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덧칠

잡기장
지각생님의 [식어감] 에 관련된 글.

어두칙칙한 좁은 방에서 감정의 설사를 지린 후 밖에 나왔다. 자전거를 못타지만 차가운 날씨는 머리를 맑게 해준다. 어제 밤에 자전거를 타고 피곤하고 시간이 늦어 집에 안가고 또 미문동 방에서 잤다. 오늘은 인터뷰도 있고 해서 집에 와서 씻고 옷 갈아입고 나가려고 한다.

오랫만에 지하철을 탔다. 사람은 많지 않다. 편하게 자리에 앉아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가 없는 상황. 연습장을 꺼내고, 내가 조금 전에 싸지른 덩어리를 생각한다. 내가 무슨 말을 한거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누군가에 대한 실망과 원망의 마음이 저 아래에 계속 쌓이고 있던 걸 은연중 드러내고 싶었다. 나 지금 쉽지 않다고. 힘들다고. 좀 알아주면 안돼? 그런 마음이 밖으로 나오지 않거나, 나올때는 반대로 표현된다. 받고 싶을때 더 주려한다. 그것이 내 "오바"의 원인이다.

연습장에 내 감정과 의식의 흐름을 기록하다 보니 내가 모른 척하던 내 생각이 드러난다.

* 건강한 척 한다고 건강해지는 건 아니다. 지금 나는 정신적으로 약해져있어. 무슨 히코꼬무리? 같군.
* 황폐해진 내면이 그냥 드러나는 중이야.
* 서로 합의하지 않은 걸 기대하고 있군. 혼자만의 바람. 어차피 누구도 해줄 수 없는 것에 대한 갈망을 특정 사람에게 전가하고 있는 거지. 그런게 그 사람들을 피곤하게 하고, 거리감 혹은 좌절감을 느끼게 할 지도 몰라. 그러지 말자.
* 내가 외로우면 누군가 외로움을 풀어주길 기대하지 말고, 다른 이의 외로움을 들어주자. 하지만 어떻게? 나도 "응급 조치"는 필요한 거 아냐? 호흡이 곤란하니 일단 인공호흡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그런 상황이 아닐까? 아니면 내 증상에 대해 과대망상을 갖고 있는 걸까
* 하여든 달래야 하고, 숨 돌리고 나면 내가 찾아나서야지. 그 과정에서 누군가에게만 과도하게 들러붙지 않게 되길.

그림을 그린다. 감정의 고착. 어릴 적 어디엔가 고착되어 있는 감정의 찌꺼기. 응어리. 그 끈적 찐득한 액체에 발이 잠겨, 늘러붙은 한 마리 새. 날개짓을 하고 있지만 버둥거릴뿐 벗어나지 못한다.

그림을 잘 못그린다는 건 내 가장 큰 아쉬움이다. 어제 블랙보드를 하나 사서 미문동방에 걸어놨다. 펭귄 그림을 그리려 했는데 망쳤다. 둥그런 외관과 날개를 그리고 눈과 부리, 검정과 흰 부분의 경계를 그리다 보니 점점 이상해졌다. 그래서 계속 손질을 가했는데 그럴수록 펭귄이 아니라 이상한 괴물이 되어간다. 지나친 손질, 덧칠. 그 생각이 나자 내 지금 상황을 표현할 단어를 기억해냈다. 그래, 난 감정을 계속 덧칠하고 있어. 지나치게 자주 손질을 가하고 있지. 전체 그림에 대한 상은 갖고 있지 않고 부분적인 데만 몰두하지. 내버려둬도 좋을 것을 계속 손대고 있어. 그렇게 망치는 그림은 지워버린다. 그리고 종이를 뜯어 구깃구깃 접는다. 그리고는 휴지통에 넣는다. 어쩔때는 그것도 누가 볼까봐 서랍이나 가방에 넣어놓는다. 온전히 끝까지 그린 그림도 많지 않고, 사람들에게 보여준 그림도 별로 없다.

* 솔직하게 지금의 내 상태를 드러내는게 무에 문제인가. 이런 내가 싫다면 할 수 없는거지.

하지만 이 말이 옛날과 다르게 틀린 것은, 이 블로그는 더 이상 "얼굴 없는 지각생"의 블로그만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를 오프라인에서 아는 사람도 생기고, 너무 많이 알고 있거나 감정의 찌꺼기가 쌓여 곤란한 사람도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말을 쓰지 않고 있다. 예전에 했던 그런 말을 하지 못한다. 그나마 그런 말을 하고 나서, 모두에게 공개된 장소에 털어놓고 회피할 수 없게 되고 나서야 나는 내 자신을 조금더 들여다 볼 수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그러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고 다른 블로그에는 그런 예전의 느낌이 나지 않는다. 왠지 집 놔두고 엉뚱한 곳에서 방황하는 것 같은 심정.

* 자유로워지고, 치유해서, 건강을 회복하자. 그래서 다시 내가 만나고 싶은 사람들 앞에 나서고 싶다.
* 저지르고 나니, 걱정이 되고, 수습을 위해서라도 조금 더 생각하게 되는구나. 끝없는 수습, 덧칠, 그러지 말고 그냥 내버려두자.
* 성숙, 혹은 극복 과정을 자랑해도 된다. 하지만 원래 어두웠던 것, 출발점을 덮지는 말자. 덧칠하지 말자. 그럴수록 나 자신을 잃어갈거야. 나로부터도. 내 블로그..

여기서 지하철을 내렸다. 버스로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데, 어디선가 또 다른 곳에서 출발한 생각이 고개를 디민다. 난 그것이 뭔지 안다. 2차적 의식이랄까. 내가 연습장에 마치 솔직하고 자연스럽게 늘어놓는 것처럼 하고 있을때 그걸 관찰하고 있는 또 하나의 나. 그게 말한다. 지금 나는 부끄러운 나를 감추기 위해, 또 덧칠하기 위해 이런 말들을 블로그에 어서 올리고 싶어 안달하고 있구나. 사람들에게 나 극복했어요. 잠시 흔들렸을 뿐 나는 기본적으로 이런 생각들은 옛날에 다 했다고요. 라고 말하고자 하는구나. 지금껏 그래왔듯 여전히 솔직하지 못하고 교묘하게 내 감정을 포장하고 배치해서 늘어놓고 있구나. 누군가 사 가거나 적선해주길 기다리는 것처럼.

내 불안과 열등감은 아무 근거가 없는게 아니다. 계속 내 지금의 상태를 숨기고 뒤처진 나를 배제하고 있으니 외연에 비해 내적 성숙이 이르지 못하는 거다. 어느 순간에서 멈춰 있는 거다. 지금의 내 상태를 인정해야돼. 나는 깊이 있고 진지했다기보단 차라리 심각해지는 습관을 갖고 있었다고 말하는게 더 적당할 수 있다. 나는 돌덩이 속의 조각을 볼 수 없고, 완성된 그림에 대한 상 없이 밑그림만 그리고 부분에만 끙끙거리다 던져버리고 만다. 끝없는 덧칠과 손질, 지워버림, 감춤의 반복은 내 감정, 내 모습을 잃게 하고 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나는 빨리 이 글을 쓰고 싶어다. 회복하고 있다는 것, 내가 살짝 드러낸 부끄러운 감정을 덮어버릴 수 있는 "깊이"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한 몸부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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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5/16 14:28 2007/05/16 1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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