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2009년 3월 이후 박노자의 글 모음

View Comments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읽은 이후 박노자 글의 팬이 되었다. 과거만큼 영감을 주는 건 아니지만, 여전히 그의 풍부한 상상력은 평가해줄 만하고, 또한 사회주의나 혁명 등의 서술에 있어서도 자신의 직간접적 경험을 토대로 그만큼 쉽게 풀어내는 사람도 없는 듯하다. 그래서 작년 3월 이후에 모아놓았던 그의 글들을 담아왔다. 나중에 참고할 수 있도록... 덧붙여 그의 인터뷰도 하나...
  
------------------------------------
신석기 이후 인류의 '거대한 꿈' & 좌파 (레디앙, 2010년 01월 04일 (월) 01:27:06 박노자 / 오슬로대)
['좌파'의 인류사적 의미] "일장춘몽 인생에 의미 부여해줘"
 
보수가 좌파를 공격할 때에 대체로 자주 쓰는 무기는 '현실성'입니다. 전 고교졸업생의 거의 86%가 대학진학을 하는 요즘 같은 사회에서 대학 교육을 무상으로 하자는 게 과연 현실적이냐, 재원확보를 위해 세율을 높이다보면 조세저항에 부딪칠 게 아니냐. 또는 하도급 기업 노동자들의 임금이 100만원 선에서 확 올라버리면 결국 한국 자동차와 휴대폰의 국제 경쟁력을 떨어뜨릴 것이 아니냐, 이런 식의 공격들입니다.
 
한국 같이 아직도 '명분'과 '대의'가 공공영역에서 중요시되는 사회에서는 나는 내 잇속만 챙긴다는 인상을 남기면 별로 설득력을 갖지 못합니다. 대신에 현실성 타령을 하면 우국지사의 자세를 취하기가 좀 쉽죠. "좌파 얼간이들이 국민 경제를 망가뜨리려 하는데, 오로지 우국충정에 가득찬 나는 국가와 국민을 살리려 한다"는 식입니다. 국가/국민주의가 강력한 헤게모니를 행사하는 사회에서는 보수 이데올로기는 대체로 이와 같은 방식으로 발화되는 것입니다.
 
인정할 것을 인정하자면, 좌파의 길은 우파의 길보다 훨씬 더 험난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보수의 이데올로기란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에 맞추어서 한 걸음씩 천천히 나아가자는 이야기 정도이고, 보수의 철학적인 기반은 어디까지나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의 성악론적인 '현실에의 안주' 정도 밖에 발전되기 어렵습니다.
 
버크주의자의 입장에서는 인천국제공항에서 입국하고 있는 재벌 총수를 맞이할 때에 무슨 마피아 갱처럼 일제히 깊이 절하는 그 부하들을 이상하게 볼 것도 없는 것입니다. 게으르고 이기적인 인간을 채찍질하기 위해서 재벌과 같은 '사적인 군주국'들이 부득이하게 필요하다는 논리이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용산참사에 분개할 것도 없죠. 서로 모순된 이해관계의 갈등을 국가가 그 철권으로 해결(?)해주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의 그 모든 비합리성, 부조리를 어떻게든 합리화하려는 보수주의 철학을 따르면서, 세상을 아주 마음 가볍게 살 수 있습니다. 보수주의의 기저에 "불완전한 인간과 세계를 그냥 그대로 두자"는 취지가 담겨져 있기에 말씀입니다.
 
좌파는 다르다는 것은, 좌파가 추구하는 이상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자연 속에서 존재하지 않다는 점부터입니다. 인간의 세상에서는 500년 전까지만 해도 미주, 호주, 아프리카 등지에서 수많은 평등한 사회들이 존재했지만 결국 엄청나게 폭력적 자본주의 세계 체제 확장 과정에서 유럽인에게 다 먹히고 말았습니다. 인간 사회에서 동물왕국식의 약육강식이 실로 행해진데다가 그 원칙은 140년 전부터 소위 '사회진화론'이라는 중심부의 매우 영향력 높은 이데올로기의 금과옥조까지 됐습니다.
 
그러한 측면에서 보자면 좌파의 평등주의는 자연을 따르는 것이기보다는 우리 마음 속의 자연, 즉 우리의 이성대로 자연의 원칙을 다소 수정하는 것입니다. 좌파는 인간의 아주 근원적인 문제점들 - 탐욕, 어리석음, 폭력에의 지향 등 - 을 해결해주는 '도덕 선생'의 노릇을 하는 것이죠. 불교적으로 이야기하자면 탐진치를 극복할 수 있도록 같이 용맹정진하는 분위기를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평등과 마찬가지로 평화란 어디까지나 근대 인간의 사상적 창조물이지 원래부터 있어온 것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 등 가끔가다 종교적 비판이 있어왔지만, 대체로 20세기 초까지 전쟁에 의한 국제분쟁의 해결이 '합법적'이라는 게 '국제사회의 상식'이었습니다. 이 '상식'에 반대한 사람들을 보면 극소수의 비주류 종교인(퀘이커, 여호와의 증인 등)이나 극소수 부르주아 중산층 '인본주의자', 그리고 정계의 소수자라고 할 초기 사회주의자들일 뿐이었습니다.
 
제1, 2차 세계대전의 참혹한 경험도 있고 해서 그 보잘것 없는 소수의 의견이 이제 상당히 주류화돼 공개적으로 전쟁을 찬양하는 정치인들은 100년 전보다 많이 없어졌지만, 100년 전 현실의 기조는 어디까지나 그대로 존속됐습니다. 지금도 초강대국 내지 지역강대국의 자격이란 외부/내부적과의 대전 능력이 있다는 것은 가장 먼저고, 그 초강대국/지역강대국으로 평가되는 모든 국가들 (미, 중, 인도, 러, 독 등)은 지금으로서 각종 내/외부 전쟁 중입니다. 평화는 여전히 현실이 아닌 꿈으로 남아 있고, 그 꿈을 버리지 않으려는 좌파들은 늘 '비현실적'이란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초기 기독교인들이 자기 자신을 "이 세상에 속하지 않다"고 봤듯이, 오늘날의 좌파도 이 세상에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가치들을 이 세상에 이식시키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미 신석기 말기부터 불평등해지고 전쟁을 다반사로 만들기 시작한 이 세상을 '아주 근본적으로' 바꾸어보자는 것은 좌파의 궁극적 이상입니다. 그러한 차원에서는 좌파는 비록 현실 정치 참여 차원에서 나라마다 조직을 다르게 꾸미고 다르게 움직이지만, 근본적으로 국지적이기보다는 '지구적, 인류적' 현상이라 봐야 합니다. 그 대의는 인류사 그 자체를 바꾸자는 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현실에 안주하려는, 또한 당면 현실 이외에 아무것도 보려 하지 않는 근시안적 분들에게는 '비현실적으로' 보이지만, 기독교가 쇠퇴한 유럽 같으면, '거대한 꿈'이 남아 있는 것은 좌파 말고 또 있나요? 이 꿈은 신석기 후기 이후의 인류사 전체를 그 대상으로 삼기에 저의 살아생전에 이루어질 리도 없을 것입니다. 한데, 이와 같은 꿈이 있기에 원래 무의미할 수밖에 없는, 순간적 춘몽만 같기도 한 인생에는 그 어떤 '뜻'이 부여되는 것입니다.
 
-------------------------------------------------
2009/04/24 19:38
레디앙에 올라온 박노자의 글을 옮겨오다가 3월 중순 이후에 그가 썼던 글들도 다시 보게 되었다. 그 사이에 그는 한국에도 들렸나 보다.
 
최근에 그의 글을 접한 후의 느낌은 과거 '당신들의 대한민국'을 볼 때만큼의 뜨거운 것은 아니지만, 여전히 국제적인 계급의 눈을 가지고 한국사회와 러시아 사회, 그리고 국제사회의 흐름을 훑고 있는 그의 글을 보고 있노라면 부끄러운 생각이 많이 든다. 나는 책을 읽고 변변치 않은 글 하나 쓰는 것에도 헉헉대는데...

 

-----------------------------------
계급정치 가능성 조심스레 낙관한다 (레디앙, 2009년 03월 13일 (금) 08:54:41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지역-화풀이 투표 넘어서야…20대, 비정규직 '분노의 정치' 주목
 
한국학을 바깥에서 가르치다 보면 느끼는 점이지만 같은 사회, 정치적 기관 내지 절차는 서로 다른 형태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완전히 다른 의미를 지닐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름은 똑같아도 서로 체제의 형태가 다른 사회들이 그 이름에 부여하는 '의미'는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지요.
 
아주 대표적으로는, '대학'의 의미는 북구와 일본/한국 모델의 사회에서는 서로 거의 같지가 않다는 것입니다. 일본/한국 자본주의 모델에서 '대학'이란 일차적으로 '20대 초반 청년 대다수의 최종 사회화 기관이고, 사회의 위계서열적 분류 작업을 담당하는 신분 결정적 기관'입니다.
 
예컨대 지방사립대를 졸업한 사람들 중에서는 (영남대 등 일부의 '명문'을 제외하고서는) 대한민국 역사상 장관이 몇 명이나 배출됐는가요? 굳이 묻지 않아도 뻔한 이치입니다. 그런데 이제 '명문대'라는 말을 한 번 스웨덴어나 노르웨이어로 번역해보시지요. 해보면 아시겠지만 딱 맞는 번역어 자체가 없어요. 동질의 사회 현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제가 학생들에게 보통 "prestisjetungt universitet"(사회적 高권위를 부여하는 대학)이라고 번역하지만, 어쨌든 직역어는 아닙니다. 그리고 일본/한국에서 고교 졸업생의 90% 가까이 대학에 진학하는 '진짜 이유'를 북구 학생들에게 설명하기가 너무나 힘듭니다. '노동자라는 이름의 저주'는 여기에서 대체로 1950년대 이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지요.
 
마찬가지로 '투표'도 그런 것 같습니다. 북구의 '투표'란 개인의 계급적-연령적-신분적 정체성의 표현이고, 정치/사회에서 '50% 대 50%'에 가까운 좌우파의 균형을 유지하면서도 일시적으로 좌파 내지 우파에게 기회를 주는 절차이기도 합니다. 즉, 노르웨이에서는 '이민자 출신의 20대의 하급 공무원'이 노동당 아니면 사회주의좌파당을 찍을 확률은 90% 이상이고, '노르웨이 토박이 출신의 30대의 자동차 공장 노동자'라면 노동당 아니면 극우적인 '진보당'을 찍을 확률은 70~80% 이상입니다. 그러니까 사회적 계층별로 지지 정당이 거의 고정돼 있고 지지율 변경의 폭은 좁습니다.
 
예컨대 노동당의 지지율은 1980년대초 이후로는 28~33% 사이에서 그저 끝없이 왔다갔다합니다. 그리고 사회적으로 포괄적 의미의 '좌파'와 '우파'에 대한 지지의 폭은 거의 비슷한 수준이니 양쪽 중에서 누가 집권을 해도 아주 '급진' (내지 '과격')해질 수도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다른 쪽'도 배려하는 합의 정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일본에서의 투표는 계급과는 (아직도) 거의 무관하고, 연령대와는 매우 부분적 관계만 있습니다(투표권 있는 이민자 출신들이 1% 이하이기에 고려 대상도 아닙니다). 한국의 경우에는 '투표'의 의미는 크게는 두 가지로 압축할 수 있을 듯합니다:
 
첫째 지역적 정체성의 표현. 해당 지역의 '건설 경기'가 살아야 다수의 영세사업가들과 중소기업 노동자들이 총체적 '활황'의 덕을 보니 해당 지역에다가 '대형 공공 토목 공사 예산'을 잘 가져올 '지역 인재'를 모색해 뽑는 것은 투표의 의미입니다. 여기에서는 '정치적 신념'도 '도덕적 자질'도 전혀 고려 대상은 아니지요. 오로지 키워드는 '건설', '경기', '예산 따기'입니다.
 
그러기에 '계급 정치'가 (매우 제한적으로) 가능한 곳은 '건설 경기'에 크게 좌우되지 않는 공공 부문 및 대기업 노동자들이 많은 일부 지역 (경기도, 울산, 창원 등등)입니다. 이 부분은, 일본에서 이미 1950년대에 공고화된 '토건 정치' 모델과는 거의 그대로 일치됩니다.
 
둘째 '화풀이'. 이건 일본보다 한국에서 훨씬 강한 현상인데 일단 어떤 정권의 임기 중반 (약 2년)쯤 되면 그 정권에 대한 유권자의 '피로 현상'이 일어납니다. '예산'을 따봐야 어차피 '경기'가 바라는 만큼 좋지 못하고, '코드 인사' 때문에 배제를 당한 지역적/종교적 등등의 파벌들의 불만이 쌓이고 거기에다가 부패 스캔들 등이 계속 터지고... 임기 3년째 대통령은 한국에서는 이미 '레임덕'에 가깝게 됩니다.
 
결국 '정권 심판'한다는 유권자들은 A라는 보수적 정권을 쫓아내고 B라는 보수적 정권을 대신 창출시킵니다. 그렇다고는 바뀌는 것은 있는가요? 글쎄, 부자 감세의 폭이나 대북 정책, 새로운 건설 예산의 (지역적) 내역, 그리고 새로운 장관들의 출신 학교와 출석 교회/사찰 정도는 조끔씩 바뀌긴 하지요.
 
이외에는 아무것도 바뀔 수 없는 이유는, 한국을 '선출되는 권력'이 좌우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전체 부동산의 절반 넘게 소유하는 5%의 땅부자나 삼성의 회장을 누가 투표로 뽑나요? 한국에서 '지역/건설' 정치 모드에서 '계급/연령 정치' 모드로의 전환은 가능할까요? 글쎄, 저는 '조심스러운 낙관론'을 표명하고 싶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 아무리 '부양'을 해도 건설 경기는 결국 큰 폭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고 '최고의 저축 형태'로서의 부동산의 의미는 좀 달라질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둘째, '20대 백수'와 '불안한 20대 노동자'의 급상장해가는 과정에서는 '계급적 불만의 정치'의 가능성들이 조금씩 열리는 것 같기 때문이지요.
 
새로운 대졸들의 다수는 이제 '백수' ('취업 준비생' 등등등)가 되거나 '인턴'이라는 기만적 이름의 '비정규직 이하의 비정규직' 되거나 그냥 비정규직이 되는, 20대들이 더 이상 절망감 이외에 아무것도 느끼지 않는 사회에서는 '본질적으로 다 갈아보자!' 분위기의 조성은 가능할 것 같기도 합니다.
 
결국 문제는, '진보'가 생산하는 담론들이 20대의 '절망감에 빠진 유권자'들에게 어디까지나 '현실적 실행 가능한 대안'으로 인식되는가 라는 부분이지요. 어렵긴 매우 어렵지만 한국 자본주의가 잘나가던 1997년 이전까지의 시대나, '개혁 사기꾼' (노무현/유시민 류들)들에 대한 기대들이 아직 살았던 2006~07년 이전까지의 시대보다 지금은 기회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
[박노자칼럼] 가난뱅이는 죽어도 싸다?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09-03-16 오후 09:26:45)
 
1970년 11월13일, 전태일의 분신은 한국 현대 지성사의 분수령이 됐다. ‘민족중흥’의 환상에 들떠 노동자들의 고통을 그저 ‘근대화’를 위해 치러야 할 당연한 대가로 생각했던 많은 지식인들은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들으면서 민중의 피눈물로 이뤄지는 ‘근대화’의 진면목을 알게 됐다. 함석헌이 전태일 분신을 계기로 노동운동이야말로 ‘씨알’들의 가장 본격적인 움직임인 줄 알았고, 안병무는 전태일의 몸을 살라버린 불길 속에서 한국 예수를 봤다. 한 무명 노동자의 죽음은 이 나라의 지성계를 바꿔 놓았다. 불과 39년 전의 일이다.
 
‘민족중흥’과 같은 용어들이 이미 웃음거리가 된 오늘의 민주화된 세상에서는, 사회가 안겨준 고통에서 비롯된 한 사람의 죽음은 원칙상 독재시대보다 훨씬 더 무겁게 받아들여져야 하지 않을까? 지배자들이 ‘선진화’를 늘 들먹이는 곳에서는 생명의 가치도 그만큼 높아져야 하지 않는가? 그러나 현실은 그 정반대다. 노동자들의 대량 비정규직화와 신용불량자 양산으로 “외환위기 극복”의 기만극이 연출됐던 새 천년 초기부터 수출과 토건 위주의 기형적인 한국 경제가 드디어 사상 최악의 위기에 봉착한 오늘날까지 대한민국에서 수십명의 가난뱅이들은 시위 도중 맞아 죽기도 하고, 투신·분신으로 죽기도 하고, 경찰의 살인적 ‘작전’으로 불길에 휩싸여 죽기도 했다. 용산 참사 희생자들의 얼굴들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지만, 이외에도 생존권 투쟁에 나선 민초들은 2000년대 내내 계속 죽어갔다. 2005년 11월15일, 서울 한복판에서 시위 진압 과정에서 경찰로부터 입은 중상으로 사망하고 만 전용철·홍덕표 농민을 우리가 벌써 잊었던가? 2006년 7월16일, 포항에서 시위를 벌이다가 죽은 하중근 노동자를 이미 망각했던가? 2004년 2월14일에 비정규직 차별 철폐를 요구하는 유서를 남기고 전태일과 똑같이 분신자살한 현대중공업 하청업체 소속의 박일수 열사와 마찬가지로, 비정규직들의 요구를 힘껏 외치기 위해 고통스러운 죽음을 택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70년대와 똑같이 노동운동의 역사는 피로 쓰이고 있다.
 
하지만 놀랍게도 꺼져버린 이들의 생명에 대해서 ‘주류 사회’는 70년대보다 훨씬 더 무관심하다. 싸늘한 주검이 돼 버리는 농민·노동자들을 보고 ‘참여정부’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유명 자유주의적 지식인들은 과연 많았던가? 박일수 열사와 같은 비정규직들의 죽음은, 비정규직을 가장 악질적으로 양산하는 재벌들의 상품 불매운동으로라도 이어졌던가? 대학에서 안정된 자리를 잡은 지식인이나 시민사회 ‘주류’의 노동자·농민에 대한 무관심은 실로 놀랍다. 다수 지식인들 스스로도 가난했던 70년대와 달리, 아파트 한 채와 정규직을 갖고 있는 오늘날, 중산층 지식인이 하층 노무자와 완전히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어서 그런 것인가? 계급 분화가 본격화돼 중산층과 하류층이 철저하게 분리된 만큼 ‘하류 인생’들의 고통은 ‘시민 계층’한테 남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2000년대의 전태일들에게 무관심한 이들은 기억해야 할 게 있다. 대공황 시대에 영원한 정규직도 영원한 중산층도 없다는 것이다. 설령 본인은 중산층으로 남아도 ‘88만원 세대’에 속하는 그 자녀들이 ‘하류 인생’을 면할 보장은 없다. 우리가 ‘밑’의 고통에 관심을 끄고 ‘나만의 인생’을 즐기는 길을 택할 경우, 무관심이라는 이름으로 우리가 가하는 폭력은 결국 부메랑처럼 돌아와 우리를 칠 것이다. 아주 아프게.
   
---------------------------------
연예인의 몸은 '국민의 몸' (레디앙, 2009년 03월 25일 (수) 10:01:15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자살은 인간성으로의 몸부림…김태희 모르는 나는 간첩?"
 
근인(近因)이야 특히 장자연씨의 경우에는 아주 분명합니다. 연예인은 '판촉'돼야 하는 상품이 될 때에는, 그 상품의 일차적인 구매자가 사실상 독점 기업(방송사 등등)일 때에 판매자에게 구매자가 얼마든지 무서운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상품'이 성애화된 이미지의 여성의 몸이라면, 독점적 구매자의 폭력은 또 얼마든지 성추행/성희롱/성상납 요구로 나타나게 돼 있다는 것이지요. 이 형태 자체는 예컨대 대기업들이 중소 하청기업들에게 행사하는 단가 인하 압력과 구조적으로 흡사한 것이고, 시장이란 얼마나 폭력적일 수 있는지를 십분 보여줄 뿐입니다.
 
우리는 보통 '국가 폭력'에 늘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데, 사실 국가보다는 시장은 어쩌면 더 끔찍한 폭력을 더 쉽게 행사하지요. 국가를 비판할 자유라도 우리가 지금으로서 갖고 있는데 (물론 이명박 시대에 접어들어 그 자유가 많이 축소돼갑니다) '나'의 노동력을 구매하는 시장 행위자를 '나'는 나서서 비판한다는 것은 거래 중지와 시장으로부터의 퇴출을 전제로 하는 일입니다.
 
국가를 합리화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지만, 여론이 무서워서 대통령이나 장관이 자신의 부하에게 차마 할 수 없는 행위를, 교수가 되고 싶어하는 여성 대학원생에게 그 지도교수가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아주 용감한 극소수의 피해자들이 출세를 포기하면서 이 문제를 공론화시킨 덕에 우리가 이만큼 '공개적으로' 아는 것이고, 우리가 '공개적으로' 아는 부분은 현실의 빙산 일각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피라미드적 시장 구조 (극소수의 구매자, 무수한 판매 희망자)가 근인이라면 원인은 '연예인의 신체'에 대한 자본주의 사회의 시각에서 찾아야 할 듯합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의미의 층위가 중첩됩니다. 일면으로는 크게 성공한 연예인은 '국민의 몸'이 됩니다.
 
제가 한 번 한 대중 강연에서 어떤 질문자가 김태희인가를 거론했을 때에 "그게 누구에요?"라고 물어봤을 때에 "그걸 어떻게 모르느냐"는 다수의 반응이었습니다. 김태희를 모르면 '간첩', 즉 비국민입니다. 불쌍한 이북 사람들에게 별로 잘 생기지도 않은 김정일 아저씨나 역시 별로 외모가 준수하지 못한 그 부모 친척밖에 아주 가시적인 '네이션 심볼'은 없다시피 하지만, 이 쿨하고 다이내믹한 위대한 대한민국은 자랑스럽게도 김태희나 장동건, 욘사마의 신체들을 그 상징으로 소유하고 있으니 유유자적하게 자애자중해도 모자람이 없습니다.
 
그런데 '네이션 심볼' 이야기는 최종 소비자 쪽 이야기지요. 판매 희망자 (연예인 지망생)와 판매 중계자 (기획사), 일차적 구입자 (방송사 등등)의 차원에서는 특히 성애화된 여성 연예인의 몸은 일차적으로 '돈을 벌어주는 기계'입니다.
 
이 날씬한 다리, 이 '짜릿하고 파격적인' 드레스 차림, 이 '귀여운 미소', 이 모든 것이 '매력 만점'이어서 시청률을 높여야 하고, 광고를 찍어서 물건을 팔아야 하고, 영화들의 흥행 성공을 보장해야 하는 것이지요. 시장에서의 돈벌이라면 당연히 경쟁이 붙기 마련인데, 연예인 사이에서도 '외모 경쟁' 등등은 치열할 수밖에 없지요.
 
누가 보다 많은 '매력'을 발산하는지, 누가 매체에서 보다 자주 나오는지, 누구의 몸값이 더 높은지, 누가 스타 반열에서 어느 정도의 위치를 점하는지. 자본주의 시스템은 다 그런 것이고 '몸값'이라는 아주 끔찍한 표현은 교수에게도 일선 회사원에게도 그대로 쓰이지만 아주 큰 돈이 왔다갔다하는 연예계에서는 '나 자신의 상품화하기'가 훨씬 더 철저합니다.
 
인생 자체가 이제 '판매'된 것이니까 어디에서 뭘 해도 늘 '이미지 관리'를 해야 하고, 개인 생활도 거의 다 공개돼 '매력'의 한 요소가 되니 연애하고 가정 꾸리고 하는 일 하나 하나 다 자기 자신의 '판촉'과 연결됩니다. 마르크스나 프롬이 다시 깨어나도 '인간 상품'의 보다 완전한 형태를 못찾을 것입니다. 사실, 인간도 거의 없어지는 듯하고 남은 것은 광고소득과 신문 연예계 뉴스 등등입니다. 그렇게 살다가 비관자살을 안하겠습니까?
 
근인이야 어떻든간에 연예계 종사자들을 자살하기 쉬운 환경에 집어넣는 것은 '자기 상품화' 규범과 보편적 '인간성'의 충돌입니다. 인간으로 남으려는 사람은 이 규범들을 받아들일 수 없기에 결국 죽음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인간성을 살리는 것입니다.
 
-----------------------------------------
저항의 중심은 중간 계층들이었다 (레디앙, 2009년 04월 01일 (수) 09:31:50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대공황의 법칙들] 강자 더 강해지고, 기층은 원자화되고
 
세계 체제가 대공황을 당할 때에 그 체제의 본래 법칙들은 가시적으로 노골화됩니다. 대공황 때에 일어나는 일들을 유심히 지켜보기만 하면, 이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그 심층적 원리가 무엇인지 당장에 알아차리게 되지요. 가장 중요한 법칙 2개를 열거해봅시다:
 
1. 약육강식
그건 이 체제의 원래부터의 특성이지만 대공황 때만큼 실감될 때도 없어요. 이 법칙의 작동은 여러 측면에서 고찰해볼 수 있습니다:
 
1) 지리적 측면 : 세계 체제의 핵심부에서는 '부양책'이라도 쓸만한 여윳돈이 있지만, 주변부는 물론 준주변부의 상당수 약체들은 운신의 폭이 훨씬 좁습니다.
 
금년에 8% 쯤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할 듯한 앙골라의 경우에는 '부양책'이 문제가 아니고 아사 사태 대비가 문제지만, 그 앙골라에서 떼돈을 버는 노르웨이 석유 등 재벌들에게는 그게 별로 관심사도 아닌듯합니다.
 
대공황 때에는 약체들이 강자들의 먹이가 됨으로써 강자들은 보다 강해지는 것입니다. 예컨대 중국이 계획대로 5~6% 이상의 성장할 경우 일부 중국 대기업들에게는 이번 위기는 실로 기회가 될지도 모르지요.
 
2) 계층적 측면 : 고통을 당하는 순서는 '밑으로부터'입니다. 직장에서 내쫓기고 단속반 사냥감이 되는 외국인 노동자부터, 일감이 없어지는 일용직 노동자부터, 부도나는 영세상인부터가 순서입니다. 고국의 빚을 갚을 길이 없는데 직장을 잃은 외국인 노동자, 부도 나서 처자를 먹여줄 방도가 없는 영세 상인, 일감이 없어진 '노가다' 노동자는 얼마든지 자살로 몰릴 수 있습니다.
 
어느 정도의 숙련도가 있는 비정규직도 위험하지만 위험도가 덜 되는 것이고, 대기업 정규직은 - 한국 경제가 아예 파산으로 치닫지 않는 한 - 소득 절감 정도의 고통으로만 국한될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는 위기를 기회 삼아 현금 쌓아두기에 들어간 일부 기업에서는 기업잉여를 불려 '득'을 볼 수도 있고, 이번 정부의 망상적 토건 프로젝트로 득을 볼 기업들도 있습니다.
 
3) 연령적 측면 : '20대 백수'와 50대 이후의 퇴직자/실업자들은 가장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한국 노동 시장이 철저하게 젠더화돼 있기에 '여성이라는 불리한 점'을 태생적으로 가진 이들도 비교적 큰 고통을 당하게 돼 있습니다.
 
2. '저항 중심으로서의 중간 계층들' 
일반적 통념과 달리 저항을 주도하는 이들은 꼭 '가장 어렵게 사는' 이들은 아닙니다. 1960년 4월, 1987년 6월의 데모 학생들도 상당수 중산층이었지만, 1917년 2월에 러시아 제정 정권의 타도에 앞장선 페트로그라드의 브보르그스카야 스토로나의 고숙련 금속공들도 그들의 적대자인 경찰들보다 월급을 더 많이 (한달에 60~70루블 내지 그 이상) 받았습니다.
 
1987년, 1996-1997년 한국 파업 운동도 고숙련 정규직 중심이었습니다. '맨 밑'의 고통은 아주 커도 조직화될 만한 여력은 많이 부족하고, 외국인 노동자나 일용직 노동자의 경우에는 '파업'이라는 무기를 빼앗기고 만 상태입니다. 즉 최처 계층들이란 원자화된 상태에서 '생존 전투'에 몰두해 있는 만큼 지배자들에게 집단적으로 대들기가 아주 힘들어요.
 
반대로 임금근로자 그룹의 중위, 상위 부분을 이루는 광범위한 의미의 중간 계층들(중간/고소득 정규직 노동자, 공무원 노동자, 전문직 노동자 등)은 정치의식의 발달 기회가 많은데다가 조직화의 기회가 보다 많이 주어져 있고 집단 행동을 취할 만한 여유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만약 이들은 선두에 나선다면 최저 계층들을 포함한 광범위한 '민중' 복합 그룹의 저항적 동원은 가능할 듯합니다.
 
한국의 체제 안에서 이와 같은 '저항적 동원'의 가장 큰 걸림돌은 무엇인가요? 무엇보다 원칙상 저항에 앞장서야 할 20대 노동시장 신규 진입자 및 신규 전문직 채용자 - 대학생부터 젊은 도심 사무실 월급쟁이까지 - 의 '생존 전투'에의 포획 상태입니다.
 
여름 휴가 5주의 나라와 기껏해봐야 4~5일 쉬는 나라에서 '저항'에 나설 만한 근로자의 여력은 다를 수밖에 없는 법이지요. 한국적 체제란 일단 '딴 생각'을 할 만한 여유를 주지 않는 체제입니다. 그러나 절망적 정서가 어느 정도 고착되어 대중화, 보편화되면 대한민국도 어쩌면 그리스처럼 '젊은이들의 만성적인 불만 폭발의 나라'가 될 수도 있지요. 결국 현금 상황의 절망성을 어느 정도 깊이 인식하는가 라는 문제는 핵심적일 듯합니다.
 
-----------------------------------
십자가를 내팽개친 한-일 기독교 (레디앙, 2009년 04월 06일 (월) 10:54:28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한국에 교회는 있나?…"예수는 부처, 마르크스보다 더 급진적"
 
요즘 양현혜 교수(이대)의 『근대 한-일 관계사 속의 기독교』(이대출판부, 2009)를 유심히 읽고 있습니다. 이 책의 커다란 장점은, 근대 기독교 역사를 '한-일'을 하나로 묶는 방식으로 쓰는 기본 접근의 형태부터입니다. 사실, '민족/국민' 개념의 역사도 그렇고 대중 문화의 역사나 관료제 역사도 그렇지만, '한국적 근대'의 정리를 '일본적 근대'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하는 것은 바람직합니다. 이 두 개의 근대성의 변종은 서로 너무나 깊은 '관계'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기독교라면 '일본'보다 '미국'을 먼저 떠올리고 또 그럴 만한 이유도 있지만, 한국 기독교의 수용, 토착화, 그리고 왜곡 등은 많은 면에서 일본 기독교와 흡사성을 가집니다. 물론 차이점도 만만치 않지요. 기독교에 대한 아주 근본적인 접근법에 있어서는 근대 한-일은 참 닮았습니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기독교의 중핵이 돼야 할 '십자가'를 팽개친 것은 똑같다는 것이지요.
 
교회가 동네마다 몇 개씩 있어서 그런지 우리는 대개 교회와 기독교를 아주 쉽고 간편하게 인식하지만, 사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붓다나 마르크스보다 훨씬 더 급진적이지요. 황제에게 황제의 것(세금)을 돌려도 마음만큼은 하나님과 이웃사랑에만 바쳐라, 악마에 의해 정복된 이 세계와 선을 그어라, 이 악마적 세계에 포획된 가족들과 필요하면 주저없이 떨어져라, 돈/신분/행복과 같은 우상을 팽개쳐라, 그리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히지 않고서 이 모든 일을 해낼 수 없다면 십자가를 행복하게 받아들여라 - 이건 원래 기독교입니다.
 
기독교는 '잘 사는' 것을 가르치지 않아요. 이 세상의 사람으로서 '잘 죽는' 것을 가르치고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는 걸 가르치지요. 기독교의 핵심이라면 교회도 아니고 예배도 아닙니다. 우상파괴와 십자가지요. 원칙상 기독교는 비폭력적이지만 우상파괴 과정이란 꼭 그렇지도 않아요. 예수께서 채찍을 들고 성전에서 상인을 축출한 것은 엄밀히 세속적 의미에서는 '폭력'이었을 것입니다. 폭력은 나쁘지만, 간디 말마따나 비겁함은 훨씬 더 나쁜 것이지요.
 
'십자가'의 기독교를 한국과 일본이 경험하지 않은 것도 아니거든요. 17세기 초기의 일본의 천주교도 박해나 1880년대 이전까지의 조선에서의 박해 속에서는 '십자가의 교인'들은 속출했어요. 그런데 개항기 이후의 관점에서 볼 때에 이게 이미 '과거'이었어요.
 
끝에 가서 1941~45년간 일본 기독교의 모태라고 할 영미를 상대로 국가가 벌이는 전쟁까지도 무조건 궁정해야 하는 것은 이 노정의 아이러니였어요(17~44쪽). 물론 일제가 패망하자마자 그것도 긍정해 맥아더장군이라는 새로운 '힘'에 무조건 귀의했지만, 남은 문제는 하나 밖에 없지요. 이 '힘'의 광란 속에서는 십자가의 힘은 어디에 있는가요? 전쟁을 끝까지 부정, 거부해 감옥에서 죽은 몇 안되는 여호와의 증인에게야 '십자가'는 있었지만, '주류' 기독교는 십자가가 아닌 안락의자에 앉아 '근대'를 즐길 뿐이었지요.
 
한국 교회의 근대적 여정이란 그것보다 훨씬 복잡다단했어요. '근대'를 마음껏 즐기고 싶어도 1948년까지 근대의 핵심이라 할 '국민국가'가 부재하기에 자의로든 타의로든 좀 급진화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한국 교회 안에서 '우리'와 박해 받는 이스라엘 백성의 공통점을 찾으려는 분위기도 있었고, '약자를 위한 신의 공의'에 목말라하는 오산학교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적 그룹도 있었고, 김교신처럼 '약자 조선의 기독교'를 체계화해 결국 십자가를 짊어진 예언자들도 있었고, 병역거부자들의 큰 스승 함석헌도 있었어요. 힘이 없는 자에게 오게 돼있는 복이라 할까요? 힘이 없는 자는 힘을 아무리 숭배하고 싶어도 한계가 좀 있는 것입니다.
 
양현혜 교수의 이 신간의 약 70%를 읽은 이 시점에서는 저의 답은 "함석헌과 김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이들의 마음 속에서는 존재합니다. 나머지는 예수님과는 큰 상관은 없으며, 한국 교회 건물들의 99%를 복지관이나 공연장으로 그 용도를 변경해도 신은 노여움을 품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지요. 
 
-------------------------------------------
"'개혁적 지식인' 여러분, 제 말씀 좀..." (레디앙, 2009년 04월 10일 (금) 10:39:41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노무현 게이트를 보고] 자유주의적 개혁의 한계와 좌파의 세력화
 
이미 머나먼 시절인 것처럼 느껴지는 그 2002년 벽두에, 저는 노무현을 대통령으로 만든 대한민국이 무한히 자랑스러웠습니다. 푸틴의 러시아, 고이즈미의 일본, 부시의 미국에 비해서는, '노무현의 한국'은 그 당시로서 왠지 '희망의 오아시스'로까지 느껴진 부분은 있었지요.
 
그러나 그 뒤로는 가슴 아픈 일이 하도 많아 '그 때 그 감동'은 결국 여지 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시민 김선일의 희생된 목숨과 함께 말씀이지요. 이라크 파병과 김선일의 죽음 이후에는 제게 '노무현'이란 더이상 그 어떤 '의미 있는' 존재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지지한 일도 없고 약간의 '희망'을 가져봤을 뿐인데, 2003년 이후로는 그 '희망'도 없어지고 말았고, "일체 보수 정치인에 대한 관심을 아예 끊는 게 좋다"는 결심은 섰습니다. 지금도 그 결심대로 살고 있지요.
 
하여간 저도 '노무현 게이트'가 있으나 마나 "보수 정치인이란 대한민국에서는 원래 그것이지요..."라는 생각 이외에 별다른 감상이 없는 것이고, "정치인이란 원래 그냥 도둑이다, 단 일반적인 도둑보다 훨씬 악질적이다"라는 상당수 한국인들의 정치관을 공유하는 제 아내도 무관심, 무표정이었습니다. 아니면 군사 정권 말기보다 숫자가 그래도 좀 줄었다는 데에 대한 약간의 안도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요. 그 때야 단위는 백 억대이었지 않았나요?
 
저야 '추락한 노무현'에 대한 눈물도, 솔직히 이렇다 할만한 분노도 ('대한민국 보수 정치인' 중에서는 그보다 나은 이가 있으면 그에게 먼저 돌을 던지시라!) 관심도 없는데, 제 주위에 이번 일을 많이 비관하실 분들이 좀 계십니다.
 
다름이 아닌 노무현을 '끝까지 지킨' 소위 '개혁적 지식인' 분들입니다. 이 분들의 이라크 파병이나 한-미FTA, 비정규직 양산 등에 대한 감상은 저와 별로 다르지도 않았는데, "그래도 개혁이지 않나", "그래도 역사의 진보이지 않나"라는 말로 끝내 '차악론'을 펼치신 것입니다. 즉, 노무현 정권도 '문제'가 많지만 '반대쪽'에 비해 그래도 덜 악하고 조금 더 선하지 않나, 조금 더 '개혁 지향적'이지 않나, 이것이었습니다.
 
그 분들이 말씀하시는 '개혁'이란 뭔지 제가 늘 궁금해왔는데, '햇볕 정책' 이외에는 대체로 △악법 (국보법 등) 폐지 △ 관료제 합리성 제고 (각종 토착 비리 척결) △월권을 행사해온 각종 대자본 (특히 삼성/조중동)에 대한 적당한 국가적 견제 △부동산 시장 정상화 ('거품 터지는' 일을 방지하기 위한 단계적 땅값 내림세 유도, 투기 방지책), 그 정도였습니다.
 
뭐, 발상이야 좋은 발상이지요, 저도 하등의 반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자유주의적 '개혁론'의 기본적 문제점이란, '자유주의'라는 틀에 갇혀 있는 이상, 위에서 나열한 아주 '온건한' 목표들도 사실 달성할 수 없다는 슬픈 현실입니다. 노무현 정권의 완전한 실패는 바로 이 부분을 입증하기도 합니다.
 
'온건한 자유주의적 노선'마저도 사실상 '자유주의'보다 더 진화된 (사회주의적/사민주의적) 세력들만이 제대로 실행할 수 있다는 게 '한국적 정치'의 재미있는 역설입니다. 그게 한국 자본주의 형성 과정, 성장 통로, 그리고 현존 지배계급 새력 분포/지배 형태와 관련이 있어요. '온건 자유주의 개혁' 목표 별로 이야기하자면 다음과 같지요:
 
1) 악법 폐지
국보법 폐지라도 성취하자면 한국적 '지배 연합'의 한 축인 '안보 블록' (군+ 정보기관)과의 심각한 대결을 불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특히 군 고위급들의 현 입장에서는 북한과의 대결을 법제화시키는 국보법이야말로 '거대한 육군'의 존재 근거이기도 합니다.
 
국보법을 폐지해가면서 이북과의 '평화공존'을 심화시키자면 "꼭 군인 머릿수가 70만이어야 되느냐"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을 수 없거든요. 그런데 그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고 너무나 귀중한 '밥통'의 문제입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에서 '자유주의 정치인' 중에서 '안보 블록'과의 아주 심각한 불화를 감수할 사람은 있나요?
 
2)관료제 합리성 제고
사실 조금씩 나아져가고 있긴 하지만, 중앙, 지방에서 엄청난 토건 예산을 풀어주곤 하는 '토건 국가' 체제 안에서는 예산 집행자와 시공업자 사이의 '검은 컨넥션'을 완전히 끊기는 어렵지요.
 
한국보다 훨씬 진화된 일본의 관료제 작동법을 보시면 아실 것이지만, '토건 국가'로서의 한계라는 게 있어요. 그러면 '토건 국가' 자체를 점차 해체시키자면, (역시 토건 업자들에게 여러가지 신세져온) '자유주의 정치인'으로서는 불가능하지요.
 
3) '문제적 대자본' 견제
총수출의 15%를 삼성전자 하나가 보태주는 '독점 자본 위주의 수출 주도 모델'라는 틀 안에서는 그게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각종 '삼성관'이 많이 새워진 '명문대'를 봐도, 상당수 최고 국가 기관들의 현황에 대한 X파일이 제공하는 정보를 봐도, 삼성경제연구원과 역대 정권들의 경제 비전을 서로 대조해봐도 이 나라를 누가 실제적으로 지배하고 있는지 오척동자도 알 것입니다.
 
이건 본격적으로 해결하자면 아예 수출 주도 모델을 해체시켜가면서 주요 독점 자본에 대한 준국유화 정책까지 고려해야 하는데, 그걸 '개혁주의자"들이 해낼 것 같아요?
 
4) 부동산
한국 지배계급의 가장 선호하는 저축 형태이기도 하고, 중산층 상위, 중위 부문의 포섭 도구이기도 합니다. 월급쟁이가 서울/경기도의 '괜찮은 동네'에서 아파트 한 채를 갖고 있어도 벌써 '서민' 대열을 이탈해 '신분 상승'한 것처럼 느끼니까요. 부동산 시장 대수술을 계획하자면 역시 상류층뿐만 아니고 중간 계층들의 '윗부분'들의 반감 살 일까지 감수해야 합니다. 어느 자유주의자도 하기 어려운 일이지요.
 
위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개혁' 담론이라는 게 한국에서 더 이상 의미가 없어요. 물론 제2, 제3의 노무현도 집권할 수야 있지만, 그 실적은 제1대 노무현과 크게 다르지 않을 걸요. 자유주의자들은 그 무슨 '개혁' 이야기를 들먹여도 '한국적 체제' - 군사/안보 국가, 부동산 과열, 토건 집중, 관료들에 대한 대자본의 지배, '명문대' 학벌 우대, '현대판 천민' (비정규직) 과중 착취 등등 - 그냥 그대로 갈 것입니다.
 
1998~2007년간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으면, 그게 아예 바뀔 수 없다고 판단해야 합니다. 사회주의적/사민주의적 세력들이 정치, 사회적으로 '세력화'되지 않고서는 말이에요... 
  
-----------------------------------
푸틴과 이명박, 준주변부의 관벌들 (레디앙, 2009년 04월 15일 (수) 09:54:15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러시아엔 '개인'만 있고 '사회'는 없어"…푸틴-MB "방송부터 장악"
 
공산당을 좋게 보든 나쁘게 보든간에 그래도 그 때에는 적어도 이와 같은 '일상' 영역에서는 '공공성'의 논리는 훨씬 잘 적용됐습니다. 고급 간부라 해도 '뺑소니'를 저지르면 처벌을 받게되어 있었지요. 그러나 재미있게도 자본화돼가면서 사회가 일정 수준 '탈현대화'돼 권력이 사유화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학교 노동자인 저로서 제일 '자극적' 부분은 요즘 저희 모교의 교수 행정 관계이었지요. 원래 러시아는 당연히 국립대학은 종신고용제인데, 이건 소련 시대 이전에 독일식 학교 행정을 본뜬 그쪽 대학의 '전통'이지요. 그런데 푸틴과 메드베데프 등 현재 권력자들의 '은사'라는 공로(?)로 지금 총장이 된 그 쪽 새 총장은, 자신의 명령으로 하루에 일체 교수들을 계약제로 바꾸어 놓았답니다.
 
5년제 계약인데, 원칙상 재계약 여부는 학교 재량입니다. 물론 '구두 설명'은 "이게 형식일 뿐이다. 큰 하자 없는 한 정상적 종신고용을 당연히 시켜주겠다"는 식인데, 말로 하는 게 어느 법원에서도 쓸모가 없지요. 즉 지식인 '철밥통' 시대는 그쪽에서 이제 막을 내리는 셈입니다.
 
1970~80년대, 소련 말기의 공산당도 꼴보기 싫은 '재야적' 교수를 함부로 해임시킬 수 없었는데(해임하려면 교수회의 결정, 현장 노조 위원장 사인, 총장 사인 등 너무나 많은 사인들을 받아야 했음) 이제 새로운 '주인네'들은 꼴보기 싫은 사람을 아주 쉽게 처리할 수 있을 겝니다.
 
엄청난 변동이지요? 저는 당연히 사회에서 이에 대한 논란이 일어났으리라 짐작하고 '사회의 반응'에 대해 물었습니다. 선배의 답은 걸작이었지요. "러시아 사회? 그런 게 없어요, 없대니까요. 노조는 미동도 없었고, 교수들은 무서워서 일언반구를 못하지요. 공황인데 이 직장을 잃으면 어디를 가요? 그리고 학교와 무관한 이들은 학교 일에 간섭 안하지요. 대체로 지금의 러시아식 생활 방식이란, 자기와 식솔, 그리고 인연들을 챙기는 것인데, 그외의 세상에 철저히 무관심하지요. 사회를 찾으려면 당신네들의 노르웨이에서나 찾든지, 러시아에서 이런 게 잘 없어요. '가족'은 있고, 수천만 명의 '가족'들 위에 '나라 주인님'은 있는데, 그게 다예요"
 
이게 사실 러시아뿐만 아니라 중국 등 소위 '권위주의형 신흥 시장 국가'들의 현실을 굉장히 잘 설명해주는 대목입니다. 맞습니다. 그리고 중국-러시아 블록의 자본주의가 '구' 산업화 사회들에 비해 그 나름의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건 바로 이걸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어떻게든 기존 체제에 잘 적응해 '알아서 잘 기는' 수천만 명의 고급인력들을 거느려 초과 수취를 행해 비교적 자유롭게 노동자의 몫을 줄여 이윤율을 높일 수 있는 사회(?)는 자본주의의 '모범생'이지요. 그리고 '사회'가 없다는 것은, '개인'이 온 마음, 온 몸으로 '오로지 시장, 오로지 국가'를 받들고 이 둘의 절대적 권력/권위에 자신을 맞추어야 한다는 걸 의미합니다.
 
제가 보기에는 끔찍한 일이지만, 자본가 입장에서는 완전히 원자화된 '인력'이야말로 요리하기에 제일 좋지요. 물론 요즘 몰도바나 그루지아에서의 폭동들은 보여주듯이, 이와 같은 식으로 조직된 준주변부 사회에서 '나라 주인님'이 '백성'들을 잘 먹여주지 못할 때에 "나쁜 주인님을 쫓아내 좋은 주인님을 맞이하자"하며 대중 운동도 일어날 수 있지요. 그러나 경쟁하는 관벌 중의 또 다른 관벌이 그렇게 해서 집권해도 본격적으로 바뀔 게 아무 것도 없을 것입니다. 세계 자본의 '황금 어장'인 옛 스탈린주의 지역들의 사정은 그렇습니다.
 
저는, 이명박 등 요즘 한국 지배자들도 이와 비슷한 형태의 '개인만 있고 사회가 없는' 상태를 이상시하는 게 아닌라, 라는 의심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사회'의 버팀목인 방송부터 왜 꺾으려 했겠습니까? 푸틴도 방송 등 언론 장악부터 시작했단 말예요.
  
----------------------------------
제 스승 박준호 선생님의 별세 (레디앙, 2009년 04월 20일 (월) 16:39:09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삼국사기> 완역하시고 <삼국유사> 번역 중 91세로 타계
 
저를 '한국사 연구자'로 만드신 제 스승님 미하일 박 (박준호) 선생님께서 2009년4월 16일 낮에, 자택에서 숙환으로 별세하셨습니다. <삼국사기>를 러역하신 바 있는 미하일 박 선생님께서 평소에 <삼국유사>마저 다 번역해놓으면 원한없이 죽을 수 있다는 말씀을 계속 하셨습니다.
 
물론 미하일 박 선생님의 별세에 대해서 한국에서 그 무슨 '언론'들도 언급한 바 없었습니다. 적어도 제가 그러한 언급을 아직 못본 것입니다. 뭐, 고려인, 그리고 미국과 서구, 일본이 아닌 모든 '가난한 나라'들의 연구자들에 대한 무시가 몸에 밴 인간들에게 뭘 기대하겠습니까? 저는 이런 태도에 하도 익숙해져 벌써 화나지도 않습니다. 하여간 <삼국유사>를 쓰고 읽는 것은 골프 치는 게 인생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무리들이 하는 일이 아니기에 저들이 우리들을 무시하듯이, 우리도 저들을 염두에 두지 않고 그냥 살면 됩니다.
 
미하일 박 선생님의 學恩을 다 이야기하자면 아예 책을 따로 써야 하기에 여기에다가 가장 중요한 요점만 아주 간추려서 적어놓습시다. 첫째, 미하일 박 선생님께서 고대사회를 무조건 '노예소유제'로 보려는 스탈린주의의 주박을 풀어 한국 고대 사회를 '초기 봉건 사회'라고 규정하시고, '국가 관료제 중심의 귀족적 사회'라고 상세히 정의해놓으셨습니다. 소련의 '동아시아적 국가봉건제론'의 원조는 실로 미하일 박 선생님이신데, 이 이론은 관료제 중심으로 발전돼온, 그리고 18세기 이전까지 시장/상품통화경제 영역을 별로 만들어내지 못한 한국 사회의 핵심적 특질을 가장 잘 설명해준 것입니다.
 
둘째, 1950년대초반부터 <삼국사기> 신라본기 러역을 시작하시어 1990년대 초반까지 연표까지 혼자서 번역하신 게 미하일 박 선생님이셨습니다. 1990년대에 들어와 제자들과 함께 <잡지>, <열전>까지 다 해놓으셨는데, 세계 최초의 <삼국사기> 외국어 완역이 완성됐습니다. 프로젝트를 해서 1~2년 내에 '성과'를 내야 한다는 이 시장 바닥 논리의 시대에 이렇게 필생일업으로 한 중세 문헌을 번역하는 사람들은 과연 몇 명이나 됩니까? 뭐, 사람을 탓할 게 아니고 진정한 학문의 씨를 말리려는 이 미친 체제를 문제시해야겠지요.
 
미하일 박 선생님께서 한국 고대사 이해의 기본적 체계를 세우신 분이지요. 이제 이 체계를 계속 발전시키는 것은 저희 제자들의 몫이지만, 요즘 같은, 권위주의적 '소프트 독재'와 신자유주의가 중첩된, 상당히 야만화된 러시아에서 외국의 고대사, 특히 중, 일에 비해 주목을 훨씬 덜 받는 한국의 고대사를 공부하는 것은 아주 어려운, 거의 생존을 포기하게끔 만드는 일입니다. 그렇다고 - 이명박 정권에 접어들어 다소 적어진 - 한국의 관련 기관으로부터의 지원에만 의존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요. 미하일 박의 학파가 생존할는지, 즉 한국 고대사에 대한 非민족주의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 접근을 하는 이들이 러시아에 계속 있을는지 정말 지금으로서 책임있게 예측하기 어려운 사항입니다.
 
--------------------------------
‘안티 민족주의’의 의미? (레디앙, 2009년 04월 24일 (금) 16:43:44 박노자)
민족주의는 자본주의 파생상품…본질은 계급문제
 
독감보다도 저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제가 참여한 학회는 과연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그리고 앞으로 공부의 방향을 어떻게 잡아야 하는가, 라는 데에 대한 근본적 의문들입니다. 융숭한 대접을 받아 신세를 많이 진 그 학회는 ‘트랜스내셔날’, 즉 ‘국민/민족’을 초월하는 역사쓰기에 관한 이야기로 관통됐습니다.
 
그 대의에 대해서야 저는 예나 지금이나 대찬성입니다. 마르크스주의 사학이란 원래 ‘국지적 특수성’과 ‘세계 보편성’을 아우르는 걸 과제로 설정하는 것이고, 원칙상 민족주의와 대립의 각을 세우게 돼 있습니다. 단군 신화를 조롱하는 1930년대의 너무나 멋진 백남운 선생을 생각해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사실, 아예 ‘국사’를 과감히 없애고 한-중-일-베트남의 역사를 같이 가르치는 게 제게 제일로 편합니다. 그러한 측면이 있기에 ‘트랜스내셔날 역사쓰기’ 학회 이야기를 듣자마자 당장에 참석을 신청했습니다. 그런데 학문적 담론의 범위를 넘어 ‘현실’을 직시하면 이 ‘트랜스내셔날’, 즉 ‘안티 민족주의’ 화두는 과연 어디까지 의미가 있는지 조금 더 생각해봐야 합니다. 어느 정도 수준이 있는 학문이야 애당초부터 당연히 ‘국제적’일 수밖에 없지요. 역사뿐만 아니고, 자연과학은 더욱더 그렇습니다.
 
그런데 다수의 피지배층들이 ‘국민/민족’의 범주에 갇혀 있는 것도 엄연한 현실입니다. 본인이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고 어릴 때부터 학교에서 받은 교육도 있고, 또 현실적으로 국가 단위로 짜여 있는 노동시장에 갇혀 있어서 그런 것이기도 합니다.
 
실직한 부산의 비정규직에게 ‘세계 시민’이 되는 지름길이란 사실 일본에 가서 불법 체류하면서 막노동하는 것인데, 그렇게 한다고 해서 그 쪽에서 ‘시민’이라도 될 수 있습니까? 그게 문제지요. 즉, 학회 토론장에서 “민족주의가 단세포적이다”라는 말을 백 번 외워도 학교 교육을 장악하는 국가도 미동도 하지 않겠지만, 국가 별로 구성된 노동 시장을 관리하는 각국 출입국사무소들도 움직일 일은 없을 것입니다.
 
‘트랜스내셔날’ 논리가 실천이 되자면 한국과 그 주변 국가에서 ‘세계 피지배층 연대’에 친화적인 정치세력이 국가 권력 탈환을 생각할 수 있는 수준으로 자라나야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습니까?
 
그리고 사민주의 우파가 권력을 갖고 있거나 나누어 갖는 영국, 독일 등의 나라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온건 좌파를 자칭하는 세력들이 국가를 장악한다 해도 ‘타자’에 대한 태도가 꼭 ‘트랜스내셔날화’되지도 않아요. 유럽 연합 밖으로부터의 노동이민을 제한하는 영국 정부의 정책을 보시면 아실 것입니다. 그리고 학자들은 아무리 ‘안티 민족주의’를 신조로 삼아도 국민 국가가 주도하는 세계 자본주의 질서는 바뀌지는 않지요.
 
그리고 과연 ‘민족주의’는 이 체제의 주된 이데올로기라고 봐야 합니까? 체제에 의해서 주로 ‘국가주의’라는 형태로 이용되기도 하지만, 그게 표방하는 이념뿐이지 체제의 속살은 아니에요. 이윤 추구라는 이 체제의 근본적 작동 원칙에 맞기만 하면 이 체제는 민족이고 국민이고 다 팽개칩니다.
 
‘특별히 도움되는’ 교포 내지 외국인에 한해서 이중 국적을 허용하자는 논의를 보셔도 아실 것이고, 과거가 별로 아름답지 못한 일본 기업을 끌어들여 우주항공산업 개발을 하는 모습도 보실 만합니다. 실제로는 예컨대 한국의 출입국관리 시스템은 각종 명칭 (외국인 등록증 등등)부터 시작해서 철저하게 일본 모델에 따라 짜여진, 아주 ‘국제적’ 시스템이지요.
 
한미 FTA를 봐도 아시겠지만 ‘외국인 투자자의 국가 제소’ 등 일정 정도의 ‘準주권 포기’를 각오하면서도 한국 지배자들의 상당 부분은 외국 자본을 끌어들이고 미국에서의 자동차 매상고를 올리려 합니다. 뭐, 자본에 실질적 위협이 되지 않는 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는 ‘트랜스내셔날 역사쓰기’에 대한 세미나도 잘도 지원합니다. 어차피 현실과 직결된 이야기도 아닌데, 저명한 외국 학자들을 모셔서 잘 대접하면 뭐가 나쁘냐는 논리지요.
 
이 체제에 대한 진정한 위협이 되는 것은 ‘안티 민족주의’라기보다는 ‘안티 자본주의’인데, 후자에 대한 학술적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들을 국내에서 점점 고사시키려고 노력할 듯합니다. ‘트랜스내셔날’ 담론은 이 체제의 좋은 악세사리가 될 수도 있지만 자본에 대한 문제 제기는 바로 ‘이적 행위’지요.
 
하여간, 다시 한 번 이야기하자면, 제가 민족주의에 대해서는 거의 체질적 거부 반응을 일으킵니다. 제 ‘민족’이 무엇인지도 알고 싶지도 않고 각국 피지배계층들을 ‘민족’/‘국민’ 별로 줄세우는 것도 우스운 일일 뿐입니다.
 
그런데 ‘민족주의’라는 게 자본주의의 ‘파생상품’일 뿐이지 이 체제의 본질은 절대 아닙니다. 본질적 문제란 여전히 계급 문제와 군사주의적 폭력 등 체제의 현실적 작동 논리와 직결돼 있는 문제들이죠. 그래서 역사를 제대로 쓰기 위해서라도 단순히 ‘국사’라는 개념을 포기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할 듯합니다.
 
동아시아 역사를 써도 계급, 계층간의 갈등, 투쟁, 포섭, 상호작용의 역사이어야 할 듯하고, 국가와 자본의 폭력적 본질을 직시케 하는 역사이어야 하지요. 과로사 당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아내와 아이를 생각하면서 “너무 피곤해 죽을 것 같아”라는 몸의 경고를 계속 받아도 감히 직장을 떠날 수 없는 일본, 한국, 중국 노동자의 피땀의 역사이어야 하지요.
 
그런데 그러한 역사쓰기 토론을 위해서 지원금을 신청하면 노르웨이 정도면 모를까, 그것도 ‘외국’의 문제를 다루는 경우에는 응해줄 국가라고는 세상에 많이 없을 것입니다. 

 

---------------------------
[박노자칼럼] 대한민국의 ‘유일사상’, 경쟁주의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09-04-29 오후 10:02:27)
 
‘유일사상’이라고 하면 대다수는 이북을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이남에서는 명시적 ‘유일사상’은 없어도 지배자들이 ‘지도 이념’으로 당연시하는 이데올로기는 있다. 다름이 아닌 ‘경쟁주의’, 즉 세계 만국과 국내 만인들이 피를 말리는 각축전에 휘말리는 것을 전제로 하여 적자생존 전장에서 약자의 도태를 당연시하는 이데올로기다. 지배자들은 ‘실용주의’를 들먹이지만, 실제 저들을 대표하는 언론들의 선전도, 저들의 정책들도 이 이데올로기를 배경으로 한다. 다수의 주민들을 먹여 살릴 수 있었던 자원들을 미사일 개발에 돌리는 이북 지배자들의 행동이 ‘주체사상’이라는 군사주의적 민족주의에 의해 뒷받침돼 있는 것처럼 말이다. 사실, ‘경쟁’에 뒤지거나 ‘강성대국 건설’ 프로젝트의 무게에 깔려 있는 약자에 대한 잔혹성이라는 측면에서 남북 지배자들은 일란성 쌍둥이다.
 
국가적 경쟁의 차원에서 이야기하자면, ‘국가 경쟁력’이라는 용어는 - 북한에서의 ‘자주성’ 못지않게 - 남한 보수 언론과 정치인들의 언설들을 관통하는 핵심어가 된 지 오래다.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라면 국가와 자본으로서 합리화하지 못할 일은 없다. 머나먼 섬나라 마다가스카르의 전체 농지 절반에 가까운 면적을 현지 민중의 대대적 의분을 불러일으킬 만한 조건으로 임대해 ‘식량 공급기지’로 삼으려고 해도 되고, 부지 수용 때문에 땅을 빼앗기는 빈농들의 저항을 무시해 인도 오리사주에서 제철소 건설을 밀고나가도 된다. 아시아와 중남미 곳곳에서 특히 방직, 신발 공장을 운영하는 한국 자본가들이 노동자에 대한 폭행부터 노조 와해 책동까지 온갖 부당 행위를 일삼아도 국내 언론들은 일언반구를 하지 않는다. ‘국가 경쟁력’을 위해서라면 경쟁에서 뒤진 ‘까무잡잡한 원주민’들이 좀 고생해도 무방하다는 이야기다.
 
‘국가 경쟁력’이라는 국시에 희생되는 이들은 과연 먼 나라들의 민중뿐인가?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들을 거의 포기한 듯한 지배자들이 정부의 실책에 대한 서민들의 불안과 반감을 그 글 속에 담은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구속해 세계인들을 경악하게 하여 <이코노미스트>와 같은 서구의 보수 잡지로부터도 비판받을 지경이 됐지만, 국내 보수 언론들은 ‘국가 경쟁력’의 논리로 이 만행을 정당화한다. 경제에 대한 비관적 예측이 ‘시장’에 방해된다면 표현의 자유를 무시해도 된다는, ‘사회’ 영역에 대한 ‘시장’ 영역의 무조건적 우월성을 전제로 하는 ‘시장적 전체주의’의 논리다. <이코노미스트>가 남한 지배자들의 민주주의 압살 작전과 북한 정권의 행태를 비교한 것은 이에 대한 당연한 반응일 뿐이다.
 
개인 사이의 경쟁은 한국에서 무엇보다 학습 경쟁을 의미하는데, 그렇지 않아도 의미도 재미도 없는 ‘달달 외우기’ 경쟁에 지쳐버린 아이들에게 추가 부담을 덮어씌우는 것이 이 정권의 교육정책이다. 만성피로가 쌓인 아이들을 살리겠다고 일제고사를 거부한 교사다운 교사들을 교실에서 쫓아낸 것만 봐도 이 정책의 본질이 무엇인지 알 만하다.
 
보수주의자들은 학습 경쟁이 ‘공정하다’고 하지만, 남미 정도의 양극화가 벌어지고 사교육이 유일하게 성장하는 산업으로 남아 있는 나라에서 이런 소리는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다. 결국 ‘경쟁’의 허구가 기득권을 정당화할 뿐이다. ‘경쟁주의’란 대한민국을 세계 민중들의 착취자로 만들고, 한국인을 이윤 추구의 기계로 만드는, ‘주체사상’만큼이나 잔혹한 망상이다. 1980년대에는 민주화가 시대적 과제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경쟁주의’와의 투쟁이 한반도의 앞날을 결정할 것이다.
  
--------------------------
아버지의 별세, 죽음을 부르는 마음 (레디앙, 2009년 05월 01일 (금) 10:05:40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북조선이 갑자기 무너지면 안되는 이유…직장과 동료의 의미 
  
사람 보기 전에 돈을 보는 게 오늘날 러시아인지라 아버지 역시 그 세상으로부터 끝내 자유로울 수 없었어요. 이제 빨리 러시아 입국 비자를 받고 하루 장례식에 가야 합니다. 장례식을 빨리 하지 않으면 제 어머니는 시신 보관소에다가 하루에 시신 보관비 5천 루불을 내셔야 하는데, 그게 한 달 연금보다 큰 돈이지요. 시신을 놓고 돈을 버는 것도 좀 재미있는 풍경인데, 저는 이미 이런 일에 대한 분노도 없어요. 사람이란 이제 없고 돈 버는 인간 모양의 기계들만 남은 세계에서 누구보고 분노합니까?
 
아버지는 죽음을 손꼽아 기다리셨어요. 금년에 72세 되니 꼭 금년에 죽고야 말겠다고 제게 맹세하기도 하셨어요. 이제 본인의 소원대로 됐으니 "가서 쉬십시오, 그리고 되도록이면 여기로 돌아오지 마십시오"라고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아버님은 언제부터 "죽음"을 부르시기 시작했느냐면, 1990년대 초반에 그 직장이 망하고 나서였습니다. 평생, 30여년 간 하나의 설계소에서 발전소 변전기 설계해오셨는데, 그 직장은 '직장' 이상이었지요. '일'은 인생의 전부이었고, 동료는 가족 이상 가까웠습니다.
 
한 달이나 되는 소련 시절의 휴가 때에 직장을 못 가셔서 오히려 심심하시고 답답해 하셨던 모습을 많이 봤어요. 하루 빨리 동료들을 보고 '일'을 하고픈 욕심이 컸습니다. 그 직장이 소련이 망한 이후에 망하고, 그 건물은 무슨 부동산업자에게 팔리고 동료들은 다 흩어졌을 때에 아버님은 다행히 연세가 많아 바로 연금생활자가 됐지만, 그 뒤로는 인생에 대한 관심을 잃으셨습니다.
 
일도 없고 동료도 없는데 왜 사느냐 이것이었습니다. 사실, 자녀 두 명이 외국에 있고 해서 그렇게까지 궁핍하신 것도 아니고 음식과 의복에 부족함이 크게 없으셨는데, '직장' 없는 생활에는 '의미', 인간을 인간으로 만드는 그 '뜻'이 없어 소련 시절을 회상하거나 죽음을 하나님께 부탁드리는 것이 '일'이 됐습니다.
 
최근에 유선TV에서 한국 등 '이국적 나라'에 대한 교양 프로그램을 보시는 재미로 사셨는데, 이제 본인의 소원대로 시신보관소에서 돈을 갈취하는 이곳을 떠나시니 어찌보면 인연에 감사드려야 하는지도 모르지요. 뭐, 감사하든 저주하든 인연은 인연입니다. 우리 감정으로는 우리 업이란 바뀔 일은 없겠어요.
 
제가 이제 며칠 간 장례식 등으로 정신없겠지만, 이 이야기를 한글로 적은 뜻은 아주 간단합니다. 하나님께, 부처님께, 알라신께 북조선이 제발 갑자기 무너져 남한의 내부 식민지가 되지 않기를 간절히 비는 뜻입니다. '직장', '동무들 사이'를 떠나서 다른 인생을 살 수 없는 제 아버지들은 거기에서 수 백만 명쯤이나 사시는 걸로 압니다. 나라가 없어지고 이 분들의 공업소가 남조선 토지투기꾼들의 차지가 되면 이 분들의 죽음을 부르는 염원은 어느 정도 강하겠습니까?
 
스탈린주의를 어떻게 보든 간에, '평생 직업', '온정', '직장의 가족들과 같은 동무들'로 돌아가는 사회에 다 적응된 사람은, 국가 혼자서만이 아니고 각자 모두가 자기 몸을 알아서 파는 작은 자본가가 돼야 하는 사회에 다시 적응을 못합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사회가 바뀌어도, 좀 천천히, 느슨한 속도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북에서 사시는 나이 드신 분들은 남의 땅이 된 자기 나라에서 제 아버지처럼 뜻을 잃고 사시는 모습을 안봤으면 좋겠어요.
     
-------------------------
공산주의자의 필요조건 (레디앙, 2009년 05월 12일 (화) 09:51:36 박노자)
한 중국학 노교수의 생애…노동과 삶과 오락의 통일
 
중국 고전을 다루는 일은, 그 분으로서 인생의, 이제 거의 유일한 즐거움입니다. 한자 하나 하나 한어대자전에서 찾아내고, 그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고, 문장 구조를 이해하고, 그걸 아름다운 러시아어로 옮기고…. 이게 ‘노동’이자 즐거움, ‘나’를 위한 지적 오락, ‘나’의 지적 욕망의 분출의 계기이기도 한 것이지요. 사실 이 분의 삶에서는 ‘노동’과 ‘삶’, ‘노동’과 ‘오락’의 경계선은 없습니다. 중국 고전을 빼면 ‘삶’ 자체가 무너지고 마는 것이지요.
 
그걸 보면서 제가 생각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실, 그 분은 구 소련의 공산당과 담을 쌓고 살았지요. 공산당이 제국주의 국가 소련의 지배기관으로 변질됐다고 많이 싫어하셨고, 공산당원이었던 제 아버지의 사촌 형을 그 측면에서 별로 좋게 보지 않았습니다(학자로서 존경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런데 그 분의 정치 지향이 어땠든 간에 그 분과 같은 생활적 태도야말로 공산주의자 되기의 필요조건이 아닌가 싶어요. 공산주의의 목적은 결국 소외, 즉 노동 상품화의 극복, 노동이 바로 즐거움이자 자기실현, 자기 계발이 되는 ‘활기 넘치고 스트레스 없는 사회’의 건설이 아닌가요?
 
그러한 면에서는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사람도 가능만 하다면 ‘즐거운 노동’을 실천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이는 일반 사회에서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수유연구실의 고미숙 선생이야 자신의 노동(원고 작성과 대중 강의 등)과 자신의 즐거움을 거의 일치시킨 고무적 사례지만, 학원화된 학교에서 ‘미친 교육’의 멍에를 지고 있는 교사로서는 본인에게도 아이에게도 ‘즐거움’이 되는 수업을 하기가 아주 힘들 것입니다.
 
그래도 악조건 하에서도 ‘즐거운 노동’, ‘노동 그 자체를 위한 노동’, ‘돈이 아닌, 나와 남을 위한 노동’을 지향하는 게 인간의 지상 과제라고 봅니다. 이 과제의 완벽한 해결이야 자본주의의 완전한 극복 이후에만 가능하겠지만, 그래도 할 수 있는 대로 이를 지향하도록 노력하는 게 본인의 정신 건강에도 좋을 듯합니다.
   
-----------------------------------------
개인 욕망 아니라, 지식인 계급 문제 (레디앙, 2009년 05월 22일 (금) 10:04:05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황석영 논란과 시각] "그처럼 행동하지 않는 사람이 희귀종"
 
요즘 '황석영 개그'가 적지 않은 논란을 일으킨 듯한데, 이 문제에 대한 토론은 조금 엉뚱한 쪽으로 흘러가는 것 같습니다. 이 논의는 자꾸 황석영 선생의 개인 '욕망' 문제로 귀결되는 것 같은데 사실 진정한 문제는 그 분의 '개인' 문제는 절대 아닙니다. 조금 과장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분과 같은 '급'에 오른 사람이라면 그 분과 같은 류의 행동을 취하지 않는 사람이야말로 멸종위기에 처해진 희귀 종류입니다. 즉, 이는 단순히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그 개인의 '급'의 문제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옛날 칼 만하임 선생의 말대로 지식인을 free-wheeling, 즉 자율적 존재로 보려는 사람들은 많지만 이는 진실의 절반 정도입니다. 그런데 이와 동시에 지식계야말로 눈에 보이는, 또한 보이지 않는 '계급'이 정확하게 정해져 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외부자들에게는 당장 파악되지 않을 수 있지만, 내부자 입장에서는 거의 지식인마다 딱지처럼 그 '급'이 붙어 있지요. 또 독자들의 입장에서는 그 '급'이 꼭 지명도에 따라 정해지는 걸로 보일 수도 있지만, 문단의 경우에는 그런 측면이 강할지 몰라도, 꼭 그렇지만 않습니다. 등단한 잡지, 수상한 상, 내부적으로 '키워준' 후견자, 같은 '계통'에 속하는 문인들이 누구냐는 그 '줄세우기'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입니다.
 
출신대학/은사를 물신화시키는 데에 있어서 국내/일본의 분위기는 좀 특이하지만 학계 안에서의 위계 질서는 구미권에서도 엄밀히 존재하지요. 예컨대 학술지에 게재하기 위해 논문을 심사에 맡길 때에 '급'이 같거나 더 높은 사람에게 보내는 것은 불문율입니다. 교수 채용 때의 심사와 같은 정말로 중요한 문제라면 그 '급'이란 더욱더 분명해지지요.
 
문제는 무엇입니까? 그 위계질서에서 어느 정도의 '급'에 도달한 이상 또 하나의 권력, 즉 국가권력을 상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기본적으로는 예컨대 본인과 본인의 '문하생'들을 위해 연구비라도 따내야 하지 않습니까? 연구비, 출판보조비, 학회 보조비 등은 그나마 국가와의 '괜찮은'/'건전한' 관계일 수도 있지만, 특히 국내에서는 많은 교수들이 각종 '국책 사업' (국가 위원회들 등등)에 참여하도록 학교 측으로부터 상당한 압력을 받을 수도 있지요.
 
학교로서는 이게 학교 사이에서의 '무한의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한 하나의 방도이기도 합니다. 사실, '무한의 경쟁'이란 결국 경쟁 주체의 국가권력에 대한 '무한의 구애'를 의미하기도 하는데, 신자유주의자들은 보통 이 치사한 부분을 잘 이야기해주지 않더랍니다. 또 국가로부터 정기적으로 연구비를 받고, '국책 사업'에 자주 참여하고, 그 덕으로 많은 박사과정생들이나 젊은 박사들에게 용역을 많이 주고 그러다 보면 그게 어느덧 관습화되어서 국가와의 관계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됩니다.
 
그러면 그 관계를 '관리'할 필요가 생기는데, 일단 국가 정책 등에 대한 대외적 발언의 수위를 적절히 조절하는 게 기본입니다. "제자들을 위해 좀 참자"라고 하면서 이렇게 함구하면 자신이 비겁하다는 생각도 잘 들지 않습니다. 비겁함은 어느덧 현명함으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학교에 얽매여 있는 교수보다 작가가 더 자유롭다고 보시는 분도 계시는데, 착각일 뿐입니다. 잘 안 팔릴 소설들을 영어나 스웨덴어 등으로 번역, 출판케 지원해줄 주체는 과연 누구이고, 각종 작가포럼 등을 지원할 주체는 누구입니까?
 
하여간 '정상적인' 지식인이란 '보신', '자기 보존' 본능이 대단히 잘 발전된, 자신의 '급'이 높은 만큼 국가 관료들의 '급'도 알아주는 사람입니다. 체제에 일단 순응한 지식인에게는 체제에 대한 의미 있는 '반대'를 기대한다는 것은 사하라사막에서 물을 찾는 일과 똑같은 것이지요. 물론 각자 취향에 따라 '표현'의 수위는 다를 것이고, 적어도 '반대하는 시늉'이라도 해줄 소수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오십보백보일 것입니다. 거기에서 욕심이 조금 더 크면 국가와의 '통상적' 협력 이상으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즉, 국가 정책을 명시적으로 찬양하거나, 국가에 의해서 돌연히 크게 기용되거나...
 
이러한 '특별한 유착'은 세인들에게 - 특히 해당 지식인이 '반대자'로서 알려졌을 경우에는 - 좀 괴이하게 보이겠지만 지식인 사회의 '통상적 협력'의 정도를 아는 사람에게는 별로 이상하게 안 보일 것입니다. 사실, '통상적 협력'보다 단 한 걸음, 두 걸음만 더 나아가면 국가와의 '특별한 관계'가 이루어질 수도 있지요. 지식인들을 좀 냉소적으로 볼 필요는 있습니다. 그들에게 특별한 기대를 걸거나 특별한 후광을 부여한다는 것은 좀 어리석은 일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식인 본인들도 대체로 매우 냉소적으로 처신하기에 그들을 같은 방법으로 대하는 게 적당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
[박노자칼럼] ‘학습’은 있어도, ‘교육’은 없다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09-05-25 오후 09:31:56)
 
고등학교 때부터 마르크스-엥겔스 전집을 자주 펼쳐보곤 했던 필자는 한때 그 전집의 제1권을 많이 좋아했다. 청년 마르크스의 글들을 모은 그 책에서 가장 감동적이었던 것은 “직업 선택을 앞둔 젊은이의 사색”이라는 주제의 고등학교 졸업 에세이였다. 17살 청소년이 썼다는 걸 믿기 어려울 정도의 그 글에서는 마르크스가 여러 직업들에 대한 화려한 환상들을 경고하면서 “나를 (정신적으로) 더 고귀하게 만들고 속세의 군중들과 차별화시키는 동시에 타자들을, 인류의 공공선을 위해서도 기여할 수 있는 직업이어야 한다”는 선택의 법칙을 이야기했다. 청소년 마르크스가 그때에 스스로 직업 선택을 해보지도 않았다는 점까지 고려한다면 그가 이미 고교 시절부터 “인간이 무엇을 위해서 사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뼈를 깎는 고민을 했을 것이라는 결론을 내려야 했는데, 그 고민의 수준에 비해서 필자 자신은 초라하게 보였을 뿐이다.
 
10대의 후반에 이미 지적인 생활을 한 것은 과연 마르크스와 같은 유럽 천재들뿐이었던가? 마르크스가 고교에 다녔던 그 시절의 조선에서도 10대 후반의 청년 지식인이 자기 고민을 우아한 언어로 표현해 글을 쓰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천재들이야 아예 10대가 되기 이전에도 이미 글밭을 열심히 갈았다. 열 살 이전에 쓴 글을 모아 문집 하나 만들 정도로 ‘글’을 일찍부터 벗삼은 다산 정약용은, 마르크스가 고교 졸업 에세이를 썼던 그 나이에 화순읍의 동림사에서 책을 읽으면서 “젊은 시절의 재주만 믿다가는 나이만 들면 대부분 바보스러워진다, 이를 경계해 소홀히 하거나 느리게 하지 말자고, 가는 세월은 참으로 허망하다”라고 시를 썼다. 자신을 매일 스스로 극복해가면서 자율적으로 노력할 수 있는 의지력이 없다면 ‘나이’라는 무서운 적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많은 이들이 죽을 때까지 이해하지 못하는 진리를 다산은 오늘날의 ‘고2’에 해당하는 나이에 아름다운 글로 표현했다. 다산이야 천재였지만 조선시대 일반 지성인들이 10대 후반에 썼던 글들을 봐도 많은 경우에는 그 성숙함에 놀라게 된다. 그들은 이미 그 나이에 ‘독립적 개인’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개인’이라는 말도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10대들에게 개성의 발달이 허용돼 있었지만 ‘개성 만세’를 부르는 21세기 벽두의 대한민국에서는 그 반대로 열일곱살 청년이 ‘독립적 개인’이 되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가 ‘개인’이기 전에 세계 최장인 평균 주당 50시간의 고된 학습노동을 무조건 해내야 하는 ‘학습기계’다. 그가 왜 친구들과의 성적 경쟁에 열과 성을 바쳐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그에게 설명하지 않는다. 직업 선택이야 본인 스스로 해도 삶의 방식을 선택할 자유도 그에게 없는 것이고, 이 문제에 대한 고민도 사회가 부단히 차단시키려 한다. 우생열패 원칙이란 이 사회에서 성욕이나 식욕처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고, 신성불가침의 이데올로기로 여겨지기도 한다. 획일적인 내용을 남보다 철저하게 익히느라고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보내야 하고, 이 잔혹한 ‘암기 경시대회’에서 한 번만 지면 평생 낙오자가 되어 만인에게 짓밟힐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힌 대한민국의 이팔청춘은, 과연 마르크스나 다산처럼 인생에 대한 고민 속에서 자율적 자아를 도야할 수 있는 심신의 여유가 있는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로 만드는 ‘교육’이란 우리에게 없다. 기업들에 이미 개성이 다 깨진 순응적 ‘인력’들을 공급해주는 ‘학습’만 있을 뿐이다.
  
-------------------------------
MB 꿈은 '잘 사는 북한형 사회'? (레디앙, 2009년 06월 22일 (월) 09:31:37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PD수첩' 작가 이메일 공개…"야만으로 다시 돌아왔다!"  
 
인간 문화의 근본 중의 하나는 '개인 영역'과 '공공 영역'의 분리입니다. 물론 이 분리는 전통사회에서는 완전할 수는 없었고 지금도 절대적이지 않습니다. 전통사회에서 개인적 불효는 사회 문제가 될 뿐만 아니라 국가적 제재 대상이었고 근대사회에서 10년 전의 '클린턴 게이트'에서 봤듯이 부적절한 대상과 부적절한 곳에서 개인적인 성관계를 맺었다가 공공영역에서 '벼락'을 맞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 공공영역에서 허용되어지지 않는 많은 행동들이 개인영역에서 허용되는 것이고, 그게 바로 우리가 체감하는 '자유'의 상당한 부분을 이룹니다. 무더운 날인데 '바깥'에서 벗을 수 없는 윗통을 안방에서 벗어 하늘이 낸 몸대로 앉아 쉴 수 있듯이, 사석에서 공석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말들을 꽤 할 수 있습니다.
 
개인 사신을 '기관'에서 은말히라도 본다면, 마치 나의 안방에서의 '나체 휴식'을 이웃이 재미 삼아 엿본 것 같아 미칠 정도로 화나지요. 우리의 '덜 답답한 삶살이'를 가능케 만든 공,사 영역 분별의 벽이 무너지기에 그럴 수밖에 없지요.
 
'도덕' 관념이 아직도 있는 사회에서 '부도덕'을 이야기할 의미가 있지만 모든 게 감시되는 빅 브라더의 왕국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잠잘 때도 내면적으로 검열해 '쓸 때 없는 말'을 잠꼬대 속에서도 안넣는 게 '도덕' (?)입니다. '도덕'이라기보다는 생존방식이지만 빅 브라더의 나라에서는 '생존' 이외의 목표란 있을 수도 없어요.
 
우리는 다 투명인간들입니다. 매일 매시 휴대폰과 전자우편, 인터넷, 신용카드를 쓰고 도심 감시 카메라에 잡히기 때문에 '기관'으로서 '박노자의 일과'를 알 필요가 있다면 시간, 분 단위로 쉽게 작성할 수 있지요. 그리고는 우리가 다 -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 '관'의 영향권에 있습니다. 대학에 있는 학자는 주로 국가에서 주는 연구비에 따라 춤추고 있지만 시민단체에서도 기업 후원 등을 무시할 수 없고 기업이란 '관'이 싫은 일을 절대 못하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만약 '관'에서 저희 투명인간들에 대한 감시의 정도를 크게 높임과 동시에 "사적인 영역에서라도 불온한 언행을 하는 이에게 큰 불이익을 주겠다!"라는 메시지를 보내면, 우리 사회는 상당 부분 싱가포르나 어쩌면 아예 북한을 닮아가게 될 것입니다.
 
'생존' 문제가 걸린 투명인간들은 사무실에서는 물론 술집에서까지 '불온한 이야기'를 자제하기 시작할 것이고, 사회 전체에서 상호 의심과 공포의 분위기가 퍼질 것입니다. 뭐, 주요 재벌들의 임원들이 그 재벌의 소유자 일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 공, 사를 불구하고 얼마나 조심조심하는지 보시면, 앞으로 이와 같은 정권의 행각이 계속 가속화될 경우 대한민국이 뭐가 될는지도 알만 합니다. 각종의 '위대하신' 보스들에 대해서 말을 아주, 아주 조심해야 하는, 일종의 '잘 사는 북한형 사회". 감시주의, 경찰주의 위주의 '재벌들의 준독재'라고나 할까요?
 
-------------------------------
진정한 공산주의자란? (레디앙, 2009년 06월 29일 (월) 09:47:06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소유욕' 버린 인간이 되는 과정…"우린 멀어도 아주 멀었다"
 
어제 한-중-일 고승들의 임종게를 같이 해석하느라고 노르웨이 시인 에를링 키텔센과 만난 일이 있었습니다. 일하다가 같이 한담을 하게 됐는데, 제가 약 1년 전에 노르웨이 저명 소설가 다그 솔스타드 선생이 자신이 "공산주의자"라고 텔레비전에서 밝혀 주목을 끈 사건을 거론하면서 "그래도 노르웨이가 부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솔스타드의 '공산주의자 선언'은 폭력 혁명이라기보다는 이윤추구가 없는 사회에 대한 막연한 내면적 지향을 이야기한 것이었는데, 대한민국에서는 만약 저 같은 중생이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노자와 석가가 궁극적으로 공산 사회를 꿈꾸었듯이 나도 공산주의자다"라고 "내면적 이상 차원의 공산주의자"란 말을 했어도 그 다음 뒷처리가 보통 버거운 게 아니었을 것입니다. 뭐, 감옥에 가지 않는다 해도 방송국에는 두 번 다시 부르지 않을 확률만큼은 높을 걸요. 그러자 에를링이 그렇게 답했습니다:
 
"뭐, 한국에서야 재산계급의 사유제 근간 '흔들리기'에 대한 공포도 아직 남아 있기도 하고 남북 대치 상황도 있고 미국 영향도 태심하기에 '공산주의'라는 말에 대한 지배자의 거부 반응은 아주 강하겠지만 노르웨이만큼은 이 정도는 전혀 위험시되지 않습니다. 노르웨이 공산당들이 이미 이 체제에 완전히 편입된 것도 그렇지만 공산주의는 이 체제와 행동 양식이나 근본적 마음가짐 등을 달리하지 않아 크게 이질시되지도 않지요.
 
공산주의자들이 재산가의 이윤추구적 지배에 맞서 일체 공업시설들을 하나의 공장처럼 중앙집권적으로 운영하려 하는데, 이는 비록 이윤추구 시스템은 아닙니다. 하지만 근대적 생산/소비 순환, 합리주의, 공리주의, 관료적 규범주의 등의 코드를 지배계급과 공유합니다. 사회의 운영 방식을 바꾸자는 것이지 사회의 체질을 바꾸자는 게 아니거든요. 그게 지금 이 체제로서 전혀 위험시되지는 않지만 예컨대 이슬람주의자들이야말로 위험시되는 것이지요. 현세의 '합리적' 향락을 다 포기하고 신의 손에 목숨을 맡겨 결사적으로 저항하는 그 행동의 논리 자체는 이 사회와 너무나 동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여간 이 공산주의자들은 좀 불쌍한 사람들에요. 영국 빅토리안 시대의 얼치기 합리주의를 붙잡느니 차라리 도덕경이나 일독하게. 그러나 그 자들의 서구중심주의가 심해 진짜 책을 안읽는단 말에요"
 
공산주의자들이 어차피 근대의 '합리적인' 기계 문명, 생산, 소비하기 위해 규범적으로 사는 개인의 상을 공유하는데다 이미 체제에 다 편입돼 위험하지 않다는 것은 에를링의 진단이었는데, 저는 그 분의 주장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습니다.
 
현대 사회주의의 기원이야 19세기 빅토리안 시대의 나이브한 '진보사관'이었지만 1950-70년대의 실존주의 전성기, 반문화 운동, 환경 의식 고조 등을 경험한 오늘날의 사회주의는 적어도 유럽에서는 꼭 '사회의 체질 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지요. 사회주의자들이 예컨대 미래 사회의 상을 설정할 때에 '성장'이 아닌 '환경적 균형 유지'와 '지구적 빈곤 척결' 등을 내세우는 것이지요. 즉, 19세기적 '영원한 성장'의 신화를 이미 파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노르웨이의 대표적인 급진사회주의 정당의 적색당 (구 모택동주의적 공산당과 일각의 군소 공산주의적 조직체의 연합체) 강령을 보면 미래의 상을 "인간의 요구에 의해서 움직이는 경제"라고 합니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민주주의적으로 계획되고 통제되는, '다수의' 요구에 따르는 경제" (demokratisk planlagt og kontrollert behovsstyrt økonomi).
 
좋은 말씀인지라 저도 그 밑에 제 동의를 서명하고 싶지만 문제 하나만 남습니다. 그 민주적 통제권을 손에 쥘 다수의 인간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과연 환경적 상황에 맞추어서 제대로 자제라도 할 수 있을까요? 지금 로포텐이라는 아름다운 섬 근방에 유전개발을 해서 그 환경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개발' 노선으로 갈 것이냐 라고 북부 노르웨이 주민들에게 물어보면 다수 (52%)가 '유전 개발'을 지지하지요.
 
미래의 공산주의 사회에서 바로 그 다수가 자제되지 않는 소비 욕구에 따라서 또 무슨 '개발주의적' 망동을 또 지지할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요. 즉, "민주주의적으로 계획되고 통제되는, '다수의' 요구에 따르는 경제"도 좋고 다 좋지만 개인, 또는 다수가 '개발', 소비를 위한 소비, 타자를 고려하지 않는 '편안한 삶', 그리고 '자연에 대한 인간의 승리'에 대한 망상을 어떻게 해서 버릴 것인지 문제가 됩니다. 그래서 바로 여기에 <도덕경>이 요청되는 것이지요.
 
<도덕경>에서 성인의 행동방식을 가리켜 "生而不有,為而不恃,功成而弗居。夫唯弗居,是以不去"라고 하지 않았던가요? "뭔가를 낳으면서도 소유하려 하지 않고, 일하면서도 그 일에 마음으로 기대려 하지 않고 일을 이루면서도 거기에 마음으로 머물면서 그 공로를 내세우려 하지 않기에 잃을 것도 없다". 자아 확립 욕구가 없고 소유욕이 없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것이야말로 공산사회의 이상형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평생도 모자라지만 어디에서도 머무르지 않는, 소유하려 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의 심성적 시작입니다.
 
"虛其心,實其腹,弱其志,強其骨", 즉 그 마음을 비우고, 그 '배' (피할 수 없는 기본적인 욕구 - 식욕, 성욕 등)를 채우고, (남보다 자신을 우위에 두려는) 그 뜻을 약화시키고, 그 골격 (능력 등을) 강화시키는 것은 소유와 성장의 미망을 버린 사회의 생활양식일 것입니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경쟁이 없기에 잘못들도 저질러지지 않습니다 (夫唯不爭,故無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서 그 기운을 기르는 이들은 결국 일종의 '성숙된 아이'와 같은, 나약 (즉, 남에게 그 어떤 강요도 하지 않는) 하면서도 진실로 강한 상태에 이릅니다 (專氣致柔,能如嬰兒乎). 스스로 높으면서도 남을 '다스리려' 하지 않는, 권위주의란 전혀 없는 사람 (長而不宰)이야말로 노자의 주인공입니다. 사람들이 <도덕경>을 보면서 이 영원한 책의 현재성을 왜 보려 하지 않는지 모르겠어요.
 
하여간 국내의 각종 '골방 혁명가'들을 보느라면 <도덕경>이 제시하는 인간상과 가장 상반되는 타이프들을 충분히 구경할 수 있습니다. '長而不宰'가 아니고 반대로 '不長而宰', 스스로 높지도 않으면서도 '다스리려' 드는, 이런 모습을 도처에서 구경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이고, '영구적 혁명' 주문을 한 번 외웠다고 해서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전혀 아닙니다. 공산주의자가 되는 것은, 결국 인간이 되는 과정이지요. <도덕경>적 의미의 정상적 인간, 뭘 가지려 하지도 않고 내세우려 하지도 않는 인간이야말로 공산주의자의 원형일 것입니다. 그러한 견지로 본다면 우리야 다들 멀어도 아주 멀었어요...

 

---------------------------------
"박노자 당신은 누구인가"라는 질문 (레디앙, 2009년 08월 24일 (월) 08:51:19 박노자 / 오슬로대)
'혁명적 국제주의' 또는 '당과 계급'에 희망을 놓치 않은 비관파
 
상대방은 갑자기 "개인적 질문"이라 하면서 "그러면 한국인의 아이덴티티는 그렇다고 치고, 당신의 개인적 아이덴티티는 도대체 뭐냐"라고 물으시더군요. 저는 좀 당황을 했어요. 제 본인도 별로 생각을 잘 안하는 테마라서요. 질문에 크게 당황해야 걸로 결국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게 선문답의 원칙이라고들 하지요? 저도 당황을 한 뒤에 결국 갑자기 '그림'이 떠올라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한국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제가 '벤치마킹'하는 것은 과거 서구의 좌파적인 코스모폴리타니즘의 정체성입니다. 마르크스에게 '너는 독일인이냐 영국인이냐'라는 질문은 무의미하듯이, 아니면 게오르그 루가치가 유대인도 헝가리인도 독일인도 러시아인도 아니면서도 그 네 가지를 다 겸비했듯이, 저는 어떤 해방 지향적 이념으로 사는 사람이 각종의 언어-문화적 정체성들을 비교적으로 자유롭게 개인적 취향과 상황대로 '재조합'시켜 개인화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19세기 이후의 세계적인 근대성의 공간에서는 '해방 지향적 이념'이란 언어-문화적 장벽을 어느 정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으로 사료합니다"
 
이제는 상대방이 좀 당황했던 모양입니다. 아마도 제게 "한국인의 정체성을 점차 취득해나간다"는 쪽의 답변을 내심 기다리셨던 모양인데, 제가 고의적으로 그러한 이야기를 해주지 않았습니다. '한국인 노릇'을 하는 것도 개개인 나름이고 각자가 다르게 하는데, 제가 생각하는 한국인 노릇과 질문하신 분이 생각하시는 한국인 노릇이 자못 다를 수 있기에 의도적으로 오해를 피하려 한 것입니다.
 
대답을 드리자 학회가 속회되고 이 흥미로운 대화가 중단됐지만, 나중에 생각해보니 제 답에는 그래도 하자 하나가 있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야 루가치나 마르쿠제와 같은 '혁명적인 국제주의'는 가장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이제 구라파의 상황은 좀 달라졌단 것입니다.
 
루가치만 해도 당으로 조직된 노동계급이 집권을 하여 해방을 실천할 수 있는 것처럼 믿었던 것이고, 그건 그 때만큼 현실적으로 보였지요. 마르쿠제는 '계급 - 당 - 집권 - 사회주의 건설' 등식을 더 이상 믿지 않았지만(또는 믿을 수 있는 상황에 넣여 있지 않았지만) "탈권위주의적, 다차원적, 창조적 인간의 출현"을 현실적으로 기다리고, 또 1960년대 후반의 '젊은이 혁명'의 분위기 속에서 그게 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저희 세대 같으면 사실 이와 같은 희망은 이제 거의 없습니다. 물론 '계급과 당'에 대한 희망은 어느 정도 남아 있지만, 저 같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들은 - 노르웨이의 사회주의좌파당이나 독일의 좌파당부터 국내 진보신당까지 - 잘해봐야 (유럽의 경우) '공공성/복지'의 '인간화된 자본주의' 질서를 사수하거나. (한국의 경우) 새로이 건설하려는 목표를 현실적으로 정하는 것이지요. 오늘날의 정세에서는 더 이상의 이야기는 곧잘 '섹트화', 대중과의 완전한 괴리를 의미하기에 말입니다. 그리고 권위주의부터의 해방은 어느 정도 돼도 상명하복의 질서는 소비쾌락주의 질서로 교체됐을 뿐, 인간은 해방에 가까워진 일은 없었습니다.
 
돈을 써야 쾌감을 느끼고 돈과 돈이 가져다주는 쾌감을 철저히 계산해서 인생을 설계하는 오늘날의 '문명인'은 사실 자기 상품화를 하지 않고서는 이미 살 수 없는, 물화된 인간입니다. 자본주의가 이미 다 내면화된 세상인지라 '해방'의 수사는 공허하게 들릴 때가 많지요.
 
자본주의가 그 말기적 위기에 밀리면서 극단적인 사회 파편화, 원자화부터 끊임없는 전쟁까지 온갖 병리적 현상들이 다발하는 시대에 '어떻게 해서 완전한 야만화라도 방지할 수 있을까'라는 게 요즘의 시대적 과제인 것 같습니다. 너무 비관적으로 보일는지 몰라도 그게 적어도 점차 우경화돼가는 유럽의 정치판 안에서 현실로 느껴집니다.
 
-----------------------------
"권력자는 진보적일 수 있나" (레디앙, 2009년 09월 04일 (금) 08:14:26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대학, 권력관계 무자비하게 작동되는 공간…성희롱은 권력 문제"
 
성희롱이란 노르웨이라 해도 직장 여성의 30~40% 정도는 평생 한 번이라도 당하는 것이지만, 일반 직장보다 상식적으로는 더 깨끗해야 할 대학에서마저도 '교수의 성적 압력'이란 존재한다는 것은 일반인에게는 아주 충격적으로 다가옵니다.
 
이번에 신문에서 나온 이야기를 보니 상황은 대단히 심각한 것으로 보입니다. 치대 여성 박사과정생 중에서는 약 10여 명이 남성 지도교수로부터의 심각한 성희롱, 성상납 요구를 호소하는가 하면, 이미 학위를 수여한 한 명은 과거 박사과정 시절에 당했던 "강간 정도까지 가곤 했던 지속적인 몇 년 간의 성희롱과 성상납 요구" 등으로 아주 끔찍한 정신적 상처를 입어 이제 노동능력을 잃어 사회복지 사무소의 신세를 져야 하는 정신신경과 환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성에 굶주려 양심과 상식을 잃은 교수가 한 사람의 인생을 망가뜨린 셈입니다. 치대에서 이런 일이 하도 상습화됐기에 대학교의 노동환경보호 책임자가 아예 "임상치과의학연구소를 폐소시키겠다"고 위협할 정도입니다. 
  
보통 그러한 일은 발표될 때마다 사회에서 '규정 강화, 처벌 강화, 여성 교수 증원' 요구가 터져나오는데, 사실 다 맞는 요구지요. 문제는 그렇게 한다고 해도 과연 이성의 제자를 성적 만족의 수단으로 써보겠다는 인간(?)들을 막기에는 과연 역부족이지 않을까 싶은 것입니다. 예컨대 저희 윤리 규정 (http://www.admin.uio.no/opa/ps/etiske_retningslinjer.html)을 지금 봐도 지도 교수와 그 학생 사이의 일체 성적 관계와 선물 증여 등을 이미 엄금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상납을 요구했다는 게 증명되면 해당 교수들이 무조건 해직될 가능성은 아주 큽니다.
 
그런데 치과 의사는 교수직에서 해직돼도 굶을 일은 없기에 본인으로서는 해직의 위협이란 탈선 행위를 막을 만큼 충분치도 않아요. 지금 20%도 안되는 여성 교수의 비율을 50%까지 올려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여성 교수라고 해서 남성 제자에 대한 부당한 섹스 요구를 안할 보장이라도 있나요?
 
이건 성차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일차적으로 '권력'의 문제입니다. 교수란 사실 권력자의 다른 이름이지요. 자본가의 자본 남용을 막기가 매우 어렵듯이, 군인의 전시 민간인 학대를 막기가 불가능에 가깝듯이 교수라는 권력자의 권력 남용을 막는 일은 지난한 일입니다.
 
'상아탑'과 '진리 탐구'에 대한 낭만적인 미사여구를 걷어치우고 '현실'만을 냉정히 본다면 박사과정생에 대한 지도교수의 의무란 무엇인가요? 궁극적으로는, 자본주의적 사회에 쓸 만한 고급 (박사학위 소지) 인력을 공급해주는 것은 교수의 본업입니다. 그래서 노르웨이만 해도 박사학위 논문 작성시에 보통 '현실적 중요성' (den praktiske relevansen)을 머리말에 꼭 써야 되지요. 관가에서든 기업에서든, 아니면 적어도 비정부기구나 같은 학자든 이 연구의 결과를 어떻게 써먹을 것이냐라는 부분을 밝히지 않고서는 학위를 못받지요. 물론 인문학자들의 연구의 중요성은 보통 같은 학자들에게 자료 내지 해석 방법, 해석 결과를 공급해주는 선에서 그치지만, 인문학 안에서도 꼭 나름의 '규율'은 존재합니다.
 
어쨌든 박사 공부란 자본주의 체제의 제반 요구에 맞추어져 있는 것이고, 교수는 이 제반 요구를 지도학생에게 전달해주고 시행케 하는 매개체이자 학생에 대한 공적, 사적 권력을 휘두르는 '권력자'입니다. 공적으로는 '성적(成績)'이란 무기가 있는가 하면, 사적으로는 직업적 네트워크에서의 학생의 활동을 크게 방해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요.
 
그러면 학생과의 관계에 있어서 '체제' 그 자체를 대표하는 권력자는 정말 그 권력을 남용하지 않게 할 수 있나요? 이 체제 자체가 극도로 부도덕적인 만큼 이 체제의 한 대표자를 도덕군자로 만드는 게 유토피아입니다. 당연히도, 그렇지 않아도 이미 엄격한 본교 규정들도 더욱더 강화시켜야 하고, 피해자 여학생들을 괴롭힌 괴물들에 대한 형사 책임까지 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건 당연하지만, 그렇게 한다 해도 문제의 뿌리를 뽑을 수는 없을 거에요.
 
보통 대학이란 - 특히 노르웨이와 같은 모범적인 사민주의 국가의 대학 - '진보'의 대명사처럼 여겨지지만, 사실은 대학만큼 상하 사이의 권력 관계가 노골적이고 무자비하게 작동되는 공간은 없을 것입니다. 물론 예외도 있을 수 있지만 대개는 교수라는 이름의 권력자로서 미시적인 권력 관계에 있어서 '진보적으로' 처신하기가 매우 어렵지요. 그렇게 하기에는 교수들은 그들을 키운 체제의 논리에 너무나 길들여진 것입니다. 노르웨이의 교수라고 해도 절대 예외는 아니고요. 그래서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 자신을 포함한) 교수들에 대한 과신 내지 맹신은 진보 사회로서는 일대 금물이어야 할 것입니다.
 
--------------------------------
재범 향한 사이버 인민재판이 두렵다 (레디앙, 2009년 09월 14일 (월) 08:30:02 박노자 / 오슬로대)
국가주의 잔혹성에 놀라…시민의식-계급의식 성장 불가능 환경
 
최근 가수 '재범'에 대한 다수 네티즌들의 '사이버 인민재판'을 지켜보면서 정말이지 거의 공포심을 느낄 정도입니다. "여기 와서 돈을 벌려는 주제"에 "감히 우리나라를 욕했다"고 해서 한 명의 인간을 생매장하려는 듯한 그 국가주의적 '열정'(?)에만 놀라는 것은 아닙니다. 국가주의야 꼭 여기에만 있는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우리 나라를 감히 욕했다"고 해서 빨리 빨리 '그 놈'을 십자가에 못을 박으려는 류의 유치함을 딴 데에 가서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예컨대 자국의 주요 기업(지금의 독일의 오펠사처럼)이 외국 자본, 특히 많이 이질시되는 러시아나 중국계 자본 등에 팔려 나갈 때에 유럽인들이 보이는 태도만 봐도 그들에게 중상주의적 경제 국가주의가 얼마나 몸에 밴 것인지 알 수 있지요. 사실, 이와 같은 중상주의적 경제 국가주의, 즉 외국 자본에 대한 거부 반응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적 공격에 대한 일종의 (물론 매우 불완전하고 그 한계가 뚜렷한, 일시적인) 보호막의 역할도 할 수 있으니 꼭 그걸 비판하려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데 '재범 사건'에서 보인 그 유치한 감성적인 국가주의에 저로서 놀란 것은 그 '사상적 내용'의 수준이 아니고 그 잔혹성의 수준입니다. "군대도 안 갔다온 주제에 우리 나라를 감히 욕했다"는 한 젊은이를 가상 공간에서 짓밟은 그 무수한 네티즌 중에서는 재범 본인이 그걸 지켜보면서 갖게 되는 마음 상처의 정도에 대해서 생각해본 사람은 있었을까요? 남에게 하등의 머뭇거림없이 상처를 주려는, 학교의 왕따 가해자와 같은 그런 마음가짐이란 이쪽에서 '넷심', 뭇 다중들의 '집단 지성'입니다. 억울하고, 생각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요.
 
사실, 제가 작년 여름 촛불집회 때도 비슷한 생각을 해본 경험은 있었어요. 그 당시의 수많은 '쿨한 구호' 중에서는 "맹박아, 미친 고기를 쳐먹어 쳐죽으라"라든가, "숨쉬지 마, 공기 아깝다" 같은 류의 표어를 들었을 때에 왠지 마음에 걸리곤 했어요. 물론 이런 구호를 외친 이들이 '맹박이'가 '쳐죽는' 것을 진지하게 바랐을 리는 없었을 터이고 일종의 '잔혹한 농담' 정도로 봐야 하는데, 농담 삼아서라도 타자의 생명을 이처럼 가볍게 취급하는 것은 성숙된 시민적 태도라고 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시민적 태도도 아니지만, 성숙된 계급주의적 태도도 아니라고 봐야겠지요. 계급주의적, 즉 사회주의적 시각에서 본다면 삼성과 현대, LG와 군벌, 관벌들의 이해관계를 총조절하는 '대통령'이라는 이름의 지배계급의 수장의 구체적인 명칭이 무엇이 되든, 그가 미친 고기를 먹어서 죽든 말든 별로 대수가 아닙니다. 왜냐하면 지배계급(총자본)의 이해 관계의 추진을 누가 맡든간에 그 내용상의 변화가 그렇게 결정적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계급주의적 시각에서 본다면 이명박 개인의 '악질성'에 대한 집착은 우습게만 보이는데, 단선적이고 흑백적인 부르주아적 상상(악한 이명박 대 선한 희생자 노무현 등등)에 익숙해진 수많은 사람들은 '선한 순교자의 서거'에 넋을 놓을 만큼 슬퍼하고 "이명박 때문에 나는 요즘 우울증에 걸렸다"고 이야기하곤 합니다. 이것은 우리 '집단 지혜'의 수준이니 뭐 할 말은 따로 있겠습니까?
 
다르게 생각하고 '나/우리'로서 체면을 깎는 듯한 발언을 하는 사람에게 우선 '매국노' 따위의 딱지를 붙이고 그 다음에 마녀사냥의 광풍을 일으키는 것은 우리 '공공 영역'의 수준입니다. 나와 같은 편이라면 절대선이고 나와 반대편이라면 미국에 돌아가든지 죽든지 빨리 없어져야 할 절대악이라는 구도 안에서는 시민 사회의 생명인 토론은 불가능합니다.
 
진정한 의미의 계급의식의 성장도 불가능하지요. 왜냐하면 사회주의를 제대로 이해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반대편에 서는 사람(지배계급)도 "도덕적으로 타락하고 빨리 죽어야 할 악한"은 아니고 유효기간이 지난 자본주의라는 시스템 안에 갇혀서 빠져 나올 줄 모르는, 아무리 개인적으로 선하다 해도 구조적으로 착취자가 될 수밖에 없는 비극적인 인간일 수도 있는 것이지요.
 
사회주의의 활동은 '흥분'을 필요로 하지 않지만 우리의 공공 영역의 심성적 근간이란 바로 흥분, 나아가서는 발악입니다. 정말로 예민한 주제 같으면, 한국 사회에서 차라리 공론화하지 않는 편은 나을 때가 많아요. 합리적인 반응이 아닌 '고함소리'만 들리기 때문입니다.
 
작년, 노르웨이에서 막스 마누스(Max Manus)라는 1940~45년간 반독 반파쇼 무장 저항의 영웅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애국 영화'가 처음 상영됐을 때에 노동당 계통의 한 논객이 "과연 민간인들을 독일군의 보복에 노출시키는 반독 무장 투쟁은 꼭 도덕적이었는가", "친독 협력자라는 혐의로 수십 명의 노르웨이 '부역자'들을 정식 재판도 없이 암살해버린 무장 저항 운동은 과연 독선과 잔혹성을 보이지 않았는가"와 같은 문제들을 제기한 바 있었습니다.
 
신문 지상에 몇 차례의 논쟁이 진행됐지만 어쨌든 그 노동당 계열의 논객과 반대편은 '감정'이 아닌 '사실' (예컨대 친독 부역자 처단 시에 오로지 그 자리에 우연히 있었기에 함께 죽은 무고한 희생자의 수 등등)과 어떤 보편적인 기준에 의한 '판단'을 중시했기에 합리적인 논박이라도 가능했어요.
 
그러면, 일제 시기의 무장 독립 운동에 대한 같은 종류의 문제 제기를 한국사회에서 해보시기 바랍니다. 결과가 뻔하지요? 감정을 빼고 냉정하고, 조용하게 반대쪽의 이야기를 듣고 오로지 사실과 보편적인 도덕적 기분에 의한 '객관성을 지향하는 판단'을 내릴 수 없게 하는 이 분위기는 문제입니다.
 
건전한 시민이 되려고 해도, 사회주의자가 되려고 해도, 반대자가 적이 아님을 이해하고 개개인간의, 집단간의 소통을 할 줄 아는 게 전제조건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저쪽 학교 애들을 무조건 패주어야 한다"는 깡패적인 고교생 패거리의 수준을 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재범 사건'을 보면서 이게 과연 가능할는지 의심이 납니다. 이런 마음으로 내일 새벽에 출국해야 하니 슬프기만 하네요... 
   
-------------------------
자유주의 세력이 극우보다 위험? (레디앙, 2009년 09월 23일 (수) 08:21:45 박노자 / 오슬로대)
노르웨이 사민주의좌파당 후퇴와 한국 진보정당에 주는 교훈
 
며칠 전 노르웨이에서 총선이 진행됐습니다. 제게 가장 유의미한 결과는 두 가지이었습니다. 첫째, '자본주의 전복'을 외치는 가장 급진적인 진보 정당인 적색당(일종의 공산당이라고 할 수 있음)은 2%도 득표하지 못하여 국회의원 하나 만드는 데에 실패했습니다. 급진적인 '반자본주의적' 담론의 대중화가 얼마나 어려운지 잘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둘째, 급진성과 현실성을 잘 구비한 듯했던 '신좌파적'(말하자면 급진적인 사민주의라고 할 수 있는) 사회주의좌파당(사좌당)은 표를 많이 까먹고 말았습니다. 4년 전만해도 8.8%의 득표율을 올렸던 사좌당은 이번에는 6.2%밖에 못얻었지요.
 
사좌당의 '맏형' 격인 노동당(온건 사민주의)은 4년 전보다 더 많은 표를 받았기에 노동당-사좌당-중앙당 (농민당, 보호무역주의)의 연립좌파내각은 예전대로 그냥 존속될 수 있겠지만, 그 안에서의 사좌당의 몫은 좀 줄어들 모양입니다. 사좌당은 과연 왜 이렇게 좌초됐을까요? 아주 간단하고 냉소적으로 이야기하자면, "몸을 너무나 노골적으로 팔아서 문제"라는 시각은 있습니다. "몸을 팔았다"는 것은 무슨 뜻이냐 하면 사좌당의 고유 의제 - 아프간 주둔 노르웨이군 철군, 나토 탈퇴, 빈곤의 완전한 청산 등등 - 를 실행할 의향이 전혀 없는 보수적인 사민주의 색깔의 노동당이 주도하는 내각에 사좌당이 합류한 것은 '연애 결혼'이라기보다는 '타산 결혼'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맏형 노동당이 사좌당의 의견을 무시하면서 국정을 비교적으로 보수적 기조로 운영했지만, 사좌당은 불편한 마음을 참고, '국정 운영 수업'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노동당과는 사실 많은 면에서 '성격 불일치'가 심해도 사랑이 별로 없는 이 관계를 청산하지 않고 계속 내각에서 버틴 이유는, 유권자들 앞에서 '국정 운영 유경험자, 책임 정당'으로 보이고 싶어서였습니다. 물론 이와 동시에 사좌당 주도층(간부층)의 적지 않은 관직에 대한 '관심'도 있었던 모양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여기까지는 정치인의 속성이니까 그렇다 치고, '국정 수업'을 위한 사좌당의 '억지 내각 합류'를 유권자들은 결국 별로 좋게 봐주지 않은 모양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사좌당과 같은 '사민주의보다 왼쪽'인 정당을 찍어주는 사람을 크게 봐서 두 가지 부류로 볼 수 있어요. 첫째, 자본주의보다 더 나은 세상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얻겠다는 이상주의자들이고, 둘째 우파 집권을 막고 복지 지출의 증강을 얻으려는 '복지주의적 현실주의자'들입니다.
 
문제는 무엇인가 하면, 첫째 부류의 유권자들은 좀 까다로운 성격이라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사좌당의 타산적인 온건 사민주의자들과의 억지 동거를 처음부터 좋게 보지 않았는데, 그 관계가 지속되면서 사좌당의 의제가 하나도 반영이 안되고 꼭 "몸만 팔고 화대도 못받는" 듯한 기색이 역역하기에 아예 상당수가 사좌당을 떠난 모양입니다. 사좌당과 노동당의 현실적 노선 사이에 별차가 없다면 차라리 힘이 더 센 노동당 안에서의 급진파를 키우든지 아예 투표를 안하든지, 하여간 그런 분위기들입니다.
 
그리고 '복지주의적 현실주의자'들은 역시 힘이 상대적으로 약한 사좌당을 지지하는 데에 늘 주저하는 마음은 있습니다. 이상주의 파들이 떠남에 따라 힘이 더 빠지니까 이들도 역시 떠날 준비를 하지요. 복지 예산 따내기에 역시 힘이 센 노동당이 더 쓸모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이들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대중들에게 어필하겠다고 '사랑이 없는 노동당과의 동거'에 몸과 마음을 판 '급진 개혁주의적' 정당은, 바로 일부분의 대중들에게 버림을 받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는 역설이네요...
 
우리가 여기에서 받을 수 있는 교훈은요? 현실 정치의 요구도 당연히 있지만 우리 이상을 너무 싸게 팔아버리면 그 값도 못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한국의 정치판 같으면 노르웨이 노동당과 같은 거대 사민주의 정당은 없는데, 한국의 진보정당으로서 극히 '몸조심'해야 할 것은 각종의 '노빠'류 - 포퓰리즘을 구사할 줄 아는 소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색깔의 주류 정당 내지 세력 - 와의 관계입니다.
 
권력을 아직도 못얻은 '노빠'류 정치인은 가끔가다 입바른 소리도 할 줄 알지만 권력을 득하기만 하면 부르주아 정치의 '풀 코스'가 따를 것입니다. 부정부패부터 그 무슨 새로운 해외 파병까지, 부르주아 정치인이 할 수밖에 없는 모든 짓을 다 할 것은 불보듯 뻔하지요. 한국의 진보정당은 이런 류의 정객들과의 관계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면 그 불가피한 낭패에 대한 책임까지 지게 될 것이고, 때이른 변절로 소신파 지지자들의 마음만 상처입힐 것입니다. 간디의 말대로, 윤리적인 정치는 최선의 정치입니다. '양심' 등을 가장하면서 진보를 유혹하는 부르주아 리버럴이야말로 어쩌면 이명박씨 류의 극우보다 더 조심하고 경계해야 할 사람일 것입니다. 
   
-------------------------------------
과거의 제국, 미래의 제국 (레디앙, 2009년 10월 08일 (목) 10:31:52 박노자)
미 제국의 쇠망…통합되는 유럽과 아시아의 ‘민족’ 계급
 
노르웨이에서 전쟁 5년간 반파쇼 저항 운동의 참여 인원은 약 4~5만 명으로 추산되는데, 독일군에 자원 입대하거나 파쇼 조직(NS ; 민족 연합당)에 자원 가입한 이들은 약 6만 명에 이릅니다. 그리고 전쟁 희생자 1만여 명의 5분의 1 정도는 노르웨이 유대인들이었는데, 그들을 구속해서 독일 쪽에 넘겨준 것은 노르웨이 자치 정부 하의 노르웨이 경찰들이었죠.
 
그 작전을 지휘한 총경이 나중에 전후에 재판을 받았다가 ‘단순히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하여 무죄판결이 나고, 평생토록 계속 경찰 복무하여 행복하게(?) 은퇴한 사람에요. 이런 이야기를 하노라면 노르웨이가 과연 파쇼 독일의 피해자였는가, 노르웨이의 공식적 역사 담론에 상당한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는 노릇입니다. 고문실에서 죽어나갔던 공산주의자들이나 아우슈비츠로 끌려간 유대인들이야 피해자임에 틀림없지만 하나 같이 독일군의 수주를 열심히 받은, 그리고 당연히도 전후에 하등의 처벌을 받은 일이 없었던 노르웨이 대기업들이야 차라리 수혜자에 가까웠습니다.
 
사실, 같은 이야기를 한국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죠. 정신대로 근로보국대로 끌려간 수많은 가난뱅이들이야 당연히 일제 전쟁의 피해자이었지만 황군 군납으로 돈을 번 경방의 김연수, 일본제국 국회의원으로까지 출세한 윤치호와 같은 그 시절의 경성의 거물들은 차라리 수혜자 축에 들죠.
 
노르웨이와 한국 사이의 흥미로운 공통점을 이야기하자면, 양쪽이 각각 독일의 제3제국과 대일본제국의 상당히 우대 받는 병참기지였죠. 독일인에 비해 노르웨인이 ‘2등 아리안’ 이었듯이 조선인도 일본인에 비해 대동아공영권의 2등 신민이었지만, 일단 둘 다 3등이 될까 말까 하는 부류들, 폴란드나 중국의 점령지대에 대해 얼마든지 군림할 수 있었죠.
 
그리고 ‘비인간’으로 분류된 제4지대, 구소련이나 중국의 국민당, 공산당 통치하 지역 주민들을 도살하는 전장으로 노르웨이인들도, ‘반도의 황국신민’들도 하급, 중급 장교 격으로 나아가 동참하면서 출세의 길을 닦을 수 있었죠. 히틀러나 전시 일제의 희한한 잔혹성이야 다행히도 과거의 일로 남을 것으로 기대할 수 있지만, 이와 같은 서열질서적인 지역적 위계는 미국의 세계 제국, 달러 제국이 점차 패망돼가는 오늘날에 다시 한 번 돌아오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유럽에서는 유로권의 중심 국가들이 핵심적인 제1지대를 이루고, 유로권의 취약한 경제(스페인 등)들이 제2지대가 되고, 유럽연합에 가입되었으나 유로 도입할 수 없는 유럽 주변경제(에스토니아 등)들이 제3지대가 되고, 가까운 시일 내에 유럽연합에 들 희망이 없는 우크라이나 등은 제4지대로 편입될 듯합니다.
 
물론 산업의 분업은 이들 4개의 지대 사이에서 아주 차별적으로 이루어질 듯합니다. 예컨대 아디다스사의 디자인 등을 독일이 맡겠지만, 오펠 자동차의 새로운 공장을 아마도 폴란드 정도의 나라에서 세울 것이고, 그것보다 환경적으로 영향이 나쁜 철강 산업은 여전히 우크라이나의 몫일 것입니다. 그리고 아디다스사나 그 하도급 업체의 생산라인은 아예 유럽 밖에, 베트남이나 인도네시아에 위치하는 것은 당연하기도 하죠. 이 4개의 지대 사이에서 자본이야 장애 없이 이동하겠지만 우크라이나 사람이 제1지대인 독일로 이동해서 노동으로 돈을 벌자면 가장 어렵고 더러운 직장에 취직하여 어렵사리 노동비자를 따내야 할 것입니다.
 
시리아나 알제리아인은 아예 그런 비자를 따낼 확률 자체도 아주 낮을 것이고요. 하나의 피라미드처럼 분업구조를 이루고 일체 노동자들에게 ‘국적’이라는 명찰을 달아 그들의 이동을 철저하게 단속하면서 저임금노동력의 착취의 초과이윤을 톡톡히 버는 새로운 유럽연합제국.
 
미 제국의 패망이야 사회주의자로서 눈물 흘릴 일은 전무하지만, 미국 제국 이후에 들어설 여러 지역적 분업 구조들에 의거한 새로운 제국주의적 세계질서는 지금보다 더 좋을 것이라는 환상을 버리는 게 좋을 듯합니다.
 
자본주의가 과잉 생산의 위기로 접어들면 접어들수록 오히려 저임금 노동력 착취의 초과이윤 효과를 그대로 지켜내기 위한 ‘국적별’ 노동력 통제가 더욱더 가혹해질 것입니다. 주변부 노동자들이 중심이나 준중심으로 허가 없이 이동해버리면 그들에게 중심/준중심의 기준대로 임금을 높이 주어야 하는데, 그게 자본의 입장에서는 그 나라에 진출해서 거기에서 공장을 세우는 일보다 이윤이 훨씬 덜 나죠. 그리하여 짐승사냥식의 이민자 단속은 아마도 앞으로 더욱더 잔혹해지고 파쇼적 냄새를 더욱더 풍길 듯합니다. 세계적 미국 제국이든 지역적인 패권국가 중심의 새로운 지역별 질서든 자본에 짓밟힌 노동자들은 그대로 늘 속출될 것입니다.
 
--------------------------------
급진화의 전제 조건들 (레디앙, 2009년 10월 19일 (월) 11:06:03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성장시대의 급진화, 빈곤시대의 보수화 & 반체제 이데올로기
 
요즘 며칠간 러시아어 <한국통사>를 출판준비하느라 거의 잠을 설치고 독서도 못할 지경입니다. 거의 10년 간 작업해서 만든 교과서인데, 이제 노태우 말기까지 조명하는 강만길 선생님의 <고쳐쓴 한국현대사>의 러문 번역본을 합쳐서 한국사의 일반을 다 커버하는 완성판을 내게 된 것입니다. 이 교과서를 마지막으로 가꾸면서 자꾸 드는 생각인데, 역사에서는 사건의 복원까지 하기는 쉬운데 인과 관계의 복원은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실생활에서 인과관계가 너무나 복잡하다는 것이죠. 하도 다선이다 보니 이를 간단하게 몇 마디의 설명으로는 도저히 정리를 못 합니다.
 
예컨대 같은 반공 전선 국가인 한국, 대만, 싱가폴인데 그 세 나라에서 1970~80년대의 민주화운동은 너무나 서로 다른 양상을 보입니다. 싱가폴에서는 비교적으로 미미한 일부 지식인/직업적 운동가 움직임 정도고 대만에서는 외성인에 대한 본성인의 '민족해방운동', '대만독립운동'과 같은 모습으로 많이 기울여지고 남한에서는 아주 보기 드물게 정치적으로 급진화되어 1980년대에 반공주의 진영의 동아시아에서 마르크스주의를 가장 폭넓게 수용했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그랬을까요? 물론 예컨대 잠재적인 비판자들의 출국을 가능케 하는 비교적으로 개방적인 국가인 싱가폴, 대만과 출입국을 동유럽 못지 않게 심하게 관리했던 1987년 이전의 한국의 '군사화의 정도'부터 시작하여 한국의 대기업 위주 공업화가 가져다준 노동 집중의 효과 등까지 거론할 수 있는데, 완벽한 설명은 되지 못합니다.
 
아니면, 이와 같은 대조는 어떤가요? 우리는 보통 통념적으로 '상대적 궁핍화'가 다수의 급진화를 가져다준다고 생각하는데, 사실상 그게 정반대일 수도 있습니다. 1980년대가 '궁핍화'시대였나요? 삼저호황, 지속적 고성장, 반도체 진출, 야간 통금 철폐 등 일상의 부분적 탈군사화, 그리고 선정적인 대중문화의 전성기 시대이었습니다. 중산계급에는 물론 못미쳤지만 노동자의 실질소득은 사실상 소폭으로 오르고 있었으며, 빈곤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었어요. 그럼에도 젊은 지식인, 노동자의 계속적 급진화는 결국 1987~88년의 대승리 - 정치적 민주화와 민주노조의 탄생을 가져다줄 수 있었죠.
 
반대로는 1998~2008년의 시대는 말 그대로 '점차적 궁핍화'의 시대를 맞았습니다. 상대적 도심인구 빈곤율은 1990년대 중반의 7%에서 지금의 15%로 껑충 오르고, 대학생들의 등록금 인상율은 물가 인상율보다 2배나 돼 학생들을 '안정적 고용의 전망이 전무한 빚쟁이'로 만들고, 성장세의 지속적 둔화 속에서 근로자 다수가 비정규화됐고... 마지막으로 남은 것은 부동산 가격의 거품인데, 그것까지 꺼지면 대다수의 전체적 빈곤화를 중산층까지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상대적 빈곤화의 시대가 정치적으로 낳은 게 무엇인가요? 노동운동의 침체(대체로 수세적 자세), 노조의 고립화, 진보정당 운동의 답보상태 (민노, 진보신당을 합쳐도 전체 지지율은 10~12%의 한계를 절대 못넘죠), 그리고 40~50%의 지지를 받는다는 '괴물적인' 극우정권의 안정화입니다.
 
미래를 빼앗기고 현재에서 하루 하루 힘겹게 '쩐의 전쟁'을 치루고 있어야 할, 그 부모만큼 잘 살 확률이 없는 '88만원의 시대'는 꼭 "보수화됐다"고는 할 수 없지만 적어도 가시적으로 진보화돼가는 조짐은 없습니다. 그리고 현실 정치에서는 진보성의 부족은 벌써 기존 현실의 암묵적 지지, 즉 보수성을 의미하죠.
 
성장 시대의 급진화, 그리고 빈곤화 시대의 보수화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요? 일단 잠정적인 답은, 경제적 추세와 정치적 상황 사이의 직접적인 인과 관계가 작동한다기보다는 사회 조직 내지 이데올로기와 같은 중간기제를 통해서 영향을 미친다는 것입니다. 사회 조직과 이데올로기의 차원에서는 급진화의 전제 조건은 대체로 다음과 같습니다:
 
1. 피지배층의 전위(예컨대 상대적인 박탈감이 강할 수 있는 '88만원 세대' 등)의 상황과 취향에 맞은, 호소력이 강한 반체제 이데올로기의 확산입니다. 이데올로기라는 '풀'이 없으면 원자화된 개개인들은 서로서로에게 '붙여지지' 않아요.
 
1980년대에는 학교, 군대에서 집단규율에의 복종을 철저하게 익힌 아이들에게는 이와 같은 동원이데올로기의 역할을 조직과 리더에게의 복종을 가르쳐주는 스탈린주의라도 할 수 있었죠. 그런데 오늘날처럼 이미 상당부분 탈군사화된 한국사회에서는 높은 규율성을 요구하는 1980년대식 운동이데올로기는 웃음거리 이상 되기가 힘들 것입니다.
 
사회가 강요하는 '일 중독'이나 저질 대중문화, 일차원적인 행동양식('출세를 위한 총력전', 시간과 정력의 소비를 '투자'로 개념화하여 '전략적으로만' 움직이는 타산적인 생활양태 등)에 지칠대로 지친 '88만원 세대'에는 차라리 계급성의 논리와 인간성 회복의 논리를 연결시킨 신좌파 - 마르쿠제, 프롬부터 홀거 하이테 류까지 -가 더 호소력이 있겠지만 레닌주의의 '파생상품' (전형적 스탈린주의부터 트로츠키주의까지)들은 이미 한국화돼 어느 정도 수용돼도, 신좌파는 소개만 됐지 제대로 토착화되지 못했던 것 같아요.
 
결국 새로운 혁명의 수단은 체제전복은 돼도 그 궁극적 목적은 일에, 가정에, 돈에 갇힌 인간의 다차원적인 '해방'은 될 터인데, 이와 같은 '인간성 해방 혁명'을 위한 이론은 아직도 국내에서 정형화, 대중화되지 못하고 있어요. 이진경 선생 같은 분들은 바로 이와 같은 '신혁명 이론'에 근접하시고 계시지만, 너무나 계급적 명확성이나 계급운동과의 관계를 잃어서 문제입니다.
 
2. 대규모 조직이 현실적으로 지향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동목표는 필요합니다. 1980년대는 이론적으로 백가쟁명의 찬란한 시대이었지만 다들 "독재 타도, 민주화, 노조 자율화" 정도의 최소강령을 그나마 공유했기에 운동 전반은 탄력을 받을 수 있었죠.
 
지금 운동의 '병목 현상'을 타파하자면 그 전선에 있는 수많은 단체, 집단들은 - 거기에서는 좌파민족주의자부터 불교적 환경생태론자까지 온갖 분들이 다 계시겠지만 - 적어도 몇 가지의 간단한, 그리고 현실적으로 실현 가능한 '최소한의 공동 강령' 정도 제정, 보급하는 것은 좋을 듯합니다. 예컨대 "사유제한으로 비정규직 양산을 막고, 기업세, 고소득자 소득세를 대폭 올려 교육, 의료 무상화 달성하자" 아니면 "직장 안정화, 분배 정의"라고 아주 간단히 하든지요. 이게 우리의 당면 목표라는 절실한 의식이 대중화된다면 다음에 진보정치는 그나마 소수의 섹트 정치에서 대중 정치로 발전이라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행동보단 말이 쉬운 것입니다.
 
위와 같은 전제 조건이 충족된다면 '88만원 세대의 급진화'를 상상해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운동 전선'은 1980년대의 유산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해 '88만원 세대'와 동등하게 대화할 줄 계속 모른다면 앞으로의 젊은층의 점차적 빈곤화는 급진화가 아닌 극우화로도 이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극우화라는 것도 일종의 급진화입니다. 우파적 의미의 급진화죠... 

 

--------------------------------------
진보정당, '사회적 정의 정당' 돼야 (레디앙, 2009년 11월 02일 (월) 08:38:20 박노자 / 오슬로대)
대중이 원하는 건 빵과 정의…자본주의 속 사회주의자들이 할 일 
 
말기의 소련 시민들이 정권에 대해서 불만을 가졌을 때에 꼭 소비물자 부족보다도 '간부층의 특권'을 늘 꼽았습니다. 물론, 오늘날 러시아의 백만장자들의 생활 스타일을 생각해보면 그 때의 간부층의 특권이란 우스운 수준이었죠.
 
노동자 평균 임금 약 3~4배 이상의 월급, 특수 배급소에서 나오는 맛이 있는 동독제 소시지와 마로꼬산 오렌지, 자녀들의 영어 특목고(네, 그 시절에도 '외국어특목고'는 특권의 상징이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주변적 문화들은 중심권의 언어에 대한 숭배에 있어서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리고 3~4년에 한 번씩 있을까 말까 하는 핀란드나 파리로의 출장 내지 투어... 이 정도면 오늘날 모스크바 중산층의 생활수준에도 크게 미달하는 '풍족'인 셈이죠. 그리고 오늘날 러시아 백만장자들의 '특권'이란 영국에서 축구 구단을 하나 사버린다든가 초호화 요트나 개인 비행기를 수집하는 식인데, 그런 것은 과거 공산당의 총서기장마저도 꿈조차 꿀 수 없었습니다.
 
일각의 트로츠키주의자들은 구소련 등에 대해서 '국가 자본주의'라고 못을 박지만, 그 논리에 일말의 진리가 담겨져 있다해도, 아주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치고 있습니다. 공산당 총서기장과 같은 자들은 그 관료적 영향력이라는 행정자본을 대물림할 수 없었거든요. 공산당 정치국 위원의 아들은 유명한 미사일 엔지니어 정도 되는 것은 다반사였지만 정치국 위원직 자체를 사유화시켜 대물림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금전적 자본이 자본가 일가에서 당연히 세습되는 진정한 의미의 자본주의와는 판이하게 다른, 훨씬 더 업적주의적인 관료제 위주의 계급적 시스템인 셈이죠.
 
그러면 30년 전의 공산당 정치국 위원의 별장이 너무 커 보인다고 침을 뱉고, "공산당 간부를 다 처단해야 한다"고 자신의 부엌방에서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했던 이들이, 오늘날 로만 아부라모비치가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첼시 구단에 몇 백만 달러를 더 투자했다는 소식에 냉소하면 하지 별로 분노하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요?
 
답은 아주 간단명료합니다. 사회가 합의한 '정의' 개념은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공산당 치하의 사회에서는 공산당 간부란 레닌의 가르침(이라고 선전되어지는 교리 내용)을 전수 받아 이를 '양떼'라고 할만한 '근로인민대중'들에게 설교하고 이들을 이끌어 아미타불의 정토처럼 완벽무구한 '공산주의'로 가는 성직자 아닌 성직자입니다. 그런데 '양'들은 자기헌신하여 사회주의 건설장에서 죽으라 일하고 레닌이라는 성현의 신성한 가르침을 전수, 간직하는 현대판 사대부들이 인욕을 막으면서 오로지 멸사봉공에 헌신한다는, 엣 공산시기의 사회 정의에 대한 합의는 이미 깨지고 말았습니다.
 
자본주의 러시아의 '정의'에 대한 합의란 "각자 그 생존을 도모하여, 정부가 우리 벌이를 크게 위협하지 않고 거시 경제 여건만 바로 잡으면 우리도 정부와 재벌의 행동에 딴지 걸지 않겠다"는 정도입니다. 각자 알아서 그 생존을 도모한다, 그러면 그 도모에 성공해서 첼시 구단까지 사버린 이에게 왜 침을 뱉겠어요? 부정한 방법으로 도모했다고요? 러시아 같은 '신흥 시장'에서 법을 한 번이라도 어기지 않은 사람이라고 있겠어요? 적당한 부정에 적당히 눈을 감아주는 것도 '새로운 러시아'의 사회적 합의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사람에게 '빵'이란 일차적인 욕구지만 '사회 정의' 없는 빵만으로는 한 사회가 잘 유지되지 못합니다. 망할 때쯤 됐을 때에 소련에서는 빵은 약간 부족해도 그것 없어서 굶어 죽은 사람은 없었습니다. 연금생활자들의 아사의 경우 등은 망한 뒤에야 나타났죠. 그런데 정의가 없다는 걸 다들 체감했기에 이에 대한 공감대가 결국 한 나라를 무너뜨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면 대한민국은 어떤가요? 우리에게 정의란 결국 '기회의 균등'과 '의무의 균등', '공법 엄수' 정도일 것입니다. 요컨대 10%의 부자들이 거의 80%의 자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데에 대해서는 다수의 국민들은 반기지 않는다 해도 체념할 수 있지만 그 부자들의 자식들의 병역기피에 대해서는 아주 격분합니다. "나는 가서 2년씩이나 썩었는데 저 놈은 나와 뭐가 다르기에 안 가느냐" 이것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이미 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전혀 바뀌지 못할 계급적 위치인데, 이 계급 질서 그 자체를 이미 받아들인 대한민국 국민들은 계급질서에서 파생되는 비교적으로 사소한 부정 등에 대해서만큼은 아주 분노들 많이 하는 셈입니다.
 
이재용 전무 한 명이 수만 명의 '중산층' 한국인보다 훨씬 더 많은 부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에 대한민국 국민들은 당연시하지만, 만의 하나에 이재용 전무가 그 자녀를 기부입학과 같은 방법으로 서울대에 집어넣으려 한다면 상당한 분노가 일어날 것입니다. 계급적 질서도 받아들여져 있으며 서울대생의 특권적 위치 등의 학벌 위계도 다 '합의'된 듯하지만 '기회의 균등' 원칙을 무시해 그 학벌의 사다리에서 몇 계단 뛰어오르면 다들 "야, 이 새끼"라고 고함치르죠.
 
사회주의자의 입장에서 보면 대한민국의 '평균적 국민'의 사회적 정의 정서란 억울하고 우스운 것입니다. 이건희나 이재용과 같은 이들이 군대에 가지 않았다는 등의 문제보다도, 사회주의자 입장에서는 삼성의 일가를 위시한 자본계급이 대한민국을 배타적으로 지배한다는 상황 자체가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데올로기적 헤게모니가 아무래도 자산계급에 장악돼 있다는데 어찌 하겠습니까? 비록 대한민국 인구의 90%는 중하급 월급쟁이거나 영세한 내지 비교적으로 규모가 작은 업자들이지만, 각자 그 생존을 도모하여 무슨 값을 치르더라도 무조건 '성공'을 이루어야 한다는 자본의 이데올로기를 거의 대다수가 공유합니다.
 
"각자가 그 생존을 도모한다"는 이야기 정도면 우리의 국시 아닌 국시이며, 애국이고 사회고 민족이고 뭐고 그 국시에 비해서는 어디까지나 '취미', '선택 사항' 내지 그냥 장식품입니다. 이와 같은 악조건에서는 사회주의자들이 해야 할 일은 아무래도 다수의 정서를 참고하면서 정의를 규정하는 방식에 조금씩 균열을 일으켜서 보다 사회주의적 내용의 사회적 정의의 규정을 대중화시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돈이 사교육을 사고 사교육이 명문대 입학을 보장해주는 세상에 과연 명문대의 존재 자체가 '기회 균등'의 원칙을 배반하지 않는가? 차라리 재능이 있어서 돈이 없어서 지방대에 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을 생각하여 대학평준화, 학력서열 타파책을 취해야 하지 않는가?
 
이런 방식으로 메시지를 전할 경우에는 비록 이미 '정신적으로 자본화된' 대중이라 해도 그래도 호응은 있을 것 같습니다. 진보신당과 같은 진보 정당들은 만약 성공하자면 결국 '사회적 정의의 정당'이 돼야 할 것 같고 늘 대중의 정의감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단, 문제는 진보 정당들이 사용할 수 있는 매체들이 제한돼 있어 아무리 잘 조율된 메시지라 해도 그 전달은 여간 어려운 게 아닐 것입니다.
 
--------------------------------------------
자본주의서 행복은 미션 임파서블? (레디앙, 2009년 11월 09일 (월) 09:27:57 박노자 / 노르웨이 오슬로대)
근대 이후의 행복관…사회주의 아니면 치유 불가능 가까워
 
학술적으로 보자면 전근대에서 근대로의 전환은 행복감의 '주관화'를 의미했습니다. 전근대 사회의 행복관은 대체로 객관적인 조건을 전제로 하는 것입니다. 아이들이 많고(노동력이 필요하니까), 심신 건강하고(병이 나면 지금 노르웨이처럼 나라에서 먹여주지 않으니까), 되도록이면 오래 살고, 적당한 부를 축적하고 - 이 정도입니다.
 
지금 보면 아주 단순한 행복관이지만, 유행병으로 인구의 10~20%가 쉽게 죽어버리고 평균 예상 수명이 30세이었던 시절에 "병없이 오래 산다"는 것은 사실 꽤 까다로운 조건이었습니다. 그런데 근대에 접어들어 행복지수라는 게 주관적으로 전환됩니다. 큰 병없이 오래 살고 아이를 낳고(많이 낳지는 않지만) 적당한 재력을 가진다... 이 정도라면 다수의 노르웨이 사람들이 '객관적으로' 행복하겠지만 주관적으로 볼 때에 전혀 행복감을 느끼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간단하죠. 행복감이 주관적일 때에 그 기본 조건이 된다는 것 역시 '관계'입니다. 인간이란 '관계적 존재'이기 때문이죠.
 
생활의 질을 따지자면 대한민국과 비교가 되지 않겠지만, 행복이라는 게 성적순도 아니지만 생활의 질 순서도 아닌 모양입니다. 물론 이유들은 많을 수도 있지만, 저는 그래도 인간의 '관계'를 비뚤어지게 만들어 개개인의 '행복감'을 떨어뜨리는 주된 요인으로 자본주의적인 노동, 즉 자신의 노동력의 상품화의 필요성을 꼽으려 합니다.
 
물론 '칼 퇴근'이 거의 특권으로 인식되어지는 이 '위대한 대한민국'과는 역시 비교할 수 없지만, 노르웨이에서도 개인 인생의 중심에 대개 '직장'이 있습니다. 싫든 좋든 다들 거기에 다녀야 하는 것처럼 1년에 2~3번씩이나 스페인에 가서 일광욕과 쇼핑을 즐길 수 있잖아요?
 
여성의 80% 정도가 직장에 다니기에 사민주의적 국가가 '여성복지 증진'시킨답시고 갓난 영아, 즉 1살 영아들의 유치원 보내기를 적극 장려합니다. 이게 사실 여성의 복지라기보다는 양질의 여성 노동력을 이용하려는 기업을 위한 '생산 복지'인데, 말이야 늘 '여성 복지'라고들 하죠.
 
그러나 이 자본 세계의 물신인 생산을 위해 뭘 못하겠어요? 결국 그렇게 큰 아이들은 애정 결핍에 걸리고 부모와 거리가 멀어지고 대마초나 피우고 동료들을 이지매하고 그렇습니다. 비극의 씨앗은 자본의 필요성에 따라 움직이는 사민주의적 국가가 뿌리죠. 아이를 가진 어머니들 내지 아버지들에게 아이가 적어도 3살 될 때까지 평균임금에 준하는 육아수당을 지급하면서 그냥 재택 육아노동에 자유롭게 종사케 하고, 그 다음에 순조로이 본직에 복직시켜주면 그만일 테고 노르웨이의 재정으로 봐서는 충분히 가능한 일인데 그렇게 절대 안 하려고 합니다. 생산의욕을 떨어뜨린다고 해서 말입니다.
 
부부 관계를 봐도 그렇습니다. 현대 소비 자본주의의 특징은, 절대로 사람을 가만히 두지 않으려는 것입니다. 수많은 광고들은 '가족 휴식의 최적의 방법'으로 각종 여행상품 등을 팔아먹고, 어릴 때부터 텔레비전 소리에 익숙해진 어른들은 부부끼리 집에 같이 있을 때도 늘 텔레비전 등을 켜놓고 있고, 부부간에 같이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쇼핑이 부상되고 그렇습니다. 그저 같이 숲속을 거닐고 이런 것을 좋아하는 부부들은 친구 사이에 '구식'으로 몰립니다.
 
경제가 불황이고 항공사들이 제일 타격을 맞고 있는데도 노르웨이 저가 항공인 <노르비젼>이 엄청난 이윤을 챙기는 걸로 봐서는 항공여행'이 노르웨이인들의 일상 속을 얼마나 파고 들었는지 알 만합니다. <노르비젼>만 해도 일년에 거의 9백만 명의 승객, 즉 전국 총인구 두배나 되는 승객들을 태우죠. 그 와중에서는 부부들에게 서로에 대한 '인간적' 관심, 배려, 사랑은 없어지고 맙니다. 풍족한 물질만 남는 것이죠. 직장에서의 인간 관계의 문제 - 여기에서도 있는 따돌림 등 - 를 제가 나중에 따로 쓰려고 하는데, 요지는 마찬가지입니다. '생산 요구'상 자아실현이 불가능해지죠.
 
인간이 물질의 주술을 벗어나 서로에 대한 배려와 사랑으로 살 수 있는 사회주의/공산주의가 아니라면 현재 선진권 인류의 불행함을 치유할 수 있는 방법은 없을 것 같습니다. 규율화된 생산으로부터의 자유를 득하지 않으면 행복도 불가득입니다. 그런데 다수가 이 사실마저도 이해 못하는 걸로 봐서는 그 대동사회까지의 길은 아주 멀고도 멀죠... 
 
---------------------------
시베리아에서, 향수와 희망 (레디앙, 2009년 11월 16일 (월) 08:14:53 박노자 / 오슬로대)
구소련 시절 인텔리들이 공부만 팔 수 있었던 이유…시장에서 벗어난 삶
 
제 자신에게 왜 가느냐 라고 물어보면 이렇다 할만한 쉬운 답을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는 학회 때문에 가죠.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그 쪽을 가보려는 욕망의 원천은 아마도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보고 들추어보려는 마음에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한 마음을 두고 종종 '향수'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제 경우에는 이 향수라는 말은 아마도 반쪽쯤 해당될 것입니다. 일단 향수라고 하더라도 이미 망하고 없어진 곳에 대한 향수, 즉 회복이 불가능한 과거에 대한 향수일 것인데, 역시 향수라는 말에 약간의 어폐가 있는 것 같기만 합니다. 대개 '향수'라고 할 때에 그 대상이 상당히 미화된다는 것이 전제가 되곤 합니다. 예를 들어서 '박정희 향수'라고 할 때에 '경제 기적'부터 '민족적 자신감 회복', '국민적 단결', '국민적 긍지'까지, 대체로 1960~70년대의 (조건부일 수도 있지만) 긍정론을 펴곤 하는 것이죠.
 
그런데 제가 소련에서 보낸 시절, 즉 이미 어느 정도 사회 생활을 인식할 수 있었던 1980년대의 학창 시절을 굳이 긍정할 근거도 갖지 못하고 있으며 긍정하려 하지도 않죠. 경제적으로는 성장률이 2~3%밖에 되지 않아 비군사 부문의 생산도 민간의 소비 부문도 정체를 겪은 것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관료주의 독재라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무래도 긍정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독재'라 해도 박정희 시절과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일 것입니다. 박정희 시절의 '재야'는 - 천관우 선생과 같은 얌전한 선비형 분들까지 - 야수적 고문을 당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지만, 소련에서 1970~80년대에 카갈리치키 선생처럼 반정부 재야 활동을 했던 지사들은 기껏 해야 비교적 '참을 만한' 조건하에서 몇 개월에서 몇 년까지의 투옥 내지 강제 '노동교화' 정도 겪고 출국허가를 받아 서방으로 나가거나 다시 사회로 돌아오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조직까지 만드는 '골수'들에게 해당되는 것이었지 (그런 분들은 1987년에 일제히 석방됐지만 전국에서 대략 80명에 불과했습니다) 일반적으로 반정부 가제 책자(사미즈다트)를 돌리는 정도라면 한번 '기관'에 불러 상담을 하고 "다음부터 반소 활동을 하지 않는 약속"을 요구하는 수준이었습니다. 이미 명분과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고 나름의 복지국가를 세운 정권은, 박통과 달리 반대자를 고문하고 죽일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던 것이죠. 그런데 '소프트 독재'라 해도 어쨌든 독재는 독재입니다. '긍정'할 것은 절대 못되죠.
 
제가 향수와 비슷한 감정을 느끼는 부분은, 그 어떤 '긍정'도 할 수 없는 후기 스탈린주의 정치 체제는 절대 아닙니다. 차라리 그 체제 속에서도 그래도 고스란이 남은, 암흑 속에서 진주처럼 빛나는 것 같았던, 혁명 초기의, 내지 혁명 이전부터 혁명적 인텔리겐차에게 있어왔던 그 어떤 '정신'에 대한 애착입니다. 예를 들어서 1980년대에 대개 대학 전임강사의 임금 (그 당시 국정 확률로 약 300~400달러)은 고숙련 노동자의 임금 (약 500~600달러, 광부처럼 고위험 직업군의 경우에는 거의 600~700달러)보다 훨씬 낮았습니다. 생활 여건도 열악한 데가 한 두 군데 아니었습니다.
 
그 때에 이미 개인 자동차나 개인 별장 (다차)가 흔해졌지만 미하일 박선생님을 비롯한 제 스승들에게는 거의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지식인들을 과잉 배출시킨 데다 전략적으로 고숙련 노동자 집단 사이에서의 지지를 확보하려 하는 체제로서 일부 필요한 전문가 (핵물리학자 등 군사적 용도가 있는 전공들을 말함) 이외에는 인테리들을 특별히 우대할 것 없었어요.
 
그럼에도 제가 아는 수많은 이들은 박봉과 사회적 푸대접 등을 각오하면서도 온갖 '돈이 안되는' 공부들을 - 한문고전부터 마야족의 문자까지 - 열성적으로 했던 것이죠. 미하일 박 선생님 같으면 1960~80년대에 혼자서, 그 무슨 연구비 한 푼 받을 것 없이 고구려, 백제 본기를 다 러어로 번역하신 게 그 한 예입니다 (<신라본기>는 이미 1959년에 번역,출판됐습니다). 당에서 고대사에 관심이 적어 출판이 어려울 것도, 언젠가 긴 줄 서서 출판이 돼도 역시 돈이 될 일이 없는 것도 다 알면서 30년 동안이나 혼자서 어려운 한문을 푸는 이유는? 그저 공부가 좋아서였습니다 (물론 그외에 고려민족의 정신 보존 등의 고려도 있으셨을 것입니다).
 
'일'에서 쾌감을 얻을 수 있는, '일'을 행복으로 보는 진정한 의미의 공산주의적 정신은, 왜곡된 대로 왜곡돼버린 스탈린주의 사회에서도 그래도 일각에서 간직되었던 것이죠. 저는 향수가 있다면 이러한 면에 대한 향수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혁명적 인텔리겐차의 그 유명한 '무푼주의'(besserebrennichestvo - 돈에 대한 무관심)가 그래도 간직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이엇을까요? 답은 간단합니다. 관료주의적 중앙집중적 경제운영 체계 ('한 공장과 같은 한 나라')에서는 물론 부분적으로는 시장의 요소도 존재했지만 (국가는 고용자들이 만들어낸 잉여를 수취하여 재생산에 투입시키는 등 국가적 자본의 확대재생산은 경제운영의 원칙이었습니다) 수많은 부분들이 비시장적으로 운영됐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대학 입학시의 까다로운 입시, 의료서비스의 낮은 질, 연금의 박함, 주거 환경의 열악성과 새로운 주택을 배급 받기 전에 서야 하는 몇 년간의 긴 줄 등은 불만일 수 있었지만 기본적으로 교육, 의료, 노후, 주거 등은 사회가 비시장적으로 책임지는 까닭에 개인으로서 두려울 것은 사실 거의 없었습니다.
 
아무리 마음 먹어도 직장을 잃어 장기 실업자 될 수도 없었고 (직장 알선은 국가 책임이었습니다) 굶어죽을 수도, 돈이 없어 병원에 못가고 아파서 죽을 수도 없는 세상이다 보니 사람들에게 마음의 여유가 생길 수 있었던 것이죠. 그리고 그 마음의 여유의 표현은 바로 각종 벽(癖)들이었습니다. 미하일 박 선생님의 한문 원전 번역벽 같은. 좀 희귀한 일에 미치면서 서로 별로 다르지 않은 나날들을 그래도 재미있게 보내는 것은 소련 시민들의 낙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정치적인 권위주의로부터의 자유는 없었지만, 경제적 억압으로부터의 상당한 자유는 주어져 있었습니다. 지금 러시아 같으면 물론 이것도 저것도 다 없다고 봐야겠지요?
 
스탈린주의는 물론 사회주의도 아니고 그 어떤 이상 사회도 아닙니다. 그런데 인간의 생존에 절실히 필요한 일체 부문 (주거부터 의료, 교육까지)을 비시장화시킨 후기 스탈린주의 특징 등을, 사회주의자로서는 당연히 긍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야말로 인간의 자유로운 자아실현을 가능케 하는 '겁으로부터의 해방'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부분에 한해서는 구 동구권 사회들은 우리에게 여전히 "나은 세상이 가능하다"는 희망을 심어주기는 합니다. 과거이면서도 우리의 바람직한 미래이기도 합니다. 
 
---------------------------
내일을 위한 사회주의 (레디앙, 2009년 11월 23일 (월) 08:27:32 박노자 / 오슬로대)
'황금의 중도' 차베스 노선 성공과 유럽의 좌향좌
 
제가 말씀 나눌 수 있는 저쪽 동료 분들은 구 소련 시절의 '가장 기억하기 아픈 문제'로 두 가지 이야기합니다:
 
1. 정치적인 '공공영역'의 부족
사석에서야 못할 이야기는 사실 없었지만 공석에서 기탄없는 합리적 토론을 할 수 있는 장치는 없었습니다. 신문에서는 검열이 태심하고, 집회 자유나 결사 자유는 이름뿐이고, 합리적 토론을 전개하기 위한 외국 서적도 마음대로 다 주문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버마스가 이야기했던 '공공영역'이 사실상 동료끼리 차를 마시면서 나누는 정치 험담 ("저 간부놈들이 이제 또 뭔 짓을...") 수준으로 좁혀지니 내면의 자유는 있어도 그 자유의 사회화는 불가능했대요. 그러면 인문학은 정치화된 '어용학문'과 정치를 아에 배제하고 '순수학술'만 따르는 인문주의적 아카데미즘으로 양분되고 점차 힘을 잃어간답니다.
 
2. 민간소비 부문의 위축
일부는 정치적 성격이었지만 (해외 여행과 해외로부터의 수입에 대한 매우 엄격한 제한 등)민간소비 부문의 위축은 대체로는 군수복합체에 투자하느라 정신없는 국가는 단순히 경공업 등에 투자를 너무나 덜한 것이었습니다. 시장이 아닌, 국가의 행정적 결정에 의해서 움직이는 경제다보니 국가로서는 우주공학 등에 투자를 더 하고, 화장실 휴지 생산에 투자를 거의 안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보였지만, 우주에 비행할 일은 없는 일반인의 입장에서는 휴지 하나 구입할 수 없는 '인민의 낙원'은 좀 지옥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었어요.
 
제2차 세계 대전을 겪은 윗세대는 '무기'의 중요성을 잘 인지했기 때문에 그냥 참을 수도 있었지만, 신세대로서는 욕구불만 해소의 길은 없었습니다. 그 불만을 말로 표현하는 것까지 불허되니 쌓이고 쌓인 체제에 대한 혐오는 결국 한꺼번에 나중에 터지고 말았습니다.
 
위에서 이야기한 현실 사회주의의 두 가지 폐단을 합쳐서 이야기하자면 한 마디로 '민주주의의 부족'이었습니다. 직장 생산자들의 민주적 결정에 의해서 사회화된 경제가 움직였다면 화장실 휴지를 간절히 원하는 뭇 인간들의 바람이 당장 주효돼 사회적 투자의 방향은 휴지 공장 쪽으로 움직였겠지만, 실제로는 수백만 명의 민심보다 한 명의 고급장교의 의견이 더 중요시됐기에 사회주의 국가가 '총동원형 고등국방국가' 수준을 넘지 못했습니다.
 
만의 하나에 시장보다 훨씬 더 합리적일 수도 있는 '계획'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경제 체제가 정말로 '공공영역'에서 토론돼 결정되는 바대로 운영되고, 개개인 한 명 한 명의 욕구를 들어줄 만한 능력을 갖추었다면 이 체제는 망할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소련이 이렇게 쉽게 망해버린 것은 바로 그 체제의 비민주성을 노골적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주지하듯이 소련연방 해체에 대한 결정을 그 구성 공화국 중 세 개(러시아, 우크라이나, 백러시아)의 대통령들이 함께 술을 마시면서 내린 것이었습니다.
 
국민투표 따위는 없었죠. 민주국가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방식인데, 고르바쵸바가 그렇게도 많이 이야기했던 '사회주의의 민주화'는 결국 이루어진 적은 없었어요. 뭐, 표현의 자유가 주어지자마자 여태까지 억압당했던 온갖 욕구들이 폭발적으로 표명돼 '사회주의' 자체가 거의 욕처럼 됐는데, 무슨 말씀을 하겠습니까?
 
사회주의를 매장시킬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사회주의 실천할 때에 민주주의를 배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단기적 집권은 가능해도 장기적으로는 필패죠. 소련의 흥망이 우리에게 주는 핵심적 결론인 듯합니다.
 
거시적으로 본다면 소련의 '비민주적, 국가주의적'인, 소위 현실 사회주의는 초기의 내전과 그 뒤의 각종 외전(냉전을 포함함), 그리고 러시아 사회의 후진성과 압축형 공업화 필요성의 산물이었습니다. 내전 때에 만들어진 체카 등 안보기관의 출신들은 지금도 사실상 러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죠. 또한, 소농들이 다수를 점하는 사회에서는 도시 인테리/고숙련 노동자 중심의 사회주의자 집단은 기본적 통치 행위도, 농업부문에서 공업부문으로의 자원 이동도 '민주적으로는'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전쟁, 기아, 후진성으로 점철된 사회에서 배태되는 사회주의는, 그 창립자들은 아무리 선한 마음을 가지고 아무리 진실되게 진정한 사회주의의 건설을 원한다 해도, 결국 '동원 체제'의 한계를 넘기가 힘들어요.
 
그러면, 미래 사회주의는 어떤 모델에 따라서 발전되는 게 바람직할까요? 저는 아무래도 지금으로서 차베스 이상의 '벤치마킹' 대상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수많은 빈민굴 주민들을 위해 사회적 잉여를 나누어주고 각종 노동자의 공장 관리 등을 지원하면서도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적어도 장기간 '과도기' 내내 그대로 간직하면서 부르주아계층과 대립하면서도 극단적인 무장 충돌을 일단 최대한 피하는, 그런 형태는 지금으로서는 황금의 중도일 듯합니다.
 
일단 내전, 내지 대미전으로 접어들기만 하면 그 다음 베네수엘라판 체카를 만들고 안보정치, 국방정치를 펴야 할 터이니 최대한의 정치술, 인내심을 발휘해서 '극단적 충돌'을 피하는 것은 맞습니다. 다만 문제는, 세계 전체가 여전히 1990년대식 반동 정치의 사슬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남미의 사회주의 지향적 정권들이 고립화와 극단적 충돌 등을 얼마간 피할 수 있을까요? 차베스 등의 위대한 실험이 완벽하게 성공하자면 유럽부터 하루빨리 좌향좌를 시작해야 할 것이죠.... 
 
------------------------------
사회주의, 그리고 인생의 의미 (레디앙, 2009년 11월 30일 (월) 08:53:27 박노자 / 오슬로대)
'마지막 인간'들이 만나는 곳…진보정당 지역위서 문학-인생 토론을
 
사실, 오늘날 아프간과도 다를 게 없는데, 경험이 풍부한 그레엄 그린은 월남이 미국의 계획대로 어차피 살 수 없다는 점, 그리고 결국 그 특유의 길 - 일종의 유교화된 국가사회주의의 길 - 로 필히 갈 수 밖에 없다는 점 등을 다 간파해 책에서 그걸 그대로 보여준 것이었습니다.
 
저자의 '제2의 자아' 격인 토마스 파울러(영국 기자)가 월남을 "구제하겠다"는 선민의식에 불타는 미국 공작원 올든 파일에게 그걸 역설하면서 아주 중요한 이야기 하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즉, 월남의 농촌으로 가보면 농민들의 원한이 섞인 온갖 인생 이야기를 제대로 들어주는 사람이라고는 월맹(越盟) 간부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이공 정부의 관료라는 자들이 대체로 약탈자 이상이 못되고 불란서인 등이 외국 침략자들인데 월맹 간부는 믿고 따를 수 있는, 그리고 민족 해방에 대한 연설로 농민들에게 고상한 인생의 의미까지 부여하는 유일무이한 '우리 지도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불란서와 미국과 그 현지 대리인이 아무리 강해도 그들이 현지인과 소통이 안되고 현지인들에게 그 어떤 집단적인 '인생의 의미'도 부여할 수 없는 이상 그들의 분투는 필패라는 건 그 냉소적 기자의 지론이었습니다. 뭐, 사실, 아프간에서 미국이 결국 패퇴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대로 설파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여기에서 제게 기억에 남는 부분은 바로 '인생 의미 부여'로서의 사회주의 사상의 의미이었습니다. 물론 그린이 이야기한 월맹 간부들은 사실상 어디까지나 유교적 목민관과 계몽주의자를 겸비한 이들이었고, 그들이 농민들의 이야기를 단순히 들어주었다기보다는 농민들을 '조직 통솔'했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전통사회 해체기로서는 이와 같은 권위주의적 훈육/피훈육 - 통솔/피통솔의 관계는 불가피할 수도 있지만, 오늘날로서는 적합치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인생의 의미로서의 사회주의 내지 공산주의는 꼭 그 때뿐만 아니고 지금이라 해도 그대로 유효한 이야기인 것 같습니다. 사실, 어찌 보면 '인생의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현대 사회에서 사회주의/공산주의 사상이 존재할 수 있는 유일한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 오늘의 일본처럼 - '개혁사기꾼'형, '노빠'형 정치꾼들이 일본 민주당 식의 잡탕식 개혁 정당 하나 더 조립해서 언젠가 정권을 탈환하여 부르주아 국가를 약간 다듬어서 계속 과거대로 운영하는 것이, 민노당이나 진보신당의 집권보다 훨씬 더 현실적 시나리오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진보'할 가치는, 그 무슨 '집권'에만 있는 것은 꼭 아닙니다. (이 부분도 물론 도외시할 수는 없지만) 사회주의하는 목적이란 결국 '인간답게 살기 위함'일 듯합니다. 권력이 주어지고 말고 등등은 다 부수적 부분들이죠.

인간의 삶에는 세 가지 층위가 있는 것 같습니다. 최저의 가장 기본적 층위는 생물적 생존입니다. 먹고 자고 성관계 맺고 번식하고 자녀 키우고 아플 때에 약을 먹고, 그리고 자연사하는, 이런 것입니다. 초기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는 이 기본적 생존마저도 노동자에게는 거의 '꿈' 같은 이야기이었습니다. 원하는 만큼 못먹고 아파도 병원에 못가고 그랬기 때문입니다. 지금 같으면 아직까지 제약이 좀 있지만(세계 최장 노동시간 대한민국 많은 노동자들의 수면 부족, 자녀 양육 문제들과 출산율 저하 경향, 무상 의료의 부재로 말미암은 제문제 등) 일단 후기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한국과 같은 준주변부 국가에서는 이 정도는 다소 보장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두번째 층위는 기본적 사회적 역할의 수행 가능성입니다. 아이로서 정상적으로 성장하고, 젊은이로서 연애를 할 만큼 해보고, 어른으로서 부모에게 제대로 해드리면서 아이를 잘 키우고, 노후 생활을 조용하고 안정되게, 그리고 창조적으로 보내고, 이런 것입니다. 아이의 절대 대다수가 스트레스에 시달리고, 알바하느라 연애고 뭐고 다 때려치우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고, 집에 밤 한 시에 돌아오는 아버지들이 아이를 한 번 보는 것도 힘들고, 노인들의 빈곤율이 약 40%에 달하는 이 위대한 토건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이 둘째 층위 정도는 벌써 거의 보장 못하죠.
 
한데, 제대로 된 복지국에서는 이 정도까지도 보장해줄 확률은 좀 있습니다. 그런데 셋째 층위 이야기가 나오면 대한민국과 노르웨이의 차이는 벌써 느껴지지 않습니다. 바로 대인 관계를 통한, 창조적 노동을 통한, 그 어떤 애타적 실천을 통한 진정한 자아 실현입니다. 그게 인생의 진수며 인생의 가장 깊은 의미일 것입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나를 버리지 않는, 나와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사귀고, 이름 모를 타인을 위해 그저 봉사하기가 좋아서 봉사를 해주고, 그리고 나만이 남길 수 있는 그 어떤 독특한 말, 글, 그림, 악보 등등을 남에게 남기고 가는 것....
 
적어도 "나는 살 만큼 살았다. 불법을 광설하고 의발 전수하고 상구보리 하화중생할 만큼 했다, 이제 가면 된다"하여 안심하고 새로운 세상으로 갈 수 있는, 그런 '만족스러운' 인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 만족스러운 인생의 복은 거의 주어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과연 우리에게 예컨대 우리 신분과 학력, 돈 등등 외부적 요소들이 다 바뀌어도 우리를 계속 사귈 친구들은 몇 명이나 있는가요? 사실, 우리 대인 관계에서 '상호 이용'을 빼면 남을 게 얼마나 될까요? 우리가 하는 일 중에서는 남의 심금을 울려 이 세상의 마음의 밭을 조금이라도 더 정토처럼 가꾸는 게 얼마나 많을까요?
 
우리에게 주어지는 노동 중의 99%는 대개 그 어떤 독립적 의미가 보이지 않는 단순 반복 행위입니다. 그리고 우리 머리, 마음 속에서 외부에서 주입된 지식과 생각, 감정 등을 빼면 과연 '우리만'의 것이라 할 수 있는 게 얼마나 될까요?
 
한국이든 노르웨이든 자본주의 하에서 사는 인간들은 자기 자신들로부터 아주 심각하게 소외돼 있습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부질 없는 벌이, 오락, 상품화된 정보의 흐름 속에서 인간이란 묻히고 말죠. 바로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의미가 생기는 것입니다. 이미 '뜻'을 잃은 세계에서는 진보활동이란 그 뜻을 회복하기 위한 하나의 노력에 해당될 것입니다. 진보/사회주의 운동을 하는 사람에게는 예컨대 '나만의 안목' 같은 게 생깁니다.
 
연예계부터 '경제 회복'에 대한 당국의 망설까지, 이 세상을 이루는 그 모든 허위, 가식, 거짓말, 모든 거품에 대해서는 "이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말할 수 있는 의식과 용기가 생기고, 진정한 의미의 '자아'가 태어나는 것입니다. 자본주의적 흐름에 몸과 마음을 그저 맡기기만 하면 진정한 의미의 '개인'도 될 수 없지만 사회주의는 '비판적 개인'을 창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개인들이 만나면 소통의 기쁨을 맛볼 수 있는 것이죠. 어떤 상호 이용 등이 개입되지 않는, 동지적 관계의 기쁨도 맛볼 수 있고요... 사회주의란, 단순히 '집권을 위한 정당 운동' 차원만은 아닙니다. (그런 차원도 당연히 있지만)
 
이 폐허에서 인간으로 다시 거듭나기 위한, '뜻'을 되찾기 위한 실존적 운동이죠. 종교가 이미 다 상품화돼서 의미를 잃은 세상에서는, 사회주의야말로 예수와 석가의 뜻을 제대로 받드는 '마지막 인간들'의 집합이기도 합니다. 그러한 의미에서는, 진보정당 지역 위원회에서 문학 토론, 종교 토론, 인생 토론 해도 좋은 것 같고, 아마추어 연극, 인디 밴드 콘서트 등이라도 해서 돈으로 매개되어지지 않는 '삶'을 즐겨도 좋은 것 같습니다. 사회주의란, 문화가 상품화돼 죽어버린 시대에 인류의 문화를 끝내 지켜보겠다는 운동이기도 하기 때문이죠. 그런데 1980년대적인 도식주의, 도그마주의에 아직도 빠져 있는 일부의 분들이 그걸 아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
[박노자칼럼] 불멸의 단어 ‘사회주의’ (한겨레,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2009-12-07 오후 09:36:39)
  
올해 가을은 동유럽에서 분주했다. 베를린장벽 붕괴, ‘동유럽 해방’ 20돌인지라 기념행사들이 줄을 이었다. 이 행사에서 반영된 이데올로기는 그 이분법적 단순함으로는 거의 과거 스탈린주의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현실 사회주의’는 ‘암흑’으로 서술되는 반면, 1989년 이후의 시절은 ‘자유와 번영’으로 이야기되곤 했다. ‘자유’에 대한 수사가 하도 절대적 어법이기에 리투아니아나 폴란드 등 ‘해방된’ 나라 중의 일부는 요즘 아예 적색 오각별 등 ‘공산주의적 상징물’을 엄금하기에 이르렀다. 망치와 낫이 그려진 옷을 입었다가 감옥행을 당해야 하는 사회라면 ‘해방’보다 차라리 조지 오웰의 <1984>를 떠올리지만, 무너진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동유럽 지배자들의 발악적 태도는 사실 저들의 깊은 불안감을 보여준다. 과잉차입과 무분별한 외국투자를 기반으로 한 지난 10년간의 동유럽의 ‘번영’이 얼마나 허구적이었는지 이번 세계공황이 그대로 드러냈기 때문이다.
 
한때 스웨덴 자본의 가장 유망한 투자처로 보였던, 그러나 올해 국민총생산이 약 20%로 떨어질 것으로 예상되는 라트비아는 계속 집단저항 행동으로 흔들린다. 지난 몇 년 동안 ‘고성장’으로 인구에 회자됐던 우크라이나의 경제는 이제 다시 2003년 수준으로 돌아갈 것으로 예상되며, 임금 체불과 감원에 대한 노동자들의 저항만이 확산된다. 정부가 ‘반공 투쟁’에 앞장서는 폴란드에서 경찰들마저도 시위에 나서는가 하면, 1980년대 말에 최초로 자본화에 나선 헝가리는 채무불이행의 위험이 가장 높은 나라 중 하나로 간주되기에 이르렀다.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과 유럽연합의 ‘내부 식민지’로서의 편입은 동유럽에다 ‘번영’이 아닌 종속성과 만성적인 사회불안을 가져다준 것이다. 이에 대한 불만은 흔히 극우적 배외주의의 형태를 띠기도 하지만, 최근에 세계적 자본의 위기를 목격하게 되는 상당수 동유럽 소장파 지식인과 노동운동가 등이 다시 한번 ‘사회주의’라는 화두를 들게 됐다. 오각별이나 망치와 낫 등이 젊은층 일각에서 유행하자 지배자들이 이를 엄금하는 전체주의적 입법에 나서는 것이다.
 
물론 서유럽의 조립공장이자 투자처, 또는 사창가로 전락한 동유럽에서 새로이 모색되는 사회주의는 스탈린주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전위 정당’은 서로 동등한 일선 조직들의 횡적 네트워크로 대체되며, ‘무산계급’의 개념은 불안정 계층(젊은층·이민노동자 등) 등 여러 소수자들에 대한 고려로 대폭 확장됐다. 이제 추구하는 것은 ‘무산계급의 독재’라기보다는 일차적으로 주거와 육아, 교육, 의료 등이 시장영역이 아닌 공공영역이 되는 사회, 이윤이 아닌 다수의 복지를 목적으로 운영되는 민주적 복지사회다. 그러나 투쟁 방식 등이 아무리 달라져도 이들 동유럽 소장파 사회주의자들에게는 적색 오각별이 상징하는 1917년 10월혁명은 여전히 희망의 등불로 남아 있다. 20년 전 스탈린주의의 종말은, 결국 계급운동의 죽음이 아닌 새로운 시작을 의미했다고 봐야 한다.
 
한국 재벌들의 휴대폰이나 자동차가 동유럽 시장을 석권한다 해도, 의료나 교육 비용 등을 고려하면 그 부품을 만들어주는 하도급 공장 비정규직들의 삶은 동유럽 노동자보다 더 고될 정도다. 서유럽으로의 이민 아니면 인생에 희망이 없는 동유럽 젊은이들이나, 한달의 ‘알바’로 겨우 50만원을 버는 한국의 가난한 젊은이들의 절망적인 상황은 크게 봐서는 매한가지다. 결국 국내에서도 급격히 팽창되는 소외층 사이에서 ‘새로운 사회주의’가 화두로 부상하는 것은 시간문제 아닌가 싶다. 
 
-----------------------------
오바마와 노벨평화상 "역겨웠다" (레디앙, 2009년 12월 11일 (금) 09:22:57 박노자 / 오슬로대)
'세계 최고권력자'의 매력?…좌파들의 '오비어천가'는 죄악
 
오바마가 묵고 있는 초호화 호텔 밑에서 그에게 참배(?)하러 오는 '일선 진보주의자', 즉 노동당이나 사회주의좌파당 등의 일선 지지자들을 포함한 행렬을 보노라면 이건 이북에서 수령님 만세 부르는 일보다 조금 더 큰 죄악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북에서야 안 불러주면 본인과 가족들에게 아주 안 좋은 결과들이 올 가능성부터 크지만, 이 사람들은 하등의 강제없이, 마음의 부름을 받아 세계 최고의 권력자를 숭배하러 옵니다. 그가 세계 평화를 크게 진작하겠다는 믿음으로... 정말이지 정신병원에서 사는 듯한 느낌마저 듭니다.
 
대기근 속에서 가족을 잃은 이북인들도, 참여정부 밑에서는 경제 생활에 제대로 참여하지도 못해 비정규직을 전전하는 수많은 젊은 이상주의자들도 계속해서 그들을 불행하게끔 만드는 그 메카니즘을 조절하는 최고권력자에 대한 환상을 품는 걸 보니 인간이라는 게 과연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여기에서 마르크스주의적 계급 갈등 관계 분석에 대한 다수들의 무지라는 요소 등도 작용되지만, 혁명적 변혁, 진정한 의미의 개혁을 포기하거나 무기한 유보한 지식인 사회의 '차악' 담론에 포섭된 수많은 이들의 비극도 보이는 것입니다.
 
현실을 크게 타파하여 새로운 사회를 이루어볼 끔을 포기한다면, 현실 정치에서 차악을 찾는 것은 그 다음 순서입니다. '비록 한계가 있지만 승산이 있는 후보 중에서는 그나마 좀 낫다'는 심정으로. 그 차악을 택하는 순간에는, '현실을 인정한' 이상주의자의 머리 속에서 과연 그가 왜 현실적으로 승산이 있는지, 즉 이 사회의 진짜 주인네들이 그에 대한 나름의 지원을 왜 하는지(내지 왜 그를 결사적으로 막지 않는지)에 대한 하등의 고려도 없습니다. 그냥 '승산'을 그 자체로서 인정하는 것이죠. 이를 인정하는 바로 그 순간에, 승산을 가능케 한 이 사회의 진정한 조절자들의 포로가 되는 법입니다. 그 다음은 기나긴 '자기 설득'의 과정이 시작됩니다.
 
"물론 이라크 전쟁은 잘못됐지만 우리 나라 대미 관계의 현실상 과연 파병 요청 불응은 가능했겠어요?" (내지 "비록 아프간으로 잘못 치고 들어갔지만, 펜타곤이 수만 명의 증파를 요구할 경우에는 그 요청에 오바마가 현실적으로 비토할 수 있겠어요?") "물론 한미 자유무역협정은 잘못된 부분은 많지만, 일단 휴대폰, 자동차의 대미 수출도 현실적으로 고려해야 하지 않겠어요?"(내지 "물론 월가 은행들에게 목돈을 주면서도 개인 파산, 주택 강제 경매를 당하는 주택 구매자들에게 별로 구제 정책을 펴지 않는 것은 잘못이지만, 은행의 요구를 무시해 은행들의 채무 불이행의 가능성을 방치할 수 있었겠어요?") 등등. 결국 이 이상주의자들은 자신의 (이미 현실적으로 포기하고 만) 이상을 자위의 도구로 삼으면서 '최고의 권력자'에게 계속 끌려다닙니다. 이와 동시에 현실이 크게 바뀔 가능성은 진정으로 계속 줄어들죠.
 
'무력한 백성'의 신드롬이라고나 할까요? '승산이 있는 괜찮은 사람'이 최고권력자가 되어서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것이라는 기대는, '인자한 군주'를 대망했던 중세 백성의 희망, 대원군이 고종 대신에 집권하면 왜양도 물러가고 무명잡세도 없어지고 탐관오리도 응징 받을 것이라고 믿었던 전봉준의 기대와 같은 수준입니다. 그러니 부모의 온정을 희망하는 아이처럼 오바마나 노무현에게 매달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기대'는, 현실에 대한 전면적 부정, 그리고 급진적 타파에의 의지를 갖는 것보다 훨씬 안정적으로 느껴집니다. 오바마에 대한 기대를 갖고 이 불안한 시대를 살기는 심적으로 약간 더 쉬운 일이죠. 그런데 오바마의 집권이 언젠가 결국 아프간으로부터의 패주와 달러화 가치의 폭락 등으로 불가피하고 매듭지어지고 나면 어찌 할 작정이지요?
   
------------------------
자본가에게 전쟁은 ‘축복’ (한겨레21 2009.12.11 제789호, 박노자 오슬로국립대 교수·한국학)
[박노자의 국가의 살인] 주기적 불경기로 시장 위축 때 무기 생산으로 극복… 사회복지제도도 전쟁 위한 ‘총력전 체제’의 산물
 
수업 시간에 있었던 일이다. ‘동아시아의 자본과 노동 관계’에 대해 배우는 학생들에게 “일본에서 근대적 복지체제의 근간이 만들어진 것은 1937년 중국 침략 이후 상이군인과 퇴역 군인, 그리고 현역 군인들의 가족을 보살필 후생성이 1938년에 세워지고 나서다”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수많은 평민이 한꺼번에 총알받이가 돼야 자본주의 국가가 비로소 ‘복지’에 신경쓰기 시작했다는 사실에 경악한 한 노르웨이 여학생이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그러면 전쟁이 없는 자본주의 문명은 과연 불가능한 것인가?” 이 질문을 듣고 쓴웃음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 전쟁 없는 자본주의라고? 노르웨이처럼, 수류탄부터 미사일까지 온갖 무기를 생산·수출해 세계에서 7위 무기 수출국으로 군림하면서도 노벨평화상을 주는 등 ‘평화국’으로 행세하는 나라는 일단 외면상 전쟁을 국내에서 비가시화할 수 있다. 노르웨이산 무기로 아프간의 미군이나 가자지구의 이스라엘군이 미성년자 ‘테러리스트’를 아무리 많이 살육해도 이를 많은 노르웨이인들은 그저 몰라도 되는 것이다. 그러나 노르웨이와 같은 군소 핵심부 국가가 전쟁으로 돈을 벌면서도 표면적으로 ‘평화국’으로 남는다 해도, 노르웨이도 속하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전쟁 없이 굴러갈 수 있다는 것은 순진한 꿈에 불과하다. 세계 산업자본주의란 전쟁 속에서 태어나고 전쟁을 먹고 자랐다. 자본주의 국가에 “전쟁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사냥꾼에게 불살생계를 설법하는 일과 다를 게 없다.
 
정치외교학계 일각에서 “민주국가 사이의 전쟁은 없다”라는 ‘법칙’을 가끔 들먹이지만, 일소에 부칠 만한 난센스일 뿐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맞붙은 입헌군주국 영국과 독일은 당대 기준으로 봐서는 ‘민주국가’ 대열에 속했으며, 10년 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군의 공습을 당한 세르비아도 발칸반도의 기준으로 봐서는 ‘민주국가’였다. 1945년부터 오늘날까지 ‘정통 열강’이라고 할 미국·영국·독일·프랑스·일본 등이 더 이상 서로 싸우지 않은 이유는 냉전시대 소련부터 오늘날 중국까지 그들에게 공동의 외부적 적대자 내지 잠재적 경쟁자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고, 1945년까지 각종 대규모 전쟁에서 이미 그들 사이의 ‘서열’이 정해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미국이 영국(1812∼15년 전쟁), 독일(제1·2차 대전), 일본(제2차 대전) 등을 차례로 패배시킨 상황에서 미국의 군사적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은 불가피해졌다. 그런데 이 서열이 정해지는 과정은 전쟁의 연속이었고 바로 이 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성장해왔다.
 
시장주의자들이 시장의 ‘보이지 않는 손’을 들먹이기 좋아하지만, 오늘날 시장을 실제로 쥐락펴락하는 손은 장님이 아닌 이상 누구에게도 잘 보인다. 미국 경제에 1조달러가량의 ‘구제금융’을 아낌없이 부어버린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 등의 손이다. 사실 국가가 매개체가 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거대은행들의 부실경영을 책임지고 그 부족분을 채워주는 꼴이 되고 말았다. 과연 미국이라는 국가는 자본주의적 시장을 이처럼 ‘유지·육성’하는 역할을 언제부터 맡은 것인가?
 
이는 ‘전쟁’을 빼면 도저히 설명되지 않는다. 남북전쟁(1861∼65)을 앞둔 미합중국은, ‘중앙집권적 국가’라 하기 어려울 만큼 지방분권적인 정치체였다. 1837년부터 중앙은행 기능이 정지돼 1365개 주립·사립 은행이 각자 다르게 지폐를 찍어내는 ‘화폐 다원주의’ 국가이기도 하고, 상비군이 2만8천 명밖에 되지 않는 지방 민병대 위주의 ‘군사 다원주의’ 국가이기도 했다. 이러한 ‘느슨한’ 국가를 오늘날 군사적 제국이자 하나의 경제단위로 만든 것은 남북전쟁이었다. 전쟁이 호기가 돼 화폐 발행권을 국가가 독점한 것은 물론, 1861년 8월5일부터 그때까지 미국 역사상 없던 연방 소득세가 최초로 전국적으로 부과됐다. 국가가 국내 부의 상당 부분을 독점해버린 것이다. 이 돈은 전쟁 말미에 약 100만 명이 된 연방 군대를 위해서도 쓰였지만, 갑자기 팽창해버린 관료기구들을 뒷받침해주기도 했다. 남북전쟁이 없었다면 과연 보호관세와 철도 부설 지원 등을 통해 미국 자본주의를 ‘키워줄 수 있는’ 강력한 연방국가가 태어났겠는가?
 
은행에의 ‘구제금융’ 등을 통해 시장을 주도할 수 있는 오늘날 간섭주의적 국가는, 1917년 제1차 세계대전에 뛰어들려는 미국이 군수산업 육성을 위해 일체의 산업경제에 대한 개입 권한을 가진 전쟁산업국(War Industry Board)을 신설하고 나서 탄생했다. 전비 지출로 미국 연방국가의 지출 전체가 2년 만에 약 20배, 7억달러에서 190억달러까지 늘어났다. 그렇게 해서 ‘만능국가’가 태어난 것이다.
 
그러면 자본가들이 전쟁 비용을 증세와 국채 발행 등 사실상 인플레를 통해 조달하는 ‘국방국가’의 탄생을 반긴 이유는 무엇일까? 군수공업 같으면 그 대답은 자명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도 개개인 자본가의 전쟁에 대한 호불호를 넘어 자본가 계급 전체로서 전쟁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전쟁이 가져다주는 ‘특수’, 즉 산업 호경기가 없는 이상 이윤율이 경향적으로 저하되는 자본주의 경제는 장기적으로 지탱되지 않기 때문이다. 후발주자가 늘 뛰어들어 언젠가 시장이 포화되면서 출혈경쟁으로 이윤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소비재와 달리, 무기와 같은 ‘유사 자본재’의 수급과 가격 등은 시장과 거의 무관하게 사실상 독점에 가까운 생산업체와 정부의 담합으로 결정된다. 그러기에 주기적 불경기로 소비재 시장이 위축될 때 적당한 투자처가 없는 엄청난 잉여자본을 가격이 안정적인 무기 생산에 쏟아부어 불황을 유보하는 것은 자본주의 체제의 중요한 운영 기법이다. 미국 자본의 시각에서 제1차 세계대전을 한번 보라. 중앙정부의 세입이 약 4배로 느는 등 자본가가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지만, 1916∼18년 공업 생산량이 40%나 늘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은 미국을 대공황에서 회복시켜준 일등 공신이기도 했고, 그 총생산량을 800억달러에서 1300억달러어치로 키워 세계경제 초강대국으로 만든 ‘황금의 계기’이기도 했다. 한 아나키스트의 말대로 전쟁은 실로 ‘국가의 건강’ 그 자체였다.
 
자본주의 경제가 전쟁을 먹고 자란다는 말은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진다. 우리가 흔히 이용하는 절대다수의 민간 부문 기술들은 전쟁을 계기로 태어났다. 제2차 세계대전 종료 이후에 바로 여객기로 변신한 두글래스 DC-6 병력 수송기나 역시 군대 운반의 필요성을 염두에 두고 확장된 철도, 1989년이 돼야 군수 첨단기술 산업 관련자들의 전유물에서 상업적 상품으로 탈바꿈한 인터넷 등은 정부가 지원하는 군 관련 기술 개발이 우리 생활에 미치는 영향을 대변해준다.
 
그런데 과연 19∼20세기의 총력전, 즉 ‘일체 국민 단결’과 총동원을 수반하는 전쟁의 시대가 바꾼 것은 사회의 ‘하드웨어’뿐인가? 사회의 ‘소프트웨어’라고 할 수 있는 사회조직도 일상화된 전쟁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우리는 복지국가를 통상 ‘사회민주주의의 산물’로 보지만,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민주주의자들이 국가적 복지체제를 크게 발전시킬 수 있었던 이유는 모든 국민에게 초등교육을 하고 다수의 남성을 군에 징병해 전장에 보내야 했던 ‘총력전 국가’가 국민 다수를 이루는 빈민·노동층의 생존을 담보해주고 그 충성심을 보장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유럽 복지국가 건설의 선두주자인 독일 같으면 노후연금법과 병가수당법, 실업수당법 등을 1880년대 초반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숙적인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가 국회에서 통과시켰다. 그 목적은? 언제든지 기꺼이 총알받이가 돼줄 ‘국민’의 창출이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 노동자 계층을 중산층화한 하나의 계기는 바로 다수가 노동자 출신이던 퇴역 참전군인에게 무상 고등교육 기회 등을 준 1944년의 ‘퇴역군인 대우법’(GI Bill)이었다. 그 뒤 한국에서, 베트남에서, 이라크에서 수많은 ‘열등한 타자’를 도살하면서 스스로도 죽어야 할 제국의 총알받이들에게 일단 ‘당근’부터 지급해야 했다.
 
그러면 모든 국민을 ‘아군의 승리’에 열광하는 총력전의 ‘능동적 공범’으로 만들려는 국가의 목적은 달성됐던가? 모든 경우에 꼭 그렇지 않았다는 것을 제1차 세계대전이 빚어낸 독일과 러시아의 혁명이 말해주지만, 권위주의 정권의 억압과 포섭의 도가 크게 높아지기만 하면 대중 총동원의 성공을 거의 보장할 수 있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전시에도 국가가 주선해주는 단체관광을 즐기고, 전후에 개인 승용차와 단독주택을 공급받을 거라고 약속받고, 나치당과 무장 친위대 등을 통해 여태까지 상상 못한 벼락출세의 가능성을 얻은 수많은 ‘순혈 독일인’ 노동자가, 설령 아우슈비츠에서 매일 수천 명의 유대인과 공산주의자 등 ‘불온 분자’가 죽어나간다는 것을 알았다 한들 과연 히틀러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겠는가. 베트남에서 한국군이 저지른 만행을 이젠 다 알아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수많은 한국인의 의식을 봐도 알 만한 일이다. 비교적 약체인 독일이나 일본에서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부 좌익이 기대한 ‘노동계급의 반란’이 끝내 없어 극소수의 반전 저항에 그치고 말았지만, 강자인 미국에 제2차 세계대전은 당시나 지금이나 ‘좋은 전쟁’으로 대인기를 유지했다. 다수의 주류 백인이 경멸한 ‘황인종 일본’을 주적으로 삼은 것도 대만족이었지만 대공황 때 23%에 달했던 실업률이 전쟁 특수와 대량 징병으로 1%로 떨어지고 워싱턴 근로자의 실질소득이 전쟁 호경기로 42%나 늘어나지 않았던가. 전체주의적 파시스트 독일이든 허울 좋은 ‘민주주의’의 미국이든 적어도 ‘주류’에 속하는 대중이 ‘경제를 살리고 아국의 위세를 높이는’ 대량 학살에 대부분 열광했다는 것은 ‘극단의 시대’(홉스봄)의 가장 아픈 교훈 중 하나다.
 
한때 히틀러의 유대인 학살이나 전시 일제의 ‘일억옥쇄’(一億玉碎)의 집단 광풍 등을 ‘후발 발전국의 후진성을 증명하는 예외적인 야만’으로 보는 견해가 우세했지만, 지금의 학계에서는 오히려 홀로코스트를 ‘근대성의 당연한 산물’로 보는 지그문트 바우만 교수의 설이 유력해지고 있다. 사실 규모와 방법에는 차이가 있지만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기계적으로 학살한 것이나 한국전쟁 때 이북 지역에 65만t의 폭탄을 퍼부어 ‘원시 상태’로 돌아가게끔 한 것이나 결국 똑같은 기계화된 대량 살육의 유형에 속하는 일이다.
 
위에서 보여준 대로, 이 대량 살육의 주기적 반복 없이는 자본주의적 세계 체제는 그 경제적 균형도 ‘계급평화’의 허상도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다. 그러기에 1945년 이후부터 이어져온 ‘장기 평화’, 즉 주요 강대국 사이의 대규모 열전 부재 상태는 거시적 시각에서 어쩌면 ‘예외’에 속하는 것일지 모른다. 자본주의가 남아 있는 한, 새로운 홀로코스트와 새로운 히로시마들이 우리를 꼭 기다릴 것이다.
 
참고 문헌:
1. < The Rise and Decline of the State > Martin Van Kreveld,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2. < The Rise of the Modern State > James Anderson (ed.), Harvester Press, 1986.
3. < Late Capitalism > Ernest Mandel, Verso, 1975
4. Zygmunt Bauman, Cornell University Press, 1989.

----------------------------
주류 종교와 사민주의 유감 (레디앙, 2009년 12월 20일 (일) 10:25:58 박노자 / 오슬로대)
내가 조계사 신도와 사민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이유들
 
어제 파리 7대학에서 불교근대사 강의했을 때에 참 웃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강연의 한 부분은 태평양 전쟁 때에 소장파 승려들의 일군 입대를 '장려'(강요)하고 그 무슨 '황군무운장구' 기도회나 열고 전몰군인 정토왕생을 빌고 '야소교 믿는 미영 귀축을 죽여주는 것도 보살도'라는 광언을 해대는 불교 동네 '주류'들의 전쟁 부역 행위 이야기이였는데, 제가 그 뒤에는 전후의 한국 불교도 군사주의와 결별하지 못했다고 지적했습니다.
 
기독교도만이 군목을 보낸다는 데에 대한 경쟁심을 느낀 불교 종단이 줄기차게 정부에 군승 군포교 허가를 요청해왔는데, 결국 1966년에 그걸 따내자마자 파월 병사들에게도 군승을 보내는 등 월남 침략 행위를 사실상 합리화했으며 국방부와의 당당한 '협력관계'를 구축해놓은 것이었습니다. 물론 불교 지식인/승려 입장에서는 일반 군복무보다 9주 훈련받고 군승으로 가는 것은 훨씬 나은 일이지만, 군종실의 불교 관계자들의 활동에서는 불살생계에 대한 진지한 고려가 많이 결여되지 않는가 라는 점은 제 이야기의 골자이었습니다.
 
군, 전쟁, 살생의 현실을 당연시하는 불교와 기독교는 무엇이고, 이 종교들을 그래도 진지하게 대하려는 우리 중생들이 무엇인지, 우리가 똘레랑스하지 말아야 할 부분까지 왜 이렇게 쉽게 똘레랑스하는지, 계속 생각들이 머리를 떠나지 않아요. 군 포교 등 살인 훈련 기관인 군대에 '종교적인 인정'을 해주는 대사회적인 관계를 맺는 방식은, 제가 조계종의 신도증을 따고 싶지 않은 이유 중의 하나입니다. 물론 자의와 무관하게 군에 끌려간 이들을 위해서 불법을 설법하는 것은 당연히 좋은 일이지만, 군 당국과 협력하면서 군 생활과 종교 생활을 일치화시키는 데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지나친 타협으로 느껴집니다.
 
불교까지도 살생의 전문화를 당연시하게 된다면 과연 껍질밖에 남을 게 아닌가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끌려가게 된 무고한 이들을 휴가시 설법, 예불 등의 방식으로 위해주되, 그들에게 살인 교육을 강제하는 사회적 장치들을 그대로, 아무런 단서도 없이 인정한다면 '석가모니가 없는', 석가모니를 떠나버린 불교가 되고 말죠.
 
저는 '주류' 종교(사실, 주류의 개신교 내지 천주교도 불교와 이 점에서 다를 게 없지만)에 대해서 이 점에서 많은 이질감을 느끼지만, 사실 요즘 진보신당 동지 분들 중의 일부가 지향한다는 '사민주의'에 대해서도 똑같은 유감을 느낍니다. 제가 사민주의자가 될 수 없는 이유는, 조계종 신도가 될 수 없는 이유와 매한가지입니다.
 
근대적 사민주의 역사의 전환점은 1914년 8월초였죠. 원래 제2차인터내셔날의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약속한 대로 총파업을 통해 지배자들의 제국주의 전쟁 음모를 분쇄하고 그 대신에 전세계적으로 계급갈등을 노골화시키는 일 대신에, 대중의 '애국적' 몰이해와 탄압에 겁을 먹은 불란서, 독일, 영국의 '주류'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제국주의적 살육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거나 카우츠키 등 극소수처럼 '소극적 반대'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총동원령, 극우파 암살단, 경찰들의 검거 열풍 앞에서 그들이 느낀 생체적 공포심을 저도 십분 이해합니다. 저도 겁이 많은 중생이기에 말씀입니다. 그래도 수백만 명을 도살하겠다는 전쟁의 귀신 앞에서는, 적어도 노동자들과 같이 살고 같이 죽겠다는 사회주의자 정도면 그 생체적 공포심을 그래도 좀 스스로 극복하고 끝내 국제주의적 반전주의의 의리를 지켜야 하지 않을까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우중들의 '애국주의'에 휩쓸린다면 그 사회주의의 마지막의 인도주의적 명분이 없어지고 말죠. 그런데 그 운명적 순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이 스스로의 인도주의적 명분을 포기했으며, 유럽 '주류'의 범죄의 공범이 됐습니다. 그 뒤로는 예컨대 영국 노동당 같으면 케냐 독립운동 탄압, 말레이시아 독립운동 탄압, 북부아일랜드 민족운동 탄압, 아르헨티나와의 전쟁 등등 영국의 수많은 전쟁들 중에서는 제대로 반대한 경우는 하나라도 있나요? 이라크 침략에 바로 영국 노동당 당수가 한 주범으로 나선 것은 어디 우연입니까?
 
레닌 등 그 시대의 급진주의자들이 그 손에 필요 이상으로 피를 묻힌 것도 사실이겠지만 그들의 '테러리즘'을 맹비난한 유럽의 얌전한 사민주의자들의 손을 검사해보면 기절할 만하죠. 피밖에 보이지 않죠. 그리고 전자보다 후자의 처신은 훨씬 비겁하고도 미래지향성은 결여됐습니다.
 
사민주의자들이 1990년대의 신자유주의 총공격에 무방비로 무너지고 신자유주의적 광풍에 많이 편승한 것도 우연은 아닙니다. 우리가 결국 한국의 새로운 사회주의 운동을 건설하자면 과거의 급진파에게도, 나름대로 복지 모델의 디자인에서 좋은 결과를 거둔 일도 있었던 온건파에게도 배울 점을 배워야 하지만, 전쟁 부역죄로 그 명분을 잃은 온건파'만'을 따른다는 것은 좀 문제가 있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인도주의적, 인간다운 사회주의의 명분을 전혀 살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노동자는 왜 이 체제를 받아들일까? (레디앙, 2009년 12월 24일 (목) 08:04:39 박노자 / 오슬로대)
뼛속까지 대중-한국적 담론 창출하자 
좌파 정치낭인 조지 오웰의 '계급과 민족' & 대한민국의 경우
 
모든 사회주의자들에게 그렇듯이 조지 오웰에게는 "노동자들이 이 체제를 왜 받아들이는가?"라는 화두는 인생의 제일 화두이었는데, 제2차대전 초반에 쓴 라는 에세이는 그 답변의 시도입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오웰이 노동자에게 혁명/계급을 '민족'이 대체했다고 봤습니다. 그리고 노동대중들의 민족/애국주의는 꼭 '위에서 주입된 이데올리기'라기보다는 (그런 측면도 있지만)거의 자연발생적이다 싶은 일종의 '자애자중의 감'이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습니다.
 
그가 본 노동자들의 '영국 민족'은 학술적으로 정의되는 '공동 언어, 문화, 시장을 기반으로 한 수평적 연대'라기보다는 일종의 '속살, 관습, 아비투스'입니다. 태어난 지방의 사투리를 쓰고 매일 저녁에 같은 주막에서 맥주를 마시고, 축구를 자존심으로 삼고, 그리고 모든 외국 것들을 다 '이상하다'고 느끼는 습성부터, 영국의 선거제나 사법부를 "문제는 있어도 일단 기본적으로 부패하지 않고 민의를 대변한다"고 고집스럽게 믿는 부분까지, 이 모든 것들은 다 노동자 대부분의 '영국성' (Britishness)이었는데, '국제연대'를 외치는 극소수 지식인들의 그 어떤 노력도 이 유서 깊은 '습성의 영역'을 바꿀 수 없다고 그가 단언했습니다.
 
그리고 1920년 러시아 내전 간섭 반대 운동 이외에 영국 노동자들이 국제주의적 행동을 취한 적도, 앞으로 취할 가능성도 없다고 덧붙였습니다. "노동자들에게는 조국이 없다"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아주 거북스럽게 들리는 '쓰라린 진실'이지만, 오웰의 역할이라는 게 원래부터 '불편한 진실 말하기' 아니었을까요? 그것이야말로 오웰의 불멸의 가치입니다.
 
노동자들에게 '이윤의 경향적 저하 법칙'을 잘 설명(설교?)하기만 하면 그들이 당장에 벌떡 일어나 불란서와 독일의 노동자와 연대해 영구적 혁명의 대열에 나설 것이라는, 일각의 나이브한 트로츠키주의자들과 설전하느라 오웰이 여기에서 약간의 '오버'를 하긴 했습니다. 실제 최근 같으면 영국 노동자들이 폴란드 등지로부터의 이민 노동자들과 연대 행동을 꽤 잘 하긴 하고, 비록 아직도 "주된 부분이 됐다"고 할 순 없지만, 국제연대를 전혀 못한다곤 말할 수 없죠. 자본주의가 지구화돼가는 상황인지라 불가피한 일이기도 하죠.
 
그런데 '오버'가 있었다 해도 오웰의 말에는 근본적 진실의 일말은 담겨져 있긴 해요. 그렇습니다. 자본은 지구화돼가지만, 노동자들은 여전히 대개 '국지적' 인간들입니다. 자본가들이야 영어 실력이나 국제여행 연혁부터 화려하지만 노동자의 '국제경험'이란 잘해봐야 일본에서의 불법 체류 및 노동과 값싼 4박짜리 중국 내지 월남 여행 정도입니다.
 
일언이폐지하면, 자본가에게 다층적, 다각적 '세계'가 열려 있지만, 노동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한국어와 한국 텔레비전, 한국식 대중요리와 오락,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평생의 (감옥과도 같을 수도 있는) '국내살이'입니다. 그러기에 노동자는 꼭 '민족주의자'가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마트에서 하루 종일 한 번 앉지 못해 일하느라 다리와 허리가 아파 죽겠는데, 뭔 '민족주의'가 필요하나요? 그 따위는 여유있는 인간들의 관심거리죠), 대개는 '한국적'이지 않을 수 없죠.
 
그러한 측면에서는, 미국에서 체류하느라 병역을 면탈하는 '국제인'(부자집 자식놈)들에 대한 대다수 한국 노동자들의 분노는 십분 이해할 만합니다. 그러면, 이 현실에서 사회주의자가 할 일은? 두 가지라고 봅니다. 하나는, 그 모든 '경향적인 법칙'들을 학회 시간이나 학습시간에 이야기하는 걸로 하고, 대다수 한국인들이 찬성할 수 있는 '대중적, 뼛속까지 한국적 담론'을 창출하는 것입니다. "마트에서 일하고도 공짜로 대학에 갈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 "단칸방에서 사는 이들이 양질의 공공임대주택을 받을 수 있는 세상을 위하여"라면 수많은 이들이 연대할 수 있겠지만, '동시다발적 세계 혁명'이란 어디까지나 '여유 있는 이들'을 위한 고심거리일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일본 노동자나 중국 노동자 등 이웃 나라 무산자들의 삶과 투쟁을 친숙하게 알 수 있는 대중화된 저서라도 나왔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이쪽에서 이마트와 삼성에게 맞서는 이들은, 비정규직을 양산하면서도 책임지지 않는 일본 기업들에게 맞서는 파견마을(하겐무라) 사람들과 점차 '아는 사이'라도 될 수 있죠. '아는 사이'를 넘어 친구가 되자면 산넘어산입니다. 말이야 쉽지, 국내식으로만 살게끔 구조적 조건이 다 맞추어져 있는, 국내라는 감옥에서 종신형을 살다 싶이 하는 분들에게 '국제 연대'란 결코 쉬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2008/07/30 01:56 

---------------------------------

"한국, '아류 제국주의'로 가고 있다" (프레시안, 성현석/기자, 2008-07-29 오후 7:32:20)
[인터뷰] 박노자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 교수  
 
"말씀 참 잘 하시네요. 재미있게요."
"아휴, 그럼요. 이게 직업인데….재미 없으면, 학생들이 안 모이잖아요."
그러면서, 손을 입가로 당겨 새가 부리를 재잘거리는 모양새를 흉내 낸다.
  
"하긴, 역사가 참 재미있는 학문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역사학과에 학생이 잘 안 모여요."
"아무래도 취업이 잘 안되니까 그렇죠. 그래서 요새는 이름 바꾸는 게 유행이래요. '역사 콘텐츠 학과', 이런 식으로요."
"텔레비전에서 사극이 뜨니까, 그런가. 드라마 작가 양성하는 학과로 홍보하려는 건가보죠."
"글쎄요. 어찌됐거나, 학문을 꼭 취업과 연결시켜야 한다는 게 슬픈 일이죠. 노르웨이에서는 취직이 잘 된다는 이유로 전공을 고르는 일은 드물어요. '재미'가 중요하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최대한 재미있게 가르쳐야 해요. 다행히, 역사학을 재미있어 하는 학생들이 꽤 있어요."
"부럽네요. 한국에선 취직 잘되는 학과가 인기학과인데…."

  
잠시 대화가 멎었다. 눈치 빠른 독자는 이쯤에서 누구와 나눈 이야기를 옮긴 것인지 알아챘을 게다. 단서는 '노르웨이'다. 대화의 주인공은 노르웨이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가르치는 박노자 교수다. 박 교수가 여름방학을 맞아 서울을 찾았다. 뙤약볕이 내리쬐던 제헌절 오후, 연세대학교 정문 앞에서 만난 박 교수는 거침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프레시안>이 삼성에게 소송당한 이야기부터,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대체복무제를 둘러싼 논란까지.
 
이야기의 박자에 맞춰 고개를 주억거리며, 그와 신촌 거리를 거닐었다. "재미있는 전공에 학생이 몰린다"라는 대목에서 고개를 들었는데, 하필 토익 교재를 품에 안고가는 대학생이 눈에 툭 들어왔다. '저 학생은 토익 공부가 재미있을까?' 붙잡고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답은 뻔하다. 토익 공부를 즐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박 교수의 말마따나 공부는 원래 '재미'로 하는 것이다. 블라디미르 티호노프라는 이름으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난 그가 '박노자'라는 이름을 갖게 된 것도 대학에서 접한 한국어 고전이 준 '재미' 때문이었다. 하긴, 아인슈타인이 상대성이론을 발견한 것도,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것도 취업을 위한 게 아니었다. 당연한 이야기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사실을 종종 잊고 지낸다. 문득, 박노자 교수를 만난 보람이 여기에 있다 싶었다. 잊고 지내던 당연한 사실을 일깨워주는 사람.
  
'학문의 재미'라는 표현이 사치처럼 여겨지는 대학 거리에서 박 교수와 찻집에 들어갔다. 그를 만나기에 앞서 준비한 이야깃거리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촛불, 나머지 하나는 독도. 둘 다 집단적 열정과 관계있는 주제다. 물론, 박 교수의 반응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의 블로그에는 외국인 친구들에게 촛불집회에 대해 변호하느라 바쁘다는 내용이 담긴 글이 있다. 그는 시위의 폭력성 논란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입장을 밝혔다. "평화시위를 하라고?"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최근의 촛불집회에 대해 "몇 명의 전경과 보수신문 취재 기자에 대한 집단 폭행이라는 유감스러운 사태들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과거의 대형 시위와 비교했을 때에, 대다수 시위자들의 투철한 비폭력 의식이 매우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라고 평가했다. 이어 그는 "이 정도 규모의 시위대가 반대 측에 이렇게 적은 수의 부상자를 낸 것은 한국사상 최초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정부와 보수언론은 마치 시위자들의 인내의 한계를 시험하듯 그들에게 물리력과 언어를 통해서 폭력을 계속 행사해 왔다"라고 지적했다.
 
독도 문제에 대해서는 블로그를 찾아갈 필요도 없다. 국가주의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는 잘 알려져 있다. 그래도, 묻기로 했다. 독도 문제에 대한 호들갑스런 반응을 개탄하는 그가, 외국인들에게 종종 민족주의적 열정의 발산으로 비친다고 알려져 있는 촛불집회를 어떻게 '변호'했는지 자세히 듣고 싶어서다.
  
역시나 그의 대답은 유창했다. 그리고 긴 이야기를 가로지르는 키워드는 '계급'이었다. 광우병 위험 쇠고기 수입에 반대하며 촛불을 든 시민들이 분노를 쏟아낸 대상은 위험한 먹을거리를 사도록 꼬드긴 미국이라기보다, 시민을 경제 성장을 위한 소모품쯤으로 여기는 정부였다. 재벌이 휴대폰과 자동차를 파는데 도움이 된다니까, 시민의 입에 들어가는 먹을거리는 위험해도 상관없다는 정부에 대한 분노였다.
 
그리고 석 달 가까이 촛불을 들면서, 시민들은 이 정부가 결코 자신의 편이 아니라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현 정부가 탄생하도록 표를 몰아준 다수 노동자, 서민은 그저 소모품에 불과하다는 깨달음이다. 이런 깨달음은 정부가 소수 재벌과 부동산·금융 자산가의 이익을 위해서만 부지런할 뿐이라는 인식과 동전의 양면을 이룬다. 이런 과정은 조금씩 자신이 속한 '계급'에 대한 각성으로 이어진다. 촛불의 한계에 대한 답변도 결국 '계급'이었다. 그는 촛불이 중산층 이데올로기를 넘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물론, '축제'로서 아름답고 감동적이었다는 단서가 붙었다. 그의 대답을 요약하면 이렇다.
    
"촛불집회는 축제였다. 시민의 가슴에 쌓여 있던 불안과 공포가 녹아내리는 자리였던 동시에, 억눌렸던 욕망이 분출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한계도 명확했다. 철저히 중산층 중심의 의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왜 광우병 위험에 대해 분노하는 그들은 KTX 여승무원과 기륭전자,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의 투쟁에는 지지와 관심을 쏟지 않았을까. 촛불을 들었던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광우병 문제는 자기 문제이지만, 비정규직 문제는 남의 문제라고 여겼던 모양이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이제 근거가 약하다. 이미 비정규직의 수는 전체 임금 노동자의 절반을 넘었다. 쇠고기 급식을 먹고 자식이 광우병에 걸릴까봐 걱정하는 부모들은 머지않아 자식 세대가 비정규직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지금도 20대의 절반은 비정규직이다. 촛불의 물결 속에서도 KTX 여승무원과 기륭전자,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은 계속 고립됐다. 몹시 안타까운 대목이다."
   
실제로 이랜드 여성 노동자의 파업 1주년을 맞은 지난 6월 23일, <프레시안>과 만난 김경욱 이랜드 일반노조 위원장은 "광화문을 뒤덮은 촛불의 물결을 보며, 절망했다"라고 말했다. 박 교수와 이야기하다, 당시 인터뷰를 떠올렸다. 그쯤에서 박 교수는 "총파업, 더욱 강력한 총파업"이라고 중얼거렸다. 이어 나온 이야기다. "(촛불정국에서) 민주노총을 비롯한 조직화된 노동운동의 역할이 중요했다. 시늉만하는 파업이 아니라, 실제로 공장을 멈추는 파업이 필요했다. 하지만, 당시 민주노총이 보인 모습은 여러모로 아쉬웠다. 강력한 총파업을 통해 노동운동이 정치적 목소리를 내야 했다. 이 과정에서 중산층 이데올로기를 깨고, 계급적 의제를 부각시켜야 했다.
 
어차피 중산층은 점점 줄어들고 있다. 대신 비정규직이 늘었다. 이랜드 여성 노동자들을 외면하면서 쇠고기 문제에만 관심을 쏟은 중산층 부모들은 곧 가처분 소득이 확 줄어드는 경험을 할 가능성이 높다. 중산층이 계속 늘어나던 과거의 경험으로 미래를 재단하면 안 된다. 사회 양극화를 비롯한 계급적 의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쏟아야 한다."
  
그는 늘어나는 빈곤층에 대해 이야기했다. 소득은 줄고, 고용 상태는 더 불안정해졌다. 미래는 불안하기만한데, 물가는 계속 오른다. 시장에 나가서 주머니를 열 엄두가 나지 않는다. 하긴, 주머니를 털어봤자 나오는 것도 없다. 이쯤에서 툭 튀어나온 말. "그런데 재벌은 점점 더 몸집을 불리고 있죠."
 
익숙한 장면이다. 거대 기업은 계속 상품을 쏟아내는데, 국내 시장에서는 팔리지 않는다. 소비자의 대부분은 노동자인데, 미래가 불안한 그들은 주머니를 열지 않는다. 노동자들이 소비를 하지 않으니, 소규모 자영업자들도 형편이 어려워진다. 결국, 국내에서는 거대 기업이 파는 상품을 살 사람이 거의 없다. 나라 밖에서 시장을 개척하는 수밖에 없다. 100년쯤 전에, 유럽 국가들이 겪었던 일이다. 이들 나라들이 내몰린 길은 공황과 파시즘, 전쟁이었다. 이런 상태를 가리키는 말이 '제국주의'다.
   
박 교수는 "한국 역시 '아류 제국주의 국가'의 길을 따르고 있다"고 말했다. 본격적으로 해외 식민지를 경영하는 제국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이미 여러 면에서 제국주의적 양상을 띠고 있다는 것. 아시아 곳곳에서 한국 재벌들은 이미 수탈자의 이미지로 통하는 경우가 많다. 몽골과 동남아 등에 뿌리내린 한국인의 이미지도 비슷하다. 결코 '약자'가 아니다. 현지 주민들 위에 군림하는 쪽에 가깝다. 국내에서도 마찬가지다. 숱한 이주노동자들이 한국에서 한국인들이 꺼리는 일을 하며 생계를 꾸리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노동자로서 누려야 할 기본적인 권리도 얻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상당수 한국인들은 인종적 편견을 갖고 이들을 대한다. 과거 제국주의 국가 국민들이 식민지 백성을 대하는 태도와 꼭 닮았다.
  
"한국이 아류제국주의 국가가 되고 있다"는 사례는 이밖에도 많다. 고구려에 열광하는 대중문화도 그 중 하나다. 고구려는 강한 군사력을 가진 정복 국가로 종종 묘사됐지만, 이제 이런 묘사가 낳은 부작용을 걱정할 때라는 게 박 교수의 설명이다. 박 교수는 <조선문학사>, <조선문명사> 등의 저서를 남긴 역사학자 안확에 대해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알려진 '고구려 무사'의 이미지는 주로 안확의 연구 성과에서 비롯된 것이다. 활을 잘 쏘는 주몽을 '북방 무사의 모범'으로, 연개소문을 '고구려 말기의 가장 뛰어난 무사'로 평가했던 안확의 이론은 이기백, 이병도 등 주류 사학자들에게 받아들여지면서 한국 역사의 상식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박 교수는 이런 상식을 재검토할 때가 됐다고 말했다.
 
일본 제국주의에 의한 식민지 경험을 갖고 있는 한국은 전투적인 고구려 무사를 이상화하는 민족주의적 역사학을 통해 종종 자기 위안을 얻었다. 그러나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한국은 더 이상 식민지 국가가 아니며, 오히려 아시아 곳곳에서 수탈자의 이미지로 통하는 나라다. "우리는 피해자니까"라는 논리가 통하던 시절은 지났다는 이야기다. 박 교수는 "강자에게 짓밟히는 동안, 자신도 모르게 내면화된 '강자의 논리'에서 이제 벗어나야 한다"라고 말했다. '강한 군사력을 가진 정복국가'를 무턱대고 이상화할 시기는 지났다는 뜻이다. 박 교수가 안확의 이론을 재검토하는 것은 한국인에게 내면화된 고구려의 이미지를 되돌아보기 위한 첫 작업이다.
  
이쯤에서 떠오르는 책이 있다. 우석훈 박사가 쓴 <촌놈들의 제국주의>다. 이 책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우석훈 박사는 삼족오 깃발을 든 고구려 무사들이 전투를 벌이는 드라마에 열광하는 한국인들을 보며, 이 책을 썼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지요"라고 툭 던졌다. "맞다. 그 책에서 많은 영감을 얻었다"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자연스레 화제가 <촌놈들의 제국주의>로 옮아갔다. 박 교수의 생각은 대부분 <촌놈들의 제국주의> 내용과 일치했다. 하긴, 용어도 비슷하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라는 표현에서 '촌놈'은 지방 사람을 비하하는 뜻이 아니다. 제국주의 중심 국가 흉내를 몹시 내고 싶어 하지만, 그만한 실력을 갖추지 못한 한국을 뜻한다. '아류 제국주의'라는 표현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박 교수의 생각이 우 박사와 온전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북한 문제에 대해서는 생각이 크게 엇갈렸다.
  
<촌놈들의 제국주의>에서 우석훈 박사는 한국 재벌과 정치 권력이 북한을 내부 식민지로 삼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우 박사는 이 책에서 "다른 먼 나라에 외부 식민지를 갖기 어려운 한국 자본주의 입장에서 북한만큼 만만한 식민지가 또 있을까? 중국보다 가깝고, 동남아보다 임금이 싸고, 아프리카보다 훨씬 양질의 노동력을 가지고 있는 북한을 식민지로 전환시키지 않는다는 건 상식적인(?) 눈으로 볼 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도 모른다"라고 적었다. 그런데, 박노자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한국 재벌에게 북한 투자는 '수지가 맞지 않는 장사'라는 것. 박 교수는 "안정적인 이윤이 보장되는 투자라면, 삼성이 가만있을 리가 없다"라며 말문을 열었다. 이윤 앞에서 늘 기민한 모습을 보였던 삼성이 대북 투자에 소극적이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박 교수의 설명은 이렇다. "대북 투자는 높은 이윤을 거두기 힘들다고 본다. 북한은 기업 활동을 위한 인프라가 너무 취약하다. 물론, 인건비를 쥐어짜서 이윤을 얻는 것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 경우에는 북한 관료 집단과 이윤을 나눠야 한다. 뇌물을 줘야 한다는 뜻이다. 북한 관료 집단의 협조 없이 대북 사업이 성공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이윤을 보장하기 어려운 북한에 한국 자본이 큰 매력을 느낄 것 같지는 않다. 결국, 북한은 중국에 예속되는 길을 택할 게다. 지금도 북한은 식량을 자급하지 못한다. 부족한 식량을 대주는 곳이 중국이다. 한국 자본은 북한 체제를 인수하는 비용에 대해 부담을 느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중국은 그렇지 않다. 중국 입장에서는 북한 체제를 인수해서 얻는 이익이 더 크다."
  
동북아시아 3국 사이에서 일어날 정치적 지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상처 입은 역사를 갖고 있는 한·중·일 3국이 이런 지진 앞에 노출되면, 어떤 일이 생길까. 게다가 이들 3국은 모두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영광'을 떠올리며 흥분하는 한국, '중화 제국주의'의 추억을 다시 끄집어 낸 중국, '패배의 기억'을 씻고 싶어 하는 일본이 부딪히면 재앙은 뻔하다. 이미 경고음은 울리고 있다. 독도 문제다. 박 교수는 "국내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일본 정부가 인기 회복을 위해 독도 문제를 꺼냈다"라고 이야기했다. 한국 보수 세력이 걸핏하면 색깔론을 들먹이듯, 일본 보수 세력은 영토 문제를 통해 대중의 의식을 마취시킨다는 설명이다. '좌파'인 그에게 '영토 민족주의'는 불편한 화제다. 표정 위로 허탈한 웃음이 번졌다.
 
"'천황제 폐지'를 주장하는 일본 공산당이 영토 문제에 대해서는 몸을 사린다. '영토 회복'이 그들의 공식 입장이다. 물론, 좌파가 패권적 민족주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던 사례는 흔하다. 하지만, 안타까운 일이라는 점은 분명하다." 영토 문제에 대해선 일본 좌파가 우파와 한목소리를 내고 있다는 지적이다. 하긴, 한국도 비슷하다. 민주노동당이 독도 문제에 대해 취한 태도는 보수 세력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이런 상황이 지속되서 이익을 얻는 쪽은 일본과 한국의 보수 세력이다. 진보 세력은 어떤 길을 택해야 할까. 박 교수의 대답은 명료했다.
 
"어려운 문제다. 하지만,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우선, 한국과 일본의 진보 세력이 끊임없이 대화해야 한다. 장기적으로는, EU(유럽 공동체)와 비슷한 동아시아 공동체를 꾸리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그래야 한·중·일 3국 사이의 갈등이 위험 수위 안쪽에서 조절될 수 있다. 이런 공동체가 꾸려지면, 영토 문제가 감정싸움으로 번질 가능성은 낮아진다. 노동시장이 통합된 상황에서 민족적인 감정다툼이 생기면, 기업 활동이 어려워져서 자본에게도 좋을 게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치인들이 영토 문제를 이용해 대중을 선동하려는 시도도 잦아들게 된다."
  
박 교수와 이야기를 마친 다음 날, 그의 블로그를 찾았다. "자전거형 사회 경제"라는 글에서 박 교수는 1990년대 한국에서 만났던 대학생들에 대해 이야기 했다. 내용은 이렇다.
 
"제가 1990년대에 본 한국 대학생들이 대개 미래를 낙관적으로 봤지요. 이유는 하나이었지요. 아무리 여러 고충이 있어도 대졸에게 직장이 거의 보장되다시피 했기 때문이고, 직장 가진 이는 신분 상승을 얼마든지 할 수 있다는 인식이 팽배했기 때문이지요. 저와 1991년대에 친했던 고려대 학생 중에서는 여학생까지 포함해서 취직이 안 된 이는 아무도 없었어요. 제가 1997~2000년 사이에 가르쳤던 경희대 러시아어과 학생만 해도, 다소의 중간 고충들이 있어도, 결국 저와 연락이 닿아 있는 이들은 다 취직됐어요. 그 중에는 절반 가까이 전공까지 살렸으니 기적 같은 일로 보이지요. 거의 다 결국 정규직이 된 것입니다. 물론 IMF 때는 당분간 취직이 안 되고 1~2년 놀거나 몇 년간 학원에서 가르치는 등 불안한 취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1990년대 말기만 해도 아직 '절망의 시대'는 아니었지요. 대졸에게는 정규직으로서의 취직이 현실적으로 가능했던 만큼은 잔혹한 군대, 자기 부담 위주의 의료서비스, 국가적 보장이 없는 노후 등이 다 크게 인식되지 않았더랍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저성장 시대로 접어들어 달라진 것이 무엇인가요? 86%가 대학생이 되는 오늘날에는 '대졸'은 대한민국의 젊은이의 별칭일 뿐이고, 다수의 대졸들을 기다리는 것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면서 정규직 취업을 기다리는 매우 긴 '대기 기간'이나 비정규직으로서의 미래 없는 인생이지요. 
미래가 없는데다가 월급마저도 생계 유지선을 겨우 넘으니 없다시피한 공공의료, 노후 보장, 실업 급료에 대해서 절로 생각하게 됩니다. 고성장 시대에, 비교적으로 풍부했던 취직 가능성은 복지의 부재(不在)나 사회의 전체적 낙후성을 어느 정도 보상했습니다. 
  
그러나 취직이 '별 따기'가 된 저성장의 시대에 접어들어서는 '직장'이 없는 사람은 대한민국에서-유럽과 달리-인간 대접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은 수많은 이들에게 실감되기 시작했지요. 사실, 촛불 집회와 같은 대중적 저항 운동의 발생은 이 부분과 결코 무관하지가 않아요."
  
'직장이 없으면, 사람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사회'에 대한 지적이다. 이런 곳에서 취업 가능성이 전공을 고르는 기준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학문의 재미'는 사치스런 이야기로 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정치적 선동은 정신의 사치가 허용되지 않는 곳에서 주로 창궐한다. 스스로 생각하는 시민은 선동에 넘어가지 않는다. 독도 갈등을 이용해 감정 다툼을 선동하는 이들에게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학문의 재미'를 되찾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노르웨이에서는 '재미'가 전공을 선택하는 기준"이라는 박 교수의 말이 신촌 거리를 메운 대학생들 위로 자막처럼 겹쳤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페이스북에 공유하기딜리셔스에 북마크
2010/01/04 11:26 2010/01/04 11:26

댓글0 Comments (+add yours?)

Leave a Reply

트랙백0 Tracbacks (+view to the desc.)

Trackback Address :: http://blog.jinbo.net/gimche/trackback/904

Newer Entries Older Entries

새벽길

Recent Trackbacks

Calender

«   2024/05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Tag Li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