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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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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01/18 03:54
한겨레의 이 기획이 2주에 한 차례씩 연재된다면 이 서문적인 글에서 언급된 이들만 대충 해도 올 한해 내내 기사가 나올 것 같다. 그 동안 새롭게 등장한 진보 지식인에 대해 잘 모르는 게 많았는데, 많은 도움이 되리라고 본다. 물론 기사가 충실하다는 전제하에서이지만...
 
그런데 소개된다는 이들 중에 내가 소개할 수 있을 만큼 잘 아는 이가 있을까. 그렇지 않다고 말할 수 있는 걸 보면 지난 10여년간 정말 공부를 하지 않은 게 틀림 없다. 이들의 이론을 아는 게 나에게, 세상을 바꾸는데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모르겠지만, 우선은 의욕이 솟는다. 
 
아직은 도전하고 싶은 게 있다는 것, 그것만으로 내가 아직은 젊구나 하면서 스스로 자위하게 된다. 물론 내 본업이라도 충실히 한 다음에 할 것이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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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은 ‘역사’…다시 쓰는 ‘미래’ (한겨레, 진태원/고려대 민족문화연구원 HK연구교수, 2009-01-16 오후 07:02:55)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2주에 한 차례씩 연재될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기획에 소개할 이론가를 선정하고 기획하는 과정에 도서출판 길과 진태원 고려대 연구교수 등 국내 소장학자들이 도움을 주었다. 또 이들은 이 시리즈의 주요 집필자로 나서 진보 사상의 지도를 그린다.
 
① 연재를 시작하며
 
20세기 세계 진보 사상의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주의 역사였다면, 21세기 벽두의 진보 사상은 확실하지만 낡은 답변을 되풀이하기보다, 좀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며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포함한 근대 문명 전체에 함축된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 마르크스주의 이후 어떤 진보 사상인가?
20세기 세계 진보 사상의 흐름이 마르크스주의의 다양한 변주의 역사였다면, 21세기 들머리 진보 사상은 역사적 종언을 고한 마르크스주의 ‘이후에’ 어떻게 지배에 맞서 저항할 것인가, 어떻게 사회의 변혁을 사고할 것이냐란 화두와 마주해 있다. 이런 의미에서 현대 진보 사상은 근본적으로 ‘포스트 마르크스주의’라고 부를 수 있다. 실제로 우리가 다룰 지식인들 가운데 어느 누구도 더는 잉여가치의 착취 메커니즘을 유일한 지배 원리로 간주하지 않으며, 또 누구도 프롤레타리아라는 단일한 ‘역사의 주체’에 근거를 둔 정치적 변혁과 대안 사회의 구성 가능성을 믿지 않는다. 대신 이들은 극단적 폭력을 수반하는 고도의 과학기술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통해 마르크스주의가 공백으로 남겨두었던 문제들을 분석하고, 나아가 마르크스주의 자체를 포함한 근대 문명 전체에 함축된 모순들을 해명하려고 시도한다. 그들은 모두 확실하지만 낡은 답변을 되풀이하기보다, 좀더 복잡하고 까다로운 질문을 던지는 길을 택한 사람들이다.
 
■ 새로운 진보 사상의 주역은 누구인가?
우리가 이번 기획에서 다룰 진보 지식인들은 20세기 후반기를 풍미했던 진보 사상의 대가들을 잇는 사람들이다. 프랑스의 경우 루이 알튀세르, 질 들뢰즈,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을 계승하고 있는 알랭 바디우, 에티엔 발리바르, 자크 랑시에르, 장뤼크 낭시, 브뤼노 라투르, 베르나르 스티글레르가 이번 기획의 주인공들이다. 바디우와 발리바르, 랑시에르가 알튀세르의 지적 유산을 비판적으로 극복함으로써 자신들의 이름을 사상의 성좌에 새겨 넣고 있다면, 낭시는 마르틴 하이데거와 카를 마르크스, 데리다, 모리스 블랑쇼의 유산을 독창적으로 종합하여 ‘무위(無爲)의 공동체’라는 독자적인 사상 경지를 이룩했다. 라투르와 스티글레르는 각각 현대과학기술의 발전을 추적하면서 그것이 인간적 삶의 형식을 어떻게 변형시키고 있는지, 또 비자본주의적인 과학기술 발전의 길은 어떤 것인지 탐색하고 있다.
 
독일에서는 위르겐 하버마스와 카를오토 아펠 이후 독일 비판이론의 전통을 계승한 악셀 호네트와 한스 요아스가 이번 기획의 핵심 인물들이다. 그리고 프랑스 후기구조주의와 비판이론을 독창적으로 결합해 새로운 사상 지평을 열어가는 크리스토프 멩케도 주요 인물로 소개될 것이다 아울러 <자본주의의 종말>이란 책으로 국내에서도 화제를 모은 엘마 알트파터나 <히스테리>로 독창적인 여성 연구의 새 차원을 보여준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도 <한겨레> 독자들을 만날 것이다.
 
이번 기획에서 가장 역점을 둔 것 가운데 하나는 이탈리아의 진보 지식인들 소개다. 안토니오 그람시라는 걸출한 마르크스주의자를 배출한 이후 20세기 후반 이탈리아에서는 탁월한 진보 지식인들이 대거 출현하면서, 세계 사상의 흐름이 프랑스에서 이탈리아로 이동할 것이라는 다소 때 이른 전망을 낳고 있다. 그들을 모두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이번 기획에서 다룰 안토니오 네그리, 조르조 아감벤, 잔니 바티모는 이미 독자적인 사상 영역을 개척한 21세기 사상의 선구자들이다.
 
영·미권에서는 우리에게 잘 알려져 있는 레이먼드 윌리엄스, 프레드릭 제임슨, 이매뉴얼 월러스틴 이후 진보 이론의 최전선에서 작업하는 지식인들이 이번 연재 기획의 중추를 이룰 것이다. 이들 가운데는 현대 문화연구 창시자의 한 사람인 스튜어트 홀이나 포스트 마르크스주의와 급진 민주주의의 제창자로 잘 알려진 샹탈 무페가 포함돼 있다. 또 탈근대 사회의 모순적인 삶의 양상들에 대한 섬세한 분석을 수행하고 있는 지그문트 바우만과 <젠더 트러블>의 저자 주디스 버틀러도 우리가 관심을 기울이게 될 이론가들이다. 이매뉴얼 월러스틴 이후 가장 주목받는 세계체계론 연구자인 조반니 아리기와 생명공학의 비약적인 발전에 내재한 정치철학적 함의를 추적하고 있는 니콜라스 로즈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지식인들이다. ‘정보시대 3부작’으로 잘 알려진 도시사회학자 마누엘 카스텔스와 비판지리학의 대가 데이비드 하비의 작업에서도 현대 사회를 비판적으로 이해하는 지침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거론한 인물들은 이른바 ‘북쪽’, 곧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에서 활동하는 진보 지식인들이다. 하지만 에드워드 사이드 이래 우리가 깨닫게 되었듯, 21세기 진보사상이 해결해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숙제는 유럽 중심주의와 식민주의의 청산이다. 우리가 서양 바깥의 진보 지식인들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유다.
 
그중에서 우리가 각별히 주목하는 것은 인도의 지식인들이다. ‘현존하는 인도 최고의 사상가’로 꼽히는 라나지트 구하는 소수 전문가들 외에는 국내에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무지하고 가난한 대중을 지칭하는 서발턴(subaltern)에 관한 연구로 20세기 후반 진보 사상의 새로운 시야를 열어 놓은 역사학자다. 그리고 마르크스주의와 해체론에서 영감을 얻은 가야트리 스피박은 서발턴 연구에 비판적으로 동조하면서 탈식민주의 여성학이라는 새로운 장을 개척한 인물이다.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아마르티아 센이 가진 것 없는 이들을 위해 제창한 ‘센코노믹스’도 21세기 진보 사상의 중요한 축을 형성할 것으로 기대한다.
 
우리와 인접한 동아시아 진보 지식인들을 위한 자리도 마련돼 있다. 국내에도 잘 알려진 일본의 비평가 가라타니 고진이 국민국가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대안을 구상하는지 살펴볼 것이며, 중국의 대표적 신좌파 지식인인 왕후이가 제창하는 ‘아래로부터의’ 동아시아 연대에 관한 구상을 들을 기회도 갖게 될 것이다. 좀더 많은 인물을 소개하지 못하는 것이 아쉽지만, 서구 형이상학의 대안을 제시하는 해방 철학의 대가 엔리케 두셀은 우리에게 남아메리카 진보 사상의 진수를 보여줄 것이다.
 
■ 또다른 진보의 세기를 위하여
지금 이 순간도 카지노 자본주의의 거대한 도박 노름에 민중들이 피눈물을 흘리고, 마치 시곗바늘을 30여년 전으로 되돌린 듯 공안통치의 칼날을 사정없이 휘두르는 정권의 기세에서는 광기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반동의 역풍이 거셀수록 진보의 나무는 조금씩 희망의 싹을 틔울 것이다. 우리가 독자들과 더불어 새로운 진보의 세기가 시작될 수 있고 또 시작되어야 한다는 믿음과 의지의 씨앗을 뿌리려고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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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근대가 쫓아낸 ‘진리’를 다시 불러오다
(한겨레, 서용순/세종대 초빙교수·철학, 2009-01-30 오후 09:49:14)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② 알랭 바디우 Alain Badiou
 
알랭 바디우는 1937년 모로코 라바에서 태어나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수학했다. 1968년 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지식인이었고, 1970년대에는 마오주의 운동을 활발하게 벌이며 옛 스승이었던 루이 알튀세르의 ‘이론주의’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70년대 말 마오주의 운동의 쇠퇴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와는 다른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 집합이론과 여러 탈근대 철학의 조류를 비판적으로 수용해 1988년 <존재와 사건>을 집필했다. 이는 새로운 진리 이론을 수립함으로써 철학을 복권시키려는 시도였다. 이후 <철학을 위한 선언> <윤리학> <조건들> <메타정치 소론> 등에 이어 2005년에는 <존재와 사건>의 2권인 <세계의 논리>를 출간한다. 이 밖에도 바디우는 현실의 정치적 이슈에 개입하는 <정황> 시리즈를 출간하고 있고, 옛 동지들과 결성한 ‘정치 조직’(Organisation Politique)을 통해 ‘당 없는 정치’를 기치로 활발한 정치 활동을 펴고 있다. 

■ 사르트르·알튀세르·마오를 거쳐
프랑스 파리의 어느 수요일 저녁. 이미 일흔을 넘긴 노교수의 강의가 파리고등사범학교의 쥘 페리 대강의실에서 진행된다. 이 강의를 듣는 사람들의 면면은 다양하다. 머리가 희끗한 노인에서부터 현직 교수, 교사들, 이제 막 대학에 들어온 젊은 학생들까지 모든 세대의 사람들이 강의 시작 30분 전부터 강의실을 채우고 있다. 시간이 되자 백발의 노교수가 천천히 강의실로 들어온다. 곧이어 우렁찬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200여명의 청중은 정적 속에서 강의에 집중한다. 매달 한 차례 진행되는 이 강의의 주인공은 알랭 바디우(72)라는 프랑스 철학자다.
 
바디우는 그의 철학이 차지하는 비중에 견줘 국내에서 그다지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1988년 대표작인 <존재와 사건>을 프랑스에서 출간한 이래 끊임없이 문제작들을 내놓았다. 프랑스 철학의 많은 거장들이 타계한 지금, 바디우는 오늘날의 프랑스를 대표하는 철학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이력은 복잡다단하다. 장폴 사르트르를 추종하던 젊은이였던 그는 파리고등사범학교 시절 루이 알튀세르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고, 이후 1968년 혁명에 열정적으로 참여한 실천하는 지식인이었다. 70년대 마오주의 운동의 한가운데에 있던 그는 80년대에 들어와 마르크스주의를 벗어나 독자적인 사유를 추구하게 된다. 그 결실이 바로 <존재와 사건>이다. 이 저작에서 바디우는 집합이론을 통하여 존재론을 재조명하고, 퇴장당한 것으로 간주된 ‘진리’를 다시 철학 속으로 끌어들인다.
 
■ 진리의 부활과 철학의 복권
프랑스를 중심으로 60년대부터 시작된 ‘근대’에 대한 비판은 실로 강력한 것이었다. 이른바 탈근대 철학은 전통 철학이 추구했던 진리가 얼마나 폭력적이고 허구적일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진리에 대한 맹목적 숭배는 모든 비(非)진리를 억압하고 배제하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 자크 데리다, 프랑수아 리오타르와 같은 탈근대 철학자들의 비판이었다. 탈근대 철학은 이를 통하여 철학이 더는 진리를 욕망해서는 안 된다고 단언한다. 철학은 이제 진리 없는 상대주의의 길, 고대 그리스의 소피스트들이 추구했던 길로 나아가게 된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떤 진리도, 어떤 유토피아도 사유할 수 없다는 우울한 승인만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이 지배적이던 80년대 후반, 바디우는 그에 반대하여 철학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야심찬 시도를 감행한다.
 
이는 무척 독특하고 흥미로운 시도이다. 바디우는 철학을 복권시키기 위해 기존의 철학을 넘어선다. 그의 시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가 진리를 바라보는 방식이다. 그에게 진리는 여러 영역에서 생산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그에게 진리란 복수(複數)의 절차 속에서 생산되는 복수의 진리이다. 그러한 진리는 예술·정치·과학·사랑 같은 철학 외부의 영역에서 생산된다. 철학의 할일은 스스로 진리를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생산된 진리를 ‘사유’하는 것이다. ‘진리는 없다’고 말하는 탈근대 철학에 맞서 바디우는 ‘진리는 있다’고 응수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탈근대 철학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바디우는 탈근대 철학의 진지한 문제제기를 수용하는 가운데 전통 철학의 진리와는 전혀 다른 진리를 말하는 것이다. 진리는 복수로 존재하며, 항상 불투명한 성격을 지닌 ‘사건’으로부터 출현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바디우가 말하는 진리는 과거의 철학이 말하고 있는 진리가 아닌 혁신된 진리이다.
 
이렇게 바디우는 도그마로서의 진리를 완전히 거부하고 진리를 새롭게 파악함으로써 철학을 구원하고자 한다. 이전의 철학은 여러 진리를 동시에 사유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철학은 진리의 생산을 어느 한 영역에 가두었고, 그것을 전능한 것으로 간주하여 다른 진리들을 억압하였다. 그리하여 진리는 폭압적인 형상으로 변질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과학을 맹종하는 실증적 철학과 정치적 진리를 특권화하는 마르크스주의 안에서 그러한 모습을 볼 수 있다. 바디우는 이렇게 어느 특권적 영역에만 갇혀 있는 철학을 원하지 않는다. 정치를 특권화하는 철학은 예술·과학·사랑 같은 영역을 모두 정치에 종속시키고, 과학을 특권화하는 철학은 다른 영역을 도외시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철학은 여러 진리를 동시에 사유하는 철학이다.
 
바디우는 그렇게 혁신된 철학을 통해 진리에 대한 사유를 전개한다. 진리에 대한 사유는 진리를 생산하는 ‘사건’에 대한 사유이고, 사건 이후에 생산된 ‘진리’에 대한 사유이며, 그 진리에 충실한 ‘주체’들의 실천에 대한 사유이다. 그는 사뮈엘 베케트의 산문과, 파울 첼란, 페소아의 시학에 집중하고, 현대 집합이론의 혁신에 천착한다. 흥미로운 것은 바로 정치에 대한 그의 사유이다.
 
■ 오늘의 현실과 19세기의 유사성
그는 오늘의 현실을 19세기와 유사한 것으로 보고 있다. 오늘날 우리가 목도하고 있는 광범위한 빈곤층의 증가, 젊은이들의 허무주의, 불평등의 확대 등은 모두 19세기를 지배했던 현상들이다. 그에 따르면 ‘파리 코뮌’이라는 19세기의 마지막 정치적 사건 이후 혁명의 기운은 쇠퇴하였고, 다시 1917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고 제국주의적 세계질서가 위기를 맞이하기까지 50년에 가까운 휴지기가 있었다. 오늘날의 세계는 확실히 신자유주의의 지배가 관철되고 있고, 68년 혁명 이후 모든 해방의 가능성은 사라진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본이 노동을 지배한다는 것은 불변의 사실이 아니다. 그 관계는 분명 역전될 수 있다. 현실적으로 존재했던 공산주의는 끝났고, 우리에게 실현해야 할 해방의 가설이 더는 없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오늘날 중요한 것은 당장 무엇인가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해방의 가설을 일신해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항상 보편적인 것의 사유를 통해 가능하다. 그것이 우리가 ‘평등의 선언’을 포기할 수 없는 이유이다.
 
■ ‘평등의 선언’을 포기할 수 없다
바디우가 말하는 평등은 결코 객관적인 평등, 실현해야 할 목표로서의 평등이 아니다. 임금이나 기회의 평등, 계약에서의 평등이 문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서 우리가 평등하다’는 선언이 문제시되는 것이다. 자본과 노동의 지배관계를 실질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것은 분명 평등의 선언이다. 이를 포기하는 것은 해방을 포기하고 주어진 지배질서에 투항하는 일일 뿐이다. 모든 의미 있는 정치적 선언은 항상 평등을 자신의 것으로 삼고, 이를 통해 보편적 정치로 나아간다. ‘역전의 정치’의 동력은 항상 이러한 평등의 선언에 있는 것이다.
 
바디우에 따르면 이러한 해방적 정치의 길을 걷기 위해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용기’이다. 분명 오늘날을 지배하는 것은 공포와 두려움이다. 최근 세계를 압도하는 경제 위기의 확산에서 잘 볼 수 있듯이, 이 공포라는 괴물은 객관적인 데이터보다 훨씬 강력한 힘으로 세계를 잠식하고 있다. 젊은이들의 경제적 효율성에 대한 강박 역시 미래에 대한 불안과 공포로부터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공포로부터 벗어나는 일은 모든 시련 속에서도 자기 자신을 지키며 인내하는 것이라고 바디우는 말한다. 그러한 인내를 통해 우리는 용기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해방을 사유하는 모든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용기인 것이다. 바디우는 우리에게 진리를 말한다. 그 진리는 지켜내야 하는 진리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내는 것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해내는 무명용사들은 어디에나 있다. 바디우는 말한다. 당신이 두 번 믿지 않을 것을 사랑하라고. 그리하여 진리 속에서 영원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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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분한 민주주의’ 이뤘다는 주장은 반민주적이다 (한겨레, 최원/시카고 로욜라대 박사과정 수료, 2009-02-13 오후 07:02:29)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③ 에티엔 발리바르 Etienne Balibar
 
1942년 프랑스 아발롱에서 태어나 파리고등사범학교에서 루이 알튀세르를 사사하고, 네덜란드 네이메헌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61년 프랑스 공산당에 입당하나, 1981년 당의 보수적인 이주노동자 정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축출된다. 현재 파리 10대학 명예교수이자 미국 어바인대 교수다. 이데올로기, 국가, 시민권 문제 등을 이론화하지 못한 마르크스주의의 한계를 넘어서기 위해 1980년대부터 대중들의 교통양식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를 적극 수용했다. 이를 기반으로 해방과 변혁이라는 근대 정치의 두 가지 상에 동일성들과 경계들의 폭력을 대상으로 하는 시민인륜(civility)의 정치를 추가할 것을 주장했다. 우리말로 번역된 책으로는 <민주주의와 독재> <역사유물론 연구> <마르크스의 철학, 마르크스의 정치> <대중들의 공포> 등이 있다.
모든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반민주적 조건을 내장하고 있고, 민주주의가 멈춰서는 ‘경계들’을 갖게 된다. ‘국민경계’는 그 안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유효한 조건이지만, 국민이 아닌 자들에 대한 차별을 제도화하고 민주주의를 무효로 만드는 야누스적 성격을 갖는다. 
 

지금 세계 곳곳에는 때아닌 만리장성들이 건설되고 있다. 중동에는 본디 테러리스트를 막을 목적으로 세웠지만, 이제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일자리를 찾아 이스라엘로 오는 길을 차단하는 콘크리트 장벽이 있다. 또 북아프리카의 스페인령 주변에는 유럽과 아프리카 사이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려는 이주자들을 막기 위한 감시초소 장벽이 있고, 아메리카 쪽으로 눈을 돌리면 미국-멕시코 국경에 세워진 9척 높이의 일명 ‘죽음의 장벽’이 있다. 세계화 시대에 상품들이 자유롭게 유통된다고 해서, 사람들도 자유롭게 이동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장벽을 넘다 죽어갔다. 이렇게 죽은 자들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죽음의 장벽’ 멕시코 쪽 벽면에 주민들은 여러 벽화를 그려 놓았다. 거기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다. “우리는 경계를 침범하지 않았다. 경계가 우리를 침범해 온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은 당면한 삶의 필요에 따라 이동한 것뿐인데 이를 막아서는 경계야말로 부당한 것 아니냐는 항의다. 그러나 이 문구는 또한, 지금 우리 사회에는 도처에 경계가 생겨나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해준다. 경계는 이제 국경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복제되고 증식되고 있으며, 그렇게 “우리를 침범해 오고 있는 중”이다. 이주자들에 대한 감시와 차별이 제도화됨에 따라, 사회는 일정한 경계선 안에서 동질성을 누리는 공동체가 아니라, 점점 더 다양한 경계선들에 의해 분할된 공간으로 변모해 가고 있다.
 
외부 식민지들이 공식적으로 지도에서 사라진 시대에 중심국들의 국경 안에는 새로운 식민지들이 은밀하게 건설되고 있으며, 제국주의 국가의 옛 경계를 방어하던 비민주적 제도와 통치술도 모습을 바꿔 중심 안에 속속 복귀하고 있다. 도시 내 게토나 도시 외곽 빈민촌의 형식을 취하는 이러한 내부 식민지들은 세계 중심국들의 메트로폴리스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고속도로 같은 장애물이 그곳을 에워쌈으로써 분리(segregation)의 장벽을 이루고, 경찰은 국경을 지키는 군인처럼 이 내적 경계를 방어한다.
  
경계들의 이러한 폭발적 증식 속에서 우리가 목격하는 것은 우리가 ‘민주주의’라고 불렀던 것의 소멸이다. 어떤 이가 피부색을 이유로 검문당하고 강제송환되거나 심지어 죽임을 당할 때 민주주의는 파괴된다. 곳곳에서 아파르트헤이트에 견줄 만한 제도적 인종주의가 출현하고, 과거 민주주의의 상대적 성과들이 소실된다. 이른바 “내국인들”은 초과착취되는 이주자들의 상황에 스스로 처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면서 권리의 현저한 후퇴를 감내하거나, 자신의 경제적 곤궁에 대한 불만을 이주자들에 대한 증오로 투사하는 극우 포퓰리즘에 휩쓸린다.
 
이러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 대안을 모색하기 위해 반드시 참조해야 할 철학자가 에티엔 발리바르다. 발리바르는 1960년대부터 그의 스승인 루이 알튀세르와 함께, 스피노자의 관점을 도입함으로써 마르크스주의의 발본적 개조를 도모해온 철학자다. 특히 80~90년대를 통과하면서 그는 민주주의에 대한 스피노자의 논의와 그 난점을 분석하는 한편, 이를 근대 국가의 민족형태에 대한 역사적 분석과 연관시킴으로써 “민주주의의 경계들”에 대한 독창적인 논의를 생산해왔다.
 
스피노자는 민주주의를 하나의 정치체제로 정의하지 못한 채 <정치론>을 미완성으로 남겨두었다. 그런데 발리바르에 따르면, 이것은 결함이 아니라 오히려 엄밀한 사고의 결과다. 민주주의란 본디 하나의 정치체제에 주어질 수 있는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민주정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정치체제를 ‘민주화’하는 대중의 실천일 따름이다. 이러한 실천은 원칙적으로 종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기에, 항상 “더 많은 민주주의”를 향한 운동으로 재개될 수밖에 없다. 거꾸로, 실존하는 모든 정치체제는 정도의 차이가 있다고 해도 여전히 민주화되어야 할 것으로 남는다. 모든 제도화된 “민주주의”는 역설적으로 민주주의를 위한 반민주적 조건을 내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민주주의가 멈춰서는 “경계들”을 갖게 된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민주주의의 근대적 경계가 바로 국민 경계에 놓여 있었다고 지적한다. 그는 민주주의가 최대한 달성되었다고 하는 서구의 “복지국가들”조차 국민 경계 안에서 다소간 평등한 사회권을 보장하려는 시도였다고 평가한다. 곧 국민 경계는 그 안에서 민주주의가 작동할 수 있는 유효한 조건이었지만, 동시에 국민 성원이 아닌 자들에 대한 차별을 제도화하고 그 너머에서 민주주의를 무효로 만드는 야누스적 성격을 가졌다는 것이다. 마치 멕시코 쪽 벽면에 그려진 벽화가 미국 쪽에서는 한 점도 발견되지 않듯이 말이다.
 
70년대 말부터 시작된 자본 주도의 신자유주의적 세계화는 국민 경계가 가졌던 이러한 전략적 기능을 심각하게 교란했다. 이른바 ‘복지국가의 위기’라는 것도 경계의 위기로 이해될 수 있다. 자본이 국경을 넘어 움직이자 자본과 국가권력을 통제할 수 있는 시민들의 역량도 그만큼 위축되었고, 정치는 초국가적 기술관료들이나 국제법 전문가들의 수중으로 넘어가 버렸다. 하지만 경계가 위기에 처했다는 것이 곧 경계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오늘날 경계는 복잡성을 더해가면서 인구통제와 민주주의의 제한을 위한 수단으로 그 반민주적 성격을 노골화하고 있다.
 
발리바르는 이러한 상황에 대한 대안으로 “경계들의 민주화”를 제안한다. 이제까지 우리는 경계 내에서의 민주주의를 고민해 왔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경계들의 민주주의를 고민할 때가 왔다는 것이다. 이는 경계들을 단순히 철거하고 세계공동체의 단일한 시민권으로 나아가자는 말은 아니다. 경계들의 제거는 더 많은 폭력으로 귀결될 수 있다. 문제는 경계들을 이루는 반민주적 제도들을 변혁하고 경계들의 내부와 외부가 민주적으로 교통하게 만들기 위한 실험과 실천을 정치의 중심 과제로 제시하는 것이다. 상이한 정치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거주하는 바로 그곳에서 더는 “시민”과 “이방인”(또는 “적”)이 아닌, 평등한 권리를 누리는 서로-시민들(co-citizens)로 만날 수 있는 조건을 창출하기 위한 정치가 발명되어야 한다.
 
오늘날 유일하게 가능한 정치는 세계정치이며, 시민권은 국민들을 관통하는 관(貫)국가적(transnational) 수준에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리고 이 점에서 이주자들은 “우리”와 더불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위한 운동을 재개할 동료 능동 시민들로 인정되어야 한다. 발리바르의 최근 작업이 우리에게 인식하도록 촉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민주적 정치의 새로운 지형이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1342.html
우리는 ‘과두적 우파국가’에서 살고 있다 (한겨레, 양창렬/파리1대학 박사과정, 2009-02-27 오후 06:51:18)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④ 자크 랑시에르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4044.html
진짜 정치는 결코 ‘생각대로’ 되지 않는다 (한겨레, 박준상 전남대 철학연구교육센터 연구원, 2009-03-13 오후 07:29:46)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⑤ 장뤼크 낭시 Jean-Luc Nancy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6563.html
은행강도 출신 철학자의 소비욕망 탈출전략 (한겨레, 이지훈/한국해양대 강사, 2009-03-27 오후 06:54:31)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⑥ 베르나르 스티글레르 Bernard Stiegler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49176.html
혼돈의 시대 ‘정치생태학’에서 해법을 찾다 (한겨레, 김환석/국민대 교수, 2009-04-10 오후 07:45:18)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⑦ 브뤼노 라투르 Bruno Latour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1539.html
“나를, 우리를 인정하라”…투쟁은 계속된다 (한겨레, 문성훈/서울여대 교수, 2009-04-24 오후 07:01:08)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⑧ 악셀 호네트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5215.html
창조적 분투로 역사의 진보에 개입하라 (한겨레, 신진욱/중앙대 사회학과 교수, 2009-05-15 오후 10:38:16)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⑨ 한스 요아스 Hans Joas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57692.html
‘일반’은 없다, 미적으로 타당한 개인이 있을 뿐 (한겨레, 김동규/연세대 강사, 2009-05-29 오후 07:21:17)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⑩ 크리스토프 멩케 Christoph Menke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60164.html
‘연대의 경제’로 위기의 자본주의 넘어서라 (한겨레, 임운택/계명대 교수, 2009-06-12 오후 07:28:17)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⑪ 엘마 알트파터 Elmar Altvater
 
http://www.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362600.html
“히스테리…남성언어가 파괴한 여성자아의 흔적” (한겨레, 이현재/서울시립대 연구교수, 2009-06-26 오후 06:56:39)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⑫ 크리스티나 폰 브라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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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은 생명’의 영속화에 던지는 경고 (한겨레, 박진우/연세대 연구교수, 2009-07-10 오후 07:01:19)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⑬ 조르조 아감벤 Giorgio Agamben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났다. 로마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이후 프랑스의 철학자 시몬 베유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8년 간행된 발터 베냐민의 이탈리아어판 전집 편집자를 지낸 뒤 베로나대학과 유럽·미국의 주요 대학에서 미학과 철학을 강의했다. 현재 베네치아건축대의 철학 교수로 있다. 대표작인 <호모 사케르>(Homo Sacer)는 이후 <아우슈비츠에서 남은 것>(1998), <예외 상태>(2002), <군림과 영광>(2007)을 거치면서 지금도 여전히 진행중이다.  
‘호모 사케르’는 희생될 수 없는 존재이지만 그를 죽여도 어떤 법적 처벌을 받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를 가리키는 고대 로마법 용어였다. 아감벤은 이 용어를 통해 정치를 주권 권력과 ‘생명으로서의 삶’이 맺고 있는 ‘생명정치’의 관계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현존하는 이탈리아의 대표적 철학자인 조르조 아감벤의 사유 세계 전모를 논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아감벤의 저술 활동, 특히 그의 주저는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20권이 훨씬 넘는 저술들이 이미 세상이 나와 있으며, 한국 독자들도 지난 2년 사이에 두 권의 번역서를 접한 상황에서 그의 사유를 한층 상세히 재검토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다. <호모 사케르>라는 책, 그리고 이 책에 이르는 과정과 이후의 전개과정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보는 것이 한 가지 방법일 것이다. 동시대의 모든 사유와 고민들을 앞선 세기와는 단절된 형태로 근본적으로 되물어야 한다는 아감벤의 문제의식에 비춰 본다면, 또한 이를 통해 20세기가 결코 풀지 못한 과제들(여기에는 정치적 좌우의 대립, 계급과 인종의 대립, 법과 민주주의, 전체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과 같은 핵심적인 정치적 범주들이 포함된다)의 함정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사유를 모색하는 과제와 직접 마주친다면, <호모 사케르>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중요한 화두가 아닐 수 없다.
 
아감벤은 원래 로마대학 출신의 법학도였다. 학창시절부터 이미 파졸리니, 모라비아 등이 주도한 지식인 서클에 적극 참여하면서 문학과 미학, 철학 분야로 사유 지평을 확대해 나갔다. 1970년대에 그는 자신에게 결정적인 흔적을 남긴 세 명의 사상가와 본격적으로 마주쳤다. 아비 바르부르크와 발터 베냐민, 마르틴 하이데거는 초기 아감벤의 문학적·미학적 사유뿐 아니라 199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전개된 정치철학적 사유의 핵심적 원천으로 기능하고 있다. 1978년에 이탈리아어로 간행된 <발터 베냐민 전집>의 편집자로서 그의 이름이 유럽 지성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진 이래, 그가 직접 수집한 청년기 베냐민의 미발굴 서한들을 출발점으로 삼아 이루어진 베냐민 사상 전체에 대한 급진적인 해석(그에 따르면 베냐민 사상의 진면목은 단순히 마르크스주의적 해석과 유대 신비주의적 해석의 자장 속에서 파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를 둘러싼 기성 학계와의 갈등은 그의 명성을 유럽의 좁은 문학 연구자 서클의 범위를 넘어서게 만들었다. 이후 데리다·들뢰즈·낭시·바디우 등 프랑스 지식계의 지도자들과 본격적으로 교류하면서 당시 프랑스 철학의 새로운 흐름을 자양분 삼아 자신의 사유를 한층 정교하게 다듬어 나갔다. <아동기와 역사>에서 <산문의 이념>을 거쳐 <언어의 죽음>에 이르는 저술들은 이런 지적 여정과 편력을 반영한 중간 결과물이자, 동시에 다음 단계의 정치적 성찰을 탄생시킨 모태와도 같은 작품들이다.
 
1995년에 처음 간행된 <호모 사케르>는 같은 이름으로 간행된 연작의 첫째 권에 해당하면서, 그의 사유의 전모를 밝히는 데서 반드시 거쳐야 할 대표작이다. 사회주의권 붕괴가 결코 ‘역사의 종언’일 수 없음을 증명했던 유고 내전의 쓰라린 경험은 그에게 정치를 본격적인 사유 대상으로 삼아야 할 필요성을 다시금 제기하였다. <호모 사케르>라는 이 낯선 제목은 원래 고대 로마법 전통 속에서 범죄자로 판정받은 자를 뜻하는데, 성스러운 자이자 저주받은 자여서 그를 희생물로 바치는 것은 허용되지 않지만 그를 죽이더라도 처벌 받지 않는 모순적인 존재를 가리킨다. 저자는 이 용어를 통해 서양 정치철학의 근원적 패러다임을 재정의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근대 이래의 정치이론이 오랫동안 주권자와 신민의 관계, 그리고 주권자와 법의 관계를 통해 정치의 본질을 규정해 왔던 것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호모 사케르라는 모순적인 존재를 통해 그는 정치를 궁극적으로 주권 권력과 ‘생명으로서의 삶’이 맺고 있는 ‘생명정치’의 관계로 재정의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니까 주권 권력에 의해 배제됨으로써 주권 속에 포함되는 이 모순적 존재, 즉 ‘벌거벗은 생명’의 존재는 법·주권·시민·인권처럼 오랫동안 서양 정치철학의 핵심 범주로 간주되었던 용어들을 의문에 부치게 만든다. 이 용어들은 결코 당연히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정치의 맥락에서 그 의미가 재구성되어야 할 사유의 재료들인 것이다.
 
사실 이 책은 처음 간행될 당시에는 아감벤의 필생의 사유가 응축된 ‘주저’로서 기획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가 새롭게 시도한 정치철학적 사유의 단초들을 처음으로 대중 앞에 제기하는 사유 실험의 성격이 강했다. 하지만 무솔리니와 이탈리아 파시즘의 역사적 경험과 기억, 나아가 아우슈비츠와 유대인 학살을 둘러싼 ‘기억의 정치학’이 사회적 이슈로 변모할 때, <호모 사케르>가 제시했던 새로운 사유 모델은 한 차례 대중들의 충분한 시선을 끌 수 있었다. 복잡한 정치적·사회적 의미망 속에서 의미가 점차 모호해져 가던 기억·증언·재현 같은 주요 개념들에 대해 우리를 다시금 철학적 사유로 이끌어갔던 <아우슈비츠가 남긴 것 : 호모 사케르 3>이 대중적 성공을 거두면서, 그의 이름과 <호모 사케르>라는 저자의 패러다임은 새롭게 주목받은 것이다. 아울러 9·11 테러와 이어진 ‘테러와의 전쟁’은 <호모 사케르>가 언급했던 “예외 상태의 영속화”가 눈앞의 현실임을 역설함으로써, 그의 명성을 세계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그가 볼 때 예외 상태란 법의 공백이지만, 그것은 또한 우리 시대 법질서의 핵심이기도 하다. 법보다 ‘법’의 ‘힘’이 우선하며, 그것은 전체주의와 민주주의라는 20세기 정치사의 양대 열쇳말이자 여전히 해소되지 않은 사유의 근본 단위를 재구성하는 방향으로 나아간다. 이것은 <호모 사케르>의 또다른 변용이자, 새로운 영역에서의 이론적 시도다. 2007년에 발표된 <군림과 영광>이라는 또 하나의 <호모 사케르> 연작은 ‘영광’의 스펙터클, 그것이 가리고 있는 경제 우선의 통치 메커니즘의 계보학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다. 경제가 정치를 압도하는 근대 생명정치의 특성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한국 사회가 새롭게 발표되는 그의 저술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은 이제는 어쩌면 당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이제 우리 앞에는 마지막 질문이 놓여 있다. 과연 이처럼 주권 권력으로부터 배제됨으로써 공동체에 포함되어 있는 ‘호모 사케르’들의 사회, 혹은 ‘영속적인 예외 상태’ 속에서의 삶, 그리고 ‘군림과 영광’의 스펙터클 사회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과연 어떤 변화의 가능성이 주어져 있는가. 과연 <호모 사케르> 속에서 지금 우리 사회를 변화시킬 수 있는 주체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인가. 아니, <호모 사케르>가 전개한 수많은 논의들을 거치고 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변화와 그 주체라는 오랜 패러다임을 오늘의 스펙터클 사회 속에서 그대로 유지할 수 있을까. <호모 사케르> 연작이 진행되면서, 그가 가장 시달렸던 과제는 아마도 이것일 것이다. 그리고 여전히 해답은 모호한 상황에서, 다행히도 저자는 우리에게 최종 답안을 전해 줄 것이라 약속한다. 그것이 바로 <호모 사케르> 연작이 도달할 최후의 종착점일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가 여전히 ‘완성’을 향해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 거대한 연구 프로젝트의 종결을 유심히 지켜볼 필요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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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벌거벗은 삶'을 징벌하다 (머니투데이  | 2009/06/11 12:30)
[MT교양강좌]조르지오 아감벤, 인간을 벌거벗은 생명으로 규정
  
"오늘날 국가권력과 대칭되는 위치에 있으면서 절대적인 기본권으로 간주되는 생명의 신함이란 무엇일까?" 조르지오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프랑스를 시작으로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이탈리아의 철학자이자 미학적 시각을 지닌 비평가다. 지난 1942년 로마에서 태어나 파리의 국제철학원과 베로나 대학을 거쳐 현재는 베네치아 건축대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아감벤의 저서 '호모 사케르'는 21세기 전 세계 인문학의 새로운 패러다임 전환을 대변하는 아감벤의 문제작으로 ‘권력 대(對) 벌거벗은 생명’을 중심축으로 서양 사상사의 맹점을 해체하면서 포스트모더니즘 이후 ‘정치 철학’을 제1철학으로 정립하고 있다.
 
‘인간은 생각하는 동물이다’라는 철학적 정의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정치적 정의 모두를 넘어 인간은 ‘벌거벗은 생명’이라는 새로운 제1원리를 도출한다. 그가 분석하는 역사 인식이나 세계관이 너무나 참신하기 때문에 지금 세계에서 가장 뜨겁게 논쟁되고 있는 철학자 중의 한 명이다.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에서 생명정치와 주권국가 체제의 상관관계를 넓은 지성사적 맥락에 위치시키고 있다. ‘sacer’는 라틴어로 ‘성스럽게 되다’, ‘저주를 받다’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로마법에서 유래한 단어로, 직역하면 성스러운 인간이라는 뜻이다. 즉, '호모 사케르'란 벌거벗은 생명, 살해는 가능하되 희생물로 바칠 수는 없는 생명을 말한다. 아감벤은 신칸트학파에 대한 비판으로 요약될 수 있는 1920년대 독일 사상계의 문제의식을 먼저 소개하면서 구체적으로는 칼 슈미트, 발터 벤야민, 하이데거 사이에 흐르는 공통의 물음을 되짚어 본 뒤 이들 사상가에 주목하여 정치적 실타래를 추적하고 있다.
 
또한 법의 문제에서 접점을 이루고 있다고 보고, 양자에 대한 비판적인 계승을 시도한다. 아감벤에게 있어서 주권은 아우슈비츠와 핵시대, 그리고 9.11이후의 세계가 직면하고 있는 예외상태가 상례가 되는 상황에서의 정치와 법질서의 구조를 이해하기 위한 필수적인 개념이다. 그가 보기에는 문제는 단지 주권이 비상사태를 근거로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정치적 삶으로서의 가능성을 완전히 박탈당한 극단의 삶을 만들어낸다는데 있다.
 
현대 정치의 위기는 기존의 법과 삶의 관계에 대한 재성찰을 통해서만 극복될 수 있으며, 이것이 바로 새로운 정치철학의 과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감벤은 순수한 잠재성의 정치를 통한, 보편과 개별의 어느 쪽으로도 환원되지 않는 새로운 공동체의 상을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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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중’은 네트워크 투쟁으로 ‘제국’에 맞선다 (한겨레, 윤수종/전남대 사회학과 교수, 2009-07-24 오후 06:58:25)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⑭ 안토니오 네그리 Antonio Negri
 
안토니오 네그리는 1933년 이탈리아 파도바에서 태어났다. 독일 역사주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68혁명 이전까지 인식론, 철학, 정치학, 국가론 등에 관해 연구하고 책을 썼다. 1959년 이후 자율주의적인 좌파잡지(정치집단)에 참여했다. 1970년대에 일어난 아우토노미아 운동에 감명을 받으면서 자율주의 사상을 정립해 나갔고, 1970년대 말 이탈리아의 억압적 상황에서 프랑스로 망명했다. 그 와중에 그의 대표 저작인 <마르크스를 넘어선 마르크스>가 출간됐다. 1980년대에는 프랑스에서 가타리를 비롯한 탈근대이론가들, 이탈리아 망명자들과 함께 연구와 정치 활동을 병행했다. 1997년 마이클 하트와 <제국>의 집필을 끝낸 뒤 이탈리아로 돌아가 수감됐다가 2003년 자유의 몸이 됐다.  
근대적 주권은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 주권’으로 변형되어 간다. 새로 등장하는 ‘다중’은 특이성을 보존하면서 소통을 통해 공통성을 만들어가는 능동적인 주체다. 21세기 변혁운동의 중요과제는 다중의 자기조직화를 통해 절대적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것이다.

안토니오 네그리는 마이클 하트와 공동으로 저술한 <제국>(2000)과 <다중>(2004)의 저자로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이 두 저작은 1970년대 이래로 일관된 연속성을 갖고 전개돼온 그의 오랜 작업의 결실이다. 네그리는 또 하나의 지배 장치로 변질된 공산당과 종래의 마르크스주의를 비판하면서 자본의 지배를 효과적으로 분쇄할 수 있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 곧 자율주의적 마르크스주의를 발전시켜 나갔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그의 사상은 지금까지 두 가지 축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으로 그는 자본주의적 지배체제가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이행했다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으로 주체성의 측면에서는 노동자를 축으로 한 ‘계급’ 주체성에서 다양한 주체들의 배치로서의 ‘다중’으로 이행했다고 파악한다.
 
제국주의에서 제국으로
네그리는 <제국>에서 국민국가에 기반한 근대적 주권이 네트워크 권력에 기반한 제국적인 주권으로 변형되어 간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몇 가지 측면에서 부연될 수 있다. 근대적 주권에서 제국적 주권으로의 이행은 우선 영토적인 국경 안에 거주하는 국민들을 기반으로 구성된 근대적인 국민국가들과 그 국가들 사이의 지배와 종속 관계인 제국주의의 시대가 종언을 고했음을 의미한다. 그 대신 이제는 국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초국적인 자본과 그러한 자본의 활동을 뒷받침하는 국제기구들(유엔·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세계무역기구 등)이 서로 네트워크를 이루면서 지배하는 제국의 시대가 됐다. 따라서 국민국가 시대에는 국경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중요했지만, 제국적 주권하에서는 국경과 외부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모든 것은 이제 전지구적인 차원에서 전개되며, 모든 전쟁은 제국 안의 시민전쟁, 즉 내전이 된다.
 
제국의 시대에도 위계와 차별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더욱 정밀하게 강화된다. 위계와 차별은 생물학적 차이나 가시적 차이에 의존하는 인종주의에서 벗어나, 더욱 유동적이고 유연한 일상적인 체제 속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이고 잔인해지는 일상적인 실행체제 속에서 관철된다. 제국적 주권은 하나의 중심적인 갈등을 둘러싸고 조직되는 것이 아니라 미시적 갈등들의 유연한 네트워크를 통해 조직되는 것이다.
 
제국의 또다른 특징은 생산의 성격 변화다. 네그리에 따르면 오늘날의 자본주의에서는 이전과 달리 잉여가치의 생산에서 거대 공장의 노동력이 차지했던 중심적 역할이 쇠퇴하고, 비물질적이고 소통적인 노동력이 대신하고 있다. 여기서 비물질적 노동이란 “서비스, 문화 상품, 지식, 또는 소통과 같은 비물질적 재화를 생산하는 노동”을 의미한다. 왜 이러한 변화가 중요할까? 그것은 이런 노동의 형태 속에는 협동이 노동 자체 속에 완전히 내재해 있기 때문이다. 곧 비물질적 노동은 직접적으로 사회적 상호작용과 협동을 포함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노동이 더 이상 자기 외부의 적대적 타자인 자본에 의해 가치증식되지 않고, 자기 자신을 스스로 가치화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네그리는 바로 여기에서 제국의 질서에 이미 내재해 있는 공산주의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그럼에도 제국 권력의 지배가 결코 완화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으며, 네그리의 말로 요약하자면, 제국 권력의 효율성은 폭탄에 의한 파괴에, 화폐에 의한 판결에, 소통에 의한 공포에 기반을 두고 있다.
 
다중, 소통하는 자율적 집합주체의 등장
<제국>이 지배에 대한 분석이라면, <다중>은 부제인 ‘제국 시대의 전쟁과 민주주의’에서 볼 수 있듯이, 전쟁의 와중에 등장하는 다중과 그에 따른 사회운동의 방향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여기서 네그리가 말하는 다중(multitude)은 무차별적인 무리로서 ‘대중’(mass)이 아니라 특이성을 보존하면서 소통을 통해 공통성을 만들어 가는 능동적인 주체다.
 
네그리는 이전에도 전통적인 노동자계급이라는 개념 대신에 주변층이나 실업자, 여성, 학생 등을 포괄하는 사회적 노동자 개념을 사용해 왔다. 다중은 이 개념을 좀더 확장한 것으로 다음과 같은 특징을 갖는다. 다중은 군중, 인민, 대중, 국민, 계급 등과 같은 종래의 정치적 주체 개념과 대비되는 새로운 주체 개념이다. 다중은 서로 다른 문화, 인종, 종족, 젠더, 성적 지향 및 상이한 노동형태와 생활방식, 세계관, 욕망 등과 같은 수많은 내적 차이들로 이루어져 있어 결코 단일한 정체성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리고 다중은 계급보다 훨씬 포괄적인 개념으로서, “자본주의 아래에서 살고 일하는 모든 사람”을 의미하는 것으로 확장된다. 특히 직접 임금노동을 하지 않는 다양한 주민층을 포함하게 된다.
 
이러한 새로운 주체로서의 다중의 등장과 함께 사회운동의 투쟁방식과 방향도 변화한다. 1960년대에 나타난 게릴라 투쟁 모델은 집중제의 마지막 표현이었으며, 네트워크 투쟁으로 나아가는 과도적 형식들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네그리에 따르면 1970년대 이탈리아의 자율운동에서 나타난 네트워크 투쟁은 이후 사회운동의 방식으로 널리 확산됐고 대안세계화운동에서 절정에 도달했다.
 
대의제를 넘어 절대적 민주주의로
이러한 네그리의 논의는 민주주의에 대한 새로운 사고로 이어진다. 그는 민주주의가 진전하는 데 가장 주요한 장애를 대의 민주주의에서 찾는다. 대의 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다중의 역능구성 과정을 통해 기존 권력을 혁신해 나가는 구성권력 전략을 사고하기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네그리는 대표를 만들어 위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대표화를 막으면서 다중이 다양한 방식으로 자기조직화해 나가는 방향을 생각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21세기 변혁운동의 중요과제는 바로 민주주의라는 탈을 쓴 대의제를 파괴하고 그 대안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리고 대안구성은 대안 제도를 만드는 데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관련 주체들이 아래로부터 욕망에 근거하여 자신들의 사회관계를 구성해가는 것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가 말했던 절대적 민주주의다.
 
네그리의 이런 주장은 많은 쟁점과 논의를 불러일으키고 있으며, 기존의 좌파 운동에 대해 비판점을 형성하고 있다. 네그리는 당 형태에 대한 비판과 더불어 네트워크 형식의 운동을 강조하고 대안 세계화 운동, 다양한 소수자 운동과 자율운동의 활성화에 희망을 걸고 있다. 마르크스가 자본을 분석했지만 노동을 구성(노동자 계급을 조직)하려고 했듯이, 네그리는 제국을 분석하지만 대중을 구성(구성권력을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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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짓진실 벗긴 ‘약한 사고’…변혁 추동하는 ‘강한 실천’ (한겨레, 박상진/부산외대 교수, 2009-08-07 오후 10:18:13)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⑮ 잔니 바티모 Gianni Vattimo
 
잔니 바티모는 1936년 이탈리아 토리노에서 태어났다.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하면서 해석학과 미학의 관점에서 종교와 사상의 문제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주로 니체와 하이데거의 철학을 탈근대적 사고로 연역하면서 해석학의 기초 위에 이른바 ‘약한 사고’의 이론을 주창했고, 이를 통해 대중문화와 인터넷이 범람하는 현대 사회에서 좌파 정치의 새로운 역할을 제시하고 있다. 1964년부터 2008년까지 토리노대에서 철학과 미학을 가르쳤으며, 1999년부터 2004년까지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했다. <진실에 대한 예술의 주장>, <기독교 이후>, <허무주의와 해방>, <해석학적 공산주의> 같은 책들을 썼고, 국내에 <투명한 사회>와 <근대성의 종말>이 번역돼 있다.  
바티모는 ‘약한 사고’의 개념을 빌려 형이상학적 진실과 이별하는 우리 시대에서 해석이 지니는 실천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모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실들의 허위성을 드러내고, 자유로운 해석의 실천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추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잔니 바티모는 탈근대성이라는 이론적 토대 위에서 ‘약한 사고’라는 사유와 실천 형식을 마련하는 것으로 우리 시대의 철학의 역할을 재정립하고자 한다. 바티모가 말하는 탈근대성은 근대성을 폐기하거나 이어받는다기보다, 심화하고 비틀고 치유하면서 그것을 넘어서려는 한층 복잡한 사고를 가리킨다. 바티모는 ‘약한 사고’의 개념을 빌려 형이상학적 진실과 이별하는 우리 시대에 해석이 지니는 실천적 중요성을 강조한다. 대중문화와 매스컴, 인터넷이 날로 번창하는 현대 세계는 무수한 입장들이 가로지르는 네트워크로 짜인다. 그런 상황은 새로운 좌파의 철학과 정치를 요구하는데, 그것은 모든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진실들의 허위성을 드러내고, 자유로운 해석의 실천을 통해 아래로부터의 변혁을 추동하는 것을 가리킨다.
 
바티모는 탈근대성을 다원주의로 파악한다. 다원주의는 절대적인 진리를 부정할 때 발생한다. 반면 절대적인 진리는 민주주의를 저지한다. 절대 진리가 있고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절대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는 것을 반대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따라서 진리와 이별하는 시대는 민주주의의 가능성을 한껏 높이는 시대다. 바티모에 의하면, 진리가 단단하고 영속적인 객관성을 지닌 것으로 보이는 존재론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진리를 재해석과 재맥락화, 재서술에 의해 새로 구성되는 어떤 것으로 선별하고 채택해야 하는 해석학의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철학은 세계를 묘사하기보다 해석해야 한다. 탈근대적 해체가 통일된 역사서술에 종말을 고한다면, 그를 위한 철학은 ‘차이의 모험’을 적극적으로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존재를 사건으로 인식함으로써 진실의 개념에 해석적 성격을 부여하는 것이다. 니체의 말을 빌리면, 진실은 없고 해석만이 있으며, 따라서 진실의 가치는 해석들의 차이들에 따라 결정된다. 바로 여기서 해석하는 주체의 자리가 중요하게 떠오른다. 진실이나 존재는 주체의 해석 행위에 따라 가변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바티칸과 같은 종교 기관이 의도적인 설교를 하고, 미국과 같은 정치적 제국이 자본주의를 선전하며, <엔비시>(NBC)나 <시엔엔>(CNN) 같은 텔레비전 네트워크가 선택된 뉴스를 통해 ‘객관적 사실’을 정의한다면, 철학은 진실이란 단지 해석들의 게임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우리 시대에 철학은 논증적인 담론보다는 일종의 교화하는 담론이며, 지식의 발전과 진보보다는 인류의 교화를 향한 담론이다. 철학자의 임무는 영원을 이해하도록 인류를 이끄는 플라톤 식의 어젠다와 상응하지 않는다. 그보다 인류가 역사를 향해, 역사와 함께 나아가도록 만든다. ‘약한 사고’는 결코 사고의 약함 자체를 의미하지 않는다. 사고는 더는 논증적이지 않고 교화적이기 때문에 약해지는 것처럼 보일 뿐이다. ‘약한 사고’에 근거한 철학은 주장이 아니라 호소이며 선언이다. 주장은 응답을 기대하지 않거나 거기에 대처하려 하는 반면, 호소와 선언은 응답을 기대하며 그 응답과 함께 커나간다.
 
바티모는 오늘날 정치와 철학이 이해하고 구성해야 할 진실의 유일한 지평은 사회적·문화적 대화의 인식론적 조건들을 재검토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진실이라는 주제를 사회적 분배와 참여의 문제로 연결시키고 일반 대중이 가장 잘 이해되는 방식으로 생각하도록 해주어야 한다. 진실과의 이별과 그에 따른 ‘약한 사고’는 민주주의의 시작이며 토대다.
 
이런 식의 ‘약한 사고’를 펼치는 바티모는 ‘좌파에 대한 좌파의 철학자’라고 불릴 만하다. 그것은 여전히 절대적 토대를 전제로 하는 좌파에 비해 바티모는 ‘좌파 철학’을 토대의 붕괴와 재구성을 통해 추구하기 때문이다. 좌파의 정치는 무조건적인 도덕적 의무, 보편타당성의 주장, 초월적인 합리적 전제들을 회의하고 비틀고 재구성함으로써 가능하다. 따라서 철학은 좌파 정치에서 부수적이지 않다. 바티모와 같은 좌파에게 철학은 더 나은 미래를 만드는 사회정치적 주도권을 지닌다. 그런 면에서 그는 ‘약해진 마르크스’를 주창하면서 ‘약한 사고’를 정치적 차원으로 발전시키고자 한다.
 
돌이켜보면, 바티모는 68혁명에 참가한 학생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었다. 수감된 그의 학생들이 보낸 편지에서 바티모는 형이상학적 주체를 주장하는 폭력적 논리를 발견하고, 절대 원칙을 생산하는 철학은 없다는 자신의 신념을 확인했다. 그의 급진성은 원칙을 세우기보다는 회의하고 비판하며 끊임없는 재사고의 대상으로 올리면서 이루어졌다. 그런 입장에서 바티모는 1970년대 이래 좌파 정치에 관여했고, 바티모를 위시한 철학자들이 급진적이지 못하다는 붉은 여단의 압력을 폭력으로 간주했다. 특히 1990년대에 들어 이탈리아 정치에서 혁명과 같았던 ‘탄젠토폴리’(뇌물도시) 사건에서 정치적 열의를 보였다. 그 뒤 많은 지식인들이 관심을 접은 상황에서 바티모는 언론 기고를 통해 논쟁을 지속시켰고, 그와 함께 베를루스코니 체제를 비판했다.
 
바티모는 1999년부터 5년 동안 유럽의회 의원으로 활동하면서 주로 인권과 문화, 교육, 매체와 같은 분야에서 활동했다. 바티모의 유럽의회 활동은 다원주의의 확립으로 두드러진다. 유럽연합 헌법에 ‘기독교적 가치’라는 용어를 삽입하는 문제를 두고 논쟁이 일어났을 때, 바티모는 유럽은 다원주의적이어야 하며, 단일 종교를 언급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그렇다고 유럽의 기독교적 전통과 가치를 부정하고 망각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기독교적 가치는 세속주의와 대립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세속주의는 자신을 포기하는 방식의 사랑이라는 가장 기독교적인 개념에 토대를 둔다. 그런 면에서 세속주의는 다양한 종교들이 제한 없이 스스로의 신앙을 추구할 수 있는 다원주의와 통한다. 따라서 기독교의 ‘종교적’ 힘은 세속주의의 차원에서 민주주의의 토대를 제공해준다. 유럽연합 헌법에 기독교 개념을 넣으려는 바티칸의 압력은 바티모의 눈에 유럽의 다원성을 좀먹는 교조적 형이상학의 발현과 다르지 않다. 종교는 세속주의로 나아갈 때 비로소 진정한 종교성의 옷을 입게 되는 것이다.
 
바티모가 유럽에서 본 것은 코즈모폴리터니즘(세계시민주의)의 꿈이다. 유럽연합은 초국가적 국가가 점령이나 침공, 전쟁이 아닌, 자유로운 의사 결정에 의해 구성된 최초의 경우다. 바티모는 유럽연합을 진지한 정치적 진보의 표상으로 본다.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자연스러운 기반이 아니라 다양성들의 자발적인 기초이기 때문이다. 유럽연합은 단 하나의 언어와 종교, 인종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와 종교, 인종에 의해 구성되었기에, 무한하게 뻗어나가고 적용될 수 있을 공동체라고 바티모는 굳게 믿는다.
 
바티모의 좌파적 사고와 정치 실천은 사회주의가 인류의 운명이라는 생각에서 나온다. 사회주의는 모든 사회적 가치와 권력의 민주화가 펼쳐지는 우리의 집단적 삶을 국가적으로 조절하는 체제를 말한다. 이는 ‘투명한’ 민주 사회에서만 가능하다. 투명한 민주 사회란 사회적 대화에 참여하고 싶어하지 않는, 공통의 결속된 원칙들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열린 공간을 남기는 사회다. ‘불투명한’ 사회에서 폭력은 형이상학적 구조와 그것이 빚어내는 궁극적 진실에 의해 정당화된다. 반면, 진정한 인간 존엄성은 기존의 자연스러운 형이상학적인 본질이 아니라 그것을 비틀고 재고하는 개인들의 자유에서 나온다.
 
이제 보편적 전통이 와해되고 절대적 진실이 붕괴하는 세속화의 근대 역사 끝자락에 서 있는 우리에게 던져진 질문들은 이러하다. 우리에게 형이상학적 구조와 궁극적 진리는 무엇인가. 그들에 맞서 다양한 해석과 의미의 소통을 이루는 공간은 어떻게 건설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에 대한 답과 함께 새로운 체제의 구성을 향해 나아가야 하는 나름대로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 ‘약한 사고’는 그를 위한 강력하고 근본적인 사유와 실천의 형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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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성’ 메스로 신자유주의를 해부하다 (한겨레, 서동진/계원디자인예술대 교수, 2009-08-21 오후 08:52:56)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 / (16) 니컬러스 로즈 Nikolas Rose
 
니컬러스 로즈(62)는 현재 영국의 런던 정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생명과학, 생명의학, 생명공학과 사회 연구 센터’의 소장을 맡고 있는 사회학자다. 유대계 후손으로 대학에서는 생물학을 전공한 뒤 대학원에서 사회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줄곧 사회학 분야에서 이론적 작업을 펼치고 있다. ‘영국 통치성 학파’의 좌장으로 ‘현재의 역사’라는 그룹을 조직해 푸코의 통치성 개념에 바탕한 서구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에 진력하여 왔다. 최근에는 생정치, 다시 말해 생명에 관한 새로운 과학적 지식과 기술들이 생산하는 효과와 권력에 이론적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통치성 개념을 통해 푸코는 권력을 지식과 주체화라는 개념으로 재구성하고 이를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로즈는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이론으로 체계화하고 이를 동시대 자유주의 권력의 해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련했다.  

니컬러스 로즈는 흔히 통치성 연구로 알려진 푸코주의적 사회이론을 대표하는 학자로 알려져 있다. 미셸 푸코가 1970년대 후반 콜레주 드 프랑스의 세미나에서 발표했던 강의노트에 등장한 ‘통치성’이란 개념은 일종의 이론적 프로그램처럼 받아들여졌고, 영국을 중심으로 독특한 푸코주의적 사회이론 그룹이 만들어진다. 통치성 학파라고 알려진 이론가들은 실은 ‘현재의 역사’라는 연구자 네트워크에 참여한 이들을 가리키는데, 이들의 공동작업의 결과는 여러 저작으로 출간됐고, 이는 현재 ‘통치성 연구’라고 불리는 흐름의 바탕을 닦은 작업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로즈는 이 그룹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로즈는 영국에서 특히 강력했던 알튀세르 마르크스주의의 영향 속에서 이론적 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다 정신병리학과 정신의학에 관한 푸코 초기 저작에 영향을 받으면서 <심리학 복합체>, <영혼을 통치하기>와 같은 초기 주요 저작을 완성한다. 이는 영국의 정신병리학 기관이던 타비스톡 연구소에서 민속지적 방법을 통해 정신병리학 제도의 권력과 작용을 분석했던 경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렇지만 로즈의 이론적 관심을 전환하도록 이끌었던 것은 푸코의 통치성에 관련된 글과 그의 세미나를 통해 발표된 제자들의 논문들이었다.
 
그는 ‘현재의 역사’라는 그룹을 조직하고 그가 편집장을 맡고 있던 저널 <경제와 사회>를 통해 그 성과를 소개했다. 이 시기 그의 이론적 성과를 묶은 것이 피터 밀러와의 공동 저술 논문을 묶은 <현재를 통치하기>와 그의 신조어인 ‘선진자유주의’란 개념을 통해 서구의 새로운 자유주의적 권력을 분석하고자 시도한 <자유의 권력들>이다. 아마 로즈의 이론적 성과를 집약하고 있을 <자유의 권력들>은 신자유주의라 알려진 정치권력을 분석한 데 그치지 않는다. 여기에서 그는 자유주의 권력의 계보학적 분석을 통해 통치성 개념을 권력 분석의 이론적 도구로 다듬어내고 있기 때문이다.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근대 국가의 계보학적 분석이라는 이론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돌출한 개념이다. 그것은 정치철학의 주권론과 국가론 혹은 경제적 결정을 은폐하는 허구적 상부구조로서의 국가권력이라는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고자 한 탐색 과정에서 출현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왕의 목을 베기’라는 푸코의 유명한 표현은 점차 ‘국가의 통치화’에 관한 분석으로 다듬어졌고 그는 이를 자신의 작업을 망라하고 조직할 수 있는 개념이라 공언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것이 엄밀한 의미에서 이론적 개념이라 할 수 있을지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어쨌든 통치성을 통해 푸코는 권력을 지식과 주체화라는 개념을 통해 재구성하고 이를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분석을 통해 해명하고자 시도했다. 로즈의 작업 역시 바로 이 지점에 위치해 있다. 그에게서 특기할 점은 푸코의 통치성 개념을 이론으로서 체계화하고 이를 동시대 자유주의 권력의 해부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정련했다는 점에 있을 것이다.
 
그는 통치성 혹은 그가 선용하는 표현을 빌리자면 ‘정치적 합리성’을 크게 세 가지의 성분으로 나눈다. 그것은 첫 번째 지식과 언어, 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권력은 무엇보다 그것이 행사되는 대상을 구성하고 창안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디까지가 경제적인 삶의 세계이고 무엇이 사적인 삶의 세계인지는 전연 자명하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그것이 경제적인 삶이라 할 때, 성장·효율·능률·합리성·진보·성과·이득 같은 것 역시 무엇을 가리키고 그것은 어떻게 판별되고 측정하며 평가해야 할지 전연 분명하지 않다. 따라서 무한히 다양한 삶의 세계들은 그것을 읽고 분석하고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대상으로 빚어져야 한다. 다시 말해 권력은 다양한 지식과 언어를 생산하고 그것을 활용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두 번째로 테크놀로지를 들 수 있다. 권력은 단순히 관념이나 이념이 아니라 특정한 효과를 겨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다양한 장치·도구·계산방식 등을 만들어낸다. 이는 성장·진보·안녕·안전·교정·개선 같은 다양한 목표를 충족하고 실현하는 데 필요한 전문적 지식들을 생산하고 그에 관련된 인물·기관·제도·자격·보상 같은 것들을 끌어들인다. 세 번째로 권력은 윤리 혹은 주체화라고 할 만한 것으로 이뤄진다. 그것은 자유주의 권력의 결정적인 특징 가운데 하나인데 이는 권력은 무엇보다 자유를 동원하면서 작동하는 것임을 가리킨다. 사람들은 행복·안전·건강·성공 등 다양한 포부와 욕구를 가지고 다양한 삶의 세계에서 살아간다. 이때 사람들은 그런 목표를 충족하기 위해 어떻게 처신하고 타인들과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에 관련된 다양한 규범과 행위의 코드에 관련을 맺게 된다. 이것이 바로 윤리 혹은 주체화라고 할 수 있다.
 
로즈는 이 세 가지의 성분으로 구성된 권력의 해부학적 도구를 이용하여 근대 자유주의 권력의 역사적 변전을 분석한다. 그는 서구 자유주의의 역사를 크게 자유주의·복지주의·선진자유주의라는 단계로 나눈다. 자유주의란 18세기에 형성된 초기 서구 자유주의 권력을 가리키는 것으로 주된 특징은 권력이 초월적인 원리나 임의적인 의지를 통해 행사되는 것이 아니라 자연을 통해 즉 그것이 행사되어야 하는 대상에 대한 지식(특히 정치경제학)을 배경으로 신중하고 또한 효과적으로 행사되어야 함을 가리킨다. 더불어 권리를 행사하는 법적 주체라는 겉모습에도 실제 삶의 세계에서는 자신의 안녕과 행복을 추구하며 자신의 인생을 이끌어가는 개인들을 통치받는 대상 혹은 주체로 만들어낸다.
 
이런 초기 자유주의는 사회주의의 등장, 개인주의의 만연과 같은 위험에 직면하면서 혹은 로즈가 강조하는 개념을 빌리자면 숱한 ‘문제화’를 통해 복지주의로 변이하게 된다. 복지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은 ‘사회를 통한 통치’라고 말할 수 있다. 복지주의는 무엇보다 ‘사회’를 발명하고 그를 통해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과 주체를 전연 다른 방식으로 구성한다. 그리고 이를 실현하는 핵심적인 기술로서 사회보험과 사회복지를 동원한다. ‘연대’란 개념을 통해 권력이 행사하는 대상은 공통의 운명을 짊어지고 동일한 목표를 향해 의무와 책임을 나눠 가지는 사회적 시민 혹은 국민으로 변형된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혹은 로즈의 표현을 빌리자면 ‘선진 자유주의’는 무엇이며 어떻게 다른 것일까.
 
그것은 무엇보다 ‘사회의 종말’이란 것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연대라는 이상 속에서 책임과 의무를 나눠 가진 사회적 시민은 이제 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책임지는 개인들 그리고 무엇보다 특정한 친화성과 정서적 유대에 기반한 ‘공동체’로 변신한다. 그리고 이는 위험의 관리를 둘러싼 테크놀로지 역시 감사, 책무성, 성과 측정과 같은 것으로 바꾼다. 이를 살펴볼 수 있는 가장 두드러진 예는 복지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 복지로부터 노동 연계 복지로 혹은 능동적 복지로 표현되기도 하는 이런 변화는 자신을 돌보는 개인을 겨냥하고 그들의 책임 부여를 요구한다.
 
신자유주의 분석을 위한 유용한 이론적 틀로 통치성 개념이 각광을 받으며 1990년대에 서구 학계에 일약 통치성의 이론적 붐이라 부를 만한 것이 일어나고 로즈와 동료들의 작업 역시 크게 주목을 받고 있다. 그렇지만 그 작업은 자유주의 권력에 관한 치밀한 분석에도 권력이란 개념을 특권화하면서 현실에 관한 통치를 분석하는 것으로 환원할 수 없는 정치의 위상을 제거하고 정치를 사회학화했다는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물론 그것은 로즈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푸코를 경유하여 정치를 사고하려 했던 이들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일 것이기 때문이다.
 

 

나오는 대로 업데이트하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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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2 22:21 2009/08/22 2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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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Subject: 지도는 잘 그려야 한다 -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에 대한 코멘트 Tracked from 2010/05/01 21:54

    "21세기 진보 지식인 지도"라는 제목으로 <한겨레>에서 작년 한해 격주로 장장 28회에 이르는 기획기사가 나갔다(기사 목록 링크는 여기를 보라). 의도도 선해 보이고 내용도 그 자체로만 보자면야 나쁘진 않았던 것 같은데... 난 과연 거기 거론된 사람들이 도대체 "21세기 진보 지식인"을 상징할 수 있는 사람인지, 더군다나 다른 곳도 아닌 한국에서 그런 이름으로 불리기에 적합한 인물들인지 커다란 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뭐...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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