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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07/01/30
    청년 시인 유진오(1)
    나은
  2. 2007/01/28
    마지막, 강진, 해남(3)
    나은
  3. 2007/01/27
    엿새째, 광주.(1)
    나은
  4. 2007/01/26
    닷새째, 담양.(1)
    나은
  5. 2007/01/26
    악몽(1)
    나은
  6. 2007/01/22
    넷째날, 정읍.
    나은
  7. 2007/01/18
    떠나는 오후
    나은
  8. 2007/01/18
    셋째날, 변산반도.
    나은
  9. 2007/01/18
    문득 접속통계를 보니
    나은
  10. 2007/01/17
    둘째날, 군산.(7)
    나은

청년 시인 유진오

  • 등록일
    2007/01/30 23:50
  • 수정일
    2007/01/30 23:50
김강사와 T교수를 쓴 유진오가 아니라
시인 유진오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청년 시인 유진오는 48년에 <창(窓)>이라는 시집을 냈는데 그 후기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시인이 되는 것은 바쁘지 않다.
먼저 철저한 민주주의자가 돼야겠다.
시는 그 다음에 써도 충분하다.
시인은 누구보다도 먼저 진정한 민중의 소리를 전하는 사람이어야 할 것이다.
투철한 민주주의자가 된다는 것은 인민을 위한 전사(戰士)가 되는 것이다.
나의 시다운 시는 금후의 과제이다."

라고 심정을 적어놓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시집은 지리산으로 떠나면서 출간한 것으로 보인다.

(남부군 中)


유진오

출생 연도 및 출생지 미상
1940년 초반에 일본 문화학원을 다님
1946년 김상훈 등과 함께 『전위시인집』 발간
조선문학가동맹에 참여하여 활동
1947년 빨치산 문화선전대로 지리산에 들어감
1949년 10월 군법 재판에서 사형 언도를 받은 후 감형되었으나,
그 이후 행적은 불분명함

시집 : 『전위시인집』(1946), 『창(窓)』(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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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강진, 해남

  • 등록일
    2007/01/28 11:57
  • 수정일
    2007/01/28 11:57
에이쒸!!!

한 시간 동안 썼는데, 날렸다!!!

"등록" 버튼을 누르고 나니깐 왜 아무 내용 없이 텅 빈 내용만 뜨는 것이야.
뒤로가기 몇 번 해 봐도 안 뜨네.
우엑우엑우엑.

아씨.
다시 쓰기 귀찮어.

일단 메모와 사진만 남긴다.
나중에 시간 나면, 혹은 땡기면 보완해야겠다...

<메모>

영랑생가. 관심없어 그저 그런
다산초당 옛길. 좋았다.
반찬이 다 김치라는 할아버지.
두륜산 옆자락을 넘고 넘어.
솔직히 힘들고. 1단 잘 안 내려가고. 빨리 가고픈데 시간도 쫓기고.
스트레스 ↑
그래도 소나무 우거진 북일 초교에서 김밥 한 줄 먹고 진정.
끝없이 오르락 내리락
지나치는 여행자, 인사 놓치다.
쇄노재 매점 아주머니.
귤2, 가구마5. 투어가이드.
자식들이 비슷한 또래.
부동산 얘기. 역사 이야기.
40분 앉아 놀다.
77번 도로 힘들더라.
땅끝.
버스.
7일 만에 엔진.
이상한 기분.
이렇게 빠를 수가.
이틀만에 160km 내려왔는데 정신이 없다. 뭐가 뭔지 모를.



영랑 생가.


영랑 생가.


영랑 생가.


강진에 청자 도요지가 있다나.


다산 초당가는 옛길


다산이 걷던 길을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이라 한다.


유배가 풀릴 것을 앞두고 새겼단다.
똑같이 돌에 새겨도 어떤건 문화재가 되고, 어떤건 자연훼손이 되고.




초당에서 몇 걸음 가면 나오는 정자에서. 바다가 보인다.


쉬어갔던 북일 초등학교.


동백꽃이 피려 하고 있었다.


쇄노재 매점, 그리고 아주머니.
여행 중 가장 길었던 대화.


겨울이 보는 파릇파릇함.


배추 수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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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새째, 광주.

  • 등록일
    2007/01/27 23:50
  • 수정일
    2007/01/27 23:50
찜질방에서 잤던 날 중 가장 잘 잤다.
수면실 시설도 매우 좋았고,
무엇보다 군산 찜질방의 경험을 살려 휴대용 귀마개를 미리 준비한 것이 압권이었다.
앞으로도 찜질방에선 얇은 상의 한 벌과 귀마개 정도면 매우 편안히 잘 잘 수 있을 것 같다.

오늘은 광주를 돌아보고, 부지런히 강진까지 가야 한다.
그동안은 하루에 6~70km 정도 탔지만 광주시내에서 망월동까지 갔다가 강진으로 가려면 사실상 거리는 100km가 넘는다.
시간이 부족하면 밤에도 잔차질을 해야 하는 거리다.

밤에 잔차질 하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아서 최대한 피하려고 했는데...
화요일에 전남 남해안 지방에 비가 온다고 한다.
비가 오는 것은 더 최악이다.

월요일에 땅끝에 닿기 위해 강진까지는 간다고 결심하게 된 것이다.
광주에서는 518관련지를 많이 돌아보고 싶었는데...
전남대와 망월동만 돌아보기로 결정했다.


전남대


뭐. 별 느낌 없었다.
정문은 그 때의 정문이 아니라 새로 지어진 정문이라고 하니.
'용지'라고 불리는 연못이 크고 좋아 보이더란 생각 밖에는...
학생회관에 한 번 가봤으면 좋겠다 싶긴 했는데 시간도 많지 않고 해서 금방 나왔다.


연못에서 노니는 오리들.
나 너네 좋아하는거 알잖아~


망월동



광주시내에서는 대따 멀다. 가는데 한 10km. 40분 넘게 걸렸다.
게다가 길도 안 좋고 차들도 많고 해서 좀 위험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쨌든 도착.

남들은 학교 다닐 때 가보곤 하더라만 나는 어쩐지 한 번도 와 보질 못했다.












거대한 국립묘지가 서 있었다.
이 묘지가 완공되면서, 어찌 보면 박제화되고 있는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잠깐 했다.
묘비 사이를 돌면서 여성들의 이름을 찾아 비문을 읽어 보았다.
그리고 윤상원 열사의 비석 앞에선 좀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대학 1학년때,
월간 노동해방문학에 실려 있던 윤상원 평전.
지금은 변절한 시인 박노해가 쓴 그 글을 읽고 나는 전율했다.
그 글을 읽은 후 나에게 518은 더이상 광주 민주화 운동이 아니라 광주노동자계급의 무장봉기였다.

그 후로 임철우의 장편소설 '봄날', 최윤의 '저기 소리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 '깃발' 등의 소설책을 쥐곤 했다. 어제 본 '오래된 정원'을 보면 518이 사람들을 싸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데 20여 년이 지났지만 나에게도 그러했다...

국립묘지를 돌아보고 사진전을 보면 수없이 봐 온 사진들을 감상했다.
여전히 가시지 않는 분노. 한편으로는 허탈함.
문득 다음에 연재되던 강풀의 만화 '그 후 20년'은 어떻게 끝났는지 모르겠다.
볼 만 했는데..

구묘역으로 갔다.
안 갔으면 큰 일 날 뻔 했다.
열사들이 쉬고 있는 곳.
이용석 열사의 묘소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용석 열사가 분신하던 그 장소에 나도 있었지.

집회가 끝나고 행진을 시작할 때쯤 뒷쪽에서 연기가 나길래 여느때처럼 유인물, 쓰레기 등을 모아 불을 피우나 했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람이었다.
그 때 전신이 뭐라 표현할 수 없는 느낌으로 물들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근로복지공단 진입을 위한 몸싸움라인에서 마주쳤던 1001들의 야수같은 폭력도.

그 날 집회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서 비정규직 노동자의 주최로 열린 첫 전국집회였다.
원래는 상징적인 몸싸움 정도를 계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날 모두는 그냥 그렇게 시늉만 하고 갈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 날은 그랬다.


구묘역에는 광주, 전남 지역이 고향인 열사들이 묻혀 있는 것 같았다.
87년 6월 항쟁의 상징인 이한열 열사도 있었고,
많은 학생 열사, 노동 열사들이 있었다.

한 학생 열사의 사연이 가슴에 남았다.
집회에 참가하기 위해 기차를 타고 가다 검문을 피하려 달리는 기차에서 뛰어내리다가 목숨을 잃은 한 학생.
너무나 어처구니 없어 보이는 죽음일 지 모르겠지만...

구묘역을 돌고 나니 다른 묘역들도 한 번씩 가 봐야겠단 생각이 들었다.
박일수 열사 장례식 때 가 보았던 양산 솥발산과 마석 모란공원에 가기로 마음먹었다.



남도 땅을 달리며

부지런히 광주 시내를 벗어나 나주를 지나 영암으로 향했다.
먼 거리. 만만치는 않았다.
중간 중간 쉬기도 하면서.



영암읍을 얼마 남기지 않은 고갯길에서 뜻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저수지가 내려다 보이는 곳에 왠 6.25 희생자 위령탑?


비문을 읽어보니 내용이 영 심상치 않다.
영암군 금정면 연보리.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지가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돌아와서 찾아보니 맞다.

전남 영암 보련학살
지역
전라남도, 영암군
1949년 결성된 '국민보도연맹(國民輔導聯盟)'의 취지는 과거 좌익 경력을 가진 사람이나 그 가족을 '도와서 올바른 데로 인도한다(輔導 또는 補導)' 였다. 하지만 당시 이승만 정권을 반대한 이들을 모두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켰고 또 지역에서는 할당된 수를 다 채우지 못하자 사상과 무관한 주민들을 대거 보도연맹원으로 가입시키는 상황이 발생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예비검속되어 학살되었으며 전국적으로 약 30만 명이 이렇게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보도연맹원과 함께 좌익 경력자 및 좌익 가족에 대한 예비검속으로 이들 또한 보도연맹원과 함께 모두 학살되었다. 예비검속 및 보도연맹원에 대한 학살은 이후 물고 물리는 보복학살의 시작이었다.

1950년 7월 13일(음력 5월 30일) 영암군 금정 덤재에서 경찰이 200-250명의 보도연맹원을 학살하였다. 전쟁이 발발하고 예비검속이 된 보도연맹원들이 며치 구금된 사이 경찰은 이들을 살리고 싶으면 돈을 가져오라 하여 갔더니 이미 보도연맹원들은 사라진 후였다. 당시 유족들은 학살지를 찾아 시신을 확인하였는데 한 구덩이에 5-6명씩 묻혀있었고 이런 구덩이가 40-50개 정도 되었다고 한다.

또 1950년 10월 17일(음력 9월 7일) 영암군 구림에서 경찰이 80여 명을, 1950년 12월 18일(음력 11월 10일) 영암군 연보리 차네골에서 군인이 161명을, 1951년 1월 2일 (음력 1950년 11월 25일) 영암군 구림에서 경찰이 12명을 빨치산 소탕과정에서 학살한 사건이 있다. 이 외에도 영암군 풀씨재 고개, 금정 남송리 등지에서도 학살이 있었다는 제보가 끊이지 않고 있다.
(자료 : http://www.genocide.or.kr/  )

그 외에도 찾아 보니 이런 자료가 있다.
http://www.dailian.co.kr/area/news/n_list.html?page=2&t_name=gj_news&sel=&search=&kind=mno&keys=3277&idx=&id=9807&room=&area=&sno=&sdate=

http://blog.naver.com/uuuau?Redirect=Log&logNo=40010166441
20세기 전반 동성마을 영보의 정치사회적 동향

특히 위 글을 읽어 보니
내가 넘어온 고개는 바로, 월출산을 배경으로 한 빨치산들의 활동 무대였던 것이다.

고갯마루를 넘으면 나오는 영보리라는 마을은,
좌익 인사들을 많이 배출한 곳으로 한때 '영암의 모스크바'로 불리기도 했단다.


고갯마루를 앞두고.











고갯마루에 서니 월출산과 탁 트인 남도 땅이 한 눈에 들어온다.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마주친 역사의 현장이었다.
예전에 사두고 읽지 않은 채 꽂아 둔 이태의 '남부군'이나 다시 봐야겠다.


한밤중에 강진으로

영암읍에 도착하니 이미 어두워졌다.
영암읍은 마치 죽어있는 도시처럼 조용하고 사람도 거의 없어 보이고..
문 연 식당도 별로 없어 보이고(내가 못 찾은 거겠지만)
겨우 고깃집 하나를 찾아서 들어가 밥을 안 먹고 고기나 한 번 시켜 먹어 보았다.
2인분은 시켰는데 혼자인지라 왠지 박대하는 분위기라 좀...;

술은 못 먹고 사이다로...

밥을 먹고는 캄캄한 밤길 30km를 달려가기로 결심했다. 중간에 터널도 하나 지나야 하고.
그리고 강진으로 가는 길.

처음 출발할 때는 바로 머리 위해 오리온 자리가 떠 있었다.
"오리온, 날 지켜줘~"

가끔씩 차들은 쌩쌩 지나갔지만
왠지 오싹한 느낌.
귀신 나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도 들고.

시가지가 아닌 곳은 정말 '캄캄'하다.
자전거로 긴 오르막을 오르는데 힘든 건 둘째치고,
 캄캄한데 멈춰 서 있는게 더 무서워서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결국 터널 하나를 지나고 부지런히 간 끝에 한 시간 반만에 강진읍 도착.
저 멀리 시가지 불빛들이 보이는데 어찌나 반갑던지~


터널 속의 환한 불빛 바로 옆에서 나는 잠시 쉴 수 있었다.
빛이 있고 없고에 따라 인간은 강해지기도 약해지기도 하는 것인지.


강진 진입.
이렇게 20인치 바퀴로 100km를 끊었다.
26인치 바퀴로 다닐 땐 100km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 같은데 ㅠ.ㅠ

찜질방은 없고,
여인숙은 못 찾고,
온돌 있는 모텔방을 찾아서 옷도 말리고, 씻기도 하고..
아무래도 너무 무리했나 보다. 오른쪽 허벅지가 찌릿찌릿 했으니.
자다가 다리에 쥐 나지 않을까 싶어서 문득 겁이 났다.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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닷새째, 담양.

  • 등록일
    2007/01/26 16:52
  • 수정일
    2007/01/26 16:52
여행 다섯번째 날. 목적지는 담양, 그리고 담양을 넘어 광주에 도착해 자는 것.
그런데 이날은 구경한 것보다 예닐곱 개의 고갯길을 넘었던 것이 더 기억에 남는다.

정읍에서 담양으로 갈 수 있는 코스는 두 가지.

장성으로 좀 돌아가거나, 내장산을 직접 넘어서 가거나, 내장산 옆을 돌아 순창을 걸쳐 담양으로 넘어가는 길.
전라도는 경상도에 비하면 정말정말 평야가 많지만,
전북에서 전남으로 넘어가는 길에는 노령산맥 줄기가 뻗어나와 내장산 자락이 떡 하니 버티고 있다.
 
아마 장성으로 돌아가는 길이 그나마 언덕이 좀 적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순창을 걸쳐 넘어가는 길을 택했다.

분명히 계획을 짤 때는 장성으로 가겠다고 마음 먹었는데,
왜 당일 아침에 코스를 바꿨는지 모를 일이다.

"1번 국도 타고 장성으로 가면 엄청 돌아가는 거야~"
라는 택시기사의 한 마디 때문이었을까.

내가 잤던 찜질방의 위치가 1번국도로 쪽으로 나가기에는 너무 내장산 쪽으로 치우쳐 있기 때문이었을까...

하여튼 이 날. 해가 아직 뜨지 않은 아침 7시 30분에 출발.
장장 다섯 시간 가까이 자전거를 타다가, 질질 끌고 가다가...;;
10km의 오르막과 10km의 내리막을 지나 겨우 담양에 도착했다.

하지만 담양에 도착한 것으로 고개 넘기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광주로 가기 위해 나는 그 날 무등산 자락도 넘어야 했으니깐...


처음 찜질방을 출발해 내장산을 향하는 드넓은 도로에서는 참으로 상쾌했다~
그러나. 담양으로 향하는 표지판과 함께 등장은 높다란 언덕길.
나는 이 길로 갔던 것이다.



고개 하나를 넘어 보니 저 앞에 더 큰 고개가 또 하나 보이고.
지도에서 M자로 꺾인 곳을 겨우 넘어 경계선을 넘으니 드디어 순창군이 나왔다.


내가 넘어온 길. 과연 오늘 안에 담양에 도착이나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저~ 밑의 평지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내장산이 거의 눈높이에 가까워졌다는 사실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날씨는 흐리고,
햇빛은 나지 않고,
언덕을 오르는 동안 몸과 옷은 흠뻑 땀에 젖은 상태.
길은 깨끗했지만 며칠 전에 내린 눈은 여전히 녹지 않고 곳곳에 쌓여 있었다.
8km가량의 긴 내리막을 내려오는 동안, 정말 추웠다.
싸구려 등산자켓은 땀을 자기가 흡수해서 다 머금고 있는고로 정말 얼어죽는 줄 알았다.


옷을 보니 이렇게 얼음이 얼었다.
이건.... 여의도에서 겨울에 물대포에나 맞았을 때나 봤던건데 헉.

한 시골 마을을 지나가는데 연기가 나고 있었다.
모닥불이 있나보다! 싶어서 달려가 보았더니

보기에는 따뜻한데 제대로 불을 쬘 수는 없을 정도.
이틀 전 격포에서의 그 커다란 장작불이 어찌나 그립던지.
솥 안에는 과연 뭐가 끓고 있었을까?

할 수 없이 몸을 녹이는 것도, 옷을 말리는 것도 실패하고 다시 달리다 보니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어느 교회 화장실에 들어가 옷을 싹 갈아 입었다. 그러니 조금 낫더만.

순창군 쌍치면을 지나 담양군으로 들어간다. 순창에서 담양을 넘는 경계도 고갯길이다.
아... 차 타면 금방인데 이 고생을 왜 내가 사서 하나 싶기도 하고...
그래도 큰 고개를 하나 넘어 담양이 가까워졌다는 생각에 조금씩 마음은 가벼워 진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
담양 가는 길. 원래는 개장 앞에 수많은 닭들이 뛰놀고 있었는데
사진 찍으려고 어물어물 하는 바람에 개장 뒤쪽으로 닭들이 다 숨었다.
고갯길을 넘느라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개그야의 "킬리만자로의 걔"가 생각나서 혼자 웃었다.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본다더니, 니가 '쳐다본다'냐?"
"아니다. 내 이름은 '닭 쫓던'이다. 너야말로 '쳐다본다'냐?"
"아니다. 내 이름은 '지붕'이다."
"그럼, 누가 '쳐다본다'냐~~~~~"
(정말 불쌍한 얼굴로 김완기가 등장한다)
"내가............. '쳐다본다'다..........."
그 다음엔 어떻게 했더라? ㅋㅋ

담양으로 접어드니 왼쪽에는 거대한 담양호가 나오고,
오른쪽으로는 전남5대 명산 중 하나라는 추월산이 나온다.
추월산 참 범상치 않게 생기긴 했다.


담양호. 전망좋은 곳에서 찍은 사진.


추월산 옆구리도 다시 넘어넘어 드디어 담양읍에 도착.
죽녹원에 도착했다. 작은 산등성이에 만들어진 대나무숲 공원 정도 된다고 할까?


죽녹원.
겨울이라 춥긴 했지만 도통 녹색을 보기 힘들었는데, 여기서는 마음껏 녹색을 즐길 수 있었다.

이게 바로 '운수대통'이란 건데. 여기에 동전을 던져 넣으면 소원이 이루어질 지 모른다나~
이건 '어린이용'이다.
그런데 어린이들의 꿈은 의사, 박사, 예술가밖에 없단 말인가~~


이건 어른용.
'대박' 뭐 이런 것도 있고. 나도 하나 던졌는데 '사랑'에 골인~ 음하하!

대나무숲 곳곳에 소풍 다녀간 고등학생들의 소원지를 매달아 두었다.
이거 보는게 참 재미있었다. 소원의 대부분은 '수능 대박' 고3애들이 왔다갔나 보다.






가끔 이런 애들이 있었다. 이건희 회장보다 부자가 되려면..
이건희 친척 정도는 되야 조금 가능성이라도 있을텐데?


캬. 멋지다.


우주 정복의 첫 관문은 수능이로군. 음..


응. 그래 뭘 기다렸니?


오늘의 베스트.

지구가 역자전 하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런지 ㅡ.ㅡ;
잠시 심각하게 고민해 보았다.
일단 지구가 거꾸로 돌면. 해가 서쪽에서 뜨겠네? +.+
그리고 계절풍, 무역풍 따위의 방향이 바뀌면... 기후가 달라지나...?
아 그러면 기후재앙이 생길 수도 있고 혹시 세계의 평화가 깨지는 것을 아닐까.
나 원 참.












죽녹원은 괜찮았다.

관방제림도 둘러 보고 메타세퀘이어 길도 둘러 보았다.
생각보단... 역시 가을에 왔어야 했나.
그래도 담양 읍내를 흐르는 천변은 잘 가꾸어 놓았다.






담양읍내 김밥천국을 찾아 밥을 먹었다.
다음 목적지는 소쇄원. 지도가 있었지만 그냥 현지 사람에게 말도 붙일 겸 식당 아저씨한테 물어봤더니 한 번도 못 가봤다면서 잘 모르더라.
아저씨도 내가 신기했는지 이것저것 물어 보길래 잠시 얘기를 나누었다.
사실 자기는 연중무휴로 식당을 해야 해서 어디 놀러가거나 할 여가가 없다고.
왠지 말 속에 아쉬움이 배어 있는 듯했다. 그러고 보니 괜히 물어본 것 같아 미안하기도 했다.

이제 담양과 광주의 경계 쯤에 있는 이른바 '가사문학문화권'의 중심지인 소쇄원으로 출발.
지나다 보니 광주호가 나온다. 참 곳곳에 인공호수가 많다.


먼저 도착한 곳은 식영정. 여기가 참 경치가 좋았다. 광주호를 내려다 볼 수도 있고.










반면.
유홍준의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나온 소쇄원. 한국식 전통정원이라는데.
솔직히 1000원 내고 들어간 것 치고는 대실망.
겨울이라서 그랬나. 아니면 해 지기 직전이어 햇빛이 없어서 그랬나.
무슨 수해 당한지 얼마 안 된 것 같은 그런 기분. 어차피 건전지가 다 돼서 사진도 얼마 못 찍었다만. 하여튼...


소쇄원을 나오니 해가 다 졌다.
이제 광주 시내로 들어가 잘 곳을 찾아야 했다.
소쇄원 쪽에서 광주로 가는 길은 두 개. 대체로 평탄하지만 거의 'ㄱ'자로 돌아가는 코스가 있고, 무등산 자락을 넘어 거의 직선으로 가는 코스가 있다.
또 살짝 주유소 아저씨한테 물었더니 얼마 안 걸린단다. 자전거로 20분이면 된다나.
설마... 20분은 아니고 3~40분은 되겠지 하고 속으로 생각했다.
마침 세부적인 지도가 없었다. ㅡ.ㅡ 그 부분만.

주유소 아저씨 말을 믿는 바람에 나는 또 캄캄한 밤에 두 개의 고개를 넘어 한시간 반만에 광주 시내로 들어설 수 있었다. 쌩쌩 달리는 차들을 욕하면서.
에휴~


두번째 고갯마루에서 만난 광주 시내 야경.
어찌나 반갑던지-

시내에 들어가 저녁은 대충 때우고.
찜질방을 찾았다. 광주 시내 굴지의 찜질방. 마침 토요일 밤이어서인지 진가 수백 명이 복작복작하고 있었다.
과연 잘 잘 수 있을까...

자기 전에 내일 코스를 점검했다.
이왕 가는 거 땅끝까지 간다. 그러면 내일은 무조건 강진읍까지 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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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몽

  • 등록일
    2007/01/26 12:08
  • 수정일
    2007/01/26 12:08

요즘 평균 수면 시간 9시간. ㅡ.ㅡ;

 

나에게 2007년은 보람차고 희망찬 새해가 아니다.

며칠 전에 현역에 있는 후배녀석이 전화를 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고 했다.

녀석이 "형도 새해 복 많이 받아~ 어? 근데 형은 올해 복 받을 일이 없잖아~~~"

하고 놀린다.

 

1월이 거의 지나가고 짧디짧은 2월이 다가오는 요즘

나는 이중의 압박 속에 시간을 허비 중이다.

 

하나는 왜 내가 지금 활동도 못하고 백수짓을 하고 있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

또 하나는 대체 나는 과연 앞으로 어떻게 될까 하는 조바심.

 

다름 사람들과 다르게 내가 너무 오버하는 것은 아닌지,

과대망상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닌지도 의심해 보는 요즘이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엔 급기야 개꿈같은 악몽을 꾸었다.

이게 뭐냐! 이게! 으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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넷째날, 정읍.

  • 등록일
    2007/01/22 11:13
  • 수정일
    2007/01/22 11:13
동학농민혁명의 중심지로


부안군을 벗어나 정읍시로 들어섰다.
어느덧 도착한 고부면. 조선 시대에는 호남의 제일 핵심도시는 전주였고, 고부는 그 다음이었다고 한다. 일제에 의해 의도적으로 고부는 일개 면으로 전락했다나.



무엇보다 배가 고파 식당에 들렀다.
국밥 하나를 시켰는데 반찬도 푸짐하다.
결코 김밥**에서는 접할 수 없는 반찬들. 근거없는 느낌인데 전라도 식당들은 대체로 반찬이 푸짐한 듯 싶다.















식당 옆에는 고부초등학교와 고부관아터가 있다.
고부관아터에 고부초등학교가 들어서 있어서 실제 모습을 볼 수는 없다.



개교 백주년이라 허허


고부면에서 이제 황토현 전적지로 간다.
고부군수 조병갑의 학정에 농민들이 최초로 봉기한 후 관군과 붙어 대승을 거둔 곳.

황토현 전적지


기념탑이 서 있는 곳에서 내려다 본 드넓은 들판


전봉준 동상










제 1 주동자가 누구인지를 밝히지 않기 위해 주모자들의 이름을 원을 따라 둥글게 썼다고 한다.

텅 빈 기념관에서 그래도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고,
역시 교과서적이지만 자료 설명도 꼼꼼하게 잘 되어 있었다.
생각해 보니 동학농민군이 설치했던 집강소는 일종의 소비에트와 유사한 성격의 인민자치기구 아니었을까.

재미있는 것은 동학농민혁명의 의의를 죽 서술하면서 이것이 90년대 민족자주운동으로까지 연결된다고 설명했던 부분. 왠지 모를 '입장'이 느껴져서였는지도^^

텅 빈 황토현 전적지 기념관을 혼자서 고즈넉이 둘러보다
바로 옆에 새로 멀끔히 지어진 동학농민혁명기념관에 들렀다.
박물관 같은 곳. 시설도 잘 되어 있고. 특이한 것은 19~20세기 세계 각 국의 민중운동에 대해서도 간략히 전시해 놓았다는 것.


요 기념관이랑 황토현 전적지랑 묶어서 거대한 기념공원을 조성하는 중이었다.
관광수입을 만들기 위해서 참 노력하는 지자체라-

멀지 않은 곳에 전봉준 생가가 있지만 자전거로 가기엔 너무 멀어서 바로 정읍시내로 직행했다.

호남선 철도와 호남고속도로를 넘어서 정읍시내로 진입.

여기를 작년에 몇 번은 지나다녔겠지.
만약 자동차로 다녔더라면,
나는 목적한 곳에 몇 배는 빨리, 쉽게 도달할 수 있었겠지.
그래도 나는 내 다리 힘으로 두 바퀴로 내가 살고 있는 이 땅을 누빈다는게 자랑스러워.

정읍에선 오랜만에 피씨방에 한 3시간 들어앉아서 이것저것 들어가 보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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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오후

  • 등록일
    2007/01/18 20:55
  • 수정일
    2007/01/18 20:55


짐을 다 꾸리고 떠날 채비를 하던 어느 오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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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 변산반도.

  • 등록일
    2007/01/18 18:59
  • 수정일
    2007/01/18 18:59
잠을 잘 못 자서 컨디션은 축 쳐졌다.
찜질방 락커에서 옷을 꺼내 보니 다들 축축하다. 하긴, 이 비좁고 밀폐된 락커 속에서 마를 새가 없었겠지. 찜질방 안에서 먹은 미역국은 맛도 양도 별로였다.

밖으로 나와 시 외곽으로 빠져 나가려는데 또 길을 몰라 좀 헤맸다.
결국 타야 하는 도로를 잡아타고 페달질을 하는데
영 컨디션이 시원치 않다.

아니 그것보다 더 갑갑한 것은 지도가 제대로 맞지 않는다는 것.
내가 지금 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 것 같기는 한데 지도상으로는 분명하지가 않다는 게 문제였다.
자전거를 타고 천천히 가는 할아버지께 지도를 보여주며 지금 이 길이 지도상의 이 길이 맞냐고 여쭈었더니
"이 길은 김제 가는 길이여~ (지도 이런건) 난 몰러~."

방향은 대충 맞게 잡았나보다 싶어서 일단 갔다.
(나중에 보니 지도가 너무 앞서 나간(?) 지도였다;)

군산에서 김제로 가는 길. 만경강과 동진강 유역.
여기야말로 진정한 '평야'인 듯  했다.
뿌옇게 안개가 끼어 있으면서도 지평선 저 아득히에는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가끔씩 '지평선축제'라는 현판이 있는 걸 보니 정말 여기가 평야이긴 평야인 것 같다.

도무지 힘이 안 나는 것은 밥을 덜 먹었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결국 중간의 한 식당에 들어가 이른 점심을 먹었다.
김치찌개. 반찬들도 맛있었구. 왠지 힘이 났다.
그래서 다시 열심히 부안을 향해 페달질.
가는 길 도중, 전깃줄 위에 까마귀떼 수십 마리가 앉아 있었다.



새만금. 거대한 프로젝트.

여차저차 하여 드디어 변산반도로 진입.
바닷가와 만나기 시작하자마자 '새만금'이 눈에 들어온다.



총 33km의 방조제를 연결해서 갯벌을 메우고 땅을 늘린다는 간척사업.
어민들의 반대시위도 있었지만 이제는 물막이는 일단 다 끝난 상황.
전국지도를 펼쳐 놓고 보면 정말 엄청나다.
오죽하면 세계 최대 길이의 방조제라고 할 정도니...



하지만 여전히 생태운동의 반대도 이어지고 있는 듯 했다.
새만금 가까이 다가가다 보면 한 해변에는 이렇게 갯벌을 살리려는 염원이 자리잡고 있다.







문득 저 넓게 조성된 토지는 누구의 소유가 될까 싶었다.
새만금 개발은 농지 확보, 용수 확보, 관광 산업 개발 등 다양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만약 저기에 농지가 생긴다면 그 주인은 누구일까. 새로 생기는 저 넓은 땅은 과연 누구의 이익이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들이 지나갔다.

이 땅의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농업을 희생시키겠다는 방향인 것 같은데 농지 확보가 목적이라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하나.

밤에 TV를 보니 전북지역 발전을 위한 TV토론회를 하고 있었다. 전북도지사가 나와서 새만금 개발 완료가 1차 과제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토론회에 나와서 늘어놓은 내용들이란 철저히 경제발전을 위해 자본가들의 요구와 이해를 담은 것들이었으니 말 다 했지. 전북도청 미화원 해고자들이나 빨리 복직시켜라.


격포에서. 낙조


변산반도의 낙조가 전국에서 손꼽히는 절경이란 소리에 서둘러 격포항으로 향했다.
채석강과 적벽강 같은 명승지와 해수욕장, 항구가 어우러진 격포.
다행히 늦지 않게 도착했고 멋진 일몰을 감상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해가 완전히 지는 시점엔 오히려 이렇게 되더군.


파도와 바람이 만들어 낸,
인간의 능력으로는 만들어 내지 못할 절벽



간조 때는 그 모습을 드러내고, 만조 때는 모습을 감춘다.
이 곳에도 누가 이렇게 귀여운 돌탑을...^^

여기가 채석강. 다음 날 아침에 다시 돌아보았다. 그 전 날 나는 채석강인 줄 알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채석강이 아니었더라구 ㅡㅡ;

저 겹겹이 쌓인 지층(?) 사이에는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잠들어 있을런지.


해식동굴들.


어느덧 깜깜한 가운데 가방 속에서 차가운 김밥으로 저녁을 대신한다.
하루종일 흘린 땀을 싸구려 등산자켓은 고스란히 품고 있다.
춥다. 춥다. 사람들이 겨울에 자전거로 다니면 춥지 않냐고 하는데 솔직히 하나도 안 춥다.
땀 나서 덥다. 그렇지만 몸을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을 때, 옷이 다 젖었을 때부터는 감기 걸리기 쉽상이다.

그 때 우연히 발견한, 해변가 수퍼마켓에서 각종 나무 쓰레기들을 태우는 불길 하나를 발견!
어찌나 반갑던지. 여기서 한 시간 동안 붙어 있으면서 옷을 다 말렸다.

열심히 옷을 말리고 있으니 역시 관광객 여러 무리가 잠깐씩 불을 쬐고 간다.
걔 중 한 젊은 커플. 둘이서 자알 놀다가 남자가 말을 건다.
자전거로 여행 중이냐고. 그래서 이런저런 얘기 나누고, 사는 데가 어딘지도 물어보고..
그 남자는 자기도 해보고 싶었는데 마음 뿐이라며 자전거로 여행하는 것 정말 멋있다고 했다. 한 번도 아니고 연거푸, 박수까지 치면서. 이거, 너무 민망하잖아?

방 하나를 잡고, TV를 틀어놓고, 짐 정리를 하고(쓸데 없는 것들 너무 많이 가져와서 무거워 죽겠어~ 하고 투덜대면서-)... 그리곤 팩소주 하나를 까 먹고는 해롱해롱한 상태로 잤다.
밤에는 대체로 심심하다. 이번이 두 번째 음주였다. 첫 날 밤엔 맥주 한 캔.


오르락 내리락, 바닷가를 돌아 변산반도를 나온다.

다음 날 아침.
격포를 떠난다.
배를 타고 위도로 들어가도 좋을텐데, 조금은 아쉽다.

격포항.



바닷가를 따라 모항, 곰소를 지나 변산반도를 빠져 나간다.
격포까지 올 때와는 다르게 끊임없는 오르막과 내리막. 서울 남산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경치 하나는 멋있었지만, 힘들긴 힘들었다.

그래도 페달을 밟으면서 이리저리 스쳐가는 생각들.
지난 날의 활동에 대한 반성. 떠난 사람들에 대한 소회.
앞으로의 계획과 결심. 한편으로는 불안감.
인간관계에 대해서.. 사랑과 연애에 대해서..


여기가 솔섬. 낙조가 멋져 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지.



고갯마루의 바닷가가 내려다 보이는 경치좋은 곳이면 항상 이런 가게들이 자리잡고 있다.
시야를 가로막으면서.
가게 안에 들어가면 바다가 보인다.
여행객의 입장에서는 좋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가건물들이 답답해 보이지만,
다들 먹고 살려는 것 때문 아닌가.
자본주의가 아닌 다른 세상이라면, 관광지에서 느끼는 불편함과 답답함도 덜어질 수 있을런지?





중간에 내소사가 나오는데 지난 번에 청평사에 한 번 가 본 이후론 절에 대한 관심이 떨어져서... 그냥 패스.
곰소란 곳이 나온다.
여기는 염전이 있고, 젓갈이 유명한가 보다.

곰소 염전.





이제 바닷가와 멀어지는 지점에서 어느 학교 안에 들어가 잠깐 쉬었다.
학교 정문 바로 안에 세워져 있는 비석.
"꿈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멋지다. 그래. 학창시절은 우울하기도 했지만 한편 막연히 희망을 그리기도 했었지.
운동 현실은 어렵지만
꿈을 가진 모든 이들은 길을 만들어 가고 있다.

원래 넷째 날의 계획은 변산반도를 빠져 나와 곧바로 담양으로 직행하는 것.
꽤 먼 거리이므로 해 지기 전에 담양읍에 도착하는 게 원래의 계획이었다.
하지만 첫날 공주 우금치에 들린 탓에 일정은 바뀌었다.
지도 상에 나와 있는 동학 전적지와 동학혁명기념관을 둘러보기 위해
나는 정읍으로 목표를 바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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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접속통계를 보니

  • 등록일
    2007/01/18 10:27
  • 수정일
    2007/01/18 10:27
2004년 9월 12일부터 오늘까지는 859일.
총방문자수 75764명을 859로 나누면 약 88이 나온다.
그럼 평균적으로 하루에 88명이나 들렀다는 얘기인가?
음.. 많다 정말. 내가 들어온 걸 빼도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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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날, 군산.

  • 등록일
    2007/01/17 16:36
  • 수정일
    2007/01/17 16:36
따사로운 연못.

아침에 가뿐하게 다시 궁남지를 방문했다.
역시 좋은 풍경.
7일 간의 여행 중에 어쨌든 가장 멋진 풍경이었음에 틀림없다.
연못 한 가운데 누각에서 주안상(?)을 차려놓고 잔치 한 번 했으면 딱 좋겠구만...






이른 아침이어서인지 미화원인 듯한 할머니 한 분께서 청소를 하고 계셨다.
"수고하십니다." 한 마디 건네고...


낯설지 않은 풍경.


서둘러 군산을 향해 빠져 나간다.
부여군청 앞을 지나는데, 트랙터를 비롯한 대형 농기계들의 도열.
농기계들마다 노오란 깃발이 꽂혀 있다.
"한미FTA반대" 그리고 곳곳엔 형사와 경찰들이 분주하다.
군청 앞에서 집회가 있는 모양이다.









부여읍을 빠져 나가는 다리께에서는 아예 경찰이 검문을 하고 있다.
읍내로 들어오는 트럭이나 봉고 등은 모조리 세워서 행선지를 묻는 작태.

여행 내내 농촌 마을 어디에서나 한미FTA협상 반대 현수막 없는 곳이 없었다.
다리를 건널 때면 난간에 한미FTA협상 반대 깃발이 휘날리지 않는 곳이 없었다.

일각에서 얘기하듯이 고부가가치 농업 중심으로 개편하면 농민들이 살 길이 열릴까?
아니... 어쩌면 농민들의 고통은 농산물을 '상품'으로 거래하는 시대에서는 끝없이 지속될 지도 모를 것.


군산 가는 길.

잠시 금강을 뒤로 하고 산길로 접어 들었다.
지도 상으로는 강 따라 가는 길이 둘러 가기에 조금 더 직선으로 가보겠다고 택한 길.
그러나, 언덕을 하나 넘고, 두 번째 언덕부터는 힘들어서 자전거를 끌고 가기도 여러 번.
언덕 두 개를 넘고 나니 앞으로 모든 길이 언덕처럼 보인다.
하지만 돌아보니 이건 아무 것도 아니었다...

달리는 중간에 먹을 물이 모자라면, 주유소에 들려서 물을 얻었다.
대체로 관대하다. 물 좀 받을 수 있냐고 물었더니 타이어 펑크 날 만큼 실어가란다.^^
물 마시고 숨 좀 돌리고, 다시 페달을 밟아 도착한 금강 변의 작은 마을.
강이 한 눈에 보이는 곳에 작은 쉼터가 마련되어 있길래 김밥으로 점심을 때웠다.
강을 따라 달리면 마음이 푸근해지는 기분이다.

지금까지는 강을 왼쪽에 두고 달렸는데 이제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에 두고 달리게 된다.
웅포대교를 건넌다. 다리 건너기 전 AI로 인한 소독 기구들이 장치되어 있다.
하지만 철저히 방역이 되는 것 같지는 않던데..

드디어, 충남에서 전북으로 넘어가는구나-

여기서부터는 금강하구둑까지 한참을 달려야 한다.
금강하구둑 주변은 철새도래지인데, 철이 아니어서인지 많이 보진 못했다.
그래도 몇 백 마리 정도는 남아 있던데 참 신기하더라..



금강변에서-


금강 하구둑.


금강하구둑을 지나, 군산으로 들어가는 길. 갯벌...

금강하구둑을 지나면 강인지 바다인지 모를 길을 따라간다.
거기에 "채만식 문학관"이 서 있다.
지난 여름에 우연히 들러봤던 곳.

지도를 얻으려 들렸는데 중년의 여성해설사 분이 참 친절하게 설명해 주신다.
어디서 자면 되는지, 어디를 둘러 보면 되는지 조목조목.
자기 대학생 아들도 자전거 매니아라면서 정말 호의적인 태도.
긴 얘기를 나누지는 못해도 이런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는 게 어찌보면 여행의 매력은 아닐까.
어디를 둘러볼지 설명을 주욱 듣고 다시 출발해서 처음 도착한 곳은
구암동 철길.


군산 시내.

구암동 철길이 특이한 것은 철로와 주택들이 바로 붙어 있다는 것.
이 때문에 영화 배경으로도 많이 쓰였고, 사진작가들도 많이 찾는 곳이란다.
내가 찾았을 땐 뭐랄까... 고단함이랄까... 수 마리의 개들이 개집에 묶여 있었는데 왠지 불쌍해 보이는 녀석들. 어쨌든 달동네 비슷한 느낌을 받았단 얘기지.




바로 옆에는 번듯한 아파트들이 서 있다.
이 곳을 지나는 사람들은 매일매일 '기적'을 바라는 것인가.
(저 '기적' 표시판은 아마 기차가 기적을 울리란 뜻인 듯)


군산항, 수탈의 관문.

군산에는 일제가 조선을 수탈하던 시대의 유적(?) 등이 많이 남아 있다고 한다.
군산항에도 그런 것들이 남아 있다.
호남의 곡창지대에서 나오는 수많은 미곡을 군산항을 통해서 빼내 갔다.


군산 내항 근처...


개항 100주년 기념 광장 한 켠의 그래피티. 철거직전인 건물 외벽.


일제 시대에 만들어진 세관.


부잠교. 군산항은 조수 간만의 차이가 커서 다리가 물 위에 떠 있다시피 하다. 이것도 아무 때나 쌀을 실어 가려고 만든 거라는데. 옛날에 만든 것은 아닌 듯 하고 새로 설치한 것 같다.
아, 그리고  '타짜'를 바로 이 군산항에서 찍었다 하던데?
마지막 혈투를 벌이는 도박판 말이다.


해망굴. 군상항 바로 옆에는 산이 하나 떡 버티고 있다.
일제 시대때 미곡 운반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시내에서 군산항으로 바로 연결되는 굴을 뚫었다.


해망굴까지 보고 나니 배고파 죽을 지경.
아까 지나다 보니 "우리는 짬뽕을 자신있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현수막을 걸어둔 중국집을 본 것 같았다. 왠지 짬뽕이 매우 땡겨서 다시 뱅글뱅글 돌아 그 집을 찾았다.
그리곤 짬뽕을 시켰는데,
역시. 과연.
이것이 바로 바지락 짬뽕.

큼직큼직한 바지락이 짬뽕 그릇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조갯살 떼어먹는 재미가 솔찬하다.
다른 해물은 없고 온리 바지락. 그래도 맛있더라. 밥까지 하나 시켜서 말아먹었다.

밥을 먹고 군산항 옆에 있는 월명공원에 오르니 군산항과 시내가 눈에 들어온다.
공원 꼭대기에는 도시를 지킨다는 뜻의 수시탑이 조명을 내뿜고 있었다.



군산저수지도 돌아보고,
길을 물어물어 찜질방을 찾았다.
군산안내지도는 대략적인 위치만 나와 있고 구체적인 길 안내가 안 되어 있어 영 애먹었다.
은파유원지에도 가 보았는데, 마침 조명이 꺼지는 시간이어서 김 샘.



군산도 점점 성장하고 있는 도시다.
자동차 부품산업을 중심으로 해서...
KM&I동지들은 잘 있으려나.
사실 아쉬운 투쟁이었는데.

부여에서 군산까지 약 50여 km.
군산 시내에서 돌아다닌 것만해도 15km는 될 게다.
피곤한 몸을 누이러 찜질방으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BUT.
미친듯이 코를 고는 아저씨 등장.
상상을 초월하는 소리. 슬그머니 살인충동까지 느껴졌다.
휴대용 귀마개를 깜빡 잊다니!! 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수면실에서 나와서 찜질방 공용공간에서 아무렇게나 누웠다.
결과적으로 그 날은 영 잘 못 잤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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