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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나아갈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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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강기명님의 글을 통해 데이빗 그레이버의 <승리의 충격>이라는 글을 접하게 되었다. 적린님이 번역했군. 한번 읽어봐야겠네.
 
그레이버는 직접행동 그룹이 자신들이 거둔 승리를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고 한다. 즉, 혁명이란 단번에 국가 단위(혹은 전지구적 단위)에서 국가가 패배하고 자본주의가 폐절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나 실제 승리한 지점에서부터 그러한 자본주의 바깥의 삶, 국가 바깥의 삶을 살며 그러한 삶과 저항, 그리고 수많은 승리들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의미 있는 지적이다.
 
김강님의 글에서 마지막에 교육감 선거를 언급한 것은 조금 뜬금 없지만, 나머지 내용은 지금의 교착된 상황을 돌파함에 있어서 충분히 시사적이라고 본다. 물론 청소년들이 자신들의 삶을 자신이 결정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당연하다. 
 
원영수의 글은 결론 부분에 한우와 계급을 연결지어 이상한 글이 되고 말았다. 촛불집회 과정에서 발생했던 소소한 에피소드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를 지적하는 것은 좋은데, 이를 계급과 연결하고, 한우를 돈에 구애받지 않고 먹을 수 있는 권리와 연결하는 것은 확실한 오바인 것이다.
 
조현연의 글은 진보신당이 촛불과 소통할 수 있는 정당이 될 수 있도록 결단을 해야 함을 주장하고 있다. 운동단체와는 다른 정당으로서, 또 기성의 정당들과는 다른 새로운 색깔의 정당을 자임하고 있는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자는 것인데, 그 결단이 무엇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게 뭘까? 
  
사실 내 눈에는 기성의 정당들이 비리비리해서 그렇지 뭔가 새로운 색깔을 담지하는 정당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니 진보정당으로서 제대로 된 내용과 형식이라도 갖추는 것이 우선 아닐까. 그런 기본도 없이 무슨 결단을 하자는 것인지...
 
새로 유입된 당원들은 과연 당원인가, 아니면 후원자인가? 그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해본 적이 있는가. 예전의 민주노동당의 잣대로 재지 말라고? 그러면 무엇으로? 기껏해봐야 개혁당의 잣대밖에 남아있지 않은 듯한데...
  
김종엽의 글은 성격상으로는 가장 왼쪽에 있지 않은 글이지만, 나에게 주는 함의는 가장 큰 글이었다. 이 글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촛불의 사회운동화와 제도화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 이에 대한 준비가 필요하다.
 
박준형의 글은 촛불집회의 양면적 성격을 얘기한다. 그리고 지금은 시민들과 사회운동이, 다시 광장에서 촛불의 방향을 토론할 때라는 그의 결론에 동의한다. 하지만, 우리가 얻은 것이 없는 걸까. 구체적으로 획득한 것은 없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슈가 있을 때마다 일어설 수 있다는 자신감이야말로 성과물은 아닐까. 문제는 이러한 자신감을 조직화로 연결시키지 못한 진보세력의 무능이다. 
 
그런데 내가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는걸까. 승리했다고 하지만 조금은 공허하게 보인다. 그렇게 자족하고 나면 뭐가 남을까. 여전히 삶은 팍팍한데... 모르겠다. 아래에 각 글의 링크와 함께 주요부분을 발췌하여 담아왔다.
 
촛불 이전과 결코 같지 않으리! (참세상, 김강기명, 2008년07월08일 16시21분)
[기고] 촛불 봉기의 '승리'를 진정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 (참세상, 원영수(진보평론) / 2008년07월08일 16시50분)
[칼럼] 촛불의 진화와 촛불폐인에 대한 찬사 
 
진보신당, 욕먹을 각오로 결단해야 (레디앙, 2008년 07월 08일 (화) 17:49:50 조현연 / 성공회대)
[촛불과 진보신당] "촛불과 소통할 수 있는 정당이 되자"  
 
촛불이 갈 길 (레디앙, 2008년 07월 09일 (수) 15:24:20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창비주간논평] 6.10과 7.5의 의미있는 차이  
 
촛불집회, 벌써 횟수를 줄일지를 고민할 때? (박준형(공공노조) / 2008년07월09일 17시33분)
[기고] 7월5일 ‘국민승리’ 선언했지만, 승리한 항목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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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 이전과 결코 같지 않으리! (참세상, 김강기명, 2008년07월08일 16시21분)
[기고] 촛불 봉기의 '승리'를 진정으로 축복하기 위하여
 
지난 주 종교인들의 ‘감동적인’ 동참, 그리고 이어지는 7월 5일의 대규모 ‘평화집회’는 두 가지의 서로 모순된 결과를 낳았다. 한편으로 그것은 정부의 끈질긴 버티기 혹은 공안탄압에 의해 지쳐가고 있던 촛불의 불씨를 되살리는 것이었지만, 동시에 다중의 전위적 활력과 차이의 생산을 거세하는 ‘국민화’ 기획의 완성이기도 했다.
 
물론 이 기획은 지난주에 갑작스럽게 탄생한 것은 아니다. 촛불집회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두 가지 기획 - 다중의 전위적 기획과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이하 전위적 기획과 국민화 기획) - 은 삶정치를 매개로 지속적으로 부딪히면서 공존해왔다. 5월 2일의 청소년들의 봉기, 24일의 대책위 주도의 집회로부터의 이탈과 거리행진, 갖가지 구호로 무장한 대중의 다종다양한 ‘자기표현’으로서의 가두시위의 모습, 막으면 돌아가는 떼 지성의 흐름, 지도에 대한 끊임없는 거부 등이 전자의 한 예라면, 대형무대의 설치, 구호의 단일화, 방송차의 행진 지도, 각종 ‘국민 대토론회’, 시위대를 호명하는 ‘국민’ 호칭, 조금씩 시도되는 것으로 보이는 정부와의 협상, 국회등원요구 등은 후자의 예라 할 수 있다.
 
국민화 기획의 완성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촛불봉기 내에서 ‘국민화’의 기획을 이끌어 온 “국민대책위”가 아니라 “정의구현사제단”이 그 기획을 완성시켰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그만큼 촛불봉기에서 ‘국민화’의 기획이 어려웠다는 것을 보여준다. 종교라는 초월적 수준에서가 아니면 도저히 ‘국민’으로의 통합이 불가능했던 것이다.
 
6월 10일의 대규모 행진으로 본격화된 이러한 국민화 기획은 정부로 하여금 효과적으로 촛불봉기에 대응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정부는 대규모의 촛불 앞에 겸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는 퍼포먼스를 벌이자마자 전열을 가다듬고 농성전과 공안탄압에 나섰다. 그것은 여러 방향으로 흐르던 힘이, 그래서 어디를 어떻게 막아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힘이 한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6월 10일에 크게 한 번 터져나온 외침 이후로도 대형 집회는 이어졌지만 상황을 반전시키지는 못했다. 무엇보다 그것은 지리한 반복일 뿐이었다.
 
더 큰 문제는 열심히 촛불봉기에 참여했던 사람들, 특히 인권활동가들을 비롯하여 봉기의 전위적 기획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지난 5일의 집회 이후 상당한 무력감을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6.10에 이어 또 다시 50여 만 명이 모였으나 사실상 아무 일도 하지 못했다는, 더 이상 새로운 힘을 생성하는 사건을 만들지 못했다는 패배감이 만연하고 있다. 그 모든 저항에도 불구하고 미국산 쇠고기가 이미 유통까지 되고 있는 지금, 나 자신이 바로 이 거리의 주인이며, 누구도 나를 지배할 수 없다는 초창기 봉기의 그 충만함을 찾기란 매우 힘들어졌다. 대신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타인의 입을 쳐다본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누구의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라 과감한 망각이다. 무엇보다 그것은 우리 안에 있는 ‘혁명’을 망각하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패배감과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것은 우리의 봉기가 우리 기억 속의 ‘혁명’과 다르기 때문은 아닐까? “청와대로 가자!”, “차벽을 넘자!”는 외침과, 그것을 위한 직접행동들(줄다리기, 토성 쌓기) 이외에 다른 상상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건, 좀 더 넓게는 저녁의 촛불집회와 가두시위 외에 이 봉기의 시간 속에서 다른 실천을 기획하지 못하는 건 “다중”을 말하고, 상상력과 전위를 논하는 이들조차도 이 봉기를 기억속의 ‘혁명’ 속에 억지로 끌어 맞추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기억 속의 혁명과 현실의 갭 사이에서 허무주의에 빠져버린 것은 아닐까?
 
촛불 봉기가 우리 기억 속의 혁명의 모습과 다르다고 해서 우리는 아무것도 하지 못한 것일까? 한 가지 질문을 던져보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두 달 전으로 돌아가서 살 수 있겠습니까?” 아니다. 우린 결코 그렇게 살 수 없다. 돌아가기에 우리는 너무도 많은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직접 행동 운동이 직면하고 있는 최대의 문제는 승리를 어떻게 다뤄야 할지를 모른다는 것이다.”(데이빗 그레이버, <승리의 충격>)
 
그레이버 역시 90년대 후반에서 지금까지의 반세계화/반전 투쟁에 참가하면서 우리와 같은 문제 - 패배감의 만연 - 에 부딪혔다. 그는 패배감의 이유를 운동의 단기적 목표는 전혀 달성하지 못한 것처럼 보이며, 중기적 목표는 너무나도 빨리 달성되어 버렸다는 점에서 찾는다. 여기서 단기적 목표란 -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면 - 특정 서밋(IMF, WTO, G8 등)을 저지해서 철폐하는 것을 말하고, 중기적 목표란 워싱턴 컨센서스 전반에 대한 문제제기를 전지구적으로 확산시키고 각종 국제기구들을 무력화시키며 새로운 직접 민주주의운동의 모델을 보급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최종적 과제가 중기적 과제의 빠른 성공과 단기적 과제의 실패로 인해 무한히 연기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반세계화 운동의 성과는 놀라운 것이었다. 무엇보다 단 몇 년 사이에 전지구적 수준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유일한 삶의 방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실제로 IMF, 세계은행 등이 가진 자본금이나, 이들의 영향력이 급속도로 저하되었다. 남미의 경우 이제는 거의 IMF없는 남미를 상상할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
 
하지만 그들의 단기적 목표는 거의 대부분 실패한 것이었다. G8 회담이나 WTO회담은 어찌되었던 무사히 열렸고, 경찰폭력은 단호히 시위대를 막았다. “반테러”의 명분으로 각국의 공항은 반세계화 운동가들을 블랙리스트에 올려 관리하기도 했다. 이러한 실패는 활동가들로 하여금 중기적 목표에 대한 운동의 승리를 자신의 것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하고, 심지어 운동을 분열시켰다.
 
때문에 그레이버는 직접행동 그룹이 자신들이 거둔 승리를 제대로 인식하고, 거기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즉, 혁명이란 단번에 국가 단위(혹은 전지구적 단위)에서 국가가 패배하고 자본주의가 폐절되는 것이라는 환상을 벗어나 실제 승리한 지점에서부터 그러한 자본주의 바깥의 삶, 국가 바깥의 삶을 살며 그러한 삶과 저항, 그리고 수많은 승리들을 확산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좀 더 우리가 거둔 성과들을 분명한 승리로 인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혁명”은 바로 거기서 출발해야 한다. 우리는 무엇을 얻었을까? 조정환은 다음의 여섯 가지를 제시한 바 있다.
1)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 정책들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대중화시키고 있다.
2) 수구적인 이데올로기적 권력기구 조중동의 권력을 침식하고 있다.
3) 국가권력과 지배계급 내부의 분열을 조성하고 있다.
4) 사회 각계각층을 반이명박 전선으로 결집시키고 있다.
5) 새로운 항쟁의 주체들을 생산하고 있다.
6) 봉기의 새로운 기술들을 매일 매일 창조하고 있다.
(조정환, <2008년 촛불봉기: 다중이 그려내는 새로운 유형의 혁명>)
 
또 촛불봉기를 통해 얻게 된 “새로운 시민의 상식” 목록도 있다.
첫째, 헌법 1조 지켜져야 하며, 국민 원하면 대통령도 리콜해야 한다는 생각
둘째, '배운여자'와 '배운남자'는 더 이상 정치에 무관심하지 않다는 생각
셋째, 사실을 왜곡 보도하는 조중동, 언론으로서의 권위가 사라졌다는 생각
넷째, '민영화'와 '자율화'는 생각만큼 좋은 것이 아니라는 생각
다섯째, 서로가 서로를 믿고 도울 수 있다는 생각
(이수연, <촛불과 함께한 두 달, 우리는 어떻게 달라졌나?>)
 
이것 이외에도 수많은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것이다. 수십만 명이 모인 광장은 김밥과 생수가 모자라지 않는 작은 꼬뮌의 모델을 제시해주었고, 생협이나 대안학교 운동 등 그동안 ‘탈정치적 중산층 운동’으로 여겨져왔던 운동에 급진적 삶정치의 흐름이 강화되고 있다.(조합원 수가 늘어나고 있음은 물론이다!) 또한 무슨 일만 생기면 법원, 인권위, 헌재만 바라보던 사회운동이 다시금 직접행동의 능력을 찾아가고 있기도 하다.(그 과정에서 집시법은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법으로 우리에게 받아들여지고 있기도 하다)
 
두 달 전의 우리의 삶을 생각할 때 우리는 이 성과들이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설사 지금 우리가 공안정국 속에 갇혀 있는 것처럼 보이고, 미국산 쇠고기가 제대로 된 검증장치 없이 유통되고 있다 하더라도 말이다! 앞으로 우리의 삶은 바로 우리가 이룬 이 성과 위에서 이어갈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우리가 이것들을 진지하게 승리로 인식하고 더 많은 승리로 과감히 나갈 때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렇다면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촛불집회는 이제 광우병 쇠고기 반대 내지는 몇 가지 핵심 이슈들만이 이야기되는 ‘국민저항’의 공간이 되어버렸고, 그 이슈 바깥의 주장, 또한 국민 바깥의 주체성들을 배제하고 있다. 나는 과감히 이런 식의 촛불 집회를 포기할 것을 요청하고 싶다. 더 이상 집회를 나가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것이 우리의 봉기에 있어 유일한 직접행동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고 대중집회의 안팎에서 현재의 봉기 형식, 주체성, 내용 모두를 넘어서는 상상력을 발휘하자는 것이다.
 
청와대로 가는 거보다는 이미 우리가 2달 동안 점유한 거리 그곳에 대한 지배를 기정사실화하는 게 더 중요하지 않았을까. 우리의 낙서, 목소리들이 설치 미술이 되고 있는 그곳. 밤마다 좀비들이 득실거리는 곳으로 기정사실화 하는 것. 아예 그곳에서는 언제든지 누구라도 어떤 이야기를 하는 것이 당연하고 듣는 것이 당연한곳으로... 언제나 이 썩은 사회를 향해 시위하는 곳으로 그곳의 의미를 점유하고 공간을 점유해버려야 하는 게 아닐까. 사실 이미 그런데 그걸 더 의미화 하는 작업이 필요할거 같다. (달군, <거리점유>, http://blog.jinbo.net/dalgun/?pid=1249)
 
다시금 이 촛불의 공간이 “모든 이들이 모든 능력을 표현하며, 모든 요구를 말하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이 ‘촛불’은 저녁의 촛불집회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일터가, 학교가, 또 그밖에 다종다양한 우리의 삶터 모두가 촛불의 공간이 되어야 할 것이다. 또한 저녁의 촛불집회를 이러한 소수 정치의 공간으로 재전유해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우리는 진정한 승리 - 즉 국민의 공화주의적 기획을 넘어서는 새로운 변혁적 주체성과 새로운 세계의 창조 - 를 누릴 수 있을 것이다. 인권침해와 입시지옥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외침이, 노동과 삶의 불안정화에 투쟁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외침이, 주거권을 요구하는 빈민과 노숙인들의 외침이, 장애를 가진 것이 문제가 되지 않는 세상을 만들기 위한 장애인들의 외침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바로 지금 그들의 삶터와 촛불집회의 현장 모두에서 외쳐지도록 해야 한다. 그리고 실질적인 승리들을 만들고, 또 그 승리들을 서로 연결함으로써 우리가 함께 살아갈 공통의 세계를 창조해야 할 때이다. “우리는 이미 승리했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만 참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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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은 계속되어야 한다! (참세상, 원영수(진보평론) / 2008년07월08일 16시50분)
[칼럼] 촛불의 진화와 촛불폐인에 대한 찬사
 
5월 30일, 6월 6-8일, 6월 10일, 7월 5-6일을 경과하면서, 새로운 조건에서 87년 6.10투쟁을 재현한 촛불의 위력 앞에, 모든 분석도구와 틀은 현재로선 무의미하다.
 
촛불의 존재 자체, 아니 그 확산으로 촛불은 이미 커다란 승리를 거두었다. 영어몰입교육, 대운하등 정치쇼로 보수정권의 지배체제를 굳히려던 이명박은 대선에 이은 총선의 압도적 승리에도 불구하고 한미FTA와 노동유연화 공세를 빼면 집권 내내 무기력했던 노무현의 뒤를 충실히 따르게 되었다.
 
이명박은 칼을 꺼내기도 전에 절망의 나락으로 떨어졌다. 온갖 거짓말로 변명하기에 급급하지만, 약발은 먹히지 않고 있다. 촛불 승리, 이명박 완패! 설사 촛불이 꺼진들, 실추된 이명박의 권위는 그를 청와대 세입자 신세를 유지시켜주면 다행인 형국이 되었다.
 
한국사회에서 계급의 선은 여러 가지로 그어지지만, 이번에는 그것이 소고기였다. 과거 집 문제로 유가계급과 무가계급으로 나뉘었던 한국사회는 이제 FTA 시대를 맞아 한우 먹는 계급과 미친소 먹는 계급으로 나뉘게 되었다. 먹든지 말든지. 광우병 걸리는 건 복불복! 물론, 한우 먹기를 포기한 계급이 과연 촛불에 시민권이 있는지에 대한 지적도 있지만.
 
일각에서 촛불의 성격을 규명하기에 급급하다. 다중론자 또는 자율주의자들이 철만난 듯이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이런 성격논쟁은 한가하기 짝이 없다. 촛불 건너편 저들은 철저한 계급적 본능으로 똘똘 뭉쳐 촛불 죽이기에 올인하고 있다. 촛불의 계급성을 부정하는 한가한 논란을 보면서 저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을지?
 
촛불은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독재에 맞서, 생존권을 위해 투쟁한 운동권 없이 새로운 운동권이 나올 리 없다. 그들은 일반시민, 네티즌, 다중, 대중 등 뭐라고 이름 붙이든 새로운 운동권이다.
 
소고기란 촛불의 의제도 의제지만, 직접행동과 민주주의, 자발성은 촛불의 새로운 아이콘이다. 집행부의 의지에 따라 통제되는 집회와 행진, 간혹 벌어지는 대치와 전투 등 기존 운동권의 전술이 갖는 한계를 넘어, 가두진출과 72시간 무박투쟁까지 새로운 다양한 대치전술이 시험되면서 새로운 운동권의 정체성과 새로운 저항문화가 형성되고 있다. 정작 촛불을 화나게 하는 건 촛불이 새로운 운동권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촛불은 새로운 운동권이었다. 소고기는 촛불을 통해 직접 민주주의로 확장했고, 운동권은 자기 의제를 던졌다. 촛불은 거리에서 하나가 되었다. 이제 촛불과 운동권은 분리된 무엇이 아니라 뒤섞여서 48시간, 72시간을 함께 뛰면서 외치고 토론하는 하나의 그 무엇이 되었다.
 
물리적 공간은 폭력을 수반한다. 국가폭력, 경찰력으로 표현되는 정부의 이른바 공권력은 촛불에 대한 그 본질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순수 비폭력 촛불은 거리의 촛불이 되었고, 이후 촛불의 도로점거는 경계를 살짝 넘었다. 전투경찰은 폭력으로 맞섰지만, 비무장 시위대를 진압할 수 없었다.
 
지난 2달 동안 비폭력의 정치는 가두를 매개로 끊임없이 변화했다. 그 수위는 절묘한 것이었다. 맹목적 비폭력은 넘어서되, 공권력과 미친 언론의 폭력 이데올로기가 힘을 얻지 못할 정도로 수위를 유지하면서, 가두의 국가폭력을 수세로 몰아넣은 전술구사의 새로운 차원을 열었다.
 
일각에서 이번 촛불을 한국판 68혁명으로 표현한다. 양자는 표면적으로 유사성을 갖는다. 단 68혁명을 문화적으로 해석할 때 그렇다. 권력에 대한 조롱, 넘치는 끼와 자발성, 직접행동, 민주주의의 확장 등은 1968년 5월 파리에서 또 프라하의 봄에서 학생과 노동자들이 제도적 권위주의에 맞서 해방의 공간을 창출했을 때 나타났던 특징이다.
 
그러나 촛불에는 68을 특징짓는 반자본주의, 국제주의는 없다. 비판이 아니라, 맥락이 다르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촛불의 확장은 앞으로의 과제이다. 자본주의를 부정, 거부하는 정치세력과 정치적 선전선동이 부재했던 한국의 맥락에서 갑자기 반자본주의가 촛불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다.
 
촛불은 확실히 한국적이다. 오히려 섣부르게 68을 바로 대입하기보다는 거시적으로 전쟁과 4.19, 유신과 80년 민주화의 봄, 광주항쟁과 87년 6월항쟁, 7-8-9월 노동자대투쟁, 96-97총파업, 1997-98년 IMF 경제위기로 이어지는 한국사회의 역동적 변화과정, 그것을 관통하는 계급투쟁의 발전 속에서, 미시적으로 2000년대 주기적으로 일어나는 사회정치적 동원(월드컵, 노사모 등)의 정치학을 매개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촛불의 과거가 아니다. 일차적으로 촛불의 현재가 중요하고, 미래가 더 중요하다.
 
어쨌든, 촛불도 완벽하지 않다. 6.10을 통해 전국적 현상임을 확인했지만, 여전히 촛불은 서울중심이다.
촛불이 운동권의 한계를 창조적으로 넘어선 것은 분명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촛불이 운동권을 대체하지 못하고, 또 대체할 필요도 없다. 문제는 촛불과 운동권의 만남이 어떤 시너지를 만들 것인가와 그 내용이다. 문제는 실천하는 것이다.
 
자학은 악취미다. 경찰버스에 불 지르려던 실업자를 경찰에 넘기는 옹졸한 준법주의나, 전경의 군화발에 밟힌 서울음대생과 구속된 노동자들에 대해 갖는 은밀한 계급적 이중 잣대에 대한 처절한 자기비판이 더 필요하지 않을까? 굳이 말을 거들려면 궁색한 자기변명이나 자기 합리화가 아니라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하려는 지혜를 말하라.
 
촛불은 계속된다. 설사 꺼지더라도 다시 살아날 것이다. 촛불이 꺼지지 않는 만큼, 민주주의와 해방의 유토피아는 더 가까이 다가올 것이다. 한우가 특정한 계급에 독점되지 않는 그날까지, 미국의 소들이 잔혹한 사육으로부터 해방되는 날까지, 모두가 한우를 돈에 구애받지 않고 먹을 수 있을 정도로 계급이 폐절되는 날까지 촛불의 진화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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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신당, 욕먹을 각오로 결단해야 (레디앙, 2008년 07월 08일 (화) 17:49:50 조현연 / 성공회대)
[촛불과 진보신당] "촛불과 소통할 수 있는 정당이 되자"
 
‘촛불’의 물결. 우리 사회에 거대한 충격을 던지며 등장한 그것은 2008년을 상징하는 말이며, 그것이 던지는 의미는 여러 가지로 집약된다.
 
첫째, 80년 5월의 광주가 전두환 정권의 정통성에 치명상을 가하면서 87년 6월을 배태했듯이, 2008년의 촛불은 새로운 가능성의 정치공간을 열면서 이명박 정부의 통치 비용을 급상승시킬 것임에 틀림없다.
 
둘째, 촛불은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희망의 빛이자, 동시에 기성의 정당정치와 운동정치의 뼈아픈 각성과 혁신을 촉구하는 항의의 표시이기도 하다. 촛불의 물결은 문화적 엄숙주의와 폐쇄적 회로로 무장한 기성의 운동질서와 행동문화에 파열구를 냈다. 참신한 문화적 상상력과 자발적 참여, 생기발랄한 소통은 거리의 광장을 저항의 즐거운 축제의 장으로 만들었으며, 해방감과 연대는 그것의 자연스런 표출이었다.
 
마지막으로, 촛불은 온갖 부조리와 부정의와 거짓에 대한 국민적 저항과 심판이자, 소외와 고통 속에서 오늘을 힘겹게 살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희망의 빛을 의미한다.
 
좀 더 긴 호흡으로 본다면, 2008년의 촛불로 표현된 다양한 운동의 에너지는 정치의 변경을 가져올 힘으로 전화되어야 된다. 그 핵심은 바로 이 운동의 에너지를 모아낼 수 있는, 새롭게 출현한 촛불광장과의 소통이 가능한 정당의 존재 유무이다. 정당이야말로 사회적 요구와 이해를 응집하고, 또 그것에 기초하여 다양한 사회적 균열을 재구성하고 재편해낼 수 있는 조직이기 때문이다.
 
촛불정국이라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사태와 그 진로에 대해 진보신당은 권위 있는 해석자가 되고, 촛불의 의미를 이 땅에 뿌리 내리게 하는 실천가가 되어야 한다. 그것이야말로 사회의 요구에 응답하고, 정치적 실천을 통해 책임을 짐으로써 대중적 신뢰를 획득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또 새로운 주체 형성을 이루고 그 힘에 기초하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고 궁극적으로 세상을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14,000명 당원의 60%에 달하는 신규 당원들, 그들과의 만남에서 오는 신선한 문화적 충격, 생기발랄함에 대한 부러움과 나는 왜 저렇게 살지 못했을까 하는 자책감 또는 시샘도 새로운 당 활동의 가능성과 희망을 엿보게 해준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용광로 속에서 녹아 새로운 힘의 원천으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앞으로 조만간 안착될 당의 시스템과 조직 편제가 그것에 맞춰 꾸려져야 하겠지만 말이다.
 
‘재협상 관철을 위한 거리와 광장에서의 촛불의 지속’, 과연 진보신당이 이 주장을 책임 있게 할 수 있는가, 또 당연히 해야만 하는 것이 솔직하고도 바람직한 정당의 태도일까? 앞서 말한 것처럼 정당이란 응답과 책임을 통해 정치적 신뢰를 획득하는 것, 그것을 위해 당면한 사태에 대한 권위와 책임있는 해석이 필요하다.
 
그랬을 때 광장에 참여하고 있는 모든 사람들과 모든 목소리를 만족시킬 수 있는 답이란 없다는 것, 지도 없이 진행된 촛불의 자발성과 이른바 ‘집단지성’, 그리고 의석 없음을 핑계로 마냥 그 뒤를 따르는 것이 지금의 딜레마를 푸는 해법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운동단체와는 다른 정당으로서, 또 기성의 정당들과는 다른 새로운 색깔의 정당을 자임하고 있는 진보신당이 지금이야말로 사태에 대한 정확하고도 솔직한 해석을 통해 책임 있는 견해를 내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받아들이기 쉽지 않지만 국면이 전환되고 있는 지금, 욕 먹을 각오와 긴 호흡과 함께 하는 담대한 결단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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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이 갈 길 (레디앙, 2008년 07월 09일 (수) 15:24:20 김종엽 / 한신대 사회학과 교수)
[창비주간논평] 6.10과 7.5의 의미있는 차이
 
6월 10일에 이어 7월 5일에도 다시 한번 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촛불로 넘실거렸다. 하지만 두 집회 사이에는 의미있는 차이가 존재한다. 6월 10일에 사람들은 청와대를 향해 서 있었다. 하지만 7월 5일 사람들은 냉담하게 청와대를 등지고 앉아 집회를 진행했다. 사람들은 더이상 불법주차된 전경차를 견인하려 하지조차 않았다. 그리고 촛불이 이미 승리했음을 선포했다.
 
그렇다. 촛불은 이미 승리했다. 촛불이 켜지던 첫날에 교복 입은 여중생들이 "미친 소, 너나 먹어"라고 단호하게 외치던 그때 이미 승리했고, 72시간 릴레이 투쟁을 벌여나갔을 때 이미 승리했으며, 6월 10일 거대한 촛불의 강을 이루고 스티로폼 계단을 쌓아 밤샘토론 끝에 명박산성에 올라 깃발을 흔들었을 때 이미 승리했고, 국민토성을 쌓아 명박산성을 비웃고 형형색색의 비옷을 입고 아리랑을 부르며 아침을 맞는 기차놀이를 할 때 승리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평화롭게 행진하고 토론하고 노래 부르고 놀았을 때 우리는 이미 승리한 것이다. 촛불항쟁을 관통하는 쇠고기, 대운하, 건강보험, 교육, 수돗물, 공영방송 같은 이슈들은 하나같이 생명을 중심축으로 선회한다. 촛불은 이 생명의 정치를 공생의 정치로 고양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동고동락하는 기쁨을 얻었다. 그러니 이미 승리한 것이다.
 
촛불은 이명박 정부의 행보를 다 막지는 못했지만, 그들을 당황하게 하고 대운하나 민영화 같은 잘못된 중요정책에 제동을 걸었다는 점에서 이미 구체적 성과를 내고 있다. 뿐만 아니라 상징적 승리 자체가 현실적 승리 못지않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촛불이 보여준 상상력과 자기표현의 엄청난 분출, 끈기있고 진지한 토론과 성찰,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실시간으로 통합하고 활용하는 능력, 실천적 자기통제력, 유희와 항쟁을 결합하는 여유는 5공시절 허문도식 언론통제 그리고 강경대와 김귀정을 때려죽인 공안정국에 대한 낡은 추억 주변을 맴돌고 있는 정부를 한참 능가했다.
 
이런 상징적 하야 뒤에도 이명박 대통령은 상징적 토대를 잃었기에 벌거벗은 모습으로 드러날망정 여전히 막강한 제도적 권력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끊임없이 휘두를 것이다. 촛불은 이런 상징과 실재의 괴리를 견뎌야 한다.
 
"이미… 그러나 아직"이라는 역설의 시간에 드리운 어둠을 쫓아내기 위해 계속 타올라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명박 정부의 물리적·제도적 폭력에 더해 촛불이 얻어낸 도덕적이고 상징적인 승리마저 침식할 여지를 줄 수 있다. 그것을 막고 한걸음 더 전진하기 위해서 지난 두달 동안 이루어졌던 촛불의 발전경향을 의식화하고 더 진화시켜야 할 때이다.
 
무엇보다 촛불은 이제 지구전으로 나아가야 한다. 시민적 의제를 중심에 둔 현상황에 전쟁의 메타포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 유감스럽다. 하지만 그런 메타포를 떠올리게 한 것은 촛불이 아니다. 그것은 "내전" 운운하는 질 나쁜 한 소설가에 의해 그리고 산성을 쌓고 농성체제를 구축했던 이명박 대통령의 행보에 의해 유도된 것이다.
 
촛불은 이제 "그렇게까지 외쳐도 이렇게까지 벽창호일 수 있는가" 하는 울화에서 벗어나 지구전에 임하는 마음을 갖추어야 한다. 전방위적 탄압과 고립화 시도로 인해 촛불이 일보 혹은 이보 뒤로 밀리는 때가 올지라도 그것을 이겨내기 위해서 평상심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 촛불의 사회운동화와 제도화를 이룩해나갈 필요가 있다.
 
이런 방향은 지난 두달 동안의 촛불항쟁 속에서 이미 조금씩 모습을 갖추어왔던 것이다. 촛불은 조중동 같은 수구언론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는 사회운동을 조직했으며, 그들의 거친 반응에서 보듯이 이미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이런 활동을 더 조직적으로 "질기게" 이어나가야 하며, 이제 미국산 쇠고기 불매운동을 비롯하여 급식감시운동으로 확산해가야 한다. 더불어 촛불이 의제화한 교육, 의료, 공공써비스, 언론문제 등에서 사회적 퇴행을 저지하는 운동을 조직해야 한다.
 
이런 사회운동화와 더불어 그것을 잘 수행하기 위해서도 제도화가 필요하다. 촛불은 집회를 행복한 공간으로 만들어왔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로마저 씻어낼 수는 없다. 또한 근본적으로 탈중심화된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촛불은 사람들로부터 창의력과 참여를 끊임없이 불러냈지만, 다른 한편 타자의 참여에 대한 예측 불가능성으로 인해 은근한 불안을 자아낸다. 지금까지의 촛불항쟁 동안 전환점에서마다 촛불의 미래에 대한 논의가 촉발됐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이런 불안과 피로를 없는 척하지 말고 받아들이자.
 
이를 위해서 집회를 주말로 정례화하고 한달에 한번 집중집회를 하는 식으로 그리고 주중에는 토론을 조직하는 방식으로 제도화하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이런 집회방식의 변화와 관리를 위해서는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보다 좀더 높은 수위의 연대 기구, 이를테면 "촛불회의" 같은 것이 필요할 수도 있다.
 
이런 제도화 속에서 나는 토론의 조직화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촛불은 토론 속에서 발전해왔지만 그것이 더 심화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촛불은 쇠고기 사태에서 출발하여 곧장 다른 의제들을 흡수해 5대 의제로 발전했다. 공생을 향한 이런 촛불의 학습과 진화는 그 귀결점으로 이명박정부와 조중동이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의 한국사회를 함축하고 있다. 그것이 어떤 것인지 스스로 밝힘으로써 대안을 조직화해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5대 의제라는 자기한정을 넘어설 필요가 있다. 지난 두달 동안 촛불은 비정규직 문제를 비롯한 노동문제를 정면으로 감당하지 않았고, 항쟁의 한가운데 있었던 6·15를 스쳐 지나갔으며, 쇠고기 문제의 뿌리인 한미FTA 문제 또한 다루려 하지 않았다.
 
그런 우회에 쟁점을 집약하고 우리를 최대화하려는 신중함이 서려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제 그런 신중한 한정을 떨쳐야 한다. 집회에서 우리는 폭력을 완벽하게 자제해야 하지만 사유와 성찰은 거칠 것 없이 개방해야 하며, 그것을 토론에 회부해야 한다. 토론이 깊이를 더할수록 대안은 모습을 갖추어나갈 것이다.
 
이런 촛불의 진화는 또한 촛불 든 이들의 진화이기도 할 것이다. 토론 속에서 우리는 전문가인 시민, 정치가인 시민이 될 것이며 내적 변화마저 이룩할 수 있다. 생각해보면 지난 대선과 총선은 우리 내면의 저열한 열정과 속물성이 뛰쳐나왔던 과정이었다. 그 우리 안의 속물됨을 촛불로 정화해야 한다. 나도 그랬지만 많은 사람들이 집회 중에 자신이 든 촛불을 응시할 때마다 마음의 평화를 느꼈을 것이다. 이 평정한 마음으로 정진하면, 세상을 밝히며 안으로도 스며드는 조용하고 따뜻한 이 촛불 같은 사회, '촛불세상'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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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집회, 벌써 횟수를 줄일지를 고민할 때? (박준형(공공노조) / 2008년07월09일 17시33분)
[기고] 7월5일 ‘국민승리’ 선언했지만, 승리한 항목은 없다
 
지난 7일,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는 "촛불 집회 주최 횟수를 줄인다"라고 발표했다. 대책회의가 주최하지 않는 날은 다른 단체들이 할 수 있도록 하고, 불매운동이나 국민투표 요구와 같이 다양한 운동방식을 병행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결정은 대책회의 내부 논의 과정에서 촛불집회의 방향과 관련된 진통이 있은 후 발표되었다.
 
시청 앞 집회는 폭력적으로 원천봉쇄되고 있으며, 대책회의 실무진들은 수배자가 되어 조계사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집회 전단을 붙이던 시민이 연행되어 구속영장 청구를 받고, 조중동 불매운동에 동참한 네티즌들은 출국금지를 당하는 황당한 상황이다. 때마침 통합민주당은 국회 등원을 선언했다. 이런 국면을 지칭할 때에는 "승리했다"라는 말보다는 "역공당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적합해 보인다.
 
진행 중인 논쟁을 마치 존재하지도 않는 것처럼 말할 때, 오히려 진정한 쟁점에 대해서는 일방적인 입장으로 결정되기 쉽다. 촛불집회의 방향에 대한 대중적인 토론이 지난 6월10일 대회 이후 이루어졌던 것을 생각하면, 훨씬 더 심각한 방향전환이 이루어지는 이 순간에 논의는 오히려 대중적인 공간이 아니라 대책회의 운영위에서만 논의되고 있다. "대표성"도 불분명한 공간에서 말이다.
 
집회를 지속하려는 조직된 노력이 사라지는 사이에, 자발적으로 모이는 소수의 시민들은 고립되고 있는 상황이다. 시청광장에서 이루어지는 시민들의 고립이 그 "다양한 운동방식"에서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을까?
 
이제까지 촛불 운동이 시민들의 지지를 받아왔던 이유가 무엇인지를 다시 생각해야 할 때다. 그리고 이 운동이 완강하게 진행될 수 있었던 힘이 어디에 있었는가를 생각할 때다. 그것은 "촛불집회"라는 집회의 독특한 양식 --아마도 "평화로울" 것이라고 기대되는-- 때문이라기보다는 그 요구 사항에 시민들이 공감했기 때문임을 기억하자. 오히려 집회의 양식은 "촛불"이라는 상징만 일관되게 유지되었을 뿐, 시기에 따라 꾸준하게 변화해왔다.
 
촛불 공간 속에서 시민들은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불만을 자신의 언어로 발견하고 발언할 수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집회는 매순간 문화제에서 침묵시위로, 가두행진으로, 전경차 끌어내기로, 그 양식의 다양한 변화를 겪으면서도 요구를 꾸준히 확대해왔다. 대책회의가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정권퇴진"을 외치는 상황에 이르렀다.
 
여전히 문제는 시민들이 외치고 있는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를 더 확장하고 구체화하고, 일관되게 전선으로 모아내는 일이다. 공기업, 의료 등 공공서비스 민영화 반대, 대운하 반대, 정권의 교육정책 반대와 같은 것들이 단지 이명박 대통령이 "미친" 놈이기 때문에 하는 정책이 아니라, 모두 하나의 일관성을 가진 사회, 경제 정책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인식하고 싸워가도록 투쟁을 지속하는 일이다. 비록 대책회의는 "국민승리"를 선언했지만 정작 승리한 항목은 어느 것도 없기 때문이다.
 
공기업 민영화는 이름만 "선진화"라고 바꾸어 추진되고 있다. 정부가 7월2일 발표한 "경제안정 종합대책"(2008년 하반기 경제운용방향)에서는 여전히 공공부문 구조조정과 민영화를 추진하겠다는 내용을 "공기업 선진화 방안" 항목 안에서 제시하고 있다. 정책발표 시기만 두어달 늦추어서, (아마도 정세가 반전되리라 기대되는) 8~9월에 할 뿐이다. 대운하만 하더라도, 촛불집회가 사그라든다고 판단할 때 언제든지 다른 이름으로 부활할 수 있다.
 
운동의 방식을 다양하게 확장하는 것도 의미 있다.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더 잘하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핑계로 촛불집회로 상징되는 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정권반대 투쟁을 고립시키는 것은 정권이 원하는 것일 뿐이다. 이미 청와대는 7월5일 대책회의의 청와대 면담과 관련하여 "촛불집회 중단"이 조건이었다고 밝히지 않았는가? 그것은 현재 국면을 정리하려면 우선 시청광장의 촛불집회라는 상징을 제거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그들이 먼저 알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준다. 지금 필요한 것은 오히려 더 완강하고 끈질긴 싸움과 요구의 확장이다.
 
노동운동은 자신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고유한 요구를 제대로 촛불집회에 결합시켜오지 못했다. 예컨대, 의료, 교육, 공기업사유화 등 다양한 곳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에 대한 반대가 결합하는 와중에도 왜 신자유주의 문제의 결정판인 "비정규직 문제"는 거의 언급하지도 못했을까? 정작 광우병 대책위 안에서 이 문제에 대해서라면 가장 "정통할" 민주노총이 제기하지 않는 마당에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을 수도 있다. 저임금 노동자의 생존권이라고 할 최저임금 현실화와 같은 쟁점을 광장에서 결합하지도 못했다.
 
그러니 노조운동은 신자유주의 반대운동에 노조가 관련된 주요한 과제 중 하나(공공부문 사유화 저지)에 대해서는 단지 무임승차했으며, 또 다른 하나(비정규직 철폐)에 대해서는 말도 꺼내지 못한 셈이다. 비록 운수노조를 중심으로 한 미국산 쇠고기 반출 저지 투쟁, 총파업이 있기는 했지만 노동자들의 요구가 시민들의 다른 요구와 다르지 않음을 시민들에게 말하고 함께 하지 못했다. 그 결과 이 거대한 싸움이 진행된 과정에서도 노동운동은 여전히 광장의 시민들에게는 "손님"에 불과한 상황이다.
 
지금의 촛불집회는 여전히 양면적 혹은 복합적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는 이런 방식으로 대중이 모인 것을 기억한다. 정치적 불만이 표현되는 방식이면서 동시에 인터넷과 미디어 문화 속에서 형성되고 강화된 맹목(그것이 불과 직전에는 민족주의적이거나 발전주의 같은 것이기도 했다)이 확산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2008년 촛불은 어딘가에서 돌출한 사건이 아니라 이런 맥락에서 형성되어온 현상이라는 점에서, 이 유례없이 완강한 촛불집회도 여전히 복합적인 성격을 그 안에 갖고 있다.
 
이 속에 있는 어떤 경향은 많은 사람이 기대하는 것처럼 신자유주의 반대를 위한 운동으로, 일상의 민주화와 문화혁명으로 발전해갈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그러나 또 어떤 경향은 운동의 부정적 수렴도 불가능한 것만은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도록 한다. 따라서 촛불집회의 요구를 쇠고기 수입문제에 가두지 말고 더 열어가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촛불 안에서도 사회운동들의 역할이 여전히 존재한다.
 
또한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는 여러 주체가 이 운동 속에서 만나고 결합하면서 하나의 방향을 강화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정규직 노동자, 이주노동자, 여성도 시민이라는 것을 촛불 광장에서 확인하는 일도 그래서 중요하다. 촛불집회에서 "시민"이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노동자=시민", "이주노동자=시민", "여성=시민"들이기도 하다. 그것을 광장에서 "국민"으로 불리는 사람들에게 질문하고 대화하고 논쟁하면서 주체와 쟁점을 열어가야 한다. (그럴 때, 사회운동도 광장의 시민들로부터 배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 운동을 결산할 때 인터넷 카페나 다음 '아고라'만은 아닌 다른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운동의 조직화"를 사고할 수 있다.)
 
비록 전술적으로만 생각하더라도, 이때 필요한 일은 광장에서 후퇴하는 것이 아니라 광장을 지키고 넓혀가는 것이다. 정세의 쟁점은 정권 스스로에 의해서도 이미 광우병 쇠고기 수입만이 문제가 아닌 것으로 확장되어 가고 있고, 시민들이 먼저 모든 방면에서 정권의 신자유주의 정책에 반대하는 자신의 요구를 제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쟁점들에 대해서 시민들과 사회운동이, 다시 광장에서 촛불의 방향을 토론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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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07/09 21:00 2008/07/09 21:00

댓글1 Comments (+add yours?)

  1. 불씨 2008/07/09 21:24

    훌륭한 시각이라고 봅니다.
    글을 요약하는 시각이 대단 합니다.
    각자의 고민에서 참고하여 현국면을 돌파하는 참고가 되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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