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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죽노동인권센터 소식지 제2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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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했습니다.

 


고용지원센터 앞에서 최저임금 선전전 계속하고 있습니다. 김남균사무국장은 교육을 받기위해 준비하고 있는 노동자들 앞에 섭니다. 실업급여를 받기위해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노동자들 앞에 섭니다. “민주노총이 잘못한 것이 많습니다.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뼈아픈 반성을 하며 이제라도 여러분과 함께 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호죽노동인권센터는 민주노총이 이런 의지를 담아 노동자들을 위한 무료법률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언제라도 방문하시면 ..... 감사합니다.” 짝짝짝...  

“잘못했습니다.” 잘못했으니 잘못했다고 하는 것이겠지만, ‘무료법률지원이니, 당신들과 함께하겠다느니’ 하는 말보다는 진심으로 잘못을 인정하는, 부끄럽다고 하는 그이의 말에 박수를 보낸 것이려니 생각합니다. “그래, 자식! 잘해봐!” 하는 ....

이번 노동절에는 실업노동자와 함께 합니다. 비명같이 외쳐봅시다.
실업급여 수급기간 연장! 수급대상 확대! 실업부조 도입!

                                                                              호죽노동인권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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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죽노동인권센터의 활동현황 4월 9일부터 4월 23일까지>

 

호죽노동인권센터 활동보고

1. 상담 중 특기사항
① **사업장 노동자들의 노동조합 설립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법률지원하고 있습니다.
② **노동조합이 소속사업장 외주업체 노동자들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외주업체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을 위하여 사측 및 외주업체와
   접촉하고 있습니다. 센터에서는 법적인 검토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③ 괴산에 소재한 **식품이라는 김치공장.  매일 30분의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토요일 3시간의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건으로 상담.
④ **복지시설이 운영하는 장애인 작업장 사례입니다.  
   70~80명 근무.  2007년 노사협의회 구성.  피상담자는 정년퇴직함.  
   남성노동자가 같은 장애인인 여성노동자에게 극도의 폭언을 퍼부어 분을 못 이긴채
   작업 중 쓰러짐.  치료받은지 3주 째이나 말을 크게 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임.  
   현재 산재 신청 중이나 더 나아가서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질의함.
⑤ 회사가 어렵다는 이유로 3월 임금을 삭감함.  나중에 경기가 좋아지면 주겠다는
   구두 약속을 하고 동의서에 사인을 해 달라고 하여 삭감 동의 사인을 해줌.  
   이 30% 삭감분을 추후라도 받을 수 있는지 궁금하여 상담함.
⑥ **금고 부당해고판정서 도착. 절차상 하자 인정하고 사유는 평가 유보
   (매우 특이한 판정서임. 사유의 평가를 유보한 판정은 흔치 않음),추후 다시 해고우려.
⑦ **학원에서 15년이상 총장 개인기사와 미화원으로 근무하던 중 계약기간만료로
   해고당하여 상담. 연차수당, 연장근로수당, 해고예고수당 청구.
⑧ 4월 상담은 해고/인사관련 상담 및 임금체불 상담이 많았습니다.

* 정식품,LG화학,코스모링크,우진교통(주),가자투어 등 노동조합의 현안문제 법률지원.

 4) 상담 및 법률지원활동 현황
 ① 연** 부당해고구제신청 이유서 준비 - 취하 - 재접수 예정
 ② 한** 부당해고구제신청 재심 답변서 1, 2 제출/4.28 15:00 심문회의 예정
 ③ 전** (**운수) 부당해고구제신청 심문회의 - 화해
 ④ 김** (**요양원)부당징계구제신청 출석조사 - 심문회의 예정
 ⑤ 변** 외 (주성대) 임금사건 지원
 ⑥ 김** 임금사건 진정 (최저임금 홍보활동 중 상담)
 ⑦ 원** 임금사건 진정 (도산인정신청 및 체당금신청 지원예정)
 ⑧ **환경 임금 검토
 ⑨ 정** 외 임금사건 출석조사 (충주노동부)
 ⑩ **센터 일용직노동자 인권문제 상담
 ⑪ **고속 - 대의원선거 이후 구제신청 취하, 노조합병결의, 후원관계는 계속,
    추후 중요사안에 대한 상담 및 논의구조는 이어가기로 함  

 6) 노동인권활동
  ① KT공대위 - KT본사 선전전 (화,금 출근시간),4.28 기자회견,심문회의 참관
  ② 최저임금 선전전 - 고용지원센터(월, 수, 금) 13:00
  ③ 청주여성인력개발센터 노동법 교육, 파업학교 노동법 교육
  ④ 충청타임즈 등 상담글 기고 및 소식지 발송
  ⑤ 충남노동인권센터 방문 - 노동인권활동 방향에 대한 토론
  ⑥ 전략조직화연석회의 - 희망터(현정희분과장) 사례발표 및
      공공서비스 전략조직화 계획 검토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은
...... 고통입니다.
땀을 흘릴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되는 것은
...... 죄악입니다.

  한아름 흘린 눈물

 

 
                                                 민주노총충북지역본부 대외협력부장 김기연

23살. 한창 겉멋을 부릴 나이. 메뉴큐어와 마스카라를 바르는 것을 넘어 어느덧 화장법의 달인으로 등극할 나이. 꿈의 나래를 한창 펼쳐야 할 그 나이에 그녀는 절망과의 사투를 벌이고 있다.

그녀는 지난 4월 10일. 청와대 앞 청운동사무소에서 애지중지하던 그녀의 머리를 내놓았다. 어깨를 덮을 정도로 치렁치렁한 그녀의 생머리는 성큼성큼 잘려나갔다.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차마 볼 수 없어 고개를 떨군 그녀의 눈엔 눈물이 떨어졌다. 눈물길에 따라 번져 흐르는 검은 마스카라로 얼룩진 그녀의 얼굴. 그녀는 이제 23살의 대학생 ‘한아름’ 양이다.

‘취업성형’까지 마다하지 않는 시대에 한아름 양은 민둥머리를 택했다. “이제 4월의 반 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5명이 죽었다.” 4월 21일 방영된 PD수첩 <대학가면 개고생이다>편의 인터뷰 내용이다. 그녀는 말한다. “좀 허전하고 춥기는 하지만, 내가 자른 것은 머리카락이 아니다. 내 자신을 버린 것도 아니다. 정말 해결되었으면 좋겠다. 지금 내가 잘라내고 있는 건 이명박 정부에게 걸었던, 정말 서민을 위할 거구 민주적으로 나를 운영할 거라는 실낱같은 믿음과 기대였다.”

‘1,000만원 등록금 잔혹사’는 ‘말죽거리 잔혹사’와 비할 바가 아니다. 그녀의 말마따나 올해 벌써 5명이 스스로 숨줄을 끊었다. 살아있는 대학생들도 ‘이건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라며 아우성치고 있다. 지난해 학자금 대출을 받은 61만명의 대학생 중 1만명은 사회에 발을 내딛기도 전에 신용불량자의 멍에를 짊어져야 한다. 학비를 위해 ‘유흥업소 남자 도우미’를 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신분열증 치료제’ 성능실험에 참가하는 등 학비마련을 위한 ‘마루타’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등록금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각되자 발빠른 정부여당이 큰소리쳤다. ‘등록금! 반값으로 모시겠습니다.’ 2007년 1월, 당시 한나라당 대표였던 강재섭씨는 신년 기자회견을 통해 “대학등록금을 반으로 줄이는 5대 입법을 반드시 관철시키겠다.”고 밝힌 바 있다. 그녀의 그 공약에 믿음과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벌써 2년이 훌쩍 지났건만 감감무소식일 뿐이다.

반값 등록금 해결에 필요한 정부재정은 5조원 정도다. 내년부터 20조원 이상 깎아주는 ‘부자감세’의 반에 반값에 불과한 액수다. ‘부자우대 대학생천대’ 정책만 바꿔도 능히 실현될 수 있는 금액이다. 신용우량자인 부자들은 ‘더 부자되세요.’외치고, 대학생들의 등골 빼먹고  신용불량자로 내모는 일을 중단하면 된다. ‘반값 등록금’이 단지 민심을 낚기 위한 ‘낚시공약’이자 ‘떡밥공약’이 아니라고 강변할게 아니라 실현가능하도록 추경예산에 5조원을 반영하면 된다.

2008년 OECD의 국민총생산 대비 공교육비 정부 부담의 평균치는 1.1%다. 한국의 정부지출 부담은 0.6%로 ‘반값 지출’에 머물고 있다. 2007년 한국의 국민총생산액은 9,571억달러. 현재 환율(1,300원)을 대비한 국내총생산의 0.5%는 6조 2천억원에 해당한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OECD 평균치만 준수하면 ‘반값 등록금’은 해결될 수 있다.

어느 개그우먼의 말마다나 ‘스텝 1. ‘반값 등록금’에 필요한 예산을 추경예산에 반영한다. 스텝 2. OECD 국내총생산 대비 공교육비 정부부담분의 평균치인 1.1%로 맞춘다. 스텝 3. 추경예산 5조원을 즉시 사용한다. 반값 등록금 참~ 쉽죠잉’ 이렇게 쉬운 일을 정부는 변죽만 울리고 있을 뿐이다. 되레 ‘반값 등록금’ 대신 ‘반값 월급’ ‘반년 고용’에 지나지 않는 인턴제를 밀어붙이고 있다.

이처럼 믿음과 기대가 무너진 현실이 그녀에게 민둥머리 선택을 강요한 것이다. 그녀는 세상을 향해 반값 등록금 실현을 위한 ‘희망의 품앗이’를 함께 하자고 말하고 있다. 4월 10일에 이어 5월 1일과 2일 개최될 큰 집회에서 ‘품앗이’를 함께 할 ‘세상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한다.

한아름 양은 말한다. “1분 1초가 급하죠. 너무나 절박하고 절실한 문제거든요. 누군가 더 알리고, 더 뛰어야 한다.” 그리고 세상을 향해 외친다. “5월 1일 범국민대회 있는거 아시죠?” 참고로 한아름 양이 흘린 눈물은 순도 100%짜리 진심어린 눈물이다. ‘실천’은 없고 ‘감성’만 있는 ‘악어의 눈물’이 결코 아니다.


 

▲ 지난 10일 오전 청와대 입구
  청운동사무소앞에서
 '등록금 인하, 청년실업 해결' 등을
  촉구하는 전국대학생대표자
  농성선포식에서
  홍익대 총학생회장 한아름씨가
  삭발 도중 감정이 북받쳐
  눈물을 흘리고 있다.

출처 : 나는 왜 청와대 앞에서 머리를 밀었나 - 오마이뉴스

 
 
 
 
 

의료연대 부설 ‘희망터’를 소개합니다.

 

- 이름도 거창한 ‘미조직전략조직화연석회의’에서 희망터 현정희분과장을 모시고 ‘희망터’활동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산삼같은 그녀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우여곡절 끝에 의료연대를 꾸리며 밤을 세우는 토론 끝에 활동가들은 기업을 넘어 지역조직의 형식을 갖추고 중소병의원 노동자, 비정규직노동자의 조직화를 실현하자는 목표를 세웠다.

미조직비정규직의 실제 조직화를 위해서는 미조직노동자의 조직화를 일상적으로 전담하는 활동가와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화센터가 필요했다. 이것이 희망터이다. 이 고민은 노조의 미조직비정규직조직화에 대한 노조상근자들의 고민과 사업은 있었으나 정규직노조의 투쟁기간 혹은 임단협기간동안에는 상근자로서 노조에 집중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미비활동은 단절되는/반복되는 한계에서 시작되었다.

2006년 4월 의료연대는 인력과 재정을 통일하여 ‘희망터’를 설립하고 3명의 상근활동가가  활동을 시작했다. 희망터는 활동가 교육훈련, 요양간병노동자 조직화 활동, 중소병의원노동자 조직화 등의 활동을 하고 있다.

요양간병노동자는 노동조합과는 다른 틀로 조직화를 시도하고 있다. 활동가들이 ‘협회’ 등 요소요소에 들어가 간부자리를 장악하고 계속 선전선동활동을 하면서 제도와 정책문제에도 적극 개입해 나가고 있다.

중소병의원노동자의 조직화 전략은 지역문화를 만드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한두명의 개별노동자가 노동조합에 가입하는 것으로 노동환경을 개선하기에는 여러 가지 넘지못할 산이 있었다. 그래서 지역노동자의 노동조건을 지역에서 문제화하고 지역에서 노동조건을 개선하도록 하는 문화를 만드는 일에 정성을 들이고 있다. 정당 및 전문가조직과 연대하여 매주 지역캠페인 활동을 통해 꾸준하게 지역의제로 만들어 가고 있다.

희망터의 운영은 의료연대 부설이기는 하지만 의료연대에서 직접적인 지휘감독을 하지는 않으며, 재정만 부담하는 형태로, 희망터에서 조직화사업을 주도하고 지도하도록 전권을 주고 있다. 물론 의료연대에 희망터 활동보고는 정기적으로 하고 있고, 노조에서도 선전활동 등 역할분담할 일은 연대하여 추진하고 있다.

희망터의 희망은 모든 지역에, 산별 ‘희망터’같은 조직화센터를 만드는 것이다. 즉 지역별, 산별 미조직비정규직 조직화를 위한 코디네이터로 자리하는 것이 희망이다. 희망터는 노동조합과는 다른 조직화센터로 호죽노동인권센터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 같아 기대가 된다. 충북은 충분히 힘이 있다. 지역에서 호죽센터를 만든 것만 봐도 알수 있다.  

- 산삼을 먹은 듯 뜨거운 기운이 느껴지고, 불끈 힘이 솟았습니다. 막(이 대책없는 말은 누가 만들었을까요?) 뭔가 하고 싶습니다. 막 뭔가 시작하고, 막 열심히 뭔가 하고 싶습니다.-


 

노인장기요양보험의 공적인프라와 서비스질 강화하라.-기자회견사진

⊙ 병원노동자희망터는

병원이나 의원, 각종 보건복지시설 등 보건의료관련 사업장에서 일하는 모든 노동자의 희망을 만들어 가는 곳입니다.

해고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비정규 노동자와 중소영세 병원 노동자의 문제는 상상을 초월합니다.주 48시간이 넘는 근무, 생체리듬을 완전히 무시한 교대근무를 하면서도 100여만원이 조금 더 되는 저임금은 법적 기준에도 못 미치고 있습니다. 임금체불, 퇴직금과 수당 미지급, 부당한 인사 등의 불이익 뿐만 아니라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일어나는 부서장 및 의사들의 폭언· 폭행 사건을 비롯한 술자리 보조 등 비인격적인 대우 등등,,,

그 누구에게도 말 못하고 속으로 끙끙 앓고 가슴에 눌러온 문제에 대해 드러내 함께 이야기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활동을 합니다.전국의 보건의료노동자의 권리확보를 위한 활동을 하기 위한 곳입니다. (홈피-희망터소개글)  

 

속터지는 노동자... 처벌은 원치 않습니다.

 


청주고용지원센터에서 최저임금 홍보 및 상담을 진행하면서 만난 아저씨 이야기입니다.

아저씨께는 죄송하지만 처음 말을 걸으셨을 때는 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 될 만큼 아저씨의 말투는 느리고 순박했습니다. 작년 여름에 다니던 직장에서 두달정도 임금을 못 받으셨다고 상담을 하셨고, 센터를 방문하시어 임금체불 진정을 하였습니다. 나이도 있고, 말씀이 워낙 느리시고 하니 직장잡기가 어려웠다고 합니다. 그러던 차에 지인의 소개로 들어간 직장에서 생산직으로 두달반정도 근무하였는데, 임금도 못 받고, 해고당했다고 합니다. 사업주가 돈을 빌려달라고 했는데 본인도 어려워 빌려주지 못했더니 나가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노동부에서는 사업주가 지불할 능력이 없어 체불금품확인원을 발급해주는 것으로 사건을 종결하려고 하는데 처벌을 원하느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아저씨는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고, 나에겐 큰돈이지만 백만원 때문에 형사처벌을 받게 할 수가 있느냐며 극구 처벌을 원치 않는다고 했답니다.

사실, 아저씨는 7년동안 생산직으로 근무하다 퇴직하고는 몇 년동안 이렇다 할 직장을 구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실업급여도 이전에는 자발적 퇴직이라 받지 못했고, 이번에는 고용보험기간이 짧아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더더욱 일자리를 구해보려고 열심히 고용지원센터를 오가지만 아저씨의 착한 심성을 알아차릴 사업주는 아직 없나봅니다.

근로감독관도 아저씨의 사정이 측은했나봅니다. 이 사업주를 상대로 다른 노동자들이 집단으로 낸 임금체불 진정사건 조사가 끝나면 아저씨를 위해 ‘지불각서’라도 받아줄 생각이라고 합니다. ‘지불각서’가 아저씨의 생활에 보탬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감독관도 짐작하겠지만 어떻게든 돕겠다는 것이니 마냥 미워할 수만은 없습니다.

아저씨께 물었습니다. 왜 처벌은 원치 않는다고 하셨냐고요. 사람이 살면서 그렇게까지 하면서 살아야 하느냐고 하십니다. 돈 빌려주지 않는다고 나가라고 한 사람인데, 임금도 싹뚝 떼어먹은 사람인데, 미안하단 말도 안하는 사람인데......

아저씨가 처벌을 원하지 않는 것과는 별개로 아저씨의 노동권 실현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을 아저씨와 의논하며 계속할 것입니다. 그깟 백만원이 아닌 억만금보다 더 값진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

 

최저임금 홍보 및 노동상담
진행하고 있습니다.
고용지원센터 앞입니다.

 

 "끌어"   -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

 

* 이번 소식지에는 궁금한소식 대신 재미있는 글 하나 소개합니다.
* 조광복노무사 블러그에 실린 글입니다.

"끌어"

학창시절의 문학 서클에 보내는 조사(弔詞)

글쎄, 내가 갑자기 왜 이 얘기를 하고 싶어졌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아득하고 아득해져서 마치 배가 바다 위에 남긴 긴 곡선의 끝자락 같이 가물가물한 시절.  오래된 화상 자국 마냥 아주 지울 수도 없고 그래서 때때로 아릿한 고등학교 문예반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몸과 마음을 바쳤으나 어린 시절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짓눌려 다시는 그곳으로 가고 싶지 않다.  그런데 왜 어린 아들 현을 보면서 나의 그 시절과 아이의 미래가 겹쳐졌는지 모를 일이다.

내가 고등학교를 입학하고 나서 생각할 것도 없이 찾아간 서클(당시는 동아리를 서클이라 했다)이 문예반이다.  국민(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너의 소원이 무엇이뇨”라고 물어보면 시인, 소설가, 작가 이런 그럴듯한 말은 알지 못하여 그저 “문학가요”라고 대답했다.  이때부터 나의 학교 특활(특별활동)은 문예반을 벗어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고등학교 입학하자마자 문예반을 들어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나 전라도 끝 촌구석에서 말단 공무원 녹을 잡수시는 와중에도 자식 하나만큼은 제대로 가르쳐보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자식들을 12시간 걸리는 완행열차에 실려 서울로 올려 보내신 아버지의 그 “청운의 꿈”을 와르르 무너뜨린 곳이 바로 문예반이었다.

나의 입학년도가 82년이고 기수가 41기니까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서클이다.  이름도 매우 오만하지만 여기서는 그냥 00문예반이라 부르겠다.  또 당시 고등학교에서는 필력이 높기로 알아주는 서클이었다.  그러니 대대로 세습되어 온 말도 안 되는 전통이니, 또 어린 것들의 치기 이런 것이 얼마나 우세스러웠을까.  우리 기수는 처음 8명~10명 정도가 서클에 들어온 것으로 기억한다.  나중에 4명만 남았지만.  서클 입회 절차가 다 끝나고 첫 소집을 하는데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뭔가 잘못 엮인 것 같은...  수업이 끝나고 학교 근처 뒷골목 짱깨집(당시 우리들은 그렇게 불렀다)에서 2학년과 3학년 선배들을 모시고 신고식을 치렀다.  짜장이 들어오고 소주가 들어오고 선배들은 고약스럽게 갖은 폼을 잡고 담배들을 꼬나물었다.  그리고 1학년부터 시작해서 노래를 부르라고 하였다.  노래가 아니라 악다구니를 내야 했다.  이게 아니다 싶었다.

선배들은 틈만 나면 짱깨를 갔다.  1,2학년끼리 혹은 3학년을 모시고 가기도 하고, 졸업한 선배들이 와서 가기도 한다.  그런데 1,2학년끼리 갈 경우에는 절대 2학년 선배들이 돈을 내는 경우는 없다.  단골 짱깨에는 1학년들이 맡긴 시계나 돈 될 만한 품목들이 쌓여갔다.  나는 맡길 게 하나도 없어서 늘 동기들에게 미안했다.

문예반은 매일 모임을 가졌다.  점심시간에 선배들보다 일찍 서클실에 와 청소를 하고 정자세를 한 채 앉아서 선배들을 기다려야 한다.  수업을 마친 후에도 저녁 8시까지 정자세를 한 채로 선배들의 훈계를 듣고 써온 글을 평 받아야 한다.  1학년이 앉은 곳에서 정면을 응시하면 큰 창문이 있고 바로 창문 너머에는 “창밖의 여자”를 대신하여 벽돌 건물의 붉은 벽이 노려보고 있다.  그 붉은 벽이 어둠을 콱 깨물어 칠흑이 번질 시간이면 그 어린 가슴 속에도 서글픔이랄까 비애랄까 이런 감정이 울컥 번지는 것이다.

문예반에서는 1학년들은 매일 글을 한 편씩 써가야 한다.  우리는 시와 수필 중 하나를 자신의 장르로 선택해야 했고 나는 시를 선택했다.  매일 시와 수필을 써오라는 지시가 참 기가 찰 일이었지만 그 때가 안 되는 일도 가능하게 만드는 무인천하가 아닌가?  말도 안 되는 지시를 거부할 권리와 배짱이 우리에겐 없었다.  조건도 까다롭다.  맞춤법, 띄어쓰기 틀리지 말 것, ‘그리움’, ‘슬픔’ 같은 추상명사는 절대 쓰지 말 것 따위.  그것을 지키지 않으면 빳다(좋은 용어는 아닌데 당시 그렇게 불렀다)를 맞아야 한다.  그 환경에서 매일 주옥같은 시가 나온다면 나는 천재시인 랭보의 반열에 서야 하겠지만 현실은 나 같은 놈한테 그런 천재성을 주지는 않았다.  수업시간에 수업은 듣지 않고 시를 써야 하는데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가는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점심 전까지 시 비슷한 거라도 만들어야 한다.

문예반이 선생들 사이에 가장 악명이 높았던 것은 전교1등을 했던 아이도 몇 달 안에 꼴찌의 반열로 내려앉힐 수 있는 기적을 행하고 학교 대걸레를 남아나지 못하게 하는 빳다 덕택이었다.  문예반에 입회한 대부분의 동기들은 얼마를 못 버티고 탈퇴를 햐였다.  그런데 선배들이 탈퇴 빳다는 50대라고 엄포를 주었기 때문에 그걸 피하기 위해 갖은 방법을 쓴다.  어머니가 바카스 1박스를 사들고 와서 탈퇴를 시켜달라고 사정하기도 하고, 때로는 탈퇴를 하려는 놈과 그걸 붙잡아 본보기로 응징을 하려는 놈 사이에 추격전이 벌어진다.  탈퇴하려는 후배들은 선배와 마주치지 않기 위하여 등교시간을 넘겨 지각을 하거나 심지어 결석까지도 감행한다.  한 보름 동안의 눈물겨운 숨바꼭질에 성공한 일부는 그 대가로 성적 최상위 클라스에 저의 이름을 올려놓았다.  붙잡혀온 일부 친구는 가엾게도 50대까지는 아니라도 한 스무 대는 치도곤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내가 성적이 후드득 떨어지니까 한 번은 담임선생님이 교무실로 불렀다.  너 문예반 하는 것 안다.  그거 탈퇴하면 안 되겠냐, 문예반이 빳다가 세고 공부도 하기 힘든 곳인데 잘 생각해봐라 이런 보약 같은 말씀이었다.  그 자리에서 나는 제가 하고 싶어 하는 거라 탈퇴할 생각이 없다고 하였다.  그것은 진심이었다.  들끓는 청소년기에 나는 오로지 문학을 하고 싶었고 문예반 외에는 달리 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전부나 다름없는 문예반으로부터 나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억압받았다.  몇 번 고민을 했지만 그 때마다 문예반에 남는 것을 선택하였다.

문예반 빳다는 유명하다.  빳다를 맞을 때보다 그 전의 분위기가 정말 견디기 어렵다.  선배들은 한 번씩 수업 끝나고 저녁 때 대걸레 자루를 모아오라고 내보낸다.  그러면 우리는 교실을 돌면서 대걸레에서 걸레를 떼어내고 자루만 모아온다.  그렇게 모아온 것이 한 번에 20벌은 족히 넘을 것이다.  창밖의 붉은 벽이 어둠을 어금니 물듯 쿡 물어버릴 때, 선배와 후배들 사이에 침묵이 이어졌다가 선배 하나가 마침내 입을 뗀다.  “끌어”  우리는 긴 탁자를 뒤집어 또 하나의 탁자에 올려놓은 후 서클실 한 쪽으로 끌어 붙인다.  탁자 다리가 시멘트 바닥에 그르륵 끌리는 소리가 그렇게 싫을 수 없었다.

당시 대학교들은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백일장을 주최하였다.  수업을 빼먹어서 좋은 날이다.  그런데 괜히 하는 얘기가 아니고 많은 중요한 상을 우리 문예반이 휩쓸어왔다.  내 동기들도 다들 몇 차례씩 장원도 타고 그랬는데 유독 나만 상을 타지 못했다.  난들 왜 상을 타고 싶지 않았겠는가마는 한 번도 나에게 그런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는 한계를 금방 깨닫고 2학년 중반부터 백일장에 가도 더 이상 글을 제출하지 않았다.  그러다 3학년 봄철에 대학 백일장에 참가할 때다.  1학년 후배 하나가 제출 시각 15분 전까지도 시를 전혀 쓰지 못하고 끙끙대는 것을 보고 내가 지금부터 불러주는 대로 적어라 하고 한 10분간 불러주었는데 그게 덜컥 차하(3등상)에 입상한 것이다.  학창 시절 상에 대한 기억의 전부이다.  비록 남의 이름으로 탔지만...

문예반 활동의 절정은 1학기 때 00지라는 문예지를 한 차례 내는 것도 있지만 뭐니 해도 2학기 때 00문학회라고 이름을 달았던 문학의 밤을 개최하는 일이었다.  해마다 국화가 활짝 피는 가을철에 문학회가 열리는데 각자 준비한 시와 수필을 낭독하는 시간이다.  이 짧은 한 때를 위해서 한 달 동안을 초죽음의 수준으로 연습을 한다.  작품집에 실릴 시와 수필을 쓰고 낭독 연습을 보통 밤 10시~11시까지 한다.  한 밤 내내 발성연습을 시킨다고 소리를 꽥 꽥 지르게 한다.  모두들 더 예민해져 빳다도 심해진다.  문학회에 오는 학생들은 거의 대부분이 여학생들이다.  어린 가슴이 설레지 않을 리 없다.  운 좋게도 나는 어떤 때는 여학생으로부터 종이학을 선물받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여학생이 내 시낭송을 듣고서 울었다는 얘기도 들었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단 한 번도 로맨스로 이어진 적이 없다.

이런 큰 행사를 마치고 나면 예외 없이 졸업한 선배들을 합쳐 수십 명의 인원이 짱깨를 향한다.  1학년 때는 몰랐으나 2, 3학년 때는 왜 이리 슬픔과 허무함이 복받쳐 오르는가.  나는 술에 만취가 되어 엉엉 울고, 토하고, 또 울었다.  모두들 그랬다.  신기한 것은 아무리 술에 취했어도 일어나서 문예반가를 부를 때는 모두들 정자세를 하고 고개를 푹 숙이고 노래를 부르는 것이다.  도무지 정상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는 받아들일 수 없는 노래가사를 마치 유언을 써내려가듯 비장하고 또 비장하게 읊조리는 것인데 그 가사가 이렇다.

“바람에 날리는 갈대와도 같이도 변하시기 잘하시는 여자의 마음 보아라 믿지 못할 여자의 마음 / 믿을래서 믿었나 외로와서 믿었지 살자고 믿었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남자의 마음 // 우리 집에 부모님 나를 낳고 길러서 문예반 가서 요 모양 요 꼴 되라고 나를 낳고 길렀나 보아라 믿지 못할 자식의 마음 / 기를래서 길렀나 낳으니까 길렀지 기르고 싶어 길렀던 것은 절대로 아니란다 보아라 믿지 못할 부모의 마음”

1학년 때 그토록 싫어했고 닮고 싶지 않았던 선배들을 나 또한 닮아가는 것이 너무 싫었다.  매 맞는 아이들이 자라서 부모가 되어 아이에게 폭력을 휘두르듯이 서글프지만 나도 그렇게 변해갔다.  짱깨에서 후배들 앞에서 갖은 폼을 잡고 술잔을 들고 담배를 꼬나물고 슬프게도 나도 빳다를 휘두를 때가 있었다.

졸업을 하고 한 동안 후배들에게 정성을 들였다.  다시는 나의 경험을 물려주고 싶지 않아서, 어리지만 성적에 목매지 않고 문학을 향한 열정을 품고 있을 기특한 후배들이 문예반으로 인하여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라면서 후배들을 찾았지만 크게 변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해가 지날수록 내 발걸음도 조금씩 뜸해지고 89년인가 전교조가 설립되고 학교마다 “굴종의 삶을 떨쳐...” 노래가 퍼지고 얼마 후에 서태지와 아이들의 “난 알아요 이 밤이 흐르고 흐르면...” 노래가 또 온 세상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어느 땐가 우연히 동기들로부터 문예반이 해체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2학년 재학생들이 전원 탈퇴하였단다.  그 후로 문예반은 다시는 재건되지 않았다.

고등학교 시절 문예반은 일탈을 하고 싶어 들끓었던 내 청소년의 한 시절이 의지하였던 피난처요, 또 어린 열정을 쏟았던 곳이었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 시절에 목말랐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가두고 억압하였던 곳이다.  나는 문예반에서 시를 배웠으나 가슴과 몸으로 쓰는 시를 배우지 못하고 단지 시 쓰는 기술만을 익혔을 뿐이다.  나와 우리는 끊임없이 마음에 없는 말을 시와 수필의 형식을 빌려 상을 타기 좋게끔 꾸미도록 통제받았다.  그 덕에 상을 휩쓸고 한 시절을 풍미하였던 문예반은 하늘을 찌를 것 같던 군사정권이 퇴락하듯 전교조와 서태지와 아이들을 거쳐 점점 쇠락하여 해체되었다.  아프기는 하지만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억압받고 갇혔던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다시 회복하기 위하여 많은 시간을 에돌아가야 했다.

먼 세월을 흘려보내고 문예반은 기억에서 흐려져 갔다.  그 문예반과 당대의 서클들이 사라진 자리를 입시학원이 성적 성적 오로지 성적을 위해 들어찼다.  나는 사랑하는 어린 아들 현이 더 크면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라도 학원이라도 가라고 해야 할 판이다.  그때는 자위하듯이 아빠의 학창시절이 그래도 열정을 쏟아 부을 곳은 있었다고, 뜨거운 눈물 한 번 받아줄 곳이 그나마 있었다고 말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나는 사랑하는 아들 현에게 그런 돼먹지 않은 얘기는 해주고 싶지 않다.  학창시절 문예반은 나의 모든 것이었으나 그 때의 억압이 자유와 감성과 상상에 목말랐던 그 시절의 나에게 너무나 힘겨웠으므로.  나중에는 그 억압을 은연중에 즐기는 나를 확인하는 것이 너무나 싫었으므로.

내 아들 현에게만큼은 꼭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너의 시절에 걸맞는 자유와 감성과 상상을 마음껏 누리라고.  그것을 도와주고 싶다고.

 

조광복노무사 블러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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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l : 043) 286-9596, Fax : 043) 286-9598,http://www.cbnodong.org/hojuk/hojuk.ht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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