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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개의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1. 2010/09/27
    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3
    외딴방
  2. 2010/09/27
    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2
    외딴방
  3. 2010/09/27
    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1
    외딴방
  4. 2010/09/25
    19 금 혹은 보안사항임(3)
    외딴방
  5. 2010/09/25
    창작중-용서할 수 없는 자라도 이해할 수는 있다.
    외딴방
  6. 2010/09/25
    창작중-여.우.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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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2010/09/24
    창작중-청춘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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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2010/09/24
    창작중-화이트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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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2010/09/23
    창작중-여자 대 여자
    외딴방
  10. 2010/09/22
    진의 노래
    외딴방

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3

진은 자꾸만 혜정을 보고 있고 싶었다. 그 애를 살폈다. 그 애가 어떤 눈빛을 하고 있는 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이 찬란한 봄, 말 수 적은 혜정의 입을 벌려 소리를 듣고 싶었다.

편지, 그런 걸 쓰지 말라고 말하고 차가운 밤, 꽁꽁 언 손으로 선물 상자 따위 들고 있기를 바라지 않았다.

한 마디를 하면, 자신은 그 열배로 돌려주고자 했다. 왜 그러하지 않겠는가, 우리에게 허락된 청춘의 시간은 얼마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애가 자신의 서툰 말주변에 금방 눈물을 떨어뜨리자 감히 더는 접근할 수가 없었다.

그 애의 초컬릿이 동경인지, 그 애의 고집스럽게 빛나던 눈에 정원에게서 봤던 것같은 욕망이 숨어있는지 진은 확인할 수가 없었다. 확인이 안 되는 채로 자꾸만 가고 있는 시간이 아쉬웠다. 그 애를 만나는 것은 한 달에 한 번도 어려웠는데 그 시간을 인내하기에 자신의 마음 속, 자신의 허리, 그 팔딱이는 심장은 너무나 빨라진 가속도에 휘둘려 제 것으로 갖고 있기도 벅차했다. 이런 속사정에 아랑곳 없이 혜정은 외박을 아주 장기로 해대고 있었다.

 

" 그럼 언제 오는데? "

" 토요일, 5박 6일이라니까. "

" 잠은 ? " 응? 하고 되묻더니 혜정, 막 웃으며 스카우튼데 당근 텐트지 한다.

" 봄에 오리엔테이션 엠티할 때 텐트 치는 법이랑 다 배웠다니까. "

" 니가? 각자 자기 텐트 치고 잔다구? "

" 아니, 애들이랑 같이. 그리구 남자애들이 많이 도와줘."

아, 그래 보이 스카우트...그 보이들 말이지....

진은 머릿 속에서 동급생들과 함께 떠들어봤던 여성잡지에서 해변가에서의 사고 어쩌고 하는 기사들과 함께 모자이크처리된 남녀의 사진에 배경으로 있었던 텐트를 떠올리고 있었다. 아, 내가 왜 이러나, 요즘 너무 까십에 민감해진 듯 싶다....

뭐라고 당부하기도 멋적어 진은 조심해서 잘 다녀오라고 할 수 밖에 없었다. 응, 하고 혜정은 말하면서 어차피 자신은 체력이 딸려서 등반할 때마다 맨 뒤의 가드한테 꼬챙이로 찔리면서 올라간다고, 그래서 혼자 뒤처지거나 다치거나 하지는 않는다고 덧붙인다.  하지만 진은 그 가드가 보이일까 스카우트대장이라는 그 선생님일까하는 생각을 하며 대체 누굴 조심하라고 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다지 친구가 많지 않은 혜정이 같은 반에서의 몇 명과 겨우 어울릴 뿐 스카우트활동에선 물 위에 뜬 기름처럼 부유하고 있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지만, 그래서 굳이 적성에도 안 맞는 지리산종주같은 걸 따라가는 것이 달갑지 않았지만 자신이 가타부타 할 순 없는 일이고.... 그렇게해서라도  끈질기게 자꾸 보고 싶어하는 혜정의 그 국어선생님이 더 맘에 들지 않았다. 혜정의 말에 의하면 그 여자는 생각보다 나이가 있어서 77학번이랬던가? 암튼 노처녀였다. 처녀총각 선생님들에게 한 번씩은 꼭 하는 " 선생님, 애인 있어요? " 하는 질문에 그 여자는 애인은 없고 남자친구는 있다면서, 그 친구와 10년 이상 오래전부터 사귀고 있다고 근데 너무 오래 사귀어서 결혼하자는데 도저히 어색해서 못 하겠다고 그랬다고 말했다고.... 한다. 허참, 어색해서 못하겠다니...그래서 결혼 안 하고 계속 제자들하고 독서토론이나 하면서 살겠다는 건지....진은 그 선생님이 요즘 대학가에서 많이 부르는 노래라면서 운동권가요같은 걸 혜정에게 적어준 걸 보았다. 모르긴 몰라도 그 여자는 학생운동을 했을 것이고 어쩌면 지금도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독신주의자인 것 같았다. 혜정은 그 선생님을 사랑하는 사람을 얘기하는 것같은 분위기로 얘기하곤 헀다. 그래? 그 여자를 사랑하니? 이 혜정? 진은 그냥 웃으며 넌 왜 다른 애들처럼 젊은 총각선생님을 안 좋아해? 했더니 좋아한다며, 지리선생님이랑 영어선생님을 좋아한다고 한다. 둘 다 총각이라고. 지리선생님은 좀 못 생겼지만 그 선생님이 수업 중 간간히 흘리는 이야기들에 많은 걸 느낀다고. 영어선생님은 수업 밖에 안 해서 잘 모르겠지만 진짜 잘 생겼다고. 아이들이랑 같이 가 본 그 선생님의 자취방이 너무 누추해서 근처 슈퍼에서 우유랑 간식꺼리를 사서 문 안에 살짝 놓고 오기도 했다고 주절주절 얘기한다. 갈수록 태산이다. 고등학교 들어와 안하던 짓을 하는가 싶었더니 아주 세게 나간다.  그래서 남친도 만드셨나...

하지만 의외로 혜정은 그 길거리헌팅을 자신을 주도하여 자기의 패거리들에게 각각 보이프렌드가 하나씩 생긴 것에 대해 아주 크게 자책하고 있었다.

" 애리가...그 후까시랑 계속 만나나봐...다른 애들은 나이트 한 두 번 가고 다 땡쳤다는데, 애들이 별로...모범생같지도 않고... "  혜정은 저의 친구들은 이성교제에 그리 열심이지 않다고, 친구들끼리 놀고 같이 공부하고 그러는 걸 더 좋아하고 연애는 대학가서 ! 라고 다들 정하고 있다고 한다. 근데 그 애리란 애가 아빠가 좀 가정폭력이 있고 해서 가출하고 싶어한다고, 그리고 예뻐서 남자애들이 좋아하는데 그 짝궁된 남자애랑 사귀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만약 걔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미팅을 주선한 자기는 너무 괴로울 것 같다며 불안해 했다.  진은 그러나 그 것보다 혜정의 그 짝궁- 미팅에서 소지품줍기같은 걸로 짝짓기한 남자애를 이렇게 표현하는 혜정이 웃기긴 했지만 - 은 어떻게 되었나가 더 궁금했고 걱정스러웠다. 아닌게 아니라....혜정도 그 남자애가 하도 따라다녀서 애를 먹고 있었다. 집 근처까지 와서 엄마, 아빠한테까지 걸려서 인사까지 했다는 것이다. 혜정의 부모는 의외로 걱정이나 야단보다, 개랑 결혼할꺼냐면서 웃었다고 한다. 애는 괜찮아보이네 어쩌네 하시며....  아주...가지 가지해요,.. 그래서 어쩔건데? 했더니 빨리 정리해야지. 갠 왜 그리 말귀를 못 알아먹는지...참....하면서 혜정은 진심으로 걱정스런 표정을 한다.

이 모든 상황을 미루어보건대 진은 혼자 방에 앉아 고심에 차서 정리를 시작했다.

그 국어선생님은 독신주의자거나 레즈비언일 수도 있었다. 그리고 혜정도 남자들에 대해 관심이 별로 없는 것으로 보아 아직 뭘 모르거나 아니면 레즈비언의 경향성이 농후하다.....

진은 이렇게 결론을 내리고 보니 더 맘이 다급해졌다. 그럼 자기에 대한 혜정의 감정은 뭔가?  남자에 대해  아직 모르는 거라면 자긴 아예 해당사항 없고, 여자에 대한 사랑으로 치면 그 국어선생보다 못 한게 아닌가? 이런...젠장....3월부터 7월까지 공부도, 피아노도 건성건성하면서 소녀경이니 제2의 성- 그 책은 너무 두껍고 어려워서 겨우 2부의 레즈비언편만 열심히 봤을 뿐이지만....- 을 탐독하고 어여쁜 클리토리스에 대한 사랑과 경외감을 키워온 건 뭔가 되나?  말짱 도루묵?  설마 좋아하는 애도 있는데 이 시점에서 자위하는 법이나 배워야 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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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2

" 진아, 왜 그래, 별 일도 아니쟎아. "

정원이 빠른 걸음의 진의 곁을 동동거리며 쫓아오며 말했다.

" 응, 지금 화내는 거야? 나한테? 그러지 마, 너두 알쟎아, 이런 거..."

진은 우뚝 멈춰섰다. 자신의 눈 바로 아래 얼굴을 바짝 들이대고 있는 정원의 얼굴, 그 처연히 맑은 눈동자와 딱 마주쳤다. 뭘? 뭘 알아야 하는데? 내가...

" 이거...설마 모른다고 하는 건 아니지? "

정원은 여전히 맑게, 꿰 뚫을 것같은 투명함을 내비치며 진을 올려다보고있다.

" 넌 안 해?  자위...다들 해, 하쟎아. 그걸 좀 같이 한 거 뿐이야. 뭐 그리 나쁜 일도 아니쟎아. 안 그래? "

그래? 그런가? 진은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진은 해 본 적 없었다....

그 단어를 모르는 건 아니었고 그 뜻을 모르는 것도 아닌것 맞다. 하지만 이게 그런 건가? 그게 대체 뭐지?

" 진아...왜...날 부끄럽게 해.... 넌 여자가 자위하는게 나쁘다고 생각해? 그런거야? "

나쁘다...그 말은 옳다라든가 정당하다라는 말의 반대말이 아닌가? 그런 식의 술어와 연관시켜 본 적 없다.

" 생리적인 거야. 너무 많이 하지만 않는다면, 그래서 일상생활에 지장받을 정도만 아니면 괜찮다고, 그냥 자연스러운 거라구....넌 그렇게 알고 있지 않아? "

" 알았어. 그냥 좀 놀랜 것 뿐이야. 알았으니까 그만 해. "

진은 정원과 빨리 헤어져 집으로 가고 싶었다.

정원은 5학년 때부터 자위를 해왔다고 말한다. 자기도 중학교 때는 이런게 나쁜 건 아닐까  병이라도 걸리는 건 아닐까 무서운 생각이 들었었다고. 하지만 상담실에서 어렵게 " 자위하는 거 안 좋은가요? " 하고 물어보니 선생님이 괜찮다고 너무 많이만 하지 않으면 상관없다고 그랬다고 한다. 여자아이들 뿐 아니라 남자아이들은 더 많이 더 자주 하고 서로 그런 얘기도 많이 한다고, 이상한 비디오 빌려서 같이 보면서도 막 그런다는 얘기를 막 한다. 내가 무슨 사춘기 성교육 받는 중딩이냐......진은 그런 생각을 했지만 사실 자기가 성교육이라고 받은 건 중2때 가정시간에 슬라이드로 아기 낳는 걸 보여주면서 설명해 주던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수정란이 생겨서 자궁에 착상해서 어쩌고 하던 것 밖에 없었다. 그림으로 그려져있던 자궁의 기이한 모양, 나팔관 어쩌고 하는 그저 모양을 따서 붙인 명칭이 좀 우스웠다는 기억, 그리고 어떤 외국여자가 고통스럽게 출산을 하는 모습을 담은 슬라이드영상....그 어둠침침한 시청각실에서 아이들은 놀라움과 무서움을 느끼며 괴성을 질러댔었다. 그리고 우리들에게 남은 건 애 낳는 건 너무 아플 것 같다는 공포, 두려움 같은 것이었다. 정원의 말대로라면 그 시절, 그 때에도 애들은 자위를 하곤 했던 걸까? 근데 자신은 왜 그걸 몰랐을까? 아니 왜 아까 그 정원이 하던 것 같은 그런....자신의 음부에 손을 대는 그런 행위를 해 본적이 없었을까....정원의 말처럼 아주 어린아기들도 본능적으로 자위를 한다면 나는 왜? 내가 그냥 좀 남자같은 게 아니고 뭔가 문제가 있나? 하지만 정원이 " 넌 안 해?" 라고 말했을 때 진은 본능적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왠지 알리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해 본 적 없다는 사실을. 그 느낌을 모른다는 사실을.

아이들은, 여자애들이 소근소근대는 사랑이니, 키스니, 섹스니 하는 얘기들은 최근 들어 훨씬 구체화되고 있다는 것을 진도 곁에서 들어 알고 있었다. 아이들은 정말 진지하게, 영화에서 키스하는 걸 잘 보라구, 우리나라 배우들 말고 외국배우들이 하는 걸, 턱을 움직이지 않냐고 입술을 벌리고 있지 않냐고...혀를 넣어서 하는 키스를 프렌치키스라 그러는 거라구 누군가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그러면 백설공주나 신데렐라가 왕자님과 부등켜안고 있는 모습 밖에 모르는 여자애들은 아냐, 그럴리가, 더럽게시리... 하고 반박하기도 했지만 번번히 비웃음을 사곤 했다.

진은 기억을 더듬어 훨씬 더 어렸을 때 삼촌이 잠시 얹혀살 때 혼자 들어가 본 그의 방바닥 자리밑에서 발견한 얇은 소설책 같은 걸 읽었던 생각을 했다. 여자의, 아마 소녀의 벌거벗은 몸에 대해 묘사한 글들이 있었다. 부드럽고 하얀 허벅지라든가, 그 깊은 골짜기의 샘이라던가 뭐 그런 표현들을 봤던 것 같다. 기분이 좀 이상했다. 그리고 들끼면 안될 것 같아 다시 그 자리에 살며시 끼워두고 방을 나왔었다. 아무한테도 그 얘기를 한 적은 없었다.

엄마는...엄마는 왜 내게 이런...아니 성교육을 시켜주지 않았을까 하는 원망이 슬쩍 들었다. 엄마는 항상 부드럽고 포용적이었고 동생 이수와 차별을 두지 않으려고 의식적으로 노력하는 편이었다. 어릴 때는 안아주기도 했지만...그다지 스킨쉽이 많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 진은 갑자기 엄마가 궁금해졌다. 벌써 전부터 별거 중이었다. 외박을 한 일도 없다. 엄마가 애인 비슷한 관계의 사람이 있다고는 상상되지 않았다. 엄마는 자기 일에 열심이었고 자기 생각에 확신을 갖는 사람이었다. 생활에 있어 무척 스탠다드한, 반듯한 기본자세를 흐트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엄마가 성을 모른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자기를 낳았고 몇 번이나 임신을 했는데.....가정시간에 배운 바에 의하면 임신에 성공하려면 배란기를 맞춰야 하고 뭐...암튼 섹스를 많이 해야 한 번씩 아기를 낳는게 가능한 것이었다. 그럼 혼자 잠자는 우리 엄마는 성생활을 어찌 하시나? 역시 자위? 그런가? 언제? 밤에? 그래서 자기는 전혀 몰랐을 수 밖에 없었을까? 하지만 내가 밤중에 깬 것도 여러 번 있었는데.....그 땐 안 했나?

진은 어쨌든 엄마도 자위를 한다고 밖에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논리적으로 그렇지 않은가. 누구나 생리적으로 하는 거라는데....그건....땀을 많이 흘리는 일 같은데.....어떤 기분일까....정원은 뭔가 무척 좋은 듯, 흡족함을 아주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어떤 감정, 아니 감촉인 것처럼 보였다. 정원과 같이 다니기 시작한 지난 6개월 동안 이렇게 전혀 공감이 안 가기는 처음이었다. 진은 밤새 뒤척였다.

 

그 후로 정원이 다시 그런 행위를 보인 적은 없이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하지만 그 전보다 정원은 훨씬 더 붙어다니려 했고 같이 걷거나 나란히 책상 앞에 앉을 때면 손을 잡거나 팔을 걸거나 책상 위에 올려놓은 손등 위로 자신의 손바닥을 겹치며 간질이거나 하는 행동을 자주 했다. 진은 주변에 아이들이 없을 때면 또 다시 키스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상하게 눈 앞에 자꾸 어른거리는 정원의 붉은 입술을 보면서 하게 되곤 했다. 피곤했다. 이런 생각을 자꾸 자꾸 하고 있는게. 일일찻집 앞에서 혜정을 보고 난 후 부터는 피로감이  배로 커진걸 느끼며 골치가 아프려 했다. 아이들이 슬쩍슬쩍 넘겨보던 사진이 많은 잡지를 등너머로 훔쳐보기도 하고, 누구네 집에 언제 모인다는 쑥덕거림에 한번 끼어들어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아이들이 자기 눈 앞에서 잡지를 숨기지 않았다면, 자기들 얘기를 진이 들었나 하고 의심의 눈초리로 쳐다보지 않았다면 자신도 자연스럽게 한 마디쯤 던져볼 수 있었을 텐데....아쉬웠다. 그리고 어느 겨울밤, 동생 이수의 방에서 새어나오는 불빛과 새어나오는 숨소리, 그 가쁘게 헉헉대는 숨소리를 들으면서 얼른 제 방안으로 뛰어들려다 조금 더 방문 앞에 머물렀던 일이 있고나서 진은 이젠 화가 나려 했다. 대체 어디서 그런 책을 구해야 할 지, 누구에게 물어야 뭔가를 볼 수 있을 지 답답하기만 했다. 이런 얘기....상담이랍시고 엄마에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러기에 엄마는, 너무 고결해 보였다.  그러면 정원에게? 진은 정원의 스킨쉽도, 솔직함도 그리고 그 혀를 넣는 키스의 기억도 싫었다. 왠지 모르지만....그 남자애들과 손을 잡았을까? 그리고 또 뭔가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 고개를 들었다. 보고 싶었다. 혜정...그 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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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진, 사랑을 탐구하다 1

고등학교와 중학교는 달랐다.

아니 좀더 편협하게, 여중과 여고는 많이 다르다.

아이들의 태도도, 말도, 행동도.

정원은 처음부터 다른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수업 중에 옆얼굴이 따갑다 싶으면 여지없이 빤히 보고 있는 그 눈과 마주쳐야 했다.  입학식 후 자리를 정하기 위해 복도에 일렬로 섰을 때도 정원은 맨 뒤에 서 있다가 선생님의 손짓에 마지못해 앞으로 자리를 옮기더니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 당황한 선생님은 재가 수즙음이 많아 그런가? 하며 그럼 뒷줄에 앉으라고 했다. 교실의 맨 뒤에서 두 줄 앞의 좌석을 차지한 정원,  진의 얼굴을 옆으로 돌아보면서 수시로 미소를 지어보인다.

" 나랑 친구 해. 우리 같은 중학 출신이쟎아. "

" 모르던 사이도 아닌데, 뭘 새삼스레? 그래 잘 지내보자. "

중학교 합창대회에서 지휘를 도맡았던 정원과는 같은 반이 아니었어도 피아노반주 땜에 이래저래 얼굴을 익혀온 사이였다.

" 그럼 이제부터 나랑 같이 다니는 거다. 알았지? "

정원은 '나랑' 에 힘을 주며 말했다. 이 애가 날 좋아하는가 보군. 진은 담담히 생각했다. 가벼이 취급하는 건 아니지만 비교적 익숙한 경험이었기에. 여자아이들은 원래부터도 자주 패를 지어다녔지만 개중에는 초등학교 때처럼 단짝을 만들어 꼭 붙어다니는 애들도 적지 않았다. 고등학교 오면 좀 달라질까 했더니?

여느 아이들처럼 쪽지를 보내거나 사소한 볼일들을 만들어 말을 붙이거나 아니면 멀리서 쳐다보며 얼굴을 붉히는 그런 류의 행동을 정원은 하지 않았다. 대신 밖에 나가 놀던 자기집 아이를 데리러 온 엄마처럼 " 진아, 가자. " 라고 말하며 팔짱을 끼고 앞서 나갔다. 당연한 듯 와서 도시락을 펼쳤고 오래 사귄 벗처럼 자연스럽게 동행했다. 처음에 진은 같은 중학 출신이니까 편해서 그러려니 했다.  사실 그렇기도 했다. 정원이 그리 친한 티를 내자 고교에 와서 처음 만난 아이들은 쉽게 친구의 자리를 만들어오지 못 했다. 좀 더 어렸을 때처럼 그저 호쾌하고 성격좋은 친구가 편하고 좋아서 잘 어울려다니는, 그런 단순한 마음으로 진을 바라보는 게 아니기 때문에 더 그랬다. 그런게 아닌 척을 못 하는 여고생들에게 정원은 내 친구에게 딴 맘 먹지 말라는 듯,  죽마고우인 자신의 자리 외에 더 만들 자리는 없다는 듯 고개를 높이 들고 두 눈을 휘 둘러보며 진의 곁을 지켰다. 덕분에 진은 새로운 친구를 사귀지 못 했다. 아니 정원이라는 새로운 친구 외에  다른 기회를 얻지 못 했다.  정원의 '나랑' 이란 실인즉 '나랑만'이라는 뜻이었지만 진은 그걸 예민하게 파악하지 못 했다. 늘 절친한 여러명의 친구가 있었을 뿐 단짝을 갖지 않았던 지난 과정 때문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정원이 그 단짝의 자리를 자처하고 나섰고 새로운 학교, 새로운 인간관계 속에서  선점에 성공하자 단숨에 고착화시켰다.  진에게 친구들은 계속 생겼고 그 중 몇 명과 더 친해졌지만 그들은 정원보다 더 친한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도 그렇게 진행되었다. 진과 친해질 시간과 공간을 허락받지 못 한 주변부의 아이들,이를테면 교실에서 비교적 먼 곳에 앉아있는 키작은 여자애들과 윤 진과 클라스메이트가 되는 행운을 얻지 못한 불행한 소녀들은 진과 그의 친구들을 부러워했으나 정작 그의 친구들은 자신이 주변부에서 바라보는 여자애들과 특별히 다르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 특별한 위치는 오직 정원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건 이미 오래된 사실인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아직 학기초였고 진의 생일을 알기에는,  알아도 선물을 챙기기에는 마음의 시간이 부족했었을 것이었다. 그런데 정원은 교실에 화려한 꽃다발을 안고 들어섰다.

" 어머나, 예쁘다 ! " " 얘, 뭐니, 이거? 어느 선생님 줄껀데? " " 오늘 무슨 날이니? " 

여고생들은 한마디씩 하며 금방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어냈다. 어느 선생님에게 주던 우리반에서 주는 거니 함께 자랑스러울 수 있으리라...정원이 이쁨을 받는대도 제 일처럼 기뻐할 것 같은 얼굴로 모여든 얘들에게 정원은 " 응, 오늘 진이 생일이쟎아. 내가 케잌도 주문했으니까 이따 점심시간에 같이 파티하자. "  하고 말했다. 아이들은 환호하며 그러자고, 케잌이 수위실에 도착하면 자기가 가지러 가겠다는 둥 책상을 붙여서 과자랑 음료수를 더 사다 놓고 하자는 둥 말들이 많았다. 하지만 개 중에는 왜 진이의 생일을 미리 알아두지 않았을까,  괜히 망설이지 말고 선물이랑 준비할 껄, 점심시간에 나갔다 와서 이따 집에 가기 전에 주면 안될까 하는 등의 생각으로 낭패감을 느끼고 있는 애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미 차려진 젯상에 상돈 올리는 격 밖에 안 되는 지라 아예 몰랐던 척 축하나 하는 편이 나을 터였다. 

진은 채 다 알지도 못 하는 동급생들이 차려주는 생일상에 감격해했다. 보다 더 즐겁고 활기찬 분위기에 함께 신나했다. 그리고 꽃다발을 받으면서 " 고마워" 하고 말했고 그러면서 다시한번 정원을 쳐다보았다.

그 후로도 진의 반에서는 모둠을 지어 생일파티를 하는 일이 없지 않았고 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은 술 마실 껀수의 하나로 누군가의 생일을 차용해오기를 자주했지만, 윤 진의 퍼스트는 정원이라는걸 누구도 부인할 수 없게 되었다. 진 자신에게도 말이다.

정원은 예쁘다라고 말하면 시샘하는 맘이 아니고서는 결코 아니라고 할 수 없는 외모의 여학생이었다.  긴 생머리를 항상 등언저리까지 정갈하게 빗어내리고 다녔고 티나지 않게 화장한 얼굴에 잘 다듬은 눈썹과 밝고 화사한 뺨을 가지고 있었으며  도톰하니 육감적인 입술은 건강한 붉은 색이었다. 중학시절 단발머리의 정원이 한 학급의 아이들 전체를 앞에 두고 카라얀처럼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두 팔을 활짝 뻗으며 지휘봉을 휘두르던 모습을 진은 알고 있었다. 빨간 마이에 타이트 스커트를 입고 아가씨들처럼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다리를 보이는 단상 위에서 지휘하는 그 모습에선 사뭇 카리스마가 느껴지기도 했다. 그 때에 비하면 정원은 다소 얌전 아니 차분 아니 참해졌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크게 웃지 않고 한 손을 입술 가까이로 올리며 웃기도 한다. 분명하게 레이스나 핑크색, 예쁜 소품들에 대한 선호를 나타냈고 가방이나 옷가지에 그런 취향을 살리고는 했다. 정원에겐 꽃, 오완식 커텐, 푸짐하고 질 좋은 돈까스 그리고 붉은색 포도주가  어울리는 그런 이미지가 있다. 정원의 구김살없는 웃음, 천박하지 않으면서도 거칠것 없다는 듯 큰 목소리, 호감을 표시하고 또 보답받고자 하는 분명한 기대와 요구, 그런 솔직함과 애교스러움을 진은 좋게 보았다. 정원과는 분식점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어야 했고, 동대문보다 명동을 가야 했으며 달에 한 번씩 영화를 보다가도 가끔은 대학로에 가서 연극을 보기도 해야 했다. 봄날 다사로운 해 아래 정원과 손을 잡고 학교에서 버스정류장에 이르는 가로변의 부띠끄 앞을 지날 때, 살랑이는 치맛자락이며 투명한 망사리본 따위에 이끌려 가게 안으로 들어선 정원에게, " 이거, 너한테 잘 어울리겠다. " 하며 진은 캉캉스타일의  풍성하게 펼쳐지면서 발등까지 내려오는 하얀 치마를 사 주었다. " 어머, 정말이야? 그래도 돼? " 하며 정원은 기쁜 듯 햇살같이 웃었다.  진은 귀엽고 또 예쁘다고 생각했다. 당장 다음날 학교에 정원은 그 치마를 입고 왔다. 너무나 눈에 띄는 그 치마를 이틀 더 입고 왔으나 생활지도부 선생의 부드러운 지적이 있은 후 " 진아, 아무래도 이 옷, 여기서는 못 입을 것 같아. 나중에 놀러나갈 때 입어야겠어. " 하며 그렇지만 정말 우아하고 멋진 옷이라며 이걸 입고  함께 파티같은 데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맞아, 네겐 파티의 공주님이라는 자리가 어울린다하고 진은 생각했다. 이렇게 순진하게 웃는 모습은 언제까지라도 지켜져야 한다는 생각도.

정원은 나중에 사회에 나가면 멋지고 좋은 남자를 만나 행복하고 편안하게 살 것 같았다. 지금은  정원에게 그런 기사와도 같은 역할을 자신이 해 준대도 그건 그것대로 즐거운 추억이 될 꺼라고, 그리 생각하는 진이었다. 그러지 않아도 여고생들은 좀 더 어렸을 때와는 아주 판이하게 다른 분위기를 풍기며, 예전처럼 여럿이 함께 다가오기 보다 자기 혼자만을 봐 주기를 원하는 듯한 속내를 자주 흘리고 있었다. 진은 그래서, 어쩌자는 것인지? 하고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일세하는 맘으로 적당히 상대해 주고 있었다. 하지만 정원이라면 조금은 얘기가 다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예쁜 아가씨는 소중히 대해져야 한다고 생각했고  조금 멍청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닌게 아니라 정원은 순진하게 웃을 때면 야, 바보같아 보여 하는 핀잔을 자주 받곤 하였다. 얘기를 오래 나누다 보면...한 번에 두 가지 다른 종류의 생각을 못 하기도 해서 좀 천천히 정리하면서 대화를 해야 하는 불편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어떠랴, 이쁜 것이 공부도 잘 하면 미움받는다고 정원은 그다지 성적이 좋게 나오는 편은 아니었지만 음악엔 재능이 있었다. 음악을 좋아하기도 했고 팝송과 함께 클래식도 혼자서 잘 듣는 편이었다. 함께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러 가서는 똑같이 좋아하는 오페라에 환호했고 그 웅장함에 감동했다. 살리에리의 분노와 자괴감에 공감하는 마음도 함께 나누며 우리, 음악가의 길을 가는 것에 좀더 진지해져야 하지 않을까 하며 같이 심각해지기도  했다. 정원은 언젠가 자신의 바이올린에 피아노반주를 부탁하겠다고 농담 반 진담 반의 꿈을 얘기하기도 했다. 정원이 여고에서의 진에게 있어 가장 가까운 친구임은 두말 할 필요도 없는 사실인 듯 했다. 적어도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정원과 진이 둘 다 자주 가는 음악실, 그 어스름한 오후의 인적없는 공간에서 그들이 함께 깜박 잠이 들었던 때에 일어난. 진은 여기서 오래 자면 안되는데....정히 선생님이 늦을 것 같으면 그만 연습을 마무리하고 집에 가야지...정원이는 어쩌지, 데려다 주고 갈까....하는 생각을 얕은 잠 속에서 계속하고 있었다. 음악실의 기다란 의자가 등뼈와 쇄골에 부딪혀서 불편하기도 하고 또 좁기도 했다. 시체처럼 차렷 자세로 눕기에도, 옆으로 돌려 누워있기에도 불편해서 한 손은 허리께에 다른 한 손은 이마 위에 올리고 있었다. 이상하게 피곤함이 느껴진 그러나 여느날과 별로 다르지 않은 평일이었다. 아, 컨디션이 안 좋다며 생리때가 되가는 것 같다던 정원 땜에 피로감이 전염되었나 하는 생각도 들긴 했다. 그러니까 아무래도 빨리 집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눈이 떠지지 않았다. 문득 진은 지금 자기손이 어디로 떨어졌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 위에 올리고 있던 손이나 아니면 이마 위에 올리고 있던 팔이 좁은 장의자에 누워있다보니 스르륵 밑으로 떨어졌나 보다. 근데 이 의자 아래에 있는게 뭘까......부드럽고 따뜻한, 어린 시절 엄마의 젖가슴에 손을 넣었을처럼 쑤욱 미끄러지며 손바닥에 느껴오는 이 온기는? 어린 강아지의 턱밑을 간질었을 때와 같은 이 가실한 감촉은?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로, 손끝마디마디에 물렁한 듯 단단한 듯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이 열기는?

진은 눈을 번쩍 떴다. 자신이 누운 옆에 무릎을 꿇은 듯 풀어헤쳐진 가슴이 보였다. 유두, 붉게 팽창한 유두와 함께. 그리고 자신의 한 손과 함께 아래로 쑥 들어간 채 가늘게 떨고 있는 팔꿈치, 튀어오른 혈관과 뜨겁게 맺혀있는 땀방울을.

정원은 잠깐....잠깐만.... 조금만 이대로 있어 줘...하고 기어들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러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하듯 진의 손등을 꽉 부여잡은 채 힘껏 흔들어대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정원의 깊은 한숨, 이마에 맺혔다 떨어지는 땀방울을 얼굴로 받으며 진은 자신의 손을 되찾아올 수 있었다. 뭐라 해야 할 지 아무것도 떠오르는게 없었다. 진은 이게 뭐지? 이게 자위? 그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고마워...하는 정원에게 화를 내야 하는 상황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자신을 쳐다보던 여자아이들의 그 눈빛에 담긴, 작년과는 다른 그 알 수 없었던 느낌이 바로 이런 거였나 하는 생각이 확신처럼 들었다. 정원의 축 늘어진, 그러나 뜨거운 물에서 건져올린 오징어숙회같은 입술이 누운 채로 멍해져 있는 자신의 입술 위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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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금 혹은 보안사항임

원래 쓸라구 했던게 이게 아닌데, 삼천포로 빠졌다.

동화창작반에서 동화창작을 할라니 당췌 떠오르는 게 없어 어린시절 친구 얘기를 쓰다가 사춘기시절 좋아했던 여자애가 생각나서 한참 생각하다 보니 내가 좋아했던 사람들이 전부 여자들이라.....내가 레즈비언인가 하는 의혹에 사로잡혔다.

ㅎㅎㅎ 솔직히 초등학교 동창생은 오래 붙어있긴 했지만 걔가 좋았다기 보다 걔가 주는 크라운산도가 좋았고 걔네집에서 놀 때의 편안함을 좋아했었으니 열외다. 내가 정말로 좋아했던 윤.  정말 오랫동안 맘 속에서만 살았던 이였다. 만화책에 간간히 나오던 동성애 코드 땜에 정말 푹 빠져들었다. 중학시절 친했던 두 친구, 고교시절 사춘기의 절정에서 많은 걸 나눴던 한 명의 친구와 한 명의 선생님, 아 그 선생님이야말로 좋아했던 것에 더해서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를 만들어준 사람이었다.  운동은 대학에서가 아니라 그 선생님이 빌려준 사회학 관련 서적을 통해 내 의식에 각인되었었다. 그 후로 내게 영향을 끼친 사람이 없다. 오히려 내게 비판의 주표적이 되었던 선배들 몇 명이 있었을 뿐이고 덕분에 대학생이라는 신분과 스펙을 내 인생에서 삭제하는 데 톡톡히 공헌했던 걸로 기억된다. 하지만 노동자 생활에서는 막판에 함께 투쟁했던 동지를 한 명 친구로 건져내어 지금도 돈독히 지낸다. 흠...그 친구를 포함해서 내가 좋아했던 이들은 모두 여자들이다. 아, 남편을 포함해서 사랑할 만한 남자를 만나지 못 한 것은 내가 너무 잘나서였을까 내가 너무 까칠해서였을까.  여성해방이 이룩되지 않는 한, 남자를 인생의 의미로 사랑하기는 힘들 것 같다. 걍 하던 대로 여자를 사랑해야겠다.

 

ㅋㅋㅋ 그래서 내가 진짜로 쓰고 싶은 것은 여자를 사랑한 여자의 이야기이다. 남자를 사랑한 남자의 이야기는 장 정일 이후 정말 지겹도록 보았고 이젠 주말마다 티비에서도 보고 있다.

삼천포로 빠진 이야기를 이어나가면 보안에 걸릴 것이 많아서 또 현재진행형의 사람들과 연루되니 더이상 쓸 수 없을 것 같다. 그리고 즐겁지도 않다.

두근 두근 즐거울 게 분명한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은데....

진보넷 블로그라 써도 될 지 걱정스럽다.

게다가 19금으로 이어질 수 밖에 없으니...걍 문 닫고 숨어서 써야 할라나....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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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용서할 수 없는 자라도 이해할 수는 있다.

혜정을 찾을 수가 없었다.

고등학교 졸업식 전날까지 헤드폰과 이어폰을 만드는 전자제품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던 혜정은 거기에도 노조가 생겼다며, 단지 교정이 넓어서 선택했다는 대학에선 인근 성수공단의 체불임금을 남겨둔채 야밤의 제품반출을 시도하는 구사대와 몸싸움을 하던 여공들이 다쳤다며 분개하더니  채 1학년을 다 마치지도 않고 사라졌다. 티비에서는 가자 북으로! 를 외치는 대학생들을 몽둥이로 두들기는 영상이 편집 속에서도 연신 내비쳤고 대통령직선제에도 유유히 권좌를 장악한 우익이 세를 과시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위해 연신 빨아대는 흡혈에 고통스러워하고 있었다.

" 한국의 민주화는 끝났어. " 라고 백기완의 낙선을 두고 더 이상 희망을 볼 수 없다고 인하대의 운동권이라는 친구오빠가 말하더라며 혜정은 6월 항쟁은....우리들의 승리가 아니야....라고 중얼거렸다. 그 애는 더 이상 문학소녀가 아니었다. 오래도록 사춘기의 몸살을 앓던 내성적이고 연약하기만 하던 아이도 아니었다. 아빠에게 맞은 뺨의 붉은 손자욱을 가리던 반항하는 십대도 아니었다. 스물 하나, 그 후로 그의 인생을 철저하게 규정했던 이십대의 운동권 인생을 그 애는 모든 인연을 끊고 잠적하는 것으로 본격화했다.

그 애가 다닌 학교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독문학과가 있는 4년제 종합대학교였다. 꿈이 없어.....사회에 나가 뭘 하고 싶은 지 모르겠어서, 고교를 졸업하자 마자 취직을 하는 건 아무래도 아니라며 고 3의 수험생 생활을 그야말로 공부에 매진했던 그 애였다. 왜 독문학과를 가느냐고 묻자, 여자아이들이 선호하는 사범대나 영문과를 가는 건 시집 잘 가려고 가는 것 같아서 싫고 법대는 너무 어렵고 또 웃길 것 같고 경제학과는 수학 때문에 안 된다며, 독일철학을 원서로 공부하고 싶어서? 하지만 사실은 그저 전혜린의 분위기에 딸려가는 거라고 말하면서 혜정은 배시시 웃었다. 그런데 독일어는 불어만큼의 분위기도 없고 발음이 자기가 내기엔 너무 뻘쭘하다며 게다가 짜라투스트라에서 슈바빙의 안개 낀 아침을 느끼긴 어렵겠다면서 그냥 번역된 독일의 원전들을 보기도 바쁘다고 혜정은 한창 쏟아져나오기 시작하는 맑스엥겔스 저작들을 사는데 용돈을 다 털어넣고 있었다.  그 애와 대학의 낭만을 느껴본 건 아직 학생운동을 하는 선배들의 귀여운 후배 노릇을 하고 있던 오월의 축제와 골방에 처박혀 세미나합숙을 마친 후 조금 남은 여름방학끝에 한가로이 교정을 거닐었던 며칠 뿐이었다.

" 아무리 읽어도 주체사상은...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어. 이건 유물사관이랑도, 변증법하고도 인식론적으로 연계가 안돼. 휴우.... "  혜정은 한숨을 쉬며 자신의 직속 선배와 대판 싸웠다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고민했다. 혜정과 자유롭게 맥주를 마시고 엠티를 핑계삼아 가까운 춘천에라도 다녀오고 싶었던 윤 진은 고민하는 혜정에게 할 말이 없었다. 데모가 뜨던 말던 별로 영향이 없었던 예술가들의 무리 속에 있는 윤 진에게 아무런 비난도 비판도 하지 않는 혜정은 무슨 생각에서였는지 " 너까지 이런 고민을 할 필요는 없어. 나두 확신이 없는데 뭐...." 그리고 덧붙였다.  혁명 후 러시아에서도 예술가들은 단죄의 대상은 아니었어. 그랬어야 한다고 생각해. 인간의 역사는 사회혁명보다 더 큰 틀거리 속에 있다고... 윤 진은 그 애가 보는 소설책을 잘 몰랐던 것처럼 그 애가 소장하고 있던 사회과학 서적도 한 장 떠들어본 적이 없었던 지라 무슨 소린지 하나두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자신을 특별히 여기고 있다는 느낌은 확실히 받았었다.

그런데 자기에게조차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야말로 뾰로롱 사라졌다. 그 애의 학과 선배들 중 이름을 들을 적이 있는 사람을 과사무실에서 만났다. 안 그래도 혜정의 아빠가 온 학교를 뒤집어놓고 갔다며 아주 학을 떼었다며 진저리를 치면서 말했다. 사실은 자기들이 기껏 키워놓은 후배를 피디그룹에서 빼갔다고. 과에서 자기를 같은 동아리에 있는 3학년 언니의 따라지라고 부른다고 삐져서 말하던게 생각났다. 혜정을 주체성있는 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는 언사에 윤진은 그 애가 보다 낮이나 밤이나 처박혀 살던 동아리실을 찾았다. 2학년 알피라는 화학과의 우직스러워보이는 여자가 여름방학 후 동아리엔 거의 안 나타났다면서 학생회관이 아닌 대운동장 스텐드 밑의 구석진 곳에 자리잡은 학내에서 거의 유일한 피디써클이라는 곳의 동아리실을 알려주었다. 맨날 밥먹자고 쫓아다녔지만 가뭄에 콩 나듯 한 번씩 학생식당에서 자리를 함께 했을 뿐이라며 네모난 얼굴의 예비역이 우리 쪽으론 안 왔다고 한다. 대체 이, 부지만 서울시내 제일로 넓다 뿐이지 학생운동은 쓰다만 플랭카드와 신나냄새로 꽉 찬 한 동의 학생회관을 중심으로 문과대와 사회대 앞의 민주광장 안에서 다 이루어지고 있는  이 손바닥만한 행동반경을 갖고 있는 학생운동권에서 혜정은 어디로, 어느 선을 타고 빠져나갔단 말인가?

나름 주변을 정리하는데 순서를 밟고 상대를 배려하느라 에너지를 소진했던 혜정이었다. 중학시절 몇 안 되는 친구들과 멀어지는 것도 천천히, 고등학교의 패거리들과 함께 어울리다가 얽혔던 남학교의 후까시들과 인연을 끊는 것도 입시공부를 해야 한다고 몇 번이나 만나 설득하느라 1년 여가 걸려서 윤 진으로 하여금 울화통이 터지게 하던 소심가였다. 윤 진은 그 애가 데모를 한다고 시내에 택이 있다고 비택이라 말할 수 없다고 혼자 몇 번이고 버스를 갈아타고 나가는 것을 보고, 그리고 저녁에는 일곱시 뉴스를 통해 자욱한 최류가스 속에서 몽둥이찜질을 당하며 피투성이가 된 대학생들과 아우성치는 시민들을 카메라에 잡은 영상을 보면서 몇 번이나 말하려고 했었다. 혜정아, 너에겐 어울리지 않아. 그 작은 몸으로 옥쇄파업을 하는 노동자들처럼 팔에 팔을 걸고 군중들 속에 있어봤자 몰아치는 전경들보다 더 빨리 튀는 너의 그 동지들의 발에 채여 너의 전력질주는 소용이 없을 거라고. 학생운동도 대학시절의 빼놓을 수 없는 낭만 중 하나라고 뻔뻔스럽게 읊어대며 인민에 대한 사랑을 떠드는 입술로 취업준비를 착실히 하는 도서관에서 건진 잘 빠진 여학생과의 키스와 함께 대학이라는 또 하나의 기득권을 결코 놓치지 않으려는 우리 시대의 대학생들이 하는 운동 속에서 너는 또다시 고립될 꺼야. 입시에 매몰되었던 고등학교에서처럼. 부모의 직업이라는 귀속계급에서 한치도 벗어날 수 없었던 기독사립학원의 중학교에서처럼. 하지만 그 애의 고집스럽게 꾹 다문 입술은 대학에서의 한 계절, 한 계절이 갈수록 더욱 다시 벌어지지 않았고 간간히 웃음을 날리던 순진한 표정에는 침울과 의혹이 도사린 비장함이 갈수록 짙어져갔다. 맑스주의가 답을 주지 않는다면....삶의 진리는, 희망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여기서 답을 찾아보겠어. 끝까지 가 볼꺼야. 대학생이 아닌 노동자들 속에서. 노동자계급만이 희망이야. 60년대 빈농이었던 아빠가 도시빈민에서 부동산폭등기에 한 몫 잡은 걸 기화로 자수성가에 성공하면서도 구질구질한 가난과 설움 속에서 습성화된 가부장적 폭력으로 가족들을 공포와 불안 속에 살게 한 어린시절을 혜정은 용서할 수 없어했다. 우리 부모가 자기 노동력에 기반한 자영업주가 아니라, 그래서 쁘띠비지의 간사하고 비열한 속성을 내성화하지 않고 하루 품으로 하루도 버티기 힘든 공장노동자로 살았다면 그래서 아마 계속 가난하고 일상의 불편에 온 에너지를 소진하며 어쩌면 자식들을 대학에 보낼 돈이 없어서 피지배계급의 재생산에 머물렀을지도 모르지만 사람에 대한 애정과 소박한 품성을 유지할 수 있었을 지도 모른다고. 그건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집단으로서 존재하는 프롤레타리아만이 가질 수 있는 계급성에서 나오는 연대의식에서 나오는 인간애라고. 혜정은 그 기대와 희망의 끈을 힘겹게 붙들고 있었다. 분명히 그 애는 다시 공장으로 간 것이 틀림없었다. 학생아르바이트가 아닌, 먹고 살기 위해 취업을 갈구하는 노동자계급의 일원으로. 울산? 아니면 인천? 학교의 선배들이 아니라면, 그 애가 함께 한 ' 동지' 들은 누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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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여.우.사.이

의외로.

혜정을 만나 한가한 시간을 보내는 것은 쉽지 않았다.

학교가 다르다는 것이 이렇게나 불리한 조건일 줄을 중학교 때는 몰랐다. 반이 다르다는 것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는데...윤 진은 지난 시절이 아쉽게 느껴졌다.

우연을 가장하지 않고 그 애의 학교 앞에 갈 수 있었지만 한 번 가 보니 다시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교 후 외대 앞에서 보자니 도착하면 저녁시간이 되어버렸다. 한국사회에서 학생신분으로 산다는 것은 직장인으로서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아침자율학습은 수당없는 조출이었고 야간자율학습은 제 돈내고 밥 사 먹으면서 매달리는 성과를 위한 야근이었다. 실적을 내지 못 하면 여지없이 열반으로 좌천되거나 경쟁에서 열외로 밀리는. 황금같은 주말에도 피곤에 지친 몸을 일으키지 못 한 채 방바닥에 붙어있다가 하루 해가 뉘엿뉘엿해져서야 정신이 돌아오지만 월요일을 생각하면 외출은 한참 고심한 끝에야 감행할 수 있는 사치였다. 뭐...이런 싸이클에 혜정이 충실했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한국의 고등학생들에게 주어진 일상의 규제와 스트레스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 오늘은 야자 있는데. "

반포까지 가는 피아노레슨이 있는 날을 피해 혜정의 학교 앞에 왔지만 도무지 하교하는 학생을 볼 수 없어 들어가본 교정에서 들은 말이었다. 그렇게 말한 여자애는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정문에서 바로 바라다보이는 2층짜리 교사 안으로 쏙 들어갔다. 교실이 있는 것 같아 보이지 않는데? 국기가 게양된 조회대 뒤의 현관으로 들어서니 커다란 거울을 가운데 두고 왼쪽 오른쪽 2층을 가리키는 화살표 옆에 서무실, 교무실, 도서실 등의  팻말이 써 있었다. 대부분 입실을 끝낸 듯 몇 안 되는 남녀 학생들이 각자의 짐을 지고 바쁜 듯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따라서 가 보니 2층의 왼쪽에 양호실, 그 뒤로 피아노실이란 팻말이 붙어있다. 가 볼까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혜정과는 인연이 없는 곳이다. 문득, 미션스쿠울이었던 중학교에서 해마다 있었던 합창대회가 생각났다. 그 애는 엘리야의 하나님이란 노래에서 하이소프라노파트를 맡았었다. 엉망이었다. 연습 때 반주를 맡은 아이가 결석을 해서 윤 진이 대신 피아노를 치면서 보았던 지휘를 맡은 아이도 지도를 하던 음악선생님도 그 곤혹스러움을 참는 표정이란 !  아이들이 꺼려하는 하이소프라노에서 그 애를 뺄 수 없었다는 것이 문제였고 계속되는 불협화음에 그 애는 아이들이 첫음을 시작한 후에 슬쩍 섞여드는 수법을 쓰더니 점점 목소리가 작아졌고 대회날에 이르러서는 그냥 입모양만 보여주는 것으로 위기를 모면했다. 어떻게 할 수 없는 음치라고나 할까....그러기도 쉽지 않았을텐데...개인적으로 친했던 음악선생님은 기말고사 성적을 정리하면서 " 이 애는 필기는 백점인데 실기점수를 합산하니 평균 이하로 떨어지네...이거 참 내가 준 점순데 츳츳....." 하면서 상위권에 랭크된 우수학생의 평균을  자신이 끌어내리는 것 같다며  미안해 했다.  빙긋 미소를 떠올리며 윤 진은 도서실 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감독선생이 아직 들어오지 않은 듯 여기저기 의자를 끌고 책들을 늘어놓는 아이들이 눈에 띄였다. 그 속에서 나는 딴세상이요 하듯 고개를 쳐박고 열공 중이거나 사색? 중인 아이들로 구성된 도서실 야자의 수용자들은 그래도 영수 열반으로 편재되어 교실에서 야자를 하는 것보다는 낫다는 우월감으로 위로받고 있었다. 혜정의 말에 의하면 그랬다. 부산하게 수다를 주고 받는 패거리 들 속에서 일어나는 혜정은 옆엣 아이들에게 웃으며 뭐라고 말하더니 문 쪽으로 나왔다. 가슴에 교과서는 아닌 듯한 책 몇 권을 껴안고 있었다. 윤 진을 보고 깜짝 놀란다. 저번처럼 더듬진 않는다. 야자 있는 날이라고 방금 아래층에서 들었던 말을 한다.

" 근데 넌 어디 가? "

" 아, 아직 시작 전이거든, 얼른 교무실에 다녀올려구. 선생님한테 빌린 책을 갖다드려야 해서. "

슬쩍 들여다본 책의 제목은 들어보지 못 한 것이었다. 머나먼 쏭바강? 제 2의 성? 이게 뭐지? 윤 진은 선생님이 빌려 준 책이니 의심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뭔가 껄적지근한 것이.... 그 애를 따라가서 교무실 앞에서 기다렸다. 오후 5시가 다 되어가는데  종례를 마치거나 감독을 들어가거나 하는 선생님들이 오락가락 하면서 교무실은 한창 분주한 판이었다. 열려진 교무실 문 사이로 그 애가 젊지만 세련되어 보이지는 않는 여선생과 얘기하는 모습이 보였다. 윤 진은 그런 옆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밝고 편안한 표정으로, 보통의 선생과 제자 사이에선 발견하기 어려운 유대, 신뢰, 호감과 애정 같은 것이 그들 사이에 흘렀다. 교무실을 나오는 그 애의 가슴엔 또 다른 책이 한권 소중히 품어져 있다. 8억인의 나라...이건 또 뭔가요? 윤 진은 그 애가 중학시절과 다르지 않게 교과서 아닌 책들을 읽는 걸 계속 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근데 인문계고교에서 학생에게 문학서적도 아닌 책을 대 주는 선생이라?

" 넌 야자시간에 혼자 책 보냐?"

" 하하...그게...수업시간에 실컷 본 교과서를 또 들여다본다는게 지겨워서..."

암기로 되는 과목들이라면 모를까 고교에서 시험기간에 공부하는 것으로 좋은 성적을 내기는 어려울텐데 하고 윤 진은 생각했지만 중학시절 최상위와 최하위를 오르내렸던 그 애의 석차를 알고 있는 윤 진은 여전하군 하는 생각을 했다.

" 입시, 걱정 안 돼? "

" 글쎄....내가 상정한 목표가 아니라...  "

의욕이 생기지 않는다고 혜정은 말했다. 저렇게 독서에만 열중하다가 소설가라도 되려나 했더니 아닌게 아니라 시를 쓰고 있다고, 국어선생님이 봐 주신다고 한다. 친해 보였다. 보통, 여학생들은 젊은 남자선생을 좋아하는데, 좀전에 교무실에서 핑크빛 베개를 책상 위에 떡하니 올린 채 하얀 얼굴을 파묻고 자고 있던 남자선생도 무척 젊어보였다.

" 하하하, 그 선생님 대학 졸업하고 처음 부임한 영어선생님인데, 인기 캡이야. 얘들이랑 뒤밟아서 집도 아는데 단칸방에서 자취하고 있더라고. "

이 혜정, 너 스토커냐? 뒤 밟는거 습관된다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며 슬쩍 기분이 나빠지는 윤 진이었다. 야자를 땡땡이치라곤 차마 할 수 없어서 윤 진은 다른 친구 얼굴이나 보고 가겠다며 혜정과 도서실 문 앞에서 헤어졌다.  땡땡이를 칠까 말까를 고민하는 듯 관리 안되는 표정으로 혜정은 문 안으로 떠밀리듯 들어갔다. 그 애의 자리 근처에서 예의 그 ' 네 명'의 멤버들인 게 분명한 아이들이 손짓하는 게 보였다. 중학 때와는 달라진 혜정의 일부였다. 곧 그 애들에게 뭐라고 하면서 웃음을 떨구고 있는 혜정, 그다지 자연스러워보이진 않는다.

중학시절 혜정이 패거리 속에 있는 건 본 적이 없었다. 그 애의 초등학교동창생말고 친하게 지내는 한, 두명이 있다는 건 강당이나 체육시간에 반복적으로 곁을 지키던 얼굴을 보아 알고 있다. 그 중 한 명이었던 학교의 유명한 날라리는 학년이 바뀌자 그 애의 곁에서 보이지 않았고 혜정이 그 날라리친구들 속에 묻혀다닌다는 얘기도 없어서 은근한 걱정을 털어버렸던 생각이 났다.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그 애는 혼자 중학교의 교문을 총총히 빠져나갔었다. 하교길에서 보았던 그 애의 어깨 혹은 옆얼굴은 늘 심각한 가정문제라도 있는 양 굳어있었고 조그마한 입을 꾹 다물고 발밑만 응시하고 걷는 고집스러운 모습이었다.

" 고등학교 와서 새친구들은 많이 사귀었어? "

" 응...글쎄...."

혜정은 1학년 때 짝궁과 지금도 자주 만난다고 했다. 자기는 절대로 갈 수 없는 이과를 선택해서 다시 한 반이 될 수 없었다고 말하면서 실의에 찬 표정을 보였다. 넌...친구 따라 강남가냐...하는 생각을 하며 개랑 많이 친한가 봐? 하고 떠보자 교환일기도 썼다고 한다. 윤 진으로선 흉내도 못 낼 일이었다. 아무리 하기 어려운 말이라도 걍 면전에서 얘기하는 게 낫지, 편지는 커녕 수업시간에 종횡무진 날아다니던 쪽지 한 장에도 제대로 된 문장을 써 본 적이 없었던 윤 진이었다. " ? " 아니면 " OK "  혹은 쌩까는 게 윤 진이 하는 대답의 다였다. 혜정이 중학시절 유일하게 조회대에 올랐던 것도 교내 백일장에서 입상을 했을 때였다. 그 애는, 윤 진이 초등학교시절 숙제검사로 겨우 썼던 일기를 지금도 매일 쓰고 있을 것이 틀림없었다.

하릴 없이 교정을 돌아보았다. 개교 3년 차의 학교답게 새 건물, 깨끗한 벽이었다. 본관 뒤에 있는 ㄷ 자 모양의 교사는 공주사대의 건축물을 모방한 것이라더니 2층까지 뻥 뚫려 시원해보이는 회랑은 자못 넓어서 중학교 때 강당건물의 천정 높은 홀을 생각나게 하였다.  강당건물의 홀을 나오면 잘 손질된 화단과 작은 연못도 있는 야트막한 언덕이 고등학교 교사를 지나 야외음악당까지 이어져있는 중학교의 넓은 교정을 혼자 걷고 있는 혜정을 점심시간이나 때로는 아이들이 다 하교한 시간에도 발견할 수 있었다. 피아노연습을 하고 나오다가,  그 애가 학교의 뒷산으로 가는 건 아닐까 하고 윤 진은 한참이나 지켜보았었다. 그 애는 그렇게 혼자 산책하기로 학교에서의 모든 자유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러나 교실의 의자에 붙박히지 않을 수 있는 시간들을 다 때우기에 이 공립고등학교는 너무 작은 부지 위에 세워져있었다. 게다가 운동장을 포함하여 학교의 한쪽 면은 높이 솟아있는 가림막으로 둘러쳐져 있었는데 그 얇은 천은 알알이 박힌 검은 가루로 잿빛풍경을 연출하고 있었다. 정말이지 건강을 위해서라도 산책하면 안될 것 같은 교정이었다.

정말 의외였지만 고등학교에서 혜정은 꽤나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평소에는 네 명의 패거리와 하교길을 함께 하더니  그 패와 또 다른 공식적인 써클활동도 하고 있었다. 스카우트 입단식이 있다며 1박 2일 엠티를 간단다.물론 그 앤 걸스카우트다. 그런데 당연할 수도 있겠지만 보이스카우트와 함께 간다는 것이었다. 윤 진은 골치가 아팠다. 일일찻집 앞에서 길거리 헌팅을 하던 모습이 떠올랐다. 남녀공학에서 써클활동을 하는 아이들의 진짜 목적은  건전한 이성교제의 공간을 허가받는 거라고, 여고에서 국제로타리활동을 하는 애들과 함께 싸잡아 비난하던 정원의 말이 떠올랐다.  혜정이 학교의 남학생들 얘기를 하는 걸 본 적은 없었지만, 걸스카우트 대장이 그 책을 빌려주던 국어선생님이라는 것 또한 들어 알았지만, 공부도 잘 하고, 운동도 잘 하고 스카우트 활동까지 하는 혜정이 남학생들의 주목을 받거나 적어도 자연스럽게 남학생들을 만날 기회가 많을 것은 쉬이 예측되는 일이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예측이 빗나갔다는 것을 윤 진은 여름방학 때쯤엔 확신할 수 있었다. 혜정은 나날이 떨어지는 성적과 함께 담임의 관심을 잃어갔고 체력장의 윗몸일으키기나 달리기 같은 데서 강단으로 승부하는 기록치 외에 모두가 어울려 하는 피구나 발야구에서의 순발력은 제로 수준이라는 걸 드러내면서 아이들의 관심에서도 멀어져갔다.그리고 써클활동을 하는 아이들의 부티나는 의상과 소지품, 화젯거리에 어울리는 흉내도 낼 수 없었던 혜정은 보이스카우트는 고사하고 걸 스카우트의 동기들 사이에서도 경원시되고 있었다. 그럼에도 혜정은 여름방학 때는 스카우트에서 지리산을 간다고 했다. 그건 5박 6일이나 되는 일정이었다. 거길 가기 위해서 아빠와 한참을 싸웠다고도 했다. 부모님 두 분 다 가게에 매여 하루 종일 일하면서 삼남매를 키우는 혜정의 집에서 고등학교 써클활동은 쉽지 않은 사치이기도 했다. 혜정은 정말로, 단지, 스카우트 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 그 국어선생이기 때문에 써클활동을 하고 있었다. 그게 더 나쁘다는 걸 오래지 않아 윤 진은 느꼈다.

어느날, 지리선생님이 잡혀갔다고 우울해하던 혜정은 학교가 난리가 났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 했다. 아침 자율 학습에 늘 턱걸이하는 시간에 도착하던 혜정은 칠판 위 태극기 액자 옆과 천정에 붙어있던 몇 장 밖에 못 보았지만 온 학교에 총학생회장 직선제를 요구하는 벽보가 나붙었다는 것이었다. 학생주임과 교련, 생활지도부선생을 주축으로 한 우악스러운 포스의 남자선생들이 몽둥이를 들고 그 벽보를 뜯어내며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느라 뛰어다닌 끝에 겨우 소란이 가라앉았지만 학교는 오랫동안 귀엣말과 숨은 회합 속에서 긴장과 분주함을 이어나갔다. 그런 것 같다고, 3학년 선배들의 민주 어쩌고 하는 조직에 맨날 꼴찌를 도맡으면서도 관동별곡을 가르치는 시간에 이 험한 산중에서 가마를 메고 진땀을 흘리는 하인들에게 수려한 산천경개가 눈에 들어왔겠냐며 꼬집던 작문선생님이 연루되었고 더불어 그 국어선생님도 딸려갈지도 모르겠다며 혜정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 옆얼굴엔 입시공부에나 매여있어야 하는 자신을 한심스러워하는 자괴감이 깃들어있었고 혜정은 그 우울과 소외감 속에서 국어선생님에게 시가 아닌, 장장 10장에 이르는 편지를 써 보냈지만 아무 답변도 받지 못했다며 슬퍼했다. 그리고 간첩혐의로 잡혀갔던 지리선생님을 면회하고 온 국어선생님에게서 곧 나올 수 있을 것 같다고 증거도 없는 조작사건이라는 말을 들었다며 그러나 다시 교단으로 돌아오지는 못 할 것 같다면서 혜정은 고통스럽게 말했다.  

" 지리 선생님의 그 표정이 잊혀지지 않아..."  끝없이 떠들거나 진도나가 달라고 요구하는 학년톱의 부잣집 아이와 같은 교실에 있다는 것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지긋이 자신들을 쳐다보던 지리선생님 앞에서 너무나 부끄러웠다는 얘기를 혜정은 비감하게 읊조렸다.

그 후 고 3이 되어 입시준비를 하겠다던 혜정은 대학을 가지 않으려면 취직을 하거나 시집을 가라고 아빠가 말했다면서 주변을 정리했었다. 뭉쳐다니던 패거리 중에 키가 큰 한 친구는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인문계고교 3학년에 특별학급으로 편성된 취업반으로 갔다가 2학기부터는 공장을 다닌다고, 전국이 데모로 들끓었던 여름 이후 계속되는 노동자파업의 물결 속에서 그 애가 어찌되었을 지 모르겠다며  혜정은 답답해 죽겠다며 눈물을 흘렸다.그리고 입시가 끝난 그 겨울 그 애가 다니는 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다며  소식을 뚝 끊었던 혜정은 대학 1학년을 마치기 전에 잠적했다.  이 혜정, 여기서 우리가 사랑을 이야기하기에 대한민국의 고등학교는 너무나 척박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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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청춘 그리고

" 윤 진 아닌데, 지금은. "

" ......? "

" 엄마 성으로 바꿨어. 이 진이야. 부모님이 이혼하셔서. "

" 아, 그래....."

말을 많이 삼키는 편이다. 혜정은.

부러 묻지 않는 듯, 잠시 다른 화제거리를 찾느라 고심 중인게 눈에 보였다.

" 원래 별거 중이셨어. 몇 년 전부터. 아빠랑 동거하는 여자가 임신을 해서. 엄마는 원래 다른 사람에게 의존적인 성격이 아니어서 별로 상처 안 받는 것 같더라구. 교회에서 야학하시다가 지금은 공부방하셔. "

월급을 받는 지 안 받는 지는 모르겠지만 엄마는 그 일을 인생에 처음 만나는 자유처럼 즐거워하며 해나가고 있었다. 68학번인 엄마는 대학 때도 사회운동에 참여하신 것 같았다. 써클 선배였던 아빠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재학 중에 윤 진을 임신하지 않았더라면 과연 결혼을 했을까 의심스러웠다. 울 오빠를 포함해서 남자들은 다 사기꾼에 이중인격자야. 고모는 연애를 시작하자마자 엄마에게 써클을 그만두라고 강요했다며 아빠의 학생운동경력을 폄하했다. 과연 대학을 중퇴한 엄마와 결혼생활을 시작하고도 군대에 졸업에 정해진 코스를 하나두 놓치지 않으려던 아빠는 일찌감치 학생운동 써클에서 발을 뺐고 80년 광주사태가 있었던 해에도 열심히 등화관제를 지키며 누구와도 연락을 하지 말라고 엄마를 단속했다. 인습으로부터의 독립을 자아실현의 전단계처럼 여기고 있는 엄마에게 아빠는 왜 그리 어렵게 풀려고 하냐며 이해할 수 없어 했고 직장에서 매일 보던 여자동료와 마음을 나누더니 몸도 나누게 되었었다. 내가 운동할 때는 늦게 들어오던 안 들어오던 말 않더니 왜 직장일로 밤새고 오는 것은 인정을 못 하냐며 아빠는 운동이 인생이었던 것과 다르지 않게 지금은 직장에서의 일이 내 인생이라며 존중해달라고 요구했다. 지역유지 정도는 되었던 할아버지의 맏이였던 아빠가 돈이나 출세를 염두에 둔 게 아니라는 건 엄마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빠의 일이 엄마의 인생은 아니었다. 물론 대학때의 운동은 두 사람 모두에게 인생이었지만. 그걸 어떻게 한 줄에 놓고 비교하나...엄마는 넑두리했고 두고 온 써클의 동료들과 야학의 아이들을 가슴 속 돌덩이로 누르며 가슴 아파 했다. 엄마는 무엇보다 자신의 판단미스 때문에 괴로워했다. 왜 그와 결혼하는 걸 통해 평생 운동을 할 수 있을 거라는 바보같은 생각을 했을까......내가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을까....엄마는 태내에서 7개월이 다 되어 눈도 깜박깜박하던 아이들을 죽인 것에 괴로와하며 평생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심정으로 산다며 한탄했다.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일을 자신의 선택으로 실행해 왔던 것에 엄마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어했다.

그런데 비해 공부방을 운영하는 엄마는 아주 날개를 단 것처럼 자유스러워했다. 피곤하고 힘든 생활이었음에도 그걸 감내하는데 한치의 고뇌도 없이, 스스로 페이스를 조절해가며 잘 해 나가고 있었다.

덕분에 윤 진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혼자 고민하고 연구해야 했지만 할아버지나 아빠의 영향을 차단해 준다는 좋은 점이 더 많은 것이 엄마의 이혼이었고 새로운 이름으로 사는 현재의 생활이었다.

" 아, 물론 나도 별로 상처 안 받았어. 지금도 앞으로도. "

윤 진은 고심할 꺼 없다는 듯이 줄줄이 늘어놓고 혜정을 쳐다보았다.

알았다는 듯 혜정의 소리없는 미소에 윤 진은 활짝 웃는 미소로 답했다.

편지는 결국 못 썼지만 사탕부케같은 안개꽃을 받으며 환하게 얼굴을 펴는 혜정을 보며 윤 진은 쪽팔렸지만 열심히 들고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 너무 늦은 답장이지? "

" 응? "

하...기억 못 하나? 그럴리가?

" 아...응...아냐...괜찮아....고마워...."

뭐가? 혜정은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고 있는 걸까? 윤 진은 자기도 잘 모르는 감정을 섣부르게 표현하려 애쓰고 있었다.

" 무엇의 답장인 지 아는 거야? "

" ......"

아주, 약았다. 조금만 난처해도 금방 말을 삼켜버린다. 이 혜정.

" 편지의 답장일까? 아니면 초컬릿의 답장일까? "

 입을 닫자 마자 윤 진은 아차 싶었다. 지뢰 밟았다. 젠장 !

빨갛게 달아오른 그 애의 뺨 위로 금방 눈물이 주륵 흐르는가 싶더니 턱 밑으로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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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화이트데이

윤 진은 불쾌함을 뚝뚝 떨어뜨리며 학교에서 인기를 잃어갔다. 겨울방학이 시작되기를 학수고대했다는 듯,  연락을 뚝 끊고 집에 처박혔다. 아이들에게 성을 바꾼 것에 대해 설명하기도 귀찮았다. 엄마는 취직을 생각하는 듯 날마다 무슨 수험서같은 걸 들여다보고 있었고 사춘기의 성에 눈 뜬 듯, 동생 이수도 하루종일 말이 없었다. 방학 전부터 눈에 띄게 친절함을 싹 거둔 윤 진의 태도에 여자아이들은 질색을 하며 아우성을 쳤지만 부모의 이혼이라던가 복잡한 가정사에 대한 소문을 동정어린 쑥덕거림으로 확장해 가며 조용히 멀어져갔다.

여자애들의 동경이란게 뭐 그 정도인게지, 윤 진은 상처받을 일 없다는 듯이 피아노레슨 시간을 늘리면서 이쯤에서 진로를 결정해야 하나 하는 고민에 머리가 아팠다. 피아노 학원 선생은 예대 입시를 전문으로 하는 학원이나 개인교습을 해 줄 만한 교수를 소개시켜주겠다며 엄마에게 연락을 달라고 했다. 엄마, 지금 그럴 상황 아니거든요 !  윤 진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짜증이 났다. 자신의 일을 혼자서 처리할 수 없다는 것이 화가 나고 답답했다. 결혼 후 한 번도 직장생활을 한 적 없는 엄마가 이제와서 취직을 한다는 게......그걸 그냥 두고 볼 수 밖에 없다는 것, 어떻게 해도 한계선 안에 있는 자신을 직시하는 것이 괴로웠다. 이럴 때 남자아이들은 엄마를 대신해 학교를 그만 두고 취직을 한다. 흔히 보아왔던 드라마 속에서 보던 것처럼, 자신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이 속상했다.

긴 겨울이었다.

윤 진은 태어나서 처음으로 우울이란 걸 알았다. 한없이 외롭고 쓸쓸했다. 독립적이라는 것과 고독하다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혜정, 그 애가 말 없이 학교를 다니면서 과연 외로와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랬다면 그 정도의 편지를 던져두고 그냥 참아낼 수 있었을까? 세상에 혼자 밖에 없다는 듯 까칠하게 아이들과의 친교에 담을 쌓고 지내던 그 애가 자신에게 편지를 보낸 이유가 뭘까? 외로워서? 그래서 남자친구를 만들고 싶었을까? 윤 진은 확 치밀어오르는 스트레스를 느끼며 책상 서랍을 열었다 다시 닫았다. 젠장...

발렌타인데이 쵸컬릿을 주겠다며 정원이 만나자고 했다. 롯데리아에서 만났다. 연방 얼굴을 붉히면서도 끊임없이 수다를 떤다. 정자와 민희가 나이트에서 부킹을 했다는 얘기, 자기도 남자애들에게 붙잡혔지만 금방 빠져나왔다는 얘기, 거기서 그 후까시의 남학생들이 그 멤버 그대로 각자 여자아이 하나씩을 끼고 왔더라며, 그 중에 곱슬머리 애는 천연파마인게 분명하다며 걸려도 학생주임도 뭐라 못 할 꺼라는 얘기, 윤 진은 더 듣고 싶지 않았다. 정원은 늘 누군가의 약점을 들춰 비웃으며 자기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어했다. 그래서 뭐 ! 그렇게 파마가 하고 싶어서 맨날 아침마다 고데기로 지져 머리끝을 다 태우고 다니냐, 너는?

새학년 새학기가 되어 정원과 한 반이 되지 않은 걸 그나마 다행이라 여기며 이제 그만 여자아이들의 아이돌을 졸업하고 싶은 맘으로.  "공부해야 돼" 라는 말로 오는 전화를 모두 끊었다. 새로 입학한 1학년들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지만, 주변에 여자아이들이 모이는 일은 없어졌다. 다른 애들처럼 자율학습으로 학교에 남지도 않았고, 예대 준비를 하고 있다는 걸 선생들도 다 알고 있었기에 수업이나 시험에 예민하게 굴지 않았다. 피아노 학원을 옮기진 않았지만 1주일에 두 번, 엄마의 친구의 친구라는 음대교수의 레슨을 받기로 하였다. 반포 서래마을까지 왕복 2시간을 길거리에 뿌리며 윤 진은 이제 습성이 되어가는 사색에 잠기기 좋은 기회로 삼고 있었다. 삼월 첫 주가 가고 있었다.  

 고속터미널 역에서 유난히 꽃다발을 짐처럼 싸안고 가는 사람들이 많은 걸 이상하다 생각하다 보니 교실에서 아이들이 화이트데이 어쩌고 하던 게 생각났다. 아, 발렌타인데이......초컬릿회사의 상술이라더니 그럼 이번엔 사탕공장의 상술인가? 어쨌든 꽃집은 또 한 번의 씨즌을 맞겠군. 윤 진은 지하철 맞은 편 자리에 지친듯 앉아 제 몸보다 큰 두 다발의 꽃들을 무릎으로 버텨놓은 채 잠들어 있는 젊은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가씨처럼은 안 보였지만 아줌마스럽지도 않아서 꽃집을 생계로 하느라 꾸밀 틈이 없는 듯 화장기 없이 파리한 안색을 하고 있었다.  드라마에 흔히 나오는 미혼모나 애딸린 이혼녀를 연상시키는 그 얼굴이 신문지로 둘둘 말았슴에도 그 희고 작은 꽃송이송이들을 연두빛 가는 가지들과 함께 환하게 내어놓고 있는 안개꽃 무더기 속에서 스러질 듯 안타까왔다. 윤 진은 외대 근처 그 애의 학교가 어디쯤인가를 더듬었다. 생긴지 얼마 안 되는 그 애가 다닌다는 고등학교는 우리들의 중학교 앞을 흐르던 개천을 뒤에 두고 막 흐드러지고 있는 개나리로 덩쿨담을 진 뚝방길의 끄트머리, 굴다리 건너 동네 안쪽에 자리잡고 있었다. 학교 앞엔 조그마한 책방과 문방구 하나, 그 외엔 학교 주변다운 점이 별로 없어 그냥 한적한 주택가처럼 보이는 그 골목 어디께에서 윤 진은 정문에서 하교하는 남녀 고교생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피아노 악보를 넣고 다니는 캔버스가방 하나만 달랑 어깨에서 흔들거리며 구멍가게 앞 아이스크림 냉장고 앞에 서 있자니 여학생들은 흘끗흘끗 돌아보며 지나가고 남학생들은 수상한 눈초리로 흝고 간다. 오래 서 있긴 좀 쪽팔리는군...어쩐다 하며 고민을 시작할 때 쯤 한무더기의 왁자한 여자애들 수다패가 눈 앞을 홱 지나간다. 그 구석에 팔짱에 팔짱을 끼고 웃음소리 속에 묻혀 스러질 것 같은 그 애의 옆얼굴이 보였다. 한 명만 뻬고 키도 다 그만그만해서 작은 축이었던 그 애는 뒷모습도 다 보이질 않는다. 재가 저렇게 크게 웃고 떠들며 몰려다니던 애였던가? 윤 진은 지난 가을, 일일찻집 앞에서 보았던 그 애의 모습에 이어 나이트에서 짝을 지어 춤을 추며 맥주를 마시는 그 애의 모습이 주말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머릿속을 지나갔다. 이쁘지도 않은 것들이 끼만 있어서 저렇게 넷이서 한 패인 것처럼 보이는 여자애들은 누구도 발걸음 한 번 흐트리지 않고 버스정류장으로 나가기 전 코너에 자리잡은 떡볶이집 안으로 곧장 사라졌다. 윤 진은 골치가 아프다는 생각을 하며 스트레스가 확 올라오는 걸 억누르며 그 자리를 떠났다. 그 자리를 지킨지 3일 째, 그 애가 혼자 나오는 걸 발견했다. 표정없는 얼굴로 그 애는 정문에서 바로 꺽어져 학교 담장을 따라 죽 이어지는 골목길로 쏙 사라졌다. 서둘러 뒤를 쫓았다. 아, 뒤를 밟는 거 이렇게 하는 건가 보군. 그 길을 가는 애들은 별로 없었다. 중학교 앞 인도를 두고 굳이 뚝방길을 따라 걷는 애들이 별로 없었던 것처럼. 그 애는 중학교 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뒷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중단발, 하나도 자라지 않은 것 같은 작은 키, 가을에 입었던 것을 봄에도 똑같이 입는 듯 체크무늬의 플레어스커트, 가방만큼 큰 보온도시락통을 촌스럽게 어깨에 메고 혼자 타박타박 걷고 있는 게 어제, 그제의 떡볶이집 패거리 속의 그 애와는 영판 다른 아이처럼 보였다. 반쯤 고개를 푹 숙인 듯 그 애의 머리가 반토막 밖에 안 보여서 더 작아 보였다. 윤 진은 금세 그 애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저만치 골목이 끝나는 지점에 횡단보도도 없는 찻길이 보였다. 행인들이 많아질 것 같은 느낌에 윤 진은 별로 준비도 없이 " 야, 이 혜정 - " 하고 불렀다.

화들짝 놀란 듯 그 애의 등이 심하게 움찔했다. 뭔 생각을 저리도 골똘히...츳...

돌아본 그 애는 금방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알아보는 것이 틀림없었다.

" 이 혜정 맞지? 영광중학교 나온. " 이건 준비한 멘트다. 윤 진은 자신이 탤런트로 나가도 되겠다는 생각을 하며 천연덕스럽게 우연을 가장했다.

" 아......윤......"

" 어, 놀랐어? 본 듯한 얼굴이어서, 너 나 기억해? "

그 애는 금방 말을 잇지 못 했다. 길거리에 우뚝 서 버린채 건너다보는 그 애의 얼굴을 낯빛 하나 안 바꾸고 윤 진은 마주 바라보며 서 있었다.

" 윤 진......여긴 어떻게... "

" 친구 만나고 가는 길인데? 너도 여기 다니는 구나? " 아, 이것도 준비한 멘트인데 해 놓고 보니 그 애의 편지 속에 학교 이름이 있었다는 생각이 났다. 순간적으로 그 애의 얼굴이 파래졌다가 곧 하애졌다.

" 집에 가는 길이야? "

윤 진은 서둘러 말을 이으며 걸음을 떼었다. 그 애도 덩달아 가던 길로 걸음을 옮기며 응 하고 대답한다.

" 너는? 어디 가? "

" 글쎄, 올 때는 시내에서 오느라고 몰랐는데 집에 가려니 버스를 어디서 타야 하는지 헷갈려서. "

" 버스 정류장 이 쪽 길 아닌데 " 하며 그 애는 정문 쪽을 돌아보았다, 너무 많이 왔다고 생각하는 지 다시 앞을 보며 " 저 쪽 옆으로 돌아 죽 나가면 버스 지나는 큰 길이야. "

" 넌 어느 쪽으로 가는데? "

" 난 아무데로나... 걸어서 가, 집 별로 안 멀어. " 

" 그래? 중학교 때보다 가까운가 보네? 맨날 걸어다녀? "

" 버스 타면 한 정거장 밖에 안 돼. 내려서 또 걸어가야 하니까. "

중학교랑 우리 집 정도 되나 보군. 윤 진은 혜정이 똑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해서 슬쩍 그 애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계속 자라고 있는 윤 진으로서는  살짝 숙인 그 애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다. 키도 쪼끄만게 맨날 고개는 푹 꺽고 다니니...원

니네 학교엔 중학교 때 아이들이 많은가 어쩐가 문과랑 이과 중 어느 쪽을 택했나 하는 류의 떠올리기 쉬운 질문을 주고 받으며 버스 다니는 큰 길에 이르자 혜정은 횡단보도 앞에서 잠시 고민을 하는 듯 이쪽과 저쪽을 번갈아 보았다.

" 왜? "

" 버스 정류장, 일루 가나 절루 가나 비슷한데...."

이 쪽은 학교가 있는 방향인데?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말하나 보군. 그럼 저쪽으로 가야지. 혜정의 집으로 가는 길이 학교 쪽일리는 없을 테니.

" 나 땜에 버스정류장 쪽으로 온거야? 너네집은 어디로 가는데? "

" 아냐, 나두 여기 찻길 따라서 가. 저 쪽으루 "

" 그럼, 글루 가. 저 쪽 버스정류장에서 타면 되지. 온 방향으로 다시 돌아가는 건 손해보는 것 같쟎아. "

잘 모르는 동네였지만 혜정의 집 쪽이면 중학교도 멀지 않을 테고 윤 진의 집과도 그럴 것이었다. 근데 학교에서 집까지 한 정거장 밖에 안 된다면 저쪽 정류장 근처인가 본데 흠....너무 짧은데.

하지만 중학 3년 내내 이만큼 많이 얘기를 나눠본 적도 없었다는 것에 윤 진은 만족스러웠다. 얘기 나눠보니 중학교 때랑 하나두 느낌이 다르지 않은 것이 일일찻집이며 나이트며 떡볶이집에서 수다떨던 그 애는 그 애가 아닌 게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애와 헤어져 집에 오는 길에 꽃집에 들렀다. 화분을 빼면 꽃보다 사탕이 더 많아서 이게 꽃집 맞나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하얀색, 분홍색, 주홍색, 노랑색 장미들과 색색가지 리본들 사이에 서 있자니 괜시리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탕을 빨아먹는 그 애의 모습은 도대체 상상이 안 되어서 안개꽃 한다발을 품에 안고 한참을 서 있자니, 중년의 꽃집 아줌마 나름 코디를 해 준다는 듯 연초록 가지 사이에 도롱도롱 작은 애기사탕을 매달고 있는 연분홍 장미 몇 송이를 안개꽃 속에 꽂아주며 이럼 어떠누 하신다. 좋네요. 하며 윤 진은 반짝이 포장지로 폭 싸 안고 돌아와 제 방의 유리화병에 물을 담아 꽂았다. 근데 이걸 어쩌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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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중-여자 대 여자

그 애를 다시 보았다.

그 애가 나를 보지 못 했으므로 만났다라곤 할 수 없다.

 

고등학생들 때론 중학생들이 인근에서 모이는 작은 대학로, 외대 앞에서였다.

가을 축제의 끄트머리,  그 순진하다 못 해 아기자기한 시화전이며 그림전시회, 작은 찻집 같은 걸 낭만스럽게 여길 수 있는 것은 낙엽 떨어지는 교정을 남자 아이들과 함께 걸을 수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몇 안 되는 남녀공학의 여자아이들까지 일일찻집의 티켓을 방패막이 삼아 한껏 멋을 부리고 서툰 화장발에 앳띤 웃음을 흩날리며 가을날의 까페거리로 원정을 나왔다.

윤 진은 유난히 달라붙는 정원과 또 다른 두 여자애들과 함께 미팅을 나온 참이었다. 그 애의 학교와 가까운 곳이라는 게 윤 진의 작은 이유였지만 스스로도 마음 속에서 드러내지 못 했다. 정원은 자기가 끈덕지게 졸라대어 인근 남학교 애들과 주선한 소개팅이었으면서 윤 진의 마지못해 하는 승락에 순수하게 기뻐하지 않았다. 뭔가 껄적지근했다. 그러나 윤 진은 깊이 생각하지 않았고 막상 거리로 나와 보니 생각보다 차가운 10월의 바람에 성큼 다가온 겨울의 초대장을 받은 것 같아 마음 한 켠이 아렸다.

일일찻집은 외대 정문에서 바로 건너편 버스정류장 앞의 작은 점포에서 있었다. 평소에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파는 인지도 없는 분식체인점인 듯 내부엔 테이블도 몇 안 되었다. 거리로 내다보이는 창유리엔 유치한 형광색종이에 몇 가지 메뉴와 가격을 매직으로 적어 붙여놓았다. 크리스마스도 아닌데 금색은색 띠종이로 체인을 만들어 여기저기 걸어놓은 폼이 여자애들이 별로 참여하지 않은 일일찻집의 주관처를 알려주고 있었다.

" 진아, 여기 ! 여기야, 일루 와서 앉아 ! "

정원이 소리쳐 부르는 통에 작은 찻집, 몇 모이지 않은 아이들의 주목을 받은 김에  윤 진은 슬쩍 그 네들의 얼굴을 슥 둘러보았다. ' 여기 올 리가 없지. ' 그 수줍음 많던 애가 이런 데 오겠냐, 나두 참 바보같다....

" 남자애들은 벌써 와 있어. 이제 민희랑 정자만 오면 돼. "

" 어, 그래......"

이렇게나 어색한......윤 진은 점퍼를 걸치지 말고 마이라도 입을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그만그만한 남자애들 넷이 검정색, 남색, 카키색 그리고 베이지색의 점퍼를 걸치고 있었다. 나름 신경쓴 듯 브랜드 로고가 내비치는 티셔츠를 대조적인 화사한 색깔로 골라입고 짧은 고수머리를 귀 뒤로 빗어넘기고 이마를 확 들어낸 앞머리에는 힘껏 후까시를 주고 있다.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는 정원이를 넷이서 상대하면서 실컷 분내를 즐기고 있던 그들은 윤 진의 등장에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한창 자라는 중에 있는 그들은 학교에서 가장 키가 큰 윤 진에게 아직 못 미쳤고 돋았다 잦았다를 반복하며 벌건 여드름자국을 가리지 못 한 얼굴은 윤 진의 희고 멀쑥한 낯빛에 기가 눌려 채 벌어지지 못 한 어깨를 움추리게 하는 듯 했다.

" 아...저기...윤 진이 저...그...윤 진이었냐..."

남학교의 뚜였던 듯 미팅을 주선한 후까시 하나가 이마에 땀을 흘리며 버벅거렸다. 정희여고의 윤 진이라면 알 만한 애들은 다 알았다. 키 크고 훤칠한 맨리, 공부도 피아노도 영어도 잘 한다는 자이언트, 타학교까지 여학생들의 팬클럽, 아니 팬덤이 형성된 나이트, 가끔 수상한 소문까지 따라 다니는 키 큰 여자애 하나 때문에 일대의 남학교에선 걸프렌드 만드는데 엄청 애를 먹고 있었다. 대체 왜 이 보이쉬한 여자애가 미팅 같은데를 !  사춘기의 꽃몽우리들이 한층 붉게 부풀어오르며 남자애들은 낭패한 빛을 역력히 드러냈다.

민희와 정자가 오기 전에 남자애들은 자리를 일어섰다. 정원이 소지품 뽑기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짝을 짓지 않고 다 함께 몰려다닐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 재네들, 저렇게 보내면 안 되는 거 아냐? "

" 글쎄? "

" 민희랑 오면 뭐라구 하냐? 잔뜩 기대했을 텐데..."

" 글쎄? 어디 가서 헌팅이라도 하던지..."

정원의 걱정없다는 듯 태평한 말에 윤 진도 이게 별 일 아닌 건가? 하는 생각이 설핏 들었다. 하기야 짝짓기하고 나가게 되었으면, 그도 난감한 노릇이었다. 개중 가장 키가 크다던 남자애도 자신과 엇비슷해보였는데 사소한 일에 목숨거는 남자애들이 저와 함께 걷는 걸 견디겠나 싶기도 하고... 자신으로서도 더 볼일이 없는데 걍 싱겁게 집에 가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 진아, 안되겠다. 토껴야겠어 ! "

" 뭐? "

갑자기 분위기가 어수선해지더니 정원이 팔을 잡아끌며 나가자고 했다. 떴어 ! 어멋 ! 어떡해 ! 사방이 부산하게 움직이더니 삽시간에 일일찻집은 파장하는 폼이었다. 학생지도부 선생들이 학생들이 주관하는 일일찻집을 단속한다는 것이었다. 아, 이럴꺼면 티켓은 왜 팔아먹은 거냐구? 윤 진은 자기가 낸 돈은 아니지만 억울해하는 학생들의 심정에 함께 했다. 불건전한 이성교제를 조장하는 모임이나 회합을 금한다는 교칙을 강조하던 담임의 말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건전하구만, 내 참.

시내로 나가는 버스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정원은 방금 떠나온 길 건너의 일일찻집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다가와 지긋이 살펴보는 학생지도부 선생의 찌푸린 미간을 정면으로 쳐다보다 생긋 웃기까지 했다. 남잔지 여잔지 원...츱... 뭐라 한 마디 더 할까 말까 잠깐 망설이던 학생지도부 선생은 등 뒤로 휙 지나가는 남녀의 풋내를 감지한 듯 이내 발길을 돌렸다. 이런 젠장... 윤 진은 확 스트레스가 올라왔다. 뭐가 즐거운지 생글거리는 정원이 아니었으면 꽥 소리라도 한 번 지르고 싶었지만, 꾹 누르며 시선을 돌렸다.

길 건너 버스 정류장 근처에 좀 전에 헤어진 남자애들이 주루룩 서서 불쾌한 표정으로 서성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불쌍한 것들...민희와 정자는 일일찻집이 취소되었다는 얘기를 들었다며 결국 오지 않았다. 교보문고에 가자는 정원의 말에 따라나서기는 했으나 윤진은 이렇게 될 것을 정원이 몰랐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별로 귀엽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냥 이 근처에서 햄버거나 먹자고 할까 고민하며 건너편 가게들을 유심히 살펴보았다. 그때 눈 속으로 그 애의 작은 어깨가 파고 들었다. 초가을엔 일러보이는 체크무늬의 머플러를 촌스럽게 두르고도 곁에 선 남자애들에 비해 반도 안 되어 보이는 어깨, 변함없이 뻗쳐대는 반곱슬의 중단발머리카락 속에  목덜미를 감춘 채 곤색 마이 아래로 같은 계열의 체크무늬 플레어스커트를 입고 있었다. 치마는 잘 안 입더니? 윤 진은 어떻게 길 건너로 가서 아는 체를 해야 하나 하는 생각을 순간적으로 하며 그 애를 주시했다. 그리고 그 애가 곁에 서 있던 남자애들에게 말을 거는 모습을.

금방 그 개중 키 크다던 후까시의 얼굴이 확 밝아지는게 건너편에서도 똑똑히 보였다. 저의들 패거리에게 뭐라 속닥인다. 다 같이 고개를 돌려 그 애를 훑어본다. 그 애가 돌아보는 뒤편 롯데리아의 창 안으로 비치는 여자애들을 함께 돌아본다. 곧 남자애들이 그 애를 따라 롯데리아로 들어간다. 저것들이?

윤 진은 어이가 없었다. 지금....재가 길거리 헌팅을 한거냐? 저 애가? 기가 막히는 구만....많이 컸다, 이 혜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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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의 노래

그 애의 편지가 온 것은 여름방학 중이었다.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골치가 아팠던 윤 진은 그 애의 편지를 책상 속 발렌타인데이의 초컬릿 상자 밑으로 밀어넣은 채 잊어버렸다. 슥- 읽어 보고 아무 감흥이 안 오는 그 애의 편지는 그 애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지난 달, 여느때처럼 첫번 째 일요일의 데이트를 즐겼지만 아빠는 웃고, 떠들고, 맛잇는 음식과 선물을 사 주고 저녁해가 기울기 전에 집 앞까지 데려다 주었다. 엄마는 초인종 소리만 듣고 거실 창가에서 문을 열어주었다. 우리가 지난 몇 해 째 보아온 아빠의 얼굴을 엄마는 이제 알아보지 못 하는 게 아닐까? 그들은 부부였지만 서로 얼굴을 마주 하지도 식당을 함께 가지도 않는다. 어떤 사람들처럼 마구 싸우는 것도, 서로 미워하는 것도 아닌데 우리들을 데려오고 데려다 주는 와중에 얼굴 한 번 스치는 것, 애매한 시간대에 외식으로 저녁밥을 해결하는 것 정도에도 그들은 함께 하지 않으려 했다. 어린이날, 아빠와 함께 놀이공원에 가기 위해 엄마와 하루종일 떨어져있어야 한다는 것에 동생 이수는 아무리 말해도 이해하려 하지 않아했다.

" 왜 ! 엄마랑 아빠랑 함께 갈 수 없냐구? 얘들은 다 그렇게 간단 말야. 엄마 아빠 다 같이 놀러간다구 ! "

양 손에 아빠와 엄마의 손을 잡고 가운데서 걸어가는 그림을 이수는 연출하고 싶어했다. 윤 진은 ' 너의 그 그림에 나는 어디 있냐.... 이 나쁜 외아들아....' 속으로 뇌이며 엄마를 도와 이수를 끌고 아빠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행 버스를 타곤 했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수가 태어나기 전에는 '진이 에미야' 하고 엄마를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윤 진은 자신을 제끼고 이수아범, 이수에미라고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왜 다른 집처럼 맏이의 이름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품지 못 했다. 거기에 반발한 것은 엄마였다.

" 이수를 외아들처럼 부르지 마세요. 진이 동생일 뿐이에요. 왜 항상 진이를 없는 듯이 취급하세요? "

" 버릇없는 년, 따박따박 말대답은 !  내 자식 내 맘대로 부른다. 니가 뭔데 상관이냐 ! "

할머니가 눈총을 주었지만 할아버지는 늘 함부로 말을 했고 엄마는 결코 거기에 익숙해지지 못 했다.

스트레스는 적응이 되는게 아니라고- 나중에 엄마는 말했다.  할아버지의 맏아들이었던 아빠는 결혼 1년 만에 이혼할 수는 없는 거 아니냐면서 분가를 요구했다고 하셨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지금 결국 이혼을 하는 것에 할아버지의 탓을 얼마만큼 할 수 있을까?

자식들에게 심각한 얘기라곤 한 마디도 하지 않는 아빠에 비해 엄마는 늘 진지했고 스스로 선택하고 판단하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지금 그게 부담으로 다가와서 윤 진은  네 살 아래의 동생이 부러울 지경이었다. 동생은 언제까지나 초등학생인 듯 귀엽게만 굴었고 약간의 의젓함에도 대단한 어른이라도 된 양 칭찬을 받았다.

" 그래서? 생활비 주던 건 어떻게 한대, 아빠가? "

엄마는 요즘 들어 더 파리해진 얼굴에 그늘을 만들며 슬쩍 이수를 건너다보았다. 중 1 의 남자아이, 무슨 말을 들어도 그 말의 사전적 의미조차 제대로 파악을 못 한다. 하물며 말 속의 느낌을 어찌 캐치하랴.

" 아빠 이름으로 되어 있는 신당동 집, 엄마 명의로 바꾸기로 했어. 월세가 나오니까. "

" 흠....그럼 지금까지랑 바뀌는 것도 없지 않나? 뭐가 문젠데? 엄마, 얼굴 좀 펴라. 우리 괜찮다니까. 애도 아닌데 왜 그래. "

" 아빠가 너희들을 굳이 데려가겠다고는 하지 않지만.....호적을 정리하겠다고 내가 말했단다. "

엄마는 이후의 양육을 책임지겠다는 말, 아이들의 이름에 아빠가 아닌 자신과의 유대를 표시하겠다는 등의 주장을 생략했다.

" 요컨대, 아빠성에서 엄마성으로 바꾸라는 말인거지? "

" 진아, 네가 원한다면 말이다. 이수는 고등학교에 들어가면 그 때 다시 의논할 꺼니까. 지금 학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었고. "

" 그러니까, 내가 선택하란 말이군. 이수는... "

이수는 할아버지가 인정하지 않을 것이었다. 아빠가 새로 한 결혼에서 아들을 낳기 전에는. 혹은 그 뒤에도.

이수를 낳기 전에 엄마는 두 번이나 임신을 했지만 할아버지의 요구로 두 번 다  중절 수술을 했다. 다 자란 아그들을 !  눈물을 훔치던 고모는 딸은 사람도 아니냐며 엄마의 분노와 상처에 함께 했었다.

윤 진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지 못 한다. 이수가 태어나고 윤진은 처음으로 유치원이란 데를 갔다. 가사와 양육을 혼자 감당하기에 늘 힘겨워했던 엄마는 그럼에도 항상 배가 불러있었고 부자연스러운 출산의 후유증으로 갖은 합병증을 달고 살았다. 착하고 순한 아빠는 그러나 집안일을 돕는 것을 자연스러워하지 않았고 무리한 분가로 인해 겨우 반지하방에 살게 된 일상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아빠를 대신해 할아버지와 싸운 것은 늘 고모였다. 별로 성과는 없었다. 세번 째 임신에서 이수가 태어나자 할아버지는 " 우리 며느리가 큰 일 했구나 ! "  하시며 신당동에 단독주택을 사 주셨다.  " 진이도 아직 어린데 ! " 하고 안타까워하며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데리러오며 약 이주일간 적응훈련을 시킨 것은 고모였다. 엄마는 4년 만에 다시 갓난아이를 돌보며, 그러나 결혼 초와는 현격히 쇠약해진 몸으로 악전고투하느라 윤 진을 돌아보지 못 했다. 엄마는 윤 진에게 혼자 하라고 말했다. 화장실 가는 것도, 잠을 자는 것도, 책을 읽는 것도. 하지만 하루 한 번 윤 진을 불러 하루 일과를 묻고 관심을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윤 진은 엄마에게 자신이 친구처럼 대해지는 것을 어렸을 때부터 경험했다.

윤 진은 스스로 선택해서 성을 바꾸기로 했다. 학교에 입학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친구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기다린다는 것도 우스운 짓이었다. 그 동안 자신의 밑으로 이수 외에 또 다른 동생이 생길 지도 모르는데...게다가 아빠의 호적에서 엄마 혼자만 정리되어 퇴출된다는 것은 너무......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딸들을 너무 많이 잉태했다는 이유로 그 딸과 함께 이름을 올리는 것도 허락받지 못 한다는 것은 ! 엄마가 남을 수 없다면 윤 진은 엄마와 함께 떠나는 것을 택하기로 했다.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엄마의 유일하고도 소박한 소망이니까.

' 내가 엄마와 함께 할께요. ' 윤 진은 속으로 뇌이며 책상 앞에 앉았다. 서랍 속 발렌타인데이의 초컬릿, 그 추운 겨울밤에 손을 오그리며 들고 있었던.  그 애의 눈은 기대와, 모진 슬픔을 견디는 고집스러움으로 빛났었다. 한 마디만 더 했다면 너와 함께 할 수 있었을 텐데. 윤 진은 감흥없이 씌여진 그 애의 편지를 다시 꺼내 보았다.

 

To 윤

불쑥 편지를 보내 놀라지나 않았는지?

혹시라도 나를 기억하지 못 하는 건 아닐까 망설여지기도 하고.

새로운 학교 생활은 어떠니, 친구도 많이 사귀었겠지?

중학 3년 동안 한 번도 같은 반이 되지 않아서 아쉬웠는데...

그래도 늘 친구가 되고 싶었었어.

혹시라도 마음이 내키면 답장을 주지 않겠니.

그럼 안녕.

                                                 from 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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