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레이드 러너 2007년 감독판

SF
만일 지금 인간의 모습을 꼭 닮은 복제인간을 만들 수 있다면,
심지어 모습만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도 인간과 닮아있다면,
당신은 복제인간이 아님을 어떻게 스스로 증명할 수 있을까?



필립K.딕의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의 꿈을 꾸는가?"를 원작으로 한 고전 명작 SF "블레이드 러너"의 2007년 감독판을 봤다. 요 근래 활동가 워크샵이다 뭐다 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데, 내가 신나서 떠드는 두 가지 주제가 하나는 "빈집"이요, 다른 하나는 SF다. 그러다보니 다양한 관점이긴 하지만 SF에 관심 있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여차저차 하다보니 "SF영화보기 모임"을 일단 시작하게 됐다. 지난 금요일 망원동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실에서 처음으로.

그 전에 뭘 볼까요 물었더니 이것저것 나오는데 역시 SF영화 얘기하면 거의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는게 블레이드 러너. 일단 그것을 어둠의 경로로 다운받아 오겠노라 약속하고 빈집에 돌아와 SF마스터 네오스크럼에게 자랑스럽게 얘기했더니 좋은 정보를 알려준다. 글쎄 몰랐는데 2007년에 감독판이 다시 나왔다는게 아닌가.


(사진은 감독판에만 있는 "유니콘" 백일몽 - 결말 부분의 반전과 연결된다)
블레이드 러너는 1982년에 나왔는데, 그때는 제작사에서 감독이 원치 않는 요소들을 넣게끔 했다고 한다. 나레이션을 넣었고, 주인공은 복제인간이어서는 안되고, 결말은 해피엔딩. 이에 불만에 차 있던 감독, 93년에 감독판을 낸 것으로 모자라 2007년, 무려 25년이 지난 시점에 다시 한번 디지털 복원과 재편집과정을 거쳐 감독판을 냈다. 어둠의 경로를 탐색해 봤더니 마침 영화부분(DVD의 다른 다큐 등은 뺀)이 딱 올라와 있다. 땡큐~ 받아서 혼자 미리 본 다음, 82년 오리지널과 뭐가 다른지 확인하고, 다시(이번엔 영화보기모임에서 여럿이랑) 보니, 우와... 영화가 정말 풍성했다. 그냥 무심히 지나친 장면들이 의미 심장했고, 어떤 결말을 따르냐에 따라 장면의 세부적인 해석이 달라진다.


혹 영화를 안본 분들을 위해 -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25년 된 고전의 스포일러가 된다고 해서 큰 문제가 있으려나?)

2019년, 핵전쟁을 거쳐 황폐해진 지구, 인간들은 인간과 꼭 닮은 복제인간을 만들어 힘들고 위험한 일을 시킨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키고, 그걸 진압한 후 외계에 나가있는 복제인간이 지구로 돌아오는 것은 엄격히 금지된다. 그리고 잠입한 복제인간은 잡아내서 "폐기"하는데, 그런 일을 전담하는 사람은 "블레이드 러너"라 불린다. 그들은 "보이스-캄프 테스트"라는 방법으로 복제인간을 식별할 수 있다.

시대를 앞선 썩소를 여러번 보여주는,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해리슨 포드)", 어느날 이전에 일을 주던 브라이언 반장에게서 친절한 호출을 받는다. 밥먹을 때 건드리다니.. 그리고 최근 지구에 들어와, 그들을 만든 "타이렐"사에 잠입했다가 도망친 4명의 레플리컨트(복제인간)을 제거하는 일을 맡긴다. 됐거든? 하지만 소용없다. 결국 다시 일을 맡게 된 데커드는 수상한 형사?와 함께 동료 블레이드 러너를 해치고 달아난 "레플리컨트" 레온의 은신처부터 수사를 진행한다. 그리고 타이렐 사에서 "최신형" 레플리컨트 레이첼(숀 영)을 만나게 된다. 레이첼은 평소보다 몇 배의 노력을 들여야 겨우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과 꼭 닮은 레플리컨트이다. 심지어 레이첼은 스스로 복제인간임을 모르는데, 그에겐 다른 이가 살아온 기억이 이식되어 있기 때문이다.


검색하면 다 나올 얘기는 이제 그만하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인간과 쏙 닮은 인간,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로봇, 복제인간이 있다면 당신은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아니 구별하는 주체인 당신은 복제인간이 아니라는 걸 뭘로 보장할까?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인공지능(AI) 이란 말이 이제 전혀 낯설지 않는 만큼 "생각한다"는 것만으로 인간을 규정지을 순 없다는 건 분명하다. 그럼 다음은? "인간적이다" 말할때 흔히 생각되는 "감정"은 어떨까?


어익후, 레플리컨트도 느낀다는군. 그리고 인간과 다를뿐 모든 동식물이 "감정"이란걸 느끼잖아. 감정도 탈락.

간신히 레플리컨트라는걸 밝혀낸 최신형 "레이첼"은 자신이 복제인간이 아니라고 항변하기 위해 찾아와 어릴 적 사진을 내민다. 그리고 "살아온 기억"을 얘기하려 한다. 그러나... 데커드는 이미 레이첼이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는 "기억"을 어디서 듣고 와서 먼저 얘기해 준다. 그 기억은 이식된 거야.


"기억 이식"은 흥미로운 얘기꺼리다. 당신은 얼마나 당신의 기억을 "내 것"이라고 믿을 수 있나요? 필립 딕의 다른 소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We Can Remember It For You Wholesale' (또 한편의 명작 "토탈 리콜"의 원작 소설)에는 주인공이 실제 화성에 여행을 갈 형편이 안되고, 일상에 갇혀 있어 "화성 여행의 기억"을 이식받아 만족하려고 한다. 그런데 그런 기억을 조작하는 과정에서 뜻밖에도 그는 이미 기억을 한번 이식받은 적이 있었다는 것이 드러난다. 그 기억이란 세상에...

다른 소설-영화 "임포스터"에서도 비슷한 설정이 나온다. 갑자기 동료와 경찰이 자신을 체포하며 너는 외계에서 파견된 암살 로봇이라고 몰아세운다. 이게 뭥미? 난 지금껏 여기 지구별에서 계속 살아온 사람이잖아. 너 나 몰라? 하지만 그들은 믿지 않고 주인공이 "기억이 이식된 로봇"이라고 말한다. 그는 결국 스스로를 증명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탈출하고 쫓겨다니게 된다. 그 결말은...? 이 작품은 안 보신 분이 많으실테니 여기서 꿀꺽~

이 밖에도 많은 작품에서 필립K.딕은 인간과 비인간의 경계, 모호함, 어떤 "절대적 인간성"에 대한 부정?을 얘기하고 있다. 그의 소설은 대부분 막판 반전이 묘미다. 그의 작품 중 많은 것이 영화화됐고, 지금도 되고 있는데, 대부분의 영화는 원작의 주제의식과 감흥을 잘 못 살리고, 제작하는 곳의 가치관이 덕지덕지 발라진 이상한 영화가 됐다는 것이 많은 이의 평인 듯 하다. 심지어 "마이너리티 리포트"조차, 잘된 면이 많고 재밌긴 하지만, 하여간 그 지겨운 "어메리칸 가족주의"때문에 짜증나는 영화가 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대체, 인간과 복제인간이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왜 인간은 다른 존재로부터, 개인은 다른 개인, 다른 집단으로부터 구분되어야 할까? 과연 "그들"은 "우리"와 공존할 수 없는 존재일까?


영화에서 레플리컨트는 용도에 따라 "보통의" 인간보다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고, 그래서 짧은 수명을 갖고 있다. 그들은 인간보다 뛰어나기 때문에 위험하다. 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으면 문제가 생긴다. 그들은 "우리"와 떨어진 곳에 있으며 "우리"의 이익을 위해 "원래 맡은 역할을 주어진 시간 동안 충실히" 수행해야 하는 존재이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그들은 철저히 탄압해야 하고, 그러기 위한 가장 좋은 지배 수단은 "공포속에서 살게 하는 것"이다. 잠깐 그런데 내가 지금 현실 사회를 얘기하는거야 영화얘길 하는거야?

나와 다른 너, 달라야 하는 너. 이런 관계를 유지하지 않고는 버텨낼 수 없는 사회 구조.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 구호를 내건 타이렐사는 성공했다. 실제로 그들의 최신형 모델은 인간과 다를게 없다. 살려고 하는 욕망, 자유로워지려는 욕망, 어차피 곧 죽을 그들을 인간은 어떻게든 죽이려 하지만, 마지막 남은 레플리컨트는 오히려 자신들을 죽이는 인간을 구원한다. 그리고 조용히 죽음을 맞는다.


눈물의 (거의) 마지막 장면. 엉엉 못 보신분들은 꼭 보시기 바래요.
(사실 이런 영화 안 좋아하시는 분들은 영화 중후반에 많이 지루해하신다고 알고 있다. 그래도 끝까지 안보면 후회할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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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참 많은 얘기꺼리를 뽑아낼 수 있다. 82년 오리지널 스토리만으로도 그렇다. 그런데 감독판의 스토리를 받아들이면 이게 몇배는 뛰어오르는 느낌이다. 이 영화에서 가장 큰 논란거리는, "블레이드 러너 데커드는, 인간인가 레플리컨트인가?"이다. 이 논쟁이 계속 끊임없이 이어져왔고, 감독판이 나오면서 리들리 스콧은 "레플리컨트"라고 분명히 얘기했다고 한다. 어차피 보는 사람의 해석에 의해 완성되는 것이니 그걸 받아들이던, 인간이라고 믿던 그것은 자기 자유지만, 레플리컨트라고 생각하는 순간, 영화 초반부부터 갑자기 무언가가 무너짐을 느끼게 된다.

블레이드 러너의 일을 다시 맡기는 브라이언, 하지만 데커드가 기억이 이식된 복제인간이라면 어떻게 되는 걸까? 경찰서에서 그들은 옛 동료를 만나는 것처럼 대하지만, 사실은 그게 서로의 첫만남이라는게 된다. 그리고 브라이언은 처음 보는 데커드에게 연기를 한게 되고. 그리고 그 후 몇번의 만남과 정보 교환이 사실은 모두 어떤 의도에 의한 계획적인 행동이라는 것이 된다.


그리고 약간 수상하지만 그냥 넘길 수 있었던 이 남자의 정체는 대체 뭘까?

그냥 브라이언과 함께 일하는, 데커드를 처음에 데려가고, 처음 수사를 도와주는 형사,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기 위한 연락책이 아니라 계속 데커드 주변을 맴돌면서 그를 감시하고, 몰아가는 사람이 된다.

또, 영화 초반에서 6명의 레플리컨트가 타이렐 사에 잠입하고 1명은 죽고 4명은 달아나고 1명이 사라졌다는 것도, 수 많은 상상을 할 수 있게 만드는 부분이다. 그 한명이 혹시 데커드는 아니었을까? 다른 4명이 그를 못 알아보는 것 같아서 아닌 것도 같지만, 왠지 그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지배할 대상끼리 서로 싸우게 하고, 그들의 손을 빌려 스스로를 파멸시키는 행위는 사실 언제나 지배계급이 의도하고 실행하는 바가 아닌가.

체스를 잘 몰라서 그러는데, 퀸으로 비숍 잡고 (너 미쳤니 소리 듣고는) 나이트로 퀸을 잡자, 다른 비숍으로 체크메이트! 타이렐 사장의 관심을 끌어 세바스찬(레플리컨트 몸 제조자)을 내세운 베티(전투용 레플리컨트, 리더)를 들이는 장면에서 왠지 그런 느낌이 든다. 이건 좀 지나친 생각인지는 모르나...

너무 길어지니 여기서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이 관심을 보이는 실용적인 상상물. 머리 말리는 기계의 모습을 보며 마무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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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19:24 2008/12/08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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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cked from | 2008/12/08 20:30 | DEL
[블레이드 러너 2007년 감독판] 에 관련된 글. 앞 포스팅에 썼듯이, 지난 금요일 망원동에서 SF영화보기 모임 첫번째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람이 많이 올 거라는 기대는 안하고, 그냥 장소 제공하는 단체 사람들이랑 본다 생각하고 시간을 잡았는데, 아 글쎄 막상 당일 되니 외근에, 출장에.. 낮 시간이라 다른 분들이 오기는 힘들고.. 홍보도 안하고 한지라 4명이 조촐하게 영화를 같이 봤습니다. 그나마 두 분은 끊임없는 전화와 일의 압박때문에 끝을 못
Tracked from | 2010/05/27 17:13 | DEL
얼마전 개봉한 영화 [로빈 후드]의 리뷰를 블로그에 올렸더니, 리들리 스콧의 감독판 DVD나 블루레이를 기다린다는 답글이 달렸다. 영화를 만드는 것은 감독인데, 왜 굳이 감독판이라고 하는 별도의 판본을 기대하게 되는 것일까? 실제로 DVD나 블루레이 등 부가판권시장에 출시된 영화들을 보면 디렉터스 컷(Director's cut)이라 불리는 감독판 영화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영화의 편집은 크게 세 단계로 나눠진다. 처음 작업이 스크립트에 나와있는..
momo 2013/09/06 20:28 URL EDIT REPLY
블레이드 러너 감독판 검색하다가 이곳에 왔습니다.
SF영화보기 모임 글이 있어서 반가운 마음에 읽어봤더니 꽤 오래전 이야기군요...^^
아쉽네요.글 잘 읽고 갑니다.
지각생 | 2013/10/17 17:35 URL EDIT
SF영화보기 모임은 언제든 다시 하고 싶습니다. 혹시 모임을 만드시게 되면 제게도 알려주시면 고맙겠습니다 ^^
오호 2015/09/09 17:41 URL EDIT REPLY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깊은 감상평에 감탄을 느끼게 되네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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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려줘

잡기장
징징 죽는 소리 연달아 하고 싶지 않아서 지난 주 금요일에 했던 "SF영화보기 모임"의 소개와 첫번째로 본 "블레이드 러너" 감독판(2007)을 본 소감을 쓰고 싶었는데,
오늘 회의 들어갔다 온 결과
이번 주까지 무조건 지금 만들던 걸 완성하고 매뉴얼까지 써 바쳐야하게 됐다.

그냥 배째기엔 연말 주머니 사정의 압박과 내년 재계약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일에 몰두하기엔 하고 싶은 얘길 쌓아둔건 삭아가고 썩어가고

다행히 4시간 열심히 일한 결과 진전이 있어서
얼릉 블레이드 러너 글쓰고, 앞 포스트와 거리를 좀 띄운다음
다시 우는 소리 한번 하고,
그리고는 일만 집중하면서 사람들의 덧글 위로나 혹 있을지 기대해야겠다.

그래도 어떻게 이번 주만 넘기면
생업이 주는 압박은 일단 벗어나니
혼자 처박혀 명상을 하던, 그동안 감정 쌓인 사람과 드잡이질을 하던, 아니면 휘릭 어디론가 떠나 잠적하다 오던 해서
마음을 좀 가라앉혀야지

주위 사람들에게 미안한 마음, 그만큼 내 스스로 원망스런 마음
이건 역시 생각을 고쳐먹는다고 될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지고 있는 짐을 좀 내려놓고, 홀가분하게 시간을 좀 보내서 여유를 찾아야 될 것 같다.

이 전 글을 통해 새삼 느끼는 것은, 연달아 글을 쓸때는 가능하면 밝은 글이 맨 나중에 오는게
이후 덜 민망하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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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2/08 17:57 2008/12/0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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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생의 마음

잡기장
요 며칠 몇가지 패턴을 살짝 바꿨더니 사람들의 걱정을 좀 샀다.

* 빈집2(윗집) 이사 바로 다음날부터 빈집을 나와 증산동 집에 와 있고
  전화 통화로 한 말도 "쉬고 싶다", "혼자 있고 싶다" 이랬고
* 가만히 있다가 정보통신활동가 메일링으로 까칠 메일을 보내고
* 사람들이 놀자 술먹자 해도 별로다 바쁘다며 마다하고
* 블로그도 갑자기 쓰는데 재개통 포스트가 아리송하고

직접 대하던 전화로 말하던 차분히 천천히 얘기하고 그랬더니
과연 뭔일이 있구나 라고 생각할 만했는 갑다.
내 스스로도.. "아 이렇게 말하면 요런 걸로 생각할 수도 있겄네" 싶지만
그냥 당분간 편하게 나오는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래도 빈집 사람들이 특히 걱정을 많이 하나보다 싶어 어제는 오해도 풀겸, 뭐 좀 챙기려 빈집에 들렀다. 역시나 다를까 "지심은 무엇인가?"를 화두로 한참 얘기를 했다고 한다. ㅋ 억측과 추측을 풀고 사라지기 전 못다한 얘기도 좀 하고는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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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요즘 좀 피곤했다.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요 몇달간 계속 이런 저런 일이 늘 있었고, 차분히 내 자신과 대화하거나, 사람들과 천천히 여유있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많지 않았다. 다양한 사람들이 거쳐가고 늘상 새로운 일이 일어나는 빈집에 있으면서 특히 에너지 소모가 많았다. 즐겁지 않아서가 아니라 즐거운게 너무 많고, 따라가고 몸을 맡기고 싶은 흐름이 많다보니 계속 나를 그 속에 던지며 쭉 흘러온 탓이다.

블로그를 한동안 안쓴 것도 여러가지 원인이 있지만 그런 "여유 없음"도 큰 몫 했다. 지각생은 원래 혼자 청승떨며 이리저리 노다니기를 즐기던 사람이었는데, 올해 들어서는 정말 혼자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다. 벌인 일은 많고, 조금이라도 더 붙들고 잘해보고 싶은 게 많아서 놓지 않고 있다보니 일은 일대로 내게 스트레스를 주고, 뭔가 하나 마치고 나면 피로와 허탈감이 몰려와 고생했다.

그 밖에는 내가 좋아했던 사람에 대한 미련이 생각보다 오래 남아 있어 힘들었고, 지금 좋아지고 있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마음의 문을 열지 못해 스스로 답답해 한다. 사실 다른 것보다 이 점이 나를 안에서 불태워 힘들어한다고 봐도 좋겠다. 이런 상태로 몇 달 지내다 보니 정말 안으로 밖으로 힘들었는데 그냥 저냥 지내왔다. 근데 더 이상 이러면 안되겠다 싶다.

뭐 그렇다고 용단을 내리고 과감히 뭔가를 정리하고, 착착 해결해 나가고 이런 성격도 아닌지라 상황이 금방 나아질리는 없다. 그래서 내게 휴가를 주기로 했다. 다만 빈집에 중요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어 조금만 더 에너지를 쏟기로 하고 버티다가, 지난 주 금요일 세미나 준비가 안돼서 한 주 미루게 되고, 주말에 빈집2 이사를 마친후 에너지가 일시적으로 똑 떨어졌다. 그래서 이번주 월요일 아침, 빈집에서 눈을 뜨고 결심했다. "휴가를 시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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흠. 원래 말하려던 것보다 또 늘어났다. -_-
휴가라기보단 "변화"를 준 거라고 말할 수 있다. 몇 주간 얼굴도 안 비친 집에 가서 안방에 컴퓨터 설치하고, 방 정리하고, 겨울 옷을 꺼냈다. 겨울 옷이래봤자 얼마 되지도 않는데 그나마 스타일이 영 아니다. 작년까지만 해도 그냥 별 신경 안쓰고 따시고 편하면 입었는데 올해는 좀 보게 된다. 아... 정말 이런 걸 입고 다녔었나. 에혀, 물론 늘 얻어 입다시피 하긴 했지만 조금 더 욕심 좀 낼걸. 이 글 보시는 분덜, 겨울 옷 안 입는 거 있으면 좀 주세요. (말 끝나기 무섭게 이렇게 말하다니 -_-)

한 이틀 정도 집과 직장만 왔다 갔다 했더니 이제야 "혼자 있던" 때의 마음이 살짝 되돌아 온 것 같다. 생각같아서는 한 달 정도는 더 혼자 있고, 일 좀 해놓고는 여행이라도 휙 다녀오면 좋겠다. 그저께는 용산에서 부품을 몇개 사고 오는데, 용산역에서 문득 바람이 불었다. 아.. 그냥 저 열차 아무거나 타고 어디론가 가버릴까. 잠깐 상상을 하고 보니, 내 손에 들고 있는 전자제품 부품이 산통을 깨놓는다. 늦가을에 훌쩍 떠나는 여행... 하지만 한 손엔 전자제품들이 담긴 비닐 봉지. 이건 좀 아닌 것 같다. -_- 담에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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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조용히 살았더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진 것도 같다. 물론 일하러 와서는 막 속도를 올려 이것저것 하니 다시 멍해지지만, 나머지 시간에는 그동안 하려다가 못한 것들이 하나씩 조용히 수면 위로 올라와 천천히 되짚으며 해결하곤 한다.
예전 만큼 쓸 수 있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불로그에 와서 "쓰기" 버튼도 여러번 누르게 되고.

아우... 이거 어느새 혼자 중얼중얼거리는 흐름에 내 손이 맡겨져 있네. 일단 시간이 많이 지났으니 어여 퇴근하자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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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11/27 20:39 2008/11/27 2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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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온 2008/11/27 21:52 URL EDIT REPLY
둘째 단락... 미투.
지각생 2008/11/28 01:01 URL EDIT REPLY
허허 디온도 좀 쉬시게.. 말이야 쉽지만
공룡 2008/11/28 09:39 URL EDIT REPLY
내 옷은 좀 안맞겠지? 그저 토닥...토닥... 물끄러미...
붕자 2008/11/28 12:08 URL EDIT REPLY
나도 안 입는 겨울옷 있는데..아쉽네요..==;;
지각 2008/11/28 12:58 URL EDIT REPLY
공룡// 그르게, 쬐끔 안 맞겠소 ㅋ
붕자// 이렇게 아쉬울 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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