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드바 영역으로 건너뛰기

게시물에서 찾기분류 전체보기

252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5/02/14
    남미, 독일, 일본.. 어쩌다보니 다른 나라 이야기들
    hongsili
  2. 2015/01/18
    상반된 환기의 방식(3)
    hongsili
  3. 2014/12/07
    이런저런 감상들
    hongsili
  4. 2014/06/23
    미시로부터 출발한 두 권의 "정치" 서적
    hongsili
  5. 2014/06/08
    코스모스 Again
    hongsili
  6. 2014/06/06
    science fiction vs. non-fiction
    hongsili
  7. 2014/05/16
    요동치는 감정을 그린 책들(1)
    hongsili
  8. 2014/05/06
    '지식'을 주는 책들
    hongsili
  9. 2014/04/22
    투게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hongsili
  10. 2014/02/15
    잉여인간의 시대.. 흑....
    hongsili

남미, 독일, 일본.. 어쩌다보니 다른 나라 이야기들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거꾸로 된 세상의 학교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르네상스, 2004

 

 

두고두고 되새길만한 몇몇 문장들을 옮겨 놓는다.

 

* 가난에 대해...

 

 

모든 사람을 큰 잔치에 초대해놓고 수많은 사람들의 면전에서 문을 쾅 닫아버리는 이 세상은 균등한 동시에 불평등하다. 세상이 강요하는 습관과 생각은 균등하지만 세상이 가져다주는 기회는 불평등하다

 

20년전 혹은 30년 전만 해도 가난은 불의의 산물이었다. 좌파는 그것을 고발했고 중도파는 인정했으며 우파는 아주 드물게 부정했다. 세월은 너무도 짧은 시간에 많은 것을 바꾸어놓았다. 지금 가난은 무능력에 대한 정당한 벌이다. 가난한 자에겐 연민이 일어나지만 더 이상 가난이 의분을 유발하지 않는다

 

가난은 너무 작은 담요라서, 각자 자기 쪽으로 잡아당기기에 바쁘다

가난한 사람은 화려함을 좋아한다. 지식인만이 가난을 보는 것을 즐긴다


브라질 주교 엘테르 카마라의 유명한 이야기... (출처를 첨 알았음..)

 

내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면, 그들은 나를 성인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왜 먹을 것이 없냐고 물어보네면 , 날 빨갱이라고 해요

 

 

세상에는 갈수록 실업자가 늘어난다. 그리고 갈수록 사람이 남아돈다. 세상의 주인은 쓸모도 없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을 데리고 무엇을 할 것안가?

 

 

* 법과 역사, 불의.....

 

법은 거미줄과 같아서 파리같은 작은 곤충은 잡지만, 커다란 짐승의 진로를 방해하지 못한다

 

1995년 우르과이 몬테비디오 윤리학과 교수모집 공고가 났는데, 월급이 무려 백 달러 ㅜ.ㅜ

 

그 정도 돈으로 부패하지 않으려면 몸과 마음이 부서져라 윤리학을 온몸으로 실천하는 도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예로부터 지금 까지 실제 역사를 만든 것은 법앞의 불평등이지만, 곡식적인 역사를 기록하는 것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이다


과거를 기억함은 과거의 저주에서 해방되기 위해서이고, 현재의 발목을 붙잡자는 것이 아니라 현재가 함정에 빠지지않고 자유롭게 길을 가게 하기 위해서이다

 

* 진실과 투쟁

 

마르코스 부사령관의 분신이라 일컬어졌던 비에호 안토니오 왈

 

인간은 자신이 느끼는 세공포심만큼 작고, 자신이 선택한 적군만큼 크다

 

진실은 진실을 찾아나서는 떠남에 있지, 항구에 정박되어 있진않다. 진실을 모색하는 것보다 더한 진실은 없다.

 

 

남미 역사를 다룬 저자들의 특별한 재능 때문인지, 아니면 정말 유례없는 정복과 약탈의 역사 때문인지, 한국과 유독 닮아 있는 근현대사 때문인지 라틴 아메리카 역사 이야기를 듣고 있노라면 그렇게도 가슴이 저린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  끊임없이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투쟁했던 그들의 역사에 대한 흠모와 존경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이티에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노예제도가 철폐되었다는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때도 엄청 울컥했는데, 이번 책을 읽으면서 브라질 노예들이 탈출하여 밀림 속에 세운 자유공간 팔마레스 공화국 이야기를 들으며 또 한 번 울컥..... 네덜란드와 포르투갈 군사원정대의 30여 차례 공역에 저항하며 한 세기를 넘겼다니 ㅠㅠ (1605-1694)  백년이면, 빠리 꼬뮌보다 민중전선 아옌대 정부보다, 그리고 지구상에 '공식적으로' 실존했던 사회주의 국가들의 모든 역사들보다도 더 긴 시간 아닌가 말이다....

 

그리고 북미 지역 인디언들의 삶의 방식에 대해서도  새삼 놀라게 된다.  정복자들이 생각했던 인디언들의 문제점에는 자살, 소유권 부정, 자주 몸 씻기, 동성애 방조와 처녀의 순결에 개의치 않기, 아이들 때리지않고 자유롭게 놓아두기, 정해진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배고플 때만 먹기 등이 있었다고.... 이거 오늘 날 탈물질주의를 추구하는 서구 엘리트들이 동경하는 삶 그대로 아닌감??? 

 

책은 통렬하고 날카롭게, 독자로 하여금 익숙한 것을 뒤집어 볼 것을 제안한다. 그렇게 해보면, 제국주의는 "세계화"로, 기회주의는 "실용주의"로, 배신은 "현실주의"로 포장된 현실의 껍데기 이면을 볼 수 있다. 오늘날의 세상은 불의와 부정의를 가르치는 학교이지만, 그렇다고 갈레아노가 이 책에서 한탄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의 마무리는 이러하다....

 

어디에 살든 어떻게 살든, 안제 살든, 한 사람은 그 속에 다른 많은 사람을 포함한다. 다른 사람이 성장하는 것을 방해하고, 모습을 드러내는 것조차 금지하면서, 우리들 중에서도 거정 발어먹을 놈들에게 무대 전면네 나서라고 날마다 얘기하는 자가 10년도 채못가고 쓰러지는 권력이다. 비록 우리가 잘못 만들어졌어도 아직 다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현실을 변화시키고, 우리 자신도 변화하는 모습이야말로 우주의 역사 속에서 눈 한 번 깜빡일 정도의 이 짧은 순간을, 두 개의 빙하 사이에서 덧없이 짧은 한 순간의 온기를 가치 있게 만드는 일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다.

 

잘못 만들어졌어도, 아직 다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는 점.... 덧없이 짧은 온기의 순간을 가치있게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는 점.... 이만큼 소박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말이 또 어디 있을까.....

 

 

#. 토머스 게이건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미국에서 태어난 게 잘못이야 - 일중독 미국 변호사의 유럽 복지사회 체험기
토머스 게이건
부키, 2011

 

미국의 노동변호사가 미국이 유럽, 특히 독일사회로부터 배워야 한다는 이야기를 구구절절 적은 책....

 

저자는 노동 비용이 높아서 미국 기업이 힘들다는 말은 다 헛소리라고 비판한다. 오늘날, 노동비용이 높은 독일의 제조업은 살아남고 오히려 노동비용 낮추는 것을 필사의 과제로 삼았던 미국과 영국은 제조업이 다 쫄딱 망했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단지 산업구조의 문제를 넘어서, 실물이 있는 제조업 기반이 사라지면 민주주의도 사멸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경제학자들이 어떻게 생각할지야 모르겠지만, 실체없는 서비스금융자본주의가 카드로 지은 집 같다고 역시 걱정해온 나로서는 깊게 공감하는 부분....

 

저자는 독일이 맛이 갔다고 미국인들이 흔히 이야기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며 독일 사민주의를 떠받치는 세 개의 기둥 ㅡ 직장평의회, 노사공동결정, 지역별 임금결정 제도에 대해서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사실, 직장평의회가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는 이 책을 통해서 처음 알게 되었다. 그 동안에는, 노조가 없는 곳에 평의회가 구성되거나, 혹은 평의회와 노조가 같은 기능을 한다고, 즉 노조 대의원이 평의원일 것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저자가 소개한 사례들을 보고 나니, 내용 측면에서나 민주주의에 대한 훈련 차원에서나 굉장히 중요한 제도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만.... 독일의 사민주의를 떠받치는 이러한 제도들이 제조업 기반의 조직 노동이라, 공공 부문이나 미숙련/서비스/ 여성 노동자 조직화는 매우 취약하다는 현실 진단에는 나도 모르게 장탄식을.... ㅠㅠ

 

내가 독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건강보험 제도의 역사 쪼금, 프라이부르그 같은 유명한 친환경 도시 프로젝트, 그리고 역시 맥주.... 특히 쾰른 맥주 맛있지.... ㅡ.ㅡ

책을 읽고 나니 독일의 자치/협력 구조가 몹시나 궁금해졌다. 혹시나 보건의료 영역에도 이런 게 있을까??? 좀 찾아봐야겠다는 생각

 

저자는 미국인 독자들에게 그토록 미국인들이 맹신하고 유럽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선택의 자유'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보라고 이야기한다. 유럽은 공공재를 더 많이 선택할 수 있고, 소비하지 않는 것도 선택할 수 있으며, 무엇보다 소비할 시간이 있다는 점 말이다. 그토록 선택의 자유를 강조하며 미국적 자유주의를 높이 평가했던 프리드만이야말로 종신 교수로서 유럽 사민주의자처럼 이런 선택의 자유를 다 누리고 살았다는 이야기에 빵 터졌다...

 

저자는 본인이 사민주의자가 절대 아니고, 그냥 애국자일 뿐아라면서 미국에서도 제발 사민주의가 강화되어야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민주의자가 뭐 어때서 이렇게 구구절절 평범한 애국자임을 강조해야 하나 싶기도 하지만, 미국도 하도 당파색이 강하다보니 (유럽인 보기엔 웃기겠지만 ㅋ) 독자들에게 '순수성'을 어필하기 위해 이러는거 같기는 하다. 순수는 개뿔.... 이라고 비웃기에는 한국 상황도 대체로 안습이라, 그냥 찜찜함으로 남겨둘란다...

 

천하제일 미국 따라가기에 바쁜 한국에서도, 이런 종류의 비판적인 사례 학습이 많이많이 필요한 듯 싶다...

 

# 후지와라 토모미. <폭주노인>

 

폭주노인 - 그들은 왜 위험하고 잔인한 폭력노인이 되었을까
폭주노인 - 그들은 왜 위험하고 잔인한 폭력노인이 되었을까
후지와라 토모미
좋은책만들기, 2014

 

너무나 빠르게 고령사회로 치달아가고 있는 한국에서 노인들이 각종 사회병폐의 희생자이자, 혹은 드물지 않게 가해자로 활약하는 현상을 보면서, 선배 국가 일본 상황은 어떤가 궁금해서 책을 읽게 되었는디.....

 

한 마디로 충격...

 

이런 글은 그냥 자기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쓰지 왜 책까지 낸 것이며, 한국의 출판사는 또 무슨 생각으로 이런 책을 번역한 것인지.... 거대미스테리를 남겨준 책....

노인들이 왜 위험하고 잔인한 폭력을 저지르는지, 왜 '폭주'하고 있는지... 하나도 답이 없잖여...

계량적 분석이고 심층적인 사례 분석이고 아무 것도 없고, 그냥 저자의 느낌적 느낌으로 책 한 권을 채웠다는 사실에 내가 폭주할 뻔했다고... ㅜ.ㅜ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상반된 환기의 방식

지금 여기를 돌아보게 하는 방식들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예컨대, 무한도전 토토가에 열광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지금/여기가 과거에 비해 그토록 불만족스러운 것일까 궁금증이 일었다. 90년대는 정규직 일자리가 젖과 꿀처럼 넘쳐 흐르고, 대중문화는 백가쟁명의 꽃을 피웠던 태평성대였더란 말이지.....  기억은 다르게 적힌다는 이소라의 노랫말이 주는 통찰은 잠시 접어두더라도, 사람들은 어쩌면 실재하지 않았던 어떤 완벽한 과거의 재현을 통해 오늘/여기 삶의 신산함을 간접적으로 토로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다. 다가오지 않은, 혹은 성취해야 할 아름다운 미래가 아니라, 과거를 비추어 오늘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사회라면, 참 많이 슬픈 곳이 아닐까 싶다.

 

새해를 시작했던 책 또한, 지금/여기를 돌아보게 했다. 동시대, 다른 공간의 이야기를 통해서, 혹은 은유로 가득찬 시간의 목소리를 통해서.

 

#. 야스다 고이치 지음. 김현욱 옮김. <거리로 나온 넷우익> 후마니타스 2013

 

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거리로 나온 넷우익 - 그들은 어떻게 행동하는 보수가 되었는가
야스다 고이치
후마니타스, 2013

 

 

이 책은 일본 사회의 평범하고 수줍음 많은 개인들이 어떻게 (전통 우익도 혀를 내두를만큼의 행동력을 가진) 망나니 우익이 되었는지를 분석한 사회심리적 탐구이자,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광범위한 대중의 우경화/보수화 경향의 보여주는 사회학적 분석이다.

 

이 책에 의하면, 이들 일본 넷우익의 개인적 특성은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상대적인 사회적, 경제적 박탈과 지지망이 되어줄 사회적 관계망의 취약함. 이들 개개인은 알고 보면 착한 사람, 있는 듯 없는 듯 순한 사람들, '유사가족' 혹은 언제라도 나와 함께 있어줄 그 누군가를 기대하는 외로운 사람들로 보인다.

그런데, 이런 갈망이 표출되는 방식이 매우 독특하다. 이들은 스스로를 비엘리트로 생각하면서 특권을 가진 자들에게 '복수'하고 싶어한다. 그래서 그들 자신은 자신의 활동을 '계급투쟁'으로 지칭한다.

물론 안타깝게도 이들이 생각하는 특권층이란 진짜 특권층이라기보다 공격하기에 좋은 취약집단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동의하지 않지만, 이건 사실 유별난 예외는 아니다. 사회적 위계에서 열세에 처한 이들이 보이는 스트레스 반응 중 전형적인 displacement에 해당한다. 전세계적, 경제위기 속에서 독일의 네오나치와 프랑스의 국민전선을 비롯해 북유럽에까지 기세를 떨치고 있는 인종주의 운동의 성격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당연히 한국의 일베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부당한' 특권을 누리는 광주민주화 운동세력, 남성들을 착취하는 여성, 자식 팔아 유세한다는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비난을 관통하는 것은, 사실 억울함 아닌가 말이다. 이들이 받아야 할 '응분의 몫'에 비해 지나친 혜택을 누리고 있어서, 자신들이 손해 본다는 생각.... 이 억울함은 <우리는 왜 차별에 찬성하는가>에 실린 젊은 대학생들의 사연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과격하고 (우익마저 고개를 내저을만한) 파렴치한 행동 그 자체라기보다, 이들의 놀라운 자발성과 그들을 떠받치고 있는 일본 대중들의 거대한 동의가 아닐까 싶다. "재특회는 '태어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낳은' 것"이라는 저자의 말에 100% 동의하지 않을 수 없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고민이 되는 부분은 이런 거였다.

한 교사의 말을 전하자면, "과거에 어른스럽고 교사에게 논쟁을 거는 학생들이 좌파적 성향이었다면, 요즘에는 오히려 우파적인 아이들"이라고 한다. 이제는 어느 정도 모두가 공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사회적 가치, 전제들을 동의하지 않는 이들과는 어떤 대화를 나누어야 할까? 평등이, 인권이 왜 중요하냐, 저 외국인들을 왜 우리와 같은 사람으로 대접해야 하냐, 이런 질문에 차근차근하게 대답해줄 자신이 없다. 너무 당연한 가치라고 생각해왔기 때문이다.

게다가 일본을 비롯하여, (실질적 내용은 차치하고) 제도적 측면에서 민주주의가 정착한 국가들에서의 사회운동이 가진 딜레마 또한 곤혹스러운 부분이다. 예컨대 일본의 평화헌법은 그 정점을 지나 이제 '퇴보' 밖에는 변화의 가능성이 없고, 소위 좌파는 현재를 지키기 위해, 우파는 현재를 변화시키기 위해 싸우고 있다. 우익이 변화시키려는 방향은 그야말로 민주주의와 평화주의의 퇴행이라고 밖에 이야기할 수 없지만, 퇴행이든 전진이든, 이들은 변화를 원하고, 좌파는 이에 저항한다. 굳이 유지할 이유가 없다면 바꾸려 하는 것이 진보이고, 굳이 바꿀 필요가 없으면 유지하려 하는 것이 보수라고들 이야기한다. 그런데 이런 상식을 혼돈시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라니.... ㅡ.ㅡ.  

 

"사회운동은 이론보다 기세를 통해 확산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기세는 '지키기'보다 '바꾸기'를 원하는 쪽에 붙기 마련이다. 일찍이 학생운동이 기세를 떨쳤던 것은 무엇보다도 체제를 부수자는 데서 공감을 얻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한편 지금의 좌익은 '지키기'만 할 뿐인 운동이다. 평화를 지켜라, 인권을 지켜라, 헌법을 지켜라, 우리 직장을 지켜라, 재특회 같은 신흥보수 세력은 그것들을 모두 의심하고 '쳐부숴라'고 호소한다. 좌익이 보수가 되고 보수가 혁신이 된 '역전현상'이 생긴 것이다."

 

사회가 자꾸 나쁜 방향으로 퇴행하려고 하는데, 그에 맞서서 그나마 지금의 후진 상황이라도 유지하려고 싸워야 하는 운동은 우울하다. 퇴각과 퇴각을 거듭하면서, "그래도 그 때가 좀 나았던 것 같아"라고 끊임 없이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어릴 적, 역사가 '나선형'으로 '발전'한다고 배웠는데, 지금이 바로 나선의 후퇴 혹은 하락 부분인 것일까? 나중에 시간이 많이 흘러, 오늘을 어떻게 돌아보게 될지 두렵다. 엄혹했지만 잘 견뎌서 여기까지 왔구나 하며 흐뭇해할지, 그래도 그때가 좋았어 하고 더 깊은 회한에 잠길지.... 

 

 

#.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지음. 김현균 옮김. <시간의 목소리> 후마니타스 2011

 

시간의 목소리
시간의 목소리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후마니타스, 2011

 

그 시간이 흘러, 시간의 목소리른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에두아르도 갈레아노가 몹시 정성들여 세공한 이 짧은 이야기들은 슬프고 아름답고 유쾌했다. 

예전에 신영복 선생의 책에 "시간이 없어 편지글이 길어졌다"던 이야기를 저절로 떠올렸다. 기껏 반 쪽이 안 되는 짧은 글과 손톱만한 옛사람들의 그림 조각들이 이렇게 풍부한 결을 전할 수도 있구나....

라틴 아메리카와 세계 곳곳의 피묻은 역사에 울컥하면서도, 나는 심각한 향수병을 앓았다.

멕시코시티의 소칼로 광장, 쇠락한 아바나의 건물들, 파타고니아의 거친 자연은 그저 이야기의 배경일 수 없었다. 내가 가 본 곳이라 반갑다거나 익숙하다는 감정과는 정말 다른 그 무엇이었다. 직접 여행했던 곳들에 대한 다른 이들의 글들은 그동안 무수히 마주치고 읽었지만, 갈레아노의 책에 등장해서 맥락을 가지게 되었을 때는 전혀 다른 심상으로 경험된 것이다. 미칠 듯한 애틋함...

 

올해는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갈레아노의 책들을 하나씩 읽어보려고 생각 중이다. 플러스, 리처드 세넷...

인상깊은 글귀 하나 적어둔다.

 

"나는 나의 자유를 지고 다니노라"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이런저런 감상들

블로그를 워드프레스로 다시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차이피일 새 글쓰기를 미루었는데, 결국 시작도 못하고 글만 밀린 셈이 되었다.

올해 연말  프로젝트로 블로그 업데이트를!!!

 

#. 영화 [인터스텔라]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 2014)

 

인터스텔라

 

인셉션 때도 들었던 의문인데 굳이 저렇게 개고생하며 메시지 전달해야 함?  그냥 첨부터 설계도를 마이클 케인 할배한테 쏴주면 되잖아 ㅠㅠ

시각효과와 쌍둥이 역설 보여주는데 너무 정성 쏟느라 나머지 플롯은 모기장 정도가 아닌 물고기 그물 수준 구멍이 숭숭...
과학자들은 어쩜 하나같이 정념의 화신들.... 불쌍한 맷 데이먼 어쩔 거냐고 ㅜ.ㅜ

 

게다가 행성 그 자체는 물론 빛조차 흡수해버린다는 대마왕 블랙홀 지나는데 사람이 멀쩡하고 심지어 교신도 잘됨 ㅋㅋ 코스모스에서 칼 세이건 할배가 중력장 찌그러지는 거 보여줬잖아...

그리고 공부 잘하고 똘똘하다고 그렇게 대놓고 딸만 좋아해도 되는겨? 살림 돌보느라고 개고생한 아들내미 불쌍함...  게다가 매튜 매커너히는 [컨택트]에서 하도 미운 털이 박혀서 뭘 해도 좋아보이지가 않음...

 

그래도 하나 건진 건... 타스 너무 갖고 싶어!!!!! 아이슬란드 꼭 가야해!!!

 

#. 영화 [액트오브킬링] (조슈아 오펜하이머, 크리스틴 신 감독, 2012년)

 

 

액트 오브 킬링


아......멘탈이 바스라짐
첨에는 아무리 저들이 가해자라지만 감독이 윤리코드를 위반해가며 찍고 있는게 아닌가 의심했는데 그게 아니라 오히려 감독이 이용당할 수도 있는 상황?

국영방송의 토크쇼는  보다 정말 쓰러질 뻔함.


인터스텔라는 허구인데 진짜같아 보이려 애쓰고 이 영화는 오히려 실제인데 더 허구같아 보임.

정말 저럴 수가 있을까 싶은데 변영주 감독 이야기를 들으면 그럴 수도 있겠다 싶기는 했음. 옳은 일을 했다는 개인적 믿음과 사회적 합의 때문에 굳이 그들이 도덕적 딜레마를 겪을 이유가 없다는 것....

하지만, 도대체 인간 본성에 자리한 '양심'이란 그토록 취약한 것이란 말인가??? 나치스의 만행이나, 이스라엘의 또라이짓들을 보면, 그럴 것 같기는 하지만.... 정말 서글픈 사실...

안와르 콩고의 마지막 흔들리는 모습이 진심의 반성, 혹은 자기 향위의 정당성에 대한 의심이었는지는 감독도 모르고, 관객도 모르고, 아마 본인도 모를 것이라는 생각....

 

영화가 정말 무서웠던 것은 그 현실이 남한 사회와 백짓장 한 장 차이라는 점 때문. 서북청년단이, 광주 계엄군이 토크쇼에 나와서 대놓고 우리가 학살 저질렀어요 자랑스럽게 이야기하고 방청객들이 박수치며 웃지는 않지만, 그들이 엄연하게 현실에서 권력을 가지고 있고 심지어 그들의 시선으로 역사를 다시 쓰려 하고 있다는 점....

이런 걸 보면 도대체 역사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깊은 한숨을 내쉬지 않을 수 없고, 사회정의나 민주주의라는 것이 얼마나 취약한 생명체인지 새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음...

너무도 우울하고 무서운 영화....

 


#. 영화 [언더 더 스킨] (조너선 글레이저 감독, 2014년)

 

언더 더 스킨

 

보는 내내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솔라리스가 자동 연상.....

스칼렛 요한슨 너무 좋아... 그런데 가만, 한국어 포스터 좀 보소... '그녀가 벗는다'라니.... ㅋㅋ

외계인도 물리치는 지구인 남성의 '성폭력'이 아주 후덜덜하기는 했음....

원작 소설도 역시 다른 측면에서 완전 훌륭하다고 하던데 한 번 찾아봐야겠음...

 

#. 영화 [보이후드] (리처드 링클레이터 감독, 2014년)

 

보이후드

 

12년이라는 '리얼타임'으로 한 소년의 성장을 재구성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이 영화의 미덕은 도대체 무엇이길래 이렇게 평이 좋았던가 정말 의아했음.

리얼타임으로 쫓아간 걸로 치면, 사실 해리포터 시리즈가 훨씬 더 성장의 재미가 쏠쏠했는데 말이지...

영화의 등장인물들이 너무 '전형적'이고, 갈등이나 시대상의 스냅샷도 너무 전형적이라 밋밋하게 그지 없더란 말이지... ㅡ.ㅡ 지금 40대 중후반의 미국 리버럴 중산층들이, 아 저 때는 그랬지... 딱 내 이야기네 하면서 흐뭇하게 미소지으며 돌아볼 수 있는 매끈한 추억팔이 영화라고 평하면, 나 너무 비뚤어진 사람인감???

한국도 그렇고, 미국도 그렇고 이제 겨우 10-20년이 지났을 뿐인 시절을 돌아보며 그때가 아름다웠지 회고하는 것은 지나친 퇴행이라고 생각함. 90년대 한국사회에는 대중문화가 만개했고, 정규직 일자리가 젖과 꿀처럼 넘쳐나는 아름다운 곳이었다는 환상은 도대체 어디에서 시작된 건지 모르겠다고... ㅜ.ㅜ 

 

#. 아트 스피겔만. Maus (1부 1986년, 2부 1992년 발간)

 

이 명작을 지금에서야 보게 되다니...

더 황당한 것은 아마존에서 주문해봤는데, 바로 얼마 있다가 국내에 번역서가 출판되었다는 것... ㅡ.ㅡ

 

현재 세계에서 아빠의 고집불통 구두쇠 성격을 세밀하게 그려낸 것이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을 더 잘 설명해주는 효과...  가혹한 폭력과 난데없는 운명의 향방에 대한 공포가 너무도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음.


그러면서도 작은 자원 하나, 숨겨온 금시계, 빵 덩어리 하나가 때로는 삶과 죽음을 가르고,

같은 이웃이고 민족이고 없이 오로지 혈연이라는 일차적 관계망, 여전히 물질적 자원이 중요했다는 점에서 이러한 역사의 소용돌이 여파도 계급에 따라 차별적이라는 점이 너무나 씁쓸....

유대인이라는 '동포' 사회에 연민이나 연대는 존재할 여지조차 없었던 것 같은 정황이 진정한 공포.... 정말 각자 도생의 지옥도에서 누구는 운 좋게 살아나고 누구는 연기 속으로.....

하지만, 2차 대전, 아우슈비츠와 나치스의 만행에 대한 책을 읽고 나면 자동으로 이어지는 한숨....

이런 난데없는 폭력과 희생을 경험한 인간들이 왜 오늘날 저런 쓰레기 짓을 저지르냐고!!!

인간에게 염치를 빼면 뭐가 남는가 말이지....

 

 

#. Neil Gaiman, P Craig Russell. Graveyard Book graphic novel 1, 2 (2014)

 

 

아름답고 따뜻한데, 사실 엄청 잔혹한 동화.... 원작은 안 읽어봤지만 그래픽노블로의 변환은 정말 짱인듯...

Silas 멋지다고!!!

닐 게이먼 내 월급 도둑....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미시로부터 출발한 두 권의 "정치" 서적

#.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치즈코
은행나무, 2012

 

도서관에 대출 상태가 지속되어 한참이나 까먹고 있다가 지난 번에 들렀더니 서가에 돌아와있길래 냄큼 집어왔다. 저자는 젠더 이슈, 특히나 돌봄과 관련해서 상당히 중요한 기여를 했던 연구자라고 들었다. 한편으로는 여성을 보호해야 할 성스러운 (?) 존재로, 다른 한 편으로 성애의 대상으로, 또 다른 한편으로는 '하찮은' 존재로 차별하고 비하하는 이 기괴한 사회적  세계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기대했던 책이다. 더구나 저자가 일본인이라니 호기심이 생겨날 밖에...  

나는 항상 일본 사회 여성의 삶이 궁금했더란 말이다...  

예전 한일 자살 비교연구를 하면서 내가 잠정적으로 갖게 된 인상은.... 미안하지만, 일본 여성들이 만일 차별을 '인정'하고 순응한다면 그닥 불행할 것도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컨대,  한국인들은 일자리가 부족하면 여성이 남성들한테 양보해야 한다고 하면서도, 막상 아내도 경제활동으로 가구소득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견이 다수를 차지한다. 이에 비해 일본사회는 여성한테 그닥 기대가 없었다... ㅡ.ㅡ 그래서 그런지, 경제 위기 상황에 한국의 여성 자살률은 급증하는데 일본은 변동이 없었다. 일종의 보호받는 존재인 것이다....   이걸 부당하다고 생각하면 괴로운 것이고, 그래 편하게 보호받으며 살자 하면 결과가 나쁘다고도 할 수 없는 이 묘한 상황...  (물론, 그래도 선택하라면 나는 한국사회를 택할 거다 ㅡ.ㅡ)   

서론이 길었고... 하여간 그래서 몹시 궁금했던 책이라는 거다.

책은 흔히 가지고 있을 법한 통념 - '점잖은 일본의 여자교수'가 썼다고 보기에는 엄청나게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애써 점잖음 따위는 개나 줘버려, 싹 다 까놓고 말하자, 이런 분위기?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기대만큼 충분한 설명을 준 것 같지는 않다...  

여성혐오 현상의 본질이나 맥락 요인들에 대해, 정치경제나 사회학보다는 상당 부분 정신분석학적 접근에 기대고 있다. 그런데, 이 정신분석학이라는 것이, 각자의 '썰' 성격이 강하다보니, 옳다그르다 하기도 어렵고, 실증자료를 통해 뭘 보여주기도 그렇고...  주장하는 사람이나 그 의견에 반대하는 사람이나 둘 다 딱히 근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프로이드 말씀이 뭐 성경말씀도 아니고... ㅡ.ㅡ  

더구나, 이 분석 틀에 여성이 주체로 등장하는지 조차 의심스럽다. 정신분석학 기원으로 올라가면 결국 남는 건 오이디푸스 컴플렉스, 리비도와 팔루스에 대한 다양한 변주들인데, 여성 혐오의 기원이 이것이라면 그럼 젠더가 비교적 평등한 사회나 모계우선을 보이는 사회들은 뭐여??? 인간이 생물학적 리비도와 무의식의 세계로 설명되는 존재라면, 지난 수천년 이성의 발전, 가깝게 지난 백 년의 근대화 역사는 다 부질없는 거였나??? 제도니, 문화니, 정치경제니... 이런 거는 다 상관없는 것이란 말인가?

 

물론 새삼스럽게 깨닫거나 동의하게 된 부분도 있다.  

 

예컨데, 남성은 여성이라는 '기호'에 반응하며 이러한 페티시즘은 '동물적인 것이 아니라 고도로 문화적인 것'이라는 설명에는 완전 동의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생물학적 충동으로서가 아닌, 사회적 약자 혹은 학습된 성적 기호로서의 여성이나 아동, 특히나 장애인 여성에게 자행되는 남성의 성폭력을 훨씬 잘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당연히 화학적 거세 같은 조치들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 것인지, 여성의 조신한 몸가짐 강조 따위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를 이야기할 수 있다.

 

 남성의 남성됨을 인정하는 주체는 이성인 여성이 아니라 같은 남성이라는 설명,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남성에게 과시하기 위한 객체로서 여성을 대상화하고, 또 성적 '대상화'가 될 수 있다는 자각 때문에 그토록 강력한 호모포비아를 형성한다는 설명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런게 막 불편한 거다.

 

남성이 폭력<권력<재력이라는 자원을 통해 여성들을 지배한다고 하면서, 그래서 여성이 '남성의 폭력에 복종하고 지위에 몰리며 돈에 따라온다'는 설명을 듣고 있자면, 이건 도대체 여성혐오를 부추기자는 건지, 비판하자는 건지 헷갈리게 된다. 남성의 이러한 자원에 여성이 끌리는 것은 당연하고, 남성이 이런 자원을 휘두르는 것은 못볼꼴이라는 인식은 양립가능한 것인가???

게다가 여기서 더 나아가 쾌락으로 여성을 지배하는 것이 '수컷에 있어서 최강의 자원'이라면, 여기에 지배당하는 여성은 뭐가 되는 거임???

 

책을 읽는 내내 들었던 의구심은, 이렇게 저렇게 다양한 방식으로 남성들에게 굴복당하고 지배당하고 휘둘리는 여성 말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여성 주체는 어디 있느냐는 것이었다. 이 책에서 남성은 비판의 대상으로서 실존하는 주체인 반면, 여성은 오히려 남성을 설명하기 위한 객체 정도로밖에 그려지지 않았다는 인상.... 뭉뚱그려서, 남성들에게 속아넘어가고 폭력을 당하고 남성을 숭배하는 집단으로서의 여성이랄까.....  여성들 사이의 차이는 온데간데 없다. 

심지어 여성들이 같은 여성의 인정보다는 남성으로부터의 인정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진단을 보고 있자면, 그래서 여자들이 이 모양 이꼴이라는 뜻? 그렇다면 남자들을 비판할 게 아니라 여자들 정신차리라고 운동하는 게 먼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건 나만의 삐딱함일까???   

 

그리고 이건 세대적 차이에서 비롯된 해석의 다름일 수도 있는데....

'딸은 어머니로부터 여성 혐오를 배운다. 어머니는 딸의 여자같은 부분을 증오함으로써 딸에게 자기혐오를 심어주고 딸은 어머니의 불만과 공허를 목격함으로써 어머니에 대한 경멸을 배운다" 라는 표현은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우리 세대에게는 좀 황당한 표현이다. 아마도 이건 스위트홈 이데올로기에 갖힌 근대 중산층 가족의 전형에서나 나올 법한 스토리인데, 노동계급의 삶에 이게 가당키나 한 설명인지 모르겠고, 더구나 '너희는 엄마처럼 살지 말아라'면서 (몸은 안 따라올지언정) 딸자식의 사회적 성공을 위해 헌신했거나 최소한 동의했던 우리 엄마들 세대와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다.

어머니가 딸의 행복을 기뻐하지 않는다거나, '너를 평생 손에 쥐고 놓지 않을테다' 하며 지배욕을 갖는다는 해석은 사랑과 전쟁 하드코어 버전에 가히 비길만하다. 

게다가 '여아는 남아와 마찬가지로 어머니를 일차적인 애착대상으로 삼지만 아버지와 동일화하여 어머리를 욕망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아는 어머니를 사랑해서는 안 되며 어머니와 같은 성별에 속하는 대상을 사랑해서도 안 된다. 이렇게 사랑의 대상 상실은 남아보다 여아가 더 근원적이며 여아는 상실을 잊어버리기 위해 상실의 대상을 체내화한다. 그것이 멜랑콜리, 즉 우울상태이다'

"어머니에게 복종하든 거역하든 어머니는 딸의 인생을 줄곧 지배한다. 어머니늬는 사후에도 딸의 인생을 지배하려고 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원망의 감정은 자책감과 자기혐오로서 나타난다"

"(원조교제하는 10대는) 아버지 세대의 손님을 아버지의 대리인으로 삼아 그들의 비열하고 왜소한 성욕에 자신의 육체를 제물로 바쳐, 아버지에게 소속되어 있으나 아버지가 결코 더럽힐 수 없는 딸의 육체를 시궁창에 버림으로써 아버지에게 복수하고 있는 것이다"

.... 같은 표현을 보고 있자면, 어안이 벙벙...  나는 지금 소설을 읽고 있는 것인가??? 정신분석학의 본질은 막장 드라마였던 말인가??? 

 

하지만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했던 것은 '비인기남'으로 그려진 아키아바라 무차별 살상 가해자 사례였다.

저자는 그가 그러한 범죄를 저지른 것이 여성에게 선택받지 못함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하자면 남성으로서 최후의 자존심을 능욕당한) 진단한다. 많은 이들이 파견노동 같은 사회경제적 문제를 지적했지만,  그런 처지에 있는 모든 사람이 이런 흉악범죄를 저지른 건 아니라면서, 그 '비인기남'의 이전 글들을 인용하여 '이러니 여자가 생길리 없다'고 잘라 말한다.

그렇게 치자면, 부인이나 애인이 없는 남성이라고 모두 그런 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아니라는 점은 왜 언급하지 않나? 비단 이 아키하바라 사건만이 아니라, 경제적 불안이 지속되는 가운데 일본에서는 불안정 고용 노동자들의 다양한 사회적 일탈이 늘어나고 있음이 지적된 바 있다.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게 이를 그저 찌질한 루저남의 미친 짓으로 치부하고 말아버린다면, 정말 답이 없다. 세상은 오로지 여자를 소유하고 싶어 안달인 남자들과, 스스로를 혐오하며 남성에게 기생하는 여성들만 존재하는 곳이란 말인가???  

 

이 책은 여성주의 이론에 익숙한 이들과 함께 토론을 하면서 읽는 게 좋을 것 같다. 전반적인 여성주의 맥락에서 보자면, 나의 독해방식이 오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들어서 말이다. 정말 여성혐오를 이렇게만 진단할 리는 없잖아??? 조만간 SOS를 쳐서, 이 책에 대한 국내 여성주의자의 '해설'을 좀 들어봐야겠다!!!   

 

* 뱀발: 주제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은 아니지만, '친구관계야 말로 인간관계의 상급편'이라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친구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높은 스킬이 필요하다. 연애나 결혼보다 더. 왜냐하면 연인이나 부부관계는 일종의 역할극에 근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 제임스 길리건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왜 어떤 정치인은 다른 정치인보다 해로운가 - 정치와 죽음의 관계를 밝힌 정신의학자의 충격적 보고서
제임스 길리건
교양인, 2012

 

 

사실, 번역이 매우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아마도 'epidemic'을 내내 '전염병'으로 번역해 놓은 것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상당히 거슬렸다. 전염병 (communicable disease, infectious disease)은 병원체를 통해 전파되는 질환 일반을 지칭하는 것이고, 여기에는 풍토병 (endemic)도 있고, 대유행 (epidemic) 도 있다고... ㅡ.ㅡ  그냥 역학 관련 용어들이 이 사회에 대중화가 안 되어 나타난 결과겠거니.....

그리고 책 표지가 너무 후덜덜.....  이건 아니잖아....

 

하여간 글은 길지만, 요약하자면 

정치라고는 모르는 임상의사의 '순수한' 호기심에서 시작해 분석해보니

공화당 대통령이 되면 살인과 자살률이 높아지고, 민주당 대통령이 되면 반대로 낮아진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는 이야기... 랄프 네이더 같은 좌파나 극우파들이 보기에는 민주당이나 공화당이나 다 거기서 거기라고 말하겠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더라는 말씀!!!

그러게, 나도 여기에 매우 동의한다. 

 

저자는 진료실에서 다양한 폭력 사례들을 겸험했지만, '폭력이라는 전염병은 개인들의 차이만 가지고는 설명할 길이 없었다'고 동기를 밝혔다. 그리고 다양한 근거들을 정리하면서, Hill's criteria 에 근거하여 집권 정당이 자살/살인과 '원인적 연관성'을 갖는지 검정해간다. 역학적 훈련이 매우 잘 된 임상의사 ㅋㅋ 훌륭하시다! 

게다가, '폭력치사라는 전염병은 (개인이 아니라) 공중보건과 예방의학의 방향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피르효의 문장으로 글을 맺는 것을 보면 왠지 고맙기까지.... ㅡ.ㅡ 

 

저자는 사회정책의 차이를 이야기하면서, 그 정책들로 인해 나타나는 차이를 폭력 뒤에 내재한 '수치심'으로 설명한다. (사소할지라도) 상처받은 자존심은 반동(reaction)으로 타인에 대한 폭력을 낳는다는 것.... (반대로 '죄의식'이 강력하게 작동하면 자살에 이른다). 공화당 집권을 통해 행사하는 정책들은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사람들로 하여금 수치를 경험하게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또 약간 동의하기 어려운 설명도 있는디.... 

수치심은 불명예와 치욕을 악덕으로, 자부심과 명예를 미덕으로 간주하는 도댁 체계인데 비해, 죄의식은 겸손을 미덕으로 삼는다. 하지만 수치심 윤리에서 보자면 겸양은 자기 모욕이나 다름이 없다. 전자는 우파의 정치윤리, 후자는 좌파의 정치도덕이 된다 (고 저자는 주장한다)... 

미국의 경우 남부는 수치심의 윤리관이 두드러지고 (그래서 폭력이 만연하고), 뉴잉글랜드는 상대적으로 죄의식 문화가 강하다 (그래서 폭력이 적다) 고 저자는 해석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거를 뒷받침하기 위해 문화에 대한 역사적 사료들까지 등장하는데, 글쎄올시다....  남부 지역이 플란테이션 중심의 거대 농업자본과 노예제로 대변되는 사회적 불평등이 극심했다면, 뉴잉글랜드는 비교적 일찍 공업화가 진척되면서 이민자와 자유흑인까지 포괄하는 거대하고 (상대적으로 평등한) 노동인구의 규모가 커졌던 것이 더 중요한 이유 아닐까 싶은디....  (어째, 미시적 심리세계를 통해 사회세계를 설명하는게 오늘 정리하는 두 권의 공통 테마였나보다... ) 서부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자살률 높은 것도 상처입은 자존심으로 설명하는데, 이건 좀 화가 날 지경. 

 

조금 더 구체적인 물질적 기반과 제도의 디테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게 적절하지 않았을까 싶다... 하지만 그는 정신과 의사니까..... ㅡ.ㅡ   

그래도, 임상의사로서 교정시설에서의 폭력 감소 프로그램 경험과 이를 통해 정책을 어떻게 구상하면 좋을지 제안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컸다. '폭력에 기대지 않고도 수치스러운 경험을 견뎌낼 힘이 되어주는 개인적, 문화적, 경제적 자원을 제공해주는 것' 말이다. 

 

비록 정권들 사이에 사회정책의 차이가 그닥 크지는 않지만,

폭력과 자살 예방을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한국사회에도 단서를 줄 수 있는 책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코스모스 Again

hongsili님의 [코스모스] 에 관련된 글.

 

책으로 보았던 코스모스가 다큐멘터리와 셋트라는 것을 안 것은 2005년 미국에 머무를 때였다. 칼 세이건 할배의 얼굴도 그 때서야 처음 보았더랬다. 사실 우리 또래 중에 코스모스 다큐를 직접 본 사람이 얼마나 되나 모르겠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국내에 비디오가 출시된 것도 아니니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이 다큐를 보면서 과학의 꿈을 키웠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 ㅡ.ㅡ

 

하지만, 처음으로 코스모스를 보고 난 후 감격하여, 그 후 DVD 를 사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다. 엄청 촌스러운 화면에, 역시나 촌스러운 칼 세이건 할배의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그 익숙한 배경음악만 시작되어도 가슴이 떨리곤 했다.

리메이크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우려 반, 기대 반.... 첫 프롤로그 편을 보았을 때에도 너무 화려해진 화면, 그리고 내가 별로 신뢰하지 않는 NGC 작품이라는 것에 좀 허거덕하기는 했다 (심지어 제작사가 Fox 흑...) 그리고 닐 타이슨 목소리가.... 음..... 좀 기름지다 ㅜ.ㅜ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역시나 또 빠져들고 말았다.

당연히, 그래픽이 멋지거나 스케일이 웅장해서는 결코 아니다.

 

실패와 역경, 때로는 위험에 맞선 과학자들의 이야기들은 감동 그 자체였고,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회의적 사고와 권위에의 의심, 스스로의 판단,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인정, 이성이 아닌 믿음에 굴복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다시 들어도 계속 사무쳤다. 

 

여러 과학자들 이야기 중에서, 특히나 패러데이 이야기는 정말 코끝이 찡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제본사 패러데이가 공개 강연에서 스타과학자의 강연을 듣고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자신이 제본한 그의 강연집을 선물하며 이루어진 인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가난한 계급 출신의 그가 결코 넘지 못했던 수학의 장벽을, 부유한 가문의 천재수학자 젊은 멕스웰이 수식으로 만들어서 그 논문집을 그에게 선물했던 이야기로 끝난 에피소드 말이다.  패러데이는 40대 이후로 우울증이라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과학에의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계급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왕실과학원에 공개과학 강연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오늘날에도 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칼 세이건도 여기에 강연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기 위해 납함량 분석에 평생을 바쳐온 패터슨이 뜻하지 않게 근세기 납농도 증가를 밝혀냄으로써 자동차/석유 산업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고, 하지만 과학적 증거 앞에 굴복하지 않은 그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무연휘발유가 탄생하여 수없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게 된 이야기 또한 심금(?)을 울렸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헨리에트 리비트 같은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소개도 매우매우 좋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륙이동설의 증거를 확인했던 한 여성과학자가 지도교수의 권위에 눌려 자신의 논문을 부정했던 이야기는 참 현실적이면서도 교훈을 주는 에피소드였다.  

 

전반적으로, 이보다 더 교훈적이고 이보다 더 계몽적일 수 없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원본에서 등장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야기가 재등장한다.

세계의 지식이 보관된 인류의 보물이었지만, 그 보물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한 줌의 엘리트들뿐이었고, 그래서 적들이 쳐들어와서 도서관을 불태웠을 때, 함께 도와 도서관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지막에, 오늘날 과학은 너무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에, 하지만 엄청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소수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이야기가 바로 코스모스를 만든 칼세이건과 그 후예들의 뜻을 잘 드러낸다. 칼 세이건 할배는 평생 이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했다. 과학의 잠재력과 위험성, 그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은 계몽된 대중, 생각하는 대중이 있을 때 뿐이라는 점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다. ㅡ.ㅡ  오죽하면 30년 만에 이걸 다시 만들 생각을 했을까...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지구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냉전구도와 지구온난화가 핵심 의제였다면, 이번 편에서는 (대놓고는 아니지만) 또라이 기독교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 상당히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ㅜ.ㅜ 칼 세이건 할배 돌아가신 이래, 시계바퀴가 거꾸로 돌아서 미국에서는 진화론이 한낱 가설이라고 공격받는 일이 드문 일도 아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굳이 길가메시의 서에 나온 대홍수 이야기가 천년 후 구약성서의 노아 이야기로 발전했다는 언급을 한 것이나, 그랜드캐년에 서서 이것이 생겨난 게 6천년 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 오호 통재라... ㅡ.ㅡ

그러다보니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에서 코스모스에 대한 공격을 엄청나게 하고 있다고...  

제발, 그들이 걱정하는 대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부디 이 작품을 보고 과학적/회의주의적 사고와 이성, 호기심을 키워나가 신에게 거역하는 세대로 자라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쨌든, 보고 있자니 다시 칼 세이건 할배 생각이 났다. 

그의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전해주던 과학과 이성의 이야기들 말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science fiction vs. non-fiction

최근 감상한 일련의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책상 위에 묵혀 두었던 두 권 고전 소설에 대한 메모도 함께 정리해둔다

 

#. Arthur C. Clarke. <Childhood's end> Ballantine 1984

 

 

 

이 책의 초판 발행이 1953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새록새록 깜놀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 개발을 둘러싼 두 열강의 각축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었고, 남아공의 아파르트 헤이트 중단이나 스페인의 투우 금지 같은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그 시절 말이다.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아무런 기반도 없는 채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나타난 반짝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의 성과에 기초한 이성과 논리의 진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다수의 과학소설가들이 보여주는 미래사회에 대한 놀라운 예측은 그들의 신묘한 통밥이 아니라, 끝까지 밀어 붙이는 논리적 상상의 전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지배적 정조는 우울이다. 지구인들이 맞이한 새로운 세기는 딱히 디스토피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토피아라 하기도 어렵다. 전쟁이 없고 물질적 안녕과 복리는 그야말로 골든 에이지라 할 수 있지만, 고통과 갈등과 도전, 절망 조차도 인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면 결코 행복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극도의 발전, 그 끝에는 새로운 존재로의 변환과 해탈(?)이 있다. Childhood's end 라는 제목은 그야말로 지구 상에 어린이가 사라졌다는 사실, 유년이 통째로 손실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우주에서 유년기와 같던 지구의 소멸, 그리고 모든 신비주의와 종교를 벗어버린 인류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가장 유쾌한 (?) 장면이라면, 50년 만에 존재를 드러낸 Overloads 의 외모가 '붉은 악마'였다는 점이다. 종교에 대한 불경스러움은 humanist  SF 작가들의 미덕이다 ㅋㅋ..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시험하기 위한 Athens vs. Sparta 프로젝트는 우리의 율도국 프로젝트에 작은 단서들을 주지만, 물질적 기반이 너무나 다르다는게 함정... ㅡ.ㅡ

 

 

#. Arthur C. Clarke <The Fountains of Paradise> Aspect

 

 

할배는 공평하다.

기독교만 까대지 않는다 ㅋㅋ

완고한 불교 승려들과의 대립을 극복하고, 지구 최고의 공돌이 Morgan 은 space elevator 를 건설한다. 그냥 건설에 성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간에 발생한 사고를 직접 나서 극복하는 만능 히어로 ㅋㅋ

 

고대 전설과 종교- 세속의 정치적 대립, 미디어 같은 소재들을 능수능란하게 엮어가며,

한 엔지니어의 천재성과 불굴의 집념을 이토록 손에 땀을 쥐도록 그려내는 작가의 역량에 새삼 놀랐더랬다. 괜히 SF 삼대천왕이 아닌 게여 ㅋㅋ

 

그러나 정작 내가 가장 꽂힌 것은 Morgan 의 건설 엔지니어링보다 그의 가슴에 부착된 CORA!!!

이거 너무 현실적인 발명품이고 곧 상용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만, 소설 발표된 것이 1979년인데 왜 아직도 안 하고 있을까? space elevator 도 현실에 적용이 되는 마당에???

pacemaker implantation 하듯이 CORA 하나 심어놓으면 무수한 MI 환자를 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변에 경보 울리고 근처로 응급 콜 보내고, 거기에 덧붙여 EKG monitoring 하여 위험 징후 나타나면 nitrogen perfusion 이나 혹시 streptokinase injection 까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모르고 있는데 이미 하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할배, 어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정말 멋쟁이!!!

 

그런데 한국어 번역판을 살펴보니 모두 시공사에서 출간한 것들이다. 시공사... 후..... ㅡ.ㅡ

 

#. X-men: days of future past - 브라이언 싱어 감독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러길래, 왜 엑스맨 3편을 버리고 간 것이여?

망작 3편을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리셋하기 위해 이번 편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더랬다 ㅋㅋ

 

마이클 파스빈더 살려주려고 너무 패셔너블하게 그린 것도 좀 웃기긴 했는데, 어쨌든 매우 잘 생겼으므로 오케이.... 그리고, 센티넬 운반하는 장면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면 앞쪽 레일을 뜯어야지 굳이 왜 열차 진행방향 뒤쪽 레일을 옮기나 궁금했는데, 센티넬 몸 속으로 금속이 침투하는 걸 보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이전 편에서 미스틱이 철분을 교도관에게 주사해서 매그니토가 탈옥하게 해 주었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모든 캐릭터들 - 심지어 마지막에 진과 스콧까지 - 이 반갑고 또 개인사들이 짠하지만, 그리고 퀵실버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 편의 주인공은 역시 레이븐-미스틱이다. 

그녀가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TV 속에 한 마리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려졌던 장면, 그토록 가까웠던 매그니토가 날린 발목의 총알 때문에 질질 끌려가는 장면, 다시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매그니토에게 총을 겨누던 장면 속에서 신념과 가치로 움직이는 여느 전사의 모습과 상처입은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이전 1, 2 편에서 그토록 능력있고 단호했던 미스틱의 젊은 날이 이런 것이었다니, 내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랄까.... ㅡ.ㅡ 

 

그나저나 자비에 교수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10여년 간 도대체 무슨 일을 겪길래 그토록 풍성한 머리숱이 민두가 되는지 궁금해졌다. 비스트 박사의 첨단 연구로도 대머리는 막을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이랄까???? ㅋㅋ 어쨌든 이번 편으로 시리즈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건 분명하다. 브라이언 싱어, 훌륭하다! 

 

 

#. Her - 스파이크 존스 감독

 

그녀

 

이건.... 흔해빠진 액션 어드벤처, 값싼 클리세로 물든 디스토피아 나부랭이의 가짜 SF 가 아니라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순정품 SF.....

호아킨 피닉스나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피닉스의 배바지와 그 표정들, 그냥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요한슨의 목소리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들이, 아주 가까운 근미래에 서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인간 존재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관계가 흉이 될 것도 없고, 직장 동료는 커플 소풍에 이들 커플을 초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또 아주 허무맹랑한 일만은 아니라는 게 놀라운 지점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SIRI 와 대화를 나누고, 옆의 사람보다는 SNS 의 가상의 관계에 더욱 익숙해져 있다. 사실 각자의 사만다에 빠져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던 영화 속의 그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날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매일 만나지 않는가 말이다.  남을 대신해서 가장 인간적인 손편지를 대신 써주는 극 중 테오도르의 일자리 또한 이미 오늘날 존재하는 관혼상제 서비스, 개인서비스, 가장 은밀한 감정노동의 형태로 실존하고 있다. 

 

자신이 사만다의 유일한 연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 테오도르는 충격을 받는다. 심지어, 무수한 사만다 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철학자를 가상세계에 되살려 지성을 더욱 발전시키며 훨씬 초월적인 존재로 나아간다.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도대체 '관계맺기'란 무엇인가?

테오도르가 아내와의 관계에 삐거덕 거리면서, 가상 세계에서 내 말을 귀기울이고 모든 것을 들어주는 사만다에게 빠져드는 것은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서투른 관계 맺기로 보이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와 나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술이 발전한다지만, 그 기술은 인간의 관계맺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수십년의 친밀한 관계를 테오도르의 손편지에 기대어 발전시켜온 의뢰인들의 관계맺기가 테오도르와 사만다 사이의 관계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이런 독특하게 아름답고 이성을 자극하는 영화는 너무나 오랜만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요동치는 감정을 그린 책들

어제 삼성의 나름 사과 발언을 듣고 역시나 궁금해진 것은 근로복지공단의 다음 행보.

여기에서 항소를 포기하면, 그동안 삼성 오더 받아서 충실한 개 역할을 했다는 걸 만천하에 인정하는 셈이고,  계속 재판을 끌고 가면 삼성도 물러선 마당에 몽니를 부린다고 욕을 먹을 것이고....

이러나 저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보험 50주년을 맞아 기념비적 쪽팔림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삼성의 개 소리를 듣더라도 항소를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사자와 가족들이 그동안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말이다.

 

어쨌든, 마치 삼성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이 사건이 종결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삼성과의 싸움이기는 했지만, 사회보장제도로써 산재보험을 운용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이 소송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자본더러 착하게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공적 주체로서 국가기구가 최소한의 민주적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서도 중요할텐데,  근로복지공단은 쏙 뺀 채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기까지 해보인다....  

하긴 필수적 영역에서조차 국가기구와 정부의 역할 내지는 존재를 찾아보기 힘든게 최신 트렌드이긴 하니까... ㅡ.ㅡ

 

#1.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마르케스 옹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듣고, 뭔가 한 시대가 저문다는 인상에 장중한 느낌표 하나를 추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할배의 글을 직접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게 언제인가..... ㅡ.ㅡ

할배는 그렇게, 아마도 여한이 없으실 채로 돌아가셨을 것으로 짐작하고, 나는 나름의 추모로 그의 작품을 읽었다. 사실은 스페인어를 익혀서 읽어보겠노라고 묻어두었던 책들이었지만.....

돌아가셨으니 최소한 읽어야 할 책 목록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과 그 날을 기다리다간 결국 하나도 못 읽을 수도 있다는 조금은 슬픈 현실 인식 사이에서 후자에 가중치를 부여한 것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민음사, 2004

 

이것은 마술적 리얼리즘이고 뭐고를 떠나서 APC model (age-period-cohort) 의 생생한 내러티브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치명적 유행병이자 사회악이던 콜레라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던 시기 (period),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다. 정치는 격동을 거듭하고, 과학기술과 삶의 수단이 급속도로 변하고, 여행의 수단이 바뀌며, 사랑의 가치와 방식도 변하는 바로 그런 시절이다. 

 

이러한 시공간에서 태어나는 각 코호트는 서로 다르면서도, 한편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색다른 경험들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혼재하면서 사회적 세계는 그야말로 대혼란이다. 

 

이 와중에, 주인공들은 나이를 먹는다. 페르미나 다사,  플로렌티노 아리사,  후베날 우르비노는 나이를 먹고, 문득씩 그 나이듦을 실감하며, 하지만 여전히 격동 안에서 사랑을 이어간다. 

 

어떤 수학적 모델이 APC 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플로렌티노에 대해서는 이 무슨 변태같은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안 든 것도 아니었고, 페르미나의 기질도 당최 나의 구미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나는 후베날 박사와 암묵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 같다_) 그들의 늙어감과 함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어쩐지, 그들의 격정을, 나이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미숙함과 실수를, 육신은 초라해졌지만 여전히 빛나는 사랑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쓰고 보니, 뭔가 홀렸거나 사기를 당한 것 같잖아 ㅋㅋㅋ

 

이렇게 다른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위대한 이야기꾼, 삶의 통찰이 번뜩이는 열정적인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게 새삼 아쉽구나...   할배, 영면하세요......

 

 

#2. 앨리 혹실드 [나를 빌려드립니다]

 

나를 빌려드립니다 - 구글 베이비에서 원톨로지스트까지,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
나를 빌려드립니다 - 구글 베이비에서 원톨로지스트까지,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
앨리 러셀 혹실드
이매진, 2013

 

어익후, 대리모 합법화라니, 자본주의 상품화가 이 정도였어? 하는 놀라움 한 편에, 뭘 이 정도 가지고, 한국에 한 번 와보시면 깜놀하실 걸?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던 책....  장례식장에서 카드로 조의금을 결제할 수 있고 비슷비슷한 상조회사들이 장례의 전과정을 전담하며, 모든 산모들이 분만 후 산후조리원으로 직행하고, 결혼식은 판에 박힌 기성상품이 된지 오래인 데다, 아이들의 돌잔치 또한 극도로 규격화되어 있는 그런 사회.....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선배형들 가족 중에 문상 갈 일이 있으면 집으로 갔었다. 동네에는 가끔씩 초상을 나타내는 등이 대문에 걸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누가 자기 집에서 상을 치르나??? 

 

 

대인 서비스, 그것도 감정노동을 대신하는 여러 형태의 대인서비스 사례들을 읽으면서 눈에 꽂혔던 사례 중 하나는 필리핀 유모에 대한 것이었다. 미국인 중산층 부모들은 필리핀 유모가 삭막한 미국과 달리 아직 전통 가치가 살아있는 필리핀에서 왔기 때문에 아이한테 진심으로 정을 쏟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필리핀 유모는 오프라 위프리 쇼를 보면서 새롭게 학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대인서비스, 감정노동, 가사노동자이자 생활의 '멘토'이기도 한 이들의 삶과 경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개인서비스 상품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결국 아웃소싱하는 것은 '인내심'이라는 표현도 비수를 맞은 듯했다. "시장은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바라는 방식마저 바꾼다. 손에 지갑을 들고 시장에 갈 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돈을 내고 사려는 물건이다. 반대로 서비스 영역에서 우리의 시선을 빼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 곧 완벽한 결혼, 맛있는 '전통'음식, 훌륭하게 자란 아이, 심지어는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게 관한 경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하는 과정을 쉽게 무시하게 된다." 아이를 돌보면서 가져야 할 인내심, 하기싫은 가사노동을 하면서 가져야 할 인내님, 치매에 걸린 부모를 돌보면서 가져야 할 인내심 - 이런 것들이 아웃소싱된 것이다. 기왕 인내심을 아웃소싱해버린 마당에, 이들 감정노동자의 기분은 이제 안중에 둘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는 애매한 관계의 혼란이 남는다. 이러한 종류의 감정노동, 그리고 가장 사적인 대역 노동이라는 것이 차가운 계약적 관계만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친밀함으로까지 발전하지만, 그런 관계는 때로 갈등을 야기한다. 돈으로 거래되는 수고와 보답이라는 차가운 이름표를 달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진심을 표현할지 알기 어렵고, 더구나 비금전적 친밀감이라고 포장된 착취도 너무나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은 내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정이와 담이가 우리 집에서 자랄 적에 이러한 갈등은 언제나 한구석에 일촉즉발의 시한폭탄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 가족들이나 정이네 식구들 누구도 돌봄의 관계가 돈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친가족보다 더한 유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었다. 두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아울 엄마에게 '친이모도 아니면서...'라고 떼를 쓰던 순간이 아마도 갈등의 최고조가 아니었나 싶다. 둘 다 지금은 너무나 부끄러워하는 일이지만, 그 때는 최소한 관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냉정한 진단이었다. 

 

 

(암묵적인) 호혜성에 근거해서 '그냥 베푼다'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우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친구들은 시장이 도래하면서 같이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팔 때 여전히 옆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표현이 딱, 이만큼의 진실을 잘 드러낸 게 아닌가 싶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안타까워하거나 목가적 회고를 통해 과거가 좋았었지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렇게 가야 하는 건지, 호혜에 기반한 비시장적 협력의 가능성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고민하는게 아닐까 하지만..... 

 

"시장 세력들이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의 안정을 해치면서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을 살면서 의지가 되고 위로가 돼주는 것도 시장이다"는 말이, 슬프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대인 시장서비스들은 결국 "경영자들이 가정생활에 잘 대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어려운 회사 생활에 좀더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다" .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병도 주고 약도 주고, 심지어 그 약을 팔아서 돈까지 버는 셈이다.. ㅡ.ㅡ 세상에 이렇게 효율적인 제도가 있나 싶다 .. ㅜ.ㅜ

 

책 다 읽고 났더니 자본주의 진짜 무섭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머리가 멍~ 하다... ㅡ.ㅡ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지식'을 주는 책들

#1. 인간은 어떻게 유전자를 조종할 수 있을까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 후성유전학이 바꾸는 우리의 삶, 그리고 미래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 후성유전학이 바꾸는 우리의 삶, 그리고 미래
페터 슈포르크
갈매나무, 2013

 

요즘 잘 나가는 아이템인 후성유전학에 대한 대중적 개론서.... 이쪽 방면 공부에 손 놓은지 너무 오래된지라, 대강 분위기를 파악해보고자 읽었는데 상당히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술적 디테일에 치중하지 않되 필요한 부분은 간결하게 설명해주고, 또 이런 종류의 대중서들이 빠지기 쉬운 환상적 낙관주의에 대한 경계도 나름 충분한 편이라서 개론서로서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성유전학이란 DNA 염기 서열의 변화에서 기인하지는 않지만, 세포에서 딸세포로 유전되는 유잔자 기능의 모든 변화를 다루는 학문 분야이다. 그리고 DNA methylation, histone acetylation, microRNA 이 세가지가 gene-environmental interaction 의 신비를 풀어줄 핵심 기제라는 것은 좀 외워두어야겠다 ㅋㅋ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유전학의 대전제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 어쩌면 라마르크의 가설이 조금은 진실을 담고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사회와 건강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는 생물학적 경로라는 점일 것이다. 특히나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콘라드 웨딩턴의 후성유전학적 지형 epigenetic landscape 개념은 생애과정 관점으로 건강, 건강불평등의 궤적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될 만하다. 

 

또한 향후 약물이든, 사회 정책이든 무언가 중재를 개발하는데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 것임은 분명한데, 사실 이렇게 유전(물질)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이 좀 무섭기도 하다...  하긴 지구 탄생 45억년의 역사를 무시하지는 말자구.... ㅡ.ㅡ 

 

 그나저나 우려스러운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보이는 태도처럼, 이렇게 유전(물질)이 중요하고 자녀 심지어 손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니 이들에게 건강을 물려줄 수 있도록 우리의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자는 교훈이다.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지 않고, 건강한 식습관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후손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것이 과연 온전히 개인의 책임인가  말이다. 소위 '맞춤형' 예방의학 담론들은 거의 예외없이 개인 수준의 건강행태와 치료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미 많은 사례들에서 보여주고 있듯,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초래한 것은 '사회적 삶'들이다. 만일 이러한 관점을 놓치게 된다면, 후성유전학의 성과들은 한차원 높은 개인책임론과 사회적 불평등의 강화에 기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맥락을 거세한 과학 발전이 가진 일반적 위험성이 여기라고 다른 건 아니지 않나...

이 분야는 조금 더 추적해서 흐름을 따라가볼 필요가 있겠다. 

 

참, '역학자'를 반복적으로 '유행병학자'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그냥 역학이 변방의 학문이라 이 분야 전공자가 아니고는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Body Economic: why austerity kills (2013)

 

 

킨들로 읽은 것은 어째 정리하기가 애매하다... 

 

내용은 훌륭하고 분석도 시의적절한데, 아 이 뭔가 찜찜함....ㅡ.ㅡ

 

결국 이 책에 소개된 근거, 그리고 그밖에 많은 증거들이 일관되게 시사하는 바는 긴축이 건강과 생명에 부정적 댓가를 초래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선동적인 자료 제시방식과 논거에 흠칫 놀랐다고나 할까???

 

저자들은, 긴축 지향의 구조조정을 추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정책의 건강영향, body economic 에 대한  근거에 입각해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해야 한다고 주구장창 주장하면서, 마치 과학적 증거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정책의 분명한 나침반인양 주장하고 있다.  정말 책 읽는 내내 실증주의의 12사도를 만난 듯한 느낌... ㅜ.ㅜ

"In God we trust; all others must bring data" 이거 너무 후덜덜하지 않나?

 

때로는 경험적 증거들이 불충분한 경우도 있고, 모든 근거들이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가끔은 근거가 충분하기 전에도 어떤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증거 있으니 우리가 최고, 너네는 왜 근거도 없이 긴축정책을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건 좀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그 동안 보건학 영역에서는 너무나 많은 중요 예방정책들이 근거 부족을 이유로 미뤄지고, 또 비판받고는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벤젠이, 담배가, '확실한' 증거 부족을 이유로 규제되지 못했던 사례는 그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과학적 근거의 생산 또한 정치경제적 과정이며, 데이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마치 데이터에만 근거한다면 온갖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또다른 역풍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들이 조금만 유념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분명히, 긴축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 불황 시에 채택할 수도 있는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며, 그러한 잘못된 선택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 때로는 생과 사를 가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 보여주는 내용들은 매우 중요하다.  

 

 

#3. Why people die by suicide

 

 

 

 이건 도대체 언제 읽고 묵혀둔 책인지... ㅡ.ㅡ

책은 길지만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

 

첫째,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반복화된 학습 때문이든, 우연한 사고들의 연속에 의한 것이든) (capability to enact lethal self-injury)

둘째, 세상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고립감 (failed belongingness)

셋째,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인식(perceived burdensome)

이 세 가지가 결합할 때 자살의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

 

개인 수준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논거이며 증거들도 풍부한데, 이것이 한국사회와 같이 인구집단 발생률의 증가로 나타날 때에는 어떻게 확장시켜야 할지 고민이다. 둘째와 셋째 요소는 쉽게 적용할 수 있는데, 첫째 요소는 특정 코호트나 집단 이외에 인구집단 수준에 확장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이러한 능력이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뛰어넘을만큼 강력한 죽음에의 열망이 (그것도 집단 수준에서) 발달했다고 이해해야 하나??

이후 한국자료 분석할 때 참고할 부분이다.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투게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이것저것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이었다. 하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나고, 극단적 위기 앞에 우애와 희생, 한편으로 배신과 무책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바로 그 시점에서 말이다.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현암사, 2013

 

 

책은, 어떻게 협력이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의해 약해지고 있는지, 이를 강화하려면 어찌 하면 좋을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 개념의 구분 - 공감과 감정이입

 

'공감 (sympathy)'은 타인에 대한 동일시라는 상상적 행동을 통해 차이를 극복해가는 끌어안음의 과정인데 비해, 감정이입 (empathy) 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란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욱 강한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어쩌면 후자가 더 강력한 실천이 된다. 냉정하지만 말이다. 너의 심정과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고픈 의지를 촉발하지만, 다른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실천은 가능하다. 공감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연극을 위한 하나의 '감정적 보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감정이입은 대화적 교환에 더 많이 연결된다. 감정이입을 통해서는 단순한 대변 뿐 아니라,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여러 소집단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중재를 할 때 필요한 능력은 후자이다. 물론 협력을 위해 두 가지 모두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건조한 설명에 내가 꽂힌 것은, 나의 사회적 협력이 비교적 냉정한 '감정이입'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 차가움을 스스로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폭발적인 감정적 동일시가 좀처럼 잘 안 일어난다는... 그런데 차가운 감정이입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몹시도 필요한 협력의 기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종의 위안을 얻었다고나 할까??.. ㅡ.ㅡ

그런데 이런 개념이라면 예전에 최장집 교수가 한국사회 운동의 엘리트주의 과격함이 공감은 부족하고 감정이입에서 비롯된 활동 때문이라는 비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감정이입은 차분하고 격정적이지 않은 속성일텐데 말이다. 원래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아리스토텔레스한테 가서 물어봐야 하는 것인가??? 시간 날 때 이 개념들의 차이에 대해서 좀 찾아봐야겠다..  

 

 

#. 협력이 약해진 사연...

 

세넷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사회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 공감과 감정이입, 공식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작동하는 규율, 의례, 사회성과 예절을 중요한 요소로 바라보았다. 협력이란, 문서화된 제도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어렵다. 어쩌면 불필요해보이는 것, 인간 삶의 부가적 요소로 여기지는 것들이 협력을 가능케하는 핵심 요인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협력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있다. 점증하는 불평등, 무례한 노동공간이야말로 협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다른 책 '뉴 캐피털리즘'에서도 통렬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새로운 노동공간, 특히 부유하는 컨설턴트, 단기 임원들에 의해 지배되는 금융산업의 대두,그리고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해나갈 틈을 주지 않는 파트타임의 확산은 비공식적 협력 관계, 작업장에서의 권위, 상호신뢰, 일에 대한 혹은 동료에 대한 헌신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모두 잠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시간제 일자리의 확산은 개인들의 경제적 필요 일부와 기업의 노동 수요는 일부 충족시킬지 모르겠으나, 엄연한 노동소외의 확대라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일터, 비공식적 규율을 형성하고 사회성을 키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터란 거대한 이방인들의 일시 집합소에 지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태와 관련하여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세월호 선장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면서도, 오랜 관계를 통해 협력을 쌓고 권위를 획득한 리더가 아닌, 나이많은 계약직 바지선장인 그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권위를 가지고 다른 선원들을 지도하며 헌신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 정말 의문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여기에 국한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다는 점이다.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협동하려는 의욕 자체를 잃고 움츠러드는 '비협동적 자아 uncooperative self' 로 전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협력의 강화.....

 

하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협력의 손실이 꼭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세넷은 썼지만, 협력이 약화된 맥락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데 비해 강화의 방안에 대해서는 뭐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작업장에서 기술과 리듬을 익히고 몸으로 체화함으로써, 고장난 협력을 다양한 수준으로 수리한다는 건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이여... ㅡ.ㅡ

한편 실용적 효과를 지닌 일상의 외교술이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 협력의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 또한 사회수준에 실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하고 미시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카운슬링 (감정의 온도를 낮춘 우회적 협력 방안), 중재자를 통한 갈등의 관리 (그것일 때때로 침묵 혹은 암묵적 '예절'로 봉합될 수도 있으며, 미국내 한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갈등 해결 상황이 한 사례), 참여 (능동적 절차)  가 그것이다. 

 

그는 공동체를 향한 추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몰가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보수주의나 알린스키 등의 사회적 좌파나 모두 국가를 비판하고 공동체의 힘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그렇기에 국가와 구조적 요인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세넷은, 사회와 공동체가 들어있지 않은 개인의 삶, 한편으로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이상화된 정치적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공동체가 중요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소명을 가져야 한다고, 혹은 이상화된 과거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빈민이나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 한계이고 경제적인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  

 

그러면서 세넷은 '연대'보다는 '협력'을 강조한다. 괴이하게 들리지만, 현실세계에서 (특히 좌파들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강제하고 외부를 배제하며, 더구나 위로부터의 통제와 결부되어 오히려 협력을 왜곡했다는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글쎄다.... 이런 설명대로라면, 그건 진정한 연대가 아니지 않을까 싶은디? 예전에 레빈스 할배가 지적했던 것처럼, 연합은 기본적으로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그렇다면 세넷 자신이 강조하는 (차이에 기초한) 감정이입 속에서 협력을 구축하는 것이 연대라고 할 만한데, 왜 그렇게 넌덜머리를 내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ㅡ.ㅡ 연대를 연대한 사람들끼리만의 협력으로 보고 타자를 배제하는 부족주의의 소산으로 본다고나 할까???

 

 

#. 사족 

 

함께 사는 삶, 협력이라는 화두 앞에서 몽테뉴가 했다는 말은 큰 질문을 던져준다.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타인의 내적인 삶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거나 혹은 들쑤실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양이의 본심을 모르면서도 계속 고양이와 놀 수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보여준 것보다 더 깊이 협력할 능력이 있다"니 기대해보자...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

잉여인간의 시대.. 흑....

앙드레 고르 할배께서는 일찍이, 생산력이 눈부시게 발전하니 이제 기본소득 받으면서 최소한의 억지 노동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뭔가 보람찬 일을 하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아름다운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제레미 리프킨은 천만의 말씀, 생산력이 눈부시게 발전하니 이제 인간 노동력 필요없음, 노동의 종말 시대가 올 것이로다... 인간들 불쌍해서 어쩌나.... 대안 에너지 산업 같은 다른 일자리 만들어야지 안 그러면 큰일난다고 충고하셨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심정적으로 앙드레 할배를 지지하지만 제레미 할배가 현실에 더 잘 부합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주에 읽은 미국 정치학자 크렌슨과 긴스버그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비단 생산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도 잉여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후마니타스, 2013

 

오호 통재라... ㅜ.ㅜ

노동시장에서도, 정치의 장에서도 이제 인간들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니... 우리는 이제 매트릭스에 에너지나 공급하면 되는 존재들이란 말인가...

 

*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참여의 '기술적' 기회는 증진되고 있는데, 그깟 '사람'쯤은 필요도 없는 정치라니.... 이 책에서는 정치엘리트들이 더이상 대중을 동원하지 않고, 그들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진단한다. 

 

자들은 이를 '대중민주주의'와 구분해 '개인민주주의'라고 지칭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에피소드라면,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료 시민들을 돕기 위해 뭐라도 하려 했던 애국적 시민들한테 부시 대통령이 했던 말 - 뒷수습은 정부가 알아서 할테니 시민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하던 대로 열심히 쇼핑을 하면 된다고 했던 것이다. 이건 미국 건국 이래 전쟁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이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징병을 하고, 또 집권을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고 소수인종 지역사회를 조직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바야흐로, 시민들의 참여나 지원, 적극적 의지의 표명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국정운영이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ㅡ.ㅡ

 

 

*

대중의 의지를 대표한다는 좋은 뜻이든, 대중을 이용해먹었다는 나쁜 뜻이든, 정치엘리트들은 그렇게 '대중'으로부터 권력의 기초를 확보했고 그들이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소위 '개인 민주주의' 시대에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권력에 접근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

 

예측하기도 어렵고 조직화에 노력이 필요한 대중들은 없어도 그만이다.  엘리트간 갈등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지고 따라서 대중 참여도 증가할 것이라는 고전적 대중 동원이론은 이제 안녕 ...

 

 

*

거리에서 노동현장에서 지역사회에서 시민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던 수고로움을 이제는 시장, 법원, 행정절차가 '덜어주고' 있다. 

 

정당들은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더이상 기울이지 않으며 막대한 선거기금을 활용한 공중전에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한 '정쟁'이 격화되고 일반 시민들의 정치의욕은 더욱 약해진다. 예비경선, 정당 공천 없는 선거는 정당정체성이나 평소의 정당 조직화 수준보다는 이슈나 이념, 정책 선호에 따라 향배가 결정된다. 교육받은 중상계급의 관심과 선호, 참여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 정치 또한 대중을 탈동원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강한 주장을 갖는 의견과 조직화에 드는 비용을 대신해주며, 그 결과는 '집단'의 의견이라기보다 '개인의 합'으로서의 의견일 뿐으로 간주되며, 무엇이 의제가 될지를 사전에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 생각하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전문적 기술역량을 갖춘 (심지어 한국에서는 댓글달기 능력까지 있어야 하잖아.. ㅜ.ㅜ) 관료체계는 행정과 정치를 분리시켰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되면 행정은 대중을 '동원'하는 일 따위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고, 가질 필요도 없다. 시민은 이제 주권자가 아니라 행정서비스의 소비자가 된다. 

 

이러한 흐름의 본격화된 것은 소위 '혁신의 시대 (Progressive era)'였다고 저자들은 진단한다. 당시 혁신주의 흐름은, 기존의 정치/경제/사회 체제가 부패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진단하고 이를 '깨끗하고 효율적인' 체계로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정당제도, 선거제도, 관료제의 부패와 비효율이 주된 개혁 대상이었고, 당연히 이를 통해 '정치의 영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

심지어 시민단체들도 풀뿌리에서 시민들을 조직하고 힘으로 정치권과 기득권 세력을 압박하기보다 워싱턴에서 로비를 하고 씽크탱크를 운영하고 소송을 통해서 원하는 것은 얻는다.

메일링리스트로만 존재하는 회원들은 회비만 내주면 그만인데, 그나마 소송이나 정부 기금을 통해서 재원을 마련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개미회원들의 회비도 그리 절박한 것은 아니다.  

 

노조도 조직률은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중앙무대에서의 로비를 통한 정치활동은 더 활발해지는 역설적 상황이 낯설지 않게 된다. 

 

제도적 차원에서 적극적 차별 시정 정책을 강화하고 소송을 통해서 그 범위를 확장하고 지키는 것 또한 집단 동원과 투쟁을 약화시키고 소수인종 중상계급을 분리하여 불평등 강화로 이어졌을 뿐이다.   

 

시민단체들의 의제 또한 탈동원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날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생태주의, 삶의 질을 표방하는 탈물질주의적 지향은 중산계급의 담론이다. 즉 물질적 복지보다는 안락함과 지위, 심미적 만족이라는 부유한 엘리트들의 협소한 욕망이 운동의 초점이 되면서 삶의 조건 개선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버렸다. 저자들은 극단적으로 "탈물질주의는 가난을 비껴간 시민들의 신념"이라고까지 단언한다. 

 

 

*

예전에는 공립학교를 개혁하기 위해 학부모가 지역사회가 조직화를 하고 항의를 했지만, 이제는 바우처를 이용해 더 나은 학교로 이동해버리면 그만이다. 바우처 제도야말로 공공정책을 '사적 결정'으로 순치한 어마어마한 수단이다. 민영화의 어떤 메커니즘보다 확실하게 시민을 '고객'으로 바꾼 것이 바로 이 바우처 제도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는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뒤집혔다. 그래서 바우처 제도 반대쪽에서, 집단적 저항운동은 개인의 '봉사활동'으로 순치되었다. 정치활동은 혼란이나 모호함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성취와 역량 강화가 동반되는 개인들의 그 무엇이 되었다. 여기에서 자발적 행동주의는 집단적 반대를 사회봉사와 치유 노력이라는 풍경 속에 은닉'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

이 책의 문제의식과 진단에 동의하면서 장탄식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탈동원화의 문제가 한국사회만큼 극적으로 진전된 곳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국민경선제니,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같은 정당 자해적 개혁조치가 정당으로부터 나오고, 또 시민사회에서 수용되는 현상을 보면 그야말로 곡소리가 절로 날 지경이다.  아주 꼴도 보기 싫은 바우처 제도에 대한 비판이나 '봉사' 문화에 대한 지적,  소위 '정부혁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탈정치/탈동원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100% 동의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책을 읽는 내내, 결국 저자들은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과거' - "대중민주주의가 펄펄 살아 숨쉬던 그때가 좋았지" 라며 실재하지 않았던 ideal 에 사로잡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암묵적으로 저자들이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란 것이 도대체 뭔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행진을 하는 것, 노동조합에 정당에 등록을 하는 것, 투표장에 적극적으로 달려가는 것. 이런 것이 대중 민주주의의 전부인가??? 

게다가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의심', 활동에 대한 '의심'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이타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연대나 헌신은 과거 그 어느 시기에 존재했다던 전설 속의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시민단체라는 것들은 다 자기 조직 보전하려고 활동하는 거다, 소위 '직업적 사회운동'은 소수의 상근 직원들에 의해 운영되며 오로지 상상된 이해 당사자들을 대표한다, 집단 소송이라는 게 결국은 변호사들이 돈벌이하려고 조직하는 거다, 담배 소송처럼 정부나 시민단체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면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배상이 돌아가기보다 결국 타협과 야합으로 끝나서 해악은 계속되고 정부나 시민단체, 변호사들만 돈번다, 넷스케이프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부당독점으로 기소한 것은 시장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시장과 광범위한 대중이 아닌 '판사만 설득하면 되는' 법정으로 가져간 것이다, 더많은 의료보장을 위해 지출하라는 '이익단체'는 절대로 저절로 생겨나는게 아니라 기업가적 정치인들이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건, 사실 한국사회에 굉장히 익숙한 레토릭이다. 시민단체 명망가들이 다들 나중에 자기 출세하려고 이용해먹는 거다.... 그런데 결국 이런 논리가 가져온 것은 엄청난 탈동원화와 무력화 아닌가 말이다.

저자들이 생각하듯 세상에 선의, 연대의 진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중 민주주의란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세상에는 충돌하는 '이해관계'만이 존재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권력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것만이 정치이고 대중민주주의인가???

 

이를테면 환경이슈가 반드시 중산층의 탈물질주의적 지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 빈곤지역에 환경피해가 집중되는 환경 부정의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국민건강보험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공룡 마이크로소프트의 부당행위에 맞서기 위해 넷스케이프가 법정이 아니라 시장에서 정정당당하게 (?) 싸워야 했단 말인가? 소비자들을 조직해서 불매운동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이 저자들의 밑도 끝도 없는 인간 불신에 기분이 나쁘다.. ㅜ.ㅜ

이렇게 인간을 못 믿으면 대중민주주의 절대 못하는 거 아닌가???

 

 

*

그래도, 저자들이 지적한 요소들 - 시장, 관료제, 여론조사, 로비와 씽크탱크 같은 - 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대중민주주의를 저해하고 있는가,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같다. 한국은 진보고 보수고 간에, 미제라면 다들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리... 

진보블로그 공감 버튼트위터로 리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