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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수,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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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김연수 지음/문학동네/2007.
 
김연수의 이 장편소설을 도서관에서 대출받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항상 누군가 대출중인 상태였다. 그래서 오히려 구미를 돋구었던 소설책이었다. 지금 다시 누군가가 대출예약을 했기에 그를 배려해서라도 빨리 반납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이 책을 잡은 다음에는 출퇴근 시간에 시나브로 읽어나가려 했는데, 그게 쉽지 않더라. 하다보니 그냥 단숨에 읽어내려버렸다. 그 마지막은 조금은 허탈한...
 
작중화자인 나는 1980년대 말부터 90년대 초까지 벌어졌던 다양한 사건들의 중심부에 있다. 물론 그렇다고 그 사건들의 주인공은 아니며, 조금은 관조하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여기에 정민, 이길용, 강시우 등과 그 주변사람들의 이야기가 보태져서 소설은 전세계를 커버하면서 20세기 전반을 다루는 것처럼 보인다.
 
이 책은 일종의 후일담 소설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이 소설에 나오는 사람들의 정서를 읽어내는 사람이 많이 있을까 의문을 제기한다면 과도한 걸까. 그래도 많이 회자되는 걸 보면 간접체험을 그럴싸하게 느끼는 이들이 꽤 되는 모양이다.
 
하지만 내가 여기에 완전하게 공감하지 못하는 이유는 내가 운동의 주변부에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정민과의 사랑에 대해서도 그렇고, 주인공의 베를린 파견도 그렇고... 방북을 위해 베를린에 예비대표로 파견되는 이 정도 되면 사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정리가 되었을 텐데, 작중화자는 전혀 그렇지 않다. 내가 아는 한, 주인공은 감성은 깊은지 모르겠지만, 이성과 이념 등에 관한 한 단무지과여야 정상이다. 적어도 학생운동권 내의 좌우파의 특색은 분명히 구분이 되는 것이었는데, 주인공은 이 양자를 짬뽕하여 모두 가지고 있다. 그래서 소설이 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소설 제목이 참 멋있다고 생각했는데, 시의 한 구절이었다. 이 시는 표제시로 실려 있다.

 
기러기
                                    메리 올리버
착해지지 않아도 돼.
무릎으로 기어다니지 않아도 돼.
사막 건너 백 마일, 후회 따윈 없어.
몸속에 사는 부드러운 동물들,
사랑하는 것을 그냥 사랑하게 내버려두면 돼.
절망을 말해보렴, 너의. 그럼 나의 절망을 말할 테니.
그러면 세계는 굴러가는 거야.
그러면 태양과 비의 맑은 자갈들은
풍경을 가로질러 움직이는 거야.
대초원들과 깊은 숲들,
산들과 강들 너머까지.
그러면 기러기들, 맑고 푸른 공기 드높이,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거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
기러기들, 너를 소리쳐 부르잖아, 꽥꽥거리며 달뜬 목소리로―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이 세상 모든 것들
그 한가운데라고.
 
Wild Geese 
                                 by Mary Oliver
You do not have to be good.
You do not have to walk on your knees
for a hundred miles through the desert repenting.
You only have to let the soft animal of your body
love what it loves.
Tell me about despair, yours, and I will tell you mine.
Meanwhile the world goes on.
Meanwhile the sun and the clear pebbles of the rain
are moving across the landscapes,
over the prairies and the deep trees,
the mountains and the rivers.
Meanwhile the wild geese, high in the clean blue air,
are heading home again.
Whoever you are, no matter how lonely,
the world offers itself to your imagination,
calls to you like the wild geese, harsh and exciting
over and over announcing your place
in the family of things.
 
나의 책 읽기는 항상 그렇듯이, 책 사이에서 쓸만한 문장찾기가 많다. 김연수의 이 소설에는 사람들이 그럭저럭 감동을 받을 문장들이 상당히 있다. 물론 나는 기억하려는 것은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고...
 
내가 그 또래였으면 전혀 생각하거나 말로 꺼내지 못했을 것들을 나이 어린 화자가 얘기하더라도 그냥 그러려니, 내가 그렇게 어린 것이려니 생각하니 편하다.

 
그 입체 누드사진은 현실보다도 더 생생한 환상을 그(섬에 고립되어 죽을 날만 기다리는 젊은 병사)에게 보여줬을 거라면서, 나는 고립된 사람들에게 현실이 한순간 뒤흔들리면서 그보다 더 생생한 환상이 나타나는 건 자주 일어나는 일이라고 떠들어댔다. 제아무리 견고하다 해도 현실은 인간의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므로.
모든 聖人들은 자발적으로 고립을 택해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으로 들어가는데, 이는 현실이 오직 감각을 통해서만 드러난다는 사실을 깨닫기 위해서다. 하지만 ‘존재의 가장 어두운 밤’을 경험한 그 다음 순간, 모든 성인들은 감각적 현실이 얼마나 아름다운 세계인지 깨닫게 된다. 현실이 감각적으로만 성립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모든 게 덧없을 뿐이라는 허무주의에 빠져야 할 텐데, 아이로니컬하게도 더욱더 그 감각적인 생생함을 즐기게 되니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그 밤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최상의 행복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한다. (42쪽)
 
→ 나는 이런 말을 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꼬실 자신도, 능력도 없다.
 
서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술이 취해 불콰해진 얼굴로 여럿이 몰려가 창녀와 하룻밤 자는 일은 모두가 공유할 수 있었지만, 학생회 내부에서 연애하다가 생기는 성욕은 전적으로 개인적인 것이었다. 개인적인 모든 것은 전적으로 이해받을 수 없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는 욕망이기에, 그러니까 남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지극히 내밀한 욕망이기에, 나는 거기에서 단 한 발짝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윽고 나는 그게 사창가에서 드러나는 욕망과 달리 나만의 사적인 욕망이기 때문에 덫과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엘레나가 된 순희를 향한 욕망은 연민의 감정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랑으로 포장됐으므로 도덕적이고 공적인 것이었다. 도덕적이고 공적이라는 말은 그런 욕망을 지닌 우리들이 그 욕망의 대상들보다 사회적 위치가 높다는 사실을 뜻했다. 실제로 도덕적으로 욕망할 때도 그랬지만, 도덕적으로 욕망한다고 생각할 때도 우리는 스스로 뭔가를 희생하고 있다고 믿었고, 뭔가를 희생하는 한, 우리는 스스로 그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 내게 느닷없이 특정한 대상을 향한, 그 어떤 희생의 기미도 보이지 않는 너무나 사적인 욕망이 자리잡았으므로 나는 당연하게도 그 욕망을 부도덕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명백히 부도덕한 모든 것들은 인간의 무의식을 점령하고 거기서 떠나지 않는다. (53-54쪽)
 
완전한 해방은 두려울 정도로 요염한 쾌감과 연결돼 있었다. 완전한 해방이란 사적인 쾌감과 관계된 것이므로 누구에게도 이해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56쪽)
 
→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지만, 그게 과연 완전한 해방일까.
 
증오나 분노와 달리 사랑이 가리키는 것은 저마다 달랐다. 예컨대 광주학살을 명령한 사람이 가족을 아끼는 감정도 사랑이었고, 그 순간 정민의 몸을 껴안고 한없이 만지려고 드는 내 마음도 사랑이었다. 사랑은 그 모든 것이었다. 세상이 혼란스러워지는 까닭은 그 모든 것을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기 때문이었다.
 
(정민의 말) “우주는 무한할 거야. 이 우주에 내가 누구인지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 나 하나뿐이라면, 생각만 해도 추워. 무주에서 보내던 그해 겨울이 기억나. 얼마나 추웠는지 몰라. 그때 달달달 떨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내가 그토록 간절히 원했던 것은 누군가 내게 말을 거는 일이었어. 그게 누구든, 나는 연결되고 싶었어. 다만 내게 말을 걸고, 또 내가 누구인지 얘기해줄 수 있는 사람이 이 우주에 한 명 정도는 더 있었으면 좋겠어. 그게 우주가 무한해야만 가능한 일이라면 나는 무한한 우주에서 살고 싶어. 그렇지 않으면 너무 추울 것 같아.” (68-69쪽)
 
개인들은 언제나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했다. 이데올로그들이 말하는 ‘순수한’ 개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역사적 조건들과 관계들 내부에 있는 자신으로부터. 그렇다면 어디를 향해? 그 순간 내 몸으로 이해한바, 시작도 끝도 없는 우주공간 속으로, 그리고 외로움이 없는 해방 속으로. 그 공간은 너무나 행복하고 너무나 아름다워 다른 곳에 그와 같은 세상이 하나 더 존재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70쪽)
 
→ 여친과 그런 상황에 있다면 이렇게도 느낄 만 하겠네.
 
뉴스를 듣다보면 갑자기 세 번의 차임벨 소리가 울리는 순간이 있었는데, 정민은 그 순간을 가장 좋아했다. 세 번의 차임벨 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뉴스가 시작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외신을 전한다거나 지방뉴스가 시작될 때면 어김없이 그 소리가 들렸다. 뭔가가 바뀐다는 것, 이윽고 다른 세계의 일들로 넘어간다는 것은 그처럼 반드시 차임벨 소리와 함께 이뤄져야만 할 것 같았다. …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그 온갖 얘기들이 말해주듯 인간의 삶 역시 항상 무슨 일인가가 벌어지고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무슨 일인가 일어나는 순간, 삶은 예전의 삶과는 달라졌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늘 예전과 다른 곳에서 살아가는 유목민이나 다름없으므로 영원한 거처라는 건 있을 수 없었다. (83-84쪽)
 
습관이란 무의식중에 행하는 행동을 뜻한다. 폭력이 몸에 밴 사람은 폭력을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바로 그 ‘인식하지 못함’이 그가 속한 세계를 폭력적으로 만든다. 그런 세계에서는 제아무리 비폭력을 주장한다고 해도 현실적으로 그들의 몸은 폭력보다 비폭력을 더 불편해한다. 그걸 가리켜 현실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인지도 모른다. (102쪽)
 
→ 우리가 대체복무에 동의하고, 군대폐지에 공감한다고 하더라도, 강의석이 국군의 날에 행한 군대 폐지를 위한 알몸 퍼포먼스에 대해 불편해하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닐까. 물론 강의석이 지금까지 해왔던 행태 때문에 이를 쇼라고 보고, 그 진정성을 의심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걸 떠나서 생각해볼 때 그렇다는 거다.
 
신간서적의 한 구절. “반석 위에 집을 지어라. 그 반석이란 네가 스스로 말살시킨 고유의 천성이며, 자식에 대한 사랑이고, 아내의 사랑에 대한 꿈이며, 네가 열여섯 살 때 가졌던 인생에 대한 꿈이다. 너의 환상들을 약간의 진실과 바꾸어라. … 이웃은 잊어버리고 자신의 내면에 귀를 기울여라.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인데, 올바르게 생각하고 주의를 부드럽게 환기시키는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라. 인생은 자기 자신이 지배하는 것이다. 너의 인생을 다른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말라. 무엇보다도 네가 선출한 지도자에게는 맡기지 말라. 자기 자신이 되어라.”(123쪽)
 
→ 주인공은 자신을 구한 것이 “자기 자신이 되어라”라는 문장이었다고 하지만, 책 전반적으로 그의 인생을 자신이 지배하지는 못했던 듯하고, 자기 자신이 되지도 못했던 것 같다. 자기 자신이라는 것도 그냥 생기는 것이 아니고, 바로 어느 정도는 다른 이와의 소통 속에서 생성되는 것이고, 계속 변화하는 것인데, 저자는 이를 간과하였다.
 
그도 발인할 무렵이면 내가 영안실에서 기식하는 사람, 그러니까 한때 영안실을 지키던 우리가 ‘밥풀떼기’라며 경찰에게 넘겨줬던 그 부랑자들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될 것이었다. (134쪽)
 
→ 이 구절에서 순간 김소진의 ‘열린 사회와 그 적들’을 떠올렸다. 역시 ‘밥풀떼기’는 1991년 김귀정 열사가 사망했을 때 출현했던 거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 <투란도트>에 희망이 무엇이라고 나와 있었지?”
“밤이면 인간의 마음속에서 날개를 폈다가 해가 뜨면 사라지는 환상. 매일 밤 태어났다가 매일 아침 소멸하는 것.”
“결국 만지면 부서지는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지. 현실이 잔혹할 때, 희망이란 아무짝에도 소용없는 장난감 같은 거야. 그래서 나는 모든 희망을 버린 사람들에게 새로운 삶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거야. 희망과 함께 자신의 모든 과거를 부정하는 사람들을.” (167쪽)
 
내가 독일행을 결심하게 된 것은 프라하의 성녀 아네스에게 보낸, 성 글라라의 편지에 나오는 한 구절 때문이었다. “옷을 입은 사람은 붙잡힐 때에 있어서 더 빨리 땅에 내동댕이쳐지기 때문에 알몸인 사람과는 싸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 글귀처럼 나는 나의 나약함도 무기가 될 수 있다고 믿었을 뿐이었다. 뭔가를 위해 희생하는 일이라면 그 누구보다 더 잘해낼 자신이 있었다. (168쪽)
 
“음악은 본질적으로 역설이지. 침묵을 이겨내기 위해 태어나지만, 결국 또다른 침묵으로 끝날 뿐이니까. 삶이 그런 것처럼.” (227쪽)
 
→ 베를린 봉쇄 시에 베를린 시민들에게 식량을 공수하던 비행기 엔진 소리가 멈추고 침묵이 찾아왔을 때 이는 더 이상 식량과 석탄이 공급되지 않는다는 걸 의미했으므로 시민들에게 공포를 불러왔다. 그래서 위선적이고 압도적인 침묵이라고 베르크는 표현하였으나, 수용소의 클럽에서 독일인 장교들을 위해 피아노를 연주하면서, 바그너의 마이스터징어 서곡이 끝난 뒤, 가스실을 채운 침묵을 외면했던 자신은 그 독일인에 대해 침을 뱉을 수 없었다고 얘기한다.
 
(이길용,) 그에게는 그런 식으로 위악적인 측면이 있었다. 치명적인 사랑에 빠진 사람들이 대개 그렇듯, 그 역시 사랑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사랑에서 도피하고자 했다. 더 깊이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이 진퇴양난의 상황 속에서 그는 순전히 살아남기 위해서 위악을 선택했다. (250-251쪽)
 
소설 속에서 언급되는 프랜시스 레이가 만든 <빌리티스>의 주제곡이 뭔가 상당히 궁금했는데, 들어보내 익숙한 곡이더라. 아래 곡은 남택상이라는 사람이 연주한 모양이다. 영화 <빌리티스>에서는 누가 연주했는지 당연히 모르겠고... 영화를 내가 봤는지 여부도 불확실하다. 아마 보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T.S. Nam - Bilitis
    
“물질이란 인간의 감각에 주어져 있으며 인간의 감각에서 독립해 존재하면서 인간의 감각에 의해 복사되고 촬영되고 묘사되는 객관적 실재를 표시하기 위한 철학적 범주다.”
“세계에는 운동하는 물질 외에는 아무 것도 없으며 또 운동하는 물질은 공간과 시간 밖에서 운동할 수가 없다. 세계는 하나이며 물질적으로 통일되어 있다는 것, 이것이 ‘세계는 무엇인가?’에 대한 변증법적 유물론의 대답이다.”
“물질세계는 발전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연관된 통합적 전체이기도 하다. 물질세계의 모든 대상들과 현상들은 자력으로 또는 따로따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관 속에서 또는 다른 대상들 및 현상들과의 통일 속에서 발전한다. 이들의 각각은 다른 대상들과 현상들에 작용을 가하며, 스스로도 이 상호작용의 영향을 받는다.” (353쪽)
 
→ 소설에서 이길용은 요원들에 의해 이러한 문장들을 외우도록 강요받았다. 그러고 보면 나도 이런 문장들을 접해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물론 뇌 용량상의 문제도 있고 하여 당연히 외우지는 않았다. 이해가 되면 되는 것이지. 그런데 그 때는 너무 쉽게 이해가 되는 것은 진리가 아닌 것 같았다. 그것이 내가 주체사상에 대해 별로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엔엘이 되지 않은 주된 이유이기도 하다.
 
소설의 모티브가 되는 그 누드사진은 도대체 뭘까. 궁금하긴 하지만, 그리고 검색해서 찾아보려면 찾을 수도 있으련만 빌리티스 주제곡을 찾아낸 것까지는 몰라도 그것은 좀 과하다.   

 



김연수는 촛불시위의 낙천적인 대학생들을 보고 주인공이 복수하는 결말을 수정했다고 한다. 자신의 눈 앞에서 정의가 실현되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에... 민생단 사건을 다뤘다니 한번 보고 싶기는 한데, 거의 모든 신문기사의 서평에 언급되는 촛불집회 관련 대목 때문에 오히려 조금 별 볼 일 없지 않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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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 간도 ‘민생단’ 학살사건 (서울, 김규환 기자, 2008-10-03  24면)
김연수 장편소설 ‘밤은 노래한다’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의 작가 김연수(38)씨가 민생단 사건을 정면으로 다룬 장편 ‘밤은 노래한다’(문학과지성사)를 펴냈다.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를 출간한 이후 1년여만에 내놓은 여섯 번째 장편 소설이다.
 
‘밤은 노래한다’는 1930년대 초 가슴 아픈 사연을 간직한 젊은이들이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가 서로 죽이고 배신하고 변절하고 미치광이가 되는 가혹한 운명을 생생하게 그려냈다. 측량기사로 파견된 김해연이 이정희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그녀가 그에게 한 장의 편지를 남긴 채 자살하는데, 편지를 통해 이정희가 혁명조직의 일원이었음을 알게 되면서 시작된다.“정희가 내게 보낸 처음이자 마지막 서신. 그 한 장의 편지로 인해서 그때까지 아무런 문제도 없이 움직이던 내 삶은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졌다. 그때까지 내가 살고 있었고, 그게 진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계가 그처럼 간단하게 무너져 내릴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소설로 나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대학생 시절부터 이 이야기를 가슴에 담았던 작가는 1995년 장편소설 형태로 썼다가 민생단 자료들을 다시 읽고 계간지에 연재하면서 세상에 내놓았다. 그러나 연재를 끝난 뒤에도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사람들끼리 서로 죽이는 이야기를 내서 뭣하겠는가?”라는 회의가 생겨 뒤로 밀쳐놨다. 그러다 이번에 내놓은 것은 지난 봄 촛불시위 현장에서 본, 전경들 앞에서 대중가요에 맞춰 춤추던 대학생들 때문이었다고 한다. 대학생들이 춤추는 장면을 보면서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가 왔다는 사실에 학생시절의 공포를 떨쳐버리고 용기를 얻은 것이다.
 
민생단 논문을 쓴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박사논문을 쓰는 내내 이건 논문이 아니라 소설로 써야 한다는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며 “논문으로는 다 담을 길 없는 그 깊이 모를 혼돈과 암흑의 심연 속에서 벌어진 민생단 사건에 빠져든 인간들의 이야기를 김연수는 처음 끌어안았다.”고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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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뺀 사람 얘기 … 노선 관심 없어” (중앙, 이경희 기자, 2008.10.03 00:48)
민생단 다룬 소설 『밤은 노래한다』 펴낸 김연수씨
 
새로 쓴 결론은 마음에 드나. “마음에 든다. 개인의 삶은 불합리해 보이지만 인류 전체로 보면 무언가 이루어진다는 것, 진실은 내가 보아야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이 목격할 수도 있다는 결론이다.”
 
“옛날엔 전쟁이나 4·19를 쓰면 누구나 공감했지만 지금은 아니다. 학생 운동을 다룬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80년대 이후 생들은 전혀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 나라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라는데, 마치 ‘일제시대에 태어났으면 나도 독립운동을 했을까?’란 반문을 듣는 느낌이었다. 오직 하나 남은 공동의 관심사가 연애다. 연애는 호기심이나 말려드는 강도가 전쟁같은 재난에 가깝기 때문에 쉽게 소통된다. 연애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연애가 나한테 특별한 건 사실이지만.”
 
“난 노선엔 관심없다. 소설로 써서 기억하는 것까지만 내가 할 일이다. 가치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역사적 사건 안의 인물에 덧씌워진 ‘역사’를 빼고, ‘사람’으로 돌아가는 게 내 관심사다. 친구가 나를 죽인다면 어떻게 죽을 것인가, 우정이나 믿음이 뭔가가 내겐 훨씬 중요하다. 그건 역사와 관계없이 반복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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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조선 혁명가를 서로 죽이게 했나 (한겨레, 글 최재봉 문학전문기자, 2008-10-03 오후 10:09:43)
연인의 자살 전 편지 한통에 역사 격랑 빠져드는 청년…
1930년대 ‘민생단’ 사건 되짚어

 
소설은 김해연이 사랑하는 연인 이정희의 편지를 받는 것으로 문을 연다. 용정의 여자학교 음악선생인 정희는 해연의 거듭되는 편지와 구애에도 확실한 대답을 미루다가 마침내 처음으로 편지를 보내는데, 그것은 그가 자살을 앞두고 쓴 마지막 편지이기도 했다.
 
정희의 자살과 편지는 시인을 꿈꾸던 낭만적인 청년 해연을 삽시간에 역사의 격랑 속으로 밀어넣는다. 정희가 혁명 조직의 일원이었다는 사실을 해연은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야 알게 된다. 조사 과정에서 사토 경부는 해연에게 묻는다: “이정희도 너를 사랑했는가?” 의아해하는 해연에게 사토는 서류 한 장을 내민다. 그 서류는 해연에게 정희를 소개해 준 박길룡이 정희의 애인이라 말하고 있었다. 게다가 상처에 말뚝을 박듯 사토는 덧붙이지 않겠는가: “너는 분명히 운명 때문에 이정희를 사랑한 게 아니라 누군가의 치밀한 계획에 따라 이정희를 사랑하게 된 거야.”
 
정희의 죽음 이전에는 그토록 자명해 보였던 진실이 사토가 내민 서류를 보는 순간 한없이 흐릿하고 모호하게 바뀌고 만다. “그로부터 내가 알던 세계는 완전히 허물어졌고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의 이면을 똑똑하게 보게 됐다.”
 
 
» 〈밤은 노래한다〉
 
정희의 사인을 확인하는 과정은 양파 껍질을 벗기는 일과도 같다. 한 꺼풀을 벗겨 진실을 확인했다 싶으면 이내 그 이면의 또 다른 진실이 얼굴을 내민다. 그 과정에서, 정희가 학생 시절 함께 비밀 조직활동을 했던, 박길룡을 포함한 네 남자의 이야기가 드러난다. 하나같이 정희를 사랑했던 그 남자들은 연정과 질투가 혁명을 향한 노선 다툼과 구분할 수 없도록 뒤얽힌 가운데 서로에게 차례로 죽임을 당한다. 조선인 유격근거지에 들어가서 해연이 목격하고 연루된 민생단 사건은 그런 갈등의 정점을 이룬다. 여기에다가 정희가 정보 수집을 위해 일본군 장교 나카지마와 연인 관계로 지냈다는 사실까지 확인되면서 정희의 정체는 천사와 요부 사이를 격렬하게 널뛰기한다.
 
소설 말미에서 해연은 권총을 들고 정희의 옛 동료 출신으로 일본 영사관 경찰보조원으로 전향한 최도식을 찾아간다. 정희를 죽게 만든 자들에게 복수함으로써 일종의 ‘시적 정의’를 이루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종 퇴고 과정에서는 최도식의 어린 아들들을 목격한 해연이 복수를 포기하고 돌아 나오는 것으로 처리되었다. 이렇게 결말이 바뀐 데에는 지난 5월 말 촛불시위에 나가서 보았던 젊은이들의 발랄한 모습이 결정적인 구실을 했다. “당장 내 눈앞에서 정의가 이뤄지지 않아도 좋다. 이게 어제와 다른, 새로운 세계라면.”(‘작가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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촛불시위의 낙천적 젊은이들 보고 주인공이 복수하는 결말 수정했죠 (한국, 이왕구 기자, 2008/10/04 02:47:27)
"역사의 광풍에 명멸해간 청춘들 그리며 내 안의 상처 치유"
밤은 노래한다/김연수 지음/ 문학과 지성사 발행ㆍ348쪽ㆍ1만원

 
"그 시절의 진실에 대해서 나는 아는 바가 하나도 없다. 지금은 이 세계에 객관주의라는 것이 과연 존재할 수 있겠는가라는 의문도 든다" (212쪽)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그것은 "친구를 죽일 수 없는 아이의 세계에서, 친구라도 죽일 수 있는 논리를 받아들이게 되는 어른의 세계로 진입하는 과정"이다. 이 소설은 따라서 잘 짜인 역사소설이자 애틋한 연애소설, 그리고 인상적인 성장소설로도 읽힌다.
 
이 소설은 작가 김씨가 대학졸업 직후 잡지사 기자로 일하던 1995년 일본 학자 와다 하루키의 연구서에서 접한 '유격대원 출신이다. 민생단이라는 진술이 대단히 많다'라는 김일성에 관한 짧은 프로필 한 줄에서 잉태됐다. 그 한 줄의 섬광은 간도를 다룬 안수길 염상섭 등의 소설, 북한의 항일혁명사 소설 '불멸의 역사 시리즈' 에 대한 취재 등을 거쳐 그를 2004년 중국 옌지로 끌어들였다고 한다. 그의 9개월 간의 옌볜 체류는 시대의 광풍에 희생됐던 젊은이들의 사연을 다룬 이 소설로 결실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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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아이러니에 스러져간…‘밤은 노래한다’ (동아, 정양환 기자, 2008-10-04 03:00)
 
“그들은 정작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그건 당신도, 나도, 식민지에서 살아가는 그 누구도 마찬가지다. 나라를 빼앗기고 남의 땅에서 살아가는 한, 우리는 우리가 아닌 다른 존재를 꿈꿀 수밖에 없다. 주인만이, 자기 삶의 주인만이 지금 여기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꿈꾸지 않는다.”
 
지난해 동아일보가 선정한 ‘올해의 책’ 가운데 한 권으로 뽑혔던 장편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문학동네)의 작가 김연수. 1년 만에 출간한 ‘밤은 노래한다’는 출간 이전부터 올 하반기 최고의 기대작으로 꼽혀온 작품이다. 책장을 넘기는 순간, 그 기대는 기대를 뛰어넘는다.
 
소설의 배경은 1930년대 초반 북간도 항일유격 근거지에서 실제로 벌어진 ‘반민생단(反民生團) 투쟁’. 일본제국주의에 맞서 총칼을 든 혁명가 500여 명이 적도 아닌 동지들의 손에 죽어간 사건이다. 그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꺾인 청춘의 꽃 무덤 앞에 작가는 짙은 묘비명을 아로새긴다.
 
사랑이란 상처로 생의 의지마저 잃어버린 해연. 죽기를 맘먹었으나 그마저 여의치 않고, 후유증으로 말문이 막혀버린 그는 사진관 소녀 여옥을 통해 상처를 치유할 용기를 얻게 된다. 사랑을 사랑으로 치유하는 법을 배운 그들은 여옥 언니 결혼식에 참석하러 화룡현 촌락 유정촌으로 향하는데…. 그들을 기다리는 세계는 행복의 땅이 아니었다.
 
“캄캄했다. 그 무엇도 내 망막에는 맺히지 않았다. 검정이 검정을 직시할 수 없듯이 이 모든 암흑을 검은 눈동자는 바라볼 수 없기에 나는 어둠을 믿지 않았다. 그런 눈동자. 내 눈동자. 당신의 눈동자. 그리고 그들의 눈동자. 어둠을 믿을 수 없는 눈동자. 자신과 다른 것만을 알아볼 수 있는 눈동자. 바라보는 바를 믿어 의심치 않는 눈동자.”
 
‘밤은 노래한다’는 놀랍다. 작가 특유의 고고한 품위가 여전하면서도 편안하다. 사실 전작들에서 보여준, 무거운 침잠이 가득했던 작가의 문장은 한껏 매력적이면서도 그 체화(體化)가 수월치 않았다. 하지만 이번 소설은 훨씬 무거운 주제를 다룸에도 사뿐하다. 봇물처럼 드넓게 터져 오른 가을꽃 향취처럼.
 
무엇보다 이 소설은 작가가 계속해서 헤치고 보듬는 ‘경계’의 실연이 빼곡하다.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할 뿐 아니라, 양쪽 다 밟아야만 버틸 수 있는 삶. ‘반쯤 죽은 자들과 반쯤 살아 있는 자들이 함께 살아가는 세계.’ 어둠을 먹고 눈물을 품은 유목민들은 어디쯤에서 가쁜 숨을 고를는지. 작가는 여전히 그 사막 건너를 바라본다. 찢기는 혹은 시린 가슴 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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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0/08 23:02 2008/10/08 23:02

댓글1 Comments (+add yours?)

  1. 소요유 2008/11/02 01:42

    그대는 진정 은하계 최고 정리의 대마왕, 오지랖 대마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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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사소한 삼등성들이 이뤄내는 빛나는 별자리 -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 김연수, 2007 Tracked from 2008/10/13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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