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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ichard Sennett. 유병선 옮김. 2009. 『뉴캐피털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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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료제론과 관련하여 쓸만한 대목이 있을 듯하여 이 책을 집어들었는데, 의외로 생각할 대목들이 많더라. 저자인 세넷이 블레어 밑에서 일했다는 게 별로였지만, 책의 내용 자체는 이와 별로 상관이 없다. 전체적인 요약은 서평기사들에 잘 나와 있다.

 

Richard Sennett. 유병선 옮김. 2009. 『뉴캐피털리즘』. 위즈덤하우스; 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 Yale University Press. 2006.
 
○ 역자 후기: 사감 냄새나는 세상을 꿈꾸는 사회학자
세넷은 새로운 자본주의하에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새로운 제도들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흔들어놓고 있는지를 막힘없이 풀어낸다. 그는 세계화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에 대한 현상 분석이 아니라 퇴출의 공포로 대변되는 불안정한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는지에 주목한다. 삶과 노동의 관점에서 새로운 자본주의의 문화적 천박함을 해부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에 대한 사람 냄새나는 비판인 셈이다.
이 책의 핵심 단어를 하나만 꼽는다면 서사(narrative)가 아닐까 싶다. 자신의 삶을 연속적인 이야기로 만들어줄 수 있는 어떤 전후 연관성도 사라지게 하는 것이 오늘날의 새로운 자본주의의 속성이라고 세넷은 진단한다. 그는 “변화하지 않으면 죽는다. 장기적 관점을 버리고 단기적으로 승부하라. 남과 깊이 사귀지 말고, 손해 보면서 호의를 베풀지 말라”는 것이 이 시대의 이상적인 가치로 강요되고 있다고 말한다.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는 불확실성을 긍정적으로 인정하라는 도덕적 압박을 가한다는 점에서 이전의 자본주의와 구분되는데, 이러한 압박이 삶의 서사와 삶에 대한 통제력을 잃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무엇이, 어떻게 서사의 고리를 단절시키는가? 세넷은 컨설턴트와 MP3, 그리고 월마트 등 일상의 언어로 새로운 경제ㆍ사회ㆍ정치의 특성을 손에 잡히게 설명한다. 컨설턴트들은 기업의 구조조정에 끼어들어 조직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지만 결코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변화를 재촉할 뿐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를 설명하지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는 신경제는 컨설턴트식 경제라 할 수 있다.
음반이나 테이프를 사용하던 이전의 오디오와 달리 MP3는 특정음역만을 연주하고 수시로 듣고 싶은 노래들을 마음대로 바꿔 들을 수 있게 해준다. MP3형 조직과 사회는 피라미드의 중간층을 줄여 상부의 명령이 곧바로 하부에 연결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정보 전달체계의 변화가 서사의 여지를 없앤다는 게 세넷의 설명이다. 이러한 경제ㆍ사회적 변화는 또한 월마트식 정치로 나타난다. 상표만 다를 뿐 내용물은 비슷한 상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월마트 매장에서 물건을 고르듯 시민들도 정치를 단지 소비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천박한 문화는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쉬 깨어질 것이라는 게 세넷의 전망이다. 삶의 서사를 끊어놓은 지배체제는 결코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넷은 현대사회의 유동화를 마냥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삶을 속박하던 제도로부터 개인이 보다 자유로워진 것은 긍정적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단지 보다 자유로워진 개인들이 잃어버린 서사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가 우리 시대의 과제라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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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 투자 결정과 관련된 용어에 처음으로 군대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전쟁론(On War)』을 쓴 카를 폰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의 ‘성과 분석(outcome analysis)’이란 말도 경제용어로 자리잡았다. 시장이 위기를 맞게 되면 관료제가 손실을 보전해주었다. 관료제는 시장보다 훨씬 효율적인 것처럼 보였다. 미국 역사학자 로버트 위비(Robert H. Wiebe)가 말한 ‘질서를 위한 모색(search for order)’이 기업에서 정부로, 그리고 민간사회로 확산됐다. 전략적 이윤이 중요하다는 생각이 효율적인 정부의 규범으로 자리잡으면서 공무원들의 지위는 한 단계 올라갔다. 공무원의 관료사회는 집권당에 관계없이 정치의 외풍을 타지 않게 됐다.
 
시민사회의 영역에서도 학교의 수업과 교육 내용이 표준화되고, 전통적인 전문직종인 의료ㆍ법를ㆍ과학 분야에서 전문가들의 입김은 더욱 세졌다. 베버는 이처럼 군대에 뿌리를 둔 제도가 일상적인 삶을 규정함에 따라 그 속성상 군대와 다를 바 없는 우애와 권위, 공격 따위에 대한 규범을 가진 사회가 도래할 것으로 보았다. 물론 그렇게 되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가 군인과 같은 사고방식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고 베버는 생각했다(Sennett, 2009: 32-33).
 
베버는 보상 유예의 규율과 현실의 불일치에서 비롯된 좌절감이 개개인의 주관을 어떻게 왜곡시키는지를 설명했다. 예컨대, 보상유예의 규율이 몸에 밴 사람들은 스스로가 목표에 이르는 것을 허용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앞만 보고 달려온 사람들은 불만에 빠지고 만다. 그들은 지금 손에 많이 쥐고 있든 적게 쥐고 있든 부족하다고 여기며, 당장의 즐거움을 위해 지금 이 순간을 즐기는 것은 가당치 않다고 생각한다. 성취의 지연이 삶의 방식으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베버의 관점은 주관적 충동에 제도적 전후관계를 대입하는 것이었다. 관료제라는 피라미드의 계단을 올라가는 것은 또 하나의 삶의 방식일 수 있다. 관료제의 쇠창살은 감옥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심리적인 안식처가 될 수도 있는 것이다(Sennett, 2009: 41-44).
 
복지국가도 관료제의 피라미드 형태를 취했다. 사회민주주의의 원리대로라면, 기본적으로 노령연금이나 교육과 같은 복지 혜택은 보편적인 권리에 해당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북유럽이나 영국에서조차 복지 혜택의 수혜자들은 필요로 하는 도움을 받으면서도 관료처럼 생각하도록 강요받았다. 관료제의 규칙들은 관료제 자체를 무엇보다도 우선시하도록 만들어졌다. 그래서 고령자와 학생, 실업자와 병약자는 저마다의 삶을 영위하는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베버가 말한 관료제의 관료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복지국가 시스템의 초점은 복지 혜택이 얼마나 효율적으로 분배되는가보다는 제도 자체를 유지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다(Sennett, 2009: 44-46).
 
군대에서나 기업에서나 조직에 대해 행복감을 느끼지 않으면서도 그 조직에 헌신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예컨대, 설령 조직에 불만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어떤 일이 주어지게 되면 일반적으로 조직의 일을 우선적으로 처리하는 것처럼 말이다. 과거 현장연구를 하면서 세넷은 조직에 대한 불만과 헌신이 뒤섞이는 현상이 피라미드형 관료제를 구현한 복지국가의 공공서비스부문 노동자들에게서 특히 두드러진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국의 시카고와 영국의 런던에서 쇠락하는 도심 학교의 교사들이나 뉴욕의 공동화된 도심에 자리한 시립병원의 간호사들의 상당수는 보다 나은 일자리를 구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스로 뭔가 유용한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Sennett, 2003: 200-204). 그들을 그 조직에 묶어두는 것 또한 자신들의 개인적 존재를 확인시켜 주는 조직 내부의 타협과 중재의 기능이었다. 뉴욕의 한 간호사는 민간병원에서 임시직으로 일하는 게 벌이는 더 낫지만 자신이 보잘것없는 시립병원에 머물고 있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간호라는 행위는 어디에서든 유익한 것이지만 병원에 따라 유익함의 정도는 달랐다(Sennett, 2009: 46-48).
 
국경이 없어지면서 풀려나간 자본과 단기성과에 대한 경영 압박이 결합되면서 주식투자자들이 기업의 제도와 구조를 바꿔놓았다. 외부 사람들의 눈에 근사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투자자들은 회사에 엄청난 경영 압박을 가했다 제도적인 이점을 과시하기 위해서는 기업이 내부적으로 유연성을 높이기 위한 개혁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줘야 했다. 심지어 멀쩡하게 잘 굴러가고 있는 회사조차도 시장에서 보다 역동적인 것처럼 보이도록 하기 위해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는 증거를 제시해야 했다. 선빔(SunBeam)이나 엔론(Enron) 같은 회사들이 궁지에 몰린 것은 이러한 투자자들의 요구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거나 내부적으로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이전 테일러 시대의 피라미드식 제도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지금처럼 한 가지 과업을 여러 팀이 나누어 수행하는 것은 노력이 중복된다는 점에서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새로운 조직의 사고방식에서는 설혹 얼마간의 비효율이 있다손 치더라도 가능한 한 신속하게 최선의 결과를 내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바로 이것이 효율성에 대한 현대의 잣대다. 이러한 조직 내부의 경쟁은 경제학자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가 말한 ‘승자독식(winner-take-all)’의 방식으로 보상된다. 경쟁에서 이긴 팀에게만 큰 상이 돌아간다. 예전 같았으면 2, 3등상, 혹은 아차상이라도 있으련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컨설팅 작업은 사회적 거리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컨설턴트들은 현대 관료제 권력의 필수적인 요소이며, 관료제가 원활하게 작동하게 하는 윤활제이기도 하다. 원칙적으로 컨설턴트들은 객관적인 자문과 전략을 제공하는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그들이 하는 일은 조직의 구석구석을 돌며 고통스러운 구조조정 작업을 벌이는 것이다. 예컨대, 퇴직을 강권하고, 부서를 통폐합하거나, 해고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업무를 부과하는 따위가 컨설턴트의 몫이다(Sennett, 2009: 70).
 
외부에 컨설팅을 의뢰함으로써 경영진은 구조조정 과정에서 요구되는 고통스런 의사결정의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다. 요컨대 MP3 플레이어의 중앙처리장치와도 같은 조직의 중심부는 명령을 내리지만 책임을 지지는 않는 것이다. 실제로 컨설턴트들은 한번 구조조정에 관여했던 회사와는 다시 일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도 그렇게 함으로써 구조조정의 책임에서 벗어나려 하는 셈이다. 이러한 컨설팅 관행으로 인한 결과물이 바로 의사결정과 책임의 분리다.
 
첨단 조직문화가 공공부문에 적용될 때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문제점이 권력과 권위의 분리다. 영국과 독일에서 복지국가 제도를 수술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혁가들은 복지 혜택을 제대로 제공하기 위해, 권력은 중앙집중화하고 권위는 배제한 모델을 채택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늙은이나 병든 사람들은 정부에게 도와달라고 징징거리는 사람들일 뿐이다. 하지만 공공부문에 권위는 없고 권력만 집중될 경우 권력자 스스로가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권력자는 제도 개혁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오직 자신의 카리스마에만 의존해야 되기 때문이다. 카리스마가 부족한 개혁가들은 자칫 독단적으로 비춰질 수 있고, 책임을 지지 않는 제도는 말 그대로 무책임한 제도로 보일 수밖에 없다(Sennett, 2009: 77).
 
새로운 정보 시스템이 도입되면 조직의 효율이 크게 향상될 것처럼 말하는 이들이 있다. 특히 조직에 대해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식이라곤 눈곱만큼도 없는 컨설턴트들이 그렇다. 하지만 이는 대단히 순진한 발상이다. 물론 기계 자체가 나쁘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사실 로터스 노츠와 같은 프로그램은 조직의 지식 공유 기반을 크게 확장해 줄 수 있다. 그 프로그램의 통제와 적용을 직접 사용자의 손에 맡겨놓기만 한다면 말이다. 구조조정 과정을 들여다보면 새로운 컴퓨터 프로그램을 들여올 때 그 프로그램을 사용자에 맞게 변형시키지 못하도록 규제하는 경향이 있다. 프로그램의 통제 권한도 직접 사용하지 않는 조직의 상층부가 쥐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럴 경우 아무리 좋은 컴퓨터 프로그램이라도 표류효과, 즉 겉도는 현상이 나타날 수밖에 없다.
 
젊을 때는 자유로움을 추구하지만 가족이 딸리고 주택 대출금을 갚아야 하는 중년이 되면서 가치관이 바뀌기는 기업가들도 마찬가지다. 첨단분야에 종사한다는 도덕적 위신은 출세의 부적일지는 몰라도 중간층 노동자들이 평생 그런 일을 하며 살아가는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고용 기간과 관련 새로운 첨단 분야의 노동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조건들은 베버가 근대 노동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핵심적인 도덕적 가치라고 주장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정면으로 충돌한다.
베버가 관료제를 분석하면서 ‘철창의 비밀(the secret of iron cage)’이라고 지적했던 것이 바로 시간의 문제였다. 사람들은 미래에 보상을 받을 것이란 희망으로 고정된 제도 속에 스스로를 속박시킨다는 게 베버의 해석이었다. 보상의 지연을 통해 사람들은 절제하게 된다. 좋든 싫든 사람들이 직장에서 몸이 부서져라 일하는 것도 나중에 돌아올 보상을 기대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개인들이 어떤 일을 함으로써 명예나 위신을 얻게 되려면 신뢰할 만한 특정한 제도와 조직이 필요하다. 미래의 보상을 보장해줄 수 있을 만큼 조직의 안정성이 높아야 하고, 나중에라도 조직원들의 그간 업적을 제대로 펑가해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노동의 패러다임은 당장의 보상을 나중으로 미루는 금욕을 부질없는 것처럼 만든다.
불황기에 상류층은 중ㆍ하류층에 비해 운신의 폭이 훨씬 크다. 불황기에 어려움에 처한 기업들의 경영진은 서로 인맥과 학맥 등 관계망을 활발히 가동할 수 있어 노동자들에 비해 위기에서 발을 빼기가 훨씬 용이하다. 관료제의 틀 속에서 노동자들이 나중을 기약하고 열심히 일해온 것을 평가하고 보상해줘야 할 직장의 경영자와 상사들이 달아나고 없는 상창이 벌어지는 것이다. 하이테크회사나 금융과 미디어 분야에서 나타나는 경영진의 잦은 이동과 교체는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며 금욕한들 나중에 이를 제대로 평가할 책임자가 없다는 의미로 다가온다.
 
강력하고 광범한 인맥이야말로 특권층이 현재의 지위를 유지할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요소다. 인적 네트워크가 바로 특권층에게 장기적인 전략적 설계를 불필요하게 만드는 일종의 안전망(safety net)역할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신흥 지배층은 보상의 지연이라는 낡은 윤리에 더 이상 연연하지 않는다. 이들은 자기가 속한 회사나 조직과 무관하게 든든한 인맥과 학맥 등의 네트워크를 통해 지배층과 부단히 접촉하며 스스로 그 일원임을 확인한다. 그러나 대중은 사정이 다르다. 제도와 조직 속에서 비공식적 접촉과 지원이 줄어들면 그들의 연결망은 협소해지게 되며, 그럴수록 점점 더 제도에 의존하게 된다.
 
젊은 노동자들을 ‘제멋대로인 말썽꾸러기’라고 간주하는 고정관념은 왜곡된 것이다. 신참 노동자들은 경험도 적고 지위도 낮기 때문에 회사에서 신중하게 행동하는 경향이 있다. 또 이들은 회사가 마음에 들지 않을 땐 이에 맞서기보다는 차라리 회사를 떠나는 쪽을 택하기 쉽다. 딸린 식구도, 지역사회에서 지켜야 할 체면에 대한 부담도 적은 만큼 선택의 폭이 넓은 것이다. 따라서 기업 조직의 경우 앨버트 허쉬만(Albert O. Hirschmann)이 말했던 ‘떠나기(exit)’와 ‘개선하기(voice)’라는 양자택일의 기준은 바로 노동자들의 나이다.
 
컨설턴트는 여기저기를 집적거릴 뿐 결코 한 가지에 몰두하지 않는다. 더구나 누구든 숙련도를 끌어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실제 현장에 투입돼 일하면서 숙련도를 향상시킨다는 발상은 첨단을 달리는 새로운 제도의 생리와 맞지 않는다. 이들 첨단 제도는 사람들이 한 가지가 아니라 여러 가지 다른 업무들도 지체 없이 처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첨단 조직들은 똑똑한 인재들 덕에 잘나가고 있지만, 만에 하나 그 똑똑한 사람들이 장인정신으로 한 가지 일을 파고들기라도 한다면 모든 것이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오늘날 소멸하는 열정은 극적인 힘을 지니고 있다. 구경꾼 소비자(spectator-consumer)에겐 어떤 물건을 내 것으로 소유하고 싶다는 열망보다는 지금까지 가져보지 못한 것이기에 갖고 싶다는 열망이 훨씬 더 크다. 잠재력의 효능이 과장됨에 따라 구경꾼 소비자들은 사용하지도 않을 복잡한 기능을 갖춘 물건에 욕심을 내게 된다. 정치도 연극적이긴 마찬가지다. 특히나 진보적인 정치에는 특별한 수사법(rhetoric)이 요구된다. 정치인들은 시민들이 경험을 통해 마음속에 쌓아둔 진보 정치에 대한 불신을 잠시 접어두게 하기 위해 수사법을 동원한다. 나는 이제껏 정치적 수사법이 지닌 긍정적인 측면을 중시해왔다. 하지만 상품의 판촉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판촉 행위도 훨씬 더 부정적인 쪽으로 향하고 있다. 시민들은 진보적인 변화를 바라면서도 잊고 있는 것이 있다. 환상이 현대사회에서 너무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것이 변화에 대한 희망을 심각하게 갉아먹는다는 사실이다. 사람들 스스로가 능동적으로 점점 더 수동적이 되어가는 수동성 역설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Sennett, 2009: 191).
 
정치적 플랫폼에서 유일하고도 가장 중요한 공통의 요소는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는 쇠퇴하기는커녕 여전히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고 있다. 국가는 각기 위임받은 조직에 자원이 적절하게 배분될 수 있도록 통제하고, 그 실행 과정을 감시하는 중심부의 역할을 맡는다. 하지만 지금의 국가는 권력과 권위가 분리된다는 점에서 베버가 분석했던 초기 자본주의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기업에서와 마찬가지로 정치의 관료주의도 시민에 대해 책임은 지지 않으면서 권력은 더욱 중앙집중화하는 추세다. 기업의 사례를 통해 분석했듯이 권력과 권위가 분리되는 것을 결코 정치적인 진보라고 볼 수 없다. 여기서 ‘진보적(progressive)’라고 언급한 것은 모름지기 좋은 정치란 모든 시민들이 동일한 구상 아래 서로 통합되어 있다고 믿는 것을 뜻한다는 의미에서다. 사회자본주의는 군대를 본뜬 민간제도를 통해 공동 계획을 창조했지만 연대(solidarity)의 철창이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이에 비해 새로운 제도는 주변부로 밀려난 개인과 집단에 대해 자유란 이름으로 책임을 회피한다. 새로운 자본주의에서 비롯된 정치의 약점이 바로 무관심이다.
 
정치적 금박입히기의 가장 단순한 형태가 상징 부풀리기다. 영국의 경우 보수당과 노동당은 여우 사냥에 개를 풀어놓는 것을 금지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둘러싸고 열정적으로 서로의 차이를 부각했다. 이 문제가 의회에서 논의된 시간만 얼추 700시간에 달한다. 이에 비해 영국 의회가 대법원을 신설할 것인가를 논의한 건 고작 8시간에 불과했다. 사소한 것을 상징적으로 부풀리는 방식 자체가 새로울 것은 없지만, 상품의 광고와 정치 행위가 서로 일치한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이라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이 자신을 대증들에게 홍보하는 방식은 비누를 판촉하는 일과 점점 더 흡사해지고 있다. 정치적으로 사소한 차이에 금박을 입히는 행위는 동일한 플랫폼으로 만들어진 제품을 광고만 달리해 전혀 다른 제품인 것처럼 포장해 대중들의 눈길을 사로잡으려는 마케팅과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시민이 소비자처럼 행동하게 되면 더 이상 장인처럼 생각하지 않게 된다. 시민이 소비자처럼 행동하면 할수록 정치인들은 태만해진다. 더구나 소비자로서의 시민은 난해하거나 첨예하게 찬반이 갈리는 정치적 현안에 대해서는 눈길을 돌려버린다.
 
사용자 중심이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온다. 민주주의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이라크 전쟁을 지지하는 미국인들 중에서조차 이라크가 어떤 나라인지를 알고자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소비자로서의 시민이 아니라 장인으로서의 시민이라면 마땅히 그 이유를 알려고 했을 것이다. 민주주의가 소비자로서의 시민을 기반으로 하고, 사용자 중심으로 치닫게 될 때 알고자 하는 의지는 사라진다.
 
사람들은 경제적 변화로 인해 의혹이나 불안을 느끼더라도, 논리적으로는 이를 정치의 문제로 받아들인다. 정치인들이 중심을 못 잡고 우왕좌왕하거나, 실행 의지가 없거나 둘 중의 하나가 원인이라고 간주하는 것이다. 특히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소비자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면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낳거나 매우 심각한 불만들이 생겨날 수 있다.
 
이민 노동자들은 돈 잘 버는 민간병원에서 일하는 게 돈벌이는 더 나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이 공공병원을 떠나지 않은 것은 지위(status) 때문이었다. 영국인 대부분이 국민 모두에게 의료보험 혜택을 제공하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영국 국민건강보험(NHS) 제도를 높이 평가하고 있는데, 이러한 평판은 공공병원의 이민 노동자들이 영국 사회 안에서 긍정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지위의 보다 근본적인 가치는 정당성(legitimacy)이란 측면에서 다루어져야 마땅하다. 제도가 정당성을 부여할 때 당신은 지위를 갖게 된다. 쓸모 있는 존재라는 것도 이러한 얼개를 벗어나지 않는다. 요컨대, 그것은 사적으로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이란 의미를 넘어서는 것이며, 공적으로 인정받은 존재를 가리킨다. 군대의 하사관들도 공공의료기관의 이민 노동자들과 똑같은 정서를 갖고 있었다. 이들은 보다 편하고, 보수도 더 좋은 사설 경호원으로 일할 수도 있지만 군복을 벗지 않았다. 민간부문에서보다 공공부문에서 일할 때 더 인정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장인정신은 새로운 문화가 빠뜨린 기본 덕목을 가지고 있다. 이상적인 노동자, 이상적인 학생, 이상적인 시민의 자질이 지니지 못한 미덕, 즉 헌신(commitment)이 바로 그것이다. 헌신의 미덕은 외곬의 경쟁심 많은 장인들이 일을 잘해내기 위해 혼신을 다할 수도 있다는 것에 있다기보다 장인들이 일 자체의 객관적 가치를 믿는다는 데 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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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세계는? (서울=연합뉴스, 정천기 기자, 2009-03-13 07:00)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경제 흐름 속에서 빚어진 글로벌 금융위기는 세계의 모습을 어떻게 바꿔놓을까? 미국 출신의 좌파 지식인 리처드 세넷 런던 정경대 사회학과 교수가 지은 '뉴캐피털리즘'(위즈덤하우스 펴냄)은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가 안은 문제를 진단하고 위기를 극복할 대안을 제시한 책이다.
 
저자는 글로벌 금융위기는 세계화와 신경제의 성장 신화 속에 숨어 있던 함정이며, 이는 퇴출의 공포로 대변되는 불안정한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을 몰고 와 개인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놓았다고 진단한다. 이어 개인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리는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의 속성으로 '서사적 삶의 파괴'를 꼽는다.
 
저자가 말하는 '서사적 삶'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과 경험이 축적되는 것을 일컫는다. 하지만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는 이해관계에 따라 빠른 속도로 이합집산을 되풀이하고, 필요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 선택적으로 고용하며, 효용성이 사라졌을 때 즉시 해고해버리는 조직문화를 통해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삶을 연속적인 이야기로 구성하지 못하게 만든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저자는 서사의 고리가 단절된 정치·경제·사회의 특성으로 ▲월마트식 정치 ▲컨설턴트식 경제 ▲MP3형 사회를 든다. 저자는 "정치조직의 중앙집중화는 지방조직과 다양한 이해집단의 중재에 기초해온 기존 정당정치를 해체한다"면서 "소비자는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월마트 매장에서 상표만 보고 물건을 고르듯 정치를 소비할 뿐"이라고 말한다. 끊임없이 변화를 재촉할 뿐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도 설명하지 않고, 기업의 구조조정에 끼어들어 조직을 뒤죽박죽 만들고서도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컨설턴트식 경제'도 개인에게서 삶의 서사를 빼앗는 신자유주의 경제의 함정 가운데 하나이다.
 
저자는 노동계의 비정규직화, 간소화 등을 심화시키는 현상을 'MP3형 사회'라는 개념으로 풀이한다. 듣고 싶은 노래들을 마음대로 바꿔 들을 수 있는 MP3처럼 신자유주의 경제는 조직 구성원들의 역할을 뒤바꾸고, 조직 피라미드의 중간층을 없애 간소화하며, 조직의 일부 기능을 아웃소싱하는 형태 등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저자는 "신자유주의 경제 체제에서 서사적 삶의 고리가 끊어진 구성원들이 '제도에 머물면서 보장받을 수 있는 기간'은 계속 짧아지고 있다"면서 "이는 구성원 스스로 쓸모없는 잉여인간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불안에 휩싸이게 하는 등 사회적 퇴화의 핵심 원인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고용이 불안정하고 퇴출의 공포가 심화하여 삶의 서사가 흔들리는 시점에서 개인들에게 오랜 세월 고용과 승진을 보장해주는 관료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하기도 한다. 저자는 나아가 신자유주의 경제 속에서 개인이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을 이어갈 방안으로 일자리 나누기 등을 통한 '서사적 삶의 회복', 자원봉사 등을 통해 자신을 쓸모 있는 존재로 느끼도록 '개인의 유용성 발휘', 이해득실을 떠나 자기만족을 느낄 수 있는 '장인정신 갖기' 등 세 가지를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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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읽는 경제이야기]삶을 망가뜨리는 ‘MP3 자본주의’ (내일, 이재걸 기자, 2009-03-13 오후 2:14:40)
<뉴캐피털리즘> 리처드 세넷/ 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 , 1만3000원
 
‘뉴캐피털리즘(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은 미국을 대표하는 좌파 지식인 리처드 세넷이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를 진단하고 현재 위기를 극복하는 데 필요한 혜안과 해결의 실마리를 주는 책이다. 세계화와 신경제로 인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졌는지에 대한 현상 분석이 아니라 퇴출의 공포로 대변되는 불안정한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어디서 어떻게 비롯되는지에 주목한다. 새로운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람들의 삶이 얼마나 흔들리고 있는지, 새로운 제도들이 개인의 삶을 어떻게 흔들어놓고 있는지를 막힘없이 풀어낸다.
 
아무 가치기준 없이 강요되는 변화는 삶의 연속성 즉 ‘서사’를 파괴한다. 이해관계에 따라 빠른 속도로 이합집산을 되풀이하고 필요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을 선택적으로 고용하며 효용성이 사라졌을 경우 즉시 해고해버리는 고용 문화가 우리가 내년, 10년 후, 그리고 삶의 마지막은 어떠하리라는 예측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로써 우리는 머릿속으로 스스로의 삶의 연속적인 이야기를 구상하기 어려워진 것이다. 세넷은 오늘을 사는 사람들에게 가장 절실한 것은 이들이 표류하지 않게 단단히 붙들어주는 문화적 닻이라고 말한다. 일과 권력의 변화가 과연 바람직한 것인지를 평가할 수 있게 해주는 가치 기준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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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사회는? (매경, 손동우 기자, 2009.03.13 15:21:34) 
`MP3 자본주의` 심화 … 일자리 나누기로 극복을
MP3처럼 연속성 무시된 사회, 개인은 미래를 설계하기 힘들어
자원봉사ㆍ장인정신 등으로 개인의 `삶의 서사` 유지해야

  
저자는 "세계화와 신자유주의는 개인의 삶을 나락으로 빠뜨릴 수 있는 위험을 애초부터 가지고 있었다"며 "지금의 금융위기도 그 부작용이 드러난 결과일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의 어떤 속성이 개인의 삶을 불안하게 몰아가는 것일까. 세넷은 대표적인 원인으로 `서사적 삶의 파괴`를 든다. 여기서 말하는 `서사적 삶`이란 연속적인 시간의 흐름 속에서 경험을 축적해 가는 현상을 말한다. 즉, 자신의 미래를 개인이 과거부터 현재까지의 경험으로 예측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새로운 자본주의 경제는 이런 `서사적 삶`을 이어갈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파괴한다"고 주장한다. 이해관계에 따라 빠른 속도로 이합집산을 되풀이하는 분위기에서 개인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어 서사의 고리가 파괴된 사회의 특성으로 세 가지를 든다. 가장 먼저 제시되는 것이 `MP3식 조직`. MP3는 음반이나 테이프와는 달리 특정 음역만을 들을 수 있고, 순서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다. 세넷은 "현대의 조직 역시 MP3처럼 순서와 매뉴얼을 파괴하고 유연하게 운영하는 형태로 바뀌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 다음이 `컨설턴트식 경제`다. 컨설턴트는 기업의 구조조정에 끼어들어 조직의 판을 뒤엎어 버리지만 그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는다. 끊임없는 변화를 재촉할 뿐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 설명하지도 않고, 책임도 확실히 지지 않는 지금의 경제가 바로 `컨설턴트식 경제`라 할 수 있겠다. 
 
이런 사회ㆍ경제적 변화는 정치 영역에도 영향을 미친다. 소비자들이 `월마트`에서 매장의 선반에 널린 엇비슷한 비누 가운데 상표만 보고 구매를 결정하듯, 정치 권력을 선택하는 일도 비슷한 양상으로 변해간다는 것. 세넷은 이런 변화를 `월마트식 정치`라고 명명하며 "이 세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사회는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쉽게 깨지기 때문에 그 속에 사는 개인은 불안해 할 수밖에 없다"고 분석한다. 
 
하지만 저자는 현대사회의 유동화를 완전히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는다. 삶을 속박하던 제도로부터 개인이 자유로워진 만큼 그동안 잃어버린 것들을 어떻게 회복할지가 우리의 과제라고 지적한다. 이를 위해 세넷은 먼저 "삶의 서사를 되찾으라"고 주문한다. `일자리 나누기` 등을 통해 사람들이 인생을 길게 보고 계획을 세우도록 만들라는 얘기다. 이 밖에도 책은 자원봉사 등 시민사회의 다양한 비공식적 관계를 통해 스스로를 쓸모 있는 존재로 느끼도록 만드는 방법, `장인정신`을 가져 작은 이해득실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 만족감을 느끼는 방법 등을 새로운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돌파할 수 있는 해결책으로 제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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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천박한 자본주의 ‘삶의 서사’가 흔들린다 (경향, 김진우 기자, 2009-03-13-17:44:28)
 
독일의 사회학자 막스 베버는 관료제를 ‘쇠창살’에 비유했다. 자신의 삶을 다른 누군가가 설계한 틀에 맞춰 살아가야 한다는 의미에서였다. 1960년대 신좌파(New Left)는 관료제를 개인을 억압하는 ‘감옥’이라고까지 비판했다. 하지만 관료제의 쇠창살은 ‘안식처’이기도 했다. 관료제의 최대 유산인 ‘조직화된 시간’ 속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서사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연속적으로 설명하고 미래를 설계할 수 있었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또 다른 자아를 느낄 수도 있었고 사회관계를 맺는 것도 가능했다. 
 
오늘날 삶을 서사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하는 제도는 녹아 사라지고 있다. 종신고용제는 막을 내렸고 복지정책과 사회안전망은 단기화되고 변덕스러워졌다. 고용은 불안정해지고 퇴출의 공포는 심화됐다. ‘새로운 자본주의’의 확산으로 ‘삶의 서사’가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뉴캐피탈리즘>(원제 The Culture of the New Capitalism)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흔들어 놓고 있는지 풀어내면서 퇴출 공포로 대변되는 불안정한 삶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짚은 책이다. 노동 및 도시화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저자는 새로운 자본주의 제도·문화가 노동 윤리나 능력에 대한 태도, 소비와 정치에까지 어떻게 작용하는지 파헤쳤다. 
 
책에 따르면 새로운 자본주의가 우리에게 강요하는 가치는 다음과 같다. ‘항상 변화하라’ ‘불확실성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라’ ‘장기보다 단기가 중요하다’ ‘지난 업적보다 미래 잠재력이 중요하다’. 이 같은 가치는 개인이 자기 삶의 연속적인 이야기를 구상하는 것을 어렵게 만든다. 이해 관계에 따라 이합집산을 되풀이하고 필요한 재능을 가진 사람만을 선택적으로 고용하며 효용성이 사라졌을 경우 해고해버리는 고용 문화는 개인이 미래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저자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속성을 MP3 플레이어를 빗대 설명한다. MP3가 듣고 싶은 노래의 순서를 그때 그때 바꿔 들을 수 있는 것처럼 새로운 조직은 주력 업무에 따라 고용을 늘리거나 줄이면서 신축적으로 조직을 운영할 수 있다. 신경제는 또한 끊임없는 변화를 재촉할 뿐 무엇을 위한 변화인지를 설명하지도,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도 않는 ‘컨설턴트식 경제’다. 이로 인해 조직에 대한 충성도 저하, 노동자들 사이의 비공식적 신뢰 붕괴, 구성원들의 조직 생리에 대한 무지 등 세 가지 ‘사회적 적자’가 발생한다는 게 저자의 지적이다. 새로운 조직과 제도가 관료제에 비해 더 작아진 것도 민주적이 된 것도 아니다. 권력의 중앙 집중화가 심화되고 권력에서 권위는 떨어져 나갔다.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은 죽은 셈”이라는 평가다. 
 
게다가 단기간에 일을 처리하고 다시 다른 일로 옮겨가야 하는 새로운 자본주의는 잠재력 같은 재능만을 강조한다. 오랫동안 쌓은 업적과 숙련의 가치는 소멸하고 그에 깃든 지식의 맥락과 내용도 소진된다. 어떤 일을 깊이 파고드는 것이 불가능하다보니 장인정신은 사라진다. 잠재력이 없다는 판정을 받은 사람들에겐 과거의 업적에 상관없이 더 이상 쓸모 없고 경쟁력 없는 인물이란 낙인이 찍힌다. 
 
저자는 나아가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가 소비를 넘어 정치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월마트식 정치’를 통해 보여준다. 소비자가 상표만 다를 뿐 내용물은 비슷한 상품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월마트 매장에서 물건을 고르듯 시민들은 정치를 단지 소비할 뿐이라는 것이다. 
 
책은 소비자이자 구경꾼이기도 한 시민들이 진보 정치에 점점 등을 돌리고 스스로 수동적이 되어가는 이유를 설명한다. 자동차 회사가 공동의 플랫폼을 바탕으로 디자인과 옵션을 약간 달리한 자동차들을 내놓듯 현대 정치는 ‘신자유주의’와 같은 공동의 정치적 플랫폼을 제공한다. 이로 인해 정치 제품에는 ‘금박을 입힌 정도의 차이’만 존재하고 서로의 차이를 부각시킬 수 있는 ‘수사법’만 난무하게 된다. 또 시민이 더 이상 장인이 아니라 소비자처럼 행동하면서 난해하거나 첨예하게 찬반이 갈리는 정치 현안에 대해서는 눈길을 돌려버린다. 저자는 “‘사용자 중심’이라는 것이 민주주의를 망친다”고 말한다. 민주주의란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기 위해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력할 것을 요구한다는 설명이다. 
 
저자는 개개인이 표류하지 않을 수 있게 해주는 ‘문화적 닻’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이 같은 가치로 사건과 경험의 축적을 통한 서사적 삶의 회복, 스스로를 쓸모 있는 존재로 느끼도록 해주는 개인 유용성의 발휘, 장인정신 등 세 가지를 든다. 일자리를 알선하거나 연금 관리 및 의료보험 가입을 대행하는 등 노동자들의 경험이 서사적으로 단절되지 않게 하는 ‘병렬 조직’의 설립, 일자리 나누기, 인생 설계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초자본의 제공 등이 제시된다. 
 
물론 책은 새로운 자본주의 문화가 가져온 긍정적인 결과를 부인하지 않는다. 제도가 사람들의 삶을 덜 구속하게 되면서 자유로운 개인의 영역이 넓어졌다는 것이다. 하지만 저자는 현재 새로운 권력 구조를 탄생시킨 자본주의 문화의 천박함을 삶과 노동의 관점에서 비판한다. 그리고 현재 일터나 학교, 정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문화의 천박함은 “유리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쉬 깨질 것”이라면서 새로운 문화에 대한 ‘반란’을 전망한다. 유병선 옮김. 1만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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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북카페] 툭하면 “헤쳐 모여” …샐러리맨은 불안하다 (중앙일보, 이은주 기자, 2009.03.13 19:30)
뉴캐피털리즘, 리처드 세넷 지음, 유병선 옮김, 위즈덤하우스, 243쪽, 1만3000원
 
불안정, 그게 자본주의의 변함없는 속성이라는 것이다. 노동·도시화 연구로 유명한 세넷은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의 ‘지적 조언자’(intellectual mentor)로 주목받았다. 그는 이 책에서 20세기 후반 들어 전개된 경제적인 변화의 실체가 무엇이었고, 이것이 우리의 소비·정치 행태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조망한다. 간단히 말하자면, 그는 이 변화의 핵심을 ‘MP3형 조직’과 ‘월마트식 정치’란 두 키워드로 요약한다. 기업의 조직은 극도의 유연성을 내세우며 통제만 강화하고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면, 정치는 새로운 제품과 서비스를 ‘소비하는’ 방식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있다는 얘기다.
  
세넷은 “현재 일터나 학교, 정치의 세계를 뒤덮고 있는” 천박한 문화는 “유리 그릇처럼 작은 충격에도 쉬 깨질” 것으로 내다본다. “개인이 유용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일거리를 찾고(국가도 자원봉사 등 일자리를 만들어내는 것에 적극 관여해야 한다), 새로운 문화가 빠뜨린 기본 덕목, 즉 헌신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장인정신의 가치를 재평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 책을 통해 현재 개인들이 겪고 있는 불안이 덜어질 리 없다. 하지만 일상의 사례들을 풍부하게 곁들이며 자신의 논지를 펼치는 지은이의 통찰력은 우리가 처한 현실을 한 발짝 떨어져 다시 바라보게 한다. 특히 개인의 삶을 배려하는 제도야 말로 헌신을 이끌어내고, 지속가능한 사회의 핵심이라는 주장은 곱씹어볼 만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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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3/22 22:39 2010/03/22 2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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