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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어제 먹은 술이 덜 깼다.  술이 덜 깰 때마다 문득 문득 드는 생각, 누구에게나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면서 나에겐 있었나.  열무가 제 꽃을 피워 나비에게 쉴 곳을 내어주듯...  그래서 나는 문태준 시인의 시 ‘극빈’을 찾는다.  술이 덜 깰 때 한 번 씩...


             극빈 / 문태준

    열무를 심어놓고 게을러

    뿌리를 놓치고 줄기를 놓치고

    가까스로 꽃을 얻었다 공중에

    흰 열무꽃이 파다하다

    채소밭에 꽃밭을 가꾸었느냐

    사람들은 묻고 나는 망설이는데

    그 문답 끝에 나비 하나가

    나비가 데려온 또 하나의 나비가

    흰 열무꽃잎 같은 나비 떼가

    흰 열무꽃에 내려앉는 것이었다

    가녀린 발을 딛고

    3초씩 5초씩 짧게 짧게 혹은

    그네들에겐 보다 느슨한 시간 동안

    날개를 접고 바람을 잠재우고

    편편하게 앉아 있는 것이었다

    설핏설핏 선잠이 드는 것만 같았다

    발 딛고 쉬라고 내줄 곳이

    선잠 들라고 내준 무릎이

    살아오는 동안 나에겐 없었다

    내 열무밭은 꽃밭이지만

    나는 비로소 나비에게 꽃마저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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