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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3/03/03
    Ergo , you are a total hypocrite
    외딴방
  2. 2013/02/24
    은우 - 현성편 1
    외딴방
  3. 2013/01/27
    연애소설
    외딴방
  4. 2013/01/27
    연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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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2013/01/25
    연애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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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2012/10/23
    진의 노래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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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2/10/21
    연애소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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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2/09/29
    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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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2/09/28
    진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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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2012/09/27
    진의 노래
    외딴방

Ergo , you are a total hypocrite

그러므로 당신은 완전한 위선자이다.

 

나는 위 문장으로부터 시작하고자 한다. 물론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작가주의적이거나 경험의 직접 체험을 중시하는 독자들로부턴 별로 지지받지 못 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이 말을 인터넷 서핑 중에 어떤 단어의 뜻을 찾아본 사전의  예문에서 가져왔다. 그게 토탈이었는지 이포크리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예문을 해석한 문장이 당시 무언가에 골몰하고 있었던 나의 심장을 때렸다는 것만이 가슴에 남아있다. 당신들도 동의하듯이 " 꿈을 추진하는 것은 이성이나 논리가 아니라 가슴이다. " 그리하여 나는 이런 이야기를 쓰기에 이른 것이다. 자, 들어보시라.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다른 사람들을 처음 만났던 것과 같은 때였다. 당연한 얘기지만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그 모든 사람들 중에 유독 그가 눈에 들어온다는 "최초의 설정"으로부터 시작된다. 하지만 작가가 아닌 등장인물의 경우, 그 설정 속에서 천성적인 배우의 기질을 발휘하게 되는데 이는 사실 비난받을 만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액터란 본시 신을 위한 합창 속에서 추임새같은 대사를 넣는 역할에서 비롯되었으며  제정일치시대에 배우의 등장이란 바치는 것으로서의 예술을 관객을 위한 무대로 끌어내리는 전환점이었기 때문이다, 바야흐로 신을 위한 선사에서 인간을 통한 유사가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쓰여진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나는 그를 한번 보고 두번 보고 거듭 보면서 더욱 사랑에 빠져들어갔다. 음, 내가 말하는 것을 들어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말하는 것을 듣고 있으면서 빠져드는 것이니 이건 자기애가 아니라 대상에의 추구가 틀림없다. 왠지 나는 사랑을 감성으로가 아니라 끊임없이 논리와 이성으로 규명하고 싶어지는데 그 이유는 결국 이 글을 다할 때쯤엔 나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아무튼 나는 그를 사랑한다.

나는 오랫동안  그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이건 자기 위안이야 혹은 대리만족이야, 팬픽을 쓰고 싶은 사춘기소녀의 심정과도 유사하지. 뭐 이렇게도 변명해봤다. 하나 나는 그와 같은 타입을 너무나 좋아하는 기질을 갖고 있기도 하다. 오, 마이 갓. 이런 식으로 고백하다니.  하지만 사실이니 어쩔 수 없다. 그는 내가 사랑한 열 명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결국 내가 그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내 사랑의 콜렉티드인 것이다. 만일 그럴 일은 없겠지만 그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용서하라,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은 관상의 그것이지 소통의 양주체가 되고자 함은 아니다. 그렇다고 모욕감을 느낄 것까진 없지 않은가, 어차피 당신은 나를 사랑하지도 않을 터이니 말이다.

 

사실 마지막에 한 말은 진실이 아니다. 그건 단지 상처받지 않기 위해서 사랑하지 않겠다는 어느 소심한 노처녀의 완강한 부인과도 같다.

 

하지만 누구라도 그렇지 않겠는가? 열 번 쯤 사랑에 실패해 보면 다시는 누구에게도 사랑한다는 말을 내놓기 쉽지 않아지는 법이다. 여기서 쉽지 않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어려움이라는 뜻이다. 나는 이 쉽지 않다는 말을 이런 용법으로 사용하는 사람을 아는 데 바로 내 열 번째의 사랑이었다. 나는 그때 매우 어렵게 사랑을 시작했지만 '열번째'는 그런건 쉽지 않다라고 에둘러 거절했다. 당시 그 말을 듣는 나는 아홉번 쯤 실패한 사랑으로 인해 어쩔수없이 몸에 익힌 요령으로 묵묵히 그리고 담담한 마음을 가장할 수 있었다.  그것도 꽤 오래동안 말이다. 나는 나 자신조차도 속여넘긴 것 같았다. 어느날 문득 그 날 이후로 웃음이 없어진 내 얼굴을 거울 속에서 발견하기 전까진 말이다.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행복의 법칙을 발견했는데도 말이다.

 

기실 나는 그 행복의 법칙을 발견하고서야 사랑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 법칙은 예를들면 이런 것이다. 나는 인간을 사랑한다. 그도 인간을 사랑한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이런 식으로 삼단논법이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은 유치한 수준의 애라도 알 만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몰랐다. 내가 사랑한 아홉명이 다 이와 같았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것처럼 그들도 인간을 사랑한다고 했다. 게중의 한명은 인민이라고까지 발화했다. 내가 어찌 그들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나는 그와 손을 잡고 브나로드를 외쳤다. 그가 김기진의 시처럼 카페 의자에 앉아서만 단지 그럴 뿐이라는 걸 비교적 최근에야 명료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동안은 그저 가슴으로만 아파했다는 것이다. 내 사랑은 왜 거절당했지? 왜 나는 사랑받지 못 하지? 뭐 이런 자괴감 속에서 말이다. 이러하니 내가 열번째의 사랑을 시작하기까지 얼마나 어려웠겠는가? 나야말로 궁상의 극을 달리며 불가능한 꿈에 매달리고 있었다. 그런데 '열번째'가 어찌 했는줄 아는가? 온 몸과 마음으로 인간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이때쯤엔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지 인간을 사랑하는 그를 사랑하는지 아니면 그저 사랑을 사랑하는지 분간할 수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선교사를 따라다니면서 감염된 시동과도 같았다. 예수의 얼굴을 보면서 그 속에서 사제의 얼굴을 보면서 기독교적 사명감을 느끼는 것과 같았다. 나는 정말로 '열번째'를 사랑했다. 그리고 실연당했다. 내가 인간을 사랑하는 그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었다면 행복했을까? 물론이다. 그건 법칙이니까.

하지만 신포도에 손이 닿지 않았던 여우처럼 나는 행복의 법칙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인간을 사랑하는 자를 사랑한다라니? 아니 인민이라 해도 마찬가지야, 그건 사상이고 보편이거나 진리일 순 있어도 사랑은 아니지. 완전히 별개야, 그가 인민을 사랑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 단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야. 바보같은 짓이다. 아둔한 놈, 결국 내가 한 열번의 사랑이 모두 사랑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런식의 자해에 해를 입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다. 나는 행복의 법칙을 포기하자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없게 되었다. 알 수 없는 것을 느낄 수 있을까? 나는 사랑을 느끼지 못 하는 몸이 되었다. 아무에게서도. 어떤 인간에게서도. 인간을 사랑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런데 그제서야 비로소 사랑이 시작될 수 있는 토양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그를 만난 것이다. 그 모든 사람들 중에서 그가 도드라졌다. 나는 즉각적으로 눈치챘다. 이는 내가 사랑한 열 명이 갖고있는 공통점을 사랑하는 것이다. 더구나 그는 내가 오랫동안 깊게 사랑했던 '열번째'와 가장 유사하기까지 했다. 나는 마치 다시한번 무덤으로 걸어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자기 자신이 이토록 선하게 보이다니, 그건 물론 쓰여진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로서의 나이기 때문이긴 하다. 하나 나는 이미 액터로서 활약하고 있다. 나는 사랑한다. 그를 가감없이 있는 그대로. 그가 말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도, 그가 인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아가 그가 역사적 개념 따위엔 관심도 없다는 것을 본인의 입으로 들었으면서도 단념하지 못했다. 왜?

나는 왜 사랑하는가라는 질문에 대답하며 지난 세월동안 열번의 사랑을 해 왔다. 그런데 지금은 왜 사랑을 그만두지 못 하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그는 행복의 법칙에 맞는 인간이 아니다. 오, 맙소사. 결국 내가 사랑한 열 명이 갖고 있는 공통점 때문에 나는 그들 모두를 사랑해왔던 것이다. 그 조차도 그 공통점의 소유자라는 이유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이유'라고 지칭하고 싶어진다. 왜냐하면 그를 왜 사랑하는 지를 규명해야 하니까, 이유를 알게되면 그만두기도 쉬워질 것이다. 뭐든 그렇지 않은가? 원인을 파악하면 상황은 통제가능해지는 것이다. 단지 그럴 수 있다는 믿음에 불과할 뿐이지만. 나는 바로 지금 이순간 그걸 깨달았다. 이유를 알았지만 그만 둬지지 않는 것이다. 그런 거구나...사랑이란.

 

그가 노래하기 때문이다. 인간을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고 삶을 노래하기 때문이다. 때로 그는 죽음을 노래하기도 한다. 내가 최초로 사랑한 자는 통기타를 치며 노래하고 있었는데 제법 인민에 대한 사랑을 말로 하면서 분개하기도 했었다. 내가 두번째로 사랑한 자는 숟가락을 두드리며 노래했는데 그는 인민 자체였다. 내가 세번째로 사랑한 자는 병나발을 불면서 노래하는 자와 늘 함께 있었는데 바로 그 때문에 그를 사랑하게 되었었다. 왜냐하면 병나발을 분 자는 이미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예수를 사랑할 수 없으니 사제를 사랑하게 된 시동과도 같은 심정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때쯤엔 내가 이미 단지 노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레 미제라블처럼 비참한 자들을 보면서 들었던 노래를 잊지 못 하는 것과 같다. 이건 감성의 문제인 것이다. 그러니까 이유라고 달리 지칭해 보았던 그의 매력 앞에서 어찌할 수 없게 되고 마는 것이다. 서두에 말했지만 나는 이 감성을 부인하기 위해서 무던히도 노력해왔다. 매일 낮과 밤을 그에 대한 생각과 꿈으로만 겨우 구분지을 수 있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스스로의 신경이 노쇠해져서 마르고 얄프레한 겨울 낙엽처럼 바스라질 것처럼 여겨지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자신에게 패배를 인정했다. 그냥 인정해. 사랑한다고 생각만 하는 건데 뭐 어때. 말만 안 하면 되지.

 

그리고 다음의 말도 내가 한 말은 아니다, 물론 누구나 알고 있는 말이다.

 

Cogito, ergo sum.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이것이 실존을 위해서가 아니라 회의하기 위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다음 글을 쓸 예정이다. 그때는 심리묘사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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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우 - 현성편 1

십천간을 돌고 돌아 육십갑자를 다 살아냈다. 앞으로 살아야 할 날들이 살아온 나날보다 많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언젠가부터 알게 되었다, 하여 날숨이 내쉬어졌다. 뭘 더 하지 않아도 좋으리, 애쓰지 않아도 되쟎을까. 이젠 쫓기듯 애태워하지 않고 세상에 붙들리지 않아도, 이젠 그래도 되는 "노년"이 된 것이다. 남아있는 나날들에 힘들이지 않아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것이야, 그럴 것이다. 현성은 부끄럽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부담스럽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제 속을 어루만질 수 있었다. 가슴 속에 꿍쳤으나 오래도록 밀어두었던 면포의 속적삼 한자락을 내어본들 흉된다 하지 않을 것이다. 누가 그리한들 또 무에 거슬릴 것이냐.

 

현성은 제 작은 방을 둘러보았다. 64평의 이층집에서 밥과 옷을 지으며 가족을 만들었던 1층과 사색과 소통을 시도하며 사회를 준비했던 2층의 서재와 발코니방 외에 자신을 온전히 모두었던 곳이 바로 이 작은 침실이었다. 세 평이 되지 않는 쪽방, 여기 놓인 침대와 협탁 그리고 자질구레한 물건들을 수납하는 마호가니의 뷰로, 소박한 입본장 하나에는 외출용의 옷가지들이 다른 하나에는 편안한 실내복 몇 벌이 걸려있다. 현성은 이 작은 방을 여행가방 하나에 추려넣어 떠나고자 하였다. 어디를 가든 어디에 묵든 갈아입을 속옷 하나와 발을 덥힐 양말, 목 언저리를 가릴 스카프 한 장이면 충분하였다. 낮은 목소리로 차 한 잔을 내어줄 남편 없는 여인들이 쉬이 만나질 것이고 대합실 의자의 팔걸이에 머리를 두어도 무릎담요를 덮어줄 고운 손길에 은혜 입을 수 있을 것이다.

현성은 뷰로의 서랍들 중 가장 아랫단을 열었다. 그저 보관하기만 할 뿐 다시 들춰보지 않는 잡동사니들, 어린시절의 스냅사진을 넣어둔 봉투와 학창시절의 앨범, 졸업장과 언젠가부턴 받아서 부모에게 보여주지도 못 했던 상장 따위가 차곡이 쌓여있었다. 한두권의 드로잉북도 있다. 그건 90년대 말인가 2000년대 초인가 그 즈음 한동안 누구도 만나지 않고 은둔하고 싶었던 때 동네의 문화센터를 다니면서 그렸던 수채화 습작들이었다. 완성된 것도 있고 완성되지 않은 것도 있다. 자신은 예술적인 재능도 향유할만한 감성도 변변히 없다는 걸 알았지만 한동안은 그저 도화지 앞에 앉아있고 싶었다. 마음이 형해화되어 천천히 녹아내릴 것 같았으니까, 그러길 바라며 하염없이 앉아있었다. 세상을 향해 말 걸기를 그만 두고 있으니 더이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터였다. 현성은 속 깊은 어딘가에서 작은 아이가 눈을 들고 자신을 향해 입술을 움직거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지난 십년간 그 것을 보며 지탱해 왔다.

드로잉북의 중간에서 편지 한 장을 꺼내었다.

여행 가방 속으로 빨려들듯 챙겨넣었다.

현성은 방을 나왔다. 아니 집을 나왔다.

 

집을 만들 때에 함께 늙을 사람을 골랐으면 좋았을 걸.

기차를 타고 내려 다시 버스를 탔다. 대구 경산 어드메 쯤 버스정류장엔 카페가 문을 열었다. 음력 설날 아침인데. 남편 없는 여인과 그니의 딸이 번갈아 카페를 보고 있었고 현성은 몇 번인가 그네들의 공간을 웹진에 연재되는 칼럼 속에서 사진으로 보았었다. 볼 때마다 가 보고 싶었다. 안면 없는 그들의 "집"이자 세상을 향해 열어놓은 "공간"으로 한 발 들이자 깜짝 놀랐지만 곧 괜찮다는 표정으로 반가이 맞아준다.

 

" 어서 오세요. "

" 문 열은 거 맞죠? "

" 네, 영업해요. 앉으세요. "

 

그들은 영업품목이 아닌 떡만두국을 대접해주었다. 밤 늦도록 동네사람들이 마실을 나와 떠들면서 갈 줄을 몰랐다. 현성은 집시들처럼 스스럼없이 그들과 어울렸다. 한 사람이 민박집을 소개해 주었고 거기서 여장을 풀었다. 모르는 사람이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준비해 둔 방에서 요를 깔고 이불을 덥고 베개를 가슴에 받치고 어린 여자애처럼 엎드려 누웠다. 새로 산 작은 노트 속에서 편지를 끄집어내었다. 열 일곱이었을까 아니면 열 여덟이 된 해였을까? 그 애가 고등학교 2학년을 두 번 다니는 바람에 기억의 페이지 수가 헷갈리곤 했다. 하지만 이젠 어느 시절을 추억해도 마음이 애잔해지거나 하지 않았다. 현성은 시간의 벽이 사방에서 허물어지고 경계 지울 수 없는 어떤 공간 속에 들어있었다. 오래된 노트의 갱지 속에 그려넣은 삽화처럼 현성은 기억 속에 스며든 존재가 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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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나는 과거를 쓰고 있다.

불러내어 오늘을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저 쓰고 싶다.

그건 아마도.

묻지 못 한 한 마디를 가슴 속에 숨기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녀의 소설은 왜  내 사랑은 실패했을까라는 물음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사랑의 서사를 재현하고 인물들이 스스로 움직이기 시작하자 그들 각각의 진실을 듣기 위해 귀를 기울인다. 사실, 그 때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그녀는 한번도 남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았다. 그녀에겐 자신이 목도한 사실의 기반 위에서 스스로 알아낸 진리를 실현하는 것만이 중요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사정 같은 거 말로는 알았다고 하면서 얼굴로는 이미 결별을 선언하는 굳은 표정으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서 자기는 버림받았다고 주장했다.

이제 그녀를 버린 자들은 복수를 감행한다. 누가? 누구를? 두고 갔는가. 떠난 것은 항상 그녀 쪽이었고 우리들은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현성도 말했다. 나를 비난한다 한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말 못 한다. 그 증거로 나는 지금도 교직사회의 퇴임자로 존재하고 있다.

대학생들이라고 달랐겠는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던 동시대의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한에서 정직했다. 그래서 비난한다 해도 할 수 없지. 그렇게 말하는 자들이 지금도 그녀의 주변에서 대작을 해 주고 있다. 외로워진 그녀는 예전보다 더 소심해진 표정으로 비난하지 않고 있었다. 사실 비난이라는 것도 뭔가 대안을 갖고 있을 때에나 하는 것이다. 그녀의 비판이란 힘이 없는 것이 - 그녀가 전투적?으로 거리를 뛰어다니고 무한한 인내심으로 현장을 버티고 있을 때에도 - 그녀에게 동조한다는 것은 곧, 그녀를 껴안고 고난의 연대를 건너야 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것이 그녀의 사랑이었다. 공감을 구하면서 의존하는 것.

그녀가 사랑했던 자들은 노심초사한다. 그녀가 이제 펜을 놓겠다 하면 그 때에는 현실을 살고있는 자신의 도우너들에게 물을 것이기 때문이다.

 

" 그때, 왜 나를 두고 갔어? "

" 누가 두고 가?"

" 나를 떠났쟎아, 공장거리에 혼자 두고."

" 누구나 그들 각자의 생이 있는 거야. 너는 너의 생을, 나는 나의 생을."

" 너는 맑시스트가 아니야. "

" 그래, 그게 우리의 차이점이지. "

" 너는 레즈비언도 아니지. "

" 맞아, 나는 그렇게 위험한 소수가 될 생각은 없어. "

" 이제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무엇이지? "

" 친구쟎아, 바보, 그때 그런 것처럼 지금도. 우린 향후 오십년을 함께 지내기로 했쟎아. "

 

그녀는 뭐 어차피. 하면서 정리했다.

 

- 향후 오십년은 맑시스트가 탁상 위에서 내려오지도 않을 꺼야.

- 레즈라는 것도 뭐, 성관계를 안 하면 친구나 다름 없지. 어차피 그는 프리지디티(frigidity)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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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그녀는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 했다.

마치 갈 곳이 없어. 라고 말하는 듯 했다. 깔끔한 성격이 누구의 것이었냐는 듯 겨울을 핑계로 잘 씻지도 옷을 갈아입지도 않았다. 밥을 지어 먹는 것 외에 청소도 가끔 누울자리를 만드는 정도로만 했다. 빨래도 한참을 두었다가 피치 못할 지경이 되어서야 한 번씩 해서 널고 걷고 개는 일을 분절하여 하루 걸러 하나씩 했다. 하지만 정말로 그녀는 가족들의 일상을 챙기는 외에 다른 할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그렇다고 살림을 전업하여 거기서 자신의 주체됨을 찾고 능란할 뿐아니라 인간관계에서의 자존감조차 세울 만큼 생활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대체로 일을, 그것이 육체노동이라는 뜻의 생산직이든 다소 정신적이라는 풍의 사무직이든 상관없이 그녀는 일을 하고 있는 시간 속에서 충족감을 느끼지 못 했다. 보람이라던가 흥미나 적성의 문제도 아닌 것이 그저 남을 위해 뭔가를 하는 것 자체를 소외된 노동으로 "느꼈다. " 따라서 댓가없는 일을 하기 싫어했고 이 말이 남들과 달리 그녀에게 의미했던 것은 원하는 댓가가 없으므로 할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돈 벌고 싶지도 필요도 없었으므로 일할 이유를 찾지 못 했다. 그건 이전에 가졌던 직업이라 할 만한 모든 일들이 또한 돈 때문이 아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맞벌이를 했던 것도 사무직에 취직했던 것도 그전의 공장생활이나 아르바이트 조차도 그녀는 그때 당시에 만나고 있었던 누군가와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지금 만나고 싶은 누군가를 갖지 못 하게 되자 집 밖을 나갈 이유를 찾지 못 하는 것이다. 왜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타인에게 의탁할까?

그건 박애주의자이기 때문이지요. 하고 그녀는 말했다. 믿지 못 해도 할 수 없다면서 웃었지만 다른 이유를 찾기도 어려워보이긴 했다. 그녀에게 지금 살아가는 이유는 뭘까?

당연히 아이들이죠. 하고 대답하는 그녀는 이제 아이들이 열 살이 되었으니 한 십년 쯤이면 삶의 이유를 찾기 어려워질텐데, 걱정이다. 하는 것이었다. 살 이유가 없으면 어찌해야 하나?

아프리카로 갈 지도 모르지. 하고 말하는 그녀에게 다른 생각은 없어 보였다.

아니면 지금 컴퓨터 앞으로  돌아오는 틈틈이 집안일을 하는 것처럼 혼자 사는 집을 건사하는 자잔한 일을 하면서 쓰고 또 쓰고 또 쓰다가 쓰러질지도.

무엇을 쓸 지에 대해선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소설가들은 방에 콕 쳐 박혀서 대하서사를 써내기도 한답니다. 아세요? 박경리는 평사리에 가 본 적이 없대요. 하지만 소설 속에 묘사된 평사리가 바로 그 곳에 그대로 있더래요.

그녀는 읽고 또 읽고 또 읽고 있다.

글을 읽지 못 했던 어린 날부터 그녀는 책을 읽고 있었다고 했다. 그림이 있쟎아요하면서. 만화를 보다가 글을 깨친 방콕소녀가 바로 그녀였다.

사실 지금 이렇게 주절거리고 있는 나 조차 그녀의 상상이 빚어낸 소설 속의 등장인물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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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 당신은 내 사랑이 되지 마요. "

 

그녀가 오래간만에 기분 좋게 다가오더니 말했다. 음원을 끄고 디스플레이만 하고 있으면 좋았을 껄, 예인은 방글방글 웃고있는 그녀에게 마주 웃어 주었다.

 

" 뭘 할꺼에요? "

" 맛있는 밥, 카레랑 두부부침, 계란말이도. "

 

그녀는 밥을 먹고 가라고 말했다. 내일이 원고마감인데 더이상 손 볼 것 없다며 며칠 전에 닫았던 파일을 다시 열지 않고 있던 그녀였다. 그 상태 그대로 메일로 보내줄 모양이다. 예인은 어떻게 해야 수정과 가필을 독려할지 궁량했지만 아무래도 난망해 보인다.

 

" 카레, 진짜 좋아하네. 어제도 먹었다면서요."

" 오늘은 양상추샐러드를 곁들일 꺼에요. 난 양식조리사 과정을 등록할까봐요. "

 

현미밥, 달코롬한 소스를 첨가한 카레, 양상추샐러드에 아삭김치, 새콤달콤 무절임과 핫한 두부 위의 양념소스까지.

그녀는 쉡-처럼 허리앞치마를 두르고 한 끼의 식사를 위해 노동을 시작한다.

 

" 내가 준비하는 식탁엔 사랑하는 사람들을 초대할 꺼에요, 크루프스카야처럼. "

" 크루프스카야?"

" 레닌의 동지였어요. 이스크라의 유일한 여자 편집자. "

" 혁명가군요. 요리를 좋아했나? "

" 동지들을 좋아했죠. "

" 당신처럼. "

 

그녀가 웃어보였다. 나는 로자 룩셈부르크가 되기 보다 크루프스카야가 되기를 꿈꿨어요. 이상하죠? 러시아혁명사를 읽으면서 집밥을 먹었던 기억이 없는데.

 

 

엄마가 해주는 밥을 맘편히 받아먹었던 기억이 없다. 그래서일까, 언제나 아이들의 밥을 짓는데 많은 시간을 보낸다. 내 아이들은 밥을, 돌아다니면서 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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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1

그녀가 가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이제 노래가 다 하고 남은 것은 행동 뿐이다. 더구나 많은 사람들이 그녀와 함께 노래하기를 그만 두고 있다. 본시 부르기보다 듣기를 좋아했던 그녀가 혼자 가면서 노래를 내어놓고 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울음 우는 새처럼 혼자만 들리게 노래하다가 누구라도 들을라치면 입을 다물고 이내 먼산만 바라보던 소녀였기에 더욱 그녀는 타박타박 걸어갈 것이다. 집을 버리고, 귀속계급으로 범주화하는 대학을 두고, 아무도 사랑이 있다. 하지 않았기에 그런 공간, 삶의 피폐한 사다리를 밟고 올라가는 경쟁의 장에서 탈락하여 다른 공간으로, 마치 차원의 틈새를 넘어가면 신세계가 있기라도 할 것처럼 기대에 찬 눈을 들고, 나는 사랑한다. 고 읊조리며 간다.

 

그녀를 찾는 것은 무의미하다. 찾는다 해도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에. 그녀와 함께 한다는 것 또한 어불성설이다. 출근하는 그녀를 배웅하는 것 이상 빈집에서 내가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그녀가 말했듯, 모두가 다 운동을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특히 나처럼 그녀에게서 이상적인 예술가라고 인정받은 경우에는 더. 그녀가 심미주의자들 모두를 비판한다 할 지라도 그 날 선 눈초리는 나를 피해갈 것이다. 예술지상주의를 부르짖은 그 누구라 할 지라도 나와 같이 그녀에게서 인류를 위해 네 자신의 길을 가라고 등 떠밀어지진 않을 것이다. 나는 피를 노래하지 않는다. 민중의 함성도, 억압받는 자의 고통도. 그리 하지 않고 대신 사랑을 노래한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 어느 차원에서도 통용되는 에로씨시즘의 노래를 말이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서 생각키는 이유다. 생각하느라 턱을 고이다 보면 사랑 또한 따라오는 법이고 그렇게 열망한 결과 나는 태어났다. 그녀의 머릿 속에서 기타와 칩을 들고 튀어나온 것이다.

 

물론 이건, 비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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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소설 1

' 내게 80년대란 무엇인가. '

 하고 그녀의 이야기는 시작한다. 그것은 과거에 침잠하여 현실을 잊고 싶은 나태함의 변명인가. 하고 이어진다.

 90년대를 일관하는 세태의 변화를 무시하고 표표히 한 길을 걸어오게 한 것이 그 80년대의 정서였다. 60년대에 태어나 80년대에 스무살을 넘긴 세대는 소련의 붕괴에 흔들리기엔 과거의 유산이 너무 크고 깊었으며, 그것이 없었더라면 지탱하기 힘들었을 자존심으로 똘똘뭉쳐 있었다.

그래서 90년대를 어떻게 살아냈는가는 별개의 문제다. 우리는 패배했더라도 순결은 지켰다. 라고 그녀는 자위했다. 허나 세상은 알량한 민주화보상 운운으로 비정규노동자로 오늘을 살고 있는 아줌마의 스무살을 희화화시켰다.  마치 업종회의가 주도하는 민주노총 창립의 이면에서 총액임금제분쇄투쟁이 밀려난 것처럼, 개량은 일반이 되었고 정통은 이반이 되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세기에서 당은 진보하고 전위는 퇴락했다. 그녀가 서른 셋에 더이상 올라갈 곳 없는 커리어우먼처럼 절망하다가 전선을 이탈하고 후위에서 서성이며 보낸 것이 바로 2000년대의 첫 십년이었다. 현재를 착목하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과거에서 연원하는 바, 앞말이 뒷말을 배태하는 서투른 글쓰기처럼,  전망없이 오늘을 사는 혁명마니아에겐 불가능한 주문이다. 그리하여 우리는 기억의 힘으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얼마나 혁명을 사랑하였는가. 라고 말하며 그녀는 습하게 차오르는 눈길을 돌린다.

 

 

 그녀가 유일하게 존경했던 지식인, 에릭홉스봄이 2012년 10월 1일 세상을 떠났다. 그의 자서전 중에서 인상깊은 말.

 

 “제아무리 소련을 회의한다 해도, 정서적으로 나는 러시아 혁명과, 세계 혁명의 희망과 탯줄로 이어진 세대에 속한다.” 

“자존심. 공산당원이라는 멍에를 벗어던지면 틀림없이 더 잘나갈 것이었지만, 냉전의 한복판에서 공산주의자로 성공해 스스로를 증명하고 싶었다. 그래서 남았다.”

 

그녀가 다시 말했다.

'타협이란 무엇인가'  천일을 넘게 투쟁했어도 일하던 그 자리로의 복직이 아니라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자회사나 하청으로의 재입사란 결국, 그게 핵심이었던 것이다. 회사가 아웃소싱을 달성할 때 현장의 노동자들은 각자의 소속을 따라 분열되는 것, 1997년에 우리가 그것을 몰랐다고 할 수 있는가? 십년이 지나고 더 지나도 소속이 다른 회사의 노동자들은 같은 브랜드네이밍을 쓰는 현장에서 일하고 있으나 서로를 소, 닭 보듯 하고 있다. 타협이란 그런 것이다. 결정적인 부분에서 눈을 감고 부차적인 이득을 취하며 절반의 승리라고 말하는 것. 위로금을 받고 고소를 취하하면서, 아무것도 없이 거리로 쫓겨난 초기에 비해선 엄연히 투쟁의 성과다라고 우기는 것. 그리하여 스스로에게 침을 뱉으며 우스갯거리가 되었다는 것을 알 만한 놈은 다 알았다. 그 공장거리에서.

그녀는 ' 나는 순결했으나 그것이 무엇을 남겼는가에 대해선 회의한다. ' 라고 쓰고 있다. 그러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지도 모른다고. 우리의 패배는 노정된 것이었을까? 천일에 천일을 더, 그리고도 더 천일을 투쟁했다면 혹시, 이길 수 있었을까, 아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자괴감 혹은 패배의식이란 자신의 능력으로 할 수 없었다고 인식할 때 생기는 것이다. 할 수 없었던 다른 원인이 있었다면, 그래서 원인을 통제할 수 있다고 평가된다면 절망이라것이 자신을 잠식해 들어오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설득할 수 없었고 그것이 천일 동안 현장을 함께 했고 다시 천일 동안 투쟁을 함께 한 동지들과의 관계의 정도였죠. " 그녀는 입술을 깨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고도 바보같이. 하고 이어 말했다.

" 천일을 더 동지들을 붙잡고 있었어요. 마치 바람난 서방을 쳐다보며 집에 들어오기만 해 달라고 애원하듯이. 우리의 결말이 어땠을 것 같아요? "

그녀는 망신창이가 되어 결별하는 것 밖에 없었다고 술회했다. 십년쯤 지나고 보니 말이 목구멍을 넘어 나오기도 하는 군요. 하고 덧붙이며.

나의 사랑은 반쪽이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온전히 하나의 사랑을 구하는 법은 없을 것이다. 내가 사랑해 마지 않았던 노동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몇 장의 시민권을 얻기 위해 계급 전체를 천민으로 전락시키는 협상안에 싸인을 하고 나왔다. 속으로 모다, 내가 저 시민권을 가지리라. 생각하며.

" 내가 그들을 분할해서 사랑할 수 있을 꺼라곤 생각하지 마세요. 나는 물론 공지영을 미워하지만, 그렇다고 쌍차의 노동자들을 더 사랑하는 건 아니랍니다. "

사랑을 잃고 어찌 노래가 가능하겠는가. 그녀는 더 이상 순결을 지키는 것에도 지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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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그애를 찾지 못하고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앉았다. 피아노 위에 손을 올려두고 가만히 손가락의 느낌을 기다렸다. 손끝, 지문돌기의 아래에서 하얀 건반이 따뜻해지고 있다. 모든 물질은 자체의 파장을 갖는다고 그애가 말했었지. 소리를 내고 싶은 것은 건반일까, 손가락일까, 아니면 우리 둘의 파장이 일치해서 일어나는 신기인걸까. 진은 소리없이 건반을 반쯤 눌렀다.

 

" 사계, 어때? 봄, 여름, 가을, 겨울... "

 

진은 피아노 앞에 앉으면서 물었다. 그애는 창 앞으로 가져다놓은 의자 위에서 무릎을 감싸안은 채 앉아 있었다.  짧아진 해 어스름이 창턱에서 그애의 옆얼굴을 지나 한쪽 어깨를 감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 여름, 여름이 좋아. "

 

그애가 말했고 진이 손을 움직였다. 아버지가 본가에서부터 가져온 피아노였지만 우아한 검정빛을 조금도 잃지 않고 민감하게 공명해주고 있었다. 그애는 피아노 치는 모습을 보고 있는 걸 좋아했다. 여름은 어둡고 불안하면서도 끈기있게 진을 끌고 갔다. 소리는 말처럼 뜻처럼 영혼을 가진 것처럼 방 안에 가득찼고 창문을 넘어갔으며 긴 계단을 지나 플라타너스 낙엽의 소용돌이 속에 서 있는 그애를 찾아갔다. 파장이 맞으면 반응하는 전기석처럼 그애는 귀를 기울이고 걸음을 빨리 했다. 연습실 앞에까지 온 그애는 소리없이 문을 밀고 한발 두발, 그리고 멈춰선 채 피아노치는 진의 등을 바라보았다. 부드럽게 움직이는 어깨, 춤추듯 너울대는 팔꿈치와 길고 긴 손가락. 그애는 벽 앞에서 무릎을 구부려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가을의 짧아진 해가 이울고 장막처럼 노을이 연습실 안쪽으로 퍼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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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바람이 차다. 몹시 가을 타는 그애는 어쩌고 있을까. 진은 피아노 앞에 앉았으나 선뜻 손을 올리지 못했다. 생각이 내달리고 있다, 그애는 지금...

늦은 가을이다. 플라타너스는 온몸을 흔들어 벌거벗은 채 승천무라도 추고싶다는 듯 끊임없이 낙엽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연습실을 나와 사범대 앞의 계단을, 호숫가를 돌아 학생회관 별관이랑 문과대의 뒷담을 살폈으나 그애는 없었다. 집에선 분명히 학교 간다고 나갔는데, 얼굴을 아는 같은 과의 사람들을 만나 물었으나 하루종일 어떤 강의에도 들어오지 않았다고 했다. 워낙 자주 빠지는 지라 별 관심도 없다는 표정의 동기들, 오히려 선배라는 여자들이 더 성실히 답해 주었다.

 

" 동아리실에 있을 것 같은데? 점심도 거의 그쪽 선배들이랑 먹으니까. "

 

단발 머리가 길어져 목과 어깨에 닿을듯 말듯한 여자선배는 얼굴 넓데데하고 눈도 코도 입도 다 커서 시원시원한 느낌이었다. 아, 언젠가 살풀이춤을 추는걸 본 것 같...진은 아는체를 했다. 그애가 어찌나 잘 묘사를 했는지 문과대 풍물패를 하면서 장구는 기본이고 무당춤의 전승자라고.

 

" 그건, 과장이 심하네요. 그냥 동아리에서 하는 수준이에요. "

 

"  예뜨락에 있는 거 아냐? 전에 거기서 같이 막걸리 마셨는데, 나중에 보니 거기서 책 보다가 막 자구 그러던데? "

 

숏컷트의 정말, 자격지심 있을 것처럼 못생긴 다른 선배가 자상하게 일러주었다. 동그마하니 호박모양인데 깨가 많아서 그리 보이나, 선배들 중 가장 생각이 깊고도 선하다. 라고 그애는 각주를 붙여주었었다.

 

" 니넨 파전이라도 놓고 먹었었지, 난 그냥 생두부만 달랑 놓고 먹었다. 것도 설립자 동상 아래에서 커피 마시는 커플들 구경하면서. "

 

중동? 비스무리한 어디쯤에서 교환학생으로 온 사람인가 싶을 만큼 가무스름한 피부에 큰 눈과 긴 속눈썹을 가진 여자선배가 남자처럼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곱슬곱슬한 머리도 그렇고, 아랍풍인데 아주 섹시미가 넘친다. 고 말하면서 그애가 실눈을 뜨고 미소짓던게 생각났다.

모두들 그애를 사랑하고 아끼는 듯 진에게 친절히 그리고 벌써 안 보인지 며칠 된 것 같다며 걱정스레 함께 행방을 궁금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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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 나는 독신주의자야. "

 

그애는 자신없이 말했다. 결혼이란 남과 여의 제도적 결합이니, 이를 좋다할 것인가 싫다할 것인가. 진은 끌듯이 물었다.

 

" 왜? "

" 나를 받아줄 남자는 없을 것같아서, 말하자면 피동적 솔로이스트지. "

" 고등학교 때도 그랬지만 지금도 과선배가 맨날 밥 사준다고 쫓아다닌다며? "

" 나를 모르고 접근하는 것뿐이야. 알고나면 도망갈 꺼야. "

 

허나 그애는 알게 하고 싶지도 않은 듯, 누구와도 길게 만나지 않았다. 인사치레의 관계 이상 무엇도 함께 하기를 원치 않는 그애가 그나마 얘기하는 사람들은 동아리에서 세미나를 같이 하는 선배들과 동기들이었다. 조금 잘 생긴 과의 학생회장과 문학써클의 키 크고 우수에 찬 표정의 한,두명의 남자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긴 했다.

 

" 시를 쓰는 사람들은 어째 하나같이 여리여리한 걸까? "

" 그래, 얼굴 허옇고 손가락 가늘고 목소리는 낮고 부드럽지. "

 

진은 거기다 안경까지 쓰면 완전.

 

" 브나로드야! "

 

하하하. 같이 웃었지만 진은 사실 러시아의 지식인운동도, 김기진의 시도 알지 못 했다. 그애가 읽고 있는 책은 대체로 역사책류였지만 가끔 소설을, 더 가끔 시집도 있었고 한번인가 펼쳐놓은 페이지를 읽어보았지만 뭐.

 

카페-의자에 겉터 앉아서

희고 흰 팔을 뽐내어 가며

<우 나로-드!>라고 떠들고 있는

60년 전의 노서아 청년이  앞에 있다.

 

그 시를 읽고 있었던지 그 애의 표정은 어두웠고 비감에 차 있었다. 물론 우리가 그때 아담한 까페에 앉아있긴 했었지만, 민들레찻집이라는 조그마한 걸이팻말처럼 정말 테이블이 두 세개 밖에 없는 그것도 학교 담장 아래 쓰러질 듯한 단층주택의 주차장을 개조한, 그런데에서 김치볶음밥을 먹는게 뭐 그리 부르조아틱하진 않을터인데.

 

" 대학을 다닌다는 것이 부끄러워. "

" 나두."

 

그애는 얼굴을 들고 빤히 쳐다보았다. 진은 음. 하고 신음을 삼켰다. 그애는 5월을 지나면서 무척 진지해지고 있었다. 두꺼운 한국현대사를 1권, 2권, 3권까지 읽어내더니 다음권이 안 나온다면서 비평잡지를 사 보기 시작했다. 그리스로마 신화를 끌어대며 대화를 잇곤 하던 그애에게 익숙해진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카프라던가 OSS요원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들어봤자 그애에게 심중의 공감을 하기는 어려웠다. 그런 진을 그애는 사랑했다.

 

" 피아니스트가 되려면 대학을 다녀야지. 너는 왜..."

 

그애는 도중에 말을 끊었다. 작년 수험생 시절, 엄마보다 담임보다 더 화를 냈던 것은 그애였다. 왜 피아노과를 안가고 음교과냐구, 바로 옆에 있는데 굳이 그럴게 뭐냐구, 나중엔 난 사범대 얘들은 다 싫어해! 라고 소리치기까지 했다. 하긴...사대 분위기가 좀 실용적이긴 하지, 반권위주의를 기치로 하는 그애의 컨셉엔 안 맞기도. 하지만 그애는 사범대로 가는 긴 계단을 좋아했다. 그늘도 지고 낙엽도 지고 바람도 땅 가까이 포복하듯 불고 가는 언덕 아래 사범대 앞의 계단에서 쇼팽의 에튀드를 들으며 진을 기다리는 날도 있었다.  

 

" 음악을 듣고 있는게 좋아. 주변에 무엇이 있던, 말 거는 이 없이 내버려둬 준다면... "

 

그애의 빨간 스테레오카셋트는 아직은 책상 위 한 구석을 지키고 있었고, 93.1 메가헤르쯔의 클래식이 계속 흘러나오는 한은 대학생이라는 그애의 신분이 유지될 것이었다. 아무리 백수의 탄식을 저를 향해 읊으며 괴로워한다 해도, 페미니즘의 끝을 이어 독신의 생애를 예감한다 해도 갓 스물의 그애가 바람부는 계단에 앉아 읽던 책을 덮고 녹턴을 듣고 있는 동안에는 진의 노래는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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