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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문화도시 서울을 찾아서』(홍성태, 2005)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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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말에 홍성태 교수의 『생태문화도시 서울을 찾아서』(2005)를 가지고 전진 서울 남부지회에서 SOS를 진행했다. 이와 관련한 논의 및 책 내용을 정리하였다.
 
ㅇ 소유·사용권에 대해 논의하지 않으면 공간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 김종철 후보가 사회주택을 주장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다. - 각 지역별 사회주택 쿼터제 20%
  
ㅇ 지방선거에 대해 근본적으로 고민할 필요가 있다. "지방간 경쟁선거"에 대응하는 이데올로기를 개발해야 한다.
 
ㅇ 서울에 집중된 권력을 해체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지역연대선거?
- 지방 균형발전은 서울과 떨어진 문제가 아니다. 이를 위해 교육, 대학평준화의 문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수도권 규제와 관련하여 현 상태에서 쾌적하게 살아갈 것인가 vs 생태적으로 축소지향할 것인가
- 수도권 규제 완화에 반대하는 진보진영의 목소리를 꾸준하게 내야 한다. 이것은 생태문화도시와도 연관된다. 생태문화도시를 말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천을 통해 확산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ㅇ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뭉뚱그리지만 여전히 절대 다수의 서울시민에게 생활공간(자는 곳)-노동공간(일하는 곳)-여가공간(즐기는 곳)은 분리되어 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서울의 공간정책을 구성할 때, 지역주민운동을 할 때, 정치활동을 할 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 왜 분리되어 있는가?
- 주거(생활)-일-여가의 분리 양상은 소득수준에 의해서가 아니며, 나름대로 뒤섞여 있다. 강남에도 빈민은 존재한다는 것이다.
- 이러한 분리로 인해 3시간 이상 걸려서 출퇴근하는 것이 서울시민의 일반적인 삶이 되었다. 공간의 문제를 해결할 때 좀더 쾌적한 생활이 가능하다. → 토지, 주택의 사회화 등과 같은 구체적인 조치가 필요하다.
- 서울에서 지역주민운동이 제대로 안되는 이유를 여기에서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양상이 진보정당의 당원협의회의 운영에도 반영되어야 한다.
- 이제는 서울이 다른 지역보다 사회계층적으로 보수적인 성향을 보이고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
 
ㅇ 노인, 주부, 어린이, 자영업자 등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이들은 사는 곳이 어떻게 변할 것인가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것이다.
 
ㅇ 노동운동의 개입 방식은 어떠해야 하는가. 지역별 산별노조를 떠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ㅇ 사회계급좌파와 생태문화를 어떻게 결합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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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성태. 2005. 『생태문화도시 서울을 찾아서』. 현실문화연구.
 
기존에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모아서 책으로 만든 탓인지 보완을 하였다고 하지만 뭔가 미흡한 느낌이 드는 책이다. 그래도 서울의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의 입장을 갖게 되었으니 이 정도면 된 것일까.
 
진보진영이 서울을 장악하고자 한다면, 생태문화도시로서 서울을 전제로 하고 많은 것들을 보완해야 할 것 같다. 이것은 서울시민들의 의식을 바꾸는 문제이기도 하다. 특히 강남과 관련된 환상을 깨주는 것이 필요하다. 홍성태 교수는 강북의 강남화를 우려하고 있지만, 대다수는 이를 희망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서울에서 좌파는 집권할 수 있을까.
 
생태문화도시라는 대전제에 동의한다 하더라도 저자의 논의는 서울이라는 공간에 적용되는 계급갈등에는 소극적이다. 서울시의 계급문제를 간과하면서 이를 민족적인 문제로 치환하는 탈계급적 문제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강남북으로 대변되는 극심한 지역분리의 논리가 어떻게 생태-문화라는 개념만으로 해결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또한 저자는 아파트와 같은 주거가 아닌 투자가 목적인 단위가 서울의 공간을 채워나가는 상황에 대한 분석과 대안에는 소극적이다.
 
사고가 났을 때는 분노했으면서도 이를 서울시정 및 정부의 전반적인 정책의 맥락 속에서 읽지 못했던 성수대교 붕괴사고나 삼풍백화점 붕괴사건에 대해 다시 검토하게 된 것은 뜻밖의 수확이다.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이라는 두 사례가 책에 포함된 것은 장석원 동지의 언급처럼 단지 대표적 참사이기 때문이 아니라 ‘군사적 성장주의’가 초래한 폭압적 근대화가 공공역역 뿐만 아니라 민간영역으로 확대 적용됐음을 보여주고자 했기 때문일 터이다.
 
청계천복원사업은 한 부를 할애해서 분석하고 있다. 생태문화도시 재생의 중심이 되어야 할 청계천 복원사업이 어떻게 현실의 힘에 휘둘리면서 변질되어 갔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005년도에 발간되어서인지 그 뒤의 논의를 훑어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실제 이에 대해서는 행정학계 쪽에서도 많은 논문이 나왔는데, 다들 저항을 물리치면서 민간의 합의를 이끌어내어 복원사업을 성공시킨 이명박 시장의 리더십과 당시 서울시의 거버넌스를 분석하는데 초점이 가있다. 홍성태 교수가 이런 글을 쓴 줄 알았더라면 시민위를 중심으로 위원회의 기능 및 역할, 구성방식, 운영내용, 한계 등을 살펴보는 글을 쓸 수 있었을 것 같다, 갈등해소에 초점을 맞춘 글들이 있긴 하지만 말이다. 지금이라도 다시한번 검토해볼까나. 위원회제도는 앞으로도 내 주요 연구대상이라 할 만하다.
 
청계천 복원과 관련한 사업은 민주노동당 서울시당의 주요사업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내 기억에 시당은 의미있는 역할을 하지 못했고, 이 책에서도 분석대상에서 제외되어 있다. 시당에서 나서서 청계천 복원 사업 반대의 논리를 당원들에게 교육시키고 당원들을 저항의 주체로 만들지 못한 채 시당지도부의 연대사업으로 축소시켰던 것이 오류의 한 지점이다. 나아가 ‘청계천 복원은 안된다’라는 논리가 오히려 서울시민들에게 ‘청계천’ 이슈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효과를 가져와서 결국 한나라당이 선점한 프레임에 말려드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진보정당이 나서서 대안적인 프레임을 적극 설파했어야 했는데, 이것이 부족했다는 것도 평가할 지점이다. 당시 청계천복원의 모순과 오류들에 대해 대중적으로 저항하고 대안담론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면, 이명박 시장은 가능했어도 이명박 정권은 성립되지 않았을 것이다(박근혜 정권이 되었으려나). 대운하 사업 또한 지금과 같은 파장을 일으키지 않았을 테고. 2006년 서울시장 선거에서도 ‘생태문화’를 선점한 것은 강금실 후보였고, 민주노동당의 김종철 후보는 담론을 전혀 주도하지 못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 공사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2000년대 초반만 하더라도 서울대학교와 함께 이에 반대하는 투쟁을 NGO들이 나름 조직적으로 펼쳤는데, 지금은 그러한 움직임이 전혀 보이지도 않는다. 그냥 이대로 용인하는 것일까. 자연을 파괴하면서 진행되는 강남순환도시고속도로의 문제를 재론할 필요가 있다.

 

○ 서울은 지난 100년 동안 제 모습을 잃고 말았다. 1차는 일제의 풍수침략이었다. 일제는 근대화를 내세워 서울을 구조적으로 파괴했다. 2차는 박정희의 ‘조국근대화’였다. 박정희는 근대화를 내세워 서울을 더욱더 크게 파괴했다.
3차는 이명박의 ‘신개발주의’다. 이명박은 박정희의 폐해를 바로 잡겠다고 호언했다. 그러나 청계천복원사업의 예에서 잘 알 수 있듯이, 이명박은 박정희의 폐해를 제대로 바로잡지 않았다. 이명박의 신개발주의는 생태적이고 문화적인 가치로 포장한 개발주의일 뿐이다. 이명박의 신개발주의는 박정희의 구개발주의보다 더욱 거대한 개발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한층 더 위험한 개발주의다(홍성태. 2005: 9-10).
 
○ 생태문화사회를 위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회와 공간을 분리해서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버리는 일이다. 좋은 공간은 좋은 사회의 필수조건이다. 사회란 관계적 실체이며 공간적 실체이다. 전자가 사람과 사람이 맺는 관계를 뜻한다면, 후자는 사람이 자연을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런 점에서 생태문화사회는 사회의 필수조건이자 그 실체이기도 한 공간의 생태문화적 전환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홍성태. 2005: 10).
 
○ 서울의 생태문화적 전환을 가로막는 가장 큰 적은 지주와 투기꾼과 개발업자의 3대 파괴세력이다. 이들은 투기이익과 개발이익이라는 막대한 불로소득을 챙기기 위해 난개발을 부추기고 토지공개념으로 대표되는 선진국의 부동산정책에 극력 반대한다. 이러한 3대 파괴세력을 엄호하는 양대 보조세력이 바로 정치인과 공무원이다(홍성태. 2005: 11).
 
1부 근대화와 서울
 
○ 서울은 지난 100년 사이에 급격한 ‘퇴락’을 경험하였다. 서울의 ‘퇴락’은 600년의 역사와 어울리지 않는 이상스러운 것들이 도심에 가득 들어차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대표적인 예로는 일제가 지은 조선총독부와 경성부, 박정희가 지은 세운상가와 청계고가도로를 들 수 있다. 일제와 박정희 통치의 유사성, 아니 일제의 자식으로서 박정희의 면모를 여기서 잘 살펴볼 수 있다. 이 건물들과 구조물은 모두 커다란 몸집으로 위세를 과시하는, 즉 그 기능에 앞서 정치적 선전물의 성격을 크게 갖는다. 차이가 있다면, 그 아비는 천년만면 통치할 욕심에 아주 튼튼하고 미적 형식을 갖추어 건물을 지은 반면에, 그 자식은 취약한 정치적 정당성을 보완할 필요에 쫓겨 튼튼하지 않고 볼품은 더더욱 없는 건물과 구조물을 세웠다는 것이다.
 
일제에서 시작된 ‘파괴적 개발’로서 한국의 근대화는 박정희에 의해 한층 더 강력하게 추진되었다. 그는 일제의 군사학교에서 배운 ‘하면 된다’는 군사주의 정신으로 이런 식의 근대화를 밀어붙였다. 자신의 능력과 의도를 믿지 않는 국민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 박정희는 사람들의 눈에 금방 띄는 거대한 건물과 구조물을 여기저기에 열심히 그리고 바쁘게 세웠다. ‘군사적 성장주의’란 이처럼 일제의 군사주의를 바탕으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는 박정희식 근대화 노선을 가리킨다.
 
박정희는 끊임없이 대규모 공사를 벌임으로써 많은 사람들을 자신이 지배하는 거대한 ‘공모관계’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었다. 그러나 ‘군사적 성장주의’는 박정희로 대표되는 그 ‘공모관계’의 이익을 위해 엄청난 사회적 대가를 요구했다.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는 가운데 한없이 커진 공간적 위험이 이러한 사실을 잘 보여 준다. 이렇게 위험이 커진 것을 극단적인 방식으로 보여 준 것이 바로 ‘성수대교 붕괴사건’이었다(홍성태. 2005: 47-48).
 
‘고도위험체계’나 ‘위험사회’에 대한 사회학적 논의들이 잘 보여 주듯이, 현대사회는 거대한 위험을 구조적으로 생산하는 동시에 그러한 위험에 의존하여 존속하는 사회다(Perrow, 1999; Beck, 1992; 홍성태, 2000). 우리가 지금과 같은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는 한, 군사적 성장주의를 통해 굳어진 부패와 부실의 먹이사슬을 끊지 않는 한, 우리는 언제나 재앙적인 사고와 맞닥뜨릴 가능성을 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
 
오늘날과 같은 ‘위험사회’의 상황에서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하는 구실을 제대로 하려면, 마치 야누스처럼 생산력인 동시에 살상력인 기술을 이용ㆍ관리하는 제도를 꼼꼼하게 수립하고 철저하게 운영해야 한다. 우리의 경우는 그런 제도 자체가 아직도 여러모로 갖추어져 있지 않고, 갖추고 있더라도 극히 심각한 부패와 부실의 먹이사슬 속에서 형식적으로 운영되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만일 ‘한국적’인 것이 있다면, 그것은 좀 더 문화적인 것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근 100년에 걸쳐 진행된 일제와 전쟁과 독재의 억압사ㆍ파괴사가 우리의 세계관과 심성에 미친 역사적ㆍ문화적 영향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뒤틀어진 역사는 우리로 하여금 결코 정상이라 할 수 없는 것을 정상으로 받아들이고 살아가도록 만들었다. 대표적인 예로 ‘군사적 성장주의’가 조장한 ‘파괴적 개발’과 ‘외형적 실적주의’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를 들 수 있다(홍성태. 2005: 55-56).
 
○ 성수대교 붕괴사건을 통해 다리는 놓는 것만큼이나 지속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비로소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잘못을 잘못으로 여기지 않는 잘못된 정치를 개혁하는 데까지 나아가지 못했다는 점에 주의해야 한다. 제도의 개혁도 필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를 갖추고 있더라도 제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면, 성수대교의 붕괴와 같은 사고는 얼마든지 다시 일어날 수 있다(홍성태. 2005: 58).
 
○ ‘군사적 성장주의’도 하나의 사회체계로 작동하면서 거대한 ‘사회적 공모관계’를 형성해 놓았다. 만일 ‘군사적 성장주의’나 ‘폭압적 근대화’가 순수하게 폭력에만 의존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완전히 무너져 흔적조차 찾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여전히 현재적 문제일 정도로 강고한 위력을 발휘하는 까닭은, 박정희의 통치 아래에서 형성된 거대한 ‘사회적 공모관계’가 여전히 강고한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이다(홍성태. 2005: 64).
 
‘군사적 성장주의’는 일찍이 박정희가 일본의 군사학교에서 온몸으로 익힌 군국주의적 정신을 바탕으로 외형적 결과를 가장 중요한 목표로 추구한 개발방식을 뜻한다. 이 점에서 군사적 성장주의에 바탕을 둔 개발은 자연과 사회를 체계적으로 파괴하는 ‘파괴적 개발’일 수밖에 없으며, 이런 식의 개발로 이루어지는 근대화는 결국 ‘폭압적 근대화’일 수밖에 없다(홍성태, 2000: 55-57, 249-253). 
 
○ 1990년대에 발생한 대형사고들은 사고와 위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크게 바꾸어놓았다. 사고는 더 이상 우연한 일이 아니라 체계적이고 정상적인 것(Perrow, 1986: 147)이라는 사회이론이 널리 받아들여지게 되었다(홍성태. 2005: 74). 
 
자본의 탐욕, 관의 부패, 전문논리로 치장한 확률적 예방론은 삼풍백화점 붕괴의 3대 원인이다. 그리고 ‘폭압적 근대화’는 이 3자를 하나로 결합하여 ‘사고공화국’을 세우고 지탱하는 과정이었다(홍성태. 2005: 75). 
 
○ 부실 ‘공사’만이 아니라 각종 관리체계들도 거대한 사회적 부실체계를 형성하고 있다. ‘부실’은 실수나 무지의 산물이 아니라 정상적인 사회체계의 일부가 되었다. 그것은 근대적 지식을 통해 합리화하기도 하고(전문지식을 동원한 설명과 해명), 경제적 목표로서 공공연히 추구되기도 하며(비용을 줄이고 매장을 넓히라는 요구), 최종적으로 정치적 기제를 통해 정당화한다(구청이나 시청의 승인). 부실은 위험이나 사고와 마찬가지로 근대화 과정에서 체계화하고 정상화하며, 정치적 부패의 정도에 따라 상당히 다른 양태를 보이게 된다(홍성태. 2005: 95-96).
 
○ 삼풍백화점의 붕괴는 돈을 벌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개발지상주의적 근대화의 붕괴’를 상징한다. 개발지상주의가 군부의 강권에 기초한 폭압적 근대화의 경제적 핵심이라는 점에서 개발지상주의의 붕괴는 ‘폭압적 근대화의 붕괴’를 상징한다(홍성태. 2005: 107).
 
유가족들의 悲怨과 자원자들의 희생정신이야말로 뇌물을 매개로 형성된 부패와 부실의 먹이사슬을 매장하고 공공영역을 새롭게 구축할 수 있는 동력이었다. 안전하고 쾌적한 삶에 대한 시민의 갈망과 참여야말로 위험도시 서울을 안전도시 서울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힘이다. 그러나 이와 함께 안전문제에 관한 노동운동의 적극적인 참여도 이루어져야 한다. 현장의 문제를 가장 잘 알고 있는 노동자들이 적극 나설 때, 안전도시를 이룰 수 있는 길은 더욱 넓게 열릴 것이다(홍성태. 2005: 108-09).
 
2부 문화도시 서울의 구상
 
○ 1996년 발표된 ≪2011년 도시기본계획≫에서는 ‘서울의 미래상’을 ‘인간 중심의 살고 싶은 도시’로 정하고, ‘7대 실현목표’를 제시했는데, 그 다섯째 목표가 바로 ‘살맛 나는 문화도시’였다. 요컨대 ‘문화도시’를 서울시가 2011년까지 이루어야 할 ‘7대 실현목표’의 하나로 정했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서울시의 공간정책은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문화정책의 성격을 적극 추구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부문별 계획에서 서울시의 공간정책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였다. 11개 절로 이루어진 ‘부문별 계획’에는 문화정책이 아예 독립항목으로 들어가 있지도 않았다.
결국 ‘살고 싶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목표로 ‘문화도시’를 제시한 것은 사실상 그저 듣기 좋은 소리를 늘어놓은 것일 뿐이었다(홍성태. 2005: 118). 
 
○ 문화도시는 다양성과 창조성이라는 점에서 문화적 특징을 가진 공간이면서, 사람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인 문화를 즐기고 일상을 이어가는 공간이다. 공간의 문화적 전환은 그 자체로 문화도시의 공간적 특징을 만들어내는 것이면서, 활발한 문화생활이 일어날 수 있는 물리적 기초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의 경우에 개발은 그 자연과 역사의 파괴를 뜻했다. 따라서 이곳에서 공간의 문화적 전환은 우선 파괴된 자연과 역사의 회복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져야 한다(홍성태, 2004; 홍성태, 2005: 121).
 
○ 녹지체계의 파괴라는 점에서 보자면, 서울은 문화도시를 논하기 이전에 현대적 도시의 요건마저 갖추지 못했다고 할 수 있다. 본래 서울은 8개 산(내사산과 외사산)과 2개 물줄기(청계천과 한강)에 바탕을 두고 이루어진 ‘생태도시’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러한 면모가 크게 훼손되기 시작했으며, 박정희 정권의 파괴적 개발의 시대를 지나며 더욱 큰 상처를 입었다. ‘문화도시’의 중요한 바탕은 도시에서 자연을 느끼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자연이 형편없이 망가진 도시를 ‘문화도시’라 할 수는 없다. 생태계의 복구는 서울이 ‘문화도시’로 발전하기 위한 불가결한 바탕이다(홍성태, 2000). 생태적으로 건강하지 않은 도시는 결코 문화도시가 될 수 없다(홍성태. 2005: 156).
 
○ 2000년대 초에 서울시가 추진한 ‘4대문안 역사문화탐방로 조성계획’은 ‘역사문화’를 돌아보기보다는 ‘시민들에게 걷고싶은 거리’를, ‘외국인들에게 찾고 싶은 거리’를 제공하기 위한 것으로 추진되었다. 요컨대 서울의 역사성을 회복하기 위한 사업이 아니라 역사적 자산을 이용한 ‘관광사업’의 성격이 더 강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광사업’의 근본적 문제점은 그 자체가 서울의 역사에 대한 또 다른 파괴일 수 있다는 사실에 있다. 
 
역사성의 회복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단순히 물리적 복원에 그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역사성의 회복은 역사를 현재의 맥락 속에서 살아 숨 쉬게 하는 ‘유기적 복원’이 되어야 한다. 그 요체는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고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데에 있다. 복원된 공간과 장소와 건물은 멀리서 감상하는 ‘골동품’이 아니라 직접 만지고 느낄 수 있는 ‘생동품’이 되어야 한다(홍성태. 2005: 126-28).
 
○ 서울이 ‘문화도시’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역사를 되살릴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난개발을 막는 것이다. 이런 바탕 위에서 도심의 역사를 살릴 수 있는 사업들을 기획하고 추진할 필요가 있다(홍성태. 2005: 161-66).
 
서울 도심의 문화적 재생을 위한 가장 근본적인 과제는 공공재인 공간을 사적 이윤을 위해 멋대로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이다. 도심처럼 접근성이 높은 곳, 따라서 공적 가치가 높은 곳은 누구나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한다. 
 
○ 국민의 세금으로 지어지고 운영되는 거대한 국립 문화시설들은 무엇보다 국민들이 일상적으로 수준 높은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나아가 이 시설들은 국민의 세금을 이용해서 전체 국민들에게 거대하고 장기적인 문화적 투자를 하는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우리의 국립 문화시설들은 대체로 찾아가기가 어려운 곳에 있다. 이 때문에 근대 국민국가의 문화적 기반으로 제 구실을 하기 어렵다. 이에 비해 서울시립미술관, 서울시립역사박물관, 세종문화회관의 입지는 두드러진다.
 
이른바 ‘선진국’의 국립 문화시설들은 찾아가기 편리한 곳에 있으며, 이 때문에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찾고 놀고 배우는 곳으로 이용되고 있다. 이에 비해 서울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곳은 예외 없이 정치적 공간이 아니면 경제적 공간이다. 이런 도시 구조가 말해 주는 것은 바로 정치와 경제가 이 나라를 지배해왔다는 것이며, 시민은 정치와 경제의 주체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유럽에서 시청 앞 광장은 곧 시민의 광장이기도 하지만, 서울의 시청 앞은 자동차의 광장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찾을 수 있는 공간을 모두 시민들이 자유롭게 즐기고 배울 수 있는 공공 문화시설들이 들어선 문화적 공간으로 바꾸어야 한다. 특히 중요한 것은 생활 문화시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지식기반인 ‘지역도서관’을 크게 늘리고 실질화하는 것이다(홍성태. 2005: 129-31). 
  
○ 서울에는 아주 많은 상업공간이 있다. 업종의 차이를 떠나서 이 상가들을 구분하는 한 가지 유용한 방식은 재래식과 현대식으로 나누어보는 것이다. 재래식이 보기에 지저분하다면 현대식은 보기에 깨끗하다. 나아가 재래식 상가가 상거래만을 위한 공간이라면, 현대식 상가는 문화적 공간의 성격을 함께 띠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대형 백화점들은 서울에서 ‘지역문화의 첨병’ 노릇을 톡톡히 하고 있다. 그곳에서 상품문화와 생활문화는 거의 완벽하게 하나로 융합된다. 이에 비하자면 공공 문화시설은 물리적 시설이나 접근성이나 운영의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 이것은 문화시설의 확충 및 운영과 직접적으로 연관되는 문제다. 그러나 백화점의 문화적 공간은 백화점이라는 상품문화의 공간에 의해 지배된다는 큰 문제를 안고 있다(강내희, 1995).
 
서울의 상업공간은 수많은 시민들이 일상적으로 이용하는 가장 대중적인 공간임에도, 문화적 의미나 가치를 제대로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 그 공간은 상업적 목적에 지배되어 잠시 쉴 여유조차 가질 수 없는 공간이기 십상이다(홍성태. 2005: 137-38).
 
○ 우리의 삶이 다양한 형태와 내용으로 이루어지는 만큼 우리 주위에는 다양한 형태와 내용을 갖춘 삶의 공간이 있게 마련이다. 이런 공간들이 재개발의 이름으로 어떤 자취도 남기지 않고 고스란히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문화도시 서울’을 위해 큰 문제이다(홍성태. 2005: 141). 
 
○ 오늘날 서울은 세계에서 자연이 가장 엉망으로 망가진 도시에 속하며, 오랜 역사는 기껏 고궁에서나 박제화한 형태로 감상할 수 있으며, 곳곳에 전깃줄이 뒤엉켜 있는 전봇대와 전깃줄 도시이며, 육교와 지하도가 보행자를 괴롭히는 자동차 도시이며, 아무 곳에나 아파트가 불쑥불쑥 솟아올라 있는 난개발 도시이다(홍성태, 2004).
 
○ 서울이 급속도로 메갈로폴리스가 된 것은 그만큼 한국의 근대화가 중앙집중적으로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며, 그만큼 한국의 근대화가 분산과 자율에 바탕을 둔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서울은 과밀문제로 시달리고 있으며, 그 반대편에서 다른 지역은 과소문제로 시달리고 있다(홍성태. 2005: 150). 
  
3부 청계천의 좌절과 희망
 
○ 박정희가 이룩한 ‘복개의 문화’는 자연과 역사를 없애는 ‘파괴의 문화’였다. 청계천의 복원은 엉망으로 망가진 역사와 문화를 되살려 서울을 훨씬 아름답고 살기좋은 곳으로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파괴의 문화’를 ‘보존의 문화’로, 나아가 자연이 살아 있는 ‘생명의 문화’로 바꾸어놓으려는 시도여야 한다(홍성태. 2005: 197).
 
○ 청계천 복원공사가 시작되고 1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복원사업은 ‘신개발주의’의 상징이 되었다(강홍빈, 2004). 신개발주의는 이를테면 ‘소비사회의 개발주의’라고 할 수 있다. 겉보기에 신개발주의는 구개발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성장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점에서 구개발주의와 다르지 않다. 다른 것은 성장주의가 요구하는 성장의 명령을 실현하는 방식일 뿐이다. 구개발주의가 자연과 역사를 노골적으로 파괴하는 방식으로 성장을 추구했다면, 신개발주의는 자연과 역사의 가치를 존중하는 것처럼 하면서 파괴적 성장을 추구한다(조명래, 2003).
 
신개발주의와 구개발주의는 모든 것을 경제적 가치에 복종시킨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아무런 차이가 없다. 그러나 파괴의 규모 면에서 신개발주의는 구개발주의보다 훨씬 더 무섭다. 청계고가도로는 없앨 수 있지만, 세운상가도 없앨 수 있지만, 새로 들어설 초고층 건물들은 없앨 수 없다(홍성태. 2005: 255).
 
‘신개발주의’란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을 내걸고 펼쳐지는 개발주의를 뜻한다. 그 핵심에는 종래에 일방적으로 무시되고 파괴되어 온 자연과 역사의 복원이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신개발주의는 개발주의의 한 유형일 뿐이다. 자연과 역사의 복원을 내걸고 더욱더 극심한 자연과 역사의 파괴를 저지른 청계천복원사업은 그 대표적 예다. 개발주의가 신개발주의로 모습을 바꾼 것은, 종래의 개발주의가 더 이상 지탱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 주지만, 개발주의가 여전히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도 한다.
 
다른 모든 것과 마찬가지로 개발주의도 시대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꾼다. 개발독재시대에 그것은 자연과 역사를 직접적으로 파괴하고 공간의 경제적 가치를 최대화하는 방식으로 나타났지만, 경제성장이 이루어진 뒤에는 우선 자연과 역사를 적극 활용하는 방식으로 변모했으며, 이어 개발독재를 통해 파괴된 자연과 역사를 복원한다는 방식으로 변모했다(홍성태. 2005: 264). 
 
신개발주의는 이명박 시장의 등장과 함께 나타난 것이 아니라 사실 경제성장에 따라 개발주의가 모습을 바꾼 것이다. 개발주의는 어떤 고정된 형태로 존재하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그 모습을 바꾸는 것이다. 따라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개발주의의 문제를 올바로 인식하는 것이며, 그 개혁을 위해 우리의 경제구조와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개발주의에 관한 이러한 역사적 인식은 ‘생태적 전환’의 과제를 추구하기 위한 출발점이 된다(홍성태. 2005: 267).
 
개발주의가 계속 모습을 바꾸면서 지속되는 까닭은 그것이 다수의 삶과 깊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개발주의는 소수 지배세력의 지배방식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일상적 생활방식이기도 하다. 따라서 개발주의에 맞서는 것은 다수의 일상적 생활방식에 맞서는 것이기도 하다.
근대화 이후에는 다수의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통해 개발주의가 자동적으로 재생산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여기서 실제로 큰 이득을 보는 사람들은 소수 지배세력이다. 따라서 개발주의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개발주의의 대중화와 그 실제 이득 사이의 틈을 가능한 크게 벌려야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다수의 일상생활을 바꾸는 과제이기 때문에 사실은 이루기가 대단히 어렵다. ‘박정희교’로 나타나는 파괴적 개발의 기득권구조를 해체하는 것이야말로 신개발주의를 넘어서 생태적 전환으로 나아가기 위한 근원적 과제이다(홍성태. 2005: 267-68).
 
○ 청계천복원사업의 의사결정방식은 ‘삼각체계’로 사업의 내용을 정하고 추진한다는 것이었다. 삼각체계란 청계천복원추진본부,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청계천복원연구지원단의 세 주체가 힘을 모아 청계천복원사업을 추진한다는 것을 뜻한다. 여기서 핵심은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이다. 시민위가 의사결정을 하면 청계천복원연구지원단이 협조를 받아 추진본부에서 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다른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서울시는 이 위원회를 그저 방패막이와 들러리로 활용했을 뿐이었다(홍성태, 2004b). 
 
이 기능은 올바른 청계천복원사업이 이루어지도록 관련 정책을 심의ㆍ평가하는 것과, 시민들에게 청계천복원사업을 잘 알려서 갈등이 빚어지는 것을 가능한 한 줄이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명박 시장은 시민위를 사실상 ‘방패막이’로 이용하려 했을 뿐이다. 시민위가 지적한 문제를 제대로 고치지 않은 채 실시설계를 제출하고, 시민위가 실시설계의 수용거부를 공식적으로 밝혔는데도 ‘복원공사’를 하고 있는 것이 그 좋은 예이다(홍성태. 2005: 230).
 
서울시는 시민위의 의미를 크게 강조했다. 복원사업에 대한 우려가 컸던 만큼 시민위가 해야 할 일이 분명히 컸기 때문이다. 시민위가 올바른 청계천복원사업을 이끌고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시민위원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이루어져야 했다. 그러나 사실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일반적인 위원회와 마찬가지로 시민위의 경우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시민위원의 수는 제한되어 있었다. 그러나 모든 회의에 서울시나 시정연의 당연직 위원들은 당연히 정규적으로 참여했다. 시민위원들은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지만, 당연직 위원들은 꼭 해야 하는 업무로 시민위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당연직 위원들이, 즉 서울시가 자기 뜻대로 시민위를 끌고 갈 가능성은 대단히 컸다. 여기에 덧붙여서 시민위원들의 상당수는 용역이나 다른 위원회를 매개로 오래 전부터 서울시와 대단히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서울시는 애초부터 충분히 조작할 수 있도록 시민위를 구성했던 것이다(홍성태. 2005: 247-48).
 
서울시의 놀라운 효율성은 시장을 위한 것이지 시민을 위한 것은 아니다. 이 사실을 시민위의 운영은 잘 보여 주었다. 시민위의 모든 회의는 시민 앞에 철저히 공개되어 그 잘잘못을 평가받으며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해야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그저 이명박 시장과 양윤재 본부장의 구상에 따라 진행되었을 뿐이었다. 이 과정에서 시민위는 철저히 농락당하고 말았다(홍성태. 2005: 255).
 
○ 청계천 자체에 국한해서 보자면, 청계천복원사업은 무엇보다 청계천이라는 역사유적을 파괴하는 사업이다. 이를 접어두고 보자면, 이명박 시장의 청계천복원사업은 역사유적과 자연생태의 복원을 내세운 도심하천개발사업이다. 이명박 시장은 청계천이라는 역사유적을 없애고 그 자리에 현대식 도심하천공원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무지막지한 시멘트 옹벽으로 수로를 만들고 그 안에 인공둔치를 만들어 걸어다닐 수 있게 하고 알록달록한 다리를 놓아 건너다니게 하는 것이다(홍성태. 2005: 251). 
 
4부 생태문화도시 서울을 찾아서
 
○ 서울시는 ‘뉴타운’을 ‘고품질의 복지주거환경공간’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청계천복원사업’이 복원을 내걸고 자연과 역사를 파괴하는 사업인 것처럼, ‘뉴타운사업’은 ‘뉴타운’을 내걸고 전면적이고 대대적으로 아파트 건설사업을 벌이는 것일 뿐이다(홍성태. 2005: 272).
 
이명박 시장의 ‘뉴타운사업’은 ‘21세기판 새마을운동’ 또는 ‘이명박식 새마을운동’이다. 새마을 운동은 철저히 반민주적 사업이었고, 우리의 자연과 문화를 대대적으로 파괴한 사업이었다. 새마을 운동을 통해 우리는 수천 년간 이어져 온 우리 문화에 관한 자부심을 잃게 되었고, 자연의 파괴를 당연하고도 올바른 것으로 여기게 되었다. 뉴타운사업은 박정희식 파괴적 개발에서 별로 벗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명박 시장에게 이 사업은 서울의 전 지역을 대상으로 하는 ‘거대한 선심행정’이다(홍성태. 2005: 274).
 
○ 공간정책으로서 재개발정책은 무엇보다 공간의 특성을 올바로 이해하고 공간정책의 복합성을 구현할 수 있어야 한다. ‘더 많은 개발과 성장’은 공간정책을 경제정책으로 여기는 것이며, 그것도 ‘공간의 상품화’에 중점을 둔 잘못된 경제정책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런 공간정책은 불평등의 심화, 자연과 문화의 파괴를 낳을 수밖에 없다.
 
서울시의 공간정책 면에서 이명박 시장의 가장 중요한 시정목표는 ‘강북의 강남화’로 줄일 수 있다. 이는 강북의 자연과 문화를 거대한 시멘트 덩어리와 아스팔트로 없애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강북의 강남화’란 강남보다 훨씬 다양한 강북의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며, 강남보다 훨씬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는 강북의 문화를 파괴하는 것이며, 강북을 강남에 못지 않은 불평등한 공간으로 바꾸어놓는 것이다(홍성태. 2005: 277-78).
 
○ 공간정책의 면에서 서울시정은 공간의 물리적 특성을 살릴 수 있는 복합적 정책이 되어야 한다. 특히 경제정책은 ‘공간의 상품화’가 아니라 오히려 공간의 상품화를 적절히 규제하는 정책이 되어야 한다. 올바른 공간정책은 ‘공간의 상품화’를 막고, 나아가 지주와 투기꾼과 건설업체와 정치꾼이 결탁해서 이루어진 ‘난개발의 신성동맹’을 해체하는 것이어야 한다.
 
이렇게 잘못된 서울시 시정을 바꾸기 위해 서울시와 서울시의회를 바꾸려는 정치적 노력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결국은 시민의 참여에서 희망을 찾아야 하는데,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서울의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결코 서울을 수단으로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서울의 개혁 자체를 ‘일생의 과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서울시와 서울시의회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운동을 펼쳐야 한다.
 
시민사회에서 더욱 일상적으로 펼쳐야 하는 네 가지 운동이 있다. 첫째, 서울시의 각종 위원회를 개혁하는 것이다. 서울시에서는 110개가 넘는 위원회를 운영하고 있는데, 모든 위원회가 사실은 ‘들러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사실 민주화의 영향으로 이제는 각종 위원회에 많은 개혁적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이런 개혁적 인사들이 만나서 의견을 교환하고 목표를 공유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단지 위원회에 참석해서 발언하는 것을 넘어서 위원회의 문제를 고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실천한다면, ‘들러리 위원회’ 제도 자체를 크게 개혁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들러리 위원회’를 매개로 이루어지는 ‘娼婦형 전문가’와 서울시의 끈끈한 유착관계를 혁파하는 것도 포함된다.
 
둘째, 서울시 시정을 감시하고 개혁하기 위한 시민운동을 더욱 활발히 펼친다. 지금도 서울시 시정을 바로잡는 활동을 활발히 펼치는 단체들이 적지 않지만, 시정의 감시와 개혁에만 몰두하는 단체는 대단히 드물다. 그 방식도 성명서를 발표하거나 토론회를 여는 수준을 넘어서야 한다. 우선 서울시 고위 공무원과 시의원들의 행적에 관한 자료를 폭넓게 축적하고 일상적으로 감시해야 하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시의회가 시정부와 유착하지 않고 본연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도록 하는 것이다. 문제가 있을 때에는 매체를 통한 여론전이나 집회와 같은 직접행동뿐만 아니라 형사고발, 행정소송, 감사청구 등의 모든 법적 수단을 동원해서 철저히 대응해야 한다.
 
셋째, 서울시 시정과 관련된 언론보도를 일상적으로 감시하고 평가해야 한다. 이명박 시장을 강력하게 지원하는 매체들이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계적 균형론에 빠져서 서울시의 변명을 ‘사실’로 다루는 언론보도도 볼 수 있는데, 이는 서울시에게 면죄부를 주기 때문에 심각한 문제를 낳게 된다.
 
넷째, 이 모든 것에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는 문제는 예산과 관련된 것이다. 사실 문제의 핵심은 아주 교활하고 능란하게 책정해서 집행하는 ‘정치적 예산’이다. ‘정치적 예산’이란 정치적 지배세력의 정치적 야욕을 위해 세금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것을 뜻한다. ‘들러리 위원회’에 사용되는 경비나 각종 개발사업과 관련된 예산이 이러한 ‘정치적 예산’의 성격을 강하게 가진다. 무엇보다 그 규모가 엄청나기 때문에 각종 개발사업과 관련된 예산의 책정과 집행을 꼼꼼히 감시해야 한다(홍성태. 2005: 281-84). 
 
○ ‘좋은 도시’가 이룩되기 위해서는 다음의 네 가지 요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도시의 역사가 존중되어야  하고, 다양한 문화가 자라날 수 있어야 하며, 시민이 주체가 되어야 하고, 훼손된 자연이 되살아나야 한다. 도시와 자연의 대립 위에 건설된 메트로폴리스는 근대의 산업문명이 이룩한 거대한 시멘트 사막이다. 자연과 조화를 이룬 ‘생태도시’는 좋은 도시를 만들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요건이다(홍성태. 2005: 319-20).
 
○ 현대의 도시는 생물이 살 수 없도록 만들어진 도시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다. 아니 생물이 살지 못하도록 만든 ‘반생태적 공간’의 성격을 강하게 갖고 있다. 이로부터 현대 도시는 본질적으로 ‘기생도시’와 ‘위험도시’의 성격을 강화하게 된다(홍성태, 2000).
 
위험도시란 기생성의 다른 면이라 할 수 있다. 물질적 풍요를 만끽하는 곳처럼 보이는 현대의 도시는 여러 구조적 위험을 안고 있다. 이런 위험은 현대 도시의 생태적 취약성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서울의 경우를 보자면, 엄청난 양의 전기와 물을 필요로 하면서도 정작 스스로 생산하는 전기와 물은 거의 없다. 또한 엄청난 양의 쓰레기를 배출하면서도 정작 그 쓰레기를 스르로 처리할 수 있는 시설과 장소를 거의 가지고 있지 않다. 더욱이 더러운 배기가스와 미세먼지로 가득 차 있기도 하다. 생태적 취약성은 자정능력의 취약성이기도 하다.
 
현대 도시의 풍요는 다른 지역의 착취를 통해 유지된다. 자원의 한계라는 점에서 보자면, 현대 도시의 생태적 전환은 너무도 시급한 과제다. 현대 도시에서 계속 사람이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지금의 풍요를 이용해서 현대 도시의 생태적 전환을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홍성태. 2005: 322-23).
 
○ 서울은 한국 도시의 반생태성을 보여 주는 상징공간이다. 녹지는 없고 고층빌딩과 자동차와 사람은 많다. 서울은 이 엄청난 밀도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공업력을 최대로 사용하고 있다. 이 공룡도시를 지탱하기 위해 가까운 곳은 물론이고 먼 곳의 자연과 문화가 파괴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은 심각한 공간적 불의의 문제이며, 우리의 삶을 위협하는 생태적 파괴의 문제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서울과 수도권의 극단적 집중현상은 해체되어야 한다(홍성태. 2005: 325).
   
참고문헌
강내희. 1995. 『공간, 육체, 권력 - 낯선 거리의 일상』. 문화과학사.
강홍빈. 2004. 신개발주의 비판: 균형발전과 신개발주의의 갈등. 한국공간환경학회/걷고싶은도시만들기시민연대 심포지엄 격려사.
조명래. 2003. 한국 개발주의의 역사와 현주소. 「환경과 생명」, 2003년 가을호.
청계천복원시민위원회 역사문화분과. 2003. 청계천복원사업은 역사복원사업이다 - 기본설계는 완전히 다시 작성되어야 한다.
홍성태. 2000. 『위험사회를 넘어서』. 새길.
홍성태. 2000. 위험사회와 도시. 『위험사회를 넘어서』. 새길.
홍성태. 2004. 『서울에서 서울을 찾는다』. 궁리.
홍성태. 2004b. 청계천 복원사업과 청계천의 파괴: 이명박 시장의 신개발주의와 이익의 정치. 「경제와사회」, 2004년 가을호.
Beck, Ulich. 1992. 홍성태 옮김(1997). 『위험사회 - 새로운 근대(성)를 향하여』. 새물결.
Perrow, Charles. 1999. Normal Accidents: Living with High-Risk Technologies. New York: Basic 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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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7/06 19:50 2009/07/06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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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머리아파 2010/11/23 06:44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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