아지자 11월 2일에 “한국노총과의 관계를 단절시켰던 자신의 과도했던 발언 부분만을 사과하도록 했고, 정책연대와는 추호도 관련이 없음을 분명히 하도록 지시”했다고 해명하는 사과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은 명백한 거짓이며, 실무자가 실수로 작성했다는 변명 또한 구차하였다. 김형탁 전 대변인이 언급한 것처럼, 문제는 자세인데, 문성현 대표는 사과공문을 보냈을 때의 태도나 사과공문을 철회할 때의 태도나 어느 것 하나 당당함이 없었고, 옳다고 판단하여 결정을 내렸으면서도 그에 대해 책임을 지는 자세를 보여주지 않았다.
 
최고위원회 또한 다수가 정책연대 거부 결단에 반대하였으며, 책임회피로 일관하였다. 당의 정체성에 비추어 지극히 명백한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지리멸렬한 논의를 거듭한 끝에, 전진, 해방연대, 전해투, 당노조(공공노조 민주노동당지부) 등이 중앙당사 앞에서 합동으로 항의시위를 벌이는 등의 행동에 나서자, 비로소 ‘사과 철회, 정책연대 유보’라는 애매한 결론을 내렸을 뿐이었다. 물론 이렇게 무능과 무책임으로 점철된 최고위원인 줄 알았다면 과연 선출되었을까.
 
게다가 김선동 사무총장은 한국노총에 대한 부당한 예산지원의 감시와 견제라는 민주노동당 소속의 지방의원들의 임무에 대해 한국노총 지역본부와 상의해서 진행한다는 내부지침을 공유했노라고 발언했다. 이는 당내에서 논의된 바 없는 일로서 발언 자체가 월권이다. 하지만 김선동 사무총장은 이것이 자신의 소신이라고 하여 민주노동당 지방의원들의 자율적 의정활동을 봉쇄하면서도, 한국노총의 관변단체로서의 기득권을 옹호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러한 언행은 충분히 당원소환의 대상이 된다. (당규 제17호 당원소환에 관한 규정에 따르면, “당의 모든 선출직 및 공직선거 당선자가 당의 강령, 당헌․당규를 위반하거나, 당의 명예를 심각하게 실추시킨다고 판단될 경우 당원이 해당자를 직접 소환할 수 있”다.)
 
한국노총은 비정규직 사용을 제한할 사유제한 조항을 철회하고 기간제한으로 돌아서면서 경총과 정부와 야합, 비정규직 개악입법을 통과시키는 데 앞장섰다. 나아가 민주노총을 배제한 채 다시 경총과 정부와 경총과 야합해서 단위사업장에서의 노조결성의 자유(복수노조 건설)를 팔아먹었으며, 수많은 업종을 파업시 대체근로 절반 허용, 필수유지업무 지정 등으로 사실상 파업권을 부정하는 형태의 필수공익사업장으로 묶어놓고 노동기본권을 옥죄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로 인해 수많은 노동자들이 지금도 자기 의사를 대변할 조직결성의 자유를 제약받고 있으며, 특히 동일한 사업장 내에서 이중으로 차별받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고통은 말할 수 없다.
 
그것 뿐인가. 한국노총은 비정규직의 처절한 투쟁이 격화하는 시점에 정부를 대리하여 외자유치 활동에 나섬으로써 신자유주의 공세에 노골적으로 가담했다.
 
10월 19일에는 “주 44시간 노동, 토요일 격주휴무”라는 너무나도 소박한 요구를 내걸고 120일 넘게 장기파업투쟁을 벌이고 있는 건설노조 소속 인천 전기원들의 천막농성장에 한국노총 조끼를 입은 용역깡패들이 난입하여 침탈하였고, 한국노총 소속 경인전기원노조 조합원들이 관제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이런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반노동자 집단인 한국노총과 연대를 도모하려 했다는 것만으로 노동자정당으로서의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은 훼손되었다. 민주노동당의 무원칙한 표구걸행위는, 노동자계급의 대표성을 부인하고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뒤흔드는 위험한 행동이었다.
 
6) 당 정체성이 의심받는 상황은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경선을 거쳐 대선 과정에서 더욱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우선 이갑용 전 울산동구청장의 민주노동당 대선후보등록 서류접수 자체가 거부된 사안이 그 예이다. 이갑용 전 구청장은 1600여명의 당원추천을 받아 당선관위에 대선후보등록을 신청했지만, 선관위는 당규상에 공직후보는 피선거권을 가져야 한다는 규정에 근거하여 서류접수를 거부하였다. 하지만 당규상에는 후보가 되려고 하는 당원이 후보등록에 필요한 서류를 갖추고 있을 경우 선관위는 후보 접수를 받고, 후보자격이 없다고 판단했을 경우에 후보등록을 취소할 수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이갑용 전 구청장이 피선거권이 제한된 이유는 바로 당의 입장에 충실하여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공무원노조를 징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직무유기로 기소되어 대법원에 의해 유죄판결을 받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갑용 당원의 당원으로서의 권리는 국가기구에 의해 침해되어서는 안될 것이었다. “민주노동당의 건설과정에서 자본과 권력은 사규를 들어, 혹은 선거법등을 들어 입당권리와 당원의 권리를 제한하려는 시도를 계속했고, 당건설은 이러한 탄압에 맞서 결연히 투쟁하는 과정”이었고, 이갑용 당원의 권리 또한 그런 차원에서 보장받아야 하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8월 19일의 중앙위원회에서도 ‘당원의 권리는 자본과 권력의 전횡에도 불구하고 지켜져야 한다’는 결의문은 채택되지 못했고, 이갑용 당원은 결국 대선후보 등록을 하지 못했으며, 경선에 출마했던 나머지 세 후보진영은 그리 적극적인 지지의사를 표명하지 않았다. 노동자정당으로서 당 정체성이 달린 문제였음에도 불구하고 해방연대를 제외하고는 여기에 적극적인 연대를 한 의견그룹도 없었다. 이런 행태를 보이면서 과연 민주노동당은 교사, 교수, 공무원의 노동기본권 쟁취를 떳떳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
 
한편 경선과정에서 권영길 후보는 보수정치인들이 전형적으로 얘기하는 경륜을 내세웠고, 선대위를 꾸려가면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 등에서 그리 진보적이지 않은 행보를 보였다. 민중들이 민주노동당 대선 후보에게 전혀 기대하지 않는 현충원, 군대, 중소기업 등을 방문한 것들이 그 예이다.
 
또한 17대 국회에서 마지막이 될 국정감사에서도 단병호, 심상정, 노회찬 의원 등이 몇 차례 부각되었을 뿐, 의정활동을 대선과 연결시키고, 의회에서 당이 이끌 수 있는 이슈를 발굴해내고 쟁점으로 만들어내는 활동을 소홀히 했다. 총선을 이유로 자신이 출마할 지역구 사업에 열중하는 모습은 진보정당의 의원다운 행태는 아니다.
  
3. 당조직 체계의 응집력 상실
 
1) 지난 2007년 상반기에 제기되었던 개방형 경선제, 민중참여경선제 논란은 민주노동당의 골간을 버텨왔던 진성당원제가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3월 11일 정기 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 선출 시 당원 이외의 참여를 허용하는 개방형 경선제 당헌 개정안은 재석 1,050명 중 663명이 찬성하여 부결되었다. 그리고 민주노총의 이석행 지도부가 중심이 돼서 추진해오던 민주노동당 대선후보 민중참여경선제 또한 6월 16일의 중앙위원회에서 재석 과반수에 미달하여 부결되고 대선 후보를 당원 직선으로 선출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2/3에 가까운 대의원들이 개방형 경선제를 지지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사실 진성당원제는 기층당원의 의사에 기반한 진보정당과 보수정당의 차이를 보여주는 준거기준이며, 민주노동당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최대자산이다. 당원이 의미 있는 정치적 실천의 단위로 존재하는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정당들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진성당원제를 형해화하고, 대중을 대상화하는 화석화된 제도정치에 스스로를 재단하는 조치에 민주노동당의 다수 대의원들이 손을 들어주었다. 여전히 진성당원제는 유지되고 있지만, 1개월분의 당비를 납부한 비정규직 노동자에 대해 피선거권을 부여하는 식으로, 당원의 권리가 약화되었다.
 
개방형 경선제는 당원 및 지지자 확대사업의 변형일 뿐이다. 개방형 경선제의 도입을 통해 더 많은 지지, 후원자를 조직하여 더 많은 득표를 할 수 있다는 발상과 논리는 진보정당의 것이 아니다. 개방형 경선제는 평소 ‘당원 없는’ 정당을 유지하다가 당직ㆍ공직 선거가 있을 때에만 대중을 동원하여 표 찍는 기계로 만들어왔던 보수정당들의 행태를 따라하는 것이다.
 
당원이 활동의 중심에 놓이지 않으며, 당내 민주주의와 당의 대표성 및 연대성 제고의 결절점으로서의 진성당원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정당이 좋은 정당이 될 수는 없다. 개방형 경선제, 국민경선제 등의 시도는 대중정당적 요소를 약화시키는 것이다. 개방형 경선제, 민중경선제라는 이름으로 시도되는 진성당원제의 약화 시도는 민주노동당이 사회운동적 정당이 되기보다는 기층대중들과의 거리를 넓히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이다.
 
2)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politics by other means)가 민주노동당 내에서도 행해지고 있다. 미국에서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란 선거과정에서 언론의 역할이 엄청나게 팽창하는 반면, 사회 저변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대중동원의 메커니즘인 정당의 역할은 줄어드는 현상을 의미하였다. 이 과정에서 투표자들에 대해 직접적인 ‘책임성’을 갖지 않는 제도나 기구들, 즉 국가기구 내의 검찰이나 사적 영역에서의 언론이 점차 정치의 중심 행위자가 되었다(최장집, 『민주주의의 민주화: 한국 민주주의의 변형과 헤게모니』, 2006. 79-80). 노무현 정부와 17대 국회에서도 사법부에 대한 의존성이 증대하였다. 정당은 정치에서 다양한 세력들과의 관계의 중심에서 이해갈등을 집약하고 조정하는 주체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제해결의 중심기제로 헌법재판소, 각급 단위 사법부와 검찰,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대두되고 있다. 정당과 운동집단, 풀뿌리 운동들이 문제해결을 위해 사법부를 지속적으로 호명하는 상황에서 민주주의는 작동할 수 없다. 나아가 정당이 당내 경선 관리조차 선관위나 검찰을 불러들여 해결하는 상황에서 정당의 역할이 제대로 수행되고 있다고 볼 수는 없다.
 
민주노동당의 경우 일종의 당내사법기구인 당기위원회 제소가 빈발하고, 검찰 등 사법수단을 사용하는 경우도 갈수록 늘어났다. 그 대표적인 예가 2006년 초의 당대표 선거 과정에서 나타난 부정의혹이 당내에서 수습되지 않자, 당원들이 이를 검찰에 고발하면서 그 파문이 2007년까지 이어졌다. 이를 통해 민주노동당은 당내의 정파갈등과 당내 민주주의의 결핍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집단임을 외부에 폭로하였다. 정파갈등이 부정선거 시비로 표출된 것이다.
 
당내의 다른 수단에 의한 정치의 만연은 당 내부의 자율적인 통제수단이 마비되었음을 의미하며, 당 소통과 책임시스템의 붕괴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이와 같은 정치의 사법화는 민주주의의 약화를 가져온다. 대내적 정치 메커니즘이 붕괴된 상황에서 대외적인 정치 활동을 잘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4. 진보정당의 운영 메커니즘 붕괴
 
1) 민주노동당 내에서 더 이상 당원민주주의를 말할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보수정당만큼 타락하진 않았을지라도 자주파와 평등파 공히 선거시기마다 불법ㆍ부정선거를 저질러왔다. 노트북을 들고 다니면서 인터넷 선거를 할 수 있는 상황을 악용했던 것이 그 예이다.
 
이는 제대로 된 진성당원제의 미정착에 따른 필연적인 결과이다. 상근자와 활동당원들에게는 정보가 있지만, 평당원들에게는 적극적으로 정보를 제공하지 않으니, 정보의 비대칭성에 따른 역선택(averse selection)이 발생할 수 밖에 없다. 웬만한 당원들은 TV나 신문에 자주 나오는 의원이나 대변인 정도밖에 모르는 상태에서 자신과 친한 이가 찍어주는 사람을 누군지도 모르고 찍게 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기본적으로 자율, 즉 자기 결정의 원리에 기초한다. 이런 자기 결정의 원리가 의미를 가지려면 결정의 과정에 평등하게 참여할 수 있는 권리가 보장됨과 동시에 의사 결정의 ‘결과’와 그 ‘내용’이 열려 있어야 한다”(박찬표, 『어떤 민주주의인가?』, 2007, 229).
 
민주노동당에서 당원민주주의를 말하고자 한다면 당원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재규정과 함께 당원 활동에 대한 재검토가 필요하다.
이제는 무산된 진보대연합 논의 또한 당원민주주의 차원에서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진보대연합은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었을지언정 당원들의 시야를 벗어나 추진되었다. 만약 새진보연대와 사회당 간에 진보대연합이 이루어졌다고 할 때, 여기에 상징적인 의미를 부여하면서 수긍하는 당원은 있을지 몰라도 그것이 아래로부터의 당원들의 요구에 기반하지 않았기에 당원들로부터 얼마나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었을지 의문이다.
 
한편 진보대연합의 대상이 되었던 새진보연대의 경우 대표가 이수호 전 민주노총 위원장이었다. 하지만 그는 분명 민주노동당 당적을 가지고 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새진보연대라는 별도의 정치조직을 만들어 통합을 운운한 것에 대해 어떠한 해명을 하지도 않았으며, 당 또한 이에 대해 별도의 조치를 취하지도 않았다.
 
이와 비슷한 예가 바로 한국진보연대 가입 밀어붙이기이다. 한국진보연대는 전국 시ㆍ군ㆍ구에 기반을 둔 조직을 만들어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이끌어내고, 참여조직의 규모와 납부금 비율 등에 따라 의사결정의 지분을 배정하여 참여도를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민중연대과 통일연대를 통합한 범자민통세력의 결집체로 드러났다. 민주노동당은 중앙위원회를 통해 한국진보연대 가입을 결정했지만, 민주노동‘당’에 가입했다고 생각하는 당원들에게 당보다 더 우위에 있는 상층 중심의 전선체 가입이 어떠한 의미로 다가갔을까에 대해서는 제대로 검토되지 않았다. 진보진영의 총단결을 이야기하면서 자신들이 쳐놓은 울타리 안에 들어올 것을 강요했던 한국진보연대의 종파적 행태는 당원민주주의와 어울리지 않았다. 당 중심노선의 포기이자 정당으로서의 역할과 임무를 방기한 것이기 때문이다.
 
2) 당원민주주의의 붕괴와 연결된 것이 진보정당 당원으로서 정체성을 심어줄 수 있는 교육과 당원들 상호간의 소통 및 토론이 이루어졌는지 여부이다. 새내기당원에게 민주노동당의 역사와 강령, 정책을 간단하게라도 소개하면서 당헌, 당규에 대해 소개하는 교육은 갈수록 줄어들었고, 기존의 당원교육마저 형식화되었다. 성평등교육 등 다양한 교육프로그램이 생겨나고, 당직ㆍ공직을 맡기 위해 이수해야 하는 필수교육과정도 생겨났지만, 이를 통해 자신이 뭔가 배움을 얻었다고 여기는 이는 별로 없는 상황이 되었다. 교육ㆍ학습 시스템이 붕괴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당 강령과 규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책임 있는 토론도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교육의 정상화가 이루어질 수는 없다.
 
“기대를 모았던 민주노동당 역시 넓게 보면 교육받은 중산층의 정치관이 지배하는 엘리트 정당의 유형이 아니라고 말하기 어렵다. 이념 정당이라는 규정이 무색하게도, 통일된 강령과 규율은 존재하지 않으며 책임 있는 토론의 체계가 제도화되어 있지도 않다. 편협한 정파 논리와 반대를 위한 반대가 지배하는 자유의지의 과잉이 더 두드러진다”(박상훈, 『어떤 민주주의인가?』, 2007, 319-320).
 
그 과정에서 더 이상 당원들이 단련될 수 없는 구조가 형성되었다. 당에 가입하기 전에 습득한 사전 지식에 의존하거나 자신이 속한 노조나 학회 등에서 행해지는 교육을 통해 획득되는 지식 이외에 당의 공식적인 교육체계를 통해 자신이 민주노동당원으로 거듭나는 경우는 점차 희박해져가고 있다. 당 활동은 자신의 역량을 배가하고 축적시키는 것이 아니라 소진시키는 것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따라 활동당원의 규모는 축소되고, 상근자 및 소수의 열성당원을 중심으로 지역위 활동이 이루어지며, 이에 따라 당원의 대상화가 발생한다. 지역위원회는 ‘그들만의 공간’으로 변하게 되면서 페이퍼당원이 늘어나고, 지역주민 및 지지자들과의 소통은 사그러진다. 

그나마 당원 내에서 교육과 학습이 활성화되고 있는 것이 있다고 하자. 과연 정치의식을 제고하는 학습 이외에 진보정당 내에서 상식이 살아숨쉬도록 하는 교육, 세상을 바꿀 수 있도록 당원들을 단련시키는 교육은 행해졌던가. 정보인권의 문제, 지식사회로의 진척에 따른 감시와 통제, 프라이버시 보호의 문제, 이주노동자의 노동권 및 인권과 관련된 문제, 학력ㆍ학벌의 문제, 진보진영 내의 나이주의, 권위주의 타파의 문제 등에 대해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도록 했을까.
 
시민사회의 일원이라면 당연히 갖춰야 하는 상식과 소양에 대해 민주노동당은 너무 무뎠다.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 편의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효율성 만능주의에 빠졌다. 그래서 국가권력도 비밀ㆍ평등ㆍ자유투표의 원칙을 훼손할 위험 때문에 함부로 시도하지 못하는 인터넷투표를 거침없이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프라이버시 보호나 소수자의 문제는 간과하였다. 이러면서 국가권력을 비판할 수 있을까. 보수정치와 국가권력에 들이대는 잣대를 우리에게도 제대로 댄 적이 있었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물론 당원교육 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대활동을 동반한 정치사업, 현장에서의 투쟁, 지역활동을 통해 당원들에게 자부심을 심어주고, 당원들이 대상화되지 않을 것임을 확신시키는 모습 또한 보여주어야 한다.
 
3) 소위 ‘오세훈 법’에 의해 지구당 폐지가 결정된 이후 민주노동당은 지구당의 불법적 운영, 이에 따른 상근비 지급, 이중장부의 존속 문제에 시달려왔다. 다수 정치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처럼, 지구당 페지, 선거캠페인의 축소 등은 정당이 당원, 지지자 집단, 유권자 집단과 접촉할 수 있는 면을 좁혀 대중정당의 발전을 봉쇄하는 결과를 초래한다는 점에서, 민주노동당은 지구당 부활을 위한 전방위적 활동을 벌여야 했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2007년 내내 행해지지 않았고, 선관위와의 암묵적인 묵인 하에 지역위원회 사무실을 운영하는 것으로 넘어가고 있다. 당원들을 대상으로 한 각종 회의에서 보고되는 운영장부와 선관위에 신고되는 장부가 다르게 되는 것도 불가피하게 발생하였다.
 
특히 지역에 따라 집행부가 교체되면서 발생하는 회계업무의 인수인계 문제는 집행부 활동의 파행을 야기하기도 하였다. 경남도당의 경우 도당위원장이 전임 집행부로부터 회계 업무에 대한 인수인계를 운영상의 갈등 문제로 사퇴한 날까지도 받지 못했다. 2006년 5.31 경남도지사 선거 후 발생한 1억 7백만원의 적자를 도당 운영위에서 도당의 부채로 떠안기로 결정했으면서도 그 적자 내역을 공개하지 않았으며, 적자 내역에 대한 중앙당 예산결산특별위원회의 특별감사 결과 일부 부실한 회계 처리 사례가 발견되었고,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어떻게 지울 것인가 여부를 가지고 갈등이 빚어졌던 것이다. 자주계열에 속하는 경남도당의 다수 운영위원들은 회계책임자가 공식 사과하는 선에서 매듭짓자는 주장을 했지만, 이는 당사자들에게 면죄부를 부여하는 셈이었다. 이로 인해 도당위원장과 부위원장이 사임하게 되었고, 이는 대선시기 세액공제 사업과 조직 사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결국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파적 이해보다는 정파적 이해를 우선시하는 자주계열 주류 세력의 패권적 태도가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재정, 회계 문제는 비단 경남 뿐만 아니라 인천, 광주 등에서도 벌어졌다.
 
4) 얼마 전 당내에서 논란이 되었던 상근활동가들에 대한 임금체불, 공공노조 민주노동당 지부와의 단협 지체의 문제, 재정파탄의 문제는 민주노동당이 제대로 된 진보정당인지에 대해 의문을 품게 하였다.
 
임금은 재정 형편이 좋은지 여부에 따라 조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최우선적으로 지급되어야 하는 채권이다. 이에 대해서는 민주노동당에서 좋은 논평을 한 바 있다.
 
“반복되는 임금체불 문제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체불임금과 갈수록 미청산액이 늘어나는 것은 근로감독의 소홀함과 악덕기업들에 대한 단호한 조치를 취하지 않는 정부의 태도에서 기인하고 있다. …소극적인 자세로는 상습체불 사업자의 못된 버릇을 뿌리뽑을 수 없다. …상습체불 사용자가 발붙이지 못하도록 근로감독을 강화하여 벌칙을 강화해야 한다” (민주노동당 논평, 「임금체불, 정부가 적극적이고 단호하게 나서야」, 2007-02-12).
 
재정파탄의 문제 또한 심각하다. 국고보조금도 받고 당원의 수도 늘어났는데도 대선후보 등록 기탁금 5억을 제 때 마련하지 못하여 당비인출을 하루 앞당기는 촌극까지 벌였다. 예산자료는 당원들에게 여전히 투명하게 공개되지 않으며, 여론조사 사업예산이 자민통 세력의 계열사 컨소시엄에 배정되자 사업예산을 부풀려서 빼돌리는 행태도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예산파탄의 현실을 보고 있노라면 자민통 세력의 무능함마저 확인하게 된다. 똑똑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할까.
 
올해 1월 7일 민주노동당노동조합으로 출범하였던 ‘공공노조 민주노동당 지부’(이하 당 노조)의 활동을 둘러싼 민주노동당 내의 대립과 갈등은 근본적인 것인지도 모른다. 당 노조에 반대하는 어떤 당 간부들은 당헌ㆍ당규와 의결기구에서의 예산 심의를 들며 단체교섭이 곤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부정적인 시선을 보내는 이들을 결코 진보정당의 구성원이라 볼 수 없으며, 이들과 당을 함께 하는 것 또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당 노조에 대해 부정적 시선을 가진 최고위원들과의 단체협상이 순탄할 리 없었다. 어떤 교섭위원은 특수고용직 노동자들의 노동기본권 보장을 소리 높여 외치면서도 정작 당노조와의 교섭 자리에는 바쁘다거나 잊었다는 핑계로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당 노조 간부를 일에서 배제하기도 하며, 의도적인 왕따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행태는 다른 사업장에서라면 부당노동행위로 처벌된다.
 
“진보정당에 상근자는 엄밀한 의미에서 노동자가 아니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활동가가 갖는 노동자성에 주목하는 한, 진보정당의 활동가이기 때문에 노동자가 아니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그것은 진보정당을 구성하는 활동력, 즉 모든 노동력의 노동자성에 대한 무지 아니면 왜곡일 가능성이 높다. 사회 진보를 위한 특정한 목표에 동의하는 특정한 사람들의 결사체라 하더라도, 그 구성원 중 누군가가 노동자성을 제기한다면 결사권, 단결권은 조건없이 보장되어야 한다”(참세상 논평, 「민주노동당노조 출범을 환영한다」, 2007-01-08).
 
5. 나가며
 
참여와 개혁의 기치를 내걸고 집권한 노무현 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참여와 개혁의 가치가 훼손되었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마찬가지로 현 사회의 문제에 대한 대안과 자신이 바꿀 사회에 대한 비전이 없는 진보정당, 당장 집권했을 때 이 사회를 어떻게 조직하고 운영할 것인가에 대한 준비가 없이 국가권력을 장악하겠다는 진보정당은 그 자체로 진보와 변혁의 가치를 훼손할 것이며, 역사발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 민주노동당의 집권은 과연 민중들에게 어떠한 의미를 가질 것인가. 적어도 2007년 민주노동당의 집권은 시기상조이며, 무책임한 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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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1 19:39 2007/12/21 19: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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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ㅅㅎㅊ 2007/12/21 23:47

    와...깁니다. ㅋㅋㅋ 근데 내용이 좋으니 용서를...ㅡㅡ;;
    한가지 궁금한 것은 "4) 당의 가치와 정책보다 개인이나 정파의 입장이 우선시되어 진보정당이라면 당연한 상식들이 파괴된 경우도 있었다." 이 부분은 종북파만 문제인가욤? ㅡㅡ;;; 어떻게 보면 종북파는 당의 가치와 정책에 처음부터 동의를 안하는 사람들이니 당연히 별로 괘념치 않겠죠. (너무한가? ㅋ)

     Reply  Address

  2. 새벽길 2007/12/22 01:00

    그건 종북파만의 문제가 아니죠. 그래서 그렇게 일반적인 표현으로 얘기한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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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벽길님의 [2007, 진보정당운동은 무엇을 했는가?] 에 관련된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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