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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4/06/08
    코스모스 Again
    hongsili
  2. 2014/06/06
    science fiction vs. non-fiction
    hongsili
  3. 2014/05/16
    요동치는 감정을 그린 책들(1)
    hongsili
  4. 2014/05/06
    '지식'을 주는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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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4/04/22
    투게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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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4/02/15
    잉여인간의 시대..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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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4/01/25
    삶의 위안에 대한 이야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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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3/09/13
    어쩌라는 건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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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3/08/25
    이상한 감정이입
    hongsili
  10. 2013/08/19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hongsili

코스모스 Again

hongsili님의 [코스모스] 에 관련된 글.

 

책으로 보았던 코스모스가 다큐멘터리와 셋트라는 것을 안 것은 2005년 미국에 머무를 때였다. 칼 세이건 할배의 얼굴도 그 때서야 처음 보았더랬다. 사실 우리 또래 중에 코스모스 다큐를 직접 본 사람이 얼마나 되나 모르겠다. 요즘처럼 인터넷으로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국내에 비디오가 출시된 것도 아니니 초중고등학교 시절에 이 다큐를 보면서 과학의 꿈을 키웠을 가능성은 매우 낮았을 것... ㅡ.ㅡ

 

하지만, 처음으로 코스모스를 보고 난 후 감격하여, 그 후 DVD 를 사서 여러 번 반복해서 보았다. 엄청 촌스러운 화면에, 역시나 촌스러운 칼 세이건 할배의 차림새에도 불구하고, 그 익숙한 배경음악만 시작되어도 가슴이 떨리곤 했다.

리메이크 작품이 만들어진다고 했을 때, 우려 반, 기대 반.... 첫 프롤로그 편을 보았을 때에도 너무 화려해진 화면, 그리고 내가 별로 신뢰하지 않는 NGC 작품이라는 것에 좀 허거덕하기는 했다 (심지어 제작사가 Fox 흑...) 그리고 닐 타이슨 목소리가.... 음..... 좀 기름지다 ㅜ.ㅜ

하지만 회가 거듭될수록, 역시나 또 빠져들고 말았다.

당연히, 그래픽이 멋지거나 스케일이 웅장해서는 결코 아니다.

 

실패와 역경, 때로는 위험에 맞선 과학자들의 이야기들은 감동 그 자체였고, 계속해서 강조하고 있는 회의적 사고와 권위에의 의심, 스스로의 판단, 오류 가능성에 대한 인정, 이성이 아닌 믿음에 굴복하지 말라는 메시지는 다시 들어도 계속 사무쳤다. 

 

여러 과학자들 이야기 중에서, 특히나 패러데이 이야기는 정말 코끝이 찡했다.

가난한 집안 출신의 제본사 패러데이가 공개 강연에서 스타과학자의 강연을 듣고 존경의 마음을 표현하고자 자신이 제본한 그의 강연집을 선물하며 이루어진 인연 이야기에서 시작하여, 가난한 계급 출신의 그가 결코 넘지 못했던 수학의 장벽을, 부유한 가문의 천재수학자 젊은 멕스웰이 수식으로 만들어서 그 논문집을 그에게 선물했던 이야기로 끝난 에피소드 말이다.  패러데이는 40대 이후로 우울증이라는 병마와 싸우면서도 과학에의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가난한 계급 아이들이 참여할 수 있도록 왕실과학원에 공개과학 강연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오늘날에도 이 전통이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칼 세이건도 여기에 강연자로 참여한 적이 있다.

지구의 나이를 측정하기 위해 납함량 분석에 평생을 바쳐온 패터슨이 뜻하지 않게 근세기 납농도 증가를 밝혀냄으로써 자동차/석유 산업의 엄청난 공격을 받았고, 하지만 과학적 증거 앞에 굴복하지 않은 그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 무연휘발유가 탄생하여 수없는 사람들의 건강을 지키게 된 이야기 또한 심금(?)을 울렸다. 그동안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던 헨리에트 리비트 같은 여성 과학자들에 대한 소개도 매우매우 좋았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대륙이동설의 증거를 확인했던 한 여성과학자가 지도교수의 권위에 눌려 자신의 논문을 부정했던 이야기는 참 현실적이면서도 교훈을 주는 에피소드였다.  

 

전반적으로, 이보다 더 교훈적이고 이보다 더 계몽적일 수 없으면서도,

그러면서도 재미와 감동이 있었다.

 

마지막 에피소드에는 원본에서 등장했던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이야기가 재등장한다.

세계의 지식이 보관된 인류의 보물이었지만, 그 보물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은 한 줌의 엘리트들뿐이었고, 그래서 적들이 쳐들어와서 도서관을 불태웠을 때, 함께 도와 도서관을 지킬 수 있는 사람들은 없었다는 이야기는 매우 의미심장하다.

마지막에, 오늘날 과학은 너무 소중한 자산이기 때문에, 하지만 엄청난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에 소수에게만 맡겨둘 수 없다는 이야기가 바로 코스모스를 만든 칼세이건과 그 후예들의 뜻을 잘 드러낸다. 칼 세이건 할배는 평생 이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했다. 과학의 잠재력과 위험성, 그 두 가지를 잘 조화시킬 수 있는 것은 계몽된 대중, 생각하는 대중이 있을 때 뿐이라는 점 말이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다. ㅡ.ㅡ  오죽하면 30년 만에 이걸 다시 만들 생각을 했을까...

오리지널 버전에서는 지구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냉전구도와 지구온난화가 핵심 의제였다면, 이번 편에서는 (대놓고는 아니지만) 또라이 기독교의 논리를 반박하는 데 상당히 고심한 흔적을 엿볼 수 있다. 세상이 변한 것이다. 그것도 나쁜 방향으로... ㅜ.ㅜ 칼 세이건 할배 돌아가신 이래, 시계바퀴가 거꾸로 돌아서 미국에서는 진화론이 한낱 가설이라고 공격받는 일이 드문 일도 아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굳이 길가메시의 서에 나온 대홍수 이야기가 천년 후 구약성서의 노아 이야기로 발전했다는 언급을 한 것이나, 그랜드캐년에 서서 이것이 생겨난 게 6천년 전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꼭 해야만 할 필요가 생겨난 것이다. 오호 통재라... ㅡ.ㅡ

그러다보니 기독교 근본주의 집단에서 코스모스에 대한 공격을 엄청나게 하고 있다고...  

제발, 그들이 걱정하는 대로, 어린이와 청소년들이 부디 이 작품을 보고 과학적/회의주의적 사고와 이성, 호기심을 키워나가 신에게 거역하는 세대로 자라났으면 하는 바램이다.

 

어쨌든, 보고 있자니 다시 칼 세이건 할배 생각이 났다. 

그의 명료하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전해주던 과학과 이성의 이야기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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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ience fiction vs. non-fiction

최근 감상한 일련의 작품들을 돌아보면서, 책상 위에 묵혀 두었던 두 권 고전 소설에 대한 메모도 함께 정리해둔다

 

#. Arthur C. Clarke. <Childhood's end> Ballantine 1984

 

 

 

이 책의 초판 발행이 1953년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새록새록 깜놀하지 않을 수 없다. 

 

우주 개발을 둘러싼 두 열강의 각축은 아직 시작되지도 않았었고, 남아공의 아파르트 헤이트 중단이나 스페인의 투우 금지 같은 것을 생각지도 못했던 그 시절 말이다.  

 

과학의 발전이라는 것이 아무런 기반도 없는 채 어느 날 갑자기 섬광처럼 나타난 반짝 사건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라, 이전까지의 성과에 기초한 이성과 논리의 진화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한다. 다수의 과학소설가들이 보여주는 미래사회에 대한 놀라운 예측은 그들의 신묘한 통밥이 아니라, 끝까지 밀어 붙이는 논리적 상상의 전개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지배적 정조는 우울이다. 지구인들이 맞이한 새로운 세기는 딱히 디스토피아가 아니지만 그렇다고 유토피아라 하기도 어렵다. 전쟁이 없고 물질적 안녕과 복리는 그야말로 골든 에이지라 할 수 있지만, 고통과 갈등과 도전, 절망 조차도 인간 삶의 한 부분이라고 본다면 결코 행복이라고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시기인 것이다. 그리고 극도의 발전, 그 끝에는 새로운 존재로의 변환과 해탈(?)이 있다. Childhood's end 라는 제목은 그야말로 지구 상에 어린이가 사라졌다는 사실, 유년이 통째로 손실되었다는 사실을 나타낼 뿐 아니라, 우주에서 유년기와 같던 지구의 소멸, 그리고 모든 신비주의와 종교를 벗어버린 인류에 대한 비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가장 유쾌한 (?) 장면이라면, 50년 만에 존재를 드러낸 Overloads 의 외모가 '붉은 악마'였다는 점이다. 종교에 대한 불경스러움은 humanist  SF 작가들의 미덕이다 ㅋㅋ..

그리고 새로운 사회를 시험하기 위한 Athens vs. Sparta 프로젝트는 우리의 율도국 프로젝트에 작은 단서들을 주지만, 물질적 기반이 너무나 다르다는게 함정... ㅡ.ㅡ

 

 

#. Arthur C. Clarke <The Fountains of Paradise> Aspect

 

 

할배는 공평하다.

기독교만 까대지 않는다 ㅋㅋ

완고한 불교 승려들과의 대립을 극복하고, 지구 최고의 공돌이 Morgan 은 space elevator 를 건설한다. 그냥 건설에 성공하는 정도가 아니라, 중간에 발생한 사고를 직접 나서 극복하는 만능 히어로 ㅋㅋ

 

고대 전설과 종교- 세속의 정치적 대립, 미디어 같은 소재들을 능수능란하게 엮어가며,

한 엔지니어의 천재성과 불굴의 집념을 이토록 손에 땀을 쥐도록 그려내는 작가의 역량에 새삼 놀랐더랬다. 괜히 SF 삼대천왕이 아닌 게여 ㅋㅋ

 

그러나 정작 내가 가장 꽂힌 것은 Morgan 의 건설 엔지니어링보다 그의 가슴에 부착된 CORA!!!

이거 너무 현실적인 발명품이고 곧 상용화될 수도 있을 것 같다만, 소설 발표된 것이 1979년인데 왜 아직도 안 하고 있을까? space elevator 도 현실에 적용이 되는 마당에???

pacemaker implantation 하듯이 CORA 하나 심어놓으면 무수한 MI 환자를 살릴 수 있을 것만 같다. 주변에 경보 울리고 근처로 응급 콜 보내고, 거기에 덧붙여 EKG monitoring 하여 위험 징후 나타나면 nitrogen perfusion 이나 혹시 streptokinase injection 까지 해줄 수 있지 않을까???  내가 모르고 있는데 이미 하고 있는 걸까?

그나저나 할배, 어쩜 이런 생각을 했는지, 정말 멋쟁이!!!

 

그런데 한국어 번역판을 살펴보니 모두 시공사에서 출간한 것들이다. 시공사... 후..... ㅡ.ㅡ

 

#. X-men: days of future past - 브라이언 싱어 감독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그러길래, 왜 엑스맨 3편을 버리고 간 것이여?

망작 3편을 관객들의 기억 속에서 지우고 리셋하기 위해 이번 편을 만들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더랬다 ㅋㅋ

 

마이클 파스빈더 살려주려고 너무 패셔너블하게 그린 것도 좀 웃기긴 했는데, 어쨌든 매우 잘 생겼으므로 오케이.... 그리고, 센티넬 운반하는 장면에서 열차를 전복시키려면 앞쪽 레일을 뜯어야지 굳이 왜 열차 진행방향 뒤쪽 레일을 옮기나 궁금했는데, 센티넬 몸 속으로 금속이 침투하는 걸 보면서 입이 쩍 벌어졌다. 이전 편에서 미스틱이 철분을 교도관에게 주사해서 매그니토가 탈옥하게 해 주었던 것을 떠올리게 하는 장면이다. 

 

모든 캐릭터들 - 심지어 마지막에 진과 스콧까지 - 이 반갑고 또 개인사들이 짠하지만, 그리고 퀵실버의 등장이 예사롭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번 편의 주인공은 역시 레이븐-미스틱이다. 

그녀가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TV 속에 한 마리 상처입은 짐승처럼 그려졌던 장면, 그토록 가까웠던 매그니토가 날린 발목의 총알 때문에 질질 끌려가는 장면, 다시 자신의 목숨을 걸고서 매그니토에게 총을 겨누던 장면 속에서 신념과 가치로 움직이는 여느 전사의 모습과 상처입은 인간의 모습을 동시에 보았다. 이전 1, 2 편에서 그토록 능력있고 단호했던 미스틱의 젊은 날이 이런 것이었다니, 내가 만감이 교차하는 느낌이랄까.... ㅡ.ㅡ 

 

그나저나 자비에 교수는 영화에 등장하지 않는 10여년 간 도대체 무슨 일을 겪길래 그토록 풍성한 머리숱이 민두가 되는지 궁금해졌다. 비스트 박사의 첨단 연구로도 대머리는 막을 수 없다는 슬픈 진실이랄까???? ㅋㅋ 어쨌든 이번 편으로 시리즈를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된 건 분명하다. 브라이언 싱어, 훌륭하다! 

 

 

#. Her - 스파이크 존스 감독

 

그녀

 

이건.... 흔해빠진 액션 어드벤처, 값싼 클리세로 물든 디스토피아 나부랭이의 가짜 SF 가 아니라 진짜 오랜만에 만나는 순정품 SF.....

호아킨 피닉스나 스칼렛 요한슨의 연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특히 피닉스의 배바지와 그 표정들, 그냥 눈으로 보고 있는 것 같은 요한슨의 목소리는 정말 할 말을 잃게 만들었다.

 

이들이, 아주 가까운 근미래에 서로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눈다.  인간 존재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이런 관계가 흉이 될 것도 없고, 직장 동료는 커플 소풍에 이들 커플을 초대하기도 한다. 그런데 이게 또 아주 허무맹랑한 일만은 아니라는 게 놀라운 지점이다. 

 

이미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SIRI 와 대화를 나누고, 옆의 사람보다는 SNS 의 가상의 관계에 더욱 익숙해져 있다. 사실 각자의 사만다에 빠져서 그녀와 대화를 나누며 길을 걷던 영화 속의 그 수많은 사람들을 우리는 오늘날 지하철에서 거리에서 매일 만나지 않는가 말이다.  남을 대신해서 가장 인간적인 손편지를 대신 써주는 극 중 테오도르의 일자리 또한 이미 오늘날 존재하는 관혼상제 서비스, 개인서비스, 가장 은밀한 감정노동의 형태로 실존하고 있다. 

 

자신이 사만다의 유일한 연인이 아니었음을 깨달았을 때 테오도르는 충격을 받는다. 심지어, 무수한 사만다 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철학자를 가상세계에 되살려 지성을 더욱 발전시키며 훨씬 초월적인 존재로 나아간다. 인간의 육체에 갇혀 있지 않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도대체 '관계맺기'란 무엇인가?

테오도르가 아내와의 관계에 삐거덕 거리면서, 가상 세계에서 내 말을 귀기울이고 모든 것을 들어주는 사만다에게 빠져드는 것은 무척이나 이기적이고 서투른 관계 맺기로 보이지만, 이성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와 나도 저런 사람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마 나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기술이 발전한다지만, 그 기술은 인간의 관계맺기를 더욱 어렵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다. 수십년의 친밀한 관계를 테오도르의 손편지에 기대어 발전시켜온 의뢰인들의 관계맺기가 테오도르와 사만다 사이의 관계보다 더 나은 것이라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정말, 이런 독특하게 아름답고 이성을 자극하는 영화는 너무나 오랜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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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치는 감정을 그린 책들

어제 삼성의 나름 사과 발언을 듣고 역시나 궁금해진 것은 근로복지공단의 다음 행보.

여기에서 항소를 포기하면, 그동안 삼성 오더 받아서 충실한 개 역할을 했다는 걸 만천하에 인정하는 셈이고,  계속 재판을 끌고 가면 삼성도 물러선 마당에 몽니를 부린다고 욕을 먹을 것이고....

이러나 저러나, 근로복지공단은 산재보험 50주년을 맞아 기념비적 쪽팔림을 경험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삼성의 개 소리를 듣더라도 항소를 중단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사자와 가족들이 그동안 받은 고통을 생각하면 말이다.

 

어쨌든, 마치 삼성이 전향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으니, 이 사건이 종결된 것처럼 보도하는 언론의 태도는 문제라고 생각한다. 본질적으로 삼성과의 싸움이기는 했지만, 사회보장제도로써 산재보험을 운용하고 있는 근로복지공단이 소송의 당사자였기 때문이다. 자본더러 착하게 행동하라고 요구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국 공적 주체로서 국가기구가 최소한의 민주적 공공성을 확보하는 것이 앞으로를 위해서도 중요할텐데,  근로복지공단은 쏙 뺀 채 논의를 진행하는 것은 다소 위험하기까지 해보인다....  

하긴 필수적 영역에서조차 국가기구와 정부의 역할 내지는 존재를 찾아보기 힘든게 최신 트렌드이긴 하니까... ㅡ.ㅡ

 

#1.  마르케스 [콜레라 시대의 사랑]

 

 

마르케스 옹이 돌아가셨다는 뉴스를 듣고, 뭔가 한 시대가 저문다는 인상에 장중한 느낌표 하나를 추가하는 느낌이 들었다. 스페인어를 열심히 공부해서, 할배의 글을 직접 읽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던게 언제인가..... ㅡ.ㅡ

할배는 그렇게, 아마도 여한이 없으실 채로 돌아가셨을 것으로 짐작하고, 나는 나름의 추모로 그의 작품을 읽었다. 사실은 스페인어를 익혀서 읽어보겠노라고 묻어두었던 책들이었지만.....

돌아가셨으니 최소한 읽어야 할 책 목록이 늘어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낙관과 그 날을 기다리다간 결국 하나도 못 읽을 수도 있다는 조금은 슬픈 현실 인식 사이에서 후자에 가중치를 부여한 것이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콜레라 시대의 사랑 1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민음사, 2004

 

이것은 마술적 리얼리즘이고 뭐고를 떠나서 APC model (age-period-cohort) 의 생생한 내러티브 버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치명적 유행병이자 사회악이던 콜레라가 점차 사라져가고 있던 시기 (period), 세상은 빠르게 변화한다. 정치는 격동을 거듭하고, 과학기술과 삶의 수단이 급속도로 변하고, 여행의 수단이 바뀌며, 사랑의 가치와 방식도 변하는 바로 그런 시절이다. 

 

이러한 시공간에서 태어나는 각 코호트는 서로 다르면서도, 한편으로 공유할 수밖에 없는 색다른 경험들을 한다. 하지만 이것들이 혼재하면서 사회적 세계는 그야말로 대혼란이다. 

 

이 와중에, 주인공들은 나이를 먹는다. 페르미나 다사,  플로렌티노 아리사,  후베날 우르비노는 나이를 먹고, 문득씩 그 나이듦을 실감하며, 하지만 여전히 격동 안에서 사랑을 이어간다. 

 

어떤 수학적 모델이 APC 를 더 잘 설명할 수 있을까?

 

플로렌티노에 대해서는 이 무슨 변태같은 인간인가 하는 생각이 안 든 것도 아니었고, 페르미나의 기질도 당최 나의 구미에 맞는 것은 아니었지만 (사실 나는 후베날 박사와 암묵적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었던 것 같다_) 그들의 늙어감과 함께 모든 것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공감할 수 있게 된 것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모르겠다.  어쩐지, 그들의 격정을, 나이들어도 사라지지 않는 미숙함과 실수를, 육신은 초라해졌지만 여전히 빛나는 사랑에 나도 모르게 응원을 보낸 것 같기도 하다. 쓰고 보니, 뭔가 홀렸거나 사기를 당한 것 같잖아 ㅋㅋㅋ

 

이렇게 다른 사람을 홀릴 수 있는 위대한 이야기꾼, 삶의 통찰이 번뜩이는 열정적인 작가가 세상을 떠났다는게 새삼 아쉽구나...   할배, 영면하세요......

 

 

#2. 앨리 혹실드 [나를 빌려드립니다]

 

나를 빌려드립니다 - 구글 베이비에서 원톨로지스트까지,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
나를 빌려드립니다 - 구글 베이비에서 원톨로지스트까지, 사생활을 사고파는 아웃소싱 자본주의
앨리 러셀 혹실드
이매진, 2013

 

어익후, 대리모 합법화라니, 자본주의 상품화가 이 정도였어? 하는 놀라움 한 편에, 뭘 이 정도 가지고, 한국에 한 번 와보시면 깜놀하실 걸? 하는 생각이 동시에 떠올랐던 책....  장례식장에서 카드로 조의금을 결제할 수 있고 비슷비슷한 상조회사들이 장례의 전과정을 전담하며, 모든 산모들이 분만 후 산후조리원으로 직행하고, 결혼식은 판에 박힌 기성상품이 된지 오래인 데다, 아이들의 돌잔치 또한 극도로 규격화되어 있는 그런 사회..... 대학 다닐 때만 해도 선배형들 가족 중에 문상 갈 일이 있으면 집으로 갔었다. 동네에는 가끔씩 초상을 나타내는 등이 대문에 걸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제 누가 자기 집에서 상을 치르나??? 

 

 

대인 서비스, 그것도 감정노동을 대신하는 여러 형태의 대인서비스 사례들을 읽으면서 눈에 꽂혔던 사례 중 하나는 필리핀 유모에 대한 것이었다. 미국인 중산층 부모들은 필리핀 유모가 삭막한 미국과 달리 아직 전통 가치가 살아있는 필리핀에서 왔기 때문에 아이한테 진심으로 정을 쏟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필리핀 유모는 오프라 위프리 쇼를 보면서 새롭게 학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우리는 이러한 종류의 대인서비스, 감정노동, 가사노동자이자 생활의 '멘토'이기도 한 이들의 삶과 경험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한다. 

 

 

또한 이러한 개인서비스 상품을 이용하면서 사람들이 결국 아웃소싱하는 것은 '인내심'이라는 표현도 비수를 맞은 듯했다. "시장은 우리가 바라는 것 이상으로, 우리가 바라는 방식마저 바꾼다. 손에 지갑을 들고 시장에 갈 때 우리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은 돈을 내고 사려는 물건이다. 반대로 서비스 영역에서 우리의 시선을 빼았는 것은 물건이 아니라 '경험', 곧 완벽한 결혼, 맛있는 '전통'음식, 훌륭하게 자란 아이, 심지어는 건강하게 태어난 아이게 관한 경험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하는 과정을 쉽게 무시하게 된다." 아이를 돌보면서 가져야 할 인내심, 하기싫은 가사노동을 하면서 가져야 할 인내님, 치매에 걸린 부모를 돌보면서 가져야 할 인내심 - 이런 것들이 아웃소싱된 것이다. 기왕 인내심을 아웃소싱해버린 마당에, 이들 감정노동자의 기분은 이제 안중에 둘 필요조차 없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용주와 피고용인 사이에는 애매한 관계의 혼란이 남는다. 이러한 종류의 감정노동, 그리고 가장 사적인 대역 노동이라는 것이 차가운 계약적 관계만으로는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가족이나 친구와 같은 친밀함으로까지 발전하지만, 그런 관계는 때로 갈등을 야기한다. 돈으로 거래되는 수고와 보답이라는 차가운 이름표를 달고 싶지 않지만, 그렇다고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진심을 표현할지 알기 어렵고, 더구나 비금전적 친밀감이라고 포장된 착취도 너무나 빈번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갈등은 내게 전혀 낯선 것이 아니다. 정이와 담이가 우리 집에서 자랄 적에 이러한 갈등은 언제나 한구석에 일촉즉발의 시한폭탄처럼 남아 있었다. 우리 가족들이나 정이네 식구들 누구도 돌봄의 관계가 돈에 의해서 유지되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친가족보다 더한 유대관계에 기초하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여전히 불씨는 남아있었다. 두 아이들이 사춘기를 맞아울 엄마에게 '친이모도 아니면서...'라고 떼를 쓰던 순간이 아마도 갈등의 최고조가 아니었나 싶다. 둘 다 지금은 너무나 부끄러워하는 일이지만, 그 때는 최소한 관계에 대한 그들 나름의 냉정한 진단이었다. 

 

 

(암묵적인) 호혜성에 근거해서 '그냥 베푼다'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는 세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친구가, 우정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친구들은 시장이 도래하면서 같이 사라진 게 아니라 우리가 시장에서 상품을 사고팔 때 여전히 옆에서 함께 하고 있다"는 표현이 딱, 이만큼의 진실을 잘 드러낸 게 아닌가 싶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러한 상황에 안타까워하거나 목가적 회고를 통해 과거가 좋았었지 한탄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도 이렇게 가야 하는 건지, 호혜에 기반한 비시장적 협력의 가능성은 어떻게 만들어낼 수 있는지 고민하는게 아닐까 하지만..... 

 

"시장 세력들이 직장 생활과 가정 생활의 안정을 해치면서 불안감을 조장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인생을 살면서 의지가 되고 위로가 돼주는 것도 시장이다"는 말이, 슬프지만 진실이다. 그리고 이렇게 다양한 대인 시장서비스들은 결국 "경영자들이 가정생활에 잘 대처할 수 있게 함으로써 어려운 회사 생활에 좀더 쉽게 적응할 수 있게 도와준다" .  말하자면 자본주의는 병도 주고 약도 주고, 심지어 그 약을 팔아서 돈까지 버는 셈이다.. ㅡ.ㅡ 세상에 이렇게 효율적인 제도가 있나 싶다 .. ㅜ.ㅜ

 

책 다 읽고 났더니 자본주의 진짜 무섭다는 생각에 압도되어 머리가 멍~ 하다...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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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을 주는 책들

#1. 인간은 어떻게 유전자를 조종할 수 있을까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 후성유전학이 바꾸는 우리의 삶, 그리고 미래
인간은 유전자를 어떻게 조종할 수 있을까 - 후성유전학이 바꾸는 우리의 삶, 그리고 미래
페터 슈포르크
갈매나무, 2013

 

요즘 잘 나가는 아이템인 후성유전학에 대한 대중적 개론서.... 이쪽 방면 공부에 손 놓은지 너무 오래된지라, 대강 분위기를 파악해보고자 읽었는데 상당히 충실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기술적 디테일에 치중하지 않되 필요한 부분은 간결하게 설명해주고, 또 이런 종류의 대중서들이 빠지기 쉬운 환상적 낙관주의에 대한 경계도 나름 충분한 편이라서 개론서로서는 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성유전학이란 DNA 염기 서열의 변화에서 기인하지는 않지만, 세포에서 딸세포로 유전되는 유잔자 기능의 모든 변화를 다루는 학문 분야이다. 그리고 DNA methylation, histone acetylation, microRNA 이 세가지가 gene-environmental interaction 의 신비를 풀어줄 핵심 기제라는 것은 좀 외워두어야겠다 ㅋㅋ 획득형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유전학의 대전제에 금이 가고 있다는 것, 어쩌면 라마르크의 가설이 조금은 진실을 담고 있을 수도 있었다는 것...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후성유전학적 변화가 사회와 건강 사이의 관계를 연결하는 생물학적 경로라는 점일 것이다. 특히나 책에서 소개하고 있는 콘라드 웨딩턴의 후성유전학적 지형 epigenetic landscape 개념은 생애과정 관점으로 건강, 건강불평등의 궤적을 이해하는데 매우 도움이 될 만하다. 

 

또한 향후 약물이든, 사회 정책이든 무언가 중재를 개발하는데 중요한 고려사항이 될 것임은 분명한데, 사실 이렇게 유전(물질)의 힘이 강력하다는 것이 좀 무섭기도 하다...  하긴 지구 탄생 45억년의 역사를 무시하지는 말자구.... ㅡ.ㅡ 

 

 그나저나 우려스러운 것은, 이 책의 저자가 보이는 태도처럼, 이렇게 유전(물질)이 중요하고 자녀 심지어 손자녀에게까지 영향을 미치니 이들에게 건강을 물려줄 수 있도록 우리의 행동거지를 바르게 하자는 교훈이다.  시간을 내서 운동을 하지 않고, 건강한 식습관을 갖지 못하고, 그래서 후손들에게까지 민폐를 끼치는 것이 과연 온전히 개인의 책임인가  말이다. 소위 '맞춤형' 예방의학 담론들은 거의 예외없이 개인 수준의 건강행태와 치료에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러나 저자가 이미 많은 사례들에서 보여주고 있듯, 후성유전학적 변화를 초래한 것은 '사회적 삶'들이다. 만일 이러한 관점을 놓치게 된다면, 후성유전학의 성과들은 한차원 높은 개인책임론과 사회적 불평등의 강화에 기여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사회적 맥락을 거세한 과학 발전이 가진 일반적 위험성이 여기라고 다른 건 아니지 않나...

이 분야는 조금 더 추적해서 흐름을 따라가볼 필요가 있겠다. 

 

참, '역학자'를 반복적으로 '유행병학자'라고 번역한 것에 대해서는, 그냥 역학이 변방의 학문이라 이 분야 전공자가 아니고는 이름조차 아는 사람이 없다는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 Body Economic: why austerity kills (2013)

 

 

킨들로 읽은 것은 어째 정리하기가 애매하다... 

 

내용은 훌륭하고 분석도 시의적절한데, 아 이 뭔가 찜찜함....ㅡ.ㅡ

 

결국 이 책에 소개된 근거, 그리고 그밖에 많은 증거들이 일관되게 시사하는 바는 긴축이 건강과 생명에 부정적 댓가를 초래한다는 것인데, 여기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매우 선동적인 자료 제시방식과 논거에 흠칫 놀랐다고나 할까???

 

저자들은, 긴축 지향의 구조조정을 추구하는 경제학자들이 정책의 건강영향, body economic 에 대한  근거에 입각해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해야 한다고 주구장창 주장하면서, 마치 과학적 증거야말로 더할 나위 없는 정책의 분명한 나침반인양 주장하고 있다.  정말 책 읽는 내내 실증주의의 12사도를 만난 듯한 느낌... ㅜ.ㅜ

"In God we trust; all others must bring data" 이거 너무 후덜덜하지 않나?

 

때로는 경험적 증거들이 불충분한 경우도 있고, 모든 근거들이 일관되게 한 방향으로의 결과를 보여주는 것도 아니며, 더군다나 가끔은 근거가 충분하기 전에도 어떤 정책을 시행해야 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렇게 "증거 있으니 우리가 최고, 너네는 왜 근거도 없이 긴축정책을 하는 거야"라고 말한다면 이건 좀 너무 위험하지 않은가 말이다. 사실, 그 동안 보건학 영역에서는 너무나 많은 중요 예방정책들이 근거 부족을 이유로 미뤄지고, 또 비판받고는 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벤젠이, 담배가, '확실한' 증거 부족을 이유로 규제되지 못했던 사례는 그 중 아주 일부에 불과하다. 

 

과학적 근거의 생산 또한 정치경제적 과정이며, 데이터는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마치 데이터에만 근거한다면 온갖 합리적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또다른 역풍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저자들이 조금만 유념했더라면 좋았을 뻔했다.   

 

분명히, 긴축은 필연적인 것이 아니라, 경제 불황 시에 채택할 수도 있는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며, 그러한 잘못된 선택이 수많은 사람들의 삶의 질, 때로는 생과 사를 가르기도 한다는 점에서 이 책이 보여주는 내용들은 매우 중요하다.  

 

 

#3. Why people die by suicide

 

 

 

 이건 도대체 언제 읽고 묵혀둔 책인지... ㅡ.ㅡ

책은 길지만 핵심 메시지는 세 가지.

 

첫째, 자신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반복화된 학습 때문이든, 우연한 사고들의 연속에 의한 것이든) (capability to enact lethal self-injury)

둘째, 세상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는 고립감 (failed belongingness)

셋째,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주고 있다는  인식(perceived burdensome)

이 세 가지가 결합할 때 자살의 위험이 크게 증가한다는 것.

 

개인 수준에서 매우 설득력 있는 논거이며 증거들도 풍부한데, 이것이 한국사회와 같이 인구집단 발생률의 증가로 나타날 때에는 어떻게 확장시켜야 할지 고민이다. 둘째와 셋째 요소는 쉽게 적용할 수 있는데, 첫째 요소는 특정 코호트나 집단 이외에 인구집단 수준에 확장하기가 쉽지 않다. 심지어 이러한 능력이 갖춰지지 않았음에도, 그것을 뛰어넘을만큼 강력한 죽음에의 열망이 (그것도 집단 수준에서) 발달했다고 이해해야 하나??

이후 한국자료 분석할 때 참고할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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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게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기

이것저것 생각거리를 많이 던져준 책이었다. 하필, 세월호 침몰 사고가 나고, 극단적 위기 앞에 우애와 희생, 한편으로 배신과 무책임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던 바로 그 시점에서 말이다.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투게더 -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리차드 세넷
현암사, 2013

 

 

책은, 어떻게 협력이 형성되고 변화하는지, 그리고 무엇에 의해 약해지고 있는지, 이를 강화하려면 어찌 하면 좋을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 개념의 구분 - 공감과 감정이입

 

'공감 (sympathy)'은 타인에 대한 동일시라는 상상적 행동을 통해 차이를 극복해가는 끌어안음의 과정인데 비해, 감정이입 (empathy) 은 자신의 기준에 따라 다른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란다.

전자가 후자에 비해 더욱 강한 감정으로 여겨지지만, 어쩌면 후자가 더 강력한 실천이 된다. 냉정하지만 말이다. 너의 심정과 고통을 내 것처럼 느낀다는 것이 문제를 해결하고픈 의지를 촉발하지만, 다른 이와 같다는 생각을 하지 않으면서도 실천은 가능하다. 공감은 정-반-합이라는 변증법적 연극을 위한 하나의 '감정적 보상'으로 이해될 수 있는 반면, 감정이입은 대화적 교환에 더 많이 연결된다. 감정이입을 통해서는 단순한 대변 뿐 아니라, 배움을 얻을 수 있다. 여러 소집단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중재를 할 때 필요한 능력은 후자이다. 물론 협력을 위해 두 가지 모두 중요함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건조한 설명에 내가 꽂힌 것은, 나의 사회적 협력이 비교적 냉정한 '감정이입'에 기초하고 있었고  그 차가움을 스스로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도대체가 폭발적인 감정적 동일시가 좀처럼 잘 안 일어난다는... 그런데 차가운 감정이입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닐 뿐 아니라 몹시도 필요한 협력의 기술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일종의 위안을 얻었다고나 할까??.. ㅡ.ㅡ

그런데 이런 개념이라면 예전에 최장집 교수가 한국사회 운동의 엘리트주의 과격함이 공감은 부족하고 감정이입에서 비롯된 활동 때문이라는 비판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기본적으로 감정이입은 차분하고 격정적이지 않은 속성일텐데 말이다. 원래의 정의가 무엇인지는 아리스토텔레스한테 가서 물어봐야 하는 것인가??? 시간 날 때 이 개념들의 차이에 대해서 좀 찾아봐야겠다..  

 

 

#. 협력이 약해진 사연...

 

세넷은 함께 살아가는 인간사회에서 말로 표현되지 않은 것, 공감과 감정이입, 공식 제도화되지는 않았지만 작동하는 규율, 의례, 사회성과 예절을 중요한 요소로 바라보았다. 협력이란, 문서화된 제도나 명령에 의해서 이루어지기 어렵다. 어쩌면 불필요해보이는 것, 인간 삶의 부가적 요소로 여기지는 것들이 협력을 가능케하는 핵심 요인들이다. 

 

그런데, 오늘날, 협력은 빠른 속도로 쇠퇴하고 있다. 점증하는 불평등, 무례한 노동공간이야말로 협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다. 그의 다른 책 '뉴 캐피털리즘'에서도 통렬하게 지적했던 것처럼, 새로운 노동공간, 특히 부유하는 컨설턴트, 단기 임원들에 의해 지배되는 금융산업의 대두,그리고 안정적인 관계를 구축해나갈 틈을 주지 않는 파트타임의 확산은 비공식적 협력 관계, 작업장에서의 권위, 상호신뢰, 일에 대한 혹은 동료에 대한 헌신 같은 소중한 가치들을 모두 잠식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소위 시간제 일자리의 확산은 개인들의 경제적 필요 일부와 기업의 노동 수요는 일부 충족시킬지 모르겠으나, 엄연한 노동소외의 확대라 보아도 무방할 듯 싶다. 관계를 맺지 못하는 일터, 비공식적 규율을 형성하고 사회성을 키울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 일터란 거대한 이방인들의 일시 집합소에 지나지 않을테니 말이다.   

그리고 최근의 사태와 관련하여 덧붙이고 싶은 것은....

세월호 선장의 행동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하다 생각하면서도, 오랜 관계를 통해 협력을 쌓고 권위를 획득한 리더가 아닌, 나이많은 계약직 바지선장인 그가, 위기 상황에서 얼마나 권위를 가지고 다른 선원들을 지도하며 헌신을 보여줄 수 있었을지 정말 의문이라는 점이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여기에 국한된 특수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 만연해있다는 점이다. 무섭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많은 이들이 협동하려는 의욕 자체를 잃고 움츠러드는 '비협동적 자아 uncooperative self' 로 전환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협력의 강화.....

 

하지만 너무 실망할 필요는 없다. 협력의 손실이 꼭 돌이킬 수 없는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라고 세넷은 썼지만, 협력이 약화된 맥락에 대한 설명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데 비해 강화의 방안에 대해서는 뭐가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작업장에서 기술과 리듬을 익히고 몸으로 체화함으로써, 고장난 협력을 다양한 수준으로 수리한다는 건데, 이게 도대체 어떻게 가능하다는 것이여... ㅡ.ㅡ

한편 실용적 효과를 지닌 일상의 외교술이라는 이름으로 몇 가지 협력의 방안을 제시하는데, 이 또한 사회수준에 실행하기에는 지나치게 모호하고 미시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카운슬링 (감정의 온도를 낮춘 우회적 협력 방안), 중재자를 통한 갈등의 관리 (그것일 때때로 침묵 혹은 암묵적 '예절'로 봉합될 수도 있으며, 미국내 한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갈등 해결 상황이 한 사례), 참여 (능동적 절차)  가 그것이다. 

 

그는 공동체를 향한 추구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그것은 몰가치적인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같다. 보수주의나 알린스키 등의 사회적 좌파나 모두 국가를 비판하고 공동체의 힘을 강조하지만, 후자는 그렇기에 국가와 구조적 요인의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세넷은, 사회와 공동체가 들어있지 않은 개인의 삶, 한편으로 아렌트가 이야기하는 이상화된 정치적 공동체 모두에 대해서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도 무엇보다 공동체가 중요하고 공동체를 건설하는데 소명을 가져야 한다고, 혹은 이상화된 과거의 공동체로 돌아가야 한다고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그보다는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 사람들이 일대일 관계의 가치와 그런 관계의 한계를 모두 실현해내는 과정으로서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싶다. 빈민이나 주변적인 인간들에게 그 한계는 정치적 한계이고 경제적인 한계이다. 가치는 사회적 가치이다. 공동체가 비록 삶의 전부를 채워주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진지한 즐거움을 약속해주기는 한다."  

 

그러면서 세넷은 '연대'보다는 '협력'을 강조한다. 괴이하게 들리지만, 현실세계에서 (특히 좌파들이) 연대라는 이름으로 타인을 강제하고 외부를 배제하며, 더구나 위로부터의 통제와 결부되어 오히려 협력을 왜곡했다는 문제의식과 관련이 있다. 글쎄다.... 이런 설명대로라면, 그건 진정한 연대가 아니지 않을까 싶은디? 예전에 레빈스 할배가 지적했던 것처럼, 연합은 기본적으로 차이의 존재를 인정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고, 그렇다면 세넷 자신이 강조하는 (차이에 기초한) 감정이입 속에서 협력을 구축하는 것이 연대라고 할 만한데, 왜 그렇게 넌덜머리를 내는 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ㅡ.ㅡ 연대를 연대한 사람들끼리만의 협력으로 보고 타자를 배제하는 부족주의의 소산으로 본다고나 할까???

 

 

#. 사족 

 

함께 사는 삶, 협력이라는 화두 앞에서 몽테뉴가 했다는 말은 큰 질문을 던져준다. "내가 고양이와 놀고 있으면서, 사실은 그 고양이가 나와 놀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내가 어찌 알겠는가?" 타인의 내적인 삶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하거나 혹은 들쑤실 수 있냐는 것이다. 그러게나 말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고양이의 본심을 모르면서도 계속 고양이와 놀 수 있다.  "사회적 동물로서 우리는 기존의 사회적 질서가 보여준 것보다 더 깊이 협력할 능력이 있다"니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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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인간의 시대.. 흑....

앙드레 고르 할배께서는 일찍이, 생산력이 눈부시게 발전하니 이제 기본소득 받으면서 최소한의 억지 노동만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뭔가 보람찬 일을 하면서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는 아름다운 말씀을 하셨다.

 

하지만 제레미 리프킨은 천만의 말씀, 생산력이 눈부시게 발전하니 이제 인간 노동력 필요없음, 노동의 종말 시대가 올 것이로다... 인간들 불쌍해서 어쩌나.... 대안 에너지 산업 같은 다른 일자리 만들어야지 안 그러면 큰일난다고 충고하셨다.

 

세상 돌아가는 꼴을 보자면, 심정적으로 앙드레 할배를 지지하지만 제레미 할배가 현실에 더 잘 부합한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지난 주에 읽은 미국 정치학자 크렌슨과 긴스버그의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는 비단 생산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의 영역에서도 잉여인간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다운사이징 데모크라시 - 왜 미국 민주주의는 나빠졌는가
매튜 A. 크렌슨 & 벤저민 긴스버그
후마니타스, 2013

 

오호 통재라... ㅜ.ㅜ

노동시장에서도, 정치의 장에서도 이제 인간들이 더이상 필요하지 않다니... 우리는 이제 매트릭스에 에너지나 공급하면 되는 존재들이란 말인가...

 

*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참여의 '기술적' 기회는 증진되고 있는데, 그깟 '사람'쯤은 필요도 없는 정치라니.... 이 책에서는 정치엘리트들이 더이상 대중을 동원하지 않고, 그들에 의존하지 않으면서도 권력을 유지하고 행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고 진단한다. 

 

자들은 이를 '대중민주주의'와 구분해 '개인민주주의'라고 지칭했다. 그들이 보기에 이러한 현상을 가장 상징적으로 드러낸 에피소드라면, 911 테러가 발생했을 때 나라를 지키기 위해, 동료 시민들을 돕기 위해 뭐라도 하려 했던 애국적 시민들한테 부시 대통령이 했던 말 - 뒷수습은 정부가 알아서 할테니 시민들은 자기 자리를 지키면서 하던 대로 열심히 쇼핑을 하면 된다고 했던 것이다. 이건 미국 건국 이래 전쟁을 하기 위해 더 많은 이들에게 투표권을 부여하고 징병을 하고, 또 집권을 위해 노동자를 조직하고 소수인종 지역사회를 조직했던 것과는 대조적인 현상이다. 바야흐로, 시민들의 참여나 지원, 적극적 의지의 표명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국정운영이 제대로 된다는 것이다... ㅡ.ㅡ

 

 

*

대중의 의지를 대표한다는 좋은 뜻이든, 대중을 이용해먹었다는 나쁜 뜻이든, 정치엘리트들은 그렇게 '대중'으로부터 권력의 기초를 확보했고 그들이 있어야 무언가를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 소위 '개인 민주주의' 시대에는 얼마든지 다른 방식으로 권력에 접근하고 그것을 유지할 수 있다.

 

예측하기도 어렵고 조직화에 노력이 필요한 대중들은 없어도 그만이다.  엘리트간 갈등 수준이 높아질수록 정치적 지지를 동원하기 위한 경쟁도 치열해지고 따라서 대중 참여도 증가할 것이라는 고전적 대중 동원이론은 이제 안녕 ...

 

 

*

거리에서 노동현장에서 지역사회에서 시민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던 수고로움을 이제는 시장, 법원, 행정절차가 '덜어주고' 있다. 

 

정당들은 투표율을 높이기 위한 노력을 더이상 기울이지 않으며 막대한 선거기금을 활용한 공중전에 집중한다. 그러다보니 선명성을 부각하기 위한 '정쟁'이 격화되고 일반 시민들의 정치의욕은 더욱 약해진다. 예비경선, 정당 공천 없는 선거는 정당정체성이나 평소의 정당 조직화 수준보다는 이슈나 이념, 정책 선호에 따라 향배가 결정된다. 교육받은 중상계급의 관심과 선호, 참여가 상대적으로 비중이 커질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 정치 또한 대중을 탈동원화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강한 주장을 갖는 의견과 조직화에 드는 비용을 대신해주며, 그 결과는 '집단'의 의견이라기보다 '개인의 합'으로서의 의견일 뿐으로 간주되며, 무엇이 의제가 될지를 사전에 결정해주기 때문이다. 

 

 

*

오늘날 우리가 당연하게 (?) 생각하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이고 전문적 기술역량을 갖춘 (심지어 한국에서는 댓글달기 능력까지 있어야 하잖아.. ㅜ.ㅜ) 관료체계는 행정과 정치를 분리시켰다  당연하게도, 이렇게 되면 행정은 대중을 '동원'하는 일 따위에 관심을 가져서도 안 되고, 가질 필요도 없다. 시민은 이제 주권자가 아니라 행정서비스의 소비자가 된다. 

 

이러한 흐름의 본격화된 것은 소위 '혁신의 시대 (Progressive era)'였다고 저자들은 진단한다. 당시 혁신주의 흐름은, 기존의 정치/경제/사회 체제가 부패하고 비효율적이라고 진단하고 이를 '깨끗하고 효율적인' 체계로 변화시키는데 초점을 두었다. 이 과정에서 정당제도, 선거제도, 관료제의 부패와 비효율이 주된 개혁 대상이었고, 당연히 이를 통해 '정치의 영역'은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

심지어 시민단체들도 풀뿌리에서 시민들을 조직하고 힘으로 정치권과 기득권 세력을 압박하기보다 워싱턴에서 로비를 하고 씽크탱크를 운영하고 소송을 통해서 원하는 것은 얻는다.

메일링리스트로만 존재하는 회원들은 회비만 내주면 그만인데, 그나마 소송이나 정부 기금을 통해서 재원을 마련하는 비중이 높아지면서 개미회원들의 회비도 그리 절박한 것은 아니다.  

 

노조도 조직률은 줄어들었지만 오히려 중앙무대에서의 로비를 통한 정치활동은 더 활발해지는 역설적 상황이 낯설지 않게 된다. 

 

제도적 차원에서 적극적 차별 시정 정책을 강화하고 소송을 통해서 그 범위를 확장하고 지키는 것 또한 집단 동원과 투쟁을 약화시키고 소수인종 중상계급을 분리하여 불평등 강화로 이어졌을 뿐이다.   

 

시민단체들의 의제 또한 탈동원화와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오늘날 시민운동을 대표하는 생태주의, 삶의 질을 표방하는 탈물질주의적 지향은 중산계급의 담론이다. 즉 물질적 복지보다는 안락함과 지위, 심미적 만족이라는 부유한 엘리트들의 협소한 욕망이 운동의 초점이 되면서 삶의 조건 개선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조직하고 동원하는 것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 것이 되버렸다. 저자들은 극단적으로 "탈물질주의는 가난을 비껴간 시민들의 신념"이라고까지 단언한다. 

 

 

*

예전에는 공립학교를 개혁하기 위해 학부모가 지역사회가 조직화를 하고 항의를 했지만, 이제는 바우처를 이용해 더 나은 학교로 이동해버리면 그만이다. 바우처 제도야말로 공공정책을 '사적 결정'으로 순치한 어마어마한 수단이다. 민영화의 어떤 메커니즘보다 확실하게 시민을 '고객'으로 바꾼 것이 바로 이 바우처 제도라 할 수 있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라는 구호는 '정치적인 것이 개인적인 것'으로 뒤집혔다. 그래서 바우처 제도 반대쪽에서, 집단적 저항운동은 개인의 '봉사활동'으로 순치되었다. 정치활동은 혼란이나 모호함을 유발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성취와 역량 강화가 동반되는 개인들의 그 무엇이 되었다. 여기에서 자발적 행동주의는 집단적 반대를 사회봉사와 치유 노력이라는 풍경 속에 은닉'하는 것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

이 책의 문제의식과 진단에 동의하면서 장탄식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다. 정치적 탈동원화의 문제가 한국사회만큼 극적으로 진전된 곳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국민경선제니,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같은 정당 자해적 개혁조치가 정당으로부터 나오고, 또 시민사회에서 수용되는 현상을 보면 그야말로 곡소리가 절로 날 지경이다.  아주 꼴도 보기 싫은 바우처 제도에 대한 비판이나 '봉사' 문화에 대한 지적,  소위 '정부혁신'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탈정치/탈동원화의 문제에 대해서도 100% 동의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 책을 읽는 내내, 결국 저자들은 돌아갈 수 없는 '아름다운 과거' - "대중민주주의가 펄펄 살아 숨쉬던 그때가 좋았지" 라며 실재하지 않았던 ideal 에 사로잡혀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암묵적으로 저자들이 지향하는 '대중민주주의'란 것이 도대체 뭔가?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고 행진을 하는 것, 노동조합에 정당에 등록을 하는 것, 투표장에 적극적으로 달려가는 것. 이런 것이 대중 민주주의의 전부인가??? 

게다가 저자들이 가지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의심', 활동에 대한 '의심'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에 이타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고, 연대나 헌신은 과거 그 어느 시기에 존재했다던 전설 속의 그 무엇이 아닌가 싶다.  

 

이를테면 이런 거다.

시민단체라는 것들은 다 자기 조직 보전하려고 활동하는 거다, 소위 '직업적 사회운동'은 소수의 상근 직원들에 의해 운영되며 오로지 상상된 이해 당사자들을 대표한다, 집단 소송이라는 게 결국은 변호사들이 돈벌이하려고 조직하는 거다, 담배 소송처럼 정부나 시민단체가 기업을 상대로 소송하면 피해자들에게 실질적인 배상이 돌아가기보다 결국 타협과 야합으로 끝나서 해악은 계속되고 정부나 시민단체, 변호사들만 돈번다, 넷스케이프가 마이크로소프트를 부당독점으로 기소한 것은 시장에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으니 시장과 광범위한 대중이 아닌 '판사만 설득하면 되는' 법정으로 가져간 것이다, 더많은 의료보장을 위해 지출하라는 '이익단체'는 절대로 저절로 생겨나는게 아니라 기업가적 정치인들이 만들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건, 사실 한국사회에 굉장히 익숙한 레토릭이다. 시민단체 명망가들이 다들 나중에 자기 출세하려고 이용해먹는 거다.... 그런데 결국 이런 논리가 가져온 것은 엄청난 탈동원화와 무력화 아닌가 말이다.

저자들이 생각하듯 세상에 선의, 연대의 진심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대중 민주주의란 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세상에는 충돌하는 '이해관계'만이 존재하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동원하고 (무엇을 위해서인지는 모르지만) 권력을 둘러싸고 투쟁하는 것만이 정치이고 대중민주주의인가???

 

이를테면 환경이슈가 반드시 중산층의 탈물질주의적 지향을 반영하는 것은 아니라 빈곤지역에 환경피해가 집중되는 환경 부정의의 문제이자 생존의 문제이기도 하다. 미국의 전국민건강보험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이 모두 다른 속내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니다. 거대공룡 마이크로소프트의 부당행위에 맞서기 위해 넷스케이프가 법정이 아니라 시장에서 정정당당하게 (?) 싸워야 했단 말인가? 소비자들을 조직해서 불매운동이라도 했어야 한다는 말인가???   

 

한 마디로... 이 저자들의 밑도 끝도 없는 인간 불신에 기분이 나쁘다.. ㅜ.ㅜ

이렇게 인간을 못 믿으면 대중민주주의 절대 못하는 거 아닌가???

 

 

*

그래도, 저자들이 지적한 요소들 - 시장, 관료제, 여론조사, 로비와 씽크탱크 같은 - 이 한국사회에서 어떻게 대중민주주의를 저해하고 있는가, 유심히 살펴보는 것은 매우 중요할 것같다. 한국은 진보고 보수고 간에, 미제라면 다들 좋아하는 경향이 있어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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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위안에 대한 이야기들

지난 한 주는 참, 어두운 소식들이 끊이지 않는 이상한 한 주였다. 초현실적이었던 박상표 선생님 부고도 그랬고, 친한 지인들의 개인적 수난들도 참 그로테스크했다... 

정말 인생은 고통으로 가득찬 망망대해인가 싶다.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이 우리를 진정으로 구원할 수 있을까? 

우연히도, 지난 2주 동안 삶에 대한 책과 영화를 읽고 감상했지만, 정작 이런 일들에 대처하는데 어떤 용기와 지혜를 주었는지는 잘모르겠네 그려.. ㅡ.ㅡ 

 

 

#. 알랭 드 보통 <행복의 건축>

 

행복의 건축
행복의 건축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

 

지난 가을 무렵에 문을 연 동네 도서관에는 새 책이 그득했다. 읽고 싶었던 리차드 세넷의 책들, 사회과학 서적들은 찾아보기 힘든데 그대신 예술이나 문학, 소프트 버전의 인문학 서적들은 꽤나 갖춰져 있는 것 같다. 무엇보다 모두 반딱거리는 새 책이라는 점이 장점....

보통의 이 책은 사실 제목을 '행복의 예술'이라도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작정하고 예술을 의도한 작품과 달리 건축물이란 일상 속에 존재하고 특히나 '실용성'이라는 목표가 있는만큼,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소비되고 감상할 지점이 있는 예술품이라 할 수 있겠다.  

가장 마음에 남는 문장들은 이것들이다. 

"진정으로 아름다운 작품이란 우리의 긍정적이거나 부정적인 투사를 견딜만한 내적 자산을 갖춘 것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지도모른다. 그런 작품은 좋은 특질을 단지 상기시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체현한다."

(나같은 경우) 예술작품이 감상 당시의 맥락이나 감정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는 경우가 일반적인데 비해, 돌이켜보면 정말 위대한 작품들에서는 그런 감정과 맥락 없이 그 자체로 경이와 감동을 느꼈던 것 같다. 

"사회는 무엇이든 자기 내부에 충분하지 않은 것을 예술에서 찾고 사랑한다...."

그러게나, 각박한 기술문명사회는 자연을 동경하고, 기술적으로 낙후된 사회는 '첨단'의 이미지를 선호한다. 그런 면에서 한국 사회는 독특하다. 이제는 기술/첨단/규모에의 집착을 버릴 때도 되었다 싶은데 말이다.   

노발리스라는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예술작품에서는 질서의 베일을 통해서 혼돈이 아른거려야 한다'. 정말 탁월한 진단이 아닐 수 없다. 

 

 

#. 알랭 드 보통 <철학의 위안>

 

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철학의 위안 - 불안한 존재들을 위하여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2

 

그야말로 다양한 '위안'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위안을 얻으려 읽은 것은 아니었지만, 만일 위안이 필요해서 읽었더라면 대실망했을 것 같다. 절박하게 위안이 필요한 급성기 환자보다는, 만성적으로 인생에 회의하는 이들에게 살짝 고개를 돌려보라고 제안하는 일종의 nudge? 정도로 생각하면 충분할 듯하다. 

책은 크게 여섯 가지의 위안이 필요한 사람 혹은 상황에 대해서, 여섯 명의 철학자들의 입과 생활을 빌어 '그렇지 않아' 라며 이야기하고 있는데, "인기없는 존재 - 소크라테스 / 가난한 존재 - 에피쿠로스 / 좌절한 존재  - 세네카 / 부적절한 존재 - 몽테뉴 / 상심한 존재 - 쇼펜하우어 / 어려움에 처한 존재 - 니체" 가 그것이다. 

 

문제는, 스스로 저런 상황에 처해 있다 하더라도 감히 언급된 철학자들의 처지와 가르침을 떠올리며 위안을 얻을 것 같지는 않더란 말씀.... 

이를테면 모든 통념에 대한 질문하고 세상의 부조리를 드러냈기 때문에 사람들을 온통 불편하게 만들었던 인기없는 존재 소크라테스를 이야기하며,  "소크라테스의 예를 따라서, 늘 이성의 명령에 귀를 기울이려고 노력한다면, 우리는 최고의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고 이야기하는데, 글쎄다. 많은 사람들이 인기가 없는 이유가 그들이 세상과 불화하는 소크라테스, 혹은 랭보나 보들레르이기 때문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ㅡ.ㅡ  

 

또한 정상과 비정상성에 대한 편견을 비판하고 현학을 멀리했던 몽테뉴의 가르침을 따라 "평범하고 도덕적인 삶이라면, 비록 지혜를 얻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 우둔함에서 결코 멀리 벗어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그 자체로 충분히 성취를 이룬 삶이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위안을 얻을만큼 우리가 순진하지는 않다. 

"철학의 임무는 우리의 바람이 현실세계의 단단한 벽에 부딪힐 때에 가능한 한 부드럽게 안착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것"이라는 작가의 말에는 동의하지만, 이것이 정신승리와 현실 굴종의 내면화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 한에서 말이다. 

 

사람들은 이런 책 혹은 이런 종류의 위안/힐링 강연에서 도대체 무엇을 얻는 것일까? 보통이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거듭 이야기했듯,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사람들은 도통 알지 못하고, 수학이나 문학이 아닌, 삶을 살아가는 방식을 가르치는 학교가 필요하다는 진단과 무관하지 않겠지...

 

 

#. 벤 스틸러 감독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월터의 상상은 현실이 된다

 

너무 전형적이긴 한데, 순간순간 빵 터지는 코미디와 아름다운 풍광에 나도 모르게 마음을 뺏겨버린 영화라고나 할까.... 사실 아무 데도 가본 곳이 없고, 특별한 일이라고는 없는 월터의 일상과는 조금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왔기에 딱히 로망을 가질 만한 것은 없었지만, 어쨌든 모험을 떠나는 소심남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응원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에 등장하는 그린란드 항구 마을, 아이슬란드 화산 도시, 아프가니스탄 산자락이 모두 사실은 아이슬란드 였단다. 시규어 로스의 뮤직비디오에서 마주쳤던 풍광을 떠올렸었는데 역시나....

 

누군가 '현재' 우울한 사람이 있다면 알랭 드 보통의 '철학의 위안' 보다는 이영화를 추천해주겠다.

 

 

#. 연상호 감독 <사이비>  

 

사이비

 

이 영화는 '위안'이라는 단어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다.

인간말종이 진실을 말하고, 신을 참칭한 사이비들이 그 인간말종으로부터 응징을 당한다.

 

하지만, 이런 인생의 아이러니는 이 영화가 던지는 불편한 질문의 일부에 불과하다.

터무니 없는 사이비로부터 진정한 위안을 얻었던 사람들, 그 사람들의 진심어린 표정이야말로 이 세상이 얼마나 난해한 곳이며 인간이란 얼마나 복잡한 존재인지를 보여주었던 것 같다. 보상금을 모조리 기도원 건립기금으로 갖다 바친 마을 주민들, 치료약이 아니라 반석 샘물을 마시며 병을 키워나가는 마을 주민의 모습에서 우리가 본 것은 광신자들의 기괴함이나 어리석음이 아니었다. 답답해 미칠 것 같았지만, 어쩐지 그 평화를 깨뜨리면 안 될 것 같았다.  

 

또한 세월이 흐른 후, 신을 비웃으며 사이비들을 응징했던 인간 말종이 자신만의 '진정한' 신앙으로 귀의해 있었다는 사실도 맘을 착잡하게 만들기는 마찬가지였다. 사이비가 아니라 '진짜'라면 괜찮은 거였던 것일까? 진짜와 사이비를 가르는 것은 무엇일까? 

 

사실 영화가 너무나 리얼해서, 실사가 아닌 굳이 애니메이션으로서 갖는 장점이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았는데, 아마도 저 끔찍한 상황이 실사가 아니라서 조금 덜 부담스럽게 직면할 수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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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라는 건가?

최근 읽은 책들은 공통적으로, 뭘 어쩌라는 말인가... 라는 공통된 질문을 던져주었다.

 

#. 악셀 하커, 조반니 로렌조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 두 남자의 고백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 두 남자의 고백
악셀 하케 & 조반니 디 로렌초
푸른지식, 2011

 

알라딘에서 퍼온 책표지는 저리 상쿰한 레몬색이지만... 내가 동작도서관에서 빌린 책은 껍데기 날아간 검은 양장본... ㅡ.ㅡ

유명 저널리스트이자 작가들인 두 아자씨들.

이들은 잘못된 선택과 실패를 경험하며 성장해왔고, 신사회운동의 언저리에서 적극적 혹은 소극적 참여를 경험했고,  매 순간의 선택과 비선택에 대해서 후회와 사려깊은 성찰을 피하지 않는, 괜찮은 사람들로 추정된다 (실제 사생활이야 어찌 알겠냐구... ).

 

아주 특출나게 주장이 강한 별종도 아니고, 그렇다고 온전히 시류에만 몸을 맡긴 소시민 대표주자도 아닌 그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나도 때로는 속물인 때가 있'지만 그래도 정신줄을 놓지 않으려 노력하며 살아간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의와 가치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는 품새가 마치 인생의 선배가 토닥토닥하며 후배한테 두런두런 이야기를 해주는 것 같아 좋기는 했다. 폼이나 잡고 '내가 왕년에는...' 이런 거 절대 없고 ㅋㅋㅋ

 

그런데, 독일에서 이들이 위치한 것과 비슷한 입지에 있는 한국의 인사가 이런 책을 썼더라면, 혹은 내가 독일인이었다면 훨씬 더 진지하게 고민했을법한 이야기들이, 어쩔 수없는 '사회적 거리' 때문에 영 살갑게 다가오지는 않더라는 문제가.... ㅡ.ㅡ

 

이들도 딱히 인생의 답을 주려고 이 책을 쓴 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다 읽고 나서 '그래서 뭐 어쩌라는 거지?'라는 느낌은 영 피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내가 이들의 나이가 되었을 때, 나도 과거를 돌아보면서 이들만큼의 긍정적 성찰과 반성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바램... 

 

참, 로렌초의 안토니오 네그리 인터뷰 삽화는 허거덕.... 이런 일화를 가지고 그의 생애와 활동을 모두 파악했다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이런 상황이 또 아주 낯선 건 아니라서 ㅜ.ㅜ  그가 어떤 사람인지 어쩐지 알 것만 같은.......      에휴....

 

 

#. 리처드 세넷 [뉴 캐피탈리즘]

 

뉴캐피털리즘 -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
뉴캐피털리즘 - 표류하는 개인과 소멸하는 열정
리차드 세넷
위즈덤하우스, 2009

 

몇 가지 주요 내용 요약

 

*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인간상과 관련된 세 가지 요인 (혹은 도전과제)

 

첫째, 시간 - 프레임이 달라졌다, 자주 바뀐다 (여기에 적응할 수 있어야 현대적 인간 ㅡ.ㅡ) 사실, 자본주의가 군대를 모방할 수 있었던 (그래서 효율을 높일 수 있었던) 비밀의 열쇠는 시간, 즉 제도가 개인에게 보장하는 기간으로서의 구조화된 시간이었다. 그런데 더이상 그렇지 못하다는... 

둘째, 재능- 특정 기술이 아니라 잠재력이 중요한 세상 (기술과 지식은 금방 낡은 것이 되어버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에 부단하게 적응할 수 있는 '능력') 

셋째, 포기의 문제 - 과거와 얼마나 잘 단절할 수 있는가 (즉, 새로운 것에 재깍 얼마나 뛰어들고 몰입할 수 있느냐)

 

* 오늘날 자본주의에서 노동하는 개인들이 경험하는 변화를 특징짓는 거대요인 - 첫째, 관료제의 변화

 

경직되고 진부한 관료제 (말하자면 '사회자본주의')란 오늘날 '비효율'의 상징처럼 여겨지곤 하지만,

사실 이것이야말로 노동자 개개인이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고 설계할 수 있게 했던 안정된 토대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컨설턴트들에 의해 관료적 조직특성을 변화시키는 구조조정과 개혁이 추진되지만, 조직 안정성의 붕괴, 단기적 수익에의 몰두는 위계의 가장 말단에 있는 노동자들에게 가장 큰 부담을 안겼을 뿐이다.  안정된 조직 기반의 붕괴는 조지 소로스의 지적처럼 사람들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을 '관계맺기'가 아닌 '거래'로 이동시켰다. 그런데 이게 참 딜레마인 것이.... 관료제야말로 그 특유의 안정성과 지속성, 피라미드적 위계를 통해 치밀한 '포섭'을 가능케 하고 변혁의 가능성을 가로막는데, 문제는 관료제를 뛰어넘는 소위 '현대적' 기업운영체계로의 변화야말로 노동유연화를 통해 변혁의 가능성을 더욱 가로막고 있으니....

 

저자는 '관료제 쇠창살' 해체와 관련된 주요 변화를 (1) 경영자에게서 주주로의 권력 이동, (2) 이와 관련된 것으로 장기실적보다 단기성과의 중시, (3) 통신과 제조부문의 기술혁신 으로 꼽았다. 기술이 혁신하면서 앙드레 고르가 기대했던 것처럼 모든 이들의 노동시간이 줄어들고 새로운 여가가 생겨난 것이 아니라, 제레미 리프킨이 걱정했던 것 같은 '노동의 종말'이 다가왔고, 주주 자본주의의 대두는 단기적 이익과 책임지지 않는 경영체제 (의사결정과 책임의 분리), 상시적인 '구조조정'을 가져왔다는 것이다. 뭐 새로운 분석은 아니지만, 명쾌하게 1, 2, 3으로 정리해주니까 오케이 ㅋㅋ 

 

하여간 이러한 변화를 통해 이제 조직은 MP3 같은 특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이야기인데, 비유가 적절한 것 같지는 않다. 이 책이 쓰여졌던 시점에서는 그랬을지도 모르겠으나, 말하자면 피라미드 관료조직과 달리 복잡한 중간단계 없이 중앙이 말단을 직접 통제하는 구조, 유연한 조직으로서 MP3라니... ㅡ.ㅡ (저자가 말한 대로 기술문명이 너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ㅋㅋ)

 

그리고 노동자들은 이런 유연한 조직에서 상시적인,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불안 (anxiety) 에 시달린다. 기업들은 개인들의 독립성과 자기관리를 미덕으로 내세우며 더이상 책임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타나는 세 가지 사회적 적자라면 (1) 충성도 저하, (2) 노동자들 사이의 비공식적 신뢰 붕괴, (3) 구성원들의 조직 생리에 대한 무지... 결국 이렇게 되면 미래를 위해 현재의 보상을 유예하고 지연하는 프로테스탄트 윤리는 붕괴될 수밖에 없다. 이는 개인과 기업 모두에게 치명적이다. 저자는 이를 '자본주의만 살아남고 사회적인 것 the social 은 죽은 것'이라고 표현했다. 

 

그리고 이렇게 불안과 유동성이 특징인 사회, 공식적인 제도와 관료제적 안정성이 사라진 사회에서 특권, 사회 네트워크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커질 수밖에 없다. 특권을 가진 이들이라면 삶을 전략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수고를 굳이 할 필요가 없다...(이러한 지적에 격하게 공감... ㅜ.ㅜ) 사회자본주의가 쇠퇴하는 곳에 불평등과 소외는 커지고 있다.

 

* 거대요인 - 둘째, 능력주의 (와 동반된 퇴출의 공포)

 

능력주의와 그에 따른 퇴출의 공포는 현재에만 해당하는 독특한 현상은 아니지만, 특별히 오늘날의 공포는 (1) 글로벌 노동력 공급, (2) 자동화, (3) 고령자에 대한 처우 라는 세 가지 요인에서 비롯된다고 지적했다.

앞의 두 가지야 뭐 워낙 익숙한 것이고, 특별히 고령자 처우 문제를 보자면,

사회자본주의의 틀을 해체한 기업들에게 중요한 것은 고령노동자의 경험이 아니라 젊은층의 재능, 그래서 경험이 늘어날수록 가치가 떨어진다는 기현상이 벌어진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인건비만 잡아먹는 무능한 집단이라는 평가... ㅜ.ㅜ

이러한 퇴출의 공포는 복지국가를 위협하는 요인, 즉 아예 사람들을 복지국가의 체계 바깥으로 밀어내버린다는 지젹에 동의. 이것이 바로 오늘날 한국사회에 벌어지고 있는 현상이지 않나... ㅡ.ㅡ

 

한편 저자는 '잠재력'에 대한 강조가 '재능'의 기준을 훼손시킨다고 지적하고 있다. 잠재력을 발굴하는 것이 곧 정의로 여겨지지만 (대표적으로 아마티야 센이나 마샤 누스바움의 논거를 드는데, 적절한 것같지는 않음), 이는 경험의 축적이나 연습, 노력의 중요성을 미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아무리 천재적 소질(잠재력)을 가진 연주자라도 부단한 연습이 없으면 좋은 연주를 해낼 수 없는 것인데, 미래를 준거로 과거의 노력을 평가절하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장은 번역이 이상한 건지, 사회적 맥락이 달라서 그런지 잘 이해가 안 가는게... 재능/잠재력/능력주의 용어가 내가 생각했던 맥락과는 좀 안 들어맞음.. ㅜ.ㅜ 이를테면 SAT 사례도 지식 자체보다 생각하는 방법에 초점을 두는 평가라고 하면서 이것이 잠재력을 중시하는 현재를 반영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주입식 교육과 암기를 위주로 학력고사를 통해 1등부터 백만등 까지 줄세웠던 과거의 입시제도에 비해 사고력을 중심으로 평가한다는 수능과 논술, 잠재력을 중심에 둔다는 입학사정관 제도들이 훨씬 불평등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사실로 얼추 이해는 하겠는데.. 개별 문장들의 앞 뒤가 연결되지 않는 것 같은... 이건 뭐 원서를 확인해봐야 알 것 같다.

 

하여간 신분적 귀족사회가 아니라 능력에 따라 지위를 보장받는 '자연적 귀족사회' 혹은 능력주의가 분명히 정의로운 것은 사실이었으나, 오늘날은 여기에 보태 과거보다는 미래의 잠재력을 강조함으로써, 개인을 독려하고 개인을 무력화시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전에는 업적을 기준으로 '비인격적'인 평가를 했던데 비해, 타고난 재능이나 잠재력을 중요시한다는 것은 '인격'에 대한 평가이기 때문이다. 타고난 재주, 잠재력이 없다고 판정된 이들은 과거의 업적이 어떠하든 이제 쓸모 없는 인물인 것이다. ㅜ.ㅜ

          

* 거대요인 - 셋째, 정치의 몰락

 

이제 이렇게 변화된 경제는 정치에도 영향을 미친다. 뭐 당연하겠다. 노동시장의 유연화가 분절된 노동자계급, 원자화된 개인들을 낳고 이들의 불안정성과 노동의 방식은 정치 또한 소비상품의 하나로 만들 뿐이다. 변혁에의 열정은 소멸해버린다. 

 

저자는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한 이유를 '소비자'이자 '구경꾼'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이들은 (1) 기업의 생산이나 유통에서 활용되는 플랫폼과 유사한 정치적 플랫폼을 제공받으며, (1) 정치제품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아니라) 금박을 입힌 정도의 차이만 존재하고, (3) 칸드가 명명한 '인간성이란 휘어진 목재'를 평가절하하며 (즉 이미 손에 진 것은 무엇이든지 충분치 못하다고 여기는 소비자들의 생각), (4) (굳이 배우고 노력할 필요없이 간편하게 제시되는) 사용자 중심의 정치를 신뢰하도록 요구받고, (5) 부단히 제공되는 정치적 신제품을 받아들인다. 

 

자, 그러다보니 정치인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 진보정치가 성장하기 어렵다.... 고 이야기하는데, 한편으로는 진보정치의 저성장에 대해 (최소한 한국사회에서) 이러한 상황 탓만 할 수 있는지는 모르겠다. 

 

* 그렇다면???

 

저자는 이러한 변화의 시대에 문화적 닻을 단단하게 내리는데 꼭 필요한 가치로 (1) 사건과 경험의 축적, (2) 개인 유용성의 발견, (3) 장인정신 의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사건과 경험의 축적을 할 수 있는 안정된 토대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노동유연화로 인해 안정된 노동기반과 노동조합을 가질 수 없다면 노동자센터 같은 병렬조직을 세우고, 일자리를 나누고, 새로운 상황에서 시간을 재구성하여 인생설계를 할 수 있는 방식 (기본소득이나 기본자본)

 

둘째, 사람들이 쓸모있는 존재임을 각인시키기 위한 제도가 필요한데, 특히나 국가가 정당한 가치를 부여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비슷한 일이지만 공공서비스 부문 노동자와 무급 가사노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의 차이를 고려한다면 쉽게 이해 가능)

 

셋째.. 이게 약간 거시기한데, '헌신'을 특징으로 하는 '장인정신'을 회복하는 것...  '사람은 누구나 일을 제대로 해내려 노력함으로써만 스스로의 삶이 아무렇게나 흘러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들어맬수 있다'는 주장에 매우 공감은 하는데... 문제는 사람들이 이렇게 하고 싶어도 할 기회가 없다는 것 아닌가 말이지... ㅜ.ㅜ  우리 모두 생활의 달인이 되라는 것이여???

 

문제의 제기와 진단에 비한다면, 사실 저자가 내놓은 처방이 충분하다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쩌면 문제들을 정치경제적 관점보다는 문화적 관점에서 분석했기 때문에 이런 결론에 이르렀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일목요연하게  (특히 번호매겨가면서 ㅋㅋ) 정리해주고, 오히려 그동안 익숙했던 정치경제 방식의 신자유주의 분석이 아니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준 책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의 다른 책들을 좀 읽어봐야겠다.

 

 

#. 전성원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 헨리 포드부터 마사 스튜어트까지 현대를 창조한 사람들
누가 우리의 일상을 지배하는가 - 헨리 포드부터 마사 스튜어트까지 현대를 창조한 사람들
전성원
인물과사상사, 2012

 

만물박사 지식을 익혀서 남들한테 자랑하는데 써먹기에는 유용한 책인데..

딱히 통찰력을 주는 책은 아니다. 

 

무거워서 들고 다니는데 고생만...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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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감정이입

그 유명한 Alan Moore 의 Watchmen 을 최근에 킨들 버전으로 읽었다.

물론 '읽었다'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을 수도 있겠다. 글씨만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사실 2008년 영화로 개봉되었을 때, 갑자기 영사기 고장으로 끝까지 못 봤던 안 좋은 기억이... ㅡ.ㅡ

오프닝 크레딧은 지금 돌이켜보아도 굉장했다. 사이먼과 가펑클의 음악을 배경으로 삽화처럼 흘러가는 왓치맨들의 성장과 은퇴와 몰락의 장면들..... 그 감독이 잭 스나이더였다는 것은 최근 '맨 오브 스틸'을 보면서 깨달았다. 나에게 그 감독은 300을 만들었던 밑도 끝도 없는 후까시 감독으로 기억되었는데, 사실 영화 왓치맨도 나쁘지는 않았다. 물론 이것도 지나치게 액션영화 스타일이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겠으나, 책을 다 보고나서 돌이켜보니 등장인물의 캐릭터도 원작에 꽤나 충실했던 것 같다...  

 

 

킨들 버전으로 그래픽 노블을 읽은 건 처음인데, 나쁘지 않았다. 간혹 깨알같은 글씨들이 빽빽해서 책으로 볼 때는 오히려 잘 안 읽히는 대사들이 있었는데, 아이패드 화면의 가독성이 더 좋았다. 그래도 '만화책' 고유의 그 질감은 여전히 잘 안느껴진다는 단점은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자면....

작품은 정말 굉장했다... Alan Moore 짱!

이건 전혀 새로운 유형의 영웅담이었다. 여기에는 전혀 초인적이지 않은 히어로들의 등장과 몰락이 있고, 가보지 않은 대안역사가 있고, '왓치맨'을 필요로 하는 세상의 혼돈과 무질서가 있었다. 각 장마다 삽입된 문서자료들, 이를테면 신문기사, 일기, 소설 등은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을 설명하는 새로운 방식의 오브제였고, 극중 극 형태의 코믹스 - 히어로들이 보잘것 없는 시대에는 영웅물이 아닌 해적물 코믹스가 인기를 끈다 - 의 충격적 스토리와 전개는 이야기 안팎의 긴장감을 높이는 역할을 충실하게 해냈다.

 

고담 시 같은 뉴욕에서 질서를 유지한 자경단은 이들 왓치맨이었고, 이 때의  질서란 가족/도덕/법질서 같은 보수주의적 가치였다. 그런데, 선출되지 않은 혹은 합법적 자격을 갖추지 않은 이들 권력에 대해서 '자유주의적' 대중들과 점점 기득권을 정립해가던 경찰은 반감을 키워가고 결국 이들은 '쓸모없고 불법적인' 존재가 되어버린다. 이제 과거의 왓치맨들은 동성애자와 공산주의의 위협이 가득한 세계, 무질서와 방탕으로 오염된 현실을 한탄할 뿐이다. 물론 일부는 보수주의 정부의 오른팔이 되어 베트남전을 승리로 이끌고, 리버럴한 케네디를 암살하기도 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안전하게 지키는 역할을 맡기도 한다. 이렇게 보자면, 이들 왓치맨의 정체성은 보수주의를 수호하는 우익 야경단이 틀림없다.  

 

그런데...기묘하게도...

나는 작품을 읽는 내내, 이들 왓치맨이 한국의 70-80년대 운동권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치적으로는 반대 (?)의 입장에 서 있을텐데도 말이다. 한 때, 정의의 이름으로 사회를 수호하던 이들이  어느 순간부터 그러한 활동의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고, 이제는 끊임없이 과거를 추억하며 살아가거나, 정부의 손발로, 혹은 세상을 바꾸는 새로운 길을 도모하는 자본가로 살아가는 바로 그 지점.... 

딱히 적절한 해석은 아닌 것 같은데, 뭐 느낌은 그랬다.  작품은 각자의 경험과 관점을 반영하는 각자의 해석이 있는 것이니 뭐 틀리고 말 것은 없겠다... 

 

등장인물들 중, 가장 이상하고 또라이 같은 인간은 Adrian (이양반은 megalomania)과 닥터 맨하탄... 아드리안은 그냥 환자라 치고, 닥터 맨하탄은 진짜 우주 최강 쫌생이에 겉으로만 쿨가이... ㅡ.ㅡ

Dan은 만일 이 작품이 Batman 이나 Ironman 이었다면 브루스 웨인, 혹은 토니 스타크 급이었겠지만, 여기에서는 돈과 재능을 가진, 하지만 그냥 머뭇거리는 아자씨... 

가장 애정이 갔던 인물은 Rorschach... 아마도 작품이 로샥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그의 관점으로 일련의 사건을 따라갔던 것 같기도 하고, 그의 개인사와 강인함에 대한 매료일수도 있고... 마지막 부분에서 맨하탄이 로샥을 '사라지게' 만들었을 때 정말 털썩... ㅜ.ㅜ

 

하여간... 등장인물 하나하나의 역사를 이렇게 유기적으로 배치하면서 관계의 복잡성, 가치의 혼돈, 인간세상의 아이러니를 이리도 잘 엮어내는 작가가 또 있나 모르겠다. 그래픽노블이고 뭐고, 정말 대단한 예술작품이라는 말을 거듭거듭 하지 않을 수가 없다.   

V for Vendetta 도 역시 Alan Moore 의 작품이란다.  다른 작품들도 찾아봐야겠음...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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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의미

하나로 도저히 모아지지 않을 것 같지만, 묘하게 하나의 흐름 속에 자리한 책과 영화들...

 

#. 성석제 [위풍당당] 

 

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위풍당당 - 성석제 장편소설
성석제
문학동네, 2012

 

오랜만에 성석제의 소설을 읽었는데,  이건 '읽었다'기보다 마치 마당극 한 편을 감상한 기분?

중고등학교 국어 시험 문제에나 등장할 법한, '풍자와 해학'이라는 전형적인 단어가 이렇게나 어울리는 오늘날의 소설은 정말 오랜만인듯... 

이 아자씨... 녹슬지 않았어!!!

미친 듯이 웃기고, 번뜩이고, 그리고 심지어 짠하기조차 하다니....

버림받고 내쳐진 사람들끼리의 이 유쾌한 연대의 소동극과 대책없는 낙관, 빠져들지 않을 수 없잖아!

 


# 알랭 드 보통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

 

몇 달 전에 우연히 TV 채널을 돌리다가 알랭 드 보통이 약장사같은 '더빙' 톤과 몸짓으로 수백명의 한국 관객들 앞에서 멘토 코스프레 하는 것 보고 (심지어 승합차 타고 시내를 돌면서 이동상담까지.. ㅜ.ㅜ) 식겁해서 입이 쩍 벌어진 적이 있었더랬다. 아... 저건 또 뭔가.... 

어쩐지, 이제 다시는 이 자의 책을 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었는데, 동작도서관에 책 빌리러 갔다가 스르르 또 집어들었네 그려...  스맛폰에 담아둔 읽어야 할 책 목록에 아직 있었던 탓...

근데, 또 이 책을 읽고 나니, '인생학교'를 열어 정말 삶에 필요한 지식을 가르치려는 그의 노력, '종교에게' 전유당했던 삶의 중요한 요소들을 다시 찾아오자는 견해에 깊이 동의하게 되면서, 굳이 어릿광대 같은 모습으로 대중강연회에 나타났던 것도 그리 이해못할 바는 아니라는 관대한 마음이... ㅡ.ㅡ (물론, 강연료 때문에 그리 한 것인지, 견해를 널리 전달하기 위해 그리 한 것인지는 내 알 수 없으나..)

 

이 책의 주장은 거칠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듯...  

종교 자체가 인간의 발명품 - 함께 살아가야 할 필요성과 고통에 대처해야 할 필요성에 대응하여 만들어진 - 인데, 무신론자들은 종교가 보여준 독단과 부정적 측면에 경도된 나머지, 이렇게 중요한 필요성을 종교가 전담하도록 방치하고 있다는 것... 마치 그것을 종교만이 다룰 수 있는 문제인 것처럼... 

그니까, 무신론자들은 원래 인간의 문제, 이를 해결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을 종교의 영역으로 치부하고 눈감을 것이 아니라, 가져오자는 것.... 이건 너무 소중한 문제들이잖아....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며, 심지어 우리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사람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초자연적인 것의 가장 큰 적들이라도 이를 선별적으로나마 다시 흡수해야 할 것이다. 종교는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이고 지적이기 때문에 신앙인들만의 전유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다."

이렇게 이야기하게 된 배경에는 현대의 제도와 고안물, 이를테면 교육제도, 대학, 미술, 건축 같은 것들이 그동안 종교가 해왔던 교육, 통찰, 혹은 위안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미술관이 공급자 마인드?로 작품들은 연대기별, 유파별로 배치함으로써 중세 성당의 그림들이 주었던 영감이나 감흥을 완벽하게 차단했다는 비판에 대해서 완전 공감!!!

"실제로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단테보다 이미 더 많은 책을 읽었음을 그만 간과하고 있다"는 지적에 흠칫....  

 

그런데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만 들으면, 종교활동이 인간의 고통을 대면하고 극복하게 하는 깊이있는 숙고와 성찰 드라마인 것 같지만, 현실 세계에서 보이는 모습은 이런 것과는 거리가 너무나(!) 멀어서 좀 터무니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한국사회 공격적 복음주의자들의 신앙 활동 중 어느 부분이 지적이고 합리적인가???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유대교의 세심한 교리와 삶의 원칙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 그럼 지금 팔레스타인에서 하는 짓거리는 뭔데? 하는 질문 때문에 도대체 곱게 바라봐줄 수가 없더라니...   (사실, 나는 이스라엘과 관련된 그 어떤 긍정적 스토리도 다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ㅡ.ㅡ )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속주의자들이 소중한 인류의 지혜를 눈여겨 보고, 종교로부터 이를 찾아오자는 주장 자체에는 매우매우 공감....

 

#. [마지막 4중주] (야론 질버만 감독, 2012년 작)

 

마지막 4중주

 

원제가 "late quartet" 인데 과연 이것이 '마지막'으로 번역되는 게 맞는지 모르겠다.

그냥 '말년의'라고 했더라면, 연주자들의 나이와 상황, 이런 것들에 더 어울렸을지도 모르겠다.

배우들의 연기가 너무 좋았고, 소소한 (?) 인생의 드라마들의 구성도 촘촘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영화가 주는 메시지 혹은 질문은 너무 어려웠다. "이렇게 오래 쉼 없이 연주한다는 것은 각 악기들의 음률이 맞지 않게 된다는 의미다. 그럼 어떻게 할 것인가? 연주를 그만둘 것인가, 아니면 모두가 불협화음이라도 필사적으로 서로에게 맞추려고 노력해야 할까?"

이제는 불협화음이, 일탈이, 소위 비정상성이 일상, 정상, 질서의 한 부분이라는 점을 충분히 알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지만, 그걸 안다고 해도 실제 이것들을 조화롭게 공존시키며 살아내기란 참으로 만만치 않은 '필생의 과제'인 것 같다... 

영화를 보고, 자연스레 베토벤의 현악 4중주 14번을 찾아 들어보았다. 귀가 막귀라서.... 불협화음의 화음을 제대로 알아내기 어렵다는 점이 함정...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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