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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1/05/22
    습작 - 그녀의 일상
    외딴방
  2. 2011/05/21
    습작 - 그녀의 일상
    외딴방
  3. 2011/05/21
    습작 - 그녀의 일상
    외딴방
  4. 2011/05/20
    습작 - 그녀의 일상
    외딴방
  5. 2011/05/11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외딴방
  6. 2011/05/11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외딴방
  7. 2011/05/09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외딴방
  8. 2011/04/29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외딴방
  9. 2011/04/29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외딴방
  10. 2011/04/28
    습작 - 열 아홉의 그녀 13
    외딴방

습작 - 그녀의 일상

그녀의 다리 사이를 닦아주었다. 물티슈 왕창 쓰면서. 

우리들의 홈이라면 함께 목욕이라도 할텐데.

도질까, 무섭다. 집을 갖고 싶은.

욕망, 그보다 더 진한 감수성.

 

창 넓은 베란다를 갖고 싶어. 아니 발코니를.

연한 초록의 잎들이 무성한 나무, 풀, 낮은 꽃나무. 듬성듬성 내보이는 흙더미들.

그녀는 가꾸지 않은 정원이라도 흙을 밟으며 걷고 싶어한다. 발이 아프게 되고부터.

 

- 강화마루, 아니 원목마루인가. 암튼 마룻장 때문이야. 넓고 딱딱한.

 

그녀는 발이 아프게 되기 직전, 통증을 느끼면서 이상하다 생각하면서 그래도 관심두지 못 하고  바쁘기만 했던 아이들의 세살, 다섯살 적을 보냈던 아파트에서의 넓은 마루가 생각난다고 한다. 그 마루 끝에서 울었던 일. 아이 돌보기에 힘이 부쳐 괴로웠던. 남편에게 화내다가 하소연하다가 속이 끓어 슬픔이 북받쳤던 일. 그 집을 슬픔으로 기억한다. 그 넓고 딱딱했던 마루. 청소하기에 힘에 부쳤던. 늘 어질러진 집기들을 집으러 다니느라 발이 아팠던,  제 몸을 돌아보는 것이 너무 늦었던, 그 집을 떠나고 또 다른 집에서 맞벌이하면서도 채 일년을 살아내지 못 하고 결국 집을 줄여 이사할 수 밖에 없었는데. 그제서야 그녀는 몸이 예전같지 않음을 알았다고. 더이상 무리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았음을, 그녀는 금방 되풀이되는 스트레스와 피로에 처지는 몸과 불안정한 정신을 수습하지 못 하면서 눈물 많아지는 자신을 발견하고. 아, 못 하겠다. 하였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남편에게 끊임없이 화를 내는 자신을 발견했다. 자신을 제어하지 못 하는 자신을 비로소 돌아보면서 그녀는 말하기를 멈췄다. 그렇게...화내면서 살 무엇이 있는가고.

그리고 버릇처럼 되뇌었다. 괜찮아. 하고.

원하지 않으면 상처받을 일도 없지. 하면서.

내가 그에게 너무 큰 것을 원했다. 하고.

그를 사랑하지 않았으니 상처받지 않을 테지.

그리고 앞으로도 사랑하지 않는다면 새로 상처입을 가능성은 없을 테니.

 

" 우리, 연애하자. "

 

그녀의 벗은 어깨 위로 린넨셔츠를 걸쳐주면서 속삭였다. 팔을 끼워 옷을 다 입고, 누웠던 자리에서 일어나려 손을 내어민다. 붙잡아 일으켜 달라고. 항상 어리광을 부린다. 곁을 주는 모든 사람에게.

" 혜정아. "

그녀, 못 들은 듯 바지를 꿰어입고 바클을 채우고 매무새를 다듬는다. 시계를 흘낏 거리며.

 

" 너, 빨리 옷 입어. 나는 다 입었는데 뭐하고. 웃기쟎아, 너만 홀랑 벗고 있으니. "

 

그녀의 작은 입이 웃음을 떨구고 있다. 제가 주도하여 갖고 놀았으니 이만 가 볼란다. 하는 선비처럼. 그런 마음의 자세로 내려다보며, 어서 일어나라고 채근한다. 그녀가 무릎으로 어깨를 친다, 톡톡.

 

" 혜정아, 우리 연애하자. "

 

더 크게 또렷이 말했다. 그녀의 무릎을 감싸안으며. 매어달리는 주막집 과부처럼 비통하게, 애절하게, 아니 진솔하게.

그녀는 진지하지 않은 건 아니나 그리 심각해할 만한 얘기는 아니라는 듯.

 

" 어, 참, 빨리도 얘기하네? 키스하고 포옹하고 자고 난 담날 아침에야 대사 치는 게 요즘 청소년들의 연애순서야? "

 

그녀, 올려다보며 미안함 반, 간절함 반으로 눈길 꽂았으나 마주쳐 주지 않고 손길 내민다. 일어나라궁...시계 좀 보구...나, 얘들 데리러 가야 해. 너두 할 일 많쟎아. 그녀의 손을 잡고 일어나 옷 입고 방을 나왔다. 그리고...

 

" 혜정아, 우리 연애하자. "

" 아, 97번만 더 말하면 백번째야. 너 백 한 번째까지 프러포즈할꺼야? "

" 응. "

" 왜 그래? "

 

그녀, 비로소 눈 들여다보며 가만히 섰다. 그녀가 모르지는 않는다. 무슨 뜻인지. 우리. 라고 말했는데. 그녀에게 사과해야 할 것이다.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대해. 앞으로도 그럴 의사가 없는 것에 대해. 그러면서도 이리 강짜부리듯 규정을 하자 하는 것에 그녀는 따지고 들며 부당하다 할 지도. 허나, 누가 따지리. 사랑하면서 사랑해선 안된다는 당위론을 들먹이는 게.

 

" 연인이라고 인정해 줘. "

" 그게 무슨 소용인데? "

" 나한테 솔직하게...욕구를 보여 줘. "

" 니가 그러고 싶은 거겠지. "

" 너도 그러고 싶쟎아. 싶을 때 있쟎아. 오늘처럼. "

 

그녀, 잠깐 생각을 하려는 듯 말을 멈춘다. 눈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맘이 읽히지가 않는다.

 

" 그래. "

" 혜정아. "

" 하고 싶을 때 얘기할께. 내가 그러듯 너도 그러면 되지. 우린 연인이야. 됐지? "

" 혜정아, 내가 성욕만 얘기하는게..."

" 네가...대체 뭘 해 줄 수 있어? 내게. "

 

그녀, 똑바로 쳐다보고 있지만 분노 혹은 슬픔이 없다.

 

" 네게 미안하다고 말하진 않을 꺼야. 하지만 사랑해. "

 

그녀, 감흥없이 듣고 있다. 이런 고백을.

 

" 내가 더 사랑해. "

 

그리고 돌아선다. 시간 없어. 갈께.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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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그녀의 일상

그녀의 두 손이 손바닥을 맞잡듯 떠받치고 있다. 손바닥 안에 움푹 패인 화상 자국이 무슨 신주단지라도 된 듯.

상상력이 풍부한 그녀, 가스렌지 위에서 번지는 불길을 눈 앞에서 보는 듯, 황망히 불꽃 위로 내젓는 두 손이 미처 느끼지 못 한 뜨거움을 대신 느끼듯 눈쌀 찌푸러진다. 속 상하고 속 상해서 그 마음 베어져 건너올 것 같은 찌푸린 얼굴, 꾹 다물어지다 못 해 질끈 깨물어지는 입술, 동글게 오무리며 다가온다. 호. 하고 불어줄 듯.

 

" 흉 지면 어떡해. "

" 손바닥인데 뭘. "

 

그예, 입술 다가와 더운 숨결을 떨군다. 살짜기 벌어지며.

저절로 손바닥이 닫아진다. 손목 비틀며 빼내려는 데 그녀, 작은 두 손 와짝 감아잡고 놔주질 않는다.

하아.

이 여자가.

 

" 놔. "

" 싫어. "

 

이 여자가, 상황 판단 못 하네. 안 하는 건가.

그녀의 어깨로 자유를 가지고 있는 다른 한 손이 건너온다. 둥근 어깨, 작고 좁다. 한 손가락만 걸쳐도 다 가려지는.

그녀의 두 손 안에 잡혀있는 한 손에서 힘을 빼며 그 시각, 그녀의 어깨를 타넘는 다른 손에는 힘이 들어간다.  결코 의도한 바 없다. 누가 이런 세밀한 계획을 세울 수 있단 말인가. 애드립이 난무하는 예능프로의 작가처럼 사랑의 순간에는 예측이 불허하다.

 

" 그럼, 다른 데선 싫다고 하면 안돼. "

" ... "

 

그녀, 무슨 말이냐고 다시 묻고 싶으면서도 눈을 들지 않는다. 손바닥의 상처에서 시선을 떼지 못 하고, 그에 팔린 정신이 다른 눈치를 채면서도 수습이 안되고 있다. 그런 것이다. 알면서도 거절하지 못 하는. 사랑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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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그녀의 일상

그녀가 우니까,  감정 흐트러진 틈을 타서 어찌해 보려는 게 아니다.

지난 주부터 하루 걸러 사무실에서 보면서 그녀, 감정 살지 않고 있는 것도 느껴 알고 있다.

언제 니를 사랑하였다고? 하는 듯 무심한 표정, 무심한 눈길, 무감하게 스쳐 지나가면서 그녀와의 거리가 이전 그 어느 때보다도 멀어져 있다는 걸 새록이 되새겼다.

지난 해 가을에서 겨울까지 있었던 일들이 아득한 과거처럼, 태고의 화석처럼 감흥이 없다. 누가 그녀를 이리 만들었는가. 눈 들어 바라보는 시선 끝에 허망함이 흩어질 뿐. 주저리 수다를 늘어놓은 들 어느 한 대목에도 힘이 실리지 않고 있는데.

 

- 양평으로 가는 건.

그녀의 눈길, 탁자의 가으로만 흘러다니는 시선을 마주치지 못 해 약간 고개를 숙이며 쟝은 물었다.

- 이젠 포기한거지?

- 뭐.

그녀는 동기와 함께 있는 자리이니 머쓱해하는 듯 흘려말한다.

- 현실성이 없쟎아.

 

그리고 알바하러 오라는 말에 반색하듯 대답했으나 표정은 전혀 기쁜 빛이 없었다. 잘됐네 !  파트타임 일거리 찾고 있었는데, 유아영어 지도하는 거 할껄 그랬다고 후회하고 있었쟎아. 하고 동기가 말하는 중에 뭐라 맞장구 치지 못 한채 시선을 헤매이던 그녀. 바로 담날 문자를 보내왔다. 오늘부터 사무실 나갈까? 하고.

생각없이 나오라고 했다. 바로 회의 있다는 게 생각나서 다시 전화했지만 이미 오고 있는 중이라고.

만나서 30분 만에 헤어졌다. 그녀, 불평 없이 돌아간다. 다음날 다시 오겠다며. 회의가 연짱 있었고 지방에서 올라오는 회원들 땜에 1박 2일 연수까지 겹쳐서 그녀, 사무실에서 찬찬히 볼 수 없었다. 하필, 그녀가 오는날 운영위원장까지, 단체 사람들이 드나드는 통에 그녀에게 겨우 사무적인 말만 몇 마디 했을 뿐. 그녀는 사수에게 지도받는 도제처럼 얌전히 업무용 싸이트를 눈과 머리에 익히는 데 집중했다.

 

- 행정업무가 맨날 쌓여서리.

컴 쳐다보다가 가스렌지에 찻물 올려놓은 걸 잊어버려 화재날 뻔 했다고. 물 뿌리면 안된다는 걸 기억해서 주변의 두터운 옷가지로 덮어 껐는데. 제법 큰 일이라 얘깃거리 삼아 떠들어댔다. 그러다가 손바닥에 화상 입었다고 슬쩍 보이며. 그녀, 미간을 찌그리며 금세 수심에 찬다. 어디 봐, 많이 다쳤어? 하는 그녀의 눈길과 손길 사이에 내놓았던 손을 뺐다. 피부 스치는 것도 어색하다. 그녀의 동기가 바로 앞에 있는데.

 

손길 피했던 것을 맘에 담은 그녀.

사무실의 옆자리에 앉아서도 한 번 다시 보자는 말 않더니, 찻잔 가져다 책상 위에 놓아주는 데 시선이 걸렸다. 빤히. 꽂아넣을 듯 시선을 박은 그녀, 찻잔에서 떨어지는 손을 쫓아 고개를 든다. 곱슬머리, 파마를 해서 웨이브가 더 강하다. 이마를 가리고 눈썹을 묻었으나 눈꺼플이 떨리는 것을 감추지 못했다. 괜찮아? 하는 말에 뭘? 하면서 모르는 체 했다. 손길 피했던 것에 맘을 다친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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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그녀의 일상

그녀가.

자판을 치다가 멈춰 있다.

아까 가져다 준 감잎차를 여즉 반 넘어 남긴 채.

그 눈길이 화면을 향해 있지만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 손, 다쳐서 어떡해.

- 뭘.

 

그녀가 다친 손바닥을 보려고, 만지려고 하는데 접촉을 피하듯 팔을 치웠다. 눈치챘을 것이다. 피한다는 것을.

그리고 마음에 담았다.

마음에 담겨 어쩌지 못 한 채 출렁이고 있다.

 

" 뭐 해? "

" ... "

 

대답 안 한다. 못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들었대도 대답할 성격 아니다, 그녀는.

그녀가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자판 두드리는 소리를 내기가 멋쩍다. 아니..불편하다. 무척.

삐진 그녀.

 

의자를 밀어 그녀의 옆으로 다가 앉았다.

" 왜 그래? "

그녀의 대답이 없을 것이니 기다리지 않고 책상 위로 손을 뻗어 자판 위에 얹혀진 채 가만히 있는.

" 손 대지 마! "

낮지만 무게가 실린 목소리. 하지만 끝이 떨리고 있다. 분함을 감춘.

그녀의 손등 위로 손가락을 걸쳤다. 그냥 가만히 있다. 손등이 조금 뜨겁다.

" 넌...."

목이 메였다. 금방도 운다. 어느틈에 눈물이 찼을까. 곧 떨어질 것 같다. 말을 잇지 못 하나 그녀의 뜻을 안다.

" 왜 못 만지게 하냐구? "

그녀의 손등 위에서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보여주며 속삭였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뜬다. 그러느라 고였던 눈물이 툭 떨어진다. 그러나 펼쳐진 손바닥 안에서 꽤 넓게 살갖 벌려진 채 부풀어있는 상처를 보느라 그녀는 경황이 없다.

" 어떡해 ! "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상처가 있는 손을 감싸안듯 모아 쥔다.

그녀에게 한 손을 내어맡긴 채, 다른 한 손을 들어 그녀의 등 뒤로 올렸다. 등에 닿지 않게 조심하여 의자 등받이 위로 걸쳐올리며.

" 괜찮아. 아프지도 않고. "

그녀는 속이 상해 어쩔 줄을 모른다. 상처 위로 손을 올렸으나 차마 대어보지는 못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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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나중에 그녀가 대학에서 데모를 하러 다니고, 낮에.

밤에는 세미나를 하러 다닐 때. 학교를 벗어나서 알 수 없는 여러 대학의 여러 남녀들과 어울려 세미나를 하느라 그녀는 주로 밤에 모였다. 룸이 있는 카페들이나 아니면 누군가의 자취방에서. 그리고 지하철이 끊길 때쯤 막차를 탔고 여느 대학생들처럼 남자들은 여자들을 바래다주지 않았다. 물론 커플이 된 여자애들은 아니었지만. 그녀가 몰라서 그렇지, 커플이 되어가는 중이었던 남학생들은 여학생들을 집까지 바래다주었을 지도.

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여자동기는 항상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집이 큰 길가에 있어서 자기는 위험한 골목길이라는 걸 잘 몰랐다고. 하지만 그 여자동기는 그녀의 학창시절 친구들이 많이 그랬던 것처럼 조용한 주택가에 집이 있었다고. 그렇게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여자 혼자 가는 건 위험하다고. 운동을 하는 남녀 대학생들은 서로를 차별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사회가 만들어놓은 차별을 간과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었는데.

그런 골목길을 지나 집으로 가던 동기는 정말로 집 근처에서 성폭행을 당했었다. 나중에. 한참 나중에 그 사실을 그녀에게 말해 주었는데 그녀는 뭐라 위로해야 할 지. 그냥 담담히, 그런 건 그냥 사고같은 거니까. 너무 상처받지 말라고. 우리들은 모두 그런 현실에 분노하고 너를 사랑한다고. 다행히 친구는 많이 힘들었지만 많이 도와주었던 친구가 있어서 잘 극복할 수 있었다며. 그리고 그 친구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하였었다.

 

그녀는 여자들은 위험해. 하고 다시 중얼거렸다.

" 힘으로는 남자들을 당해낼 수가 없으니까. 공정한 싸움이 안돼. 싸우면서 크는 아이들이라거나, 몸으로 한 판 붙고 나면 더 친해진다거나 그런 건 여자애들에겐 해당이 없지. "

그리고 나서 그녀는 한참 말이 없다. 여자를 향해 진심으로 완력을 사용하는 어떤 남자들의 무지함과 천박함을 생각하는 듯. 비참한 표정, 그늘이 이마에 드리웠다.

그녀는 남자들의 더 강한 완력을 싫어했다. 더 넓은 어깨도. 더 크고 굵은 가슴이나 팔뚝. 나중엔 오동통한 돌쟁이 사내아이의 더 무거운 체중조차. 무거우니까 더 힘들어. 하면서. 골목길을 뛰어노는 남자아이들의 빠른 달리기솜씨나 욕지기와 함께 거칠게 내뱉고 가는 남자아이들의 고함소리에도.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런 걸 남자다움이라고 말하는 혹은 말하고 싶어하는 아줌마들, 할머니나 할아버지, 빙그레 미소를 걸고 아들을 쳐다보는 퉁퉁한 뱃살의 사내들을 피해 그녀는 시선을 멀리 두고 걸었다. 알고 지내고 싶지 않으니 말 걸지 말라는 듯이.

 

그래서일까, 그녀가 좋아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다 샤프했다. 마른 체형에. 순한 표정, 조용하고 부드러운 목소리. 아무리 화가 나도 상욕을 하지 못 하고 혼자 툴툴 거리는 소심가들. 츱...오래 사귀지는 못 했다. 쪼잔해서들.

 

그녀는 조용히 차를 마시며 환담을 나누는 걸 좋아한다. 커피를 마시면 꼭 비스켓을 하나. 피아노연주가 들어있는 음악이 있으면 더 좋다. 튀는 음악, 노랫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가요, 비트가 있어 배경으로 깔기에는 부담스러운 곡이 나오면 그녀는 입을 다물었다. 귀로 상대방의 말을 다 알아듣지 못 해 표정은 점점 멍해져갔고 결국 빨리 헤어지기를 원하며 시간을 확인하곤 했다.

" 다른 음악 없어? "

 하고 그녀가 요청하는 일은 드물었다. 진은 그녀와 사귀며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또 연극을 보며 덕수궁이나 프랑스문화원을 돌아다녔으며 그러지 않는 더 많은 시간을 정독도서관의 잔디밭에서 보냈다. 나중에는 그녀가 다녔던 대학 캠퍼스의 호수 주변, 오래된 문과대의 허름한 외벽 아래 그리고 고전음악감상실에서 홀로 앉아 있는 그녀를 찾아내고는 했다. 그리고 학교 앞의 작은 찻집들을 찾아 전전했다. 주로 조용한 음악을 틀고 있는 곳으로.

그녀가 상대방에게 자신의 요구를 전하기보다는 빨리 헤어져 혼자가 되는 쪽을 택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진은 그녀가  떠나고 싶어하지 않을 만한 장소를 찾기에 집중했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샤갈의 눈 내리는 마을

어린 왕자

이런 제목의 간판을 달고 있는 카페들이 대체로 그녀의 취향에 맞았다. 크고 넓은 창과 함께, 테이블 구석엔 밤시간이 아니라도 곧잘 사용되는 낮은 촛대와 밝은 색깔의 초가 놓여있고.

그녀에게 가장 추천해서는 안되는 데이트코스는 스포츠경기 관람이었으며 두번째로는 액션영화였다. 그녀는 거의...고문을 견디는 표정으로 자리을 지키곤 했다. 그것도 꼭, 정말로 그 동행했던 사람과 헤어져서는 안되는 불가피한 목적성이 있었을 경우에만. 결국 그런 것들이 그녀를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할 수 없는 요인이 되었다. 너무나 어색하게 참고 있는 그녀를 사람들은 편하게 느끼지 못 했으므로. 티비 앞에서 그녀는 시선을 멀리 혹은 빗겨두고는 했고, 드라마 속의 배역들을 변별해 내지 못 했으며 주변사람들의 수다 중에 등장하는 이름이 극 중 인명이 아닌 연예인의 이름인 것 때문에 더욱 혼란스러워했다. 결국 티비보기를 포기하고 노래방가기를 꺼려하고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곳이 아닌 술자리를 기피하는 그녀는 학창시절 이후에도 편하게 알고 지내는 지인을 얻지 못했다. 거기다...남자의 완력과 여자의 순종, 돈 벌어오는 기계와 같은 남편과 하녀처럼 가사서비스에 몰입하는 부인들을 보면서는 결코 그네들과 말 나누기를 하지 못 했다. 그녀가 누구와 대화할 수 있겠는가. 자신의 집에서도. 결혼한 시댁의 사람들과도. 그들과 같은 사고방식을 가진 남편과 공유하는 자신의 집에서도. 그녀는 항상 혼자 있고 싶어했다. 열 아홉살에도, 그 이후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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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여성은 불안하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신에게 여자로 태어나지 않게 해 주신 것을 감사하다고 했다던가.

 

그녀를 뒤에서 안는 것은 금지되었다. 이수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에.

진이 그녀에게 다그쳐 묻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그녀의 불안증과 비명과도 같았던 그 외침이 자꾸 마음에 남았기 때문이었다. 넋을 놓고 잠들지 못 하는 그 수면장애와 함께.

 

" 왜 그러니? "

그녀의 어깨에 한 팔을 두르면서 초딩 때부터의 동무인 양 물었다. 그녀의 친구, 기억하는 한 집에서 학교 가는 길 중간 어디쯤에 집이 있었다는 5학년 때의 친구는 두 명이었다.

한 명은 골목과 골목을 누벼 한 가운데, 다른 한 명은 큰 길 가까운 아담한 단독주택에. 골목 속의 집도 단독주택이었으나 가내공장을 하시는 아버지와 함께 엄마, 언니들, 그외에 한둘 더 있는 여공들 사이에서 그녀는 동무와 함께 부엌 위 다락방에서 놀았다고 했다. 열 두어살 먹은 계집아이들이니 소꿉놀이를 한 건 아니고 주로 만화책을 함께 봤었다던가. 그 친구와 무얼 더 했는 지는 기억에 없다고, 저에게는 좋아하는 만화책을 함께 읽고 얘기 나눌 수 있는 것이 좋았었다고, 같은 반에 또 다른 아이가 한 명 같은 만화를 즐겨 보며 다음 편이 언제 나오는지 출판사로 전화를 하기도 하던 여자애가 있었지만 그 애와는 친할 수가 없었다고. 부티나는 차림새와 사람을 깔보는 듯한 말투로 얘기하는 그애와 저는 누가 더 공부를 잘 하나 하는 걸로 비교되긴 했으나 친하지는 못 했다면서. 만화 좋아하는 애들이 공부도 잘 해. 하는 말을 하던 그애보다 마당까지 평상과 지붕을 이어놓고 요꼬기계를 늘어놓은 사이로 만화방에서 빌려온 꾸러미를 가슴에 안고 통과하여 다락방으로 기어올라가 함께 배깔고 만화를 봤던 그 친구는 공부를 못 했는데, 친하기는 쉬웠다고.

아담한 쪽의 단독주택에 살던 친구의 이야기는 별로 하지 않았지만 진은 자신과 중학시절 같은 반이었던 그 애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그녀를 이해했다. 초등학교의 친구가 중학시절까지, 그래서 사춘기적 감성으로 계속 벗이 될 수 없었던 것에 대해 그녀는 편하게 추억하지 못 했다.

 

" 중학교 때 별로 친하지 않은 동급생이 우리 동네에 살았는데. "

그녀는 너도 보아서 알지 않느냐며 자신의 집은 시장통에 있는 상가건물이라고. 시장통을 조금 벗어나면 조용한 주택가가 있는데. 하면서.

거기 줄 지어있는 낮은 단독들 중의 한 집이 그애네 집이라고. 자신이 알게 된 건 장사를 하시는 부모님이 그 집딸이랑 같은 학교라며? 하시더니 같은 반이라며? 하시더라고.  서로의 부모님들이 동네 이웃이지만 주택가의 회사원 혹은 전업주부와 시장통의 장삿꾼 내외와는 별로 왕래가 없었다고. 그 가게에 뭘 사러 혹은 왜 우리 가게에 안 오나. 하는 둥의 혼잣말을 하는 경우 외에는.

진은 이 애가 왜 그 친하지 않았던 중학시절의 동급생 이야기를 하나 싶었지만, 그냥 참고 들었다. 왜 그녀가 뒤에서 불쑥 나타나는 사람 그림자에 그렇게나 놀라는 지, 놀라고 나서 안전을 확인한 후에 그렇게나 슬퍼하는지.

" 그 집 앞에서 어떤 남자가 뒤에서 확 껴안는거야...."

" 그런 일이 있었어? "

진은 가슴을 꾹 누르며 짐짓 태연하게 말을 받아주었다.

" 대문이, 왜 지붕이 있어 화분이나 뭐 채소같은 걸 심기도 하쟎아. 장독대랑 이어서. "

" 응, 그래. "

" 그래서 대문 앞에 구석진 곳으로 서 있으면 잘 안 보여. 거기 사람이 있는 줄 몰랐는데...어두워서...새벽이었거든. "

" 새벽에 왜? "

왜 새벽에 골목길을 돌아다니냐구...진은 머리가 아프다. 이 애가...다 자란 처녀 아이가.

" 새벽에 왜 그 집 앞을 지나갔는데? "

그녀는 아니 뭐. 하면서 주저주저하더니 생긋 웃어보인다. 밤산책이 이어져서. 라는 말이라도 할까 싶었으나.

" 신문배달 하느라. "

" 신문배달? 네가? "

그녀는 이젠 내어놓고 웃으며 어색함을 얼버무리려 한다. 왜? 내가 키가 작으니까? 하고 따질 것 같은 눈으로.

" 여자애들도 많이 해. 고등학생들이나, 뭐 남자애들은 중학생들도 하쟎아. "

" 그래, 그래서? "

진은 그녀가 왜 신문배달을 해야 했는지도 의아했으나 그 새벽에 더 무슨 일이 있었는가에 침이 말랐다.

" 아냐, 별 일 없었어. "

" 그래? "

" 응, 내가 놀라서 소리를 빽 질렀더니 그...남학생도 놀랐는지 금방 도망가더라구. "

" 남학생이었어? "

" 응. 고수머리의, 고등학생이나 아님 재수생? 뭐 그런 것 같던데. 그냥..."

그녀는 잠깐 생각하더니 이어 말했다.

" 신문배달은 되게 일찍 시작해. 거의 한밤중에 보급소에 가서 신문을 받아다 난 몇 부 안 되어서 다 돌릴 때 쯤에 겨우 새벽빛이 조금 대문들의 색깔을 알아보게 해 주거든. 그 남자애는..."

진은 말대답해 주는 걸 잊었다.

" 내가 모자도 쓰고 점퍼에 바지입고 긴 머리도 잘 안 보였는데, 키가 작아서 여자애라는 걸 눈치챘나 봐. 아마...미리 거기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는지..그냥, 여자애를 한 번 안아보고 싶었던 가 봐. 근데 소리를 지르니까 너무 놀랐나 보더라구."

그녀는 어색하게 웃으며 내가 비명지르면 좀 찢어지는 목소리지. 하면서.

진은 웃음이 안 나온다. 뭐라고 대답 치기도.

" 큰일날 뻔 했네. "

" 응. "

그녀는 바로 그 신문배달을 그만 두었다며. 여자애들은 너무 불안해. 하고 중얼거린다.

 

" 신문배달해서... 돈 벌어서 뭐 할라구? 학생이? "

" 글쎄... 유흥비 마련? 학생이니까? "

하면서 막 웃는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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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그녀를 보내서는 안되었다.

진은 빗장뼈처럼 걸리는 그녀의 호흡을 느꼈다. 허리께에 머무는 그녀의 흐느낌과 함께.

 

 

"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구 !"

이수는 반드시 해명을 하여 누명을 벗겠다는 듯 변명을 계속했다.

진은 한숨이 나왔다. 화를 내다가 큰 소리도 나오게는 되었으나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다. 이수가 부러 방 안에 있으면서 집에 아무도 없는 척을 한 것도 아니고. 이러든 저러든 그녀가 사실 그렇게까지 놀랄 것도 없는 것이었다.

" 나두 조심스러워서 천천히 기척을 내려고 한 거라구..."

이수는 정말 억울하다는 듯, 사뭇 애원조다. 하기야 제가 멀대같이 키만 컸지, 조숙한 그녀에게 대면 초딩이나 다름없을 텐데 언감생심...치한 취급을 받는 것이 제가 더 억울하고 분하다는 듯.

" 누가 그렇게 놀라 소리지를 줄 알았냐구, 내가 뭘 어쨌다구, 그냥 마루로 나가면서 발소리 내도 못 들은 것 같기에 인사할라구..."

진은 그래도 그냥 말로 하지, 어깨에 손은 왜 올리냐구! 하고 말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로 내어놓는게 더 이상하다.

" 그래, 알았어. "

그냥 서서 쳐다보고 있는 이수.

" 괜찮대? "

" 그래, 혼자 딴 생각하다가 깜짝 놀란 것 뿐이라구. 너 때문 아니라구, 몇 번이나 얘기하더라. "

그래도 쳐다보는 이수, 망설이듯 하더니 결국.

" 무슨 생각을 하면 그렇게 놀랄 수 있어? "

하기야....진은 저도 황당했겠지 싶긴 하다. 단어로 표현하진 않았어도 그 비명 소리는 그냥 외마디, 놀람의 방출이 아니었다. 최대한 크게 지르는, 길게 빼어 도움을 요청하는 소리, 늦은 귀가길의 구석진 어둠 속에 숨어 있다가 덮쳐드는 사내의 팔에 갇히기 직전, 입을 틀어막히리라는 예감 속에 찢어지는 듯한 목소리로 위급함을 알리는 비명이었다. 대문 앞에 오기 전에 귀에 꽂히는 그 소리가 그녀의 것임을 직감하며, 열쇠를 돌려 대문을 따며 이걸 부수고 싶다는 생각이 확 스쳐지나갔었던 진은 순식간에 뛰어오른 현관 앞에서 어안이 벙벙할 지경이었다.

당장 눈에 들어온 그녀의 움추린 어깨.  떨고 있는 손과 터져나오는 울음소리와 그 뒤에서 망연한 표정으로 두 손 쳐 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는 듯 굳어진 이수와 눈이 마주치자 당장 울기라도 할 것처럼 누나를 쳐다보며 도움을 요청하는 동생을 보면서는, 심장이 멈추는 듯 했었으나 머릿속이 바쁘게 돌아가며 상황을 판단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 정말 괜찮대?"

이수는 얼마 전까지 누이와 그녀 사이를 걱정하며 못 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이맛살 찌푸리며 말을 아끼던 것과는 딴판이다.

" 응. "

하지만, 그녀는 진이 와서 말해 주기 전에 이미 눈으로 이수를 확인하였으면서도 터져나온 울음을 주체하지 못 하였다. 가슴의 떨림이 멈춰지고 손을 꼭 부여잡고 놓지 않고 있음에도 그녀는 통곡하듯 울음을 참지 못 했고 방에 혼자 있게 하면서 차를 가져다 주어서도 입으로는 괜찮다 하면서 눈으로는 차고 넘치기만 하였다. 그녀는 스스로를 한심하다 하였다. 그리고 자기연민이라고 중얼거렸다.

" 근데, 왜 그렇게 오래 울었대? 원래 그렇게 눈물이 많아? "

이수는 남학교를 다니면서는 여자의 얌전함을 가까이서 본 적이 없다 하더니, 누이는 제쳐두고 그녀가 여성스럽다 여겨지는 가 보다.

" 감정선이 약해서 그래. 원래 소설이나 만화책 보면서도 잘 울어. "

" 그래? 뭐, 드라마 보다가도 아줌마들이 운다고는...근데, 그렇게 길게 우나? 한참이나 훌쩍훌쩍, 집에 갈 때도 보니깐..."

" 원래 그래!  라임오렌지 나무라는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울면서 읽었대. 테르미도른가 뭔가 하는 만화도 보고 또 보면서도 자꾸 눈물이 난다고. 그 얘기 하면서도 생각이 나는지 또 울고. "

이 자식이 뭘 자꾸 물어보구...진은 그녀를 다른 누군가가 들여다본다는 게 좋지 않다. 부러 길게 설명을 해 주었더니 그것도 짜증난다. 그녀를 또 누군가가 자세히 알게 되는 것도...별로군.

이수는 그래? 그런 성격이군. 하면서 뭐를 납득했다는 건지 물러나면서 누이를 한번 흘낏 건너다 본다.

" 왜? "

피곤함을 느끼면서 진은 동생을 쳐다봤다. 그녀를 집에까지 데려다 주지 않았는데. 자꾸만 괜찮다고 혼자 가겠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빨리, 혼자가 되고 싶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밀쳐졌다는 느낌.

" 아까...바래다 준다고 나갔을 때...현관 앞에 이게 떨어져 있더라구. "

이수는 슬쩍 주머니에서 봉지째 꾸짓꾸짓해진 무언가를 식탁 위로 내려놓고 휙 고개 돌리고 등을 보이며 제 방으로 사라진다.

진은 아! 하고 속으로 외치면서 얼른 손아귀 안으로 끌어들였다. 젠장...이것 때문에.

그녀를 대문 안에 먼저 밀어넣고 진이 왔던 길을 돌아가서 약국에 들러 사 온 것.

애인을 꼬실 양이면 준비성이 철저해야지, 사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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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진은 열 일곱이었다. 제가 12월 생이고 그녀가 8월 생이니...2년하고도 4개월...뒤에 태어난 셈이다. 흠...그.래.서. 뭐 어떻단 말인가. 진은 동생이 학교에서 동급생들에게, 그러나 나이로는 1년 하고도 몇 개월씩 차이나는 여드름 덕지덕지한 뚱보들을 내려다보며 씹듯이 뱉어내던 말을 거울 속의 저를 보면서 하고 있었다.

이수가 키가 훌쩍 커 버린 2학년 이후 사춘기에 내몰린 남자아이들은 패를 짓거나 혹은 은둔하면서 성적 호기심을 다 채우지 못 한 채, 저 보다 더 키가 큰 놈의 나이를 시비삼지 못 했고 못 하면서 코가 큰 놈은 거시기도 크다더라. 하는 말을 떠올리며 밥그릇 수는 적은데 어찌 그게 다 코로 갔나. 하면서 이수의 매부리코를 흘끔거렸다.

오히려 그 이수하고 나란히 서면 동급생처럼 보이는 게 그녀였는데.

진은 두 살 차이가 뭐 대수라고. 하는 생각을 하였었다. 하였지만 그녀가 주민등록증 나오지 않았느냐고 지나가듯 물었을 때는 못 들은 척하며  넘겼다. 그녀도 재차 묻거나 하지 않았는데, 아마...제가 일찌기 가지고 있는 것을 보여달랠까봐 두려웠던 듯. 진은 나야말로 두렵다. 없는 걸 보자 하면 어쩔까 싶어서. 2학년 내내 교실에서는 가끔 주민등록증을 보이며 몇 달 언니네 동생이네 하는 동급생들의 수다가 끊일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귀를 파고드는...그 놈의 나이타령. 진은 속으로 곱씹었다. 그럼...내가 니를 언니라 부르리...하는 대사를 혼자 치면서.

언니라 부르며 안을 수는 없지 않은가...아마 그보다, 그녀가 결코 안기려 하지 않을 것이다. 저보다 동생에게. 한 살 차이로도 억수로 고뇌하는 그녀인데. 그래서 진은 더욱, 실제 나이같은게 무슨 소용이냐. 학령기 이후 교육기간이 얼마인데, 이미 사회화되는 만큼 성장의 속도는 비슷할 것이다...닥쳐보면 그게 아니라는 걸 알지만.

진은 그녀를 껴안았던 처음에는 아니었지만 두번 째부터는 벌써 어, 이게 아닌데. 하는 생각에 흠칫 놀랐었다. 뭐, 나중에는 찬탄해 마지 않았으나. 그녀의 흥분과 강도, 지속성 뭐...재발성? 아니 반복성? 까지 진은 그녀를 당해낼 수가 없었다. 사실 솔직히 거울 속에서 자신 외에 듣는 이 없으니까 말하는 거지만, 진은 그녀에게서 거의 배우는 수준이었고 간신히 티 안 나게 따라해 보며 느끼는 상태였다. 물론 겪어보니 장난 아니게 좋았지만. 뭐...그렇게 하는 거구나 싶기도 했고. 그렇다고 그녀에게 충실하지 않았냐 하면 전혀. 진은 정말 열심히. 하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그녀의 성감대 찾기에, 그리고 발현시켜주는데 온힘과 정성을 바쳤다. 물론...빨고 싶은 마음이 든 건 제가 먼저였지만 엄지...하나에 그렇게 허리까지 출렁일 줄은 몰랐다....다음 순간에 그녀가 벌떡 일어나 부딪껴 올 줄도.

진은 그런데, 대체 뭐가 부족했던가. 하는 고민에 잠을 못 이뤘다. 그녀는 왜 싸돌아다니나. 왜 고민이 많나. 왜 좋을 때 그냥 푹 빠지지 못 하고 늘 반쯤 정신이 딴데 가 있나...왜 조금만 내버려두면 좌절모드가 되어 뭔가를 결정짓지 못 해 고심에 찬 사람처럼. 마치 햄릿이라도 된 듯 번뇌하다가 황당한 결정을 내리는가...진은 그녀가 또래보다...는 아니라도 여느 예비 고 3처럼 입시에 몰두하지 못 하는 것도, 대학을 가벼이 여기면서 또 사회인이 되는 것에 대해선 말할 수 없이 무겁게 생각하는 것은 그녀가 국어선생으로부터 빌려보는 여타의 사회과학 서적들 영향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보니, 그녀가 끼고 있던 책들, 작은 거인인가 8억인의 나라인가 그런 것들이 엄마의 책장에도 꽂혀있었다. 순...운동권 책들이었다. 알고보니. 그녀가 학교의 민주화 뭔가 하는데에 섞여들었으면 아예 입시를 칠 것 같지도 않았다. 아니...운동할라구 대학을 갔을 지도. 아니면 아예 공장으로 직행했을려나. 나중에 보니 고등학생 운동권이라는 것도 있었더라니...

진은 요컨대 제가 그녀에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직시하면서 어쩔 수 없이 화가 나고 대책이 안 섰다. 그리고 천추의 한이다 싶은 것이. 그녀가 고백을 하던 그 겨울에 바로 대답을 했으면. 그랬으면 우린 즐겁게 고교시절을 시작했을 것이고, 그녀는 그 소위 철학적인 짝궁이나 보나마나 운동권이 틀림없는 노처녀 국어선생이나 뭐 기타등등에 별로...휩쓸리지 않았을까? ... 대학을 들어가고 그녀가 데모를 하러 가던 길에 마주쳤던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동창생이 말하길, 넌 운동할 것 같았어. 했다는 걸 나중에 들었다. 그 동창생이 중학시절의 아는 얼굴인지 고교시절인지, 솔직히 그녀는 너무 희미해서 도저히 모르겠다고 했지만 진은 그 동창생의 이름을 듣자 바로 기억이 났다. 그녀와 2학년 때 한 반이었던, 그리고 진과는 3학년 때 한 반이었던 그 동창생은 중학시절, 운동장을 돌면서 체력장 연습을  하다가 문득 저쪽 모둠을 바라보면서, 저 애, 너 좋아하나 봐. 작년에 맨날 창에 붙어서 너네반 체육하는 거 보고있더니, 지금도 네 쪽만 쳐다보쟎아. 하였었다. 그때 진이 뭐라 했던가. 씨익 웃으며 내가 워낙 한 인기 하쟎아. 했었다. 왜 기억이 생생할까. 얘들 속에서 그저 한 인기 하는 거에 맞춰 나이스하게 살았지만, 사실 뒤통수에 꽂히는 그녀의 시선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애가 나를 틈만 나면 쳐다보네. 하면서 휙 고개 돌리면 어느 틈에 딴데 쳐다보고 있는...여시같은 기집애. 하면서. 그러면서 내가 너무 이쁜가. 했었던가...진은 츱. 하고 거울 속의 자신을 한심하고 딱하다는 듯 흘겨봤다.

" 이 애를 어떻게 꼬시지..."

절로 혼잣말이 나온다. 누가 조언 좀 해 줬으면. 연애초보자들은 다 어디가서 상담을 하나. 상담을 하면 반드시 사실대로 밝히고 도움을 구해야지. 실은 제가...두 살 연상의 여자를 사귀는 데요. 그 여자가 방년 열 아홉이라, 은근짜루다 아주 색기도 장난 아닌데다...뭔 고민은 또 그리 많은지...제가 아직 갓 열일곱이라 뭘 좀 모르거든요. 세상도 모르고 남의 사정 헤아릴 줄도 모르고 사실 알아도 미성년자니 돈도 못 버니깐 도와줄 수도 없지만, 그래서 울 엄마도 지금 직장 다니느라 고생이지만, 아 뭐 부모님이나 가정문제 고민하는 건 아니고...까놓고 말하면 일단 잠자리 문제가 젤루 큽니다. 나한테 푹 빠지면 그녀가 딴 생각 안 하구 의지해 줄 것 같은데. 나이 많아 봤자, 어차피 고등학교 졸업하는 건 똑같아요. 혹시 재수 없어 재수라도 재수좋게 하게 되면, 금상첨화인데...예측컨대 대학생 되는 것도 같은 시기에 될 꺼구요. 보시다시피 전 남자도 아니니까 군대가서  뭐 사회진출이 더 늦어진다거나 하는 핸디캡도 없어여...그러니깐, 그녀를 먹여살리는데도 별 하자 없고....근데 그녀가 문제죠. 까탈스러워서는 경제적이던 뭐든 의존하는 거 댑따 싫어해요. 여성성이라는 게 싫대나 뭐래나...제 2의 성이라는 어느 프랑스 아줌마의 책이 끼친 영향이 대단한 거 같애요. 거기다 마가렛 미드인가 하는 여자가 뭔 원숭이 연구하면서 인류의 결혼제도가 고정불변한 게 아니라는 둥. 저는 손톱 길이보다 더 두꺼운 책은 잘 못 읽어서, 뭐 발췌 읽기 하듯...도 아니고 딱 한 장 밖에 안 봤지만 대충 떠들어본 다른 장 들의 내용은 필시 그녀에게 매우 독립적이거나 페미니스트가 되기를 종용하는 것처럼 보이는데...휴...물론 제가 그녀를 남성적 입장에서 소유하고 싶다는 건 아니구요...하지만 그녀가 저렇게 고민하면서, 부모님과의 불화를 기성세대 전체와의 대적으로 몰고 가면서 현실을 부정, 거부하는 것으로 비화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변강쇠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랍니다....

그녀를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진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코드에 맞춘다고 맞췄지만 늘 한 발 앞서나가는 그녀 덕분에 진은 인식하기 이전에 행동을 해야했다. 입맞추려나 하면 빨아야 하고, 이제 감도 올라갔다 싶으면 허리 운동하느라 세빠질 지경이니...무아지경으로 헛손질하고 있는  자기 앞에서 그녀가...푸욱 적셔오는데 원...진은 자신이 오르가즘이 늦은게 문제이다. 하는 생각을 하며 2년의 성숙도가 이렇게 차이 나나 하고 의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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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열 아홉살이었던 해의 겨울.

그녀는 어지간히도 힘들었던가.

조울증 환자처럼 기분을 자주 바꿨다.

" 아빠가 대학을 가지 않으려거든 취직을 하라고. 아님 시집을 가던가. "

그녀는 음울하게 말했다. 그간 듣기로 그녀의 아버지는 말을 가려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깊이 생각하고 하는 것도. 하지만 그녀는 말 실수 속에 무의식적인 소망이 담긴다고 주장하는 정신분석학자처럼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다고 생각했다. 진지하게 생각한 듯, 고졸의 자격으로 취업을 하는 건 별문제가 아니나, 저의 친구 중엔 상고를 다니는 이가 있으니.

" 사회에 나가는 게 무서워. 나는 아무것도 정립하지 못 했는데. "

물론 시집을 간다는 건 더 황당하다. 참...

진은 말을 잊은 채 정말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 저건...

그녀가 자신의 주변, 인간관계나 사회생활 같은 걸 자연스럽고 담담하게 인식하지 못 하는 것은 그 국어선생님의 탓이다. 하는 생각을 진은 하고 있었다. 그녀가 다소 관념적이고 철학적이긴 했으나, 보다 더 문학적이고 낭만적이었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물론 진이 그녀를 먼 눈으로 보고 있었던 중학시절에는 더우기나. 3년 내내 저만을 바라보면서 말 한 마디 못 붙이다 겨우 쵸컬릿 상자 하나를 건네기 위해 겨울 밤거리를 건너오던 그녀가 아니던가. 감성에 젖어 짝궁과 숱한 편지를 쓰며 밤을 지새다가 그 짝궁이 이과를 선택하자 저도 그래야 하나 하고 오래 고민하던 그녀였다. 저에게서 화이트데이의 꽃다발을 받고 당황하며 얼굴 붉히던,  미소 한 번 손길 한 번에 표정 바꾸며 그러면서도 마음 안 열고 오래 애먹이며 새초름하던 그녀였는데. 진은 한숨이 나왔다.

처음 안아보았던 여름 이후 벌써 반년이 다 되어가는데, 손을 꼽을 만하다. 물론 그 적은 회수의 넓은 간격 만큼이나 안을 때마다 장족의 발전을 보여주며...아니 생각지 못했던 부면에서의 적극성을 보여주는 그녀를 안다보니 그저 놀라움의 연속이었지만. 츱...진은 성질이 날 것 같았다. 그 국어 선생 때문이다.

그녀가 자주 연락을 끊고 두문불출하던 것은. 제가 전화하고 찾아가고 다음 약속 미리 잡고 하면서도 그 사이로는 연락 한 줄 없이 한 주고 두 주고 그냥 흘려보내며 침잠하던 것은.

생각해 보니 시월에는 아예 한 번도 못 만났다. 진이 혼자 열 받아서 연락 안 했더니, 이게 끝까지 전화 없는 것이...이러다간 그냥 인연 끊길 것 같았다. 그녀가 이렇게 곁을 흘려 보낸 이가 한 둘...이다. 저까지 셋이 될 듯. 정 없어 그렇지는 않은 것이 그녀는 맘에 담았던 친구, 그 소수의 친구를 오래, 그리고 깊이 생각하고 있었다. 문제는 생각만 하고 있다는 것인데. 진은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만 하는 대상이었던 것을 자각하자 요 몇 개월 얼굴 맞대고 또 몸도 맞대었다 한들, 그녀에게 추억 속의 존재로 전락하기는 정말...몇 날밤을 공들여 써내린 장문의 편지를 보내지도 않고 서랍 속에 묵히는 그녀에게 있어...어느날 쓰레기통으로 내다버리는 신세가 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었다. 하긴...

진은 혼자 침울한 그녀를 앞에 두고 공감을 표한다는 듯, 말없이 혼자 골똘하다가 설핏 웃음을 흘렸다. 아, 상담을 시작하지 못 하고 있는 내담자를 기다리면서  이러면 안되는데. 하지만 진은 달을 넘겨 다시 만난 그녀가 먼저 안겨 오고, 그 안겨 오던 밤이 떠오르자 자동적으로 떠오르는 미소를 수습하기가 난감하다. 슬쩍 고개를 푹 숙여 같이 심각한 척.

" 아무래도 독서실을 끊어야겠어. "

별로 대답을 필요로 하지 않은 듯, 말 없는 진의 앞에서 그녀는 혼자 생각에 빠지고 있다. 아빠에게 돈을 달라고 해야 할텐데. 하는 듯.

기계적으로 그런 추측을 하며, 진은 그러나 국어선생에 대한 증오...까지는 아니라도 미움 내지는 불만과 뒤섞인 상념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그녀의 육감적이었던 모습, 가녀린 허리를 두 손 안에 부여잡자 스스로 팔을 올리며 옷을 벗던, 그러면서 진에게도 옷을 벗으라고 꼬박꼬박 강제하던 그 진지한 표정의 얼굴이 떠올라 불쑥 아랫배가 짜르르 해 온다.  그 얼굴이 분홍빛으로 물들던 것이...

" 뭐? 독서실? "

진은 신호가 늦게 가는 기계식 전화를 받았다는 듯, 한참 뜨는 말대답을 하였다. 그럼에도 그녀, 응. 하는데. 그래, 뭐 그녀야 기본 자세가 나는 게으른 나무늘보요 하는 식이니. 허나 진은 말대답 늦게 하면서 그녀가 혼자 마음을 다져먹으며 올 겨울엔 열심히 공부해야지 하고 나름 생활계획을 다 세우는 것에 침묵으로 동조한 셈이 되었다.

" 독서실 가면 언제 올라구? "

" 아이...뭐 들었어. 수험공부하는 얘들은 그냥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 다 한다니깐. 넌 예능계라 안 가 봤겠지만 독서실 총무가 이불 보관도 해 주고, 소등도 신경 써 주고. "

" ...춥지 않을까. 넌 추위 많이 타쟎아. "

진은 할 말이 없어 생각나는 대로 주워붙였다. 독서실에서 먹고 자고...라니...총무가 어쩌고...이 얘가 정말...

" 실내인데, 뭐. 그보다 아빠가...허락해 주실지. "

그녀는 정말로, 자기는 집에서 공부하기 힘들다고 한다. 지금까지 중간고사나 기말고사야 벼락치기 공부로 때워왔지만 입시를 정말로 통과하여 대학을 가겠다면 이렇게는 안될꺼라구. 쪽팔리게 후기 같은데 갈 수는 없고. 아빠는 재수같은 건 없다고 미리 말하고 있는데. 하면서.

" 아빤, 내가 공부 잘 하고 똑똑한 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 잘났으니까 말대답도 꼬박꼬박 하면서 바락바락 대든다고. "

그녀는 잠깐 띠웠다가 이어 말했다.

" 후기 같은데 가면 등록금 아깝다고 하실꺼야. "

오빠는 삼수까지 시켰지만...딸자식에게 그렇게 투자할 순 없다고. 시집가면 그만인데, 무얼. 하는 말을 귀에 담고 있는 그녀는 결심이 확고한 듯하다.

" 친구들도 다 끊고 공부만 하려구. 휴..."

진심으로 걱정된다는 듯, 그녀는 수학 땜에. 하였다. 그렇게 걱정해도 1년 뒤 그녀의 수학점수는 한 자리 수였다. 국영수 비중이 압도적인 학력고사에서 수학점수를 그리 받고 전기 간 애는 그녀 밖에 없을 듯.

그런데, 뭐하러 독서실에 처박혀 겨울 삼동을 다 보내냐구!

한숨을 쉬며 불길해 했던 것처럼 그 겨울, 진은 그녀를 제대로...보긴 했으나 안지는 못 했다. 젠장...

그녀는 불쑥 전화를 해 와서는 집 근처 어디라는 둥, 배고프니까 컵라면 먹자는 둥, 공부하다가 너무 목이 말라서. 하면서 음료수 하나만 사 달라면서 왔다가 사 주면 홀짝 먹고는 발길 돌려 총총히 사라지곤 했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밥 한 술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독서실 갔다고 그녀의 엄마는 탄식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고. 자정이 되도록 기다려도 그녀에게서 전화했었냐며 전화해 오는 일은 없고.

그래서, 그녀가 독서실에서 가장 추웠던 겨울 두 달을 보내면서 공부를 열씸히 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았다. 그녀는 독서실에서도 친구끼리 소근대는 것에 귀를 쫑긋거렸고, 이불 덮어주며 징징거리는 애들의 시선을 느끼며 혼자 책상에 엎드려 있었으며, 낮이나 밤이나 참고서와 문제집을 들여다보면서 지겨워져도, 허리가 아파도, 배가 고파도, 목이 말라도 말 붙여 함께 할 동무가 없어 외로움만 새겼다. 그래선가 어째선가 밤거리, 반쯤 문닫은 가게 앞이나 골목 어귀의 가로등 불빛 아래서 보는 그녀의 얼굴은 새로 표정을 만든 듯 웃는 얼굴임에도 하얗게 떠 보였고, 조금 전까지 울었던 것처럼 어색했으며 고개 돌리며 안녕. 하면서는 이내 침울함이 점령할 듯 짙게 그늘이 드리우곤 하였다. 그러다가 어느땐가는 독서실에서 나온 것 같지 않은 차림새로 하염없이 뚝방을 향해 인적없는 차로변, 좁고 길다랗기만 인도를 따라 걷다가 네거리의 신호등을 기다려 건너더니 도로 턴 하여 언덕 위로 이어지는 인도를 걸어올라가기도 하였다. 한 밤에. 그 모습을 간판의 불을 끈 제과점 안에서 이수와 함께 빵을 먹으며 지켜보면서 진은 그제서야 그녀가...저를 만나고 사귄다 생각하고 나아가 연애 중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지난 1년 동안에도 혼자 산책하기를 멈추지 않았음을 알았다. 새삼스럽게, 그녀에게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듯 외로워하던 것에서도,슬픔을 내성화하던 것에서도 그녀를 덜어내올 수 없었다는 걸 진은 확인하였다. 옆에서 이수가 혀를 차며.

" 저 누나는 왜 저렇게 청승맞어? 저번에 놀러와서 떠드는 거 보니, 웃으면 귀엽고 이쁜데. "

흘낏 진을 쳐다본다.

" 잘 좀 해 주지? 쫌만 친절해도 디게 좋아하던데, 누나랑 친한 것 같더만 그렇지도 않은 가..."

말 없이 표정 굳어진 채 풀릴 줄 모르고 있는 진의 얼굴을 보면서 이수는 얼버무렸다.

" 아니 그런가...집에 무슨 일이 있나 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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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작 - 열 아홉의 그녀 13

고요히 어둠이 점령하고 있는 골목 안, 저 끝에서 타박타박 걸어오고 있는 이수의 모습이 보인다. 가방을 어깨 위로 둘러 맨. 스포츠형 머리의 얼굴은 멀쑥하나 표정이나 몸짓은 아직 어릿스러운 소년, 매부리코 때문에 나이가 들어보인다. 집 앞까지 못 와서 전신주 옆에 서 있는 누나를 보고 발걸음을 멈춘다. 놀라는 표정이 느릿한 이수는 어딘가 그녀를 닮은 듯도.

" 뭐야? "

감정 없이 물어보려 하나 쉽지 않다는 듯 애먹은 말투.

" 미안..."

진은 동생을 바라보며 담담히, 하지만 정말 미안하다는 듯 또박또박 말했다.

" 좀 이따 들어와라. "

이수는 왜? 하고 물을 듯 잠깐 쳐다보았다. 시선을 마주치며. 피하지도 어색함도 없는 누나의 얼굴이 다소 들떠있음에, 그러나 냉정하게 자신을 바라보고 있음에 뭔가를 떠올린 듯, 곧 표정을 일그러뜨린다.

" ...알았어. "

묻지도, 탓하지도 않고 이수는 발길을 돌렸다. 바로 나오는 골목 모퉁이로 꺽어들며 가능한 빨리 시야에서 사라져 주겠다는 듯.

잠깐 그대로 서 있다가 조용한 골목길, 버스에서 내려 집을 찾아드는 행인들이 느는 것을 보며 진은 집안으로 들어왔다. 고즈넉히 마당도, 거실도, 식탁 주위도 그리고 자신의 방문도 잠든 듯 하다. 그녀, 침대 속에 파묻힐 듯 누운 채 잠들어있다. 피로가 이마에 떠 있다. 조그마한 얼굴에서 가장 비중이 큰 넓은 이마, 앞머리를 반쯤 내리고 다니느라 눈에 띄지 않았으나 약간 짱구다. 실핏줄이 비쳐보이는 눈꺼풀, 힘없이 감겨져 있고 자그마한 코, 작은 입술, 거뭇하니 부르터 있어 더 붉어 보이는.

진은 그 입술을 손가락으로 살며시 만져보았다. 부르튼 주위를 둘러 입술 끝으로. 미끄러트리며 턱선을 따라 가 보며. 그녀가 흠칠. 하며 눈꺼플을 움직인다. 시야에 들어오는 손, 그 손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들며. 작은 입술을 달짝이며.

" 몇 시야..."

" 아직 괜찮아. 8시 밖에 안  되었어. "

그녀, 무언가를 생각하듯 가만 있다가 벌떡 일어난다.

" 나 갈께. "

" 괜찮다니깐. 동생은 늦을 꺼라구 전화 왔어. "

그녀, 그래? 하더니 침대 위에 잠시 가만히 앉아있다. 티를 다시 입혀 놓았지만 브래지어는 하지 않고 있는 그녀, 스퀘어 네크라인 속으로 숨어드는 쇄골을 보고 있는 진은 그녀가 아쉽다. 가지 않았으면.

" 같이 저녁 먹자. "

그녀는 시계를 쳐다보며 글쎄. 한다.

" 같이 밥 먹고, 같이 저녁 시간을 보내며. "

그녀는 무슨 말인가 싶어 진을 쳐다본다. 집에 가야겠다하는 생각을 굳히는 듯 입을 꾹 다문 채.

진은 말을 먹고 가만히 그녀를 보고만 있었다.

그녀를 한길 건너 바래다 주고 저의 집과 그녀의 집 중간쯤이라 생각되는 놀이터 앞에서 혼자 가겠다는 그녀를 쉬이 보내주고 돌아오면서 마음이 다져진다.

" 혜정아, 나는... "

혼자 어두운 채 인적 끊어진 밤길을 걸으며 진은 다짐하듯 스스로에게 말로 내어 놓는다.

" 너와 한 집에서 살고 싶다. 이리 보내지 않고, 네게 다른 공간, 다른 접촉, 다른 생각을 하게 두고 싶지 않다. "

진은 알게 되었다. 그녀가 자신을 보고, 자신을 생각하며, 자신의 손길과 말 속 에서 행복한 미소를 떠올린다는 것을. 그녀는 점점 더 말을 많이 하고 점점 더 속을 내어보이며 조금씩이나마 제 손가락을 뻗어 자신의 몸을 만지고 싶어하고 있었다. 그처럼 내어놓는 면이 넓어질 수록 그녀의 웃음은 편해지고 또 생각은 창의성을 번뜩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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